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침저녁으로 기온이 뚝 떨어졌다. "길가 산모퉁이에 뜬금없이 벚꽃이 피었다. 벚나무는 원하지 않은 태풍이 몇 차례 지나갈 때마다 모진 비바람으로 맞았는지 가지마다 생채기가 났고 찢어져 있었다. 자연은 자비롭지도 녹록하지도 않았다. 벚꽃은 자기만의 기억으로 엄살을 부리지 않고 자연스럽게 가을꽃을 다시 피웠다. 생체리듬은 계절을 잊어버리고 봄인줄 알았나보다. 한 나무가 꽃을 피우자, 잎이 떨어진 다른 벚나무도 시샘이라도 하듯 서로 마주치며 햇살이 따사로운 자리부터 차례차례 꽃을 피웠다. 햇빛의 기운으로 한데 모아 오들오들 벚꽃군락을 이루었다. 뭐가 그리 급한지 일의 순리도 없었다. 얼떨결에 챙긴 새 이파리가 드문드문했다. 이러한 현상을 '불시개화不時開花'라고 한단다. 그들만의 위대한 생존 투쟁이었다.
벚꽃은 슬픈 꽃이다. 꽃을 가까이하고 맡아야 겨우 느껴지는 향기다. 상당히 인색했다. 냄새에 반눈도 감기지 않았다. 이렇게 겸손 끝은 봄바람 향기보다 더 민망하다. 그런데도 잔인한 계절 4월에 만발했다. 왜 이때를 고집했을까 몹시 궁금했다. 시샘은 좋은 일과 나쁜 일로 함께 왔다. 벚꽃 말 중 하나는 '삶의 아름다움과 덧없음'이란다. 벚꽃 비는 봄비와 함께 내린다. 꽃이 피어 있는 날짜가 너무 짧았다. 열흘이 멀다. 피어 있는 모습 못지않게 떨어지 는 기품이 서러우면서 아름다웠다. 또 금세 활짝 피어 화려하게 물드나 싶다가 봄비가 내리면 애처롭게 앞만 푸르게 남는다. 잠깐 숨 돌리는 사이 사라져 버리고 마는, 내일이면 다시 피는 나팔꽃보다 더 허망했다. 가장 아름다운 순간 느끼는 덧없음이랄까. 이렇듯 짧고 화려하기에 더욱더 잊히지 않고 추억으로 남아 여러 장의 흑백사진이 파노라마처럼 저장되었다. 꽃잎이 유독 얇고 하나하나 비바람에 흩날리었다. 연한 핑크빛 비가 떨어지는 것 같아 한참 동안 어이없고 허무했다. 희망의 빛을 잃은 다른 세상에 있는 착각마저 들었다. 추억이 깃든 사진을 다 잃은 듯 허전했다. 그러면서 또 일 년을 기다려야 한다. 역설이다. 그런데도 매년 설렌다. 누가 벚꽃은 질 때가 가장 아름답다고 했던가!
올여름도 예년과 마찬가지로 태풍이 들이쳤다. 자연에 대한 그들만의 힘겨운 생존투쟁을 반복했다. 나뭇가지가 찢겨 내리 팽개쳐지듯 했다. 극한상황에도 점잖고 늠름했다. 벚나무는 꺾인 만큼 저항했고 그 힘은 꽃으로 설레게 했다. 삶과 죽음의 갈림길에서 처절하게 몸부림치는 자연법칙이었다.
「벚꽃 엔딩」이란 노래가 있다. 한때 우리나라 국민 가슴을 들었다 놓았던 한 소절은 이랬다. '봄바람 휘날리며 흩날리는 벚꽃 잎이 울려 퍼질 이 거리를 둘이 걸어요.' 작가는 벚꽃이 빨리 지기를 바라는 내심 심술이었다. 남이 잘되는 것을 보기 힘 들어서 만들었다고 했다. 질투를 긍정적으로 끌어들여 사랑 고백으로 바꿔놓았다.
벚꽃은 이제 하늘 높은 가을에 한껏 어울리기도 한다. 가을 벚꽃을 노래했다면 어땠을까. 바로 이렇게~ '가을 벚나무처럼 굽히지 않고 버티는 힘으로 세상을 나아가요. 우리 함께 꽃을 피워요' 벚나무에 꽃이 피면 새로운 이파리가 생겨난다. 이파리가 있어야 햇볕을 한껏 받아서 추운 겨울을 버틸 양분을 축적할 수 있게 된다. 벚나무가 때아닌 가을에 꽃을 피운 건 스스로가 살기 위한 본능의 몸짓이란 얘기다.
꽃이 피고지는 과정은 우리의 삶과 너무나 비슷하다. 인간도 젊음의 한순간을 정점으로 거기서 늙어간다. 화려한 꽃 역시 조용하고 쓸쓸하게 지는 것으로 마무리된다. 특히, 우리의 삶이 그렇다. 다만 반복이 다를 뿐이다. 지난봄이 되돌아설 일 없듯 말하지 않아도 다 알고 통한다. 절망 속에서도 꽃은 피어난다고 했다.
얼마 전 떨어지는 벚꽃처럼 하늘로 보낸 '엄마의 세계'를 나는 모른다. 언젠가 떠나는 것은 분명한 일이다. 그러나 죽음에 이르는 순간에 아프지 않고 가장 따스하게 미소를 짓는 것이 가능한가? 지금 그립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