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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증동국여지승람 제33권 전라도 全羅道 [1]
본래는 변한(弁韓) 땅인데, 뒤에 백제(百濟) 땅이 되었다. 의자왕(義慈王) 19년에 당(唐) 나라의 고종(高宗)이
소정방(蘇定方)을 보내어 신라(新羅)의 무열왕(武烈王)과 함께 공격하여 멸망시켰다. 5개의 도독부(都督府)로
나누어 각기 누현(州縣)을 통솔하게 하고, 추장(酋長)을 뽑아서 도독(都督)ㆍ자사(刺史)ㆍ현령(縣令)을 삼아
다스리게 하였다. 당 나라 군대가 물러간 뒤에는 신라가 모두 그 땅을 병합하였다.
경덕왕(景德王)은 전주(全州)와 무주(武州) 2개 도독부(都督府)로 나누었다.
진성왕(眞聖王) 5년에 견휜(甄萱) 이 백제의 옛땅[舊地]을 점거하고 후백제왕(後百濟王)을 자칭하였으나 아들
신검(神劍)에 이르러 부위(父位)를 찬탈하였고, 고려(高麗) 태조가 직접 이를 정벌하여 멸하였다.
성종(成宗) 14년에 전주(全州)ㆍ영주(瀛州)ㆍ순주(淳州)ㆍ마주(馬州) 등의 주현을 강남도(江南道)라 하고,
나주(羅州)ㆍ광주(光州)ㆍ정주(靜州)ㆍ승주(昇州)ㆍ패주(貝州)ㆍ담주(潭州)ㆍ낭주(郞州)를 해양도(海陽道)라
하였다. 현종(顯宗) 9년에 이것을 합쳐 전라도라 하였고, 본조(本朝)에서도 이에 따랐다.
영부(領府) 1, 목(牧) 3, 도호부(都護府) 4, 군(郡) 14, 현(縣) 37이다.
관원 관찰사(觀察使) : 1명이다. 병마절도사(兵馬節度使) : 2명이며, 그 중 하나는 관찰사가 겸한다.
수군절도사(水軍節度使) : 3명이며, 하나는 좌도(左道), 하나는 우도(右道), 하나는 관찰사가 겸한다.
병마우후(兵馬虞候) : 1명이다. 수군우후(水軍虞候) : 2명이며, 하나는 좌도(左道), 하나는 우도가 겸한다.
도사(都使) : 1명이다. 심약(審藥) : 3명이며, 하나는 관찰사도(觀察使道), 하나는 절도사도(節度使道),
하나는 제주(濟州)가 겸한다. 검율 : 2명이며, 하나는 관찰사도(觀察使道), 하나는 제주가 겸한다.
[비고]
연혁 인조조(仁祖朝) 때에 전남도(全南道)로 고쳤다가 곧 옛이름을 그대로 불렀고, 또 광남도(光南道)로 고쳤
다가 곧 예전대로 불렀으며, 영종(英宗) 4년에 전광도(全光道)로 고쳤다가 13년에 예전대로 불렀다.
모두 56읍(邑)이다.
순영(巡營) : 전주부(全州府에) 있다.
병영(兵營) : 강진현(康津縣). 좌수영(左水營) : 순천부(順天府). 우수영(右水營) : 해남현(海南縣).
방어영(防禦營) : 제주목(濟州牧). 토포영(討捕營)ㆍ전영(前營) : 순천(順天)ㆍ좌영(左營) : 운봉(雲峯).
중영(中營) : 전주(全州). 우영(右營) : 나주(羅州). 후영(後營) : 여산(礪山)에 있다.
고종(高宗) 33년에 좌ㆍ우도를 남북도로 고쳤다.《문헌비고(文獻備考)》
전주부 全州府
동으로 진안현(鎭安縣) 경계까지 47리, 서쪽으로 임피현(臨陂縣) 경계까지 74리,
금구현(金溝縣) 경계까지 19리, 남으로 금구현(金溝縣) 경계까지 38리, 임실현(任實縣) 경계까지 42리,
북으로 익산군(益山郡) 경계까지 37리, 여산군(礪山郡) 경계까지 61리, 거산현(高山縣) 경계까지 40리,
서울로부터는 5백 16리가 된다.
건치연혁 본래 백제(百濟)의 완산(完山)이며 : 비사벌(比斯伐), 또는 비자화(比自火)라고도 한다.
신라 진흥왕(眞興王) 16년에 완산주(完山州)를 두었다가 동왕 26년에 주를 폐지하고,
신문왕(神文王) 때 완산주(完山州)를 다시 설치하였다. 경덕왕(景德王) 15년에 지금의 이름으로 바꾸어 9주를
완비하였다. 효공왕(孝恭王) 때 견휜(甄萱) 여기에 도읍을 세우고 후백제(後百濟)라 하였다.
고려 태조 19년에 신검(神劍)을 토벌하여 평정하고 안남도호부(安南都護府)라 하였다가
23년에 다시 전주(全州)라 하였다.
성종(成宗) 12년에 승화절도안무사(承化節度安撫使)라 하였고, 14년에 12주에 절도사를 두고 순의군(順義軍)
이라 하여 강남도(江南道)에 예속시켰다. 현종(顯宗) 9년에 안남대도호부(安南大都護府)로 승격하였다가 뒤에
다시 전주목(全州牧)으로 고쳤다.
공민왕(恭愍王) 4년에 원(元) 나라 사신 야사불화(埜思不花)를 가둔 일 때문에 부곡(部曲)으로 강등하였다가
5년에 다시 완산부(完山府)라 하였다. 본조(本朝) 태조 원년에 임금의 고향이므로 완산유수부(完山留守府)로
승격시켰고, 태종(太宗) 3년에 지금의 이름으로 고쳤으며, 세조(世祖) 때에 진(鎭)을 두었다.
속현 옥야현(沃野縣) : 전주의 서북 70리에 위치한다. 본래 백제의 소력지현(所力只縣)이었는데 신라 때 옥야현
으로 고치어 금마군(金馬郡)의 영현(領縣)으로 삼았다. 고려 초에 전주에 예속시켰다.
명종(明宗) 6년에 감무(監務)를 두었고, 뒤에 다시 내속시켰다. 군창(軍倉)이 있다.
진관 군(郡)이 6이다 : 익산(益山)ㆍ김제(金堤)ㆍ고부(古阜)ㆍ금산(錦山)ㆍ진산(珍山)ㆍ여산(礪山)ㆍ
현(縣)이 11이다 :
정읍(井邑)ㆍ 흥덕(興德)ㆍ부안(扶安)ㆍ만경(萬頃)ㆍ옥구(沃溝)ㆍ임피(臨陂)ㆍ금구(金溝)ㆍ용안(龍安)ㆍ
함열(咸悅)ㆍ고산(高山)ㆍ태인(泰仁).
관원 부윤(府尹)ㆍ판관(判官)ㆍ교수(敎授) : 각 1명이다.
군명 견성(甄城)ㆍ완산(完山)ㆍ비사벌(比斯伐)ㆍ안남(安南)ㆍ승화(承化)ㆍ순의군(順義軍)
성씨본부(本府) 이(李)ㆍ최(崔)ㆍ유(柳)ㆍ박(朴)ㆍ전(全)ㆍ경(庚)ㆍ한(韓)ㆍ백(白)ㆍ방(房) : 이주해 왔다.
양(梁) : 주계(朱溪)에서 왔다. 장(張) : 결성(結城)에서 왔다. 김(金) : 모평(牟平)에서 왔다.
우주(紆州) 박(朴)ㆍ이(李)ㆍ정(鄭)ㆍ황(黃)ㆍ최(崔)ㆍ염(廉)ㆍ배(裵)ㆍ유(柳)ㆍ홍(洪).
양량(陽良) 백(白)ㆍ나(羅)ㆍ강(康)ㆍ유(劉). 이성(利城) 이(李)ㆍ백(白)ㆍ정(鄭)ㆍ손(孫)ㆍ진(陳)ㆍ최(崔).
두모촌(豆毛村) 책(冊)ㆍ최(崔)ㆍ이(李). 이성(伊城) 조(趙)ㆍ배(裵)ㆍ장(張)ㆍ구(仇)ㆍ염(廉)ㆍ고(高)ㆍ온(溫).
옥야(沃野) 임(林)ㆍ장(張)ㆍ염(廉)ㆍ구(仇)ㆍ양(梁). 경명(景明) 김(金)ㆍ임(林)ㆍ배(裵)ㆍ인(印).
풍속 사람들이 약삭빠르다 : 주기(州記)에, "비옥한 땅과 척박한 땅이 섞여 있고 사람들이 약삭빠르다." 하였다.
백성들이 어리석거나 완고하지 않다 : 이규보(李圭報)의 기(記)에, "인물이 번성하고 가옥이 즐비하여, 옛 나라
의 풍모가 있다. 그러므로 그 백성은 어리석거나 완고하지 않고 모두가 의관을 갖춘 선비와 같으며, 행동거지
가 볼 만하다." 하였다.
집을 다스리는 자는 대부분 곡식을 저축하여 흉년에 대비한다 : 이경동(李瓊同)의 기(記)에 있다.
남국의 인재가 몰려 있는 곳이다 : 서거정(徐居正)의 기(記)에 있다. 물건을 싣 는데 수레를 사용하며, 저자는
줄을 지어 상품을 교역한다.
형승 국가의 풍패(豐沛)주D-001로 산천이 영수(靈秀)하다 : 윤곤(尹坤)의 기(記)에 있다.
주나라의 조상이 일어난 곳이요, 일도의 으뜸이다 : 모두 서거정의 기에 있다.
안팎으로 산과 개천이 있다 : 성임(成任)의 시(詩)에, "안팎의 산과 강이 판적에 들어 있다." 하였다.
산천 건지산(乾止山) : 전주부의 북쪽 6리에 있으며, 진산(鎭山)이다.
이규보(李圭報)의 기(記)에, "전주에 건지산이 있는데 수목이 울창하여 주(州)의 웅진(雄鎭)이다." 하였다.
완산(完山) : 작은 산이다. 부의 남쪽 3리에 있다. 부의 이름은 이 산 이름에서 딴 것으로 일명 남복산(南福山)
이라고도 하는데, 읍을 설치한 후로부터 나무하는 것을 금지했다.
고덕산(高德山) : 부의 동남쪽 10리에 있다. 고달산(高達山)이라고도 한다.
무악산(毋岳山) : 부의 서남쪽 20리에 있다. 금구현(金溝縣) 조에도 있다.
기린봉(麒麟峯) : 부의 동쪽 6리에 있다. 봉우리 위에는 작은 못이 있다.
청량산(淸涼山) : 부의 동북쪽 40리에 있다. 서방산(西方山) : 부의 동북쪽 25리에 있다.
가련산(可連山) : 부의 서쪽 10리에 있으며, 건지산(乾止山)의 산세가 여기에 와서 끊어졌는데, 사람들의 말이
이어져야 할 곳에서 끊어졌다고 하여 가련이라 이름한 것이라고 한다.
여현(礪峴) : 부의 남쪽 42리에 위치한다. 웅현(熊峴) : 부의 동쪽 47리, 진안현(鎭安縣) 경계에 있다.
서고산(西高山) : 부의 서쪽 15리에 있다.
태실산(胎室山) : 부의 남쪽 20리에 있다. 여기에 예종(睿宗)의 어태(御胎)를 안치하였다.
황화대(黃華臺) : 부의 서쪽 4리에 있다. 읍인(邑人)들이 봄ㆍ가을로 올라가 제사술을 마셨다.
만경대(萬景臺) : 고덕산(高德山) 북쪽 기슭에 있다. 돌 봉우리가 우뚝 솟아 마치 층운(層雲)을 이룬 듯이 보이
는데, 그 위에 수십 명이 앉을 만하다. 사면으로 수목이 울창하며 석벽(石壁)은 그림같이 아름답다. 서쪽으로
군산도(群山島)를 바라보며 북쪽으로는 기준성(箕準城)과 통한다. 동남쪽으로는 태산(太山)을 지고 있는데
기상이 천태만상이다. 정몽주(鄭夢周)의 시에, "천인(千仞) 높은 산에 비낀 돌길을, 올라오니 품은 감회 이길
길이 없구나. 청산이 멀리 희미하게 보이니 부여국(扶餘國)이요, 황엽이 휘날리니 백제성(百濟城)이라.
9월 높은 바람은 나그네를 슬프게 하고, 백년 호기는 서생(書生)을 그르치게 하는구나.
하늘가로 해가 져서 푸른 구름이 모이니, 고개 들어 하염없이 옥경(玉京)을 바라보네." 하였다.
안천(雁川) : 주의 북쪽 25리에 있으니 즉 고산현(高山縣) 남천(南川)의 하류가 주계(州界)에 이르러 직연(直淵)
이 되고 안천이 되며, 삼례역(參禮驛) 남쪽에 와서 추천(楸川)과 합류한다.
남천(南川) : 부의 남쪽 3리에 있다. 금상 4년에 시내를 막고 돌을 쌓으니 길이가 6천 자나 되었다. 남천(南川)의
근원은 여현(礪峴)에서 나오는데 부의 동남에 이르러 성을 둘러 북으로 가련산(可連山)을 지나 추천이 되고,
무악산(毋岳山)에서 나온 물과 합해서 삼례역(參禮驛) 남쪽에 이르러 다시금 고산(高山) 웅현(熊峴)의 물과
합쳐서 서쪽으로 흘러 회포(洄浦)가 되며, 조수(潮水)가 여기까지 들어온다. 옥야(沃野) 이성(利城)을 지나서
신창진(新倉津)이 되었다.
신창진(新倉津) : 부의 서쪽 70리에 있다. 김제군(金堤郡)과 만경현(萬頃縣) 조에도 있다.
덕진지(德眞池) : 부의 북쪽 10리에 있다. 부의 지세는 서북방(西北方)이 비어 있어 전주의 기맥(氣脈)이 이쪽
으로 새어버린다. 그러므로 서쪽으로는 가련산으로부터 동으로 건지산(乾止山)까지 큰 둑을 쌓아 기운을 멈추
게 하고 이름을 덕진(德眞)이라 하였으니, 둘레가 9천 73자이다.
풍월정(風月亭)의 시에, "깊은 못을 한번 바라보니 푸른 하늘이 비쳐 있네. 옛부터 이 못을 파기에 몇 사람의 공
이 들었을까. 마을 연기 멀리 끼어 가을 달이 몽롱하고, 어부의 피리 소리는 저녁 바람에 비꼈도다." 하였다.
신증 유순(柳洵)의 시에, "깊고 맑은 물에 허공이 비쳐 있고, 덕을 쌓았으니 제물(濟物 사물을 구제하는 것)하는
공(功)을 갖추었네. 이곳에 참 용이 일어나지 않았다면, 세상 어느 곳에서 뇌풍(雷風)을 찾았으리오." 하였다.
공덕지(孔德池) : 부의 서쪽 60리에 있다. 판토포지(板吐浦池) : 부의 북쪽 30리에 있다.
굴연(堀淵) : 부의 동쪽 4리에 있다. 돌기둥 여섯 개가 있는데 녹담정(綠潭亭)의 기둥이라고 전해온다.
신증 발산(鉢山) : 부의 동쪽 3리에 있다.
우락암(于樂巖) : 옥야창(沃野倉) 북쪽 2리에 있다. 그 위에 50여 명이 앉을 수가 있다.
봉황암(鳳凰巖) : 부의 서쪽 5리에 있다. 그 아래에 못이 있다.
황학대(黃鶴臺) : 부의 남쪽 5리에 있다. 석봉(石峯)이 솟아 있고, 큰 시내가 끼고 돌아간다. 전하는 말에
황학(黃鶴)이 놀던 곳이라 한다.
토산 석류(石榴)ㆍ종이 : 상품(上品)이다. 생강(生薑)ㆍ울금초(鬱金草)ㆍ벌꿀[蜂密]ㆍ응어[葦魚]ㆍ칠(漆)ㆍ
자기(磁器).
성곽 읍성(邑城) : 돌로 쌓았는데 둘레는 5천 3백 56척이고 높이는 8척이다. 그 안에 2백 23개의 우물이 있다.
궁실 경기전(慶基殿) : 부성(府城)의 남문(南門) 안에 있다. 영락(永樂 명(明) 성조(成祖)의 연호이다.
경인년에 태조(太祖) 강헌대왕(康獻大王)의 어용(御容)을 봉안(奉安)하였다. 참봉(參奉) 2명을 두었다.
유순(柳洵)의 시에, "시기에 호응하여 도록(圖錄)에 맞게 동한(東韓)을 평정하니, 도탄에 빠진 백성을 평안하게
하였도다. 성덕(聖德)을 마땅히 백세에 제사하리니, 천추에 묘모(廟貌)는 단청(丹靑)이 맑으리라." 하였다.
실록각(實錄閣) : 경기전(慶基殿)의 동쪽 담 안에 있는데 본조의 실록(實錄)이 수장되어 있다.
김길손(金吉孫)의 기(記)에, "아국(我國)은 조종(祖宗) 이래로 세대에 따라 실록을 편찬하여 안과 밖에 수장하였
으니, 안에는 춘추관(春秋館)이 있고, 밖에는 충주(忠州)ㆍ성주(星州)와 같이 모두 장서각(藏書閣)이 있는데,
오직 본부(本府)만이 없었다. 을축년 겨울에 비로소 부성(府城) 안 승의사(僧義寺)에 두었다가 갑신년 가을에
진남루(鎭南樓)에 이안했다. 세조께서 본도(本道)에 명하여 장각(藏閣)을 세우도록 하였으나 연이어 흉년이 들
어 공역(工役)을 중흥하지 못하고 몇 년 동안 미루어오다가, 임진년 봄에 세조와 예종(睿宗)의 양조 실록이 이루
어지니, 주상께서 동지춘추관사(同知春秋館事) 양성지(梁誠之)를 파견하여 이것을 부에 봉안하도록 하였다.
그때에 상국(相國) 김지경(金之慶)은 본관(本館)의 구신(舊臣)으로서 이곳에 안찰(按察)로 나와 있으면서,
애써 장각을 세우고자 하여, 양공(梁公)과 더불어 경기전(慶基殿)의 동편에 자리를 정하고 사유(事由)를 갖추어
장계(狀啓)를 올리고, 인근 여러 포(浦)의 선군(船軍) 3백 명을 역군으로 하고, 부윤인 상국(相國) 조근(趙瑾)을
책임자로 하였으며, 순창(淳昌) 군수 김극련(金克鍊)으로 하여금 감독하도록 하여, 지난해 12월 중공(衆工)이
일을 같이하여 금년 5월을 지나 공사를 마쳤다." 하였다.
객관(客館) : 이경동(李瓊同)의 서헌기(西軒記)에, "신묘년에 우리의 좌주(座主) 조근(趙瑾) 공이 전주 부윤으로
왔는데, 관리와 백성이 모두 그 교화에 좇았다. 공은 판관(判官) 김신(金信)과 더불어 여러 사람들에게 도모하여
말하기를, '부의 관(館)은 대청(大廳)에 중앙에 있고 좌우에 익실(翼室)이 있는데, 동편은 높고 서쪽은 낮으며
동편은 넓고 서쪽은 좁은데, 다행히 창리고(創吏庫)에 남은 재물이 있어 서헌(西軒)을 고쳐 동헌(東軒)과 같이
하고자 하는데, 그대들의 뜻은 어떠한가.' 하니, 이민(吏民)들이 모두 이에 찬동하였다.
이에 일 없이 노는 사람들을 고용하고 다른 백성들을 번거롭게 하지 않았으나 건물이 새로워지니, 주(州)의 남
녀들이 감탄을 하면서 바라보았는데, 건물이 고쳐진 것만 볼 뿐이요, 공역(工役)이 어떻게 해서 되었는지를 알
지 못하였다. 공의 뒤를 잇는 사람도 백성 사랑하기를 공과 같이 하고 관직 수행을 공과 같이 하며, 건물과 장벽
(墻壁)을 늘 보수(補修)하여 임금의 세계근원(世系根元)이 길이 발상한 이 고장으로 하여금 그 기반을 공고히
함으로써, 조선(朝鮮) 억만년의 무강(無疆)한 복조와 더불어 상서(祥瑞)를 같이한다면, 어찌 우리 부의 큰 행복
이 아니겠느냐." 하였다.
누정 진남루(鎭南樓) : 공관(公館)의 후원(後園)에 있으며 영락(永樂) 기축년에 감사(監司) 겸 부윤인 윤향(尹向)
이 지은 것이다. 신유년에 부윤 한승순(韓承舜)이 중수하고 정곤(鄭坤)이 기문을 썼다.
윤향(尹向)의 시에, "백제성 중에 백척루며 경영은 바야흐로 태평시기에 당하였네. 기린봉(麒麟峯)에 비 뿌리어
주렴(珠簾)을 흔들고, 무악산(毋岳山)에 구름 이어 그림 기둥에 떠있네. 기둥에 기대어 동남으로 몇 개 군에 임
하고, 난간에 의지하여 서북으로 서울을 바라보네. 누에 오르니 3년을 지낼 손[客]이 가소롭고 호기(豪氣)는
오히려 바다 구석까지 넘쳐 있네." 하였다.
○ 허주(許周)의 시에, "맑은 경치를 연유하여 새 누각에 의지해 섰네. 눈은 깜짝 지는 잎을 보고 가을을 깨닫도
다. 수많은 민가의 저녁 연기는 어렴풋이 푸르고, 사산(四山)의 아리따운 기운은 무성하게 피어오르네.
유수(留守)의 부절을 나누니 2천 석이요, 월(鉞 군(軍)이나 지방 장관의 표시로 임금이 준 도끼)을 짚고 서서 50
주를 관풍(觀風)하네. 다행히 세월은 성시(盛時)를 당했으니, 닭 울고 개 짖는 소리 궁촌에까지 들리네." 하였다.
○ 이경동(李瓊同)의 기문에, "전주는 본래 백제 완산(完山) 땅인데, 당(唐) 나라 현경(顯慶 당 고종의 연호. 연간
에 백제가 망하고 그 땅이 신라(新羅)에 들어왔다. 경덕왕(景德王)이 처음으로 전주(全州)라 불렀는데,
신라가 기울자 견휜(甄萱)이 여기에 도읍을 정하고 나라를 세워 후백제라 하였다.
40년이 지난 뒤 고려의 태조가 이를 멸하고 안남도호부(安南都護府)를 두었다가 곧 다시 전주라 하였다.
뒤에 혹 승화(承化)라 하기도 하고, 또는 순의(順義)라고도 하여 비록 그 연혁(沿革)은 일정하지 않으나, 언제나
남방에 있어서 큰 고을이었음에는 틀림이 없다.
우리 태조께서 임금이 되자 선조(先祖)가 처음으로 터를 잡은 땅을 근원해서 주(州)를 승격하여 부로 하고, 자제
(子弟)들을 뽑아서 숙위(宿衛)에 넣음으로써 총애를 유달리 하였으며, 승하하신 뒤에는 경기전(慶基殿)을 지어
수용(晬容)을 봉안하니, 전주를 중요히 여김이 이에 성대하였다. 조정에서는 언제나 재상(宰相) 중에서 위망(威
望)이 있고 다스림의 대체를 알고 있는 사람을 뽑아 부윤으로 삼았다. 우리 성상께서 태묘(太廟)에 제사한 다음
해에 남원(南原)의 윤효손(尹孝孫) 공이 당시 예조 참의(禮曹參議)였는데, 늙은 어버이를 모시기 위하여 사임하
고 임금의 특별한 임명을 받고 전주의 부윤으로 내려왔다.
공의 덕으로 말하면 부모에게 효도하고 친구간에 신의가 있으며 뛰어난 정치를 베풀었다. 귀신을 섬기는 일이나
사람을 다스리는 일을 한결같이 지성(至誠)으로 하였으니, 봄과 가을의 석전(釋奠 공자를 모시는 제사를 말한다.)
에는 반드시 몸소 나아갔으며, 수재(水災)와 한재(旱災)에는 매양 기도를 올리면 곧 감응이 있었다. 노인을 공양
하는 외로운 사람을 돕는 일에 그 정성을 다하였으며, 첩소(牒訴)는 바쁜 중에도 모두 손수 써서 처리하였으며,
부역을 간소하게 하고 세금을 고르게 하며, 형벌은 가볍게 하고 정치는 맑게 하니, 백성이 마침내 기쁨으로 복종
하였다.
임금이 그 정치가 뛰어남을 들으시고 을미년 여름 6월 21일에 교서를 내려서 포장(褒獎)하여 이르기를, '민생의
즐거움과 근심은 수령에게 달렸다. 이전에 전주 백성이 재해를 입어 식량이 거의 바닥이 났었는데, 그대가 백성
을 다스리면서부터 많이 구제하여서 걸인이 목숨을 부지하고 유랑하는 자들이 제자리로 돌아갔으며, 특히 정사
를 고르게 하고 소송을 다스리니, 백성은 편안히 살게 되고, 치적 또한 남다른 바가 있으니, 그 백성을 잊지 못하
는 마음이 어떻다고 할 것인가. 여기에 당의(唐衣) 표리(表裏) 한 벌로 그대의 뛰어난 치적을 표창하노라.'
하고, 곧 감사에게 명하여 포상(褒賞)하는 의의(意義)를 열읍(列邑)에 널리 알려 그 나머지 사람들을 권장하니,
아름답도다. 그 가상함이 이에 이르니 그 누가 감동되지 아니하랴.
당시의 통판(通判) 김신(金信)이 또한 엄명(嚴明)하고 청신(淸愼)하여 간활한 자들을 복종시키고 공을 보좌함에
공로가 있었다. 공이 아뢰기를, '신이 재주가 없는 몸으로 외람되게 직책을 맡아 주야로 바삐 잘못이 없을까 두려
워하였는데, 홀연히 임금의 은명(恩命)이 내리니, 이는 비록 하늘을 속이고 임금을 속인 죄 피할 길이 없다 하겠
으나, 이전 재신(宰臣) 중에도 없던 영광된 일이라 신이 어찌 감히 하늘의 은총을 탐하여 사적인 것으로 삼으리
오. 마땅히 성은을 넓혀 영광을 막료들과 함께 하고자 하나이다.' 하니, 김후(金侯 김신(金信))가 또한 감히 사양
하지 못하였다.
이에 두 공(부윤과 통판)이 성상(聖上)의 돌보아 주심이 중한 것을 체득하고 계속 교화를 넓혀 게을리하지 않고
더욱더 경건하게 하여, 은혜와 위엄이 다 같이 드러나고 기강(紀綱)이 크게 행해졌으니, 전주 백성의 은혜 받음
이 어떻다고 할 것인가. 부의 북쪽에 누(樓)가 있으니 이것이 바로 진남루(鎭南樓)로서 여기에 본조실록(本朝實
錄)이 수장되어 있다. 정의(政議)에서 너무 소홀하다고 하여 달리 각(閣)을 세우고 실록을 옮겨 놓으니, 드디어
진남루는 예전대로 복구되었다. 하루는 공을 찾아뵈니 공이 자리를 내어주고, 이 누각의 연고를 언급하고 나에
게 기문을 쓰게 하였다.
삼가 생각하건대, 완산(完山)이 주가 된 것은 양(梁 중국 육조(六朝) 중의 소연(蕭衍)이 세운 나라) 나라 때이니,
지금으로부터 천여 년 전의 일이다. 그동안 정치의 잘못과 풍속의 선악은 때에 따라 서로 오르고 내림이 있었다.
내가 어려서 책을 끼고 어른을 따라 거리에서 놀 때는, 풍속은 화려한 것을 좋아하고 검소한 것을 즐기지 아니
했고, 후생들은 노는 데에만 힘쓸 뿐 책을 읽고 활쏘기와 차 모는 것을 익히는 자는 아주 적었다. 그런데 그 후에
습속이 크게 변하여, 자제들은 향학(鄕學)에서 글을 읽고 성균관(成均館)에 뽑히는 자가 시험 때마다 7ㆍ8명에
이르고, 문과와 무과에 오르는 사람이 거의 시험 때마다 빠지는 수가 없었다. 사시(四時)로 연방회(蓮榜會)를 열
면 참여하는 자가 언제나 수십 명이 되었으니, 후진은 흥기하고, 상숙(庠塾)에는 글을 강론하고 배우는 소리가
높았다. 봄 가을 향사(鄕射)에는 활을 쥐고 술잔을 높이 든 자 쏘면 반드시 명중하니 간성(干城)의 재목이며,
집안을 다스리는 자 곡식을 저축하여 흉년에 대비하는 사람이 많았다. 길에서는 여자와 같이 수레를 탄 사람을
볼 수가 없으니, 옛날에 보던 바와는 크게 상반된다고 하겠다.
일찍이 〈지리지(地理誌)〉를 보니, '풍속은 교활하고 늙은 사람이 보면 창피한 일도 있다.' 하였는데, 내가 보고
기억한 바로는 어려서 장성하기까지 수십 년에 불과하나 풍속은 많이 변하여서 기약한 일 없이 자연적으로 좋아
졌으니, 다시 한번 좋아진다면 가장 이상적인 도에 이르게 되리라는 것을 누가 의심하겠는가.
이제 성상께서 바야흐로 흥운(興運)을 융성하게 하고, 윤공(尹公)이 처음으로 총명(寵命)을 받아 우리 호남(湖南)
50여 주의 열백(列伯)을 창도(唱導)하여 우리 완산(完山) 1천여 년의 구도(舊都)를 거듭 새롭게 하니 정치의 융성
함과 풍속의 아름다움이 이때를 당하여 더욱 중하도다.
아, 주는 비록 오래나 천명은 새롭고, 누각은 오래나 그 이름은 처음이니, 옛날에 숨었다가 오늘에 드러남이여,
그 기대함이 있음이로다. 산하(山河)의 뛰어남과 경치의 부미(富美)함은 정사(政事)의 급한 바가 아니므로 굳이
기록하여 뒤에 전할 필요가 없으리라. 이것으로 기문을 대신하노라.' 하였다.
매월정(梅月亭) : 객관(客館)의 동북쪽 구석에 있다. 성화(成化 명 나라 헌종(憲宗)의 연호) 계묘년에 부윤 이봉
(李封)이 세웠다.
신증 이숙함(李淑瑊)의 시에, "매화[梅兄]와 달[桂魄]이 다 같이 청신(淸新)하여, 높은 정자를 웃고 차지하여 주
인이 되었도다. 호반(湖畔)에서 임포(林逋)의 신선된 이야기를 들었더니, 지금은 들보 위에 이백(李白)의 전신구
(傳神句)를 보겠네. 찬 겨울에 처음으로 매화 향기 언덕에 퍼지고, 가을이면 둥근 달이 그림자를 비치네.
담장 구석에 대나무도 쓸쓸히 서 있으니, 바람에 말을 전하여 같이 친해보자." 하였다.
○ 허침(許琛)의 시에, "가련하다, 매화 꽃술 달 가운데 청신하니, 냉담(冷淡)한 심기(心期)를 몇 사람이나 알아
줄까. 구름이 끊어진 곳에 참모습을 더하고, 눈이 차가운 곳에 옛 정신을 비치네. 주렴이 흔들거리니 성긴 그림
자가 비끼고, 지붕 모서리에 창랑히 반달이 나왔으니, 다 같이 세간에 속물이 아닐진대, 나도 한몫 끼어 서로 친
해본들 어떠리." 하였다. ○ 신용개(申用漑)의 시에, "매화[玉蕊]와 달[金波]이 서로 청신함을 다투어, 맑은 빛
담담한 모습이 우리의 벗이로다. 달 그림자[廣寒影]가 천상에 춤추니, 고야산(姑射山)에 아가씨처럼 고운 신선
이 그 아닌가. 눈이 깊으니 달 속 두꺼비는 뼛속까지 차갑고, 바람 탄 무학(舞鶴)은 날개가 바퀴처럼 크구나.
나부산(羅浮山)은 고래로 신선과 진인(眞人)이 사는 곳. 사웅(師雄)으로 하여금 하룻밤을 친하게 한들 어떠리."
하였다.
제남정(濟南亭) : 성의 남쪽 시내 위에 있다.
○ 홍여방(洪汝方)의 기문에, "계축년 봄에 이곳의 부윤으로 와서 하루는 과업을 권장하러 남문을 나섰다가,
동천(東川) 가에 누(樓)가 있고, 한쪽에 고인의 시판(詩板)이 있었는데, 또한 목은(牧隱) 선생이 남겨 놓은 시가
있는 것을 보고서 나는 이것을 다시 세울 생각을 가졌다. 놀고 있는 사람을 모집하고 재목을 모으고 있는 중 갑
인년 가을에 나는 병으로 면직이 되고, 동년(同年)인 조종생(趙從生) 공이 대신 와서 나의 뜻을 이어서 경영을
하며, 규모를 넓히고 단청(丹靑)을 선명하게 하여 그 오른편에 송백(松柏)을 심어 놓으니, 실로 제향(帝鄕)의
승관(勝觀)이더라." 하였다.
○ 노사신(盧思愼)의 시에, "교남(橋南) 교북(橋北)으로 많은 사람을 보내고 맞이하니, 날마다 수레와 말발굽이
여기를 바라고 지나가네. 높은 정자가 강가에 있으니 올라가 바라보는 이 아니 취하고 어이하리." 하였다.
신증 성현(成俔)의 기에, "나의 벗 이백승(李伯勝) 후(侯)가 전주 부윤이 된 지 3년에, 진남(鎭南)ㆍ제남(濟南)
두 누각의 기문을 나에게 부탁하였다. 직접 내 발로 그곳에 가보지 못했고, 내 눈으로 그 경치를 보지 못한 터에,
후(侯)가 나에게 기문을 쓰라고 하니, 내가 후를 위해 기문을 쓴다 하면 마음과 안목(眼目)이 서로 모순이 되는
것이니, 바람을 잡고 달을 잡는 것처럼 효험 없는 일이 되지 아니하겠는가.
예전에 한창려(韓昌黎)는 등왕각(滕王閣)을 보지 않고 기문을 쓴 일이 있는데, 다만 세월만 서술하고 광경은 언
급하지 아니하였다.
지금 나의 기문이 이와 비슷해야 하나.삼가 글을 보고 말하건대, 누(樓)는 주성의 남문(南門) 밖에 있으니 어느
때 지은 것인지 알지 못하다.
목은(牧老) 선생이 일찍이 읊은 시가 남아 있고, 홍여방(洪汝方) 공이 중수하였는데, 연대가 오래되니 황폐한 채
로 버려두고 손을 보지 않은 지 오래되었다. 안침(安琛)이 남방의 감사로 와서 이 누각을 보고 다시 고칠 뜻이 있
었으나 임기가 문득 차서 뜻을 이루지 못하였다. 이제 후가 와서 안공(安公)이 부지런히 부탁하기에, 감사에게
청하여 재목을 모으고 공인을 모집하여 그 제도(制度)를 일신하고, 문식을 더하였다.
또한 담장을 쌓아 빙 둘려서 관문(館門)에까지 닿게 하였다. 그러한 뒤에 형세는 장대하고 누의 경개(景槪)는 또
뛰어나게 되었다. 대천(大川)이 산골짜기에서 흘러나와 누각 아래로 굽이쳐 흐르고, 그 동서로는 돌을 쌓아 방죽
을 이루어 물이 언덕을 깎아먹는 것을 막도록 하였다. 그 밖으로는 뭇 산이 둥글게 줄을 지어 손을 마주 잡은 것
같기도 하고 서로 읍을 하는 것 같기도 하다. 만경대(萬景臺)는 유리알 같은 물 위에 그림자를 드리우고 기린봉
(麒麟峯)은 동쪽 구석에 우뚝하게 솟아 있다.
논밭은 수놓은 것 같고 촌락은 즐비하다. 아침저녁으로 연기는 수목 사이에 어렴풋하고 망망한 넓은 들은 안계
(眼界)가 공활(空闊)하다. 오르는 자는 마음이 넓어지고 정신이 맑아져서 그 흥취(興趣)가 무궁하다.
대개 유락(游樂)의 적취(適趣)에는 두 가지가 있으니 깊은 것과 넓은 것이 그것이다. 만약 여러 귀빈을 초청하여
술잔을 나누며 촛불 들고 밤까지 노는데, 예로써 대접함에는 진남루(鎭南樓)의 깊은 것이 좋고,
난간에 의지하여 사방을 둘러보고 천지를 부앙(俯仰)하며 성정을 즐겁게 하고 울적함을 풀기에는 제남루(濟南樓)
의 넓은 것이 좋으리라. 주의 인물은 풍성하고, 예문(禮文)은 번다하며, 소송 문서는 밀려 좌우로 지휘하며 응접
할 겨를이 없다가, 하루아침 이 누각에 오르면 사람의 왕래는 무한하고, 물상이 널려 있는 것은 무궁하여 눈에 보
이는 것 모두가 그 마음에 감동을 주지 않는 것이 없다. 천부(千夫)의 삼태기와 가래로 애써 농사한 자는 조세를
왕실에 먼저 바치고, 십묘(十畝)의 상자(桑柘)로 부지런히 길쌈하는 자는 비단을 귀가[閭右]에 먼저 올리며 어부
는 고기를 잡아 자기가 먹지 못하고, 목자(牧者)는 말을 먹여도 자기는 타지 못한다. 짐을 지고 실어 허리 굽혀 왕
래하는 자 그 누구나 다 의식(衣食)을 꾀하기 위한 것이다. 굶주린 자는 배부르게 먹이고자 하고,
추운 자는 옷을 입게 하고자 하며, 피곤한 자는 휴식시키기를 하고자 하여서 백성의 편안하지 못한 것을 보기를
자신의 몸이 아픈 것처럼 한다. 이런 마음으로 정치에 임하면 남방 백성을 구제하려 하는 마음이 공황(龔黃 공수
(龔遂)와 황패(黃霸). 둘 다 한(漢) 나라 신하)의 정치와 다를 것이 없을 것이니, 그 정교(政敎)에 도움이 어찌 적
다고 하랴."라고 하였다.
공북정(拱北亭) : 부(府)의 서북쪽 5리에 있다. 서거정(徐居正)의 기(記)에, "부의 북쪽 5리쯤에 정자가 있으니
공북정이라 한다. 조정에서 덕음(德音)을 펴거나 사명(使命)이 있으면 부윤이 관리들을 인솔하여 의관을 갖추고
이곳에 나와서 경례하여 맞이하며, 만약 국왕의 생일이나 국가의 큰 경사, 큰 상서를 만나면 부(府)와 주(州)가
각기 전문(箋文)을 받들어 대궐을 향하여 예를 행하고, 또한 여기에서 사신을 떠나보낸다.
그런데 집을 지은 지가 오래되어 거의 다 무너지게 되었으니, 예를 행하는 자가 들에서 일을 도모한다는 탄식이
있게 되었다.주D-002 신사년 겨울에 이언(李堰)이 부윤이 되어 개연(慨然)히 이를 다시 세울 뜻을 가지고 바야
흐로 일을 경영하려 하였는데, 실행하지 못하고 전임이 되었다. 이형손(李亨孫)이 후임으로 와서 공인을 모으고
자재(資材)를 갖추어 거의 일이 되어가는 차에 부모의 상을 당하여 또 교대되어 갔다. 계속해서 부윤 이번(李蕃)
과 통판(通判) 최지(崔漬)가 와서 공사를 완결시키기를 도모하고, 읍인 김사효(金思孝)를 시켜 공사를 독려하였
다. 일 없이 노는 사람을 데려다 일을 시키고 농민들을 괴롭히지 아니하였으며, 수개월이 지나 완성을 보자 주의
부로(父老)들이 이 일을 자랑하고자 나에게 기문(記文)을 부탁하였다. 생각하건대 전주(全州)는 산천의 좋은 기
운이 얽히고 서려 왕업의 자취를 창립하였으니, 실로 우리 조선(朝鮮)의 근본이 되는 땅으로 주(周) 나라의 태빈
(邰豳)주D-03과 같은 곳이요, 목조(穆祖)가 북방으로 옮겨간 것은 마치 주의 태왕이 빈(邠)을 떠난 때이다.
주D-04 태조(太祖)께서 나라를 열고, 열조의 성군이 서로 이어받아 부(府)를 설치하고 윤(尹)을 두어 한 도의 머
리가 되게 하니, 대개 영광스럽게 하기 위함이었다. 전주의 부로와 자제들이 오래 선왕(先王)의 남은 교화를 입
고 열성(列聖)의 깊은 은혜를 받아 풍패(豐沛)에 살면서 노래를 부르고, 시를 읊조리니 임금을 생각하는 정성 실
로 만 배나 더하리라. 전후로 내려온 수령들은 모두가 조정에서 중선(重選)된 사람들이었고,
지금의 부윤과 통판(通判)이 또한 일시(一時)의 명망(名望)을 받는 이들로 정사(政事)는 왕명을 공경하고 왕사
(王使)를 예로 맞는 것을 우선으로 하였으니, 이는 곧 공북(拱北)을 중시하는 까닭이다.
아, 고인이 말하기를, '그 경내(境內)에 들어가면 교화(敎化)를 안다.'고 하였으니, 지금으로부터 전주(全州)를
지나면서 우리의 풍속을 물으면 우리의 풍속이 어떠하며 우리의 고장이 어떠한가를 알 것이니,
춘추(春秋) 시대에 왕을 높이던 그 의(義)와 예(禮)를 깊이 체득하는 것이 반드시 이 정자(亭子) 때문일 것이다.
그러니 정자를 수리함이 미관상 아름답게 하여 노는 곳으로 만들기 위한 것이라 한다면 이는 두 분 부윤과 통판
의 뜻을 모르는 말이다. 뒤에 오는 사람들이 오늘 새로 고친 거룩한 뜻에 어긋남이 없기를 바라노라." 하였다.
신증 노사신(盧思愼)의 시에, "완산국(完山國)의 번영을 다 흠모하니, 성안에 가득찬 문물(文物)이 무성한 귀인
[纓簪]이네. 덕음(德音 임금의 말)이 널리 퍼져 교외에까지 나아가 다투어 맞이하니, 북궐(北闕)에는 언제나
임금을 받드는 마음[捧日心]이 걸려 있더라." 하였다.
○ 유순(柳洵)의 시에, "임금의 명령을 지니고 달려가니 스스로 공경하네. 우연히 정자 위에 오르니 귀현[華簪]
들이 모였구나. 팔마(八馬 고관의 행차 앞에서 교통을 정리하며 가는 사람) 남행하는 나그네 다시 임금 생각하는
마음 간절함을 누가 알리요." 하였다. 내사정(內射亭) : 성내(城內) 남쪽에 있다. 부윤 정자제(鄭自濟)가 지었다.
쾌심정(快心亭) : 제남정(濟南亭)으로부터 4리 떨어져 있다. 시내를 따라 올라가면 산이 끊어지고 물이 돌아 내려
가는 낭떠러지가 있는데, 돌을 쌓아 터를 만들고 그 위에 정자를 세웠다. 노사신(盧思愼)의 시에, "강물은 길이
흘러 운잠(雲岑)을 둘렀는데, 강 위 높은 정자에는 꽃과 대[竹]가 깊구나. 붉은 난간을 서성거리며 두 눈이 맑으
니 세상 그 무엇이 내 마음을 가리랴." 하였다.
신증 신용개(申用漑)의 시에, "푸른 산이 우뚝 끊어진 모퉁이로 병풍처럼 푸른 물이 둘렀는데, 누가 좋은 정자를
물가에 지었는가. 잔잔한 물결에 바람이 없어 거울처럼 비치고, 우뚝우뚝 솟은 봉우리로 해가 지니 붉게 흙더미
를 이루었네. 찬 하늘이 떨리니 가을이 장차 저무는데, 멀리 떠난 나그네가 등림(登臨)하여 머리를 홀로 돌리네.
또한 젓대 소리가 나를 흥기시키니, 맑은 시가 기루재(倚樓才 시를 빨리 쓰는 재주)를 빌릴 필요가 없네." 하였다.
신증 청연당(淸讌堂) : 객관(客館) 서쪽에 있다. 부윤 강징(姜澂)이 세웠다.
만화루((萬化樓) : 향교(鄕校)에 있다.
○ 김종직(金宗直)의 시에, "학교[庠序]는 궐리당(闕里堂 지금의 산동성(山東省) 곡부현(曲阜縣)에 세운 집)에
공자(孔子)가 처음으로 교학(敎學)을 시행한 집과 비슷하고, 장수(藏修)는 모두가 초국(楚國) 재목이로다.
연어(鳶魚)는 호호(浩浩)하게 천지(天地)를 나누었고, 현송(絃誦)은 양양하게 담 밖으로 퍼지는구나. 물이 방지
(方池)에 출렁이니 가슴속 생각이 깨끗하고, 바람이 문행(文杏) 나무를 흔드니 웃음 소리가 시원하도다. 학생들
을 분발 흥기시킴에 내가 방책이 없으니, 누전(樓前)에 자유(子游)와 자하(子夏)의 행실을 행하는 학생들에게
부끄럽구나." 하였다.
학교 향교(鄕校) : 부의 서쪽 5리에 있다.
○ 서거정(徐居正)의 기(記)에, "삼가 생각하니, 우리나라는 유학(儒學)을 숭상하고 도(道)를 중시하여 학교를
세우고 스승을 세워, 비록 궁벽한 고을이라도 다 그러하거늘, 하물며 전주는 우리 조종(祖宗)의 고향 땅이며 남
쪽 지방의 인재가 모인 같은 곳이니 더 말할 것이 있으랴.
그러니 교육을 제일로 삼고 고을의 자제들이 또 문헌세가(文獻世家)들이 많아 선(善)을 좋아하고 학문을 좋아
하므로 일향(一鄕)의 교화가 잘되고 많은 인재가 그 중에서 배출되니, 이는 비록 지령(地靈)의 좋은 기운이 모
여서 된 것이라고는 하나 또한 교육에 바탕이 있기 때문인 것이다.
부의 학[序學]이 이전에는 정청(政廳) 안에 있었는데, 신유년에 태조의 빛나는 용상(容像)을 경기전(慶基殿)에
봉안하게 되자 학교와 경기전이 너무 가까워 시서(詩書)를 외는 소리와 태만한 학생에게 매질하는 소리가 시끄
러워서 성령(聖靈)을 편안히 모실 곳이 못 되었다.
마침내 성의 서쪽 6ㆍ7리 되는 곳으로 옮겼는데 무릇 성전(聖殿)과 강당(講堂) 재랑(齋廊)과 부엌이 차례로 완
비되었다. 그러나 부지가 매우 넓고 시내에서 멀리 떨어져 도적이나 범의 화가 근심이 되어 담장을 두르고 자물
통을 단단히 하니, 오직 단단하고 치밀한 것을 제일로 하였다.
기해년에 계림(鷄林) 이유인(李有仁) 선생이 부윤으로 와서는 먼저 선성(宣聖 공자를 말함)을 뵌 다음에는 제생
을 불러들여 제사 지내는 일에 관해서 강론하고, 교화를 일으키고 어진 이를 독려함을 마음으로 삼고, 학과에
순서가 있고 공급(供給)은 넉넉하며, 수선(修繕)하는 작은 일도 여유있게 조치하였다.
이듬해 경자년 봄에 다섯 채의 새 누각을 지으니, 높고 밝아서 제반 마련이 알맞았다. 완성을 본 다음에는 선생
이 제생을 인솔하고 누에 올라 술잔을 기울여 낙성식을 하였다.
선생이 여러 학생들을 돌아보며 하는 말이, '그대들이 이 누각에 올라오니 얻은 바가 있는가.' 하니, 제생이 대답
하기를, '전에 누각을 짓기 전에는 교사가 낮고 좁아서 우리가 책을 읽는 여가에 비록 답답함을 풀고 정신을 맑
게 하고자 하나, 사방을 돌아보아도 쉴 자리와 놀 자리가 없어 늘 답답한 마음을 풀 길이 없었습니다.
이제 이 누각에 오르니 우리의 번거로운 마음을 씻어 주고 막힌 생각을 밝게 해서 산을 보고서는 인(仁)을 체득
할 수 있고, 물을 보면 지혜를 기를 수 있으며, 솔개가 하늘을 날고, 고기가 물 속에 뛰노는 것을 보고 도체(道體)
의 밝게 드러난 것을 깨닫게 되었으니, 한번 내려보고 우러러보는 것이 배우는 것이요, 한번 움직이고 고요함이
또한 배우는 것이라, 무릇 눈에 보이고 귀에 들리는 천지간 만물의 많은 것이 그 어느 것인들 천성을 기르는 데
도움되지 않는 것이 있겠습니까. 그 공(功)을 미루어 나가면 천지의 화육(化育)에 참여하여 천지(天地)와 그 공
을 같이 할 수 있을 것이니, 선생이 우리에게 베푼 은혜는 지극함이 있습니다. 만약 유락(遊樂)에 빠져 흥청거리
는 것이나 강송(講誦)을 하다 말다 하는 것은 선생이 우리에게 바라는 바가 아닐 것입니다' 하였다.
선생이 웃으며 머리를 끄덕이니 제생이 공(公)의 주신 은혜를 빛내기 위하여 나에게 기문을 부탁하였다.
내 또한 이 고을에 적(籍)이 속해 있는 사람으로 그 뜻을 사양할 수 없노라." 하였다.
역원 삼례역(參禮驛) : 부의 북쪽 35리에 있다. 본도에 속한 역은 열두 개이니 반석(半石)ㆍ오원(烏原)ㆍ
갈담(葛覃)ㆍ소안(蘇安)ㆍ재곡(材谷)ㆍ양재(良才)ㆍ앵곡(鸎谷)ㆍ거산(居山)ㆍ천원(川原)ㆍ영원(瀛原)ㆍ
부흥(扶興)ㆍ내재(內才)가 그것이다. ○ 찰방(察訪) 1명이다.
○ 고려 현종(顯宗)이 거란 병사를 피하여 삼례역에 이르렀다. 절도사(節度使) 조용겸(趙容謙)이 들에 엎드려
어가(御駕)를 맞이하였다. 박섬(朴暹)이 상주(上奏)하기를, "전주는 옛날의 백제(百濟)인데 성조(聖祖)께서도 또
한 싫어하던 곳이니, 청하건대 왕께서는 그곳에 가시지 마십시오." 하니, 왕이 그 말을 좇았다.
반석역(半石驛) : 부의 남쪽 3리에 있다. 앵곡역(鸎谷驛) : 옛날에는 장곡역(長谷驛)이라 하였다.
부의 서쪽 30리에 있다.
○ 고려 현종이 이 역에 묵었다. 이날 밤에 절도사 조용겸이 왕을 이 역에 머무르게 하고, 왕을 끼고 호령을 하고
자 하여 전운사(轉運使) 이재(李載), 순검사(巡檢使) 최집(崔檝), 전중소감(殿中少監) 유승건(柳僧虔)이 흰 깃대
를 관(冠)에 꽂고, 북을 치고 소리치며 들어오므로 지채문(智蔡文)이 사람을 시켜 문을 닫고 굳게 지키니, 적이
감히 들어오지 못했다.
금광원(金光院) : 부의 북쪽 50리에 있다. 숙점원(宿店院) : 부의 서쪽 35리에 있다.
안덕원(安德院) : 부의 동쪽 10리에 있다. 사대원(四大院) : 부의 남쪽 5리에 있다.
허고원(虛高院) : 부의 북쪽 30리에 있다. 장신원(長信院) : 부의 남쪽 21리에 있다.
상관원(上館院) : 부의 남쪽 40리에 있다. 추천원(楸川院) : 부의 서쪽 11리에 있다.
신원(新院) : 부의 동쪽 31리에 있다. 월당원(月塘院) : 부의 동쪽 4리에 있다.
부윤 김정준(金廷雋)이 세우고, 재호(齋號)는 월당(月塘)을 따서 이름으로 하였다.
○ 정이오(鄭以吾)의 시에, "일은 백년이나 지나 햇수는 멀지만, 그 이름은 한 읍에 전하니 월당(月塘)의 맑음이
여." 하였다.
피계원(皮界院) : 부의 남쪽 11리에 있다. 보산원(補山院) : 부의 북쪽 30리에 있다.
대초원(大初院) : 부의 서쪽 25리에 있다. 광제원(廣濟院) : 부의 북쪽 30리에 있다.
탄현원(炭峴院) : 부의 서쪽 16리에 있다. 모로원(毛老院) : 부의 북쪽 17리에 있다.
남복원(南福院) : 부의 남쪽 8리에 있다. 모즐지원(毛叱知院) : 부의 남쪽 35리에 있다.
내현원(奈峴院) : 부의 북쪽 40리에 있다.
불우 귀신사(歸信寺) : 무악산(毋岳山)에 있다.
○ 고려 신우(辛禑) 때에 왜병(倭兵) 3백여 기(騎)가 주성(州城)을 함락하고 이 절에 주둔하였는데, 병마사 유실
(柳實)이 격퇴하였다.
○ 윤진(尹珍)의 시에, "북쪽 뜰에는 산들바람 대밭에 불고, 남향 창문을 열면 넓고 아득한 만겹 산이로구나.
소나무 관문과 돌길 시내 건너 들어와서 , 고승(高僧)을 대하고 앉아 잠시 한가함을 얻었도다." 하였다.
보광사(普光寺) : 고덕산(高德山)에 있다.
○ 이곡(李穀)의 기(記)에, "전주의 남쪽 고덕산에 절이 있으니, 이를 보광사(普光寺)라 한다.
실로 백제(百濟)로부터 내려오는 큰 절이다. 비구(比丘) 중향(中向)이 어려서 이 절에서 자랐는데, 그 절이 황폐
해지는 것을 걱정하고 개연히 중흥시킬 뜻을 품었는데, 주(州)의 사람 중에 지금의 자정사(資政使) 고룡봉(高龍
鳳) 공이 황제의 우대를 받고 성품이 또한 착한 것을 좋아한다는 말을 들었다.
그리고 원통(元統 원(元) 순제(順帝)의 연호) 갑술년에 바다를 건너 서유(西遊)하여 경사(京師)에 가서 만나보고
말하기를, '고공(高公 즉 고룡봉(高龍鳳))은 변지(邊地)에서 태어난 몸으로 상국(上國)에 와서 이토록 뜻을 얻으
니 어찌 인과(因果)가 아니겠습니까. 공은 군상의 측근에서 주야로 반걸음도 좌우에서 떠나지를 아니하니 군상
(君上)의 은택에 빛남과 여복(輿服 타는 수레와 입는 옷)의 아름다움을 고향에 있는 친척과 붕우들이 알 수가 없
으니, 소위 비단옷을 입고 밤길을 가는 것과 무엇이 다르겠습니까. 만약 고향에 절을 지어서 위로 임금을 위해
축수(祝壽)하고, 아래로 대중들과 복을 같이하여 우뚝하게 한 자리 귀앙(歸仰)할 장소를 마련한다면, 낮에 비단
옷을 입는 격[晝錦]이 되지 않겠습니까.' 하니, 공이 흔연히 승낙하고 천민(千緡)에 상당한 지폐를 출자하여 절
을 새로 단장하고 삼장(三藏 불교의 경(經)ㆍ율(律)ㆍ논(論))을 두게 했다.
그 뒤 공은 재신(宰臣)의 이간질을 당하여 남방에 출거(出居)하게 되고 중향(中向)도 또한 산으로 돌아와서 건물
을 수리하고 공이 하루속히 돌아오기를 빌었다. 지정(至正 원(元) 순제(順帝)의 연호)으로 개원(改元)하기 2개월
전에 간신들을 출척하고, 정화(政化)를 다시 베풀어 바람과 우레처럼 호령을 발하고 뇌성과 비처럼 시행하자,
공은 다시 사환(賜環)주D-005되어 임금의 사랑이 더욱 새로웠다.
중향은 다시 경사에 들어갔는데 공은 전에 뜻을 다 마치지 못한 것을 서운하게 여겨 그 비용을 더해서 공사를 독
려하여 완성하도록 하였다. 세시(歲時)에 전장(轉藏)주D-06하고 전후로 보시(布施)한 것을 합하니, 천에 달하는
사람이 2만 50명이요, 황금물로 칠을 해서 불상을 새롭게 한 사람이 15명이며, 백금으로 새겨서 기명(器皿)을 장
식한 사람이 30명이었다. 무릇 건물의 기둥은 1백여 개나 되는데, 정축년 봄에 시작해서 계미년 겨울에 완성을
보았다. 일이 끝나는 달에는 산인(山人) 담숙(旵淑) 등이 시주를 널리 모아서 크게 화엄회(華嚴會)를 개최하여
낙성식을 하니, 그동안에 쓴 일꾼이 3천명이요, 시일은 50일이 걸렸다.
선비와 부녀자들이 부지런히 다니며 공양(供養)하고 찬탄(讚嘆)하니, 골짜기를 메우고 산등에 넘쳐 그 수를 헤
아리기 어려웠다. 중향(中向)이 마땅히 본말(本末)을 기록하여 후세에 전하는 것이 옳다 하여 고공(高公)의 명
으로 나에게 기문(記文)을 부탁한 것이다.
삼가 생각하건대 견훤씨(甄萱氏)가 본국에 들어온 지 4백년이 넘는다. 절은 비록 백제 때에 창건되었으나 여러
차례 병화를 입고 비(碑)나 기문도 없어 그 세월을 상고할 길이 없으나, 혹은 일으키고 혹은 폐하더니, 오늘에
이르러 반드시 고공(高公)을 기다려서 비로소 옛날의 모습을 복구하게 되었다. 공은 삼한(三韓) 땅에 태어났으
니 경사(京師)로부터 5천 리인데, 인연이 닿아서 일월(日月) 같은 천제(天帝)의 빛에 의지하고 비와 이슬 같은
큰 은혜를 입었으니, 향국(鄕國)에 그 여택이 많이 미쳤다. 또한 불사(佛事)를 크게 베풀어서 복을 빌고[祝釐]
근본을 갚아서[報本] 끝없이 드리우니, 그 어찌 우연한 일이라 하겠는가." 하였다.
서고사(西高寺) : 서고산(西高山)에 있다. 남고사(南高寺) : 만경대(萬景臺)의 뒤에 있다.
천룡사(天龍寺) : 부의 동쪽 성 밑에 있다.
○ 이규보(李奎報)의 시에, "온 집이 푸른 산 옆에 와서 산다네. 얕은 모자 가벼운 옷으로 침상에 누웠네.
폐부가 마르니 촌 술맛이 더욱 좋고, 정신이 혼미하니 들차[野茶] 향기가 또한 좋구나. 대나무 뿌리는 지상에
흩어져 뻗으니 용이 허리를 움직이는 것 같고, 파초 잎이 창 앞에 닿으니 봉의 꼬리처럼 길구나. 삼복(三伏)이
일찍 그치고 백성의 송사가 적으니, 이때 다시 부처님을 섬김도 무방하리라." 하였다.
경복사(景福寺) : 고달산에 있다. 이절의 비래당(飛來堂)에는 보덕대사(普德大士)의 화상이 있다.
○ 이규보의 기(記)에, "보덕(普德)의 자는 지법(智法)인데 고구려 반룡산(盤龍山)의 연복사(延福寺)에 거주하였
다. 어느날 홀연 제자에게 말하기를, '고구려는 도교(道敎)만을 숭상하고 불법을 존숭하지 않으니 이 나라는 반
드시 오래가지 못하리라. 몸을 편히 피란할 곳이 어디 있겠느냐.' 하니 , 제자 명덕(明德)이 말하기를, '전주(全州)
의 고달산(高達山)이 안주하여 움직이지 아니할 곳입니다.' 하였다.
보장왕(寶藏王) 26년 정묘 3월 3일에 제자가 문을 열고 나가보니 집은 이미 고달산에 옮겨져 있었으니, 반룡산
으로부터 1천여 리나 떨어진 곳이다. 명덕(明德)의 말이, '이 산이 비록 뛰어나긴 했으나 샘물이 말라 있다.
내 만약 스승께서 옮겨 오실 것을 알았다면 틀림없이 반룡산의 샘도 옮겨왔을 텐데.' 하였다." 한다.
임천사(臨川寺) : 서산(西山)에 있다. 사대사(四大寺)ㆍ흑석사(黑石寺) : 두 절 모두 고덕산(高德山)에 있다.
원암사(圓巖寺) : 청량산에 있다. 봉서사(鳳棲寺) : 서방산에 있다. 대원사(大圓寺) : 무악산(毋岳山)에 있다.
○ 고려 박춘령(朴椿齡)의 시에, "문서 다루는 3년 생활에 몸에는 백 가지 병이라, 공사에서 물러나 때때로 옛 정
이 든 벗을 찾아가네. 높고 낮은 데 수목은 빽빽하여 길이 없나 의심하고, 철 따라 꽃이 피니 달리 봄이 있도다.
골짜기는 음청(陰晴)하여 부앙(俯仰)간에 다르고, 연기와 노을은 자색과 푸른색으로 아침저녁 다르네.
원공(遠公)은 시냇물을 건너지 마소.주D-007 산인(山人)들이 스스로 보내고 맞이하네." 하였다.
사묘 사직단(社稷壇) : 부의 서쪽 3리에 있다. 문묘(文廟) : 향교에 있다.
성황사(城隍祠) : 기린봉(麒麟峯)에 있다.
○ 이규보(李奎報)의 몽험기(夢驗記)에, "나는 일찍이 완산(完山)에 장서기(掌書記) 벼슬로 있었다.
평소에 성황사에 가는 일이 없었는데, 하루는 꿈에 사당에 가서 당하에서 절하였는데 법조(法曹)의 동배자(同拜
者)가 있는 듯하였다. 법왕(法王)이 사람을 시켜 말하기를, '기실(記室 고을 원의 비서일은 맡은 사람)은 계(階)
에 오르라.'하였다. 내가 청사에 올라서 재배(再拜)하니 법왕이 베로 된 모자에 검은 빛의 유의(襦衣)를 입고 남
쪽 뜰에 앉았다가 일어나 답배(答拜)하는 것이었다. 나를 이끌어 앞으로 오게 하니 홀연히 한 사람이 탁주를 들
고 와서 부었는데 술과 찬이 또한 초라하였다. 한참 동안 같이 마시다가 말하기를, '들으니 목관(牧官)이 근자에
새로 12국사를 찍었다 하는데 그런 일이 있는가.'라고 물었다. 그렇다고 대답하니 또 말하기를, '어찌 나에게 주
지 아니하는가. 내가 여러 아들이 있는데 읽도록 하고 싶으니 몇 책을 보내줄 수 있는가.' 하였다.
내가 예예 하고 대답하니 또 말하기를, '아전의 우두머리 누구는 좋은 사람이니 보호하여 주기를 청하노라.'
하였다.
내가 다시 승낙하고, 화복이 어떨지를 물었더니 법왕이 길 위에 달리다 축이 꺾인 수레를 가리키며 하는 말이,
'그대의 운수가 마치 이 수레의 모양이니, 금년을 넘기지 못하고 전주를 떠나리라.'하고 곧 가죽띠 두 개를 가지
고 나에게 주면서 말히기를, '자네는 존귀할 것이므로 이것을 준다.'하였다. 꿈을 깨니 온 몸에 땀이 흐르는 것
이었다.
당시에 안렴사(按廉使) 낭장(郎將) 노공(盧公)이 목관을 시켜 12국사를 새로 찍게 한 일이 있고, 또 관리 중에 아
무개가 내 뜻에 맞지 않아서 어떤 일로 인하여 내몰고자 한 일이 있었는데, 이것을 말한 것이다.
다음 낮 그 아전을 불러 12국사 두 책을 갖다가 바치게 하였고, 그 사람의 죄는 불문에 부치었다. 이 해에 과연 동
료자의 고소로 파직을 당하고서 비로소 차축에 비유한 말을 깨우쳤다.
그러나 한가한 생활 7년에 한 번도 벼슬을 받지 못하여 곤란이 막심하였으므로 다시는 그 말을 믿지 아니하였다.
비록 요직을 지내고 벼슬이 3품에 오르고서도 여전히 깊이 믿지를 아니하다가 이제 상국(相國)의 지위를 제수받
고서야 이에 존귀하게 되리라 하던 말이 부합되어 틀림이 없는 것을 크게 믿게 되었다.
아, 신도(神道)의 그윽한 감응도 역시 때로는 믿을 만하니 어찌 모두가 허망하다고만 하겠는가."라고 하였다.
신증 관찰사 이언호(李彦浩)가 소상(塑像)을 부셔버리고 위판(位版)으로 대신하였다.
여단(厲壇) : 부의 북쪽 5리에 있다.
고적
고토성(古土城) : 부의 북쪽 5리에 있다. 터가 남아 있는데 견훤이 쌓은 것이다.
고덕산성(高德山城) : 돌로 쌓았는데 둘레는 8천 9백 20척(尺), 높이가 8척이며, 그 안에 우물이 7개, 시내 하나
가 있다.
우주 폐현(紆州廢縣) : 우(紆)는 오(汚)로 쓰기도 한다. 주의 북쪽 50리에 있다. 본래 백제의 우소저현(于召渚縣)
인데, 신라에 와서 지금의 이름으로 고치고, 금마군(金馬郡)의 영현(領縣)으로 삼았다가 고려 초에 예속시켰다.
이성 폐현(伊城廢縣) : 주의 서쪽 25리에 있다. 본래 백제의 두이현(豆伊縣)인데, 왕무(往武)라고도 한다.
신라 때에는 두성(杜城)으로 고치어 예속시키고 고려에 와서 지금의 이름으로 고쳤다.
이성 폐현(伊城廢縣) : 주의 서쪽 75리에 있다. 본래는 백제의 내리아현(乃利阿縣)이다. 신라 때에 지금의 이름
으로 고치어 김제군(金堤郡)의 영현(領縣)으로 삼았다가 고려 초에 예속시켰다.
경명향(景明鄕) : 영명(榮明)이라고도 한다. 부의 북쪽 1백 20리에 있다.
양량소(陽良所) : 우주(紆州)의 동북쪽, 즉 우양촌(右楊村) 철소(鐵所)에 있다.
두모촌소(豆毛村所) : 이성현(利城縣)에 있다.
녹균정(綠筠亭) : 청사(廳事)의 북쪽에 있다. 지정(至正) 정미년에 목사 한계상(韓系祥)이 정(亭)을 바꾸어 누
(樓)로 만들었다. 이달충(李達衷)이 편액을 관풍루(觀風樓)로 고치고 기문을 적었는데 지금에 와서 폐지하였다.
효자리(孝子里) : 부의 남쪽 3리에 있다.
○ 이규보(李奎報)의 시에, "돌을 세워 효자를 표창하였는데, 성씨를 아니 새겼네. 어느 때 사람이며,
효행은 어떠하였는고." 하였다
명환
신라 용원(龍元) : 신문왕(神文王) 때 총관(摠管)이다.
김웅원(金雄元) : 헌덕왕(憲德王) 3년 도독(都督)이 되었다.
고려 정항(鄭沆) : 예종(睿宗) 조의 우정언(右正言)이며, 시사를 의논할 적에 곧게 직면하여 권신들에 거슬리어
통판(通判)으로 나갔다가 불려와 사간(司諫)이 되었다.
오정총(吳廷寵) : 전주 목사이며, 정사가 관대하고 공평하였으며, 가혹하지 아니하였으며, 아전과 백성을 편안
하게 하였다. 뛰어난 치적이 알려져 추밀원(樞密院) 좌승선(左承宣)에 소배(召拜)되었다.
박춘령(朴椿齡) : 완산(完山)의 수령이다. 조영인(趙永仁) : 의종(毅宗) 때에 과거에 급제하였다. 서기(書記)에
임명되었는데 정무를 잘한다는 명성이 있었다.
이규보(李奎報) : 신종(神宗) 2년 기미년에 사록(司錄) 겸 장서기(掌書記)에 임명되었다.
박원계(朴元桂) : 사록(司錄) 겸 장서기였다. 경내에 호랑이 소동이 났는데 목사와 판관이 잡지를 못하고 박원계
(朴元桂)에게 맡겼더니 원계가 말을 타고 좁은 지역에서 한 화살로 적중시켜 죽였다.
백득주(白得珠) : 장원하여 서기(書記)가 되었다. 당시에 안렴사가 대궐로 가면서 절구 한 수를 남기었다.
백득주가 화답하기를, "사신[星使]이 임금께 돌아간 후에 유영(柳營)은 벌써 봄이네. 무정한 푸른 풀도 원망을
하거늘, 하물며 정이 있는 사람에 있어서랴." 하였다. 안렴사가 평상에서 내려와 손을 잡고 작별했다.
곽예(郭預) : 고종(高宗) 때에 사록(司錄)이 되었다.
김지대(金之垈) : 고종 때 사록에 임명되었다. 고아와 과부들을 구제하고 부호와 강포한 사람들을 누르고 잘못
을 귀신처럼 적발하니 아전과 백성들이 공경하고 두려워하였다.
정선(鄭僐) : 원종(元宗) 말에 사록이 되었다.
한공의(韓公義) : 충혜왕(忠惠王) 때 목사로 나가 은혜로운 정사를 시행하였다.
이우(李瑀) : 이암(李嵒)의 아버지이다. 재간(才幹)이 있어 목사가 되어 나갔는데, 유애(遺愛)주D-008가 있었다.
정운경(鄭云敬) : 공민왕(恭愍王) 때 목사이다. 처를 거느리고 집에서 사는 중이 있었는데 하루는 밖에 나갔다
가 죽었다. 그 처가 관가에 고소하였으나 증거가 없어 오래 판결을 보지 못했다. 정운경이 그 처가 사통하는 자
기 있는가 물었으나 없다고 대답하였다. 다만 이웃에 한 놈이 늘 희롱하기를, "노승이 죽으면 일이 좋겠다." 하
는 것이었다. 이에 그놈을 밖에 잡아 두고 먼저 그 어미를 국문하여 말하기를, "모월 모일 너의 자식이 집에 있었
느냐, 아니면 나갔느냐." 하니, 어미의 말이, "이날 밖에서 돌아와 하는 말이 친구와 술을 마셔 취하였다 하였습
니다."고 하였다. 즉시 이웃 남자에게, 같이 술마신 자가 누군가 물으니 바로 사실을 자복하였다.
김도(金濤) : 공민왕 때 사록(司錄)이 되었다. 윤곤(尹坤) : 부윤이 되었다.
본조 허조(許稠) : 태종 때에 판관(判官)이 되었는데, 청절(淸節)을 지키고 강직하고 현명하였다. 일찍이 스스로
맹세하기를, "그릇된 법으로 일을 처단하면 황천이 벌을 내린다.[非法斷事皇天降罰]"는 여덟 글자를 작은 판에
써서 청사에 걸었다.
권담(權湛) : 세종 때의 부윤이다.
홍여방(洪汝方)ㆍ김길통(金吉通) : 다 같이 부윤을 지냈다.
이언(李堰) : 성품이 청렴하고 강직하였으며 세조께서 교서를 내려 포상하였고, 가선대부(嘉善大夫)에 올랐다.
이봉(李封) : 부윤이 되어 잘 다스린다는 명성이 있었다. 이유인(李有仁) : 부윤인데 치적이 있다.
학교를 증수(增修)하니 교생들이 그가 죽은 날에는 제사를 차렸다.
신증 윤효손(尹孝孫) : 부윤인데, 정사는 자비롭고 어진 것을 숭상하였고 아전들과 백성이 그를 사랑하므로
포상하여 가선(嘉善)으로 품계를 올렸다. 김선(金瑄) : 부윤인데, 정사를 부지런히 삼가하였다.
가선(嘉善)으로 포상하여 올려 주었다. 최자숙(崔自淑) : 판관인데 아전들은 두려워하고 백성들은 그를 사랑
하였다.
인물
고려 최균(崔均) : 어려서부터 열심히 공부하여 출중하였으며, 인종(仁宗) 때에 과거에 급제하였다. 자주 벼슬이
올라 소부(少府) 주부(主簿)가 되었다. 그때의 재상(宰相) 최윤의(崔允儀)가 봉지(奉旨)하고, 문사(文士)를 택하
여 예의(禮儀)를 상정(詳定)함에 있어서 최균(崔均)을 제일 먼저 뽑았다. 뒤에 최윤의가 임종할 때에 홀로 최균
을 천거하여 임금은 각문지후(閣門祗侯)를 제수하였다. 명종(明宗) 때에 예부시랑으로서 병마부사(兵馬副使)를
겸임하였는데, 서경(西京)의 조위총(趙位寵)을 공격하다가 잡혀 해를 입었으며 예부상서로 추증되었다.
최척경(崔陟卿) : 아전으로 과거에 급제하여 의종(毅宗) 초에 경산부(京山府) 판관(判官)이 되었다. 임기가 만료
되어 서울에 돌아와서는 10여 년간 권문세가에 드나들지 아니했다. 뒤에 다시 탐라령(耽羅令)이 되었다가 자주
옮겨 감찰어사가 되고, 좌정언 지제고(左正言知制誥)에 제수되었다가, 예부시랑 비서감(禮部侍郞祕書監)까지
지냈다. 맑은 이름과 굳은 절개는 늙어서도 쇠하지를 아니했다. 애초에 박춘령(朴椿齡)이 완산(完山)을 지킬 때,
연구(聯句 몇 사람이 함께 연철(聯綴)해서 시를 완성하는 형식)로써 군동(群童)을 뽑는데, 최척경ㆍ최균(崔均)ㆍ
최송년(崔松年)을 얻었다. 교체되어 돌아갈 때에 함께 데리고 가서 권하여 학문을 시켜, 뒤에 세 사람이 다 명사
(名士)가 되었으니, 당시에 완산 삼최(完山三崔)라 불렀다.
이준양(李俊陽) : 청백함으로 유명하고, 의종(毅宗) 때에 벼슬이 평장사(平章事)에 이르렀다.
최보순(崔甫淳) : 최균(崔均)의 아들인데 벼슬은 평장사, 시호는 문정(文定)이다.
유광식(柳光植) : 풍도와 모습이 매우 크고 청검하고 절약하였으며 신중하고 말이 적었다. 중외(中外)로 여러
직책을 역임하였는데 모두 치적을 올렸다. 고종(高宗) 때에 문하평장사(門下平章事)로 치사하고 소요자적(逍遙
自適)하였는데, 세칭 수부쌍전(壽富雙全)하다고 하였다. 시호는 대숙(戴肅)이다.
유소(柳韶) : 유광식의 아들인데 성품은 강직(剛直)하고 꿋꿋했으며 남을 인정함이 적었고, 집안 살림에 관심을
두지 아니했으며 벼슬은 평장사에 이르렀다.
최성지(崔誠之) : 최보순(崔甫淳)의 4세손이며 충선왕(忠宣王) 때 사람인데, 벼슬은 첨의찬성사(僉議贊成事)
광양군(光陽君)에 이르렀다. 시호는 문간(文簡)이며 성품은 강직하고, 말을 함부로 하지 아니했고 글씨는 매우
반듯하였다. 시(詩)는 온자(溫藉)해서 좋고 음양 술수를 잘했다. 풍헌(風憲)과 어사직(御史職), 선거(選擧)와
이부직(吏部職)ㆍ성관(星官 천문관직(天文官職))ㆍ예원(藝苑 한림원직(翰林院職)) 등을 20년간 역임을 했다.
유방헌(柳邦憲) : 문하평장사(門下平章事)를 지내고 시호는 정간(貞簡)이다.
최득평(崔得枰) : 성품이 염정(廉靜)하고 스스로 지조를 지켜서 사람들이 모두 공경하고 두려워하였다.
벼슬은 이부(吏部)의 전서(典書)로 치사(致仕)하였는데, 충렬(忠烈)ㆍ충선(忠善)ㆍ충숙(忠肅)의 삼조(三朝)를
섬겼다. 그 중에 충선왕이 더욱 중용하였다.
최재(崔宰) : 최득평(崔得枰)의 아들이다. 충숙왕(忠肅王) 때 과거에 급제하였다. 임금이 그가 자기 아버지의 풍
도를 지녔다고 하여, 감찰지평(監察持平)을 제수하였다. 충혜왕(忠惠王)이 즉위한 뒤 면직되었다.
임금이 원 나라로 끌려간 뒤 임금이 설치한 것은 모두 다시 바뀌었는데, 도감(都監)을 세우고 최재(崔宰)를 판관
(判官)으로 삼으니 최재는 탄식하고 말하기를, "임금의 실덕은 임금 자신이 한 것이 아니요, 좌우에서 임금의 과
실을 유도하여 인도한 것이다. 앞에서 맞이하고 뒤에서 맞아 들쳐 올리니, 내가 실로 이것을 부끄러워한다." 하
고 병을 칭탁하고 나오지 아니하였다. 공민왕(恭愍王) 때에 완산군(完山君)으로 봉하고 문정(文貞)이라 시호하
였다.
최용갑(崔龍甲) : 1등으로 뽑혀 급제하였다. 이자을(李資乙) : 1등으로 뽑혀 급제하였다. 최용갑(崔龍甲)과 함께
문명(文名)이 있었다. 이곡(李穀)의 완산도중시(完山途中詩)에, "장원(壯元)한 최(崔)ㆍ이(李)의 재명(才名)이
크고, 경계 머리[界首] 완산(完山)이 전라도에 기상이 웅장하구나. 과객은 신분이 귀한 것을 자랑하지 말라.
공경(公卿)이 이 한 고을에서 많이 나왔네." 하였다.
최칠석(崔七夕) : 장수(將帥)의 재량이 있었다. 이문정(李文挺) : 지순(至順) 경자년 과시에 뽑히어 벼슬은 정당
문학(政堂文學)에 이르렀다. 최부(崔府) : 벼슬은 판서이며, 시호는 정간(靖簡)이다.
이백유(李伯由) : 이문정(李文挺)의 손자인데 개국공신이며, 완성군(完城君)에 봉하였다.
이의손(李義孫) : 과거에 급제하고 벼슬은 이조 참판이며 문명(文名)이 있다.
이사철(李思哲) : 과거에 급제하고 정난공신(靖難功臣)에 들었으며 벼슬은 좌의정이다.
최경지(崔敬止) : 함열(咸悅) 우거(寓居) 편에 보인다.
이경동(李瓊仝) : 이문정(李文挺)의 4대손이며, 임오년 과거에 급제하였고, 중시(重試)와 발영시(拔英試) 과에
도 합격하여 벼슬은 병조 참판까지 이르렀고, 문명(文名)이 높았다.
신증 유헌(柳軒) : 과거에 급제하였고 벼슬은 대사간(大司諫)이었으며 기량(器量)이 있었다.
유숭조(柳崇祖) : 과거에 급제하여 성균관(成均館) 동지(同知)를 지냈다. 경학(經學)에 정통하고 사람을 가르치
는 데 부지런하였다.
효자본조 박진(朴晉) : 아버지가 병이 들자 벼슬을 버리고 돌아가 시중하였는데, 언제나 옆을 떠나지 아니하였
고 밤에도 허리띠를 풀지 아니하였으며, 약을 달이면 꼭 먼저 맛을 보았다. 아버지는 병이 위태하자 시를 지어
박진(朴晉)에게 주어 말하기를, "나이 80에 병상[蟻床]주D-009에 누우니, 육순된 아들이 약을 먼저 맛보네.
사생(死生)은 운명이기에 끝내 피할 수 없으니, 네 어머니 묘 가까이에 수당(壽堂 생존시에 지어 두는 묘)을 세
워 두라." 하였다. 아버지가 작고하자 장례와 제사를 예로써 하고, 묘막에서 3년을 지내니 고을에서 칭송하였다.
태조 7년에 마을에 정문을 세웠으며 벼슬은 지군사(知郡事)를 지냈다.
박유성(朴有誠) : 나이 50세 때에 부모가 죽자 6년간 묘막 생활을 했다. 상을 마친 뒤에는 부모의 형상을 그려 벽
에 붙이고 아침저녁으로 상식을 그치지 아니했다.
성종(成宗) 6년에 이 일이 임금께 알려져 특별히 광흥창(廣興倉) 봉사(奉事)에 제수되었다.
복윤문(卜閏文) : 효행이 있었다.
신증 오영로(吳齡老) : 생원(生員)인데 계모의 상을 입고 기년(期年)에야 비로소 소식(疏食)을 시작했다.
연산(燕山) 때에 아버지가 작고했는데, 그때 단상법(短喪法)이 엄했는데도, 오영로는 오히려 예대로 상을 입었다.
금상 4년에 마을에 정문을 세웠다.
박세직(朴世直) : 생원(生員) 나이 10세에 어머니를 잃고, 3년 동안 슬프게 울었으며, 아버지가 작고해서는 묘막
에서 죽으로 3년상을 마치었다. 금상 23년에 상으로 벼슬을 주었다. 김천동(金千同) : 사노였으며 어머니가 종기
를 앓아 거의 죽게 되었는데 손가락을 잘라 약에 타서 드리니 병이 나았다. 금상 23년에 마을에 정문을 세웠다.
열녀고려 임씨(林氏) : 낙안군사(樂安郡事) 최극부(崔克孚)의 처이며, 왜구가 마을에 쳐들어왔는데, 임씨가 피난
하여 달아나자 왜구가 쫓아와서 욕보이려 하였다. 굳게 항거하니 왜구가 한 팔을 끊었는데 그래도 따르지 아니
했고, 또다시 다른 팔을 끊어도 끝내 따르지 않고 마침내 죽음을 당했다. 그 집과 마을에 정문을 세웠다.
본조 이씨(李氏) : 최이원(崔以源)의 처인데 나이 19세에 남편이 죽었다. 부모가 그 뜻을 뺏고자 하니 이씨는 밤에
시부모 집으로 돌아가버렸다. 부모가 후회하고 개가시킬 것을 포기하였다. 세종 24년에 일이 임금께 알려져서 마
을에 정문을 세웠다.
김씨(金氏) : 박형문(朴衡文)의 처이며 남편이 죽자 3년간 머리를 빗지 아니했다. 조석으로 직접 상식을 올리고
상복을 벗은 뒤에는 시절에 따라 옷을 지어 신주(神主)에 바치었다. 금상 23년에 마을에 정문을 세웠다.
제영 욕방의관비왕사(欲訪衣冠悲往事) : 이색(李穡)의 시에, "견성(甄城)의 경치가 오르기를 권하니, 옛사람을
위무(慰撫)하며 유연히 웃음을 머금도다. 의관을 찾고자 하니 지나간 일들이 슬퍼지고 부질없이 도기(圖記)만을
가지고 옛 궁터를 말하네. 술은 황국(黃菊)에 맑은 서리 내린 후 맛을 다하고, 주렴(珠簾)은 청산(靑山) 낙조(落
照) 사이에 걷혀 있네. 고금(古今)의 영웅이 지나가는 새와 같으니, 피곤하기를 기다리지 말고 돌아갈 줄을 알아
야 하겠네." 하였다.
견훤농병지(甄萱弄兵地) : 정추(鄭樞)의 시에, "중간에 길이 산과 강을 갈라 놓으니, 남주(南州)의 물색(物色)이
구분되었네. 얽힌 소나무는 옛날 역원(驛院)을 알리고, 긴 대나무는 이전의 마을을 표시하고 있네. 말[馬] 그림
자는 거치른 다리에 비치고, 까마귀 소리는 황폐한 절간의 구름 속에서 들리네. 견훤이 군병을 지휘하던 땅, 물
가에 임하여 싸립문이 걸렸네." 하였다.
천년종왕기(千年鍾王氣) : 권근(權近)의 시에, "큰 고을이 남과 북을 갈라 놓으니, 완산(完山)이 가장 특기하도다.
천년의 왕기가 모여 있으니, 일대에 큰 토대를 열었구나." 하였다.
완산거진승남양(完山巨鎭勝南陽) : 설장수(偰長壽)의 시에, "완산(完山)의 거진(巨鎭)은 남양(南陽)에 뛰어나고,
성한 기운이 제향(帝鄕)에 아련하여라." 하였다.
세마기가누근수(洗馬幾家樓近水) : 석선탄(釋禪坦)의 시에, "완산의 4월 완화(浣花) 앞에, 하늘 기운은 사람을
가두어 취한 듯이 잠이 오네. 말을 씻기는 집은 몇 집인고, 누(樓)는 물가에 있는데. 모래 물가에 우는 비둘기, 비
는 촉촉이 내리네." 하였다.
남리임구제효우(南里林鳩啼曉雨) : 성임(成任)의 시에, "남리(南里) 수풀 속 비둘기는 새벽비에 울고, 동풍(東風)
연기 속 버들은 봄 성(城)에 어둡다." 하였다. 압계공업서하산(鴨鷄功業誓河山) : 서거정(徐居正)의 시에, "대세
(大勢)를 반드시 휼방(鷸蚌)의 고사주D-010를 참고로 해서 보아야 하네. 오리와 닭의 공업(功業)주D-11을 산하
(山河)에 맹세하도다. 추풍이 한 번 견훤을 위하여 웃으니, 노발(怒髮)은 무단히 관을 들먹거리는구나." 하였다.
완산가려고명도(浣山佳麗古名都) : 이승소(李承召)의 시에, "완산은 곱고 새뜻하니 옛날의 명도(名都)로다.
용호(龍虎)가 서리고 걸터앉은 듯 울성하게 얽혀 있네. 정령(精靈)이 쌓여 지키고 도우니, 기운(氣運)도 아름다
워라. 때에 발설하니 바른 부서(符瑞) 이루었네. 국조의 근원이 이곳에서 비롯되니, 대대로 맑은 덕음(德陰)이
동우(東隅)에 덮였어라. 신풍(新豐)주D-12 계견(鷄犬)을 어찌 족히 비기리요. 충후(忠厚)는 빈풍(豳風)과 다를
것이 없도다." 하였다.
[비고]
방면
부동(府東) : 끝이 5리이다. 부서(府西) : 끝이 5리이다. 부남(府南) : 끝이 10리이다.
부북(府北) : 끝이 7리이다. 봉상(鳳翔) : 동북쪽으로 처음이 3리, 끝이 40리이다.
귀이동(龜耳洞) : 남쪽으로 처음이 30리, 끝이 50리이다.
우림곡(雨林谷) : 서남쪽으로 처음이 10리, 끝이 20리이다.
조촌(助村) : 북쪽으로 처음이 10리, 끝이 20리이다.
양량소(陽良所) : 원래의 양량소는 북쪽에 있으며, 처음이 1백 10리이고, 끝이 1백 30리이다.
연산(連山) 남쪽이고, 진산(珍山)의 서쪽이며, 고산(高山)의 북쪽이고, 은진(恩津)의 동쪽에 있다.
초곡(草谷) : 동북쪽으로 처음이 10리, 끝이 20리이다. 소양(所陽) : 동쪽으로 처음이 20리, 끝이 60리이다.
완전(薍田) : 남쪽으로 처음이 10리, 끝이 25리이다. 전포(田浦) : 북쪽으로 처음이 20리, 끝이 25리이다.
용진(龍進) : 동쪽으로 처음이 10리, 끝이 30리이다. 상관(上關) : 동쪽으로 처음이 15리, 끝이 50리이다.
오백조(五百條) : 북쪽으로 처음이 25리, 끝이 35리이다. 우동(紆東) : 북쪽으로 처음이 30리, 끝이 50리이다.
우서(紆西) : 북쪽으로 처음이 30리, 끝이 35리이다. 우북(紆北) : 북쪽으로 처음이 50리, 끝이 60리이다.
위의 3면은 우주(紆州)이다.
이동(伊東) : 북쪽으로 처음이 20리, 끝이 25리이다. 이남(伊南) : 서남쪽으로 처음이 20리, 끝이 30리이다.
이서(伊西) : 서쪽으로 처음이 30리, 끝이 35리이다. 이북(伊北) : 서쪽으로 처음이 20리, 끝이 30리이다.
위의 4면은 이성(伊城) 땅이다.
이동(利東) : 서쪽으로 처음이 50리, 끝이 60리이다. 이서(利西) : 서쪽으로 처음이 50리, 끝이 80리이다.
이북(利北) : 서쪽으로 처음이 20리, 끝이 30리이다. 위 3면은 이성(利城) 땅이다.
동일도(東一道) : 서북쪽으로 처음이 30리, 끝이 50리이다.
서일도(西一道) : 서북쪽으로 처음이 50리, 끝이 60리이다. 남일도 : 서북쪽으로 처음이 40리, 끝이 50리이다.
남이도(南二道) : 서북쪽으로 처음이 50리, 끝이 70리이다.
북일도(北一道) : 서북쪽으로 처음이 50리, 끝이 60리이다.
북이도(北二道) : 서북쪽으로 처음이 60리, 끝이 80리이다.
위의 6면은 옥야(沃野) 땅이다.
○ 이성(利城) 3면은 동쪽으로 익산(益山)과 접하고, 남쪽으로는 김제(金堤)ㆍ만경(萬頃)과 접하며, 서쪽으로는
임피(臨陂)와 접하고, 북쪽으로는 함열(咸悅)과 접한다.
○ 옥야(沃野) 6면은 남쪽으로 사수(泗水)와 연하고, 서쪽으로는 김제(金堤)와 접한다.
낭산(朗山) : 서북쪽으로 처음이 20리, 끝이 35리이다. 귀산(歸山) : 서남쪽으로 처음이 20리, 끝이 40리이다.
○ 경명향(景明鄕)ㆍ북일백(北一百)ㆍ두모촌(豆毛村)은 이성(利城) 땅이다.
창고 창고(倉庫)가 3곳이 있다 : 본읍. 고(庫)가 10곳이 있다 : 감영(監營)이 성내에 있다.
옥야창(沃野倉) : 서쪽으로 70리이다. 이성창(利城倉) : 서쪽으로 60리이다.
우주창(紆州倉) : 북쪽으로 10리이다. 봉익창(鳳翔倉) : 동리쪽으로 40리이다.
외성창(外城倉) : 동쪽으로 30리이다.
내성창(內城倉) : 위봉산성(威鳳山城)에 있다. 양량소창(陽良所倉) : 동북쪽으로 1백 20리에 있다.
진도 신창진(新倉津) : 서쪽 70리에 있으며, 김제(金堤)와는 남쪽으로 20리 거리이다.
사천진(沙川津) : 횡탄(橫灘) 아래쪽에 있다.
토산 대[竹]ㆍ감ㆍ붕어ㆍ게.
누정 호경루(護慶樓) : 남천(南川) 곁에 있다. 큰 시내가 누정 밑을 둘러 흐르고, 동남쪽으로는 푸른 산이 둘러
있다. 만화루(萬化樓) : 위와 같다. 매월정(梅月亭) : 객관(客館) 동쪽에 있다.
궁실 조경묘(肇慶廟) : 부성(府城)의 동문(東門) 안 경기전(慶基殿) 북쪽에 있다. 영종(英宗) 47년에 세웠다.
이조(李朝)의 시조(始祖) 위판(位版)을 봉안하고 있다 : 성은 이씨이고 휘는 한(翰)이며, 신라 때 벼슬은 사공
(司空)이다. 배필은 김씨로 군윤(軍尹) 은의(殷義)의 딸인데, 신라 태종(太宗)의 10세 손이다. 봄과 가을에 상삭
(上朔)에서 상순(上旬) 사이에 날을 택하여 제사를 지낸다.
○ 영(令) ㆍ별검(別檢)이 각 1명이다.
사원 화산서원(華山書院) : 선조 무인년에 세우고, 효종 무술년에 사액했다.
이언적(李彦迪) : 문묘(文廟) 편에 보인다. 송인수(宋麟壽) : 청주(淸州) 편에 보인다.
[주 D-001] 풍패(豐沛) : 풍패(豐沛)는 한 고조(漢高祖)의 고향이다.
여기서는 태조(太祖)의 선대가 전주 이씨(全州李氏)이기 때문이다.
[주 D-002] 예를 행하는 자가 들에서 일을 도모한다는 탄식이 있게 되었다. :
《좌전(左傳)》에, "정국(鄭國)에 큰일이 있으면 자피(子皮)를 싣고 들에 가서 모의한다." 하였다.
[주 D-03] 태빈(邰豳) : 주(周)의 선대가 일어난 땅이다.
[주 D-04] 주의 태왕이 빈(邠)을 떠난 때이다. : 주 문왕(周文王)의 조부 태왕(太王)이 침략하는 적인(狄人)을
피하여 도읍지인 빈(邠)을 버리고 기산(岐山)으로 옮겨가매 백성들이 따라갔다.
[주 D-005] 사환(賜環) : 옛날에 신하가 임금에게 쫓겨났을 때에 구경에 가서 처분을 기다렸는데,
임금이 결(訣)을 주면 돌아오지 말라는 것이요, 환(還)을 주면 돌아오라는 뜻이다.
[주 D-06] 전장(轉藏) : 불교의 장경(藏經)을 독송강설(讀訟講說)하는 것이다.
[주 D-007] 원공(遠公)은 시냇물을 건너지 마소. : 동진(東晉)의 중 혜원(慧遠)이 여산(廬山)에 있으면서 손을
전송할 때에 호계(虎溪)를 넘지 않았는데 한 번은 도연명(陶淵明) 육수정(陸修靜)을 전송하면서 이야기하다가
저도 모르게 호계를 넘었다.
[주 D-008] 유애(遺愛) : 그 사람이 간 뒤에도 백성에게 대한 사랑이 백성의 마음에 남아 있어 잊지 않는 것이다.
[주 D-009] 병상[蟻床] : 진(晉) 나라 은중감(殷仲堪)의 아버지가 마음에 병이 있어, 평상 밑에 개미들 싸우는
것이 마치 소싸움[鬪牛]하는 것처럼 들렸다 한다.
[주 D-010] 휼방(鷸蚌)의 고사 : 휼새[鷸]가 조개[蚌]를 쪼아 먹으려고 조개의 벌린 껍질 속에 입을 넣었다가,
서로 버티는 동안에 어부(漁父)가 두 마리를 한꺼번에 잡아갔다는 것이다.
[주 D-11] 오리와 닭의 공업(功業) : 태봉(泰封) 말기의 참서(讖書)에, "먼저 닭을 잡고 뒤에 오리를 친다."
하였는데, 과연 고려 태조가 계림(鷄林 : 신라)을 먼저 얻고 뒤에 압록강(鴨綠江)까지 국경을 개척하였다.
[주 D-12] 신풍(新豐) : 풍(豐)은 한 고조의 고향으로, 한(漢)의 고조가 천하를 통일한 후 성과 거리의 모양을
풍(豐) 땅과 같이 만들어 놓고 풍 땅의 백성을 이곳에 이주시키고 신풍(新豐)이라 하였다.
익산군 益山郡
동으로 여산군(礪山郡) 경계까지 10리, 북으로 여산군 경계까지 19리,
남으로 전주부(全州府) 경계까지 17리, 서쪽으로 함열현(咸悅縣) 경계까지 22리, 서울로부터 4백 68리이다.
건치연혁 본래 마한국(馬韓國)이다 : 후조선(後朝鮮)의 임금 기준(箕準)은 기자의 41대 손인데,
위만(衛滿)의 난을 피하여 바다에 떠서 남으로 내려가,
한지(韓地)에 가서 나라를 세우고 마한(馬韓)이라 하였다. 백제의 시조 온조왕(溫祚王)이 이곳을 병합하고,
이후부터 금마저(金馬渚)라 불렀다.
신라의 신문왕(神文王)이 금마군(金馬郡)으로 고치고, 고려조에 와서 전주(全州)에 부속시켰다.
충혜왕(忠惠王) 뒤 5년에 원(元) 나라 순제(順帝)의 황후 기씨(寄氏)의 외향(外鄕)이라 하여,
승격시켜 익주(益州)라 하였는데, 본조 태종(太宗) 13년에 지금의 이름으로 고치고 군으로 만들었다.
관원 군수ㆍ훈도(訓導) : 각 1명이다.
군명 금마(金馬)ㆍ익주(益州)
풍속 생민이 후박하다 : 박초(朴礎)의 시에, "생민이 후박하니 마한(馬韓)의 풍속이다." 하였다.
성씨본군 김(金)ㆍ한(韓)ㆍ송(宋)ㆍ이(李)ㆍ황(黃)ㆍ임(林)ㆍ구(仇). 흑석(黑石) 이ㆍ구ㆍ김.
산천
건자산(乾子山) : 군(郡)의 북쪽 1리에 있는데 진산(鎭山)이다.
도순산(都順山) : 속칭 시다산(施茶山)이라 하는데, 군의 동쪽 5리에 있다.
당산(唐山) : 군의 서쪽 10리에 있다. 산에는 밤이 산출되는데 1년에 세 번 열린다. 그러나 딴 곳에 옮겨 심으면
나지 않는다.
용화산(龍華山) : 군의 북쪽 8리에 있는데, 일명 미륵산(彌勒山)이라고도 한다.
장군봉(將軍峯) : 용화산 남쪽에 있다. 바위 위에 구멍이 있는데 기름 몇 십 말을 담을 수가 있어 속칭 등잔암
(燈盞巖)이라 한다.
춘포(春浦) : 군의 남쪽 15리에 있다. 용화산(龍華山)에서 나와 전주의 신창진(新倉津)으로 들어간다.
왕궁정(王宮井) : 군의 남쪽 5리에 있다. 세상에 전하기를, "옛날 궁궐터이다."라고 한다.
마룡지(馬龍池) : 오금사(五金寺) 남쪽 백여 보(步) 되는 자리에 있다. 세상에 전하기를, "서동대왕(薯童大王)의
어머니가 축실(築室)하였던 곳이다." 한다. 상시연(上矢淵) : 군의 서쪽 17리에 있다.
토산 대나무ㆍ붕어ㆍ생강.
누정
청심루(淸心樓) : 객관(客館)의 동쪽에 있다.
송을개(宋乙開)의 기문에, "금마군(金馬郡)은 옛날 무강왕(武康王)이 칭왕(稱王)한 땅이다.
산천은 그 옛날과 같고 탑과 묘(廟)가 완연하니, 천년이 지난 오늘에도 웅장한 풍도가 장열하였음을 짐작할 만하
도다. 국조(國朝)에 와서 병자년에 무진(茂珍) 노상군(盧相君)이 이 고을을 지켰는데, 처음으로 누각을 객관 동쪽
에 세웠다. 오랜 세월에 기울고 헐었는데, 무진년 봄에 밀양(密陽) 손후(孫侯)가 군수로 와서, 노는 사람을 불러
모으고 재목을 마련하고 기와를 구워 새로 단장을 하였다. 단청(丹靑)을 칠하고 2개월 만에 완성을 보았다.
생각하니, 어진 수령 손후여, 관에서 이 역사를 하는데 백성이 모르고, 위에서 가진 마음 아래에서 서로 도와,
재력이 관청에서 나오지 않아도 일하는 사람이 배부르며, 역사는 대중이 하지 않고도 공사가 완성되니, 이 도리
를 미루어 모든 일을 펴 나가면, 무슨 일인들 인(仁)에 어긋나리요." 하였다.
학교 향교(鄕校) : 군의 동쪽 5리에 있다.
사원 흑석원(黑石院) : 흑석 부곡에 있다.
불우 미륵사(彌勒寺) : 용화산(龍華山)에 있다. 세상에 전하기를, "무강왕(武康王)이 인심을 얻어 마한국을 세우
고, 하루는 선화부인(善花夫人)과 함께 사자사(獅子寺)에 가고자 산 아래 큰 못가에 이르렀는데, 세 미륵불이 못
속에서 나왔다. 부인이 임금께 아뢰어 이곳에 절을 짓기를 원하였다. 임금이 허락하고 지명법사(知命法師)에게
가서 못을 메울 방술을 물었더니, 법사가 신력으로 하룻밤 사이에 산으로 못을 메워 이에 불전을 창건하고 또 세
미륵상을 만들었다. 신라 진평왕(眞平王)이 백공(百工)을 보내어 도왔는데, 석탑(石塔)이 매우 커서 높이가 여러
길이나 되어 동방의 석탑 중에 가장 큰 것이다." 하였다.
○ 권근(權近)의 시에, "창 밖 청산을 깎아 만든 것 같은데, 근심이 있을 때 눈을 들어 바라보니 더욱 분명하구나.
가을 바람이 날로 두건과 지팡이에 불어오니, 높은 산에 올라 서울을 바라볼까 하노라." 하였다.
사자암 : 용화산 위에 있다. 두 바위가 벽처럼 솟아 있는데 내려다보면 땅이 보이지 않는다. 돌길이 갈퀴처럼 걸
려 있는데, 부여잡고 올라가면 바로 지명법사가 거주하는 곳이다.
사원사(上院寺) : 용화산에 있다. 오금사(五金寺) : 보덕성(報德城) 남쪽에 있다. 세상에 전하기를, "서동(薯童)이
어머니를 지성으로 섬겼는데, 마를 캐던 땅에서 갑자기 오금(五金)을 얻었다. 뒤에 그는 임금이 되어 그 땅에 절
을 짓고 오금사라 하였다." 하였다.
사묘 사직단(社稷壇) : 군의 서쪽 1리에 있다. 문묘(文廟) : 향교에 있다. 성황사(城隍祠)ㆍ
여단(厲壇) : 모두 군의 북쪽 1리에 있다.
고적
쌍릉(雙陵) : 오금사(五金寺) 봉우리의 서쪽 수백 보 되는 곳에 있다.
《고려사》에는 후조선(後朝鮮) 무강왕(武康王) 및 비(妃)의 능이라 하였다. 속칭 말통대왕릉(末通大王陵)이라
한다. 일설에 백제 무왕(武王)의 어릴 때 이름이 서동(薯童)인데, 말통(末通)은 즉 서동(薯童)이 변한 것이라고
한다. 금마산(金馬山) : 견훤(甄萱)의 말에, "옛날에 마한(馬韓)이 먼저 일어나 대대로 발흥하였고, 진한과 변한
이 뒤이어 일어났다. 이에 백제가 금마산에 개국한 지 6백여 년이 된다." 하였다.
○ 이제 생각하건대, 온조(溫祚)가 마한을 병합한 뒤 그 땅을 금마저(金馬渚)라 부르고, 금마산(金馬山)이라 부
르지는 아니했다. 또 금마군은 백제의 서울이 된 일은 없다. 진훤의 말의 근거를 알 수가 없다.
기준성(箕準城) : 용화산(龍華山) 위에 있다. 세상에 전하기를 기준(箕準)이 쌓은 것이기 때문에 그 이름을 땄다
고 한다. 석축 둘레는 3천 9백 자이고 높이는 8자이다. 시내와 우물이 있다.
보덕성(報德城) : 군의 서쪽 1리에 있는데 유지(瀢址)가 남아 있을 뿐이다. 고구려가 당 나라에 망한 뒤,
대형(大兄) 검모잠(劍牟岑)은 고구려의 부흥을 도모하여 잔민을 모아 패강(浿江 대동강)에 이르러 당 나라의 관
리를 죽이고 신라로 향하였다. 서해(西海)의 사야도(史冶島)에 이르러 종실(宗室) 안승(安勝)을 만나 그를 받들
고, 한성(漢城)에 와서 임금으로 삼고 소형(小兄) 다식(多式) 등을 신라에 보내어 고하기를, "우리의 선왕 장왕
(臧王)께서 실도(失道)하여 나라를 잃었으나, 이제 신 등이 나라의 귀족인 안승을 맞아 군(君)으로 삼았으니,
원컨대 신라의 울타리가 되고자 하나이다." 하였다. 신라의 문무왕(文武王)은 안승을 금마저(金馬渚)에 거주하
게 하고, 보덕왕(報德王)을 봉했으며 형의 딸을 처로 삼게 하였다. 그 뒤 신문왕(神文王)은 안승을 소판(蘇判)으
로 삼았다. 그의 족자(族子) 대문(大文)이 금마저에 머물러 있었는데 모반했다가 죽임을 당하고, 나머지 무리가
관리들을 죽이고 보덕성에 근거로 또 반역하였으나, 임금은 장사(將士)를 보내어 토벌하여 죽이고 그 사람들은
남쪽의 주와 군에 옮기게 하고, 그곳을 금마군(金馬郡)으로 삼았다.
흑석 부곡(黑石部曲) : 군의 남쪽 15리에 있다. 석장동(石檣洞) : 군의 서쪽 10리에 있다. 산기슭에 고사(古寺)의
유지(遺址)가 있고, 돌 돛대가 높이 세워 있는데, 높이가 두 길이나 된다. 속칭 그 마을을 석장동이라 한다.
전대(前代)에 주와 현에 혹 동(銅)이나 돌로 돛대의 모양을 만들어, 지기(地氣)를 누른 것이 곳곳에 있는데,
지금도 그 중에 하나이다.
사교원(蛇橋院) : 군의 서쪽 19리에 있는데, 지금은 폐하고 없다.
명환
본조 진의귀(陳義貴) : 정치를 잘하여 명망이 있었다.
노귀상(盧龜祥) : 송사(訟事)를 처리하는 데에 과단성이 있었다.
최덕지(崔德之) : 행실은 검소하고 절약하며 일처리는 자상하고 분명하였다.
인물
고려 이주(李湊) : 고종(高宗) 때에 과거에 급제하여 벼슬은 한림학사승지까지 지냈다. 성품이 온순하며 문장을
잘 지었고 글씨를 잘 썼다. 평생 동안 살림을 몰랐으니, 집안에는 저축이란 조금도 없었다.
이행검(李行儉) : 이주의 아들인데 충렬왕(忠烈王) 때 과거에 급제하였다. 전법랑(典法郞) 벼슬을 지냈으며 정
화원주(貞和院主)가 평민을 노예로 삼았다. 그 평민이 고소를 하니, 동료가 권세가의 압력을 받고 법을 굽히려
하였지만. 이행검이 한사코 불가함을 주장하였다. 마침 병에 걸려 휴가중이었는데 동료들은 다행으로 여기고
일을 처결해 버렸다. 어떤 사람이 꿈을 꾸니 날카로운 칼이 하늘에서 내려와 형부(刑部)의 관리들을 죽이는 것
을 보았다. 얼마 되지 않아서 형부의 관리들은 모두 폭사하거나 병사하였는데 유독 이행검만이 무고하였다.
벼슬은 국자전주(國子典酒)까지 지냈다.
이공수(李公遂) : 이행검의 손자인데, 감찰규정(監察糾正)으로서 과시(科試)에 수석으로 뽑히었다.
공민왕(恭愍王) 때 익산부원군(益山府院君)에 봉작되었다. 원 나라는 임금을 폐위시키고 덕흥군(德興君)을 세
웠는데, 이공수가 사신으로 원 나라에 들어가 서경(西京)에 이르러서, 태조(太祖)의 원묘(原廟 정묘(正廟) 이외
에 다시 세운 묘)에 배알하고 맹세하여 말하기를, "우리 임금이 다시 복위하지 않으면, 신은 죽어도 다시 돌아가
지 아니하겠습니다." 하였다. 영도첨의(領都僉議)에 제수받고, 추충수의동덕찬화공신(推忠守義同德贊化功臣)
의 호를 받았다. 별장을 덕수현(德水縣)에 마련하고 자칭 남촌선생(南村先生)이라 하였고, 공민왕묘(恭愍王廟)
에 배향되었다.
유우본조 권근(權近) : 귀양살면서 〈입학도설(入學圖說)〉을 지었다.
열녀본조 구씨(仇氏) : 조민(曹敏)의 처인데 나이 15세에 조씨 가문에 시집갔다가 일찍 과부가 되었는데, 다시
개가하지 않기를 맹세하고 머리를 깎고 중이 되었다. 남편의 모습을 그려 벽에 걸고 의복을 늘어놓고 밤마다 애
통하였으며 조석으로 상식을 올렸다. 출입할 때에는 반드시 고(告)하였고, 시식(時食)을 반드시 바쳤다. 채소와
국을 먹지 아니하였고, 좋은 옷을 입지 아니하였으며, 소복(素服)으로 일생을 마쳤다. 성종(成宗) 2년에 임금에
게 알려져 쌀을 주고 정문을 세웠다. 오씨(吳氏) : 지삼근(池三近)의 처인데 남편이 죽고 3년간 묘막 생활을 하
였는데, 직접 조석으로 상식을 올리며 슬피 곡(哭)하니 듣는 자가 탄복하였다.
제영 기랑자복경무성(箕郞雌伏竟無成) : 성임(成任)의 시에, "기랑(箕郞)은 움츠리고 끝내 성취 없었네. 강한 것
이 약한 것을 병합함은 이치에 분명한 일. 당시 휘하의 장사 생각해보니, 그 몇 사람이 고개 돌려 서경(西京)을
생각했으랴." 하였다.
상마사야춘(桑麻四野春) : 권근(權近)의 시에, 전쟁을 하던 곳 천년 뒤 오늘, 사방에는 뽕과 삼이 봄을 맞았네."
하였다.
마한문물구성공(馬韓文物久成空) : 송을개(宋乙開)의 시에, "완부(完府)의 판도가 통일이 되니, 마한의 문물이
오래토록 공허하네." 하였다.
백년무어련금마(百年無語憐金馬) : 서거정(徐居正)의 시에, "남호(南湖)는 희고 흰데, 익산(益山)은 푸르구나.
지난 일은 희미한 한 자리의 꿈. 백제(百濟)의 유허(遺墟)에는 고목이 공적하고, 기준(箕準)의 옛 궁터엔 석양이
비꼈구나. 백년이나 말이 없으니 가련하다 금마(金馬)여, 만고에 다정(多情)하여 석양(石羊)을 기억하네.
백발되어 원유(遠遊)하니 강개가 많고, 등림(登臨)하니 신상(神傷)하지 않는 곳이 없구나." 하였다.
[비고]
연혁 본래는 백제의 금마지(金馬只)인데, 무강왕(武康王) 때에 성을 쌓고, 별도(別都)를 두어 금마저(金馬渚)라
칭했다.
방면 군내(郡內) : 동쪽으로 끝이 3리이다. 제석(帝釋) : 동쪽으로 처음이 5리, 끝이 15리이다.
춘포(春浦) : 남쪽으로 처음이 20리, 끝이 30리이다.
두촌(豆村)ㆍ두천(豆川)ㆍ지석(支石) : 모두 서쪽으로 처음이 10리, 끝이 20리이다.
사제(蛇梯) : 서쪽으로 처음이 15리, 끝이 20리이다.
율촌(栗村) : 서쪽으로 처음이 20리, 끝이 25리이다. 구문천(九文川) : 서북쪽으로 처음이 15리, 끝이 25리이다.
미륵(彌勒) : 북쪽으로 처음이 7리, 끝이 20리이다. ○ 흑석 부곡(黑石部曲) : 남쪽으로 15리이다.
교량 상한교(上漢橋)ㆍ하한교(下漢橋) : 모두 남천(南川)에 있다.
입석교(立石橋) : 춘포(春浦)와 김제(金提) 길에 있다.
면천교(綿川橋) : 서쪽으로 함열(咸悅)과 통하는 길에 있다.
토산 닥나무[楮]ㆍ게ㆍ뱅어ㆍ삼률(三栗).
사원 화산서원(華山書院) : 효종 갑오년에 세웠고 현종 임인년에 사액(賜額)하였다.
김장생(金長生)ㆍ송시열 : 모두 문묘 편에 보인다.
김제군 金堤郡
동으로 금구현(金溝縣)경계까지 14리, 남으로 태인현(泰仁縣) 경계까지 22리,
서쪽으로 부안현(扶安縣) 경계까지 26리, 만경현(萬頃縣)경계까지 13리,
북으로 만경현(萬頃縣) 경계까지 18리, 서울까지의 거리는 5백 41리이다.
건치연혁 본래 백제의 벽골군(碧骨郡)인데 신라 때에 지금의 이름으로 고쳤다.
고려 초에 전주(全州)의 속현(屬縣)이 되었다가, 인종(仁宗) 21년에는 현령을 두었다.
본조(本朝) 태종(太宗) 3년에 본현 출신인 명(明) 나라 환자(宦者) 한첩목아(韓帖木兒)의 요청으로 군(郡)으로
승격시켰다.
관원 군수(郡守)ㆍ훈도(訓導) : 각 1명이다.
군명 벽골(碧骨).
성씨본군 김(金)ㆍ장(張)ㆍ조(趙)ㆍ염(廉)ㆍ구(仇)ㆍ최(崔)ㆍ이(李)ㆍ조(趙)ㆍ신(申) : 모두 다른 곳에서 이주해
왔다. 평고(平皐) 이(李)ㆍ곽(郭)ㆍ온(溫)ㆍ오(吳)ㆍ문(文)ㆍ여(呂)ㆍ김 : 와서 붙었다. 신(申) : 다른 곳에서 왔
다.
마천(馬川) 윤(尹). 재남(才南) 이(李). 명랑(鳴良) 구(仇). 제견(堤見) 구(仇).
풍속 인심이 순후하고 농사일에 부지런하였다.
산천 명량산(鳴良山) : 명량향(鳴良鄕)에 있는데, 고봉(孤峯)이 높이 솟아 있고, 그 아래로 동진강(東津江)이 흐른다. 승가산(僧伽山) : 군의 동북쪽 10리에 있다. 오적죽산(吾赤竹山) : 군의 서쪽 15리에 있다.
대평(大坪) : 속칭 김제(金提) 만경평(萬頃坪)이라 한다. 동쪽은 전주(全州), 남쪽은 태인(泰仁), 북쪽은 신창진
(新倉津), 서쪽은 동진(東津)과 접해 있다.
회연(廻淵) : 군의 동쪽 30리에 있는데, 옛날 병영(兵營) 터가 있다.
장신포(長信浦) : 회연(廻淵) 서쪽 5리에 있다. 신창진(新倉津) : 마천소(馬川所)에 있다. 전주부(全州府) 편에
보인다. 동진(東津) : 군의 서쪽 25리에 있는데 부안현(扶安縣) 편에 자세하다.
대제(大湜) : 군의 서쪽 1리에 있는데, 둘레가 1만 3천 34자이다. 내소제지(乃所梯池) : 군의 북쪽 5리에 있다.
토산 마름[菱]ㆍ가시연[芡]ㆍ연(蓮)ㆍ붕어ㆍ모시ㆍ순채나물[蓴].
누정 문명루(文明樓) : 바로 군의 남문루(南門樓). 신증 자민루(字民樓) : 군의 서쪽 1리에 있다.
학교 향교(鄕校) : 군의 북쪽 1리에 있다.
역원 내재역(內才驛) : 군의 서남쪽 15리에 있다. 동원(東院) : 군의 동쪽 2리에 있다.
불우 흥복사(興福寺) : 승가산에 있다.
사묘 사직단 : 군의 서쪽 3리에 있다. 문묘 : 향교에 있다. 성황사 : 군의 동쪽 2리에 있다.
여단 : 군의 북쪽 3리에 있다.
고적 평고 폐현(平皐廢縣) : 군의 동쪽 25리에 있다. 본래는 백제의 수동산현(首冬山縣)인데,
신라가 지금 이름으로 고치고 내속시키었다. 고려 초에 전주(全州)에 소속시켰다가 뒤에 다시 내속시켰다.
명량현(鳴良縣) : 군의 서쪽 20리에 있다. 제견향(堤見鄕) : 군의 남쪽 10리에 있다.
○ 윤회(尹淮)의 지지(地志) 및 전라도 관풍안(觀風案)에는 전주(全州)ㆍ태인(泰仁)ㆍ임피(臨陂)도 또한 제견향
에 실려 있으니, 생각건대, 벽골제(碧骨堤)에 가까운 땅은 다 제견(堤見)이라 불렀으리라. 그러나 상고할 바가
없다.
마천소(馬川所) : 군의 북쪽 20리에 있다. 재남소(才南所) : 군의 동쪽 30리에 있다.
벽골제(碧骨堤) : 군의 남쪽 15리에 있다. 물의 근원은 셋이 있는데, 하나는 금구현(金構縣) 무악산(毋岳山)의
남쪽에서 나오고, 하나는 무악산의 북쪽에서 나오며, 하나는 태인현(泰仁縣)의 상두산(象頭山)에서 나와 벽골제
에서 같이 만나 고부군(古阜郡)의 눌제수(訥堤水)와 동진(東津)에서 합치고, 만경현(萬頃縣)의 남쪽을 경유하여
바다로 들어간다.
○ 신라 흘해왕(訖解王) 21년에 처음 둑을 쌓았는데, 길이가 1천 8백 보나 된다. 고려 시대에 와서 다시 수축하였
다가 후에 폐지하였고, 본조(本朝)에서는 태종(太宗) 15년에 박희중(朴熙中)을 보내어 관찰사 박습(朴習)과 더불
어 다시 중수하도록 하였는데 또한 지금은 폐지하였다.
○ 중수비(重修碑)에, "군의 남쪽 15리쯤 큰 둑이 있는데, 그 이름은 벽골(碧骨)이다. 이는 옛사람이 김제(金堤)의
옛이름을 들어서 이름을 붙인 것인데, 군도 역시 이 둑을 쌓게 됨으로 말미암아 지금의 이름으로 고친 것이다.
둑의 길이는 6만 8백 43자이고, 둑 안의 둘레는 7만 7천 4백 6보이다. 다섯 개의 도랑을 파서 논에 물을 대는데,
논은 무릇 9천 8백 40결(結) 95 복(卜)이라 하니, 고적(古籍)에 적혀 있다. 그 첫째 도랑을 수여거(水餘渠)라고
하는데, 한 줄기 물이 만경현(萬頃縣)의 남쪽에 이르고, 둘째 고랑을 장생거(長生渠)라고 하는데, 두 줄기 물이
만경현의 서쪽 윤부(潤富)의 근원에 이르며, 셋째 도랑을 중심거(中心渠)라고 하는데, 한 줄기의 물이 고부(古阜)
의 북쪽 부령(扶寧)의 동쪽에 이르고, 넷째 도랑을 경장거(經藏渠)라 하고, 다섯째 도랑을 유통거(流通渠)라고 하
는데, 둘 다 한 줄기 물이 인의현(仁義縣)의 서쪽으로 흘러 들어간다.
다섯 도랑이 물을 대는 땅은 모두가 비옥하였는데, 이 둑은 신라와 백제로부터 백성에게 이익을 주었다.
고려 현종(顯宗) 때에 와서 옛날 모습으로 보수하였고, 인종(仁宗) 21년 계해년에 와서 증수(增修)하였는데,
끝내 폐기하게 되니 아는 이들이 이를 한탄하였다.
하늘이 우리의 국조를 열어 성군이 태어나니, 힘써 다스려서 태평 세월을 성취하기를 도모하였다. 이에 대신들
에게 명하여 사방을 순시하고, 제방(堤防)을 완비하며 관개(灌漑)를 잘 통하게 하였다.
을미년 봄에 판상주(判尙州) 이발(李發) 공(公)을 명하여 도안무사(都安撫使)로 삼으니, 이공이 처음으로 벽골
(碧骨)에 와서 이것을 보수하고자 하였으나, 일이 번거롭고 바빠서 시작하지 못하였다.
도관찰출척사(都觀察黜陟使) 함양(咸陽) 박습(朴習) 공과 경력(經歷) 권전(權專) 군(君)과, 경차관(敬差官) 희중
(凞中)이 모두 여기에 와서 공사의 어렵고 쉬운 것을 고찰하여 자세한 내용을 보고하니, 드디어 임금이 허가를
하였다. 각 군의 장정 총 1만 명과 일을 처리하는 사람 3백 명을 증발하고, 옥구진 병마사(沃溝鎭兵馬使) 김훈
(金訓) 군(君)과 지김제군사(知金提郡事) 김방(金倣) 군을 시켜 감독하게 하니, 이해 9월 갑인일에 공역을 시작
하여 10월 정축일에 완성하였다. 둑의 북쪽에는 대극포(大極浦)가 있는데, 조수가 몹시 격하며,
남쪽에는 양지교(楊枝橋)가 있는데, 물이 깊게 고여 있어서 공사하기가 무척 힘이 들어, 옛부터 어려운 공사였
다. 이제 먼저 대극포의 조수가 치는 곳에 방축을 쌓아 그 기세를 죽이고, 다음으로는 아름드리 나무를 양지교
(楊枝橋)의 물이 고여 웅덩이가 된 곳에 세워서 기둥을 만들고, 나무다리를 만들어 다섯 겹으로 목책(木柵)을 막
아서 흙을 메우고, 또 제방 무너진 곳에 흙을 쌓아 편평하게 하며, 제방의 내외로는 버들을 두 줄로 심어서 그 기
반을 단단하게 하였으니, 둑의 아래 넓이는 70자요, 위의 넓이는 30자이며, 높이가 17자이고, 수문은 마치 구룡
(丘壟)처럼 바라보였다. 또 장생(長生)ㆍ중심(中心)ㆍ경장(經藏)의 세 수문의 옛날 돌기둥을 보수하였고,
수여(水餘)와 유통(流通)의 두 수문은 돌을 쪼개어 주춧돌로 삼고, 느티나무 기둥을 세웠다.
또 양쪽의 석주심(石柱心)이 움푹 들어간 곳에는 느티나무 판을 가로질러서, 내외로 고리와 쇠줄을 달아 나무판
을 들어올리면 물이 흐르도록 하였으니, 수문의 넓이는 모두가 13자이요, 돌기둥의 높이는 15자이며, 땅 속으로
5자나 들어가 있다. 또 아래의 석봉(石縫)은 쇠를 녹여 땜질을 해서 단단하게 하고, 다시 안쪽의 물을 막고 있는
언덕도 보수하였다. 수여(水餘)와 유통(流通)의 두 수문은 파도가 치는 곳은 아니지만, 만약 물이 범람하여 이곳
으로 새어 흐르면 물을 막을 수가 없게 된다. 그러므로 두 수문의 양쪽에다 돌을 깎아 주춧돌로 삼아서, 그 위의
느티나무 판으로 다리를 만들어 왕래하도록 하였다.
이것이 벽골제의 대략이니 때는 영락(永樂) 13년이다." 하였다.
용두동(龍頭洞) : 군의 남쪽 2리에 있는데, 조간(趙簡)이 살던 곳이다. 전하는 말에, "조간은 태어나면서 양쪽 어
깨에 용의 비늘이 있었는데 바로 벽골제의 용정(龍精)이라고 하였다. 그가 군의 낮은 관리가 되었는데 하루는
괴수(槐樹) 나무에 올라갔더니, 읍재(邑宰)가 낮잠을 자다 꿈에 나무 위에 쌍룡이 얽혀 있는 것을 보았다.
꿈을 깬 뒤 사람을 시켜 사실을 알아본 뒤에, 즉시 공부를 시켜 후에 과거시험에 1등으로 급제하게 되었는데,
그가 살던 곳을 용두동(龍頭洞)이라 한 것이다." 한다.
○ 이곡(李穀)의 시에 "장원(壯元)이 난 고을을 우연히 향하니, 옛집 추녀 앞에 석양이 비꼈네. 매번 과장(科場)
에서 군용(群龍)이 다투지만, 남다른 재명(才名) 뭇 새 중에 일악(一鶚)이네. 세상을 싫다 하던 공은 일찍 하늘
로 돌아갔는데, 이웃에 자리잡은 나는 황정(黃精 약재)을 다듬고자 하네. 지령(地靈)에서 인걸 난다는 말을 믿
을 만하구나, 공경(公卿)이 연이어 나는 것을 보라." 하였다.
명환
본조 최덕지(崔德之)ㆍ전약충(全若衷)ㆍ최유종(崔有悰) : 모두 정치의 명망이 있었다.
김륜(金崙) : 청렴하고 간소하며 정치의 명성이 있었다. 김미(金楣) : 법을 지키고 공사를 받들었다. 성종 갑진년
에 교서(敎書)를 내려 포상하였다.
인물
고려 조간(趙簡) : 어려서 한 사람이 시 구절을 읊기를, "벼루 위 검은 구름은 휘필(揮筆)한 뒤."라 하니, 즉석에서
받기를, "뜰 앞의 붉은 비는 떨어진 꽃 시절." 하였다. 충렬왕(忠烈王) 때 장원으로 급제하였고, 다음해에 임금이
시(詩)와 부(賦)로 친히 문신(文臣)들을 시험할 때 또한 1등을 하였다. 황패(黃牌)를 하사하였고 여러번 관직을
옮겨 보궐(補闕) 벼슬을 하였다. 부친상을 당하여 3년을 시묘하니, 임금이 가상히 여겨 기거경력(起居經歷) 벼슬
을 주었다. 벼슬이 밀직부사찬성사(密直副使贊成事)에 이르렀고, 시호는 문량(文良)이다.
우거고려 박의중(朴宜中) : 자는 자허(子虛), 초명(初名)은 실(實)인데, 밀양(密陽) 사람이다. 공민왕 때에 장원
에 뽑히고, 신우(辛禑) 때에 여러 번 옮겨 벼슬이 대사성 밀직제학(大司成密直提學)에 이르렀다. 사신으로 북경
에 들어가 철령(鐵嶺) 이북의 땅을 돌려 달라고 요청했다. 돌아올 때 아무 것도 주지 않으니,
요동호송진무(遼東護送鎭撫) 서현(徐顯)이 베를 청구하거늘, 의중이 자루 입구를 기울여 보이고 입고 있던 모
시옷을 벗어 주었다. 서현이 그의 청백함에 탄복하고 예부(禮部)에 알리니, 천자가 인견하고 예를 더하여 대접
하고, 예부(禮部)에 명하여 회동관(會同館)에서 대접하도록 하였는데, 원평장원사(元平章院使)의 윗자리에 앉
도록 하고 그의 요청을 허락하여 주었다. 본조에 들어와서는 검교참찬 의정부사(檢校參贊議政府事)에 배수되
었다. 박의중은 천품이 명민하고 학문이 독실하였으며, 청렴하고 강개하며 편할 때나 험난할 때나 절개를 한결
같이 하였고, 문장은 정심(精深)하고 전아(典雅)하였다.
본조 정곤(鄭坤)ㆍ노숭(盧崇)ㆍ안지(安止) : 영중추원사(嶺中樞院事)로 마을 농막에 퇴거하였다. 호는 고은(皐
隱)이다. 신증열녀본조 동질금(同叱今) : 향리(鄕吏) 이당(李堂)의 처인데 남편이 죽자 종신토록 상복을 벗지 아
니하고, 조석으로 상식(上食)을 생존할 때와 같이 올렸다. 금상 7년에 정문을 세웠다.
박씨(朴氏) : 윤사임(尹師任)의 처인데 남편이 죽고 복을 벗은 뒤에도 오히려 소복으로 고기를 먹지 않고,
처음과 다름없이 애통하였다. 금상 22년에 마을에 정문을 세웠다. 마비(馬非) : 서치명(徐致明)의 처인데 남편이
죽자 20여 년 동안 상을 벗지 않고 조석으로 상식을 폐하지 아니했다. 금상 23년에 마을에 정문을 세웠다.
제영 요곽하화최효우(繞郭荷花摧曉雨) : 이발(李發)의 시에, "성곽 둘레의 연꽃은 비를 재촉하고, 들에 가득한 벼
이삭은 가을 하늘에 상긋거리네." 하였다.
수락어하국(水落魚鰕國) : 김극기의 시에, "수위(水位)가 낮아지니 고기와 새우의 나라요, 산이 고요하니 호랑이
와 들소의 고을이로다." 하였다. 일로요련해(一路遙連海) : 옛사람의 시에, "한 길 아득히 바다에 이어있고,
천가(千家)는 반쯤이나 산에 가려 있구나." 하였다.
[비고]
방면 읍내(邑內) : 끝이 5리이다. 모촌(母村) : 동쪽으로 처음이 20리, 끝이 30리이다.
월산(月山) : 남쪽으로 처음이 5리, 끝이 10리이다. 입천(立川) : 남쪽으로 처음이 5리, 끝이 10리이다.
부량(扶梁) : 남쪽으로 처음이 20리, 끝이 30리이다. 대정(大井) : 동쪽으로 처음이 10리, 끝이 15리이다.
개토(介吐) : 동쪽으로 처음이 20리, 끝이 25리이다. 홍산(洪山) : 서남쪽으로 처음이 15리, 끝이 20리이다.
대촌(代村) : 서남쪽으로 처음이 5리, 끝이 20리이다. 반산(半山) : 서쪽으로 처음이 15리, 끝이 20리이다.
식포(食浦) : 서쪽으로 처음이 20리, 끝이 30리이다. 백석(白石) : 북쪽으로 처음이 10리, 끝이 20리이다.
목연(木淵)ㆍ마천(馬川) : 모두 북쪽으로 처음이 20리, 끝이 30리이다. 본래는 마천이었다.
연산(延山) : 북쪽으로 처음이 15리, 끝이 25리이다. 공동(公洞) : 북쪽으로 처음이 20리, 끝이 30리이다.
회포(廻浦) : 북쪽으로 처음이 30리, 끝이 40리이다. 금굴(金堀) : 위와 같다.
○ 명량향(鳴良鄕)은 서쪽으로 20리, 제견향(堤見鄕)은 남쪽으로 1리, 재남소(才南所)는 동쪽으로 30리이다.
창고 창(倉)이 2곳이 있다 : 읍내에 있다. 두창(杜倉) : 동쪽으로 20리이다. 해창(海倉) : 서쪽으로 20리이다.
진도 동진(東津) : 서쪽으로 25리, 부안(扶安) 경계의 큰 길이다. 신창진(新倉津) : 북쪽으로 20리이며,
전주(全州) 땅과 통한다.
교량 재남교(才南橋) : 동쪽으로 30리이며, 삼례(參禮)로 가는 길이다.
화교(禾橋) : 서북쪽으로 15리이며 만경(萬頃) 큰 길과 통한다. 포교(浦橋) : 남쪽으로 15리이다.
토산 게.
고부군 古阜郡
동으로 태인현(泰仁縣) 경계까지 37리, 남으로 흥덕현(興德縣) 경계까지 18리,
서로 해안(海岸)까지 39리, 북으로 부안현(扶安縣)까지 17리, 서울까지는 5백 96리 거리이다.
건치연혁 본래는 백제의 고사부리군(古沙夫里郡)인데, 신라 시대에 지금의 이름으로 고쳤다.
고려 태조 19년에는 영주(瀛州)라 하여 관찰사(觀察使)를 두었고, 광종(光宗) 2년에는 안남도호부(安南都護府)
로 고쳤다가 현종(顯宗) 10년 고부군(古阜郡)으로 회복하였다.
충렬왕(忠烈王) 때에 영광군(靈光郡)에 병합되었는데, 조금 후에 다시 복구하고 본조에서도 이에 따랐다.
관원 군수(郡守)ㆍ훈도(訓導) : 각 1명씩이다.
군명 고사부리(古沙夫里)ㆍ영주(瀛州)ㆍ안남(安南)
성씨본군 이(李)ㆍ은(殷)ㆍ배(裵)ㆍ임(林)ㆍ백(白). 수금(水金) 이(李). 부안(富安) 조(曹)ㆍ김(金)ㆍ진(陳).
황조(荒調) 박(朴)ㆍ장(張)ㆍ김(金)ㆍ요(尿) : 혹은 강(康). 덕림(德林) 임(林)ㆍ김(金)ㆍ윤(尹)ㆍ차(車)ㆍ백(白).
모조(毛助) 백(白). 우일(雨日) 박(朴)ㆍ김(金)ㆍ윤(尹)ㆍ차(車)ㆍ백(白)ㆍ이(李)ㆍ은(殷)ㆍ임(林).
독변(禿邊) 고(高)ㆍ임(林)ㆍ송(宋). 음성(音聲) 정(井).
산천 두승산(斗升山) : 군의 동쪽 5리에 있다. 일명 도순산(都順山)이라 부른다. 옛 석성[古石城]에 있는데,
둘레가 1만 8백 12자이다. 길은 골짜기를 넘어가는데 영주(瀛州) 때의 옛성[舊城]이 아닌가 한다.
바다 : 부안곶에 있다. 부안곶(富安串) : 바로 부안향(富安鄕)이며 군의 서남쪽 46리에 있다.
흥덕현(興德縣)의 사진포(沙津浦)에 넘어 들어간다.
모천(茅川) : 근원은 정읍현(井邑縣)의 내장산(內藏山)에서 나온다. 북쪽으로 흘러 군의 동쪽 15리에 와서 서쪽
으로 꺾여 태인수(泰仁水)와 합하여 부안현(扶安縣)의 동진(東津)으로 들어간다.
눌제천(訥堤川) : 근원은 흥덕현(興德縣)의 반등산(半登山)에서 나와서, 군의 서쪽 10리에 와서 눌제천이 되고,
북쪽으로 흘러 부안(扶安)의 동쪽에 와서 모천(茅川)과 합하여 동진(東津)이 되어 바다로 들어간다.
대포(大浦) : 군의 서쪽 10리에 있다. 눌제천(訥堤川)의 하류가 되는데 조수(潮水)가 드나든다.
죽도(竹島) : 군의 서쪽 바다 55리에 있다. 흥덕현 편에도 있다.
토산 석수어(石首魚)ㆍ오징어[烏賊魚]ㆍ위어(葦魚)ㆍ붕어(鯽魚)ㆍ게[蟹]ㆍ청토(靑土) : 남정(南亭)에서 난다.
사다새 기름[鶘油]ㆍ생강ㆍ차[茶]ㆍ석류(石榴)ㆍ대[죽(竹)],
성곽 읍성(邑城) : 석축(石築)으로 둘레는 2천 3백 69자이고, 높이는 13자인데 안에 우물 셋이 있다.
누정 민락정(民樂亭) : 객관(客館) 서쪽 봉우리에 있는데, 옛이름은 북루(北樓)이다.
○ 이곡(李穀)의 시에, "남유(南游)를 옛부터 꿈꾸어 오다가 등림(登臨)하니, 만 가지 걱정이 구름처럼 흩어지는
구나. 수없이 지나는 과객은 바람에 나는 버들꽃이요, 백년의 뜬 인생은 바다로 흘러가는 시내라네.
도솔산(兜率山) 빛 맑아 잡을 만한데, 봉래산(逢萊山)의 운기는 멀리 서로 이어졌네. 시구를 남기고자 읊조리며
고심한다고, 나귀 탄 맹호연(孟浩然)에 비기질랑 마시오." 하였다. 도솔산(兜率山)은 진산군(珍山郡)에 있다.
○ 성임(成任)의 시에, "성곽은 창해(滄海)에 임하고, 처마와 기둥은 벽공(碧空)에 의지했네. 안목(眼目)은 천리
밖에 통하고, 마음은 일헌(一軒) 가운데 활연(豁然)하구나. 화락하니 태평 세월을 만났고, 구가(謳歌)하니 풍년
을 경하하네. 사방에 우로(雨露)가 고르니, 이 즐거움을 다 함께 하도다." 하였다. 신증 김종직(金宗直)의 시에,
"노래 소리 저녁 무렵 정자에 퍼지니, 나의 가는 길은 자유롭기만 하구나. 어찌 한식(寒食)이라 눈물을 흘리리오,
취향후(醉鄕侯)주D-001나 닮아 보리. 멀리 불빛은 소금 굽는 마을을 알리고, 층층으로 된 구름은 신기루를
연상하게 하네. 청신한 기쁨에 오늘 같은 날이 없으니, 응당 봄놀이의 으뜸이라 하겠네." 하였다.
○ "민락정에 민사(民事)가 적으니 우연한 여흥에 술잔이 가득하네. 두강(頭綱)은 오히려 해변에 있는데,
손은 장차 서울로 갈 때로다. 언덕은 겹겹으로 그림보다 아름다운데, 구름에 덮인 산은 우뚝 솟았으니,
어찌 시(詩)가 없으리오. 난간에 의지하여 황학(黃鶴)을 타고, 신선 되어 하늘로 날아간 사람을 부러워하고 있는
데, 누가 회선(回仙)주D-02의 철적(鐵笛)을 부는가." 하였다.
신증 금학루(琴鶴樓) : 객관(客館)의 동쪽에 있다.
학교 향교(鄕校) : 군의 동쪽 1리에 있다.
역원 영원역(瀛原驛) : 군의 북쪽 10리에 있다. 송덕원(宋德院) : 군의 동쪽 20리에 있다.
공유원(恭惟院) : 군의 동쪽 40리에 있다. 가전원(加田院) : 군의 동쪽 40리에 있다.
율생(栗生) : 군의 성 밑에 있다. 생근원(生斤院) : 군의 남쪽 18리에 있다.
교량 노교(蘆橋) : 대포(大浦)에 있다. 눌제교(訥堤橋) : 눌제천(訥堤川)에 있다.
신증 토음교(土音橋) : 군의 남쪽 15리에 있다.
불우 만일사(萬日寺)ㆍ망월사(望月寺)ㆍ등계사(燈溪寺) : 모두 도순산(都順山)에 있다.
사묘 사직단 : 군의 서쪽에 있다. 문묘 : 향교에 있다. 성황사 : 군의 성(城) 북쪽 모퉁이에 있다.
여단 : 군의 북쪽에 있다.
고적 눌지(訥池) : 군의 선쪽에 있는데, 지금은 없애고 논을 만들었다. 모조(毛助) 부곡 : 군의 앞 30리에 있다.
우일(雨日) 부곡 : 군의 동남쪽 30리에 있다. 부안향(富安鄕) : 부안곶 편에 보인다.
황조향(荒調鄕) : 군의 남쪽 30리에 있다. 수금향(水金鄕) : 군의 동쪽 30리에 있다.
음성향(音聲鄕) : 군의 남쪽 18리에 있다. 독변소(禿邊所) : 군의 남쪽 모조리에 있다.
덕림소(德林所) : 군의 서북쪽 15리에 있다.
명환
고려 오천유(吳闡猷) : 정치를 관대히 하여 인심을 편하게 하였다.
본조 함우치(咸禹治) : 청간(淸簡)하며 정사에 명망이 있었다.
신증 채석경(蔡碩卿)ㆍ최한원(崔漢源)ㆍ이만령(李萬齡)
인물
고려 진사수(陳思修) : 정당문학(政堂文學)이었다. 신증본조 이희맹(李希孟) : 장원으로 급제하여 관찰사
(觀察使)를 지냈다.
열녀고려 이씨(李氏) : 낭장(郎將) 이득인(李得仁)의 처이다. 신우(辛禑) 때에 왜적이 범하려 하니 끝까지 항거하
다가 죽음을 당했다. 신증본조 금이(今伊) : 군의 아전 이성호(李成浩)의 처이다. 젊어서 남편에게 쫓겨났는데
동생의 집에 기식(寄食)하게 되자, 동생의 남편이 개가시키려 했으나 한사코 따르지 아니했다. 시부모 있는 곳으
로 도망쳐 오니 시아버지가 그 뜻을 가엾게 여겨, 그 아들로 하여금 다시 합하도록 하였다. 시부모를 진심으로 모
시다가 남편이 죽자 친히 묘에 가서 상식을 올리며 비가 오나 눈이 오나 폐하지 아니했다. 상(喪)이 끝났는데도
오히려 상복을 벗지 아니하고, 조석으로 상식 올리는 일을 여전하게 하였다. 정문을 세웠다.
제영 지근삼산경(地近三山境) : 강호문(康好文)의 시에, "지경(地境)이 삼산(三山 봉래(蓬萊)ㆍ방장(方丈)ㆍ
영주(瀛州)의 세 신산(神山)) 경계에 가까운데, 하늘은 만리정(萬里亭)을 열었구나. 일방(一方)에 새로운 막부
(幕府)요, 남국(南國)의 중요한 번병(蕃屛)이로다. 영(嶺)은 높아 흰 구름이 많고, 시내는 평편하게 흘러 풀이
절로 푸르구나. 등림하니 모골(毛骨)이 상쾌하여 굴원(屈原)처럼 깨어 있네."주D-003 하였다.
해서운귀도(海曙雲歸島) : 이첨(李詹)의 시에, "바다에 날이 새니 구름은 섬으로 돌아오고, 천기는 가을이라 달
이 누각에 가득하네." 하였다. 원근천가수외련(遠近千家樹外連) : 민사평(閔思平)의 시에, "동서 한길이 처마
앞으로 곧게 나고, 원근의 천가는 나무 밖으로 이어 있구나." 하였다.
[비고]
연혁 영종 41년에 치소(治所)를 구읍성(舊邑城)의 남쪽 1리로 옮겼다.
관원 군수(郡守) : 전주진관(全州鎭管)의 병마동첨 절제사(兵馬同僉節制使)가 겸한다. 1명이다.
방면 동부(東部) : 끝이 5리이다. 남부 ; 처음이 5리, 끝이 15리이다. 서부 : 끝이 10리이다.
북부 : 처음이 10리, 끝이 15리이다. 오금(梧琴) : 동쪽에 있다. 달천(達川) : 동쪽에 있다.
우덕(優德) : 동쪽에 있다. 답내(踏內) : 모두 처음이 10리, 끝이 20리이다.
우일(雨日) : 원래는 우일부곡이다. 벌미(伐未) : 동쪽에 있다.
수금(水金) : 원래는 수금향이다. 모두 동쪽에 있으며, 처음이 20리, 끝이 30리이다.
덕림(德林) : 본래 덕림소(德林所)이다. 거여(巨予) : 서북쪽으로 모두 처음이 15리, 끝 20리이다.
궁동(宮洞) : 북쪽으로 처음이 10리, 끝이 15리이다. 백산(白山) : 북쪽으로 처음이 20리, 끝이 30리이다.
소정(所井) : 남쪽으로 처음이 10리, 끝이 15리이다. 성포(聲浦) : 남쪽으로 처음이 10리, 끝이 30리이다.
장순(長順) : 동쪽으로 처음이 30리, 끝이 35리이다.
부안(富安) : 원래는 부안향이다. 서쪽으로 처음이 30리, 끝이 50리이다.
부안(扶安)의 서남쪽 경계와 흥덕(興德)의 서북쪽 경계 너머에 있으며, 북쪽으로 변산(邊山)을 업고 서쪽은 바다
와 접해 있다.
○ 황조향(荒調鄕)은 남쪽으로 30리, 음성향(音聲鄕)은 남쪽으로 18리이다.
모조(毛助) 부곡은 남쪽으로 30리이다. 독변소(禿邊所)는 남쪽으로 20리인데, 모조리(毛助里)이다.
성지 두승산고성(斗升山古城) : 둘레가 1만 8백 12척이다.
창고 읍창(邑倉)ㆍ해창(海倉) : 서북쪽으로 20리, 부안현 약포(藥浦)에 있다.
교량 쌍교(雙橋) : 북쪽으로 18리이다. 중교(中橋) : 서쪽으로 15리이다.
평교(平橋) : 남쪽으로 30리이다. 연교(蓮橋) : 남쪽으로 20리이다. 구중교(九重橋) : 남쪽으로 15리이다.
불우교(佛隅橋) : 남쪽으로 20리이다. 두지교(斗池橋) : 동쪽으로 20리이다.
토산 닥ㆍ뽕나무ㆍ감.
사원 정충사(旌忠祠) : 인조(仁祖) 임신년에 세우고, 효종 정유년에 사액(賜額)하였다.
송상현(宋象賢) : 개성(開城) 편에 보인다. 신호(申浩) : 남원(南原) 편에 보인다.
김준(金俊) : 자는 언형(彦瀅)이며, 본관은 언양(彦陽)이다. 인조 정묘년에 전사(戰死)하였는데,
벼슬은 안주(安州) 목사였다. 좌찬성(左贊成)을 추증하였으며 시호는 장무(壯武)이다.
[주 D-001] 취향후(醉鄕侯) : 당 나라 왕적(王績)이 〈취향기(醉鄕記)〉를 지어 술 취한 세계를 취향이란 고을
처럼 만들어, "술 잘 먹는 사람을 그 고을의 후(侯)로 봉한다." 하였다.
[주 D-02] 회선(回仙) : 회선(回仙)은 선인(仙人) 여동빈(呂洞賓)의 별칭(別稱)인데,
회(回)와 여(呂) 자가 다 구(口)가 둘이기 때문이다.
[주 D-003] 굴원(屈原)처럼 깨어 있네." : 굴원(屈原)의 어부사(漁父辭)에,
"뭇 사람이 다 취했는데 나 홀로 깨어 있다." 하였다.
금산군 錦山郡
동으로 충청도(忠淸道) 옥천군(玉川郡) 경계까지 21리, 무주현(茂朱縣) 경계까지 48리이고,
남으로 용담현(龍潭縣) 경계까지 36리, 서쪽은 진산군(珍山郡) 경계까지 19리,
북으로 진산군 경계까지 17리인데, 서울로부터 4백 83리 떨어져 있다.
건치연혁 본래는 백제의 진내군(進乃郡)이며 : 일명 진내을군(進乃乙郡)이다.
신라에 와서 진례군(進禮郡)으로 고쳤다. 고려 시대에는 강등시켜 현령(縣令)을 두었는데,
충렬왕(忠烈王) 31년에 본현 출신 김신(金侁)이 원(元) 나라에 벼슬하여 요양행성 참정(遼陽行省參政)이 되어
나라에 공이 있으므로 지금주사(知錦州事)로 승격시켰고,
본조 태종(太宗) 13년에 지금의 이름으로 고치고 군으로 하였다.
관원 군수(郡守)ㆍ훈도(訓導) : 각 1명이다.
군명 진내(進乃)ㆍ경양(景陽)ㆍ금계(錦溪)ㆍ진례(進禮)ㆍ금주(錦州)
성씨본군 김(金)ㆍ한(韓)ㆍ이(李)ㆍ손(孫)ㆍ양(梁)ㆍ백(白) : 촌(村)이다. 부리(富利) 정(程)ㆍ임(任)ㆍ황(黃)ㆍ
장(張)ㆍ배(裵)ㆍ하(河)ㆍ석(石). 대곡(大谷) 하(河)ㆍ석(石)ㆍ정(鄭)ㆍ이(李)ㆍ유(柳)ㆍ안(安)ㆍ황(黃)ㆍ
박(朴)ㆍ정(丁) : 속(續)이다. 안성(安城) 최(崔)ㆍ양(梁)ㆍ송(宋)ㆍ이(李). 횡천(橫川) 김(金)ㆍ손(孫)
풍속 풍속은 순박(淳朴)하고, 농사와 뽕나무 일에 힘쓰며, 송사(訟事)는 간략하고 백성은 질박하다 :
권근(權近)의 〈향교기(鄕校記)〉에 있다.
형승
산이 극히 높다 : 이규보(李奎報)의 기에, "산이 극히 높아서 들어갈수록 점점 그윽하고 깊다." 하였다.
사방은 막히어 깊고 험하다 : 이곡(李穀)의 시에, "사방은 막히고 길은 깊고 험하다." 하였다.
서대산(西臺山)은 북방을 진수(鎭守)하고, 진락산(進樂山)은 남방을 가리었다 : 남수문(南秀文)의 〈영벽루기
(映碧樓記)〉에 있다.
산천이 험하고 궁벽하다 : 권근(權近)의 기(記)에 있다.
산천
소산(所山) : 군의 북쪽 2리에 있으며 진산(鎭山)이다. 진락산(進樂山) : 군의 남쪽 7리에 있다. 동쪽 봉우리 아래
에 석혈(石穴)이 있는데, 서너 걸음 들어가면 물소리가 요란하여 깊이를 알 수가 없다. 전하는 말로는 용이 사는
곳이라고 하는데, 날이 가물 때 호랑이 머리를 집어넣으면 감응이 있다고 한다.
덕유산(德裕山) : 안성소(安城所)에 있는데, 경상도의 안음현(安陰顯) 지경(地境)이다.
서대산(西臺山) : 군의 북쪽 35리에 있다. 진산군(珍山郡) 편에도 있다.
주줄산(珠崒山) : 군의 남쪽 40리에 있다. 용담(龍潭)과 고산현(高山縣) 편에 보인다.
신음산(神陰山) : 군의 동쪽 27리에 있다.
소이진(召爾津) : 군의 동남쪽 48리에 있다. 그 근원은 넷이 있는데, 하나는 진안(鎭安) 마이산(馬耳山)에서 나오
고, 하나는 용담(龍潭) 주줄산에서 나오며, 하나는 무주(茂朱)의 상산(裳山)과 대덕산(大德山)에서 나오고,
하나는 장수(長水)에서 나와 군의 동남쪽에서 합쳐 소이진(召爾津)이 되고, 군의 동쪽에 와서 지대진(只大津)이
되며, 북쪽으로 흘러 충청도 옥천(沃川)에 와서 호진(虎津)이 된다.
토산 벌꿀[蜂蜜]ㆍ석이[石蕈]ㆍ쇠 : 횡천(橫川)에서 난다. 잣[海松子]ㆍ송이ㆍ복령(茯笭)
성곽 읍성(邑城) : 흙으로 쌓았는데 둘레는 1천 45자, 높이는 8자이며, 안에 네 개의 샘이 있다.
누정 영벽루(映碧樓) : 객관(客館)의 동쪽에 있다.
○ 남수문(南秀文)의 기에, "지금의 군은 옛날의 진례현(進禮縣)인데, 산을 두르고 강을 띠고 있어 전라도에서
가장 궁벽한 땅이니, 실로 사방이 막혀 있는 곳이다. 고려 시대에 읍사람 중에 김신(金侁)이 원(元) 나라에 벼슬
하여 본국에 대하여 공을 세웠으므로 고향에 돌아온 뒤에 충렬왕(忠烈王)이 이를 가상하게 생각하고 금주(錦州)
로 승격시켜 금의환향한 영광을 드러나게 해 주었으니, 이로부터 드디어 이름 있는 군이 되었다.
그런데 홍무(洪武) 경신년에 왜구(倭寇)가 불을 질러 성읍이 폐허가 되었다. 10년을 지나서 기사년에 태수(太守)
설미수(偰眉壽) 후(侯)가 주성을 쌓았고, 그 뒤에 정귀진(鄭龜晉) 후가 공관(公館)을 세우니, 관(館)이 평지에 자
리잡아 사방이 마을로 빙 둘려 있어 등람(登覽)할 만한 곳이 없었다. 선덕(宣德 명(明) 나라 선종(宣宗)의 연호)
무신년에 김위민(金爲民) 선생이 수령으로 와서, 동헌(東軒)을 새로 짓고 북쪽 모퉁이에다 다섯 기둥으로 누각을
세웠는데, 구성이 높고 고우며 단청(丹靑)이 찬란하였다.
현 군수 이뢰(李賴) 선생이 일을 인계하여 계속 경영하면서 옛 것에 비하면 더 보태었다. 선생이 글을 나에게 보
내어 누의 이름과 기문을 청하기 때문에, 전에 가서 본 것을 더듬어서 편액(扁額)을 영벽(映碧)이라 하였다.
이는 군의 산수가 남주(南州)의 으뜸이요, 이 누각의 풍경이 더욱 기승(奇勝)을 위주로 하였기 때문이라 하겠다.
서대(西臺)는 북쪽의 진수(鎭守)요, 진락(進樂)은 남쪽을 가리고 있으며, 서쪽은 대둔(大芚)의 여러 산들이 빙
둘러 높이 솟아 병풍처럼 가리고 있다. 거기에 금천(錦川)의 물은 서쪽에서 흘러와서 누각의 뒤에 와서는 물을
끌어 소지(沼池)가 되니, 산빛과 물빛이 종횡으로 짙고 푸르며, 좌우로 서로 비쳐 귀엽고 사랑스러우니,
누의 승경(勝景)이 이에 가장 뛰어났도다. 만약 주인으로 하여금 일에 얽매인 나머지 문을 열어 정신을 화락하게
하며 산을 대하고 물에 임한다면, 열띤 것을 씻고자 들을 도모하는 데에 도움되는 바가 어찌 많지 않겠는가.
내가 이 때문에 감히 이것으로 누의 이름을 짓노라." 하였다.
양청대(養淸臺) : 향교에 있다. 이사동(李士同)이 지었고, 지군(知郡) 권기(權技)가 기문을 썼다.
신증 양성루(養成樓) : 향교에 있다.
학교 향교(鄕校) : 군의 서쪽 5리에 있다.
역원 제원역(濟原驛) : 군의 동쪽 5리에 있으며 승(丞)이 있다. 본도의 속역(屬驛)은 넷이니, 소천(所川)ㆍ
달계(達溪)ㆍ단령(丹嶺)ㆍ옥포(玉包)이며, 승(丞)이 각 1명씩 있다.
남제원(南濟院) : 군의 남쪽 30리 용담(龍潭) 경계(境界)에 있다.
기평원(岐平院) : 무주(茂朱) 경계(境界) 30리에 있다. 북정원(北亭院) : 군의 북쪽 5리에 있다.
금남원(錦南院) : 군의 남쪽 60리, 무주(茂朱)의 용담(龍潭) 경계에 있다,
동원(東院) : 군의 동쪽 5리에 있다. 금곡원(金谷院) : 군의 서쪽 12리 진산(珍山) 경계에 있다.
불우 보석사(寶石寺)ㆍ만덕사(萬德寺)ㆍ영암사(露巖寺)ㆍ석천사(石泉寺) : 수굴(水窟)이 있는데 깊이를 헤아릴
수 없다. 날이 가물면 여기에서 비가 내리기를 빈다.
월봉사(月峯寺)ㆍ원효사(元曉寺) : 모두 진락산(進樂山)에 있다.
신안사(身安寺) : 신음산(神陰山)에 있다.
원통사(元通寺)ㆍ불화사(佛華寺) : 모두 덕유산(德裕山)에 있다.
보통사(寶通寺) : 군의 서쪽 5리, 계진평(桂珍坪)에 있다.
사묘 사직단 : 군의 서쪽 4리에 있다. 문묘 : 향교에 있다.
성황사 : 군의 서남쪽 5리에 있다. 여단 : 군의 북쪽 3리에 있다.
고적
부리폐현(富利廢縣) : 군의 동남쪽 60리에 있다. 본래 백제의 두시이현(豆尸伊縣)인데, 일명 부시이(富尸伊)이다.
신라 시대에 이성현(伊城縣)으로 고치어 내속시키고, 고려 시대에 지금의 이름으로 고쳤다.
명종(明宗) 5년에 감무(監務)를 두고 뒤에 환속시켰다. 대곡소(大谷所) : 군의 남쪽 60리에 있다.
안성소(安城所) : 군의 동남쪽 1백 15리이다. 횡천소(橫川所) : 군의 남쪽 1백 20리에 있다.
명환
본조 박안신(朴安臣)ㆍ조종생(趙從生)ㆍ이계수(李桂遂) : 군수로 6년을 지냈는데, 사생활이 검박하였다.
임기가 차서 서울로 돌아가자 군민이 환송시를 짓기를, "청빈한 그 절개는 오늘날은 물론 옛날에도 없었으니,
백성의 고혈은 단돈 한 푼을 취한 것이 없네." 하였다. 권기(權技) : 정사를 잘하는 명성이 있었다.
신증 정종보(鄭宗輔)ㆍ이사공(李思恭)
인물
고려 김신(金侁) : 원 나라에 벼슬하여 요양행성 참정(參政)을 지냈다. 충렬왕은 김신의 일로 연유하여 본주를
군(郡)으로 승격시켰다. 일찍이 김신의 어머니가 왜적에게 피살되었는데, 김신이 백골을 수습하여 하늘을 보고
통곡하며 말하기를, "이것이 우리 어머니의 뼈라면 마땅히 변색이 되리라." 하니, 말을 마치기도 전에 백골이
푸른색으로 변하고, 하늘에 구름이 모여들어 큰비가 내리는 것이었다. 칙령(勅令)으로 사당을 짓고 사중(四仲
중춘(仲春)ㆍ중하(仲夏)ㆍ중추(仲秋)ㆍ중동(仲冬))과 기일(忌日)에는 지금도 제사를 지내고 있다.
김지(金摯) : 좌사간(左司諫)을 지냈다. 김일휴(金日休) : 대사성(大司成)을 지냈다.
한교(韓曒) : 효행이 있어 정문을 세웠으며 벼슬은 직제학(直提學)을 지냈다.
우거
고려 윤택(尹澤) : 충숙왕(忠肅王) 7년, 수재과(秀才科)에 합격하였다. 검열(檢閱)로 임금을 연경(燕京) 관저에
알현하니, 임금이 그 재주를 중하게 여겨 어린 자식을 맡기는 부탁의 말을 하였는데, 그가 바로 공민왕(恭愍王)
이다. 우부대언(右副代言)을 지내고 관리의 선발을 장악하였다. 공민왕 원년(元年)에 밀직제학(密直提學)에
발탁되었는데, 당세(當世)의 일을 스스로 맡아 왕께 건의하는 것이 많았다. 공민왕 13년에 공(公)의 나이 76이었
는데, 전리(田里)에 돌아갈 것을 간청하여 7년간을 산수(山水)와 더불어 즐겼다. 호는 율정(栗亭)이며, 시집(詩
集)이 있다.
윤귀생(尹龜生) : 윤택(尹澤)의 아들인데, 벼슬이 판전리시사(判田里寺事)에 이르렀다. 고향에 물러가서 가묘
(家廟)를 세우고, 초하루ㆍ보름ㆍ속절(俗節)ㆍ사중월(四仲月)에는 삼대(三代)를 제사지냈는데, 한결같이 주자
(朱子)의 가례(家禮)에 따라서 하였다. 아버지 묘의 남쪽에 재실을 짓고 고조(高祖) 이하의 선조의 제삿날을 돌
에다 새겨서 자손들로 하여금 잊지 않게 하였다. 공양왕(恭讓王) 3년에 비석을 세우고 정문도 세웠다.
윤소종(尹紹宗)ㆍ윤회종(尹會宗) : 두사람은 무장(茂長) 편에 보인다.
열녀본조 삼덕(三德) : 양적(梁逿)의 처인데 남편을 따라 나물을 따다가 남편이 호랑이에 물려갔다. 삼덕이 울부
짖으며 소리를 지르고 왼손으로 남편의 발을 잡고 오른손으로는 낫을 잡아 범을 치니, 범이 남편을 놓고 도망쳤
다. 삼덕이 슬퍼하며 장사와 제사를 가례대로 하고 종신토록 수절을 했다. 일이 임금에게 알려져서 마을에 정문
을 세우고 세금을 면제하여 주었다.
제영 석경천회진(石逕千回盡) : 정귀진(鄭龜晉)의 시에. "돌길은 천 번이나 굽어 다하고, 10리 되는 들은 한가하
기만 하구나." 하였다.
공문주불개(公門晝不開) : 정수홍(鄭守弘)의 시에, "산 기운은 맑은 날에도 오히려 컴컴하고, 공청의 문은 낮인
데도 열리지 아니했네." 하였다.
낙각행방진(犖确行方盡) : 이곡(李穀)의 시에, "명승지를 찾아 다녀 험하고 평탄한 것을 가리지 않으니, 우연히
금계(錦溪)를 향해 왔도다. 돌 많은 산길을 다 가니, 꾸불꾸불 이어진 전망이 홀연히 열리는구나. 빗소리는 깊은
마을 나무 위에 떨어지고, 산 그림자는 뜰에 가득한 이끼 위에 비치네. 가르치고 기르는 것이 이 누구의 책임인
고, 지령(地靈 대지(大地)의 영묘(靈妙)함)하여 특출한 인재를 낳는도다." 하였다.
일구연화갈천민(一區煙火葛天民) : 강호문(康好文)의 시에, "금계(錦溪)의 명승지는 도원(桃園)과도 같고 땅 깊
고 하늘 깊은데 풍속 또한 순박하구나. 노래 소리 10리에 뻗치니 무성(武城)의 주인이요, 한 고을에 연화(煙火)
오르니 갈천씨(葛天氏)의 백성이로세. 도처에 푸른 이끼 끼었으니 지나간 사람은 적고, 홍행(紅杏) 필 때 되니 권
과(勸課)를 자주하네. 다행히 빈거(貧居)가 노나무 고을에 있으니, 남유(南遊)하며 관정(觀政)함에 봄을 어기지
아니했네." 하였다.
사간인생록(事簡印生綠) : 허주(許周)의 시에, "사무가 간결하니 도장에는 녹이 쓸고, 송사(訟事)가 드무니 뜰
에는 이끼가 가득하다." 하였다.
[비고]
방면 군일(郡一) : 끝이 10리이다. 군이(郡二) : 끝이 5리이다. 동일(東一) : 처음이 5리, 끝이 40리이다.
서일(西一) : 처음이 5리, 끝이 20리이다. 서이(西二) : 위와 같다. 군북(郡北) : 처음이 10리, 끝이 50리이다.
부남(富南) : 동남쪽으로 처음이 30리, 끝이 70리이다. 부서(富西) : 동쪽으로 처음이 5리, 끝이 30리이다.
부북(富北) : 남쪽으로 처음이 10리, 끝이 40리이다. 위의 4면(面)은 부리(富利) 고현(古縣)이다.
○ 대곡소(大谷所)는 동남쪽으로 80리이다.
창고 읍창(邑倉) 두 곳이 있다. 외창(外倉).
진도 소이진(召爾津) : 동남쪽으로 48리이고, 무주(茂朱)와의 경계이다.
광석진(廣石津) : 동쪽으로 30리에 있다. 위의 두 나루터는 겨울에는 다리로 건너고, 여름에는 배로 건넌다.
교량 읍전천교(邑前川橋) : 남쪽으로 1리이다. 신천교(新川橋) : 동쪽으로 7리이다.
누정 영벽루(映碧樓) : 기(記)에, "서대진(西臺鎭) 북쪽은 진락산(進樂山)이 가리고, 서남쪽은 대둔(大芚)의 여러
산이 둘러 서 있는데, 봉우리가 병풍처럼 감싸고 있다. 금천(錦川) 물은 서쪽에서 흘러 오는데, 누정(樓亭) 뒤에
서 끌어들여 소(沼)를 이룬다. 산광수색(山光水色)이 짙푸르러 아름답다.
취향정(翠香亭) : 군 동쪽의 누문지(樓門池) 안에 있다. 선유정(仙遊亭) :남산(南山)에 있다.
사원 성곡서원(星谷書院) : 광해주(光海主) 정사년에 세웠고, 현종 계묘년에 사액하였다.
김신(金侁) : 본관은 금산이다. 고려 원종(元宗) 갑술년에 일기도(一岐島)에서 일본을 정벌하는 싸움에 전사하여,
원(元) 나라에서 참정(參政) 벼슬을 받았고, 고려에서의 벼슬은 좌군병마사(左軍兵馬使)였다.
윤택(尹澤) : 자는 중덕(仲德)이고, 호는 율정(栗亭)이며, 본관은 무송(茂松)이다. 벼슬은 정당문학(政堂文學)이
었고, 시호는 문정(文貞)이다.
길재(吉再) : 선산(善山) 편에 보인다.
김정(金淨) : 청주(淸州) 편에 보인다. 고경명(高敬命) : 광주(光州) 편에 보인다.
조헌(趙憲) : 김포 편에 보인다. 종용사(從容祠) : 인조(仁祖) 정해년에 세웠고, 현종 계묘년에 사액하였다.
고경명ㆍ조헌 : 모두 앞에 나왔다.
고인후(高因厚) : 광주(光州) 편에 보인다. 변응정(邊應貞) : 자는 문숙(文叔)이며, 본관은 원주(原州)이다. 벼슬
은 전라 수사(全羅水使)였는데, 병조 판서(兵曹判書)를 추종하였으며, 시호는 충장(忠壯)이다.
유팽로(柳彭老)ㆍ안영(安瑛) : 모두 광주 편에 보인다.
이광륜(李光輪) : 자는 중임(仲任)이고, 본관은 여주(驪州)이다. 벼슬은 문소전(文昭殿) 참봉(參奉)이었는데,
집의(執義)를 추증하였다.
조완기(趙完基) : 옥천(沃川) 편에 보인다.
한순(韓楯) : 자는 자한(子閑)이며, 본관은 청주(淸州)이다. 남평 현감(南平縣監)으로 금산에서 전사하였다.
병조 판서를 추증하였고, 시호는 의장(毅壯)이다.
제봉좌막(齊峯佐幕)ㆍ중봉좌막(重峯佐幕)ㆍ제봉사졸(齊峯士卒)ㆍ중봉사졸(重峯士卒)ㆍ중[僧] 영규(靈圭) :
별사(別祠)에 분향한다. 밀양(密陽) 편에 보인다. 영규사졸(靈圭士卒)
진산군 珍山郡
동으로 충청도(忠淸道) 옥천군(沃川郡) 경계까지 41리, 금산군(錦山郡) 경계까지 36리,
남으로 금산군(錦山郡) 경계까지 16리, 서쪽으로 전주부(全州府) 경계까지 8리,
북으로 충청도 공주(公州) 유성현(儒城縣) 경계까지 39리, 충청도 진잠현(鎭岑縣) 경계까지 39리인데,
서울로부터는 4백 49리 떨어져 있다.
건치연혁 본래는 백제의 진동현(珍同縣) : 동(同)은 혹 동(洞)으로도 쓴다. 이었는데,
신라에 와서는 황산군(黃山郡)의 영현(領縣)이 되었다. 고려 시대에는 진례현(進禮縣)에 속했는데,
공양왕(恭讓王) 2년에는 고산 감무(高山監務)가 겸임했다.
본조 태조(太祖) 2년에 태(胎)를 이곳에 봉안하였기 때문에, 지진주사(知珍州事)로 승격시켰다가
태종 13년에 지금의 군으로 고쳤다.
관원 군수ㆍ훈도 : 각 1명이다.
군명 옥계(玉溪)ㆍ진동(珍同)ㆍ진주(珍州)
성씨본군 하(河)ㆍ진(陳)ㆍ장(蔣)ㆍ변(邊)ㆍ문(文) : 문(門)으로 기록된 곳도 있다. 이(李)ㆍ박(朴)ㆍ김(金) :
속(續)이다.
원산(猿山) 손(孫)ㆍ고(高)ㆍ제(堤) : 혹은 제(堤)로 기록하였다. 김(金)ㆍ지(池) : 속(續)이다.
금암(金巖) 김(金) : 혹은 전(全)으로 기록하였다. 명(明)ㆍ정(鄭). 횡정(橫程) 고(高)ㆍ박(朴)ㆍ김(金)ㆍ이(李)
풍속 순후(淳厚)한 풍도가 있다 : 주기(州記)에, "순후한 풍도가 있고, 경박(輕薄)한 습속은 없다." 하였다.
산천
대둔산(大芚山) : 군의 서쪽 10리에 있는데 진산(鎭山)이다. 고산현(高山縣) 편에도 있다.
엄정산(嚴正山) : 군의 남쪽으로 10리에 있다. 도솔산(兜率山) : 군의 서쪽으로 10리에 있다.
고산현(高山縣) 편에 보인다. 서대산(西臺山) : 군의 동쪽 41리에 있다.
천비산(天庇山) : 군의 북쪽 30리에 있다.
만인산(萬仞山) : 군의 동쪽 20리에 있다. 성봉(星峯)이 있는데 흙이 두텁고 물이 깊으며 봉우리가 우뚝 솟아
모양이 연꽃처럼 생겼다. 태조(太祖)의 태(胎)를 묻었다. 달왕산(達往山) : 군 동쪽 20리에 있다.
이현(梨峴) : 군 서쪽 10리, 대둔산 남쪽에 있다.
병천(幷川) : 근원은 군의 동쪽 6리에 있는 덕정리(德井里)에서 나오는데, 북쪽으로 흘러 공주(公州)의 금강
(錦江)으로 들어간다.
청징연(淸澄淵) : 군의 남쪽 10리에 있다. 물의 깊이를 알 수가 없고, 세상에 전하기로는 용이 있다고 한다.
날이 가물어 비를 빌면 즉시로 감응한다고 한다. 지금은 모레가 덮여 물의 깊이는 불과 3자이다.
토산 석자황(石雌黃) : 군의 동쪽 사음동(舍音洞)에서 난다. 인삼ㆍ철 : 군의 서쪽 월외리(月外里)에서 난다.
동 : 군의 동쪽 달왕산(達往山)에서 난다.
자석(磁石) : 암정리(巖井里)에서 나는데, 군의 남쪽 10리 되는 곳이다. 벌꿀ㆍ송이
누정 요월정(邀月亭) : 객관(客館)의 동쪽에 있는데, 군수 정석(鄭晰)이 세웠다. 손비장(孫比長)의 기문이 있다.
학교 향교 : 군의 동쪽 2리에 있다.
원우 삼식원(三息院) : 군의 동쪽 3리에 있다.
요광원(要光院) : 군의 동쪽 30리에 있다. 신창원(新昌院) : 군의 북쪽 15리에 있다.
불우 서대사(西臺寺) : 서대산(西臺山)에 있다. 옛날에는 상ㆍ중ㆍ하 세개의 서대가 있었는데,
중서대사(中西臺寺)는 지금 없어졌다.
봉서사(鳳棲寺) : 만인산(萬仞山)에 있다. 미륵사(彌勒寺) : 천비산에 있다. 대둔사(大芚寺) : 대둔산에 있다.
사묘 사직단 : 군의 서쪽 2리에 있다. 문묘 : 향교에 있다. 성황사 : 군의 북쪽 4리에 있다.
여단 : 군의 북쪽에 있다.
고적
산성(山城) : 옛터가 군의 북쪽 3리에 있다. 원산향(猿山鄕) : 군 동쪽 30리에 있다.
금악소(金岳所) : 악(岳)을 전에는 암(巖)으로 썼다. 군 동쪽 30리에 있다.
동계소(銅界所) : 군 북쪽 15리에 있다. 횡정소(橫程所)
인물
본조 김천석(金天錫) : 효행이 있어 정문을 세웠다. 벼슬은 관찰사를 지냈다.
제영 태실봉고변군명(胎室峯高變郡名) : 조박(趙璞)의 시에, "구름사다리 길 다한 곳에 촌락이 열렸고,
태실봉(胎室峯)이 높으니, 군명(郡名)을 고치었네." 하였다.
청봉요각운생동(靑峯繞閣雲生棟) : 윤향(尹向)의 시에, "푸른 봉우리는 누각을 두르고 구름은 들보에서
일어나니, 푸른 나무는 처마 밑에 낮고 바람은 기둥에 찼네." 하였다.
이변초래위서직(已變草萊爲黍稷) : 이곡(李穀)의 시에, "시절과 더불어 흥폐(興廢)를 민정(民情)에서 볼 수
있는데, 옛 고을에 다시 오니 홀연 눈이 밝아지는구나. 무성했던 풀들은 기장과 피로 변하였고,
가시 덤불은 마루와 밑둥을 이루었네." 하였다.
점점봉만수(點點峯巒秀) : 정이오(鄭以吾)의 시에, "점점한 봉우리는 빼어나고 영령(泠泠)한 간수(澗水)는
맑도다." 하였다.
[비고]
방면 군내(郡內) : 끝이 10리이다. 동일(東一) : 처음이 20리이고, 끝이 35리이다.
동이(東二) : 처음이 20리, 끝이 40리이다. 남일(南一) : 처음이 5리, 끝이 15리이다.
남이(南二) : 처음이 10리, 끝이 20리이다. 서면(西面) : 처음이 5리, 끝이 15리이다.
북면(北面) : 처음이 10리, 끝이 40리이다. ○ 원산향(猿山鄕)은 동쪽으로 30리이고,
금악소(金岳所)는 동쪽으로 30리이다. 고계소(錮界所)는 북쪽으로 15리이다. 횡정소(橫程所)
창고 읍창(邑倉).
토산 닥ㆍ칠ㆍ뽕나무ㆍ감
34권 여산군 礪山郡
동쪽으로 고산현(高山縣) 경계에 이르기까지 13리, 남쪽으로 전주부(全州府) 경계에 이르기까지 11리,
서쪽으로 익산군(益山郡) 경계에 이르기까지 13리, 용안현(龍安縣) 경계에 이르기까지 19리,
북쪽으로 충청도(忠淸道) 은진현(恩津縣) 경계에 이르기까지 15리, 서울과의 거리는 4백 44리이다.
건치연혁 여량현(礪良縣) : 양(良)은 양(陽)으로도 한다. 본래 백제(百濟) 지량초현(只良肖縣)이었는데,
신라때에 여량(礪良)으로 고치어 덕은군(德殷郡) 영현(領縣)으로 삼았다. 고려 현종 9년에 전주에 붙였고,
공양왕(恭讓王) 3년에 감무(監務)를 두어 낭산(朗山)을 겸임하고,
또 공촌(公村)과 피제(皮堤)의 권농사(勸農使)를 겸하였다. 낭산현은 본래 백제 알야산현(閼也山縣)이었는데,
신라 때에 야산(野山)으로 고치어 금마군(金馬郡) 영현으로 삼았다.
고려 때 낭산으로 고치어 전주에 붙였고, 공양왕이 여량감무(礪良監務)가 와서 겸하게 하였다.
본조 공정왕(恭靖王) 2년에 두 현의 이름을 따서 여산현이라 칭하였고,
세종 18년에 원경왕후(元敬王后)의 외향(外鄕)인 까닭으로 군으로 승격하여,
충청도에 옮겨 예속시켰다가 26년에 다시 본도에 예속시켰다.
관원 군수ㆍ훈도 : 각 1명이다.
군명 여량ㆍ호산(壺山)ㆍ지량초ㆍ낭산ㆍ알야산ㆍ야산.
성씨여량 송(宋)ㆍ이(李)ㆍ오(吳)ㆍ황(黃)ㆍ최(崔), 염(廉)ㆍ임(林)ㆍ배(裵)ㆍ문(文)ㆍ김(金) : 모두 다른 곳에서
왔다.
낭산(朗山) 오ㆍ조(趙)ㆍ배ㆍ유(兪)ㆍ현(玄), 김ㆍ이 : 모두 다른 곳에서 왔다. 장(張) : 촌에 산다.
피제(皮堤) 최ㆍ이ㆍ송, 임 : 다른 곳에서 왔다. 공촌(公村) 이ㆍ백(白).
풍속 풍속은 검소함을 숭상하고 농사와 누에치기에 힘쓴다.
산천
호산 : 군의 동쪽 5리에 있는데, 진산(鎭山)이다. 미륵산(彌勒山) : 군의 서쪽 10리에 있다.
군입산(軍入山) : 군의 남쪽 12리에 있다.
○ 고려 태조가 후백제(後百濟)를 정벌할 때, 여기에 군대를 주둔시켰기 때문에 이름한 것이다.
화산(花山) : 군의 서북쪽 20리에 있는데, 강에 임하여 우뚝 솟아 자못 기묘한 경치이다.
용암(龍巖) : 군의 서쪽 8리에 있다. 작지(鵲旨) : 군의 북쪽 12리에 있는데, 충청도 은진현(恩津縣)의 경계이다.
해마다 7월 15일에 가까운 양도(兩道 전라도 충청도)의 백성들이 모여 씨름[手摶]으로 승부를 다툰다.
누항(漏項) : 군의 동쪽 7리에 있다. 고산현(高山縣)에서 나온 시냇물이 서쪽으로 흘러 호산 기슭에 새어 들어
가서 스며 흐르다가 서쪽 산 기슭에 이르러 내가 된다. 굴둘레[穴圓]의 지름은 장(丈)이 넘는다.
전하는 말에, "용추(龍湫)에서 날이 가물면 비를 빈다." 한다.
내소암포(乃所巖浦) : 군의 서북쪽 20리에 있는데, 서쪽으로 진포(鎭浦)를 통하여 바다에 이른다.
장선지(長先池) : 군의 서쪽 15리에 있다. 이지(梨池) : 군의 북쪽 12리에 있다.
토산 게.
누정 세심당(洗心堂) : 객관의 동북쪽 구석에 있다.
○ 윤향(尹向)의 시에, "늦은 아침에도 밤 비는 완전히 개이지 않았는데, 연한 풀 새로 핀 꽃 한 뜰에 가득하구나.
담장 동쪽에 섰는 몇 그루의 대나무만 영롱하게 지난 해의 푸른 빛 변치 않았네." 하였다.
황화정(皇華亭) : 군의 북쪽 11리에 있는데, 신구(新舊) 관찰사들이 교대하는 장소이다.
신증 청허정(淸虛亭) : 객관 동쪽에 있다.
학교 향교 : 군의 동쪽 2리에 있다.
역원 양재역(良才驛) : 군의 북쪽 6리에 있다. 보성원(寶成院) : 군의 북쪽 11리에 있다.
영녕원(永寧院) : 군의 남쪽 8리에 있다.
불우 도신사(道新寺) : 군입산에 있다. 문수사(文殊寺) : 호산에 있다.
심곡사(深谷寺)ㆍ장안사(長安寺) : 모두 미륵산에 있다.
사묘 사직단(社稷壇) : 군의 서쪽 3리에 있다. 문묘 : 향교에 있다. 성황사(城隍祠) : 호산에 있다.
여단(厲壇) : 군의 북쪽 4리에 있다.
고적
낭산폐현(朗山廢縣) : 군의 서쪽 8리에 있다. 토성(土城) 옛터가 있는데, 둘레가 3천 9백 척이고, 안에 샘물이 두
군데 있다. 피제 부곡(皮堤部曲) : 군의 북쪽 15리에 있는데, 옛 성터가 있다.
공촌 부곡(公村部曲) : 군의 북쪽 10리에 있다.
명환
본조 선화(宣和) : 태종 때에 현감이 되어 은혜와 위엄을 아울러 행하니, 아전과 백성들이 덕을 사모하였다.
아버지 상을 당해서 직위를 버리고 갔는데, 3년 상을 마치자 읍인들이 나라에 상서하여 다시 임명되었다.
박혈(朴絜) : 세종 조에 지군사(知郡事)가 되었다.
인물
고려 송송례(宋松禮) : 원종(元宗) 조에 임연(林衍)의 난리를 평정하였고, 관직은 중찬(中贊)에 이르렀으며,
시호는 정렬(貞烈)이다. 송분(宋玢) : 송례의 아들인데, 관직은 중찬에 이르렀다.
송서(宋瑞) : 송분의 아들인데, 관직은 정승에 이르렀다. 본조
송거신(宋居信) : 좌명공신(佐命功臣)에 참여하였고, 여산부원군(礪山府院君)에 봉작되었으며, 시호는 충정
(忠靖)이다.
송문림(宋文琳) : 과거에 합격하여 화관(華官)과 요직(要職)을 여러 번 역임하였고, 나중에 좌리공신(佐理功臣)
으로서 여성군(礪城君)에 봉작되었다.
신증 송질(宋軼) : 송례의 후손이다. 두 번 과거에 합격하였고, 관직은 영의정에 이르렀으며,
정국공신(靖國功臣)에 참여하여 여원부원군(礪原府院君)에 봉작되었다. 시호는 숙정(肅靖)이다.
송천희(宋千喜) : 과거에 합격하여 관직이 이조 판서에 이르렀으며, 천성이 강직하고 과감하였다.
일찍이 경상도 관찰사가 되었는데, 함양군(咸陽郡)에 여자 무당이 있어 스스로 일컫기를, "나는 불제자(佛弟子)
인데, 능히 사람의 병을 고친다." 하니, 원근의 주민들이 구름처럼 모여들어 쌀과 포목을 다투어 시주하였다.
천희가 무녀를 형장 쳐서 죽이니, 온 지경 안이 숙연(肅然)하였다.
열녀본조 송씨(宋氏) : 남편 정희중(鄭希重)이 일찍 죽으니 피눈물로 3년상을 마쳤다. 부모들이 그가 젊어서 과
부된 것을 가엾게 여겨 개가시키고자 하니, 송씨가 죽음으로써 스스로 맹세하기를, "시어머니께서 김제(金堤)에
계시고 다른 자식은 없는데, 내가 만일 시집간다면 시어머니는 마침내 누구한테 의탁하겠습니까." 하였다.
그러나 부모들이 듣지 않으므로 송씨는 애기를 업고 시어머니의 집으로 도망쳐 가서 몇 년 동안 친정에 돌아오
지 않으니, 부모들이 그의 지극한 정성에 감동하여 마침내 집 옆에 별실을 지어 살게 하였다. 송씨는 효성을 다
하여 시어머니를 받들면서 한 평생을 마쳤다. 일이 나라에 알려져 정문을 세우고 복호(復戶)하였다.
제영 난산 횡검극(亂山橫劍戟) : 성임(成任)의 시에, "대나무 서 있으니 천 그루의 푸른 낚싯대요, 꽃이 피니 백일
동안 환하다. 송사가 한가하니 뜰에는 잡초가 우거지고, 시대가 태평하니 고을에는 성(城)이 없다. 멀리 보이는
나무는 연기 속에 아득한데, 기우는 햇빛은 비온 뒤에 더욱 밝구나. 어지럽게 솟은 산 창칼을 비껴 세운 듯한데,
막 갈아 놓은 칼과 같구나." 하였다.
일대한계 포군류(一帶寒溪抱郡流) : 강희맹(姜希孟)의 시에, "천 봉우리 높은 나무 파란 연기 속에 떠 있고,
한 줄기 차가운 시내 군(郡)을 안고 흐른다." 하였다.
[비고]
연혁 숙종 25년에 정순왕후(定順王后) 송씨(宋氏) 단종(端宗) 왕후의 관향(貫鄕)이라 하여 도호부(都護府)로
승격시켰다. 고종(高宗) 32년에 군(郡)으로 고쳤다. 《文獻備考》
방면 부내(府內) : 끝이 5리. 천동(川東) : 동쪽 처음이 5리, 끝이 10리. 서이(西二) : 처음이 10리, 끝이 20리.
서삼(西三) : 처음이 20리, 끝이 30리. 서사(西四) : 처음이 15리, 끝이 20리.
북일(北一) : 서북쪽으로 처음이 20리, 끝이 30리. 북삼(北三) : 처음이 10리, 끝이 20리.
합광(合光) : 북쪽으로 처음이 10리, 끝이 20리.
피제(皮堤) : 원래는 피제 부곡 (皮堤部曲)이다. 북쪽은 처음이 15리, 끝이 25리.
공촌(公村) : 원래는 공촌 부곡이다. 북쪽은 처음이 10리, 끝이 20리.
정지 낭산고현성(朗山古縣城) : 토성(土城)으로 둘레는 3천 9백 척이며, 우물이 둘이다.
피제고성(皮堤古城) : 북쪽으로 15리인데 유적이 있다.
영아 후영(後營) : 인조조에 두었다. ○ 후영장 겸 토포사(後營將兼討捕使) 한 사람은 본부사(本府使)가 겸한다.
○ 속읍(屬邑)은 예산ㆍ임피(臨陂)ㆍ옥구(沃溝)ㆍ함열(咸悅)ㆍ용안(龍安)ㆍ익산(益山)ㆍ고산(高山)ㆍ
진산(珍山)ㆍ금산(錦山)ㆍ용담(龍潭)이다.
창고 읍창(邑倉)ㆍ나암창(羅巖倉) : 나암포(羅巖浦)에 있다.
선교(船橋) : 읍의 남천(南川)에 있다. 신교(新橋) : 남사리(南四里)에 있다.
토산 대나무ㆍ닥나무ㆍ칠ㆍ뽕나무ㆍ비석ㆍ붕어.
사원 죽림서원(竹林書院) : 인조 병인년에 세우고, 현종 을사년에 사액하였다.
조광조(趙光祖)ㆍ이황(李滉)ㆍ이이(李珥)ㆍ성혼(成渾)ㆍ김장생(金長生)ㆍ송시열(宋時烈) : 모두 문묘 편을 보라.
만경현 萬頃縣
동쪽으로 김제군(金堤郡) 경계에 이르기까지 9리, 남쪽으로 같은 군 경계에 이르기까지 15리,
북쪽으로 전주부의 경계에 이르기까지 11리, 서쪽으로 해안에 이르기까지 30리,
서울과 의 거리는 5백 64리이다.
건치연혁 본래 백제 두내산현(豆乃山縣)이었는데,
신라 때 지금 이름으로 고치어 김제군 영현으로 만들었다.
고려 때 임피현(臨陂縣)에 붙였고, 예종(睿宗) 원년에 감무를 두었다가 후에 현령으로 승격시켰다.
본조에서는 그대로 하였다.
관원 현령ㆍ훈도 : 각 1명이다.
군명 두내산ㆍ두산(杜山).
성씨본현 : 노(盧)ㆍ두(杜)ㆍ홍(洪)ㆍ곽(郭)ㆍ방(方), 이ㆍ박 : 모두 임피(臨陂)에 있다.
김 : 김제(金堤). 고(高) : 청거(淸渠). 백 : 이성(利城). 문(文) : 평강(平江).
윤(尹) : 철주(鐵州). 이파산(泥波山) 종(宗)ㆍ김ㆍ신(申)ㆍ윤ㆍ섭(葉)ㆍ고ㆍ이, 노ㆍ유(柳)ㆍ곽(郭) : 모두 다른
곳에서 왔다.
부윤(富潤) 조ㆍ이ㆍ남궁(南宮)ㆍ장ㆍ승(勝)ㆍ최.
산천
진봉산(進鳳山) : 길곶리(吉串里)에 있다.
동진(東津)ㆍ신창진(新倉津) 두 물이 바다로 들어가는 북쪽에 몇 봉우리 산이 높이 솟았고, 낙명(落明)이라는
대가 있다.
남산(南山) : 현의 남쪽 2리에 있다.
대평(大坪) : 김제군 조에 자세히 나왔다. 길관 : 현의 서쪽 34리에 있다.
바다 : 현의 서쪽 40리에 있다. 신창진 : 현의 북쪽 15리에 있다. 수음포(愁音浦) : 현의 남쪽 15리에 있다.
군산도(郡山島) : 현의 서쪽 바다 가운데 있는데, 둘레가 60리이다. 벼랑에 배를 감출 만한 곳이 있어
서 모든 조운(漕運 배로 물건을 운반하는 것)하는 자는 모두 여기에서 순풍을 기다린다. 섬 가운데 마
치 임금의 왕릉 같은 큰 묘가 있었는데, 근세에 이웃 고을 수령이 그 묘를 파내어 금은기명(金銀器皿)
을 많이 얻었는데, 사람들에게 고발 되어 도망하였다 한다.
○ 《대명일통지(大明一統志)》에, "12 봉우리가 성처럼 서로 잇대어 있고,
옛날에 군산정(群山亭)이라는 객관이 있었으며, 또 오룡묘(五龍廟)가 있었다." 한다.
와보도(蝸步島)ㆍ궁지도(宮地島)ㆍ망지도(望地島)ㆍ횡건도(橫建島)ㆍ허내도(許內島)ㆍ가외도(家外島) :
조수가 물러나면 육지와 연결된다. ○ 이상의 섬들은 모두 군산도에 가까이 있다.
신증 몽일포(夢一浦) : 현의 북쪽 8리에 있다. 부포(釜浦) : 현의 남쪽 15리에 있다.
능제(陵堤) : 현의 동쪽 2리에 있는데, 둘레가 1만 8천 1백 척이다.
○ 김종직(金宗直)의 시에, " 만경성 가 만 이랑의 연꽃 길, 가던 손 고삐잡고 푸른 연기 속에 서 있네. 정정하게
서서 비 받으니 참으로 일산이 되고, 깨끗하게 물결 위에 섰으니 곧 신선이 되려 하는구나. 사향처럼 짙은 방심
(芳心) 깊이 사랑하지만, 한되는 건 배만한 푸른 연줄기주D-001 없는 것일세. 경렴당(景濂堂)주D-02 아래에서
아득히 생각해 보니 어느 때나 옥차고 성현(聖賢) 대할까." 하였다.
토산 청어(靑魚)ㆍ조기 : 모두 군산도에서 난다.
도미ㆍ웅어[葦魚]ㆍ진어(眞魚)ㆍ가시연밥[芡]ㆍ게ㆍ조개ㆍ숭어ㆍ생강. 신증 마름[菱]ㆍ연(蓮)ㆍ순채[蓴].
성곽 읍성 : 석축인데 둘레가 2천 8백 20척이고, 높이는 12척이며, 안에 샘물이 6군데 있다.
성 동쪽에 토성 옛터가 있다.
봉수 길곶봉수(吉串烽燧) : 현의 서쪽 29리에 있는데, 남쪽으로 부안현(扶安縣) 계화도(界火島)에 응하고,
북쪽으로 옥구현(沃溝縣) 사자암(獅子巖)에 응한다.
누정 거사루(去思樓) : 개관 동쪽에 있는데, 현령 안선(安璿)이 세웠다.
학교 향교 : 현의 서쪽 2리에 있다.
원우 입석원(立石院) : 현의 남쪽 10리에 있다.
교량 수음포교(愁音浦橋) : 수음포 위에 있다. 신증 웅교(熊橋) : 현의 북쪽 7리에 있다.
불우 망해사(望海寺) : 진봉산에 있다. 사사(沙寺) : 남산에 있다.
사묘 사직단 : 현의 서쪽에 있다. 문묘 : 향교에 있다. 성황사 : 현의 북쪽 2리에 있다. 여단 : 현의 북쪽에 있다.
고적
부윤폐현(富潤廢縣) : 현의 남쪽 13리에 있다. 본래 백제 무근촌현(武斤村縣) 이었는데, 신라 때 무읍(武邑)으로
고치어 김제군의 영현으로 만들었고, 고려 때 지금 이름으로 고치어 임피에 붙였다가 후에 이 고을로 붙였다.
이파산소(泥波山所) : 현의 서쪽 15리에 있다.
명환
본조 설위(薛緯) : 사람됨이 청렴하고 조심하였는데, 감사의 헐뜯음을 입어 벼슬을 버리도 갔다. 남긴 시에,
"강군(江郡)에서 몇 년을 홀로 거문고 탈 적에 높은 산 깊은 물에 뜻이 있었다. 세상에서는 종자기(鍾子期)의 귀
만나기 어려우니,주D-003 거문고 소리 가운데 백아(伯牙)의 마음 어느 누가 알아 줄까." 하였다.
인물
고려 두경승(杜景升) : 자질이 풍후하고 꾸밈새가 적으며 용력이 있었다. 정중부(鄭仲夫)의 난리주D-004에 사
람과 재물을 겁탈하는 무인들이 많았으나, 경승은 홀로 전문(殿門)을 떠나지 않고 추호도 범함이 없었다.
명종 조에 김보당(金甫當)과 조위총(趙位寵)의 난리주D-05를 평정하는 데에 공이 있었고, 관직은 문하시중에
이르렀다. 옛날 제도에 삼품 이상은 관급이 오를 때마다 으레 사양하는 표문을 올려, 윤허하지 않는 다는 조서
가 내린 연후에 표를 올려 사례하고 관직에 나아갔다. 경승은 홀로 말하기를, "속마음으로는 사양하고 싶지 않
으면서, 남의 붓을 빌려 겉으로만 예문(禮文)을 하니 나는 차마 못하겠다." 하였다. 최충헌(崔忠獻)이 임금을
폐할 꾀를 내어주D-06 드디어 경승을 자연도(紫燕島)로 귀양 보냈는데, 경승은 섬에 있으면서 울분이 터져 피
를 토하고 죽었다.
김희제(金希磾) : 군산도 사람인데, 지혜와 용맹이 있고 서사(書史)에 통달하였다. 고종 때 몽고 사신 저가(這可)
등이 오니 임금이 희제를 유회사(類會使)로 삼았는데, 저가 등이 한결같이 희제의 처분에 응하였다.
후에 전라도 순문사가 되었는데, 최이(崔怡)에게 참소하는 자가 있으니, 최이가 사람을 보내어 잡아오게 하였으
나, 희제는 조금도 두려워하는 빛이 없었다. 마침내 바다에 던져 죽였다.
효자
본조 홍간(洪簡) : 어미가 병이 들어 죽게 될 지경에 이르렀는데, 홍간이 정강이 살을 베어 밀가루에 타서 환을
만들어 드리니 병이 드디어 나았다. 일이 나라에 보고되어 정문을 세웠다.
김맹방(金孟倣) : 아버지 광신(光信)이 악종(惡腫)을 앓고 있는데, 맹방이 정강이 살을 베어 술에 타서 드리니
병이 드디어 나았다. 일이 나라에 보고 되어 정문을 세웠다. 아들 호인(好仁)은 어머니가 악종을 앓고 있는데,
그 역시 정강이 살을 베어 밀가루에 타서 환을 만들어 드리니 병이 드디어 나았다. 성종 5년에 일이 나라에 보
고되어 불러서 서부참봉(西部參奉)에 제수하였다.
신증열녀본조 금이(今伊) : 갑사(甲士) 최치강(崔致江)의 아내이다. 남편이 죽어 3년상을 마치고도 흰 옷을 입
고 고기를 먹지 않으며, 아침저녁으로 상식하고 철마다 의복을 지어 올렸다. 지금 임금 23년에 정문을 세웠다.
제영 야활천부해(野濶天浮海) : 정곤(鄭坤)의 시에, "들이 넓으니 하늘은 바다 위에 뜨고, 누가 높으니 객은 바람
에 의지한다." 하였다.
벽담탄일야(碧潭呑一野) : 조계생(趙啓生)의 시에, "푸른 못은 한 들을 삼키고, 물결 그림자 정자 가운데 거꾸로
있다." 하였다.
청산단처지응진(靑山斷處地應盡) : 서거정의 시에, "물나라[澤國]의 풍경 고향과는 달라서, 벼슬 형편 나그네
회포 한가지로 아득하네. 청산 끊어진 곳에, 땅도 따라 다하고, 백조(白鳥) 나는 가엔 하늘 다시 길구나.
저녁 비 올 때에 구름이 칠흑같고, 밤바람 그치니 달빛이 서리같네. 작은 누 하룻밤은 물 기운에 서늘한데, 근년
들어 야윈 얼굴 심랑(沈郞)주D-007보다 더하네." 하였다.
[비고]
연혁 광해주 12년에 김제와 합하였다 : 흉년이 들어 백성이 모두 흩어졌기 때문이다. 14년에 전주로 옮겨 예속
시켰다가 인조 15년에 다시 두었다. 고종 32년에 군으로 고쳤다. 《文獻備考》
방면 현내(縣內) : 끝이 9리. 남일(南一) : 처음이 7리, 끝이 10리. 남이(南二) : 처음이 8리, 끝이 15리.
상서(上西) : 처음이 6리, 끝이 10리. 하일(下一) : 서쪽으로 처음이 11리, 끝이 25리.
하이도(下二道) : 서쪽으로 처음이 15리, 끝이 20리. 북면(北面) : 처음이 2리, 끝이 7리.
군평(群平) : 서남쪽으로 처음이 15리, 끝이 25리. ○ 이파산소(泥波山所)는 서쪽으로 15리이다.
정지 고성(古城) : 읍성(邑城)의 동쪽에 있는데, 흙으로 쌓은 유적이 있으며 우물이 둘 있다.
토산 대나무ㆍ뽕나무ㆍ칠.
교량 백종교(白終橋) : 남쪽으로 1리. 산두교(山頭橋) : 북쪽에 있다.
[주 D-001] 배만한 푸른 연줄기 : 중국 태화산(太華山) 봉우리 위에 큰 못이 있고 그 못에 연꽃이 있는데,
그 연꽃 줄기가 큰 배만하다고 한다.
[주 D-02] 경렴당(景濂堂) : 경렴당(景濂堂)은 중국 송 나라의 선비 염계(濂溪) 주돈이(周敦頤)를 사모하여
붙인 이름이다. 주돈이는 일찍이 애련설(愛蓮說)을 지어서 연꽃을 찬양하였다.
[주 D-003] 종자기(鍾子期)의 귀 만나기 어려우니, : 백아(伯牙)가 거문고를 타면 자기(子期)가 듣고 그 소리에
들어있는 악상(樂想)까지도 틀림없이 알아맞히어 지기지우(知己之友)가 되었다는 고사이다.
[주 D-004] 정중부(鄭仲夫)의 난리 : 고려 의종(毅宗) 24년(1170년)에
정중부(鄭仲夫)·이의방(李義方)·이고(李高)를 중심으로 일으킨 무신 혁명인데, 일명 무신의 난이라고도 한다.
고려 초기 이래 문인을 숭상하고 무인을 억압하는 정책에 대한 불평을 품고, 이해 10월 2일에 임금을 거제
(巨濟)로, 태자를 진도(珍島)로 추방하고, 임금의 아우 익양공(翼陽公) 호(晧)을 맞아 세워 울분을 씻었다.
그러나 실정(失政)을 개혁 못하고 무신간의 권력다툼을 일삼았다.
[주 D-05] 김보당(金甫當)과 조위총(趙位寵)의 난리 : 명종 4년(1174년)부터 명종 6년(1176년)까지 서경유수
(西京留守) 조위총(趙位寵)이, 정중부·이의방·이고 등이 임금(의종)을 폐하고 문신을 학살하여 전횡을 일삼는
것을 타도한다는 대의명분(大義名分)을 세워 일으킨 난리이다. 여러 차례의 격전에서 승패를 거듭하였는데,
명종 4년에 윤인첨(尹麟瞻)이 원수, 두경승(杜景升)이 후군 총관사(後軍摠管使)가 되어 총공격하였다.
이때 윤인첨은 서경 공격에 앞서 조위총의 복심이 연주에 있음을 알고 포위하여 격전 끝에 명종 5년 6월에
함락시키고, 명종 6년에 서경을 함락시켰는데, 두경승의 공이 컸었다.
[주 D-06] 최충헌(崔忠獻)이 임금을 폐할 꾀를 내어 : 고려 명종(明宗) 27년(1197년) 9월에 권신(權臣)
최충헌(崔忠獻)이 신변의 위협을 받게 되자, 명종을 내몰고 평량공(平涼公) 왕문(王文 명종의 아우이며 나중에
신종(神宗)임)을 세우려고 두경승을 귀양 보냈다.
[주 D-007] 심랑(沈郞) : 심랑은 남북조 시대 남제(南齊) 사람 심약(沈約)을 가리킨다. 그는 몸이 매우 수척하
여 옷도 이기지 못할 정도였다.
임피현 臨陂縣
동쪽으로 전주부 경계에 이르기까지 15리, 남쪽으로 만경현 경계에 이르기까지 20리,
서쪽으로 옥구현(沃溝縣) 경계에 이르기까지 20리, 북쪽으로 함열현(咸悅縣) 경계에 이르기까지 11리,
충청도 한산군(韓山郡)의 경계에 이르기까지 17리, 서울과의 거리는 4백 89리이다.
건치연혁 본래 백제 시산군(屎山郡)이었는데 -피산(陂山)ㆍ흔문(忻文)ㆍ소도(所島)ㆍ실조출(失鳥出)이라고도
한다.- 신라 때 지금 이름으로 고쳤고, 고려 때 현으로 강등시켜 영(令)을 두었으며, 본조에서는 그대로 하였다.
관원 현령ㆍ훈도 : 각 1명이다.
군명 파산ㆍ취성(鷲城)ㆍ시산(屎山)ㆍ흔문ㆍ소도ㆍ실조출.
성씨본현 이ㆍ박ㆍ진(陳)ㆍ송(宋)ㆍ강(康).
산천
예산(芮山) : 현의 북쪽 4리에 있는데, 진산이다. 기세가 마치 봉황새가 날아가는 듯하고 옛 성터가 있다.
오성산(五聖山) : 현의 서쪽 18리에 있다.
취성산(鷲城山) : 현의 서쪽 4리에 있다.
공주산(公州山) : 현의 북쪽 13리에 있는데, 전하는 말에 "공주로부터 떨어져 왔기 때문에 이름한 것이다." 했다.
산 밑이 곧 진포(鎭浦)인데, 민가들이 즐비하고 배 부리는 것을 생업으로 한다.
신창진(新倉津) : 현의 남쪽 20리에 있다. 전주부 편에 상세히 보인다. 고사포(古沙浦) : 현의 남쪽 28리에 있다.
옥구현(沃溝縣) 편에 보인다. 진포(鎭浦) : 현의 북쪽 17리에 있다. 공주의 웅진(熊津)이 부여(扶餘)에 이르러 꺽
어져 남쪽으로 용안현(龍安縣)의 동쪽에 이르고, 돌아나와서 서쪽으로 바다로 들어가는데, 진포는 곧 바다로 들
어가는 입구이다. 옥구현 편에 또 보인다.
호산제(狐山堤) : 현의 동쪽 5리에 있다.
토산 가시연밥ㆍ게ㆍ도미ㆍ뱅어ㆍ정어(釘魚)ㆍ진어.
성곽 읍성 : 석축인데, 둘레가 3천 6백 74척이고, 높이는 8척이며, 안에 14군데의 샘과 5개의 못이 있다.
○ 정곤(鄭坤)의 기에, "경인년 가을에 최윤덕(崔潤德)이 이 도의 순문사(巡問使)가 되어, 감사 신개(申槩), 절도
사 이점(李漸)과 더불어 주와 군을 순시하다가, 현에서 지형을 살피어 기지를 정하고 척수[文數]를 계산하여
멀고 가까움을 논하며, 일할 기일을 헤아려 인부를 계산해서 곁에 가까이 있는 주현의 장정 1만 6천 9백여 명을
동원하고, 옥구현 판사(判事) 송희귀(宋希貴), 만경 현령 우형(禹衡), 임피 현령 장옥상(張玉相)을 시켜 역사를
감독케 하였는데, 10월 보름에 시작하여 4순(旬) 만에 성이 이룩되니, 둘레가 몇 척, 높이가 몇 척이다.
성 위에 망보는 곳을 설치하고 안에 물과 샘이 많이 있다. 이른바, '요해지에 방비 시설을 갖추어 외적의 침략을
막는다.' 는 것이니, 백성을 보존하는 도를 얻은 것이다." 하였다.
봉수 오성산 봉수 : 서쪽으로 옥구현 점방산(占方山)에 응하고, 동쪽으로 함열현(咸悅縣) 소방봉(所方峯)에
응한다.
신증궁실 애련헌(愛蓮軒) : 곧 객관의 서헌(西軒)이다.
신증누정 훈풍루(薰風樓) : 성의 남문루(南門樓)이다. 집승루(集勝樓) : 동헌 북쪽에 있는데, 현령 김수준
(金守濬)이 지었다.
학교 향교 : 현의 북쪽 4리에 있다.
역원 소안역(蘇安驛) : 현의 서쪽 8리에 있다. 관원(館院) : 현의 동쪽 20리에 있다.
신창원(新倉院) : 신창진의 언덕에 있다. 서원(西院) : 현의 서쪽 7리에 있다.
불우 용천사(龍泉寺) : 취성산에 있다. 수심사(修心寺)ㆍ관성암(觀性庵) : 모두 오성산에 있다.
사묘 사직단 : 현의 서쪽 3리에 있다. 문묘 : 향교에 있다. 성황사 : 취성산에 있다. 여단 : 현의 북쪽에 있다.
명환
고려 박화(朴華) : 현위(縣尉)가 되었다. 천성이 공순하고 삼가며, 일에 임하여 오직 부지런할 뿐이었다.
신증본조 이희맹(李希孟) : 강직하고 명석하게 정치를 하였다. 최자숙(崔自淑).
신증효자본조 오맹근(吳孟根) : 아버지가 종기를 앓는데, 허벅지 살을 베어 약에 타서 드리니 병이 나았다.
홍치(弘治) 4년에 정문을 세웠다.
최운손(崔云孫) : 아버지가 악질을 얻었는데, 손가락을 잘라 약에 타서 먹이니 병이 나았다. 홍치 4년에 정문을
세웠다.
강극례(姜克禮) : 어머니가 악한 종기를 앓는데, 허벅지 살을 베어 약에 타서 드리니 병이 나았다. 홍치 8년에
정문을 세웠다. 신증열녀본조 석비(石非) : 남편이 죽으니 울부짖기를 몹시 애통해 하면서, "홀로 살기보다는
차라리 지하로 따라 간다." 하고, 스스로 목매어 죽었다. 지금 임금 11년에 정려문을 세웠다.
제영 고현의연접수미(古縣依然接水湄) : 이규보의 시에, "고현은 의연하게 물가에 닿아 있고, 앞에 달리는 붉은
깃발 수풀을 떨치고 돌아가네. 오고 갈 제 오직 꾀꼬리만이 알고 있으니, 쇠하고 병든 몸이 어찌 나는 듯한 말
[馬]을 견딜 건가. 객사에는 버들 늘어진 새길 닦았고, 인가는 꽃 비치는 사립문 반쯤 닫았네.
참군(參軍)주D-001은 야위어 보기도 민망한데, 사녀(士女)들은 무슨 일로 모여 둘러싸나." 하였다.
빈경청수이(頻傾聽水耳) : 김극기(金克己)의 시에, "다른 고을로 사신 행차[星駕] 달려가다가 기이한 풍경 탐하
여 다소 지체하였네. 물 소리 듣느라 귀를 자주 기울이고, 산 바라보느라 머리를 몇 번 들었던고. 기러기 떼 하늘
을 연해 날고, 거미줄 땅 위에 가득 모여서 논다. 적선(謫仙 이태백(李太白))은 언제 지나갔기에,
한 번 취해 왕후(王侯)들을 업신여겼나." 하였다.
[비고]
연혁 고종 32년에 군으로 고쳤다. 《文獻備考》
방면 현내(縣內) : 끝이 5리. 동일(東一) : 처음이 10리, 끝이 20리. 동이(東二) : 처음이 5리, 끝이 10리.
남일(南一) : 위와 같다. 남이(南二) : 처음이 10리, 끝이 20리. 남삼(南三) : 처음이 5리, 끝이 20리.
남사(南四) : 처음이 15리, 끝이 20리. 서삼(西三) : 위와 같다. 서사(西四) : 처음이 20리, 끝이 30리.
북일(北一) : 처음이 15리, 끝이 20리. 상북(上北) : 처음이 5리, 끝이 15리. 하북(下北) : 위와 같다.
북삼(北三) : 처음이 15리, 끝이 20리.
정지 예산고성(芮山古城) : 유적이 있다.
봉수 불지산(佛智山).
창고 읍창(邑倉) : 읍내. 신창(新倉) : 남쪽으로 20리.
해창(海倉) : 서쪽으로 10리. 본래 고려의 조창(漕倉)중의 하나인 진성창(鎭城倉)이다. 흙으로 둘레 10여 리의
성을 쌓았다. 혁폐 나리포(羅里浦) : 이조 경종(景宗) 2년에 공주에서 이곳으로 옮겼다. 상세한 것은 나주 편에
보인다.
진도 신창진(新倉津) : 남쪽으로 20리이며, 사수(泗水)의 하류이고, 김제ㆍ만경과 통한다. 전주 편에 상세하다.
교량 갈마포교(渴馬浦橋)ㆍ장류평교(長流坪橋)ㆍ영통평교(令通坪橋)ㆍ삽교(揷橋).
토산 대나무ㆍ닥나무ㆍ뽕나무ㆍ게.
단묘 내능변(來陵邊) : 신라 때에는 서해의 중사(中祠)로 모셨는데, 고려 때에 폐했다.
사원 봉암서원(鳳巖書院) : 현종 갑진년에 세웠고, 숙종 을해년에 사액하였다. 김집(金集) : 문묘 편을 보라.
김구(金絿) : 예산 편을 보라.
[주 D-001] 참군(參軍) : 그때에 이규보(李奎報)는 전주(全州)에서 참군으로 있었다.
금구현 金溝縣
동쪽으로 전주부의 경계에 이르기까지 16리, 북쪽으로 같은 부의 경계에 이르기까지 8리,
남쪽으로 태인현(泰仁縣)의 경계에 이르기까지 18리, 서쪽으로 김제군(金堤郡)의 경계에 이르기까지 18리,
서울과의 거리는 5백 26리이다.
건치연혁 본래 백제 구지지산현(仇知只山縣)이었는데, 신라 때 지금 이름으로 고치어 전주의 영현으로 만들었다.
고려 의종(毅宗) 24년에 이의방(李義方)의 외향(外鄕)인 까닭으로 현령으로 승격시켰고,
본조에서는 그대로 하였다.
관원 현령ㆍ훈도 : 각 1명이다.
군명 구지지산ㆍ봉산(鳳山).
성씨본현 이ㆍ전(田)ㆍ조(曺)ㆍ최ㆍ신(辛). 대율(大栗) 이ㆍ김ㆍ강(姜). 역양(櫟陽) 이ㆍ전ㆍ최ㆍ장ㆍ방(方).
거야(巨野) 전ㆍ온(溫)ㆍ곽(郭)ㆍ용(龍)ㆍ고ㆍ최ㆍ오(吳). 종정(從政) 고ㆍ온ㆍ곽.
산천 봉두산(鳳頭山) : 현의 동쪽 2리에 있는데, 진산이다. 산에 마치 봉황새가 나는 듯한 형상이 있기 때문에
이름한 것이다. 왼쪽에는 양시산(楊翅山)이 있고, 앞에는 묘산(卯山)이 있다. 술가(術家)들이 또 굴선산(掘禪山)
에 개동사(開同寺)를 세워, 날고 움직이는 기세를 눌렀다 한다.
○ 이행(李行)의 시에, "오동나무 가지는 이미 떨어졌는데, 대나무 열매는 누굴 위해 달려 있나.주D-001 봉황새
는 날아가고 헛되이 회상하는데, 높은 멧부리만 땅에 우뚝 솟았네." 하였다.
모악산(母岳山) : 현의 동쪽 25리에 있다. 또한 태인현(泰仁縣) 편에 보인다.
묘고산(妙高山) : 현의 동쪽 7리에 있다. 굴선산 : 현의 남쪽 7리에 있다.
상두산(象頭山) : 현의 남쪽 25리에 있는데, 역시 태인현 편에 보인다.
모악천(母岳川) : 현의 남쪽 14리에 있는데, 모악산에서 나와 서쪽으로 흘러 김제군 경계로 들어간다.
용지(龍池) : 모악산에 있는데, 날이 가물어 비를 빌면 응함이 있었다. 지금은 모래로 메워졌다.
적포지(赤浦池) : 현의 북쪽 15리에 있다. 보광지(普光池) : 현의 서쪽 20리에 있다.
신지(新池) : 현의 서쪽 2리에 있다. 가운데에 3개의 구릉을 쌓아 올려 그 위에 소나무를 심고 3도(島)라고
부른다.
신증 황산(黃山) : 현의 서쪽 10리에 있다.
함자지(咸子池) : 현의 남쪽 10리에 있다. 웅지(熊池) : 현의 북쪽 5리에 있다.
토산 사기(沙器)ㆍ게ㆍ모시ㆍ옻ㆍ봉밀(蜂蜜)ㆍ석류(石榴)ㆍ생강.
신증 대나무.
신증궁실 수각(水閣) : 객관의 북쪽에 있다.
학교 향교 : 현의 북쪽 2리에 있다.
원우 홍인원(弘仁院) : 현의 남쪽 15리에 있다.
소복원(蘇復院) : 현의 서쪽 5리에 있다. 감물천원(甘勿川院) : 현의 북쪽 6리에 있다.
잠계원(潛溪院) : 현의 남쪽 6리에 있다.
불우 금산사(金山寺) : 모악산에 있는데, 후백제 견훤이 창건한 것이다.
○ 견훤의 어린 아들 금강(金剛)은 키가 크고 지혜가 많으니, 견훤이 특별히 귀엽게 여겨 전위(傳位)할 생각을
가졌다. 청태(淸泰) 2년 3월에 맏아들 신검(神劍)이 견훤을 금산불우에 가두어 장사 30명에게 지키게 하고,
드디어 왕위를 찬탈하여 경내에 크게 사면령을 내리고 금강을 죽였다. 견훤이 금산에 갇혀 있은 지 석 달이 되
었는데, 6월에 술을 가지고 지키는 자들을 먹여 모두 취하자 이에 막내 아들 능예(能乂), 딸 애복(哀福), 첩 고비
(姑比) 등을 데리고 나주(羅州)로 도망쳐서 해로(海路)를 이용하여 고려에 귀의했다 한다.
○ 이곡(李穀)의 시에, "청구(靑丘)에 봄이 오니 해는 중천(中天)에 오르고, 좋은 경치 구경은 농사철 아닌 때가
좋아라. 바다 위 봉래(逢萊) 지경 찾기 위하여, 인간의 도솔궁(兜率宮)주D-002을 찾아 왔노라.
높다란 처마끝은 북두성에 닿을듯, 설법하는 양 목탁소리 동풍에 속삭인다. 다시 생각하고, 지팡이와 신발로
깊숙한 곳 찾아가니, 안개 노을이 가득한 골짜기라 길가는 것 수월하다." 하였다.
○ 허백(許伯)의 시에, "옛 절은 산 기슭에 의지하고 높은 개와골 물 가를 누르고 있네. 골이 차니 잔나비는 달아
래 부르짖고, 솔이 빽빽하니 학은 가지에 깃든다. 바람은 종소리 끌어 멀리 울리고, 물결은 탑 그림자 흔들며 옮
겨가네. 한가함을 사랑하는 성벽(性癖) 있어 다시 늙은 중과 다른 날을 기약한다." 하였다.
신증 김시습(金時習)의 시에, "구름 기운 아물아물 골안[洞府]이 널직한데, 엉킨 수풀 깔린 돌엔 여울소리 들려
오네. 중천에 별들은 금찰(金刹)을 밝히는데, 밤중에 바람 우레 석단(石壇)을 도는구나.
낡은 짐대[幢]주D-03엔 이끼 끼어 글자가 희미한데, 마른 나무에 바람 스치니 저녁추위 생기누나. 초제(招提
여러 곳에서 모여 오는 스님네가 쉬어가게 마련한 집)에서 홀연히 하룻밤 자고나니, 연기 속 먼 종소리에 여운이
한가롭지 않다." 하였다.
쌍계사(雙溪寺) : 묘고산(妙高山)에 있다.
천장사(天藏寺) : 굴선산에 있다.
대운사(大雲寺)ㆍ조주사(趙州寺)ㆍ용장사(龍藏寺) : 모두 상두산(象頭山)에 있다.
사묘 사직단 : 현의 서쪽 2리에 있다. 문묘 : 향교에 있다. 성황사 : 현의 동쪽 1리에 있다.
여단 : 현의 북쪽에 있다.
고적
거야폐현(巨野廢縣) : 현의 남쪽 15리에 있다. 본래 백제 야서이현(也西伊縣)이었는데, 신라 때 야서현으로 고
치어 태산군(太山郡) 영현으로 만들었다. 고려 때 지금 이름으로 고치어 전주에 붙였다가 후에 김제현에 붙였
고, 후에 또 이 고을에 와서 붙였다.
역양폐현(櫟陽廢縣) : 양(陽)은 양(良)으로도 쓴다. 현의 북쪽 7리에 있다.
종정부곡(從政部曲) : 현의 남쪽 16리에 있다. 대율 부곡(大栗部曲) : 현의 동쪽 6리에 있다.
명환고려 이순목(李淳牧) : 좌천되어 현령이 되었다.
효자본조 우척(禹滌) : 생원이다. 아버지가 죽으니, 묘 곁에 살면서 최질(衰絰)을 벗지 않았으며, 집 일을 말하지
않고 3년상을 마쳤다.
열녀본조 박씨(朴氏) : 남편 유구연(柳九淵)이 죽으니, 3년 동안 여묘에서 살았다. 3년상을 마치자 남편의 얼굴
을 그려서 벽에 걸어두고 사철 의복을 지어 시렁에 달아 두고서는 조전과 석전을 그치지 않았다.
일이 나라에 보고되어 그 호역(戶役)을 덜어 주었다.
제영 무몽초생당(無夢草生塘) : 서거정의 시에, "해 저물어 누에 기대어서 가고 쉴 것을 초당(草堂)에 물었네.
시가 있으니 꽃이 길에 가득하고, 꿈 없어도 풀이 못에 우거졌다.주D-004 높은 나무엔 저녁 햇볕 걸렸고,
빈 처마엔 저녁 선선한 기운 모인다. 해산(海山)이 칼끝처럼 뾰족하니, 진정 시름 창자[愁腸] 베낼 수 있구나."
하였다.
[비고]
연혁 고종 32년에 군으로 고쳤다. 《文獻備考》
방면 동도(東道)ㆍ서도(西道) : 모두 끝이 5리. 동면(東面) : 처음이 5리, 끝이 15리. 상남(上南)ㆍ하남(下南) :
모두 처음이 5리, 끝이 10리.
일북(一北)ㆍ이북(二北) : 모두 처음이 5리, 끝이 20리. 하서(下西) : 처음이 15리, 끝이 25리.
역양(櫟陽) : 북쪽으로 처음이 7리, 끝이 20리.
○ 옛 읍터[邑跡]는 지금의 치소(治所)로부터 7리 떨어져 있다.
종정(從政) : 본래는 종정 부곡(從政部曲)이다. 남쪽으로 처음이 10리, 끝이 17리.
초처(草處) : 남쪽 처음이 10리, 끝이 25리.
○ 대율 부곡(大栗部曲) 동쪽으로 6리.
정지 고성 : 북쪽으로 5리, 속칭 산성이라고 하며, 봉우리에 유적이 있다.
창고 창 3 : 모두 읍내에 있다.
교량 학교(鶴橋) : 읍내에 있다. 금천교(金川橋) : 동쪽으로 10리.
원평교(院坪橋)
토산 닥나무ㆍ뽕나무ㆍ붕어.
[주 D-001] 오동나무 가지는 이미 떨어졌는데, 대나무 열매는 누굴 위해 달려 있나. : 봉황이라는 새는 상상의
동물인데, "오동나무가 아니면 앉지 않고, 대나무 열매가 아니면 먹지 않는다." 한다. 여기 이 말은 봉황이 없어
서 오동나무 가지가 떨어졌는데, 대나무 열매만 헛되이 있다는 말이다.
[주 D-002] 도솔궁(兜率宮) : 옥황상제와 신선이 살고 있다는 궁전을 말한다.
[주 D-03] 짐대[幢] : 당(幢)은 최남선(崔南善)씨는 짐대라고 번역하였는데,
원래는 구리나 쇠로 높은 짐대처럼 만든 것이니, 절에서 기 같은 것을 걸기 위해 만든 것이다.
[주 D-004] 꿈 없어도 풀이 못에 우거졌다. : 남북조 시대 남제(南齊)의 유명한 시인 사영운(謝靈運)이 ‘못 위에
푸른 풀이 났다[池塘生靑草]’는 유명한 시구를 읊었는데, 그 시구는 중국 시단에서 제일 걸작이라 한다.
그런데 사영운이 그 시를 짓던 전날 밤 꿈에, 죽은 아우 사혜련(謝惠蓮)을 보았으므로 이런 걸작이 나왔다
하였다.
정읍현 井邑縣
동쪽으로 순창군(淳昌郡)의 경계에 이르기까지 20리, 남쪽으로 장성현(長城縣)의 경계에 이르기까지 30리,
서쪽으로 고부군(古阜郡)의 경계에 이르기까지 8리, 북쪽으로 같은 군의 경계에 이르기까지 13리,
서울과의 거리는 5백 91리이다.
건치연혁 본래 백제 정촌현(井村縣)이었는데, 신라 경덕왕(景德王)이 지금 이름으로 고치어 태산군 영현으로
만들었다. 고려 때 고부군에 붙였다가 후에 감무를 두었고, 본조에서는 현감으로 고쳤다.
관원 현감ㆍ훈도 : 각 1명이다.
군명 정촌ㆍ초산(楚山).
성씨본현 탁(濯)ㆍ이ㆍ진(晉)ㆍ윤ㆍ정(井). 답곡(沓谷) 정(井).
산천
내장산(內藏山) : 현의 동쪽 25리에 있다. 오봉산(五峯山) : 현의 남쪽 20리에 있다.
반등산(半登山) : 현의 서남쪽 30리에 있는데, 고창현(高敞縣) 편에 자세히 나온다.
응산(鷹山) : 현의 북쪽 1리에 있다. 칠보산(七寶山) : 현의 북쪽 10리에 있다.
입암산(笠巖山) : 현의 남쪽 30리에 있다.
위령(葦嶺) : 위는 혹 노(蘆)로도 쓴다. 현의 남쪽 30리에 있는데, 장성현의 경계이다.
또 소위령(小葦嶺)이 있는데, 흥덕현 경계에 있다.
아요현(阿要峴) : 현의 동남쪽 7리에 있다.
목제천(木梯川)ㆍ치천(鴟川) : 두 내가 모두 내장산에서 나와 현의 서쪽 10리에 이르러 북천에 합친다.
북천(北川) : 내장산의 물이 노령(蘆嶺)의 물과 합치고, 흘러서 현의 서쪽에 이르러 고부군 모천(茅川)에
들어간다.
토산 봉밀ㆍ모시ㆍ대ㆍ감ㆍ석류ㆍ생강.
누정 낙성정(洛城亭) : 객관 서쪽에 있다.
○ 설위(薛緯)의 기문에, "정통(正統) 갑자년 여름에 태수 오련(吳璉)이 관우(館宇)가 낮고 좁아서 무더위를 피
할 수 없다 하여, 이에 관의 서쪽 나무 아래에 돌을 쌓아 올려 계단을 만들고 물을 끌어들여 못을 만들어서 정자
를 지으니, 마음을 즐겁게 하고 성품을 기르며, 더위를 물리치고 서늘함을 맞아 들일 수 있었다.
두건(頭巾)을 젖혀쓰고 홀로 앉아 마음을 열어 외로이 읊조리면, 소송하고 매때리는 시끄러운 일은 아주 없어지
고, 기수에서 목욕하고 무우(舞雩)에서 바람 쏘이는 흥이 완연히 있으니,주D-001 아전과 백성들이 공을 애모하
여 공의 관향(貫鄕)을 취하여 정자 이름을 낙성(洛城)이라 하였으니, 오래도록 공을 잊지 못하는 뜻을 붙인 것이
다." 하였다.
○ 정자는 폐하였는데, 현감 조지곤(趙智崐)이 옛터를 이용하여 누를 짓고 이름을 벽수(碧樹)라 하였다.
손비장(孫比長)의 기가 있다.
납량방(納涼房) : 객관 동쪽에 있는데, 현감 조지곤이 세웠다. 신증 감담루(鑑淡樓) : 객관 동쪽에 있다.
학교 향교 : 현의 북쪽 2리에 있다.
역원 천원역(川原驛) : 현의 남쪽 25리에 있다. 영지원(迎支院) : 현의 서쪽 5리에 있다.
왕신원(王信院) : 현의 남쪽 20리에 있다. 광제원(廣濟院) : 현의 남쪽 30리에 있다.
교량 장교(長橋) : 북천에 있다.
불우 영은사(靈隱寺) : 내장산에 있다.
○ 성임(成任)의 정혜루기(定慧樓記)에, "호남(湖南)에 이름난 산이 많은데,
남원(南原)에는 지리산(智異山), 영암(靈巖)에는 월출산(月出山), 장흥(長興)에는 천관산(天冠山),
부안(扶安)에는 능가산(楞伽山)이 있는데, 정읍의 내장산도 그 중의 하나이다.
산은 현과 겨우 20리의 거리에 있다. 방박(磅礴)하게 높이 솟아 기세가 매우 험하고 경계가 더욱 빽빽하니 참으
로 필추(苾蒭 비구승(比丘僧))들이 선(禪)에 들어가 도를 배울 좋은 땅이다.
그 가운데 큰 사찰을 영은사라 부르는데, 고려 말년에 지엄(智嚴)스님이 처음 거하였고, 본조에 와서 신암(信庵)
스님이 능히 그 자취를 이었고 그 업적을 드날렸다. 그의 문도 해인(海印)스님과 함께 수십 년 동안 이 절에 사
셨는데, 절의 퇴폐함을 보고 다시 영건하고자 하다가, 스님은 열반(涅槃 죽는 것)에 들어가고 해인스님도 또 갔
다. 모셨던 자들이 유골사리(遺骨舍利 부처나 고승이 죽은 뒤 화장하여 나온 구슬)를 받들어 각각 석종(石鐘 종
모양으로 된 부도(浮屠))에 담아 절의 양 옆에 묻어 두었는데, 이 좋은 인연으로 하여 모든 불도들을 모아 산에
서 나무를 베어 오고 골짜기에서 돌을 주워다가 절의 남쪽에 큰 누를 세우니, 소비된 재물이 무릇 얼마며 경영
한 날이 무릇 며칠인데, 정해년에 비로소 터를 닦아 무자년에 일을 마쳤다.
누가 무릇 3칸이며, 높이는 두어 길이나 되는데, 처마와 대들보는 날아갈 듯 들렸고, 창과 난간은 성긴듯 시원하
여 제작한 규모가 장엄하고 화려하여 견줄 데가 없다. 인하여 정혜라는 누호(樓號)를 걸었다.
일찍이 내전(內典 불경)을 읽었는데, 입교(立敎)의 법 세 가지가 있으니, 비(非)를 막고 악을 그치게 하는 것을
계(戒)라 하고, 생각을 버리고 속세의 인연을 잊는 것을 정(定)이라 하며, 혹(惑)을 깨고 진(眞)을 아는 것을 혜
(慧)라 하였다. 이 누에 오르는 자는 아마 생각함이 있을 것이다.
만일 계를 인연하여 정을 내서 번뇌(煩惱)를 벗어나게 하고, 정을 인연하여 혜를 내서 정신을 소통하고 생각을
통달하게 한다면 곧 보고 듣는 것이 청정하지 않은 것이 없고, 행하고 그치는 데가 낙토(樂土) 아님이 없을 것이
다. 저 용처럼 움켜잡고 호랑이처럼 후려치는 듯한 봉우리가 사면을 싸고 있는 것은 사위성(舍衛城)주D-002이
요, 가지와 잎이 무성하여 녹음이 맑고 좋은 것은 염부수(閻浮樹)주D-03이며, 두 샘이 맑고 깨끗하여 뜰을 따라
흐르는 것은 하나는 조계원(曹溪源)주D-04이요, 하나는 팔공덕수(八功德水)주D-05이다.
그 골에 들어가는 자는 마치 수마리(須摩提)주D-06를 만난 듯하고, 그 대에 오르는 자는 마치 금강대(金剛臺)에
오른 것 같으니, 이렇게 하여 중생을 일깨운다면 보리(菩提)를 같이 알게 하는 것이 어찌 멀겠는가.
그렇다면 고을은 이 산을 얻어 더욱 유명하고, 산은 이 절을 얻어 더욱 아름다우며, 절은 이 누를 얻어 더욱 나타
나며, 누는 이 호를 얻어 더욱 빛나리니, 이것은 소인묵객(騷人墨客 시인과 문사)이 놀고 싶어하는 바이며, 기묘
한 자취 좋은 경계는 모든 진세와 영원히 떠난 것이다.
내가 일찍이 호남 관찰사가 되어 공무를 보고 남은 시간에 무릇 산수의 좋은 경치는 다 끝까지 찾아 다녔지만 일
찍이 이 절을 보지 못함을 한하였더니, 다행히 절의 중이 흰 판자를 가지고 와서 나에게 글을 구하여 비졸(鄙拙)
함을 헤아리지 않고, 본말을 대략 적는다." 하였다.
반야사(般若寺)ㆍ각료암(覺了庵) : 모두 오봉산에 있다. 영원사(靈源寺)ㆍ유마사(維摩寺)ㆍ
망해암(望海庵) : 모두 칠보산(七寶山)에 있다. 백련사(白蓮寺) : 혹 내장사라고도 하는데, 내장산에 있다.
사묘 사직단 : 현의 서쪽에 있다. 문묘 : 향교에 있다. 성황사 : 응산에 있다. 여단 :현의 북쪽에 있다.
고적
망부석(望夫石) : 현의 북쪽 10리에 있다. 현의 사람이 장사하러 떠나서 오랫동안 돌아오지 않으니, 그 아내가
산 돌 위에 올라가서 기다렸는데, 혹 남편이 밤에 다니다가 해침을 당하지 않았는가 걱정하여,
진흙탕 물의 더러움을 의탁하여 노래를 지으니, 그 곡을 정읍이라 한다. 세상에 전하기를, "산에 오르면 망부석
에 발자취가 아직도 있다."고 한다.
입암산고성(笠巖山古城) : 석축이며 둘레가 1만 2천 28척이고, 사면은 높고 가운데는 널직하며, 안에 한 시내가
있다.
답곡 부곡(畓谷部曲) : 현의 동쪽 20리에 있다. 수곡 부곡(水谷部曲).
효자본조 전극공(全克恭) : 아버지가 산골에 가서 보리를 추수하다가 호랑이한테 물려 죽게 되었는데,
극공의 나이 겨우 10세였다. 형 치공(致恭)의 아내 중비(仲飛)와 더불어 크게 소리질러 쫓으니 아버지가 죽지
않았다. 일이 나라에 보고되어 정문을 세웠다.
전사용(全思用) : 나이 12세에 어머니가 죽으니, 흙과 돌을 져다가 묘를 만들었다. 일이 나라에 보고되어 정문을
세웠다.
열녀고려 안씨(安氏) : 경덕의(景德儀)의 아내이다. 고려말에 본현에 왜적이 침입하였는데, 안씨가 잡히니 수절
하고 죽었다. 이씨(李氏) : 장군 이득인(李得仁)의 아내이며, 고부(古阜) 이석(李碩)의 딸이다. 득인이 싸움터로
나가 밖에 있는데, 왜구가 그 집에 갑자기 들어와서 겁탈하고자 하니, 적을 욕하면서 순종하지 않고 마침내 해침
을 당하였다.
제영 창송록죽만전산(蒼松綠竹滿前山) : 홍경손(洪敬孫)의 시에, "푸른 소나무 푸른 대는 산 앞에 가득하고 솔솔
부는 서늘 바람 온 몸에 스며 차다." 하였다.
[비고]
연혁 고종 32년에 군으로 고쳤다. 《文獻備考》
방면 현내(縣內) : 끝이 5리. 동면(東面) : 처음이 7리, 끝이 30리. 남일(南一) : 처음이 5리, 끝이 15리.
남이(南二) : 처음이 13리, 끝이 27리. 서일(西一) : 처음이 10리, 끝이 27리. 서이(西二) : 처음이 8리, 끝이 15리.
북일(北一) : 처음이 7리, 끝이 15리. 북이(北二) : 처음이 10리, 끝이 30리.
○ 답곡 부곡(畓谷部曲) : 동쪽으로 20리. 수곡 부곡(水谷部曲).
노령보(蘆嶺堡) : 고갯길이 사나워 도적이 떼를 지어 있으면서 대낮에도 살육과 이탈을 하여 길이 통하지 않았
는데, 중종 15년에 보를 설치하여 방수(防守)하다가 뒤에 폐지하였다.
창고 창(倉) 5 : 읍내에 있다. 산창(山倉) : 장성(長城)의 입암산(笠巖山)에 있다.
토산 붕어ㆍ게.
사원 고암서원(考巖書院) : 숙종 을해년에 세우고, 그해에 사액하였다. 묘정비(廟庭碑)가 있다.
송시열 : 문묘 편을 보라. 권상하(權尙夏) : 충주 편을 보라.
[주 D-001] 기수에서 목욕하고 무우(舞雩)에서 바람 쏘이는 흥이 완연히 있으니, :
《논어》에, 증석(曾晳)이 공자의 물음에 답하여, "어른 대여섯, 아이들 여닐곱 사람과 기수(沂水)에서 목욕하고
무우(舞雩)에 올라가 바람 쏘이며 노래하고 돌아오겠습니다." 하니, 공자도, "그렇게 했으면 좋겠다."고 말한
고사이다.
[주 D-002] 사위성(舍衛城) : 실라벌(室羅筏)·실저(悉底)·시라바리(尸羅婆提)라고도 음역한다.
중인도(中印度) 교살라국(敎薩羅國)의 도성이다. 부처님이 계실 때 바사닉왕 유리왕이 살았으며, 성 남쪽에는
유명한 기원 정사가 있었다. 사위를 나라 이름이라고 하는데, 남쪽의 교살라국과 구별하기 위하여 성 이름을
나라 이름으로 한 것이다.
[주 D-03] 염부수(閻浮樹) : 인도에 널리 분포된 교목. 잎의 길이 4·5촌, 엽맥(葉脈)이 가늘고 엽면이 미끄럽고
광택이 있다. 4·5월 경에 누르스름한 작은 꽃이 핀다. 과일은 새알 만하고 익으면 자색(紫色)이 되고 맛은 떫고
시다.
[주 D-04] 조계원(曹溪源) : 우리 나라 선종(禪宗)의 총칭이다. 고려 신종(神宗) 4년(1200년) 불일보조국사가
승주군 송광산 길상사(吉祥寺)에서 정혜사(定慧寺)를 창설. 희종(熙宗)이 즉위한 뒤에 산 이름을
조계산(曹溪山), 절 이름을 수선사(修繕寺)라고 고친 뒤부터 조계종이란 이름이 생겼다.
[주 D-05] 팔공덕수(八功德水) : 8종의 공덕을 갖추고 있는 물. 8종의 공덕은 경에 따라 같지 않다.
(1)《칭찬 정토경》에는 고요하고 깨끗함, 차고 맑은 것, 맛이 단 것, 입에 부드러운 것, 윤택한 것, 편안하고
화평한 것, 기갈(飢渴) 등의 한량 없는 근심을 없애는 것, 여러 근(根)을 장양(長養)하는 것이라 하였다.
(2)《구사론》에는 달고, 차고, 부드럽고, 가볍고, 깨끗하고, 냄새가 없고, 마실 때 목이 상하는 일이 없고,
마시고 나서 배탈이 나는 일이 없다고 하였다.
[주 D-06] 수마리(須摩提) : 인도 사위성의 수달 장자 딸 수마가리. 수마리·삼마가리라고 음역한다
흥덕현 興德縣
동쪽으로 고부군 경계에 이르기까지 16리, 북쪽으로는 같은 군 경계에 이르기까지 15리,
부안현(扶安縣) 경계에 이르기까지 13리, 남쪽으로 고창현의 경계에 이르기까지 16리, 서쪽으로 같은
현의 경계에 이르기까지 14리, 서울과의 거리는 6백 26리이다.
건치연혁 본래 백제 상칠현(上柒縣)이었는데, 신라 경덕왕(景德王)이 상질(尙質)로 고치어 고부군에 붙였다.
고려에서는 그대로 붙였다가 후에 장덕현(章德縣) -장(章)은 창(昌)으로도 쓴다.- 으로 고치어 감무를 두고
고창을 겸임하였으며, 충선왕(忠宣王)이 즉위하여 왕명(王名)을 피혐하여 지금 이름으로 고쳤다.
본조 태조 원년에 다시 나누었고, 후에 예에 따라 현감으로 만들었다.
관원 현감ㆍ훈도 : 각 1명이다.
군명 상칠ㆍ상질ㆍ장덕ㆍ흥성(興城).
성씨본현 정(鄭)ㆍ장(張)ㆍ진ㆍ조(曺)ㆍ김ㆍ백, 박 : 고창(高敞)에서 왔다. 좌향(座鄕) 조(曺).
남조(南調) 진(陳). 북조(北調) 조(曺).
산천 반등산(半登山) : 현의 남쪽 15리에 있는데, 고창현 편에 자세하다.
화시산(火矢山) : 현의 서쪽 10리에 있다. 소요산(逍遙山) : 현의 서쪽 15리에 있다.
소위령(小葦嶺) : 현의 동쪽 15리에 있는데, 동쪽으로 대위령과의 거리는 8리이다.
구을현(仇乙峴) : 현의 남쪽 15리에 있다. 바다 : 현의 서쪽 25리에 있다.
죽도(竹島) : 현의 서쪽에 있는데, 물길로 7리이다. 선운포(禪雲浦) : 현의 서쪽 20리에 있다.
사진포(沙津浦) : 현의 서쪽 6리에 있는데, 장사 배가 정박하는 곳이다.
신증 용추(龍湫) : 반등산(半登山)에 있는데, 비를 빌면 응함이 있다.
토산 조기ㆍ숭어ㆍ죽전(竹箭) : 죽도에서 난다. 은어ㆍ제호유(鵜鶘油)ㆍ자기(磁器)ㆍ청어(靑魚)ㆍ오징어ㆍ
황합(黃蛤)ㆍ게ㆍ차ㆍ지황(地黃).
성곽 읍성 : 석축인데, 둘레가 3천 1척이고, 높이가 9척이며, 안에 샘 3개가 있다.
신증궁실 배풍헌(培風軒) : 객관 서쪽에 있다.
○ 정창손(鄭昌孫)의 시에, "바다 곁한 큰 고을[雄藩]은 푸른 산봉우리 대해 있고, 구름 찌를 듯한 누대는 우뚝
하게 바람을 임하네. 외로운 배는 사양(斜陽) 밖에 보였다 안보였다 하고, 먼 산구멍은 구름 속에 아물아물한다.
한밤에 나팔소리 달 그림자 흔들고, 한 난간의 꽃 빛은 봄경치 곱게 하네. 바다는 큰 물결 몰아가서 고요한데,
물 넓고 하늘 길어 보는 눈이 통한다." 하였다.
○ 김종직(金宗直)의 시에, "백치(百雉)주D-001의 높은 성 천 길의 봉우리라, 올라보니 몸은 마치 영풍(泠風)을
탄 듯하네.주D-02 노는 사람 웃음소리는 성누 밖에 들려오고, 갯가의 돛단배는 저녁노을 가운데 떠 있다.
한 길은 동서쪽으로 어찌 그리 아득히 먼가. 두 세상 높낮음 저절로 흐릿하네. 오사모(烏紗帽) 반쯤 벗고 깊은
생각 잠겼다가, 묻노라 황혼(黃昏)아, 북소리 몇 번 울렸나." 하였다.
○ "능가산(楞伽山) 몇 만 봉우리 구름에 덮였는데 매실(梅實) 익는 보슬비 동풍을 쫓아온다. 처마의 낙수 소리
자주자주 드문드문 속에 들려오고, 들 빛은 가깝고 아스라한 가운데 푸르르다. 이미 문서처리 거두고 쓸쓸한데
돌아갔으니, 고깃배 따라 허무한 곳 들어가고 싶다. 피로한 행색, 포인(庖人 음식 맡은 사람)의 괴로움을 살피
지 못하고, 다시 석잔술에 대도통(大道通)주D-03만 생각한다." 하였다.
○ 유순(柳洵)의 시에, "호남의 천만 봉우리 다 밟고, 문득 이 땅에 와서 또 바람을 타는구나. 파도치는 큰 바다에
조수가 처음 오르고, 구름 개인 긴 공중엔 달이 중천에 떴다. 북궐(北闕)로 마음 향하나 하늘이 깊고 멀어,
동산(東山)에 머무니, 빗발이 자욱하다. 난간에 기댄 몸 다시 일으켜 초연(超然)히 생각하니, 온 세상 어느 누가
개결하고 통달함을 알아줄 건가."
○ "높은 쌍 깃발 걷고 푸른 봉에 머무르니, 여덞 창엔 공중 바람 모두 들어온다.
연기와 묏부리는 난간 밖에 점점(點點)이 보이는데, 구름 바다는 손가락질하여 돌아보는 가운데 가물가물한다.
아침 해 오를 때는 맑고 시원한 것 더하더니, 저녁 안개 잠긴 후엔 가장 침침하여진다. 올라 보니 난새[鸞]를
타고 가는 공상에 스스로 만족하여, 봉래(蓬萊)ㆍ영주(瀛州) 가는 길 통한 듯하다." 하였다.
○ 남곤(南袞)의 시에, "깎아 세운 듯 잇닿은 천 만 봉인데, 아지랑이 하루살이는 큰 바람에 막혀 있구나.
한 지역 좋은 풍경은 난간 밖 아침이고, 두어 점(點)의 제주(齊州 중국(中國)을 말하는 것)는 눈에 보이네.
별포(別浦)의 조수 소리 어지럽게 떠들고, 석양의 산 기운은 멀리 부옇구나. 채색 붓 없는 내가 그림으로 그릴 수
없어, 앞의 글제 주워 모아 회통(會通 모아서 하나로 합친 책)을 만든다." 하였다.
○ 박휘겸(朴撝謙)의 시에, "정정(亭亭)하게 우뚝 솟은 만길 봉우리, 봉 꼭대기 높은 누각 먼 바람에 임하였네.
땅은 봉도(蓬島) 삼청(三淸) 경계에 연하였고, 사람은 소상(潚湘) 팔경(八景) 가운데 있다. 구름은 산허리를 두
르고 아득하게 비꼈고, 물은 하늘 그림자 머금고 뿌연 하늘에 닿았네. 홀연히 먼 포구 바라보니 돌아오는 돛단
배 빠르고, 뱃길[水道]은 멀리 이어져 한수(漢水)로 통한다." 하였다.
학교 향교 : 현의 남쪽 2리에 있다.
원우 해천원(蟹川院) : 현의 남쪽 10리에 있다.
신증 구을원(仇乙院) : 현의 서쪽 10리에 있다. 갑향원(甲鄕院) : 현의 남쪽 15리에 있다.
불우 고봉사(高峯寺)ㆍ신흥사(新興寺)ㆍ용계사(龍溪寺)ㆍ운장사(雲藏寺)ㆍ
용장사(龍藏寺) : 모두 반등산(半登山)에 있다.
백운사(白雲寺) : 화시산(火矢山)에 있다. 수월사(水月寺) : 소요산(逍遙山)에 있다.
교량 사진교(沙津橋) : 사진에 있다.
사묘 사직단 : 현의 서쪽에 있다. 문묘 : 향교에 있다. 성황사 : 현의 성 안에 있다. 여단 : 현의 북쪽에 있다.
고적
오태리고성(吳泰里古城) : 현의 서쪽에 있다. 좌향(坐鄕) : 현의 동쪽 8리에 있다.
남조향(南調鄕) : 현의 남쪽 13리에 있다. 북조향(北調鄕) : 현의 북쪽 7리에 있다.
인물
고려 장영우(張迎祐) : 사무에 능하여 재간과 능력으로서 칭찬을 받았고, 관직이 호부 상서(戶部尙書)에 이르렀
다.
정극온(鄭克溫) : 천성이 온화하고 정성스러워 무릇 부임하는 곳은 위엄과 은혜가 아울러 나타났으며, 당시에는
혁혁(赫赫)한 이름이 없었지만, 떠나간 후에는 그를 사모함이 있었다. 전공(戰功)을 여러번 세워 벼슬이 금자광
록대부 참지정사 판례부사(金紫光祿大夫參知政事判禮部事)에 이르렀고, 시호는 익렬(翼烈)이며, 강종묘정(康宗
廟庭)에 배향(配享)되었다. 진사문(陳斯文) : 벼슬이 정당문학(政堂文學)에 이르렀고, 창양군(昌陽君)에 봉작되
었다.
신증효자본조 진간(陳侃) : 읍의 아전이다. 나이 14세에 아버지가 임질을 앓아 죽을 지경에 이르렀는데, 처방과
약은 효험이 없었다. 진간이 그곳을 빠니, 돌이 나오고 병이 드디어 나았다. 일이 나라에 보고되어 정문을 세웠
다.
오준(吳俊) : 아버지가 종기를 앓고 있는데 입으로 빨았고, 병이 위태해서는 똥을 맛보았으며, 죽게 되니 몹시
슬퍼하면서 예를 다하였다. 일이 나라에 보고되어 정문을 세웠다.
제영 강교분로입연하(江橋分路入煙霞) : 이곡의 시에, "명산(名山) 찾기 위하여 이 곳을 지나는데 강다리에서
갈라진 길 연기와 안개 속으로 들어가네. 돌아와 죽림(竹林) 밑에서 말을 쉬게하니,
한 그루의 산다화(山茶花) 아직 꽃피지 않았네." 하였다.
[비고]
연혁 고종 32년에 군으로 고쳤다. 《文獻備考》
방면 현내(縣內) : 끝이 5리이다. 일동(一東) : 처음이 10리이고, 끝이 15리이다.
이동(二東) : 처음이 5리, 끝이 20리이다. 일남(一南) : 처음이 3리, 끝이 15리이다.
이남(二南) : 처음이 10리, 끝이 20리이다. 일서(一西) : 처음이 7리, 끝이 15리이다.
이서(二西) : 처음이 3리, 끝이 20리이다. 북면(北面) : 처음이 5리, 끝이 20리이다.
○ 좌향(坐鄕) : 동쪽으로 8리이다.
남조향(南調鄕) : 남쪽으로 13리이다. 북조향(北調鄕) : 북쪽으로 10리이다.
성씨 고성(古城) : 동쪽으로 15리이다.
창고 읍창(邑倉)ㆍ해창(海倉) : 사진포(沙津浦) 동쪽에 있다.
교량 각고교(脚高橋) : 서쪽으로 10리이다. 장교(長橋) : 동북쪽으로 10리. 오천교(烏川橋) : 동쪽으로 5리이다.
석교(石橋) : 서쪽으로 7리이다.
토산 대나무ㆍ칠ㆍ닥나무ㆍ뽕나무ㆍ감.
[주 D-001] 백치(百雉) : 성 위 얕은 담은 몇 걸음 간격으로 끊겼다가 다시 세워지는데, 한 번 변한 것을 치라
하였다.
[주 D-02] 올라보니 몸은 마치 영풍(泠風)을 탄 듯하네. : 전국시대(戰國時代)의 사상가(思想家) 열어구
(列禦寇)라는 이가 바람을 타고 다니니, 영연(泠然 가벼운 모양)하여 좋다고 한 고사가 있다.
여기서는 높은 성에 오르니, 몸이 마치 나는 듯 가볍다는 뜻이다.
[주 D-03] 대도통(大道通) : 당 나라 이태백(李太白)이 석 잔 술에 큰 도가 통했다고 한 고사가 있다.
부안현 扶安縣
동쪽으로 김제군(金堤郡)의 경계에 이르기까지 13리,
남쪽으로 고부군(古阜郡)의 경계에 이르기까지 18리, 흥덕현(興德縣)의 경계에 이르기까지 52리,
북쪽으로 만경현(萬頃縣)의 경계에 이르기까지 12리, 서쪽으로 바닷가에 이르기까지 11리,
서울과의 거리는 5백 77리이다.
건치연혁 부령현(扶寧縣)은 본래 백제 개화현(皆火縣)이었는데,
신라 때 부령 -혹 계발(戒發)이라고도 칭한다.- 으로 고치어 고부군에 붙였고,
고려 때에도 그대로 붙여 두었다가 후에 감무를 두어 보안(保安)을 겸임하였다.
보안현은 본래 백제 흔량매현(欣良買縣)이었는데, 신라 때 희안(喜安)으로 고치어 고부군에 붙였고,
고려 때 보안으로 고치어 고부군에 그대로 붙여 두었다가, 후에 부령감무로 겸임하게 하였으며,
신우 때에 두 현에 각각 감무를 두었다.
본조 태종 14년에 보안을 다시 부령에 합쳤고, 15년에 또 나누었다가 8월에 다시 합쳤으며,
다음해 7월에 또 나누었다가 12월에 두 현을 또 합치어 지금 이름으로 고쳤다.
익년(翌年)에 흥덕진(興德鎭)을 파하여 본현에 옮겨서 부안진(扶安鎭)이라고 부르고,
병마사(兵馬使)로써 판사(判事)를 겸하게 하였고,
세종 5년에 규례대로 고치어 첨절제사(僉節制使)로 만들었다가 후에 현감으로 고쳤다.
관원 현감ㆍ훈도 : 각 1명이다.
군명 개화ㆍ부령(夫寧)ㆍ계발(戒發)ㆍ보안ㆍ낭주(浪州)ㆍ흔량매ㆍ희안.
성씨부령 김ㆍ장(張)ㆍ황(黃)ㆍ이(李)ㆍ신(辛), 심(沈) : 다른 곳에서 왔다. 보안 한(韓)ㆍ송(宋)ㆍ황(黃)ㆍ
호(扈)ㆍ안(安)ㆍ임(林)ㆍ임(任). 고촌 호(扈).
풍속 풍속은 단자(蜑子 중국 남방 해변가에서 생활하는 종족)와 같다 : 이규보의 시에, "습속은 남방 단자와 많
이 같으니 현으로 된 것이 잠총국(蠶叢國)으로부터 시작주D-001된 줄 어느 누가 믿으랴." 하였다.
형승
변산천부(邊山天府) : 이규보의 시에, "변산(邊山)은 예로부터 천부(天府)로 불리면서, 긴 재목 잘 뽑아 동량(棟樑)
재목에 대비하네." 하였다. 강산청승(江山淸勝) : 앞 사람의 시에, "강과 산의 맑고 좋음은 영주(瀛洲)ㆍ봉래(蓬萊)
와 겨룰 만하니, 옥을 세우고 은을 녹인 듯 만고에 변하지 않는다." 하였다.
산천 변산 : 보안현에 있다. 지금 현과의 거리는 서쪽으로 25리인데, 능가산으로도 불리고, 영주산으로도 불린다.
혹 변산(卞山) 이라고도 하는데, 말이 돌아다니다가 변(邊)으로 되었다 한다. 변한(卞韓)이라는 이름을 얻은 것이
이 때문이라 하나 그런지 아닌지 알지 못한다.
봉우리들이 백여 리를 빙 둘러 있고 높고 큰 산이 첩첩이 싸여 있으며, 바위와 골짜기가 깊숙하여,
궁실과 배의 재목은 고려 때부터 모두 여기서 얻어 갔다. 전하는 말에는 호랑이와 표범들이 사람을 보면 곧 피하
였으므로 밤길이 막히지 않았다 한다.
○ 이규보의 기에, "변산은 나라 재목의 부고(府庫 창고)이다. 소를 가릴 만한 큰 나무와 찌를 듯한 나무 줄기가
언제나 다하지 않았던 것이다. 층층의 산봉우리와 겹겹의 산등성이가 올라가고 쓰러지고 굽고 퍼져서, 그 머리
와 끝의 둔 곳과 밑 뿌리와 옆구리의 닿은 곳이 몇 리나 되는지 알지 못하겠으나, 옆으로 큰 바다를 굽어보고 있
다." 하였다. 신증 김종직의 시에, "우강(禺强 신의 이름이다.
《장자(莊子)》에 우강을 얻어 북극(北極)을 세웠다 함)이 힘써 옮긴 뜻 상상하니, 까마득한 몇 만년 땅의 주축
(主軸)을 누르기 위함일세. 성루[譙樓]는 바로 높은 푯말[標]과 맞섰고, 바다는 이내 짙은 안개 걷혀 시원하다.
울창한 좋은 재목 일천 봉우리에 모였고, 소담한 보찰(寶刹 큰절)은 뭇 마귀(魔鬼)들도 알고 있네.
산 가운데 몇 개의 황망한 일은, 춘경(春卿 이규보의 자)의 백 마디 시 끌어 냄일세." 하였다.
행안산(幸安山) : 현의 남쪽 10리에 있다. 석불산(石佛山) : 현의 서쪽 20리에 있다.
바다 : 현의 서쪽 25리에 있다. 동진(東津) : 통진(通津)이라고도 한다.
벽골제(碧骨堤)와 눌제(訥堤)의 물이 합해져 북쪽으로 흘러 이 나루가 된다. 현의 동쪽 16리에 있다.
사포(沙浦) : 현의 서쪽 25리에 있다. 장신포(長信浦) : 현의 서쪽 20리에 있다.
유포(柳浦) : 현의 남쪽 50리에 있다. 덕달포(德達浦) : 현의 북쪽 20리에 있다.
굴포(堀浦) : 현의 서쪽 25리에 있다. 구도(鳩島) : 현의 서쪽 바다 가운데에 있는데, 둘레가 20리이다.
위도(蝟島) : 현의 서쪽 바다 가운데에 있는데, 둘레가 30리이며, 어량(魚梁 살을 매어 고기를 잡는 장치)이 있다.
○ 설문우(薛文遇)가 시어(侍御) 최함일(崔咸一)이 위도로 귀양가는 것을 전송한 시에, "곧은 절개라야 참 오부
(烏府 어사대)인데, 변변찮은 내 재주로 치관(豸冠 어사)을 더럽혔네. 수놓은 비단같은 재주야 어찌 같으랴만
배 속에 들어 있는 보배 서로 쏟았었네. 성대(盛代)에서 보탠 것은 비록 없지만, 동료들은 모두 다 높이 보았네.
임금을 착하게 하려는 마음 버리지 못해, 나라 걱정에 두 귀밑털 헛되이 쇠는구나. 간사한 무리들은 장우(張禹)
따위가 많은데,주D-002 서로 알아주는 비간(比干) 같은 이는 너무 적다. 이 때에 갈라져서 그대는 가고 나는 머
무르니, 어느 곳에서 평안함을 물을 것인가. 시루는 깨어졌는데 누가 애석해 하나. 하늘은 높아도 듣기는 어렵
지 않다네.
용천(龍泉)은 도리어 옛 옥터로 돌아갔는데, 위도(蝟島)는 이 새 벼슬이로다. 두 곳에는 외로이 둥근 달 떴는데,
조각배엔 한 낚싯대로다. 다시 만날 날이 있을 터이니, 잘 가서 먹는 것 조심하게나." 하였다.
계화도(界火島) : 현의 서쪽 30리에 있는데, 조수가 물러나면 육지와 연결된다.
우진암(禹陳巖) : 변산 꼭대기에 있다. 바위가 둥글면서 높고 크며 멀리서 보면 눈빛이다. 바위 밑에 3개의 굴이
있는데, 굴마다 중이 살고 있으며, 바위 위는 평탄하여 올라가 바라볼 수 있다.
토산 조기ㆍ오징어ㆍ청어ㆍ은어[銀魚]ㆍ홍어(洪魚)ㆍ준치ㆍ웅어ㆍ도미ㆍ숭어ㆍ갈치ㆍ새우ㆍ조개ㆍ게ㆍ굴ㆍ
송이[松蕈]ㆍ모시ㆍ화살대 -도이곶(都邇串) 및 모든 섬에서 난다.-ㆍ자기(磁器). 신증 사슴.
성곽 읍성 : 흙으로 쌓았는데, 둘레가 1천 1백 88척, 높이가 15척이요, 안에 샘물이 12개 있으며,
동쪽 서쪽 남쪽 3면에 모두 성문다락[譙樓]을 세웠다.
신증 돌로 쌓았는데, 둘레가 1만 6천 4백 58척, 높이가 15척이요, 안에 샘물이 16개 있다.
○ 김종직의 시에, "천길 산봉우리 누관(樓觀)이 기이하여 억지로 쇠약하고 피로한 몸 이끌고 높은 곳에 의지했
네. 금을 녹여 낸 듯한 해는 군산도(群山島)에 떨어지고, 흰 것을 묶어 세운 듯한 연기는 벽골피(碧骨陂)에 비꼈
어라. 몸이 반 공중에 있으니, 눈 가는 곳이 멀고, 시는 일만 형상 더듬자니 술잔 놓기 더디구나.
능가산은 예로부터 천부(天府 하늘이 마련한 창고)로 불렸는데, 오늘날 쇠잔한 용모 대할 줄 어찌 기약했으랴."
하였다.
관방 금모포영(黔毛浦營) : 현의 남쪽 51리에 있다.
○ 수군만호(水軍萬戶) 1명이다.
봉수 월고리산 봉수(月古里山烽燧) : 현의 서쪽 75리에 있는데, 남쪽으로 무장(茂長) 소응포산(所應浦山)에 응
하고 북쪽으로 점방산(占方山)에 응한다.
점방산 봉수(占方山烽燧) : 현의 서쪽 61리에 있는데, 남쪽으로 월고리에 응하고 북쪽으로 계화도(界火島)에
응한다.
계화도 봉수 : 북쪽으로 만경현 길관봉수에 응하고 남쪽으로 점방산에 응한다.
누정 취원루(聚遠樓) : 곧 성의 남쪽 문루(門樓)인데, 서쪽으로 변산(邊山)을 대하고, 북쪽으로 큰 바다를 바라
보며, 동쪽과 남쪽은 큰 들을 임하였다.
○ 이행(李行)의 시에, "높은 봉우리는 석보(石堡)를 이고 섰고, 상위(象緯 하늘)는 누 가운데 닿았네.
바다 위 돋은 해는 벌겋게 물결 흔들고, 구름에 잠긴 산은 푸른 것이 공중을 찌른다. 옷 가다듬고 세속 먼지 털어
버리니, 탈태하여 신선 궁에 오른 듯하네. 해질 녘에 긴 수풀 아래서는, 두 겨드랑이에 신선한 바람 스며든다."
하였다.
○ 허종(許琮)의 시에, "높은 누 바람불어 흥취가 유유한데, 해 저문 들 밖에는 말 한 필 오는구나.
아득하게 외로이 뜬 배는 어디로 가는 것이냐? 그대에게 부탁하여 같이 타고 봉래산 찾아가련다." 하였다.
청원루(淸遠樓) : 객관 동쪽에 있는데, 현감 성수겸(成守謙)이 세웠다. 신증 김종직의 시에, "소쇄(潚洒 산뜻하고
깨끗한 모양)함이 참으로 팔영루(八詠樓)와 같은데, 순식간에 지어진 화려한 누각 성후(成侯 성수겸을 말한다)
에게 하례한다. 외딴 마을 조석(潮汐)은 시 읊는 소리에 응하고, 먼 산의 구름 안개 바라보는 속에 걷혀진다.
공무를 벗어나서 마음 놓고 술잔 잡는데, 무더위 힘 없어지니 어느덧 가을이네. 돌아가기 허락 받은 병든 손이
맑은 흥에 취하여, 바다 머리 장기(瘴氣) 속에 머물고 있음을 깨닫지 못하노라." 하였다.
김영(金瑛)의 시에, "바다 산 1천 리에 웅장한 누 있는데, 태수(太守)의 재명(才名), 곽세후(郭細侯)이네.
3월이라 들꽃은 혼연(渾然)히 떨어지려 하는데, 한 주렴의 봄 안개는 전부 걷히지 않는구나. 작은 연꽃 화장하
고 처음으로 물에 뜨고, 푸른 대엔 우수수 유달리 가을 기운 모였어라. 담담한 아지랑이, 방초(芳草) 우거진 물
가에서 미인(美人)들은 공연히 바라보다 몇 번이나 머리 긁었나." 하였다.
망해대(望海臺) : 변산에 있다. 신증 개풍루(凱風樓) : 김종직의 시에, "개풍루 위 마음대로 올라와 보니, 발해
(渤澥 서해) 동쪽 빈 터는 지형 더욱 깊숙하네. 낚싯대 두 길쯤 솟은 해는 불그스레 은은하고, 천 두락 맑은 못은
푸른 것이 침침하다. 거민(居民)들은 고기잡이의 이익을 다투어 찾는데, 게으른 손은 상궐(象闕 하늘같은 대궐)
에만 마음이 달려 있네. 당발(棠發 감사를 말함) 2년에 무슨 일 하였나. 난간에 의지하여 그런대로 세상 마음
씼었노라." 하였다.
학교 향교 : 현의 남쪽 2리에 있다.
역원 부흥역(扶興驛) : 현의 서쪽 2리에 있다. 동진원(東津院) : 동진 언덕에 있다.
수세원(手洗院) : 현의 남쪽 60리에 있다. 금설원(金設院) : 현의 남쪽에 있다.
불우 소래사(蘇來寺) : 신라의 혜구두타(惠丘頭陀)가 창건한 것인데, 크고 작은 두 소래사가 있다.
○ 정지상(鄭知常)의 시에, "옛 길은 적막하여 솔뿌리 엉겼는데, 하늘이 가까워 북두칠성 만질 수 있네. 뜬구름
흐르는 물 따라 손이 절에 이르고, 붉은 단풍 푸른 이끼 속에 중은 문을 닫았구나. 가을 바람 다소 차갑게 지는
해에 불고, 산 달 점점 맑아오니 잔나비 맑게 운다. 기이하다, 수북한 눈썹의 한 늙은 중이여,
오랜 세월 인간 세상 꿈꾸지 않았구나." 하였다.
○ 이곡(李穀)의 시에, "높고 뛰어난 해안산(海岸山)이라 일찍 들었는데, 한가함을 틈타서 마음 놓고 등반 하였
네. 사람들은 하늘에서 내려오는 듯 사다리가 1천 척이요, 중은 구름과 반 칸 집을 나누었다. 고요하게 있어도
아직껏 얽맨 세상 벗지 못했으니, 세상의 인연을 어찌 감히 상관할쏘냐. 푸른 산속 어느 날에나 내 머무름 용납
할까, 대지팡이 짚신으로 날마다 왕래한다." 하였다.
○ 중 원감(圓鑑)의 시에, "바닷가에 명산(名山) 있음을 옛날부터 들었더니, 다행히도 찾아가서 오랜 소원 풀었
어라. 일만 골짜기의 연기와 안개는 가고 쉬는 속에 있고, 일천 겹 싸인 섬들 돌아보고 바라보는 사이에 있네.
의상암(義湘庵 절 이름) 높이 솟아 하늘이 기둥에 잇닿아 있고, 자씨당(慈氏堂 당(堂) 이름) 깊숙하여 돌이 관문
(關門) 되어 있네. 세상 피해 높이 살긴 이만한 곳 없으리니, 고달픈 새 미리 알고 돌아온 것 자랑한다."주D-003
하였다.
○ 중 선탄(禪坦)의 시에, "바위 아래 잔잔한 옥같은 시냇물, 산인(山人 산속에 사는 중을 말함)의 꿈 끊어지니
밤기운 쓸쓸하구나. 두견새도 역시 서루(西樓)의 달 좋아해서 밤이면 배꽃 핀 가지 위에서 울고 있다오."
○ "한 평생 가는 곳마다 낮은 등잔처럼 설움 받으니, 사해의 풍진(風塵) 속에 부평처럼 붙여 사네.
5경의 산 기운 물처럼 서늘한데, 누워서 베개 위에 떨어지는 남계(南溪) 소리 듣는다."
○ 안장한 말 타고 세상일에 바쁘다가 머리 반백(半白)되었는데, 능가(楞伽)에서 병얻어 일찍 와서 쉬었노라.
한 줄기 강 안개 비에 서산은 저무는데, 성근 주렴 길게 걷고 누에 내리지 않는구나." 하였다.
도솔사(兜率寺) : 내(內)ㆍ외(外)의 두 도솔이 있다.
○ 이곡의 시에, "산 찾는 것이 신선 찾기 위함은 본시 아니지만, 천리를 유람함이 어찌 우연이겠나.
호겁(浩劫 불교에서 말하는 인간의 큰 재화(災禍))이 인연 되어 내원(內院 도솔천(兜率天)의 내부인데, 곧 미륵
보살의 처소를 말함)으로 돌아와서, 상방(上方 산 위의 절) 세계에서 모든 하늘[諸天 불교에서는 하늘이 여덟으
로 되어 있는데, 그 여러 하늘은 마음을 수양하는 경계를 따라서 나뉘어 있으며, 이 여덟의 모든 하늘을 말함]에
고백한다. 학(鶴)이 와서 암두(巖頭)에 전각 일찍 지었고, 용은 가도 돌 틈의 샘물 아직 남아 있다.
심히 부끄럽다. 향산(香山) 백거사(白居士)처럼 결사(結社)를 못했는데, 머리 이미 희었구나." 하였다.
의상암(義湘庵) : 신라 중 의상(義湘)이 살던 곳이다.
○ 김극기의 시에, "기묘한 일만 겹 바위 높은 하늘에 비껴 있어, 위로 구름 끝까지 올라가니, 길 비로소 끊어졌다.
홀연히 의상대사의 여운(餘韻) 있음이 기쁘고, 하늘에 닿은 옛 잣나무 어둠 속 바람에 읊조린다." 하였다.
청림사(淸臨寺) : 중 선탄의 시에, "구름 떠돌아도 옛 산을 생각하고, 사슴은 숨어서 깊은 숲으로 돌아가네. 부귀
영화는 다만 흙같은 것인데, 높고 한가함을 금주고 산 다네. 솔 바람에 학의 울음소리 들려오고, 고개 마루 뜬 달
은 거문고에 가득하네. 이 뒤로는 세상의 좋은 경치 사람이 와도 찾을 곳이 없으리." 하였다.
원효방(元曉房) : 신라 때 중 원효(元曉)가 거처하던 곳인데, 방장(方丈 절의 주지가 거처하는 방)은 지금도 남아
있다.
○ 이규보의 시에, "산 따라 높은 사다리 지나고, 발 포개어 좁은 길 걷는다. 위에 백 길 산꼭대기 있는데, 효성
(曉聖 원효대사의 별칭)이 일찍 방 지었도다. 신령스런 발자취 어딘지 아득하고, 유영(遺影 화상)은 아소(鵝素
종이폭)에 남아 있구나. 다천(茶泉)은 찬 구슬처럼 고였는데, 한 웅큼 마셔보니 젖같은 단맛이라. 이 땅에 옛날
에는 물이 없어서 불도들이 머무르기 어려웠더니, 원효대사 한 번 와서 머문 뒤로는 맑은 물이 바위 구멍에서 솟
아 났다네. 우리 스님 그 높은 자취 이어 받아서, 짧은 갈옷 입고 여기 와 살고 있다네.
여덟 자 방을 한 번 둘러보니, 오직 한 켤레의 신발만이 남아 있도다. 옆에서 모시는 이 또한 없어서 홀로 앉아
아침저녁 보내고 있네. 소성(小性 원효대사)이 이 세상에 다시 나오신다면, 감히 허리 굽혀 절하지 않을 쏜가."
○ "좋은 일 들은 지 오래였는데, 신령한 자취 아득해 찾을 수 없네. 깊은 곳 다람쥐는 배고파서 굴을 나오고, 외
학은 고달파서 숲에 앉는다. 탑 그림자는 그늘져 끊어지고, 종소리는 멀리 가서 잠잠하네. 언제나 묵수(墨綬 검
은 인끈인데 곧 지방관을 말함) 풀고 자유 몸 되어 여기다 깊숙히 띠집 지을꼬." 하였다.
○ 김극기의 시에, "육방성(六方聖 육방은 동ㆍ서ㆍ남ㆍ북ㆍ상ㆍ하를 말하며, 육방성은 모든 부처님을 말한다)
을 아득히 생각하니, 남긴 자취 어디서 찾으려나. 다만 들 사슴같이 돌아왔을 뿐이니, 계림(鷄林)에 간 것 무슨
흠이리. 각수(覺樹 보리수임. 부처님이 정각(正覺)을 이루던 곳을 덮었던 나무라 하여 말한 것임)에는 천가지
꽃 떨어지고, 진공(眞空)에는 달 하나 침침하구나. 아직도 남은 것은 무진장하여 산과 물이 스스로 높고 깊도다."
하였다.
불사의방장(不思議方丈) : 신라 때 중 진표(眞表)가 살던 곳인데, 1백 척 높이의 나무 사다리가 있다. 사다리를
타고 내려오면 곧 방장(方丈)에 이를 수 있고, 그 아래는 모두 무시무시한 골짜기이며, 쇠줄로 그 집을 잡아 당
겨서 바위에 못질하였는데, 세상에서는 바다의 용이 만든 것이라 한다.
○ 이규보의 시에, "무지개 같은 사다리 발 밑에 길다랗구나. 몸을 돌려 곧장 내리면 만길이 넘는다.
지인(至人 도덕이 극치에 이른 사람)은 이미 가고 자취마저 없는데, 옛 집은 누가 붙들었기에 아직도 쓰러지지
않았나. 장육(丈六 1장 6척의 불상 이라는 뜻)은 어느 곳으로부터 나타나는고.
대천(大千) 세계는 그 가운데 감추었네. 완산(完山)에 이은(吏隱)주D-04하는 세상 일 잊은 나그네,
손 씻고 와서 한 조각 향 태운다." 하였다.
문수사(文殊寺) : 진표가 세운 것인데, 돌 부도(浮屠)가 있다.
실상사(實相寺) : 이상의 불우(佛宇)는 모두 변산에 있다.
교량 동진교(東津橋) : 동진 위에 있다. 신우(辛禑) 초년에 왜선(倭船) 50여 척이 웅연(熊淵)에 배를 대어 적현
(狄峴)을 넘어서 부령현(扶寧縣)을 노략질하고, 동진교를 헐어서 우리 군사로 하여금 더 나아가지 못하도록
하였다. 상원수(上元帥) 나세(羅世)가 변안열(邊安烈) 등과 더불어 밤에 다리를 구축하고, 군사를 나누어 적을
공격하여 마침내 크게 승리하였다.
사묘 사직단 : 현의 서쪽에 있다. 문묘 : 향교에 있다. 성황사 : 현의 북쪽 5리에 있다. 여단 : 현의 북쪽에 있다.
고적
고읍성(古邑城) : 현의 동쪽에 있는데, 둘레가 5백 척이고, 안에 샘이 6개 있다.
보안폐현(保安廢縣) : 현의 남쪽 30리에 있다. 고촌향(鼓村鄕) : 현의 남쪽 27리에 있다.
신덕소(申德所) : 현의 동쪽 5리에 있다.
신증명환본조 소효식(蘇效軾)
인물
고려 김구(金坵) : 희종조(熙宗朝)에 과거에 올라 벼슬이 찬성에 이르렀고, 시호는 문정(文貞)이며, 문장이 그
당시에 으뜸이었다. 매양 표문(表文)을 짓는데, 일을 따라 문장을 꾸민 것이 모두 이치에 맞았다.
원 나라 한림학사(翰林學士) 왕악(王鶚)이 매양 표사(表辭)를 볼 때마다 반드시 잘 했다고 칭찬하면서 그의 얼
굴 보지 못함을 한하였다. 신증본조 성중엄(成重淹) : 과거에 급제하여 홍문관 박사(弘文館博士)가 되었으며,
문장으로 이름이 있었다.
연산조(燕山朝)에 사화(史禍)를 만나 귀양갔다가 마침내 피살되었다. 지금의 임금 초년에 부제학을 추증하였다.
신증효자본조 송세정(宋世貞) : 천성이 지극히 효성스러웠다. 아버지가 종기를 앓는데, 상처를 빨아 병이 나았다.
아버지가 죽자 3년 동안 묘에 여막을 짓고 살았다. 후에 어머니의 상을 당하여 너무 슬퍼하더니, 병이 되어 죽었
으므로 정문을 세웠다.
이성간(李成幹) : 젊었을 때 어머니가 종기를 앓는데, 상처를 빠니 병이 곧 나았다. 아버지가 오랜 병이 있었는
데, 몇 년 동안 밤낮으로 시약(侍藥)하고, 옷을 벗지 않았다. 병이 위태하자 똥을 맛 보았고, 죽자 3년 동안 죽을
마셨다.
문랑(文郞) : 아버지가 악질(惡疾)을 앓는데, 손가락을 잘라 술에 타서 먹이니 병이 나았다. 일이 나라에 보고되
어 정문을 세웠다.
최필성(崔弼成) : 어머니가 유종[乳癰]을 앓는데 입으로 빠니 병이 나았다. 아버지가 오랜 병으로 백약(百藥)이
무효하고, 의사의 말은, "박쥐가 있으면 고칠 수 있다." 하였다. 때는 추운 겨울이라 구하여도 얻지 못하여 울면
서 하늘에 호소하니, 박쥐가 저절로 나오므로 잡아 약에 타서 먹였더니 병이 과연 나았다. 후에 또 병이 위태하
자 똥을 맛보았고, 죽자 매우 슬퍼하며 예를 다하였다. 일이 나라에 보고되어 상으로 벼슬을 내렸다.
열녀본조 김씨(金氏) : 일찍 남편을 여의었는데, 부모들이 다시 시집보내려 하자, 김씨는 다른 사람에게는 시집
가지 않겠다고 맹세하고 강물에 빠져 죽으려 하니, 부모들이 그만 두었다. 김씨는 한평생 흰 옷을 입고 제사를
받들며 고기를 먹지 않았다.
제영 입촌봉연사(入村逢燕社) : 이규보의 시에, "직무를 수행하느라고 겨를이 없어, 역말 타고 평탄한 들 달려
가는데, 길가에는 꽃이 어지럽고, 뉘집인지 대나무가 동산 덮었네. 등나무는 얽히어 넘어지는 덩굴 붙들고,
괴화나무는 쓰러져 외로운 뿌리를 드러낸다. 달리는 수레는 학을 모는 듯하고, 가벼운 복장은 잔나비도 따를 만
하구나. 호숫가에는 봄 안개 자욱하고, 만점(蠻店)에는 장운(瘴雲 독기가 어린 구름)이 따스하네. 이끼 살아나니
새 빛이 더해지고, 조수 사나우니 옛 흔적 지나누나. 마을로 들어오니 연사일이라 바다를 바라보며 오번(鰲番)
을 묻는다.주D-005 옛 방죽은 새벽에 수문여는데, 빈 성은 낮에도 문 닫았구나. 군의 아전은 도로에서 맞이하고,
읍 수령은 나와서 술 항아리 연다. 고달픈 것은 모두 나라일이고, 마음에 흥겨움도 또한 임금의 은혜이네.
모래 가에는 갈매기 홀로 춤추고, 숲 밖에는 새들이 조잘대누나. 늙은이들 놀라서 피하지 말라. 서생(書生)은 높
은 체하지 않는다네." 하였다.
만리장도분백마(萬里壯濤奔白馬) : 앞사람의 시에, "한 봄에 이 강머리 세 번을 지났는데, 나라일이니 어찌 한 번
인들 쉬지 못한 것 원망하랴. 만리의 세찬 물결 백마가 달리는 듯하고, 천년 묵은 늙은 나무 푸른 용이 누운 듯하
다. 바다 바람은 불어 만촌(蠻村)의 피리와 어울리고, 모래 위 달은 갯가의 나그네 배를 맞는구나. 호위하고 가는
추동(騶童)은 응당 날 괴이하게 여기리라. 좋은 경치 만나면 오래 서서 머물렀으니." 하였다.
고석낭용평작려(古石浪舂平作礪) : 앞사람의 시에, "흐르는 물소리 속에 저녁 되고 다시 아침 되니, 바다 마을 울
타리는 그리도 쓸쓸하구나. 호수가 맑으니 마음의 달은 교묘하게도 도장 찍은 듯하고, 개포 넓으니 포구로 이른
조수 마구 삼킨다. 오래된 돌 물에 잠겨 편평한 숫돌 되었고, 부서진 배 이끼에 싸여 다리 되었네. 강과 산 일만
경치 노래로 표현 다 못하겠으니, 단청하는 화필(華筆)을 청하여 묘사하리라." 하였다.
호로혜혜음상엽(蝴蟧嘒嘒吟霜葉) : 김극기의 시에, "언덕 위의 싸늘한 바람 짤막한 쑥대 굴리니, 나부껴 떠도는
것 도리어 나그네 신세와 한가지네. 매미는 맴맴 단풍잎을 노래하고, 귀뚜라미 귀뚤귀뚤 달빛을 지저귄다.
오직 눈송이[雪華]만 귀밑을 침노할 뿐, 다시는 세상의 일 가슴 속에 이르지 않네. 슬피 노래하느라 아직은 고향
꿈 이루지 못하고서, 앉아서 동헌(東軒)의 새벽 해 붉어오는 것 기다린다." 하였다.
수학소다교목로(水鶴巢多喬木老) : 이첨(李詹)의 시에, "봄 추위는 손을 속여 옷 속에 스며드는데, 들 넓고 하늘
낮아 저물도록 못 돌아가네. 물학이 많이 깃드니 높은 나무 늙었고, 현관(縣官)의 문닫으니 아전 백성 드물다."
하였다.
계산원근누대호(溪山遠近樓臺好) : 중 선탄의 시에, "산과 시내 원근에 있어 누대도 좋고, 연기 오르는 동서쪽엔
촌락(村落)이 이루어졌네." 하였다.
설진암변애일신(雪盡巖邊愛日新) : 앞사람의 시에, "바위 가엔 눈 다하여 날로 새로워지니 좋고. 금구(錦鳩) 나
는 동네 밖에는 태평스런 봄일세. 봄바람은 마치 사군(使君 원님)의 덕과 같아서, 마을이나 산중이나 한모양으
로 고르구나." 하였다.
도서미망표묘간(島嶼微茫縹緲間) : 안숭선(安崇善)의시에, "멀리 푸른 바다 보고 가까이 산을 보니, 섬들은 아득
한 사이에서 가물거리네. 해가 날마다 채찍으로 재촉하되 제대로 하지 못할까 두려우니, 봄바람 쉽게 불어 붉은
얼굴 늙어간다." 하였다.
해문잔월낙한조(海門殘月落寒潮) : 서거정의 시에, "하늘에는 보슬비 늦은 아침에도 내리는데, 누가 황금 빚어
버들가지 물들였나. 골짜기의 맑은 바람 먼 소리를 내는데, 해문(海門 해협(海峽))에 지는 달은 찬 조수에 떨어
진다. 한 누각 고요하여 편히 잠자기에 마땅한데, 옛 나루는 쓸쓸하여 다만 누운 다리뿐일세. 가는 곳마다 강산
은 시 짓기에 알맞은데, 졸필이라 끝내 묘사 못해 부끄럽구나." 하였다.
[비고]
방면 동도(東道) : 끝이 5리. 서도(西道) : 끝이 10리. 남상(南上) : 끝이 10리.
남하(南下) : 처음이 10리, 끝이 20리. 상동(上東) : 끝이 10리. 하동(下東) : 처음이 5리, 끝이 15리.
상서(上西) : 처음이 10리, 끝이 20리. 하서(下西) : 처음이 10리, 끝이 30리.
일도(一道) : 북쪽으로 끝이 10리. 이도(二道) : 북쪽으로 처음이 10리, 끝이 20리.
염소(鹽所) : 서쪽으로 처음이 10리, 끝이 15리. 소산(所山) : 남쪽으로 처음이 15리, 끝이 25리.
건광(乾光) : 남쪽으로 처음이 30리, 끝이 50리. 입상(立上) : 남쪽으로 처음이 25리, 끝이 35리.
입하(立下) : 남쪽으로 처음이 30리, 끝이 40리. 좌산내(左山內) : 서쪽으로 처음이 35리, 끝이 70리.
우산내(右山內) : 서쪽으로 처음이 35리, 끝이 60리.
○ 고촌향(鼓村鄕)은 남쪽으로 27리이며, 신덕소는 동쪽으로 5리이다.
성지
우금성(禹金城) : 우금암(禹金巖) 기슭에 있다. 둘레는 10리인데, 묘향사(妙香寺)가 그 안에 있다.
점모포진(點毛浦鎭) : 남쪽으로 50리에 있다. 성지(城池)는 지금은 폐했고 창(倉)이 둘이다.
○ 수군만호(水軍萬戶)가 1명이다.
혁폐(革廢) 격포진(格浦鎭) : 서쪽에 있으며 변산(邊山) 서쪽 기슭 끝 바닷가에 있다. 조수가 차면 호수를 이루고
썰물 때는 갯바닥이 된다. 인조 때에 처음으로 진(鎭)을 설치하고 별장(別將)을 두었는데, 숙종 4년 성을 쌓은 후
에 감영(監營)에 속하게 하고, 제방(堤坊)을 쌓고 물을 막았는데, 헌종 9년에 폐했다.
옛 군영(軍營) : 장신포(長信浦) 남쪽에 있다. 국초(國初)에 부안현에다 진을 두었을 때에 영(營)을 둔 곳이다.
창고 창(倉) 5 : 읍내에 있다. 북창(北倉) : 북쪽으로 10리. 해창(海倉) : 서쪽으로 30리.
사창(社倉) : 남쪽으로 30리이다.
진도 동진(東津) : 동쪽으로 15리. 김제와 전주로 통한다.
교량 대교(大橋) : 서쪽으로 10리. 중교(中橋) : 위와 같다. 장교(長橋) : 남쪽으로 10리이며 동진 상류이다.
토산 대나무ㆍ칠ㆍ뽕나무ㆍ감ㆍ호두ㆍ잣.
[주 D-001] 현으로 된 것이 잠총국(蠶叢國)으로부터 시작 : 유사 이전에 촉(蜀) 지방에 잠총국(蠶叢國)이
있었다 한다. 여기에서는 태고적부터 있었던 오랜 고을이라고 한 것이다.
[주 D-002] 간사한 무리들은 장우(張禹) 따위가 많은데, : 한(漢) 나라 사람이니, 자는 자문(子文)이다.
경서(經書)를 분명히 익혀 박사(博士)가 되었으며, 원제(元帝) 때 태자에게 《논어》를 가르쳤다. 성제(成帝)가
즉위한 뒤, 사부(師傅)의 예로 높였고, 하평(何平) 말년에 안창후(安昌侯)를 봉하였다. 병으로 물러가기를 청했
는데, 나라에 큰 정사가 있으면 반드시 함께 의논하여 정하였다. 성제가 왕씨(王氏)를 의심하고 일찍이 우한테
물었는데, 자기는 늙고 자손들은 약하여, 감히 왕씨 배척하는 바른 말을 못하였다. 그랬더니 주운(朱雲)이 장우
를 지목해서 아첨하는 신하라고 하였다는 고사이다.
[주 D-003] 고달픈 새 미리 알고 돌아온 것 자랑한다." : 도연명(陶淵明)의 귀거래사(歸去來辭)에,
"새도 고달프면 돌아갈 곳을 안다."라는 구절을 인용한 것이다.
[주 D-04] 이은(吏隱) : 하급 관리로 그럭저럭 지내는 것을 이은(吏隱)이라고 한다.
[주 D-005] 바다를 바라보며 오번(鰲番)을 묻는다. : 오(鼇)는 큰 자라인데, 바다에 있는 삼신산을 큰 자라
세 마리가 각각 메고 다닌다 한다. 그러므로 바다를 바라보면서 삼신산을 이고 있는 큰 자라가 어디 있느냐고
묻는다는 말이다.
옥구현 沃溝縣
동쪽으로 임피현(臨陂縣)의 경계에 이르기까지 15리, 남쪽으로 같은 현 경계에 이르기까지 13리,
북쪽으로 충청도 서천군(舒川郡) 경계에 이르기까지 19리, 서쪽으로 해안에 이르기까지 27리,
서울과의 거리는 5백 23리이다.
건치연혁 본래 백제 마서량현(馬西良縣)이었는데,
신라 때 지금 이름으로 고치어 임피군에 붙였고,
고려 때에도 그대로 하였다. 본조 태조 6년에 진을 설치하여 병마사로써 현의 일을 겸하게 하였고,
세종 5년에 병마사를 고치어 첨절제사로 만들었다가 후에 현감으로 고쳤다.
관원 현감ㆍ훈도 : 각 1명이다.
군명 마서량ㆍ옥산(玉山).
성씨본현 임(林)ㆍ고(高)ㆍ송(宋)ㆍ임(任)ㆍ문(文)ㆍ이(李)ㆍ은(殷)ㆍ배(裴)ㆍ백(白). 김 : 속(續).
회미(澮尾) 장(張)ㆍ전(全)ㆍ송(宋)ㆍ섭(葉)ㆍ신(申).
산천
발이산(鉢伊山) : 현의 북쪽 3리에 있는데 진산이다. 사자암산(獅子巖山) : 현의 서쪽 11리에 있다.
박지산(朴只山) : 현의 동쪽 10리에 있다. 옛 성이 있고 지세가 험하면서 좁다.
화산(花山) : 현의 서쪽 25리에 있다. 점방산(占方山) : 현의 서쪽 20리에 있다.
도진산(刀津山) : 현의 북쪽 20리에 있다. 바다 : 현의 서쪽 27리에 있다.
진포(鎭浦) : 현의 북쪽 16리에 있는데, 어량(魚梁)이 있다. 함개도(含介島) : 현의 서쪽 44리에 있다.
오식도(筽食島) : 현의 서쪽 40리에 있는데, 둘레가 15리이고, 목우장(牧牛場)이 있다.
고사포(古沙浦) : 현의 남쪽 25리에 있다. 빙도(冰島) : 현의 서쪽 40리에 있다.
미제지(米堤池) : 현의 서북쪽 10리에 있는데, 둘레가 1만 9백 10척이다.
토산 대하ㆍ대게ㆍ자하(紫鰕)ㆍ조기ㆍ조개ㆍ토굴[土花]ㆍ석굴ㆍ전어(錢魚)ㆍ홍어ㆍ숭어ㆍ준치ㆍ도미ㆍ
부레ㆍ웅어ㆍ차ㆍ생강.
성곽 읍성 : 돌로 쌓았는데, 둘레가 2천 58척이고 높이가 8척이다. 신증 가정(嘉靖) 갑신년에 다시 쌓았는데,
둘레가 3천 4백 90척이고 높이가 12척이다.
관방 군산포영(群山浦營) : 현의 북쪽 22리에 있다. ○ 수군 만호가 1명이다.
봉수 사자암봉수(獅子巖烽燧) : 남쪽으로 만경현 길곶(吉串)에 응하고, 서쪽으로 화산(花山)에 응한다.
환산봉수 : 동쪽으로 사자암에 응하고, 북쪽으로 점방산(占方山)에 응한다.
점방산봉수 : 동쪽으로 임피현 오성산(五聖山)에 응하고, 남쪽으로 화산에 응하며, 북쪽으로 충청도 서천군
운은산(雲銀山)에 응한다.
누정 자천대(紫遷臺) : 서쪽 해안에 있는데, 지세가 넓고 펀펀하며, 샘과 돌이 좋아 즐길 만하다.
세상에 전하기는 최치원(崔致遠)이 놀던 곳이라 한다.
학교 향교 : 현의 남쪽 5리에 있다. 신증 지금은 옮기어 현의 북쪽 2리에 있다.
신증창고 군산창(群山倉) : 군산포(群山浦)에 있다.
옛날에는 용안현(龍安縣)에 있었으며, 득성창(得成倉)이라 하였는데, 지금 여기로 옮겼다.
불우 천방사(千房寺) : 천방산(千房山)에 있고, 이응정(李膺梃)의 중수기(重修記)가 있다.
전하는 말에 신라 김유신(金庾信) 장군이 백제를 치려고 당(唐) 나라에 군대를 요청하였는데, 당 나라에서는
소정방(蘇定方)을 시켜 배로 군사 12만명을 거느리고 천방산 아래에 정박하게 하였다. 그런데 안개가 자욱하게
덮여 천지가 캄캄하였다. 김유신이 산신령한테 기도하기를, "만일 안개를 활짝 개게 해 주시면 마땅히 절 1천 채
를 세워 부처님을 받들겠습니다." 하니, 그날로 천지가 맑고 밝아졌다. 그리하여 산에 올라 두루 살펴보니,
지세가 너무 협착하여 절 천 채를 도저히 세울 수 없으므로, 다만 돌 1천 개를 배치하여 절의 형태만 만들고,
절 한 채를 세워 천방사라고 부르다가 후에 선림사(禪林寺)라 고쳐 불렀다.
고려 숙종(肅宗) 때 근신(近臣)을 보내어 중수하고, 불상(佛像)을 안치(安置)하였으며, 지금은 다시 천방사라
부른다.
길상사(吉祥寺) : 천방산에 있다. 강림사(江臨寺) : 오봉산(五峰山)에 있다.
사묘 사직단 : 현의 서쪽 2리에 있다. 문묘 : 향교에 있다. 성황사 : 객관 뒤에 있다. 여단 : 현의 북쪽에 있다.
고적
회미폐현(澮尾廢縣) : 현의 동쪽 15리에 있는데, 연강(連江)이라고도 한다. 본래 백제 부부리현(夫夫里縣)이었는
데, 신라 때 지금 이름으로 고치어 임피현에 붙였고, 고려 때는 그대로 하였다. 본조에서는 태종 3년에 이 고을로
붙였다.
인물고적 임개(林槪) : 맑고 곧으며 청렴하고 조심하여 대신(大臣)의 위엄이 있었고, 순종(順宗)ㆍ선종(宣宗)ㆍ
헌종(獻宗)ㆍ숙종(肅宗)ㆍ예종(睿宗)의 다섯 조정을 대대로 섬기어, 벼슬이 문하시랑 평장사(門下侍郞平章事)
에 이르렀으며, 시호는 원경(元敬)이다.
임유문(林有文) : 임개의 아들이다. 과거에 급제하여 벼슬이 문하시랑 평장사에 이르렀다.
고형중(高瑩中) : 의종(毅宗) 조에 과거에 급제하여, 벼슬이 국자사업(國子司業)에 이르렀다.
신증효자본조 양성윤(梁成允) : 현감 양전(梁甸)의 아들이다. 양전이 일찍이 병이 들어 자리에 누운 지 몇 년이
되었는데, 밤낮으로 옷과 띠를 풀지 않았고, 어머니가 10여 년을 앓았는데, 옆에서 모시고 받들기를 또한 정성
을 다하였다. 부모가 죽자, 모두 묘에 여막을 짓고 3년상을 마쳤다. 지금 임금 7년에 정문을 세웠다.
두세준(杜世俊) : 어머니가 병이 들어 앓았는데, 옷을 벗지 않았다. 죽자 몸소 부엌에 들어가서 음식을 장만하여
전(奠)을 드리고, 매우 슬퍼하면서 예를 다하였다. 지금 임금 23년에 정문을 세웠다.
제영 수고와변성(戍鼓臥邊城) : 정구(鄭矩)의 시에, "고기잡이 등불은 먼 포구에서 돌아오는데, 수자리 북은 변
방 성에 누워 있도다." 하였다.
장강경면평(長江鏡面平) : 허주(許周)의 시에, "옛 현은 산세가 화려하고, 긴 강은 거울면(面)처럼 편평하다."
하였다.
지궁삼면착(地窮三面窄) : 박경(朴景)의 시에, "땅이 다하니 3면이 좁고, 호수가 머니 양쪽 벼랑이 편평하다."
하였다.
[비고]
본현 동면(東面) : 끝이 10리. 서면(西面) : 끝이 10리. 북면(北面) : 처음이 5리, 끝이 20리.
장제(長梯) : 동쪽으로 처음이 10리, 끝이 20리. 정지산(定只山) : 남쪽으로 처음이 7리, 끝이 20리.
박지산(朴只山) : 남쪽으로 처음이 5리, 끝이 15리. 풍촌(豐村) : 동쪽으로 처음이 10리, 끝이 20리.
미제(米堤) : 서쪽으로 처음이 10리, 끝이 20리이다.
성지 회미고현성(澮尾古縣城) : 둘레가 3천 4백 90척이다.
박지산고성(朴只山古城) : 동쪽으로 10리인데, 땅이 험하고 깊다.
진보 군산포진(群山浦鎭) : 북쪽으로 20리이며 진포(鎭浦) 가에 있다. 만경(萬頃)에 군산진(群山鎭)이 있었는데,
전에 해적의 침략을 당해 이곳으로 옮기고, 수군만호(水軍萬戶)를 두었다. 숙종 26년에 첨사(僉使)로 올리고,
성지(城池)를 지금의 이곳으로 정했다. ○ 수군첨제사(水軍僉制使) 1명이다.
창고 창(倉) 3 : 읍내에 있다. 해창(海倉) : 군산포(群山浦)에 있다.
군산창(群山倉) : 군산진 곁에 있다. 성종 18년에 용안(龍安)의 득성창(得成倉)을 나누어 이곳으로 옮겼다.
○ 옥구ㆍ전주ㆍ진안ㆍ장수ㆍ김구ㆍ태인ㆍ임실 등, 7읍의 전세(田稅)와 대동미(大同米)를 계량(計量)하여 서울
로 운송한다.
○ 군산첨사(群山僉使)가 계량을 감독하고 수납한다.
진도 용당진(龍堂津) : 북쪽으로 20리. 강 너비는 10여 리이며, 서천(舒川)으로 통한다.
교량 경장리교(京場里橋) : 북쪽으로 15리이다.
토산 모시ㆍ대나무.
용안현 龍安縣
동쪽으로 여산군(礪山郡) 경계에 이르기까지 16리, 남쪽으로 익산군(益山郡)의 경계에 이르기까지 12리,
서쪽으로 함열현(咸悅縣) 경계에 이르기까지 4리,
북쪽으로 충청도 임천군(林川郡)의 경계에 이르기까지 10리이며, 서울과의 거리는 4백 48리이다.
건치연혁 본래 고려 함열현의 도내산은소(道乃山銀所)이었는데, 창산소(倉山所)라고도 한다.
충숙왕(忠肅王) 8년에 이 고장 사람 백안부개(伯顔夫介)가 원(元) 나라에 있으면서 본국에 공이 있었다 하여
지금 이름으로 고치어 현으로 승격시켰고, 공양왕 3년에 전주의 속현(屬縣) 풍저(豐儲)를 가져다 붙였다.
저(儲)는 제(堤)로도 한다. 본조 태종 9년에 함열현을 합치어 안열감무(安悅監務)를 만들었고,
13년에 규례대로 현감으로 고쳤으며, 16년에 다시 갈라서 두 현으로 만들었다.
관원 현감ㆍ훈도 : 각 1명이다.
군명 칠성(七城)ㆍ도내산.
성씨본조 장(張)ㆍ조(趙)ㆍ남궁(南宮), 이(李)ㆍ유(兪)ㆍ최(崔)ㆍ박(朴) : 모두 다른 곳에서 왔다.
풍제(豐堤) 손(孫)ㆍ오(吳)ㆍ유(兪)ㆍ조(趙)ㆍ임(林)ㆍ박(朴)ㆍ김. 창산(倉山) 유(兪)ㆍ오ㆍ조(趙)ㆍ현(玄).
풍속 행향음주례(行鄕飮酒禮) : 읍 사람들이 봄ㆍ가을로 마련하여 고을의 술마시는 예를 만들었는데,
나이 8ㆍ90이 된 이가 한 자리요, 6ㆍ70이 된 이가 한 자리요, 50 이하를 한 자리로 만드니, 나이로써 구별하게
한 것이다. 사람을 시켜 서문(誓文)을 읽고 말하기를, "부모에게 불효하는 자는 쫓아내고, 형제끼리 화목하지 않
는 자도 쫓아내며, 붕우(朋友)에게 신의가 없는 자도 쫓아내고, 조정을 비방하는 자도 쫓아내며, 수령을 헐뜯는
자도 쫓아낸다.
첫째 덕업(德業)은 서로 권할 것, 둘째 허물은 서로 바로잡아 줄 것, 셋째 예속(禮俗)을 서로 이룰 것,
넷째 어려운 일에 서로 구휼할 것이니, 무릇 같은 시골의 사람들은 각각 효성과 우애, 충성과 신의를 다하여 모두
후한 마음으로 돌아가라." 하니, 읽은 뒤 모두 재배(再拜)하고 음사(飮射)의 예를 행했다.
형승 비옥한 들이 바다와 잇닿았다 : 임종선(任從善)의 시.
산천 모산 : 현의 북쪽 1리에 있는데 진산(鎭山)이다. 칠성산 : 현의 서쪽 3리에 있다.
용두산 : 현의 북쪽 8리에 있다. 산의 형세가 높고 가팔라서 바로 물 깊은 데로 들어간다.
청포(菁浦) : 현의 북쪽 10리에 있다. 금두포(金頭浦) : 현의 북쪽 5리에 있다.
굴정포(掘井浦) : 현의 동쪽 5리에 있다.
토산 뱅어ㆍ게ㆍ도미ㆍ웅어ㆍ숭어ㆍ민어.
성곽 읍성 : 돌로 쌓았는데, 둘레가 4천 2백 40척이고, 높이가 11척이며, 안에 샘 11개, 작은 못 한 개가 있다.
봉수 광두원산 봉수(廣頭院山烽燧) : 현의 동쪽 13리에 있는데, 서쪽으로 함열현 소방봉(所方峯)에 응하고,
북쪽으로 충청도 은진현(恩津縣) 강경산(江景山)에 응한다.
학교 향교 : 현의 북쪽 1리에 있다.
창고 득성창(得成倉) : 금두포에 있다. 옛날에는 덕성창(德城倉)이라고 일컬었는데, 물길이 막혀서 함열현으로
옮겼다가, 성종(成宗) 13년에 이 고을로 다시 옮기고 지금 이름으로 고쳤다.
본현 및 전주(全州)ㆍ임실(任實)ㆍ남원(南原)ㆍ임피(臨陂)ㆍ김제(金堤)ㆍ장수(長水)ㆍ금구(金溝)ㆍ운봉(雲峯)ㆍ
익산(益山)ㆍ만경(萬頃)ㆍ여산(礪山)ㆍ금산(錦山)ㆍ진산(珍山)ㆍ태인(泰仁)ㆍ용안(龍安)ㆍ옥구(沃溝)ㆍ
진안(鎭安)ㆍ고산(高山)ㆍ무주(茂朱) 등 관가의 전세(田稅)를 여기에서 수로로 서울까지 보낸다.
○ 권근(權近)의 기에, "조전(漕轉 물로 운반하는 것)은 큰일이니, 국가의 경비와 공사(公私)의 넉넉함과 부족함
이 관계된다. 남쪽 지방에서 조전해서 들여오는 것은 오직 전라도만이 가장 멀어서 반드시 바다에 띄운 뒤에야
서울에 도달한다. 그런데, 왜란(倭亂)이 일어난 뒤로는, 조세 받아들이는 장소를 바다 입구가 아니라,
산협(山峽)의 모든 성에서 하니, 백성들은 조세 바치는 것을 소와 말에 싣고, 험하고 어려운 것을 넘고,
눈과 얼음에 쓰러지고 넘어지면서 3동(冬)이 다 지나서야 겨우 마친다. 봄이 되어 장차 운반하려면 또 뱃길로 수
송하는데, 길이 너무 멀어서 몇 밤이 지나서야 도달하므로 농사일은 하지 못하고 여름이 되어서야 끝난다.
겨울에는 떨고 주리며 봄에는 주리고 파리해서, 사람과 가축이 죽어 도로에 잇달았다. 또 그 모곡(耗穀)이 될 때
마다 줄어들면 반드시 조세를 더 내어 보충하고, 심지어는 남에게 빌려다가 채우게 되니, 백성들의 병됨이 이보
다 더 심한 것이 없었다.
도관찰사(都觀察使) 노숭(盧崇)은 직책을 맡은 후부터 민생의 이익과 병통을 모두 연구하고 도모하였는데, 그
운반에 대해서 더욱 관심을 가졌다. 이에 장구한 계획을 세워 백성을 이롭게 하려고 바다를 따라 살펴보고 적당
한 곳을 기억하였는데, 전주의 경계에서는 진포(鎭浦)의 용안을 얻었고, 나주(羅州)의 경계에서는 목포(木浦)의
영산(榮山)을 얻으니, 모두 물가에 언덕이 있고 높으면서도 넓었다.
공이 이에 여러 사람들에게 물어서 꾀하기를, '여기에 성을 쌓고 조세를 거두면 백성들이 실어 오는 일이 한 번
에 다 마칠 것이고, 바다로 운반하는 데 이르러서도 성 밑에 배를 대니 저다가 실을 수 있으며, 도적이 오더라도
굳게 지키고 이 성을 울타리로 삼는다면 또한 깊이 들어와서 도둑질할 수 없을 것이니, 백성에게 편리하고 나라
에 이익이 되는데, 어찌 쌓지 않을 것인가.' 하였다. 여러 사람들이 명령을 기꺼이 들었다. 곧 역말 편으로 나라
에 보고하였는데, 묘당(廟堂)의 공론 역시 그러하여 통첩을 돌려서 알렸다.
8월이 되어 농사일이 이미 한가해지자 고부 군수(古阜郡守) 정혼(鄭渾), 전 광주 목사(光州牧使) 황거중(黃居中),
전 판사(判事) 노원명(盧元明), 전 고부 군수 정사운(鄭士雲)에게 명령하여 용안의 역사를 감독하게 하고, 나주
판관(羅州判官) 윤의(尹義), 전 개성윤(開城尹) 김중광(金仲光)ㆍ정윤부(鄭允孚), 전 판관 나진(羅璡)에게 명령
하여 영산(榮山)의 공사를 감독하게 하니, 각각 관할 지역 주의 백성들을 징발해서 역사를 시작하였는데,
백성들이 모두 부역에 나오기를 즐겁게 여겨 신이 나서 일을 하였다. 이에 가래질하고 다지기도 하며 파 올려서
쌓기도 하여, 높으면서 두툼하고, 깎은 듯하면서 단단하다.
비예(睥睨 마차 위의 덮개를 고인 대)로 둘러치고 담장으로 굳게 하여, 바라보면 날아 가는 듯하고 대하면 우뚝
하였다. 영원히 잊지 못할 공이 한 달 만에 다 이루어지니, 촌 농부들이 그 폐단이 없어짐을 기뻐하여 서로 더불
어 집에서 축하하고 길에서 노래하였다. 막빈(幕賓)과 좌우에 있는 사람들이 그 일을 기록하여 후세에 보일 것
을 청하니, 공이 이에 편지를 보내 나에게 명하였다.
그때 내가 좌천되어 익산(益山)에 있었으므로, 이미 백성들의 말을 얻어 듣고 장하게 여겼는데, 홀연히 이 명을
받으니 의리상 문장이 형편없다는 것으로 사양할 수 없었다. 말하기를, '천하의 일이 형세는 같아도 뜻은 다른
것이 있다. 《춘추》에 성 쌓은 일을 썼는데, 전(傳)을 쓴 이들은 모두 기롱한 것이라고 하였으니,
이는 그 시기가 혹 봄이거나 여름이었고, 그 일은 법제도 의리도 아니었기 때문에, 공자가 폄론(貶論)하여 백성
괴롭히는 것을 중대한 일로 삼고, 백성을 애양(愛養)하는 뜻이 없는 것을 기롱한 것을 보인 것이다.
이제 공의 이 거사는, 의리는 백성을 위한 것이고, 시기는 이미 가을이었으며, 성이 이룩된 뒤로 옮겨 싣는 힘이
옛날에 비교해서 아주 줄고, 운반하는 업무가 옛날에 비교해서 아주 쉬우며, 바다에 띄워 서울로 도달하는 기간
이 또한 옛날에 비교해서 매우 빠르다. 지금부터 시작하여 영원히 힘입게 될 것이니,
곧 나라를 이롭게 하는 장구한 계획과 백성을 사랑하는 정성스런 마음이 지극하다고 이를 수 있다.
《맹자》의, 잘 살게 해주려고 백성을 시키면, 비록 수고로워도 원망하지 않는다.'고 한 말씀을 내가 이 역사(役
事)에서 보았다. 태사씨(太史氏 역사 기록하는 사람)가 반드시 대서특필(大書特筆)하여 드러내서 포상할 것인
데 하필 내 말을 기다리겠는가. 비록 그러하나 병폐가 없어져서 이익을 얻은 이 도의 백성들이 지금은 공의 덕
을 즐겨하면서 모두 노래할 것이나, 몇 해 지난 뒤에 혹 지난날의 병폐가 아주 어려웠음을 알지 못하는 자가 있
게 되면 또한 반드시 지금 공의 은혜가 아주 컸다는 것을 알지 못할 것이다.
그리하여 이를 마땅히 성루(城樓)에 써 두고 성 지키는 자로 하여금 때로 드러내어, 후세 사람들에게 알려서 대
대로 잊어버림이 없게 하니, 이렇게 하면 공의 혜택은 마땅히 진포ㆍ목포 두 항구와 함께 무궁한 데까지 흐를
것이다. 그러므로 이것은 기록할 만한 일이다. 한다." 하였다.
교량 굴정교(掘井橋) : 굴정포 위에 있다. 판교(板橋) : 현의 서쪽 3리에 있다.
광두원교(廣頭院橋) : 현의 동쪽 9리에 있다.
불우 일신사(日新寺) : 칠성산에 있다. 자명암(自明菴)ㆍ목련암(目蓮菴) : 모두 용두산에 있다.
사묘 사직단 : 현의 서쪽 3리에 있다. 문묘 : 향교에 있다. 성황사 : 현의 북쪽 1리에 있다.
여단 : 현의 북쪽에 있다.
고적 풍제폐현(豐堤廢縣) : 현의 동쪽 5리에 있다. 본래 전주에 붙였었는데, 고려 공양왕 3년에 와서 여기에 붙
였고, 풍성(豐城)이라고도 한다. 창산소(倉山所) : 현의 동쪽 10리에 있다.
명환본조 최유종(崔有悰) : 정언(正言)으로서 어버이를 위하여 외직(外職)을 구하였고, 정치는 맑고 일은 간소
하게 하였다. 모든 생도들을 모아 경사(經史)를 강론하였는데, 수업하는 이들이 매우 많았다.
신증 이득전(李得全) : 학도를 모아 가르치고 훈계하기를 게을리 하지 않았다.
인물
고려 장영(張英) : 진헌사(進獻使)로서 원(元) 나라에 들어갔는데, 주선하는 것이 예에 알맞으니 황제께서 포상
하여 특별히 백호(百戶)에 제수하고, 얼마 후에 천호(千戶)에 승진시켰으며, 말 40필, 소 25두, 수레 5냥(兩),
화살 2부(部)를 주어 본국으로 돌아가도록 명하였으며, 벼슬이 3품에 이르렀다.
장원적(張原績) : 장영의 손자이다. 서장관(書狀官)으로서 원 나라에 들어가서 3년을 머무르는데, 같이 갔던 사
람이 먼저 돌아오니 시를 지어 보내기를, "삼한(三韓)의 외로운 한 사람이, 눈 오는 저문 날 강 가를 가는구나.
돌아가는 배여, 태평하게 실어 주게. 이 밖에 다른 말은 없노라." 하였다. 원 나라 황제가 그 시를 보고 학관(學
館)에 거하게 하여서 당시 이름난 선비들과 서로 교제하면서 강론하였다. 3년 후에 본국에 돌아왔고,
벼슬이 3품에 이르렀다.
효자본조 이보(李甫) : 그의 아버지 태방(台芳)이 악질을 얻어 거의 죽게 되었는데, 여러 가지로 치료해도 효과
가 없으니 밤낮으로 통곡하였다. 그런데 꿈에 어떤 중이 말하기를, "산 사람의 뼈를 먹으면 나을 수 있다." 하였
다. 이보가 곧 놀라 깨어 손가락을 잘라 약을 만들어 먹이니, 아버지의 병이 곧 나았다.
이계수(李桂遂) : 이보의 손자인데, 과거에 급제하여 벼슬이 판사(判事)에 이르렀다. 계모(繼母)의 나이 80이었
으므로 검참판(檢參判)을 사직하고, 돌아가서 봉양하였다. 신증 이천지(李千枝) : 어머니가 악질을 얻었는데,
다리의 살을 베어 약을 만들어서 먹이니 병이 나았다. 지금 임금 14년에 정문을 세웠다.
제영 강근시다어(江近市多魚) : 정곤(鄭坤)의 시에, "땅 비옥하니 벼에는 학이 숨겨지고, 강이 가까우니 시장에
는 고기가 많다." 하였다.
원수아환세(遠岫鴉鬟細) : 서거정의 시에, "현 큰 것은 말[斗]보다 큰데, 손님 많은 것은 구름같이 많구나.
서늘한 바람 맞기 위해 북쪽창 열었고, 모자 젖혀 쓰고 남쪽 바람 쏘인다. 먼 바위 틈은 까마귀 머리처럼 가늘고,
앞 시내는 제비 꼬리같이 갈라졌네. 시 읊어도 좋은 말은 없으니, 술에서나 좋은 결과 얻어보리라." 하였다.
권렴유견검망산(捲簾唯見劍鋩山) : 노사신(盧思愼)의 시에, "말을 몰아 유유하게 이 고을에 오니, 발 걷으면 칼
날 같은 산만 보이네. 주인 없어 시름 베기 어려운데,주D-001 위에 올라가면 헛되이 바라보는 눈만 시게 하도다."
하였다.
[비고]
연혁 고종 32년에 군으로 고쳤다. 《文獻備考》
방면 현내(縣內) : 끝이 3리. 동면(東面) : 처음이 3리, 끝이 10리. 북면(北面) : 처음이 3리, 끝이 10리이다.
○ 창산소(倉山所) : 동쪽으로 10리이다.
창고 읍창(邑倉)ㆍ득성창(得成倉) : 김두포(金頭浦)에 있다. 건국 초기에는 창성(倉城)을 쌓고서 전주 남원동
19읍의 조세를 관장하여 서울로 운송하였으나, 성종 18년에 함열 성당창(聖堂倉)과 옥구 군산창(群山倉)으로
나누어 옮겼다.
진도 청포진(菁浦津) : 임천군(林川郡)으로 통한다.
교량 광두교(廣頭橋) : 동쪽으로 8리. 운교(雲橋) : 동쪽으로 4리. 판교(板橋) : 서쪽으로 3리.
완포교(薍浦橋) : 북쪽으로 5리. 굴정포교(堀井浦橋).
토산 뱅어[白魚].
[주 D-001] 발 걷으면 칼날 같은 산만 보이네. 주인 없어 시름 베기 어려운데, : 당 나라 유종원이 광서성 유주
(柳州)라는 곳으로 좌천되어 가서 지은, "바다 위 여러 산이 칼 끝 같아서 가을 되면 곳곳에서 근심하는 창자를
베어낸다."는 시에서 인용한 것인데, 이 시의 작자 자신도 그때에 불우한 경우에 있었는 듯하다.
함열현 咸悅縣
동쪽으로 익산군 경계에 이르기까지 13리, 서쪽로 충청도 한산군(韓山郡) 경계에 이르기까지 9리,
남쪽으로 임피현 경계에 이르기까지 10리, 북쪽으로 용안현 경계에 이르기까지 14리,
서울과의 거리는 4백 66리이다.
건치연혁 본래 백제 감물아현(甘勿阿縣)이었는데, 신라 때 지금 이름으로 고치어 임피군 영현으로 만들었다.
고려 초년에 전주에 붙였고, 명종 6년에 감무를 두었다.
본조 태종 9년에 용안을 합치어 안열현(安悅縣)이라 부르다가 16년에 각각 복구시켰다.
관원 현감ㆍ훈도 : 각 1명이다.
군명 감물아ㆍ함라(咸羅).
성씨본현 남궁ㆍ조(趙)ㆍ장(張)ㆍ염(廉)ㆍ박, 김ㆍ임 : 모두 속(續). 도전(桃田) 김ㆍ조ㆍ장ㆍ석(石).
산천 함라산(咸羅山) : 현의 서쪽 2리에 있는데 진산이다.
소방봉(所方峯) : 현의 서쪽 3리에 있다. 용산(龍山) : 현의 동쪽 5리에 있다.
남당진(南堂津) : 현의 북쪽 18리에 있다. 충청도 임천군(林川郡) 편에도 있다.
웅포(熊浦) : 현의 서쪽 7리에 있다.
피포(皮浦) : 현의 서쪽 10리에 있는데, 곧 공주(公州) 웅진(熊津)의 하류이다.
묵정(墨井) : 함라산 서쪽에 있는데, 둘레가 5천 척이고, 깊숙하고 검푸르며, 모래와 돌이 모두 검기 때문에
묵정이라 한다. 전하는 말에, "용추에서 날이 가물어 비를 빌면 효응이 있다." 한다.
신증 화산(花山) : 현의 북쪽 7리에 있다.
말흘산(末屹山) : 현의 동쪽 15리에 있다. 약정(藥井) : 현의 북쪽 10리에 있다.
토산 모시ㆍ숭어ㆍ정어리ㆍ민어ㆍ붕어ㆍ뱅어ㆍ웅어ㆍ게. 신증 순채ㆍ농어.
성곽 용산성(龍山城) : 돌로 쌓았는데, 둘레가 3천 6백 3척이고, 높이가 10척이며, 안에 두 개의 우물과 한 개의
못이 있다. 본조 세종 경신년에 현을 옮기기 위해 쌓았는데, 지금까지 그대로 옮기지 못하였다.
봉수 소방봉 봉수 : 서쪽으로 임피현 오성산(五聖山)에 응하고, 동쪽으로 용안현 광두원산(廣頭院山)에 응한다.
학교 향교 : 현의 북쪽 2리에 있다.
역원 재곡역(才谷驛) : 현의 남쪽 1리에 있다. 신증 사가원(四街院) : 현의 서쪽 14리에 있다.
불우 용흥사(龍興寺)ㆍ숭림사(崇林寺) : 모두 함라산에 있다. 임해사(臨海寺) : 소방봉에 있다.
사묘 사직단 : 현의 서쪽 3리에 있다. 문묘 : 향교에 있다. 성황사 : 함라산에 있다. 여단 : 현의 북쪽에 있다.
고적 도평부곡(桃坪部曲) : 평(坪)은 전(田)으로도 쓴다. 현의 북쪽 15리에 있다.
대위향(大位鄕) : 현의 남쪽 6리에 있다. 대부(大府)라고도 한다.
덕성창 : 피포(皮浦)에 있다. 창이 옛날에는 용안현 금두포에 있었는데,
세종 무신년에 여기로 옮겼다가 성종 정미년에 다시 용안현으로 옮겼다.
신증명환본조 양지손(梁芝孫).
우거본조 최경지(崔敬止) : 세조조 경진년 과거에 장원하여, 벼슬이 홍문관 부제학에 이르렀고, 재명(才名)과
기개(氣槪)가 있었다. 옛날 살던 곳은 용산성(龍山城) 가운데 있다.
효자본조 최숙함(崔叔咸) : 자는 수부(粹夫)이고, 본래 직산(稷山) 사람이다. 그 집에 일찍이 대역(大疫)이 들어
어머니의 병이 위독하였다. 아버지와 형, 그리고 여러 아우들은 모두 피하였으나, 숙함은 홀로 시약하고 어머니
의 똥을 맛보았는데 쓰더니, 어머니가 과연 나았다. 후에 어머니는 죽고 아버지가 자식들에게 토지와 종을
나누어 주려 하는데, 숙함은 모두 척박한 토지와 노쇠한 종을 차지하고, 나머지는 모두 형과 아우들에게 미루어
주었다. 향인들이 칭찬하기를, "유금루(庾黔婁)와 설포(薛包)의 행실은 천년이 되어도 우러러 사모하는데,
하물며 한 사람으로서 겸하였으니, 더 말할 나위가 있겠는가." 하였다.
열녀고려 홍씨(洪氏) : 낭장(郞將) 최득림(崔得霖)의 아내이다. 32세 때 공민왕 조에 왜구를 만나 절개를 지키고
죽었다. 일이 보고되어 정문을 세웠다.
본조 이씨(李氏) : 나이 16세에 조맹(趙孟)에게 시집갔다. 후에 조맹이 미친개에게 물려 죽었는데,
이씨가 묘에 여막을 지어 피눈물로 3년을 보내고, 토상(土像)을 만들어 사당에 안치하고, 아침저녁으로 살아
있을 때처럼 섬기며, 사철 의복을 마련해서 입혔다.
[비고]
연혁 고종 32년에 군으로 고쳤다. 《文獻備考》
방면 현내(縣內) : 끝이 5리. 동일(東一) : 처음이 5리, 끝이 10리. 동이(東二) : 처음이 5리, 끝이 20리.
동삼(東三) : 처음이 10리, 끝이 20리. 동서(東西) : 위와 같다. 남일(南一) : 처음이 5리, 끝이 20리.
남이(南二) : 처음이 7리, 끝이 15리. 서일(西一) : 처음이 7리, 끝이 10리. 서이(西二) : 처음이 5리, 끝이 10리.
북일(北一) : 처음이 10리, 끝이 20리. 북이(北二) : 처음이 10리, 끝이 15리.
북삼(北三) : 처음이 10리, 끝이 20리.
○ 대위향(大位鄕) : 남쪽으로 6리. 도평부곡(桃坪部曲) : 북쪽으로 15리이다.
창고 창(倉) 2 : 읍내에 있다.
해창(海倉) : 피포(皮浦)에 있다.
성당창(聖堂倉) : 북쪽으로 20리, 진포(鎭浦) 가에 있다. 세종 10년에 용안(龍安) 득성창(得成倉)의 수로가
막히니, 피포로 옮겼다가 성종 18년에 나누어 옮겼다.
○ 남원ㆍ운봉ㆍ진산ㆍ금산ㆍ용담ㆍ고산ㆍ익산ㆍ함열 등, 8읍의 전세와 대동미를 관장하여 서울까지 조운하
였다.
○ 함열 현감(咸悅縣監)이 계량을 감독하고 수납하였다.
진도 웅포진(熊浦津) : 한산(韓山)과 통한다. 남당진(南堂津) : 북쪽으로 18리이며 임천(林川)과 통한다.
교량 간교(艮橋) : 여산(礪山)과 통한다. 상마교(相馬橋) : 위에 나왔다.
마포교(馬浦橋) : 남쪽으로 15리에 있다.
토산 닥나무ㆍ대ㆍ뽕나무ㆍ칠.
고산현 高山縣
동쪽으로 용담현(龍潭縣) 경계에 이르기까지 34리, 전주부의 경계에 이르기까지 55리,
남쪽으로 같은 부의 경계에 이르기까지 10리, 서쪽으로 여산군의 경계에 이르기까지 32리,
북쪽으로 충청도 연산현(連山縣) 경계에 이르기까지 29리, 서울과의 거리는 4백 46리이다.
건치연혁 본래 백제 고산현 난등량(難等良)이라고도 한다. 이었는데, 신라 때 전주에 붙였다.
고려 현종(顯宗) 때 그대로 붙였다가 후에 감무를 두어 진동(珍同)을 겸임하게 하였다.
본조 태조조에 다시 나누었고, 후에 현감으로 고쳤다.
관원 현감ㆍ훈도 : 각 1명이다.
군명 봉산(鳳山)ㆍ난등량.
성씨본현 고(高)ㆍ송(宋)ㆍ전(全)ㆍ배(裴)ㆍ가(價) : 가(賈)라고도 한다. 천(千). 운제(雲梯) 배ㆍ백(白)ㆍ
수(水)ㆍ송ㆍ유
(兪).
풍속 사신(邪神)에 제사하기 좋아한다.
형승 위봉절령벽립만인(危峯絶嶺壁立萬仞) : 이규보의 기에, "높은 봉우리 우뚝한 재가 만길이나 벽처럼 서
있고, 길이 매우 좁아서 말을 내려서야 다닐수 있다." 하였다.
산천 주줄산(珠崒山) : 현의 동쪽 34리, 운제현에 있다. 대둔산(大芚山) : 현의 북쪽 45리에 있다.
도솔산(兜率山) : 현의 북쪽 35리에 있다. 불명산 : 현의 북쪽 30리에 있다.
운제산(雲梯山) : 운제현에 있는데, 산이 아주 높고 험하다.
탄현(炭峴) : 현의 동쪽 50리에 있는데, 진산군(珍山郡) 이현(梨縣)까지의 거리는 20리이다.
가점(加岾) : 현의 동쪽 35리에 있는데, 탄현과의 거리는 15리이며,
용계성(龍鷄城)이 그 동쪽에 있다.
용계천 : 현의 북쪽 40리에 있다. 그 근원의 하나는 현의 탄현에서 나오고, 하나는 전주의 이현에서 나오는데,
합쳐서 북쪽으로 흘러 충청도 연산현 경계에 들어간다.
남천(南川) : 근원이 운제ㆍ주줄 두 산에서 나와 현을 지나서 서쪽으로 흘러 전주 경계에 들어간다.
용연(龍淵) : 현의 동쪽 10리에 있다. 날이 가물면 비를 비는데, 범의 머리를 담그면 문득 효응이 있다.
신증 용연 : 운제현 동쪽 15리에 있는데, 샘물이 솟아나서 못이 되었고, 주위는 1리쯤 되며, 날이 가물 때 비를
빌면 증험이 있다.
토산 오수정(烏水精) : 현의 동쪽 이암현(耳巖峴)에서 난다.
녹반(綠礬) : 현의 동쪽 월막암혈(月幕巖穴)에서 난다.
봉밀ㆍ송이ㆍ감ㆍ석류ㆍ모시ㆍ옻ㆍ석이[石蕈].
누정 요산루(樂山樓) : 객관 동쪽에 있다. 신증 권건(權健)의 시에, "그림 기둥 조각한 난간 제작이 공교로운데,
경영한 것은 응당 농사일[田功] 위해서이리. 날카로운 산봉우리 앞뒤로 둘러 있고, 논두렁 밭둑들은 동서로
엇비슷하구나. 못 수면에는 갈매기 그림자 깨끗하게 잠기고, 담장 머리엔 버들 가지 바람에 가볍게 나부끼네.
주인의 마음 바탕 얼마나 너그러운가. 기묘한 경치 다 거두어 눈 가운데[眼中] 넣는다." 하였다.
권가루(勸稼樓) : 객관 남쪽에 있는데, 현감 김석현(金錫賢)이 세웠다.
학교 향교 : 현의 동쪽 2리에 있다.
역원 옥포역(玉包驛) : 현의 동쪽 18리에 있다. 서원(西院) : 현의 서쪽 5리에 있다.
삼기원 : 삼기정 아래에 있다. 이생원 : 현의 동쪽 40리에 있다.
불우 화암사(花巖寺) : 주줄산에 있다. 가느다란 잎사귀에 털이 덥수룩하여 허리띠처럼 어지럽게 드리워진
나무가 있었는데, 푸른 빛이 구경할 만하며, 다른 군에서는 볼 수 없는 것이다. 세속에서는 전단목(栴檀木)이라
고 부른다.
○ 고려 백문절(白文節)의 시에, "어지러운 산 틈 사이로 급한 여울 달리는데, 우연히 몇 리 찾아가니 점점 깊고
기이하네. 소나무와 회나무는 하늘에 닿고 댕댕이 줄 늘어졌는데, 백 겹 이끼 낀 돌다리는 미끄러워 발 붙이기
어렵구나. 말[馬] 버리고 걸어가니 다리는 피곤한데, 길을 통한 외나무다리는 마른 삭정이일세. 드물게 치는 종
소리는 골을 나오기 더디고, 구름 끝에 보일락말락 지붕마루 희미하다. 시내를 타고 있는 정자 벽에는 시가 가
득하고, 풍헌(風軒)의 현판에는 용과 교룡이 꿈틀거리네. 현공(玄公)이 지은 기문 옛말을 모았는데,
황견유부(黃絹幼婦)주D-001 세상에 드물도다. 샘물은 비녀다리같이 갈라져서 구슬을 내뿜는데, 문득 오목한
돌 만나 몇 개의 못 이루었네. 백 마리의 고기는 여기서 노닐고, 아홉 마디 창포(菖蒲)는 푸른 실처럼 어지럽다.
열 발짝 못 걸어서 소나무 사립문 있는데, 두드리면 산새들은 모두 놀라 날아가네. 지팡이 짚고 웃고 맞는 것은
참으로 방미(厖眉 큰 눈썹인데, 점잖은 사람)인데, 종남산(終南山) 엄연한 노인의 풍모로다. 흰 옷 입은 신선은
달 가득한 자태인데, 단정히 앉은 높은 당은 팔부위중(八部圍中)에 싸였네. 누런 모란꽃은 뜰을 비추고,
작약(芍藥)꽃에 취서시(醉西施 일종의 작약)도 있도다. 대통으로 나오는 가는 물줄기는 씻고 양치질 하겠고,
약포(藥圃)와 채전(菜田)에 가물들면 뿌려도 주네.
부들 자리에 찻잔 두고 말하다 시간은 흘러가고, 비로자나물(毗盧遮那佛)과 해장(海藏 연화세계(蓮花世界))을
혓바닥 밑에서 펼쳐내네. 면마(眠魔 잠 귀신)가 찾아오면 반드시 항복기(降服旗) 꽂으리니, 옆구리를 자리에
대지 않은 지 80년이라. 내가 와서 도 물으며 스승되기 청하니, 배운 학식 다 털어 주어 헛되이 돌아감을 면했도
다.
조용히 와서 하룻밤 자니 문득 세상 생각을 잊어버려, 10년 홍진(紅塵)에 일만 일이 틀린 것 알겠구나. 어찌하면
이 몸도 얽맨 줄을 끊어버리고, 늙은 중 따라 연기와 안개에 취해볼까. 산중은 산을 사랑해 세상에 나올 기약이
없고, 세속 선비도 다시 올 것 알지 못하는 일, 차마 바로 헤어지지 못해 두리번거리는데, 소나무 위에 지는 해는
세 장대[三竿] 기울었도다." 하였다.
위봉사(威鳳寺)ㆍ운암사(雲巖寺) : 모두 주줄산에 있다. 안심사(安心寺) : 도솔산에 있다.
사묘 사직단 : 현의 서쪽 3리에 있다. 문묘 : 향교에 있다. 성황사ㆍ여단 : 모두 현의 북쪽 4리에 있다.
고적 운제폐현(雲梯廢縣) : 현의 북쪽 20리에 있는데, 지금 이름은 운산(雲山)이다.
본래 백제 지벌지현(只伐只縣)이었는데, 신라 때 지금 이름으로 고치어 덕은군(德殷郡)의 영현으로 만들었고,
고려 때 전주에 붙였다. 본조 태조 원년에 이 고을에 붙였다. 삼기정(三奇亭) : 현의 동쪽 6리에 있다.
○ 하연(河演)의 기에, "고산현의 동쪽 5리쯤에 조그마한 산등성이가 있고, 깎아지른 듯한 낭떠러지가 서 있다.
그 아래에는 긴 시냇물이 있어 빙빙 돌면서 맑고 맑은데, 위에는 늙은 소나무가 있어 무성하게 우거져 푸르르며,
그 서쪽은 편평하게 고르다. 임인년 봄 내가 순찰 차 이곳에 도착하여 올라가 관람하니, 안개와 초목들의 아름
다운 경치가 모두 눈앞에 보이는데, 그 중에도 물ㆍ돌ㆍ소나무는 특히 기묘하게 좋은 경치였다.
이에 3기(奇)라고 이름을 정해 나무를 깎아 써 두었더니, 지금 현감 최득지(崔得之)가 여기에다 정자를 짓고 나
에게 기문을 청하는데, 나는 처음 명명(命名)한 사람이라 의리상 사양하지 못하였다.
대개 사람의 정(情)은 물(物)에 감동이 되어서 변하는데, 눈으로 보는 바는 그 느낌이 더욱 간절하다. 냇물이 맑
은 것을 보면 내 마음 본연(本然)의 밝은 덕이 더욱 밝아지고, 돌이 높게 겹친 것을 보면 확연(確然)히 뽑지 못
하는 뜻이 더욱 굳어지며, 소나무가 늦도록 푸른 것을 보면 곧고 굳은 절개가 더욱 높아지는데, 이 산등성이의
세 가지 물건이 어찌 관람하는 데에 기이하고 무더운 여름철의 휴식하는 쾌락뿐이겠는가.
내가 보는 바는 다른 사람과는 다르다. 후세의 군자들이 여기에 올라서 감흥이 되어 마음을 붙이고 조용히 생각
하면, 족히 마음을 잡고 성정(性情)을 기르는 기틀이 될 것이고, 또한 목욕하고 바람 쏘이면서 읊조리고 돌아가
는 즐거움이 될 것이니, 옛날에 내가 명명한 뜻을 대개 짐작할 것이다." 하였다.
용계성(龍鷄城) : 용계천(龍溪川)가에 있는데, 탄현과의 거리는 서쪽으로 10리쯤 되고, 서북쪽으로 연산현까지
의 거리는 30리이다. 옛 성이 있고 돌로 쌓았는데, 둘레가 1천 14척이고, 높이가 10척이며, 지금은 반절이나
무너졌다.
인물고려 고의화(高義和) : 천성이 조용하고 날쌔며 여력(膂力)이 있었다. 군보대정(軍補隊正)에 뽑혔고, 후에
벼슬이 수사공좌복야(守司空左僕射)에 이르렀다.
효자고려 유석진(兪石珍) : 현리(縣吏)이다. 아버지 천을(天乙)이 악질에 걸렸는데, 발작만 되면 숨이 끊어지니,
석진이 밤낮으로 옆에서 모시고 울부짖었다. 사람들이 말하기를, "산 사람의 뼈를 피에 타서 마시면 나을 수
있다."고 하니, 석진은 곧 왼손 무명지를 잘라 말대로 해서 먹였는데, 아버지 병이 곧 나았다.
차달(車達) : 운제현 지불역(祗弗驛) 백성이다. 형제 세 사람이 늙은 어머니를 같이 봉양하는데,
차달이 자기 아내가 어머니에게 삼가지 않는다고 쫓아버리니, 두 아우도 다 장가를 들지 않고, 같은 마음으로
어머니를 봉양하였다. 성종 9년에 세 사람을 다 역을 면해 주고, 그 소원에 따라 주현에서 호적에 넣어주었다.
제영 연촌일경유(連村一徑幽) : 고려 최영유(崔永濡)의 시에, "스스로 좋아하는 것은 나라 일에 종사하면서 인
해서 좋은 놀이 점령함이라네. 갈가마귀는 둑 위 나무에서 울고, 들 오리는 시냇물에 떠 있도다.
눈 덮인 천봉우리는 수척하고, 시골로 이어진 한 길은 깊숙하네. 멀리 와서 좋은 경치 만났으니, 말 세우고 다시
오래 머문다." 하였다.
수포원촌류(水抱遠村流) : 윤자운(尹子雲)의 시에, "산은 가까운 성곽 따라 둘러 있고, 물은 먼 마을을 안고
흐르네." 하였다.
운심동부유(雲深洞府幽) : 정지담(鄭之澹)의 시에, "지경이 고요하니 백성 풍속 후하고, 구름 깊으니 동부가
깊숙하다." 하였다.
[비고]
방면 현내(縣內) : 끝이 10리. 동면(東面) : 처음이 5리, 끝이 10리. 남면(南面) : 처음이 5리, 끝이 10리.
서면(西面) : 처음이 10리, 끝이 30리. 북면(北面) : 처음이 5리, 끝이 30리.
운동(雲東) : 북쪽으로 처음이 20리, 끝이 30리. 운서(雲西) : 북쪽으로 처음이 20리, 끝이 30리.
운북(雲北) : 북쪽으로 처음이 40리, 끝이 50리이다. 위의 3면은 운제(雲梯)의 옛 현이다.
창고 읍창(邑倉)ㆍ산창(山倉) : 비봉산성(飛鳳山城)에 있다.
교량 세심교(洗心橋)ㆍ봉림교(鳳林橋)ㆍ호액교(虎額橋)ㆍ거사교(居士橋).
토산 대나무ㆍ닥나무ㆍ뽕나무ㆍ묵토(墨土) : 서쪽 30리에 있는 부금리(赴金里)에서 난다.
[주 D-001] 황견유부(黃絹幼婦) : 황견유부(黃絹幼婦)라는 말은 변해 쓰는 말이다. 한 나라의 채옹(蔡邕)이란
사람이 한 말인데, 황견(黃絹)은 물들인 실[色絲]이니 절(絶) 자가 되고,
유부(幼婦)는 소녀(少女)이니 묘(妙) 자가 된다. 그래서 절묘(絶妙)하다는 말이다.
태인현 泰仁縣
동쪽으로 임실현 경계에 이르기까지 39리, 남쪽으로 순창군(淳昌郡) 경계에 이르기까지 48리,
서쪽으로 김제군 경계에 이르기까지 28리, 북쪽으로 금구현(金溝縣) 경계에 이르기까지 17리,
서울과의 거리는 5백 63리이다.
건치연혁 태산군(太山郡)은 본래 백제 대시산군(大尸山郡)이었는데, 신라 때 태산으로 고쳤다. 태(太)는 태(泰)
로도 통한다. 고려 때 고부군에 붙였다가 후에 감무를 두었고, 공민왕 3년에 현사람으로서 원 나라 사신인
임몽고불화(林蒙古不花)가 나라에 공이 있다 하여 군으로 승격시켰다.
인의현(仁義縣)은 본래 백제 빈굴현(賓屈縣) 부성(賦城)이라고도 한다. 이었는데, 신라 때 무성(武城)으로
고치어 태산군의 영현으로 만들었다. 고려 때 인의로 고치어 고부군에 붙였고, 태산감무에게 와서 겸하게 하였
으며, 현종 10년에 각각 감무를 두었다.
본조 태종 9년에 또 합치어 한 고을로 만들고, 지금 이름으로 고쳐서 현을 거산역(居山驛)에 옮겼다.
관원 현감ㆍ훈도 : 각 1명이다.
군명 대시산ㆍ태산ㆍ빈굴ㆍ무성ㆍ부성ㆍ인의.
성씨본현 박(朴)ㆍ시(柴)ㆍ허(許)ㆍ전(田)ㆍ경(景). 인의(仁義) 유(庾)ㆍ송ㆍ조(趙)ㆍ종(宗)ㆍ섭(葉),
안(安) : 서울. 허 : 태산(泰山). 이(李) : 고부(古阜). 어떤이는 이 세 성은 붙인 성이라 한다. 김제에도 보인다.
능향(綾鄕) 경(景)ㆍ시(柴)ㆍ박. 나향(羅鄕) 경(慶). 대곡(大谷) 전(田).
산천 죽사산(竹寺山) : 현의 북쪽 2리에 있는데 진산이다. 상두산(象頭山) : 현의 동쪽 15리에 있다.
운주산(雲住山) : 현의 남쪽 30리에 있다.
모악산(母岳山) : 현의 동쪽 30리에 있다.
연지(蓮池) : 객관 남쪽 1리에 있다.
견천(犬川) : 현의 북쪽 10리에 있는데, 상두산 북쪽에서 나와 이평(梨坪)에 이르러 남천(南川)과 합친다.
남천 : 현의 남쪽 5리에 있는데, 상두산 남쪽에서 나와 이평에 이르러 정읍의 물과 합쳐서 서쪽으로 흘러 김제군
동진으로 들어간다. 우항제(牛項堤) : 현의 서쪽 20리에 있다.
토산 화살대[竹箭]ㆍ숫돌 : 모두 인의성 산에서 난다. 게ㆍ감ㆍ석류ㆍ차ㆍ모시ㆍ봉밀ㆍ생강.
궁실 객관 : 정곤의 기에, "태인현은 곧 옛날의 태산과 인의 두 고을인데, 우리 조정에서 두 고을의 이름을 아울
러서 태인이라 하였다. 읍내는 옛날 태산의 동쪽 구석에 치우쳐 있었기 때문에, 인의의 백성들이 왕래하는데
병통으로 여겼다. 병신년 가을 8월에 현감 황경돈(黃敬敦)이 두 고을의 중간 지점인 거산역 옛 객관을 현의 객
관으로 삼았으나, 너무 좁고 누추하였다.
무술년 겨울에 오치선(吳致善)이 이어 와서 드디어 옛 객관의 서쪽에 지세를 살피고, 기해년 가을에 비로소
후청(後廳)ㆍ동서침(東西寢)ㆍ남청(南廳)ㆍ동서행랑(東西行廊)을 세우니, 모두 몇 칸이다.
신축년 여름에 안기(安起)가 오공(吳公)의 뜻을 이어받아 좌우랑(左右廊)ㆍ좌우마구[左右廐]ㆍ대문ㆍ고옥
(庫屋)ㆍ향교ㆍ성전(聖殿)을 더 세우니, 모두 몇 칸이다……." 하였다.
누정 함담정(菡萏亭) : 객관 동쪽에 있다.
○ 현감 장우규(張友奎)가 세웠다.
학교 향교 : 현의 서쪽 3리에 있다. 신증 향학당(鄕學堂) : 현의 동쪽 20리에 있다.
정언정극인(丁克仁)이 처음에 사삿집 서당으로 설치하였는데, 후에 현 사람 송세림(宋世琳)이 그 제도를 확장
하여 강당을 세웠고, 동서쪽에 재사(齋舍)가 있는데, 항상 학도들을 모아 가르치고 훈계하였다.
역원 거산역(居山驛) : 현의 남쪽 1리에 있다. 정어원(鼎魚院) : 현의 동쪽 10리에 있다.
태거원(泰居院) : 현의 서쪽 5리에 있다. 왕륜원(王輪院) : 현의 북쪽 9리에 있다.
신증교량 태거교(泰居橋) : 현의 남쪽 5리에 있다.
불우 용장사(龍藏寺) : 운주산(雲住山)에 있다.
○ 김극기의 시에, "이인(異人)이 일찍 석장(錫杖 중들의 지팡이) 걸어 두고, 용혈(龍穴)에서 명수(冥修)를
부쳤네. 삼명(三明)을 다 깨달은 후 이범(二梵)은 거의 아름다운 경지에 이르렀다. 아침 범종(梵鍾)은 묵중하게
귀머거리 깨우치고, 저녁 등은 길이 고요함을 깨뜨리네. 번뇌의 기틀 정상(淨想)에서 달아나고, 뛰어난 경치 깊
이 찾는 데에서 따라온다. 자리 떨치니 부채 잡기 게으르고, 화로 안으니 가죽옷 벗고 싶네.
월랑(月廊)에는 죽고(粥鼓 식사 시간 때 치는 북이다)가 울리는데, 풍탑(風榻)에는 차병이 출렁인다.
문득 여악(廬嶽) 도연명(陶淵明)의 정취를 가지고, 섬계(剡溪) 왕자유(王子猷)와 같이 행동한다.
동구(洞口)에서는 누가 서로 보내 주나, 오직 골짜기로 나오는 회오리바람뿐이다." 하였다.
영천사(靈泉寺)ㆍ흥룡사(興龍寺) : 모두 모악산에 있다.
사묘 사직단 : 현의 서쪽 3리에 있다. 문묘 : 향교에 있다. 성황사 : 현의 서쪽 4리에 있다.
여단 : 현의 북쪽에 있다.
고적 인의폐현 : 지금 치소의 서쪽 10리에 있다. 고태산(古泰山) : 현의 동쪽 20리에 있다.
대곡 부곡 : 현의 동쪽 25리에 있다. 개문부곡(開門部曲) : 현의 동쪽 40리에 있다.
도전부곡(桃田部曲) : 현의 동쪽 30리에 있다. 능향(綾鄕) : 현의 동쪽 5리에 있다.
나향(羅鄕) : 현의 서쪽 10리에 있다.
명환신라 최치원(崔致遠) : 치원이 스스로 서쪽에서 배워 얻은 바가 많다고 하였다. 고국으로 돌아오게 되어
장차 자기의 뜻을 행하려 하였으나, 쇠해가는 나라의 정국은 의심과 시기가 많아 세상에 쓰이지 못하고 드디어
외직으로 태산군 태수가 되었다.
인물고려 전원균(田元均) : 고사(古事)를 널리 알고 문장에 능하였으며, 이르는 곳마다 명성과 공적이 있었다.
벼슬이 상서좌복야(尙書左僕射)에 이르렀다.
우거본조 정극인 : 처음에 상사(上舍 진사)로서 태학(太學)에서 유학하였는데, 사람들이 경서(經書)에 밝고 행
실을 닦았다고 칭찬하였다. 문종조에 은거하고 있던 그를 천거하여 불러다가 광흥창 부승(廣興倉副丞)을 제수
하였다. 뒤에 과거에 급제하여 벼슬이 사간원 정언에 이르렀고, 나이가 많아 벼슬을 사양하고 물러났다.
효자본조 허중민(許仲民) : 어머니는 나이가 75세였는데, 밤에는 중민의 작은 딸을 안고 잤다. 그러다가 집에
불이 나니 중민이 불을 무릅쓰고 들어가서 어머니를 업고 나와 죽음을 겨우 면하였는데, 딸은 불에 타서 죽었다.
일이 나라에 보고되어 특별히 제용직장(濟用直長)을 제수하였다.
신증 박윤근(朴允斤) : 아버지가 악질을 앓는데, 윤근의 나이 겨우 15세였다. 손가락을 잘라 국에 타서 먹이니
병이 곧 나았다. 이번 임금 8년에 정문을 세웠다.
경례손(景禮孫) : 아버지가 일찍이 물에 빠졌는데 뛰어 들어가서 구하였으므로 아버지는 죽음을 면하였고,
예손은 힘이 다하여 마침내 빠져 죽었다. 일이 나라에 보고되어 정문을 세웠다.
열녀본조 임씨(林氏) : 밤에 그집에 불이 났는데, 시어머니가 병으로 일어나지 못하니, 임씨가 업고 나와 화를
면하였다. 일이 나라에 보고되어 정문을 세웠다.
○ 윤회(尹淮)의 서(序)에, "우리나라의 건국은 도당씨(陶唐氏 요(堯) 임금을 말함)와 나란하고, 주(周) 나라에
미쳐서는 기자(箕子)께서 봉강(封疆)을 받았으니, 인현(仁賢)의 덕화는 오래면 오랠수록 더욱 깊었다.
삼가 생각건대, 우리 조정에서는 열성(列聖)이 서로 이으시어 교화를 밝히시고 풍속을 후하게 하셨으니,
가정에서는 절개와 의리를 숭상하고, 사람들은 사랑과 공경을 돈독히 하여 아무리 못난 남자와 어리석은 여자
일지라도 향할 곳을 알지 못하는 자가 없었다.
구고 임씨(九皐林氏)는 전의부정(典醫副正) 영순(英順)의 딸인데, 한 고을의 명망이 있는 집안이었다.
15세가 되어 현재 통례문 봉례랑(通禮門奉禮郞) 박조(朴慥)에게 시집갔는데, 시어머니 전씨(田氏)를 섬겨 부인
의 도를 다하였다. 건문(建文) 신사년 봄에 박군은 서울에서 벼슬하고, 임씨 홀로 태인현에서 시어머니를 모시
고 있었는데, 3월 10일 밤중에 집에 불이 났다. 사람들은 모두 창황히 놀라면서 자신을 구하기에 겨를이 없었는
데, 오직 시어머니만은 늙고 병들어 잠자리에 엎드린 채 일어나지 못하여 어찌할 수 없었다.
이에 임씨가 급히 뛰어 들어가서 시어머니를 안고 나오다가 섬돌에 부딪쳐 쓰러졌는데, 바람에 불기운이 성하
자 자기 몸으로 시어머니를 덮어, 머리가 그슬리고 등이 데어 문드러졌다. 건장한 종이 그 의리에 감동되어
뛰어들어서 불을 막으면서 업고 나와, 시어머니와 며느리가 마침내 죽음을 면할 수 있었다. 일이 나라에 보고
되어 정문을 세우도록 명하고, 의부(義婦)라는 호를 주니, 조정의 어진 사대부(士大夫)들이 모두 시를 지어 읊
고 노래하여 이미 축(軸)이 가득하였다.
하루는 나의 동년(同年) 친구 유순도(庾順道)가 그 축을 가지고 와서 나에게 보이며, 졸문(拙文)으로 서문해 줄
것을 청하였다. 나는 생각하건대, 임씨는 한 사람의 부인일 뿐이다. 학문의 힘과 연마한 공부는 없었지만,
특별히 시어머니를 효성으로 봉양하였으므로 사랑하고 공경하는 마음이 속에 쌓였고, 남편을 잘 섬겼으므로
보고 느껴 온 바가 본래 있었다. 때문에 창졸간에 일을 당하여도 한 생각이 나온 바가 과단성 있어 막을 수 없
어서, 뜨거운 불속에 뛰어들어 다만 시어머니를 구하는 것만 급히 생각하고, 일찍이 자기 몸의 위태롭고 또 죽을
것을 돌보지 않은 것이다. 이는 비록 천성의 진실에서 근본된 것이지만, 어찌 우리 성조(聖朝)의 은택으로 길러
서 풍화를 가다듬게 한 소치가 아니겠는가. 내가 태사(太史 사관(史官))의 자리에 있기 때문에 그 아름다움을
기꺼이 말하여, 후세에 글을 쓰는 자에게 상고함이 있도록 한다." 하였다.
[비고]
연혁 고종 32년에 군으로 고쳤다. 《文獻備考》
방면 현내(縣內) : 끝이 10리. 동촌(東村) : 처음이 3리, 끝이 20리. 남촌(南村) : 처음이 10리, 끝이 20리.
서촌(西村) : 처음이 10리, 끝이 20리. 북촌(北村) : 처음이 15리, 끝이 25리.
옹지(甕池) : 동쪽으로 처음이 4리, 끝이 15리. 고현내(古縣內) : 동남쪽으로 처음이 20리, 끝이 30리.
산내(山內) : 동남쪽으로 처음이 30리, 끝이 70리. 산외(山外) : 동쪽으로 처음이 20리, 끝이 40리.
인곡(仁谷) : 북쪽으로 처음이 10리, 끝이 15리. 감산(甘山) : 북쪽으로 처음이 15리, 끝이 20리.
사곡(沙谷) : 서북쪽으로 처음이 25리, 끝이 30리. 은기동(銀器洞) : 서북쪽으로 처음이 17리, 끝이 30리.
용산(龍山) : 서북쪽으로 처음이 30리, 끝이 40리. 거산(居山) : 남쪽으로 끝이 10리.
흥천(興天) : 서쪽으로 처음이 5리, 끝이 15리.
○ 나향(羅鄕)은 서쪽으로 10리, 능향(陵鄕)은 동쪽으로 10리, 도전부곡(桃田部曲)은 동쪽으로 30리,
개문부곡(開門部曲)은 동쪽으로 40리, 대곡부곡(大谷部曲)은 동쪽으로 25리이다.
성지 인의고현성(仁義古縣城) : 흙으로 쌓았던 유적이 있다.
창고 창(倉) 3 : 읍내에 있다. 남창(南倉) : 고현내면(古縣內面)에 있다.
산창(山倉) : 남쪽으로 60리, 장성(長城) 입암산성(笠巖山城)에 있다.
교량 태거교(泰居橋) : 남쪽으로 5리. 장탄교(長灘橋) : 남쪽으로 5리, 모두 남천(南川) 하류이다.
호천교(虎川橋) : 북쪽으로 5리, 호천 하류이다.
토산 닥나무ㆍ칠ㆍ뽕나무ㆍ게.
누정 청현루(聽絃樓)ㆍ진남루(鎭南樓)ㆍ파향정(坡香亭)ㆍ관덕정(觀德亭).
서원 남고서원(南皐書院) : 선조 정축년에 세우고 숙종 을축년에 사액하였다.
이항(李恒) : 자는 항지(恒之)이고, 호는 일제(一齊)이며, 본관은 성주(星州)이다. 벼슬은 장악원정(掌樂院正)
이다.
김천일(金千鎰) : 진주 편에 있다. 무성서원(武城書院) : 광해조 을묘년에 세우고 숙종 병자년에 사액하였다.
최치원 : 문묘 조에 있다. 신라 때 태산태수(太山太守)였다.
신잠(申潛) : 자는 원량(元亮)이며, 호는 영천자(靈川子)이고, 본관은 고령(高靈)이다. 벼슬은 상주 목사(尙州
牧使)였다.
정극인(丁克仁) : 자는 가택(可宅)이고, 호는 불우헌(不憂軒)이며, 본관은 영광(靈光)이다. 벼슬은 정언이었는
데 예조 참판(禮曹參判)을 추증하였다.
송세림(宋世琳) : 자는 헌중(獻仲)이고, 호는 눌암(訥庵)이며, 본관은 여산(礪山)이다. 벼슬은 교리였다.
35권 나주목 羅州牧
동쪽으로 남평현(南平縣) 경계까지 7리, 광산현(光山縣) 경계까지 20리,
남쪽으로 영암군(靈巖郡) 경계까지 50리, 장흥부(長興府) 경계까지 75리,
서쪽으로 무안현(務安縣) 경계까지 38리, 북쪽으로 함평현(咸平縣) 경계까지 40리이며,
서울까지의 거리는 7백 42리이다.
건치연혁 본래 백제의 발라군(發羅郡) : 통의(通義)라고도 한다.
신라에서 금산군(錦山郡 : 금성〈錦城〉이라고도 함)으로 고쳤다. 신라 말에 견훤(甄萱)이 후백제라 칭하고 이
땅을 모두 차지했었다. 얼마 안 되어 군인(郡人)이 후고구려의 왕 궁예(弓裔)에게 붙자, 궁예는 고려 태조를
정기태감(精騎太監)으로 삼고, 주사(舟師 수군)를 거느리고 가서 쳐 빼앗아 지금의 이름으로 고쳤다.
고려 성종 14년에 절도사(節度使)를 두고 진해군(鎭海軍)이라 불러 해양도(海陽道)에 예속시켰다.
현종 원년에 거란(契丹)을 피해 남방으로 파천하여 이곳에 와 10여 일을 머물다가, 거란군이 패하여 물러가자
왕이 환도했다. 현종 9년에 목(牧)으로 승격시켰다. 본조에 와서도 그대로 하였다가 세조 때 진(鎭)을 두었다.
진관 군(郡)이 둘이고 : 영암(靈巖)ㆍ영광(靈光). 현이 여덟이다. : 함평ㆍ고창(高敞)ㆍ광산ㆍ장성(長城)ㆍ
진원(珍原)ㆍ무장(茂長)ㆍ남평ㆍ무안. 신증 광산을 주(州)로 올렸다. 신증 주가 하나이다 : 광주(光州).
관원 목사(牧使)ㆍ판관(判官)ㆍ교수(敎授) : 각 1명이다.
군명 발라(發羅)ㆍ통의(通義)ㆍ금산(錦山)ㆍ금성(錦城)ㆍ진해군(鎭海軍)
성씨본주 김(金)ㆍ나(羅)ㆍ오(吳)ㆍ정(鄭)ㆍ진(陳)ㆍ손(孫)ㆍ남(南)ㆍ박(朴)ㆍ유(柳). 종의(從義) 박(朴)ㆍ
홍(洪). 영산(榮山) 윤(尹)ㆍ황(黃). 회진(會津) 양(梁)ㆍ임(林)ㆍ신(申)ㆍ조(曹)ㆍ서(徐). 안로(安老) 김(金)ㆍ
서(徐)ㆍ차(車)ㆍ전(全). 반남(潘南) 홍(洪)ㆍ조(曹)ㆍ박(朴)ㆍ채(蔡)ㆍ송(宋)ㆍ주(朱). 복룡(伏龍) 조(曹)ㆍ
박(朴)ㆍ구(仇)ㆍ유(庾)ㆍ화(化), 범(汎) : 다른 곳에서 왔다. 장산(長山) 남(南)ㆍ김(金)ㆍ채(蔡)ㆍ임(任)ㆍ
장(張). 여황(艅艎) 조(趙)ㆍ조(曹)ㆍ화(化)ㆍ주(朱)ㆍ김(金) : 전(全)이라 한 데도 있다. 압해(押海) 박(朴)ㆍ
주(朱) : 주(周)라 한 데도 있다. 정(丁)ㆍ강(江)ㆍ남(南)ㆍ고(固). 군산(群山) 유(兪)ㆍ윤(尹).
임성(任城) 박(朴)ㆍ유(兪). 극포(極浦) 윤(尹). 거평(居平) 사마(司馬)ㆍ유(柳)ㆍ임(林). 금마(金磨) 하(河).
손리(孫利) 오(吳). 수다(水多) 방(邦)ㆍ유(兪)ㆍ이.
풍속 사람들이 순박하여 다른 생각이 없으며, 힘써 농사짓는 것을 업(業)으로 한다 : 정도전의 기(記)에 있다.
음사(淫祀)를 숭상한다. 가게를 벌여 물건을 팔고 산다. 민속이 순박하다 : 이예(李芮)의 시에 있다.
형승 모든 산이 북으로 향하였다 : 허백(許伯)의 시에 있다. 남방의 한 거진(巨鎭)이다 : 정도전의
《유부로서(諭父老書)》에 있다.
산천 금성산(錦城山) : 주의 북쪽 5리에 있는데 진산(鎭山)이다.
○ 정도전(鄭道傳)의 〈소재동기(消災洞記)〉에, "금성산은 단중(端重)하고 기위(奇偉)하여 동북에 웅거하였
으니 나주의 진산이다." 했다.
○ 김극기(金克己)의 사(詞) 〈강남락(江南樂)〉주D-001에, "신령스러운 멧부리 매우 높다.
깊숙한 골짜기에 호랑이가 일찍이 돌을 차고[跔] 갔고, 옛 못에는 용이 또한 구슬을 안고 조는데, 달밤에는 뭇
신선이 내려온다. 매우 높아 하늘과의 거리가 겨우 일악(一握)이다. 솔숲절[松寺] 저녁 종소리 깊은 골짜기에
전해지고, 버드나무 마을 쓸쓸한 방앗소리 외로운 연기 너머에서 들리는데, 조도(鳥道)주D-02가 위로 꾸불꾸
불 이어졌네." 하였다.
○ 윤소종(尹紹宗)의 시에, "금성산은 바다 남쪽에 있으니, 태사(太姒)의 고장으로 5백 년 이어왔네.주D-03 한
척의 배로 견왕(甄王)이 귀순한 길이요, 일만 깃발 현묘(顯廟 현종(顯宗))가 출사(出師)했던 곳이라네.
흥룡사(興龍寺) 밖에는 서기(瑞氣)가 떠 있고, 개계원(開界院) 앞에는 흰 연기가 일어나네.
성조(聖祖 태조(太祖))의 누선(樓船)을 여기에서 맞았으니, 동정(東征)하는 오늘날 생각 그지 없어라." 하였다.
덕룡산(德龍山) : 주의 남쪽 60리에 있다. 재신산(宰臣山) : 주의 남쪽 9리에 있다.
시랑산(侍郞山) : 주의 남쪽 8리에 있다. 주 사람들이 재신산(宰臣山)을 목사(牧使)의 비보(裨補)라 하고,
시랑산을 판관(判官)의 비보라 한다.
쌍계산(雙溪山) : 주의 남쪽 60리에 있다. 용진산(湧珍山) : 주의 북쪽 45리에 있다.
도야산(都野山) : 주의 북쪽 35리에 있다. 월정봉(月井峯) : 주성(州城)의 서쪽에 있다.
장원봉(狀元峯) : 주성의 서북쪽에 있다. 두 봉우리가 모두 금성산의 서쪽 갈래로서 주성을 돌아 안고 있다.
앙암(仰巖) : 금강(錦江) 남안에 있다. 혹 노자암(鸕鶿巖)이라고도 한다. 그 밑에는 물이 깊어 헤아릴 수 없는데
속설에 용이 있다고 한다. 바위 밑에 구멍이 있는데 조수가 밀려 갔을 때는 보인다. 전설에 명(明) 나라 황엄
(黃儼)이 제주(濟州)로 갈 때 압승(壓勝)주D-04한 곳이라 한다.
복암(伏巖) : 광탄(廣灘) 서쪽 언덕에 있으며 주 사람들이 놀이하는 곳이다. 바다 : 주의 서남쪽 70여 리에 있다.
금강진(錦江津) : 일명(一名) 금천(錦川), 목포(木浦)이며, 혹은 남포(南浦)라고도 한다. 곧 광탄의 하류인데 주
의 남쪽 11리에 있다.
○ 중 원감(圓鑑)의 시에, "석양에 봉우리 그림자 물가에 떨어지는데, 부서진 갓 등(藤) 지팡이로 나루 가에 서
있네. 강물은 유유히 흐르고 산은 아득하니, 가을 빛이 사람의 시름을 견디지 못하게 하도다." 하였다.
광탄(廣灘) : 그 근원이 여덟이다. 하나는 창평현 무등산(無等山)의 서봉학(瑞鳳壑)에서 나오고, 하나는 담양부
(潭陽府)의 추월산(秋月山)에서 나오고, 하나는 장성현 백암산(白巖山)에서 나오고, 하나는 노령(蘆嶺)에서
나오고, 하나는 광산(光山) 무등산(無等山) 남쪽에서 나오고, 하나는 능성현(綾城縣) 여점(呂岾)의 북쪽에서
나온다. 이것들이 모두 주의 북쪽에 이르러 작천(鵲川)ㆍ장성천(長成川)과 합류하여 주의 동쪽 5리에 와서 광탄
이 된다. 정자천(亭子川) : 주의 서쪽 25리에 있다. 금성산의 서남쪽에서 나와 남포(南浦)로 흘러 들어간다.
송지천(松只川) : 주의 남쪽 15리에 있다. 쌍계산에서 나와 북쪽으로 흘러 남포로 들어간다.
장성천(長成川) : 주의 북쪽 10리에 있다. 도야산(都野山)에서 나와 광탄으로 들어간다.
학교천(鶴橋川) : 금성산에서 나와 남쪽으로 흘러 성안으로 들어 왔다가, 동쪽으로 흘러 광탄으로 들어간다.
작천(鵲川) : 주의 북쪽 35리에 있다. 주의 용진산(湧珍山) 및 영광군 수연산(隨緣山)에서 나와 남쪽으로 흘러
광탄으로 들어간다.
고막포(古幕浦) : 주의 서쪽 30리에 있다.
팔니도(八尒島) : 주위가 28리이다. 안창도(安昌島) : 주위가 20리이다. 하의도(河衣島) : 주위가 30리이다.
태니도(笞尒島) : 주위가 30리이다. 도초도(都草島) : 주위가 35리이다. 자을도(者乙島) : 주위가 31리이다.
지좌도(只佐島) : 주위가 45리이다. 수치도(愁致島) : 주위가 23리이다. 사치도(沙致島) : 주위가 12리이다.
대야도(大也島) : 주위가 23리이다. 소지도(小智島) : 주위가 25리이다. 반월도(半月島) : 주위가 12리이다.
박지도(朴只島) : 주위가 8리이다. 고하도(高下島) : 주위가 12리이다. 다리도(多里島) : 주위가 15리이다.
사읍도(沙邑島) : 주위가 45리이다. 압해도(壓海島) : 주위가 60리이다. 옛날 현(縣)의 터가 아직도 남아 있다.
송도(松島) : 주위가 10리이다. 구슬도(仇瑟島) : 주위가 10리이다. 우막도(牛幕島) : 주위가 7리익다.
소문도(蘇文島) : 주위가 7리이다. 우개도(牛開島) : 주위가 30리이다. 가난도(加難島) : 주위가 20리이다.
비니도(飛尒島) : 주위가 30리이다. 지도(智島) : 주위가 60리이다.
장산도(長山島) : 주위가 35리이다. 옛날 현의 터가 아직도 남아 있다. 자은도(慈恩島) : 주위가 45리이다.
암타도(巖墮島) : 속칭 암태(巖泰)라 하며 주위가 45리이다. 신소도(新蔬島) : 주위가 30리이다.
○ 이상 여러 섬들은 모두 주의 서쪽 50리 바다 가운데에 있다.
물길로 모두 1백 리가 넘고 또 사람들이 거주한다.
흑산도(黑山島) : 물길로 9백 리인데 주위가 35리이다. 옛날에는 흑산현(黑山縣)이라 불렀는데 유지(遺址)가
아직도 있다.
○ 송사(宋史)에, "명주(明州) 정해현(定海縣)으로부터 순풍을 만나면 3일만에 대양(大洋)에 들어가고,
또 5일만에 흑산(黑山)에 이르러 그 나라 경내에 들어간다." 한 것이 바로 이 섬이다.
우십교지(牛十橋池) : 주의 남쪽 45리에 있다. 숭교지(崇敎池) : 주의 남쪽 35리에 있다.
판제지(板梯池) : 주의 남쪽 30리에 있다. 신증 가요산(謌謠山) : 주의 남쪽 10리에 있다.
홍의도(紅衣島)ㆍ가가도(可佳島) : 모두 주의 서쪽에 있다. 물길로 1천 3백여 리이다.
토산 전복ㆍ숭어[秀魚]ㆍ은어[銀口魚]ㆍ오징어ㆍ낙지ㆍ굴ㆍ김ㆍ황각(黃角)ㆍ비자(榧子)ㆍ표고[香蕈]ㆍ
대살[竹箭] : 삼향리(三鄕里)에서 난다. 감태(甘苔)ㆍ감초ㆍ미역ㆍ숫돌 : 주의 남쪽 비음리(非音里)에서 난다.
차[茶]ㆍ석류ㆍ자기(磁器)ㆍ대나무ㆍ매산(苺山). 신증 응이[葦魚].
성곽 읍성(邑城) : 돌로 쌓았다. 주위가 3천 1백 26척이고, 높이가 9척이며, 안에 우물이 20개,
샘이 12개, 작은 시내가 하나 있다.
봉수 군산봉수(群山烽燧) : 주의 서쪽 1백 5리에 있다. 남쪽으로 무안현(務安縣) 유달산(鍮達山)에 응하고,
북쪽으로 같은 현의 고림산(高林山)에 응한다.
궁실 벽오헌(碧梧軒) : 객관(客館)의 동헌(東軒)을 말한다. 동쪽에 벽오동 나무가 있는데, 다른 군에서는 없는
것이므로 이행(李行)이 이렇게 이름짓고 시를 지었다. '○ 서거정(徐居正)의 〈중신기(重新記)〉에, "나주는
전라도에서 가장 커서 땅이 넓고 백성과 물자가 번성하다. 땅이 또한 바닷가라 벼가 많이 나고 물산이 풍성하니,
이에 전라도의 조세가 모이는 곳이며 사방의 상인들이 몰려든다. 성화(成化) 기해년에 월성(月城) 김후(金侯)가
선발되어 목사로 왔는데 또 현명한 통판(通判) 오후(吳侯)를 만나, 뜻이 같고 의기가 통하여 정사가 닦이고 폐단
이 제거되었다. 개연(慨然)히 관사를 중수할 뜻이 있어 곧 자기의 봉급을 덜고, 공금을 보태어 목수를 부르고 재
목을 모아 먼저 이 동헌(東軒)부터 수리했다. 다만 이 동헌의 옛 구조가 넓고 좁은 것이 적당하지 않았으므로 이
제 다시 설계하여 늘이기도 하고 줄이기도 했다. 마루와 방이 질서 있게 정돈되어 서늘하고 따뜻한 것이 알맞게
되니 모두 몇 칸이다. 이렇게 공사를 시작한 것이 경자년 8월인데, 수개월이 걸려 완공했으니, 크고 트이고 시원
함이 옛 건물에 비하여 배나 된다.
자제를 나에게 보내어 내 글을 구하여 영구히 전하기를 도모하는 이가 있었다. 내 생각하건대, 관사란 것은 관청
을 존엄하게 하고 손님을 접대하는 곳으로 나의 사유물이 아니요, 그것의 흥폐(興廢)는 수령에게 달려 있다.
내가 지금 수령을 보건대, 나약하여 무능하고 우활한 자는 공문서를 처리하느라고 땀을 뻘뻘 흘리며 어찌할 줄
모르니, 그 밖의 일에 겨를이 있겠는가. 간혹 현명하고 유능하다 하는 이는 핑계하기를, '나는 나라의 금령(禁令)
이 엄함을 두려워한다. 백성의 비방이 일어날 것을 어찌하랴.' 하며, 비록 바람에 꺾이고 비에 벗겨져도 일찍이
나무하나 세우고 돌 하나 옮겨서 틈이 생겨 새는 것을 수리하지 않고, 여관에 든 나그네마냥 무관심하게 앉아 허
물어지기만 기다리다가, 다 허물어진 뒤에야 고치니, 백성을 괴롭게 함을 이루 형언할 수 있겠는가.
이제 두 후(侯)는 백성을 도리로써 부리어 백성의 재물을 손상하지 않고 농사짓는 때를 어기게 하지 않고 일을 과
히 떠벌리지 않았으니, 이미 백성에게 덕되었거니 어찌 법에 방해되었으랴. 아, 물(物)의 흥폐(興廢)는 물의 운수
이다. 이 고을에 관사 있은 지 몇 년이나 되었으며, 전후로 수령이 된 자 그 얼마리오마는, 그 중수하기를 옛날에는
하지 못했다가 이제 와서 하게 되니, 어찌 때를 기다림이 아니겠는가.
내 들으니 옛사람의 말에, '대체로 궁실이나 누각을 만듦에 있어서, 이미 그런 것을 만들기를 좋아하는 자가 있어
처음으로 만들고, 반드시 그것을 아낄 줄 아는 자가 있어 뒤에 중수하는 것이니, 만약 퇴폐해도 수리하지 않아서
처음만 있고 뒤가 없으면, 이는 물리(物理)의 순환(循環)하는 도(道)가 아니다' 했으니, 그 말이 참이로다.
이 뒤에 오는 사람들은 이 두 후의 마음을 마음으로 하고, 두 후의 정사를 정사로 하여, 관청을 자기 집같이 여긴
다면 거의 두 후가 오늘 중수한 갸륵한 뜻을 저버리지 않는 것이리라.
김후의 휘(諱)는 춘경(春卿)이고, 오후의 휘는 한(漢)이니, 모두 현명하고 유능하기로 한 때에 이름이 있는 이들
이다." 하였다.
○ 성임(成任)의 시에, "벽오헌(碧梧軒)에서 벽오동을 보니, 헌(軒)에 가득 푸른 그림자 영롱히 깔렸구나.
그 가운데 앉으니 나의 모든 근심 사라지는데, 더구나 맑은 바람 불어 얼굴에 스치네. 한가롭고 편안함이 희황
(羲皇) 시대의 사람 이상이니, 눈 앞의 흥미가 아침마다 새롭구나. 기우자(騎牛子 이행(李行)의 호)의 시가 맑디
맑으니, 속됨과 누추함 씻어 진(眞)으로 돌아가누나. 길이길이 유전(流傳)하여 이 명소(名所) 빛내리니,
어찌 매몰하여 없어지리오. 글의 높고 뜻이 예스러워 세상에 없는 바라, 구슬이 반짝반짝 헌(軒) 귀퉁이 환하도
다. 내 와서 봉황의 가지를 휘여잡으니, 완연히 옥산(玉山)같은 풍채 보는 듯하네.
눈으로 보고 마음으로 생각하다가, 반일(半日)토록 애써 읊조리며 앞뜰에 섰네. 높은 데 의지하여 멀리 바라보며
구상(構想)하노라니, 동강(東江)의 물 빛이 맑게 일렁거리누나." 하였다.
신증 금성관(錦城館) : 은행정(銀杏亭) 남쪽에 있다. 목사 이유인(李有仁)이 지었다.
누정 무이루(撫夷樓) : 객관 동쪽에 있다.
○ 성임(成任)의 시에, "비 개인 뒤 산빛 고운 것이 상심(傷心)되고, 취한 후 봄빛은 얼굴에 가득 뜨누나. 풍경이
아름다우나 내 고장 아니니, 이제부터 고원(故園)에 돌아가 쉴까보다." 하였다.
동루(東樓) : 곧 성의 동문루(東門樓)이다. 목사 김계희(金係熙)가 읍 성을 증축할 때 중수(重修)한 것이다.
옛 터는 성 안에 있다.
○ 정도전의 《유부로서(諭父老書)》에, "도전(道傳)이 회진(會津)으로부터 귀양와서 나주를 지나칠 때 동루에
올라 배회하며 바라보니, 산천의 아름다움과 인물의 번성함이 거의 남방의 한 거진(巨鎭)이었다.
나주가 주(州)가 된 것은 국초부터 비롯되었으니, 우리 태조가 삼한(三韓)을 통일할 제, 군(郡)ㆍ국(國)들이 차
례로 평정될 때에 오직 후백제가 그 험하고 멂을 믿고 복종하지 않았는데, 나주 사람들은 순(順)과 역(逆)을 밝
게 알아 솔선해서 붙었으니, 고려 태조가 후백제를 병합하는데 나주인의 힘이 컸다.
태조가 친히 이 고을에 행차하시어 목(牧)으로 승격시켜 남방 여러 고을의 으뜸으로 삼으니,
이 고을을 포상(褒賞)한 것이었다. 혜종(惠宗)이 왕위를 계승하여 백성과 사직을 잘 보존하여 창업(創業)할때의
도움과 수성(守成)한 공이 있어 종묘에서 백세불천(百世不遷)의 제사를 받으셨으며,
옛 고장을 돌보고 보호하여 사당을 지어 제사하였다. 현종(顯宗)이 남쪽으로 순수할 제,
이 곳에 이르러 드디어 흥복(興復)의 공을 이루었으므로 나주에 팔관례(八關禮)주D-005를 하게 하여 서울과 비
등하게 했다.
아, 도전이 남쪽으로 떨어져 와서 서울과 멀어졌으나 조종의 공덕의 갸륵함을 듣고 이 누에 올라 바라보니, 산천
은 옛날과 같아 당시의 천승만기(千乘萬騎)가 이 안에 주둔했던 것이 상상된다. 또 혜종의 사당이 찬란하게 있는
것을 보니, 외로운 신하의 간절한 회포를 위로해 준다. 이 얼마나 다행한 일인가. 아, 나주 사람은 그들의 밭을
갈고 집에 편히 살며 그들의 생업(生業)을 즐긴 것이 어언 5백 년이니, 모두가 조종이 기르고 휴식시킨 은혜아님
이 없는 것을 부로(父老)들도 알고 있다.
그러나 이 고을은 바닷가에 있는 먼 극변(極邊)이어서 왜구(倭寇)가 걱정거리이다. 연해(沿海)의 주군(州郡)이
혹은 사로잡히고 혹은 이사가서 소연(騷然)하여 사람이 없는데, 이 고을은 그 가운데에 끼어 있으면서도 번창하
기가 거의 평일과 같아서 뽕나무와 삼이 풍부하고 벼가 들에 가득하여, 백성들이 낮에는 일하고 밤에는 쉬어 즐
거움을 누린다. 지나는 나그네가 누에 올라 산천과 들판을 바라보면, 유람하는 즐거움을 실컷 맛볼 수 있다.
백성이 번성하고 물자가 풍성하여 성덕(聖德)을 우러르며 유풍(遺風)을 노래하니, 어찌 조종의 덕이 사람들에게
감화됨이 깊은 것이 아니겠는가. 이는 다른 고을 사람의 항산(恒産)이 없으면 항심(恒心 한결 같은 마음)이 없는
것에 비할 바가 아니다. 이 어찌 목사가 어진사람이어서 덕의(德意)를 펴서 민심을 단결시켜 흩어지지 않게 한 것
이 아니겠는가. 또 평소에 부모들의 가르침이 있어 백성들이 의(義)를 알기 때문이다. 참으로 가상하도다." 하였
다.
은행정(銀杏亭) : 무이루 서쪽에 있다.
사청(射廳) : 주의 남쪽 2리쯤에 있다.
망화루(望華樓) : 객관 남쪽에 있으며, 목사 이유인(李有仁)이 세웠다. 신증 김종직(金宗直)의 시에, "연꽃 마루
[芝栱]와 비늘같은 기와지붕이 자색 노을을 스치는데, 사군(使君)은 날마다 서울을 바라보네. 벽오동 천 열매는
봉이 깃들기에 알맞고, 화각(畫角) 세 소리에 날은 저물어 까마귀 날아드네. 생선 파는 바다 저자[海市] 시끄럽
고, 우차(牛車)는 디굴디굴 마을로 돌아가누나.
한 지방의 도회(都會)에 누대(樓臺)도 좋으니, 금장(金章 고관의 복색)으로 해변에 머무름을 한하지 말라."
하였다.
신증 빙허정(憑虛亭) : 무이루 동남쪽 성 위에 있다.
○ 남곤(南袞)의 시에, "풍진(風塵) 밖에 높이 솟았고, 성벽(城壁) 사이에 우뚝하네. 나무는 평야에 의지하여 짧고,
하늘은 해문(海門)을 향하여 넓도다. 형승(形勝)은 사람 때문에 있으니, 빈붕(賓朋)이 마음껏 즐기도다. 저녁 때
그림으로나 그릴 만한 이곳은 낙조(落照)가 구름낀 산마루에 비치도다." 하였다.
학교 향교(鄕校) : 주성의 서쪽에 있다.
역원 청엄역(靑嚴驛) : 주의 북쪽 5리에 있는데 찰방(察訪)을 두었다. 본도(本道)의 속역(屬驛)은 11이니,
단엄(丹嚴)ㆍ영신(永申)ㆍ선엄(仙嚴)ㆍ신안(新安)ㆍ녹사(綠沙)ㆍ가리(加里)ㆍ영보(永保)ㆍ경신(景新)ㆍ
광화(光和)ㆍ오림(烏林)ㆍ청송(靑松)이다.
○ 찰방 1명이다.
신안역(新安驛) : 주의 남쪽 33리에 있다. 자화원(慈化院) : 주의 동문 밖에 있다.
요광원(要光院) : 주의 북쪽 20리에 있다. 금강원(錦江院) : 금강의 언덕에 있는데 누각(樓閣)이 있다.
연화원(蓮花院) : 주의 북쪽 10리에 있는데 누각이 있다. 홍해원(洪海院) : 주의 남쪽 13리에 있다.
신안원(新安院) : 주의 남쪽 35리에 있다. 개계원(開界院) : 주의 서쪽 20리에 있다.
창걸원(昌乞院) : 주의 남쪽 35리에 있다. 영원(嶺院) : 주의 남쪽 60리에 있다.
창고 영산창(榮山倉) : 금강진(錦江津) 언덕에 있으니 곧 영산현(榮山縣)이다.
나주 및 순천(順天)ㆍ강진(康津)ㆍ광산(光山)ㆍ진도(珍島)ㆍ낙안(樂安)ㆍ광양(光陽)ㆍ화순(和順)ㆍ남평(南平)ㆍ
동복(同福)ㆍ흥양(興陽)ㆍ무안(務安)ㆍ능성(綾城)ㆍ영암(靈巖)ㆍ보성(寶城)ㆍ장흥(長興)ㆍ해남(海南) 등지의
전세(田稅)를 여기에 거두어 들였다가 배로 서울에 운반한다.
신증 금상(今上) 7년에 이 창고에 거두어 들이던 것을 영광(靈光)의 법성창(法聖倉)으로 옮겼으므로 폐지되었다.
교량 학교(鶴橋) : 성 안에 있다. 영산교(榮山橋) : 금강진에 있는데, 1년에 한 번씩 수리한다.
고막교(古幕橋) : 고막포(古幕浦)에 있다.
불우 흥룡사(興龍寺) : 금강진 북쪽에 있다. 고려 태조 장화왕후(莊和王后) 오씨(吳氏)의 조부는 부돈(富伅)이요,
아버지는 다련군(多憐君)인데, 대대로 주의 목포(木浦)에 살고 있었다. 다련군은 사간(沙干) 연위(連位)의 딸
덕교(德交)를 아내로 맞아 장화왕후를 낳았다. 장화왕후가 일찍이 꿈을 꾸는데, 바다의 용이 품안으로 들어왔다.
놀라 깨어 부모에게 이야기하니, 모두 이상하게 여겼다. 얼마 안 되어 태조가 수군장군(水軍將軍)으로 나주에
와 진수(鎭守)할 때, 목포에 배를 정박시키고 물위를 바라보니 오색의 구름이 서려 있어서 태조가 그리로 가보
니 장화왕후가 빨래를 하고 있었다. 태조가 그 여자를 불러 동침하는데 미천한 신분이라고 임신을 시키지 않으
려고 정액(精液)을 자리에 쏟았더니, 왕후가 곧 빨아 먹었다. 드디어 임신하여 아들을 낳으니 이가 혜종(惠宗)
이다. 얼굴에 자리 무늬가 있으므로 세상에서는 접주(襵主 주름살 임금)라 한다. 그 자리에 큰 절을 세워 흥룡사
라 하고, 앞에 있는 샘을 완사천(浣絲泉)이라 하니, 속설에 오씨가 빨래하던 샘이라 한다.
○ 무명씨(無名氏)의 시에, "앙암(仰巖) 동쪽 용이 날던 땅, 바로 거기가 어진 왕비의 옛 집터로다.
구세(九世)의 장군이 묵던 곳이요, 삼한(三韓)의 태자가 환생한 집이라네." 하였다.
○ 중 원감(圓鑑)의 시에, "성은 퇴락하여 초목이 깊은데, 당년엔 왕의 행차가 강가에 머물렀도다.
북쪽 산의 단풍든 나무는 화개(華蓋 별 이름)에 기울고, 남쪽 언덕의 연기 낀 대밭은 우림(羽林 별 이름)에 솟았
도다. 연(輦)타고 다니던 길에 반딧불이 나는데 이끼에 달무리[蘇暈]가 엉겼고, 붉게 칠한 대문에는 새가 지저
귀니 소나무 그늘에 잠겼구나. 가을 바람 부는 퇴락한 절에 매미 소리 저물녘에 들리는데, 홀로 난간에 의지하여
고금(古今)을 느끼누나." 하였다.
법륜사(法輪寺) : 주의 서쪽 1리에 있다.
○ 고려 임유정(林惟正)의 집구시(集句詩)주D-006에, "금수(錦水)가 동으로 흘러 금성(錦城)을 둘렀으니,
매양 중추(中秋)를 만나면 배가 더 맑구나. 세사(世事)를 따라 시대마다 변함이 없으니, 옛날이나 지금이나 철철
흐르는 한결같은 소리로다." 하였다.
○ 고려 이영간(李靈幹)의 시에, "가을 서늘함과 저문 경치가 가장 서로 좋은데, 하루 저녁 절간에서 한 번 눈썹
을 펴누나. 별들은 밤이 깊은데 빛이 찬란하고, 누대(樓臺)에 달이 가득하니 그림자가 높고 낮네." 하였다.
○ 김극기(金克己)의 시에, "우레에 놀라고 돌 때리는 시냇물 소리 급한데, 어지러이 솟은 죽순[筍]같이 하늘 찌
르는 돌의 형세도 기이하도다. 청정(淸淨)한 경지를 누가 길이 관장하는고. 속세 밖의 백운사(白雲寺)뿐이로다."
하였다. 보광사(普光寺) : 금성산(錦城山)에 있다.
〈사기(寺記)〉에, "신라 선덕왕 때 중 안신(安信)이 금성산 유마굴(維摩窟)에 살면서 22년간 도를 닦다가 몸을
천길이나 되는 갑(岬)주D-07 밑에 던지니, 갑자기 오색 구름이 와서 둘러싸고 서쪽으로 가버렸다." 하였다.
○ 이방직(李邦直)의 시에, "이곳은 참으로 선경(仙境)이니, 누가 이 절을 창립했는고.
문을 두드리니 속세와 단절되고, 방으로 들어가니 도심(道心)이 통하누나. 새벽 이슬에 산은 푸름을 머금었고,
비에 가을 꽃은 붉은 빛이 바랬구나. 천고의 일을 생각하니, 나는 새가 공중을 지난 것 같구나." 하였다.
금륜사(金輪寺) : 주의 남쪽 평지에 있다. 신왕사(神王寺) : 금성산에 있다.
도홍사(道弘寺) : 금성산 월정봉(月井峯)에 있다.
○ 임유정(林惟正)의 집구시(集句詩)에, "쓸쓸한 절 찾아 일찍이 최상방(最上房)을 지나니, 대와 오동나무에
싸인 전각(殿閣)이 처량하구나. 구름이 파묻고 물이 막아 사람 없는 곳에,
오직 그윽한 꽃이 물 건너 향기를 보내네." 하였다. 쌍계사(雙溪寺) : 쌍계산에 있다.
신륵사(新勒寺) : 금성산 장원봉(壯元峯)에 있는데, 일명(一名) 울아사(鬱牙寺)라고도 한다.
용진사(湧珍寺) : 용진산에 있다. 절에 극복루(克復樓)가 있는데, 무설산인(無說山人)의 〈기문(記文)〉이 있다.
○ 정도전이 기문 뒤에 쓰기를, "여황(艅艎)의 조박(趙璞)이 〈극복루기(克復樓記)〉를 소매 속으로부터 꺼내어
나에게 보이면서, '이 기문은 곧 무설산인(無說山人)이 지은 것입니다. 극복루는 용진사에 있는데, 대체로 사람
이 누각을 귀히 여기는 이유는, 높이 올라가 멀리 바라보면 마음을 즐기고 눈을 달리어 산천 풍월을 실컷 보아
유람의 즐거움을 삼을 수 있기 때문이니, 학문과는 상관이 없습니다. 그런데 이 누각을 극복(克復)이라 이름을
붙였으니, 이 누각에 왜 이런 이름을 붙였습니까.' 한다. 나는 말하기를, '아니다. 사람의 근심과 즐거움은 마음
에 달려 있어 대하는 경치에 따라 나타나는 것이니, 마음에 근심이 있는 이는 비록 산천의 좋음과 풍월의 아름
다움을 만나더라도 바로 상심(傷心)의 느낌이 될 뿐이다. 영릉(零陵)의 산은 남방에서 가장 수려한 것이나 쫓겨
난 신하는 감옥 같은 산이라 하였고, 악양루(岳陽樓)는 천하의 장관(壯觀)인데 귀양간 사람은 서글퍼했으니,주
D-08 사람이 진실로 그 본심을 잃는다면 어디를 가나 슬프지 않은 데가 없는 것이다. 그러니 비록 누각이 있다
하더라도 어찌 즐거울 수 있겠는가.
대체로 사심(私心)을 이겨 천리(天理)를 회복하면, 마음이 넓어져 천지와 더불어 크기가 같고 만물과 더불어
조화로움을 같이하여 호호탕탕(浩浩蕩蕩) 만나는 곳마다 모두 즐겁다. 그러므로 일단사 일표음(一簞食一瓢飮)
으로 누항(陋巷)에 살더라도 그 즐거움을 고치지 않은 것이 안자(顔子)의 극복이다.
요컨대 오직 인(仁)한 후에야 그 즐거움을 즐길 수 있는 것이니, 이 누각을 극복루라고 지은 것은 그 근본을 얻은
것이다.' 했다." 하였다.
사묘 사직단(社稷壇) : 주의 서쪽에 있다.
문묘(文廟) : 향교(鄕校)에 있다. 혜종사(惠宗祠) : 흥룡사 안에 있는데, 고을 사람들이 지금까지 제사지낸다.
○ 윤소종(尹紹宗)의 시에, "철원(鐵原)이 성(聖)을 열어주었고, 금리(錦里)에서 잉태했도다.
삼한(三韓)을 통일하는 날 먼저 백제성에 오르도다. 산하가 왕기(王氣)를 돕고 사당(祠堂)에서 민정(民情)을
보겠도다. 원하건대, 동정(東征)주D-009하는 군사를 돌보아 거듭 만대에 태평을 열어 주소서." 하였다.
남해신사(南海神祠) : 주의 남쪽 45리에 있다.
○ 사전(祀典)에 중사(中祀)로 기록되었으며, 춘추로 향과 축문을 내려 제사를 지낸다.
금성산사(錦城山祠) : 사전에 소사(小祀)로 기록되었다. 사당이 다섯개 있으니 상실사(上室祠)는 산꼭대기에
있고, 중실사(中室祠)는 산허리에 있으며, 하실사(下室祠)는 산기슭에 있고,
국제사(國祭祠)는 하실사(下室祠)의 남쪽에 있으며, 미조당(禰祖堂)은 주성(州城) 안에 있다.
○ 고려 충렬왕 4년에 이 사당의 신이 무당에게 내려서 말하기를, "진도(珍島)와 탐라(耽羅)의 정벌에 나의 공이
있었는데, 장병들은 모두 상을 타고 나만 빠졌으니 어째서인가. 나를 정녕공(定寧公)으로 봉하여야 한다."
하였다.
고을 사람 보문각대제(寶文閣待制) 정흥(鄭興)이 왕에게 귀띔을 하여 작위(爵位)를 주게 하고, 또 그 고을의
녹미(祿米)를 모두 받지 않고 해마다 5석을 이 사당에 바쳐 춘추로 향과 축문과 폐백(幣帛)을 내려 제사지냈다.
본조(本朝)에 와서도 향과 축문을 내린다. 속설에, "사당의 신은 영험하여 제사를 지내지 않으면 재앙을 내리므
로, 매년 춘추에 이 고을 사람뿐 아니라 온 전라도 사람이 와서 제사를 지내는 이가 연락부절하였다.
남녀가 혼잡하게 온 산에 가득하여 노천에서 자므로 남녀가 서로 간통하여 부녀를 잃는 자가 많았다." 한다.
매일밤 기생 4명이 사당 안에 윤번으로 숙직했는데, 성종 10년에 예조에 명해서 금하게 했다.
신증 김시습(金時習)의 시에, "옛 사당이 빈 산 속에 있는데, 봄바람에 초목 향기 아름답도다. 안개 구름은 웅장
한 기운을 보태고, 우레와 비는 위엄을 돕는다. 장구와 북은 한해가 평안하기를 기원하고, 돼지 다리는 지은 농
사 풍년들기를 비는도다. 늙은이들은 취해서 부축임을 받아 돌아가는데, 막걸리는 제상에 흥건하도다." 하였다.
용진단(龍津壇) : 금강 북안에 있다. 앙암(仰巖)과 마주보고 있는데, 본 고을에서 제사지낸다.
여단(厲壇) : 주의 북쪽에 있다.
고적 영산폐현(榮山廢縣) : 주의 남쪽 10리에 있다. 본래 흑산도(黑山島) 사람들이 육지로 나와 남포(南浦)에
우거하였으므로 영산현이라 했다. 고려 공민왕(恭愍王) 12년에 군으로 승격했다가 후에 주에 예속되었다.
압해폐현(壓海廢縣) : 주의 남쪽 40리에 있다. 압(壓) 자는 압(押)으로 쓰기도 한다. 본래 바다 가운데의 섬인데,
백제 때는 아차산군(阿次山郡)이 되었다가 신라 때 지금 이름으로 고쳐 그대로 군을 삼았다.
고려초에 나주에 예속되었다가 후에 영광군에 예속되고 후에 다시 나주에 예속되었다.
후에 왜적에게 땅을 잃고 이곳에 와서 우거하였으므로 압해현이 되었다.
여황폐현(艅艎廢縣) : 주의 북쪽 40리에 있다. 본래 백제의 수천현(水川縣)인데 수입이(水入伊)라고도 한다.
신라 때 지금 이름으로 고쳐 나주에 예속시켰고, 고려와 본조에 와서도 그대로 하였다.
회진폐현(會津廢縣) : 주의 서쪽 15리에 있다. 본래 백제의 두힐현(豆肹縣)인데, 신라 때 지금 이름으로 고쳐
나주에 예속시켰고, 고려와 본조에 와서도 그대로 하였다. 안로폐현(安老廢縣) : 주의 남쪽 30리에 있다.
본래 백제의 아로곡현(阿老谷縣)인데, 고려 때 지금 이름으로 고쳐 나주에 예속시켰고, 본조에 와서도 그대로
하였다.
○ 김대경(金臺卿)의 시에, "백년의 세월에 오십이 넘었으니, 반생(半生) 동안 이미 시서(詩書) 때문에 그릇되었
네. 어찌 세상에 병란(兵亂)이 있을 줄 알았으랴. 마침내 한 섬의 양식도 저장한 것 없구나. 어찌 맨손으로 범
잡고 배 없이 하수(河水) 건너는 것을 부러워하랴. 오히려 나무에 올라가 물고기 잡는 것이 서글프네. 고을 이름
은 내 늙음을 편안히 하기에 정히 합당하니, 한 굽이 맑은 시내가 집을 둘렀네." 하였다.
복룡폐현(伏龍廢縣) : 주의 북쪽 30리에 있다. 본래 백제의 복룡현이며, 일명(一名) 배룡(杯龍)이라고도 하다가
신라 때 용산(龍山)으로 고쳐 무주(武州)의 영현(領縣)으로 삼았다. 고려 때 옛 이름으로 복구하여 나주에 예속
시켰고, 본조에 와서도 그대로 하였다. 신증 김종직(金宗直)의 시에, "남여(籃輿)가 삐걱거리며 비 개인 내를
건너가는데, 멀리 전구(前驅)가 언덕밭을 지나는 것이 보이네. 읍내의 개는 사람보고 짖는데 울타리에 구멍이
있고, 촌 무당은 귀신을 맞이하느라 종이로 돈을 만들었구나. 끊어진 구름 찬 해는 교묘히 삼켰다 뱉었다 하고,
작은 봉우리와 질펀한 언덕은 멀리 서로 접했구나. 남으로 금성(錦城)까지 30리라니, 남여 멘 하인들의 어깨가
붉어질 것이 걱정이네." 하였다.
반남폐현(潘南廢縣) 주의 남쪽 40리에 있다. 본래 백제의 반내부리현(半奈夫里縣)인데, 신라 때 지금의 이름으
로 고쳐 군으로 삼았고, 고려 초에 현으로 강등되어 나주에 예속되었다. 본조에 와서도 그대로 하였다.
장산폐현(長山廢縣) : 주의 남쪽 20리에 있는데, 일명 안릉(安陵)이라고도 한다. 본래 바다 가운데의 섬으로 백
제 때는 거지산현(居知山縣)이 되고, 거(居) 자를 굴(屈) 자로 쓰기도 한다. 신라 때 안파(安波)로 개칭하여 압해
군(壓海郡)의 영현으로 삼았다. 고려 때 지금 이름으로 고쳐 나주에 예속시켰다. 후에 왜적들에게 땅을 빼앗기
고, 이곳에 와서 우거하여 장산현이 되었다.
금성산고성(錦城山古城) : 돌로 쌓았다. 둘레가 2천 9백 46척이고, 높이가 12척이며, 삼면이 험하게 막혔다.
옛날에 군창(軍倉)이 있었는데, 지금은 퇴락하였다.
동정자(東亭子) : 임유정(林惟正)의 집구시(集句詩)에 "들에서 마음 내키는대로 걸으니, 푸른 이끼에 지팡이 짚
기가 알맞구나. 초(楚) 나라 땅은 천리나 먼데, 두견새는 한스럽게 운다. 숲이 이지러진 곳에 호수의 빛이 새어
나오고, 모래가 편평하니 풀빛이 가지런하구나. 해가 사양(斜陽)이 되니 물고기가 먹이를 찾고, 숲이 어두워지
자 새들이 깃드는구나. 고목은 하늘에 닿아 어둡고, 새 대는 물을 덮어 나직하구나. 배 젓는 사람은 보이지 않고,
해는 그림 다리[畫鄕] 서쪽에 떨어지누나." 하였다.
종남향(從南鄕) : 옛날에는 종의향(從義鄕)이라 불렀다. 주의 남쪽 50리에 있다.
손리향(孫利鄕) : 주의 북쪽 30리에 있다. 옛날에는 소산리(所山里)라 했는데, 지금은 도림리(道林里)라 한다.
평구부곡(平丘部曲) : 주의 북쪽 16리에 있다. 금마부곡(金磨部曲) : 안로현(安老縣)에 있는데, 주에서 40리이다.
거평부곡(居平部曲) : 회진현(會津縣)에 있는데, 주에서 서쪽으로 30리이다.
군산부곡(群山部曲)ㆍ극포부곡(極浦部曲)ㆍ임성부곡(任城部曲) : 이상 세 부곡은 지금은 합하여 삼향리(三鄕里)
가 되었다. 무안현(務安縣)의 남쪽을 넘어갔는데, 주에서 서쪽으로 90리이다.
수다소(水多所) : 옛날에는 수타(水墮)라 했는데, 일명 횡산(橫山)이라고도 하며, 주의 서쪽 25리에 있다.
인덕지(仁德池) : 성 안 동작리(東作里)에 있었는데 지금은 없어졌다. 석장(石檣) : 동문 밖에 있다.
전설에, "이 주를 처음 설치할 때 술자(術者)가 이것을 세워 행주(行舟)의 형세를 표시하였다." 한다.
문 안에도 목장(木檣 나무 돛대)이 있다.
명환 고려 주열(朱悅) : 고종 때 목판(牧判)이 되어 청령함으로 이름이 있었다.
김경손(金慶孫) : 고종 때 나주도 지휘사(羅州道指揮使)가 되었다. 그때 율원(栗原) 도적 괴수 이연년(李延年)이
해양(海陽) 등의 주현(州縣)을 노략질했는데, 경손이 나주에 있다는 말을 듣고 그 무리를 이끌고 와서 포위하였다.
경손이 별초군(別抄軍) 30여 명을 모집하여 나아가 싸워서, 이연년을 베고 승세를 타서 추격하니, 적당들이 크게
무너져서 지방이 다시 평정되었다. 이에 내직(內職)으로 들어가 추밀원 지주사(樞密院知奏事)가 되었다.
최린(崔璘) : 고종 때 부사(副使)가 되었다. 그때 율원 사람 이연년이 백적도원수(百賊都元帥)라 자칭하고 주군
(州郡)을 노략질하니, 최린은 지휘사 김경손과 함께 쳐부수었다. 그 공으로 특진하여 우부승선(右副承宣)이 되었
다.
김응덕(金應德) : 원종(元宗) 11년에 사록(司錄)이 되었다. 그때 삼별초(三別抄)가 진도(珍島)에 의거하여 반란을
일으켰는데, 그 형세가 매우 치열하여 모든 고을이 소문만 듣고도 항복하였다. 적장(賊將)이 나주 경계에 이르자,
응덕과 부사(副使) 박부(朴琈) 등이 주저하며 결단을 내리지 못했다.
상호장(上戶長) 정지려(鄭之呂)가 분연히 말하기를, "성에 올라가 굳게 지키지 못한다면, 차라리 산골짜기로 도
망을 갈지언정, 고을의 수리(首吏 상호장)가 되어 무슨 면목으로 나라를 배반하고 도적을 따르리요." 하였다.
응덕은 그 말을 듣자 곧 성을 지키기로 뜻을 결정하고, 나주 및 여러 영현(領縣)에 통청하여 들어와 금성산을
확보하여, 가시나무를 세워 책(柵)을 만들고 군사들을 독려했다. 도적이 이르자 군사들이 모두 상처를 싸매고
죽음으로써 지키니, 적이 7일간 주야로 공격했으나 마침내 함락하지 못했다.
민종유(閔宗儒) : 충렬왕 때 목사(牧使)가 되었다. 장항(張沆) : 충숙왕 때 목사가 되었다.
민적(閔頔) : 목사가 되었다. 윤택(尹澤) : 충목왕 때 목사가 되었다. 정치는 관대함을 숭상하여 강자를 누르고
약자를 붙들어 주었다.
전보인(全輔仁) : 성종 때 주의 경학박사(經學博士)가 되었다. 임금이 교서를 내려 격려했는데 그 교서에, "순순
(諄諄)히 지도하는 것은 선보(宣父 공자)가 문으로 넓게 해 주는[博文] 뜻에 합하고, 가르치기를 게을리 하지
않는 것은 과인의 권학(勸學)하는 마음에 부응하도다. 마땅히 발탁하는 은혜를 더하여 특별한 은총을 보이겠다."
하였다.
본조 함우치(咸禹治) : 목사가 되었다. 김계희(金係熙) : 세조 때 목사가 되었다. 은혜로운 정치를 하여 학교를
크게 수리했으므로, 백성들은 그가 떠난 뒤에도 생각하였다. 그가 죽자 백성들은 어버이의 상을 당한 것 같았고,
보(寶)주D-010를 세워 매년 제삿날이 되면 고을의 모든 사람들이 모여 명륜당(明倫堂)에서 제사를 지냈다.
최선복(崔善復) : 목사가 되었다. 강로(姜老) : 판관(判官)이 되었다. 이영견(李永肩) : 목사가 되었다.
신증 이유인(李有仁)ㆍ민이(閔頤)ㆍ김세영(金世英)ㆍ신영홍(申永洪) : 모두 목사가 되었다.
인물고려 정가신(鄭可臣) : 처음 이름은 흥(興)이다. 고종 때 과거에 급제하여 충렬왕 때 세자를 따라 원(元) 나라
로 갔다. 거기에서 세조(世祖) 황제가 중히 여기게 되어 융숭한 대우를 받았으며, 벼슬이 중찬(中贊)에 이르렀다.
성품이 정직하고 단엄(端嚴)하며 전고(典故)에 익숙하여, 한때의 사명(辭命)주D-011이 모두 그의 손에서 나왔다.
옛 집이 주의 북쪽 금안동(金安洞)에 있다. 일찍이 원 나라에 있을 때의 시에, "해동(海東) 남쪽에 금성산이 있고,
산 아래 우리 집은 초가 수간(數間)이라네. 골목의 버들과 동산의 복숭아는 내가 심은 것인데, 봄 바람에 주인
오기를 응당 고대할 것이로다." 하였다. 나유(羅裕) : 사람됨이 용감하고 출중하여 예의에 밝고 옥사(獄事)를 판
결하는 데 밝았다. 난을 당하여 두려워하지 않아 자주 변방에서 공을 세웠다.
진자화(陳子和) : 키가 크고 날래며 용맹스러웠다. 원종 때 삼별초(三別抄)가 제주를 공격할 때 그의 나이는 19세
였는데, 바로 적중으로 뛰어들어 적장을 베어 가지고 나오니, 군사들이 기뻐 날뛰었다. 조금 뒤에 적에게 해를 당
했다.
나익희(羅益禧) : 나유(羅裕)의 아들이다. 벼슬은 상의평리(商議評理)에 이르렀다. 성품이 곧고 절의(節義)를 사모
하여 사람과 다투는 것을 부끄러워했고, 그의 어머니가 일찍이 재산을 분배하면서 특별히 종을 더 주니, 그는
사양하면서, "한 아들로서 다섯 자매의 사이에 있으니, 어찌 차마 구차스레 재물을 차지하여, 시구(鳲鳩)의 인(仁)
주D-12을 손상하게 하겠습니까." 하니, 그의 어머니가 의롭게 여겨 그대로 좇았다. 시호는 양절(良節)이다.
박상충(朴尙衷) : 반남(潘南) 사람인데 공민왕 때 과거에 급제하여 예조 정랑(禮曹正郞)이 되어, 고례(古禮)를 잘
고증하고 차례 있게 정리하여 《사전(祀典)》을 만들었다. 우왕(禑王) 때 이인임(李仁任)이 원 나라를 섬기자고
하자, 다시 상소하여 극론(極論)하다가 이인임의 뜻에 거슬려 장형(杖刑)을 받고 귀양가다가 도중에서 죽었다.
사람됨이 강개하고 큰 뜻이 있었으며, 경사(經史)에 밝고 글을 잘 지었다. 조용히 거처할 때는 책만 보며 말이
생업에 미치지 않았고, 가정에 있어서는 효도와 우애가 깊었으며, 관직에 있어서는 부지런하고 근신했다.
남의 의롭지 못한 부귀를 보면 경멸하였다. 정지(鄭地) : 모습[形貌]이 괴걸(魁傑)하고 성품이 관후하며 어려서
부터 큰 뜻이 있었다. 독서를 즐겨 대의(大義)에 통하고 출입할 때에는 항상 책을 지니고 다녔다.
공민왕 때 속고적(速古赤)이 되어 왜구를 막을 계책을 올리니, 공민왕은 보고 매우 기뻐하여 전라도 안무사로
삼았다. 신우(辛禑) 때 왜구가 양광(楊廣)ㆍ전라ㆍ경상도를 침범하여 고을마다 도륙하고 불을 지르니,
그를 삼도도지휘사(三道都指揮使)로 삼았는데, 왜구를 쳐서 크게 부수었다. 사람들은 지휘사가 아니었다면 3도
의 백성이 거의 다 없어질뻔했다고 하였다. 본조 정종(定宗) 3년에 위화도(威化島) 회군의 공을 기록하여 철권
(鐵券)을 내렸다. 벼슬에서 물러나와 광주(光州)에서 살다가 죽었다. 시호는 경렬(景烈)이다.
정침(鄭沈) : 나주의 아전으로 말을 잘 타고 활을 잘 쏘며 생업을 일삼지 않았다.
홍무(洪武) 4년 봄에 전라도 안렴사의 명으로 제주도 산천에 제사지낼 축문과 폐백을 받들고 배를 타고 가다가
왜적을 만났다. 중과부적(衆寡不敵)으로 배 안의 사람들이 모두 두려워하여 항복할 것을 의논하였는데,
그만 홀로 안된다고 하며 싸울 것을 결심하고 활로 적을 쏘니, 쏘는 족족 맞아 죽어 적이 감히 덤비지 못했다.
화살이 다 되자, 그는 일이 틀린 줄 알고 도포를 갖추어 입고 단정히 앉았다. 적이 이를 보고 놀라, "이는 관원"
이라 하고 경계하여 감히 해치지 못하자, 그는 스스로 물에 몸을 던져 죽었다. 배에 있는 사람들은 모두 적에게
항복했다.
본조 박은(朴訔) : 박상충(朴尙衷)의 아들인데 고려 말에 과거에 급제하여 본조의 좌명공신(佐命功臣)이 되었다.
벼슬은 좌의정에 이르렀고, 금천부원군(錦川府院君)에 봉해졌으며, 시호는 평도(平度)이다.
아들 규(葵)는 벼슬이 형조 참판에 이르고, 강(薑)은 좌익공신(佐翼功臣)이 되어 벼슬이 중추원사(中樞院使)에
이르렀다.
정식(鄭軾) : 가신(可臣)의 6세손이다. 세종 때 과거에 급제하여 조정과 지방에서 벼슬을 두루 지냈으며, 벼슬이
지중추부사(知中樞府事)에 이르렀다. 시호는 경무(景武)이다.
신증 최보(崔溥) : 과거에 두 번이나 우등으로 합격하여 벼슬이 예빈시 정(禮賓寺正)에 이르렀다. 학문이 해박
하였는데, 이학(理學)에 더욱 정통했다. 일찍이 왕명을 받들고 제주에 사신으로 가다가 표류되어 영파부(寧波府)
정해현(定海縣)에 이르렀는데, 〈표해기(漂海記)〉가 세상에 전한다. 연산군 무오년에 사화(史禍)를 만나 멀리
귀양갔다가 마침내 피살되었다. 금상(今上 중종) 초년에 증직(贈職)되었다.
박숭질(朴崇質) : 과거에 급제하여 벼슬이 영중추부사(領中樞府事)에 이르렀으며, 시호는 공경(恭頃)이다.
정수곤(丁壽崑) : 과거에 급제하여 벼슬이 승문원 교리가 되었다. 총명하고 기억을 잘하여 문명(文名)이 있었
더니, 일찍 죽었다. 정수강(丁壽崗) : 정수곤의 아우이다. 성품이 청렴하고 근신하였다. 과거에 급제하여 벼슬이
병조 참판에 이르렀다.
유우고려 정도전(鄭道傳) : 신우(辛禑) 초에 도전으로 하여금 북원(北元)의 사신을 영접하라고 하니, 도전이 말
하기를, "내 마땅이 북원 사신의 머리를 베어 가지고 올 것이니, 그렇지 않으면 그를 결박하여 명 나라로 보내겠
소." 했다가 드디어 이인임(李仁任)의 뜻에 거슬리어 회진현(會津縣)으로 귀양갔다. 〈소재동기(消災洞記)〉를
지었는데, "도전이 소재동 황연(黃延)의 집에 세들어 있었다. 그 동리는 곧 나주에 속한 부곡(部曲) 거평(居平)
의 땅인데, 소재(消災)라는 절이 있어 동리 이름도 소재동이라 한다. 동리를 둘러싼 것은 모두 산인데,
동북쪽에는 중첩한 산봉우리와 고개가 서로 잇달았으며, 서남쪽의 여러 봉우리는 낮고 작아서 멀리 바라볼 수
가 있다. 그 남쪽에는 들판이 펀펀한데 숲 속 연기가 일어나는 곳에 초가집 10여 호가 있으니, 바로 회진현이다.
유명한 산수(山水)로는, 금성산(錦城山)은 단중(端重)하고 기위(奇偉)하며 동북쪽에 위치하고 있고 나주의 진산
(鎭山)이다. 또 월출산(月出山)은 맑고 빼어나며 우뚝하여 동남쪽을 막아 섰는데, 영암군(靈巖郡)과의 경계이다.
금강(錦江)은 나주 동남쪽을 경유하여 회진현을 지나 남서쪽으로 바다에 들어간다. 소재동은 바다까지 수십 리
나 된다. 산의 남기(嵐氣)와 바다의 장기(瘴氣)는 사람의 살에 닿으면 언제나 병이 나게 한다.
아침저녁 어둠과 밝음에 기상이 천만 가지로 변하는 것 또한 구경할 만하다. 동(洞) 안에는 다른 초목은 없고
오직 누런 띠풀과 긴 대나무가 소나무나 녹나무[枏]에 섞여 있다. 민가에서 문과 울타리는 가끔 대나무로 나무
를 대용하니, 그 소쇄(蕭洒)하고 청한(淸寒)한 것은 멀리 온 사람도 또한 즐겨 안거(安居)할 만하다.
주민들은 순박하여 다른 생각이 없고, 힘써 농사 짓는 것을 업으로 삼는데, 황연(黃延)은 그 중에서도 으뜸이다.
집에서 술을 잘 빚고 또 자신이 술마시기를 좋아하여, 술이 익을 때마다 반드시 나에게 대접했다. 손님이 오면
언제나 술을 내어 대접하며 날이 갈수록 더욱 공손했다. 또 김성길(金成吉)이라는 사람이 있었는데, 제법 글자를
알았고, 그의 아우 김천(金天)은 이야기하고 웃기를 잘하며 술도 잘하는데, 형제가 한 집에 살았다.
또 서안길(徐安吉)이라는 사람이 있었는데, 늙어서 중이 되어 안심(安心)이라 불리었다. 코가 크고 얼굴이 길며
용모와 거동이 괴상하고, 사투리와 속담과 시골 여염집 일들을 모두 기억했다.
또 김천부(金千富)라는 이와 조송(曹松)이라는 이도 있었는데, 술을 잘 마시는 것이 김성길(金成吉)이나 황연
(黃延)의 동류(同類)였다. 그들은 날마다 나를 따라 놀며, 철에 나오는 토산물을 얻을 때마다 반드시 술과 안주
를 가지고 와서 마음껏 놀다 가곤 했다. 나는 추울 때는 갖옷 한 벌, 더울 때는 베옷 한 벌로 일찍 자고 늦게 일어
나며, 거처하는데 아무 구속이 없고 음식도 마음대로 먹었다. 두세 학자와 함께 강론한 뒤에 시내를 따라 바위
와 골짜기를 오르내리다가 싫으면 쉬고 흥이 나면 걸었으며, 경치 좋은 곳을 만나면 배회하고 구경하며 휘파람도
불고 시도 읊으며 돌아갈 줄을 몰랐다. 그러다가 혹 농부나 촌로를 만나면, 싸리 포기를 깔고 앉아 서로 위로하며
묻기를 전에 알던 사람처럼 하였다.
하루는 뒷산에 올라가 바라보다가 서쪽에 좀 편편한 곳이 있는데, 거기에서 아래로 넓은 들을 내려다볼 수 있는
것을 사랑하여, 종을 시켜 묵은 풀숲을 베어내고 집 두 칸을 짓게 했다. 띠도 자르지 않고 나무도 깎지 않았으며,
흙을 쌓아 계단을 만들고 싸리를 엮어 울타리를 만드니, 일이 간단하고 힘이 적게 들었다. 그것도 동리 사람들이
모두 와서 도우니, 며칠 안 가서 다 되었다. 현판을 '초사(草舍)'라 달고 거처했다.
아, 두자미(杜子美)가 성도(成都)에서 초당을 짓고 살았는데 겨우 한 해를 살았을 뿐이지만 그의 초당 이름은 천
년이나 전해 온다. 나는 이 초사에 얼마나 살까. 내가 떠나간 후 이 초사는 비바람에 허물어지고 말 것인가.
들불[野火]에 타 없어지거나 썩어 흙이 돼 버릴 것인가. 혹시라도 후에까지 남을 것인가, 아닌가. 모두 알 수가
없다. 다만 내가 미치광이 같고 엉성하고 어리석고 고지식하므로, 이 시대에 버림을 받아 먼 지방으로 귀양왔는
데, 동리 사람들이 나를 이와 같이 후대해 주니, 혹시 나의 곤궁한 처지를 애처로이 여겨 거두어 주는 것인가.
아니면 먼 지방에서 생장하여 시대의 여론을 듣지 못하여 나의 죄를 알지 못하는 것인가.
요컨대, 모두 매우 후대하는 것이니, 나는 부끄럽고 감격해서 시말(始末)을 적어 나의 뜻을 나타내는 것이다."
하였다.
본조 조주(趙注) : 세종 때 장원하여 청렴하고 근면하게 벼슬을 지냈으므로 명성과 업적이 높았다. 만년에 검호
조참판(檢戶曹參判)으로 물러나와 나주의 세화리(細花里)에 살았다. 그때 나이 80여 세로 매년 동짓날과 정월
원단(元旦)의 성절(聖節)이 되면 반드시 망궐례(望闕禮)에 참석하였는데, 나주 성문을 들어오면 반드시 말에서
내리고 공청(公廳)으로 갈 때에는 반드시 빠른 걸음으로 걸었다. 사람들이 까닭을 물으니, "수령은 임금의 근심
을 나눈 직책을 수행하고 성안은 수령이 있는 곳이므로 그렇게 한다." 했다.
열녀본조 나씨(羅氏) 형제 : 호장(戶長) 나종(羅宗)의 딸들이다. 언니는 한림(翰林) 조탁(趙琢)의 아내요, 동생은
견룡(牽龍) 임윤덕(林允德)의 아내이다. 형제가 모두 일찍 과부가 되어 남편의 묘소에서 3년간 묘막(墓幕) 생활
을 했다. 집이 가난했지만 제사는 오직 삼가하여 지냈다. 영락(永樂) 중에 목사 권천(權踐)이 조정에 보고하여
북장리(北藏里)에 한 쌍의 비를 세웠다. 그러므로 그 동리를 절부리(節婦里)라 하고, 그 자손들을 복호(復戶)시
켰다.
신증 능금(能今) : 정병(正兵) 최치강(崔致江)의 아내이다. 남편이 죽자 애통하여 피눈물을 흘리며 울었다.
복을 벗은 지 19년이 되었으나 아직도 고기를 먹지 않았다. 지금 임금 22년에 정문을 세웠다.
제영 영비생장구가향(靈妃生長舊家鄕) : 김극기(金克己)의 시에, "성조(聖祖 고려 태조)께서 지금의 고을을
개척하오니, 영비(靈妃)주D-013가 생장한 옛 고을이다." 하였다.
금성춘색조(錦城春色早) : 이색(李穡)의 시에, "금성에 춘색이 일러서, 강 언덕에 매화가 지려는도다." 하였다.
유시가객통오월(有時賈客通吳越) : 윤진(尹珍)의 시에, "바다에 가깝고 산으로 둘러 싸인 옛 금주(錦州), 앞 마
을 곳곳에 고기잡는 배를 매놓았구나. 한때는 장사꾼이 오월(吳越 중국) 지방과 통했었거니, 사람들은 물고기
와 새우를 얻어 주루(酒樓)로 들어가도다." 하였다.
반야백사유월색(半夜白沙留月色) : 고려 채보문(蔡寶文)의 시에, "이 땅에 왔던 것이 10여 년, 금년 가을에 또
기러기처럼 남쪽으로 왔구나. 발을 저녁 때 걷으니 강산은 좋고, 거울을 아침에 대하니 귀밑머리가 틀렸구나.
한밤 백사장에 달빛이 비치는데, 해 묵은 푸른 대가 봄빛을 빛내는구나. 부귀영화 새로운 영광이 중하니, 오고
가는데 누가 나더러 옛날의 포의(布衣)라고 할소냐." 하였다.
강회지축부(江回地軸浮) : 장윤화(張允和)의 시에, "나무가 늙으니 산의 모습이 씩씩하고, 강이 돌아 흐르니
지축(地軸)이 뜬 것 같다." 하였다.
신증 관로소매경우탁(官路小梅經雨拆) : 김시습(金時習)의 시에, "금성(錦城)의 꽃 속에 와서 봄놀이를 하니,
꽃 아래 생황(笙篁)의 노래 나그네 수심을 방랑케 하는구나. 관청 큰 길의 작은 매확는 비를 맞아 벌어지고,
역정(驛亭)의 실버들은 바람에 불려 부끄러워하는 듯. 한 떼의 구름이 바다를 덮었는데 때때로 나팔 소리 들리
고, 옥 같은 달은 창을 비취는데 홀로 누각에 의지하도다. 해거름의 호남(湖南)은 배나 쓸쓸하다.
오운(五雲)이 깃들인 서북쪽은 신주(神州 임금이 있는 곳)로다." 하였다.
십이영(十二詠) : 김종직(金宗直)의 시에, "염백(鹽白)의 누선(樓船)이 변한(卞韓)을 지나가니, 환호성이 이미
금성산(錦城山)에 진동하더라. 흥폐(興廢)를 알아 먼저 귀순하니, 예로부터 주민(州民)의 인상이 좋기도 하올
씨고." 하였다.
○ "교활한 오랑캐의 깃발이 덕진(德津)을 가리니, 어찌 남포(南浦)에 천인(天人)이 주둔했을 줄 알았으랴.
가련하다. 맹덕(孟德 조조(曹操))의 천 척 군졸이, 마침내 주랑(周郞 주유(周瑜))의 한 횃불에 재가 되었어라."
○ "용손(龍孫 고려 태조를 말함)이 당일에 군함을 대고서, 갑자기 아침엔 구름이 되고 저녁엔 비가 되는 선녀를
만났도다. 천년의 박씨(薄氏) 계집이 진실로 좋은 짝을 만나니, 지나는 사람도 그곳을 완사천(浣紗泉)이라 하는
구나."
○ "비단 빨던 강가가 고려 태조 처가의 고향이요, 흥룡사(興龍寺) 안에는 그 서광이 어리었도다.
지금도 부로(父老)들은 남긴 덕을 그리워하여, 피리 불고 북 치면서 추대왕(鄒大王 혜종(惠宗))을 즐겁게 하도
다."
○ "패강(浿江 대동강(大同江))의 푸른 나무가 창으로 하여 문드러졌는데, 현묘(顯廟)가 비단 빨던 강물로 항해
해 왔도다. 무엇이 명황(明皇 당 현종(唐玄宗))이 서촉(西蜀)으로 도망간 것과 다르랴.
무이루(撫夷樓)가 산화루(散花樓) 되었도다."
○ "누가 종지(宗之)를 기(蘷)ㆍ설(偰)의 무리라 하였던가. 험한 땅과 평지가 마침내 몸을 위태롭게 하였구나.
부질없이 부로들을 동문(東門)에서 타일러 괴롭히는 것이, 어찌 세 번 꿰매고[三緘]주D-14 회진(會津)에 숨은
것만 하랴."
○ "산과 바다는 아름다워 빼어난 기운이 새롭고, 옛부터 다만 명신(名臣)을 낸 것 뿐 아니다.
삼향(三鄕)의 대살[竹箭]이 천하에 소문나니, 주석돌[錫]과 단은(丹銀)이 어찌 보배라 할 것인가."
○ "붉은 뱃전[舷] 검은 돛대가 파도에 가득하고, 짤달막한 집 마을마다 노적가리가 높구나.
백만 섬 영산(榮山) 창고의 안에 있으니, 금년에는 백성의 고혈(膏血)을 빤다고 말하지 마소."
○ "우러르고 엎드린 두 바위 기이하고도 훌륭하니, 노니는 나그네는 동쪽 서쪽 배가는 대로 놔둔다.
빙설(氷雪) 같은 금강(錦江)에 섭섭한 생각나서, 말타는 것을 뿌리치고 걸어서 수홍교(垂虹橋)를 건너는구나."
○ "월정봉(月井峯) 서쪽 시내에는 모래가 달음질치고, 성안엔 악한 흐름[流惡]이 몇 집이나 되는가.
학교(鶴橋)에 신발 끄는 소리 얼마인 줄 알리. 아름다운 이름 마땅히 추천하여 완화(浣花)와 짝지을 것이라."
○ "남녀의 비단옷 푸른 봉우리를 쌌고, 사바(娑婆)의 노래와 춤 신간(神姦)을 즐겁게 하도다.
사군(使君)은 바로 서문표(西門豹)주D-15이니, 이 경내에 늙은 홀아비 없게 만들리라."
○ "광탄(廣灘)은 지척 사이라 성지(城池)에 붙었는데, 긴 모래사장에서 추는 졸렬한 춤은 옛부터 있었던
것이로다. 금일에 개척한 삼십 리엔 흰 느릅나무가 응당 생사당(生祠堂)을 정결하게 하였으리." 하였다.
[비고]
연혁 인조 때에 금성현감(錦城縣監)으로 내렸다가 후에 다시 승격시켰고,
영조 4년에 현(縣)으로 내렸다가 13년에 다시 승격시켰다.
고종 32년에 군(郡)으로 고쳤다. 《文獻備考》
방면 동부(東部)ㆍ서부(西部) : 모두 읍내(邑內)이다. 복암(伏巖) : 동쪽으로 처음이 10리, 끝이 20리이다.
삼가(三加) : 동쪽으로 처음이 20리, 끝이 30리이다. 상곡(上谷) : 남쪽으로 처음이 15리, 끝이 20리이다.
신촌(新村) : 남쪽으로 처음이 10리, 끝이 15리이다. 지량(知良) : 남쪽으로 처음이 15리, 끝이 25리이다.
전왕(田旺) : 남쪽으로 처음이 20리, 끝이 30리이다. 지죽(枝竹) : 남쪽으로 처음이 25리, 끝이 40리이다.
비음(非音) : 남쪽으로 처음이 30리, 끝이 40리이다. 마산(馬山) : 남쪽으로 위와 같다.
세화(細花) : 남쪽으로 처음이 30리, 끝이 45리이다. 반남(潘南) : 남쪽으로 처음이 35리, 끝이 50리이다.
금마(金麽) : 본래는 금마부곡(金麽部曲)이다. 안로(安老) : 옛 현[古縣]에 있다.
종남(終南) : 본래는 종남향(從南鄕)이며, 전에는 종의남(從義南)이라 하였다. 처음이 50리, 끝이 60리이다.
원정(元亭) : 동남쪽으로 처음이 40리, 끝이 50리이다. 시랑(侍郞) : 서쪽으로 처음이 15리, 끝이 20리이다.
모계(茅界) : 서쪽으로 처음이 20리, 끝이 25리이다. 수다(水多) : 본래는 수다소(水多所)이며,
횡산(橫山)이라고도 한다. 서쪽으로 처음이 20리, 끝이 30리이다.
금안(金岸) : 서쪽으로 처음이 30리, 끝이 40리이다. 용문(用文) : 서쪽으로 처음이 25리, 끝이 30리이다.
우곡(紆谷) : 서남쪽으로 처음이 20리, 끝이 30리이다. 오산(吾山) : 서남쪽으로 처음이 30리, 끝이 40리이다.
공수(空樹) : 서남쪽으로 처음이 40리, 끝이 45리이다. 두동(豆洞) : 서남쪽으로 처음이 45리, 끝이 55리이다.
거평(居平) : 본래는 거평 부곡이며, 회진(會津)의 옛 현에 있다. 처음이 30리, 끝이 45리이다.
곡강(曲江) : 서남쪽으로 처음이 45리, 끝이 60리이다. 대화(大化) : 북쪽으로 처음이 50리, 끝이 60리이다.
도림(道林) : 본래는 손이향(孫利鄕)이며, 옛날에는 소산리(所山里)라 불렀다. 북쪽으로 처음이 25리, 끝이 40리
이다.
여황(艅艎) : 북쪽으로 처음이 30리, 끝이 40리이다. 장본(獐本) : 북쪽으로 처음이 40리, 끝이 50리이다.
적량(赤良) : 북쪽으로 위와 같다. 이로(伊老) : 서북쪽으로 처음이 15리, 끝이 25리이다.
죽포(竹浦) : 서쪽으로 처음이 30리, 끝이 35리이다.
삼향(三鄕) : 본래 군산(群山)ㆍ두포(杜浦)ㆍ임성(任城)의 세 부곡(部曲)이다. 무안현(務安縣) 남쪽 경계 너머에
있다. 처음이 1백 리, 끝이 1백 50리이다.
영아 우영(右營) : 인조 때에 두었다.
○ 우영장 겸 토포사(右營將兼討捕使) 1명이다. 인조 19년에는 능주 목사(陵州牧使)가 토포사를 겸하였는데,
현종 15년에는 우영장이 겸하였다.
○ 속읍(屬邑)은 나주ㆍ광주(光州)ㆍ능주(陵州)ㆍ영암(靈巖)ㆍ영광(靈光)ㆍ화순(和順)ㆍ남평(南平)ㆍ
무안(務安)ㆍ함평(咸平)ㆍ무장(茂長)이고 토포(討捕)의 속읍은 장성(長城)ㆍ고창(高敞)ㆍ흥덕(興德)이다.
진보 지도진(智島鎭) : 함평 임치도(臨淄島) 서쪽의 바다 가운데에 있다. 숙종 8년에 진을 두었다.
○ 수군만호 겸 사복별장(水軍萬戶兼司僕別將) 1명이다.
흑산도진(黑山島鎭) : 우이도(牛耳島) 안에 있는데, 처음에는 별장(別將)을 두었다.
○ 수군만호 1명이다.
창고 창(倉) 다섯 : 읍내(邑內)에 있다. 제민창(濟民倉) : 서쪽으로 40리이다. 동창(東倉) : 동쪽으로 30리이다.
서창(西倉) : 서쪽으로 30리이다. 남창(南倉) : 남쪽으로 40리이다. 북창(北倉) : 북쪽으로 40리이다.
삼향창(三鄕倉) : 삼향면에 있다. 고월창(孤月倉) : 남쪽으로 30리이다. 마산면(馬山面)에 있다.
산성창(山城倉) : 장성(長城) 입암산성(笠巖山城)에 있다.
영산창(榮山倉) : 금강진(錦江津) 가에 있는데 채산현(菜山縣)의 옛 터이다.
국초(國初)에 조창(漕倉)을 두고 창성(倉城)을 쌓아, 나주ㆍ광주ㆍ순천ㆍ강진ㆍ진도ㆍ낙안(樂安)ㆍ광양ㆍ화순ㆍ
남평ㆍ동복ㆍ흥양(興陽)ㆍ무안ㆍ능주ㆍ영암ㆍ보성ㆍ장흥ㆍ해남 등의 전세(田稅)를 이곳에서 서울로 운송
하였다. 중종 7년에 조창을 영광의 법성포(法聖浦)로 옮겼는데, 지금은 강창(江倉) 뿐이다.
나리포창(羅里浦倉) : 제주(濟州)와 접하여서 설치하였다. 중종(中宗) 때에 공주(公州)에 설치하였는데,
경종(景宗) 때에 임피(臨陂)로 옮겼으며, 영종(英宗) 때에는 군산(群山)에 속하게 하였다가, 다시 임피로 환원
했으며 정종(正宗) 때에 이곳 제민창(濟民倉)으로 옮겼다.
목장 망운장(望雲場) : 영광 망운면 경계에 있다.
○ 감목관(監牧官) 1명이다.
속장(屬場) 압해도장(押海島場)ㆍ장산도장(長山島場)ㆍ자은도장(慈恩島場) : 이상은 망운에 속한다.
지도장(智島場)은 지도(智島)에 속한다.
진도 영강진(榮江津) : 고려 때에는 남포창(南浦倉)이라 불렀다.
제창진(濟倉津)ㆍ금강진(錦江津) : 모두 남쪽으로 10리에 있다.
수다진(水多津) : 서쪽으로 30리에 있다. 회진강진(會津江津) : 서남쪽으로 15리이다.
죽포진(竹浦津) : 서쪽으로 30리이다. 오산진(吾山津) : 서쪽으로 40리에 있다.
몽탄진(夢灘津) : 서남쪽으로 60리에 있다. 종남진(終南津) : 서남쪽으로 40리에 있다.
토산 닥나무ㆍ칠(漆)ㆍ모시ㆍ감ㆍ생강ㆍ우모(牛毛)ㆍ해삼.
누정 장춘정(藏春亭) : 죽포(竹浦) 서쪽에 있다.
궁묘 남해신단(南海神壇) : 남쪽으로 40리에 있는데, 중사(中祀)를 모셨다.
금성산단(錦城山壇) : 고려 충렬왕 3년에 본읍에 영을 내리어 금성산을 제사지내게 하였는데, 본조에서도 명산
이라 하여 소사(小祀)를 모셨다.
용진단(龍津壇) : 금강(錦江) 북쪽에 있는데, 우뚝 선 바위가 즐비하다. 본읍에서 제사지낸다.
사원 : 경현서원(景賢書院) : 선조(宣祖) 계미년에 세우고 정미년에 사액하였다.
김굉필(金宏弼)ㆍ정여창(鄭汝昌)ㆍ조광조(趙光祖)ㆍ이언적(李彦迪)ㆍ이황(李滉) : 모두 문묘(文廟) 편을 보라.
김성일(金誠一) : 안동(安東) 편을 보라. 기대승(奇大升) : 광주(光州) 편을 보라.
○ 월정서원(月井書院) : 현종(顯宗) 갑진년에 세우고 을유년에 사액하였다.
박순(朴淳) : 개성(開城) 편을 보라. 김계휘(金繼輝) : 호는 황강(黃岡)이며, 본관은 광주이고, 벼슬은 대사헌이
었다.
심의겸(沈義謙) : 호는 일재(逸齋)이고, 본관은 청송(靑松)이며, 청양군(靑陽君)이다.
정철(鄭澈) : 호는 송강(松江)이고, 본관은 영일(迎日)이며, 벼슬은 좌의정이다.
반계서원(潘溪書院) : 숙종 을해년에 세우고 정축년에 사액하였다. 박상충(朴尙衷) : 개성 편을 보라.
박소(朴紹) : 합천(陜川) 편을 보라. 박세채(朴世采) : 문묘 편을 보라.
박필주(朴弼周) : 호는 여호(黎湖)이고, 박소의 후손이며, 벼슬은 찬성사이고 시호는 문경공(文景公)이다.
○ 정렬사(旌烈祠) : 선조 병오년에 세우고 정미년에 사액하였다.
김천일(金千鎰)ㆍ김상건(金象乾)ㆍ양산도(梁山濤) : 모두 진주(晉州) 편을 보라.
임회(林檜) : 자는 공직(公直)이고, 호는 관해(觀海)이며, 본관은 평택(平澤)이다. 인조 갑자년 이괄(李适)의 난
때에 광주(廣州) 목사였는데 피살되었다. 좌승지를 추증하였다.
[주 D-001] 〈강남락(江南樂)〉 : 강남락(江南樂)은 사(詞)의 하나인데, 사(詞)는 시의 변형이다.
원래 시는 길게 노래하는 것으로서 노래를 문자로 써 놓은 것이다. 그런데 시대의 변천은 노래의 가락도 변하게
하여서, 재래의 시형(詩形)을 가지고서는 새 사람들의 노랫가락에 합치하지 아니하게 된다. 그래서 새 형식이
생겼으니, 재래의 시형에서 어느 부분에서는 한 자 혹은 두 자를 빼기도 하고, 어느 부분에서는 더하기도 하여
새 사람의 음악적 감각에 합치하도록 발전된 것을 사(詞)라고 이름지었으니, 당 나라 말년부터 시작하여
송 나라에 와서 극성한 시대를 이루었다. 그 가락이 수백 가지였는데 이 강남락도 그 중의 하나이다.
[주 D-02] 조도(鳥道) : 나는 새도 넘기 어려울 만큼 험한 산속의 좁은 길을 말한다.
[주 D-03] 태사(太姒)의 고장으로 5백 년 이어왔네. : 태사(太姒)는 주(周) 나라 문왕(文王)의 왕비인데, 부인
으로서 덕이 높아 지금까지 이름이 있다. 이 나주에서 고려 태조의 후취 왕후가 났으므로 그렇게 말한 것이다.
[주 D-04] 압승(壓勝) : 미신에서 부적이나 주문으로 사악한 일을 물리치는 것을 말한다.
[주 D-005] 팔관례(八關禮) : 여덟 가지 죄악을 소멸하려고 올리는 재(齋)를 말한다.
[주 D-006] 집구시(集句詩) : 예전 사람들이 지은 시구 중에서 그때의 그 경치에 합치하는 시구를 따다 모아서
한 편의 새로운 시로 만드는 것을 말한다.
[주 D-07] 갑(岬) : 산이 물가에 임하여 절벽이 된 곳을 말한다.
[주 D-08] 영릉(零陵)의 산은 남방에서 가장 수려한 것이나 쫓겨난 신하는 감옥 같은 산이라 하였고,
악양루(岳陽樓)는 천하의 장관(壯觀)인데 귀양간 사람은 서글퍼했으니, : 영릉(零陵)은 지금의 광서성(廣西省)
과 호남성(湖南省) 접경에 있는데, 당 나라의 유종원(柳宗元)이 정치에 실패하고 그곳으로 좌천되어 가서 지은
시에 아름다운 산수도 감옥과 같은 곳이라고 슬퍼하였다. 악양루(岳陽樓)는 동정호 가에 있는 누로서 그 누기
(樓記)를 지은 범중엄(范仲淹)의 글에, "쫓겨서 귀양가는 신하는 이 경치를 보고 슬퍼할 것이다."라는 말이 있다.
[주 D-009] 동정(東征) : 동정은 일본을 친다는 말이다. 그때에 실제로 일본을 친 일은 없지만 고려 말년에
왜적의 침략이 대단하여서 그런 염원을 가졌었다.
[주 D-010] 보(寶) : 이 말은 우리나라의 독특한 말로서, 어떤 일에 재단(財團)을 세워서 그 이자만으로 사업을
행해 가는 것을 말한다.
[주 D-011] 사명(辭命) : 국가에서 내외에 사용하던 문서이다.
[주 D-12] 시구(鳲鳩)의 인(仁) : 시구는 뻐꾹새인데, 여기에서 한 말은 《시경》 시구편(鳲鳩篇)에 대한 주석
두 가지 중에 하나인, "군자의 마음씀이 균평한 것을 찬미한 것이다."는 말을 인용하여,
그 어머니께서 균평하기를 바라는 말이다.
[주 D-013] 영비(靈妃) : 고려 태조의 후취 왕비로서 혜종(惠宗)을 낳았다.
[주 D-14] 세 번 꿰매고[三緘] : 공자가 주(周) 나라에서, 구리로 인형을 만들어 그 입을 세 번 꿰맨 것을 보고,
"이것은 옛날에 말을 삼가라고 경계한 것이다." 하였다.
[주 D-15] 서문표(西門豹) : 전국 시대 위(魏) 나라 업(鄴) 땅의 태수였는데,
혹세무민하는 무당을 물에 빠뜨려 죽이고 그 제자인 어린 여자들을 모두 홀아비들에게 시집보냈다.
광산현 光山縣
동쪽으로 창평현(昌平縣) 경계까지 18리, 남쪽으로 화순현(和順縣) 경계까지 21리,
남평현(南平縣) 경계까지 28리, 서쪽으로 나주(羅州) 경계까지 47리,
북쪽으로 진원현(珍原縣) 경계까지 21리이며, 서울까지의 거리는 7백 25리이다.
건치연혁 본래 백제의 무진주(武珍州)인데, 일명 노지(奴只)라고도 한다.
신라가 백제를 빼앗은 뒤 그대로 도독(都督)을 두었다. 경덕왕(景德王) 16년에 무주(武州)로 고치고,
진성왕(眞聖王) 6년에 견훤(甄萱)이 습격하여 의거하고 후백제(後百濟)라 칭하다가,
이윽고 전주(全州)로 도읍을 옮겼다. 궁예(弓裔)가 고려 태조를 정기태감(精騎太監)으로 삼으니, 태조는 해군을
거느리고 쳐들어와 주의 경계를 대략 평정했는데 성주(城主) 지훤(池萱)이 견훤의 사위로서 굳게 성을 지키고
항복하지 않았다. 태조 19년에 이르러 신검(神劍)을 쳐서 멸망시키고 23년에 광주(光州)라 고쳤다 :
지금 《고려사》를 상고하건대, 천복(天復) 3년에 궁예가 태조에게 명하여 수군을 거느리고 서해로부터 광주
경계까지 가서 금성(錦城)을 쳐서 빼앗게 했다. 개평(開平) 3년에 또 태조를 시켜서 전함을 수리하고 가서 광주
와 진도군(珍島郡)을 쳐서 빼앗게 했다.
뒤에 또 광주 서남쪽 반남현(潘南縣) 포구(浦口)에 이르러, 압해현(壓海縣) 수적(水賊) 능창(能昌)을 잡아 궁예
에게 보냈다. 태조 즉위 19년 친히 신검(神劍)을 칠 적에 영마성(營馬城)에 주둔하니, 신검은 그의 아우 정주성
주(菁州城主) 양검(良劍)과 광주성주(光州城主) 용검(龍劍)과 함께 와서 투항하였다고 하였다.
그러므로 무주(武州)를 광주(光州)라고 부른 것은 견훤 때부터였으니 태조 23년에 비로소 광주라 칭한 것은 아
니다.
어떤 사람은 고려의 사신(史臣)이 추후에 그렇게 부른 것이 아닌가 의심하는데, 그렇다면 나머지 주현(州縣)은
모두 당시의 이름으로 기록했는데 광주만 그렇게 기록했을 것인가.
생각하건대, 견훤이 후에 광주라 하고 무주라 하여 다 함께 불렀다가 이해(태조 23년)에 이르러 광주로 정한 것
인가 한다. 정확히 아는 사람을 기다린다. 성종 15년에 강등하여 자사(刺史)가 되고 후에 또 강등하여 해양 현령
(海陽縣令)이 되었다. 고종 46년 공신 김인준(金仁俊)의 외가의 고향이므로 승격하여 익주 지사(翼州知事)가 되
고, 후에 또 승격하여 무진주(武珍州)가 되었다. 충선왕 2년에 강등하여 화평부(化平府)가 되고, 공민왕 11년에
무진부(茂珍府)라 개칭했다 : 혜종(惠宗)의 휘(諱)를 피해서 무(武) 자를 무(茂) 자로 고쳤다. 22년 다시 광주라
칭하고 목(牧)을 삼았으며 본조에 와서도 그대로 따랐다. 세종 12년에 그 고을 사람 노흥준(盧興俊)이 목사(牧
使) 신보안(辛保安)을 때렸으므로, 노흥준을 장형(杖刑)에 처하여 변방으로 쫓아 보내고 강등하여 무진군(茂珍
郡)으로 만들었다가 문종 원년에 옛날대로 복구하고, 성종 20년에 판관(判官) 우윤공(禹允功)이 날아온 화살에
맞았는데 조정에서는 그 고을 사람의 행위인가 의심해서 강등하여 현을 만들고 지금의 이름으로 고쳤다.
관원 현감ㆍ훈도 : 각 1명이다. 신증 연산군 7년에 다시 주(州)가 되었다.
관원 목사ㆍ판관 : 각 1명이다.
군명 무진(武珍)ㆍ무주(武州)ㆍ광주(光州)ㆍ해양(海陽)ㆍ익주(翼州)ㆍ화평(化平)ㆍ무진(茂珍)ㆍ익양(翼陽)ㆍ
서석(瑞石).
성씨본현 탁(卓)ㆍ이(李)ㆍ김(金)ㆍ채(蔡)ㆍ노(盧)ㆍ장(張)ㆍ정(鄭)ㆍ박(朴)ㆍ진(陳)ㆍ허(許)ㆍ번(藩)ㆍ성(成)ㆍ
승(承), 유(庾) : 촌(村), 김(金) : 개성(開城), 정(程) : 한산(韓山), 신(申) : 고흥(高興), 최 : 강진(康津).
양고(良苽) 김(金) : 경지(慶旨)ㆍ벽진(碧津)도 같다.
풍속 백성 중에 어진 사람이 많다 : 성임(成任)의 시에 있다.
형승 전라도의 거읍(巨邑)이다 : 《고려사》 악지(樂志)에 있다. 모든 봉우리는 중첩하고 온 골짜기는 구불구불
하도다 : 김극기(金克己)의 시에 있다.
남국의 웅장한 번진(藩鎭)이다 : 이집(李集)의 시에, 광주는 남쪽 지방의 가장 큰 번진이라 하였다.
한 도의 요충지이다 : 신숙주(申叔舟)의 기(記)에 있다.
산천 무등산(無等山) : 현의 동쪽 10리에 있는데 진산(鎭山)이며, 일명 무진악(武珍岳) 또는 서석산(瑞石山)이라
고도 한다. 하늘같이 높고 큰 것이 웅장하게 50여 리에 걸쳐 있다.
제주도의 한라산, 경상도의 남해(南海)ㆍ거제도(巨濟島) 등이 모두 한눈에 들어온다.
이 산 서쪽 양지 바른 언덕에 돌기둥 수십 개가 즐비하게 서 있는데 높이가 백 척이나 된다.
산 이름 서석(瑞石)은 이로 말미암은 것이다. 날이 가물다가 비가 오려고 할 때나 오랫 동안 비가 오다가 개려고
할 때에는 산이 우는데 수십 리까지 들린다.
○ 세속에 〈무등산곡(無等山曲)〉이 있는데, 백제 때 이 산에 성을 쌓자 백성들이 이에 편안히 살면서 즐거워
부른 것이라 한다.
양림산(陽林山) : 현의 서쪽 2리에 있다.
삼각산(三角山) : 현의 북쪽 5리에 있다. 건지산(巾之山) : 현의 남쪽 25리에 있다. 하늘이 비를 내리려면 이 산이
울어 그 소리가 수 리까지 들린다.
어등산(魚登山) : 현의 서쪽 30리에 있다. 벽진(碧津)ㆍ생압도(生鴨渡) : 둘 다 현의 서쪽 30리에 있다.
선암도(仙巖渡)ㆍ병화로진(幷火老津) : 둘 다 현의 서쪽 40리에 있다.
건천(巾川) : 현의 남쪽 5리에 있다. 무등산 서쪽 산록에서 나와 서북쪽으로 흘러 칠천(漆川)으로 들어간다.
칠천(漆川) : 현의 북쪽 30리에 있다. 담양(潭陽)과 창평(平昌)의 물이 합쳐 서쪽으로 흘러 칠천이 되고,
벽진ㆍ생압도ㆍ선암도ㆍ병화로진을 거쳐 나주(羅州)의 경계로 들어간다.
혈포(穴浦) : 칠천에서 동쪽으로 갈라진 곳이다. 풍혈(風穴) : 규봉사(圭峯寺) 곁 석벽 아래에 있다. 길이가 한
자이고 너비가 다섯 치이며, 바람이 불다 그쳤다 한다. 속칭 그 석벽을 풍혈대(風穴臺)라 한다.
보지지(普智池) : 현의 남쪽 40리에 있다. 금물제지(今勿梯池) : 현의 남쪽 5리에 있다.
신증 장원봉(壯元峯) : 곧 무등산의 지봉(支峯)이다. 속설에 향교가 옛날에는 이 봉우리 아래에 있었는데, 이
고을 사람 중에 장원하는 자가 많았기 때문에 이런 이름이 생겼다 한다.
용연(龍淵) : 주의 남쪽 25리에 있는데, 날이 가물어 기우제를 지내면 효험이 있다 한다.
토산 감ㆍ차ㆍ석류ㆍ꿀ㆍ쇠 : 무등산 장불동(長佛洞)에서 생산된다. 도자기 : 현의 동쪽 석보리(石保里)에서
생산된다. 지황(地黃)ㆍ대살[竹箭] : 현의 남쪽 양림산(陽林山)에서 생산된다. 신증 대추ㆍ호도ㆍ매실ㆍ밤ㆍ
붕어.
성곽 읍성(邑城) : 돌로 쌓았다. 주위가 8천 2백 53척이고, 높이가 9척이며, 안에 우물 백 개가 있다.
신증궁실 객관(客館) : 성현(成俔)의 〈중수기(重修記)〉에, "한 도(道)에서 중요한 곳은 주(州)와 같은 곳이 없
고, 한 고을(邑)에서 긴요한 거주지는 관사(館舍)만한 것이 없으니, 주는 고을이 큰 것이고, 관사는 손님들을 대
접하고 여행자를 보호하는 곳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관사에는 동서에 헌(軒)이 있는데, 동헌(東軒)에는 귀인들
이 와서 머물고 관찰사가 재판하기 위하여 송사를 듣는 곳이니, 아기(牙旗)와 절월(節鉞)이 세워지고 문안(文案)
과 간독(簡牘)이 놓여져, 백성들이 모이면 반드시 그 구조와 뜰을 장엄하게 하여 사람들로 하여금 위엄을 느껴
바라보고 두려워하게 한다.
그리고 사화(使華)와 빈객들이 연회하는 곳이니, 가무가 베풀어지고 술잔들이 널려져,
위로는 읍양(揖讓)과 주선(周旋)하는 것이 용납되어야 하고, 아래로는 진퇴(進退)와 보무(步武)가 받아들여질 수
있도록 반드시 마루와 집이 넓어야 합당하다. 그러므로 정치를 잘하는 이가 퇴폐되고 쓰러진 것을 수리하고 세울
때에는 백성들이 그 수고로움을 잊으며, 정치를 잘 못하는 자는 처음도 두렵고 끝도 두려워, 기와 한 장, 서까래
한 개를 바꾸지 못하는데도 그 고을은 날로 쇠폐해 간다.
지금 설순조(薛順祖)는 첨추(僉樞)로서 지방에 나와 주목(州牧)이 되고 최영(崔榮)은 그의 보좌가 되어, 정치가
화평하고 송사가 잘 다스려지며, 시절이 태평하고 농사가 풍년 들어서, 재해를 만난 만물들이 따뜻한 어머니를
만난 듯, 시들고 병든 백성들이 소생하여 숨쉬게 되어서 모든 퇴폐했던 것이 다시 일어나고, 사방에는 근심이 없
어졌다. 드디어 사람들이 서로 꾀하여 말하기를, '광산(光山)은 도회지 중에서 큰 읍내가 되었으므로 사신의
행렬이 연락부절하고, 인물의 풍부함이 나주나 전주와 맞먹는다. 그런데 동헌의 규모가 협소하고 또 앞으로 세월
이 오래되면 허물어질 염려가 있으니, 어찌 다시 고쳐 짓지 않을 수 있겠는가.' 하였다.
이에 별로 꾀함도 없이 동의하여 며칠 안 되어 준공하였는데, 새기고 깎고 한 것이 지극히 교묘하고, 짓고 만든
것이 지극히 커서, 비록 찌는 듯한 더위나 진저리나는 장마 때에도 손님이 와서 침울한 괴로움을 잊게 되었고,
비록 손님들이 모여들어 붐비게 되어도 각기 거처할 곳을 얻어 법도를 잃지 않게 되었다. 이런 뒤에야 이 고을과
걸맞게 되었다.
최군은 내 친구이다. 편지를 보내어 나에게 기(記)를 청했고, 나는 광산 김씨에게서 태어났으니, 광산에 대하여
어찌 무정할 수가 있겠는가. 항상 광산 산천의 아름다움을 구경하고자 하였고 그 옛날 조상들의 근본이 되는
땅임을 추상하면서도, 호남지방에는 한 번도 발을 내디뎌 보지 못하고 지금까지 이르게 되었다.
그러나 경연(經筵)에서 모시고 아침 저녁 강론하기에도 여가가 없고, 백발마저 드믄드믄하니, 비록 한 잔의 술을
가지고 두 사군(使君)을 모시고 동헌(東軒)에서 읍양(揖讓)하고 수작(酬酌)하고, 그 뒤에 물러나 부로(父老)들과
더불어 공황(龔黃 공수(龔遂) 황패(黃霸))의 덕을 칭송하며 즐거이 노래부르며 이야기하고자 하나 불가능하다.
이에 부득불 붓을 잡고 사실을 적어, 내 남쪽으로 가기를 바라는 뜻을 붙인다." 하였다.
○ 고태필(高台弼)의 시에, "광산의 진산(鎭山)인 무등산(無等山)은 우뚝하여 해동에서 이름을 날리네. 옛날에는
좌막(佐幕)을 지냈는데 오늘날 또다시 풍화(風化)를 살피도다.주D-001 밤이 차니 벌레가 자리에서 시끄럽고,
구름이 걷히니 달이 하늘에 가득하구나. 객창에 근심으로 잠 못 이루니, 이별의 한이 더욱 겹치고 겹치누나."
하였다.
○ 황필(黃㻶)의 시에, "이야기를 오래도록 하니 뜰의 끝[跋]이 보이고 발이 성그니 달이 동쪽에서 뜨는구나.
나그네 수심은 조돈(趙盾)의 말이요,주D-02 여기에 와 즐김은 고인의 기풍이로다. 오늘밤 잠깐 모임을 가졌으나,
내일 아침에는 도로 비게 되리라. 천리 멀리 서로 그리워하는 뜻은 바다와 산이 겹쳐있어도 막지 못하리." 하였다.
누정 희경루(喜慶樓) : 객관 북쪽에 있다.
○ 신숙주(申叔舟)의 기(記)에, "광산은 전라도의 거읍(巨邑)이다.
옛날에는 누각(樓閣)이 이 고을 치소(治所)의 북쪽에 있었는데, 이름을 공북루(拱北樓)라 했었으나 허물어진 지
이미 오래 되었다. 이번에 태수 죽산(竹山) 안철석(安哲石)이 부임하여 1년도 되지 않았는데, 정사를 다스리는
바쁜 가운데 틈을 내어 고을의 부로(父老)들을 모아 놓고 물었다. '고을에 유람할 장소가 없어서는 안 되는 것이
사실이오. 더욱이 광산은 이 도의 요충지로 사객(使客)이 벌 모이듯 하는데, 막히고 답답하고 깊고 가려져서
시원하게 해 줄 길이 없으니, 이를 어떻게 하면 좋겠는가.' 하니, 모든 부로들이 말하기를, '높고 밝고 시원스러운
땅으로는 공북루의 옛터 만한 곳이 없습니다.' 하였다. 그리하여 재목을 모아다가 집을 짓되 옛 건물보다 더 크게
지었는데, 몇 달이 안 되어 완성되었다. 그 칸수를 세어 보면 남북이 5칸이고, 동서가 4칸이니, 넓고 훌륭한 것이
우리나라에서 제일이었다. 동쪽으로는 큰 길에 닿았고 서쪽으로는 긴 대밭을 굽어 보며, 북쪽에는 연못을 파서
연꽃을 심고 동쪽에는 사장(射場)을 만들어 덕을 보[歡德]는 장소로 삼으니, 손님과 주인이 이제야 비로소 올라
쉬는 즐거움을 누리게 되었다. 이는 태수의 뜻을 고을의 백성들이 이루어 놓은 것이다. 그러나 경술년(庚戌年)에
이 고을 사람 중에 미련한 자가 있어 강등되어 무진군(茂珍郡)이 되었다.
사건은 애매한 데서 생겨서 위로 산천 귀신으로부터 아래로 향곡(鄕曲)의 노소에 이르기까지 모두 억울함을
참고 말하지 못한 지가 1년이 넘었는데, 지금 임금 원년 신미년 여름에 비로소 이 고을 사람 이선제(李先齊) 등
이 꾀하여 말하기를, '상감께서 대통을 이어 등극하사 유신(維新)의 은택을 베푸시는데, 하나라도 알맞은 자리
를 얻지 못할까 염려하시거든, 하물며 우리 주의 오래도록 억울한 것이겠는가.' 하고, 드디어 이 고을의 부로와
관리들을 이끌고 함께 상소를 올려 간청했다.
그리하여 상감께서 특별히 옛 칭호로 회복하도록 명하시어 광주목(光州牧)이 되었다. 이러한 소식이 전해지고
마침 이 누각마저 낙성되자, 부로들은 모두 모여 태수에게 치하를 드리고 희경루라 이름을 짓자고 요청하니,
이는 고을 모든 사람의 기쁜 경사를 뜻하는 것이다. 태수가 좋다고 하고 또 이 신숙주가 이 고을 사람이라 하여
나에게 기문 지을 것을 명했다.
대저 물건이 성취되고 허물어짐에는 운수가 있고 일이 흥하고 폐함에도 때가 있으나, 그 물건과 일에 있어서
시기와 운수가 물건에 합치되는 것에 이르러서는 사람의 힘으로 할 수 있는 일이 아니다.
이 광주는 백제 때는 무진주 도독부(武珍州都督府)가 되었고, 신라에 들어와서는 무주(武州)가 되었으며, 고려
태조 때는 광주로 고쳐졌고, 성종 때에는 해양현(海陽縣)이 되었다가 고종 때 다시 광주로 승격되었고, 충선왕
때에는 화평부(化平府)가 되었으며 공민왕 때 다시 광주목이 되었다. 이조 때 와서도 강등되었다가 또 승격되
었다. 한번 승격되고 한번 강등되어 흥하고 폐하는 것이 잇달았는데, 역시 각기 그 때가 있었다.
하물며 이 누각을 지음에 있어서도 오랫동안 허물어져 있다가 기공하여 낙성하였으니, 그 시기와 만남이 반드시
운수가 있었던 것이다. 광주는 무등산으로 진산을 삼았으니, 이 산은 남방의 거악(巨嶽)으로 정기를 모으고 길상
(吉祥)을 내려 우리의 모든 위인을 낳았고 또 우리의 어진 태수를 얻었으니, 오늘에 이르러 폐했던 것이 흥하고
허물어졌던 것이 이루어진 것이 어찌 한갓 이 누각뿐이겠는가." 하였다. 신증 허종(許琮)의 시에, "고향은 무수히
연기 낀 봉우리가 가렸는데, 이를 빌려 만리의 흉금을 털어놓도다. 두 눈의 풍류는 반드시 멋대로 보는데,
앞산의 송죽(松竹)만이 내 마음을 아는 친구로다. 모든 가지는 점점이 청춘의 빛을 드러내고, 사이 사이의 잎은
가리어 대낮에 그늘을 만드는구나. 서쪽으로 가고 북쪽에서 왔지만, 어찌 너 같은 것 있겠는가. 한 동이 술로
서로 유쾌하게 하여 마음을 변치 말 것이로다." 하였다.
○ 유순(柳洵)의 시에, "열두 난간이 먼 산을 대했는데, 올라가 보니 고단한 손이 그윽한 흉금을 터놓을 만하다.
석류 꽃과 대잎은 아름다운 빛이고, 검은 제비 누른 꾀꼬리는 모두가 좋은 소리로다.
난간에 기대어서 단전(丹篆)의 짝주D-003을 부르고자 하고, 발을 걷어 올리니, 흰 구름 그늘에 누운 듯하도다.
이윽고 달이 돋아 높은 흥취를 더하니, 구구한 한 조각 마음이 없어지누나." 하였다.
○ 성임(成任)의 시에, "호남 50고을 중에서 경치는 내 고향을 꼽는다네. 산은 높은 누각과 멀리 대하였고,
연못엔 좋은 달빛 잠겼어라. 대숲 깊은데 뜰은 고요하고, 꽃 가까우니 술잔도 향기롭구나. 물건마다 시흥을 돋
우니, 어찌 봄낮이 긴 줄을 알랴." 하였다.
황화루(皇華樓) : 객관 북쪽에 있다. 봉생정(鳳笙亭) : 황화루 동쪽에 있다.
○ 정창손(鄭昌孫)의 시에, "황화루가 아득히 고대(高臺)를 누르니, 고대 주위에는 꽃만이 제대로 피었구나.
봉황은 날아가 영원히 돌아오지 않는데, 부질없이 남은 한 쌍의 나무가 푸르름을 보내 오는구나." 하였다.
학교 향교(鄕校) : 현의 서쪽 2리에 있다. 옛날에는 성안에 있었는데, 현감 권수평(權守平)이 이리로 옮겼다.
신증 성현(成俔)의 기(記)에, "경신년(庚申年) 11월 표제(表弟) 상사(上舍) 박이온(朴以溫)이 와서 〈광산학기
(光山學記)〉를 써 달라고 한다. 현감 권수평이 부임해온 이래 마음을 다해 백성들을 사랑하고 길러 병든 백성
들이 은혜를 흡족하게 입었으니, 고을의 피폐한 것들이 모두 없어지고, 옥에는 갇힌 사람이 없었으며, 교활한
관리가 그 간교한 꾀를 부리지 못하였다. 이에 백성들이 편안하여 한 지아비도 뜻대로 되지 않는 것이 없었으며,
동리가 평안하여 도적이 없었고, 정치가 공정하고 송사(訟事)가 없어져서 장부와 문서가 적어졌다.
매양 공무를 보는 틈을 타서 친히 유생(儒生)들을 이끌고 경학(經學)을 담론하여 이끌어 주고 깨우쳐 주며,
도와 주고 인도해 주는 것이 모두 합당했다. 학교가 전에는 성안에 있었는데, 낮고 습하고 좁고 퇴락하여 허물어
졌었다. 현감이 부로(父老)들을 불러들여 말하기를, '선성(先聖)의 거소(居所)로는 맞지 않는데 어찌 새로 지을
것을 생각하지 않겠는가.' 하니, 모든 부로들이 모두, '좋습니다.' 했다. 그리하여 성의 서쪽 2리쯤에 터를 잡고
공사를 시작했는데, 모든 현민들이 줄을 이어 모여들기를 마치 자식이 어버이를 좇아 일하는 것같이 하여 몇 달
만에 일이 끝났다. 먼저 성전(聖殿)을 지어 오성(五聖)과 십철(十哲)을 안치하고, 또 동서에 행랑을 지어 70제자
와 역대의 여러 현인을 안치했다. 앞에는 명륜당(明倫堂)을 두어 강학(講學)하는 곳으로 삼고,
또 동쪽과 서쪽에 협실(俠室)을 두었으니, 동쪽에 있는 협실은 교관(敎官)이 앉는 곳이고, 서쪽에 있는 협실은
사마재(司馬齋)라 했는데, 이 고을의 상사(上舍 진사(進士))가 우거하면서 학업을 닦는 곳이며, 또 동쪽과 서쪽
에 재(齋)를 두었으니, 여기가 곧 유생들이 거처하는 곳이다. 또 서재(西齋) 뒤에는 전사청(奠祀廳)이 있고,
동재 뒤에는 교관들의 사무실이 있다. 이에 신과 사람이 모두 편안하고 스승과 학생이 집이 있으며, 당(堂)과
창고와 부엌과 목욕탕이 각각 있을 곳에 있어 무려 60여 칸이나 되었다. 학교 앞에 있는 백성의 밭 수백 묘(畝)
를 현감이 돈을 내어 사들여, 혹은 논을 만들고 혹은 채마전을 만들고 혹은 종들이 있을 집을 만들었으며,
또 옛 향교의 터를 모두 학교에 예속시켜 밭을 만들었다. 또 백성의 밭은 사서 반은 학교로 들여보내고 반은
사마재(司馬齋)로 들여보냈으며, 또 무명 백 필과 조세(租稅)로 들어오는 곡식 백 석, 콩 20석으로 학생의 소용
에 충당시켰고, 무명 20필, 조세 곡식 20석은 상사인(上舍人)들의 소용으로 쓰게 했다.
또 사서(四書)ㆍ오경(五經)ㆍ제자(諸子)ㆍ운서(韻書)를 갖추어 책장에 비장해 놓아 열람할 수 있게 했다.
이때 감사(監司) 이숙함(李叔瑊)과 도사(都事) 정탁(鄭鐸)은 그 뜻을 가상히 여겨 감영(監營) 중에 있는 무명 30
여 필, 조세 곡식 70여 석을 내주어 비용을 도와주었으니, 이로 인해 유풍(儒風)이 크게 진작되고 문화의 교화가
더욱 밝아져서 고을 사람 중에 준수한 인물이 여기에 와서 놀았는데, 배울 때에는 깊이 탐구하고 애써 찾는 뜻을
가져 정진하고 수련하는 공이 그치지 않았으며, 제사를 지내면 마치 앞에 계시듯 정성을 다하여 나쁘고 편벽된
마음이 들어오지 못했다. 그런 뒤에는 광산의 학교가 다른 읍보다 성하고 인재가 찬연하게 배출되었다.
그 뒤에 선생께서도 광산 출신의 후예이니, 원컨대 전말을 적어 그 아름다움을 길이 장식하게 하여 달라고
하였다.
나는 생각하건대, 공자(孔子)의 도는 지극하다. 하늘과 땅이 만물을 덮어주고 기르듯이 그 크기를 다했으며,
해와 달이 비치듯이 그 밝기를 다했으며, 하해(河海)가 넓고 깊듯 하여 헤아릴 수 없으며, 산악이 높고 험한 듯
하여 미칠 수 없다. 고금을 통하여 변함이 없어 모든 사물이 고루 구비되어 있으며, 인륜이 이를 의지하여 베풀어
지고, 정교(政敎)가 이를 의지하여 행해지고, 존비(尊卑)와 상하(上下)가 이를 의지하여 문란하지 않고, 왜곡된
말과 간사한 말이 이를 의지하여 방자해지지 않으며, 중국의 인물과 사물이 이로 말미암아 옷을 왼쪽으로 여미는
오랑캐가 되는 것을 면했나니, 이것을 따르면 다스려지고 따르지 않으면 어지러워진다.
이를 버리면 한 때도 살지 못하므로 안으로는 서울로부터 밖으로는 주(州)ㆍ군(郡)ㆍ현(縣)에 이르기까지 문묘
(文廟)를 숭상하여 제사지내지 않는 이 없고, 학교를 세워 이를 가르치지 않음이 없으니, 어찌 까닭 없는 일일 것
인가. 우리나라는 본래 문헌(文獻)의 나라이며, 광산은 의관(衣冠)과 진신(縉紳)을 배출하는 지방이었는데,
또 현명한 태수를 만나 추(鄒)ㆍ노(魯)의 교화주D-004를 이루었으니, 촉군(蜀郡)의 문옹(文翁)주D-05의 기풍은
이 아래에 든다고 할 것이다. 그런즉 이 광산의 백성된 것이 어찌 행복하지 않겠는가. 오직 광산 백성들의 행복일
뿐 아니라 또한 조정 풍교(風敎)의 일대 다행인 것이다." 하였다.
역원 경양역(景陽驛) : 현의 동쪽 8리에 있는데 승(丞)을 두었다. 본도에 속한 역은 여섯이니,
덕기(德奇)ㆍ가림(加林)ㆍ
인물(人物)ㆍ검부(黔富)ㆍ창신(昌新)ㆍ대부(大富)가 그것이다.
○ 승(丞) 1명이다. 신증 지금 임금 5년에 승을 혁파하고 찰방(察訪)을 두었다.
선암역(仙巖驛) : 현의 서쪽 40리에 있다. 수여원(水餘院) : 현의 서쪽 33리에 있다.
증원(甑院) : 현의 서쪽 45리에 있다. 최정원(崔鄭院) : 현의 남쪽 25리에 있다.
저원(猪院) : 현의 동쪽 20리에 있다. 보통원(普通院) : 현의 북쪽 2리에 있다.
분수원(分水院) : 현의 남쪽 5리에 있다. 장록원(長祿院) : 현의 서쪽30리에 있다.
견암원(堅巖院) : 현의 남쪽 18리에 있다. 혈보원(穴洑院) : 현의 북쪽 25리에 있다.
누문원(樓門院) : 현의 북쪽 5리에 있다. 신증 극락원(極樂願) : 주의 서쪽 30리에 있다.
진국원(鎭國院) : 주의 북쪽 40리에 있다. 신원(新院) : 주의 서쪽 45리에 있다.
불우 무량사(無量寺)ㆍ천복사(薦福寺)ㆍ개룡사(開龍寺)ㆍ원효사(元曉寺) : 모두 무등산(無等山)에 있다.
성거사(聖居寺) : 성거산(聖居山)에 있다.
십신사(十信寺) : 현의 북쪽 5리 평지에 있는데 범어(梵語)로 쓴 비가 있다.
선원사(禪院寺) : 현의 동쪽 2리 평지에 있다. 증심사(證心寺) : 무등산에 있다.
○ 김극기(金克己)의 시에, "잣나무는 뜰 앞에서 푸르고, 복사꽃은 언덕 위에서 붉구나. 어찌 반드시 지경 밖에서
찾으랴, 다만 둘려 있는 속에서 찾을 것이로다. 막힌 경내에서는 마음도 끝까지 막히나니, 말[言]을 잊어야 도가
비로소 통하는 것이다. 누가 이 절 이름을 지었는가. 묘한 이치를 홀로 깊이 궁리하였도다." 하였다.
신증 규봉사(圭峯寺) : 무등산에 있다. 절 옆에 세 개의 돌이 있는데, 높이가 수백 척이 되어 삼존석(三尊石)이
라고 한다. 또 열 개의 대(臺)가 있는데,
송하(送下)ㆍ광석(廣石)ㆍ풍혈(風穴)ㆍ장추(藏秋)ㆍ청학(靑鶴)ㆍ송광(松廣)ㆍ능엄(楞嚴)ㆍ법화(法華)ㆍ
설법(說法)ㆍ은신(隱身)이라고 이름한다.
세상에 전하기를, 도선(道詵)이 이 대 위에 두루 앉아서 송광(松廣)의 산세를 본 다음 절을 창건했다고 한다.
○ 김극기(金克己)의 시에, "이상한 모양이라 이름을 붙이기 어렵더니, 올라와 보니 만상(萬像)이 공평하구나.
돌 모양은 비단으로 말라낸 듯하고 봉우리 형세는 옥을 다듬어 이룬 듯하다. 명승을 밝으니 속세의 자취가 막
히고, 그윽한 곳에 사니 진리에 대한 정서가 더해지누나. 어떻게 속세의 인연을 끊을까, 가부(跏趺)주D-006하고
앉아 무생(無生)을 배우노라." 하였다.
금석암(錦石庵) : 무등산에 있다.
○ 김극기의 시에, "지격이 궁벽하니 인적이 끊어졌는데, 봉우리와 숲이 천만겹이로다. 길은 시내 비[溪雨]에
깨끗하고, 문은 고개의 구름으로 봉하였다. 상쾌한 퉁소 소리는 바람 대[風竹]에서 나고, 맑은 그늘은 달 아래
소나무 따라 돌아간다. 도인(道人)은 원래 관장하지 않고서 길이 자금용(紫金容 불상)에 예를 올린다." 하였다.
사묘 사직단(社稷壇) : 현의 서쪽에 있다. 문묘(文廟) : 향교(鄕校)에 있다.
무등산 신사(無等山神祠) : 현의 동쪽 10리에 있다. 신라 때는 소사(小祀)를 지냈으며, 고려 때는 국제(國祭)를
올렸다. 동정원수(東征元帥) 김주정(金周鼎)이 각 관청의 성황신(城隍神)에게 제사를 지낼 때 차례로 신명(神名)
을 불러 신의 기이함을 징험했다. 그런데 이 광주의 성황신이 큰기[纛旗]의 방울을 울린 것이 세 번이었기 때문
에 김주정이 조정에 보고하여 작위를 봉했다. 본조에 와서도 춘추로 본읍에 명하여 제사를 올리도록 했다.
성황사(城隍祠) : 현의 남쪽 5리에 있다. 금당산 신사(金堂山神祠) : 현의 남쪽 10리에 있다.
용진연소(龍津衍所) : 현의 서쪽 30리에 있다. 춘추에 본읍에서 제사를 올린다. 여단(厲壇) : 현의 북쪽에 있다.
고적 석서정(石犀亭) : 현의 남쪽 2리에 있다.
○ 이색(李穡)의 기(記)에, "광주(光州)의 지리는 삼면이 모두 큰 산이고 북쪽만이 평탄하게 멀리 틔어 있다.
남산 계곡에서 흘러 나오는 물은 둘이 있는데 물의 근원이 또한 멀기 때문에 합류하면 그 형세가 더 크게 될 것
은 알 수 있는 일이다. 매년 한 여름에 장마가 들면 세차게 흐르는 급류가 사납게 쏠려, 가옥을 파괴하고 전답을
깎아가서 백성의 피해가 적지 않으니, 수령 된 자가 어찌 크게 우려하지 않겠는가. 남산 아래에 분수원(分水院)
을 둔 것은 옛사람이 그 물의 형세를 감쇄(減殺)하기 위한 것이었으나, 끝내 그 물을 나누지 못했다. 그리하여
두 물이 교충(交衝)하는 곳에 돌을 쌓아 성을 만들고 물결을 조금 서쪽으로 돌렸다가 북쪽으로 흐르게 하니,
지세가 북쪽으로 조금 내려간지라, 그 지세를 따라 물이 천천히 흘러서 백성의 피해가 그제야 겨우 없어졌다.
이에 물의 옛 길에 정자를 짓고 그 한 중간을 거점(據點)으로 해서 보(洑) 물을 양쪽으로 흐르게 하니, 사면으로
정자를 두른 것이 마치 벽수(壁水)의 모양처럼 되었다. 정자의 전후에 흙을 모아 작은 섬을 만들어 두 곳에 모두
꽃나무를 심고 부교(浮橋)를 놓아 출입하게 하니, 그 가운데에 앉아 휘파람을 불면, 마치 바다에서 뗏목을 타고
앉아 섬들이 안개와 파도 사이로 출몰하는 것을 보는 것 같아 참으로 즐겁다. 위구르[回鶻]의 설천용(●天用)이
남방을 유람할 적에 그 정자에 갔다가 이미 서울로 돌아왔는데, 목사(牧使) 김후(金侯 후는 지방 장관에 대한
존칭)가 서신을 보내어 정자의 이름과 기(記)를 요구하였다. 이에 나는 이렇게 말한다.
대우(大禹)가 치수(治水)를 한 것이 우공(禹貢 서전(書傳)에 있는 편명) 한 편에 나타나 있는데 대개 물의 형세를
따라 인도했을 뿐이다. 진(秦) 나라 효문왕(孝文王)이 이빙(李氷)을 임용하여 촉(蜀) 땅을 다스리게 했는데,
이빙이 돌로 물소를 만들어 수재를 진압한 바가 있다. 역도원(酈道元)이 《수경(水經)》을 편찬함에 있어서는 그
돌물소가 이미 영구한 것이 아니었으나, 후에 물의 이해를 말하는 자가 반드시 이빙을 칭송한다 하였으니,
이는 이것을 통해 이빙의 마음씀을 엿볼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두보(杜甫)가 노래를 지었으니,
'다만 원기만 항상 조화롭게 된다면 홍수로 인한 민폐를 스스로 면할 수 있을 것이니, 어찌 장사를 얻어 하늘 그물
[天綱]을 들어다가 또다시 돌물소를 바쁘게 부려서 수토(水土)를 잘 다스리게 할까.' 하였다. 대개 원기를 조화시
켜서 수토를 잘 다스리는 것은 이제(二帝)와 삼왕(三王)의 일이었는데 이제와 삼왕의 마음은 바로 후세에 진실로
있는 바로서 일찍이 잠시라도 잊은 적이 없었다. 그러나 괴상하고 정도를 벗어난 말을 찾아 경국제세(經國濟世)
의 영원한 정책으로 삼았으니, 여기에서 두보의 마음을 볼 수 있을 것이다. 비록 그러하나 공자가 일찍이 말하기
를, '비록 조그마한 도로라도 반드시 볼 만한 것이있다.' 하였거니와, 돌이 물을 진압한다는 사실은 어리석은 남자
어리석은 여자라도 다 아는 바이니 물소의 형상으로 만든 것도 반드시 그 이치가 있을 것이다. 포박자(抱朴子)가
말하기를, '물소를 조각하여 어함(魚銜)을 만들어 물에 넣으니 물이 석 자나 갈라졌다.' 하였으니, 물소란 물건이
수재를 없앨 수 있다는 것을 명백히 알 수 있다. 더구나 돌은 산의 뼈가 되고 물소는 또 물을 물리치는 것이니,
물이 이것을 피할 것은 틀림없다. 물도 이미 피할 줄 알고 또 아래로 인도하니, 지체없이 흘러 조금도 어긋남이
없어서 날로 비고 넓은 땅으로 향하여 도도히 흘러 바다에 이르고야 말리니, 물의 환란이 어디로부터 다시 일어
나며, 읍의 주민들이 무엇 때문에 불안을 느낄 것인가.
이 정자를 지은 내력을 쓰면 마땅히 폄(貶)하는 예(例)주D-007에 들지 않을 것이다. 그러므로 돌물소[石犀]로
이 정자의 이름을 삼고, 두보의 〈석서행(石犀行)〉이란 노래를 취하여 근본을 삼으며, 또 《포박자》를 증거로
삼아, 춘추(春秋)의 법으로 단정하여 후대 사람으로 하여금 이 정자를 지음이 수재를 막기 위함이며, 백성의 삶
을 편안하게 하기 위함이요, 한갓 놀고 관람하기 위하여 지음이 아님을 알게 하고자 한다. 이 정자에 오르는 자
가 그 이름을 생각하고 뜻을 생각하면 반드시 김후(金候)에 대한 경의가 우러나게 될 것이다.
김후의 이름은 상(賞)이며 재부(宰府)의 지인(知印)과 헌사(憲司)의 장령(掌令)을 역임한 바 있어서, 행정에 있
어 청렴하고 능력있는 행정가로 이름이 높다." 하였다.
고내상성(古內廂城) : 현의 서쪽 30리에 있다. 돌로 쌓았는데 주위가 1천 6백 81척이다.
무진도독고성(武珍都督古城) : 현의 북쪽 5리에 있다. 흙으로 쌓았는데 주위가 3만 2천 4백 48척이다.
궁수(弓樹) : 현의 성 남문 밖에 있다. 가지와 줄기가 둥근데 크기가 수십 아름이나 되고, 높이가 70여 척이나
된다. 고을 사람들이 잎이 일찍 피고 늦게 피는 것으로써 그해의 풍흉을 점쳤다. 지금은 말라죽었다.
양고 부곡(良苽部曲) : 현의 서쪽 15리에 있다. 경지 부곡(慶旨部曲) : 현의 서쪽 30리에 있다.
벽진 부곡(碧津部曲) : 현의 서쪽 20리에 있다.
명환신라 천훈(天訓) : 신라 문무왕 18년에 아찬(阿湌)으로서 나와 도독(都督)이 되었다.
김양(金陽) : 흥덕왕 때 도독이 되었다. 고려 이서(李舒) : 공양왕 2년에 좌사의(左司議)로서 목사(牧使)가
되었다.
본조 권담(權湛) : 목사였다.
이영구(李英耈) : 목사가 되어 나이가 많다고 사직하려 하자, 주(州)에서
상소하여 유임해 주기를 청했으므로 특별히 가선대부(嘉善大夫)로 승진시켰다.
인물신라 염장(閻長) : 문성왕(文聖王) 8년에 장보고(張保皐)가 진(鎭)에 의거하여 반란을 일으켰을 때,
조정에서 토벌하고자 하나 이기지 못할까 걱정하여 유예하고 있었다. 이때 염장이 아뢰기를, "신의 계책을 들으
시면 한 명의 병졸도 괴롭히지 않고 장보고의 목을 베어 바치겠습니다." 하므로, 왕이 허락했다. 염장은 거짓으
로 배반한 체하고 청해진(淸海鎭)으로 투항했다. 장보고는 그의 용감함을 사랑하여 조금도 의심하지 않고 상객
(上客)으로 대접했다.
그래서 그와 더불어 마시고 즐기다가 취하자 장보고의 칼을 빼앗아 목을 자르고 그의 무리들을 불러 타이르니
군중이 감히 동요하지 않았다. 왕이 기뻐하여 아간(阿干)의 벼슬을 주었다.
고려 김길(金吉) : 태조를 도와 공이 있었으므로 벼슬이 사공(司空)에 이르렀다.
채순희(蔡順禧) : 명종 때 조원정(曺元正) 등이 반란을 일으켰을 때에 채순희가 입시(入侍)하여 공이 있었으므로
벼슬이 평장사(平章事)에 이르렀다.
김주정(金周鼎) : 어려서부터 학문을 좋아하고 침착하였으며 말이 적었고 망녕되이 사귀어 놀지 않았다. 부성위
(富城尉)가 되었을 때 몽고병이 대거 침입하니, 김주정이 잘 조치하여 널리 칭송을 받았다. 원종 때 괴과(魁科)
에 발탁되고 여러 번 승진되어 이부 시랑(吏部侍郞)이 되었다. 충렬왕 때 좌부승지(左副承旨)가 되고,
원(元) 나라가 일본을 정벌하려 할 때, 김주정이 장수의 계략이 있다고 하여 소용대장군 좌부도통(昭勇大將軍左
副都統)을 삼고 호두금패(虎頭金牌)를 하사하였다. 일본을 정벌하게 되어 대명포(大明浦)에 이르자 갑자기 대풍
이 불어 배가 전복되고 수군들이 많이 빠져 죽었는데, 김주정이 계교를 써서 살린 자가 매우 많았다.
벼슬이 지도첨의사(知都僉議事)에 이르렀으며, 시호는 문숙(文肅)이다.
김수(金須) : 김길(金吉)의 후손이다. 담력과 지략이 뛰어났으며, 과거에 급제하자 어사(御史)를 거쳐 나와
영광군(靈光郡)의 지사가 되었다.
김태현(金台鉉) : 김수(金須)의 아들로 어머니 고씨(高氏)가 꿈에 명성(明星)이 품에 들어오더니 태현을 낳았다.
일찍이 동무들과 선배[先進]의 집에서 공부했다. 선배의 집에 있는 딸이 새로 과부가 되었는데, 시를 좀 할 줄
알았다. 그 여자가 하루는 창틈으로 시를 던졌는데, "말 탄 사람 뉘 집의 백면서생(白面書生)인가, 3개월 동안 그
이름을 몰랐었도다. 이제야 그가 김태현인 줄 알았으니, 가는 눈 긴 눈썹에 가만히 정이 생기네." 하니, 김태현은
이 시를 받은 뒤부터는 발길을 딱 끊고 그 집에 다시 가지 않았다. 충렬왕 때 과거에 급제하고 여러 번 승진되어
밀직부사(密直副使)가 되었다. 성절(聖節)을 하례하기 위하여 원 나라로 갔는데, 때마침 원 나라 황제는 감숙성
(甘肅省)에 가 있으면서 조서를 내려 여러 나라 사신들을 모두 경사(京師)에 머물러 있게 했다. 김태현이 중서성
(中書省)에 말하기를, "경사에 머물러 있으라는 것은 황제의 명령이고, 감숙성의 행재소(行在所)까지 가는 것은
우리나라 임금의 명령입니다. 차라리 황제께 죄를 지을지언정 우리 임금의 명을 어길 수는 없습니다." 하니,
중서성에서 허락했다. 드디어 행재소에 도착하니, 황제가 그 충성의 간절함을 가상히 여기고 크게 상을 주었다.
후에 지공거(知貢擧)가 되어 새로 급제한 사람들을 데리고 왕께 배알하니, 왕은 잔치를 베풀었다.
때마침 원 나라 사신 이 학사(李學士)가 자리에 있다가 왕에게 아뢰기를, "천하에는 이런 일이 없어지고 오직 귀
국에만 고풍(古風)이 없어지지 않았습니다. 감히 절하여 하례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하였다. 원 나라에서 정동
행 중서성 좌우사랑중(征東行中書省左右司郞中)으로 제수하였다.
충숙왕 때 원 나라에서 보낸 사신이 와서 국왕의 인(印)을 가져갈 때, 마침 태현은 행성(行省)에서 서리로 있었다.
태현이 가족을 이끌고 동쪽 금강산으로 갔으니,
이는 혐의를 멀리 하기 위해서였다. 원 나라에서 또다시 역마(驛馬)로 급히 불러 태현으로 하여금 다시 행성의 일
을 맡게 하였으나, 이해에 죽었다. 호는 쾌헌(快軒)이고, 시호는 문정(文正)이다. 아들은 광식(光軾)ㆍ광철(光轍)ㆍ
광재(光載)ㆍ광로(光輅)가 있는데, 모두 과거에 급제했다. 광철ㆍ광재ㆍ광로는 계실(繼室) 왕씨(王氏)의 소생이다.
왕씨는 세 아들이 모두 과거에 급제했으므로 해마다 나라에서 곡식을 내려 주었다.
김광철(金光轍) : 벼슬이 판밀직(判密直)에 이르렀고, 화평군(化平君)에 봉해졌다.
김광재(金光載) : 벼슬이 전리 판서(典理判書)에 이르렀다. 공민왕 때 두문불출하면서 지극한 효도로 어머니를
섬기고 장례 때에는 예를 다했다. 왕이 이 소식을 듣고 가상히 여겨 사람을 보내어 교유(敎諭)하기를, "경과 더불
어 말하고자 하는데 만날 수 있겠는가." 하니, 광재는 병을 앓으면서도 들어가 뵈었다.
왕이 이르기를, "나이나 안색은 매우 쇠약하지 않았는데 이렇듯 병이 들다니." 하고, 유사(有司)에게 명하여 그가
사는 곳에 정문(旌門)을 세워 영창방 효자리(靈昌坊孝子里)라 하고, 그 동네의 약간 호수를 예속시켜 받들어 섬
기게 했다. 시호는 문간(文簡)이다.
김회조(金懷祖) : 김광철의 아들로 벼슬이 판도 판서(版圖判書)에 이르렀다.
김흥조(金興祖) : 김광재의 아들로 호걸스러워 얽매이지 아니하였으며[倜儻], 벼슬이 중현군기감(中顯軍器監)
에 이르렀다.
김심(金深) : 김주정의 아들로 진국상장군 고려병마도원수(鎭國上將軍高麗兵馬都元帥)로 제수되었다가, 첨의
정승(僉議政丞)을 지내고 화평부원군(化平府院君)이 되었다. 시호는 충숙(忠肅)이다.
김승진(金承晉) : 김심(金深)의 아들로 공손하고 검소하며 충직하였고, 벼슬이 상호군(上護軍)에 이르렀다.
김적선(金積善) : 김승진의 아들로 홍무(洪武) 연간에 남원도 병마사(南原道兵馬使)가 되어 왜병과 사포(沙浦)
에서 싸웠고, 또 임실(任實)에서도 싸웠는데 모두 크게 승리했다. 벼슬이 중추원사(中樞院事)에 이르렀다.
정세운(鄭世雲) : 공민왕을 따라 원 나라로 들어가 숙직하여 지켰고, 여러 번 승진되어 대호군(大護軍)이 되었다.
공민왕이 즉위하자 그 공이 일등에 책록되어 군부판서 지문하성사(軍簿判書知門下省事)가 되었으며,
기철(奇轍)을 죽이는데 일등의 공로로 기록되었다. 공민왕 8년에 홍건적이 서경(西京)을 함락하자,
세운이 서북면 도순찰사(西北面都巡察使)가 되어 황주(黃州)로부터 돌아와 아뢰기를, "홍건적이 서경으로 쳐들
어와 목책을 쌓고 성을 수리하므로 공격할 계략이 없으니, 원컨대 놀라 들먹이지 말고 민심을 안심시키십시오."
하였다. 참지정사(參知政事)가 되었다가 공민왕 10년에 홍건적이 서경을 함락하여 왕이 복주(福州 지금의 안동
(安東))로 피난을 가니, 정세운은 추밀겸 응양군상장군(樞密兼鷹揚軍上將軍)으로 따라갔다. 그는 성품이 충직
하고 결백하여 주야로 조심하고 분개하면서 적을 무찌르고 나라를 회복하는 것을 자기의 임무로 여겼다.
여겼다. 추증하였다.
이홍길(李弘吉) : 과거에 급제하여 벼슬이 밀직제학(密直提學)에 이르렀다.
탁광무(卓光茂) : 높은 관직에 발탁되어 벼슬이 간의(諫議)에 이르렀다.
김속명(金續命) : 성품이 청렴하고 강직하며 말을 용감하게 하였다. 공민왕 초에 감찰(監察)이 되어 법을 집행
하는데 아부할 줄 몰랐으며, 후에 경상도 도순문사(慶尙道都巡問使)가 되어 왜병들이 진해현(鎭海縣)을 침략
하자, 속명이 급히 쳐서 크게 격파하니 왕은 기뻐하여 옷과 술이에 왕은 정세운으로 총병관(摠兵官)을 삼고
중서평장사(中書平章事)를 제수했다. 공민왕 11년에 그는 여러 장수들을 독려하여 서울을 회복했으나, 이윽고
안우(安祐) 등에게 살해당했다. 공이 일등으로 책록되어 첨의정승을 금띠를 하사했다. 신우 때 삼사우부사
(三司右副使)가 되었는데, 마침 반야(般若)의 사건이 생기니 그는 탄식하면서, "천하에 그 아버지를 분간하지
못하는 자는 혹 있어도 그 어머니를 분간하지 못하는 자는 내 듣지 못했다." 하였다. 이인임(李仁任)이 사의
(司議) 허시(許時) 등을 교사하여 그를 탄핵하게 했으나, 태후(太后)가 힘써 구하여 문의현(文義縣)으로 유배당
했다. 죽은 후 충간(忠簡)이라는 시호를 받았다. 공양왕 초에 윤소종(尹紹宗) 등이 글을 올려 그 억울함을 밝혀
포상(褒賞)과 시호를 추가해 주기를 애걸하므로 그의 자손을 책록함으로써 충혼을 위로했다.
김정(金鼎) : 벼슬이 중대광광성군(重大匡光城軍)에 이르렀다.
본조 김첨(金瞻) : 김회조(金懷祖)의 아들로 과거에 급제하여 벼슬이 우군총제겸 보문각제학(右軍摠制兼寶文
閣提學)에 이르렀다.
탁신(卓愼) : 탁광무(卓光茂)의 아들로 성리학(性理學)에 전심하니 탁광무가 말하기를, "우리집의 증삼(曾參)
이다." 하였다. 어린 나이에 과거에 급제하여 대성(臺省)의 벼슬을 여러 번 거쳐 참찬의정부사(參贊議政府事)
에 이르렀다. 시호는 문정(文貞)이다.
정귀진(鄭龜晉) : 두 번째로 과거에 급제하고 벼슬이 여러 번 올라가 형조 참의(刑曹參議) 강원도 관찰사가
되었다.
김구경(金久冏) : 두 번이나 문과에 급제하여 문명을 날렸으나 일찍 죽었다.
김약채(金若采) : 김정(金鼎)의 아들로 고려 공민왕 때 과거에 급제했다. 성품이 강개하여 강한 상대를 두려워
하지 않았다. 일찍이 좌사의(左司議)로 있을 때 조반(趙胖)의 옥사를 다스리는데 참여했다. 염흥방(廉興邦)이
기필코 조반을 무복(誣服)시키고자 하여 매우 참혹하게 다스리니, 조반은 마구 욕을 하면서 조금도 굽히지
않고 말하기를, "내 너 같은 나라의 도적[國賊]을 베고자 한다. 너는 나와 서로 송사를 벌인 자인데, 어떻게
국문하느냐." 하니, 염흥방이 노하여 사람을 시켜 그의 입을 마구 때리게 했다. 이때 그 자리에 모인 사람들은
일부러 자는 척, 못들은 척, 혹은 입을 함봉하고 감히 어떻다 말이 없었다. 다만 김약채만이 옳지 않다고 못하
게 하니, 조반은 이로 인하여 사면되고 염흥방이 드디어 죽임을 당했다. 그리하여 조야(朝野)가 모두 통쾌하게
여겼다. 본조에 들어와서 여러 번 승진되어 충청도 관찰사에 이르렀다.
김약항(金若恒) : 김약채의 아우로 공민왕 때 과거에 급제하여 여러번 승진되어 사헌부 장령을 지냈고,
우리 태조 4년에 성균관 대사성이 되었다. 명 나라 고황제(高皇帝)가 우리나라에서 올리는 하표(賀表)에 휘자
(諱字)를 범했다 하여 그 표를 지은 사람을 불렀는데, 약항은 방물표(方物表)를 지었으므로 정총(鄭摠)과 함께
경사(京師)에 가니, 황제가 먼 국경지방으로 귀양을 보냈다. 태조는 그에게 자헌대부(資憲大夫) 광산군(光山
君)을 내렸으나 돌아오지 못하고 죽었다.
김청(金聽) : 중국어를 잘 하였으며, 벼슬이 지중추원사(知中樞院事)에 이르렀다. 시호는 희정(僖靖)이다.
이선제(李先齊) : 이홍길(李弘吉)의 손자로 과거에 급제하고 여러 번 승진되어 벼슬이 예문관 제학이 되었다.
김예몽(金禮蒙) : 과거에 급제하여 벼슬이 판서(判書)에 이르렀다. 시호는 문경(文敬)이며, 문명(文名)이 있었
다. 아들 김덕원(金德源)과 김성원(金性源)도 모두 과거에 급제했다.
김국광(金國光) : 김약채의 증손으로 과거에 급제하여 익대적개좌리공신(翊戴敵愾佐理功臣)으로서 광산부원군
(光山府院君)에 봉해지고, 벼슬이 좌의정에 이르렀다. 시호는 정정(丁靖)이다. 아들 김극유(金克忸)도 과거에
급제하여 벼슬이 대사간에 이르렀다.
김겸광(金謙光) : 김국광의 아우로 과거에 급제하여 벼슬이 의정부 좌참찬에 이르고, 좌리공신(佐理功臣)에
참여되어 광성군(光城君)에 봉해졌다. 시호는 공안(恭安)이다.
노자형(盧自亨) : 과거에 급제하여 벼슬이 성균관 대사성에 이르렀고, 이학(理學)에 정통하고 지조와 절개가
있었다.
이형원(李亨元) : 이선제(李先齊)의 아들로 사람됨이 위풍과 거동이 단정하고 빼어났었다. 과거에 급제하여
벼슬이 홍문관 부제학에 이르렀다. 성화(成化) 기해년에 통신사(通信使)로 일본에 가다가 대마도(對馬島)에
이르러 병이 나서 돌아왔는데, 결국 죽었다.
효자고려 노준공(盧俊恭) : 우왕 때 상례 제도가 폐지되고 없어져 모두 백일 동안 복을 입고 벗는데,
준공은 묘의 여막(廬幕)에서 3년을 지냈다.
열녀고려 문씨(文氏) : 판전교시사(判典校寺事) 강호문(康好文)의 아내이다. 신우 무진년에 왜구가 동리로 쳐들
어 왔을 때 문씨는 두 아들이 있었는데, 어린 것은 업고 큰 것은 이끌고 달아나 숨다가 붙들렸다.
왜구는 그녀의 목을 매어 핍박하며 앞서가게 했으며, 또 업은 아이를 버리라고 핍박했다. 문씨는 모면하지 못할
줄을 알고 곧 어린애를 보자기에 싸서 나무 그늘에 두고 큰 아이에게 말하기를, "너도 여기 있으면 데려가는
사람이 있을 것이다." 하였는데, 큰 아이는 굳이 쫓아 왔다. 그녀는 걸어 몽불산(夢佛山) 극락암(極樂庵) 근처에
이르렀는데, 거기에는 높이가 천 척이나 되는 낭떠러지가 있었다. 문씨는 함께 붙들려 가는 이웃집 여자에게,
"적에게 더럽히면서 살기를 바라느니보다 깨끗한 몸으로 죽는 것이 낫겠소." 하고 곧 몸을 날려 떨어졌다.
왜구들은 미처 말리지 못하고 욕만 되게 하면서 그 큰 아이를 죽이고 가버렸다. 그 낭떠러지 아래에는 담쟁이
덩굴이 있었고 창포풀이 또 빽빽했으므로 죽지는 않고 오른 팔만 부러져서 한참 있다가 소생했다. 마침 동네 늙
은이들이 먼저 언덕의 구멍에 있다가 이를 보고 불쌍히 여겨 미음을 먹여 구했다. 3일 후에 왜구가 물러나자 곧
돌아오니, 동네 사람으로 경탄하지 않는 이가 없었다.
김씨(金氏) : 서운정(書雲正) 김언경(金彦卿)의 아내이다. 우왕 때 왜구가 갑자기 쳐들어 와 김씨를 붙잡아다
욕을 보이려 하자, 김씨는 "차라리 만 번 죽을지언정 욕을 당하지는 않겠다." 하고 끝까지 굽히지 않으니 적이
죽이고 말았다. 본조 태종 때 정문(旌門)을 세웠다.
본조 민씨(閔氏) : 예조 정랑(禮曹正郞) 권극중(權克中)의 아내이다. 남편이 죽자 여막에서 3년상을 치르고
애통해 하는 것이 예를 넘었으며, 머리를 깎고 여승이 되어 그대로 묘 곁에서 살다가 일생을 마쳤다.
이 일이 조정에 보고되어 정려하였다.
제영 해북호양지(海北浩穰地) : 김극기(金克己)의 시에, "바다 북쪽의 넓게 넘실대는 땅이라, 담장을 연하여
집짓기를 다투도다. 천 개의 봉우리는 많이 몰려왔고, 만 개의 골짜기는 굽이굽이 흘러가는도다. 들에 풍족한
것은 매매 우는 사슴이요, 강 속에 넉넉한 것은 펄펄 뛰는 물고기로다. 어느 골[洞] 이끼 위에서 단서(丹書)를
엿보는지 알고 싶구나." 하였다.
수죽가가비취체(脩竹家家翡翠啼) : 최원우(崔元祐)의 시에, "긴 대 집집마다 물총새 울고, 비가 한식을 재촉하니
물이 시내에 흐르는구나. 푸른 이끼 잔풀 관교(官橋) 길에, 떨어진 꽃이 말발굽에 밟힐까 걱정이로다."
하였다.
산천웅일도(山天雄一道) : 성임(成任)의 시에, "광산은 명승지라, 옛 일을 생각하니 마음이 아득하구나. 부(府)라
칭한 것이 어느 시대며, 주(州)가 된 것이 몇 년이던가. 산천은 도 안에서 제일이요, 민재(民財)와 어진 사람 많다
고 일컬어 왔네. 서헌(西軒) 마루 넓은 줄을 자못 깨달아 올라가 단편시 몇 수를 읊조리노라." 하였다.
[비고]
연혁 본래 백제의 노지(奴只)이다.
인조 2년에 광산현으로 강등시켰다가 12년에 다시 승격시켰다.
고종 23년에 군(郡)으로 고쳤다. 《文獻備考》
방면 성내(城內)ㆍ기례(奇禮)ㆍ부동(不動)ㆍ공수(公須) : 위의 4면(面)은 모두 읍내에 있다.
상대곡(上大谷) : 동쪽으로 처음이 15리, 끝이 20리이다.
하대곡(下大谷) : 동쪽으로 처음이 25리, 끝이 30리이다. 편방(片方) : 동쪽으로 처음이 5리, 끝이 10리이다.
홍도(舡道) : 남쪽으로 처음이 30리, 끝이 30리이다. 석제(石堤) : 북쪽으로 처음이 25리, 끝이 35리이다.
덕산(德山) : 북쪽으로 처음이 20리, 끝이 25리이다.
왕소지(王所旨)ㆍ천곡(泉谷)ㆍ우치(牛峙) : 모두 북쪽으로 처음이 30리, 끝이 35리이다.
계촌(界村) : 서쪽으로 처음이 30리, 끝이 35리이다. 소지(所旨) : 서쪽으로 처음이 25리, 끝이 30리이다.
흑석(黑石) : 서쪽으로 처음이 30리, 끝이 35리이다. 내정(內丁) : 서쪽으로 처음이 20리, 끝이 25리이다.
당부(當夫) : 위와 같다. 고내상(苦內廂) : 서쪽으로 처음이 30리, 끝이 35리이다.
군분(軍盆) : 서쪽으로 처음이 15리, 끝이 20리이다. 독산(禿山) : 서쪽으로 처음이 25리, 끝이 30리이다.
거치(巨峙) : 서북쪽으로 처음이 25리, 끝이 35리이다. 대치(大峙) : 위와 같다.
마지(馬池) : 서북쪽으로 처음이 20리, 끝이 25리이다. 황계(黃界) : 북쪽으로 처음이 10리, 끝이 15리이다.
효우동(孝友洞) : 남쪽으로 처음이 10리, 끝이 15리이다. 유등곡(柳等谷) : 서남쪽으로 처음이 35리에 있다.
동각(東角) : 서남쪽으로 처음이 30리, 끝이 45리이다. 마곡(馬谷) : 서남쪽으로 처음이 35리, 끝이 40리이다.
방하동(方下洞) : 서남쪽으로 처음이 30리, 끝이 35리이다. 대지(大枝) : 서남쪽으로 처음이 30리, 끝이 40리
이다.
와곡(瓦谷) : 서북쪽으로 처음이 15리에 있다. 소고룡(召古龍) : 서쪽으로 처음이 50리, 끝이 55리이다.
지한(池漢) : 남쪽으로 처음이 15리, 끝이 20리이다. 갈전(葛田) : 북쪽으로 처음이 50리, 끝이 55리이다.
칠석(漆石) : 서남쪽으로 처음이 30리, 끝이 35리이다. 경양(景陽) : 동쪽으로 10리에 있다.
석보(石保) : 동남쪽으로 처음이 25리, 끝이 35리이다. 미십보(彌十保) : 동북쪽으로 처음이 25리, 끝이 30리
이다.
옹정(瓮井) : 남쪽으로 처음이 15리, 끝이 25리이다.
지동(池洞) : 남쪽으로 20리에 있다. 오치(梧峙)ㆍ부산(釜山)ㆍ도천(陶泉) : 양고 부곡(良苽部曲)은 서쪽으로
15리에 있고, 경지 부곡(慶旨部曲)은 서쪽으로 30리에 있다.
창고 창(倉) 셋 : 읍내에 있다. 동창(東倉) : 북쪽으로 20리, 천곡(泉谷)에 있다.
서창(西倉) : 서남쪽으로 30리, 방하동(方下洞)에 있다.
성창(城倉) : 북쪽으로 1백 리, 장성(長城)의 입암산성(立巖山城)에 있다.
진도 생압진(生鴨鎭) : 서쪽으로 30리에 있으며 물이 빠지면 다리를 놓는다.
극락진(極樂津) : 옛날에는 벽진(碧津)이라 불렀다. 서쪽으로 30리에 있으며, 겨울에는 다리를 놓는다.
선암진(仙巖津) : 병화로진(幷火老津)이라고도 부르며 서쪽으로 40리에 있다.
황룡진(黃龍津) : 서쪽으로 40리에 있으며 겨울에는 다리를 놓는다.
공락교(孔樂橋) : 서쪽으로 30리에 있으며 물이 넘치면 배[丹]를 사용한다.
토산 황죽(篁竹)ㆍ닥ㆍ칠ㆍ뽕나무.
정지 경호정(鏡湖亭) : 동쪽으로 5리에 있다. 공북정(拱北亭) : 북쪽으로 5리에 있다.
양고정(良苽亭)ㆍ풍영정(風詠亭) : 모두 서쪽으로 20리에 있다.
부용정(芙蓉亭) : 서남쪽으로 30리에 있다.
단묘 무등산단(無等山檀) : 신라 때에는 무진악(武珍岳)이라 부르고, 명산이라 하여 소사(小祀)로 모셨고,
고려 원종 14년에 봄과 가을에 무등산에서 제사지내도록 명령하였으며, 본조(本朝)에서도 봄과 가을에 제사
지내도록 본읍에 명하였다.
용진연소단(龍津衍所壇) : 서쪽으로 30리에 있다. 봄과 가을에 제사지내도록 본읍에 영(令)을 내렸다.
사원 월봉서원(月峯書院) : 인조 병술년에 세우고 효종 갑오년에 사액(賜額)하였다.
기대승(奇大升) : 자는 명언(明彦)이고, 호는 고봉(高峯)이며, 본관은 행주(幸州)이다. 벼슬은 부제학(副提學)
이었는데 이조 판서(吏曹判書) 덕원군(德原君)을 추증하였고, 시호는 문헌(文憲)이다.
박상(朴祥) : 자는 창세(昌世)이고, 호는 눌재(訥齋)이며, 본관은 충주(忠州)이다. 벼슬은 나주 목사(羅州牧使)
였는데 이조 판서를 추증하였고 시호는 문간(文簡)이다.
박순(朴淳) : 박상의 조카이다. 개성(開城) 편을 보라. 김장생(金長生) : 문묘(文廟)편을 보라.
김집(金集) : 태묘(太廟) 편을 보라. ○ 보충사(褒忠祠) : 선조 신축년에 세우고 계묘년에 사액하였다.
고경명(高敬命) : 자는 이순(而順)이고, 호는 제봉(齊峯)이며, 본관은 장흥이다. 임진왜란 때에 금산(錦山)에서
순절하였다. 벼슬은 공조 참의(工曹參議)였는데 좌찬성을 추증하였으며, 시호는 충렬(忠烈)이다.
고종후(高從厚) : 진주(晉州) 편을 보라. 유팽로(柳彭老) : 자는 군수(君壽)이고, 호는 월파(月坡)이며, 본관은
문화(文化)이다. 임진왜란 때에 금산에서 전사하였다. 벼슬은 학유(學諭)였는데 좌승지를 추증하였다.
고인후(高因厚) : 자는 선건(善建)이며, 호는 학봉(鶴峯)이다. 고경명의 아들인데 임진왜란 때에 아버지와 함께
죽었다. 벼슬은 성균 권지(成均權知)였는데 영의정(領議政)을 추증하였으며, 시호는 의열(義烈)이다.
안영(安瑛) : 자는 원단(元端)이고, 호는 사재(思齋)이며, 본관은 순흥(順興)이다. 임진왜란 때에 유팽로와 함께
죽었으며 좌승지를 추증하였다.
○ 의열사(義烈祠) : 선조 갑진년에 건립하고 숙종 신유년에 사액하였다.
박광옥(朴光玉) : 자는 경환(景煥)이고, 호는 회제(懷齊)이며, 본관은 음성(陰城)이다. 벼슬은 봉상시 정(奉常
寺正)이었는데 도승지를 추증하였다.
김덕령(金德齡) : 자는 경수(景樹)이며, 본관은 광주(光州)이다. 선조 계사년에 의병장으로 충용장군(忠勇將軍)
을 배명(拜命)받았는데, 병신년에 옥사하였다. 병조 판서를 추증하였으며, 시호는 충장(忠壯)이다.
오두인(吳斗寅)ㆍ파주(陂州州) 편을 보라. 김덕홍(金德弘) : 벼슬은 지평이다.
김덕보(金德普) : 벼슬은 집의이다.
[주 D-001] 풍화(風化)를 살피도다. : 이 말은 감사가 되었다는 말이다.
[주 D-02] 조돈(趙盾)의 말이요, : 예전 춘추 시대 진(晉) 나라의 대부(大夫)이다. 그는 조쇠(趙衰)의 아들인데,
어떤 사람이 그 부자를 평하여, "조쇠는 겨울의 햇빛 같아서 사람들이 따스한 것을 사모하고[冬日之日人懷其溫],
조돈은 여름의 햇빛 같아서 사람들이 뜨거운 것을 두려워한다[夏日之日人恐其烈]." 하였다.
[주 D-003] 단전(丹篆)의 짝 : 단전(丹篆)은 옛날 신선들이 읽은 글이니, 단전의 짝은 같은 신선이란 말이다.
[주 D-004] 추(鄒)ㆍ노(魯)의 교화 : 추(鄒)는 맹자가 출생한 땅이요 노(魯)는 공자가 난 땅으로 그 유풍이 남아
교화가 잘 되어 있다 한다.
[주 D-05] 문옹(文翁) : 한 나라 촉군(蜀郡)의 태수로 문교(文敎)에 힘써서 정치를 잘하였다는 사람이다.
[주 D-006] 가부(跏趺) : 가부(跏趺)하여 앉는 것은 불가(佛家)에서 앉는 한 가지 자세이니, 앉아서 두 발바닥을
두 무릎 위에 올려 놓는 자세이다.
[주 D-007] 폄(貶)하는 예(例) : 공자가 《춘추》를 편찬할 때에 토목 건축(土木建築)을 때 아닌 때에 시행한
것은 모두 폄(貶)하여서 기록하였다.
영암군 靈巖郡
동쪽으로 나주 경계까지 14리, 북쪽으로 동주(同州) 경계까지 30리, 남쪽으로 강진현 경계까지 17리,
해남현 경계까지 75리, 서쪽으로 해안까지 50리이며, 서울까지의 거리는 8백 22리이다.
건치연혁 본래 백제의 월나군(月奈郡)인데, 신라 때 지금 이름으로 고쳤다. 고려 성종 14년에 낭주안남도호부
(朗州安南都護府)로 고치고, 현종 9년에 다시 강등되어 영암군이 되었다. 본조에서도 그대로 따랐다.
관원 군수ㆍ훈도 : 각 1명이다.
군명 월나(月奈)ㆍ낭주(朗州)ㆍ낭산(郎山).
성씨본군 최(崔)ㆍ박(朴)ㆍ주(周)ㆍ백(白)ㆍ혜(嵇)ㆍ육(陸). 곤미(昆湄) 허(許)ㆍ유(庾)ㆍ배(裵)ㆍ전(田)ㆍ
종(種)ㆍ유(柳). 진남(鎭南) 혜(嵇)ㆍ오(吳)ㆍ육(陸). 북평(北平) 조(曹). 송지(松旨) 김(金)ㆍ전(全).
심정(深井) 김(金) : 전(全)이라고도 한다. 회의(懷義)도 같다.
풍속 근엄하고 소박하며 화려함이 없다 : 군승(郡乘)에, "농업에 전적으로 종사하며,
부지런하고 검소하며 꾸밈이 없다." 하였다.
형승 긴 내가 성을 안았다 : 유관(柳觀)의 시에, "긴 내가 출렁출렁 성을 안고 흐르네." 하였다. 땅이 창해 바다와
접했다 : 고려 김췌윤(金萃尹)의 시에, "땅이 창해 바다와 접하여 장한 경치가 많다." 하였다.
산천 월출산(月出山) : 군의 남쪽 5리에 있다. 신라 때는 월나산(月奈山)이라 불렀고, 고려 때는 월생산(月生山)
이라 불렀다.
속설에 본국의 외화개산(外華蓋山)이라 칭하기도 하고, 또 작은 금강산이라고도 하며, 또 조계산(曹溪山)이라
고도 한다.
○ 김극기(金克己)의 시에, "월출산의 많은 기이한 모습을 실컷 들었거니, 흐림과 갬 추위와 더위가 모두 서로
알맞도다. 푸른 낭떠러지와 자색의 골짜기에는 만 떨기가 솟고, 첩첩한 산봉우리는 하늘을 뚫어 웅장하고 기이
함을 자랑하누나. 하늘이 영험한 자라로 하여금 세 개의 섬을 짊어지고, 지상으로 황홀하게 옮겨 놓게 했구나.
오정(五丁 다섯 역사)이 갑자기 촉도(蜀道)를 다시 뚫어주D-001 깊게 둘러싸인 계곡에 높은 능선이 위태롭구
나. 나무꾼이 오지 않으니 속세의 번거로운 일 없고, 다만 신선이 몰래 보호할 뿐이로다. 어두운 골짜기는 연기
와 아지랑이 아득하게 자리잡고, 우뚝한 봉우리는 해와 달을 가렸구나. 내가 산 아래 와서 가던 말고삐를 푸니,
서리 맞은 대의 한 가지를 부질없이 가졌어라. 댕댕이 덩굴을 더듬으며 곧장 올라가서 얼마나 알쏘냐. 기러기
등에 남은 태양이 이미 아래를 엿보누나. 서쪽 봉우리 높고 높아 우뚝 솟은 모양인데, 사나운 범이 노하여 걸터
앉았고 물소가 달려가는 모양이로다. 나그네의 흥이 기이함을 탐내어 험난함을 잊고, 뱀 서리듯 몸을 굽히면서
도 피로한 줄 모르겠네. 길이 막히니 큰 돌이 홀연히 눈 안에 들어온다. 신령스럽고 기이한 것 어찌 근원을 찾을
수 있으랴. 처음 보매 솥밭같이 솟아서 만 경(京)이나 되게 무겁더니 손을 따라 둘러보니 하나의 쇠꼬리만큼
가볍구나. 하늘은 새벽 놀이 퍼져 붉게 섞여 윤택하고, 땅은 저녁 아지랑이를 뿜어 내어 푸른색 진하게 떠오른다.
상사(相師)는 신선이 되어 아득하게 편안히 가버리고, 삽상한 남은 바람 천고에 길이 부는구나.
상사는 지난 날에 홀로 간 날이 있어, 소나무 아래 돌문에서 날마다 놀았구나. 돼지를 타고 숨어 노니 물질 밖
[象外]의 경지요, 거마(車馬)를 비웃으니 시끄러움을 따르는 것을 낮게 여기는구나. 어느 때나 기러기 그림자를
용암(龍巖)에 머물게 할까. 교묘한 생각이 오로지 조물주를 뺏고 싶구나.
향기로운 진흙으로 만들어 낸 봉우리가 이미 극에 달했으니, 오히려 다시 붓끝을 번거롭게 해야 하겠구나.
영원히 항상 오봉(五峯)이 솟을 것이니, 누가 마룻대[棟]가 부러지고 사람이 시들었다주D-02고 한탄할까.
하물며 쇠지팡이를 남겨 벽 구석에 걸어 두었으니, 호랑이를 항복받은 이상한 자취가 길이 희미해지리.
해상(海商) 백 명이 옛날에 바다를 넘어갈 때, 산 위의 신광(神光)을 아득히 바라 보았어라. 산에 올라 성인을
배알하고 마침내 집을 엮으니, 동구(洞口)의 쑥과 띠를 마구 베었네. 종신토록 다시는 옛 마을[故里] 생각하지
않고 시냇물 마시고 초목을 먹으며 바위 문에 의지하네. 푸른 벽에는 분명히 자금(紫金)의 상(像)이라, 내려와
역사를 본들 누가 다시 알 것인가. 숲 속의 중과 시골의 노인이 억지로 칭찬하니, 눈[雪]에 새기고 구름에 새겨
놓은 듯 숱한 분(枌)나무 패(牌)로다. 비바람 무정하여 상(像)이 들어 있는 누각을 무너뜨리니, 끊어진 서까래와
깨진 주초가 어지러이 흩어져 있도다. 백 척이나 되는 층층대를 홀로 밟아 멀리 가는데, 네모진 봉분을 좌우에
높이 쌓고 쌓았도다. 숨은 늙은이[逋翁] 어릿어릿 갑자기 나를 방문하니, 목 가득 학발(鶴髮)이요 몸뚱이는
닭의 가죽이었다. 멀리 북령(北嶺)으로 오르니 멋이 더욱 진진하여, 도리어 맛있는 반찬으로 아침에 주림을
해장하는 것보다도 나았다. 언덕에 의지하여 한 번 웃고 사방을 바라보니, 눈 아래 만상(萬像)이 모두 기우뚱
하구나. 멀리 잠겼던 것 처음으로 오래 감추어 두었던 거울을 여니, 먼 봉우리가 반쯤 나타나고 새로 눈썹을
그린 듯하네. 물과 구름이 그윽하고 고와 완상하기에 족하니, 과거의 사적을 찾으려는 이 그 누굴까.
김막(金漠)은 생명을 경시하고 요염(妖艶)을 중히 여겨, 꽃을 꺾고 돌아가지 않으니, 아, 슬프다. 옥소봉(玉霄峯)
아래 이 징군(李徵君)주D-03은 처음에는 땅에 집을 짓고 사는 것 같더니, 갑자기 학의 편지를 받고 높은 언덕
으로 나가, 아침에는 푸른 봉우리에서 자고 저녁에는 붉은 섬돌에서 자는구나. 슬프다, 두 사람이 마침내 면치
못하였으니, 다만 세상 마음 물질을 잊지 못해서였네. 어느 사람이 혜초 장막[蕙帳] 밖으로 내려가지 않아,
자취를 감추어 종산(縱山) 신령의 기롱을 면하였나. 선객(禪客)이 백운원(白雲院)에 영원히 깃드니, 세망(世網)
을 깨뜨려 없애어 남은 것이 없구나. 중과 속인이 이름을 흠모하여 다투어 모임에 들어오니, 처음에는 빈손으로
갔으나 결국에는 실한 데로 돌아가도다.
나도 지금 내[川]를 건너온 코끼리를 사모하거니, 어찌 양을 잃고 갈래 길에서 길이 울 것인가.주D-04 공(公)이
아직도 시상옹(柴桑翁 도연명)을 생각하는 것에 감동하였으니, 구름은 무심히 나오고 새는 피곤하게 날도다.
준마(駿馬)를 칭찬하던 도림(道林)의 보배로운 눈을 돌려서, 나의 노둔한 재질이 고삐에 매이는 것을 용납하라.
눈살을 찌푸리며 어찌 감히 고개에서 나오기를 재촉하리요. 다섯 번 웃어도 양무위(楊無爲)를 면하지 못하도다.
푸른 측백나무 뜰 앞에서 우수수 불고, 붉은 연꽃 못 위에는 물이 찰랑찰랑하는구나. 고요한 가운데 탑(榻)을
대하니 온갖 생각 사라지고, 물고기와 새마저 와서 친하여 의심하지 않는구나. 조용히 성긴 비단으로 덮은 벽을
가리키면서, 나더러 붓 휘둘러 좋은 시를 지으라 하네. 강호(江湖)의 묘운(妙韻)을 혹시라도 빌려 준다면,
좋은 글귀 용궁시(龍宮詩)에도 양보하지 않으리." 하였다.
신증 김종직(金宗直)의 시에, "등불 켜고 자리 걷지 않은 채 밥 먹고 서성대는 것 괴로운데, 월출산 꼭대기에
햇빛이 비치도다. 뭉게뭉게 들구름은 동혈(洞穴)에서 걷히고, 삐죽삐죽 가을 산은 하늘에 솟았구나. 뜬 인생이
반넘어 살도록 이름 들은 지 오래면서, 절정에 올라 보지 못하였으니 세상일 바쁜 것이라.
가야산(伽倻山)과 방불한 것 참으로 기쁘니, 무단히 마상에서 고향을 생각하게 하노라." 하였다.
구정봉(九井峯) : 월출산의 최고봉이다. 꼭대기에는 바위가 우뚝 솟아 있는데, 높이가 두 길이나 되고, 곁에
한 구멍이 있어 겨우 사람 하나가 드나들 만하다. 그 구멍을 따라 꼭대기에 올라가면 20여 명이 앉을 수 있는데,
그 편평한 곳에 오목하여 물이 담겨 있는 동이 같은 곳이 아홉이 있어 구정봉이라 이름 붙인 것이니,
아무리 가물어도 그 물은 마르지 않는다. 속설에 아홉 용이 그곳에 있었다고 한다.
동석(動石) : 월출산 구정봉 아래에 있다. 특히 층암(層巖) 위에 서있는 세 돌은 높이가 한 길 남짓하고 둘레가
열 아름이나 되는데, 서쪽으로는 산마루에 붙어 있고, 동쪽으로는 절벽에 임해 있다. 그 무게는 비록 천백 인
을 동원해도 움직이지 못할 것 같으나, 한 사람이 움직이면 떨어질 것 같으면서도 떨어지지 않는다.
그러므로 영암(靈巖)이라 칭하고, 군의 이름도 여기에서 나온 것이다.
○ 백분화(白賁華)의 시에, "저 돌은 태산같이 무겁고 내 힘은 하나의 새깃처럼 가볍구나. 태산의 경중을 어찌
일찍이 저울로 달 수 있으랴. 태산을 끼고 바다를 건너 뛰는 것을 누가 다시 어렵고 쉬운 줄 알리요.
이제 이 돌에서 천지를 한 손바닥처럼 운전하는 이치를 알겠도다." 하였다.
달마산(達摩山) : 옛날 송양현(松陽縣)에 있는데, 군의 남쪽으로 1백 24리 떨어져 있다. 또 해남현(海南縣)에
서도 보인다.
○ 고려 때 중 무외(無畏)의 기(記)에, "전라도 낭주(朗州)의 속현을 송양현이라 하는데, 실로 천하에서 궁벽한
곳이다. 그리고 그 현의 경계에 달마산이 있는데, 북쪽으로는 두륜산(頭輪山)에 접해 있고, 삼면은 모두 바다
에 닿아 있다. 산 허리에는 소나무와 참나무가 무성하여, 모두 백여 척이나 되는 것들이 치마를 두른듯 늘어 서
있다. 그 위에 아주 흰 돌이 우뚝 솟아 있는데 당(幢)주D-005과도 같고 벽과도 같다. 혹 사자가 찡그리고 하품
하는 것 같기도 하고, 혹은 용과 범이 발톱과 이빨을 벌리고 있는 것 같기도 하며, 멀리 바라보면 쌓인 눈이 공
중에 떠 있는 것 같기도 하다. 산꼭대기 고개 동쪽에 있는 천 길이나 되는 벽 아래, 미타혈(彌陀穴)이라는 구멍
이 있는데, 대패로 민 듯 칼로 깎은 듯한 것이 두세 사람이 앉을 만하다. 앞에는 층대가 있어 창망한 바다와 산
들이 지호지간(指呼之間)에 있는 것 같다. 그 구멍으로부터 남쪽으로 백여 보를 가면 높은 바위 아래 작고 네모
진 연못이 있는데, 바다로 통하고 깊어 바닥을 알지 못한다. 그 물은 짜며, 조수를 따라 늘었다 줄었다 한다.
그 땅의 끝편에 도솔암(兜率庵)이 있는데, 그 암자가 앉은 형세가 훌륭하여 그 장관을 따를 만한 것이 없다.
이곳은 화엄조사(華嚴祖師) 상공(湘公)이 터잡고 지은 곳이다. 그 암자 북쪽에는 서굴(西窟)이 있는데, 신라 때
의조화상(義照和尙)이 처음 살면서 낙일관(落日觀)을 수리한 곳이다.
서쪽 골짜기에는 미황사(美黃寺)ㆍ통교사(通敎寺)가 있고, 북쪽에는 문수암(文殊庵)ㆍ관음굴(觀音窟)이 있는데,
그 상쾌하고 아름다움이 참으로 속세의 경치가 아니다. 또 수정굴(水精窟)이 있는데, 수정(水精)이 나온다.
지원(至元) 신사년 겨울에 남송(南宋)의 큰 배가 표류해 와 이 산 동쪽에 정박했을 때, 한 고관이 산을 가리키면
서 주민에게 묻기를, "내가 듣기에 이 나라에 달마산이 있다 하는데, 이 산이 그 산 아닌가." 하므로, 주민들이
"그렇다." 하였다. 이에 그 고관은 즉시 그 산을 향하여 예를 하고, "우리나라는 다만 이름만 듣고 멀리서 공경할
뿐인데, 그대들은 이곳에서 생장했으니 부럽고 부럽도다.
이 산은 참으로 달마대사(達摩大師)가 상주할 땅이다." 하고 그림으로 그려 갔다. 위대하다, 이 산이여.
어찌 매우 높고 빼어난 모양이 산과 바다의 아름답고 풍부함을 다 했을 뿐이랴. 그 성적(聖跡)과 영험한 자취도
많았도다. 또 외국인들까지도 우러르고 공경함이 저와 같았다. 그러나 먼 지방에 있어서 세상에는 등반하여
감상하는 자가 없으니 슬프다. 만약 세상을 버리고 도를 찾는 선비로서 절정에 올라가 차가운 바람을 타고,
대사(大士)가 세상 밖에서 이른바 전하지 못한 묘함을 얻은 자가 있다면, 저 소림(少林)에서 진수(眞髓)를 얻은
자주D-06 또한 어떠한 사람이라 할까." 하였다.
갈두산(葛頭山) : 군의 남쪽 1백리에 있다. 화현(火峴) : 군의 남쪽 28리에 있다.
가학현(駕鶴峴) : 군의 서쪽 30리에 있다. 율현(栗峴) : 군의 서남쪽 25리에 있다.
영원현(嶺院峴) : 군의 동쪽 10리에 있다. 동음소현(冬音所峴) : 군의 동남쪽 25리에 있다.
바다 : 군의 서남쪽에 있다. 덕진포(德津浦) : 군의 북쪽 5리에 있다. 월출산에서 나와 바다로 들어간다.
노도(露島) : 주위가 40리이고, 목장이 있다. 달목도(達木島) : 주위가 56리이고, 목장이 있다.
보길도(甫吉島) : 주위가 63리이다. 여차라도(餘次羅島) : 주위가 30리이다. 화도(花島) : 주위가 50리이다.
백내리도(白乃里島) : 주위가 27리이다. 횡간도(橫看島) : 주위가 39리이다.
감물내리도(甘勿乃里島) : 주위가 44리이다. 어응포도(於應浦島) : 주위가 40리이다.
고도(羔島) : 주위가 29리이다. 죽청도(竹靑島) : 주위가 20리이다. 계화도(界火島) : 주위가 14리이다.
달도(達道) : 주위가 14리이다. 말응두도(末應豆島) : 주위가 53리이다. 말개도(末介島) : 주위가 19리이다.
어화도(於火島) : 주위가 24리이다. 거요도(居要島) : 주위가 17리이다. 가지도(可知島) : 주위가 18리이다.
내등도(內等島) : 주위가 25리이다. 장좌도(長佐島) : 주위가 27리이다. 좌지도(左只島) : 주위가 36리이다.
수덕도(愁德島) : 주위가 27리이다. 여작지도(餘作只島) : 주위가 27리이다.
소모도(小茅島) : 주위가 30리이다.
○ 이상은 군의 남쪽 90리 바다 가운데 있다.
토산 감ㆍ석류ㆍ유자ㆍ굴ㆍ새우ㆍ낙지ㆍ전복ㆍ붕어ㆍ홍합ㆍ조개ㆍ숭어ㆍ게ㆍ감태(甘苔 김의 일종)ㆍ김ㆍ
쇠털ㆍ매산(苺山)ㆍ황각(黃角)ㆍ미역ㆍ우뭇가사리ㆍ소금ㆍ복령(茯笭)ㆍ안식향(安息香)ㆍ향버섯[香蕈]ㆍ
생강.
성곽 읍성(邑城) : 돌로 쌓았는데 주위가 4천 3백 69척이고, 높이가 15척이며, 안에 네 개의 우물이 있다.
관방 달량영(達梁營) : 군의 남쪽 90리에 있다. ○ 수군만호(水軍萬戶) 1명을 두었다. 신증 정덕(正德) 임오년에
없애고, 강진(康津) 가리포(加里浦)로 옮겼다.
봉수 갈두산봉수(葛頭山烽燧) : 동쪽으로 강진현의 좌곡산(佐谷山)에 응하고,
서쪽으로는 해남현 관두산(館頭山)에 응한다.
신증궁실 객관 : 이숙함(李淑瑊)의 시에, "나그네의 고향 생각 세어 보면 많은데, 역로(驛路)는 멀고 멀리 하늘
가에 있구나. 아침 안개 개니 신기루의 도시가 벌어지고, 저녁 연기 나는 곳에 어부의 집이 있구나. 밤 깊고
사람 고요한데 발 걷으니 달이 환하고, 가을 다 가고 서리 내렸는데 국화꽃 피었구나. 놀며 구경하면서도 밥 한
그릇 먹을 동안을 잊지 못하여, 매양 남두성(南斗星)에 의지하여 서울을 바라보누나." 하였다.
누정 양휘루(揚輝樓) : 객관 동쪽에 있는데, 군수 강삼(姜參)이 세웠다.
신증 배회루(徘徊樓)라 개명하였다. ○ 안침(安琛)의 시에, "배회루 위에 달이 배회하는데, 나그네도 배회하니
또한 쾌하도다. 옥토끼는 몇 년 동안 선약(仙藥)을 찧었으며, 항아(姮娥)는 어느 곳에서 경대를 펼쳤는가.
흔들리는 파도에 백 동파(百東坡) 흩어지는 물이요,주D-007 그림자를 대하여 셋이 되는 태백(太白)의 잔이로다.
곧 밤이 되자 하늘은 씻은 듯한데, 서늘한 바람은 계향(桂香)을 불어 보내는구나." 하였다.
학교 향교 : 군의 남쪽 2리에 있다.
역원 영보역(永保驛) : 군의 북쪽 성 밑에 있다. 청풍원(淸風院) : 일명 청정원(淸淨院)이라고도 한다.
군의 남쪽 11리에 있다. 보현원(普賢院) : 군의 동쪽 7리에 있다. 수원(燧院) : 군의 북쪽 25리에 있다.
교량 덕진교(德津橋) : 덕진포에 있다.
불우 도갑사(道岬寺) : 월출산에 있다. 도선(道詵)이 일찍이 머물렀던 곳이다. 비석이 있는데 글자가 마멸되어
읽을 수가 없다. 절 아래 동구(洞口)에 두 개의 입석(立石)이 있는데, 하나에는 '국장생(國長生)' 3자가 새겨져
있고, 또 하나에는, '황장생(皇長生)' 3자가 새겨져 있다.
통교사(通敎寺)ㆍ미황사(美黃寺)ㆍ도솔암(兜率庵)ㆍ관음굴(觀音窟)ㆍ서방굴(西方窟)ㆍ수정굴(水精窟) :
모두 달마산에 있다.
사묘 사직단(社稷壇) : 군의 서쪽에 있다. 문묘(文廟) : 향교에 있다.
성황사 : 군의 남쪽 3리에 있다. 월출산신사(月出山神祠) : 본읍에서 제사를 지낸다.
여단(厲壇) : 군의 북쪽에 있다.
고적 곤미폐현(昆湄廢縣) : 군의 서쪽 30리에 있다. 본래 백제의 고미현(古彌縣)인데, 신라 때 지금 이름으로
고쳐 속현으로 만들고 고려와 본조에서도 그대로 따랐다.
고진도(古珍島) : 곤미현 서쪽에 있다. 고려 충정왕(忠定王) 때에 진도현(珍島縣)이 왜구 때문에 땅을 잃고
여기에 붙어 살다가 이제는 본토에 돌아갔으나 고을 터가 지금도 남아 있다.
최씨원(崔氏園) : 군의 서쪽 15리에 있다. ○ 속설에, 신라 사람 최씨가 있었는데 정원 안에 열린 외 하나의
길이가 한 자나 넘어 온 집안 식구가 퍽 이상하게 생각했다. 그런데 최씨 집 딸이 몰래 그것을 따 먹었더니,
이상하게 임신이 되어 달이 차서 아들을 낳았다. 그의 부모는 그 애가 사람 관계없이 태어난 것이 미워 대숲에다
내 버렸다. 두어 주일 만에 딸이 가서 보니 비둘기와 수리가 와서 날개로 덮고 있었다. 돌아와 부모께 고하니,
부모도 가서 보고 이상히 여겨 데려다가 길렀다. 자라자 머리를 깎고 중이 되었는데, 이름을 도선(道詵)이라
하였다. 그는 당 나라에 들어가 일행선사(一行禪師)의 지리법(地理法)을 배워 가지고 돌아와 산을 답사하고 물
을 보는데 신명스러움이 많았다. 뒤에 그곳을 구림(鳩林) 또는 비취(飛鷲)라 했다.
○ 최유청(崔惟淸)이 지은 광양(光陽)의 옥룡사비(玉龍寺碑)를 상고하건대, 도선의 어머니는 강씨(姜氏)라 하였
는데 여기에는 최씨라고 하였으니, 누가 옳은지 모르겠다.
동석사(動石寺) : 월출산에 있다.
○ 김극기(金克己)의 시에, "월출산 서쪽 고개 마루에 이상한 한 덩어리 바위가 있네. 지나는 길손 모두 길을 굽
히고, 대개 올라서 구름 자취를 찾는다. 내가 만약 그대로 지난다면 땅의 신령이 응당 책망하리라.
산 아래에 와서 말을 멈추니, 나뭇가지에 나는 신이 멈추도다.주D-008 과연 천 길이나 되는 바위를 만나니,
높고 우뚝한 것 빈 하늘을 의지했구나. 여와씨(女媧氏)가 일찍이 하늘을 기울 때 아직도 금액(金液)을 굳히지
못하여, 날아서 백운 풀에 떨어지니 하늘에서 거리가 겨우 지척일세. 참으로 그는 낙(駱)ㆍ원(原)의 사신이라,
명승지를 사랑하여 멀리 가는 것도 잊었도다. 어떤 사람이 포금(布金)의 곁에다 처음으로 절[空王宅]을 창건
했는가. 정녕 형악(衡岳)의 창름(倉廩)을 사랑하여 난간에 임하여서 등척(騰擲)하고자 하나, 혹시라도 신물
(神物)의 보호가 있을까 두려워서 놀라 바라보고 썼던 모자를 바로 하였으리라. 손을 따라 바야흐로 흔들어
떨치니, 응당 먼지를 끌어 붙이는 호박(琥珀) 같으리라.주D-09 이름만 듣고 오래도록 의심만 품었는데 한 번
보자 얼음이 풀리듯 알겠도다. 흥이 다하여 깨끗한 방을 찾아 방석 깔고 비고 훤한 데에 앉으니, 잠깐 사이에
감로반(甘露飯) 한 사발이 부엌[香積]에서 왔도다. 그대로 도연명의 술잔을 잡고 해가 서산에 육박해 감을
알지 못했더니, 달빛이 사람을 비추며 오니 맑은 경치 더욱 아깝구나. 고요한 가운데 누가 반려(伴侶)가 될까?
소나무ㆍ돌까지 세 익우(益友)가 되네." 하였다.
회의 부곡(懷義部曲) : 군의 남쪽 1리에 있다. 심정 부곡(深井部曲) : 군의 남쪽 1백 30리에 있다.
귀인 부곡(貴仁部曲) : 군의 남쪽 90리에 있다. 송정 부곡(松井部曲) : 군의 남쪽 1백 10리에 있다.
진남향(鎭南鄕) : 군의 서쪽 20리에 있다. 동백소(冬柏所) : 군의 동쪽 15리에 있다.
명환고려 유광식(柳光植) : 정치는 청백하고 엄격한 것을 숭상하니, 아전은 두려워하고 백성들은 사모하였다.
인물고려 최지몽(崔知夢) : 처음 이름은 총(聰)이다. 경사(經史)를 두루 섭렵하였는데, 복서(卜筮)에 더욱 정통
했다. 태조가 그의 이름을 듣고 꿈을 점치게 했더니, 길조를 얻었다면서, "반드시 삼한(三韓)을 통어할 것입
니다." 하였다. 태조가 기뻐하여 지몽(知夢)이라고 이름을 고쳐 주었다. 벼슬이 태사(太師)에 이르렀으며,
시호는 민휴(敏休)이다. 경종(景宗)의 묘정(廟庭)에 배향되었다.
열녀고려 최씨(崔氏) : 진주 호장(晉州戶長) 정만(鄭滿)의 아내이다. 자세한 것은 진주 열녀 편을 보라.
김씨(金氏) : 중랑장(中郞將) 조안정(趙安鼎)의 아내이다. 나이 17세에 아버지가 죽고 18세에 남편이 죽고 19세
에 어머니가 죽었으나, 모두 여막에서 3년상을 치루었다. 애통해 하기를 고치지 않았고 생업(生業)을 일삼지
않았다. 그 일이 조정에 보고되어 정려하였다.
제영 연해고연인도가(連海孤煙認島家) : 김극기의 시에, "구름을 격한 두어 마디 경쇠 소리가 언덕의 절을 알리고,
바다를 연한 외줄기 연기 섬의 인가를 알게 하네." 하였다.
송황교영육칠리(松篁交影六七里) : 김신윤(金莘尹)의 시에, "소나무 대나무 그림자 6, 7리에서도 얽히고,
닭과 개짖는 소리 수백 집일세." 하였다.
수점취연죽외가(數點炊煙竹外家) : 고득종(高得宗)의 시에, "한 소리 우는 경쇠는 구름 가운데 절에서 나오고,
두어 줄기 불때는 연기는 대나무 밖의 집에서 나는도다." 하였다.
죽림신순장룡추(竹林新筍長龍雛) : 서거정(徐居正)이 이 사군(李使君)을 보내는 시에, "황원(黃原)이 바다를
진무(鎭撫)한다 말하는 것 같더니, 그대를 보내노라. 이제 다시 어부(魚符 군수의 인)를 찼도다. 덕진(德津)에는
물이 얕아도 다리가 아직 있고, 도갑(道岬)에는 비석이 남았는데 글씨가 반은 없구나. 매화나무 언덕엔 꽃이
눈처럼 흩날리고, 죽림의 새 죽순은 용의 새끼가 자란 듯, 흰 머리 외로이 노는 흥취를 저버리니,
누가 호남의 색칠한 그림[着色圖]을 보내주랴." 하였다.
[비고]
방면
군시(郡始) : 서쪽으로 5리이다. 군종(郡終) : 동쪽으로 20리. 북일시(北一始) : 처음이 10리, 끝이 20리이다.
북일종(北一終) : 처음이 20리, 끝이 30리이다. 북이시(北二始) : 처음이 30리, 끝이 40리이다.
북이종(北二終) : 위와 같다. 서시(西始) : 끝이 15리이다. 서종(西終) : 끝이 20리이다.
곤일시(昆一始) : 서쪽으로 끝이 40리이다. 곤일종(昆一終) : 서쪽으로 끝이 90리이다.
곤이시(昆二始) : 서쪽으로 끝이 40리이다. 곤이종(昆二終) : 서쪽으로 끝이 50리이다.
옥천시(玉泉始) : 남쪽으로 처음이 60리이고, 끝이 70리이다.
옥천종(玉泉終) : 남쪽으로 처음이 80리이고, 끝이 90리이다.
북평시(北平始) : 옛 북평향(北平鄕)이다. 남쪽으로 처음이 1백 리이고, 끝이 1백 10리이다.
북평종(北平終) : 남쪽으로 처음이 1백 20리이고, 끝이 1백 30리이다.
송수시(松首始) : 옛 송수향(松首鄕)이다. 남쪽으로 끝이 1백 30리이다.
송수종(松首終) : 남쪽으로 끝이 1백 50리이다. 위의 6면(面)은 해남(海南)의 남쪽 경계 너머에 있으며,
모두 바다와 연해 있다.
노아도(露兒島) : 남쪽으로 1백 80리이다. 보길도(甫吉島) : 남쪽으로 2백 리이다.
잉거도(芿巨島) : 위와 같다. 소안도(所安島) : 위와 같다.
추자도(楸子島) : 남쪽으로 3백 리이다.
위의 다섯 섬은 모두 육지에 면(面)을 두고 있다.
○ 진남향(鎭南鄕)은 서쪽으로 20리, 회의 부곡(懷義部曲)은 남쪽으로 10리이며, 귀인 부곡(貴仁部曲)은 남쪽
으로 90리이고, 송정 부곡(松井部曲)은 남쪽으로 1백 리이며,
심정 부곡(深井部曲)은 남쪽으로 1백 30리이다. 위의 세 곳은 모두 해변에 있다.
동백소(冬栢所)는 동쪽으로 12리이다.
진보 이진진(李津鎭) : 남쪽으로 1백 20리에 있다. 성의 둘레는 1천 4백 78척이며, 우물이 둘 있다.
○ 수군만호(水軍萬戶) 1명이다. 어란포진(於蘭浦鎭) : 남쪽으로 1백 50리에 있다.
성의 둘레는 1천 4백 7척이며, 우물이 하나 있다. 해남(海南)에서 본군으로 이속되었다. ○ 수군만호 1명이다.
창고 창(倉) 넷 : 읍내에 있다. 해창(海倉) : 서쪽으로 15리에 있다. 서창(西倉) : 서쪽으로 40리에 있다.
옥천창(玉泉倉) : 남쪽으로 70리에 있다. 이창(梨倉) : 이진(梨津)에 있다.
목장 노아도(露兒島)ㆍ소안도(所安島).
진도 이창진(梨倉津) : 이진에 있다. 용당진(龍堂津) : 무안(務安)과 목포진(木浦鎭)으로 통한다.
교량 쌍교(雙橋) : 남쪽으로 60리에 있다.
토산 황죽(篁竹)ㆍ전죽(箭竹)ㆍ감ㆍ유자ㆍ칠ㆍ차[茶].
누정 대월루(對月樓) : 읍내에 있다. 해월루(海月樓) : 이진(梨津) 남쪽에 있다. 제주도로 가는 자는 여기서 배를
타며, 소안도(所安島)에서 바람을 살린다.
영보정(永保亭) : 동쪽으로 10리에 있다. 회사정(會社亭) : 서쪽으로 20리에 있다.
단묘 월출산단(月出山壇) : 신라 때에는 월나악(月奈岳)이라 부르고, 명산이라 하여 소사(小祀)로 모셨으며,
본조(本朝)에서도 본읍에 제사하도록 영을 내렸다.
사원 녹동서원(鹿洞書院) : 인조 경오년에 건립하고 숙종 계사년에 사액하였다.
최덕지(崔德之) : 자는 우수(迂叟)이며, 호는 연촌(煙村)이고, 본관은 전주(全州)이다. 벼슬은 제학(提學)이었는
데 문종 때에 벼슬을 버리고 은거했다.
김수항(金壽恒) : 양주(楊洲) 조에 보라.
최충성(崔忠成) : 자는 필경(弼卿)이며, 호는 산당(山堂)이다. 최덕지의 아버지이다.
김창협(金昌協) : 양주(楊洲) 조에 보라.
○ 충절사(忠節祠) : 효종 임진년에 건립하고 숙종 신유년에 사액하였다. 정운(鄭運) : 자는 창진(昌辰)이며,
본관은 하동(河東)이다. 임진왜란 때에 녹동 만호(鹿洞萬戶)였는데, 거제(巨濟)의 옥포(玉浦)에서 전사하였다.
병조 판서를 추증하였고, 시호는 충장(忠壯)이다.
[주 D-001] 오정(五丁 다섯 역사)이 갑자기 촉도(蜀道)를 다시 뚫어 : 예전에 중국의 진 나라와 촉(蜀) 나라는
검각산을 사이에 두고 있었는데, 그 검각산이 원체 험악하여 교통하지 못하였다. 진 나라에서 쇠로 소를 하나
만들어 놓고 밤에 그 소 뒤에다가 금을 한 덩이씩 갖다 놓고 그 쇠로 만든 소가 금똥을 눈다고 말하였다.
촉 나라에서 그 소문을 듣고 힘이 센 역사[五丁力士]를 시켜서 산의 돌을 깨고 사닥다리를 놓아 길을 만들고,
그 소를 훔쳐 갔다. 그것이 검각산의 길이 열리게 된 시초이다.
[주 D-02] 사람이 시들었다 : 《예기》의 단궁(檀弓)에 “현철한 사람이 시드니, 나는 장차 누구를 따르랴
[哲人其萎吾將安放].”라는 말이 있으니, 이는 공자의 죽음을 말한 것이다.
[주 D-03] 이 징군(李徵君) : 징군(徵君)이라는 말은 그 자신이 벼슬하려 하지 않았으나 나라에서 먼저 부른
사람이란 말이다. 여기 이 징군은 누구인지는 모르겠다.
[주 D-04] 양을 잃고 갈래 길에서 길이 울 것인가. : 양주(楊朱)가 갈림길에서 양을 잃은 것을 보고,
갈림길에서 어느 길을 택하느냐에 따라 그 결과가 크게 달라질 수 있는 것을 탄식했다는 고사에서 나온 말이다.
[주 D-005] 당(幢) : 당(幢)은 절 같은 데에서 무쇠나 구리로 기둥같이 높게 세운 것인데, 원래는 여러 깃발을
달기 위하여 만들었을 것이나 깃대는 아닌 것이다.
[주 D-06] 저 소림(少林)에서 진수(眞髓)를 얻은 자 : 인도 불교의 28대 교조인 달마대사가 중국으로 와서
하남성 숭산 소림사(河南省嵩山少林寺)에서 선학(禪學)을 전수하였는데,
그의 수제자 혜가(彗可)가 그의 학문의 진수를 얻었다 한다.
[주 D-007] 흔들리는 파도에 백 동파(百東坡) 흩어지는 물이요, : 소동파(蘇東坡)가 달 밝은 밤에 낚시하는데
물이 평온할 때에는 그림자가 하나이지만, 물이 출렁대면 물결마다 한 그림자가 보여서 백 동파(百東坡)가
된다고 한 말이 있다.
[주 D-008] 나뭇가지에 나는 신이 멈추도다. : 고개가 원체 높으므로 길가는 사람이 마치 나무 끝에 있는 것
같아서 그가 신은 신 역시 나무 꼭대기에 있는 것이라고 말한 것이다.
[주 D-09] 응당 먼지를 끌어 붙이는 호박(琥珀) 같으리라. : 호박(琥珀)을 뜨겁게 문질렀다가 티끌에 대면
전기가 일어서 티끌이 호박으로 달라붙는다.
36권 영광군 靈光郡
동쪽은 진원현(珍原縣) 경계까지 59리, 남쪽은 함평현 (咸平縣) 경계까지 28리,
북쪽은 무장현(茂長縣) 경계까지 24리, 서쪽은 해안까지 28리이고, 서울에서 6백 99리 떨어져 있다.
건치연혁 본래 백제의 무시이군(武尸伊郡)이었는데, 신라 때 무령군(武靈郡)이라 고쳤고, 고려 때에 지금
이름으로 고쳤으며, 본조에서는 그대로 따랐다.
관원 군수ㆍ훈도 : 각 1명.
군명 무시이ㆍ무령ㆍ오성(筽城)ㆍ정주(靜州).
성씨본군 : 김(金)ㆍ전(田)ㆍ조(曺)ㆍ송(宋)ㆍ윤(尹)ㆍ정(丁)ㆍ국(鞠)ㆍ이(李)ㆍ서(徐)ㆍ신(申)ㆍ박(朴) :
모두 다른 곳에서 들어왔다.
삼계(森溪) : 주(周)ㆍ최(崔)ㆍ손(孫)ㆍ성(成)ㆍ공(公)ㆍ전(田)ㆍ김(金)ㆍ이(李) : 모두 다른 곳에서 들어왔다.
육창(陸昌) : 유(柳)ㆍ조(曺)ㆍ갈(葛)ㆍ정(丁)ㆍ빈(賓)ㆍ안(安). 임치(臨淄) : 김(金)ㆍ황(黃)ㆍ박(朴)ㆍ양(楊)ㆍ
이(李). 진량(陳粮) : 윤(尹)ㆍ송(宋)ㆍ박(朴). 조지(造紙) : 이(李)ㆍ서(徐). 공아(貢牙) : 임(任)ㆍ옥(玉).
망운 (望雲): 노(盧)ㆍ김(金)ㆍ이(李). 대안(大安) : 송(宋). 홍농(弘農) : 정(丁)ㆍ김(金)ㆍ유(兪).
풍속 풍속은 귀신을 믿는다 : 〈지지(地志)〉에 있다.
형승
일곱 섬과 세 봉우리 : 신영손(辛永孫)의 시에, "일곱 섬이 아득히 눈아래 비껴있고, 세 봉우리 우뚝이 헌함 앞에
솟았네." 하였다.
산세는 두루 둘러있다 : 신숙주(申叔舟)의 시에, "산세는 두루 둘러 바다를 베개했는데, 만가(萬家)의 밥짓는
연기는 태평한 시대일세." 하였다.
큰 바다에 닿아 있고, 남쪽 지방의 중요한 고장이다 : 모두 앞 사람의 〈동헌기(東軒記)〉에 있다.
산천 오산(筽山) : 군의 서쪽 25리에 있으며, 진산이다.
모악산(母岳山) : 군의 남쪽 20리에 있는데, 함평현에서도 보인다. 산중에 용굴(龍窟)이 있는데, 깊이는 헤아릴
수 없고, 가뭄에 비를 빌면 효험이 있다. 홍농산(弘農山) : 홍농부곡(弘農部曲)에 있다.
우와산(牛臥山) : 군의 서쪽에 있다. 구수산(九岫山) : 군의 서쪽 20리에 있다.
차음산(次音山) : 군의 서쪽 30리에 있다. 굴두산(屈頭山) : 군의 서쪽 15리에 있다.
수연산(隨緣山) : 군의 동쪽 35리에 있다. 본명은 영취산(靈鷲山)인데, 수연사가 있으므로 속칭 수연산이라고
한다.
마점산(磨岾山) : 군 동쪽 10리에 있다. 진하산(珍下山) : 군 남쪽 1백 리에 있는데, 둘레가 45리이고,
목장(牧場)이 있다.
대서호(大西湖) : 군 서쪽 25리에 있는데, 일명 마성(馬城)이라고도 한다. 어량(魚梁)이 있다.
바다 : 군 서쪽 30리에 있다. 파시전(波市田) : 군 북쪽 20리에 있는데, 조기가 생산된다. 매년 봄에 온 나라의
상선이 사방에서 모여들어 그물을 던져 고기를 잡아 판매하는데, 서울 저자와 같이 떠드는 소리가 가득하다.
그 고깃배들은 모두 세를 낸다.
망운도(望雲島) : 옛 망운향(望雲鄕)인데, 어량과 목장이 있다.
고이도(故耳島) : 군 남쪽에 있는데, 목장이 있다.
고도도(高道島) : 군 서쪽 바다 가운데 있는데, 바닷가에서 백보 떨어져 있다.
성의도(省衣島) : 고도도의 서쪽에 있는데, 둘레가 20리이다.
안마도(安馬島) : 고도도의 서쪽에 있는데, 둘레가 25리이다.
진월도(珍月島)ㆍ어배도(於背島)ㆍ보사도(寶沙島)ㆍ채운도(採雲島)ㆍ사곶도(沙串島) : 둘레가 34리이다.
시아도(時兒島)ㆍ당사도(唐笥島)ㆍ모야도(毛也島)ㆍ선점도(蟬岾島)ㆍ대가질지도(大加叱知島)ㆍ진인이도
(珍人伊島)ㆍ아지마도(阿只亇島) : 이상은 모두 군의 서쪽 바다 가운데에 있다. 유도(留島)ㆍ신위도(神葦島)ㆍ
청도(靑島)ㆍ독도(禿島)ㆍ백량도(白良島)ㆍ앵도(櫻島)ㆍ취도(鷲島)ㆍ내파도(乃破島) :
이상은 모두 육창향(陸昌鄕)에 있다.
임치도(臨淄島) : 둘레가 50리이고, 목장이 있다. 북사자도(北獅子島), 남사자도(南獅子島)ㆍ개요지도(開要只島),
마지도(亇知島) : 이상은 모두 임치현(臨淄縣)에 있다.
토산 조기ㆍ넙치ㆍ오징어ㆍ조개ㆍ대조개ㆍ낙지ㆍ굴ㆍ새우ㆍ백새우ㆍ대, 죽전(竹箭) : 대안향(大安鄕) 안에서
난다. 차, 산골[自然銅] : 읍성(邑城) 안에서 난다. 생강ㆍ복령ㆍ지황(地黃)ㆍ부레[魚鰾]ㆍ준치ㆍ밴댕이ㆍ
황각(黃角).
성곽 읍성(邑城) : 돌로 쌓았는데, 둘레가 1천 4백 69척, 높이가 6척이고, 안에는 9군데의 샘이 있다.
관방 다경포영(多慶浦營) : 군의 남쪽 1백 50리에 있으며, 목장이 있다. ○ 수군만호(水軍萬戶) 1명이 있다.
신증 정덕(正德) 을해년에 처음 돌로 성을 쌓았는데, 둘레가 9백 80척, 높이가 12 척이다.
법성포영(法聖浦營) : 군 북쪽 30리에 있다.
○ 수군만호 1명이 있다.
신증 정덕 갑술년에 돌로 성을 처음 쌓았는데, 둘레가 1천 6백 88척, 높이가 12척이다.
봉수 홍농산 봉수 : 군의 북쪽 61리에 있는데, 북쪽으로 무장현 고리포(古里浦) 봉수에 응한다.
차음산 봉수 : 군의 서쪽 49리에 있는데, 남쪽으로 함평현 해제(海際)에 응하고, 북쪽으로 고도도(古道島)에
응한다. 고도도 봉수 : 군의 서쪽 28리에 있는데, 북쪽으로 홍농산에 응한다.
궁실 객관 : 신숙주의 기문에, "군이 여러 번 왜구의 난을 당하여 공관이 쓸쓸하다. 예전에는 읍의 남쪽 산기슭에
있었다는데 그 산수가 등지어 가고 지리가 불순한데, 더우기 성보(城堡 망보는 작은 성)는 낮고 무너지고 공관은
비좁기 때문에, 임신년에 읍 사람들이 사유를 조정에 아뢰어 성을 우와산(牛臥山)의 동쪽으로 옮기니, 험준하고
견고하며 넓고 평탄하며 주위가 넓게 트여서, 안에 관사와 창고, 미곡창고를 세울 만했다. 그 해 가을부터 짓기
시작했는데, 이(李)ㆍ정(鄭) 두 군수를 겪었어도 오히려 진척이 없었다.
병자년 봄에 이르러 지금 군수 여흥(驪興) 민효원(閔孝源) 공이 뒤를 이어 군사가 되어 앞 사람이 아직 세우지
못한 것을 세우고 앞 사람이 끝내지 못한 것을 끝내어, 문과 창을 내고 단청을 환하게 하니, 군 사람이 모두 경축
하였다." 하였다.
누정 만경루(萬景樓) : 객관 동쪽에 있다.
○ 군수 박항경(朴恒卿)이 세웠다.
망원루(望遠樓) : 이숙함(李淑瑊)의 기문에, "고을의 웅걸함이 남쪽 여러 고을 중에 으뜸이다. 예전에 군성이
있었으나 땅이 좁았는데, 임신년에 이 일이 비로소 임금께 알려져서 조정의 의론이 모두 가하다 하여 드디어
땅을 선택하여 여기에 읍을 세웠다. 성곽ㆍ공관ㆍ창고와 미곡창고가 창설되었으나,
성루(城樓)는 미처 세우지 못하였는데, 지금 군수 평양(平壤) 조후숙종(趙侯叔宗)이 부임해서 해가 지나자
정사가 다스려지고 송사가 바로잡히니, 백성들과 함께 일을 할 만함을 알게 되었다. 이에 여러 마을의 부로들과
의논하여 돌을 깎고 재목을 다듬었으며,
일꾼들이 사방에서 모여들어서 높은 누각과 홍문(虹門 곧,홍예문(虹蜺門)인데 관청 등의 앞 밖에 세우는 문)이
며칠 안되어 낙성되었다. 숙함(叔瑊)이 일이 있어서 이 군을 지나는데 조 군수가 나를 맞아 함께 올라가 자리를
펴고 술잔을 놓고서 낙성연을 차렸다. 술이 얼근해서 난간에 기대어 눈 가는 대로 둘러보니, 상에 가까이 닿은
것은 일곱 섬과 세 봉우리의 가벼운 산 아지랑이와 안개이고, 멀리 형세를 나눈 것은 법성포와 다경포의 바람
탄 돛과 신기루인데, 거기에다 들판의 구름같은 누런 곡식과, 마을의 흰 연기가 누각의 발과 들보 사이에서
기이한 경치를 다투어 뽐내지 않음이 없으니, 이것 또한 경치의 볼 만한 것이다." 하였다.
○ 성임(成任)의 시에, "성 아래 홍문(虹門)은 백 척의 사립문, 성 위의 높은 다락은 정말 나는 듯하네. 아침마다
바다 기운 천점(千點)이나 비꼈고, 보이는 곳마다 산 빛이 사방으로 둘러 푸르구나.
군막(軍幕)에선 주 나라 예악을 매양 말하고, 여장(女墻 성상(城上)의 담)에는 한 나라 깃발이 누어져 있네.
때가 태평하니 하청송(河淸頌)주D-001을 짓고자 하는데, 북녘을 바라보는 채색구름이 대궐을 둘렀네." 하였다.
신증 청풍루(淸風樓) : 객관 동쪽에 있다.
학교 향교 : 군의 동쪽 1리에 있다.
창고 법성창(法聖倉) : 법성포에 있는데, 본군 및 흥덕(興德)ㆍ옥과(玉果)ㆍ부안(扶安)ㆍ함평ㆍ진원ㆍ담양(潭陽)ㆍ
무장ㆍ장성(長城)ㆍ정읍(井邑)ㆍ곡성(谷城)ㆍ창평(昌平)ㆍ고부(古阜)ㆍ순창(淳昌)ㆍ고창(高敞)등의 관전세를
여기에서 거두어 들여서 서울까지 수로로 운반한다.
신증 지금 임금 7년에 조정의 의론으로 나주와 영산(榮山)의 창고는 수로가 험하기 때문에 배가 많이 전복되어
손실이 많으므로 우창(右倉)에서 거두어 들이는 전세(田稅)를 여기로 옮기고, 또 이 창고에서 거두는 흥덕ㆍ
부안ㆍ고부ㆍ정읍 등의 관전세를 군산창(群山倉)에서 나누었다.
역원 녹사역(綠沙驛) : 군의 남쪽 5리에 있다.
가정원(可亭院) : 군의 남쪽 30리에 있다. 연덕원(延德院) : 군의 남쪽 20리에 있다.
도편제원(道鞭梯院) : 군의 북쪽 40리에 있다. 임계원(臨溪院) : 군의 북쪽 15리에 있다.
북원(北院) : 군의 북쪽 5리에 있다.
불우 불갑사(佛岬寺) : 모악산의 골짜기가 그윽하고 경치 좋은 곳에 있다. 묵은 비석이 있는데 글자가 안 보인다.
뜰 앞에 동백나무가 있는데 매우 기이하다.
○ 중 수이(守伊)의 시에, "일곱 가지 동백나무 헌함 앞에 심었는데, 곧은 줄기 3층은 몇백 년이 되었나.
눈속의 붉은 빛에 옛 일이 생각나고, 마른 덩굴 그림은 뒷 사람 위에 전하네." 하였다.
자복사(資福寺) : 불덕산(佛德山)에 있다.
○ 고려 윤여형(尹汝衡)의 시에, "동림(東林)의 절은 군성(郡城)의 동쪽에 있는데, 외로운 나그네 여기 머물렀네.
하도 많은 나그네 설움 버들개지처럼 분분한데, 10년 발자취는 쑥대처럼 어지러웠구나. 구름은 어두운 빛 머금
어 바위 옆 나무에 깔렸고, 비는 가을 소리 알리며 우물 곁 오동나무 두드리네. 곳곳에 서역의 상인은 무슨 일로
머물렀던가, 흐르는 세월에 귀밑머리 희고 노자는 떨어졌구나." 하였다.
봉정사(鳳停寺) : 마점에 있다. 수연사(隨緣寺) : 수연산에 있다.
구수사(九岫寺) : 구수산에 있다. 이흥사(利興寺) : 불덕산에 있다.
사묘 사직단 : 군의 서쪽에 있다. 문묘 : 향교에 있다. 성황사 : 오산에 있다. 여단 : 군의 북쪽에 있다.
고적 삼계폐현(森溪廢縣) : 군의 동쪽 32리에 있다. 본래 백제의 소비혜현(所非兮縣)이며 소을부(所乙夫)라고도
불렀었는데, 신라가 지금 이름으로 고쳐서 갑성군의 영현으로 하였고 고려 때에 와서 영광에 내속되었다.
신증 지금 임금 19년에 사창(社倉)을 창설하였다. 관찰사 이사균(李思鈞)이 군에 마점고개가 있어서 동서로
막히고 돌 길이 험준하여 현민이 미곡을 내고 들이기에 고생하므로 사유를 갖추어 신청해서 설치 하였다.
임치폐현(臨淄廢縣) : 군의 서쪽 26리에 있다. 본래 백제의 고록지현(古祿只縣)이었는데, 신라에서 염해(鹽海)
로 개명하여 압해군(壓海郡)의 영현으로 하였고, 고려에서 지금 이름으로 고쳐서 고창에 예속시켰다.
육창향(陸昌鄕) : 군의 남쪽 25리에 있다. 본래 백제의 아로현(阿老縣)이며, 갈초(葛草)ㆍ가위(加位)라고도
불렀었는데, 신라에서 갈도(碣島)라고 개명하여 압해군의 영현으로 하였고, 고려에서 지금 이름으로 고쳐서
내속시켰다.
진개부곡(陳介部曲) : 군의 북쪽 22리에 있다. 녹사부곡(綠沙部曲) : 지금의 녹사역이다.
홍농부곡(弘農部曲) : 군의 북쪽 41리에 있다. 망운부곡(望雲部曲) : 군의 남쪽 1백 5리에 있다.
대안향(大安鄕) : 군의 동쪽 25리에 있다. 공아부곡(貢牙部曲) : 군의 남쪽 29리에 있다. 조지부곡(造紙部曲).
명환고려 김수(金須) : 수령으로서 장군 고여림(高汝霖)을 따라 삼별초(三別抄)를 토벌하였는데, 먼저 상륙하여
전사하여 돌아오지 못했다. 김진(金縝) : 수령이 되어서 정치를 가장 잘 하였으므로 들어가서 우보궐(右補闕)이
되었다.
인물고려 김심언(金審言) : 처음에는 상시(常侍) 최섬(崔暹)을 따라서 배웠는데, 최섬이 앉아서 졸다가 김심언의
머리 위에 불기운이 있어서 하늘에 붙은 꿈을 꾸고 마음으로 기이하게 여겨 딸을 주어 심언의 아내로 삼았다.
성종 때에 과연 과거에 급제하여 벼슬이 내사시랑평장사에 이르렀으며, 시호는 문안(文安)이다.
전공지(田拱之) : 성종 때에 급제하여 벼슬이 중추원 부사 이부시랑에 이르렀다.
김극검(金克儉) : 숙종 때에 할아버지 때문에 음진(蔭進 조상의 공덕으로 과거 보지 않고 벼슬하는 것)하여 인종
때에 벼슬이 사공태자소사(司空太子少師)에 이르렀다.
본조 유두명(柳斗明) : 벼슬이 대언(代言)에 이르렀다. 유규(柳規) : 두명(斗明)의 아들인데, 관리로서의 뛰어난
재간이 있었다. 여러번 이름난 고을을 맡아 가는 곳마다 명성과 공적이 있었다. 성품이 방정하고 엄격해서,
아들 자환(子煥)이 귀하게 되어서도 오히려 종아리를 때렸다. 벼슬은 중추부지사에 이르렀고, 시호는 정숙
(貞肅)이다. 유자환 : 규의 아들인데, 과거에 급제하였다. 정난공신(靖難功臣)으로서 오성군(筽城君)에 봉하고,
시호는 문양(文襄)이다.
정극인(丁克仁) : 태인우거(泰仁寓居) 아래에 상세히 나온다.
제영 현산(峴山) 위에 예전 모습대로의 타루비(墮淚碑) : 박춘령(朴椿齡)이 김유(金儒) 태수를 추억하는 시에,
"유하혜(柳下惠)는 벼슬이 낮아도 마다하지 않았고,주D-002소잡는 칼을 누가 닭 베는 데 썼던가.주D-03감당
(甘棠)은 바로 사람을 생각하는 나무요,주D-04현산에는 예전 모습대로의 타루비일세.주D-05 부로는 남긴
교화를 말하고, 아동은 부질없이 전날에 써둔 시를 외네. 도척(盜跖)은 오래 살고, 안회(顔回)는 일찍 죽었으니,
천리는 아득하여 알 수 없구나." 하였다.
먼 절의 풍경소리 한밤에 들려오다 : 박원형(朴元亨)의 시에, "남방에 부절을 갖고 순찰하기 괴로운데,
어찌 젊은 때와 같은 즐거운 놀이일까. 등왕각(藤王閣)의 강호는 천년 뒤에도 그대로 있고, 진회(秦淮)의 연월
(煙月)이 술잔 앞에 있구나. 작은 추녀의 낙수를 빈 섬돌에서 듣고, 먼 절의 풍경소리 한밤에 들려오네.
원습(原隰)은 지금도 예와 같은데, 황화(皇華)의 재주 없어 부끄럽구나." 하였다.
나무가 늙어 푸르른데 햇수를 모르겠네 : 윤자운(尹子雲)의 시에, "산성은 멀리 바닷가에 뻗쳤고, 늙은 나무
푸르른데 햇수를 모르겠네. 열이랑 뽕과 삼은 포구에 잇닿았고, 하늘에 가득한 풍월은 헌함 앞에 있구나.
비는 나그네 꿈에 곁들여 한밤에 듣고, 기러기는 집소식 가지고 만리 길에 전하네. 한나절 틈을 타니 좋은 일이
많은데, 더구나 어진 주인 만나니 반갑기도 하여라." 하였다.
산천이 푸르러 술잔 앞에 있다 : 성임(成任) 시에, "바다 하늘 봄빛이 읊조리는 곁에 가득하니, 시흥은 오히려
젊을 때 보다 더하네. 세월이 흘러 나그네 마음을 흔드는데, 산천은 푸르러 잔 앞에 있네." 하였다.
구름이 산 그림자에 얽혀서 주렴 앞에 떨어지다 : 안초(安迢)의 시에, "오성(筽城)은 바닷가에 치우쳐 있으니,
민생이 태평하기 그 몇 해이던가. 바람은 대숲 소리를 띠고 베갯머리에 불어오고, 구름은 산 그림자를 싸서
주렴 앞에 떨어지네." 하였다.
신증 인가는 물에 가까운 마을이네 : 김시습(金時習)의 시에, "바다를 곁하여 성곽을 열었으니, 인가는 물에
가까운 마을이네. 숲은 쓸쓸한 절 길을 덮었고, 꽃은 동헌 문에 짙었네. 보리 물결은 바람 앞에 부드럽고,
시냇물은 비 온 뒤에 흐리구나. 호남에 봄이 드니, 멀리 노는 나그네 마음 괴롭히네." 하였다.
[비고]
연혁 인조 7년 현으로 강등시켰다 : 이 고을 사람 이극규(李克揆)의 역모로 인한 옥사 때문이다. 16년에 다시
승격시켰다. 영종(英宗) 31년에 현으로 강등시키고 : 이 고을 사람 이주(李澍)가 역모로 주벌되었기 때문이다.
40년에 다시 승격시켰다. 고종 32년에 군으로 고쳤다. 《문헌비고》
방면 동부(東部)ㆍ서부(西部) : 모두 끝이 10리이다. 불갑(佛岬) : 동남쪽으로 처음은 15리, 끝이 30리.
마산(亇山) : 남쪽은 처음은 15리, 끝이 25리. 영마(令亇) : 서쪽으로 처음은 15리, 끝이 25.
대안(大安) : 본래는 대안향(大安鄕)이다. 동쪽으로 처음은 25리, 끝이 30리.
봉산(奉山) : 서쪽으로 처음은 15리, 끝이 35리. 황량(黃良) : 동남쪽으로 처음은 15리, 끝이 35리.
외간(外間) : 남쪽으로 처음은 10리, 끝이 15리. 원산(元山) : 서남쪽으로 처음은 20리, 끝이 30리.
구수(九水) : 서쪽으로 처음은 15리, 끝이 25리. 마촌(馬村) : 북쪽으로 처음은 10리, 끝이 20리.
홍농(弘農) : 서북쪽으로 처음은 30리, 끝은 40리. 본래는 홍농 부곡(部曲)이다.
염소(鹽所) : 서남쪽으로 처음은 40리, 끝이 45리. 남죽(南竹) : 서쪽으로 끝이 10리.
관산(館山) : 서쪽으로 처음은 10리, 끝이 15리. 도내(道內) : 북쪽으로 처음은 5리, 끝이 15리.
묘장(畝長) : 동쪽으로 처음은 10리, 끝이 15리.
○ 생곡(生谷)ㆍ여러 섬[諸島] : 서쪽 바다 가운데 있으며 섬은 모두 21개이다.
망운(望雲) : 본래는 망운부곡이다. 함평 : 서남쪽 경계 너머 바다가 있다. 남쪽으로 처음은 80리 끝이 1백 20리.
현내(縣內) : 동쪽으로 처음은 30리, 끝이 35리. 삼남(森南) : 동쪽으로 처음은 35리, 끝이 50리.
삼북(森北) : 동쪽으로 처음이 35리, 끝이 40리. 내동(內東) : 위와 같다.
외동(外東) : 동쪽으로 처음이 35리, 끝이 50리. 내서(內西) : 동쪽으로 처음은 20리, 끝이 30리.
외서(外西) : 위와 같다. 위의 7면은 삼계고현(森溪古縣)이다.
육창(陸昌) : 남쪽으로 처음은 20리, 끝이 40리.
○ 진량(陳良) : 서북쪽으로 30리에 있다. 정종 을유년에 법성포(法聖浦)에 나누어 소속시키고 독립된 진(鎭)
을 두었다.
○ 진개부곡(陳介部曲)은 북쪽으로 22리에 있으며, 조지부곡(造紙部曲)과 공아부곡(貢牙部曲)은 남쪽으로 29
리에 있다.
성지 삼계고현성(森溪古縣城) : 남쪽으로 30리에 있으며 산 위에 흙으로 쌓은 유적이 있으며 고성산(高城山)
이라 칭한다.
진보 임자도진(荏子島鎭) : 서쪽에 있다. 육로로는 1백 10리이며 수로로는 30리이다.
○ 수군동첨절제사 겸 감목관 1명이 있다.
창고 읍창(邑倉) 셋. 사창(社倉) : 삼계고현(森溪古縣)에 있다. 서창(西倉) : 서쪽 20리에 있다.
해창(海倉) : 위와 같다.
목장 다경곶장(多慶串場) : 망운장(望雲場)이라고도 한다. 나주목(羅州牧) 소관이다.
교량 학교(鶴橋) : 읍의 북쪽에 있다. 도편교(道鞭橋) : 북쪽 15리에 있다.
판하교(板下橋) : 북쪽 20리에 있다. 호교(蒿橋) : 서쪽 15리에 있다.
토산 김ㆍ우무가사리ㆍ감태(甘苔).
누정 운금루(雲錦樓)ㆍ진남루(鎭南樓)ㆍ공북루(拱北樓)ㆍ빈양루(賓暘樓).
법성포진 法聖浦鎭
연혁 본조 중종 9년에 진을 설치하고 수군만호를 두었다. 숙종 34년에 첨사(僉使)로 승격시키고 정종 13년에
본군의 진량면(陳良面)을 분할하여 독립된 진을 두었다.
관원 수군첨절제사 : 감목관과 조강령 운차사원(漕舡領運差使員)을 겸한다. 1명이다.
성지 진성(鎭城) : 중종 9년에 쌓았는데 둘레가 1천 6백 88척이며 우물이 둘이다.
○ 동조루(董漕樓)가 있다.
창고 법성창(法聖倉) : 중종 7년에 나주 영산창(榮山倉)을 이 곳으로 옮겼으며, 영광ㆍ광주ㆍ담양ㆍ순창(淳昌)ㆍ
옥과(玉果)ㆍ고창ㆍ화순ㆍ동복(同福)ㆍ곡성ㆍ정읍ㆍ창평(昌平)ㆍ장성 등
12읍과 법성(法聖) 한진의 전세(田稅)와 대동미를 수집하여 서울로 운송한다.
○법성첨사가 계량을 감독한다. 진창(鎭倉)ㆍ환상고(還上庫)ㆍ조복고(漕復庫) : 모두 진 안에 있다.
교량 도편교(道鞭橋) : 동쪽으로 15리인데 영광군의 경계다.
전고 본조 선조 30년 9월에 왜구에 함락되었다.
[주 D-001] 하청송(河淸頌) : 황하(黃河)가 늘 혼탁한데 상서로운 일이 있으려면 천 년에 한번 맑아진다는데
이를 칭송한 글, 중국사람 포조(鮑照)가 하청송을 지은 일이 있다.
[주 D-002] "유하혜(柳下惠)는 벼슬이 낮아도 마다하지 않았고, : 중국 춘추 시대 노(魯) 나라의 전금(展禽)은
낮은 벼슬도 사양하지 않았다.
[주 D-03] 소잡는 칼을 누가 닭 베는 데 썼던가. : 언언(言偃)이 무성(武城)의 원으로 있을 때 예악으로
다스리니, 공자가 비유한 말이다.
[주 D-04] 감당(甘棠)은 바로 사람을 생각하는 나무요, : 소백(召伯)이 머물고 쉬고 가르치던 곳이니,
감당나무를 베지 말라는 말이 《시경》에 있다.
[주 D-05] 현산에는 예전 모습대로의 타루비일세. : 진의 양호(羊祜)가 오(吳) 나라와 싸울 때,
덕을 닦기에 힘써서 오 나라 사람들을 회유했다. 양양(襄陽)에 있을 때, 늘 현산(峴山)에 올라갔기 때문에
죽은 뒤에 사람들이 그곳에 비석을 세웠는데 보는 사람마다 그 덕을 생각하여 눈물을 흘렸으므로,
타루비(墮淚碑)라 이름 지었다.
함평현 咸平縣
동쪽은 나주(羅州) 경계까지 32리, 서쪽은 바닷가까지 41리, 남쪽은 무안현(務安縣) 경계까지 4리,
북쪽은 영광군 경계까지 35리이고, 서울에서 7백 62리 떨어져 있다.
건치연혁 함풍현(咸豐縣)은 본래는 백제현 굴내현(屈乃縣)이었는데, 신라가 함풍이라고 고쳐서 무안군의 영현
으로 하였고, 고려는 영광군에 붙였고 명종(明宗) 2년에 감무(監務)를 두었고,
공양왕 3년에 영풍(永豐)ㆍ다경(多景)ㆍ해제(海際)의 권농방어사(勸農防禦使)를 겸임하였다. 모평현(牟平縣)
은 본래 백제의 다지현(多只縣)이었는데, 신라가 다기(多岐)라고 고쳐서 무안군의 영현으로 하였고, 고려가
모평이라고 고쳐서 영광군에 붙였는데, 본조 태종 9년에 두 현을 합쳐서 지금 이름으로 고쳤다.
관원 현감(縣監)ㆍ훈도(訓導) : 각 1명씩.
군명 굴내ㆍ다기ㆍ함풍ㆍ모양(牟陽)ㆍ모평ㆍ기성(箕城).
성씨함풍 : 임(任)ㆍ노(魯)ㆍ이(李)ㆍ문(文)ㆍ공(孔)ㆍ정(鄭), 강(姜) : 속(續). 모평 : 오(吳)ㆍ정(鄭)ㆍ갈(碣)ㆍ
모(牟), 김(金) : 속(續). 해제 노(魯)ㆍ이(李)ㆍ반(潘)ㆍ양(楊)ㆍ신(辛), 임(任)ㆍ최(崔) :
모두 다른 곳에서 왔다.
영풍 : 유(兪)ㆍ정(程)ㆍ이(李)ㆍ박(朴)ㆍ정(鄭). 다경(多慶) : 유(兪)ㆍ윤(尹).
형승 바다를 뒤에 두고 토지가 넉넉하다. 산세가 잇달았고, 넓은 들이 뻗어 있다 : 모두 정인지(鄭麟趾)의 기문
에 있다.
산천 군니산(君尼山) : 현의 북쪽 30리에 있는 진산이다. 옹산(瓮山) : 현의 서쪽 41리에 있다.
무악산(毋岳山) : 현의 북쪽 30리에 있다. 기산(箕山) : 현의 북쪽 5리에 있다.
바다 : 현의 서쪽에 있다. 정포(鼎浦) : 현의 서쪽 20리에 있다. 굴내포(屈乃浦) : 현의 서쪽 15리에 있다.
저도(楮島) : 황저(荒楮)ㆍ독저(禿楮) 두 섬이 있다. 두지도(豆知島)ㆍ
율도(栗島)ㆍ맥도(麥島) : 모두 해제현에 있다. 신지(新池) : 현의 동쪽 40리에 있다.
신증 대교천(大橋川) : 현의 동쪽 2리에 있다. 저천(猪川) : 현의 동쪽 30리에 있다.
토산 모시ㆍ닥나무ㆍ왕골ㆍ대나무ㆍ대화살 : 현의 북쪽에 있는 기산성(箕山城) 밑에서 난다. 무쇠 : 현의 서쪽
에 있는 해제리(海際里)의 양반교(兩班橋) 바닷가에서 난다.
쇠 : 현의 서쪽에 있는 사내포(沙乃浦)와 옹암포(甕巖浦)에서 난다. 자기(磁器)ㆍ석류ㆍ감ㆍ비자(榧子) : 현의
북쪽에 있는 가을고지리(加乙古之里)에서 난다.
황각(黃角)ㆍ차ㆍ감태(甘苔)ㆍ조기ㆍ백새우ㆍ민어ㆍ밴댕이ㆍ숭어ㆍ낙지ㆍ굴조개ㆍ소합(小蛤)ㆍ준치ㆍ
오징어.
성곽 기산성(箕山城) : 돌로 쌓았는데, 둘레가 1천 8백 57척, 높이가 9척이고, 안에 여섯 군데의 샘물과 한 군데
의 못이 있고, 군창이 있다.
관방 임치진(臨淄鎭) : 현의 서쪽 77리에 있으며, 영광군의 임치도와 마주보고 있는데, 우도 수군첨절제사의
영아(營衙)가 있다. 관할하는 곳은 검모포(黔毛浦)ㆍ법성포ㆍ다경포(多慶浦)ㆍ목포(木浦)ㆍ어란포(於蘭浦)ㆍ
군산포(群山浦)ㆍ남도포(南桃浦)ㆍ금갑도(金甲島)이다.
○ 수군첨절제사 1명이 있다.
봉수 옹산 봉수 : 남쪽으로 무안현 고림산(高林山)에 응하고, 서쪽으로 해제현에 응한다.
해제 봉수 : 현의 서쪽 68리에 있는데, 북쪽으로 영광군 차음산에 응한다.
누정 관정루(觀政樓) : 정인지(鄭麟趾)의 기문에, "누관을 짓는 것이 정치하는 데에 무슨 관계가 있으랴마는
국가가 다스려지고 문란한 자취나 고을이 창성하고 쇠퇴한 유래를 여기에서 엿볼 수 있다.
예전에 선양공(單襄公)이 진(陳) 나라를 지나다가 숙박할 곳이 없자 진이 앞으로 망할 것을 알았고, 공자가
포(蒲)에 들어가서 담과 집이 견고한 것을 보고 중유(仲由 자로(子路))의 선정을 알았다. 대체로 조정이 도리를
잃으면 정치와 법령이 가혹하고 아전이 용렬하고 백성이 원망하고 고을이 쇠락하고 피폐하게 되니, 어찌 누관
이 설치되기를 바라겠는가. 반드시 조정이 맑고 밝아서 정사가 닦여진 뒤에야 수령의 자리에 인재를 얻어 백성
이 편안하고 재물이 풍부해져서 여러 가지 피폐한 것이 모두 부흥하여 주군이 창성하고 정치가 날로 융성해지
는 것이다.
우리 국가는 밝은 임금과 어진 신하가 서로 만나서 안팎이 태평한 지 50년이 넘었다. 여러 고을의 수령은 모두
그 선발하여 임명함을 잘하였다. 더욱 함평은 바다 곁에 있고 토지가 비옥하다. 바다 곁에 있으므로 경비가
해이하지 않고, 토지가 비옥하므로 백성이 많으니, 반드시 문무를 겸비한 인재라야 비로소 수령이 될 수 있는
데, 오늘날에 있어서는 김계보(金季甫)가 바로 그 사람이다. 부임한 지 1년만에 아전에게 위엄이 행해지고 백성
에게 은혜가 더해지고 칠사(七事)주D-001는 여러 고을 중에 으뜸이어서 일을 처결하고 사람에게 응접하는 것
이 넉넉하고 여유가 있었다. 이윽고 마음속으로 생각하기를, '누각과 연못은 다만 놀고 구경하는 것일 뿐 아니
라 번거로운 걱정을 씻고 성정을 즐겁게 하여, 침울함을 물리치고 시원함을 맞아들일 수 있는 것인데,
이 고을에는 그것이 없으니, 어찌 사명(使命)을 존경하여 접대하는 데에 하나의 결함이 되지 않으랴.' 하고, 곧
일이 없는 중들을 모아 재목을 벌채하고 기와를 굽고 객사 동쪽에 터를 잡아 계해년 정월에 일을 시작하여 몇
달이 지나서 낙성했다.
갑자년 여름에 단청하였는데, 사치하지도 누추하지도 않았으며, 재물은 관가에서 나오지 않았고 역사는 백성
에게 미치지 않았는데, 발돋움한 듯이 높이 솟고, 새가 나는 듯이 펴졌으니, 고을 사람들이 보고 놀라며 신기하
다고 하였다. 또 그 곁에 못을 파고 연을 심었는데 넓이가 두어 묘(畝)나 되니, 또한 한 누각의 좋은 경치이다.
아아, 김군이 정치할 줄 아는 사람이로다.
내가 상상하건대, 함평의 고을됨이 산세는 길게 잇달아 북에서 왔는데 소나무와 대나무가 울창하고, 넓은 들
이 멀리 뻗어 남쪽이 틔었고 내의 흐름이 물을 대기에 적당하고 멀리 바라보면 잇달은 봉우리와 겹친 산이
구름 연기 자욱한 안개 사이에 감추었다가 비치고 나왔다가 들어가고 하여, 가을달과 봄바람에 기상이 천만
가지로 다르다. 예전에는 사람은 사람대로 경치는 경치대로 있었는데 지금은 모두 헌함과 기둥, 책상 앞에 다
모였다. 이 누각에 오르는 사람이면 누구든 그 쇄락한 정신과 넓직한 도량과 활달한 기상과 한가로운 흥취를,
굽어보고 우러러 보는 사이에서 얻지 않겠는가. 밭 갈고 짐승 치고 고기 잡고 나무하는 사람들이 노래 부르고
서로 이야기 하며 허리 구부리고, 끊임없이 오고 가고, 새들이 날아 다니고, 소 말이 흩어져 있는 것에 이르러
서는 또한 일시의 즐거운 구경이다.
지금 지간원(知諫院) 모(牟)군이 내게 말하기를, '함평은 내 고향이요, 당신도 일찍이 구경하였는데,
기문과 시가 없을 수 없으니, 부디 나를 위해 지어 주십시오.' 하며, 아울러 이름을 붙여 주기를 청하니,
내가 사양해도 안 되어 관정이란 두 글자로 편액하노라." 하였다.
○ 성임의 시에, "등림(登臨)이 반드시 놀고 구경하길 즐김이 아니요, 가는 말을 잠깐 쉬어 한가함을 빌리는
것일세. 긴 길은 북으로 가리역(嘉里驛)에 통하고, 뜬구름은 동으로 금성산(錦城山)에 잇닿았네.
남풍에 베개와 대자리는 속세를 벗어난 듯, 긴 여름날에 누각이 푸른 나무 사이에 있네.
석류꽃의 붉음이 한창이어서, 나그네길에 그런대로 다시 한바탕 웃음일세 ." 하였다.
역락정(亦樂亭) : 현의 동쪽 2리에 있는데, 현감 이계의(李繼義)가 세웠다.
신증 희우루(喜雨樓) : 객헌(客軒) 동쪽에 있다.
학교 향교 : 현의 서쪽 2리에 있다.
역원 가리역(嘉里驛) : 현의 북쪽 22리에 있다. 사기원(四岐院) : 현의 동쪽 50리에 있다.
옹산원(瓮山院) : 현의 서쪽 30리에 있다. 유현원(杻峴院) : 현의 북쪽 35리에 있다.
신증교량 대교(大橋) : 현의 동쪽 2리에 있다.
불우 : 고산사(高山寺)ㆍ월량사(月良寺)ㆍ용천사(龍泉寺) : 모두 모악산 서쪽에 있다.
서상사(瑞祥寺) : 군니산에 있다. 죽림사(竹林寺): 모악산에 있다.
사묘 사직단 : 현의 서쪽에 있다. 문묘 : 향교에 있다. 성황사 : 현 북쪽에 5리에 있다. 여단 : 현 북쪽에 있다.
고적 금성산성(金城山城) : 현의 북쪽 15리에 있다. 돌로 쌓았는데, 둘레가 1천 3백 척, 높이가 5척이고, 안에
작은 시내가 있는데, 지금은 반쯤 무너졌다.
해제폐현(海際廢縣) : 현의 서쪽 70리에 있다. 본래는 백제의 도제현(道際縣)이고, 음해(陰海), 혹은 대봉
(大峯)이라고도 하였는데, 신라에서 지금 이름으로 고쳐서 무안군의 영현으로 하였고,
고려 때는 영광군에 붙였고, 본조 태조 원년에는 함평에 내속시켰다. 고모평(古牟平) : 현의 동쪽 30리에
있다.
다경부곡(多慶部曲) : 현의 서쪽 20리에 있는데, 영광군 경계이다. 영풍향(永豐鄕) : 현의 서쪽 10리에 있다.
○ 다경과 영풍은 예전에 나주에 붙었었는데, 본조 태조 원년에 가까우므로 내속되었다.
해제목책(海際木柵) : 둘레가 1천 4백 7척인데, 지금은 없어졌다.
명환본조 이계번(李係蕃) : 현감이 되어, 청렴하여 욕심이 없고 백성을 자식처럼 사랑하였다.
인물본조 이긍(李兢) : 과거에 급제하고 벼슬은 이조 참판에 이르렀다.
열녀본조 박씨(朴氏) : 학생 서중원(徐中元)의 아내인데, 지아비가 범에게 잡혀 가게 되자 범을 때려 쫓고
지아비를 구했으나 역시 범에게 다쳐서 곧 죽었다. 이 일이 임금께 알려져서 정려하였다.
신증 장씨(張氏) : 학생 유경종(兪敬宗)의 아내인데, 지아비가 죽자 빈소에 있으면서 날마다 세 번씩 상식을
베풀었고, 복을 벗고 나서도 오히려 조석을 드리기를 그치지 않았으며 시부모를 모시기에도 또한 정성을 다
하였다. 일이 임금께 알려져서 정려하였다. 박씨(朴氏) : 학생 서윤중(徐允仲)의 아내인데, 지아비가 죽자 상중
의 예를 극진히 하였고, 복을 마치게 되어서도 오히려 상복을 벗지 않았다. 어머니가 정절을 지키려는 뜻을
빼앗으려 하니, 머리를 자르고 중이 되었고, 어머니가 죽자, 도로 머리를 길렀는데, 나이가 벌써 68세였다.
이 일이 임금께 알려져서 정려하였다.
제영 성 곁의 인가는 수풀에 반쯤 가려져 있다 : 조계생(趙啓生)의 시에, "샘 맑고 대나무 길고 바다와 산은
깊은데, 성 곁의 인가는 숲에 반쯤 가렸네." 하였다.
어지러운 봉우리 푸른 곳에 바다 구름이 깊다 : 김뉴(金紐)의 시에, "어지러운 봉우리 푸른 곳에 바다 구름이
짙고, 가을 빛 멀리 푸르러 저녁 숲에 붙었네." 하였다.
[비고]
연혁 고종 32년에 군(郡)으로 고쳤다. 《문헌비고》
방면 동현내(東縣內)ㆍ서현내(西縣內) : 모두 끝은 10리이다.
평릉(平陵) : 동쪽으로 처음은 10리, 끝은 30리이다. 식화(食和) : 동쪽으로 처음은 20리, 끝은 30리이다.
갈동(葛洞) : 동쪽으로 처음은 30리, 끝은 40리이다. 월악(月岳) : 동쪽으로 처음은 40리, 끝은 50리이다.
대야동(大野洞) : 위와 같다.
○ 위의 7면(面)은 평야(平野)이다. 해보(海保) : 북쪽으로 처음은 30리, 끝은 40리이다.
대동(大洞) : 북쪽으로 처음은 5리, 끝은 50리이다. 신광(神光) : 북쪽으로 처음은 15리, 끝은 30리이다.
손불(孫佛) : 북쪽으로 처음은 20리, 끝은 40리이다.
영풍(永豐) : 본래 영풍향(永豐鄕)인데 서북쪽으로 처음은 10리, 끝은 20리이다.
다경(多慶) : 본래 다경부곡(多景部曲)인데 서남쪽으로 처음은 30리, 끝은 50리이다. 무안 서쪽 경계에 있는데
바다에 연하여 있으며 위 두 곳은 옛날에 나주에 속해 있었다. 본조 태조 원년에 내속시켰다.
해제(海際) : 서쪽으로 처음은 50리, 끝은 80리이다. 둘레는 꼬불꼬불하며 바다에 연해 있다.
창고 창고가 셋 : 읍내에 있다. 사창(社倉) : 해보면(海保面)에 있다. 임치창(臨淄倉) : 해제면(海際面)에 있다.
해창(海滄)ㆍ세양창(稅兩倉) : 모두 손불면(孫佛面)에 있다. 수군기고(水軍器庫) : 해제면(海際面)에 있다.
목장 진하산장(珍下山場) : 둘레는 45리이고 영광(靈光) 임자도장(荏子島場)에 속하여 있다.
교량 대교(大橋) : 동쪽으로 2리에 있다. 장성교(長城橋) : 신광면(神光面)에 있으며 현과의 거리가 25리이다.
저전교(猪田橋) : 식지면(食知面)에 있으며 현과의 거리는 30리이다.
작천교(鵲川橋) : 월악면(月岳面)에 있으며 현과의 거리는 40리이다. 양반교(兩班橋) : 해제면(海際面)에 있다.
[주 D-001] 칠사(七事) : 지방 수령의 행정요강인데, ㄱ) 농상(農桑)은 이룩하고, ㄴ) 호구는 늘리고,
ㄷ) 학교는 일으키고, ㄹ) 군정은 닦고, ㅁ) 부역은 고르게 하고, ㅂ) 소송은 적게 하고, ㅅ) 간활(奸猾)은 그치게
하라는 등이다.
고창현 高敞縣
동쪽은 장성현(長城縣) 경계까지 10리, 흥덕현 경계까지 17리, 북쪽은 같은 현 경계까지 7리,
남쪽은 무장현 경계까지 19리, 서쪽은 같은 현 경계까지 22리이고, 서울에서 6백 28리 떨어져 있다.
건치연혁 본래는 백제의 모량부리현(毛良夫里縣)이었는데, 신라가 지금 이름으로 고쳐서 무령군(武靈郡)의
영현으로 하였고, 고려에서는 고부군(古阜郡)에 붙였다가 뒤에 상질감무(尙質監務)가 와서 겸임하도록 하였고,
본조 태종 원년에 두 현에 각각 감무를 두었다가, 뒤에 준례에 따라 현감으로 고쳤다.
관원 현감ㆍ훈도 : 각 1명씩.
군명 모량부리ㆍ모양(牟陽).
성씨본현 오(吳)ㆍ윤(尹)ㆍ송(宋)ㆍ김(金)ㆍ박(朴) : 대량평(大良坪)과 같다. 방(方) : 비인(庇仁)에서 왔다.
이(李) : 한산(韓山)에서 왔다. 조(趙) : 용안(龍安)에서 왔다. 양(梁) : 양산(梁山)에서 왔다.
도성(陶成) 최(崔) : 덕암(德巖)과 같다.
산천 반등산(半登山) : 현의 동쪽 5리에 있는 진산이다. 신라 말기에 도적이 크게 일어나 이 산에 웅거하여 양가
의 자녀가 많이 잡혀갔다. 장일현(長日縣)의 아낙이 그 가운데 있었는데 노래를 지어, 그 지아비가 곧 와서 구해
주지 않는 것을 풍자하였다. 곡명을 방등산(方等山)이라고 일컫는데, 방등이라는 말이 바뀌어 반등이 되었다.
장일현은 곧 장성(長城)인 듯하다. 구왕산(九王山) : 현의 남쪽 25리에 있다. 취령산(鷲嶺山) : 현의 남쪽 13리에
있는데 우리산(牛利山)이라고도 일컫는다. 화시산(火矢山) : 현의 서쪽 15리에 있다. 송현(松峴) : 현의 동쪽 10
리에 있는데 장성현 경계이다. 용혈(龍穴) : 반등ㆍ취령ㆍ구왕ㆍ화시 등 네 산 사이에 성이 높이 솟아 있는데
사면이 험하다. 예전 성을 쌓을 때에 용이 솟아나온 일이 있어서 그 구멍이 아직도 있고, 성 아래에 반룡원
(盤龍院)이 있다.
죽천(竹川) : 현의 서쪽 15리에 있는데 근원은 취령산에서 나온다.
서교천(黍橋川) : 현의 남쪽 25리에 있는데, 근원은 구왕산에서 나와서 저촌(猪村)에 이르러 죽천과 합하여
서쪽으로 흘러서 흥덕현 장소포(長所浦)로 들어간다. 기지(機池) : 현의 북쪽 5리에 있다.
토산 감ㆍ벌꿀ㆍ대나무ㆍ은어ㆍ석류ㆍ자기ㆍ차.
성곽 읍성 : 돌로 쌓았는데 둘레가 3천 80척, 높이가 12척이고, 안에 두 연못과 네 샘물이 있다.
누정 빈풍루(豳風樓) : 객관 북쪽에 있었는데 지금은 없어졌다.
○ 정이오(鄭以吾)의 기문에, "고창은 본래 시내와 산의 좋은 경치가 있다고 일컬어 왔으며, 토지 또한 기름지고
넓어서 오곡이 잘된다. 지난 무술년 여름에 이후(李侯)가 와서 현감이 되자 이듬해에는 풍년이 들고 사람들이
화목하고 정사는 맑고 송사는 적어졌다. 그 관청이 좁고 누추하여 사신(使臣)이 오면 침울함을 풀지 못하고
상쾌함을 얻지 못하는 것을 걱정하여, 이에 바로 옛 정자가 있던 것을 철거하고, 시내에 임하여 누각 몇 칸을
세우고 단청을 하는 등, 몇 달을 거쳐 낙성하니, 바라보매 새가 날개를 편 듯하다.
동ㆍ남ㆍ북의 여러 산이 안개 구름 사이에 층층으로 보이고 첩첩으로 나와 모두 책상 앞에 있고, 왼편엔 연못
을 끼고 있어 연꽃 향기와 대의 푸르름이 바람이 불면 풍겨오고, 비가 오면 씻기어 곱디곱고, 펀펀한 밭과 넓
은 들에는 많은 벼가 가득하다. 봄에 농사 지을 제 일제히 나오고 가을에 익어서는 함께 거둔다.
이후가 서신으로써 기문 짓기를 요구하고 이름 짓기를 청한다. 내가 이후의 글을 읽고 글 속에서 이 누각의
경관을 유람하고는 이 누각의 경치 좋음을 알았으니, 한 번 이후와 함께 그 위에서 멀리 바라보며 술잔을 들고
서로 권하면서 여러 사람들의 시를 읊었으면 하지만, 돌이켜보니 천리에 서로 바라보기만 하고 까마득하여
또한 머리를 들고 탄식함을 금할 수 없다. 또한 누각의 경치는 여러가지겠지만, 이 누각에서의 즐거움이란
농사에 있는 것이니, 감히 청하노니 빈풍(豳風)으로써 이름 짓는 것이 어떻겠는가.
대체로 빈(豳)은 하(夏)의 열국이요, 농사는 천하의 큰 근본으로서 백성의 생명에 관계된다.
그러므로 주(周)의 선공(先公)들이 농사의 힘드는 것을 알고서 심고 매는 것을 가르쳤다. 성왕(成王)이 즉위
하기에 이르러서는 주공(周公)이 후직(后稷)ㆍ공유(公劉)의 교화를 진술해서 성왕을 경계하였는데 이를 일컬
어 빈풍이라 한다. 7월장의 시를 보면 그 마음은 한 생각도 농사에 있지 않음이 없고, 한 해 동안에 하루도
농사에 전력하지 않음이 없고, 한 집안에 한 사람도 농사에 힘쓰지 않는 이가 없다.
농부와 베짜는 아낙이 농상(農桑)에 수고하는 모양을 모두 들어 말하지 않음이 없었으니, 당시 백성의 가렵고
아픈 데를 주공이 또한 어찌 체득하지 않은 것이 있겠는가.
지금 우리 임금과 재상의 마음이 오로지 성왕과 주공을 본받아 백성으로 하여금 근본에 힘쓸 바를 알아서 농사
에 전력하게 하여 태평한 정치를 터잡고, 더욱 수령의 선발을 중요시하여 권농하는 직책을 맡게 하였으니,
이 누각에 오르는 사람이 그 또한 어찌 소홀히 할 수 있겠는가. 대개 때 맞추어 거두어 들이며 나누어 주어서
부족함을 보조하고, 오는 사람을 위로하고, 서로 권해서 농사에 부지런하게 하는 것은 윗사람에게서 나오는
것이요, 화경수운(火耕水耘)주D-001하고 몸을 적시고 발에 흙칠하고 수고롭게 힘을 다하여 풍작이 되게 하
는 것은 실로 농부의 힘인 것이다. 만약 농사 때를 빼앗고도 그 바치는 것을 받으면서 이르기를, '내가 백성을
해롭게 하지 않는다. 법이 그러하니라.' 한다면, 어찌 빈풍에 충후한 것이겠는가. 이후의 이름은 종문(種文)
인데, 민사에 부지런하여 가는 곳마다 명성과 업적이 드러났다. 나는 이미 가서 구경하고 시내와 산의 좋음을
둘러보고도 그 풍경의 아름다움을 그려내지를 못하고, 다만 그 곡식이 많이 난다는 말만을 취해서 그 이름을
지을 뿐이다. 아아, 백성과 같이 걱정하고 백성과 같이 즐기는 자가 아니면 이런 말을 할 수 없을 것이다.″
하였다.
학교 향교 : 현의 남쪽 4리에 있다.
원우 반룡원(盤龍院) : 현의 서쪽 2리에 있다. 인계원(仁戒院) : 현의 서쪽 20리에 있는데 태천원(苔川院)이라
고도 부른다.
불우 상원사(上院寺) : 반등산에 있는데, 11층의 청석탑(靑石塔)이 있다.
문수사(文殊寺) : 취령산(鷲嶺山)에 있다. 안덕사(安德寺) : 화시산(火矢山)에 있다.
임공사(臨邛寺) : 반등산(半登山)에 있다.
사묘 사직단 : 현 서쪽에 있다. 문묘 : 향교에 있다. 성황사 : 현 성안에 있다. 여단 : 현 북쪽에 있다.
고적 대량평 부곡(大良坪部曲) : 현 남쪽 15리에 있다. 도성 부곡(陶成部曲) : 현 북쪽 25리에 있다.
덕암소(德巖所) : 현 북쪽 29리에 있다. 암(岩)을 예전에는 밀(密)로 했었다.
명환본조 이최(李漼) : 청렴하고, 정사를 잘한 명성이 있다.
인물고려 오학린(吳學麟) : 진사과에 급제하였고, 벼슬은 한림학사에 이르렀다.
손자 세 사람이 있어 세문(世文)ㆍ세공(世功)ㆍ세재(世才)라 하는데, 모두 문학으로 이름이 알려졌다.
오세재(吳世才) : 어려서부터 학문에 힘써 손수 육경(六經)을 베끼고 외웠다. 시문은 이한림체(李翰林體)를 잘
배웠는데, 소모는 아이나 말 끄는 하인이라도 이름을 모르는 이가 없었다. 그러나 타고난 재주가 너무나 뛰어
나서 법도에 맞지 않으므로 과거에 불합격 되었다. 명종 때에 비로소 급제하였는데 성품이 소탈해서 세상에
받아 들여지지 않았다. 이규보(李奎報)와는 나이를 따지지 않는 벗이 되었다.
죽자 규보가 사사로이 시호(諡號)하여 현정선생(玄靜先生)이라 하였다.
우거본조 김빈길(金贇吉) : 현의 서쪽 7리 남짓한 곳에 묘비가 있다. 낙안군(樂安郡)편에 상세히 나온다.
열녀본조 김씨(金氏) : 이름이 여귀(黎貴)인데 선군(船軍) 주안도(朱安道)의 아내이다. 지아비가 병을 얻자
김씨가 약시중들기를 게을리하지 않았는데, 달을 넘기고서 지아비가 죽었다. 김씨가 임신중인데 시체를 안고
통곡하니, 그 어머니가 말리면서 이르기를, "임신한 몸이 상을 당하여 지나치게 슬퍼하는 것이 옳지 않다."
하고, 그 집으로 데리고 돌아갔는데, 그날 저녁에 김씨가 뽕나무에 올라가서 목매어 죽었으며,
나이는 26살이다. 이 일이 조정에 알려져 정문하였다.
제영 시냇물은 푸른 뱀이 달리는 듯하고 : 이행(李行)의 시에, "시냇물은 푸른 뱀이 달리는듯하고, 봉우리는
푸른 병풍을 비낀 듯하네." 하였다. 산과 물이 둘러 있는 속 : 권진(權軫)의 시에, "산과 물이 둘러있는 속에,
누각이 푸른 숲 가운데 있네. 밤 깊어 시내에 달이 오르고, 앉아 있노라니 못에 가득한 바람일세." 하였다.
[비고]
연혁 고종 32년에 군(郡)으로 고쳤다. 《문헌비고》
방면 천남(川南) : 남쪽으로 끝이 7리이다. 천북(川北) : 북쪽으로 끝이 7리이다.
오동(吾東) : 동쪽으로 처음은 7리, 끝은 10리이다. 오서(吾西) : 서쪽으로 처음은 15리, 끝은 17리이다.
고사(古沙) : 남쪽으로 처음은 3리, 끝은 20리이다. 수곡(水谷) : 서쪽으로 처음은 7리, 끝은 15리이다.
대아(大雅) : 서쪽으로 처음은 7리, 끝은 20리이다. 산내(山內) : 서북쪽으로 처음은 5리, 끝은 30리이다.
도성부곡(陶城部曲)은 북쪽으로 15리이며, 대량평 부곡(大良坪部曲)은 남쪽으로 15리이고,
덕암소(德岩所)는 옛 덕밀(德密)인데 북쪽으로 29리이다.
성지 서산성(西山城) : 화시산(火矢山)의 동쪽에 넓직한 들 한 가운데에 한 봉우리가 유난히 돌출하였는데,
고성봉(古城峯)이라 일컫는다. 성은 흙으로 쌓았으며 봉우리가 옆으로 뻗쳤는데, 둘레는 2리이다.
창고 창오(倉吾) : 읍내(邑內)에 있다. 산이창(山二倉) : 입암 산성(笠岩山城)에 있다. 저치창(儲置倉).
교량 도산천교(道山川橋)ㆍ이진천교(梨津川橋).
토산 게[蟹].
[주 D-001] 화경수운(火耕水耘) : 옛날 농사 짓는 한 가지 방법으로 밭에서 초목을 불태우고 이것을 갈아엎어
비료의 대신으로 하는 것을 화경이라 하고, 밭에 물을 대어 매는 것을 대신하는 것을 수운이라 하는데 수운은
수누(水耨)라고도 한다.
장성현 長城縣
동쪽은 담양부 경계까지 28리, 서쪽은 고창현 경계까지 15리, 남쪽은 진원현 경계까지 17리,
북쪽은 정읍현(井邑縣) 경계까지 26리 이고, 서울에서 6백 44리 떨어져 있다.
건치연혁 본래는 백제의 고시이현(古尸伊縣)이었는데, 신라에서 고쳐서 갑성군(岬城郡)이라 하였고,
고려에서는 지금 이름으로 고쳐 영광군에 붙였다가 명종 2년에 감무(監務)를 두었고,
본조에서는 현감으로 고쳤다.
관원 현감ㆍ훈도 : 1명씩이다.
군명 고시이ㆍ갑성ㆍ오산(鰲山)ㆍ이성(伊城).
성씨본현 이(李)ㆍ서(徐)ㆍ유(兪)ㆍ공(孔)ㆍ노(魯).
형승 산이 둘러있고 물이 굽이쳐 있다 : 조종생(趙從生)의 시에, "산이 둘러있고 물이 굽이쳐 흐르니 하늘이
이룬 것이라네." 하였다.
산천 금오산(金鰲山) : 현 북쪽 1리에 있는데 진산이다. 취령산(鷲嶺山) : 현 서쪽 20리에 있다.
백암산(白巖山) : 현 동쪽 30리에 있다. 반등산(半登山) : 현 북쪽 18리에 있으며, 고창현에 상세히 나온다.
입암산(笠巖山) : 현 북쪽 20리에 있으며, 정읍현에도 나온다. 용두산(龍頭山) : 현 동쪽 1리에 있다.
송현(松峴) : 현 서쪽 15리에 있다.
위령(葦嶺) : 노령(蘆嶺)이라고도 하는데, 현 북쪽 30리에 있으니, 요해의 땅이다.
처용암(處容巖) : 입암산 남쪽에 바위가 있는데 그 모양이 완연히 처용의 모습과 같으므로 이름지었다.
가천(可川) : 현 남쪽 5리에 있는데, 위령에서 나온다. 황룡천(黃龍川) : 일명 봉덕연(鳳德淵)인데,
단엄역(丹嚴驛) 동쪽에 있다. 백암산에서 나와서 진원현(珍原縣) 경내로 들어간다.
문필천(文筆川) : 현 서쪽 7리에 있는데, 송현에서 나온다. 선연(船淵) : 현 남쪽 25리에 있는데,
문필천ㆍ가천ㆍ봉덕연의 3물이 합치는 곳이며, 남으로 흘러서 광산(光山)의 생압도(生鴨渡)로 들어간다.
토산 생강ㆍ모시ㆍ대나무ㆍ비자ㆍ감ㆍ백화사(白花蛇)ㆍ석류.
신증관방 위령군보(葦嶺軍堡) : 고갯길이 호젓하고 험해서 도적이 떼지어 모여 대낮에 사람을 죽이고 약탈을
하므로 나그네가 지나다니지 못하기 때문에 지금 임금 15년에 보방수(堡防守)를 두었다.
누정 동루(東樓) : 객관 동쪽에 있다.
학교 향교 : 현 북쪽 2리에 있다.
역원 단엄역(丹嚴驛) : 현 남쪽 13리에 있다.
○ 성임(成任)의 시에, "한 소리 베갯머리에 들리는 것은 꽃 사이의 새요, 몇점 누각에 마주 선 것은 대숲 밖의
산이로다. 해가 다 가도록 돌아다니는 나같은 이 또 있을까. 누에 올라 한가한 틈을 잠깐 만드네." 하였다.
○ 정창손(鄭昌孫)의 시에, "졸졸 시냇물은 마을 안을 흐르고, 골짜기 가득한 솔과 대에 땅은 더욱 그윽하네.
잔들고 권하는 데 풍설(風雪)이 차구나. 소리 낮춰 읊조리며 중선루(仲宣樓)에 기대었네." 하였다.
득량원(得良院) : 현 남쪽 15리에 있다. 가정원(可亭院) : 고을 동쪽 18리에 있다.
미륵원(彌勒院) : 현 북쪽 21리에 있다. 원 북쪽에 돌 미륵불이 있고, 높이가 4ㆍ5 길은 되는데, 그래서 이름
지었다.
보등원(寶燈院) : 현 남쪽 4리에 있다.
불우 취서사(鷲棲寺) : 취령산에 있는데, 석탑과 석종이 있다. 송(宋)나라 때에 중 운묵(雲黙)이 있었는데,
중국에 외유하였고, 글씨를 잘 써서 세상에 이름이 있었다. 그가 죽자 제자가 탑과 종을 세워서 유해를 안치
하였다.
정토사(淨土寺) : 백암산에 있는데, 절에 쌍계루(雙溪樓)가 있다.
○ 이색(李穡)의 기문에, "삼중대광 복리군 운암 징공 청수(三重大匡福利君雲巖澄公淸叟)가 절간 윤공(絶磵倫
公)으로 하여금 나에게 그 누각에 이름을 지어 줄 것을 청하고, 또한 삼봉 정씨(三峯鄭氏)의 기문을 함께 보여
주는데, 절의 내력은 상세하나, 시내가 어떤지 누각이 어떤지는 모두 생략하고 쓰지 않았으므로 그 이름을 짓
기가 어렵다. 골짜기에서 물으니, 절이 두 시냇물 사이에 있는데, 물이 절의 남쪽에서 합친다.
물의 근원은 동쪽이 가깝고 서쪽이 멀기 때문에 크고 작음이 있다. 합쳐서 못이 된 뒤에 산을 나와서 흐른다.
절의 사면은 산이 모두 높고 험해서 무더운 여름날이면 시원한 바람을 맞을 곳이 없으므로, 이 두 시내가 합류
하는 곳에 누각이 있어 왼쪽 물에 걸터앉아 오른쪽 물을 굽어보고 있으니, 누각의 그림자와 물빛이 위 아래로
서로 비치어 참으로 좋은 경치였다.
경술년 여름에 큰 물이 와서 돌 제방이 무너지매 누각도 따라서 무너졌다. 청수(淸叟)가 이르기를, '누각은
우리 스님이 세운 것인데, 이래서야 되겠는가. 나의 스님 각엄존자(覺儼尊者)께 스승과 제자로 서로 전한 지가
모두 5대이다. 그런 까닭에 산문(山門)에 유의하기를 지극히 하였다. 누각이 지금 없어지면 책임이 장차 누구
에게 돌아갈 것인가." 이에 날짜를 기약하고 목공을 고용하여 그 옛 모습을 회복하였는데, 썩은 것은 견고한
것으로 갈고 퇴색한 것은 선명하게 하니, 이에 위안이 될 만하였다.
그러나 내 마음에 조금이라도 혹시나 우리 스승의 마음을 져버릴까 두려워하는 것을 내 제자들이 꼭 알지 못
할 것이요, 내 제자로서 나의 뒤를 이어 이 절에서 사는 자가 혹시 내 마음을 모른다면 산문의 일이 보존되지
못할 것이 어찌 누각뿐이겠는가. 불상에 먼지끼고 집에 비바람 치는 것이 사람들의 웃음거리가 될 것이 틀림
없다.
이러므로 한낱 누각의 다시 건축함을 비록 글로 쓸 만한 것은 못되나, 반드시 글 잘하는 이가 쓰기를 구하는
것은 후세에까지 전하기를 꾀하기 때문이며 내 제자들을 경계하려는 것이니, 부디 사양하지 마시오.' 하였다.
내가 일찍이 행촌 시중공(杏村 侍中公)에게 사사하여 그 자질(子姪 이름은 암(岩))과 벗하고 놀았는데 그
스님은 그 이의 계씨였다. 그 청을 어기기 어려워서 골짜기에서 들은 말을 따라 쌍계루라고 이름 지었다.
나는 이미 늙어서, 밝은 달이 누각에 가득한데, 그 안에서 한 번 자지 못하게 되었으니, 소년시절에 그 절의 객
이 되지 못한 것이 한스럽다. 그 스승과 제자의 서로 계승한 것은 책에 있으므로 쓰지 않는다." 하였다.
○ 정몽주(鄭夢周)의 시에, "지금 시를 써달라 청하는 백암승(白岩僧)을 만나니, 붓을 잡고 침음(沈吟)하면서
재주없음 부끄럽구나. 청수가 누각 세워 이름이 이제 무겁고, 목옹(牧翁 이색)이 기문을 지어 값 더욱 더하네.
노을빛 아득하니 저무는 산이 붉고, 달빛이 배회하니 가을 물이 맑구나. 오랫동안 인간에서 시달렸는데,
어느날 옷을 떨치고 자네와 함께 올라 볼까." 하였다.
신증 영천굴(靈泉窟 : 정토사 북쪽 바위 중턱에 작은 암자를 지었는데, 샘이 있다. 굴 북쪽 작은 틈에서 솟아
나오는데, 비가 오나 가무나 한결 같다.
사묘 사직단 : 현 서쪽에 있다. 문묘 : 향교에 있다. 성황사 : 현 서쪽 2리에 있다. 여단 : 현 북쪽에 있다.
고적 망점산성(望岾山城) : 현 동쪽 10리에 있다. 돌로 쌓았는데, 둘레가 2천 6백 척, 높이가 5척이고,
안에 작은 못이 있다.
효자고려 서능(徐稜) : 고려 때 사람인데, 벼슬을 하지 않고 어머니를 봉양하였다. 어머니가 목에 종기가 나서,
서능이 의원을 청하자 와서 보고 "살아있는 개구리를 얻지 못하면 목숨을 건질 수 없다." 하였다. 서능이, "때
가 섣달이니, 어떻게 살아있는 개구리를 구할 수 있겠는가, 어머니의 병환은 어쩔 수 없구나." 하고,
슬피 울었다. 얼마 후에 의원이, "산 개구리가 없더라도 약을 만들어 보자." 하여, 나무 아래에서 약을 달이는데,
갑자기 약탕관 안으로 떨어지는 물건이 있어서 보니, 곧 살아있는 개구리였다. 의원이 놀라서, "아들의 효성이
하늘을 감동시켜 하늘이 바로 내려준 것이니, 어머니의 병은 반드시 나을 것이다." 하고, 약에 합하여 종기가
난 곳에 붙이니 곧 나았다.
신증본조 차순년(車舜年) : 역리(驛吏)인데, 어려서부터 어버이를 섬기기에 효성스러웠고, 가절(佳節)을 만날
때마다 반드시 술과 고기를 갖추어 마을 사람들을 맞아서 즐겼다. 아버지가 일찍이 임질을 앓아서 숨이 막혀
끊어지려 하자 순년이 하늘에 부르짖으며 목숨을 빌었는데, 이윽고 숨을 쉬고 살아났다. 지금 임금 23년에
복호하였다.
신증열녀본조 즉지(則只) : 학생 김계창(金繼昌)의 아내다. 지아비가 죽자 3년을 곡하며 잔 올리기를 그만두지
않았다. 아버지가 수절하는 뜻을 빼앗으려 하니, 죽음을 맹세하고 쫓지 않고, 사진을 벽에 걸고 종신토록 아침
저녁으로 제를 지냈다. 지금 임금 8년에 정려하였다.
[비고]
연혁 선조 정유왜란(丁酉倭亂) 후로 장성과 진원(珍原)이 매우 쇠잔하니,
진원과 합치고 치소(治所)를 성자산(聖子山) 밑으로 옮겼다 : 옛 치소는 부(府)의 북쪽 20리 금오산(金鰲山)
밑이다. 효종 6년에 도호부로 승격시켰다.
읍호 오산이성(鰲山伊城).
관원 도호부사(都護府使) : 나주 진관병마동첨절제사(鎭管兵馬同僉節制使)와 입암산성(笠巖山城)
수성장(守城將)을 겸한다. 1명.
고읍 진원(珍原) : 남쪽으로 20리에 있다. 본래는 벡제의 구사진(邱斯珍)이다.
당나라가 백제를 멸하고 귀차(貴且)라 고치고 분차주(分嵯州)의 영현(領縣)으로 만들었다.
신라 경덕왕(景德王) 16년에 귀원(貴原)으로 고치고 압성군(押城郡)의 영현으로 하였다. 고려 현종 9년에 나주
에 속하게 하고 명종 2년에는 감무를 두었다. 본조 태종 13년에 현감으로 고치고 선조 경자년에 내속시켰다.
방면 읍동(邑東) : 동남쪽으로 15리에 있다. 읍서(邑西) : 끝이 10리.
내동(內東) : 남쪽 처음이 15리, 끝이 25리.
외동(外東)ㆍ남일(南一)ㆍ남이(南二) : 모두 처음이 2O리, 끝이 30리. 남삼(南三) : 처음이 15리, 끝이 30리.
서일(西一) : 처음이 15리, 끝이 20리. 서이(西二) : 처음이 20리, 끝이 40리.
서肼(西三) : 처음이 10리, 끝이 25리.
북일(北一) : 처음이 15리, 끝이 30리. 북이(北二) : 처음이 20리, 끝이 40리.
북상(北上) : 처음이 15리 끝이 40리. 북하(北下) : 동북쪽 처음이 10리, 끝이 40리.
봉면(面) : 북쪽 처음이 5리, 끝이 10리.
○ 마량부곡(馬良部曲)은 진원의 옛 현이다. 서쪽 20리에 있다.
성지 입암산성(笠巖山城) : 북쪽으로 40리. 정읍(井邑) 경계에 있다. 전에는 석성의 옛터가 있었는데,
선조 30년에 수축하였고, 효종 4년에 둘레가 2천 7백 95보, 포루(砲樓) 넷, 성문 둘, 암문(暗門) 셋, 여울하나,
연못 아홉, 샘물 14로 개축하였다.
○ 수성장 본부사가 겸한다. 별장 1명.
○ 속읍은 장성ㆍ광주ㆍ나주ㆍ고창ㆍ정읍ㆍ태인이다.
○ 장경(長慶)ㆍ흥경(興慶)ㆍ인경(仁慶)ㆍ고경(高慶)ㆍ옥정(玉井)등 다섯 절이 있다. 승장(僧將) 1명.
○ 창(倉) 여섯. 장성고읍성(長城古邑城) : 서북쪽으로 15리에 있다. 둘레는 2천 1백 척이고 우물이 셋이다.
진원고읍성(珍原古邑城) : 구진성(丘珍城)이라고도 한다. 남쪽으로 15리 불대산(佛台山) 동쪽 기슭에 있다.
둘레 1천 4백 척. 우물 셋, 여울 둘. 망점산고성(望岾山古城) : 동북쪽으로 10리에 있다. 둘레는 2천 6백 척이며
연못이 하나 있다. 이척성(利尺城) : 남쪽으로 10리. 불대산(佛台山) 서쪽 끝에 있다. 둘레 1천 5백 20척.
우물 넷. 여울 여섯.
창고 읍창(邑倉) : 읍내에 있다. 북창(北倉) : 북쪽으로 20리에 있다. 사창(社倉) : 남쪽으로 20리에 있다.
성창(城倉) : 입암산성에 있다.
역참 영신역(永申驛) : 남쪽으로 20리에 있다.
토산 죽전(竹箭)ㆍ닥ㆍ칠ㆍ뽕나무ㆍ차ㆍ매실ㆍ꿀.
사원 입암서원(笠巖書院) : 선조 경인년에 건립하여 현종 임인년에 사액하였다.
김인후(金麟厚) : 문묘에 보인다.
진원현 珍原縣
동쪽은 창평현(昌平縣) 경계까지 14리, 남쪽은 광산현(光山縣) 경계까지 17리, 서쪽은 영광군 경계까지 23리,
북쪽은 장성현 경계까지 23리이고, 서울에서 6백 87리 떨어져 있다.
건치연혁 본래는 백제의 구사진혜현(丘斯珍兮縣)이었는데, 신라에서 지금 이름으로 고쳐서 갑성군(岬城郡)에
붙였고, 고려에서는 나주에 붙였으며, 명종 2년에 감무를 두었고, 본조에서는 그대로 따랐다가 뒤에 현감으로
고쳤다.
관원 현감ㆍ훈도 : 각 1명씩.
군명 구사진혜ㆍ구진(丘珍).
성씨본현 박(朴)ㆍ오(吳)ㆍ안(安)ㆍ문(文), 이(李) : 보령(保寧). 김(金) : 장흥(長興). 정(鄭) : 속(續).
마량(馬良) 신(申).
산천 불대산(佛臺山) : 현에서 북쪽으로 5리 떨어져 있는, 진산이다. 풍수하는 사람이 산에 달리는 용의 형세가
있다고 하여 절을 세우고 상하연(上下淵)이라 일컫고 산세를 다스렸다. 또 산의 동북에 큰 골짜기 작은 골짜기
가 있는데, 신라 때에 3절을 세워서 안룡(安龍)ㆍ정룡(定龍)ㆍ청룡(靑龍)이라고 하였다는데 지금은 모두 상고
할 수 없다.
동산(桐山) : 현에서 남쪽으로 20리 떨어져 있다. 죽림산(竹林山) : 현에서 서쪽으로 20리 떨어져 있다.
삼성산(三聖山) : 현에서 북쪽으로 4리 떨어져 있는데, 불대산과 서로 잇달아 있다.
가리산(加利山) : 현에서 동으로 8리 떨어져 있다. 성산(筬山) : 현에서 북쪽으로 8리 떨어져 있다.
황룡천(黃龍川) : 현에서 서쪽으로 23리 떨어져 있는데, 남쪽으로 흘러서 광산(光山)의 생압도(生鴨渡)로 들어
간다. 내의 서쪽에 돌벼랑이 있는데 높이가 10여 척이다.
구등천(九燈川) : 현에서 동쪽으로 1리 떨어져 있는데, 근원은 삼성산에서 나온다.
오항천(五項川) : 현에서 남쪽으로 18리 떨어져 있는데, 근원은 불대산의 서쪽에서 나온다.
봉황지(鳳凰池) : 황룡천 서쪽에 있다. 못 좌우의 벼랑 높이가 10여 척이다.
율곡지(栗谷池) : 현에서 서쪽으로 5리 떨어져 있다.
토산 매실ㆍ죽전 : 현 동쪽의 가리산과 상림산(上林山)에 있다. 차ㆍ모시ㆍ벌꿀.
누정 무민루(撫民樓) : 객관 북쪽에 있다.
학교 향교 : 현에서 북쪽으로 2리 떨어져 있다.
역원 영신역(永申驛) : 현에서 서쪽으로 10리 떨어져 있다.
○ 김극기(金克己)의 시에, "가을 강물은 맑고 아침 산은 푸른데, 보이는 것마다 쓸쓸하여 나그네 정을 흔드네,
물가의 학과ㆍ오리는 물이 좋아 깃들고, 들고라니 산사슴은 아지랑이와 어울려 가네.
흥건히 회포를 읊조리며 천승(千乘)을 가볍게 여기고, 취흥을 어찌 평생토록 마다 하랴. 저녁에 역정에 잠깐
들려서, 몇 잔 기울이며 벗과 즐기네." 하였다.
목호원(木虎院) : 현에서 서쪽으로 15리 떨어져 있다. 행인원(行人院) : 현에서 서쪽으로 10리 떨어져 있다.
선원(禪院) : 현에서 남쪽으로 3리 떨어져 있다.
불우 취봉사(鷲峯寺)ㆍ상청사(上淸寺)ㆍ하청사(下淸寺)ㆍ연화사(蓮花寺) : 모두 불대산에 있다.
죽림사(竹林寺) : 죽림산에 있다. 상림사(上林寺) : 가리산에 있다.
신증 인월사(印月寺) : 불대산에 있다.
○ 김시습(金時習)의 시에, "산중에 한 노승이 있으니, 옛스런 모습 참으로 기이하네. 나를 맞아 하는 이야기
점점 신기한데, 대나무 가지에는 찬 눈이 뿌리네. 행장이 정말 시원하니, 시축(詩軸)과 의발(衣鉢)뿐이라네.
스스로 말하기를 늙음이 찾아드니, 석장(錫杖)을 걸어두고, 시냇가에 한가히 머물면서, 평생의 낙을 마음껏
하고 싶다하네. 저 산 남쪽 기슭에 올라가니, 산이 깊어 고요하기에 맑은 시내에 집을 지었네.
그대는 쉬어가시어, 나의 오막살이 빛나게 하시오. 내가 마침 틈이 있어, 인월(印月)이라 편액을 써 주었네.
저 만 길 못을 바라보니, 바람이 고요하고 물빛 맑은데, 가을 달이 그 밑에 박은 것같이 밝고 맑아라. 부딪쳐도
흩어지지 않고, 흔들어도 없어지지 않으니, 늙은 스님 마음에 견줄 만하여, 도의(道義)가 더욱 높네.
활짝 트이어 근원에 통달하여, 나지도 않고 또한 없어지지도 않네. 만상의 맑음을 고요히 바라보니, 내 마음
자리에 박혀있구나. 결국 이름지을 것 없는 것인데, 암자에 이름지어 뜻을 붙이네. 뒷날에 마음을 깨닫고 보면,
이 또한 그저 평범한 일이리라."주D-001 하였다.
사묘 사직단 : 현 서쪽에 있다. 문묘 : 향교에 있다. 성황사 : 삼성산에 있다.
성산신사(筬山神祠) : 현에서 북쪽으로 8리 떨어져 있다. 여단 : 현 북쪽에 있다.
고적 마량 부곡(馬良部曲) : 현에서 서쪽으로 20리 떨어져 있다.
삼성산성(三聖山城) : 돌로 쌓았는데, 둘레가 5백 50척, 높이가 7척이고, 안에는 세 우물이 있다.
구진성(丘珍城) : 불대산 동쪽 기슭에 있다. 돌로 쌓았는데, 둘레가 4백 척, 높이가 12척이고, 안에는 세 우물과
두 시내가 있었는데, 지금은 반쯤 무너졌다.
이척성(利尺城) : 불대산 서쪽 기슭에 있다. 돌로 쌓았는데, 둘레가 5백 20척, 높이가 3척이고, 안에는 네 우물과
여섯 개의 시내가 있었는데, 지금은 반쯤 무너졌다.
제영 긴 대나무 거친 띠에 몇몇 아전의 집이로다 : 이계수(李桂遂)의 시. 차(茶)는 불 앞에서 향기를 내다 :
김극기의 시에, "귤은 서리 뒤에 맛을 더하고, 차는 불 앞에서 향기 풍기네." 하였다.
한 조각 용천(龍川)이 푸른 비단을 끌다 : 노숙동(盧叔仝)의 시에, "한 조각 용천은 푸른 비단을 끌고, 천 길 대악
(臺嶽)은 푸른 하늘에 솟았네." 하였다. 만 골짜기에 소나무 빽빽하여 좋은 경치 감추다 : 성임의 시에 "만 골짜기
소나무 빽빽하여 좋은 경치 감추고, 천 바위에 구름 걷혀 층층이 하늘 드러냈네." 하였다.
신증 객관의 풍취는 절간과 같다 : 안침(安琛)의 시에, "해 저무는 뜰에는 낙엽이 많고, 객관의 풍취는 절간과 같네.
가을이 오니 다시 동쪽 울타리의 흥취를 추억하는데, 찬란한 황금빛 국화가 있네." 하였다.
[주 D-001] 이 또한 그저 평범한 일이리라." : 불교에서는 마음이 사물에 붙어 얽매임을 금기로 하며,
이것을 벗어나면 곧 만물의 특색을 제거한 진리의 세계가 된다는 뜻.
무장현 茂長縣
동쪽은 고창현 경계까지 14리, 서쪽은 바닷가까지 29리, 남쪽은 영광군 경계까지 23리,
북쪽은 고창현 경계까지 16리이고, 서울에서 6백 53리 떨어져 있다.
건치연혁 무송현(茂松縣)은 본래 백제의 송미지현(松彌知縣)이었는데,
신라가 무송(茂松)이라고 고쳐서 무령군(武靈郡)의 영현으로 하였고, 고려에서는 그대로 따랐다.
장사현(長沙縣)은 본래 백제의 상로현(上老縣)이었는데, 신라가 장사라고 고쳐서 무령군의 영현으로 하였고,
고려에서는 그대로 따랐다가 뒤에 감무를 두어 무송을 겸임케 하였는데, 본조 태종 17년에 두 현을 합쳐서 지금
이름으로 고치고 진(鎭)을 두어 병마사가 현의 일을 겸임케 하였는데, 세종 5년에 병마사를 고쳐서 첨절제사로
하고 뒤에 현감으로 고쳤다.
관원 현감ㆍ훈도 : 각 1명씩이다.
군명 송미지ㆍ무송ㆍ송산(松山)ㆍ장사ㆍ상로ㆍ사도(沙島).
성씨무송 윤(尹)ㆍ유(庾)ㆍ차(車), 김(金) : 전(全)이라고도 한다. 신(申). 장사 유(兪)ㆍ사(史)ㆍ현(玄)ㆍ
정(丁)ㆍ김(金), 주(朱) : 웅신(熊神). 노(盧) : 대흥(大興). 장(張) : 태인(泰仁)ㆍ충주(忠州)ㆍ단천(端川)ㆍ
황간(黃澗). 진(陳) : 충주. 박(朴) : 해진(海珍)ㆍ영암(靈巖). 이(李) : 경주(慶州). 안(安)ㆍ문(文) : 모두
하동(河東).
풍속 풍속은 고기잡이와 사냥을 숭상한다 : 〈지지(地志)〉에 있다.
산천 선운산(禪雲山) : 선(禪)을 선(仙)으로도 쓴다. 현에서 북쪽으로 20리 떨어져 있다.
《고려사》의 〈악지(樂志)〉에, "선운산곡(禪雲山曲)이 있는데 백제 때에 장사(長沙) 사람이 싸움에 나갔다가
기한이 지나도 돌아오지 않자, 그의 아내가 그리워서 이 산에 올라가 바라보며 노래한 곳이다." 하였다.
화산(花山) : 현에서 북쪽으로 20리에 있다. 고산(高山) : 현에서 북쪽으로 25리 떨어져 있다. 산 위에 용지(龍池)
가 있는데, 하늘이 가물 때마다 비를 빌면 응답이 있으므로, 그 산아래 사람들은 흉년에도 굶주리지 않는다.
바다 : 현의 서북쪽에 있다. 대죽도(大竹島)ㆍ소죽도(小竹島) : 모두 현 북쪽 바다 가운데에 있다.
세십포(細十浦) : 현에서 북쪽 40리 떨어져 있는데, 어량(漁梁)이 있다.
검당포(黔堂浦) : 현에서 북쪽으로 35리 떨어져 있다. 선운포(禪雲浦) : 현에서 북쪽으로 35리 떨어져 있다.
금물여포(今勿礜浦) : 현에서 북쪽으로 30리 떨어져 있다. 경포(景浦)ㆍ
구시포(仇時浦) : 모두 현에서 서쪽으로 30리 떨어져 있다.
고전포(高田浦) : 현에서 북쪽으로 20리 떨어져 있는데, 염분(鹽盆)이 있다. 염정(鹽井) : 금당포에 있는데 바다
로 2리 남짓 들어갔다. 그 물이 희고 짜서 토착민들이 조수가 물러가기를 기다려서 다투어 길고(桔槹 물푸는
기구)를 써서 길어다가 다려서 소금을 만드는데, 볕에 말리기에 힘들지 않고 많은 이익을 거두는 데는,
오직 검당포뿐이다.
토산 조기ㆍ새우ㆍ상어ㆍ숭어ㆍ오징어ㆍ넙치ㆍ홍어ㆍ준치ㆍ부레.
죽전(竹箭) : 현 북쪽에 있는 대ㆍ소죽도에서 나온다. 차.
성곽 읍성 : 돌로 쌓았는데, 둘레가 2천 6백 39척, 높이가 7척이고, 안에는 두 샘이 있다.
봉수 고리포(古里浦) 봉수 : 현에서 서쪽으로 20리 떨어져 있는데 남쪽은 영광군 홍농산에 응하고,
북쪽은 소응포에 응한다.
소응포(所應浦) 봉수 : 현에서 북쪽으로 20리 떨어져 있는데, 북쪽은 부안현(扶安縣) 월고리산(月古里山)에
응한다.
신증궁실 동헌(東軒) : 유순(柳洵)의 시에, "10년 전에 이곳을 지났는데, 지금껏 몸과 마음 함께 맑아라.
아관정(迓觀亭) 위에 몸이 또 다시 이르니, 붉은 작약 떨기 가에 눈이 다시 밝구나. 창 밖 청산은 예전대로인데,
숲 사이 꾀꼬리는 새노래를 들려주네. 마루에 앉으니 지난해 생각 희미한데, 그 당시 이름 써두지 않은 것이
후회되누나.
○ 얼굴에 부는 훈풍이 집 깊숙이 불어오고, 발에 비치는 한낮의 꽃에 맑은 그늘 드리우네. 공무가 끝난 뒤에
번잡함이 그치니, 앉아서 빈뜰에 들판의 빛이 들어옴을 알겠네." 하였다.
누정 아관정(迓觀亭) : 객관 북쪽에 있다.
○ 정곤(鄭坤)의 기문에, "이 고을은 전라도의 서쪽에 있고 큰 바닷가에 있는데, 고려 말기에 왜적이 한창 설치어
백성이 생업을 잃고 흩어져서 쓸쓸히 온 통 빈 지가 오래더니, 지금 우리 성조(盛朝)에서 성신(聖神)이 계승하시
어 안으로 정사를 닦고 밖으로 외적을 물리치는 것이 법도가 있으니, 바닷가 고을의 민생이 번성해졌다.
이에 무송현과 강사현을 합해서 한 고을로 하고 여기에 진(鎭)을 설치하여 어질고 재간있는 사람을 가려 주장
(主將)을 삼아 변방을 굳게 하고, 이에 두 현 중간에 땅을 선택하여 성을 쌓아 백성을 살게 하고, 창고와 청사와
군영 또한 모두 자리잡도록 하였다.
지금 절제사 송유인(宋有仁)공은 진지한 군자이다. 기유년 봄에, 대호군으로부터 명을 받고 이 진에 절제사로
왔는데, 군정(軍政)은 진흥되고 민사는 다스려졌으며, 또 풍년이 들었다. 이에 더운 철에 손님을 맞을 곳이 없고,
무예를 시험할때 활을 쏠 만한 곳이 없음을 생각하여, 마침내 객사 북쪽 높은 언덕 위에 한 정자를 지었는데,
제도가 굉장하여 손님을 맞이하기도 하고 혹은 활쏘기를 익히기도 한다.
그래서 아빈(迓賓)의 아(迓)와 관덕(觀德)위 관(觀) 두 글자를 따서 아관(迓觀)이라 한다." 하였다.
동백정(冬柏亭) : 현에서 북쪽으로 30리 떨어져 있다. 산기슭이 바다안으로 쑥 들어갔고 삼면이 모두 물인데,
그 위에는 동백나무가 푸르게 우거져 몇리나 뻗어있다. 이는 호남에서 다시없이 경치 좋은 땅이다.
신증 김종직(金宗直)의 시에, "자라 머리에 수많은 나무 찬란히 붉은데, 술잔 들고 숲 사이에서 함께 흉금을 트네.
한 조각 아기(牙旗)주D-001에 비취(翡翠)새 놀라고, 몇 마디 쇠젓대 소리에 고기와 용이 춤추네.
누런 띠 밭 질펀한 곳에 농사가 한창이요, 푸른 안개 짙은 곳에 섬이 겹겹일세. 지금 성대라서 변방이 고요하니,
수령이 잠깐 노니는 것도 무방하리라." 하였다.
신루(新樓) : 객관 동쪽에 있다. 신증 현감 최검(崔儉)이 고쳐 짓고 읍취(挹翠)라 이름지었다.
○ 안침(安琛)의 시에, "누각 아래 연못에는 물이 깊고, 뜰 앞의 나무엔 녹음이 짙었네. 이 곳에 민정을 살피러
왔고, 도독은 당년에 계극(棨戟 관리가 출행할 때 앞에 들고가는 것)이 임하였네. 때가 태평하니 하상(河上)
군사가 괴롭지 않고, 풍년이 들어 읍중(邑中)의 검(黔)을 뒤로 하겠네. 조용히 술자리 여니 다른 일 없고,
불자(拂子)를 흔들며 청담(淸談)주D-002 하는 데에 날이 벌써 저물었네." 하였다.
학교 향교 : 현에서 동쪽으로 5리 떨어져 있다.
역원 청송역(靑松驛) : 현에서 동쪽으로 25리 떨어져 있다.
사신원(四信院) : 현에서 북쪽으로 18리 떨어져 있다. 청계원(淸溪院) : 현에서 남쪽으로 25리 떨어져 있다.
요광원(要光院) : 현에서 서쪽으로 18리 떨어져 있다. 동원(東院) : 현에서 동쪽으로 5리 떨어져 있다.
불우 선운사(禪雲寺) : 선운산에 있다.
○ 김극기의 시에, "산숲이 앞뒤 사면을 둘렀는데, 하나의 천당(天堂)이 절에 그려졌으니, 자수(紫綬)는 어찌
늘어진 것을 자랑하랴. 현전(玄筌 현묘한 기틀)에는 다만 부처의 진리를 엿보고자 하네. 폭포소리 옥 부수 듯
단풍진 골짜기에 울고, 산 경치는 소라를 모아 놓은 듯 푸른 하늘에 솟았네. 마주앉아 조용히 옥진(玉塵)을
날리니, 웃으며 이야기하는 끝에 맑은 바람 문득 이네." 하였다.
○ 윤진(尹珍)의 시에, "옛 길이 숲 사이에 뚫렸는데 돌이 험하고, 겹친 산이 절을 싸안았는데 물이 맴도네.
양쪽 벼랑에 나무 빽빽한데 평상에 바람일고, 시냇가 누각에 잠깐 올라가 한바탕 웃네." 하였다.
중중애사(重愛寺)ㆍ참당사(懺堂寺) : 모두 선운산에 있다.
서봉사(瑞峯寺) : 고산(高山)에 있다.
수고암(水庫庵) : 서봉(瑞峯)의 남쪽 용지(龍池) 위에 있는데, 못이 있으므로 이름지어졌다.
사묘 사직단 : 현 서쪽에 있다. 문묘 : 향교에 있다.
성황사 : 하나는 옛 무송 고을에 있고 하나는 옛 장사 고을에 있다.
화산사(花山祠) : 화산에 있다. 여단 : 현 북쪽에 있다.
고적 고무송(古茂松) : 지금 현에서 남쪽으로 20리 떨어져 있는데, 토성(土城)터가 있다.
고장사(古長沙) : 지금 현에서 북쪽으로 20리 떨어져 있는데, 석성(石城) 터가 있다.
고산성(高山城) : 돌로 쌓았는데, 둘레가 8천 1백 척이고, 가운데에 세 샘물이 있다.
약수향(藥水鄕) : 염정(鹽井)을 약수라고 일컫는다. 궁산처(弓山處) : 현에서 북쪽으로 25리 떨어져 있다.
명신고려 최해(崔瀣) : 장사감무(長沙監務)를 했다.
이존오(李存吾) : 공민왕 15년에 우정언(右正言)으로서 상소하여 신돈(辛旽)을 논박하였는데, 왕이 크게 노하여
장사감무로 좌천시켰다.
본조 한권(韓卷) : 태종 때에 감무를 지냈다.
인물고려 유록숭(庾祿崇) : 강직함으로 일컬어져서 일찍이 남을 따라 자기를 굽힌 적이 없고, 귀하게 된 뒤에도
옷과 집은 벼슬하기 전과 같았다. 예종 때에 벼슬이 참지정사에 이르렀다.
유필(庾弼) : 글과 행실로 드러났고, 성질이 강직하여 아부하지 않았다. 의종 때에 벼슬을 거듭하여 문하시랑평
장사에 이르렀다. 유응규(庾應圭) : 유필의 아들인데, 성품이 영특하고 글짓기를 잘 하였다. 두 번 과거를 보았
으나 급제하지 못하고, 의종 때에 내시로 조정에 들어가 보직되었다. 정중부(鄭仲夫)가 의종을 폐위라고 명종을
세웠을 때, 표문을 받들고 금(金) 나라에 가서 아뢰었는데, 금에서는 왕위를 찬탈한 것으로 의심하고 회답하지
않자, 응규가 조복을 갖추고 뜰에 서서 7일간 단식을 하니, 금나라 왕이 가엾이 여겨 회답의 조서를 내려 주어
돌려보냈다. 벼슬은 공부시랑에 이르렀다.
유자량(庾資諒) : 고종 때 사람인데, 벼슬은 상서좌복야에 이르렀다. 사씨(謝氏)의 집을 얻어서 살았고,
당시 고향의 벼슬에서 물러나와 한가히 지내는 사람들과 기로회(耆老會)를 만들어서 술을 놓고 마음껏 즐겼다.
넉넉히 성품을 닦은지 70세에 문득 하루는 팔계문(八戒文)주D-003을 보고서 밤에 목욕하고 취침하면서 집안
사람을 불러서 시간을 묻더니 죽어갔다.
윤해(尹諧) : 과거에 급제하여 벼슬이 성균관대사성에 이르렀다. 청백을 스스로 지켜 집이 가난해서 시래기 죽도
못 먹으면 콩을 삶아 먹고 그만두었다. 성품이 또한 굽힘없이 곧아서 호족(豪族)의 세력을 두려워하지 않고,
일에 임해서 과감하게 처결하였으므로 사람들이 감히 속이지 못하였다.
윤택(尹澤) : 금산(錦山)에 상세히 나온다. 윤귀생(尹龜生) : 택의 아들인데, 금산에 자세히 나온다.
본조 윤소종(尹紹宗) 자는 헌숙(憲叔)인데, 공민왕 때에 장원급제하고, 여러 번 전직하여 대사성을 지냈고,
공양왕 때 예의판서가 되었다가, 곧 일이 있어 금주(錦州)로 귀양갔고, 본조에 들어와서 병조전서 수문전학사가
되었다. 《동헌집(桐軒集)》이 있다.
윤회종(尹會宗) : 소종의 아우인데, 과거에 급제하여 벼슬이 사재부령(司宰副令)에 이르렀다.
윤회(尹淮) : 소종의 아들인데, 과거에 높은 등위로 합격하였고, 학문이 해박한데, 사학(史學)을 더욱 잘 하였고,
벼슬이 예문관 대제학에 이르러 대제학을 오래 지냈고, 시호는 문도(文度)이며, 《청향집(淸鄕集)》이 있다.
윤자운(尹子雲) : 회의 손자인데, 나이 적어서 과거에 급제하였으며, 세조 때의 죄익공신(佐翼功臣)이었고,
벼슬은 영의정에 이르렀고, 시호는 문헌(文憲)이다.
제영 시냇물 소리와 나무 그림자가 함께 맑고 그윽하다 : 이행(李行)의 시에, "시냇물 소리와 나무 그림자가 함께
맑고 그윽한데, 또 백 척 높은 다락에 긴 바람 부네." 하였다. 가을 깊은데 북과 호각소리 변방에 울리네 : 신숙주
의 시에, "외로운 성 위의 정자에 두 밤 자는데, 서풍이 꿈속에 맑게 불어오네. 오동나무는 남은 잎을 나부끼어
읊는 가운데에 늙어가고, 국화는 새 꽃을 늘어뜨렸는데 특별히 밝구나. 육지 끝 바다 하늘에 먼 생각을 일으키고,
가을 깊은데 북과 호각소리 변방에 울리네. 높은 시에 화답하려 하나 좋은 글귀가 없으니, 어찌 시를 지어 성명을
기록한다 하랴." 하였다.
[비고]
연혁 고종 32년에 군으로 고쳤다. 《문헌비고》
방면 일동(一東) : 끝은 10리이다. 이동(二東) : 끝은 5리이다. 청해(靑海) : 북쪽으로 처음은 5리, 끝은 20리이다.
탁곡(托谷) : 북쪽으로 처음은 7리, 끝은 20리이다. 백석(白石) : 남쪽으로 처음은 8리, 끝은 15리이다.
대제(大梯) : 남쪽으로 처음은 10리, 끝은 15리이다. 대사동(大寺洞) : 남쪽으로 처음은 15리, 끝은 20리이다.
성동(星洞) : 남쪽으로 처음은 20리, 끝은 30리이다. 원송(元松) : 남쪽으로 처음은 30리, 끝은 40리이다.
심원(心元) : 북쪽으로 처음은 20리, 끝은 40리이다. 동음치(冬音峙) : 서쪽으로 처음은 10리, 끝은 20리이다.
상룡복(上龍伏) : 서쪽으로 처음은 11리, 끝은 30리이다. 하룡복(下龍伏) : 서쪽으로 처음은 15리, 끝은 30리이다.
장자산(莊子山) : 서쪽으로 처음은 20리, 끝은 30리이다. 미공(尾孔) : 서쪽으로 처음은 10리, 끝은 30리이다.
○ 약수향(藥水鄕)은 북쪽으로 35리이고 염정(鹽井)이 있는데 약수(藥水)라 칭한다.
궁산(弓山)은 북쪽으로 50리에 있다.
성지 무송고현성(茂松古縣城) : 흙으로 쌓았으며 터가 남아 있다.
장사고현성(長沙古縣城) : 돌로 쌓았으며 터가 남아 있다.
고산성(高山城) : 남쪽으로 20리에 있고, 둘레는 8천 1백 척이고 샘물이 3개 있다.
창고 창(倉)이 셋 : 읍내에 있다. 남창(南倉) : 남쪽으로 30리에 있다.
전세창(田稅倉) : 북쪽으로 30리에 있다. 대동창(大同倉) : 서쪽으로 15리에 있다.
토산 대ㆍ닥나무.
사원 충현사(忠賢祠) : 선조 무신년에 건립하였으며 광해군이 친필을 사액 하였다.
이존오(李存吾) : 여주(驪州)에 보인다. 유희춘(柳希春) : 담양(潭陽)에 보인다.
[주 D-001] 아기(牙旗) : 천자 또는 대장군의 기, 깃대 머리에 상아를 장식하므로 이 이름이 있다.
[주 D-002] 불자(拂子)를 흔들며 청담(淸談) : 진(晉) 나라 사람들이 청담할 때 불자를 흔들었다고 한다.
[주 D-003] 팔계문(八戒文) : 불가의 8가지 금기 문으로, ㄱ) 산 것을 죽이지 말 것, ㄴ) 도둑질을 하지 말 것,
ㄷ) 그릇된 남녀 관계를 하지 말 것, ㄹ) 술을 마시지 말 것, ㅁ) 망령된 말을 하지 말 것,
ㅂ) 높고 넓은 곳, 큰 평상에 앉지 말 것, ㅅ) 화려한 장식품을 달지 말 것,
ㅇ) 노래와 춤과 기생 오락을 즐기지 말 것.
남평현 南平縣
동쪽은 능성현(綾城縣) 경계까지 18리, 화순현(和順縣) 경계까지 14리, 남쪽은 나주 경계까지 36리,
서쪽은 같은 고을 경계까지 24리, 북쪽은 광산현 경계까지 10리이고, 서울에서 7백 63리 떨어져 있다.
건치연혁 본래 백제의 미동부리현(未冬夫里縣)이었는데, 신라가 현웅(玄雄)이라고 고쳐서 무주(武州)의 영현
으로 하였고, 고려가 지금 이름 -연평(永平)이라고도 한다.- 으로 고쳐서 군으로 하여 나주에 붙였고,
명종 2년에 감무를 두었으며 공양왕 2년에 화순감무에게 겸임시켰고, 본조 태조 3년에 따로 감무를 두었다가
뒤에 준례에 따라 현감으로 고쳤다.
관원 현감ㆍ훈도 : 각 1명씩이다.
군명 미동부리ㆍ현웅ㆍ오산(烏山)ㆍ영평.
성씨본현 문(文)ㆍ황(黃)ㆍ조(曺)ㆍ정(丁)ㆍ오(吳)ㆍ유(兪)ㆍ김(金). 철야(鐵冶) 반(瀋)ㆍ노(盧)ㆍ서(徐)ㆍ
양(楊)ㆍ하(河)ㆍ김(金)ㆍ방(方). 도민(道民) 하(何).
풍속 고장의 풍속은 순박하다 : 이발(李潑)의 시에 있다.
산천 풍산(楓山) : 현에서 남쪽으로 10리 떨어져 있다. 덕룡산(德龍山) : 현에서 남쪽으로 30리 떨어져 있다.
중봉산(中峯山) : 현에서 동쪽으로 10리 떨어져 있다. 정자산(亭子山) : 현에서 서쪽으로 5리 떨어져 있다.
마산(馬山) : 현에서 북쪽으로 5리 떨어져 있다.
성탄(城灘) : 현에서 북쪽으로 3리 떨어져 있는데, 근원은 능성ㆍ화순 두 현에서 나와 서쪽으로 흘러서 현의
북쪽을 지나 나주ㆍ목포로 들어간다. 화제(花堤) : 현에서 서남으로 10리 떨어져 있다.
마지(馬池) : 마산 아래에 있다. 장자지(長者池) : 현에서 동쪽으로 8리 떨어져 있다.
토산 붕어ㆍ차ㆍ석류ㆍ매실. 죽전(竹箭) : 현의 동쪽에 있는 성산(城山)과 장자산(長者山)에서 나온다. 오죽.
누정 하향정(荷香亭) : 객관 남쪽에 있다.
학교 향교 : 현에서 동쪽으로 1리 떨어져 있다.
역원 광리역(廣里驛) : 현에서 북쪽으로 5리 떨어져 있다. 오림역(烏林驛) : 현에서 남쪽으로 40리 떨어져 있다.
저포천원(猪浦川院) : 현에서 동쪽으로 20리 떨어져 있다. 광통원(廣通院) : 현에서 서쪽으로 28리 떨어져 있다.
하천원(蝦川院) : 현에서 동쪽으로 3리 떨어져 있다.
불우 불호사(佛護寺)ㆍ웅점사(熊岾寺) : 모두 덕룡산에 있다. 주송사(朱松寺)ㆍ
봉산사(蓬山寺) : 모두 풍산에 있다. 죽림사(竹林寺) : 중봉산에 있다.
사묘 사직단 : 현 서쪽에 있다. 문묘 : 향교에 있다. 성황사 : 현에서 남쪽으로 2리 떨어져 있다.
여단 : 현 북쪽에 있다.
고적 철야폐현(鐵冶廢縣) : 현에서 남쪽으로 30리 떨어져 있다. 본래는 백제의 실어산현(實於山縣)이었는데,
신라가 지금 이름으로 고쳐서 나주에 붙였고, 고려에서는 그대로 따랐다가 뒤에 능성현에 붙였고,
본조 태종 15년에 남평현에 내속되었다.
도민부곡(道民部曲) : 현에서 서남쪽으로 16리 떨어져 있다.
운곡소(雲谷所) : 현에서 남쪽으로 35리 떨어져 있다. 율촌부곡(栗村部曲) : 현에서 동쪽으로 30리 떨어져 있다.
신증명환본조 이전수(李全粹).
인물고려 문공유(文公裕) : 벼슬이 문하성사 집현전 대학사에 이르렀고, 시호는 경정(敬靖)이다.
문극겸(文克謙) : 공유의 아들인데, 처음에는 음직(蔭職)으로 벼슬자리에 보임되었는데, 의종 때에 과거에 급제
하여 여러 번 전직하다가 정언이 되었다. 곧은 간언 때문에 황주판관(黃州判官)으로 좌천되었고, 다시 진주판관
(晉州判官)으로도 좌천되었으나, 유사(有司)가 극겸은 곧은 신하인데 지방관으로 계속 내보내 간언하는 길을
막는 것은 옳지 않다고 아뢰자, 드디어 전중내급사(殿中內給事)에 전직되었다. 정중부의 난 때에는 명망 때문에
화를 면하였고, 뒤에 벼슬이 중서문하판병부사에 이르렀고, 시호는 충숙(忠肅)이며, 명종의 묘정에 배향되었다.
문달한(文達漢) : 극겸의 6세손인데, 신우(辛禑) 때에 대호군에 제수되고 여러 번 전직하여 문하평리에 이르렀고,
순평군에 봉작되었다.
제영 가시나무 사립문으로 인가를 가리었다 : 김극기의 시에, "저녁에 남평군에 오니, 거칠은 연기에 눈이 어지럽
구나. 죽루(竹樓)로 객관을 열었고, 가시나무 사립문으로 인가를 가렸네. 마을에는 즐거운 소리 적고, 시내와 산
은 비참한 기색이 많구나. 누가 원이 되어 정치 잘하여서, 오고(五袴)주D-001의 노래를 부르게 할꼬." 하였다.
[비고]
연혁 고종 32년에 군(郡)으로 고쳤다. 《문헌비고》
방면 현내(縣內) : 끝은 5리. 동촌(東村) : 동쪽으로 처음은 5리, 끝은 20리이다.
등포(等浦) : 남쪽으로 처음은 10리, 끝은 15리이다. 저포(猪浦) : 남쪽으로 처음은 10리, 끝은 20리이다.
덕곡(德谷) : 남쪽으로 처음은 20리, 끝은 30리이다. 죽곡(竹谷) : 남쪽으로 처음은 20리, 끝은 25리이다.
도천(道川) : 남쪽으로 처음은 20리, 끝은 40리이다. 우곡(亏谷) : 남쪽으로 처음은 40리, 끝은 50리이다.
다소(茶所) : 남쪽으로 처음은 30리, 끝은 60리이다. 두산(頭山) : 서쪽으로 처음은 10리, 끝은 15리이다.
금마산(金馬山) : 서쪽으로 처음은 15리, 끝은 20리이다. 어천(魚川) : 서쪽으로 처음은 15리, 끝은 25리이다.
○ 도민부곡(道民部曲)은 서남쪽으로 16리에 있고 율촌부곡은 동쪽으로 30리에 있으며
운곡소(雲谷所)는 남쪽으로 35리에 있다.
성지 고성(古城) : 남쪽으로 1리에 있으며 성산(城山)이라 칭한다. 둘레는 5리이다.
창고 읍창(邑倉) : 읍내(邑內)에 있다. 남창(南倉) : 남쪽으로 30리이며 덕곡면(德谷面)에 있다.
서창(西倉) : 서쪽으로 20리이며 어천면(魚川面)에 있다.
교량 성탄교(城灘橋) : 북쪽으로 2리에 있다.
토산 닥나무ㆍ옻ㆍ뽕ㆍ감.
사원 봉산서원(蓬山書院) : 효종 경인년에 건립하였으며 현종 정미년에 사액하였다.
백인걸(白仁傑) : 파주(波州)에 보인다.
[주 D-001] 오고(五袴) : 후한(後漢)의 염숙도(廉叔度)가 촉의 태수가 되었는데 백성이 밤에 일하는 것을 막지
않으므로, “예전에는 저고리 하나 없더니, 지금은 바지가 다섯일세.”라고 노래하였다.
무안현 務安縣
동쪽은 나주 경계까지 33리, 서쪽은 바닷가까지 7리, 남쪽은 바닷가까지 30리,
북쪽은 함평현 경계까지 22리이고, 서울에서 7백 88리 떨어져 있다.
건치연혁 본래 백제의 물아혜군(勿阿兮郡)이었는데, 신라가 지금 이름으로 고쳤고,
고려 혜종 원년에 물량군(勿良郡)이라 고쳤다. 성종 10년에 도로 지금 이름으로 부르면서 나주에 붙였고,
명종 2년에 감무를 두었으며, 공양왕 3년에 성산극포방어사(城山極浦防禦使)를 겸임하게 하였고, 본조에서
현감으로 고쳤다.
관원 현감ㆍ훈도 : 각 1명씩이다.
군명 물아혜ㆍ면주(緜州)ㆍ물량.
성씨본현 정(丁)ㆍ박(朴)ㆍ유(兪)ㆍ조(曺)ㆍ윤(尹).
산천 승달산(僧達山) : 현에서 남쪽으로 20리 떨어져 있는 진산이다. 세상에서 전하기를,
"원(元) 나라 때에 임천사(臨川寺)의 중 원명(圓明)이 바다를 건너와서 이 산을 택하여 풀을 엮어서 암자를 만들
었는데, 임천에 있던 그의 제자 5백 명이 원명을 찾아와서 함께 깨달음을 이루었으므로, 승달산이라 한다."
하였다.
유달산(鍮達山) : 현에서 남쪽으로 66리 떨어져 있다. 고림산(高林山) : 현에서 서쪽으로 25리 떨어져 있다.
함박산(含朴山) : 현에서 남쪽으로 60리 떨어져 있다. 정족포(鼎足浦) : 현에서 남쪽으로 30리 떨어져 있다.
바다 : 서쪽과 남쪽이 모두 바다다. 창포(倉浦) : 현에서 서쪽으로 6리 떨어져 있다.
대굴포(大堀浦) : 현에서 동쪽으로 20리 떨어져 있는데, -나주(羅州) 금강의 하류다.- 고려 때에 이 강을 지세에
등져 흐르는 3대강(三大江)의 하나로 쳤다.
○ 김극기의 시에, "푸른 강 천만 이랑에, 외로운 배 떠있네. 봉우리 끝에는 붉은해를 보내고, 바다 밑에서 흰달
맞이하네. 물가에 가득한 모래 서리 같고, 공중에 연한 물결 눈인양. 고기잡이 젓대소리 서너 곡조에,
갈대 사이에서 절로 처량하구나." 하였다.
두령량(頭靈梁) : 현에서 남으로 60리 떨어져 있다. 서쪽으로 흘러서 영암(靈巖) 바다로 들어간다.
덕보포(德甫浦) : 현에서 동쪽으로 18리 떨어져 있으며, 대굴포의 하류인데 남쪽으로 흘러서 두령량이 된다.
이제포(泥梯浦) : 현에서 동쪽으로 15리 떨어져 있다. 근원은 함평현 수산(水山)에서 나오고, 남쪽으로 흘러서
대굴포에 합친다. 탄도(炭島) : 현에서 서쪽으로 30리 떨어져 있는데 사람이 산다.
독도(獨島) : 현에서 남쪽으로 35리 떨어져 있는데 사람이 산다.
부모제지(夫毛梯池) : 성에서 서쪽으로 2리 떨어져 있다.
토산 낙지ㆍ굴조개ㆍ숭어ㆍ모시조개. 죽전 : 현 남쪽 함박산에서 나온다.
감태(甘苔). 쇠 : 현 동쪽에 있는 철소리(鐵所理)에서 나온다. 차ㆍ석류ㆍ감초 : 철소리에 심는다. 비자ㆍ오징어.
성곽 읍성 : 돌로 쌓았는데, 둘레가 2천 7백 척, 높이가 15척이고, 안에는 여섯 개의 우물이 있다.
관방 목포영(木浦營) : 현에서 남쪽으로 68리 떨어져 있다. 나주와 목포가 여기 와서 바다로 들어가는 까닭에 통칭
목포라 부른다.
○ 수군만호 : 1명이 있다.
○ 궁예(弓裔) 때에 고려 태조가 군사를 거느리고 나주 포구에 이르렀는데, 후백제 견훤(甄萱)이 친히 군사를
거느리고 전함을 벌려 놓아, 목포로부터 영암군 덕진포(德津浦)까지 뱃머리와 꼬리가 서로 잇닿았고 수군과
육군이 겹겹이 깊고 넓게 배치되어 군대의 기세가 매우 왕성하였으므로 여러 장수가 근심하니, 태조가 이르기를,
"걱정마라, 싸움에 이기는 것은 단결에 있는 것이지 수가 많은 데에 있는 것이 아니다." 하고, 이윽고 진군하여
급히 공격하였다. 적선이 조금 물러나매 바람을 타서 불을 지르니, 타 죽고 빠져 죽은 자가 태반이고 머리를 베어
모은 것이 5백여 급이었고, 견훤은 작은 배로 도망해 돌아갔다.
봉수 유달산 봉수 : 현에서 남쪽으로 63리 떨어져 있는데, 남쪽으로 해남현(海南縣)의 황원(黃原)에 응하고,
북쪽으로는 나주와 군산(群山)에 응한다.
고림산 봉수 : 남쪽으로 나주ㆍ군산에 응하고, 북쪽으로는 함평현 옹산(甕山)에 응한다.
신증궁실 객관(客館) : 김영(金瑛)의 시에, "들 아가위꽃 만발했는데 낮바람이 가볍고, 여름나무 우거진 데 바다
햇빛 밝구나. 손은 난간에 기대 말이 없는데, 꾀꼬리 앉은 나무 밑에 녹음이 맑으리라." 하였다.
신증누정 남루(南樓) : 바로 성의 남문루(南門樓)다.
학교 향교 : 현에서 서쪽으로 2리 떨어져 있다.
역원 경신역(景申驛) : 현에서 서쪽으로 3리 떨어져 있다.
고막원(古幕院) : 현에서 동쪽으로 30리 떨어져 있다. 고철소원(古鐵所院) : 정족포(鼎足浦)에 있다.
평제원(平梯院) : 현에서 북쪽으로 8리 떨어져 있다.
신증교량 이제(泥梯) : 현에서 동쪽으로 18리 떨어져 있다.
불우 대굴사(大堀寺) : 대굴산에 있다.
○ 김극기의 시에, "서호(西湖)에 흥취를 따라 멀리 백련(白蓮) 스님을 찾네. 대숲 동산은 가을을 일찍 맞이하고,
소나무 가린 창문은 새벽 빛을 늦게 보내네. 푸른 이끼는 깨끗한 길에 다투어 자라고, 푸른 덩굴은 성긴 울타리
를 기웠네. 돌아가는 말고삐 재촉해 무엇하랴, 인간의 길은 평탄하지 않은데." 하였다.
법천사(法泉寺) : 승달산에 있다. 세상에서 전하기를, "중 원명(圓明)이 살던 곳이다." 라고 한다.
총지사(摠持寺) : 승달산에 있다.
사묘 사직단 : 현 서쪽에 있다. 문묘 : 향교에 있다. 성황사 : 현 성안에 있다.
용진명소(龍津溟所) : 두령량 서쪽에 돌산이 우뚝 서 있는데, 그 아래를 용진명소라 하고, 본읍에서 봄가을로
제사지낸다. 여단 : 현 북쪽에 있다.
고적 고수영(古水營) : 대굴포에 있다. 지금은 해남현으로 옮겼다.
남산성(南山城) : 현에서 남쪽으로 2리 떨어져 있다. 돌로 쌓았는데, 둘레가 2천 3백 척, 높이가 11척이고,
안에는 샘 세 개가 있다.
명환본조 권렬(權挒) : 성화(成化) 연간 초기에 정사를 잘 하기로 이름났으며, 지평이 되었다.
신증 유옥(柳沃) : 아전들이 두려워하고 백성들이 따랐다.
열녀본조 자비(自妃) : 현리(縣吏) 박기(朴耆)의 아내다. 박기가 나쁜 병을 얻었는데, 자비가 왼손의 무명지를
잘라서 가루를 만들어 국에 타서 먹였더니, 병이 완전히 나았다. 성종 8년에 이 일이 조정에 알려져서 정문을
세우고 복호하였다.
제영 땅이 바다 어귀 봉화(烽火) 가까운 곳에 잇닿았다 : 권극화의 시에, "땅은 바다 어귀 봉수 가까이 잇닿았고,
성은 산기슭 돌밭 거친 곳에 잇닿았네." 하였다.
[비고]
연혁 고종 33년에 군(郡)으로 고쳤다. 《문헌비고》
방면 읍내(邑內) : 끝은 10리다. 금동(金洞) : 동쪽으로 처음은 20리, 끝은 30리이다. 진례(進禮) : 위와 같다.
좌랑(佐郞) : 동쪽으로 처음은 20리, 끝은 25리이다. 엄다산(嚴多山) : 동쪽으로 처음은 5리, 끝은 10리이다.
석진(石津) : 남쪽으로 처음은 5리, 끝은 20리이다. 박곡(朴谷) : 남쪽으로 처음은 20리, 끝은 30리이다.
일로촌(一老村) : 남쪽으로 처음은 40리, 끝은 60리이다. 이로촌(二老村) : 남쪽으로 처음은 30리, 끝은 60리이다.
외읍(外邑) : 서쪽으로 끝은 10리이이다. 일서(一西) : 처음은 20리, 끝은 30리이다.
이서(二西) : 처음은 10리, 끝은 20리이다. 현화(玄化) : 서쪽으로 처음은 10리, 끝은 35리이다.
신개로(新介老) : 북쪽으로 처음은 10리, 끝은 20리이다.
성지 남산고성(南山古城) : 남쪽으로 2리에 있으며 둘레는 2천 3백 척인데 우물이 3개 있다.
보평산고성(普平山古城) : 서북쪽으로 5리에 있다. 흙으로 쌓은 옛터가 있는데 세상에서 물량시(勿良時) 옛터
라고 전한다. 철성(鐵城) : 동쪽으로 30리에 있다.
진보 목포진(木浦鎭) : 남쪽으로 65리이며 성의 둘레가 1천 3백 6척인데 우물 하나와 못 하나가 있다.
○ 수군만호가 한 사람 있다.
○ 당곶(唐串) : 남쪽으로 50리이다. 선조 30년 이순신(李舜臣)이 해남의 명량(鳴梁)에서 왜적을 대파하였으며,
도청(都廳)이 있는데 처음에는 나주 고하도(高下島)에 설치하였다. 인조 25년에 이 곳에 옮겨 설치하였으며
저군향(儲軍餉)이 비치되어 있다. 별장을 두었다가 후에 폐지하였다.
창고 읍창(邑倉) : 성안에 있다. 동창(東倉) : 동쪽으로 20리이다. 남창(南倉) : 남쪽으로 40리이다.
해창(海倉) : 동쪽으로 20리이다. 강소창(舡所倉) : 남쪽으로 20리이다.
당곶창(唐串倉) : 남쪽으로 60리이고 임해포(臨海浦) 앞이다.
진도 사호진(沙湖津) : 동쪽으로 15리이다. 이산진(梨山津) : 남쪽으로 20리이다.
몽탄진(夢灘津) : 남쪽으로 35리인데 위의 세진(津)은 나주 경계와 통한다.
주룡진(駐龍津) : 남쪽으로 50리이며 영암 경계와 통한다.
등산진(登山津) : 일명 목포진(木浦津)이라 불리우며 해남의 황원 우수영(黃院右水營)과 통한다.
교량 학교(鶴橋) : 읍내에 있다. 등잔교(燈盞橋) : 동쪽으로 10리이다.
토교(土橋) : 동쪽으로 15리이다. 고막교(古幕橋) : 동쪽으로 30리이다. 대교(大橋) : 북쪽으로 5리이다.
부교(釜橋) : 동쪽으로 20리이다. 한교(寒橋) : 서문 밖에 있다. 사교(沙橋) : 북쪽으로 15리이다.
토산 황죽(篁竹)ㆍ감ㆍ닥나무.
단유 용진명소단(龍津溟所檀) : 두령량(頭靈梁)에 있다. 오른쪽으로 석산(石山)이 우뚝 서있으며
그 아래에 용진명소(龍津溟所)가 있다. 본읍에서 봄과 가을에 제사를 지낸다.
사원 송림서원(松林書院) : 인조 경오년에 건립하였으며, 숙종 임술년에 사액하였다.
금작(金●) : 청풍(淸風)에 보인다. 유개(兪槩) : 임천(林川)에 보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