생명이란 쉴 곳을 찾는 전자다
[110]
비록 사람이 백 년을 산다 해도
올바른 일 꺼리고 계율을 지키지 않으면
단 하루를 살아도 계율을 지키고
뜻을 바르게 하여 선정함만 못하다.
“비록 백 년을 살더라도 계명을 깨뜨리고 마음의 고요를 잃는다면 바로 행하며, 마음의 고요를 가진 이가 하루 사는 편이 뛰어난 것이다.”
[111]
비록 사람이 백 년을 산다 해도
사악하고 거짓되어 지혜롭지 않으면
단 하루를 살아도 한 마음으로
바른 지혜 배움만 못하다.
“비록 백 년을 살지라도 지혜가 없고 마음의 고요를 잃는다면 지혜가 있고, 마음의 고요를 가진 사람이 단 하루를 사는 편이 뛰어난 것이다.”
(<법구경(法句經)> 제8장 술천품(述千品)에서)
21. 그 때부터 예수께서는, 자기가 반드시 예루살렘에 올라가야 하며, 장로들과 대제사장들과 율법학자들에게 많은 고난을 받고 죽임을 당해야 하며, 사흘째 되는 날에 살아나야 한다는 것을, 제자들에게 밝히기 시작하셨다.
22. 이에 베드로가 예수를 따로 붙들고 "주님, 안됩니다. 절대로 이런 일이 주님께 일어나서는 안됩니다" 하고 말하면서 예수께 대들었다.
23. 그러나 예수께서는 돌아서서, 베드로에게 말씀하셨다. "사탄아, 내 뒤로 물러가라. 너는 나에게 걸림돌이다. 너는 하나님의 일을 생각하지 않고, 사람의 일만 생각하는구나!"
24. 그 때에 예수께서는 제자들에게 말씀하셨다. "누구든지 나를 따라오려거든, 자기를 부인하고, 제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라 오너라.
25. 누구든지 자기 목숨을 구하고자 하는 사람은 잃을 것이요, 나 때문에 자기 목숨을 잃는 사람은 찾을 것이다.
26. 사람이 온 세상을 얻고도 제 목숨을 잃으면, 무슨 이득이 있겠느냐? 또 사람이 제 목숨을 되찾는 대가로 무엇을 내놓겠느냐?
27. 인자가 자기 아버지의 영광에 싸여, 자기 천사들을 거느리고 올 터인데, 그 때에 그는 각 사람에게, 그 행실대로 갚아 줄 것이다.
28. 내가 진정으로 너희에게 말한다. 여기에 서 있는 사람들 가운데는, 죽음을 맛보지 않고 살아서, 인자가 자기 왕권을 차지하고 오는 것을 볼 사람들도 있다."
(<마태복음> 16장에서)
아침에 일어나 <미생물이 플라톤을 만났을 때>를 읽다가 눈에 띄는 문장이 있었다.
“생명이란 쉴 곳을 찾는 전자다”
그래서 일단 이 문장을 오늘 글쓰기 명상 제목으로 적었다. 그럼 이 문장이 나오는 문단을 보자.
[연소와 호흡은 같은 산화 반응이고, 그 반응의 최종 산물은 물입니다. 추운 겨울날 자동차 배기구에서 나오는 하얀 연기의 정체는 수증기입니다. 사람의 입김과 같은 것이죠. 연소 과정에서는 빠르게 한꺼번에 에너지가 방출되지만, 호흡에서는 천천히 단계적으로 방출된다는 속도의 차이만 있을 뿐입니다. 음식물이 분해되면서 여기에 저장되어 있던 에너지가 수소 원자(H+)와 전자(e-)에 담겨 방출되는데, 이 에너지를 세포가 사용합니다. 그리고 남겨진 빈 용기인 수소 원자와 전자는 산소와 결합하여 물(H2O)이 되니, 산소는 수고하고 지친 수소 원자와 전자를 품에 안아 쉬게 함으로써 우리의 삶을 유지시키고 있는 것입니다 1937년에 노벨 생리의학상을 받은 헝가리 출신의 얼베르트 센퇴르지는 “생명이란 쉴 곳을 찾는 전자다”라고 생명을 정의한 바 있습니다.]
잘 모르겠다. 수소 두 개와 산소 1개가 결합하여 물이 된다고만 알고 있었는데, ‘빈 용기인 수소 원자와 전자는 산소와 결합하여 물이 되니’라는 문장을 보고는 감이 오지 않았다. 그렇다고 이를 파고들어야 할 정도로 탐구력이 발동하지도 않았다. 그저 그 다음 문장인 “생명이란 쉴 곳을 찾는 전자다”에만 느낌이 꽂혔다. 우리의 생명 활동이 보이지 않는 전자의 세계에서 움직인다는 표현, 이것이 뭔가 삶과 죽음에 대한 사색을 확장시키는 것 같아서였다. 즉 매사에 ‘깨어있음’이란 ‘전자’의 흐름을 인지해내고 그것을 언어적 인식으로 전환하는 것이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는 것이다.
이러한 발견을 토대로 오늘 법구경을 보니, 좀 터무니없어 보인다. 수억 년의 진화 과정을 거쳐 만들어진 생명 활동을 너무 협소하게 보는 것 같아서다. 백 년을 살다 보면 그 어느 하루쯤은 ‘뜻을 바르게 하고 계율을 지키지’ 않을까? 그러다가 또 계율을 위반하고 지혜롭지 못한 행동을 하지 않을까? 왜냐하면 우리의 생명 활동은 보이지 않는 ‘전자’의 이동에 의해 규정되기 때문이다. 물론 수행을 강조하기 위해 만든 문장이라고 하지만, 스스로 생명 활동의 기간을 정하는 인식은 약간 무섭기도 하다. 이럴 때는 진정 이런 철학적 의문이 고개를 든다.
‘내 삶은 정말 나의 것인가?’
<미생물이 플라톤을 만났을 때>에 나오는 문장을 또 보자.
[이제부터 우리가 이야기할 대상은 생명입니다. 탄생과 죽음이라는 한계를 가진 것들, 즉 박테리아에서 인간까지 포괄하는 온갖 생명체들이 여기에 속합니다. 살아 있는 것만 죽을 수 있습니다. 돌은 죽을 수 없습니다. 살아 있지 않기 때문입니다. 신은 살아 있다 말할 수 없습니다. 죽을 수 없기 때문입니다. 이 책에는 생명의 자기반성이 담겨 있습니다. 생명은 이야깃거리이자 동시에 이야기꾼입니다. 말하는 인간 자신이 생명에 속하기 때문입니다. 인간은 생명이 스스로를 되비춰보는 거울이라고 할 수 있을 것입니다. 기꺼이 우리는 티 없는 거울이고자 합니다.]
위 글에 ‘내 삶은 정말 나의 것인가?’가는 어떻게 투영될 수 있을까? 세포들의 경쟁적 공생으로 일군 개체이자 개인인 ‘나’는 실제로 세포들을 선(線) 안에 가둔 일시적인 그릇일 뿐이라는 인식에 다다를 수 있다. 그 선들을 열심히 넘나드는 것들이 전자들이고 말이다.
이 인식을 <미생물이 플라톤을 만났을 때>는 다음과 같은 문장으로 풀어놓았다.
[결국 개체든 공동체든 처음부터 그리고 영원히 정해져 있는 것이 아닙니다. 시간의 흐름에 따라 부유하는 특정 맥락 속에서, 임시로 부여되는 이름일 뿐입니다. 특정 국면과 시점에서 개체나 공동체로 존재하다가 사라질 것들입니다. 궁극적으로는 어떤 개체든 미지의 하위 개체로 쪼개질 수 있으며 상위 공동체로 통합될 수 있습니다. 각각은 모두 개체적 공동체입니다. 개체는 하위 부분들의 잠정적인 공동체이고, 공동체들 사이에 있는 하나의 공동체는 임시 개체인 셈이죠. 그렇다면 공생은 개체들의 오래된 미래입니다. 지금의 개체를 만들어준 머나먼 과거이자, 끊임없이 이합집산하게 될 개체들의 미래입니다.]
이 말을 한 마디로 줄이면 ‘공(空)’이다. 이 ‘공’을 인식한 부처는 이 ‘공’을 인식시키기 위해 최선을 다했다. 그러기 위해 수행을 강조했다. 그런데 이 부분보다 삶의 지혜, 계율 하는 내용들이 후세에 가면서 더 강조되었다. 과학철학에서 인간윤리로 선을 타고 넘었다고 볼 수 있을 것이다. 아마 눈에 보이지 않는 전자의 세계를 인식하는 게 절대 쉽지 않았음을 많은 사람들이 인식하고 있었기 때문일 것이다.
그런데 이러한 수고로움을 덜어주는 사람이 나타났다. 오늘 마태복음 가운데 “25. 누구든지 자기 목숨을 구하고자 하는 사람은 잃을 것이요, 나 때문에 자기 목숨을 잃는 사람은 찾을 것이다.”를 보자. 지상에서 하늘로의 영원한 삶의 이동, 믿음 하나로 해결된다는 데 웬만해서는 마다하기 어려울 것이다. 그 목숨이라는 것이 개체인지 공생적 공동체인지 인식 대상에서 제외는 이 이야기는 그래서 영원히 살아남을 것이다.
헤세의 <싯다르타>를 보자.
[마치, 한 나라에 페스트가 창궐하게 되면, 말 한 마디, 입김 한 번으로 역병에 걸린 사람 모두를 충분히 치유할 수 있는 능력을 지닌 인물, 어떤 현인, 어떤 도사가 그곳 어딘가에 있다는 소문이 일단 났다 하면, 그 소문이 온 나라에 쫙 퍼져 누구나 그 이야기를 하게 되며, 그 소문을 더러는 믿기도 하고 더러는 의심하기도 하지만, 아무튼 많은 사람들이 자기를 도와줄 수 있는 그 현인을 찾아 곧장 길을 떠나는 것처럼, 석가 종족의 현인이자 부처인 고타마에 관한 그 이야기가 김처럼 모락모락 온 나라에 쪽 퍼져나가게 되었다. 고타마를 믿는 신도들은 말하기를, 그는 최고의 인식을 지니고 있으며, 그는 자신의 전생을 기억하고 있으며, 그는 열반에 도달하였으므로 이제 더 이상 윤회의 수레바퀴 속으로 되돌아가지 않을 것이며 여러 형상으로 나타나는 윤회의 슬픈 강물 속에 이제 다시는 빠지지 않을 거라고 하였다. 그가 수많은 훌륭한 일, 믿을 수 없는 일들을 하였다는 소문이 나돌았는데, 기적을 행하였다거나 악마를 이겨냈다거나 신들과 이야기를 나누었다는 따위의 소문이었다. 하지만 그의 적들과 그를 믿지 않은 사람들은, 고타마가 천박하고 속된 유혹자이며, 사치스런 나날을 보내며, 제사를 경멸하며, 학식이 없고, 수행도 금욕도 모르는 자라고들 말하였다.]
고타마가 이처럼 다양한 행위들을 할 수 있었던 것을 과학적으로 설명한다면, 분명 “생명이란 쉴 곳을 찾는 전자다”라는 문장이 등장할 수 있을 것이다. 모든 생명들은 살아 있는 동안 보이지 않는 전자의 움직임에 의해 이리저리 흔들리고 있기 때문이다. 그 ‘최고의 인식’이 ‘공(空)’ 혹은 ‘구원’이라고 하지만, 바람 속에 섭취를 하며 사는 동안에는 ‘떨고 또 떨며’ 여러 변주된 모습을 보여줄 수밖에 없는 것이다. 그 모습이 나인지 공생인지 경쟁인지는 그래서 영원한 화두가 되는 것이다. 이를 게송으로 흉내내 보자.
강가에 부는 바람에 갈대가 흔들리고
산에 부는 바람에 억새가 휘청거리고
강바람 산바람 모두 맞는 중생들은
폭탄 같은 ‘전자’ 뭉치에 삶을 건네는구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