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 어떤 날에도, 이불은 나를 안아준다.
세상 모든 이불은 '소락하다'를 품고 있다
- 글: 서덕. 브런치 작가
소락하다.라는 말을 처음 들은 때는 일곱 살 즈음 어느 봄날이었다. 그날을 떠올려본다.
집안일을 마친 나의 할머니 강순옥은 자리에 드러눕는다. 나는 쪼르르 다가가 강순옥을 주무른다.
딱딱하게 굳어 쩍쩍 갈라진 손끝을 뽑듯이 잡아당긴다. 엎드린 그녀 위로 올라가 허리를 지근지근 밟는다.
하지정맥류로 핏줄이 구불구불 도드라진 종아리를 주무른다. 발가락을 뾱뾱 당겨준다.
그녀가 좋아하는 불경 테이프를 틀고, 이불을 감아준다. 아기를 담요로 감싸듯, 두 발을 중심으로
이불 가장자리를 말아 단단하게 감싼다. 바리톤 질감의 염불소리와 포근한 이불에 몸이 풀린 강순옥은
나지막이 추임새를 내뱉는다.
‘아이고, 소락허다’
처음 들은 낯선 말에 어린 나는 이불에 손을 댄다. 살갗이 부드러운 천에 닿았을 때의 촉감. 하늘하늘한
겉감이 피부를 간질이고, 기분 좋은 무게감에 몸이 눌리는 느낌. 그렇게 나는 소락하다.는 제주말을 몸으로 배웠다.
서울말로 직역하자면, 사락사락하다 같은 멋없는 말일 것이다. 언어의 질감은 직역할 수가 없다.
발음에 있어서도, 소가 아니라, 시옷과 아래아 음이다. 오와 어 사이의 중간음. 혀 안쪽의 목구멍이 떨리며
나는 소리. 서울 글로는 옮길 도리가 없다.
소락하다.를 입에 머금으면 촉감 이외에도 다양한 감각이 피어오른다. 이를테면 그 시절 옥상의 풍경이 펼쳐진다.
이불 빨래를 걷으러 옥상에 올라가 보면, 파란 하늘과 더 파란 제주도 바다가 멀리 펼쳐져 있고, 빨래는 수평선
어딘가에서 하늘거리고 있다. 장 냄새 풍기는 장독대 주변을 지나 수평선 쪽으로 몇 걸음 내딛으면 빨랫줄이다.
나는 이불에 손을 댄다. 햇볕을 머금은 탓에 살아있는 짐승처럼 따스하다.
나는 이불을 걷으려다 말고 잠시 껴안아본다. 정확히 말하자면, 이불의 품에 안긴다. 고슬고슬한 햇볕 냄새가
진동하고 바닷바람 냄새가 은은하다. 한나절 내내 햇빛은 천에 깊이 스며들었고 바닷바람은 이불 사이를
오가며 짠내를 남겨놓았다. 장독대의 된장 냄새, 옆집에서 우리 집 옥상으로 웃자란 무화과나무의 향, 앞마당의
대추나무, 호박 덩굴의 향도 살짝 배어있다. 나는 이불에 안긴 채 크게 숨을 들이마시며 잔뜩 향을 들이킨다.
세상의 체취였다. 소락한 이불 품에 있으면, 세상이 나를 안아주는 것 같았다. 이불은 하늘부터 땅까지 세상의
오만가지 것들이 농축되어 가장 편안한 모습으로 형상화된 존재 같았다. 할머니로부터 내게로 이어진
‘소락하다’는 단어 하나에 불과했으나, 개인적인 경험이 녹아들며 그 단어는 깊어졌다.
나이를 먹어가며, ‘소락하다’에는 시간이 스며들었고 그만큼 단어의 품은 넓어졌다. 나는 이불에서 고개만
내밀어 꽃게탕을 먹고 삼양라면을 먹었으며, 이불속에서 만화책을 보다 잠이 들었고, 이불 위에 엎드려
노트북을 썼고, 가끔 연인과 나란히 누웠고, 이불속에서 자주 웃고 울고 우울해했다.
백석은 세상 따위 버리고 산골로 간다지만, 산은 춥고 멀어서 나는 이불로 들어갔다. 이불은 나의 성채였고,
나의 동굴이었고, 나의 둥지였다. 세상에서 도망치다 다다르는 온전한 나의 영역이었다. 아싸가 아싸다워지는
많은 순간에 이불이 있었다.
나는 엄마라는 단어가 입에 붙지 않아 낯설어하는데, 상상 속의 엄마를 구현한다면 이불에 가까울 듯하다.
마음껏 응앙응앙거려도 좋은 이. 내가 무엇을 하여도 나를 안아주는 이. 나와 비슷한 체취가 느껴져서
그 품에서는 한없이 편안하게 느껴지는 이. 나는 ‘이불을 덮는다’는 말이 적절하지 않다고 생각한다.
내가 이불을 덮는 것이 아니라, 이불이 나를 안아준다. 주체는 내가 아니라 이불이다.
예전에 연인의 집에 놀러 갈 때에도 종종 이불로 기어들어가곤 했다. 그곳에서는 익숙하며 낯선 체취가
느껴졌다. 집과 사람과 고양이 냄새가 어우러진 기분 좋은 향. 연인과 엉겨서 눕는 것 못지않게 나는
연인의 이불을 좋아했다.
타인의 이불에는 성적 긴장감에 앞서, 다른 이의 둥지에 대한 호기심이 있었다. 고양이가 서로의 체취를
맡으며 경계를 푸는 것 같았다. 서로의 냄새를 맡으며 상대를 느끼고 이해하는 행위. 고양이는 서로의 엉덩이에
코를 대지만, 적당한 선에서 비유는 멈추도록 하자.
내 몸을 스쳐간 수많은 이불들을 생각한다. 이태리 때타올 질감의 거친 삼베 이불, 묵직한 광목 솜이불,
스르르 흘러내리는 극세사 이불, 고양이피부 같은 털담요, 과하게 미끄러워 살을 문대면 쓸릴 것 같은
호텔이불, 눅눅한 싸구려 모텔 이불. 저마다 질감은 다르지만, 하나 확실한 건 그것들은 나를 안아주었다.
모든 이불은 ‘소락하다’를 품고 있었다. 볕 잘 드는 베란다가 없어 눅눅하더라도, 오래 묵어 군내가 나더라도,
모든 이불 그 어딘가에는 소락하다가 깃들어 있어 나는 그 안에서 응앙응앙 편안해졌다. 이는 현재 진행형
이기도 하다. 외롭거나 우울하거나 힘들거나 괴롭거나 슬프거나 화나거나 그 어떤 시간을 보내더라도,
나는 결국 이불의 품으로 기어들어간다. 이불은 나를 안아주고, 나는 그 안에서 날 선 마음을 눅이며 잠이 든다.
소락한 감각에 기대어...
첫댓글 아침에 잠에서 깨어나 땀으로 축축해진 내의를 벗고 빨래한 내의로 갈아입었더니 "소락소락"한 느낌이다.
그러니까 내가 어려서 제주도에 살 때에 살감이 좋은 내의를 입으면 아주 포근하고 부드러운 느낌을 경험하곤
했는데 이럴 때 아~ "소락소락하다"라는 속말이 터져 나온다. 그래서 오늘 아침 그러한 느낌으로 이 단어를
가지고 인터넷 검색을 해 보았는데 브런치 작가인 서덕 선생님의 글이 있어서 함께 공유하고 싶어서 올립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