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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복음말씀의 향기♣ No2274
1월14일 [연중 제1주간 화요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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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살레시오회 양승국 스테파노 신부님]
<뭐든지 시켜 먹어! 나는 짜장면 보통!>
어린 수사님들을 동반하고 교육하는 선생 수도자로 생활할 때였습니다. 초롱초롱한 눈망울의 새싹같은 수사님들의 선생으로 산다는 것은 결코 만만한 일이 아니었습니다.
가끔씩 수도생활에 대한 수업 시간 때 교실 안에서의 제 가르침과 구체적인 제 삶의 모습이 괴리감이 느껴질 때, 다시 말해서 ‘말 따로 행동 따로’ 일때, 어린 수사님의 매서운 눈초리가 채찍처럼 다가왔습니다.
수도자로서의 청빈의 삶에 대해 가르칠 때는 특히 조심스러웠습니다. 혹시라도 부티나는 옷이나 고가의 브랜드 옷은 절대로 입을 수가 없었습니다. 피치못할 상황으로 수사님들과 외식이라도 할라치면, 선택은 늘 값싼 메뉴였습니다.
중국집에 들어가면 제가 농담삼아 늘 그랬습니다.
“자네들 먹고 싶은 요리 있으면, 눈치 보지 말고 뭐든지 시켜먹어!” 그러면서 꼭 한 마디 덧붙였습니다.
“나는 짜장면 보통!” ㅎㅎㅎ
본격적인 공생활을 시작하신 예수님께서는 갈릴래아로 내려가셔서 백성들을 가르치기 시작하십니다. 그런데 예수님의 가르침 말씀을 들은 백성들은 화들짝 놀랐습니다.
왜냐하면 예수님의 가르침이 너무나 신선하고 명쾌했기 때문입니다. 무슨 말인지 도통 알아들을수 없었던, 장황하고 고리타분해던 종래 종교 지도자들과는 가르침의 내용이 질적으로 달랐습니다.
예수님 말씀에는 몇가지 특징이 있었습니다. 길고 장황하지 않았습니다. 짧고 단순명료했습니다. 애써 미사여구를 늘어놓으려고 애쓰지 않으셨습니다.
하고 싶은 말을 그 누구의 눈치도 보지 않고 편안하게 말씀하셨습니다. 그만큼 예수님은 하늘을 우러러 부끄럼없는 삶을 사셨습니다.
바리사이들이나 율법학자들처럼 뒤가 구리지 않았기에, 촌철살인의 말씀을 가감없이 외칠 수 있었습니다.
예수님의 말씀은 지루하고 어렵지도 않았습니다. 가난하고 가방끈 짧은 백성들의 귀에도 쏙쏙 들어올 쉬우면서도 재미있었습니다. 뿐만 아니라 예수님 말씀이 지닌 또 한가지 특징이 있었으니 말씀에 권위가 있었습니다. 권위가 있었다 함은 말씀에 힘과 생명력이 있다는 표시였습니다.
예수님께서 하시는 말씀은 삶 속에서 즉시 구체화되었습니다. 다시 말해서 그분은 언행일치의 삶을 사셨습니다. 그분은 허언이나 헛된 공약을 남발하지 않았습니다. 아무말 대잔치를 벌이지 않았습니다.
오늘 우리의 가르침은 어떠합니까? 사람들은 우리가 선포하는 말씀에 힘과 위로를 얻고 있습니까? 우리의 말과 행동은 일치하고 있습니까?
사람들은 우리의 가르침을 통해 하느님의 사랑과 자비를 체험하고 있습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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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원교구 전삼용 요셉 신부님]
<하느님이 없는 나는?>
다른 사람을 판단하는 사람의 가장 큰 문제점은 무엇일까요? 바로 자기 자신을 모르기 때문입니다. 자기 자신이 남을 판단할 수준이 아니라는 것을 모르는 것입니다. 내가 무엇이나 되는 양 생각하기 때문에 다른 사람을 심판하는 것입니다.
EBS 화해 프로젝트에서 방영되었던 ‘해병 망치부대 동기, 잊지 못할 구타의 상처’를 보았습니다. 해병 망치부대란 80년대 초 북한의 간첩침투사건이후 보복을 하기 위해 북파공작원을 기르던 부대라고 합니다. 훈련은 쓰러질 때까지 지속됐고 사람을 인간병기로 만들기 위해 구타와 가혹행위가 반복됐다고 합니다.
망치부대에서 같이 근무한 두 해병대 동기의 이야기입니다. 처음 동기로 들어갔던 두 사람 중 한 사람인 강대중씨가 하사관이 되었습니다. 자신에게 잘 해 줄 것이라고 믿었는데 그 반대로 동기였던 노영길씨를 많이도 구타했습니다. 노영길씨가 그것 때문에 상처가 많았는데, 그 이후 상황은 역전됩니다. 두 사람은 같이 망치부대로 차출되어 이번엔 노영길씨가 훈련조교가 되었고 강대중씨를 훈련을 받았습니다.
그때 노영길씨는 그 미움이 남아있었기 때문에 강대중씨에게 더욱 지독하게 하였습니다.
그 과정에서 하사관이었던 강대중씨는 무릎이 안 좋아져서 강제 제대를 하게 됩니다. 강대중씨는 무엇을 하든 1등이었고 직업군인을 하려 했던 터라 자신이 평생 살 곳이라고 여겼던 군대를 떠나고서는 자살 생각까지 하게 되었습니다.
산 속에서 2년을 숨어 살다가 그래도 살아보려고 배를 탔는데 그만 무릎이 안 좋아서 그물에 다리가 걸려 한쪽 다리를 잃게 됩니다. 그렇게 군대 동기에 대한 원망 속에 살고 있었습니다. 노영길씨도 트라우마가 없는 것이 아닙니다. 밤에 아내가 툭 치기만 해도 강대중씨에게 맞았던 기억 때문인지 아내의 목을 조르기도 한다고 합니다.
이 둘은 함께 인도네시아를 여행하면서 친구 때문에 한 다리를 못 쓰게 되었지만 그래도 용서하면서 살아가는 사람들도 만나고, 함께 등산을 하며 이전에 비해서는 너무나 약해진 서로의 모습을 발견하고, 또 노영길씨가 인도네시아의 다른 무술을 하는 사람과 대련할 때 같은 해병대로써 강대중씨가 응원을 해 줌으로써 서로 진심으로 30년간의 증오를 털어내게 됩니다. 참으로 안타까운 사실은 그렇게 털어버리면 아무 것도 아닌 것을 강대중씨는 30년간을 미움 속에서 허비했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강대중씨가 원했던 것은 과거로 돌아가는 것이 아니라 진심어린 용서를 구하는 노영길씨의 마음이었습니다. 노영길씨도 사실 강대중씨가 그렇게 된 것이 전부 자신의 책임은 아니기 때문에 미안한 마음이 크지는 않았습니다. 그런데 마지막으로 가니 서로에게 미안한 감정이 더 많이 일어나서 누가 먼저라고 할 것도 없이 서로에게 용서를 청하게 됩니다.
우리 삶을 지옥으로 만드는 단 한 가지가 있다면 그것은 우리에게 일어난 안 좋은 일들이 아니라 바로 ‘자존심’입니다. 자존심은 내 자신을 끊임없이 다른 사람보다 높이는 마음입니다. 내가 더 해 주었고, 내가 더 많이 피해를 당했고, 내가 더 참아내야 했기 때문에 상대에게 절대 무릎을 꿇을 수 없는 마음인 것입니다.
자존심은 나를 어떤 큰 사람으로 착각하게 만듭니다. 오늘 독서에서는 하느님께서 당신 아드님을 천사보다 높은 지위에 앉게 해 주셨음을 말하고 있습니다. 사람이 되신 아드님을 천사보다 높인 이유는 당신 말씀에 순종하여 당신의 뜻을 따랐기 때문입니다. 아드님에게서 자존심이란 것은 찾아볼 수가 없습니다. 사람에게까지 무릎을 꿇고 발을 씻어줍니다.
자존심이 마음에 지옥을 만든다면 겸손함은 마음에 천국을 만듭니다. 그리고 그렇게 겸손하게 자신을 아무 것도 아닌 존재로 여기는 사람은 하느님께 이런 찬미의 노래를 부릅니다.
“인간이 무엇이기에 그를 기억해 주십니까? 사람이 무엇이기에 그를 돌보아 주십니까?”
우리 또한 천사들보다도 높아져 하느님의 자녀가 되었고 그리스도의 형제들이 되었습니다. 천사들이 영원히 질투할 일입니다. 우리가 구원받는 것은 우리가 잘나서가 아니라 주님께서 우리 겸손함을 보시고 친히 “영광과 존귀의 관”을 씌워주셨기 때문입니다.
모든 것이 그분의 덕인데 어떻게 다른 이들보다 낫다고 여길 수 있겠습니까? 우리는 주님의 도우심으로 일만 달란트를 탕감 받았습니다. 지금으로 말하면 수조원에 해당하는 금액입니다. 그렇다면 오늘 독서에서처럼 “제가 무엇이기에 저를 기억해 주십니까? 사람이 무엇이기에 그를 돌보아 주십니까?”라고 하며 주님께 감사와 찬미만 드려야 합니다.
그런데도 밖에 나가서 자신에게 수백만 원 꾼 사람의 멱살을 잡는다면 어떻게 하겠습니까? 남을 판단하고 있다는 것은 아직도 내 죄가 그리스도의 피로써 씻겼음을 믿지 못하는 것입니다.
우리 처지를 먼저 알아야합니다. 무상으로 천사들보다 높아져 하느님의 자녀가 되게 해 주신 하느님의 은혜와 그 은혜가 없었다면 지옥으로 가야했을 우리 존재의 아무것도 아님을 깨달아야 합니다.
하느님이 없으면 우리는 존재할 수도 없습니다. 아무 것도 아닙니다. 그리스도가 없이는 우리는 지옥에 갈 운명이었습니다. 이 우리 자신의 아무 것도 아님을 깊이 깨달아야 합니다.
우리가 무엇이 되었다고 생각된다면 그것은 오로지 주님 덕인 것입니다. 주님이 아니시면 우리는 지렁이보다도 못한 아무 것도 아닌 존재임을 묵상합니다.
이것이 행복에 이르는 길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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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원교구 조욱현 토마스 신부님]
복음: 마르 1,21b-28 : 더러운 영을 쫓아내시다.
사도들이 호수를 버리고, 배를 버리고, 아버지를 버리고 자신의 악습을 버렸을 때 변화가 일어난다. 모든 것을 버린 그들은 무엇을 발견하게 되는가? 복음에서는 그들이 “카파르나움”(21절)로 갔다고 한다. 카파르나움은 “위로의 땅” 혹은 “아름다운 땅”으로 해석할 수 있는 이름이다. 그들은 주님께로부터 위로를 받게 된다. 예수님께서는 회당에 들어가 사람들을 가르치셨는데 사람들은 그분의 가르침에 놀란다.
거기에 더러운 영이 들린 사람이 있었는데 “나자렛 사람 예수님, 당신께서 저희와 무슨 상관이 있습니까? 저희를 멸망시키러 오셨습니까? 저는 당신이 누구신지 압니다. 당신은 하느님의 거룩한 분이십니다.”(24절) 여기서 보면 구세주의 현존은 악마에게는 고문이었다. 더러운 영들은 예수 그리스도께서 오시리라는 것을 알고 있었다. 그분의 오심을 예상하고 있었다. 그러니 저렇게 소리를 쳤던 것이다.
마귀들도 아드님을 뵙고 이렇게 외친다. “저는 당신이 누구신지 압니다. 당신은 하느님의 거룩한 분이십니다.”(24절) 주님을 뵌 악마는 그분을 유혹하며 “당신이 하느님의 아들이라면”(마태 4,3)이라고 말한다. 악마나 마귀나 아버지와 아드님을 알아 뵈었지만 믿음이 없었다. 성경 말씀을 증거로 들이 대어도 믿지 않고 예수 아기를 죽이려 했던 헤로데는 마귀의 손발 역할을 하고 있었던 것이다.
주님께서는 악마가 진리를 말할지라도 믿지 말라고 가르치셨다. 그들은 우리를 속임수에 빠뜨리기 위해서 진리를 미끼로 사용할 뿐이기 때문이다. 베드로가 칭찬을 받았는지 생각해 보자. “스승님은 살아계신 하느님의 아드님 그리스도이십니다.”(마태 16,16) 이렇게 고백한 베드로를 복되다고 하신 것은 그의 말이 아니라, 그 마음 안에 있는 사랑을 보신 것이다. 같은 고백을 악마도 하였다. “하느님의 아드님”(마태 8,29)
베드로도 예수님을 하느님의 아드님이라고 고백했고, 악마도 예수님을 하느님의 아드님이라고 고백했다.
그러나 베드로는 사랑으로 고백했지만 악마는 두려움으로 말하였다. 그래서 베드로는 “주님, 저는 주님과 함께라면 죽을 준비도 되어 있습니다.”(루카 22,33)라고 말씀드렸고, 악마는 “당신께서 저희와 무슨 상관이 있습니까?”(마태 8,29)라고 하였다. 믿음을 지니되 사랑과 함께 지니라는 말씀이다. 믿음이 없이는 사랑을 지닐 수 없다. 그 사랑은 하느님 사랑과 이웃사랑이기 때문이다.
믿음은 위대하다 그러나 사랑이 없으면 아무 소용이 없다. 악마들도 믿음을 지니고 있었지만 사랑이 없었다. 만일에 우리가 악마와 어울리면 믿음을 자랑할 수 없다. 베드로와 악마의 고백은 다르다. 베드로는 그리스도를 껴안고자 그러했지만, 마귀들은 그리스도께서 자기들을 떠나시라고 그렇게 말했다. “조용히 하여라.”(25절) 그분은 악마들의 입에 재갈을 물리시고 새로운 가르침을 베푸신다. 나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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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일미사》오늘의 묵상
[대구대교구 박병규 요한 보스코 신부님(대구가톨릭대학교 교수)]
회당과 더러운 영의 만남은 현실적으로 가능한 것이 아니었습니다. 하느님의 율법을 읽고 해석하는 공간, 그리하여 하느님의 현존을 믿고 깨닫는 공간인 회당에 더러운 영에 짓눌린 이가 들어올 수는 없었습니다.
마르코 복음의 저자는 현실의 당위를 깨뜨리고 있습니다.함께할 수 없는 사람이 있는가 하면, 함께해서 즐거운 사람이 있습니다. 평소에 서로 ‘코드’가 맞는 사람들과만 어울리다 보면, 낯선 이들에 대한 근거 없는 적대감은 이유 없이 커져 갑니다.
더러운 영이 들린 사람은 그가 더러워서가 아니라, 더럽다고 여기는 세상 사람들의 이유 없는 적대감에 희생되어 왔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사람과 더러운 영을 분리하십니다. 더러운 영의 말은 이러하였습니다. “저희와 무슨 상관이 있습니까? 저희를 멸망시키러 오셨습니까?” 사람 사이를 갈라놓고 사람을 잠재적 범죄자로 취급하는 것이 더러운 영입니다.
서로를 향한 시선이 서로를 멸망시킬 듯 날카롭다면 우리는 더러운 영에 취하여 사람다움을 잃어 가게 됩니다.예수님께서 가르치시는 것이 사람다움의 회복이었고, 사람다움은 이 세상에 함께하지 못할 사람이 없다는 무한한 자비로 이해될 수 있습니다. 얽힌 실타래마냥 꼬인 이념의 논쟁들, 사상의 다툼들, 그 속에서 그리스도인은 제 목소리 하나 내지도 못한 채 사람 꼴을 잃어 가는 소외된 이들의 목소리를 듣는 사람입니다.
제 목소리를 내기 전에, 다른 이의 목소리에 귀를 기울여야 합니다. 저만의 ‘코드’에 합당한 이들만 모인 공간(회당)을, 낯선 ‘코드’도 함께 나누고 이해하고 받아들이는 넓디넓은 공간으로 만들 줄 아는 이가 그리스도인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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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주교구 송영진 모세 신부님]
<예수님 말씀의 ‘힘’>
“그들은 카파르나움으로 갔다. 예수님께서는 곧바로 안식일에 회당에 들어가 가르치셨는데, 사람들은 그분의 가르침에 몹시 놀랐다. 그분께서 율법학자들과 달리 권위를 가지고 가르치셨기 때문이다."(마르 1,21-22)
여기서 ‘권위’로 번역되어 있는 말의 원문 단어는 ‘엑수시아’(exousia)인데, 이 말은 ‘권위’ 라는 뜻 외에도 ‘선택의 자유, 권리, 능력, 힘, 권세, 보증, 통치권’ 등의 뜻을 가지고 있는 말입니다. 여기서는 ‘권위’보다는 ‘권능, 능력, 힘’이라는 뜻에 더 가깝습니다. 카파르나움 사람들이 예수님의 가르침에 몹시 놀란 것은, 그 가르침에서 어떤 ‘강한 힘’, 또는 어떤 ‘강한 권능’을 느꼈기 때문입니다. (막연하게 어떤 ‘권위’를 느꼈기 때문이 아니라.) 이야기의 내용을 보면, 그 ‘힘’이 ‘하느님의 힘’, 또는 ‘하느님의 권능’이라는 것을 카파르나움 사람들이 제대로 깨달은 것 같지는 않은데, 어떻든 그들은 그 ‘힘’에 압도되었고, 그래서 몹시 놀라고 있습니다. (‘권위’ 라고 번역되어 있어서, 강론을 하는 이들이, 또는 묵상 글을 쓰는 이들이 자꾸만 ‘권위’를 주제로 삼아서 강론을 하거나 글을 쓰는 경우가 많은데, 이 이야기에서는 예수님이 가지고 계신 힘을 권위라고 표현하면 뜻이 많이 애매모호해집니다. 예수님은 단순히 율법 학자들보다 더 권위가 있는 분이 아니라, 그 어떤 인간도 감히 범접할 수 없는, 절대적인 ‘하느님의 권능과 권한’을 가지고 계신 분입니다.)
복음서 저자가 ‘율법학자들’을 언급한 것은, 율법학자들과 예수님을 비교하기 위해서가 아니라, 예수님의 가르침에 들어 있는 ‘하느님의 힘’은 당시 사람들이 한 번도 경험하지 못했던 힘이라는 것을 강조하기 위해서입니다. 그 당시 율법학자들은 사람들을 가르칠 때, 옛날의 유명한 학자들이 했던 말을 인용하는 방식을 주로 사용했는데, 그것은 자기의 지식을 자랑하는 것과 같은 일이었습니다. 자신의 믿음을 증언하거나 고백하는 것도 아니고, 또 자기가 묵상한 것을 나누는 것도 아니고, 그저 지식을 과시하는 것일 뿐이라면, 그 가르침에 아무런 힘도 들어 있지 않은 것은 당연한 일입니다. 힘이 들어 있지 않다는 것은 사람들에게 전달해 줄 것이 없다는 것이기도 합니다. 그러니 듣는 사람의 입장에서는 그런 말을 듣는 것은 시간 낭비가 될 뿐입니다. (요즘에도 흔히 보는 일인데, 자기 묵상 없이 그저 다른 사람이 쓴 책에서 읽은 말을 인용하거나, 다른 사람이 만들어 놓은 ‘예화집’에서 읽은 이야기들을 인용해서 강론이나 묵상 글을 쓰는 경우가 있습니다. 더 나쁜 경우는, 사서삼경이나 불경 같은 책들에 나오는 일부 구절들을 근거로 성경을 해설하는 경우입니다. 그런 경우는 그런 책들이 성경보다 더 위에 있는 것처럼 보이게 만들기 때문에 나쁜 방식이라고 말할 수밖에 없습니다.)
“마침 그 회당에 더러운 영이 들린 사람이 있었는데, 그가 소리를 지르며 말하였다. ‘나자렛 사람 예수님, 당신께서 저희와 무슨 상관이 있습니까? 저희를 멸망시키러 오셨습니까? 저는 당신이 누구신지 압니다. 당신은 하느님의 거룩하신 분이십니다.’ 예수님께서 그에게 ‘조용히 하여라. 그 사람에게서 나가라.’ 하고 꾸짖으시니, 더러운 영은 그 사람에게 경련을 일으켜 놓고 큰 소리를 지르며 나갔다. 그러자 사람들이 모두 놀라, ‘이게 어찌 된 일이냐? 새롭고 권위 있는 가르침이다. 저이가 더러운 영들에게 명령하니 그것들도 복종하는구나.’ 하며 서로 물어보았다."(마르 1,23-27)
이 이야기는 ‘예수님 말씀의 힘’을 사람들이 직접 목격했다는 이야기입니다. 예수님의 가르침을 들었을 때에는 그 ‘힘’을 느꼈을 뿐인데, 이제 그 ‘힘’이 얼마나 크고 강력한 힘인지를 눈으로 직접 보게 되었습니다. 악령이 예수님의 명령에 복종하고 떠나간 것은 실제로는 쫓겨난 것이고, 예수님께서 ‘말씀의 힘’으로 그 악령을 쫓아내신 일입니다. 악령이 예수님의 명령에 복종할 수밖에 없었던 것은, 그 명령이 하느님의 명령과 같았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의 ‘말씀의 힘’은 ‘하느님의 힘’입니다.) 만일에 악령이 예수님의 명령에 불복종했다면 어떻게 되었을까? 그러면 그 악령은 지옥으로 떨어졌을 것입니다.
우리가 예수님을 믿고, 예수님께 기도하는 것은, “예수님은 하느님의 힘을 가지고 계신 분”이기 때문이고, “하느님이신 분”이기 때문입니다. 바오로 사도는 이렇게 설명합니다. “하늘에도 땅에도 이른바 신들이 있다 하지만 - 과연 신도 많고 주님도 많습니다만 - 우리에게는 하느님 아버지 한 분이 계실 뿐입니다. 모든 것이 그분에게서 나왔고 우리는 그분을 향하여 나아갑니다. 또 주님은 예수 그리스도 한 분이 계실 뿐입니다. 모든 것이 그분으로 말미암아 있고 우리도 그분으로 말미암아 존재합니다."(1코린 8,5-6) 예수님을 믿는 신앙인이면서도, 뭔가 힘든 일이 생기면 점쟁이를 찾아가서 그 일을 물어보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그것은 자기의 신앙을 스스로 부정하는 죄이고, 예수님을 모독하는 죄이고, 십계명 제1계명을 어기는 대죄입니다. (예수님을 믿는다면, 예수님의 힘도 믿어야 합니다. 그 어떤 힘도 예수님의 힘을 능가하지 못한다는 것을 믿어야 합니다.) 예수님의 ‘말씀의 힘’은 오늘날에도 살아 있는 힘입니다. 우리는 성경을 통해서나 전례를 통해서, 또는 여러 가지 경로를 통해서 예수님의 말씀을 듣고 있고, 그 말씀의 힘을 받고 있고, 그 힘 안에서 살아가고 있습니다.
<이 이야기를 읽으면서 우리가 조심해야 할 점은, 마귀와 ‘마귀 들린 사람’을 분명하게 구분해야 한다는 것, 또 마귀의 유혹에 넘어가는 것과 마귀 들리는 것도 구분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여기서 ‘마귀 들린 사람’이 한 말은, 그 사람이 한 말이 아니라, 그를 통해서 마귀가 한 말입니다.) 그 사람 입장에서 생각하면, 마귀는 가해자이고, 그 사람은 피해자입니다. 어쩌다가 마귀 들린 상태가 되었는지는 알 수 없지만, 마귀 들리는 것은 마귀의 유혹에 넘어가서 죄를 짓는 것과는 다른 일입니다. 따라서 ‘마귀 들린 사람’을 함부로 죄인 취급하면 안 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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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대교구 방종우 야고보 신부님]
저는 한국에서 교의 신학, 그리고 그 중에서도 특별히 교회론으로 석사학위를 받았습니다. 그런데 학교의 교수 신부님들은 저에게 유학을 통보하시며, 교의 신학이 아닌 윤리 신학을 공부하라고 명령하셨습니다. 저는 이 말씀을 들으며 진심으로 당황했습니다. “윤리”란 인간의 올바른 행동과 선한 삶을 근원적으로 규명하는 철학의 한 분야인데, 무언가를 규정하고 명령하며 인간의 행동을 통제하는 학문이라는 이미지가 제게 강했기 때문입니다.
윤리라는 과목에 별다른 관심이 없었던 것도 사실이지만 무언가를 종용하고 규정하는 학문이라는 이 이미지는 저에게는 잘 맞지 않는 것처럼 느껴졌습니다. 하지만 유학을 나가 공부를 하며 저의 생각이 완벽히 틀렸다는 것을 깨닫게 되었습니다. 이태리의 교수 신부님들은 첫 수업부터 마지막까지 꾸준히 학생들에게 “사랑과 자비”를 강조하셨습니다. 윤리란, 인간이 올바로 살아가도록 돕는 표지판 역할을 하는 학문인데 이 안에 사랑과 자비가 빠져있다면 아무런 소용이 없다는 것이 그 이유였습니다.
무언가를 규정하는 것, 종용하는 것은 교회법 학자들이 할 일이고 이를 삶에 잘 적용시켜 나갈 수 있도록 사랑과 자비로 연구하고 돕는 것이 윤리학자들이 해야 하는 일이라고 제 지도 교수신부님도 저에게 항상 당부하셨습니다. 실제로 공부를 마치고 나니, 윤리를 강조하는 데에 있어서 사랑이 빠지면 그것은 아무런 소용이 없다는 것을 깨닫게 되었습니다. 하느님 사랑의 실천이 곧 우리 신앙인들의 삶의 핵심인데, 그것이 결여된다면 윤리의 권위가 사라진다는 것을 몸소 체험하게 된 것입니다.
오늘 복음 말씀에서 예수님께서는 회당에 들어가 사람들을 가르칩니다. 이스라엘 사람들은 종교적인 시설물을 회당과 성전으로 구분하여 사용하였는데, 회당은 교육적인 장소로써 하느님의 말씀을 낭독하고 그에 대한 해설을 하는 장소였습니다. 그리고 성전은 예배와 희생제물을 바치는 장소였습니다. 회당은 당시 이스라엘의 문화 안에서 성전 못지않게 매우 중요한 위치를 차지했는데, 새로운 율법이 정해지고 권고되는 곳이었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유다인 가족이 10명만 있어도 회당은 반드시 건설되었으며 그만큼 종교적 측면 뿐만 아니라 교육적인 측면에서도 매우 필수적인 장소였습니다. 회당에서 다뤄졌던 보통의 주제는 모세오경이었습니다. 하느님을 직접 마주한 인간인 모세가 작성한 모세오경은 이스라엘인들에게 있어서 하느님의 직접적인 명령과도 같았습니다.
그러므로 이를 실생활에 적용하기 위해서는 조금의 긴장도 늦출 수 없었고, 결국 유다인들은 약간의 실수도 저지르지 않기 위해 수만가지 항목의 법규를 만들어 이를 실천하고자 했던 것입니다. 그러다 보니 항상 철저함이 요구 되었고 심지어 가혹할 정도로 그에 대한 책임 또한 요구되었습니다. 그런데 오늘 복음말씀에서 사람들은 회당에서 선포되는 예수님의 가르침에 몹시 놀라며 경탄합니다. 이를 오늘의 복음은 “예수님께서 율법학자들과 달리 권위를 가지고 가르치셨기 때문”이라고 전합니다.
이 지점에서 율법학자들의 권위와 예수님의 권위의 결정적인 차이점이 무엇인지 생각해볼 필요가 있습니다. 율법학자들의 권위는 타인을 종용하고 명령하는 것이 그 목적이었습니다. 반면 예수님의 권위는 사람들을 죄와 약점에서 해방시키고자 하는 사랑에서 시작됩니다. 사실 우리는 일상생활 속에서 율법주의에 쉽게 빠져들곤 합니다. 다른 사람의 행동을 내 관점에서 해석하고 저것은 제대로 된 것이 아닌데, 라고 생각하며 미워합니다.
또한 나와 다른 견해를 가진다는 이유로 타인을 마음 속으로 단죄하고 알게 모르게 무언의 폭력을 행사하기도 합니다. 그 안에서 우리가 믿는 하느님의 사랑은 종종 잊혀집니다.
그러나 프란치스코 교황님의 말씀처럼 하느님께서는 용서에 지치지 않으시는 분, 언제나 우리를 사랑으로 기다리시는 분입니다. 그렇다면 일상생활 안에서 우리가 행사하고자 하는 권위는 과연 무엇을 기반으로 하고 있는지 돌이켜 보아야 하겠습니다. 가족 혹은 타인의 생활 하나하나를 규제하고 억압하는 마음에 의존하고 있지는 않은지요. 이 과정 안에서 선행과 사랑, 하느님께 기쁨을 가지고 나아가는 믿음의 생활은 종종 희미해지지는 않은지요. 우리가 살아가는 사회에서 무엇인가를 가르치는 사람들은 그에 해당하는 자격이 있어야 합니다. 만약 일정한 과정을 거쳤다는 자격증 혹은 학위가 없다면 그 전문분야에 있어서 목에 힘이 실리지 않기 마련입니다.
한편, 전문적인 가르침이 아니라 할지라도 말하는 것과 행동이 일치하지 않는다면 그 사람은 다른 이들로부터 신뢰를 받지 못합니다. 아무리 좋은 말을 하고 옳은 말을 하더라도 인정받지 못하는 것입니다. 결국 우리 그리스도인의 전문 분야는 사랑이 되어야 하며 이는 곧 행동과 일치되어야 합니다. 예수님은 하느님의 사랑을 사람들에게 직접 가르치고자 노력하셨으며 말과 행동이 일치하는 분이었습니다. 그것이 바로 다른 이들을 경탄하게 하며 그분을 따르도록 하는 원동력이었습니다.
하느님의 자녀로써 복음말씀을 듣는 우리의 권위 역시 이러한 예수님의 모습을 모범으로 삼아야 합니다. 그분의 권위는 전적인 하느님의 사랑, 그리고 그것을 실천하고자 하는 의지에서 비롯되었습니다. 이를 본받을 때에 우리는 비로소 선한 길을 걸어가게 될 것이며 이와 반대의 길에 서 있는 이들은 경탄해 마지않으며 다음과 같이 이야기 할 것입니다. “이게 어찌된 일이냐? 새롭고 권위 있는 가르침이다. 저이가 더러운 영들에게 명령하니 그것들도 복종하는 구나”.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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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 바오로수도회 故 유광수 야고보 신부님]
오늘 복음을 보면 예수님이 회당에 들어가 가르치셨는데 그 가르치심을 듣고 두 가지 반응이 나타났다. 하나는 "그분의 가르침에 몹시 놀랐다."라는 반응과 "나자렛 사람 예수님, 당신께서 저희와 무슨 상관이 있습니까? 저희를 멸망시키러 오셨습니까?"라고 예수님의 가르침을 강하게 거부하는 반응이다.
이 사람을 복음은 "더러운 영이 들린 사람"이라고 하였다. 그러니까 회당에는 더러운 영이 들린 사람과 더러운 영이 들지 않은 사람이 있었다. 나는 어떤 사람인가?
예수님의 말씀을 듣고 놀라워하는 깨끗한 영혼인가? 아니면 "당신께서 저희와 무슨 상관이 있습니까? 저희를 멸망시키러 오셨습니까?라고 강하게 예수님의 가르침을 거부하는 더러운 영이 들린 사람인가? 아니면 놀라지도 않고 거부하지도 않는 또 다른 부류의 사람인가?
왜 사람들이 이런 반응을 보이는가? 사람의 말을 들었다면 아무 반응이 일어나지 않았을 것이다. 예수님의 가르침이 하느님의 말씀이고 권위 있는 가르침이기 때문에 반응이 나타난 것이다.
보라. 예수님이 가르침을 시작하시기 이전에는 아무런 동요가 없었다. 모두들 똑같이 회당에 있었다. 누가 건강한 영혼인지 누가 더러운 영이 들린 사람인지 드러나지 않았다.
다만 예수님의 가르침을 듣고 나서 이런 서로 상반된 반응이 나타난 것이다. 서로 상반된 반응이 나타난 것은 갑자기 나타난 것이 아니라 평소에는 드러나지 않다가 빛을 받고 평소의 삶이 드러난 것일 뿐이다.
더러운 영이 들린 사람이라고 해서 평소에 확연하게 드러나지는 않는 법이다. 또 건강한 영혼이라고 해서 평소에 눈에 띄게 드러나는 삶을 사는 사람도 아니다. 평소에는 잘 모른다. 각자 자기의 삶을 살기 때문이고 그리고 겉으로는 드러나지 않기 때문에 그 사람의 속 마음을 우리네 눈으로는 알아 볼 수 없기 때문이다.
다만 말씀 앞에서만이 드러난다. 왜냐하면 "하느님의 말씀은 살아 있고 힘이 있으며 어떤 쌍날칼보다도 더 날카롭습니다. 그래서 사람의 마음을 꿰뚫어 영혼과 정신을 갈라 놓고 골수를 쪼개어 그 마음 속에 품은 생각과 속셈을 드러냅니다."(히브4,12)라고 말씀하신 대로 마음 속을 드러내기 때문이다.
더러운 영이 들린 사람이란 어떤 사람인가? 겉으로 볼 때에는 크게 차이가 없다. 회당에서 예수님의 가르침을 듣기 이전까지는 아무도 그가 더러운 영이 들린 사람인지 몰랐다. 다만 그가 예수님의 가르침을 듣고 나서 "나자렛 사람 예수님, 당신께서 저희와 무슨 상관이 있습니까? 저희를 멸망시키러 오셨습니까?"라고 말했기 때문에 비로소 알게 되었다.
그러면 좀 더 구체적으로 더러운 영이 들린 사람이란 어떤 사람인가? 평소에 예수님과 아무 상관없이 사는 사람이다. 그리고 예수님의 말씀 대로 살면 자기가 망한다고 생각하는 사람이다. 예수님과는 아무 관계없이 자기 생각으로 가득 차서 사는 사람이다.
자기가 생각하고 있는 것에 대해 누군가가 이야기하면 금방 화를 내고 거부하고 도저히 받아들이지 못하고 자기 의견만이 최고인양 조금도 다른 사람한테 양보하지 못하는 사람이다.
더군다나 복음에서 말씀하신 대로 사는 사람은 바보이고 미친 짓이라고 생각하며 자기만을 위해서 사는 사람이다. 더러운 영이 들린 사람은 평생 예수님과 아무 상관 없이 살기 때문에 "예수님"이라는 말도 들어 보지 못한 사람, 예수님의 말씀을 한번도 제대로 읽어보지 않고 사는 사람이다.
한 마디로 더러운 영이 들린 사람이란 예수님과 아무 상관 없이 자기 멋 대로 사는 사람이다. 더러운 영이 들린 사람이란 반드시 신자가 아닌 사람만 말하는 것이 아니라 비록 신자라고 하더라도 더러운 영이 들린 사람일 수 있다.
회당에 모여 있다는 것은 평소에 신앙생활을 한다는 사람들이다. 회당에 모인 사람들 가운데에 더러운 영이 들린 사람이 있었던 것이다. 예수님을 믿는 사람이라면 적어도 예수님과 관계를 맺고 사는 사람이며 예수님의 가르침을 듣고 그대로 살려고 노력하는 사람이다.
비록 평소에 전적으로 말씀대로 살아가지는 못한다 하더라도 그래도 말씀을 듣고는 놀라고 무언가 새롭게 깨닫고 새로운 가르침으로 받아들이며 사는 사람이 신자이다.
“이게 어찌 된 일이냐? 새롭고 권위 있는 가르침이다.”
사람들은 더러운 영을 쫓아내는 예수님을 보고 “이게 어찌 된 일이냐? 새롭고 권위 있는 가르침이다."라고 놀랬다.
그렇다. 예수님의 말씀은 늘 새롭고 권위 있는 가르침이다. 그래서 예수님은 “사람은 빵으로만 살지 않고 하느님의 입에서 나오는 모든 말씀으로 산다."(마태 4,4)고 말씀하신 것이다.
우리가 늘 새롭고 권위 있는 말씀을 들을 때 우리의 생활도 늘 새로워지고 풍요로워 진다. 그런 영혼이 건강한 영혼이다.
“새롭고 권위 있는 가르침"이란 무슨 뜻인가? ‘가르침’은 그리스어로 ‘디다케’(Didache)라 하고, 라틴어로는 ‘독트리나’(Doctrina)라 한다. 이 말은 ‘가르침, 교훈, 원리, 원칙’이라는 뜻이다.
이 세상에 존재하는 모든 것은 다 원칙이 있다. 식물이면 식물이 살아가는 삶의 원칙이 있고 동물은 동물의 원칙이 있다. 기차는 기차의 원칙이 있고 자동차는 자동차의 원칙이 있다. 마찬가지로 인간에게는 인간의 원칙이 있다. 그 원칙에서 벗어날 때 불행해지고 사고가 난다.
신앙인은 신앙인으로서의 원칙이 있다. 원칙은 하나의 질서이고 서로 조화를 이루는 삶의 방식이며 동시에 개성이고 특성이다. 이런 원칙이 무시될 때 혼란이 오고 불행해진다. 인간 최초의 불행은 이 원칙에서 벗어났기 때문이다. 그것도 다시 돌이킬 수 없는 대형사고가 난 것이다. 그 결과로 모든 인간에게 불행이 온 것이다.
이제 원칙에로 다시 돌아가야 한다. 그 길만이 우리가 살 길이고 잃었던 행복을 되찾을 수 있는 방법이다. 권위 있는 새 가르침은 바로 이런 원칙을 제시해 주는 가르침이다. 따라서 우리는 이제부터라도 예수님께서 권위를 갖고 가르쳐 주시는 새 가르침을 배우고, 그것을 우리 신앙생활의 원칙으로 삼아야 할 것이다. 그럴 때만이 우리는 더러운 영을 내 안에서 쫓아낼 수 있을 것이다.
예수님이 이 세상에 오신 목적은 우리를 사로잡고 있는 모든 악에서 해방시켜 주러 오신 것이다. 내 마음 속에 있는 악한 생각들은 내 힘으로는 도저히 어떻게 해 볼 수가 없다. 다른 사람들도 도와 줄 수 없다. 오로지 하느님이 말씀만이 내 안에 있는 더러운 영을 쫓아낼 수 있다.
권위 있는 새로운 하느님의 말씀이기 때문이다. 아무리 어두운 곳이라도 빛이 들어가면 어둠은 물러나는 법이다. 아무리 단단하게 얼어붙은 물도 따뜻한 햇빛이 들어가면 녹기 시작하는 법이다.
우리를 사로잡고 있는 모든 악에서 더러운 영에서 우리를 해방시켜 주러 오신 것이 예수님의 목적이라는 것을 보여 주시기 위해 오늘 복음에서 더러운 영이 들린 사람에게서 더러운 영을 쫓아내 주신다. 그 더러운 영이란 예수님의 말씀과는 맞지 않는 생각들이나 사고들일 수도 있다.
오늘 복음은 가르침으로 시작해서 그 가르침을 듣고 새로운 가르침으로 깨닫고 그 소문이 곧바로 온 지방에 두루 퍼져 나갔다는 이야기로 끝을 맺었다. 이 새로운 가르침이 널리 퍼져 나가야 한다.
내 안에서 널리 퍼져 나가야 하고 또 다른 생각들로 가득 차 있는 사람들에게도 널리 퍼져 나가야 한다. 마르코 복음은 앞으로 이 새로운 가르침이 점차로 퍼져 나가면서 어떤 일들이 일어나는 가를 전해 줄 것이다.
마치 마른 사막에 물이 흘러 들어가서 생기를 되찾아 주듯이 새로운 가르침이 내 마음 안에 놀라운 가르침으로 받아들여질 때 그리고 다른 모든 사람들이 또 귄위 있는 새로운 가르침으로 받아들여질 때 하느님의 나라는 그만큼 많이 건설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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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의정부교구 상지종 베르나르도 신부님]
<사람과 더러운 영 사이에서>
마르코 1,21ㄴ-28 (회당에서 더러운 영을 쫓아내시다)
카파르나움에서 예수님께서는 안식일에 회당에 들어가 가르치셨는데, 사람들은 그분의 가르침에 몹시 놀랐다. 그분께서 율법 학자들과 달리 권위를 가지고 가르치셨기 때문이다. 마침 그 회당에 더러운 영이 들린 사람이 있었는데, 그가 소리를 지르며 말하였다. “나자렛 사람 예수님, 당신께서 저희와 무슨 상관이 있습니까? 저희를 멸망시키러 오셨습니까? 저는 당신이 누구신지 압니다. 당신은 하느님의 거룩하신 분이십니다.” 예수님께서 그에게 “조용히 하여라. 그 사람에게서 나가라.” 하고 꾸짖으시니, 더러운 영은 그 사람에게 경련을 일으켜 놓고 큰 소리를 지르며 나갔다. 그러자 사람들이 모두 놀라, “이게 어찌 된 일이냐? 새롭고 권위 있는 가르침이다. 저이가 더러운 영들에게 명령하니 그것들도 복종하는구나.” 하며 서로 물어보았다. 그리하여 그분의 소문이 곧바로 갈릴래아 주변 모든 지방에 두루 퍼져 나갔다.
<사람과 더러운 영 사이에서>
사람이 있어요
더러운 영이 있어요
더러운 영이
자신으로 물들이려고
사람을 찾아 다녀요
더러운 영이 있어요
더러운 영이 들린 사람이 있어요
더러운 영이
더러운 영이 들린 사람을 지배해요
더러운 영이 들린 사람이
더러운 영에게 지배당해요
더러운 영이
자신과 더러운 영이 들린 사람이
하나인 것처럼 행세애요
“나자렛 사람 예수님,
당신께서 저희와 무슨 상관이 있습니까?”
더러운 영이 들린 사람이
자신과 더러운 영이
하나인 것처럼 세뇌당해요
예수님께서
더러운 영과
더러운 영이 들린 사람의
거짓 하나 됨을 깨뜨려요
“조용히 하여라,
그 사람에게서 나가라”
더러운 영은 쫓겨나고
더러운 영이 들린 사람이
다시 사람이 되어요
사람이 있어요
더러운 영이 있어요
더러운 영에 들린 사람이 있어요
쫓겨난 더러운 영이 있어요
더러운 영에서 벗어난 사람이 있어요
사람을 사람으로 보시고
더러운 영을 더러운 영으로 보시는
사람을 물들인 더러운 영과
더러운 영에 물든 사람을
결코 하나로 보시지 않는
예수님이 계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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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광주대교구 조창현 클레멘스 신부님]
+ 조 두레박 신부의 영적일기
<서원하는 마음으로….>
어느 시장에 꽃을 파는 할머니가 계셨습니다. 생활이 어렵고 일을 많이 하여 손가락 마디가 굵고 쭈글쭈글했지만 얼굴만큼은 늘 웃음꽃으로 활짝 피었습니다. 그래서 시장 사람들은 꽃을 파는 할머니를 “행복을 파는 할머니”라고 불렀습니다. 어느 날 꽃을 사러 온 사람들이 할머니에게 물어보았습니다.
“할머니, 무슨 좋은 일이 있기에 늘 그렇게 싱글벙글하세요?”
할머니는 대답합니다.
“이 나이에 어찌 늘 좋은 일만 있겠어요. 그런데 행복을 지키는 한 가지 비밀이 있지.”
힘들고 어려울 때는 십자가에서 죽으셨다가 사흘 만에 부활하신 예수님을 믿고 속삭인답니다.
“사흘만 기다려라. 믿음으로 사흘만 참고 인내하며 기다리자.”
그러면 “내 마음이 편안해지고, 참을 수 있고, 기쁨으로 충만해진답니다.”라고 말씀하십니다.”
“3일만 참으면 된다.”라고 생각하면 참지 못할 것이 없습니다.
예수님께서도 3일 후에는 부활하실 것을 아셨기에, 십자가의 고통과 죽음 앞에서 기쁘게 참으시고, 용서하셨을 것입니다. 예수님은 3일 참으심의 의미를 아셨습니다. “사흘만 기다려라. 믿음으로 사흘만 참고 인내하며 기다리자.”라는 말을 하느님의 말씀으로 받아들이며 고운님들이 원하시는 소망을 이루시기를 바랍니다.
오늘 복음을 보면, 예수님께서 더러운 영에게 꾸짖으셨습니다.
“조용히 하여라. 그 사람에게서 나가라.”
그러자 더러운 영은 그 사람에게 경련을 일으켜놓고 큰소리를 지르며 나갔습니다.
왜요??? 조금만 더 생각하면 올바른 판단을 할 수 있는데, 더러운 영이 많은 사람에게 성급하게 판단하게끔 만들어 잘못된 결과를 가져오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렇다면 오늘 복음에 나온 더러운 영이 가장 두려워하는 것은 2가지입니다. 하나는, 예수님입니다.(24절)
“당신은 하느님의 거룩하신 분이십니다.”
그리고 또 다른 하나는, 예수님의 말씀입니다.(25절)
“조용히 하여라. 그 사람에게서 나가라.”
그러므로 예수님과 예수님의 말씀은 “세상을 창조하신 하느님의 능력”인 것입니다.
사랑하는 고운님들!
오늘 제1독서 사무엘기 상권을 보면, 사무엘의 탄생과 한나의 기도가 나옵니다. 한나는 어렵고 힘들고 억울한 가운데서도 기도로서 마음의 문을 활짝 열고 주님께 기도했던 여자입니다.
“한나는 마음이 쓰라려 흐느껴 울면서 주님께 기도하였고, 서원도 하였습니다.”
그 기도로 주님께서 한나를 기억해주셨기에 한나는 사무엘을 낳았습니다. 한나는 “내가 주님께 청을 드려 얻었다.” 하면서 아이의 이름을 사무엘이라 하였습니다. 이제 고운님들도 한나처럼 어려운 가운데서 마음의 문을 열기까지 물론 아픔의 시간이 있겠지만, 기도로서 주님께 더 가까이 가서 마음의 문을 열어보시기를 바랍니다. 주님께서 고운님들도 기억해주시고 고운님들이 바라는 소망이 이루어지는 축복의 때가 기다리고 있었음을 기억하시기를 바랍니다.
이제 저 두레박 사제도 미사 중에 한나처럼 서원하는 마음으로 몸과 마음이 아픈 분들과 간호하는 분들, 그리고 고운님들의 자녀들에게 치유와 회복의 은총이 있기를 기도합니다. 아멘.
영적일기를 마무리하면서….
가까이, 더 가까이, 아주 가까이 예수님께로 가서 고운님들의 마음의 문을 활짝 열어 오늘도 이미 주님께 보호받고 은총으로 행복한 자비를 입고 살아가고 있음을 고백하는 은혜로운 날이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강복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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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나를 단단해지게 하는 시편(376)
♧♧ 시편 69편 35절….
"주님을 찬양하여라. 하늘과 땅아. 물과 그 안에서 움직이는 모든 것들아."
하느님의 구원을 확신하고 그로 인해 기뻐 찬양하는 주님께 충실한 이들의 찬양이 온 누리에 걸쳐 장엄하게 울려 퍼지기를 기대하는 말입니다. 다윗은 하느님의 구원 역사와 섭리는 하느님이 지으신 천지 만물도 다 함께 기뻐 찬양만한 것임을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 시편 69편 36절….
"하느님께서는 시온을 구하시고 유다의 성읍들을 세우신다. 그들이 거기에 머물며 그곳을 차지하고"
여기서 ‘시온’은 예루살렘과 그 성읍 주민들로 대표되는 온 이스라엘 백성을 의미합니다.
때문에 어떤 학자들은 이 구절을 장차 이스라엘 백성이 바빌론 포로 생활에서 해방되어 계약의 땅으로 돌아올 것을 예언한 말씀으로 해석하기도 합니다. 그러나 이는 그러한 포로 귀한과 관련된 예언이라기보다는 넓은 의미에서 하느님께서 창조 이래 당신이 선택한 모든 백성들을 모든 위험과 고난 중에서 보호하시며 지켜주실 것이라는 확신의 말씀으로 이해하는 것이 더 좋겠습니다.
♧♧ 시편 69편 37절….
"그분 종들의 후손이 그 땅을 상속하여 그분 이름으로 사랑하는 이들이 그곳에서 살아가리라."
‘그분 종들의 후손’이란 하느님을 진정으로 사랑하는 이들의 후손을 가리킵니다. 즉, 이 구절에서...다윗은 일차적으로 하느님의 선택된 백성인 이스라엘이 자자손손, 영원토록 하느님을 사랑함으로 하느님의 자녀가 되고, 하느님이 주신 예약의 땅에 편안하게 살게 되기를 간구하는 것입니다. 또한 그렇게 될 줄로 확신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나 이러한 다윗의 간구와 확신과 달리 불행히도 이스라엘은 남북 왕국으로 분열되고, 또 각기 아시리아와 바빌론에 의해 멸망당하는 비운을 맞이하였습니다. 따라서 이 구절은...궁극적으로 장차 이스라엘 후손들인 주님께 충실한 이들(교회)이 천상예루살렘, 곧 하느님 나라를 영원한 땅으로 상속받게 될 것임을 예언하는 말씀으로 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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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천교구 조명연 마태오 신부님]
=빠다킹 신부와 새벽을 열며=
어렸을 때 제일 싫었던 것은 성당 가는 것이었습니다. 당시의 어린이 미사는 주일 아침 9시였는데, 아침 8시부터 9시까지 당시 가장 인기 있었던 만화영화 ‘은하철도 999’를 방영하기 때문이었습니다.
만화를 보고 가면 성당 미사에 늦을 수밖에 없었습니다. 그래서 끝까지 본 적이 없고 항상 1부가 끝나는 30분에 성당으로 뛰어가야만 했습니다. 지금처럼 지난 방송 보기가 없었기 때문에 더욱더 아쉬움을 뒤로 하고 성당으로 가야 했던 것이지요.
이러니 어떻게 성당 가는 것이 좋았겠습니까? 좋아하는 만화영화를 볼 수 없으니 말이지요. 그래도 성당에 가고 나서는 너무 좋았습니다. 미사 하는 것이 좋았고, 미사 후에 친구들과 함께 노는 것도 너무나 즐거웠습니다. 하지만 만화영화가 끝나지 않았음에도 불구하고 성당으로 가야 할 때는 세상의 그 어떤 것보다도 싫었습니다.
이렇게 싫었음에도 열심히 성당에 다니다 보니 믿음이 생겼고, 신학교에 들어가 지금 신부로 살게 되었습니다. 다른 사람들도 이런 이야기를 종종 하십니다. 성당에 가면 정말로 좋다고 하십니다. 문제는 성당에 가기까지의 마음이라는 것이지요. 성당 가기가 왜 이렇게 힘든지, 왜 이렇게 바쁜 일들이 생기는지 모르겠다는 분들이 참으로 많습니다.
주님을 향한 사랑의 마음은 이렇게 사랑하는 다른 것들을 뒤로할 때 가능했던 것 같습니다. 그러나 세상 것이 더 먼저가 되면서 주님이 항상 뒤에 있습니다. 더러운 영이 들린 사람이 예수님에 대해 “당신은 하느님의 거룩하신 분이십니다.”라고 고백합니다.
틀린 말입니까? 아니지요. 분명히 맞는 말입니다. 그런데도 예수님께서는 “조용히 하여라. 그 사람에게서 나가라.”라고 꾸짖으십니다. 이 꾸짖음의 이유는 그리스도를 고백했지만, 그 안에 사랑이 없었기에 아무런 의미가 없기 때문입니다.
진리를 말하고 있지만, 사랑이 없으므로 주님의 꾸짖음을 들을 수밖에 없었습니다. 우리 역시 주님이 좋으신 분이라고, 우리의 구원을 위해 사랑 그 자체이신 분이라고 말합니다. 그런데 주님이 아닌 세상의 다른 것을 더 사랑하면서 말하고 있다면 주님께 기쁨을 드릴 수 없는 것은 물론이고 우리 역시 주님의 꾸짖음에서 제외될 수가 없습니다. 주님을 향한 사랑이 세상의 그 어떤 것보다 먼저가 되어야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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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개월만 참아보십시오.>
저는 수영을 신부가 된 후에야 배웠습니다. 그러니까 30대가 되어서 처음으로 수영을 배운 것입니다. 사실, 이 나이에 수영을 새롭게 배운다는 사실이 부끄러웠습니다.
그러나 수영을 배우고자 한다면, 하루라도 빨리 배우는 것이 낫겠다 싶어서 근처 수영장에 등록했습니다. 첫날, 너무 어색했습니다. 특히 제 또래의 남자가 하나도 없는 것입니다. 킥보드에 몸을 맡겨서 ‘음파’를 반복하며 발장구치는 것도 얼마나 민망했는지 모릅니다.
첫날의 수업을 모두 마치고서 포기하고 싶다는 생각이 가득했습니다. 그러나 이렇게 겨우 하루를 마치고서 포기할 수는 없었습니다.
그 후, 3개월을 한 번도 빠지지 않고 수영장을 다녔습니다. 처음에는 실력이 향상하지 않아서 걱정되었지만, 어느 시간이 지나자 실력은 향상되었고, 자유형, 평형, 배영, 접영까지 배우면서 그 재미가 점점 커졌습니다. 이때 깨달은 것이 하나 있습니다. 포기하고 싶을 때 딱 3개월만 참자는 것이었습니다.
그 뒤로는 재미가 있고, 만족을 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주님을 향한 신앙도 그렇다고 봅니다. 처음 성당에 나오신 분들은 상당히 낯설어하십니다. 왜 이렇게 앉았다 일어났다를 시키는지, 미사는 왜 이렇게 지루한지, 교리는 왜 이렇게 어려운지….
그러나 딱 3개월만 참아보십시오. 분명히 그 안에서 기쁨을 얻고 큰 만족을 얻을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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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대교구(가톨릭 평화신문 미주지사) 조재형 가브리엘 신부님]
‘장님이 코끼리를 만진다.’라는 말이 있습니다. 앞이 보이지 않는 장님은 손으로 만져서 판단하게 됩니다. 코를 만진 장님은 코끼리가 길쭉한 줄 같다고 하였습니다. 다리를 만진 장님은 코끼리가 기둥 같다고 하였습니다. 엉덩이를 만진 장님은 코끼리가 둥근 바구니 같다고 하였습니다. 옆구리를 만진 장님은 코끼리가 벽처럼 생겼다고 하였습니다. 함부로 평가하거나, 판단하지 말라는 뜻입니다.
장님만 그런 것이 아닙니다. 두 눈을 똑바로 뜨고 있지만 우리는 편견을 가지고 세상을 바라보기도 합니다. 선입견을 품고 세상을 바라보기도 합니다. 이념의 잣대로 사람을 평가하기도 합니다. 외모를 보고 사람을 평가하기도 합니다. 과거의 행위를 보고 현재를 판단하기도 합니다. 진실의 눈으로 세상을 바라보면 좋겠습니다. 진심으로 사람을 대하면 좋겠습니다. 안개가 걷히면 아름다운 산을 볼 수 있습니다. 편견, 선입견, 이념, 외모, 과거라는 안개를 걷어내면 좋겠습니다.
스웨덴의 정치를 취재한 분에게 들은 이야기입니다. 스웨덴의 정치는 투명하다고 합니다. 정치인들은 수당을 받기 때문에 일을 하지 않으면 급여를 받지 못한다고 합니다. 기차를 타도 이등석 이상은 타지 못한다고 합니다. 당연히 줄을 서서 기다렸다가 표를 구한다고 합니다. 식사나 금품을 받으면 반드시 신고하게 되어있다고 합니다. 상대방의 재정상태를 볼 수 있기에 부정과 불의는 끼어들 틈이 없다고 합니다. 그리고 스웨덴에서 정치하는 사람들에게 ‘정치란 무엇인가?’라는 질문을 하였을 때, 늘 같은 대답을 들었다고 합니다. ‘정치는 봉사입니다.’ 대한민국의 정치인도 이런 대답을 하고, 실천했으면 좋겠습니다.
오늘 복음에서 사람들은 예수님을 두고 이렇게 말합니다. ‘우리는 저분에게서 새로운 권위를 보았습니다. 저분의 말과 행동은 권위가 있습니다.’ 그렇습니다. 그것이 예수님께서 보여 주셨던 새로운 권위였습니다. ‘누구든지 나의 제자가 되려는 사람은 자신의 십자가를 지고 따라야 합니다. 나는 섬김을 받을 자격이 있지만 섬기러 왔습니다. 여러분 중에서 첫째가 되고자 하는 사람은 꼴찌가 되어야 합니다. 여러분 중에 가장 가난한 이에게 해 준 것이 바로 하느님께 해 드린 것입니다.’ 예수님은 전 생애를 걸쳐서 봉사와 희생의 모습을 보여 주셨습니다. 십자가에 못 박혀서 죽기까지 순명을 보여 주셨습니다. 그것이 바로 예수님께서 보여 주신 새로운 권위였습니다. 그 권위 위에서 부활의 꽃이 피는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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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 베네딕토회 요셉수도원 이수철 프란치스코 신부님]
<온전한 삶>
-삶의 중심을 잡읍시다-
사제서품후 초창기부터 아마 강론중 가장 많이 사용한 주제가 ‘삶의 중심’일 것입니다. 삶의 중심에 자연스럽게 이어지는 삶의 의미요, 삶의 질서입니다. 삶의 중심을 잃었을 때 복잡하고 혼란한 삶이요 방황과 표류에 온갖 영육의 질환입니다.
삶의 중심이 확고할 때 안정과 평화요 삶의 중심이 불확실할 때 점증하는 두려움과 불안입니다. 참으로 삶의 중심이 확고할 때 단순하고 투명한 삶에 한결같이 충실한 삶입니다. 그러니 참으로 우선적으로 정립해야 할 것이 삶의 중심임을 깨닫습니다.
우리 분도 수도자들의 정주의 첫 서원 역시 삶의 중심과 직결됩니다. 참으로 하느님 중심의 언제나 늘 거기 그 자리의 한결같고 확고한 삶이 우리의 정주입니다. 다음 고백 그대로입니다.
-“하루하루 살았습니다.
하루하루 하늘 향한 나무처럼
비가 오든, 눈이 오든, 덥든 춥든
봄, 여름, 가을, 겨울,
늘 하느님이 불러 주신 이 자리에서
하느님만 찾고 바라보며
정주의 나무가 되어 살았습니다
하루하루 살다보니
이제 작은 나무가 울창한 아름드리
하느님의 나무가 되었습니다”-
정주의 나무가 상징하는 바, 그대로 우리 정주의 분도회 수도공동체요 분도회 수도승들입니다. 참으로 하느님만을 찾는 하느님 중심의 공동체 삶을 지향하는 우리 수도승들입니다. 다음 시편 고백과 자작 고백시 역시 하느님 중심의 삶을 분명히 합니다.
-주님께 아룁니다.
“당신의 저의 주님, 저의 행복 당신밖에 없습니다.”(시편16,2)-
-“주님. 당신은 저의 전부이옵니다.
저의 생명, 저의 사랑, 저의 기쁨, 저의 행복이옵니다.
하루하루가 감사와 감동이요 감탄이옵니다.
날마다 새롭게 시작하는 아름다운 선물의 하루이옵니다.”-
바로 주님만이 삶의 중심이자, 삶의 의미임을 고백하는 고백시입니다. 이런 ‘삶의 중심’이란 관점에서 보면 오늘 말씀의 이해도 확연해 집니다.
오늘 복음은 어제 예수님의 갈릴래아 전도의 시작과 어부 네 사람을 제자로 삼은 후 즉시 이어지는 더러운 영을 쫓아내신 일화입니다. 바로 더러운 영이 상징하는 바, 삶의 중심을 잃었을 때 야기되는 온갖 정신질환을 상징합니다.
살아 계신 주님이 있어야 할 삶의 중심 자리에 더러운 영이나 우상들이 자리잡고 있을 때 파생되는 온갖 심신의 질환들입니다. 그러나 오늘 더러운 영에 들렸던 이는 살아 계신 주님을 만나자 치유의 구원입니다.
“조용히 하여라. 그 사람에게서 나가라.”
더러운 영은 주님의 권위있는 말씀에 그 사람의 중심 자리에서 퇴출되었고 그 중심 자리에 살아 계신 주님이 자리 잡으니 비로소 치유의 구원입니다. 이어지는 반응이 바로 주님이 우리 삶의 중심임을 분명히 합니다.
“이게 어찌 된 일이냐? 새롭고 권위있는 가르침이다. 저이가 더러운 영들에게 명령하니 그것들도 복종하는 구나.”
우리 삶의 영원한 중심이신 새롭고 권위있는 말씀 자체이신 주님과의 일치가 얼마나 결정적으로 중요한지 깨닫습니다. 치유보다는 예방이 백배 낫습니다. 하여 우리 삶의 중심을 확고히 하기 위해 온맘으로 평생, 매일, 끊임없이 바치는 시편과 미사의 공동전례기도입니다.
오늘 제1독서 사무엘 상권의 엘카나의 아내, 한나의 하느님 중심의 삶이 감동적입니다. 한나가 온갖 시련과 역경중에도 좌절하지 않고 자신을 지킬 수 있었음도 역시 하느님 중심의 삶에서 가능했음을 봅니다. 엘리와의 대화를 통해 한나가 참으로 하느님 중심의 기도의 사람이었음이 확연히 드러납니다.
“만군의 주님, 이 여종의 가련한 모습을 눈여겨 보시고 저를 기억하신다면, 그리하여 당신 여종에게 아들 하나만 허락해 주신다면, 그 아이를 한평생 주님께 바치고 그 아이의 머리에 면도칼을 대지 않겠습니다.”
마침내 한나는 임신하여 아들을 낳았고 감격에 넘쳐 “내가 주님께 청을 드려 얻었다”고백하면서 아이의 이름을 사무엘이라 합니다. 오늘 복음에 이어지는 화답송은 바로 한나의 하느님께 드리는 감사와 찬미의 기도입니다.
사무엘 아기뿐 아니라 태어난 모든 생명들이 하느님의 선물임을 깨닫습니다. 얼마 전 번 피정하고 갔던 5남매의 자녀들을 둔 40대 중반의 신심 깊었던 젊은 부부도 기억하실 것입니다. 바로 5남매의 아버지가 보내 준 메시지에 놀랐습니다.
“또 하나 하느님께서 저희 가정에 축복을 주셨습니다. 올 7월에 저의 가정에 여섯째가 태어납니다. 태명은 ‘축복이’라고 지었습니다. 축복이가 건강하게 태어나도록 신부님의 기도를 청합니다. 시몬 드림”
저희 수도원 수도자들의 반려견伴侶犬들중 ‘복돌이’ 이름이 연상되어 절로 웃음이 나왔습니다. 참으로 하느님 중심의 삶을 한결같이 충실히 살아가는 젊은 부부의 삶이 감동스러웠습니다. 주님은 이 거룩한 미사은총으로 우리 모두 안에 내재한 온갖 더러운 영들을 쫓아내시고 심신의 질환을 치유해 주시며 당신 중심의 삶을 확고히 해 주십니다.
“주님, 당신께는 생명의 샘이 있고, 저희는 당신 빛으로 빛을 보나이다.”(시편36,10).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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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주교구 청주성모병원 반영억 라파엘 신부님]
<권위 있는 가르침>
권위를 가진다는 것은 힘이 있다는 말입니다. 그런데 참된 힘은 어디에서 오는가? 하느님에게서 옵니다. “하느님의 말씀은 살아있고 힘이 있으며 어떤 쌍날칼보다도 날카롭습니다. 그래서 사람 속을 꿰찔러 혼과 영을 가르고 관절과 골수를 갈라, 사람의 생각과 속셈을 가려냅니다.”(히브4,12) 사람들이 예수님의 가르침을 듣고 몹시 놀란 것은 바로 예수님의 말씀 안에 하느님의 힘이 들어있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말씀을 듣고도 자기를 열지 않는 사람은 그 권위를 체험하지 못합니다.
복음을 보면 예수님께서 회당에 들어가셔서 가르치셨는데 율법학자들과는 달리 권위를 가지고 가르치셨습니다.(마르1,21-22) 권위를 나타내는 라틴어 ‘아욱토리타스’(auctoritas)는 ‘아우제레’(augere)라는 동사에서 유래 하는데, 이 동사는 ‘자라게 하다’, ‘증가시키다.’, ‘커지게 하다’라는 의미를 지닙니다. 그러므로 진정한 권위는 자기중심적이지 않고 다른 사람을 자라게 합니다. 바로 예수님의 권위는 당신의 명예와 권위를 높이는데 있지 않고 모든 사람들, 특히 어려움 중에 있는 이들을 돕기 위한 것이었습니다. 만백성의 구원을 위한 힘이었습니다.
그리고 ‘가르치는 예수님’은 아주 중요합니다. 많은 사람들이 예수님을 생각할 때 은총을 주시는 분으로 기대합니다. 기적을 행하시고 앓는 이들을 일으켜 세우시며 가난한 이들과 함께하시어 그들의 위로와 힘이 되어주셨듯이 오늘도 우리에게 그렇게 해 주시기를 바라고 있습니다. 그러나 정작 그분의 가르침을 받아들이고 사는 데는 소홀히 하고 있습니다. 사실 은총은 그분이 가르치는 바를 통해서 받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예수님께서 가르치는 바를 잘 알아듣고 그것을 실천하여야 합니다. 배우려는 노력도, 실천도 하지 않으면서 어떤 기적이나 체험을 바라는 것은 결코 바람직하지 않습니다.
많은 분들이 하느님 체험을 하고 싶어 하는데 그것을 신비로운 현상이나 꿈, 장미향을 느끼는 등 현실과는 동떨어진 어떤 것을 생각합니다. 그러나 정성으로 기도하는 가운데 그런 것들이 일시적으로 있을 수 있으나 그게 다가 아니며 분명하지도 않습니다. 가장 확실한 체험은 주님의 말씀을 통해 오는 것입니다. 말씀은 영원합니다. 바오로 사도는 “우리가 전하는 말씀을 들을 때 여러분은 그것을 사람의 말로 받아들이지 않고 사실 그대로 하느님의 말씀으로 받아들였던 것입니다. 그 말씀이 신자 여러분 안에서 활동하고 있습니다.”(1테살2,13) 하고 말하였습니다.
성경의 말씀이 단순히 문자가 아니라 나에게 하시는 하느님의 말씀으로 다가올 때 깊은 감동과 기쁨을 느끼게 되고 하느님을 체험케 되는 것입니다. 성경을 읽는 순간 어떤 말씀이 나의 마음을 사로잡아 나를 전율케 한다면, 실행하지 않을 수 없게 한다면 그 순간이 하느님을 만나는 순간입니다. 그러므로 먼저 성경을 통해 말씀을 들으십시오. 그리고 권위 있는 “그리스도의 말씀이 여러분 가운데에 풍성히 머무르게 하십시오.”(골로3,16)
신앙생활을 오랫동안 하였다고 자랑하는 사람이 있습니다. 기도를 많이 한다고 뽐내는 사람이 있습니다. 각 신심단체에 이름을 걸어놓고 위로를 삼는 이들도 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을 닮은 삶을 살지 않고는 영적성장을 이룰 수 없습니다. 그러니 “말씀을 실행하는 사람이 되십시오. 말씀을 듣기만 하여 자신을 속이는 사람이 되지 마십시오.”(야고1,22) 여러분이 예수님을 닮아 그리스도인의 권위를 지니고 주님의 가르침을 실행함으로써 하느님의 넘치는 축복을 받게 되길 바랍니다.
악령은 예수님을 믿고 따르기를, 한 마디로 소통하기를 거부합니다. 말 따로 행동 따로 하는 것이 악령의 특징입니다. 그리스도인이라고 하면서도 악령 들린 사람처럼 한 입으로 두 말하면서 살아가는 것은 아닌지 모르겠습니다. 하느님을 사랑하고 이웃을 사랑하기보다는 내 욕심을 채우려고 하느님을 이용하고 이웃을 힘들게 하는 것은 아니지요? 미사참례를 열심히 하면서 거룩해 보이지만 실상은 하느님의 뜻을 따르기를 거부하며 내 뜻을 이루려 안달하는 더러운 영으로 사는 것은 아닌지 모르겠습니다.
더러운 영은 하느님과 상관이 없이 살아가는 존재입니다. 부디, 권위 있는 주님의 가르침에 순명할 수 있기를 기도합니다. 더 큰 사랑으로 사랑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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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부들의 말씀 묵상]
카파르나움에서, 예수님께서는 안식일에 회당에 들어가 가르치셨는데, 사람들은 그분의 가르침에 몹시 놀랐다.(마르 1,21-22)
<카파르나움>
그들이 호수를 버리고, 배를 버리고, 아버지를 버리고, 묵은 악습을 버렸을 때 첫 변화가 일어납니다. 그들은 그물과 더불어 자신들의 악습도 버렸습니다. 그러자 어떤 변화가 일어났는지 보십시오. 모든 것을 버린 그들이 발견한 것은 무엇입니까? 복음서는 그들이 ‘카따르나움”(마르 1,21), 곧 ‘위로의 땅으로 갔다고 합니다. ’카파르’는 ‘땅’을 뜻하고, ‘나움’은 ‘위로’를 뜻합니다.
히브리어는 발음하기에 따라 뜻이 달라지기 때문에 다양한 해석이 나올 수 있습니다. ‘나움’은 ‘아름다웅’을 뜻하기도 합니다. 따라서 ‘카파르나움’은 ‘위로의 땅’으로도 해석할 수 있고 ‘놀랍도록 아름다운 땅’으로 해석할 수도 있습니다.
-히에로니무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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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광주대교구 김홍언 요한보스코 신부님]
※김홍언 신부님의 영성의 샘물※
♥자기 사랑(self-love)이 있을 때, 내적 희망으로 참된 자비의 행위를 한다. 역설적으로 영성 생활에 실제적이고 신비로운 도전은 사랑을 주는 것이 아니라 사랑을 받는 것이다. “마음이 사랑으로 충만한 사람은 함께 나눌 무언가를 늘 지니기 마련이다”(성 교황 요한 23) 그러므로 건전한 의미의 자기 사랑(self-love)이 있을 때, 우리 자신을 사랑하듯이 남을 사랑하라는 하느님의 부르심은 외부에서 오는 명령이 아니라 참된 자비와 건전한 우정과 효과적인 사회 활동으로 이어질 수 있는 강력한 내적 희망의 자세로 바뀌게 된다.
♣자부심이 부족하고 곤궁하여 하느님 보시기에 우리가 정말로 특별하다는 사실을 믿지 못할 때, 대체로 우리 안에 계시는 하느님의 현존을 사랑하고 키워 나가기가 어려워진다.
그러다 보면 다른 이들에게 관심을 가지기도 힘들게 된다. 자신감 부족과 지나친 두려움에서 오는 불안은 위릴 무력하게 만든다.
-「일상 안에서의 거룩함」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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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도 그리스도의 향기가 되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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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올리베따노 성 베네딕도수도회 양주분회 이영근 아오스딩 신부님]
오늘 말씀은 <마르코복음>에 따르면, 예수님께서 행하신 첫 번째 일은 사고를 치는 일이었습니다. 그곳은 더러운 영을 쫓아내는 일이었는데, 그 일은 일해서는 안 되는 안식일에 벌이신 일이었습니다.
마르코 복음사가는 “하느님 나라가 왔다”는 복음을 선포한 다음, 이어서 ‘악마의 추방을 통해 “하느님 나라”의 실현을 구체적으로 보여줍니다. 곧 인간이 악마의 뀀으로 범죄 하여 에덴동산에서 쫓겨나 악의 지배 아래 살게 되었기에, 이제 구세주께서는 악의 세력인 더러운 영에서 우리를 해방시킴으로써 하늘나라의 실현을 보여주십니다.
먼저, 예수님께서는 하와를 속인 악마의 혀 놀림을 중지시키십니다.
“조용히 하여라. 그 사람에게서 나가라.”(마르 1,25)
그러자 악마는 그 사람에게서 나갔습니다. 이처럼, 예수님의 말씀은 그 하신 말씀대로 이루어졌습니다. 이로써, “때가 차서 하느님 나라가 가까이 왔다”고 선포하신 “하느님 나라”가 지금 여기에서 구체적으로 실현되고 있음을 보여주십니다.
오늘 우리도 우리 안에서 우리를 교란시키고 분열시키는 온갖 거짓의 혀 놀림을 멈추고 어둠을 몰아내어야 할 일입니다.
사실, 악마를 쫓아내는 일은 전혀 새로운 일은 아니었습니다. 히브리 구마자들도 그러한 일을 해 왔습니다. 그러나 사람들이 예수님에게서 놀라워했던 것은 그분의 권위 있는 “말씀”이었습니다.
“이게 어찌된 일이야? 새롭고 권위 있는 가르침이다. 저이가 더러운 영에게 명령하니 그것들도 복종하는구나.”(마르 1,27)
그렇습니다. 놀라웠던 것은 그분의 “권위”입니다. “권위”를 나타내는 ‘exusia’라는 말은 ‘힘’이란 뜻으로, 하느님께만 사용되는 말이라고 합니다. 곧 예수님의 말씀에는 하느님의 힘이 실려 있어서 말씀하신대로 이루어지게 되는 것을 뜻합니다.
그러기에, 결국 이 첫 구마치유는 예수님이 구원자이심을 드러내고 있습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는 더러운 영을 쫓아내시면서 당신 스스로 명령하실 뿐, 다른 누구의 이름에 의탁하여 행하지 않으십니다. 당신이 바로 구원자이시기 때문입니다. 반면에, 우리는 구마를 할 때, “우리 주님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명하노니, 엄의 영은 주 예수께로 가라”고 명함으로써, 예수님의 힘과 권위를 빌어 행하게 됩니다.
이처럼, <마르코복음>에서 예수님께서 행하신 첫 번째 모습은 놀라운 기적을 통해서가 아니라, “권위 있는 가르침”을 통해서 이루어졌습니다.
오늘, 우리도 당신의 “권위 있는 말씀”을 통해서 하느님의 힘이 우리 안에 들어오고, 우리 안에서 이루시는 하느님의 능력을 체험하길 바랍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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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 말씀에서 샘솟은 기도 -
“당신께서 저희와 무슨 상관이 있습니까?”(마르 1,24)
주님!
진리를 알게 하소서.
진리를 받아들이고 믿는 자 되게 하소서.
진리를 따르며 받드는 당신의 제자 되게 하소서.
제가 관계 맺는 모든 것 안에서 당신의 거룩한 이름이 빛나게 하소서!
거룩함 안에서 제가 새로 나게 하소서.
주님이신
당신을 믿습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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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수성심시녀회 소보둥지 김연희 마리아 수녀님]
<권위>
마르코 1장 21ㄴ~28
"조용히 하여라
그 사람에게서 나가라."
하느님의 영은 조용하며 지혜롭고
부드러운 바람과 같이 불기도 하고
순간 강하게 다가오기도 합니다.
악한 영은 시끄럽고 마음을 산란케하며
불안을 몰고와 평화를 깨뜨립니다.
힘겨움에 빠진 영혼을
예수님은 권위로 잠재우시고
평화를 되찾게 하십니다.
복잡하고 시끄러울때 그속에
파묻혀 있으면 내 영혼이 지칩니다.
큰 숨 쉬고 예수님 앞에
다가가 청하십시오.
하루중에 조용히 머무는
시간이 어떤 수많은 말보다
더 강한 팩트가 됩니다.
"참된 권위는 조용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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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극히 거룩한 구속주회 한상우 바오로 신부님]
"새롭고 권위 있는 가르침이다."(마르 1, 27)
가르침이 필요한
우리들 내면입니다.
우리들 삶에
관심과 애정을
기울이시는 우리의
예수님을 만납니다.
구원에 이르게 하는
권위 있는 가르침이
우리들 삶 속에
함께 하십니다.
새롭고 권위 있는
가르침으로
우리 삶을
망가뜨리는
더러운 영들을
예수님께서는
추방하여 주십니다.
더러운 영이 먼저
하느님의 거룩하신
분, 예수님을
알아봅니다.
극과 극은
이와같이 서로를
알아봅니다.
예수님께서는
온전한 사람이
되게하십니다.
간절한 사랑이
우리를 살립니다.
교묘하고 교활한
더러운 영들에게
명령하시는
예수님께서는 먼저
우리 내면을 귀하게
변화시켜 주십니다.
새롭고 권위 있는
가르침은 바로
예수님과의 만남임을
믿습니다.
그 만남이
구원이기
때문입니다.
가르침을 믿고
따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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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이게 어찌 된 일이냐? 새롭고 권위 있는 가르침이다."
참된 권위는 우리에게 건강한 삶을 가르쳐줍니다. 타인을 변화시키려 하지 않습니다. 자신이 먼저 빛의 길을 묵묵히 걸어갈 뿐입니다. 어려움 속에서도 새로운 것을 발견합니다.
예수님의 권위는 우리의 삶에서 새로운 아름다움을 발견하게 하십니다. 낮아지시는 권위로 우리 모두를 살리십니다.
예수님의 권위 있는 가르침은 분명 사랑입니다. 사랑으로 새로워질 우리의 시간입니다. 예수님의 새로운 가르침인 사랑은 내면의 기쁨으로 내면을 치유합니다.
참된 권위는 사치스럽고 요란하지 않습니다. 참된 권위는 참된 진리처럼 단순하고 간결합니다.
생명을 사랑하게 하는 것보다 더 건강한 권위 있는 가르침은 있을 수 없습니다. 예수님의 권위는 새로운 방식으로 잃어버린 우리의 아름다움을 되찾아줍니다. 서로에게서 새로운 아름다움을 발견하는 은총의 새로운 날 되시길 기도드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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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ince 2013. 10. 24
연희동성당 류상현 스테파노
■묵상글 나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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