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철도원 삼대>> 황석영 장편소설 창비
/인간이라고 할 때에는 결국 인간집단을 의미한다. 각 개인으로 보면 그 집단을 떠나기도 하고 다른 사람들이 새로 들어오기도 하지만 집단 자체는 주어진 공간, 익숙한 땅에 매여 있다. 그곳에 뿌리를 내린 것이다/ 페르낭 브로텔 물질문명과 자본주의 1-1 까치 64쪽
인간은 인간 집단을 떠나 개별적으로 존재하지 않는다. 사회를 떠나 존재하는 인간은 동물학이나 생물학의 대상에 가깝지 않을까. 정치는 인간 집단을 어떻게 조직할 것인가에 대한 행위이다. 즉 정해진 자원을 어떻게 분배할지가 중요한 문제이다. 인간 집단에 속한 인간들은 늘 이 문제로 갈등과 타협을 하며 하나의 공동체를 형성한다. 자신의 공동체를 떠나 다른 공동체로 쉽게 옮길 수 있는 사람이야 좋겠지만, 대부분의 인간은 주어진 공간, 익숙한 땅에 매여 있다. 황석영은 이 땅의 메여있는 인간들 중 노동자를 다루고 있다. 노동자라 하면 별난 사람들처럼 느껴질 수 있지만, 사실은 우리 모두의 이야기다. 일제 강점기부터 시작하여 현재까지 이어지고 있는 긴 이야기다. 책의 대부분은 일제 강점기부터 ‘해방’이후까지를 다룬다. 이야기 형식은 해고자 복직과 노동조합을 인정하라는 이진오의 장기간의 굴뚝 농성까지 이어진다. 이진오가 굴뚝에 올라 차례차례 자신의 조상 3대를 회상하거나, 호출하는 식으로 전개한다. 또 해방 전후사냐 할지도 모르겠다. 제발 이제 그 이야기는 그만 접고 미래로 나가자고 할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우리 사회는 꽤 오랫동안 이곳을 벗어나지 못할 것도 같다. 한국이라는 인간 집단을 조직하는 방향이 이때 대부분 결정이 되었다고 해도 과히 틀리지는 않을 것 같다. 두 번째는 당시에 논쟁이 아직도 시원하게 해결되지 않고 미완성으로 남아 있다. 현재 한국은 어떤 나라가 되어야 할까? 는 질문은 조금 과장하면 당시 거의 대부분 나온 질문을 반복하고 있다고 하고 싶다. 세 번째는 변소에서 뒤처리 하지 않은 것처럼, 뭔가 하나라도 제대로 속시원하게 처리하지 못하고 있다는 점이다. 비단 한국의 문제만이 아니겠지만, 결정이 계속 미루어지고 있다는 느낌이다. 일본군 ‘전쟁 위안부’가 아직까지 해결이 안되고 계속 호출되고 있는 모양새와 비슷하다. 해결이 되지 않았으니, 편안한 일상으로 복귀하지 못하고 돌아가신 분들은 저승으로 편히 건너지 못하고 살아있는 자들은 편히 눈을 감을 수가 없다. 우리 사회 뿐만 아니라, 문단이나 학계도 그래서 쉽사리 그 당시에서 벗어날 수가 없다. 특히나 갈등이나 논쟁이 발생하면 당시를 불러낼 수 밖에 없다. 그곳이 대한민국의 기원이다. 기원을 장악한 집단이 권력을 가진다. 일제 패망 후 진주한 미군이 ‘점령군’인지 아닌지로 대통령 후보들이 다투고 있고, 그 문제로 언론들이 신나게 장사를 하고 있다. 요즘 언론들이란 남대문 시장에서 속옷 나부랭이를 벌여놓고 호객행위를 하는 장사치들 같다. 객관적인 팩트는 ‘점령군’이 맞다. 하지만 우리 사회는 아직도 이 문제에 대해 결정 불능 상태다. 결정을 안하는 건지, 못하는건지는 모르겠다. 4.19는 의거로, 5.18은 민주화 운동으로, 제주 4.3에 대한 국가의 배상과 추모가 이뤄지고 있지만, 왜 유독 해방 전후사에 대해서만은 결정을 하지 못하고 있을까?
내 생각에는 그 문제에는 너무 복잡한 이해관계가 얽혀있고 한국이라는 국가의 정통성 문제까지 복잡하게 얽혀 있기 때문이 아닐까 싶다. 한국이라는 나라는 독립운동을 한 세력과 한국이라는 나라를 ‘세운’ 세력들이 완전히 뒤집혀 있다. 독립운동을 한 세력들을 완전히 제거하고 나라를 ‘팔아먹은’자들이 세운 국가이고, 그들이 자기들만의 방식으로 부와 권력을 움켜쥐고 있는 꼴이다. 당시의 사람들이 다 죽고 없는데, 과장이 아닐까 하는 의문을 제기 할 수 있다.
하지만 사람들은 죽고 없지만, 그들이 만든 조직화, 문화, 권력과 자원의 재분배 방식이나 언어나 개념이 아직도 건재하여 현재를 살아가는 데 영향을 미치고 있다면 그리 간단히 넘길 문제는 아니지 않을까?
소설은 영등포를 주무대로 그 인근 지역과 인천을 배경으로 철도원 삼대의 이야기다. 이백만-이일철,이이철,-이지산 삼대의 가족사이면서 독립운동과 노동조합운동, 조선에서의 프롤레타리아 운동을 다룬다. 여기에 이진오를 끼워넣어서 현재까지의 이땅의 노동자들의 투쟁을 다룬다. 소설 속 이진오는 국내 최장기 굴뚝 농성자 차광호 스타케미컬 해직 노동자임을 알수 있다. 이진숙, 재능노동조합 등 수많은 노동자들이 생존권을 위해 굴뚝으로 무던히 올라갔다. 사람이 살수 없는 환경으로 살기 위해서 스스로들 많이들 올라갔다. 그들이 외친 구호나 주장이란 ‘같이 살자’였지만, 그들은 죽음의 장소로 올라갔다. 살기위해 지옥으로 갈 수밖에 다른 방법이 없었던 셈이다. 어쩌면 이 잔인한 사회가 그들을 굴뚝으로 내몰았다고 하는 게 정확한 사실이었다. 살기 위해 목숨을 걸어야 하는 사회란 참 슬픈 사회다.
소설은 일제 강정기부터 2021년까지 죽 이어지는 노동자들의 처지와 투쟁을 다루고 있다. 삶이 있는 곳에 투쟁도 함게 했다. 우리는 흔히 동학에서 3.1운동. 임시정부 4,19. 5.18. 6.10 으로 이어지는 ‘민주화’운동의 계보를 나열한다. 그러나 이런 운동과 조금 결을 달리하는 노동자 투쟁에 대해서는 별도의 계보를 만들지 않고, 이런 큰 흐름에 묻어버리거나 한 귀퉁이에 끼워넣는 식으로 취급하여 왔다. 황석영은 한국의 노동해방 운동의 계보를 이런 흐름과 별개로 다시 그려보고 싶었는지도 모르겠다. 노동자와 그들의 투쟁사는 그 중요성에 비해 너무 소홀히 다루어지지 않았나 싶다. 이를 계급운동의 역사라 하여도 좋을 듯 하다.
일제 강정기에 영등포는 지금의 서울로 들어오는 관문이었고, 영등포역 근방에는 상당한 공업단지가 조성되었다고 한다. 지금도 그렇지만 당시의 철도는 ‘근대화’의 상징이었다. 그러니까 영등포는 근대화와 산업화의 중요한 지역이었고, 근대화와 산업화의 주체는 일제였으니, 이곳은 계급문제와 민족문제가 가장 첨예하게 대두되고, ‘전통’에서 ‘근대’로 넘어가는 과도기의 인간들의 생생한 현장이었으리라. 이 세 가지 중첩되는 모순들을 소설은 생생하게 묘사하고 있다. 세 가지가 당시의 철도원 삼대를 어떻게 관통하고, 각 개인들은 어떤 선택을 하였고, 선택에 대한 결과는 어떠하였으며, 인간 집단들의 삶은 또 어떻게 이어졌는지를 보여준다. 근대화와 산업화와 과도기에 인간들과 그 집단들은 어떤 식으로 파도에 휩쓸리고 맞서고 적응해 갔는지에 보여준다.
소설은 단지 당시의 보통 사람들의 생활상이나 평범한 삼대 이야기를 다루고 있지는 않는다. 영등포 인근을 배경으로 전개되는 노동조합운동과 민족해방운동이나 해방 후의 혼란상에서 역사의 흐름에 자기를 던지 삼대애 대한 이야기다. 일제 말이 되면 국내에서 그 어떤 운동도 설 자리가 없었다고 한다. 그만큼 일제의 탄압의 강도가 심했다고 한다. 하지만 그 열악한 조건에서도 소수의 사람들이 궤멸 될 때까지 자리를 지키면서 투쟁하였다고 한다. 우리 역사는 이들의 투쟁을 지워버리다시피 하였거나, 그 의미를 과도하게 축소시켜 버렸다. 대단히 중요한 사건이었고, 역사적으로 크게 주목받아 마땅한 사건이었다. 적색노동조합, 조선공산당 등이 그 가장 열악한 싸움을 끝까지 하였고, 이들이 뿌린 씨앗이 해방 후에 건국위원회나 조선인민위원회 등의 이름으로 일제 패망 후에 나라의 초석을 놓는데 상당한 기여를 하였다고 한다. 그런데 실제 역사는 다 알다시피 이들의 완전한 패배로 한국이라는 나라가 선다. 이들의 패배는 민족의 최대 비극인 전쟁으로 이어지고, 노동자의 잔인한 희생을 예고했고, 일제 협조자들의 권력 찬탈은 한국에 반칙과 부정이 상식이 되는 사회를 기초했다. 애초 나라를 세운 자들이 일제협력자들이었으니, 거기에 무슨 윤리나 정도가 설 자리가 있었겠는가. 어떤 식으로든 살아남는 자가 승자가 되는 사회가 되었으리라. 당시의 노조운동이나 계급투쟁이나 해방투쟁에 대한 사실적 묘사는 감동적이고 그들의 불굴의 의지는 존경 받을만 하다.
소설은 최장기 굴뚝 농성자 차광호의 소설속 인물인 이진오의 굴뚝 위에서의 첫 일상으로부터 시작한다. “이진오는 잠자리에서 되도록 먼 곳인 원형 통로의 반대편 구석에 용변 장소를 정해두었다” 죽을 각오로 올라간 굴뚝에서 이진오의 첫 번 일은 ‘되도록 먼 곳’에 용변 장소를 정하는 일이었다. 그는 자살을 하거나 삶을 포기하기 위해서가 아니라, 살기 위해서 삶을 계속이어가기 위해 올랐다는 사실을 강조하고 싶었던 모양이다. 그는 이상하거나 분노에 눈이 먼 사람이 아니라 이 삶을 이어가기 위해 가장 하찮아보이지만 가장 중요한 업무를 먼저 처리하였던 것이 아니었을까? 비록 비루한 삶이지만 아침에 매일 똥싸는 일을 계속하고 싶은 한 명의 노동자에게 우리 사회는 얼마나 잔인하게 대하고 있는지도 모르겠다. 한국이라는 인간집단은 아직까지 노동자에게 비용을 지불하기를 거절하고 있다. 노동자가 실제 생산을 담당하고 한 사회의 부를 창출하는데 가장 큰 기여를 하였는데도, 이상하리만치 그들의 노고에 대한 비용을 지불하는데 인색하다. 그들은 노동조합이란 이름으로 혹은 계급투쟁이라는 이름으로 근 백 년을 아직까지 힘겹게 싸움을 이어가고 있고, 그들 투쟁이 감당할 수 없다면 마지못해 약간을 지불하고 그 지불금만큼 비정구직이니 하는 차별 구조를 만들어 계속 유예시키고 있다. 6.10항쟁이 없었다면 지금과 같은 대통령을 직접 뽑는 선거는 상당히 유보되었거나, 아직까지 길거리에 최루탄이 낭자했을 수도 있었겠지만, 6.10 항쟁을 이은 노동자 대투쟁이 없었다면 이 땅의 많은 노동자들이 아직도 생존임금과 더 혹독한 노동에 신음하고 있었을 수도 있다. 우리 사회는 이 점을 너무 간과하고 있는 것은 아닐까. 한국 노동운동사는 지금보다 몇 배는 더 그 가치를 인정받아야 한다. 한국노동운동사나 계급투쟁은 민주하운동의 곁가지가 아니라, 당당히 주류를 차지해야 하지 않을까? 황석영은 이걸 이야기하고 싶었지 않았을까? 해방전후나에서 현대사를 뛰어넘고 2015년 차광호로 도약한 것은 좀 안타갑다. 황석영의 글로 현대사의 노동운동을 만날 수 있었으면 좋았겠지만, 그 작업은 애초에 한 작가가 감당할 수 없을 정도의 대사건일지도 모르겠다. 나는 개인적으로 왜 황석영이 노벨문학상을 받지 못하는지 대단히 의문이다.
첫댓글 /적색노동조합, 조선공산당 등이 그 가장 열악한 싸움을 끝까지 하였고, 이들이 뿌린 씨앗이 해방 후에 건국위원회나 조선인민위원회 등의 이름으로 일제 패망 후에 나라의 초석을 놓는데 상당한 기여를 하였다/
프롤레타리아 운동, 노동자들의 투쟁이 기억밖으로 사라지는 것에 대한 안타까움이 드러납니다.
에고, 정말 생소한 이름의 운동들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