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랜 동안을 맘속에 숙제처럼 가지고 있던 계획을 드디어 실행에 옮기기로 하였다.
설악산 대청봉 등정!
‘산꾼’들이야 자주 가고 대수롭지도 않은 일이겠지만 백담산장을 학창시절에 잠시 들른 것과 권금성을 10년 전에 가 본 것이 고작인 나로서는 간단한 일이 아니었다.
우리나라 제일의 산이라고들 하여 늘 “한번 가보기는 해야 하는데” 하고 벼르고 있었으나 자신이 없어서 실행에 못 옮기고 어려운 숙제처럼 끙끙거리며 엄두도 못 내 왔었지만 이번 가을은 이리 저리 '후지르고' 다니기로 작정한 터에 무리수를 둬 보기로 했다.
혼자 나서기는 너무 무료할 것 같아 이리 저리 동행을 구하다 겨우 한 명을 '건졌다'.
우리 둘은 오후 3시에 드디어 그 오랜 세월의 숙원이었던 대청봉을 향한 '장도'에 올랐다.
하남을 거쳐 양평을 지나 홍천까지 길은 비교적 좋아서 거칠 것이 없었다.
홍천 지나서부터 아직 공사 중인 길들을 보면서 옛날의 일차선 길을 달려야만 했지만 그도 길이 한적해서 비교적 달리기가 수월했다.
우리의 설악산 산행은 사실 이미 막차도 아닌 '버스 지나간 자리'이기에 길은 한적했다.
이미 나는 오대산 단풍도 거의 진 후라는 것을 알고 있었고 또 평일이니 당연히 길은 한적하리란 생각을 했다.
봄에도 매화타령을 하다 겨우 남도 거의 끝자락의 선암사 뒤뜰에서 가까스로 시든 매화꽃을 무겁게 매달고 있는 모습을 겨우 끝물의 끝물로 좀 보더니 가을의 설악 단풍도 그 치맛자락 끝단이나 보게 되나 보다.
조금 가다 춘천 막국수를 아주 잘하는 곳이 있다는 친구의 권유로 ‘허르스름한’ 식당에 들려 막국수를 시키는데 그 집 주인 마님의 헤어스타일이 참으로 특이했다.
앞에서 센 선풍기 바람을 맞고 있는 듯이 머리카락을 뒤로 눌러 세워 올리고 뒷부분은 붕 떠서 날렵하면서도 그 허풍스러움이 참으로 희한한 모습이었다.
이런 시골에 나이 지긋한 분의 헤어스타일로는 너무나 기이했다.
막국수를, 친구가 오랜 세월을 짬짬이 들려서 먹은 맛보다는 덜한 맛으로 식사를 끝냈다.
사실 나는 아직 시장기를 느끼기도 전이었기에 어쩔 수가 없었다.
나도 전에는 맛난 집을 찾아서 거리 마다하지 않고 다니고 어디 먼 여행이라도 하려면 먼저 맛난 식당을 알아보고 현지에 가서도 택시기사나 현지인한테 맛난 집을 물어보곤 하면서 엄청 미식가인 척을 했었다.
하지만 그것이 다 허구였다.
맛이란 것이 결국 나에게는 소금기와 시장기의 차이 일뿐 특별한 것이 아니었다.
거기다가 장도 안 좋아서 맛있다고 조금만 과식을 하면 탈이 잘 나는 통에 그런 식탐은 벌써 접었고 요즈음은 아예 먹고 나서 속은 편한 차라리 ‘맛없는 식사’가 더 반갑다.
그 식당을 나서며 나는 "사장님 헤어스타일이 참으로 멋집니다!"란 특별히 필요치도 않은 ‘아부성’ 발언을 꽥 지르고는 다시 차를 달려 인제, 원통을 새로 난 4차선으로 표시 안 나게 지나니 용대리 삼거리.
거기를 우측으로 꺾어서 한계령 밤길을 넘으면서 나의 출발이 너무도 잘 못 되었다는 탄식이 나왔다.
그나마 남은 단풍이라면 이 한계령 초입에 좀 있을 뿐일 텐데 이 길을 밤길로 가서 밤길로 돌아 와야 하니 올해의 설악 단풍은 그 치맛자락도 못 잡아 보고 갈 것이란 생각에 나의 계획의 한심함이 밤길 내내 느껴졌다.
한계령을 넘어서 오색약수에 도착하여 우리는 구멍가게에서 막걸리 한 통과 안주를 사서 그 가게 주인인 어눌한 노인이 권유하는 어눌하지 않은 민박 집 주인 뒤를 쫄쫄 따라갔다.
산 속의 자그마한 식당인데 방은 새롭게 수리를 했는데 방바닥도 따뜻하고 방에 딸린 화장실도 그런 대로 깨끗하였다.
여장을 풀고 막걸리 한잔씩을 걸치는데 주인집의, 말로는 세 살이라 하고 손가락은 네 개를 펴서 보이는, 둘째인 여자애가 속내의 바람으로 들어 와서 이리 저리 말참견도 하는데 문득 우리 애들 어렸을 때 생각이 났다.
애들은 어릴수록 역시 제일 큰 기쁨 덩어리이고 누구나 이런 애들 마음만 가지면 천당은 미어 터져서 신축공사를 하기에 바쁠 거란 생각이 났다.
내일 새벽에 올라가면 먹을 것이 필요하기에 우리는 도시락을 시키려고 가격을 물으니 주먹밥이 4천원, 도시락이 5천원이란다. 시골 인심이 후한 것이니 엄청 좋은 도시락이려니 싶어서 두 개를 시키고 싶은 마음도 있었지만 먹을 것이 아주 없는 것도 아니고 가격도 마음에 걸려서 우리는 그냥 한 개만 시켰다.
낮 동안의 운전이나 전 날의 미진한 잠도 있어서 깊이 잠이 들 법한데도 이런 저런 꿈들과 함께 잠을 설치면서 시계를 보니 4시다. "아직도 시간여는 더 자야 는데……." 하면서 뒤척이다 겨우 잠을 들 즈음 핸드폰의 알림 소리가 요란하여 우리는 부스럭대며 잠을 깨고 준비를 불이 나게 한 후에 어제 저녁에 시킨 도시락을 다른 짐과 함께 작은 배낭에 집어넣고 산을 향했다.
한 새벽임에도 입장료 징수원은 틀림이 없었다.
산 정상에는 지금 40keg 몸무게도 날라 갈 정도의 강풍이고 땅도 얼어서 추위도 엄청나난다.
그러잖아도 온갖 용기와 만용을 부려서 여기 섰는데 문지기의 겁줌이 나를 엄청 움츠려들게 했다.
파카도 안 가지고 온 나로서는 춥다는 말에 당연한 것이었다.
"아이젠이 필요해요!" 하니 그런 정도는 아니란다.
차 속에 넣고 온 것을 다시 빼오라고 안 하는 것이 다행이었다.
얼쩡거리던 한 분이 우리 팀에 합류를 한다. 우리가 무슨 전문 산악인도 아닌데 우리한테 합류를 하다니 고목나무에 기대는 격이지만 처음 보는 사람에게 그런 말을 할 처지는 아니고 또 아직은 어둑하니 그렇게 같이 올라가는 것도 서로가 좋을 것이란 생각이 들었다.
아직 어두운 관계로 우리 친구의 수중 전용 특수 후레쉬를 비추면서 오르는데 어디쯤 해선가 바람이 갑자기 불어 대는데 그 산림요원 말마따나 정상은 엄청 바람에 세겠구나 싶었다.
괜히 겁나는 마음이 앞섰지만 이제 뒤 돌릴 일도 아니고 어차피 작은 모험은 뒤의 더한 곱빼기 즐거움으로 낙엽 쌓이듯이 하는 것인지라 억지로 용기를 부리며 발을 앞으로 내딛었다.
드디어 첫 개울이 나왔다.
민박집 젊은 주인아저씨가 분명히 계곡 물을 네 번 지나게 된다고 하였다. 이제 세 개가 남았고 물은 마지막에 뜨면 된다고 하였으니 물을 놓치지 않겠다는 다짐을 하면서 산을 또 오르니 이제 주변은 거의 다 밝아서 사방이 눈에 들어 왔지만 여러 날은 노래 부르듯이 했던 그 놈의 ‘낙엽’은 어디로 숨어 날아들었는지 역시 코 백이도 안 보였다.
한 참을 올라가도 물소리가 안 들리기에 그 주인이 아무리 산 밑에 살아도 요즈음은 산을 오르지를 안 해서 착각을 했나 하면서 마음에 원망을 쌓아 가면서 제 일 쉼터를 지나 또 한참을 올라가니 갑자기 어디선가 물소리가 들리는데 그곳이 ‘설악폭포’란다.
물은 맑고 색깔도 옥색에 너무도 반가워서 우리는 땀을 닦고 물통에 물도 채우고 나는 주변의 어수룩한 곳에 쪼그리고 앉아서 늦은 아침 볼일을 봤다.
그 때 막 우리와 올라 왔던 사람이 사진을 찍어 달라기에 엄청 티를 내면서 사진을 찍어 주니 잘 나왔는지도 모르면서 고마워한다.
자세히 보니 나이도 젊고 그렇게 순박할 수가 없었다.
카메라 꺼낸 김에 우리 사진도 찍어 준단다.
찾을 기약이야 어찌 되었던 우리는 어깨동무하며 온갖 폼을 잡고 계곡물 위의 나뭇가지 사이로 보이는 원근의 능선의 겹친 모습들을 배경으로 사진을 찍었다.
이어서 산을 오르는데 생각보다는 날이 좋았다.
거기다가 우리의 산행 코스가 남향이어서 햇빛도 우리와 함께 오르는 지라 추위는 느낄 짬이 없었다.
단지 조금 일찍 오르기 시작해서 어느 능선 쯤 해서 해돋이를 봤어야 하는데 그 예상을 못 한 것이 너무 아쉬웠다.
늦은 해돋이고 잡목들 사이로 보이는 해였지만 눈부시었고 그 위용이 예사롭지 안했다.
한 참을 오르며 우측 멀리를 보니 이상하게도 해가 내려가 있었다.
아니 이럴 수가 있단 말인가!
이상하게 멀리 능선 위가 환하게 그 주변만 밝은 것이 막 해가 뜨는 것 같기도 한 것이 신기했다.
구름에 해가 가리었나하고 아무리 봐도 분명 산등성이 뒤에 해가 숨어 있는 것이 아닌가?
친구에게 말을 하니 히죽거리며 해는 "그 위에 있잖아!" 한다.
거참 바로 그 위로 해가 있었다.
나이 탓인가? 산이 험한 탓인가? 눈이 어둑해선 가?
그런 착각을 하다니 내가 겸연쩍었다.
특이한 자연현상에 내가 착각을 했나 보다. 그렇더라도 바로 위의 해를 못 보다니…….
또 오르는데 수녀 두 분이 어그적 어그적 거리며 산을 오른다.
“하나님하고 가까이 가서 기도 하려고 그러죠?”하니
웃기들만 한다. 언젠가 비구니들을 산에서 만난 적은 있지만 이렇게 수녀를 만나기는 처음이다. 세상의 많은 직업 중에서 하필 수녀일까?
수녀복 너머로 어려워하는 모습들이 인간적이어서 말 붙이고 싶었지만 그 한마디로 말문을 닫았다. 그들이 지나 온 인고의 시간을 나의 농 섞인 말이 오히려 더럽히지 않을까 해서이고 한편 생각하면 그들이 걷는 그 신심의 나라가 이방인의 입장에서 보면 애처로울 뿐이기에 말이 아껴 졌는지도 모르겠다.
그들의 그런 ‘님향한 마음’에 그분들의 기쁜 선택에 아랑곳없이 왠지 내 마음이 짠 한 것은 왜 일까?
아마 내가 유별나게 신심을 갖기조차 어려울 정도로 그녀들보다 훨씬 나약한 마음의 소유자이기에 그런 지도 모르겠다.
조금 더 오르는데 산기슭에서 이상한 소리가 들린다.
“억!”하고 내는 외마디 소리.
그 소린 꼭 어릴 적에 우리 아버지가 ‘뒷간’에서 인기척으로 내시던 그런 소리 같았다.
그 인기척의 표시음이 지금도 귀에 쟁쟁하건만 아주 어릴 적 일이 되어 버렸고 그 소리의 주인공도 이미 오래 전에 딴 세계의 분이 되셨으나 그 알 수 없는 짐승의 외침이 내 마음에 오버랩 되면서 일순 나를 상념에 잠기게 만들었다.
이제 정상까지 8부 능선 정도 온 모양이다.
적당히 조망하기에 알맞은 능선인지라 뒤를 돌아보니 갑자기 장관이 펼쳐진다.
이제까지는 가끔씩 뒤를 돌아 봐도 끈질기게 우리가 떠나온 마을하고 호텔들만 보이더니 이제는 그 것들은 숲에 가려서 안보이고 멀리 태백산 줄기의 각 영봉들과 왼 쪽으로 그 줄기를 따라 남북으로 달리는 동해의 파도들이 하얀 선으로 이어져 바다와 산이 어우러진 장관이 펼쳐지는 것이 아닌가? 정녕 신이 우리 민족에게만 유별나게 선사한 장관이 아니고 그 무엇이란 말인가?
그 아름다움에 숨이 턱 막혀오고 그 웅장함에 무엇에 라고 할 것도 없이 감사한 마음이 절로 일었다.
남쪽으로 이어진 산맥의 거침없는 내달림들이, 맑은 중에도 아침 해를 받아 적당히 피어오른 운해의 파다 위에 줄지어 서있는 모습과 왼 편으로 이어지는 너른 창해의 하모니는 하나의 교향곡이라고 할만한 그 모습은 정말이지 장관이었다.
구름이 많으면 먼 산이 적게 보일 것이고 그런 운무가 없으면 산들 간의 중첩미가 반감하련만 적당히 어우러진 그런 것들이 서로 간에 조화를 위해 완연히 내 보이면서도 적당한 절제로 그 낱낱의 자태를 드러냄에 주저함이 없었다.
이 광활한 깊이는 카메라나 그림으로 나타내기엔 역부족일 것이다.
그저 이렇게 눈으로 확인하여 머리에 각인 시키면 최상일 것이다.
운무 사이로 이어 지는 봉우리 들이 결국은 점으로 사라지는 그 끝까지 바다와 하늘과 하나의 조화로 눈에 들어 왔다.
오로지 지금 이 순간은 나의 미적 탐닉을 위해서만 그 장관이 펼쳐진 듯하다.
아름다움이 커도 거기에만 못 박고 서 있을 수 없는 노릇이기에 발을 내딛어 우리는 정상을 향했다.
이제 숨도 가쁠 즈음 정상부분에서 사람들의 외침소리가 들린다.
바로 앞에서 나는 소리같것만 아직도 정상은 꽤 먼지 그 정상은 영 보이지 않다가 드디어 정상 부분에 다다랐다.
조그만 움막 같은 산장이 우측에 있고 거길 조금 지나니 바로 대청봉 정상이다.
대청봉 정상이라도 뭐 별다른 것은 없었고 그저 대청봉이란 돌새김과 동판 안 쪼가리가 여기가 정상이란 것을 말할 뿐이다.
오를 때 입구에서의 말과는 달리 햇볕도 좋아선지 바람이 좀 있을 뿐 의외로 춥지도 않았고 포근한 느낌이 들 정도였다.
사방을 둘러보니 수많은 영봉의 연속이고 저기쯤이 금강산이고 해금강이겠지 하는 곳과 그 한 쪽으로 바다가 가없이 연결되어 있었다. 그 광활함이란 글이나 말로서 어찌 형용할 수 있을까? 그저 입이다 떡 벌리다가 다시 다물기나 할 뿐 달리 표현할 말이 없다.
참으로 넓고 넓은 산이오 바다였다. 그리고 그 장관이 주는 압도적 아름다움이란!
이래서 금수강산이라고 하나보다.
감상에 젖어서 있을 즈음 갑자기 헬기가 저 아래부터 기어 올라오고 있다.
그러더니 바로 정상 옆의 헬기장에 내리더니 사람을 여러 명 토해 놓고는 거짓말처럼 나라가 버렸다.
아니 정상까지 헬기로 올라오다니?
거참! 이해가 가기도 하고 안 가기도 했다.
우리는 아까의 그 카메라 든 분과 사진을 주거니 받거니 찍고는
정상 한 쪽 양지바른 곳에 쪼그리고 앉아서 그 비싼 도시락을 풀었다.
그래도 밥은 있었고 김치도 있었다. 적당히 밥풀을 세가며 아침 겸 점심을 때우는데 그 사진 찍던 분은 식사는 했다고 과자만 큼직 막한 것으로 풀어 놓고는 열심히 사진셔터만 누르는 것이었다.
풀어놓은 과자가 어찌나 내 입에 딱 맞던지 그러잖아도 부족한 배를 그 친구 사진 찍는 사이 혼자서 거의 다 먹었다.
적당히 정상의 흥취에 도취하기도 지겨워 질 무렵 우리는 하산을 하기 시작했다.
중청봉 대피소에 잠시 들려 그 어둑한 분위기 느껴보고 화장실을 다녀 온 후에
전화기가 반가워 박스에 들어가니 카드전화라 포기하고 다시 내려가는 길을 잡아 돌아 나왔다.
오르는 길도 쉽지는 안했지만 내려가는 길도 만만하지는 안했다.
그래도 오르막길보다야 나아서 한참을 내려오는데 정상에서 먼저 떠난 아까의 그 수녀 두 분이 보인다.
앞서는데 그 두 분 중에 한 분이 넘어 진 모양이다.
“어이쿠!”하는 소리에 뒤 돌아 보니 정강이에 흙은 조금 묻었어도 웃음으로 쳐다보는 터라 부상은 아니구나 싶었다.
다시 올라가서 ‘신심 덩어리’인 수녀를 안아 세울 일도 아니고 해서
“그런 사소한 일에까지 하나님이 도와주시겠어요”하고 우리는 다시 내리막길을 내려왔다.
사람들이 간간히 눈에 띌 뿐 한산한 산길은 여느 산이나 다름없었다.
단지 멀리 보이는 원경의 폭이 내려올수록 줄어 들 뿐이었다.
얼마만큼 내려오니 드디어 안 보이던 물줄기가 다시 보이고 희운각 대피소란다.
희운각으로 넘어가는 다리 아래에 여인들이 돌 깔고 앉아 점심들을 먹는데 상추쌈을 해가며 푸짐한 상을 차렸는데 침이 넘어가고 구걸할 마음이 간절했지만 옆의 친구가 체통 지키라는 눈짓을 줘서 그냥 아무렇게나 만든 산장의 나무 의자에 앉아서 땀을 좀 식혔다.
맑은 하늘을 몇 번인가 올려다보며 컵라면 먹는 이들 서너 명을 쳐다보다 우리는 다시 내리막길을 재촉했다.
좀 내려오니 다시 냇물 흐르는 소리가 우리의 발목을 잡았다.
냇물을 넘어 돌아드니 작은 ‘옥녀탕’이 거기 오롯이 있었다.
두부를 숟가락으로 떠낸 듯, 아이스크림을 숟가락으로 파먹은 듯이 그렇게 ‘옥녀탕’은 전설처럼 있었는데 그 물의 옥색이 참으로 아름다웠고 간간히 떠 있는 낙엽의 어우러짐이 식혜에 밥풀떼기 떠 있듯이 맛나 보였다.
물이 흘러 들어와 떨어지고 흘러 내려가는 곳의 오묘한 흐름이며 물위에 떠 있는 낙엽들의 조화로움은 넋을 놓고 바라보기에 충분했다.
마음 같아서는 벗어부치고 들어가 일시 상상의 선녀들과 어우러지고 싶은 마음이 굴뚝같았으나 그들과 놀기 전에 염라대왕을 만날 수도 일이니 그냥 생각으로만 헤엄을 치고 말았다.
우리는 다시 흘린 땀들을 그 옥녀들의 치마폭이 찰락거리는 물에 닦고는 길을 내려 왔다.
얼마를 내려오니 ‘천당폭포’란다.
천불동 계곡이니 짐짓 ‘천’자 돌림으로 이름 지은 것 같기도 하고 불교 용어만 쓰자니 미안해서 천당폭포라고 했는지는 잘 모르지만 위에서 밑으로 떨어지는 물의 흐름이 오모하고 옥색과 낙엽의 색들의 어우러짐이 역시 장관이었다.
마음이 아무리 사악한 이라도 이런 곳에 서면 일순 그런 마음이 눈 녹 듯할 법했다.
세상의 사기꾼들을 다 모아서 천불동계곡 단체관광을 시키면 세상이 좀 맑아지지 않을까?
줄 난간에 턱 괴고 서 있는데 홍콩사람들이 지나가고 백인도 지나간다.
세계적인 명성의 장소지만 나만 한 반세기를 돌아서 지금에서야 여기에 선 모양이다.
세상의 오묘한 곳이 많겠지만 모든 명화들이 다 각각의 아름다움을 품고 있듯이 여기도 나름의 아름다움을 뽐내고 있으니 보는 이가 세계제일이라고 마음먹으면 이 또한 세계제일의 명작이 아니고 무엇이겠는가?
그 천길 낭떠러지의 깎아지른 '브이'자 협곡의 맨 끝자락은 칼날이 들어갈 만한 틈도 없이 양쪽의 절벽이 만나는데 그 곳을 부드러운 물이 감로수처럼 골짜기를 맴돌아 부드럽게 흐르다가 결국은 물웅덩이나 작지만 아담한 폭포를 만나거나 또 널따란 너럭바위를 쓰다듬기도 하고 커다란 물의 도가니를 휘감아 돌기도 하고 또는 비치색이랄까 녹색이랄까 옥색이랄까 싶지만 결국은 물감으로나 인위적으로는 표현할 수 없는 색의 도가니의, 깊지만 밑이 훤히 들여다보이는 여울에 소리도 없이 스며들어가기도 하면서 물줄기는 천상에서 사바의 세계로 이어 지는데 그 장관은 가히 사람이 사는 동네의 모습이 아니라 선계 그 자체인 듯하다.
어느 곳은 커다란 돌기둥이 언제인가 먼 과거에 물길 위에 떨어져 있는데 로마에 갔을 적에 만난 폐허의 기둥이 그런 모습이었다. 자연이 만든 커다란 기둥이란 점과 인간이 다듬은 기둥의 차이가 분명한 것이기는 하지만 그 느껴지는 숨결은 신이나 인간이나 하나인 듯하여 신비감을 더하였다.
어느 곳은 그 깎아 들어간 모습이 채석장 같기도 하고 어느 곳은 물 속으로 하나의 추상화된 모습으로 형상을 이루고 있는데 누군가 물 속에 덩어리진 자국으로 뜻 모를 그림을 우리들 환쟁이가 평면의 화폭에 그렇게 갈구하지만 결국은 허구로 남고야 마는 커다란 밀도나 깊이를 통해 근접 못할 예술의 완성을 보여주고 있었다.
고개를 들어 그 끝이 까마득한 절벽을 올려다보고 있으면 그 화폭의 크기에, 인간이 만들어 낼 수 없는 그 화면의 완결감과 웅장미에 그저 입을 벌리고 다물 엄두가 안 날 뿐이다.
그 깎아지른 돌들의 어우러짐은 하나의 통일로 완성되어 선적인 느낌이나 덩어리진 느낌이나 각자의 마음에 맞게 상상할 여지를 충분히 남기고 있었다.
신에 의해 주어진 끝없는 상상의 세계를 읽기도 벅찬 인간의 머리로는 그저 그 형태의 한없음에 탄복할 뿐이다.
각각의 형상들은 태초에 창조된 모습의 절대적 완결 미와 오묘함과 신적인 장엄함 때문에 인간들이 만들어내는 미란 것은 한낮 어린애 장난도 못 된다는 자괴감만 들게 만들 뿐 그런 다 제 나름의 이야기가 있을 법도 하지만 그런 이야기를 엮어 내기는 능력부족이고 다 각자의 상상의 폭만큼만 신의 섭리에 다가 갈 뿐이었다.
그 알 수 없는 형상의 맨 꼭대기에 하나의 화룡점정으로 찍혀서 외롭지만 고고히 서있는 소나무의 형상이나, 알 수 없는 불심의 응어리로 무수히 서 있는 상상 속의 불상 같은 형상들의 이미지나, 절벽 사이나 가운데에서 우뚝하니 오롯이 두드러져서 그런 완벽한 완결 미에도 불구하고 또 다른 경지의 세계를 보여 주려고 애쓰는 모습들은 경이로운 완성에의 신적 집착력 그것이 아니고 무엇이랴!
내가 가지는 완성을 향한 노력은 그런 것들에 비하면 정말이지 ‘새 발의 피’도 못 되고 마이크로소프트사 창업주의 재산과 내 재산의 차이처럼 비교가 안 되는 그런 엄청난 격차로 거기에 하나도 아니고 무수히 많은 '천불동'의 숫자로 나를 기절시키며 아무렇지도 않은 듯이 우주적 완성으로 서 있었다.
감탄만 하면서 마냥 침만 흘리고 있을 수도 없는 노릇이라 우리는 또 발을 옮기니 모퉁이에 고드름이 달려 있다. 그것도 딱 두 개!
우리는 이것이 산신이 우리에게 주는 '산삼줄기의 한 부분을 휘돌아 감다 흘러내린 고드름'선물이니 그 기운을 천세 만세에 뻗치기 위해서는 반드시 먹어야 한다면서 꺾어 입에 넣고 '오두둑'거리니 그 맛이 우리의 허황된 생각만큼이나 기가 막혔다.
‘양폭’!
아마 ‘음폭’도 있는 모양이다.
사람의 상상력이 다 제각각이니 왜 양폭이고 음폭인지 알 수 없는 일이었다. 특히 음폭은 '출입금지'구역이니 비교가 안 되서 아쉬웠지만 물만 봐도 아름다운 것이기에 그런 '글자적' 해석은 뒤로 하고 물끄러미 바라보다 내려오니 절경은 끝이 없고 계곡물은 계속 아래로 신의 기침으로 흐른다.
양폭 산장은 너무도 초라한 모습으로 인간의 '짓거리'가 바라서 산의 일부가 되어 버린 듯한 그런 어정쩡한 인위적 모습으로 서 있었다.
그 뒤로 솟아 있는 바위 한 복판의 우뚝 솟은 돌 형상은 어디선가 본 모습인데 자세히 기억을 더듬으니 운주사 계곡에서 본 아무렇게나 만들어 세운 미륵불의 모습이었다.
인간이 만든 신의 형상과 자연이 만든 신의 형상이 이렇게 우연히 만나다니 신기한 마음이 일어서 산장에서 라면 부스러기 팔면서 ‘산스럽게’ 보이려고 턱수염 기르고 머리 길러 '쩜맨' '가게 상자' 속의 사내에게 그 절벽의 이름이 무엇이냐니까 '이름 없어요!'라고 퉁명스럽게 말한다.
옆에 있는 또 다른 그 친구인 듯한 사람이 "이름을 직접 지어 보슈!"한다.
해서 나는 '미륵대'라고 이름 짓기로 했다.
'옥녀탕'에 이어서 두 개를 지은 셈이다. 누군가 나하고 동감하는 이가 있었는지 있을 런지는 모를 일이지만 그래도 그런 구체적인 느낌을 남들은 전혀 못 느껴서 그냥 이름 없는 '물구뎅이'로, 절벽으로 남은 것이 이해가 잘 안 갔고 아쉬운 마음까지 들었다.
또 내려가니 오련 폭포!
박통 시절에 유신반대하다 그 무섭다는 '유디티'에 끌려가 겨우 목숨 건져서 오늘에 이른 나의 친구 왈 "햐아! 저기를 미끄럼 타고 내려오면 좋겠다!"한다.
"물은 깊고 긴데?"하니
"거기는 잠수해서 지나면 되지!"한다.
그 친구는 지난날의 뼈아프던 고충보다 오늘날의 작은 기쁨이 더 큰 모양이다.
그 친구를 생각하면 같은 시기를 '무지'로 또는 '무관심'으로 여기 계곡물처럼 수많은 질곡을 태연히 관통해온 내가 그저 죄스러울 뿐이다.
아마 다섯 개의 물웅덩이가 이어지고 물줄기가 작은 떨어짐이 이어져서 ‘오련’이라고 했나보다. 우리나라가 아무래도 불교를 오래 신봉해 온 민족이다 보니 불교적인 이름이 많은가 보다. 종교적 깊이의 자로 이 웅장한 자연을 재본들 그 오묘함을 한낮 인간이 만들어 낸 신의 경지로 가름이나 할 수 있으랴!
이어지는 귀면암!
귀신의 얼굴 같아 그렇게 붙여다는데 나는 그런 느낌의 단어를 만들어 낸 사람들과는 지금 반대방향으로 움직이며 보는 형상이다 보니 그런 느낌은 안 들고 그 꼭대기 왼 쪽은 낙타의 얼굴처럼 오른 쪽의 솟은 바위조각은 기린의 얼굴처럼 보일 뿐이지만 아마 산을 나와 반대 쪽에서 오르면서 보면 그런 이들의 마음을 이해 할 정도로 귀신 얼굴처럼 보일지도 모르겠다.
사람을 처음 만나서 관찰할 때 얼굴 정면을 위아래 훑어보지 무슨 노예시장에서처럼 이리저리 휘둘러보거나 뒷모습부터 보지 않듯이 산도 종주니 넘느니 하는데 의미를 둘 것이 아니라 먼저 밑에서부터 훑어 올라와서 다시 그 길을 내려가면서 올라오면서 놓친 부분을 샅샅이 훑어 봐야 제대로 보는 것이 아닐까 싶다.
특히 이처럼 웅장하고 기다란 천혜의 산이나 계곡을 볼 때는 더욱 그렇다는 생각을 나는 이번에 했다.
산이라는 것이 봐도 봐도 끝이 없고 매번 달리 보이겠지만 그런 중에도 그 첫 인상의 감동을 더욱 추스르는 방법은 오른 길로 다시 내려가는 길이란 생각을 하게 된 것이다.
다시 더 내려가니 사람들의 물결이 더욱 많아진다.
어느 젊은 남녀는 좁은 산길이고 나란히 걷기도 힘든데도 평생을 그런 마음의 끈을 놓치지 않고 살기라도 하겠다는 듯이 앞뒤로 손을 잡고 올라온다.
그런 중에 이상하게 수녀들이 많이 보인다. 아까의 수녀와는 다른 ‘무데기’인 것이 분명한데 아마 지금이 수녀들의 휴가철이라도 되는 모양이다.
수녀들도 자연의 아름다움을 몸으로 느끼면서 수행을 할 때 하나님의 창조의 위대함에 감동되어 더 신심에 가까이 갈 수 있는 일인지도 모르겠다.
드디어 입산 통제소의 철망 문을 나서니 비선대가 우뚝한 모습으로 우리를 반긴다.
그 위용이 가히 ‘작품스럽고’ 옆에서 보니 선녀가 가볍게 바람을 맞으며 날아오르는 모습이다.
옆으로 약간 기우뚱하면서 풍성한 옷자락들을 펄럭이며 날아오르는 모습은 의전 천지창조에서 손가락을 내밀며 나르는 신의 모습 같기도 하고 그 위용이 그리스 작품 중의 ‘니케의 여신상’같기도 하고 참으로 신묘한 모습의 형상으로 하늘 높은 곳에서 운무를 헤치며 날아다니며 속세의 일에는 아랑곳없이 천상의 시원함에 한껏 취해 있는 근접할 수 없는 그런 영원불멸의 신형상의 세계랄까?
우리가 볼 수 있는 인위적 작품의 그 어떤 높이보다 더 높은 곳에 그것도 나르는 모습으로 영원스럽게 버티고 있는 그 자연의 작품은 인간의 모든 한계를 초월해서 너무도 처연히 오랜 세월을 감동의 회오리로 그렇게 버티고 서 있다는 것이 신기하기만 하다.
여기서야 비로소 관광지 같은 느낌이 나면서 사람도 붐비고 손 마이크 소리도 들리고 수녀들을 위시한 단체 여행객도 보이고 해서 드디어 이제까지의 선계에서 인간 세계로 하산한 느낌이 들었다.
한참동안 ‘비선대’를 올려보다 밑의 흐르는 물과 너럭바위를 보니 드디어 인간세계의 시작을 알리는 ‘싸인’들이 여기 저기 새겨져 있다. 큰 글씨 작은 글씨 깊은 글씨 얕은 글씨의 이름들, 부자간의 이름들이 모두 한자로 파져 있다.
아마 그렇게 새겨 놓으면 자기들도 그 각인 된 이름의 생명만큼 오랜 세월을 장수 할 수 있다고 생각했는지 아니면 죽어서도 그 이름이 수천 년 동안 불려 지기를 바랐는지 선녀와 같이 영원히 살고 싶은 바람의 새김인지 잘 모르겠으나 다 부질 없는 일 일 텐데도 그런 깊이진 모습으로 이름을 남긴 것을 보면 옛날 사람들이 어리석다 하겠다.
하긴 지금도 자연보호로 못 파게 해서 그렇지 아니면 정이나 끌을 가지고 산을 오르는 사람들이 있을지도 모르겠다.
김일성이도 이름을 돌에 새겼다지 않는가?
무려 한 획의 깊이만도 2m가 넘는다니 그 획의 길이는 얼마나 엄청 나겠는가?
인간들의 어리석음은 예나 지금이나 같은 것인지도 모르겠다.
그런데 그 돌들이 많이 깎여서 이제는 이름들이 많이 허물어져 있었다.
처음에는 누가 이 곳까지 ‘그라인더’라도 가지고 와서 일일이 이름들을 지웠나 했더니 자세히 보니 이름들이 한 쪽으로만 깎여서 지워지고 있었는데, 그것은 너럭바위 위라도 홍수 졌을 때 물들이 넘쳐흐르며 돌들이 굴러 떨어지면서 이름의 굴곡을 때려서 지워낸 자국이었다.
인간의 어리석음도 자연의 힘 앞에서는 그렇게 지워질 뿐이다.
그래도 자연의 힘이 인간의 부질없는 생각을 지운다는 교훈적인 내용을 그 이름자들이 담고 있으니 그나마도 조금은 다행이다 싶었다.
이제 드디어 거의 평지이다.
계곡은 계속해서 우리들을 좇아 왔지만 그 위용이나 청명함이나 신묘한 기운은 많이 쇠잔해졌고 그렇게 평지를 걷기를 갈망하던 우리의 몸뚱이들을 편하게 해 줄 만큼의 아늑함과 잔잔함과 시원함만을 간직한 산책로로 바뀌었다.
시멘트나 아스팔트길인 것이 너무 아쉬웠지만 자연스러움을 싫어하는 인간들이 우매함이 어디서나 넘치니 방법이 없었다.
그러건 말건 그늘 길을 한참을 내려오니 쭉 파헤쳐진 물 없는 계곡이 보인다.
돌이 필요해서인지 계곡을 정리하려고 그랬는지 그 밑바닥을 완전히 뒤 집어 놓고 돌들이 다 헝클어져 있는데 이제까지의 그 자연스럽던 모습들을 마구 헤집어 놓아서 계곡의 내장이 다 보이는 듯했다. 큰 것 작은 것 해서 수많은 돌들이 세월의 흐름을 고스란히 몸에 새기면서 오랜 세월을 그렇게 알알이 깊이 박혀서 지내 왔다는 것이 신기했다.
또 걸어오는데 사람들의 모습이 점점 눈에 더 들어오고 어느 쯤 해서는 그 유명한 ‘신흥사’ 입구가 나온다. 중들이 서로 그 절을 차지하려고 무슨 소림사 영화처럼 ‘각개목’ 난투극을 벌였던 그 절 입구에는 정말이지 하늘땅만큼 커다란 불상이 떠억 앉아 있었다. 워낙이 커다란 위용의 천연 작품들을 많이 보고 내려 와서 그 크기가 실지보다 작게 느껴져서 그렇지 그것도 엄청난 크기의 작품이었다. 아마 이런 불상의 크기를 만들려면 구리가 ‘에밀레종’만든 것보다도 몇 백배는 더 들 거다.
그 엄청난 크기에 놀랍다. 그 불상의 목적이 통일을 기원하기 위해 만들었다니 그런 이상한 명성을 드날린 절 앞에 그렇게 엄청난 돈을 들여서 그런 목적으로 만들어 세웠다는 것이 약간은 기이해 보였다.
중생들의 바람이 그런 식으로라도 작동이 되어서는 통일이 된다면야 그런 불상 수백 개인들 못 만들겠는가? 하지만 어림 반품어치도 없는 노릇이니 그저 답답한 마음이 그 뚱한 불상의 얼굴만큼이나 답답했다.
몇 몇 여인네 들이 무릎 끓고 고개 조아리면서 염불을 외는데 그 들이 과연 통일을 기원하고 있는지 가족의 안위를 기원하고 있는지 알 수 없는 노릇이었다. 하긴 무소불위한 신이니 들어 주기로 말하면 꼭 통일이라는 공적인 일이 아니라고 야단칠 리도 없고 안 들어 줄 리도 없는 노릇일 것이다.
그 대불 앞의 향로가 ‘백제대향로’의 모습을 본 따서 만들은 향로였다. 그 옛날 어느 절이 불타면서 좇기 기라도 했던지 황급히 땅 속에 묻혀서 오랜 세월을 땅속에서 긴 잠을 자다 거의 완전한 모습으로 고스란히 깨어난 기적의 향로로서, 우리나라 예술품 중에서 최고의 값진 작품이라는 그 향로의 모습이 이렇게 어설픈 공간에 볼품없이 재생되어 있는 모습이 애처롭기까지 했지만 그것은 순전히 나만의 배부른 상상일 뿐 다른 이들은 그 불상의 크기에 주눅 들어 피해라도 가는 듯이 무심히 그 앞을 오갈 뿐이었다.
나는 그저 힐끗 일견을 주고는 그 부처의 애매모호한 표정에 나도 같이 애매모호한 표정을 던지고는 설악동을 벗어나는 버스에 몸을 실었다.
이어서 찾아간 곳은 대포동 포구의 좌판 횟집.
오늘은 날이 안 좋아서 배가 바다를 못 나간 관계로 회감이 별로 없단다.
우리의 친구는 워낙이 물고기와는 가까운 사이라서 척 보면 알아서 확실한 것을 시킨다. 이런 곳에서는 광어 도다리가 아니고 ‘히라스’인지 ‘히야스’인지 하는 방어란다. 그리고 또 오징어란다. 오징어란 놈은 하도 방정맞아서 양식이 안 되고 방어도 아직은 양식이 안 되는 고로 다 자연산이니 어설픈 양식 회감보다 가격도 싸고 훨씬 맛이 난단다.
나야 뭐 알게 없으니 그 친구의 손가락질에 의지해서 떠온 회를 먹는데 오징어야 익히 아는 맛이지만 방어는 그 부드럽고 감칠맛이 유별났다. 참치회의 제일 맛난 부분을 먹는 맛이었다. 이어서 나온 소주 한 잔에 매운탕을 곁들이니 최소한의 경비로 최대의 맛을 뽐내는 순간이었다.
부른 배를 부여잡고 약국에 들러 나의 시원찮은 위장의 성능을 드높이고는 다시 오색약수를 향하는 버스를 잡아탔다.
아니! 그런데 이게 웬 일인가?
그 손님 중에 어느 고등학생 녀석이 벌떡 일어나더니 극구 나보고 자리에 앉으란다.
약간의 취기가 있어 얼굴이 약간 단풍지고 버스에 올라타다 앞 발꿈치가 턱에 걸려 조금 흔들렸기로서니 나한테 이 젊은 나한테 대청봉도 끄떡없이 넘어 온 나한테 자리를 양보하다니?
세상에 말상에 이런 일이 있을 수가 있단 말인가?
아무리 사양을 해도 막무가내였다.
사람이 이렇게 늙어 가나보다 하고 한숨을 푹푹 쉬는데 친구도 즐겁다는 듯이 히죽거리면서 자리에 앉으란다.
좀 있자니 어느 젊은 아주머니가 젖먹이는 둘러업고 작은 애는 손을 잡고 차를 타기에 나도 “절호의 찬스다!”하고 자리에 앉으라니 이 아줌마 아예 뒤로 도망을 가 버린다.
참으로 난처한 상황이었다. 나도 아예 뒷자리로 도망을 가버렸다.
차는 굴러서 드디어 우리는 오색에 도착. 우리는 ‘싸우나 탕’에 가서 나는 몸을 ‘정그어’ 온탕 냉탕을 댓 번 들 락이니 모든 피로가 말끔히 가시는 듯하다.
사실 이번 산행은 나로서는 엄청난 모험이었다. 나이로나 경험으로나 다 만만치 않은 일이었지만 다행히 그 동안에 테니스로 오랜 세월 단련된 몸이라서인지 비교적 생각했던 것보다는 쉬운 편이었다.
이제 이 기상을 어깨에 들쳐 업고 남으로 내려간, 눈물나도록 흐트러진 단풍잎들을 좇아서 역시 아직도 미개척지로 남아 있는 지리산 천왕봉을 오를 판이다. 이제 거기만 오르면 나의 산에 대한 구도자적 염원은 끝나는 것이고 나의 금수강산에 대한 사랑은 그 열매를 맺게 될 것이고 나의 작업의 일단에 마지막 남은 단풍의 아롱짐으로 매달릴 것이다.
우리는 밤길을 달려 출발지인 분당에 돌아와 즐거움을 다시 자축하면서 또 다른 시간의 미래의 만남에 굳은 언약과 우리사이에 늦게 핀 우정의 깊이를 일부러 악수로 도장 찍으며 헤어졌다. 아마 내일은 엄청 다리가 ‘땡길’ 것이지만 그 아픔이 사라져도 오늘의 이 기쁨을 한참 오래 계속될 것이다.
새삼 내가 살고 있는 이 자연에 고마움을 느낀다.
내가 살고 있는 이 땅의 인간들도 오늘 내가 보고 온 이 자연의 백분지 일만 되도 우리나라는 충분히 살만한 나라이고도 남음이 있을 것이다.
첫댓글 마치 제가 그곳에 가 있는 것과 같이 착각을 할 정도로 자세하게 현장묘사를 하셔서 저도 즐겁게 '다녀왔습니다'
가장 아름다움이 깃들어 있는 것은 사람이었다. 그 곁에 자연이 부조를 한것 이군요. 능선을 다 넘으셔다니... 축하드립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