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을 써본지가 그 얼마나 되었나?
학창시절 이후니까 40년이 넘은것 같다!
회장님 장로님께서 권석창 집사님이 안나왔으니까 대타로 나를 보고 산행후기를 올리란다.
누구의 명령인데 거절 할 수는 없고 대충 쓰기로 맘먹고 붓을 잡았다.(옛날 옛적 표현이군...요샌 뭐라 표현하나?ㅋㅋ)
2012.1.21 10:20에 3호선 경복궁역에 도착하니 많은 아마토사너님들이 모여 있다.
회장님,총무장현집사를 비롯해 이원열,임정빈,김수철,박성범집사님! 박정례,이영자권사님,그리고 서선순,장성자,정헌자,이영숙,박인숙집사님
앗! 그리고 4룡이 보인다. 우선 올해가 용의 핸데 4마리(동물의 수는 이렇게 세는게 맞다)의 용이 보인다.
원룡,강룡,정룡 그리고 권룡 얼마나 반갑는지...
용해 첫 등산에 용 4마리(자꾸 이렇게 세어서 죄송하지만 동물을 셀때 학교에서 그렇게 배웠으니 양해바람)가 한꺼번에
나왔으니 운수 대통의 시작이라고 생각드니 너무 좋은 출발같다.
좀 있다 도착한다는 이성희 집사님을 두고 출발했다.
출구를 나오자마자 빗방울이 떨어진다 그바람에 정룡과 권룡이 도중하차하고 남 10 여7 합17명이 338미터의 인왕산을 오르기 시작 했다.
사직공원 사직단을 왼쪽으로 하고 배화여고를 지나 황학정 국궁터를 지나 오르기 시작했다. 가끔 돌아 보면 잔뜩 찌뿌린 날씨속의 서울 중심부가 너무 아름답게 느껴진다.
그러기를 1시간 반 정상에 다다랐다. 서울 시내가 한눈에 들어온다. 가는 곳마다 사복 군인들이 워키토키를 들고 행여 다른 짓을 할까봐 눈을 두리번 거린다.
왜냐하면 오늘의 등산코스 특징이 청와대 지붕을 보고 가야 하는 등산코스이기 때문이다.
인왕산 봉우리 아래가 바로 치마바위이다.
종로구 사직동 사직공원 서쪽에 있는 넓고 평평하게 생긴 바위로, 중종의 첫 번째 왕비인 단경왕후와 관련된 전설에서 유래된 이름이다. 즉 반정으로 왕위에 오른 진성대군(晋城大君)이 중종이 되자 그 부인 신씨(愼氏)는 친정아버지 신수근(愼守勤)이 반정 때 피살되었는데 반정을 주도해온 박원종(朴元宗) 등이 죄인의 딸은 왕비가 될 수 없다하며 반대하자 인왕산 아래 사직골 옛 거처로 쫓겨나 살게 되었다. 중종은 부인을 잊을 수 없어 경회루에 올라 인왕산 기슭을 바라보곤 하였으며, 신씨는 이 말을 전해 듣고 종을 시켜 자기가 입던 붉은 치마를 경회루가 보이는 이 바위에 걸쳐 놓음으로써 간절한 뜻을 보였다. 이 일로 인해 사람들은 이 바위를 치마바위라 불렀다. 또 중종이 사직단에 나올 때에는 언제나 말죽을 쑤어 주었다고 한다. 일설에는 옥인동에 있는 인왕산 (정상 밑)중턱 병풍바위 앞에 우뚝 솟은 바위를 치마바위라고 한다.
정상에서 기념 촬영후 서둘러서 왔던 길을 도로 내려와야 북악산을 올라 간다.
다 내려 온 곳에는 윤동주 시인을 기리는 공원이 조성 되어 있다.
죽는 날까지 하늘을 우러러
한 점 부끄럼이 없기를,
잎새에 이는 바람에도
나는 괴로워했다.
......
윤동주의 서시 학창시절 한번쯤 다 외어본 그 시....
시비 앞에서 여집사님들 앞다투어 연신 사진을 찍어 댄다.
창의문 입구 왼쪽으로 가면 반정공신들이 광해군 폐위를 논위 했다는 세검정이고 오른쪽으로 가면 청와대 뒷길로 간다.
가는 도중 68년 1월 21일 바로 오늘 김신조 일당들이 기습적으로 내려와 이곳에서 전투가 벌어 지고 당시 종로경찰서 최규식 서장이 총탄에 스러진 장소에 동상이있다.
(뒤에 알고 보니 회장님이 1.21을 생각못하고 정한날인데 기가 막히게 장소와 날짜를 잘 정했다 생각된다.)
북악산 초입에서 신분증 제출후 출입패찰을 목에 걸고 북악산을 오른다 두번째 오름이다.
가파른계단에 숨이 목에 찬다.
잠간 쉬어 보니 북쪽으로 북한산 능선이 아름답게 누워 있다. 항상 동쪽에서 바라본 북한산의 또 다른 아름다운 자태이다.
그러길 1시간 반만에 북악에올랐는데 실제 이름은 백악산(343m)이다.
바로 청와대를 둘러 쌓고 있는 바로 그 산이다 .김영삼정부때 개방한 것으로 알고 있다.
가끔 정장 군복을 한 군인들이 왔다갔다 하는데 정말 건장하고 씩씩하고 늠름하다. 그리고 군복도 최근 지급한다는 디지털
군복을 착용하고 있어 더 멋지고 고급스럽다(?)
바로 아래 전개되는 서울중에 서울! 바로 서울의 심장부! 그 자태가 너무 자랑스럽다.
장현 집사님! 사진이 잘 나왔으면 좋으련만.....자꾸 자꾸 권룡이 그리워진다.(그렇다고 장집사님의 사진솜씨를 폄하하는
것은 절대로 아님. 그리고 사진기가 참 안 좋은것으로 아는데 회장님 판공비로 카메라 하나 바꿔줍시다!!)
내려오다 보니 15발의 총탄 흔적을 남긴 1.21사태 소나무가 있다. 그날의 치열했던 전투를 상상하게한다.
이제 숙정문(북대문)을 지나 말바위 안내소에 와서 번호표(?)를 반납하고 자유(?)의 몸이 되어 하산을 서두르게 된다.
마침 펑어짐한 잔디밭(와룡공원 쉼터)에 둘러 앉아 회장님의 그 특유의 말솜씨로 한양천도에 대한 비하인드 스토리를 강의하시고
종종걸음으로 삼청공원 뒷길로 해서
북촌을 지나 헌법재판소를 왼쪽으로 하고 대원군이 천하를 호령하던 구름재(운현궁)를 지나 악기골목으로 해서 저녁(?) 밥집한일장에서 이성희집사님이 쏘시는 갈비탕을 끝으로 대단원의 막을 내렸다.
무려 5시간반에 해당하는 대장정이었고 불암산 두개를 탄 셈이었다.고생하신 여집사님들 보폭 맞추시느라 대단하셨고요.
진두지휘하신 회장님,후미에서 낙오병 치닥거리로 고생하신 장현 총무님 감사의 말씀 전합니다. 올핸 어떤 일이 있더라도 판공비가 있어야 할 틴디. 어짤거냐?
(도움말)
(4대문)
1.숭례문 (남대문) : 국보 제1호
2.흥인지문 (동대문) : 보물 제1호
3.돈의문 (서대문)
4.숙정문(북대문)
(4소문)
1.혜화문 (동소문)
도성 동북방의 성문으로, 수유현(지금의 수유리)을 거쳐 의정부·양주로 이어지는 동북로의 관문 역할을 하였다. 당시 북문인 숙청문은 풍수상의 문제와 교통로의 연계성 문제로 평상 시에는 일반인의 통행이 금지되었다.
2.소의문 (서소문)
서소문은 서대문과 남대문 사이 지금의 서소문동 대로에 위치한 문으로 창건 당시 소덕문(昭德門)이라 하였으며, 광희문과 함께 시구문 역할을 하였고, 서소문 밖에서 주로 사형이 집행되었다.
3.광희문 (남소문)
광희문 역시 다른 도성문들과 마찬가지로 1396년(태조 5)에 도성이 완성될 당시 동남문으로 건립되었다. 실제로 목멱산 기슭, 지금의 장충단에서 국립극장 앞을 지나 한남동으로 나가는 고개 마루에 남소문이 있었다. 이 문은 경복궁을 기준으로 보아 불길한 방향에 있다 하여 폐문하여 결국 광희문이 도성의 동남문으로 되었다
4.창의문 (북소문)
지금은 자하문으로 더 알려져 있는 창의문은 경복궁의 주산인 백악산의 서쪽에 위치하고 있으며, 태조 5년(1396년) 창건되었다. 조선시대 이 일대를 자하동(紫霞洞)이라고 부른데서 성문도 자하문으로 불려지게 되었다.
정말 글쓰기 힘드네.....
저는 이것이 산행기로 처음이자 마지막이며
앞으로 계속 권룡, 행복한나무,등등 글재주 많은 분들 분발하시고 특히 행복한 나무님은 말만 행복하다하지 마시고 회원들에 그 좋은 글솜씨를 자랑해 주세요. 기대합니다...
끝까지 읽어 주셔 감사하고 중간에 재미없다고 안 읽어신 분도 새해 복 많이 받으세요! 사랑합니다!!!
첫댓글 잘 쓰면서 겸손 떨기는 ~~ 앞으로는 좀 더 자주 자주 산행후기에서 만날수 있기를 기대 합니다. 수고 하셨습니다.
아~우! Goldnbell 님 덕분에 역사공부 많이 했습니다, 전 도대체 구분도 못하고 술렁술렁 다녀 왔었요, 많이 창피해요, 산행후기 잘 읽었습니다.
40년 만에 글쓰신다고 하는데 엄살인가? 지금도 잘 쓰시는데 자주 쓰시면 글도 늡니다. 그리고 치매도 안걸린답니다.
글로 자주 만나기를 기대합니다.
오랫만에 색다른 글을 보았습니다. 감사합니다. 자주 뵈었으면 합니다.
정말~필마!이십니다^*대단하십니다!!!열린입이 않닫아 지네요*
영상기록물을 보듯~유익하고 잊어가던 역사공부도 되어 고맙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