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https://cafe.naver.com/jejusea/3973
상징주의에 대하여
19세기 말에서 20세기 초에 걸쳐 프랑스를 중심으로 일어난 상징파(象徵派)의 예술운동과 그 경향.
.................
좁은 의미에서 상징주의(불어, symbolisme)는,1886년 9월 18일 "피가로 Figaro"지에 Moréas가 발표한 {상징주의 선언 Manifeste du Symbolisme}과 더불어 세상에 알려지게 된 프랑스 서정시인들의 예술적 강령을 말한다.
지금은 조직적으로 또한 매우 단순한 형태로만 알려져 있지만, 19세기 후반기에 이미 그것은 프랑스 서정시의 轉移的 경향으로서 자리를 굳혔었다.이 때 전이적 경향이란, 유럽과 미국 문학에 지속적인 영향을 주면서 현대시 [참조:서정시]의 중요한 구성요건이 된,미학적 이론과 실제에 있어서 크게 소용되는 시학 개념을 말한다.물론 이러한 초국가적인 시각 속에서 상징주의는 통일된 현상이 아니라 여러 가지로 확산된 불명료한 방향을 보여주는데,상징주의적인 것의 공통된 특징들은 오히려 이러한 통일되지 못한 방향 속에서 결정적 핵심의 성격을 갖는다.
프랑스 문학비평과 부분적으로는 영-미 문학비평에서 상징주의란 용어는 1880년과 1920년 사이에 서정시의 폭넓은 영역에 대하여 서술의 근본입장으로서 자리를 굳혔던 반면, 독일에서는 그 쓰임에 따라 그때 그때 사용될 뿐이었다. 이 용어의 사용 가능한 폭은 그 개념의 포괄적이며 초국가적인 사용에 대한 웰렉 Wellek의 변론에서부터,스스로 보들레르 Baudelaire 나 심지어 말라르메 Mallarmé 와 같은 작가들을 고려해서 의식적으로 기피한 프리드리히 H.Friedrich 에까지 미친다.
상징주의적 詩作의 공통된 양상은 시학 개념,창작 방법 그리고 문체적 독특성의 영역에서 찾아 볼 수 있다.주된 특징은 "enseignement","déclamation" 그리고 특히 "개관적 묘사"(Moréas)를 원칙적으로 포기하는 것이다.상징주의적 시작의 특징적인 면모는 외적 현실의 재현을 염두에 둔 모든 의도를 회피하는 데에 있다.이 점에 있어서 모범작으로 상징주의는,낭만주의 이후 사실주의적 그리고 나중에 자연주의적 서술형식의 발전과 나란히 형성되어 온 19세기 문학의 반모방적 경향을 확고히 해주고 있다.이 때 결정적으로 방향타 노릇을 한 사람이 보들레르인데,그는 전통적으로 내려오는 여러 다른 경향들을 합쳐서 변형시키고,하나의 강력한 시학 속에서 이미 분명해진 상징주의를 19세기 문학에 새겨 놓았다.감각적으로 인식된 현실은 더 심오한 존재에 대해서는 단지 암호나 난해한 기호일 뿐이라는 유럽 낭만주의의 중심 개념은 보들레르에 의해서 "악의 꽃 Les Fleurs du Mal"(1875) 속에 수용되었고,특히 시 "조화 Correspondances" 속에서 상징주의적 aesthetica in nuce 로 굳어졌다.인간에 의해서 체험된 현실은 "forêts de symboles"로서 묘사되는데,그 상징적인 것들은,비록 애매하고 모호하지만,현상을 넘어서 본질적인 존재의 "profonde unité"로의 길을 마련해 준다.이러한 단일성은 감각적으로 인식된 것의 조화,즉 사물,음향,색채와 냄새들의 동시감각적 "조화"의 체험을 통해서만 알 수 있다.상징주의적 詩作에 중요하며 모든 것의 토대가 되는 존재의 단일성을 내포하는 "보편적 유추 analogies universelles"라는 개념(역주:유추 Analogie 는 어떤 일정한 특징이나 기능과 관련해서 여러가지 대상이나 현상들을 서로 일치시키는 것을 말한다) 이 성립한다.독일 낭만주의(호프만 E.T.A.Hoffmann)와 바그너 R.Wagner를 주목하면서 보들레르는 자신의 예술비평과 이론서에서 그러한 경험의 필수적 전제조건들의 개요를 서술했다.즉 모방적이 아니라 예감적인 예술가의 상상력을 말하는데,그 상상력의 조합적인 능력은 현실의 다양성 속에서 저 유추들 Analogien 을 인식하고 작품 속에 압축시키는 것이다.보들레르가 포우 Poe({조합의 철학 The Philosophy of Composition},1846)의 사상을 수용한 한 것은 결국 이러한 능력,더 나아가 모든 감정이입의 미학을 정말로 계산적 환상으로 규정하는데 기여했다.
상징주의 시는 넓게는 보들레르에 의해서 해명된 가능성들을 받아들이고 확장하고 있다.이 때 여기에는 19세기 중엽 프랑스의 고답파들(Gautier,Leconte de Lisle)의 예술지상주의적 목적 개념이 내포되어 있는데,물론 이러한 방향의 형식적 공허함과 주제적 인습성은 제외된다.Cros,Corbière,Villiers de L'Isle-Adam 그리고 Mendès 와 같은 작가들은 그것의 상징어와 형태어로써 의미가 풍부한 존재의 본질이 파악되는 서정시의 가능성들을 실험해 본다.그러나 보들레르에 의해서 기초가 세워진 시각들을 이행하고 확장시킨 시는 랭보 Rimbaud 와 베르렌느 Verlaine 가 가담해서야 비로소 형성된다.랭보({Le Bateau Ivre},1871;{Illuminations},1872/73) 는 환상적이며 시적인 언어를 발전시켰는데,그 언어의 "독재적 환상 diktatorische Phantasie"(프리드리히)은 지금까지 친숙한 현상과 개념의 규칙을 파괴하고 시적 상상력에서 새로운 형상과 상징의 영역을 해명해 준다."alchimie du verbe",랭보에 따르면 이 연금술의 힘으로 시인은 관찰자("voyant")로서 "âme universelle"를 불러낼 수 있는 것이다.베르렌느는 서정적 도구를 풍부하게 하고 세련화 했는데,이것은 특히 "musique"와 "nuance"({Art Poétique},1874)를 통하여, 섬세한 음악적 작업의 틀 속에서 단어와 형상에 대한 탈사실주의화 과정을 통하여 이루어졌다.이 때 음악적 작업에 있어서 암시적 음향효과("Chanson d'automne",1866)는 여러 가지로 관계를 맺고 있는 주위 환경을 만들어 내는데,그런 환경의 꿈같은 不定性은 암시적인 命名의 요구에 부응하는 것이다.
이미 언급한 충동들의 많은 것들이 결국 말라르메에게서 결합되어 전문가만이 접근할 수 있는 시 창작과 이해하기 어려운 이론이 서로 조건을 이루는 상징주의 시의 개념을 이룬다.여기서는 우선 모든 서술적,의사소통적 기능으로부터 시적 언어를 근본적으로 분리해 내는 일이 중요하다.일상적이며 학문적인 언어의 "보편적 보고"에 대해서 "Le Dire"를 대립시키는데,그것은 의식적으로 의미를 모호하게 하는 시적 진술이며 현실의 이면에서 상징주의적 창작의 대상과 목표로서 모습을 드러내는 저 절대적인 것만을 약속하는 형상과 단어의 독자적인 세계를 불러내는 것이다.이러한 절대적인 것은 동일성의 확인과 묘사를 통해서가 아니라,절대적인 것에 적합한 것으로서 상징으로 넘어가는 현실적인 것의 변화를 통해서 야기되는 "정신상태 état d'âme"를 통해서만 경험될 수 있다.이것은 고정적인 명칭을 부여함으로써가 아니라 오히려 "évocation","암시" 그리고 "연상"({Sur l'évolution littéraire},1891),다시 말해서 시의 마술적 효과를 내기 위해서 세심하게 고안된 상징이나 유추를 수단으로 한 암시적 현재화 작업을 통해서 달성된다.시적 형상물에서 나머지 현실적인 부분을 제거하려는 말라르메의 노력은 절대적인 것의 개념을 無의 개념에 접근시킨다:"L'Absolu-Néant"(슈미트).이것은 단순한 기호의 기능을 넘어서 절대적인 것을 "순수 개념 notion pure"으로서 제시하는 ({Avant-dire au Traité du Verbe de René Ghil},1886) 절대적인 단어의 시학적 개념으로 이끌어 진다.상징주의적 詩作은 "순수시"가 되고 절대시가 되는데,이는 단어들과 그것들의 내적 관계가 모든 실용적인 연맥에서 이탈하여 독자적이며 지속적인,그리고 이상적인 실제성의 근거를 마련해주는 秘義的 영역을 말한다.이것은 전통적인 체험시가 갖는 서정적 자아의 포기를 의미하는데,시인의 주관이 객관성과 "순수한 작업 oeuvre pure"의 형성물 속에서 사라지기({Crise de vers},1886 ff.) 때문이다.현실적인 것의 제거를 통한 절대시의 성립은,{Sainte}(1884),{Surgie de la croupe}(1887) 그리고 {Toute l'âme résumée}(1895) 와 같은 시들에서 보듯이,말라르메에 있어서는 시의 구조동기가 된다.사물들은 세밀한 은유적 과정의 특성 속에서 탈현실화되지만,순수한 단어의 자율성 속에서 "objet tu"({Magie},1893)로서 언어적으로 새로 창조된다.이것은 말라르메에게는 "Livre"의 이념,즉 전체로서의 현실은 우연의 힘 ({Igitur},1869)에서 빠져나와 시의 이상적인 영속성으로 변화될 수 있다는 꿈이 된다.
말라르메는 자신의 시 작업과 1880년 이후 파리에서 정기적으로 개최된 "Soirées de mardi"와 더불어 프랑스의 많은 상징주의자들,특히 Kahn,Ghil, Moréas,Régnier,Valéry 그리고 벨기에 사람인 Verhaeren 과 Maeterlinck 등의 스승이 된다.비록 상징주의 학파가 구성된 것으로 아니지만, 20세기까지 대부분의 현대시를 가능케 한 상징주의 시의 특징적인 징후가 형성되었다.문학의 묘사적,교훈적 그리고 의사소통적인 모든 목표설정을 포기함으로써 언어를 매체로 한 자율적 형상의 가능성들에 대하여 관심을 집중시키게 된다.단어와 시의 율동적,음악적 성분은,새로운 종류의 형상배열의 비법을 통하여 보충된 채, 고유한 가치를 갖게 된다. 이러한 것은 시를 최대한 압축하고,암시적,미학적 효과를 정확하게 예측하려는 형태의지에 의해서 수행된다.모든 개인적인 것과 주관적인 것을 시적 형상의 물질성으로 변화시키는 자율적이며 불명료한 단어조직이 성립된다.Bertrand와 보들레르의 이론을 다시 받아들여 "poéme en prose"로서 산문을 속성으로 하고,연극(참조:연극)에 서정적 드라마라는 특별한 형태를 가져다 준 서정적 말하기가 적합한 매체가 된다(Materlinck:{La Princesse Maleine} ,1889;Villiers de L'Isle-Adam:{Axel},1890).
호프슈테터 Hofstätter 와 "상징주의" 전시회(New York 1970)의 경우에서 처럼 조형미술에 대해서도 상징주의 개념을 요구하는 시도가 부족했다.하지만 Morea, Puvis de Charannes,Redon 그리고 Ensor 등의 그림 속의 환상적이며 공상적인 요소들이 점검되지 않은 채,상징주의 이론과 실제 창작이 갖는 다양한 의미와 반향수준에 포함될 수 있느가 하는 의문은 남아 있다. 상징주의의 시대적 의미는 주로 문학의 영역과 관계가 있다.그것은 이탈리아에서는 초기 다눈치오 D'Annunzio,스페인에서는 짐메네즈 Jiménez,포르투갈에서는 사-카르나이로 Sá- Carneiro 그리고 라틴 아메리카에서는 다리오 Darío 와 현대의 시작 단계에서 가시화 된다.영국에서는 시몬스 Symons가 상징주의 개념을,와일드 Wilde 와 예이츠 Yeats의 경우에서 보듯이,상징주의의 충동성이 스윈번 Swinburne 과 전기 라파엘 주의자들(역주:라파엘적인 의미에서 예술의 개혁을 추구했던 영국 화가 협회 회원들)의 그것과 서로 융합되어 있는 자국의 문학에 적용시켰다({문학에서의 상징주의자들의 운동 The Symbolist Movement in Literature},1899).러시아에서는 프랑스 상징주의에 고무되어 많은 시적 쇄신 작업,특히 솔로굽 Sologub,브류소프 Brjusov,벨리 Belyj 그리고 블록 Blok 등이 사용한 비현실적이며 환상적 특징을 보여주는 상징어에 관한 작업이 수행되었다.
세기의 전환기의 독일 서정시는 그것이 민족적 전통의 편협함에 구애받지 않고 프랑스 서정시의 영향에 개방적인 태도를 취할 때 특히 상징주의적인 것이다.그러나 그러한 태도를 보인 작가는 극소수에 불과했기 때문에 유럽 상징주의에 대한 독일의 기여는 주로 세 명의 작가,즉 게오르게 George,호프만스탈 Hof- mannsthal 그리고 릴케 Rilke 에 의해서 이루어졌다.여기서 결정적 역할은 게오르그가 맡는다.그는 1889년에도 여전히 말라르메의 "Soirées du mardi"에 참여하면서 자신의 詩作을 위한 중요한 자극을 받게 되는데,이런 자극은 1892년 이후 "예술 草紙 Blätter für die Kunst"에서 강령적 모습을 갖게 된다.그밖에 게오르그는 보들레르,말라르메,베르렌느 그리고 Moréas의 번역자로서 왕성한 활동을 한다.비록 상징주의 개념은 "예술을 위한 잡지"에서 표어로는 채택되지 않았지만,게오르게의 견해와 그의 시는 프랑스 상징주의가 가져다 준 개혁이란 틀 속에서 움직이고 있다.또한 게오르게는 모든 현실적인 것과는 뚜렷히 거리를 둔채,"모든 국가적,사회적인 것으로부터 물러서서" "예술을 위한 예술"을 고집한다.그는 현실적인 것 대신 자율적 詩語의 소환적,마술적 그리고 암시적 작용,즉 "본질적 단어의 도움으로 일깨워 주고 속삭이는 것"을 주장한다.종종 성직자적 몸짓으로 나타나는 게오르게의 문학({영혼의 해 Das Jahr der Seele},1897;{제7의 반지 Der Siebente Ring},1907)은,시를 순수히 미학적 응집과 조화의 산물로서 제시하려는 형식에 엄격하고 흔히 연작의 형태로 나타나는 서정시 속에서 그러한 의도를 실현한다.
초기 호프만스탈은,게오르게의 영향 아래에서,그가 인상주의(참조:인상주의)의 세계붕괴에 대항해서 미학적인 것을 지속적으로 유지시키고자 하는 한 상징주의적 문학을 대변하는 것으로 보인다.시의 언어는 꿈,마법 그리고 비밀 등의 짜맞추기 언어({세계의 비밀 Weltgeheimnis},1894;{위대한 마법의 꿈},1895)에서 산산조각이 난 현실의 파편들을 짜맞추어 전체로서의 삶의 의미를 전달해주는 통합의 매체가 된다.하지만 드라마형식을 만들어 주는({어제 Gestern},1891) 서정적 말하기의 "呪文 Zauberwort"은 불과 몇 년 후에는 '찬도스 Chandos'-위기({편지,Ein Brief},1901/02)와 함께,어떤 현실에도 더 이상 특징을 부여할 수 없는 마술적 언어 유희의 단순한 내재성에 불과한 것으로 드러난다.그 결과 호프만스 은 상징주의적 창작을 포기하고 새로운 방향을 모색한다.보들레르,말라르메 그리고 발레리에 아주 정통한 릴케는 {보들레르}-시(1921)로써 자신의 창작의 상징주의적 배경에 대하여 언급한다:오직 시인만이 산산이 부서져 있는 이 세계를 결합시켰다.또한 릴케는 창작이란,현실의 붕괴과정 앞에서도 상처 받지 않는 미학적 영역을 만들어 내는 것이라고 이해한다.상징주의의 흔적은 후기 작품에까지 미치는데,특히 {두이노 비가 Duineser Elegien} (1923)와 {오르페우스에게 바치는 소네트 Sonette an Orpheus} (1923)의 秘義的 상징표현과 난해한 비유세계에서 두드러진다.
우리가 상징주의의 문학외적인 발생조건의 윤곽을 그려보고자 한다면,1800년 이후 문학의 다른 현상들에 있어서와 같이 현대의 특수한 경험을 고려해야 할 것이다.싱징주의는,현대의 현실세계를 여러 경험들이 多義적이고 다양하게 서로 결합되어서 꿰뚫어보기 어려운 복잡한 영역으로서 의식하게 되는 시대에 대두하게 된다.그러한 다양한 가치체계에서는 사회적 전체성을 직관하는 힘이 퇴색하는데,현실의 통일된 구조가 여러가지로 확산된 연관성 속에서 사라지기 때문이다.통일성은 개별적인 것을 통한 대표성을 넘어 더 이상 직접적으로 파악할 수 없게 되고, 현실의 여러가지 양상들의 복잡하고 다차원적 결합을 통해서만 도달가능한 심층 차원에 놓이게 된다.그럼으로써 개별적인 것은 일반적인 것을 직접적으로 명백하게 해주는 자신의 능력을 상실하게 된다.이러한 문제성에 비추어 볼 때 사실주의와 상징주의는 서로 보충적인 것으로 판명된다.자연주의(참조:자연주의)에 이르기까지 사실주의적 방법은 현실의 다양한 외면을 모방함으로써,현실의 조각들을 계속 축적함으로써 그리고 인상주의(참조:인상주의)로 이어지는 묘사수단의 세련화를 통하여 전체를 얻고자 한다.그것과는 반대로 상징주의는 집중의 방향으로 나아 가는데,즉 선택된 현실의 단어들을 극도로 인위적 그리고 계산적으로 결합시켜 "이념"과 "본질"로서 전체에 대한 예감과 암시를 보장해주는 다의적이며 자율적인 관련조직으로 만드는 것이다.
따라서 상징주의는 현상과 본질,표면과 심층이 서로 분리되는 결과를 보여준다.상징주의자들의 눈에 미학적 형상만이 제시될 수 있듯이,개별적인 것은 "profonde unité"를 아날로기의 파급적 구조의 기능적 요소로 정할 수 있다.하지만 말라르메에게서 볼 수 있는 無와 절대적인 것의 조립은,이념의 통일에 대한 추구는 더 이상 현실에 의해서 개관적으로 주어지는 것이 아니라 "순수시"로서의 시적 통합의 행위 속에서 작가에 의해서 만들어 진다는 사실을 입증해 준다.의미를 굳건히 해주는 심급은 따라서 현실로부터 창조적 주체 속으로 옮겨지는데,이때 창조적 주체는 본질을 더 이상 모방하는 하는 것이 아니라 절대적으로 되어버인 단어를 도구로 하여 창작해야만 하는 것이다.20세기에 깊숙히 들어올 때까지 현대 서정시(참조:서정시)의 본질적인 부분은 자율적 시를 통한,秘義的 형상조직의 순수한 내재성을 통한 의미생산의 이러한 과제에 매달리게 된다.중요한 예를 들면,말라르메의 제자로서 이론과 창작에 있어서 끊임없이 "순수시"의 가능성들과 한계 주위를 맴도는({Le jeune Parque},1917;{Eupalinos ou l'Archite},1923)발레리;이탈리아 秘義主義의 수수께끼같은 은유網(웅가레티 Ungaretti,몬탈레 Montale,가토 Gatto);그 속에서 단편적인 인용으로 위축되어 버린 현실의 "부서진 모습들이" 모여서 형상과 말의 음향이 갖는 다의적인 복합음악체가 되는 엘리옷 T.S.Eliot 의 서정시("황무지 The Waste Land",1922) 등이 있다.여기서 말라르메의 존재론적 목표설정은 사적인 암호언어를 위해서 점점 포기된다.벤 Benn 은 1951년 "서정시의 문제점들 Probleme der Lyrik"이라는 강연에서 이러한 발전 과정을 약설하고 있다.벤은 자신의 "독백적" 詩作을 상징주의 시의 전통과 연관시키고,동시에 그는 예술로 하여금 "내용이 모두 붕괴하는 가운데에 자기 자신이 내용으로서 살아 남기를" 시도케 해주는 "技巧性"의 요인으로서 "절대 시"를 규정한다.
.........................
- '상징'이란 -
상징의 서양어인 'symbol' 은 '함께 내던진다'는 뜻인 그리스어 'symballein'에서 유래한다. 이 말의 어원에는 '하나로 맞추어 보다, 비교해 보다'란 뜻이 들어 있었고, 나중에 '표시, 표지, 표징, 기호'등의 의미를 얻었다. 동양어로 상징(象徵)은 유형의 사물을 이용하여 무형의 주관적인 것을 표현한 것을 가리킨다. 이 때 상(象)은 실재의 세계에 대한 표징을 가리키고, 징(徵)은 징조를 가리키므로 '괘상(卦象)을 통해서 표현된 하늘의 징조'라는 뜻을 갖는다. 즉 인간의 지각을 초월한 만유(萬有)의 근원인 형이상학적 실재(實在)의 세계를 간접적으로 나타내어 암시해 주는 표징이다.
- 상징주의의 일반적 개념-
상징을 사용하여 사물, 정서, 사상 등을 암시적으로 표현하려고 하는 태도와 경향을 의미한다.
- 상징주의의 개념 -
19세기 말 프랑스를 중심으로 일어난 상징파의 예술 운동과 그 경향. 사실주의, 자연주의, 고답파 등의 외면적 객관적 경향에 대한 반동으로 일어난 것으로 상징적 방법에 의하여 형이상학적 또는 신비적 내용을 암시적으로 표현하였다. 보들레르, 랭보, 말라르메 등의 예술 지상주의적 경향을 가리킨다.
- 상징주의의 시대적 조건 -
사회의 상태
19세기 후반의 서양 사회는 경제적으로 고도 자본주의 단계에 접어든다. 이에 따라 사회는 고도로 조직되고 합리화된 체제로 변하여 이익 범위와 관세 구역, 독점 영역, 카르텔, 트러스트, 신디케이트 등이 빈틈없이 사회를 얽어 맨다. 이와 함께 파리 코뮨의 실패에도 불구하고 정치적 불안이 사회에 팽배하였다. 이것은 불원간 1차 세계 대전으로 분출되지만 제국주의의 국가 간의 경쟁과 함께 한 국가 사회 내에서도 노동 계급과 부르주아 간의 갈등이 심화되는 등 사회적 위기감과 불안감이 고조되는 시기였다.
사상적 배경
사회 전반에 팽배한 위기감과 불안 의식은 이상주의적이고 신비주의적인 경향들을 부활시키고, 한편으로 사회의 비관주의에 대한 반동으로서 강력한 신앙 운동을 불러일으킨다. 상징주의가 기대고 있었던 사상은 이러한 사회적 분위기에서 나타난 스웨덴보리의 신비주의 사상, 쇼페하우어의 의지의 철학, 칼라일의 <의상 철학>에서 표된된 상징이 의미의 제시와 은폐를 동시에 행한다는 관점 등이다. 이 밖에 영혼의 불멸성, 영혼의 비물질성 등을 주장한 버클리의 주관적 관념론 등의 영향을 들 수 있다. 또한 직관의 중요성과 체험에 대한 새로운 관점을 제시한 베르그송의 철학을 상징주의의 사상적 배경으로 들 수 있다.
상징주의의 문학 이론
상징주의의 문학 이론은 체계적으로 제시된 적이 없다. 따라서, 작품 속에 자신들의 문학관을 피력한 시인들의 관점이 상징주의의 요체를 파악하는 데 도움이 될 수 있다. 상징주의가 성립된 배경에는 낭만주의와 프랑스의 고답파의 이론이 큰 작용을 하였다. 낭만주의에서는 상징과 알레고리를 구분하여 알레고리는 구체적 이미지의 형태로 추상적 관념을 표현하지만 관념이 이미지에서 어느 정도 독립되는 데 반하여, 상징에서는 이미지와 관념이 완전히 통일되어 분리될 수 없으므로 보수의 의미를 지니고 해석의 다양성을 허용한다는 이론이 성립되었다. 한편 예술 지상주의의 고답파는 시가 메시지를 전달하는 것이 아니며, 예술은 효용성에서 벗어나야 하며, 형식의 순수성을 지향해야 한다는 이론을 제시하였다. 여기서 예술가는 자신이 원하는 것을 마음대로 그릴 수있다는 관점이 생겨났다.
즉 낭만주의에서 발전되어 온 상징 이론과 고답파의 심미주의적 이론이 상징주의를 가능하게 한 것이다. 보들레르는 이러한 경향들을 창조적으로 종합하여 시적 완결성을 기하면서도 도덕적 규범에 매이지 않고 그로테스크한(기괴한) 것이나 퇴폐적인 감정을 문학에 도입하였다. 이로 인해 상징주의는 정제된 표현을 지향하는 아폴로적 경향과 그로테스크한 주인공들이 등장하는 악마주의적이고 디오니소스적인 경향으로 양분되었다. 즉 언어의 연금술사가 되고자 했던 말라르메나 발레리가 아폴로적인 경향이라면, 시인은 견자(見者)가 되어야 한다고 본 랭보는 디오니소스적인 경향으로서 초현실주의의 선구자가 된 것이다.
상징주의 문학의 전개
상징주의는 세기말에 상징파 운동을 낳는다. 하지만 다른 문예 사조와는 달리 상징주의는 유파 활동보다 선구자와 창시자들의 활동이 중심이 되었다.
: 선구자
고티에는 보들레르가 '악의 꽃'을 헌정한 시인으로 고답파라는 예술 지상주의를 이끌었다. 그에 의해서 작품의 완결성, 예술적 가치만이 작품 평가의 기준이라는 관점이 성립되었다. 상징주의가 극도의 예술성을 추구하고 심미주의적 특질을 지니게 된 데에는 고티에의 영향이 크다. 한편 미국의 에드거 앨런 포의 영향도 지대하다.
그는 문학이 규칙에 얽매이는 것을 반대하여 기괴한 것, 퇴폐적인 것을 도입해야 한다고 생각했으며, 낭만주의적 열정을 표현하는 것보다 엄밀하게 계획된 구성에 따라 만들어진 작품이 신비한 효과를 낳는다고 보았다. 포의 이러한 생각은 보들레르와 예이츠 등에게 많은 영향을 끼쳤다.
: 보들레르
상징주의는 보들레르의 '악의 꽃'에서 출발한다. 근대성을 보인 최초의 작품으로 평가되는 이 시집에서 보들레르는 자본주의의 온갖 죄악과 타락과 폭력을 연관시켜 제시하였다. 이러한 것이 곧 아름다움이라는 충격적 선언을 담고 있는 이 시집은 근대 문명의 정화인 도시의 인공적 삶을 재현하여 인간의 약점과 위선을 폭로하고 있다. 즉 도시는 죽음으로 제시되며 그 속에서 현실의 삶이 무기력과 쇠락의 분위기에 빠져있음이 환기되고 있다. 시인은 이러한 것들을 표현하기 위해서 산문적 형태를 시험하기도 하며 언어의 효능을 극대화하기 위한 여러 실험을 하고 있다. 이 시집의 '상응'은 천상계와 지상계, 그리고 인간의 감각들 사이에 상응 관계가 있고 그것은 상징을 해독할 수 있는 시인에 의해서만 파악될 수 있다는 상징주의의 핵심적 교의가 담겨 있는 작품으로 유명하다.
: 베를렌
상징주의 시의 한 특징인 음악성을 가장 잘 구현한 시인이다. 뉘앙스와 음악이 시에서 갖는 효과를 살리기 위하여 의미가 같은 다른 요소들을 배제하는 단안을 내리기도 했으며, 천재 시인으로 알려진 랭보의 재능을 발굴하기도 했다. 은밀한 정서를 통해 심정의 풍경을 그리는 데 뛰어난 재능을 발휘하였다.
: 랭보
견자(見者) 시인으로 불리는 랭보는 감각의 착란과 언어의 연금술에 의해 현실과 다른 세계의 비전을 제시한 천재 시인이었다. 평상적인 경험과 습관으로는 생각하기 힘든, 완전히 계시에 의해 빚어진 듯한 비전을 제시하였으며, 보들레르가 시작한 산문시를 적극적으로 계발하기도 했다. 사물이 배후에 지니고 있는 미를 발견하기 위해 평소의 습관과 태도를 벗어나야 한다고 주장했으며, 자신을 냉철히 투시하려는 태도를 보이기도 했다. 감각을 평소의 무디어져 있는 상태에서 예리하게 분리하여 새롭게 조합함으로써 미지의 세계에 도달하려는 지향을 보이기도 하였다.
: 말라르메
시인이 철저하게 사제적인 태도로 시작에 임하여야 한다고 본 상징주의의 지고의 사제로 불리는 시인이다. 이상 세계의 본질 문제에 대해 냉철한 이성으로 사유하였으며 시에서 암시와 생략의 효과를 극대화하기 위해 노력했다.
즉 ' ~처럼', '~같은' 등의 설명적인 말을 전적으로 배제함으로서 독자들이 스스로 의미를 추론하도록 하는 방법을 썼다. 설명되지 않은 상징들이 구체적인 것과 추상적인 것, 물질적인 것과 개념적인 것, 여러 감각 영역들 사이에 있는 여러 관계와 상응의 양상을 표현하도록 하는 방법을 시에 도입하였다. 말라르메에 이르러서 상징주의는 정점에 이른다.
: 발레리
20세기의 시인인 발레리는 상징주의의 대미를 장식한 사람으로 '시에서 모든 불순물을 제거한 순수시를 주장'한 것으로 평가된다. 그는 "언어의 한쪽 끝에 음악이 있고 다른 한쪽 끝에는 대수학이 있다." 고 말하며 산문과 시의 차이를 엄밀하게 정의하려고 했다. 시가 만들어지는 과정에 대해 깊이 사유한 시인으로 유명하다. 시인의 관념이 곧 시는 아니므로 시인에게는 관념이나 감정을 다른 사람에게 환기시킬 수 있는 제작의 과정이 더 중요하다고 보았다.
.......................
상징주의(Symbolism)란 '어떤 사물을 다른 어떤 것으로 맞추어보다'란 뜻의 희랍어 동사 'symballein' 에서 유래된 것이라고 합니다. 그런데 상징이란 것이 도대체 무엇입니까?
여러분은 고등학교 국어 시간에 유치환의 시 「깃발」의 '깃발'이 인간의 본질적인 순수에 대한 열망을 상징한다고 배웠을 것입니다. 서정주의 시 「국화 옆에서」의 '국화'는 성숙한 여인의 마음을, 이상의 소설 「날개」의 '날개'는 현실초월에의 욕구를 상징한다고 배웠을 것입니다. 그렇지만 상징주의라는 문예사조를 어떤 사람들이 일으켰는지는 잘 몰랐겠지요?
상징주의자들이 상징을 사용하는 이유는 우리의 정서를 유발하여 심미적 욕구를 채우기 위해서입니다. 상징주의자들은 이 세계가 기호적 부분과 의미적 영역, 지상의 세계와 천상의 세계, 물상의 세계와 영혼의 세계로 나뉘어져 있다고 보았습니다
상징주의자들은 이 지상의 물질적 세계는 불완전하며, 허위와 부조리와 죄악과 고통으로 가득 찬 곳으로 간주하여 현실 도피적인 성향이 있었습니다. 지상의 세계는 초월적인 이데아 세계의 그림자요 가상에 불과하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가시적인 것을 통해 불가시적인 것을 탐구하겠다고 했으므로 철학적으로는 이상주의의 범주에 들고, 사조상으로는 후기 낭만주의로 불리고 있습니다. 상징주의자들이 감각·정서·상상을 중히 여기는 점에서는 낭만주의자들과 흡사하지만 감각의 대상이나 실제의 사물이 아닌 또 다른 세계(이데아)를 추구하는 점에서는 변별됩니다. 즉, 상징주의는 이데아를 꿈꾼 플라톤 사상에 연원을 두고 있습니다.
상징주의의 태동은 보들레르와 랭보 같은 천재의 출현이 있었기에 가능했지만 다리 역할을 한 고답파의 덕분이었다고 해도 틀린 말은 아닙니다. 고티에와 에레디아로 대표되는 고답파는 논리와 질서 및 정확하고 세밀한 묘사를 거부하는 대신, 모호하고 몽롱한 우리의 내면 속에 감춰진 감정을 여실히 그려내고자 했습니다.
상징주의자들은 대체로 주관적이고 관념적인 내면세계를 중시했습니다. 지극히 개인적인 은유와 상징을 사용하였고, 존재의 근본적인 신비를 탐색했습니다. 극단적인 개인적 성향은 시를 아주 난해한 것이 되게 했지요.
상징주의의 문을 연 시인 보들레르(1821∼1867)
바로 이 점이 상징주의의 쇠퇴를 앞당겼습니다. 지나치게 오묘하고 난삽한 언어를 사용하여 독자들이 점차 환멸을 느끼게 되었던 것입니다. 수사적인 표현이 지나치게 가식적이고 기교적인 것으로 간주되었고, 설명과 묘사를 배제하고 연상과 유추, 암시와 환기 등 인간 내면의 문맥에 지나치게 의존하게 되었습니다.
또한 유럽 각지에 공산주의운동과 노동운동이 파급됨에 따라 현실 일탈적인 상징주의는 쇠퇴일로를 걷게 되었고, 퇴폐적인 세기말 사상과 결합함으로써 단명하고 말았습니다.
상징주의의 비조(鼻祖)는 역시 보들레르입니다. 시는 오로지 쓰는 즐거움 때문에 씌어져야만 진정한 시가 된다는 보들레르의 시론인 자기목적성은 그때까지 나온 모든 시론을 부정한 획기적인 발상이었지요. 에드가 앨런 포의 소설을 불역한 보들레르는 그의 영향을 받아 예술은 도덕이 아니라 미를 추구해야 한다고 주장했습니다. 보들레르가 말한 미는 일반인의 상식과는 달리 고통·죄악·죽음·부패 같은 음습한 것들과 결부되어 있었습니다.
시집 『악의 꽃』과 산문시집 『파리의 우울』을 보면 기이하고 절망적인 분위기에 휩싸여 있고, 병적이고 인공적인 낙원(술·여자·마약)을 갈구하고 있습니다. 그는 기이하게도 해골·흡혈귀·썩은 시체·구더기 등 혐오스러운 것에 대해 관심을 기울였고, 인생에 대한 혐오감과 황홀감을 동시에 표현하기도 했습니다.
흑인 혼혈아 창녀를 사랑했듯이 하층사회에 대한 가학적이고 도착적인 기호벽도 보들레르의 전매특허품이었습니다. 보들레르는 낭비벽이 심했다기보다는 평생 정상적인 직업을 갖지 않고 살아갔습니다. 그래서 의붓아버지의 조종에 의해 한정치산자 선고를 받고는 한평생 가난을 면치 못했지요. 『악의 꽃』은 법정에서 외설서 판정을 받고 금서가 되었고요.
한국-시인들에게-많은 영향을-준-시인-베를렌느
(1844∼1896)
이런 것들만 보면 보들레르는 시인이라기보다는 기인이었다고 할 수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그는 감각의 중요성을 확인해준 위대한 시인이었습니다. 청각과 후각, 촉각과 시각 등을 혼합한 공감각적(共感覺的)인 이미지는 보들레르가 세계 문학사에 첫선을 보인 것입니다.
시집 『예지』를 낸 시인 베를렌느는 시의 음악성을 중시하였고, 완전한 아름다움에 대한 그리움을 표현하여 김영랑에게 어느 정도 영향을 주게 됩니다. 자연의 한 순간의 시각적 인상을 그리는 인상파 화가들의 영향을 받아 몽상과 현실이 뒤섞이고, 여운이 감도는 심상을 잘 묘사했습니다. 베를렌느의 시는 우수와 권태의 미, 여성적인 여린 감성을 갖고 있어 우리 근대시 초창기에 많은 영향을 주었습니다.
10대 소년이었을 때의 작품으로 세계 문학사에 길이 남게 된 랭보. 사진작가 카르자가 1871년 11월에 찍은 랭보의 사진.
17세부터 19세까지가 시인으로서 활동한 기간이고 그 이후로는 모험가의 생을 산 랭보는 누가 뭐라 해도 천재였습니다. 『지옥에서 보낸 한 철』은 10대의 소년이 쓴 시라고 하기에는 비범하기가 거의 천의무봉(天衣無縫)입니다.
랭보는 시인은 모름지기 견자(見者, 투시자)여야 한다고 했습니다. 감각의 착란(錯亂)의 힘을 빌어 현실세계의 배후에 있는 신선하고 강렬한 세계의 비전을 일순간에 보여주어야 한다는 것이 그의 견자 시론의 요지였지요. 신선하고 강렬한 세계의 비전은 색과 향기, 감각과 음향, 물질적인 것과 추상적인 것의 착란을 표현해야 이루어질 수 있다고 랭보는 믿었습니다.
『목신의 오후』라는 대표적인 시집을 갖고 있는 말라르메는 말의 일상적인 뜻이 파괴되고 극도의 암시성만 남은 시를 썼습니다. 사물보다는 언어에 주도권이 있는 시를 냉철한 계산에 의해 썼지요. 말라르메 하면 박목월 시인이 떠오릅니다. 말라르메는 의미의 암시와 정서의 환기를 통해 영혼의 본질을 드러내려 했으며, 사물과 현상의 순수관념을 표현했습니다.
우리 나라 최초의 번역시집은 1921년에 김억이 낸 『오뇌의 무도』입니다. 상징주의 시인들의 작품을 번역한 이 시집에는 세기말의 오뇌와 우수가 듬뿍 담겨 있습니다. 상징주의자들의 영향을 특히 많이 받은 황석우는 「碧毛의 猫」 「愛人의 引導」 등의 시에서 죽음에 대한 예찬을 다분히 관념적이고 환상적으로 했습니다.
상징주의 자체는 프랑스의 시에 국한되어 있었고, 네댓 명의 시인이 붓을 놓는 것과 동시에 사라져버렸지만 그 영향은 20세기 내내 세계 곳곳으로 퍼져나갔습니다. 우리는 이 시어가 무엇을 상징한다, 이 시의 (회화적,시각적,청각적) 이미지는 무엇이다, 이 시는 공감각적인 표현을 썼다는 등의 말을 하면서 상징주의자들의 작업을 다시금 떠올리게 되는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