2025년 2월 3일(월)
루카 복음 1장
(루카 1,20)
“보라, 때가 되면 이뤄질 내 말을
믿지 않았으니 이 일이 일어나는
날까지 너는 벙어리가 되어 말을
못하게 될 것이다”
(루카 1,22)
줄곧 벙어리로 지냈다.
묵상-
구약통독에 이은 신약 4복음서 통독,
나의 삶이 성경 안에서 치유되고
구원되기를 빌며 한 걸음 내딛는다.
사제 즈카리야와 민간인 마리아가
초대하지도 않은 천사의 방문을
불쑥 받게 된다.
하늘의 초대는 이렇듯 평범한
일상 안에서 이뤄진다는 사실,
여기에 방점 하나 찍으며 물꼬를 튼다.
“너에게 아기가 생길 터인데,
네가 내 말을 믿지 않았으니,
이 일이 일어나는 날까지
너는 줄곧 벙어리를 살 껴.”
감히 주님의 천사를 화나게
한 거다. 그렇다면 마리아는
가브리엘 천사의 방문을 받고
어떤 리액션을 했을까?
즈카르야의 리액션과 달랐던 걸까?
즈카르야: 제가 그것을 어떻게
알 수 있겠습니까? 저는 늙은이고
제 아내도 나이가 많습니다.
마리아: 저는 남자를 알지 못하는데
어떻게 그런 일이 있을 수 있겠습니까?
‘두 대화의 차이점을 찾아보세요.’
라며 질문하고 싶지만 참는다.
각자 받아들이는 관점이 다를 테니까!
내가 느낀 다른 점은 이렇다.
즈카르야의 대답에선 부정적인
느낌이 배어있는 듯하다.
모르면 그러냐고 그럼 어떻게
할까요?가 아닌
‘제가 그걸 어떻게 압니까?’라고
하며 저희 부부는 늙고 나이가
많다고 아예 단정해버린다.
뭔가 생각해볼 수 있는 여지가
없다는 것, 나라도 그랬을 것 같다.
지극히 당연한 인간적인 반응이다.
민간인 마리아는 이런 뉘앙스였다.
‘천사님, 제가 너무 궁금해서
그런데요, 정말 이해가 안돼서
그런 건데요, 저는 남자를 모르는
처녀인데, 그런 일이 가능한건가요?’
어떤가!! 왠지 조심스럽고,
뭔가 알아차리지 못했지만,
상대에게 정중하면서도 겸손한
태도로 ‘저는 불가능해보이는데,
그럴 수도 있을까요?’라며,
열린 대답을 했다는 거다.
이런 태도와 대화법은 마리아의
인품을 대변하는 것이라기보다,
어릴 적부터 닦아온 신앙심과
하느님께 대한 믿음에서 왔다고
생각한다. 내가 모르는 어떤
일들이 하느님의 영역에서는
일어날 수 있는 걸까? 하는
여지를 갖게 하는 그런 마음가짐.
하여, 너무나도 인간적인 사제,
즈카르야는 ‘그런 일이 어떻게
있을 수 있어?‘라고 반응하며,
애초부터 불가능한 일이라고
못박았던 거다.
사제의 신분이면서도 자신의
고착된 생각에 매여서
입방정을 떤 거다.
<줄곧 벙어리로 지냈다.>
나는 이 대목에서 하느님께 감탄한다.
보통은 즈카르야와 마리아와 비교하며
즈카르야가 신앙심이 딸린다고 말할 수
있겠지만, 그럼에도 어떠랴!
하느님께서는 당신의 일을 하실 때,
특히 불가능한 일을 가능하게 하실 때
벙어리로 만들면서까지 강행하신다는 것,
인간이 지닌 불신과 무능함, 부정적인
신념 등과 같은 한계도 장애가 되지
않는다는 것이다.
지금까지는 즈카르야와 마리아에게
천사를 보내시어, 성령을 통한 잉태
사실을 알리고, 불가능마저 가능한
일로 만드신 하느님의 전능하심을
묵상했었다.
오늘은 하느님의 뜻을 전달 받을 때,
어떤 말과 태도를 보이며,
하느님의 계획을 받아들여야 하는지
따라가 보았다.
자신에게 닥쳐온 불가능한 일에 대한
궁금증을 억압하거나, 하고 싶은 말을
스스로 묵살하며, 맹목적으로 주님
뜻에 자신을 맞춰가지 않은 마리아의
모습에서 하느님과 나의 관계를
떠올려 보았다.
나의 원의를 무시한채 무조건
주님 뜻을 따라야 한다고,
그래야 주님의 착한 자녀라고
믿어온 나의 그림자가 있다면,
그 역시 성찰해보리라.
사랑의 주님,
우리는 살면서 준비되지 않은 어떤
일들이 닥쳐올 때, ‘지금 이 일이
나에게 왜 일어난 거지?’라고
생각하기보다, 과거의 부정적인
기억들을 먼저 떠올리며, 불안에
휩싸이게 됩니다.
하느님께서 하시는 일은 우리 눈에
보이지 않을 때가 많기에,
더 정확히, 더 구체적으로 보고
알고 싶어 하고, 또 스스로 통제할 수
있는 힘을 가지려는 욕망이 큽니다.
하여 마리아처럼 어떤 여지를 주는
물음표를 던지거나 조심스러운
태도를 견지하기가 어렵습니다.
‘줄곧 벙어리로 지냈다.’
이 문장이 울림처럼 다가옵니다.
모를 땐 차라리 눈과 귀를 닫고,
입을 닫으며 벙어리로 지내는 것이
낫겠사옵니다.
침묵의 귀함이 다시금 느껴집니다.
즈카르야처럼, 저희는 늙고
나이 많아 그런 일은 불가능하다고
단정해버리는 오류를 반복해온
저와 우리입니다.
부디,
나약하고 오만한 저를
불쌍히 여겨주소서.
첫댓글 박지현 요셉피나님
좋은 글 감사합니다
좋은글 반갑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