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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50319. 묵상글 ( 성 요셉 대축일. - 나 당신의 사람이니 . 등 )
^ 김찬선 레오나르도 신부님. : 아직 / 05:01 추가
^ 호명환 가롤로 신부님. : 아직 / 07:30 추가
^ 조명연 마태오 신부님. : 아직 / 07:30 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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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50319. 성 요셉 대축일. 상지종 베르나르도 신부님.
<나 당신의 사람이니>
“요셉이 그렇게 하기로 생각을 굳혔을 때, 꿈에 주님의 천사가 나타나 말하였다. …
잠에서 깨어난 요셉은 주님의 천사가 명령한 대로 하였다.”(마태 1,20ㄱ.24)
굳어진
내게
당신
스미니
당신을
품어
나를
허무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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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50319. 성 요셉 대축일. 김찬선 레오나르도 신부님.
2025.03.19 04:55
- 의리와 믿음의 요셉
"마리아의 남편 요셉은 의로운 사람이었다."
오늘 복음은 요셉이 의로운 사람이었다고도 합니다.
그런데 잘 아시다시피 주님 이전에 의로움의 기준은 율법입니다.
율법이 하라는 것을 하고 하지 말라는 것을 하지 않으면 그것이 의로움입니다.
그렇다면 요셉은 마리아 임신 사실을 알게 되었을 때
율법에 따라 파혼하고 그 사실을 알려야 했는데
요셉은 남모르게 파혼하기로 작정합니다.
그 이유는 마리아의 일을 세상에 알리지 않기 위함입니다.
그런데 이것은 사실 말이 안 되는 것이지요.
파혼했는데도 마리아가 임신한 것이 드러나면,
마리아는 불륜을 저지른 여인이 되잖겠습니까?
그러므로 이것은 요셉의 다른 의로움을 얘기하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요셉의 의로움에는 율법의 의로움도 있지만
마리아에 대한 의리도 있는 사람이라는 것입니다.
제 생각에 의리는 율법적인 의로움이 아니라 인격적인 의로움입니다.
의리 있는 사람은 덕이 있어 어려움 중의 사람을 쉽게 저버리거나,
잘못을 저질렀어도 크게 분노하거나 쉽게 내치지 않는 사람입니다.
사실 약혼자가 자기 아닌 다른 사람의 애를 임신했다는 것을 알고,
분노하지 않을 사람이 이 세상 어디 있습니까?
그렇지만 요셉은 분노가 의리를 덮어버리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우리가 요셉을 칭송하는 것은 뭐니 뭐니 해도
그의 신앙이고 그의 순종이지요.
오늘의 전례는 요셉을 아브라함과 비교합니다.
요셉은 아브라함처럼 믿음으로 의로움을 얻었고,
희망이 없어도 희망하는 사람이었습니다.
요셉은 꿈에 나타난 천사를 천사로 믿었고,
천사의 말을 믿고 마리아도 믿었으며
천사의 말을 믿고 마리아와 아기를 데리고 이집트로 떠났습니다.
그러니까 천사의 말을 하느님의 말씀으로 믿은 것은 마리아나 요셉이 같았고,
이런 믿음의 바탕 위에서 희망이 없어도 희망하며 이집트 여행을 떠났습니다.
그렇습니다.
오늘 서간에서 바오로 사도가 얘기하는,
이런 절망을 거스르는 희망은 하느님께 대한 믿음 없이 있을 수 없고,
믿음이 없으면 이집트로 떠나라는 명령에 순명할 수는 없는 것이지요.
물론 이 명령에 대한 순명보다 앞서는 순명이
마리아를 아내로 받아들이라는 명령에 순명한 것이지요.
오늘 복음은 이렇게 끝이 납니다.
“잠에서 깨어난 요셉은 주님의 천사가 명령한 대로 하였다.”
잠에서 깨어난 요셉은 ‘이건 꿈일 뿐이야!’ 하며 명령을 걷어찰 수 있었습니다.
그러나 그는 믿었고 그 명령에 순명했습니다.
이런 요셉을 보면서
현몽을 한낱 개꿈으로 바꾸는 나는 아닌지
계시의 은총을 인간적으로 날려버리는 나는 아닌지 돌아보는 오늘 우리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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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50319. 성 요셉 대축일. 호명환 가롤로 신부님.
CAC 매일묵상
성경에 나오는 이방인 환대 이야기들
하느님의 숨
2025.03.19. 04:53
CAC(Center for Action and Contemplation) 리처드 로어의 매일 묵상 - 2025년 3월 18일 화요일 (호명환 번역) 열두 번째 주간: 낯선이를 환영하기
예언자들은 난민들을 차별하지 말라고 경고하였습니다.
성서 학자 체드 마이어스(Ched Myers)는 성경에 나오는 이주민들의 중요한 면모에 대해 글을 썼습니다:
모세오경과 예언자들은 야훼의 눈에는 선택된 민족도 "이방인이고 거류민일 따름"이었기에(레위 25,23) 경제나 정치적인 이유로 인한 난민들을 차별하지 말라고 경고했습니다. 이스라엘 사람들은 "너희 가운데 있는 체류자들"을 품위와 정의로 대해야 했습니다. 그들과 함께 살고 있던 이방인들에 대한 이러한 근본적인 관점과 "외부인"과 연대하라는 소명은 나자렛 예수님의 가르침과 삶에서 온전히 실현되었습니다. 이러한 사실을 잘 드러내 주는 성경 구절로서 많은 이들이 자주 인용하는 내용은 마태오 복음의 '최후 심판' 비유입니다. 여기서 예수님은 이방인의 모습을 하고 있는 당신을 잘 맞이해 주라고 명하시고, 그렇게 하지 않는 사람들을 나무라십니다(마태 25,35-46). [1]
성경에서 거의 공식적으로 언급하는 연약한 계층의 사람들은 전형적으로 세 부류가 있습니다: 과부들, 고아들, 그리고 이방인들. 야훼께서 그들을 "보살피고 계시기에"(시편 146,9), 그들은 살아가야 할 본질적인 권리가 있고(신명 14,29; 24,19-21; 26,12-13), 인간의 존엄성이 있는 사람들입니다(신명 27,19; 시편 94,6). 그래서 예언자들은 과부들과 고아들, 그리고 이방인들이 어떻게 대우받느냐에 따라 그 나라의 건강이 가늠된다고 말하는 것입니다(예레 7,6; 22,3; 즈카 7,10; 말라 3,5)....
그러나 신학적으로 볼 때 성경에는 또 다른 놀라운 특징이 있습니다: 처음부터 끝까지, 하느님 또한 환대를 필요로 하는 이방인의 모습으로 이 세상에 들어오시는 분으로 묘사한다는 점입니다. 첫 번째 당신의 현현 중 하나는 바로 "세 명의 손님"의 모습으로 야훼 당신을 신비롭게 드러내시는 장면입니다(창세 18,1-8). 아브라함과 사라는 그들에게 음식과 음료, 그리고 쉼터를 제공해 주는데, 그들의 이런 환대는 온 백성의 구원 이야기가 시작되게 하는 계기가 됩니다. 즉 하느님께서는 이들에게 아들을 낳을 것이라는 위대한 약속을 해 주십니다(창세 18,9-10)....
이외에 또 다른 특징이 있습니다: 성경의 하느님은 "나라가 없는 이"로서 계속 묘사된다는 점입니다. 사회적으로 증명되지 않는 이로 말입니다. 이런 하느님은 임금의 성전에서 편안하게 거하는 이스라엘 주변의 다른 제국의 수호신들과는 극명한 대조를 이룹니다. 탈출기의 전통을 보면, 광야의 하느님은 이름조차 없고 하물며 "증서"도 없는 분이십니다: 야훼라는 별칭은 "나는 있는 나다"라는 의미를 지니는 이름일 뿐입니다(탈출 3,14). 하느님의 목소리는 파라오의 정치-경제 구조와는 정반대의 형태라고 할 수 있는 경계구역 바깥쪽에 있는 불타는 떨기나무에서 이스라엘 백성의 해방을 위한 계획에 모세를 끌어들입니다. 이러한 하느님에 의해 영감을 받고 인도를 받아 히브리인들은 "급하게" 이집트에서 탈출하고(탈출 12,33). 어떠한 법적 지위를 지니지 못한 백성으로서 광야에서 헤매게 됩니다. - 마치 정치 난민들이 그래야 하는 것처럼 말입니다.
복음서 저자들은 예수님을 환대가 필요한 난민으로 묘사합니다"
두 복음서는 이 전통을 이어 받아 이야기를 시작합니다. 마태오와 루카의 복음서는 예수님의 가족을 로마 황제와 헤로데의 폭력을 피해 도망쳐야 하는 정치 난민으로 묘사하면서 이야기를 시작합니다(마태 2; 루카 2). 성인이 되신 예수님은 당신 자신을 집 없이 떠도는 이라고 말씀하십니다("사람의 아들은 머리 둘 곳조차 없다." - 루카 9,58). 그분은 로마 총독 앞에서 "내 나라는 이 세상에 속하지 않는다." 하고 말씀하십니다(요한 18,36). 또한 복음서 저자들은 예수님을 계속해서 환대를 받으시는 분으로, 그리고 때로는 다른 사람들로 하여금 당신을 환대하게 하시는 분으로 묘사합니다(루카 19,5 참조). [2]
우리 공동체 이야기
저는 티베트 전통을 따르는 불교도입니다. 그리스도인 친구 하나가 리처드 로어의 매일 묵상에 대해 저에게 말해 주어서 저도 이 매일 묵상을 구독하기 시작했습니다. 저는 그리스도교의 관상 전통이 우리 신앙 전통과 많은 면에서 맥을 같이한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습니다. 특별히 하나 됨과 사랑에 중심을 두는 측면에서 말입니다. 제가 처음으로 읽은 매일 묵상은 바바라 매허니(Barbara Mahany)의 로렌스 수사의 저술 "자연의 책"에 관한 묵상(Barbara Mahany's reflections on Brother Lawrence’s “Book of Nature.”)이었습니다. 제가 저의 불교 명상 그룹에 이 묵상 글에 나오는 몇 가지 핵심 메시지를 전해 주었더니, 우리 그룹의 인도자가 눈물을 흘리더군요. 이 내용이 우리 그룹 게시판에 올라와 있습니다. 이 심오한 인간성의 원천을 나눠 주신 데 대해 감사드립니다.
—Richard H.
[1] Ched Myers and Matthew Colwell, Our God Is Undocumented: Biblical Faith and Immigrant Justice (Orbis, 2012), 5.
[2] Myers, Our God, 57–58.
Image credit and inspiration: Lucas Dalamarta, Untitled (detail), 2024, photo, Unsplash. Click here to enlarge image. 알지 못하는 존재와 함께 할 때 우리는 다른 이들을 위해 열린 마음으로 공간을 마련하고 함께 나아가는 수양을 할 수 있습니다. 그 결과를 우리가 알지 못한다 하더라도 말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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숨영성 묵상글
우리 사회의 참된 남성성 회복을 위해~~~
하느님의 숨
2025.03.19. 05:42
예수님께서 가지셨던 아버지 하느님의 이미지는 참으로 다정다감하신 분이시면서도 동시에 당신 사랑과 자비의 뜻을 한결같이 실현시키는 외유내강의 하느님이셨지, 연약하거나 감상적인 분은 아니셨습니다. 예수님의 하느님은 이런 이미지는 분명히 당신의 아버지셨던 성 요셉에게서 얻게 되었을 것입니다.
그런데 우리는 간혹 성 요셉을 떠올릴 때 늙수룩하고 힘이 빠진 노인의 모습을 떠올립니다. 그래서 그런지 대개 어느 본당이든 [요셉]이라는 이름을 노인들 단체에 갖다 붙입니다. 하지만 요셉은 우리가 떠올리는 그런 이미지의 사람이 아니었다는 것이 복음서가 전하는 메시지입니다. 특히 마태오 복음은 그를 [의로운 사람]이라고 전하는데, 이 [의로움]은 분명히 약한 이미지와는 다른 이미지를 우리에게 전해 주지 않습니까?!
이런 관점에서 예전에 요셉 성인과 관련하여 올렸던 강론 내용을 다시 한번 여러분과 나누고 싶습니다.
동양사상에 의하면 모든 것이 음과 양의 조화에 의한 변화로서 세상이 움직여 간다고 합니다. 물론 이 음과 양의 조화는 서양 사상에서는 조금 다르게 표현하고 있기는 하지만, 성 보나벤투라가 말하는 반대들의 일치(coincidence of opposites)도 이런 맥락에서 볼 수 있을 것입니다.
보나벤투라는 이 우주의 본질적인 모습은 십자가로 상징될 수 있다고 말했습니다. 이것은 동양에서 말하는 음과 양의 조화라고 말할 수도 있을 것입니다.
보나벤투라가 말하는 '반대들의 일치'는 양 극단이 하나로 수렴되는 하느님(예수 그리스도를 통해)을 중심으로 말하는 것이라면 동양사상의 '음과 양의 조화'는 자연 혹은 우주의 본질적인 흐름 자체를 말하고 있다는 점에서 다르다고 얘기할 수 있습니다만, 본질적으로는 맥을 같이 하는 것이라고 볼 수 있습니다.
참 감사하게도 예수님에게 있어 아버지로서의 '요셉'이 지니는 의미를 마태오 복음저자가 전해주고 있다는 점에서 저는 이런 조화에 대해 말하려는 것입니다. 자칫 잘못하면 놓칠 수 있는 부분이지요! 요셉의 의로움은 어찌 보면 현대를 살아가는 우리 삶에 있어 남성성이 지니는 의미, 아버지 혹은 아빠가 지니는 의미를 잘 부각시켜주기 때문입니다.
몇 년 전 리처드 로어 신부님과 이메일을 주고받을 때 리처드 신부님이 저에게 "한국도 '아버지 없는 사회'라고 하던데..."라는 말씀을 하신 적이 있습니다. 정확하게 설명하기는 어렵습니다만, 저는 그 말을 알아들을 수 있었습니다. 물론 이것은 우리 한국 사회만의 문제는 아니라고 봅니다만, 아버지-부재(不在)가 의미하는 바는 축이 없이 돌아가는 소용돌이 같은 것이라고 말할 수 있을 만큼 엄청난 것입니다.
어머니가 자녀들에게 안쪽의 해(안해)로서 자녀들을 보호해주고 길러주는 면모를 지니고 있다면, 아버지는 바깥의 해(순 우리말로는 '버시지아비'라고 합니다. 그리고 아내와 남편을 이르는 순 우리 말이 '가시버시'라네요...)로서 안쪽에서 벗어나 자녀들을 세상으로 향하는 모험에 동반하며 자녀들이 그 모험을 이겨나갈 수 있도록 보호하고 힘을 실어주는 특징을 지니고 있는 것입니다.
요셉 성인이 예수님의 아버지로서 보여주고 있는 모습이 바로 그것입니다. 예수님 탄생 과정에서도 그렇고, 헤로데로부터 예수님을 보호해 드리기 위해 이집트로의 피난 길에 오르는 모습 등이 바로 그런 것이겠지요! 성경은 기록하고 있지 않지만 아마도 요셉은 예수님의 성장 과정에서 그런 아버지로서 예수님에게 큰 영향을 주었을 거라 믿습니다.
짧게 전하고 있지만 복음이 전하는 요셉의 모습은 묵묵히 하느님의 뜻을 따르는 우직한 모습입니다. 그 하느님의 뜻이 구체적으로 드러나는 것은 사랑하는 부인 마리아와 자녀 예수님을 보호하기 위해 묵묵히 마리아의 말과 천사의 말을 믿어주는 모습으로 드러납니다.
아버지의 면모, 남성 영성의 면모가 바로 이런 것이어야 하지 않을까요?!
저는 아버지가 돼 본 적이 없지만 그게 무언지를 제 육신의 아버지를 통해서, 그리고 나아가서는 제가 존경하던 남성들을 통해서 어느 정도 감지할 수 있습니다. (물론 저는 이 부분이 저에게 가장 부족한 부분임을 인정합니다...)
"현재(하느님)를 묵묵하게 신뢰하는 것!"
오래 전에 참 흥미롭게 읽었던 세 권짜리 소설 "A Certain Jesus"(스페인어 원 제목은 "Un tal Jesus")는 요셉의 의로움이 예수님에게 강한 영향력을 주었음을 강조해 줍니다.
그 소설에 보면, 예수님이 청년 시절에 아버지와 함께 목수 일을 하는 모습으로 묘사되는데, 하루는 이스라엘 독립군 한 명이 요셉 성인의 집으로 피신해 들어오는데, 요셉이 그 사람을 숨겨주고 지켜줍니다. 이 때문에 바로 로마 군인들이 요셉의 집에 처들어와서는 그 독립군을 내 놓으라고 윽박지르고는 아내 마리아를 겁탈하려고 합니다. 요셉이 이를 저지하는 가운데 로마 군인들에게 몰매를 맞고 쓰러지게 됩니다. 그때 바깥 일을 하다 돌아온 예수님이 로마 군인들을 물리쳐 줍니다(?). 요셉은 그후 시름시름 앓다가 죽게 되는데, 아버지를 죽음에 이르게 한 로마군인들에 대해 분노하며 복수심에 차 있던 예수님에게 요셉은 죽음의 침상에서 이런 유언을 남깁니다. 제가 이 내용을 정확하게 기억하는지는 모르지만 (그 책들을 다른 사람에게 빌려 주어서 제가 지금 갖고 있지도 않고요...) 대략 이렇습니다. "복수는 복수를 부를 뿐이야. 사랑과 용서가 바로 생명의 핵심이야. 이것을 명심하거라!"
아마도 예수님이 묵묵히 하느님의 뜻을 따르는 길을 강단 있게 걸을 수 있었던 것도 성모님의 함께하심과 더불어 예수님의 삶에 아버지로서 묵묵하지만 참으로 강단 있게 동반해주신 성 요셉이 계셨기 때문이라고 저는 믿습니다.
얼마 전 'National Geographic Wild' 채널에서 아마존의 한 부족의 성인식을 잠깐 본 적이 있습니다. 15-17살 정도 되는 남자 아이들에게 마을 추장이 독성이 굉장히 강한 총알 개미들을 집어 넣은 꽤 큰 장갑에 손을 집어 넣게 하는 것이 이 예식의 절정입니다. 너무도 고통이 심해 기절할 정도라고 하는데, 그 고통이 15-20시간 정도 지속된답니다. 이게 바로 이 젊은이들에게는 특히 남성으로서 자기들의 신과 자기들의 부족, 그리고 자기들을 둘러싸고 있는 자연을 믿음으로 받아들이며 자기들의 사회 안에서 중심 축이 되어 살아가야 할 사명을 배우는 것 아닐까 하는 생각을 했습니다.
이것이 바로 지금 우리 사회, 우리 세상이 필요로 하는 중심 축입니다.
특별히 우리 남성들은 성 요셉을 더 깊이 바라보며 우리 안의 아버지 성을 일깨워야 하지 않을까요?!
저는 요즘 예수회 김정대 신부님의 책 [왜 남자들은 기를 쓰고 불행하게 사는가?]을 읽고 있는데, 여기서 김정대 신부는 이런 이야기를 합니다.
"나는 '여성성이 강한(?) 시대'에 현재와 과거의 남자들의 모습을 변호하고 싶지 않다. '여성성이 강한 시대'라는 표현에 오해가 있을 것 같아 약간의 설명이 필요할 듯하다.
나는 '여성성이 강하다'는 표현을 부정적 의미로 사용하지 않는다. 현재 우리 사회는 과거 남성 중심의 가부장 사회에서 벗어나 점점 여성의 발원권이 높아지는 상황이다. 특히 내가 중년의 끝자락에서 경험하건대, 나와 비슷한 연령대의 여성들은 남성들보다 훨씬 더 활동적이고 독립적이다. 반면에 남자들은 점점더 소극적이고 의존적으로 되어간다. 그렇다 '여성성이 강한 시대'는 중립적 표현이고, 여성들은 더 강해져도 좋다. 문제는 남성성이 성장하지 못한 데 있다...."
오늘은 특별히 우리 사회의 진정한 남성성 회복을 위해 우직한 믿음의 성인 요셉의 전구를 청해야 할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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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50319. 성 요셉 대축일. 조명연 마태오 신부님.
25.03.19 06:09
책을 읽고 있으면 크게 와 닿는 부분을 발견할 때가 있습니다. 그러면 이 내용을 통해 쓰고 싶은 것도 떠올려집니다. 예전에는 책에 밑줄을 그어서 기억하려 했습니다. 그런데 책에 표시하면 단점이 있습니다. 나중에 보는 사람(다시 읽는 본인도 마찬가지)에게 좋지 않다는 점입니다. 그 표시에 매여서 자기 것을 발견하기가 힘들어집니다. 표시에만 집중하게 되어서, 새로운 것을 찾기가 힘들어지게 되는 것입니다.
더군다나 저는 다 읽은 책을 본당 도서관에 기증하고 있어서 더 깨끗하게 읽어야 합니다. 그래서 밑줄보다 클립을 꽂아두었습니다. 이 클립으로 표시한 곳을 나중에 쓰면서 정리할 목적이었습니다. 문제는 나중에 다시 읽으면 왜 클립을 꽂아두었는지를 모르겠다는 것입니다. 당시에는 분명 크게 와 닿는 구절이었는데, 다시 보면 별 내용이 아닙니다. 이제는 곧바로 적습니다. 지금 순간의 감정과 생각이 중요했던 것입니다. 미루면 잊어버립니다. 소중할 수 있는 감정과 생각이 사라지는 것입니다.
우리는 쉽게 뒤로 미루곤 합니다. 그 순간에 해야 할 것인데도 나중에 해도 충분할 것으로 착각합니다. 그래서 하느님께서는 우리 생명을 유한하게 만드신 것이 아닐까요? 너의 생명은 영원하지 않다는 것을 기억하면서 뒤로 미루지 말고 지금 당장 해야 한다는 것이지요. 특히 사랑의 실천은 결코 뒤로 미뤄서는 안 됩니다. 주님께서 가장 강조하셨고, 하느님의 일을 세상에 실천하는 결정적인 일이기 때문입니다.
오늘 우리는 복되신 동정 마리아의 배필 성 요셉 대축일을 지냅니다. 요셉 성인께서 간직하셨던 것은 바로 ‘사랑’이었습니다. 그리고 사랑 때문에 ‘강림’이라는 하느님의 일을 수행할 수 있었습니다.
요셉 성인은 약혼자 마리아가 아기를 잉태하지 그저 남모르게 파혼하기로 마음먹습니다. 의로운 사람, 법대로 사는 사람으로 알려져 있던 성인이기에 남모르게 파혼하기로 하기까지 무척 힘들었을 것입니다. 당시에 처녀가 아기를 가지면 간음했다는 이유로 법정에 세우거나 율법 학자들에게 고발해서 돌로 치게 하는 것이 원칙이니까요.
사랑하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완전한 사랑은 아니었습니다. 파혼으로 인해서 그 사랑이 끊어지게 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하느님께서 개입하셔서 천사를 보내서 마리아를 아내로 맞아들이라고 합니다. 이 계시에 곧바로 요셉은 천사가 명령한 대로 합니다. 이렇게 사랑을 버리지 않고, 또 사랑을 즉시 실천하는 그 모습에 하느님의 일이 이루어질 수 있었습니다.
우리도 마찬가지입니다. 사랑을 뒤로 미뤄서도 또 포기해서도 안 됩니다. 계속해야 하는 사랑이고, 즉시 실천하는 사랑이 되어야 합니다. 그 안에서 하느님의 일이 이루어집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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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의 명언: 나만이 내 인생을 바꿀 수 있다. 아무도 날 대신해 해줄 수 없다(캐롤 버넷).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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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50319. 성 요셉 대축일. 이영근 아오스딩 신부님.
오늘은 복되신 동정 마리아의 배필이신 성 요셉 대축일입니다. 비오 9세께서는 요셉 성인을 “보편교회의 수호자”로 선포하셨고(1870년), 비오 12께서는 “노동자들의 수호자”로, 성 요한 바오로 2세께서는 “구세주의 보호자”로 말씀하셨습니다. 또한, 신자들은 요셉 성인께 “죽음을 앞둔 이의 수호자”로서 간구합니다. 또한 프란치스코 교종께서는 요셉성인의 ‘보편교회의 수호자’ 선포 150주년을 기념하여 발표하신 교황교서 [아버지 마음으로](2020.12.8.)에서 이렇게 말합니다.
“주목받지 않고 날마다 신중하게 자신의 존재를 숨기며 살아가는 요셉 안에서, 우리는 저마다 곤경에 놓일 때의 주재자, 지원자, 안내자를 발견할 수 있습니다. 요셉 성인은 숨겨져 있거나 그늘진 곳에 있는 이들이 구원역사에서 비할 데 없는 역할을 할 수 있다는 것을 일깨워줍니다.”
복음사가들은 예수님의 모친이신 마리아께 대한 관심에 비하면, 성 요셉에 대해서는 별로 관심을 보이지 않고 있는 것처럼 보입니다. 그러나 이는 그가 구속사에 있어서 해야 할 일을 다 하지 못했다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하느님께서 계획하신 일을 일찍이 다 이루셨다는 것으로 알아들을 수 있습니다.
오늘 <복음>에서는 두 가지 예언이 성취되었음을 통해, 태어날 아기가 구세주 메시아임을 알려줍니다. 첫째는 그가 다윗의 자손이라는 사실이요, 둘째는 그가 동정녀에게서 태어난다는 사실입니다. 그리고 바로 이러한 하느님의 계획과 예언이 요셉의 믿음의 결단과 행동을 통해서 성취되었음을 보여줍니다. 이처럼, 요셉은 ‘하느님 구원계획의 온전한 조력자’로 제시됩니다.
오늘 <복음>을 통해, 성 요셉의 인품을 세 가지로 묵상해 봅니다.
첫째, 그는 “의로운 사람이었습니다.”(마태 1,19). 곧 ‘하느님의 뜻’을 따르는데, 열심을 다하는 사람이었습니다. 그 의로움으로 자신의 안락과 평안을 포기하였고, 마침내 “하느님의 뜻”을 따라 마리아를 아내로 맞아들였습니다.
둘째, 그는 “마리아의 일을 세상에 드러내고 싶지 않았으므로, 남모르게 마리아와 파혼하기로 작정하였습니다.”(마태 1,19). 곧 타인에 대한 깊은 이해심과 자비심을 겸비한 사람이었습니다. 그는 공적인 고소를 통해 마리아를 수치스럽게 만들지 않으려고, 조용히 파혼하기로 작정했습니다. 물론, 그렇게 된다하더라도 결국 그에게는 모욕이 될 수밖에 없는 처지였지만 그러한 모욕을 감수하면서라도, 마리아의 안녕을 도모하고자 했습니다. 참으로 그는 사려 깊은 처사를 할 줄 아는, 자비심이 많은 사람이었습니다.
<셋째>, 그는 “주님의 천사가 명령한대로 하였습니다.”(마태 1,24). 곧 순명하는 사람이었습니다. 그는 깊은 침묵으로, 하느님의 음성에 마음의 귀를 열고 있었습니다. 그리하여, “하느님의 뜻”에 행동하는 믿음으로 순명하였습니다. 사실, 요셉은 오늘 <복음>에서뿐만 아니라, <복음서> 전체에서 단 한마디의 말씀도 하지 않습니다. 그러나 그는 “행동하는 믿음과 순명”으로 구원받는 모든 이들의 양부가 되셨습니다.
그는 <제2독서>에서 아브라함이 ‘희망이 없어도 희망하며, 많은 민족의 아버지가 될 것을 믿었듯이’(로마 4,18), 그도 희망이 없어도 희망하며 믿음으로 순명하여, 구세주의 양부가 되셨습니다. 그렇습니다. 아브라함이 이미 얻은 외아들을 포기했어야만 했다면, 요셉은 아들을 얻기도 전에 이미 외아들을 포기해야만 했습니다. 나아가, 아브라함에게는 그래도 아내가 있었지만, 요셉은 아내마저도 포기해야만 했습니다.
그렇습니다. 그는 침묵하되, 참으로 믿는 사람이었습니다. 그는 믿되, 참으로 행동하는 사람이었습니다. 그는 행동하되, 참으로 순명하는 사람이었습니다. 또한 그는 사려 깊되, 참으로 자비심이 많은 사람이었습니다. 그야말로, 그는 우리 신앙의 모델이라 할 수 있습니다. 하느님의 음성을 듣고 그분의 뜻을 따르는 깊은 침묵, 자신의 안락과 평안을 접고 오로지 하느님께만 내맡기고 행동하는 믿음, 타인의 처지를 배려하는 사려 깊은 자비심과 사랑, 희망이 보이지 않아도 ‘하느님의 뜻’을 따르는 참다운 순명이, 바로 우리의 모델입니다.
오늘 우리도 성 요셉께 전구하며, 하느님 구원의 온전한 조력자가 될 수 있었으면 좋겠습니다. 아멘.
오늘의 말·샘기도(기도나눔터)
“두려워하지 말고 마리아를 아내로 맞아들여라.”(마태 1,20)
주님!
의심을 떨치고 신비를 받아들이게 하소서.
당신의 개입을 맞아들이게 하소서.
기이하고 황당하게 보여도 ‘당신의 뜻’에 가두어지게 하소서.
어처구니없고 터무니없게 보여도 ‘당신의 뜻’을 품고 살아가게 하소서.
제 안에, 오로지 ‘당신의 뜻’을 세우소서.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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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50319. 성 요셉 대축일. 조재형 가브리엘 신부님.
고인이 되신 베네딕토 16세 교황과 현 교황인 프란치스코 교황을 모티브로 한 두 교황이라는 영화가 있습니다. 이 영화는 전통을 지키려는 베네딕토 16세 교황과 변화를 꿈꾸는 프란치스코 교황(당시 베르골료 추기경)의 대화를 중심으로 전개됩니다. 그런데 이 영화가 단순히 두 교황의 차이점을 보여주는 게 아니라, 그 속에서 하느님의 뜻을 찾고자 하는 두 사람의 깊은 고민과 신앙의 여정을 보여준다는 점에서 의미가 큽니다. 베네딕토 16세 교황은 교회를 지키려 했지만, 변화하는 시대 속에서 자신의 역할에 대해 고민했습니다. 반면, 베르골료 추기경은 교회가 좀 더 가난한 이들과 가까이 있어야 한다고 생각했지만, 젊은 시절 독재 정권 아래에서 제대로 대처하지 못했던 자신의 과거를 후회하고 있었습니다. 결국, 이들은 서로 다른 입장을 가졌지만, 하느님 앞에서 같은 고민을 나누고 있었습니다. 베네딕토 16세는 전통을, 베르골료 추기경은 개혁을 중요하게 생각했지만, 결국 두 사람 모두 교회를 사랑하는 마음은 같았습니다. 교회는 변해야 하지만, 그 변화 속에서도 하느님의 진리를 지켜나가야 한다는 것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하느님의 구원 계획은 구약과 신약에서 드러나고 있습니다. 구약은 하느님의 구원 계획이 드러나는 예표라면, 신약은 하느님의 구원 계획이 구체적으로 드러나는 현장입니다. 오늘 저는 구약과 신약에서 볼 수 있는 두 요셉의 이야기를 통해 드러나는 하느님의 사랑과 구원 의지를 함께 나누고 싶습니다. 이 둘은 서로 다른 시대, 다른 환경에서 살았지만, 하느님의 계획 속에서 중요한 역할을 했습니다. 먼저 구약의 요셉을 떠올려 봅시다. 그는 열한 번째 아들로 태어나 형들에게 미움을 받아 이집트로 팔려 갔습니다. 어린 시절, 그는 하느님께서 보여주신 꿈을 믿었지만, 현실은 혹독했습니다. 종으로 팔려 가고, 누명을 쓰고 감옥에 갇히는 등 숱한 시련을 겪었습니다. 그러나 그는 하느님께 대한 믿음을 잃지 않았습니다. 결국 그는 꿈을 해석하는 능력을 인정받아 이집트의 총리가 되었고, 흉년으로 고통받는 가족을 다시 만나게 됩니다. 그리고 형들에게 이렇게 말합니다. "당신들은 나를 해치려 하였지만, 하느님께서는 그것을 선으로 바꾸셨습니다." 여기서 우리는 중요한 진리를 깨닫게 됩니다. 하느님께서는 우리의 고난과 시련을 통해 더 큰 계획을 이루신다는 것입니다. 요셉의 인생은 단순한 성공 이야기가 아닙니다. 그것은 고통과 배신 속에서도 하느님의 섭리가 함께하고 있음을 보여주는 이야기입니다.
신약의 요셉은 다소 조용한 인물입니다. 성경에 그의 말이 한마디도 기록되지 않았습니다. 하지만 그는 행동하는 믿음을 가진 사람이었습니다. 마리아가 성령으로 예수님을 잉태했다는 소식을 들었을 때, 그는 고민했습니다. 그러나 꿈속에서 하느님의 계시를 받고, 마리아를 아내로 받아들이기로 결심합니다. 헤로데 왕이 아기 예수님을 해치려 하자, 또다시 꿈에서 하느님의 지시를 받고 가족을 데리고 이집트로 피신합니다. 그리고 다시 돌아오라는 명을 받고 나자렛으로 가서 예수님을 양육합니다. 신약의 요셉이 우리에게 주는 메시지는 분명합니다. 그는 말이 아니라 행동으로 하느님께 순종했습니다. 우리는 종종 하느님께 많은 질문을 던집니다. "하느님, 왜 저에게 이런 일이 일어납니까?" "왜 저는 이런 시련을 겪어야 합니까?" 그러나 요셉은 묻지 않았습니다. 그는 조용히 하느님의 뜻을 따랐고, 그 순종을 통해 구원의 역사가 이루어졌습니다. 구약의 요셉이 "꿈을 해석하는 자"였다면, 신약의 요셉은 "꿈을 실천하는 자"입니다. 신약의 요셉은 행동하는 신앙과 침묵 속의 순종을 보여줌으로써 인간의 실천적 지혜를 드러내고 있습니다. 신약의 요셉을 통해 "가장 큰 사랑은 말보다 행동에서 나온다"라는 교훈을 얻을 수 있습니다.
여기서 두 요셉의 공통점을 발견할 수 있습니다. 첫째, 둘 다 꿈을 통해 하느님의 뜻을 받았다는 것입니다. 둘째, 둘 다 고난을 겪었지만, 하느님의 섭리를 믿고 따랐다는 것입니다. 셋째, 둘 다 중요한 순간에 용서하고 보호하는 역할을 했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차이점도 있습니다. 구약의 요셉은 하느님의 계획을 해석하고 사람들에게 설명하는 역할을 했습니다. 반면 신약의 요셉은 그 계획을 믿고 침묵 속에서 실천하는 사람이었습니다. 우리의 삶에도 두 요셉과 같은 순간이 있습니다. 때로는 구약의 요셉처럼 고난을 겪으며 하느님의 섭리를 깨닫는 시간이 있습니다. 또 때로는 신약의 요셉처럼 조용히 순종하며 하느님의 뜻을 실천해야 할 때가 있습니다. 어떤 상황이든, 하느님께서는 우리를 외면하지 않으십니다. 우리가 이해할 수 없는 순간에도, 하느님께서는 모든 것을 선으로 바꾸실 계획을 세우고 계십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우리의 삶을 하느님께 온전히 맡기고 신뢰하는 믿음을 가져야 합니다.
오늘, 두 요셉의 이야기를 마음에 새기며, 우리도 하느님의 사랑과 구원 의지에 응답하는 삶을 살아가도록 노력하면 좋겠습니다. “요셉은 파혼하기로 작정하며 고뇌하지만, 천사를 통하여 하느님의 뜻을 깨닫게 되고 마리아를 아내로 맞아들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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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50319. 성 요셉 대축일. 민동규 다니엘 신부님.
찬미 예수님
천사가 요셉에게 이렇게 말합니다.
“다윗의 자손 요셉아, 두려워하지 말고 마리아를 아내로 맞아들여라.”라고 말입니다.
사실 천사가 이렇게 말하기 전까지 요셉이 무엇을 두려워하고 있는 것인가 하는 생각을 해 본 적이 없습니다. 왜냐하면 요셉은 자신과 약혼한 마리아를 위해 결혼을 취소하려 했기 때문입니다. 또한 요셉에게는 어떤 잘못도 없었기에 요셉이 두려워할 것은 없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런데 천사는 ‘두려워하지 마라.’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요셉은 무엇을 두려워했을까요?
그것은 생명에 대한 사랑에서 시작된 두려움이었을 것입니다. 요셉은 알고 있었습니다. 마리아의 배 속에 아기가 있음을 말입니다. 파혼이 요셉에게는 최고의 선택일지 모르지만, 마리아에게는 최악의 결과이기 때문입니다. 파혼한 후 요셉은 모든 책임에서 빠질 수 있지만 마리아는 혈혈단신으로 모든 책임을 져야 하기 때문입니다. 물론 아기의 생사도 보장할 수 없는 결정이 파혼이었습니다. 그러나 당연히 요셉은 생명에 대한 두려움을 지니고 있었을 것입니다.
자신의 파혼 결정이 두 생명, 그러니까 마리아와 배 속의 아기에게 미칠 영향을 알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천사는 이렇게 두려워하는 요셉에게 ‘두려워하지 마라.’라고 말합니다. 그리고 요셉은 자신의 착한 마음으로 천사의 말을 받아들이고 파혼보다 더 나은 선택 즉 두 생명을 살리는 선택을 하게 됩니다.
우리의 결정이 늘 최선일 수는 없습니다. 그러나 그 결정에 앞서 주님께 물어볼 수 있으면 좋겠습니다. 주님께서는 모두를 살리는 최고의 결정으로 우리를 안내하실 것입니다. 천사를 통해서….
⭐닭고기만을 쓰는 이유
일본의 한 유명 식당이 있습니다.
이 식당은 모든 요리에 닭고기가 들어갑니다.
소고기, 돼지고기를 쓸만한데 닭고기만을 고집합니다.
왜 그랬을까요?
닭고기가 다른 고기들보다 더 좋아서 그런 걸까요?
이유는 아주 간단합니다.
그 식당 주인의 아들은 스모선수이기 때문입니다.
간단히 설명하면…. 스모라는 일본식 씨름도 우리 씨름과 마찬가지로 팔이나 다른 신체 부위가 땅에 닿으면 지는 경기입니다.
그래서….
아들이 지지 않기를 바라는 마음으로, 두 다리로 서있기를 바라는 마음에 네 발이 아닌 두 다리로 서 있는 닭고기만을 사용한다고 합니다.
이곳 성지에 오셔서, 힘들어하고 아파하는 자녀를 위해 기도하는 부모들이 생각났습니다.
사랑하는 가족을 위해 기도하는 마음은 시간과 공간을 초월해 같은 마음인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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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50319. 성 요셉 대축일. 이수철 프란치스코 신부님.
참 좋은 배경의 사람, 성 요셉
“기도, 자비, 믿음”
“보라, 주님은 당신 가족을 맡길
충실하고 슬기로운 종을 세우셨다.”(루카12,42)
입당송 말씀이 그대로 성 요셉을 지칭하는 듯 합니다. 요셉수도원의 참 좋은 배경인 불암산을 볼때마다 떠오르는 '산처럼' 이란 시가 생각납니다. 마치 성가정의 참 좋은 배경인 성 요셉을 연상케하는 불암산입니다. 25년이 지난 지금도 여전히 잊지 못하는 제 소망이 담긴 시입니다.
“언제나 늘 그 자리에 머물러
가슴 활짝 열고
모두를 반가이 맞이하는
아버지 산앞에 서면
저절로 경건 겸허해져
모자를 벗는다
있음자체만으로
넉넉하고 편안한 산의 품으로 살 수는 없을까
바라보고 지켜보는 사랑만으로
늘 행복할 수는 없을까
산처럼!”<2000.11.17.>
또 하나 생각나는 불암산 시입니다.
“아
크다
깊다
고요하다
저녁 불암산!”<2005.3. >
때로 큰 믿음, 깊은 겸손, 고요한 마음의 성 요셉을 연상케 하는 불암산입니다. 이런 산같은 어른이, 성가정의 참 좋은 배경이 바로 성 요셉이요, 이런 든든한 배경의 어른이 되어 노년인생을 살고 싶음은 누구나의 소망일 것입니다. 오늘 옛 현자의 지혜도 좋은 경각심을 줍니다.
“신뢰는 십년에 걸쳐 쌓이고, 하루만에 무너진다. 명성을 드높이는 것은 많은 사람이지만 몰락시키는 것은 단 한 사람이다.”<다산>
“명문가가 되기는 하늘을 오르는 것처럼 어렵고, 몰락하기는 털을 태우는 것처럼 쉽다.”<유씨가훈>
쌓기는 평생이지만 무너지기는 순간입니다. 잃어버린 신뢰의 회복은 거의 불가능합니다. 매사 신중하고 조심하고 겸손하라는 가르침입니다. 아마도 성 요셉의 평생 삶이 그러했을 것입니다. 살아있는 동안 늘 경계하며 살라는 것입니다. 제 형님이 준 “정의, 효도, 우애”라는 가훈대로 화목하게 살아가는 삼형제의 조카들도 생각납니다. 오늘 참 좋은 배경의 성 요셉의 덕을 세 측면에 걸쳐 나누고 싶습니다.
첫째, 성 요셉은 “기도의 사람”이었습니다.
기도할 때 큰 산같은 사람이 됩니다. 아브라함을 연상케 하는 성요셉입니다. 기도와 함께 가는 희망입니다. 아브라함은 희망이 없어도 희망하며 끝까지 주님을 믿었습니다. 희망이 없어도 희망하며 한결같이 살아간 기도의 사람, 성 요셉입니다. 기도의 사람은 침묵의 사람이자 경청의 사람입니다.
오늘 복음은 온통 성 요셉의 침묵과 경청의 분위기입니다. 깊은 기도중 꿈에 나타난 주님의 천사입니다. 주님의 성 요셉에 대한 신뢰가 얼마나 깊은지 주님은 당신 천사를 통해 속내의 비밀을 다 밝히십니다. 아마도 성 요셉은 평생 이 말씀을 명심하여 예수님을 키우는데 전심전력을 다했을 것입니다.
“다윗의 자손 요셉아, 두려워하지 말고 마리아늘 아내로 맞아들여라. 그 몸에 잉태한 아기는 성령으로 말미암은 것이다. 마리아가 아들을 낳으리니 그 이름을 예수라 하여라. 그분께서 당신 백성을 죄에서 구원하실 것이다.”
둘째, 성 요셉은 “자비의 사람”이었습니다.
자비할 때 깊은 산같은 사람이 됩니다. 한결같이, 끊임없이 바치는 간절하고 항구한 기도와 더불어 자비한 사람이 됩니다. 자비와 함께 가는 삶의 깊이입니다. 자비하기가 생명의 땅을, 생명을 바다를 닮은 성 요셉입니다. 며칠전 산책중 써놓은 글입니다.
“살아 있는
모든 것들이 뿌리 내린
생명의 땅
살아 있는
모든 것들을 품에 안은
생명의 바다
같은
하느님이
하느님 자비가 되고 싶다”<2025.3.15.>
요셉의 하느님 같은 자비심은 약혼자 마리아가 혼전에 잉태한 사실이 드러났을 때 그의 지혜로운 처신에서 잘 드러납니다. 자신보다는 마리아의 안위를 배려한 자비의 사람, 존엄한 품위의 의로운 사람, 성 요셉이요 다음 대목이 생생한 증거입니다.
“마리아의 남편 요셉은 의로운 사람이었고, 또 마리아의 일을 세상에 드러내고 싶지 않았으므로, 남모르게 마리아와 파혼하기로 작정하였다.”
셋째, 성 요셉은 “믿음의 사람”이었습니다.
내적고요는 믿음의 반영입니다. 고요한 물은 깊이 흐르고 깊은 물은 소리가 나지 않습니다. 아, 참 크고 깊고 고요한, 참 아름답고 매력적인 성 요셉입니다. 역시 아브라함이 보여준 믿음에 따라 살았던 성요셉입니다. 참으로 기도와 함께가는 자비의 삶, 믿음의 삶임을 깨닫습니다.
‘잠에서 깨어난 요셉은 주님의 천사가 명령한 대로 하였다.’
흡사 성 요셉의 참 좋은 선물인 태몽같습니다. 예전엔 좋은 태몽도 많았는데 요즘은 태몽이야기를 들은 적이 없습니다. 성 요셉의 지체없는 순종이 멋지고 아름답습니다. 사람은 물론 하느님을 감동시키는 믿음입니다. 요셉의 순종의 믿음에 하느님의 기쁨과 고마움도 참으로 컸을 것입니다. 다음 사무엘 하권의 말씀은 성 요셉과 예수님은 물론 믿음 좋은 우리를 통해 실현된 축복처럼 들립니다.
“나는 그의 아버지가 되고 그는 나의 자녀가 될 것이다. 너의 집안과 나라가 네 앞에서 영원히 굳건해지고, 네 왕좌가 영원히 튼튼하게 될 것이다.”
믿음은 순종의 삶을 통해 검증되고 입증됩니다. 크고 작은 순종이 일상화될 때 마지막 순종의 죽음도 반가이 기쁘게 맞이할 수 있습니다. 우리 삶은 믿음의 여정, 순종의 여정입니다. 주님의 이 거룩한 미사은총이 우리 모두 주님과 함께 공동체의 참 좋은 배경인 기도의 사람, 자비의 사람, 믿음의 사람이 되어, 또 주님의 착하고 성실한 종이 되어 살게 하십니다.
“잘하였다, 착하고 성실한 종아!
와서 네 주님과 함께 기쁨을 나누어라.”(마태25,21).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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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50319. 성 요셉 대축일. 고인현 도미니코 신부님.
✝️ 교부들의 말씀 묵상✝️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이렇게 탄생하셨다. 그분의 어머니 마리아가 요셉과 약혼하였는데, 그들이 같이 살기 전에 마리아가 성령으로 말미암아 잉태한 사실이 드러났다.(마태 1,18)
예수님의 불멸성은 인간으로 태어나신 뒤에도 변함없다
왜 마태오 복음사가는 복음서 처음에는 ‘나심’에 관해서 이야기하고 여기서는 ‘탄생’을 이야기할까요? 첫머리에서는 ‘나심의 책’(마태 1,1)이라고 하고, 여기서는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이렇게 탄생하셨다."(마태 1,18)고 하니 말입니다.
그러면 탄생’과 ‘나심’의 차이는 무엇입니까?.
이 두 단어를 그리스도와 관련해 어떻게 사용해야 합니까? 잘 들으십시오. 지금 제가 하는 것과 같은, 사람의 입에서 나오는 말은 고유의 본성상 만져지지 않고 보이지 않습니다. 그러나 비유컨대, 이 말을 종이에 쓰면, 말이 육신을 취한 것입니다.
그러면 눈에 보이고 민질 수도 있습니다. 육체가 없고 몸이 없는 하느님의 말씀도 이와 같습니다. 말씀은 신성을 지닌 존재시기에 우리 눈에 보이지도 않고 우리가 묘사할 수도 없지만, 육화로 말미암아 우리 눈에 보이고 묘사도 할 수 있는 존재가 되십니다. 이런 까닭에, 육신이 된 존재로서 ‘나심’의 ‘책’이 있는 것입니다. 그러나 여기서 우리가 알고자 하는 것은 마태오가 왜 ‘환시’나 ‘이야기’라는 단어 대신 ‘책’이라는 단어를 썼느냐가 아닙니다. 마태오가 왜 앞에서는 ‘나심’이라고 하고 여기서는 ‘탄생’이라고 했느냐는 것입니다.
‘탄생’과 남은 다릅니다. ‘남’ 또는 ‘생겨남’은 본디 하느님께서 만드신 것이고, ‘탄생’은 죄를 지어 죽음을 선고받은 사람에게서 사람이 이어지는 것입니다. 지금도 ‘남’은 불멸성과 죄없음의 의미를 담고 있는 반면 ‘태어남’은 정념과 죄에 매인 어떤 것을 암시합니다. 영원히 ‘나신’ 분인 주님은 죄를 지을 수 없는 분이십니다. 그분의 태어나심은 불멸의 존재인 그분의 영원한 ‘나심’을 훼손하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그분은 태어나심으로써, 영속하지 않는 것을 취하셨습니다.
이는 그분께서 죄의 지배 아래 놓이셨다는 뜻이 아닙니다. 그분은 태초의 아담의 모습을 한결같이 지니고 계셨으므로 타락이나 죄의 가능성이 조금도 스며들 수 없었습니다. 그러므로 그리스도의 경우, ‘나심’은 무존재에서 존재가 되는 과정을 뜻하는 말이 아닙니다. ‘그리스도의 나심’은 ‘하느님의 모습’으로 계시다가 “종의 모습" (필리 2,6)을 취하신 ‘옮아감’(바뀜, 길)이라고 하는 것이 맞습니다. 따라서 그분의 ‘태어나심’은 우리의 태어남과 같으면서도 한편으로는 그보다 뛰어난 것이었습니다. 우리가 태어나듯이 “여인에게서"(갈라 4,4) 태어나셨지만 “육욕이나 남자의 욕망에서 난 것이 아니라”(요한 1,13) 성령으로 말미암아 태어나셨으므로 우리의 태어남보다 뛰어난 태어남이기 때문입니다. 여기에는 성령으로 말미암아 우리에게 일어날 새로운 태어남에 대한 암시, 말하자면 예고가 담겨 있습니다.
-오리게네스-
✝️ 생태 영성 영적 독서✝️
마이스터 엑카르트는 이렇게 말했다(대지를 품어 안은 엑카르트 영성) / 매튜 폭스 해제 · 주석
【둘째 오솔길】
버림과 그대로 둠
설교 17
지성을 버리고 순수한 무지를 경험하라
예수가 열두 살 되던 해에도...(루카 2,42).
이 때문에 다음과 같은 물음이 제기됩니다: 신적이라고는 하지만 오감을 통해 우리에게 전달된 특정한 것들에 의해 과연 우리가 이러한 탄생을 찾아낼 수 있을까요? 오감을 통해 우리에게 전달된 것 가운데 한 예를 든다면, 하느님은 선하시며 지혜로우시며 자비로우시다라고 하는 생각 내지는 이성이 만들어 낸 것이긴 하지만 참으로 신적인 관념을 들 수 있을 것입니다. 과연 우리가 이 모든 관념을 통해 이러한 탄생을 찾아낼 수 있을까요? 당연히 그렇지 않습니다! 이 모든 관념이 아무리 선하고 신성하다고 해도, 그것은 여전히 오감을 통해 밖에서 우리에게 전달된 것이기 때문입니다. 이 고귀한 탄생이 순수하게 제 빛을 발하려면, 그것은 우리의 안에 계신 하느님으로부터만 흘러 나와야 할 것입니다. 이와 동시에, 여러분의 모든 행동이 멈추어져야 하고, 여러분의 모든 능력은 여러분의 이익을 받드는 것이 아니라 그분의 이익을 받들어야 할 것입니다. 이러한 행위가 완수되려면, 하느님만이 그것을 완수하셔야 할 것이고, 여러분은 다만 그것을 참고 견디는 수밖에 없을 것입니다. 여러분이 정녕 여러분의 의지와 여러분의 지식에서 벗어나는 곳이 어디든 간에, 하느님은 참으로 기꺼이 안으로 들어가셔서 자신의 찬란한 빛을 발하실 것입니다. 하느님께서 이런 식으로 자신을 아실 때마다, 여러분의 지식은 설 자리를 잃을 것이고, 아무 도움도 되지 못할 것입니다. 여러분은 여러분의 이성이 하느님을 알 수 있는 데까지 자랄 수 있다고 생각해서는 안 됩니다. 게다가,하느님이 여러분 안에서 신성한 빛을 비추시려고 마음먹기만 한다면, 여러분의 자연적인 빚은 여러분에게 어떠한 도움도 되지 못할 것입니다. 여러분의 자연적인 빛은 순수한 무가 되어 자신을 완전히 여의어야 할 것입니다. 왜냐하면 그렇게 된 뒤에야 하느님이 자신의 빛과 더불어 안으로 들어가실 수 있기 때문입니다. 하느님은 여러분이 버린 것의 천 배가 넘는 것을 가지고 안으로 들어가십니다. 게다가 그분은 모든 것을 담을 수 있는 새로운 형상을 데리고 들어가십니다.(353)
✝️ 수요일 그리스도인 일치의 날✝️
세계 교회사, 아우구스트 프란츤
제 2부 중세 그리스도교
제 4기 : 1300 ∼ 1500년
서구 통일 붕괴 시대의 교회
제 2절: 콘스탄츠 공의회와 공의회 우위설
콘스탄츠, 일치 공의회:
독일 왕 지그문트(1410∼1437)도 셋으로 분열된 그리스도교계를 새 공의회를 통하여 도울 계획을 세웠을 때, 피사 교황 요한 23세에게 접근하였다. 1414년 11월에 모이기로 된 공의회를 보덴 호수 근처의 콘스탄츠에서 소집하는 것의 동의를 요한으로부터 강제로 얻어낸 것은 바로 그였다. 그는 이 공의회의 중심적 인물이었고, 또 그러한 사람으로 머물렀다.
요한 23세는 수많은 이탈리아 고위 성직지들과 함께 콘스탄츠에 나타나 1414년 11월 5일에 공의회를 개최하였다. 그는 지신이 공의회로부터 유일의 합법적인 교황으로 승인될 것을 바라고 있었다. 그러나 사태는 다르게 발전하였다. 다이이(+1420), 필라스트르와 자바렐라 및 파리 대학의 명예총장인 제르송(+1429) 등 지도급 추기경들의 영향으로 공의회는 3인의 교황이 모두 퇴직해야만 일치가 복원될 것이라는 확신을 얻게 되었다. 이탈리아인의 다수를 꺾기 위하여 프랑스인과 독일인과 영국인들은 인원수대로가 아니라 “국가별”로 표결해야 함을 관철시켰다. 즉, 4개국 각각은 전체 투표에서 단지 한 표만을 가져야 하고, 다섯번째로 추기경단의 표가 추가되어야 한다는 것이었다. 이로써 요한과 이탈리아인의 우세를 타파하는 길이 열렸다.(25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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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50319. 성 요셉 대축일-우리 묵상 체험
성요셉 성인 대축일
강만연 [fisherpeter] 250319. 04:52 ㅣNo.180859
오늘 복음을 보면 요셉 성인과 성모님 사이에 약혼을 했다가 예수님이 성모님과 함께 계시게 된 일로 파혼을 결심하려고 마음을 먹었습니다. 많은 사람들이 다 요셉 성인 하면 다 의로운 이의 대명사처럼 그렇게 말씀을 하십니다. 저도 동의를 합니다. 여기서 요셉 성인이 어떤 점이 대한한지는 다 알고 계실 겁니다. 만약 파혼하기로 마음먹기 전에 주님의 천사가 먼저 어떻게 성령으로 예수님을 잉태한 사실을 전해줬더라면 하는 생각도 해봅니다. 저는 쉽지는 않을 터이지만 정황상 보면 조금은 이해가 되지 않는 부분이 있습니다. 그때 성모님의 생활 모습이나 이런 걸 봤을 때 난한 여성이지는 않았을 것이지 않겠습니까? 그럼 뭔가 좀 이상하다고 생각해 성모님께 어찌 된 일인지 한번 물어보긴 했을 거고 그랬다면 머리로는 이해를 할 수가 없지만 가슴으로는 이해를 해 줄 수도 있지 않았을까 생각합니다.
성모님도 남자를 모른다고 하는 내용과 함께 답답한 마음을 전했을 겁니다. 이해할 수 없는 현상이지만 성모님의 모습을 상상해보면 저라면 성모님이 어떤 사실을 말씀하셨을 때 믿어줄 것 같습니다. 설령 실수로 어떻게 그렇게 됐더라고 하더라도 그래도 사랑했던 여자라면 그런 상황에서는 오히려 여자를 지켜줘야 하지 않아야 하는가 생각을 합니다. 제가 뭇 많은 여성들에게 어떤 좋은 점수를 따려고 그렇게 생각하는 건 아닙니다. 그나마 인간적인 면에서 그래도 비밀을 지켜주려고 한 그 점 때문에 최소한의 남자의 자존심을 지킬 수 있었던 것 같습니다. 만약에 화가 난다고 해서 그런 상황에서 화풀이로 그런 사실을 외부에 알렸다고 한다면 사나이가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우리는 오늘 복음에서 이점을 한번 깊이 묵상해 볼 필요가 있다고 저는 생각합니다. 어떤 것이냐 하면 바로 요셉 성인처럼 타인의 비밀이 있다면 그 비밀이 누설되거나 세상에 알려지면 그 사람이 살아가는 데 많은 장애나 시련이 올 수 있을 위험이 있다면 그런 상황에서는 절대 비밀을 누설해서는 안 된다는 사실입니다.
우리는 신앙생활을 하면서 성모님과 같은 일은 아니지만 정말 어떤 경우에는 어떤 한 당사자가 있다면 그 당사자게겐 치명적인 아픔이 될 수 있는 비밀 같은 것을 악의적으로 그게 어떤 마치 흥미거리라도 되는 것처럼 동네방네 소문을 내는 사람들을 많이 봤습니다. 이건 성별을 불문하고 정말 이런 행동을 해서는 안 될 것입니다. 정말 어떤 경우는 무덤까지 비밀을 지켜야 하는 그런 상황이라면 하느님과 두 사람 당사자만 아는 걸로 끝까지 그 사람의 비밀을 지켜줘야 합니다. 혹여 지금까지 만약 그랬던 일이 있다면 회개하고 앞으론 신자들 사이에서 설령 그 사람이 자기 마음에 안 드는 사람일지라도 그렇게 하는 것은 조금은 비인간적이지 않을까 생각합니다. 이런 행동은 절대 하지 말아야 한다는 말에는 다 동의를 하실 것 같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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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순 제2주간 화요일
강만연 [fisherpeter] 250318.16:23 ㅣNo.180846
오늘 복음 같은 경우도 중학교만 나와도 이게 무슨 말씀인지 다 알 수 있을 그런 정도의 복음입니다. 사실 이건 어쩌면 특별한 강론 같은 것도 필요 없을 정도의 복음입니다. 이 앞에 황금률 복음이 나오는 날 저는 핑계를 댄다면 그날 올릴까 말까 고민하다가 그냥 올리지 않았습니다. 왜냐하면 이런 생각이 들었습니다. 다른 건 몰라도 황금률 복음은 그냥 인간 사회에서는 상식과 도덕과 같은 것입니다. 상식과 도덕 중에서 그것도 가장 기본적인 상식이고 도덕인데 거기서 또 뭔 설명이 필요할까 하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굳이 핑계를 댄다면 이런 핑계입니다. 오늘 복음은 그보다는 좀 덜하지만 그래도 한번 묵상할 포인트를 고민해봤습니다.
저는 최후의 심판에서 꼭 보고 싶은 장면이 있습니다. 최후의 심판을 누구나 상상하는 그런 심판 말고 다른 것입니다. 흔히 신부님들 중에서 이런 강론을 하신 분도 계십니다. 많이 인용되는 내용입니다. 천국을 가면 놀라는 세 가지입니다. 천국에 갔더만 전혀 생각지도 못했던 사람이 있어서 놀라고 또 전혀 올 것이라고 생각하지 못했는데 온 사람 이런 강론을 들은 적이 있습니다. 저는 이 표현에서 좀 더 하나를 기대하고 몹시 궁금한 게 있습니다. 오늘 복음에서도 선생이라는 단어가 나옵니다.
오늘 복음에 등장하는 이 선생이라는 단어가 복음에서 의미하는 것은 어떤 뜻인지는 다 잘 아실 것입니다. 사실은 지도자의 위치에 있는 사람이라면 지도자다운 면모를 보여야 하는데 그렇지 못할 경우를 낮추어 마치 풍자하는 것입니다. 문학유형으로 말할 것 같으면 양반전 같은 풍자소설의 풍자일 것 같습니다. 여기서 ‘자’의 의미는 ‘찌를 자’입니다. 마치 하층계급이 상층계급을 비난이나 비판을 직접적으로 할 수 없었기 때문에 우회해서 당시 사회의 부조리를 고발하기 위한 문학유형이 바로 풍자소설로 등장한 것입니다.
오늘 복음은 마치 그런 유형의 풍자소설과도 같은 면이 없지 않아 있습니다. 특히 오늘 등장하는 인물 중에서 누구를 유심히 잘 봐야 할 것 같은가요? 율법 학자와 바리사이입니다. 이 사람들이 모세의 자리에 앉아 있다고 했습니다. 모세의 자리는 율법을 상징하는 것입니다. 오늘날로 비유하자면 정확한 것은 아니지만 법학교수나 아니면 법조인 같은 사람들일 것입니다. 이게 교회 안에서는 신학교 교수 등등 이런 위치에 있는 사람들일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그들의 가르침을 잘 따라라고 말씀을 하시면서 행실은 따라 하지 말라고 하십니다. 이 말씀은 어떻게 해석을 해야 할까요? 일차적으로 예수님께서 이렇게 말씀하신 것은 지도자라는 사람이 말만 번지르르하게 하고 자기가 한 말과는 언행이 완전히는 아니더라도 터무니없이 동떨어진 모습을 보여주기 때문에 그렇게 말씀하셨던 것이라고 봐야 하지 않을까요? 그렇다면 모든 바리사이와 율법학자들이 다 그렇게 했다고 그렇게 말할 수 있을까요? 그렇지 않을 겁니다. 요즘 세상의 세태를 잘 관찰해보면 쉽게 잘 이해할 수 있을 겁니다.
학자를 비유해 표현해보겠습니다. 학자도 진정한 학문의 길을 걷는 학자가 있습니다. 만약에 학자가 세상에 어떤 메시지를 내놓을 때 학자의 양심으로 진정한 학자의 소신을 가지고 말하는 사람이 있는가 하면 만약 그렇게 말했다가는 불이익이 있거나 아니면 자신의 기득권에 손해가 될 우려가 있다면 학자로서의 양심을 저버리는 사람이 있습니다. 또 한편으로는 자신의 출세를 위해 세상의 권력에 영합하고 개인의 영달을 위해서도 곡학아세하는 그런 사람도 있습니다. 마치 2000년 전 율법학자와 바리사이들이 현대판 이런 사람과 거의 같다고 보면 맞을 겁니다.
선생이라는 신분은 지도자의 역할을 하기도 하지만 모범이 되는 사람이어야 합니다. 선생은 선생으로서의 모습과 품위를 지닐 때만이 선생으로 대우를 해 줄 수 있고 또 대우를 받을 수 있습니다. 선생으로서의 자질이 없다면 그 사람은 신분은 선생이라도 대우를 제대로 받지 못합니다. 제가 비근한 예를 들겠습니다. 고등학교 모교에서 예전에 고문을 가르치신 분이 계신데 그분은 교감 선생님도 역임하셨고 국내에서 몇 번째 손가락 안에 들 정도의 탁월한 고문 실력을 갖추신 분입니다. 국어 선생님도 그분의 실력 앞에는 경의를 표할 정도입니다.
아주 연로하신 수학 선생님이 계신데 그분의 수학 실력은 일반 수학 교사와는 비교 자체를 할 수 할 수 없을 정도의 실력을 가진 분이십니다. 근데 그분은 평소 말씀이 아주 거친 게 좀 단점입니다. 아무리 그런 말씀을 하셔도 절대 어느 누구 하나 빈정되는 말을 하는 학생이 없었습니다. 만약 실력도 없는데 그런 말씀을 하신다면 애들이 어떨 것 같습니까? 앞에서는 말을 못해도 완전 무시할 수 있습니다. 선생이라는 위치는 인품도 훌륭해야 합니다. 그러면 금상첨화겠지만 그 정도까지 요구하는 것은 좀 그렇습니다. 지금까지 제가 언급한 내용과 오늘 복음 전체와 함께 조합해서 다시 간단하게 요약해 종합적으로 표현을 한다면 선생과 지도자의 위치에 있어도 자신의 말과 행동, 언행이 일치하는 그 정도에 따라 그 지도자를 존경할 수 있고 그렇지 않을 수도 있습니다. 백번 양보해 최소한의 품위는 있어야 합니다.
이젠 오늘 복음에서 제가 서두에 언급한 내용으로 다시 환원해 정리하고자 합니다. 제가 최후의 심판에서 기대하고 궁금한 게 있다고 했습니다. 교회 내에서 지도자로서 한평생 잘 걸어가신 분들은 하느님으로부터 엄청난 상급과 영광이 함께하시길 바라겠지만 그렇지 못한 길을 걸으신 분들은 이 세상에서 누렸던 그 지위가 그날에는 부끄러움과 수치의 날이 될 수 있는 분들도 있을 겁니다. 그날에 수치를 당하지 않으려면 오늘 복음 마지막에 나오는 평범한 그 말씀을 다시 새기시고 다시 지금이라도 초심으로 돌아가야 할 것입니다. 세상 법도 신분범은 가중처벌하는 것처럼 그만큼 책임이 더 가중됩니다. 마치 이런 것처럼 최후의 심판에서는 이 세상에서 자신이 교회를 위해 어떤 직분을 가지고 있었다면 그날에 그 직분을 잘 수행하신 분은 하느님의 영광을 잘 드러낸 사람이라 상급도 어마어마할 겁니다. 직무를 태만하거나 유기한 사람은 그에 합당한 어떤 대가가 있을 겁니다. 만약 그런 게 없다면 하느님의 공의가 거짓말이 되고 정의가 없게 되는 것입니다. 이건 하늘나라에서도 똑같이 적용될 거라는 건 제가 굳이 복음 어디에 그게 있다고 말씀을 드리지는 않겠습니다.
교회 내 지도자라는 신분은 모든 사람이 다 해당될 수 있습니다. 평신도 회장도 될 수 있고 꾸리아 단장도 될 수 있고 다양한 위치에서 교회 내에서 앞장서 교회를 이끌어나가는 모든 위치에 있는 사람은 다 해당될 것입니다. 평신도라고 해서 제외되지 않을 겁니다. 왜 평신도도 해당이 되는지 자명한 이유가 있습니다. 평신도로서의 리더도 많은 사람들의 영혼을 이끄는 위치에 있기 때문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막중한 일입니다. 아마 평신도에 대해서 이렇게까지 심각하게 생각해 본 사람은 아마 드물 것입니다. 잘 한번 묵상해보시기 바랍니다. 평신도도 이런 의식을 가지고 일을 해야 하느님 역사에 진정한 공로를 세울 수 있는 것이지 그렇지 않으면 허수아비에 불과한 일만 하는 것에 그치고 말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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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3/20 복은 나누기에서 수정하였다고 언급???
사순 제2주간 화요일 복음
강만연 [fisherpeter] 2025-03-18 ㅣNo.180846
오늘 복음 같은 경우도 중학교만 나와도 이게 무슨 말씀인지 다 알 수 있을 그런 정도의 복음입니다. 사실 이건 어쩌면 특별한 강론 같은 것도 필요 없을 정도의 복음입니다. 이 앞에 황금률 복음이 나오는 날 저는 핑계를 댄다면 그날 올릴까 말까 고민하다가 그냥 올리지 않았습니다. 왜냐하면 이런 생각이 들었습니다. 다른 건 몰라도 황금률 복음은 그냥 인간 사회에서는 상식과 도덕과 같은 것입니다. 상식과 도덕 중에서 그것도 가장 기본적인 상식이고 도덕인데 거기서 또 뭔 설명이 필요할까 하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굳이 핑계를 댄다면 이런 핑계입니다. 오늘 복음은 그보다는 좀 덜하지만 그래도 한번 묵상할 포인트를 고민해봤습니다.
저는 최후의 심판에서 꼭 보고 싶은 장면이 있습니다. 최후의 심판을 누구나 상상하는 그런 심판 말고 다른 것입니다. 흔히 신부님들 중에서 이런 강론을 하신 분도 계십니다. 많이 인용되는 내용입니다. 천국을 가면 놀라는 세 가지입니다. 천국에 갔더만 전혀 생각지도 못했던 사람이 있어서 놀라고 또 전혀 올 것이라고 생각하지 못했는데 온 사람 이런 강론을 들은 적이 있습니다. 저는 이 표현에서 좀 더 하나를 기대하고 몹시 궁금한 게 있습니다. 오늘 복음에서도 선생이라는 단어가 나옵니다.
오늘 복음에 등장하는 이 선생이라는 단어가 복음에서 의미하는 것은 어떤 뜻인지는 다 잘 아실 것입니다. 사실은 지도자의 위치에 있는 사람이라면 지도자다운 면모를 보여야 하는데 그렇지 못할 경우를 낮추어 마치 풍자하는 것입니다. 문학유형으로 말할 것 같으면 양반전 같은 풍자소설의 풍자일 것 같습니다. 여기서 ‘자’의 의미는 ‘찌를 자’입니다. 마치 하층계급이 상층계급을 비난이나 비판을 직접적으로 할 수 없었기 때문에 우회해서 당시 사회의 부조리를 고발하기 위한 문학유형이 바로 풍자소설로 등장한 것입니다.
오늘 복음은 마치 그런 유형의 풍자소설과도 같은 면이 없지 않아 있습니다. 특히 오늘 등장하는 인물 중에서 누구를 유심히 잘 봐야 할 것 같은가요? 율법 학자와 바리사이입니다. 이 사람들이 모세의 자리에 앉아 있다고 했습니다. 모세의 자리는 율법을 상징하는 것입니다. 오늘날로 비유하자면 정확한 것은 아니지만 법학교수나 아니면 법조인 같은 사람들일 것입니다. 이게 교회 안에서는 신학교 교수 등등 이런 위치에 있는 사람들일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그들의 가르침을 잘 따라라고 말씀을 하시면서 행실은 따라 하지 말라고 하십니다. 이 말씀은 어떻게 해석을 해야 할까요? 일차적으로 예수님께서 이렇게 말씀하신 것은 지도자라는 사람이 말만 번지르르하게 하고 자기가 한 말과는 언행이 완전히는 아니더라도 터무니없이 동떨어진 모습을 보여주기 때문에 그렇게 말씀하셨던 것이라고 봐야 하지 않을까요? 그렇다면 모든 바리사이와 율법학자들이 다 그렇게 했다고 그렇게 말할 수 있을까요? 그렇지 않을 겁니다. 요즘 세상의 세태를 잘 관찰해보면 쉽게 잘 이해할 수 있을 겁니다.
학자를 비유해 표현해보겠습니다. 학자도 진정한 학문의 길을 걷는 학자가 있습니다. 만약에 학자가 세상에 어떤 메시지를 내놓을 때 학자의 양심으로 진정한 학자의 소신을 가지고 말하는 사람이 있는가 하면 만약 그렇게 말했다가는 불이익이 있거나 아니면 자신의 기득권에 손해가 될 우려가 있다면 학자로서의 양심을 저버리는 사람이 있습니다. 또 한편으로는 자신의 출세를 위해 세상의 권력에 영합하고 개인의 영달을 위해서도 곡학아세하는 그런 사람도 있습니다. 마치 2000년 전 율법학자와 바리사이들이 현대판 이런 사람과 거의 같다고 보면 맞을 겁니다.
선생이라는 신분은 지도자의 역할을 하기도 하지만 모범이 되는 사람이어야 합니다. 선생은 선생으로서의 모습과 품위를 지닐 때만이 선생으로 대우를 해 줄 수 있고 또 대우를 받을 수 있습니다. 선생으로서의 자질이 없다면 그 사람은 신분은 선생이라도 대우를 제대로 받지 못합니다. 제가 비근한 예를 들겠습니다. 고등학교 모교에서 예전에 고문을 가르치신 분이 계신데 그분은 교감 선생님도 역임하셨고 국내에서 몇 번째 손가락 안에 들 정도의 탁월한 고문 실력을 갖추신 분입니다. 국어 선생님도 그분의 실력 앞에는 경의를 표할 정도입니다.
아주 연로하신 수학 선생님이 계신데 그분의 수학 실력은 일반 수학 교사와는 비교 자체를 할 수 할 수 없을 정도의 실력을 가진 분이십니다. 근데 그분은 평소 말씀이 아주 거친 게 좀 단점입니다. 아무리 그런 말씀을 하셔도 절대 어느 누구 하나 빈정되는 말을 하는 학생이 없었습니다. 만약 실력도 없는데 그런 말씀을 하신다면 애들이 어떨 것 같습니까? 앞에서는 말을 못해도 완전 무시할 수 있습니다. 선생이라는 위치는 인품도 훌륭해야 합니다. 그러면 금상첨화겠지만 그 정도까지 요구하는 것은 좀 그렇습니다. 지금까지 제가 언급한 내용과 오늘 복음 전체와 함께 조합해서 다시 간단하게 요약해 종합적으로 표현을 한다면 선생과 지도자의 위치에 있어도 자신의 말과 행동, 언행이 일치하는 그 정도에 따라 그 지도자를 존경할 수 있고 그렇지 않을 수도 있습니다. 백번 양보해 최소한의 품위는 있어야 합니다.
이젠 오늘 복음에서 제가 서두에 언급한 내용으로 다시 환원해 정리하고자 합니다. 제가 최후의 심판에서 기대하고 궁금한 게 있다고 했습니다. 교회 내에서 지도자로서 한평생 잘 걸어가신 분들은 하느님으로부터 엄청난 상급과 영광이 함께하시길 바라겠지만 그렇지 못한 길을 걸으신 분들은 이 세상에서 누렸던 그 지위가 그날에는 부끄러움과 수치의 날이 될 수 있는 분들도 있을 겁니다. 그날에 수치를 당하지 않으려면 오늘 복음 마지막에 나오는 평범한 그 말씀을 다시 새기시고 다시 지금이라도 초심으로 돌아가야 할 것입니다. 세상 법도 신분범은 가중처벌하는 것처럼 그만큼 책임이 더 가중됩니다. 마치 이런 것처럼 최후의 심판에서는 이 세상에서 자신이 교회를 위해 어떤 직분을 가지고 있었다면 그날에 그 직분을 잘 수행하신 분은 하느님의 영광을 잘 드러낸 사람이라 상급도 어마어마할 겁니다. 직무를 태만하거나 유기한 사람은 그에 합당한 어떤 대가가 있을 겁니다. 만약 그런 게 없다면 하느님의 공의가 거짓말이 되고 정의가 없게 되는 것입니다. 이건 하늘나라에서도 똑같이 적용될 거라는 건 제가 굳이 복음 어디에 그게 있다고 말씀을 드리지는 않겠습니다.
교회 내 지도자라는 신분은 모든 사람이 다 해당될 수 있습니다. 평신도 회장도 될 수 있고 꾸리아 단장도 될 수 있고 다양한 위치에서 교회 내에서 앞장서 교회를 이끌어나가는 모든 위치에 있는 사람은 다 해당될 것입니다. 평신도라고 해서 제외되지 않을 겁니다. 왜 평신도도 해당이 되는지 자명한 이유가 있습니다. 평신도로서의 리더도 많은 사람들의 영혼을 이끄는 위치에 있기 때문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막중한 일입니다. 아마 평신도에 대해서 이렇게까지 심각하게 생각해 본 사람은 아마 드물 것입니다. 잘 한번 묵상해보시기 바랍니다. 평신도도 이런 의식을 가지고 일을 해야 하느님 역사에 진정한 공로를 세울 수 있는 것이지 그렇지 않으면 허수아비에 불과한 일만 하는 것에 그치고 말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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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50319. 성 요셉 대축일-우리 묵상 체험
■ 오직 침묵으로 사신 성 요셉 /
박윤식 [big-llight] 2025-03-18 ㅣNo.180849
오늘은 복되신 동정 마리아의 배필인 요셉 성인 대축일이다. 하느님께서는 당신 아드님을 이 세상에 보내시며 마리아와 요셉에게 맡기셨다. 성인께서는 이를 믿음으로 응답하였기에, ‘하느님의 약속’이 이 땅에 실현되었다. 따라서 오늘 성인을 기억하며 그의 삶을 본받자. 성인께서는 성모님께 큰 버팀목이셨다. 사실 성모님의 보호자로서 자신의 삶을 헌신하기로 마음굳히기까지 그의 인간적 고뇌의 시간이 있었으리라는 점은 충분히 짐작해 볼 수 있다. 아마도 깊은 긴 침묵의 시간이 필요했으리라. 침묵과 인내의 시간을 품어야 함을 요셉 성인에게서 본받자.
상대를 대할 때 상처 받지 않게 배려하는 것, 그래서 어떤 불이익도 기꺼이 감수하며 기꺼이 떠안는 것, 이것이 요셉 성인의 모습이다. 이 땅의 모든 아버지가 드러내야 할 참 아버지상이기도. 요즘 많은 아버지가 힘들어한다. 자녀 교육비는 점점 늘어만 가는데 경제 사정은 전보다 더 어렵다. 직장에서의 경쟁은 날로 치열해진다. 퇴직 후의 노후도 걱정거리이다. 그래서 시름은 늘어가고 주름은 깊어만 간다. 지치고 힘들게 사는 아버지들이 하느님께서 주시는 위로와 힘으로 살아갈 용기를 얻었으면 한다. 모든 남성은 요셉 성인의 이런 모범을 배워야 할 게다.
사실 성인께서는 심한 도전을 받으셨다. 마리아의 임신 소식은 이루 말로 표현할 수 없었을 게다. 그녀를 돌에 맞아 죽게 할 수도 있었지만, 끝내 성모님을 지키셨다. 그녀와 결별하고 새롭게 평범한 가정을 꾸릴 수도 있었지만, 하느님께서는 그에게 이조차 허락지 않으셨다. 결국은 마리아의 잉태가 그토록 믿어 왔던 하느님 계획 하에 이루어졌다는 것을 꿈속에 깨닫는다.
그리하여 그는 정말 비천한 곳에서 태어나신 예수님의 뒷바라지 감수와 어린 핏덩이와 산모를 이집트로 피신하라는 것도 기꺼이 받아 들이셨다. ‘성가족’을 끝까지 책임지신 것이다. 너무나 무책임하게 보이는 하느님을 성인은 얼마나 야속하게 여겼을까? 예수님과 함께 산다는 것 그 자체로 하나의 도전이었다. 성인께서는 이처럼 끝없는 도전을 받으면서 사셨다. 왜 그래야만 했을까? 하느님 뜻에 따라 예수님과 함께 살아야 했기에. 이는 감수해야 할 ‘시련’이었으리라.
이렇게 성인은 성가정을 꾸리고 이끈 가장이었지만, 하느님의 구원 역사에서 거의 모습을 드러내지 않을 정도로 겸손한 분이셨다. 성인은 단 한 마디 대꾸도 없으셨고, 자신의 의견을 감히 어느 누구에게도 내비친 적이 없다. 그저 묵묵히 순종하셨다. 시련을 무던히 참으면서 성모님과 함께 ‘아름다운 성가정’을 끝내 지키셨다. 그는 전적으로 순명의 삶을 살았다. 성인은 말을 하는 사람이 아니라 듣는 이였다. 자기 생각대로만 움직이는 것이 아니라, 하느님 말씀에 따라 행동하는 이의 전형이었다. 그러기에 하느님 말씀을 이 세상에 실현할 수 있었던 것이다.
더욱이 성인은 겸손한 이의 전형이다. 늘 예수님과 성모님 뒤에서 말없이 헌신하면서, 자신을 드러내지 않았다. 성모님의 남편으로서 얼마나 힘든 길을 걸었을까? 그러기에 성인께서는 믿는 이의 가장 뛰어난 표본이 되신 것이다. 우리 역시 늘 신앙의 모범으로 받아들이며, 그 속에서 하느님의 참된 뜻을 새겨야 할 게다. 따라서 오늘을 사는 우리는 성인의 대축일 의미를 새기자. 사실 하느님 은총을 받는 날까지 성모님께서 동정을 보전한 것은 참으로 대단한 일이다. 그렇지만 성인께서 성모님을 보호하며 도와준 일 역시 더 할 나위 없다. 예수님 구원활동에 침묵으로만 묵묵히 봉사한 성인의 크신 그 도움이 자리하였음을 우리 모두는 깊이 새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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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50319. 성 요셉 대축일. 한창현 모세 신부님.
히브리인들의 문화에서 약혼은 혼인에 포함된 중요한 과정입니다.
일단 약혼하면 남편과 아내로 불릴 수 있었습니다.
그러나 정식으로 혼인할 때까지, 적어도 일 년은 남녀가 각자 자신의 집에 머물렀습니다.
그러한 상황에서 자기와 함께 살지 않았던 마리아가 잉태하였다는 것은, 요셉의 처지에서는 마리아가 율법에서 금하는 행동을 하였다고 생각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성경은 요셉이 의로운 사람이라고 전합니다. 히브리인에게 ‘의롭다’는 말은 곧 율법을 곧이곧대로 지키는 것을 뜻합니다.
율법에 따르면 요셉은 마리아가 잉태한 사실에 실제로 마리아에게 죄가 있는지 따져 보았어야 합니다(신명 22,23-27 참조).
그러나 요셉은 의로운 사람이었음에도 율법에 따라 마리아의 죄를 따져 묻는 대신, 마리아가 잉태한 사실을 세상에 드러내지 않기로 합니다.
어쩌면 요셉은 마리아의 잉태 과정에 율법에서 금하는 죄가 있으면 어쩌나 걱정하였을 수 있습니다.
그리고 그 사실을 마주할 용기가 없었는지 모르겠습니다.
주님의 천사는 이러한 요셉이 하느님 구원의 신비를 꿈에서 마주하고, 이미 자신이 하느님 구원의 역사 안에 있다고 깨달을 기회를 주셨습니다.
우리의 영적 여정에서도 자신의 상황을 마주하지 못하고 요셉처럼 외면하고 싶을 때가 있습니다.
우리가 차마 용기가 없어 외면하고 있는 우리의 외적인 상황과 내적인 상태를 바라볼 기회가 온다면, 요셉 성인처럼 그 안에 함께하시는 하느님의 자비에 겸손하게 머물 수 있는 은총을 청해야 할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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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하 자료는 보관을 위해 추가 첨가한 자료입니다
(23:5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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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50319. 성 요셉 대축일. 김명겸 요한 신부님.
오늘 복음은
예수님 족보의 마지막 부분으로 시작합니다.
족보를 통해 요셉이 역사적 인물임을 이야기하고
그의 아내 마리아에게서 태어나신 예수님도
역사적 인물임을 이야기합니다.
마리아가 낳은 아들은
하느님 백성을 죄에서 구원하실 것이라고
천사가 예언합니다.
세상의 구원을 위해
하느님께서 인간의 역사 속으로 들어오십니다.
사람이 되십니다.
하지만 그 일은 쉽지 않았습니다.
하느님께서 인간이 되시는 것은 어떻게 보면
순리를 거스르는 것이었습니다.
한계가 없으신 분이 한계를 지닌 존재가 된다는 것은
자연스러운 일은 아니었습니다.
그 부자연스러움은 처녀의 잉태로 나타났고
그것이 하느님의 뜻이었음을 모르는 요셉은
처음에는 그것을 받아들이지 못했습니다.
요셉이 받아들이지 못했다면
예수님께서는 세상의 빛을 보지 못했을 수도 있습니다.
마리아의 응답으로 잉태되었지만
요셉의 응답이 없었다면
태어나셨어도 아버지 없는 아들로 세상을 살아가기는
쉽지 않았을 것입니다.
잉태부터 출산까지 어느 하나 쉬운 단계가 없었습니다.
인간적인 생각에
하느님께서 너무 무리하시는 것은 아닌가 생각됩니다.
그 수고로움을 하느님께서는 기꺼이 받아들이십니다.
그만큼 세상의 구원이 시급했고
그만큼 중요했습니다.
그만큼 하느님께서는 세상을 사랑하시고
우리 각자를 생각해 주십니다.
그 사랑을 생각할 때
우리도 하느님의 말씀에 기꺼이 응답할 수 있을 것입니다.
요셉의 응답이, 마리아의 응답이
대단하다고 느껴질 수 있지만
우리가 하느님의 사랑 받는 존재라는 것을 느끼면
우리도 그들처럼 하느님께
사랑으로 응답할 수 있을 것입니다.
그 사랑을 느끼고 그 사랑을 표현할 수 있는
오늘이 되었으면 좋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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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50319. 성 요셉 대축일. 한상우 바오로 신부님
'요셉은 주님의 천사가 명령한 대로 하였다.'(마태 1, 24)
하느님
햇살의
은총으로
봄꽃이
피어납니다.
망각할 수 없는
하느님의
은총과
하느님의
사랑입니다.
서로에게
구원이
되어 주는
사랑이
있습니다.
마지막까지
서로에게
충실한
요셉과
마리아의
사랑입니다.
요셉 성인을
통해
자신을
비워내는
진정한
하느님 중심을
만납니다.
자신의 뜻을
비워내는 것이
곧 자신을
살리는 길임을
깨닫습니다.
삶의 진정한
안목은
참다운 삶을
하느님 안에서
우리가 기쁘게
살아가는
것입니다.
공명(共鳴)되는
사랑이
복음입니다.
하느님의 뜻을
진실로
아끼고 귀하게
여기는
성 요셉은
성가정의
수호자가
됩니다.
성 요셉의
일상이
신앙의 귀감이
되는 것은
사람 귀한 줄
아는 소중한
마음이
신앙의 일상으로
드러나기
때문입니다.
하느님과
함께 머무는
일상입니다.
마리아와 같은
믿음의
마음으로
예수님과
함께 합니다.
서로를 진심으로
생각하고
서로를 간절하게
바라보는 삶이
신앙의 일상입니다.
우리에게 다가오신
하느님을 기쁘게
받아들이는
성 요셉 대축일
되시길
기도드립니다.
시작이 아름다우면
끝도 아름답습니다.
우리의 본마음이
끝까지
하느님과 함께하는
은총의
사순되십시오.
하느님의
뜻을 새기며
노오란
산수유꽃이
피어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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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50319. 성 요셉 대축일. 양승국 스테파노 신부님.
여행객들에게는 요구가 많지만, 순례자에게는 감사가 전부입니다!
오늘 축일을 맞이하시는 요셉 성인의 이름 뒤에는 몇 가지 중요한 닉네임이 붙습니다.
마리아의 아내, 예수님의 양부, 나자렛 성가정의 수호자, 임종자들의 수호자, 성교회의 보호자...
구세사 안에서 요셉 성인의 공로와 역할이 얼마나 지대했던지 미사 경문 내 가장 중요한 부분인 성찬 예식 내에 그분의 이름이 등장합니다.
“하느님의 어머니 복되신 동정 마리아와 그 배필이신 성 요셉과...”
인간적인 시선으로 바라보면 마리아 못지 않게 요셉 성인의 삶도 참으로 기구하고 혹독했습니다.
그가 꿈꾸고 있었던 평범하고도 단란한 결혼 생활은 하느님의 초대로 인해 일찌감치 물건너 갔습니다.
어찌보면 그는 닭쫓던 개처럼, 낙동강 오리알 같은 신세로 전락했습니다.
결혼한 것도 아니고 결혼 안한 것도 아니고. 그는 하느님으로 인해 평범한 한 인간 존재로서
기본적인 욕구나 희망이 모두 차단되었습니다.
대신 그에게 성가정을 위한 봉사와 헌신, 침묵만이 요구되었습니다.
제가 만일 요셉 처지였다면, 입만 열면 불평불만에 하소연이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요셉은 과묵했습니다.
충실했습니다.
하느님의 요청에 흔쾌히 순응하며, 그렇게 순탄치 않은 신앙 여정을 묵묵히 걸어갔습니다.
요셉 성인에게서 강하게 풍기는 덕행은 순례자로서의 충실함입니다.
그의 모습에서 성조 아브라함의 신앙을 느낍니다. 일어나라니 즉시 일어났습니다.
떠나라니 군말 없이 떠났습니다.
요셉 성인은 부단히 자신의 의지와 계획을 접고 하느님의 뜻을 찾고 추구했습니다.
언제나 한치앞을 내다볼수 없는 안갯속같은 여정이었지만, 기쁜 마음, 감사한 마음으로 하루 하루 그날의 길을 걸어갔습니다.
여행객은 요구가 많지만, 순례자는 항상 감사할 뿐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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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50319. 성 요셉 대축일. 조욱현 토마스 신부님.
복음: 마태 1,16.18-21.24a: 요셉은 천사가 일러준 대로 하였다
“어머니 마리아가 요셉과 약혼하였는데, 그들이 같이 살기 전에 마리아가 성령으로 말미암아 잉태한 사실이 드러났다.”(18절). 이 잉태는 신비이다. 이 잉태로 인해 요셉은 조금도 마리아의 마음을 괴롭게 하지 않으려고 하면서 해결하려 한다. 약혼은 했지만, 마리아와 혼인을 하는 것은 율법을 어기는 것이고, 일을 드러내어 마리아를 재판에 넘긴다면 마리아가 죽을 수도 있어서 조용히 파혼하려 했다. 이때 천사가 꿈에 나타나 “다윗의 자손 요셉아, 두려워하지 말고 마리아를 아내로 맞아들여라. 그 몸에 잉태된 아기는 성령으로 말미암은 것이다.”(20절) 하였다. 이것은 요셉이 마리아의 순결을 의심하지 않도록 그 신비를 알려준 것이다. 요셉은 의심이라는 악을 떨쳐버리고 신비라고 하는 선을 받아들였다. 요셉은 이제 마리아가 아무 죄가 없다는 것과 동정 잉태를 인정할 수 있었다. 요셉이라는 뜻은 흠잡을 데 없는 이라는 뜻이다.
천사는 또 “마리아가 아들을 낳으리니 그 이름을 예수라고 하여라. 그분께서 당신 백성을 죄에서 구원하실 것이다.”(21절) 하였다. 그 아기의 이름을 예수라 했는데 그 뜻은 하느님께서 구원하신다, 구원자라는 뜻이다. 이는 하느님께 어울리는 이름이다. 그 이름은 하느님이시며 구원자이신 분의 육에 붙여진 이름이다. 요셉은 천사에게서 계시를 받고 기쁘게 하느님의 뜻에 따른다. 그는 마리아를 맞아들이고 기쁘게 하느님의 뜻을 이룬다. 요셉이 의롭다고 하는 것은 바로 하느님의 뜻을 채우려 노력했다는 것이다. 요셉이 하느님의 뜻을 따라 마리아를 아내로 맞아들이고, 하느님의 구원계획을 이루는데 협력하셨던 삶을 본받아, 우리의 삶의 순간순간에 주님의 뜻을 이루려고 노력하며 그분을 본받도록 하여야 한다. 우리의 믿음은 바로 하느님의 뜻에 대한 올바른 응답이 되어야 한다. 요셉이 자기 뜻을 버리고 하느님의 뜻을 받아들였듯이, 마리아가 주님의 말씀에 온전히 순종하였듯이 주님의 뜻을 따르며 주님의 뜻을 따르려 노력하여야 한다. 하느님의 말씀을 실천하고 살면서 주님을 따르는 우리가 되어야 한다. 이렇게 할 때, 우리의 삶의 순간순간이, 조그마한 행위 하나하나가 하느님 구원사업에 협력하는 순간이 된다. 요셉 성인과 같이 언제나 하느님의 뜻을 충실히 이루는 우리 자신이 될 수 있도록 깨어있는 삶을 되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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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50319. 성 요셉 대축일. 전삼용 요셉 신부님.
기도의 성 요셉: 고민을 오래 하지 말고 회의도 길게 하지 말라
지금까지 성 요셉의 의로움과 정결함에는 많은 강론을 하였으나, 성 요셉의 기도라는 부분에서는
크게 묵상한 적이 없습니다.
그러나 하느님의 뜻을 따르는 데는 기도가 필수적이고, 성 요셉에게서도 그 특징은 여지없이 나타납니다.
우선 기도하지 않는, 혹은 잘못된 기도를 하는 이들의 특징은 무엇일까요?
고민을 오래 한다는 것입니다.
기도하는 사람들은 단호합니다.
일생일대의 결정 앞에서 성모님은 “저는 주님의 종입니다.
그대로 제게 이루어지소서.” 하셨고, 예수님은 “제 뜻이 아니라 아버지 뜻대로 하소서.”라며 목숨을 내어주셨습니다.
그러나 자아가 강한 사람은 언제나 우유부단하고 이런 사람들이 모이면 하나를 결정하는 데도
엄청난 시간이 소비됩니다.
그래서 저는 회의를 길게 하는 것을 좋아하지 않습니다.
각자가 기도하고 결정이 된 상태에서 와야 하고 책임자는 기도를 통해 빠르게 나아갈 길을 확정지어야 합니다.
전쟁이나 기업과 같은 경쟁 상황에서 빠른 판단력은 필수적입니다.
빠른 판단력이 사라지는 이유는 신앙을 잃었기 때문입니다.
나폴레옹은 대관식 이후부터 자신감을 잃기 시작하였습니다.
나폴레옹은 1804년, 파리의 노트르담 대성당에서 성대하게 거행된 대관식에서 스스로의 손으로 황제의 왕관을 머리에 얹었습니다.
그 자리에 교황 비오 7세가 있었지만, 나폴레옹은
하느님의 축복을 기다리지 않았습니다.
바로 그로부터 11년 후인 1815년 6월 18일, 워털루 전투에서 나폴레옹은 그러한 교만함과
홀로 결정해야 하는 지도자의 외로움이 어떤 결과를 초래하는지 뼈아프게 경험하게 됩니다.
워털루 전투는 나폴레옹이 엘바섬에서 돌아와 다시 황제의 자리에 오른 이른바 ‘백일천하’의 마지막 전투였습니다.
당시 나폴레옹의 군대는 약 7만 3천 명이었고,
상대편 연합군은 웰링턴 장군이 이끄는 영국과 네덜란드, 벨기에군 연합 6만 8천 명, 그리고 블뤼허 장군이 이끄는 프로이센군 5만 명으로 구성되어 있었습니다.
나폴레옹에게 있어 가장 중요한 전략은 이 양쪽 군대가 합류하기 전에 신속히 공격하여 각개격파 하는 것이었습니다.
그러나 전투 당일인 6월 18일, 새벽부터 내린 비로 전장이 심하게 질척거렸고, 포병과 기병의
이동에 불리하다고 판단한 나폴레옹은 오전 6시부터 공격을 망설이기 시작했습니다.
측근의 많은 장군들은 즉각 공격할 것을 조언했지만, 모든 결정을 홀로 내려야 하는 황제였던 그는 쉽게 결단하지 못한 채 고민을 이어갔습니다.
나폴레옹은 조금 더 좋은 환경이 오기를 기다리며
공격 명령을 계속 미루었고, 그렇게 결정적인 시간이 속절없이 흘러갔습니다.
나폴레옹은 무려 6시간이라는 귀중한 시간을 낭비한 끝에, 오전 11시가 넘어서야 첫 공격 명령을 내렸습니다.
그러나 이 결정의 지연은 돌이킬 수 없는 결과를 초래했습니다.
공격이 늦어지는 동안, 18km 떨어진 곳에 있던 프로이센군 5만 명은 전장으로 빠르게 이동할 수 있는 귀중한 시간을 확보하게 되었던 것입니다.
나폴레옹이 공격을 지연한 사이, 프로이센군은 오후 4시경부터 전장에 도착하기 시작했고,
이후 계속해서 병력을 증원했습니다. 결국 저녁 7시가 될 무렵에는 영국군과 프로이센군의 병력이 완벽히 합류하여 총 11만 명을 넘어서게 되었습니다.
반면, 전투를 너무 늦게 시작한 나폴레옹의 군대는 이미 피로와 혼란으로 무너지고 있었습니다.
결국 나폴레옹은 이 전투에서 크게 패배했고, 단 하루의 우유부단함으로 자신의 운명뿐 아니라
프랑스 제국 전체를 몰락시키는 결과를 가져왔습니다.
그는 다시 세인트헬레나 섬으로 추방되었고,
쓸쓸히 그곳에서 생을 마감했습니다.
만약 그가 홀로 모든 결정을 내려야 하는 외로운 왕좌가 아니라 겸손한 마음으로 하느님께 기도하고, 신중하지만 빠르게 결단했다면, 역사는 달라졌을지도 모릅니다.
오늘 복음에서 요셉은 마리아가 임신한 사실을 눈치채고 파혼하기로 작정합니다.
이것은 ‘묵상’기도입니다. 마리아의 잘못을 자기가 다 끌어안겠다는 엄청난 결단입니다.
묵상기도를 통해 여기까지는 도달할 수 있지만, 관상의 단계에서 볼 수 있는 것은 보지 못합니다.
바로 그 잉태가 곧 성령으로 인한 것임을 보는 것입니다.
하느님은 요셉의 꿈에 나타나 마리아와 결혼하라고 하십니다.
요셉은 그렇게 합니다.
이 외에도 헤로데가 아기 예수님을 죽이려고 할 때 꿈을 꾸고는 바로 짐을 싸서 이집트로 피신합니다.
다시 돌아올 때도 마찬가지입니다. 만약 기도할 줄 모르는 교만한 사람이었다면, 성모님과 결혼하지도 못했을 뿐 아니라 결혼했다면 시간을 끌다가 메시아를 잃게 만드는 원인이 되었을 수도 있습니다.
기도하는 이는 모두 결단력이 좋고 빠릅니다.
1805년 이탈리아의 작은 도시 아시시에서 태어난 프란치스코는 원래 부유한 상인의 아들로 태어나 부족함 없는 삶을 살았습니다.
그는 젊은 시절 기사로서의 명예와 세상의 부귀영화를 꿈꾸며 살았지만, 전쟁터에서의 패배와 포로 생활을 통해 그의 인생은 완전히 바뀌기 시작했습니다.
그러나 어떻게 살아야 할지 고민하고 있었습니다.
1205년 어느 날, 아시시 외곽에 버려진 산 다미아노 성당에서 십자가 앞에 무릎을 꿇고,
깊은 기도에 잠겨 있던 프란치스코는, “프란치스코야, 가서 무너져가는 나의 집을 고쳐라.”라는 주님의 음성을 듣게 되었습니다.
이 순간 프란치스코는 망설이거나 우물쭈물하지 않았습니다.
그는 그 즉시 자신의 화려한 옷을 벗고 거친 옷을 입었으며, 아버지의 재물을 포기하고 온전히
주님의 말씀을 따르기로 결심하였습니다.
그는 돌 하나하나를 손수 쌓아 올리며 산 다미아노 성당을 수리하기 시작했고, 그의 단호한 결단에 감동한 동료들이 그를 따르기 시작했습니다.
나중에 무너져가는 당신 집은 결국 탐욕으로 기울어져 가는 교회를 재건하라는 것이었다고
평가되고 있습니다.
그런데도 그저 작은 하느님의 집은 다미나노 경당을 재건하기 시작한 그의 결단력은 바로 요셉 성인과 같은 기도에서 온다고 할 수 있겠습니다.
마찬가지로 마더 데레사도 있습니다.
그녀는 1929년 열아홉 살의 나이에 인도의 콜카타로 파견되어 로레토 수녀회 소속으로 가르치는 일을 하며 평범한 수도 생활을 하고 있었습니다.
그러던 중, 1946년 9월 10일, 데레사 수녀는 다르질링으로 가는 열차 안에서 깊은 묵상 중에 강력한 하느님의 음성을 들었습니다. 하느님께서는 그녀에게 수도원의 울타리를 넘어 길거리의 가장 가난하고 버림받은 사람들을 위해 봉사하라는 소명을 명확하게 전하셨습니다.
데레사는 이 부르심을 듣고 즉시 결단을 내렸으며, 자신이 20년 가까이 지냈던 수도원과
안정된 생활을 떠나 콜카타의 빈민가로 뛰어들었습니다.
그곳에서 맨손으로 죽어가는 사람들을 보살피며, 극도의 가난 속에서도 사랑과 기쁨으로 가득한 삶을 살아가기 시작했습니다.
그녀의 결단력 있는 행동은 수많은 사람들을 감동시켰고, 1950년 ‘사랑의 선교회’를 창설하게
되었습니다.
결국 마더 데레사는 가난한 이들 안에서 그리스도를 섬기고, 전 세계에 가난과 사랑의 가치를 전하며 노벨 평화상까지 받게 되었습니다.
사랑하는 형제자매 여러분, 성 프란치스코와 마더 데레사의 삶은 우리가 하느님의 뜻을 분명히 깨달았다면 절대로 주저하지 말고 즉시 행동으로 옮기는 것이 얼마나 중요한지를 잘 보여줍니다.
요셉 성인과 이 성인들이 그러했듯이, 우리도 삶의 중요한 순간마다 하느님께 묻고, 그분의 음성을 듣는 즉시 겸손과 용기로 결단하여 하느님께서 준비하신 놀라운 축복의 길을
걸어가야 할 것입니다.
고민을 많이 하지 말고, 회의를 길게 하지 맙시다.
예수님은 기도하는 분이시기에 항상 주저하는 이들에게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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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50319. 성 요셉 대축일. 송영진 모세 신부님.
<‘버리려고 한 것’이 아니라, ‘지키려고 한 것’입니다.>
“야곱은 마리아의 남편 요셉을 낳았는데, 마리아에게서 그리스도라고 불리는 예수님께서 태어나셨다(마태 1,16).”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이렇게 탄생하셨다.
그분의 어머니 마리아가 요셉과 약혼하였는데, 그들이 같이 살기 전에 마리아가 성령으로 말미암아 잉태한 사실이 드러났다.
마리아의 남편 요셉은 의로운 사람이었고 또 마리아의 일을 세상에 드러내고 싶지 않았으므로,
남모르게 마리아와 파혼하기로 작정하였다.
요셉이 그렇게 하기로 생각을 굳혔을 때, 꿈에 주님의 천사가 나타나 말하였다.
‘다윗의 자손 요셉아, 두려워하지 말고 마리아를 아내로 맞아들여라.
그 몸에 잉태된 아기는 성령으로 말미암은 것이다.
마리아가 아들을 낳으리니 그 이름을 예수라고 하여라.
그분께서 당신 백성을 죄에서 구원하실 것이다.’
주님께서 예언자를 통하여 하신 말씀이 이루어지려고 이 모든 일이 일어났다.
곧 ‘보아라, 동정녀가 잉태하여 아들을 낳으리니, 그 이름을 임마누엘이라고 하리라.’ 하신 말씀이다.
임마누엘은 번역하면 ‘하느님께서 우리와 함께 계신다.’는 뜻이다(마태 1,18-23).”
1) 유대교에서는 율법을 잘 지키는 사람을
‘의로운 사람’이라고 불렀습니다.
그러나 여기서 “의로운 사람”이라는 말은, 그리스도교의 관점에서 ‘자비로운 사람’이라는 뜻입니다.
“마리아의 일을 세상에 드러내고 싶지 않았으므로”는 요셉이 ‘율법의 준수’보다 ‘자비의 실천’을 먼저 생각했음을 나타냅니다.
<‘법’보다 ‘자비’가 위에 있습니다.
마태오복음 12장에 있는, “‘내가 바라는 것은 희생 제물이 아니라 자비다.’ 하신 말씀이 무슨 뜻인지 너희가 알았더라면, 죄 없는 이들을 단죄하지는 않았을 것이다(마태 12,7).” 라는 말씀을 요셉과 마리아의 경우에도 적용할 수 있습니다.>
2) 요셉이 ‘남모르게’ 파혼하려고 한 것은, 마리아를 ‘버리려고 한 일’이 아니라, ‘지키려고 한 일’입니다.
여기서 ‘남모르게’ 라는 말은 대단히 중요한 말입니다.
만일에 요셉이 남모르게, 즉 세상 사람들 모르게 파혼을 했다면, 사람들은 요셉과 마리아가 파혼한 사실을 모르니까 두 사람을 부부로 생각했을 것이고, 그러면 마리아가 잉태한 아기를 요셉의 아기로 생각했을 것입니다.
그렇게 되면 마리아도 아기도 무사히 보호할 수 있습니다.
파혼은 왜 하려고 했을까?
요셉은 ‘성령 잉태’를 이해하지는 못했어도 믿었기 때문에, 아기의 아버지를 하느님으로 생각했을 것이고, 그렇다면 자기는 뒤로 물러나는 것이 옳다고 생각했을 것입니다.
그래서 남편의 지위를 포기하려고 파혼을 생각한 것인데, 마리아와 아기를 모두 지키려면 그 모든 일을 사람들 모르게 해야만 했습니다.
3) “마리아가 성령으로 말미암아 잉태한 사실이 드러났다.” 라는 말은, ‘저절로 드러났다.’는 뜻이 아닙니다.
<‘성령 잉태’는 ‘저절로’ 드러날 수 있는 일이 아닙니다.>
마리아는 성령 잉태 사실을 알게 되자 곧바로 요셉에게 가서 그 일을 알렸을 것입니다.
따라서 “마리아가 성령으로 말미암아 잉태한 사실이 드러났다.” 라는 말은, “마리아는 요셉에게 가서 자신이 성령으로 말미암아 잉태한 사실을 알렸다.”로 이해하는 것이 옳습니다.
요셉은 그 말을 이해하지는 못했지만 믿었습니다.
마리아를 믿었으니까 마리아가 하는 말을 믿을 수 있었을 것이라고 생각됩니다.
하느님을 믿는 것만큼이나 사람을 믿는 것도 중요합니다.
4) 주님의 천사가 나타난 일은, 요셉의 기도에
하느님께서 응답하신 일로 해석됩니다.
요셉은 자신의 판단과 계획이 과연 하느님 뜻에 합당한 것인지를 알 수 없어서 많이 고민했을 것이고, 그래서 간절하게 기도했을 것입니다.
천사가 요셉에게 한 말 가운데에서 “두려워하지 말고 마리아를 아내로 맞아들여라.” 라는 말은, “일을 그렇게 복잡하게 진행할 것이 아니라, 원래 하려던 대로 결혼하여라.” 라는 뜻입니다.
그리고 “그 몸에 잉태된 아기는 성령으로 말미암은 것이다.” 라는 말은, ‘성령 잉태’에 관해서 마리아가 한 말이 진실이라는 것을 보증해 준 말이기도 합니다.
“마리아가 아들을 낳으리니 그 이름을 예수라고 하여라.
그분께서 당신 백성을 죄에서 구원하실 것이다.” 라는 말은, ‘메시아 강생’을 예고하는 말이면서, 동시에 요셉과 마리아가 메시아의 부모로 선택되었음을, 즉 하느님의 ‘부르심’을 전해 주는 말입니다.
5) 겉으로 보이는 표현들만 보고서, 요셉을 소극적이고 수동적인 인물로만 생각하기가 쉬운데, 잘 생각해 보면, 요셉은 적극적이고 능동적인 인물이었습니다.
또 그는 용기가 없어서 가만히 있기만 한 사람이 아니라, 다른 사람들보다 훨씬 더 용감하고, 강인한 사람이었습니다.
만일에 용기 없고 비겁한 사람이었다면, 율법을 방패로 삼아서, 율법 뒤로 숨으려고 했을 것입니다.
그러나 요셉은 용감하고 강인한 사람이었기 때문에 적극적으로 마리아와 아기를 지켰고,
온갖 어려움들을 자기가 떠맡았습니다.
<복음서에는 ‘요셉의 말’이 전혀 기록되어 있지 않습니다.
우리는 요셉이 ‘말보다 행동으로’ 실천하는 신앙인이었을 것이라고 짐작할 수 있습니다.
사실 진정한 믿음은, 원래 많은 말이 필요 없는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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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50319. 성 요셉 대축일. 함승수 세례자 요한 신부님
마태 1,16.18-21.24ㄱ “마리아의 남편 요셉은 의로운 사람이었고“
오늘은 “복되신 동정 마리아의 배필 성 요셉 대축일”입니다. 우리가 요셉 성인하면 떠올리는 특징은 크게 두 가지이지요. 하나는 ‘의로움’이고 다른 하나는 ‘침묵’입니다. 먼저 요셉 성인의 의로움에 대해 살펴봅니다. 성경에서 말하는 ‘의로움’은 세상이 말하는 ‘정의로움’과는 다릅니다. 세상 사람들은 법과 규율을 어기지 않고 충실하게 잘 지키는 사람, 사회 구성원들이 보편적으로 ‘옳다’고 여기는 가치들을 존중하고 따르는 이들을 정의롭다고 하지요. 하지만 우리가 요셉 성인을 두고 ‘의롭다’고 하는 것은 그분이 율법이나 조상들의 전통을 어기지 않고 철저하게 지켰기 때문만은 아닙니다. 그런 것들은 그저 인간적인 기준을 적용했을 때 드러나는 상대적 의로움일 뿐, 하느님으로부터 나오는 절대적이고 참된 의로움은 아니기 때문입니다.
참된 의로움은 ‘주님 앞에 나설 수 있는 힘’을 가리킵니다. 만약 어떤 사람이 자기 친구로부터 돈을 빌린 후 약속한 때까지 갚지 않으면 그 앞에 떳떳하게 나설 수 없습니다. 그를 볼 때마다 갚지 못한 돈이 생각나서 미안해지고 괜히 마음이 위축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어떻게든 그와 마주치지 않으려고 피해다니게 됩니다. 그런 점은 우리와 하느님 사이의 관계에서도 마찬가지지요. 우리는 하느님께 도저히 갚을 수 없는 큰 빚을 진 존재들입니다. 전능하신 하느님께서 몇 번이나 우리를 용서하시고 자비를 베풀어 주셨을 뿐만 아니라, 우리를 구원하시기 위해 당신 외아들의 목숨까지 내어주셨기 때문입니다. 당신께서 우리에게 해주신 것처럼 우리도 이웃 형제 자매에게 그렇게 하라고 본을 보여 주신 것이지요. 그런데 ‘무자비한 종’이 그랬듯이 나에게 빚을 진 형제에게 자비를 베풀지 않고 꾸어준 것을 끝까지 받아내려 든다면, 그것으로도 모자라 도저히 빚을 갚을 능력이 없는 딱한 형제를 ‘법대로’ 처벌하려고 든다면, 하느님 앞에 나설 힘을 잃게 되는 겁니다.
하지만 요셉은 그러지 않았습니다. 율법대로 했다면 정식으로 같이 살기도 전에 다른 이의 아이를 임신한 약혼녀 마리아가 엄중한 죄값을 치르게 할 수도 있었지만, 그렇게 하는 건 자비로우신 하느님의 뜻이 아님을 알았기 때문입니다. 그걸 알면서도 순간적인 미움과 원망에 사로잡혀 하느님 뜻을 거슬렀다가는 자기 잘못에 대한 후회 때문에, 하느님께 죄송스러운 마음 때문에 그분 앞에 온전히 설 수 없을 것임을 알았던 겁니다. 그래서 마리아의 일을 세상에 드러내지 않고 그녀와 조용히 파혼하기로 결정합니다. 그로인해 본인이 약혼녀를 저버린 ‘나쁜 놈’이라고 욕을 먹게 되더라도, 마리아에게 자비를 베풀기로 한 것이지요.
다음으로는 요셉 성인의 침묵에 대해 살펴봅니다. 잠에서 깨어난 요셉은 “주님의 천사가 명령한 대로” 마리아를 아내로 맞아들였습니다. 하느님의 뜻에 철저히 순명하는 모습입니다. 그렇게 할 수 있었던 힘은 그분의 깊은 침묵으로부터 우러나왔지요. 성경 전반에 걸쳐 요셉 성인은 한 마디도 하지 않고 침묵하십니다. 그저 입을 닫고 말을 하지 않는 소극적인 침묵이 아닙니다. 내 생각과 뜻을 말하고 내세우기보다, 하느님의 말씀을 듣고 그분 뜻을 받아들이는 쪽을 선택하기 위한 적극적인 침묵, 믿음의 침묵이지요. 그 침묵의 힘으로 이해하기 어렵고 납득하기도 힘든 하느님의 뜻을 기꺼이 받아들이고 따르실 수 있었습니다. 그 덕에 참으로 의로우신 분이 될 수 있었습니다. 그것이 바로 요셉 성인의 대축일을 맞아 우리가 본받고 따라야 할 모습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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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50319. 성 요셉 대축일. 정인준 파트리치오 신부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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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50319. 성 요셉 대축일. 기경호 프란치스코 신부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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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50319. 성 요셉 대축일. 오상선 바오로 신부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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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50319. 성 요셉 대축일.
영적 회복을 위해 힘쓰는 삶
<2025.3.19> 아침을 여는 묵상 (눅 12:49~59절)
❝영적 회복을 위해 힘쓰는 삶❞
❚ 주님과의 바른 관계 회복이 심판에 이르지 않는 유일한 길임을 깨닫는 삶이어야 합니다.
✔ 영적 회복을 위해 어떤 노력이 필요합니까?
➲ 영적인 정체성을 놓치지 않아야 합니다(49~53절).
예수님은 당신이 세상에 오신 목적에 대하여 ‘...불을 땅에 던지러 왔다...’(49절)라고 말씀하십니다. 이는 곧 하나님의 심판을 상징합니다. 다시 말하면 평화의 왕으로 오신 예수 그리스도를 거부하는 자에게는 심판이 있을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예수님은 ‘받으실 세례’(50절)가 있습니다. 이는 십자가에서의 죽음을 의미합니다. ‘...그것이 이루어지기까지 나의 답답함이 어떠하겠느냐...’(50절). 예수님은 십자가의 죽음에 이르기까지 커다란 심리적 압박감과 간절함을 갖고 계셨습니다. 십자가의 고통뿐만 아니라 그것을 이루시기까지 거부와 반대, 온갖 박해와 고난과 어려움을 겪으시고 구원하셨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이러한 하나님의 구원을 거절하는 인간은 화평이 아닌 분쟁에 빠질 것입니다(51절). 한 가정 안에서도 분쟁이 끊이지 않을 것(52~53절)입니다. 이 분쟁은 문자 그대로 이 땅에서의 싸움이 아니라 설령 가족이라 할지라도 생명의 길을 받아들이는 사람과 거부하는 사람으로 나뉜다는 의미요, 구원은 절대적으로 개인적 선택의 문제임을 말씀하고 있는 것입니다.
다른 건 몰라도 구원의 문제 즉 영생과 영벌의 문제에 있어서 만큼은 공통분모가 없는 완전한 배타적 영역임을 인정해야 합니다. 철저하게 개인의 믿음과 선택에 관한 문제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그리스도인들은 모든 사람과 화평하게 지내되, 영적인 정체성만큼은 잃어버려서는 안 됩니다. 아무리 어둠이 짙게 내려 있다 할지라도 그 어둠을 뚫고 생명의 빛은 계속해서 비추어야 하는 것입니다. 신앙 때문에 겪는 분쟁과 갈등 그 자체를 두려워 해서는 안됩니다. 진정한 화평이 오기 위해서는 반드시 분쟁이 먼저 선행 되는 것입니다. 세리와 창기와 같은 죄인들에게 진정한 평화가 임할 때, 서기관과 바리새인과 세속 통치자들은 그 자체를 받아들이지 않아 분열과 불화를 초래했습니다. 나 역시도 예수님을 믿기 시작 하면서도부터 믿지 않는 가족들과의 심한 갈등을 겪어야만 했습니다. 사회생활을 할 때, 그리고 군대 시절 믿지 않는 주변의 사람들로부터 많은 조롱과 따돌림을 당해야만 했습니다. 그럼에도 ‘하나님의 자녀’라고 하는 영적인 정체성을 놓치지 않았기에 지금은 모두가 예수 믿는 사람으로 인정해 주고 있습니다. 영적인 정체성을 놓치지 않는 삶 그래서 주님과의 바른 관계를 계속해서 유지해 나가는 삶이 심판에 이르지 않는 길입니다.
➲ 영적인 분별력을 소멸치 않아야 합니다(54~56절).
사람들은 자연 만물의 변화를 보면서 그날의 날씨를 예측합니다. 구름이 서쪽에서 올라오면 소나기가 올 것(54절)이라고 말하고, 남풍이 부는 것을 보면 심히 더울 것(55절)이라고 말합니다. 이러한 사람들을 향하여 예수님은 ‘...외식하는 자여 너희가 천지의 기상은 분간할 줄 알면서 어찌 이 시대는 분간하지 못하느냐..’(56절)라고 책망하십니다. ‘이 시대’는 하나님의 구속 행위가 진행되는 시간인데, 사람들은 그 순간을 놓치고 있었습니다. 뿐만 아니라 하나님의 놀라운 구원 계획에 대하여 오히려 시험하여 알려고도 하지 않는 그들을 예수님은 책망하신 것입니다.
참으로 영적으로 혼란한 시대를 살아가고 있습니다. 이때 나타난 특징은 영적인 분별력이 상실된다는 것입니다. 극대의 대립과 갈등으로 치닫고 있는 작금의 혼란한 상황에 일부 정치적 목회자들과 하나님을 믿는다고 말하는 사람들이 깊숙이 관여되어 있다는 것에 참으로 분통이 터집니다. 교회가 교회답지 못한 모습으로 세상 속에 비추어지고 있는 것에 대하여 믿는 사람들은 혼란스러워 합니다. 그리고 많은 성도들 또한 영적으로 무뎌져 있어서 주님을 바라보기보다는 세상에 더 집착하여 살아갑니다. 세상적인 성공을 위해 수많은 정보들을 찾고 능력을 키우지만, 정작 가장 중요한 영적 생명에 대해서는 무지하다는 것입니다. 주님의 심판의 날이 점점 가까워 지고 있음을 분별할 수 있어야 합니다. 하나님의 심판을 분별하지 못해 멸망을 당했던 노아 시대처럼 쾌락과 유흥을 쫓고, 하나님의 경고에는 귀를 닫은 이 시대에, 주님의 재림을 준비하도록 영적인 분별력을 소멸치 않아야 하겠습니다.
➲ 영적인 판단력을 버리지 않아야 합니다(57~59절).
예수님은 스스로 무엇이 옳은지를 판단하지 못하느냐며 책망합니다. 당시 사람들은 유대교 지도자들의 행위나 말을 분별하지 못해 예수님의 복음을 거부했습니다. 즉 구원의 길이 없는 것이 아니라 스스로 옳은 것을 판단하지 못하고 있는 것입니다. 이어서 예수님은 고소인과 법정에 가기 전에 화해하지 못해 감옥에 갈 것을 염려하라(58절)고 말씀하십니다. 왜냐하면 ‘...너희가 그 마지막 한 푼까지 다 갚기 전에는 절대로 거기에서 나오지 못할 것...’(59절,새번역)이기 때문입니다. 즉, 법정 구속이 되면 돌이키지 못하기 때문이라는 의미입니다.
오늘날 세상 사람들이 추구하는 성공이 무조건 하나님의 복이라고 여기고 맹목적으로 따라가는 경우가 있습니다. 그러므로 믿는 우리는 ‘...하나님의 선하시고 기뻐하시고 온전하신 뜻이 무엇인지 분별...’(롬 12:2)할 수 있는 영적인 판단력이 있어야 합니다. 무엇보다 하나님의 심판이 이르기 전에 선함과 악함을 잘 판단해서 회개라는 권면을 받아들여 최후 법정에 서기 전에 하나님과의 관계를 회복함으로 영생의 축복을 누릴 수 있어야 합니다. 주님이 오실 날이 점점 가까워지고 있는 이때에, 우리는 더욱 깨어서 하나님의 심판을 의식하며 지혜롭게 살아가야 합니다. 영적 싸움을 치열하게 치르고, 다른 사람과는 화목하게 지낼 수 있도록 영적인 판단력이 흐려지지 않는 삶이어야 하겠습니다.
오늘도 화평케 하시기 위해 하늘의 평안을 포기하시고, 고통을 당하신 주님의 희생을 기억하여 화평을 전하고, 누리는 삶을 살아갈 뿐 아니라 주님이 오실 날이 점점 가까워지고 있는 때인 만큼 깨어서 하나님과의 온전한 관계 회복을 위해 애쓰는 삶을 살아갈 수 있기를(눅 12:49~59절)...
행복의 시작 예수 그리스도!!!
빛이 있으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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