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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는 각종 공부(公簿·국가기관의 장부)를 찾아보고 법원의 현황조사서까지 꼼꼼하게 살폈다. 유치권(담보설정 권리)과 법정지상권(건물주의 권리)을 주장하는 사람은 전혀 없었다. 근저당권 1건과 가압류 2건이 전부였다. 여름에 찍은 사진을 통해 보니 전형적인 강원도 옥수수 밭이었다. 너비가 4m 정도로 추정되는 길이 나 있었고, 땅 모양도 도로에 직사각형으로 붙어 있었다. 용도지역은 체계적인 개발이 가능한 계획관리지역으로, 특별한 규제는 없었다. 현장에 가 보지 않아도 틀림없겠거니 하고 4차 입찰에 참여했다. 경쟁자가 한 명뿐인 데다 유찰 가격보다 높은 7200만원을 써 내 무난히 낙찰받았다.
그리고 계절이 바뀌어 겨울이 찾아왔다. 그는 경매로 매입한 땅이 궁금해 현장을 찾았다. 승용차 내비게이션이 밭 앞까지 정확하게 안내해 줬다. 땅을 둘러보다 밭 한가운데 동그란 흙더미가 있어 다가가 보니 분묘 아닌가. 봄이 오면 약초를 재배해 볼까 하던 참인데 무덤이라니, 가슴이 덜컹 내려앉았다. 하지만 곰곰이 생각해 보니 큰 문제가 아닐 수도 있겠다 싶었다. 경매기간 중 아무도 나타나지 않은 걸 보면 후손이 찾지 않는 분묘일 거라는 짐작도 들었다. 그렇다면 무덤을 없앨까. 하지만 후환이 있지 않을까 꺼림칙했다.
아니나 다를까 전문가에게 자문했더니 “오래된 분묘는 관습법상 분묘기지권이 인정될 수 있다”고 했다. 분묘기지권이란 조상의 묘가 남의 땅 안에 있더라도 그 자리에 묘를 계속 둘 수 있는 권리를 뜻한다. 다만 솟아날 구멍은 있었다. 분묘기지권이 인정돼도 후손이 오랫동안 분묘를 관리하지 않았다면 땅주인이 임의로 분묘를 이장해도 된다는 것이었다.
그는 번개처럼 홍천으로 달려갔다. 반나절 동안 마을 어른들께 인사하고 진맥 짚어 드리며 분묘에 대해 조심스레 이것저것 물었다. 80세 넘은 할머니조차 누구 묘인지 모른다는 말씀에 가슴을 쓸어내렸다. 특히 추석이나 설날에 성묘하는 이들을 여태껏 본 적이 없다고 했다. 전혀 관리되지 않은 분묘가 확실시됐다. 그는 동네 주민들과 상의해 묘를 옮길 수 있었다. 분묘기지권에 해당하지 않는 경우라 십년감수한 것이다.
땅을 경매 등으로 사들이는 과정에서 분묘 문제가 종종 등장한다. 이를 대수롭지 않게 생각했다가 손해 보기 쉬우니 조심해야 한다. 우선 분묘가 있다면 분묘기지권의 성립 여부가 중요하다. 분묘기지권의 성립 요건은 다음과 같다 첫째, 땅주인의 승낙을 얻어 분묘를 만들면 괜찮다. 둘째, 땅주인의 승낙 없이 분묘를 만들어도 20년간 땅주인이 별다른 문제 제기를 안 했다면 권리가 인정된다. 셋째, 후손이 묘지를 계속 관리하는 동안 분묘기지권이 성립한다.
이처럼 합법적으로 조성한 묘지에 대해 권리를 인정해 주므로 임의로 이장하거나 철거할 수 없다. 물론 후손이 오랫동안 돌보지 않은 묘는 땅주인이 이전을 요구할 수 있다. 그렇더라도 후손이 나중에 나타나 분묘기지권을 주장하면 난감하긴 마찬가지일 것이다. 그래서 땅을 좀 아는 부자들은 여름에 시골 땅을 잘 사지 않는다. 풀과 나뭇잎이 무성해 묘 등 변수가 되는 것들이 눈에 잘 띄지 않기 때문이다. 겨울엔 잘 보인다. 분묘를 사전에 확인했지만 꼭 사고 싶은 땅이라면 묘지 이전 청구가 가능한지 확인한 뒤 경매에 뛰어들어야 한다. 경매로 재미를 보고 싶으면 추운 겨울에 땅을 보러 다니는 노고쯤은 감수해야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