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창 11: 5-9
여호와께서
모세는 인류가 바벨탑을 쌓는 죄를 행하므로 하나님께 벌을 받아 흩어진 사실을 기록합니다
1. 본문 5절은
“여호와께서 인생들의 쌓는 성과 대를 보시려고 강림하셨더라” 입니다.
이제 역사의 나머지 부분이 뒤 따라 나오고 있습니다. 모세는 얼마나 쉬운 방법으로 하나님께서 그들의 정신 없는 시도를 전복시켜 버릴 수가 있으신가를 우리에게 제시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그들의 모든 준비물들을 널리 흩어버리셨던 것을 교훈 해 주고 있습니다. 그들이 주제넘게 스스로 고안한 것을 끈질기게 착수했다는 데에는 의심의 여지가 없습니다. 그러나 모세는 첫째로 하나님께서 당분간 그들이 하는 일에 대하여 전혀 주시하지 않고 계시다가 갑자기 그 일을 착수하시는 과정에서 그들의 언어를 혼동시킴으로 그 일을 와해시켜 버리려는 계획이셨던 것처럼 보이고 있습니다.
그리고 모세는 둘째로 그렇게 함으로 하나님께서 자신이 행하시는 심판에 대한 결정적인 증거를 제시하려는 계획이셨던 것으로 보이는 것을 암시하고 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빈번하게 사람들의 죄악이 그런 관계에까지 이르렀다는 사실에 대하여 무척 참고 견디어 오셨습니다. 그러나 그 한계에 이르러서는 그들이 그런 흉악한 일을 고안하고 설계하도록 고통 당하게 하십니다. 그것은 마치 그분이 전혀 관심이나 마음 상함도 없이 단지 편안하게 좌정하고 앉아 있는 것처럼 그렇게 하십니다.
한 걸음 더 나아가서 자신 있는 성공의 확률을 가지고 하는 그들의 불경건한 그리고 왜곡된 계획들까지 그대로 놔주셨던 것입니다. 그래서 결국은 더 비참하고 낮은 곳에 그들을 던져 버리시려는 것이 그분의 의도였습니다 모세가 여기서 기록하고 있는 하나님이 강림하셨다는 말은 하나님에 관한 것보다는 인간들에게 관련하여 언급되고 있는 표현입니다. 우리가 알고 있듯이 하나님은 이곳에서 저곳으로 움직이시며 다니시는 분이 아니십니다.
그러나 모세는 여기서 하나님은 점진적으로 그리고 마치 느릿느릿한 발걸음으로 걷는 것과 같이 보복하시는 분의 특성을 지니고 나타나신 것 같이 암시하는 방식으로 표현합니다. 그러므로 여호와께서는 보시려고 내려오셨다고 했습니다. 모세가 여기서 분명하게 제시하고 있는 것은 하나님이 바벨로니아인들이 하고 있는 시도를 전혀 모르는 것이 아니라는 사실이었습니다.
2. 본문 6절은
“여호와께서 가라사대 이 무리가 한 족속이요 언어도 하나이므로 이같이 시작하였으니 이후로는 그 경영하는 일을 금지할 수 없으리로다” 입니다.
1) “언어도 하나이므로”에서 어떤 사람들은 그 말을 하나님은 인간들 속에 이처럼 다루기가 힘들고 치료하기가 어려운 죄악이 있는 것을 불평하신 나머지 그분께서 당연하신 비탄으로 흥분되셔서 결국 그들에게 보복을 감행하시기로 작정하신 것이라고 해석합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어떤 격정으로 도취되시거나 거기에 말려 들어 가시는 분이 아닙니다. 다만 그분이 언제나 인간들의 일을 다 알고 게시며 무관심한 상태가 아니라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분이 신실한 신앙을 주시하는 것과 마찬가지로 불경건한 죄인들에 대하여도 관찰하고 주시하는 분이심을 우리에게 가르치기 위해서인 것이라고 해석해야 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 사실은 시편 34편 16절에서 “여호와의 얼굴은 행악하는 자들을 대하사 저희 자취를 땅에서 끊으려 하시는도다” 라고 기록되어 있는 것과 같은 것입니다. 다른 사람들은 작은 자 곧 천한 자와 위대한 자들 사이에 비교가 있다고 생각합니다. 그래서 마치 ‘자금까지는 그들이 적었고 한 언어였지만 만약 그들이 증가되는 인구의 수 때문에 여러 민족들로 갈라지게 되면 그들이 감히 무엇인들 하지 않겠는가?’ 하는 식으로 그분이 말하셨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에게는 이 말씀에 억제된 역설이 있는 것처럼 보입니다. 마치 하나님이 자신에게 그들의 무모성을 타도하시는 가운데서 그분 자신에게 어려운 일을 제안하고 계시는 것처럼 보이고 있습니다. 그래서 그 의미가 ‘이 백성이 굳건한 음모를 꾸며서 서로 꼭 단결되었으며 그리고 같은 말을 갖고 서로 의사소통을 하고 있으니 과연 그들은 어떤 방법으로 와해시킬 수가 있겠는가?’ 하는 식인 듯합니다. 그러나 그분은 역설적으로 그들의 어리석음에 대하여 미소를 지으며 그들의 조급한 자만심에 냉소를 보내고 계십니다. 인간들이 자기들의 힘에서 무엇이 나오리라고 기대하고 있는 동안에는 자신들에게 귀속시킬 것이라고는 아무 것도 없기 때문입니다.
2) “이같이 시작하였으니 이후로는 그 경영하는 일을 금지할 수 없으리로다”에서 그들이 시작하였다고 말하는 가운데서 모세는 그 사람들이 그 일을 수행하려는 과정에서 격렬한 열심을 갖고 부지런하게 시도를 하고 있는 것을 암시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양보하는 방법으로 하나님은 모든 것들이 조금도 차질이 없이 다 준비되어 있는 것으로 여기시고 그 일을 제지할 것이 없을 것이라고 선언하고 계십니다.
3. 본문 7절은
“자, 우리가 내려가서 거기서 그들의 언어를 혼잡케 하여 그들로 서로 알아듣지 못하게 하자 하시고” 입니다.
지금까지는 모세가 ‘생동적 묘사법’을 사용하여 그 사건을 설명하였다는 것을 말했습니다. 이를테면 하나님의 심판이 더욱 더 분명하게 부각되게 하려고 그런 생동적 묘사법을 사용했다는 것입니다. 그 때문에 모세는 지금 하나님을 화자(話者)로서 소개하고 있는데 그분은 그들이 추측하기에는 전혀 저지 당하지 않고 성취시킬 것으로 여기고 있는 그들의 일을 전혀 문제없이 힘들이지 않고 그것들이 파괴될 것이라고 선포합니다. 그 말의 의미는 ‘나는 여러 가지 방법을 사용하지 않고 단지 그를 강타할 것이며 언어의 혼란으로 말미암아 처참하게 흩어질 것이다’라는 뜻입니다.
그리고 그들이 수많은 사람들을 모아 가지고 그들이 구름에까지 이르도록 가진 수단을 다 썼던 것과 같이 다른 한편으로는 하나님께서도 그분의 군대를 소집하여 그들의 격노를 격퇴시키는 데에 이용하실 수도 있는 것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이 어떤 군대를 사용하신단 말인가? 하는 식의 질문이 제기될 것입니다. 유대인들은 하나님이 그렇게 말씀하신 것은 천사들에게 내려가자고 하신 것이라 생각합니다
그러나 천사에 대하여 전혀 언급이 없기 때문에 그리고 하나님이 직접 지시하시는 자들을 그분 자신과 똑같은 계급에다 두고 계시기 때문에 그렇게 풀이하는 것은 지나친 것입니다. 그리고 그것은 당연히 배격되어야 합니다. 이 말씀은 오히려 전자의 것에 대하여 답변해 주고 있으니 그것은 인간의 창조과정에서도 언급되었던 표현입니다. 그곳에서 여호와께서는 “우리의 형상을 따라서 사람을 만들자”라고 하셨습니다. 이렇게 삼위 일체이신 하나님께서는 적절하고 지혜롭게 그 분의 영원하신 지혜와 능력을 가지고 이 많은 무리들을 가로막고 저지하시는 것입니다. 마치 그분이 다른 외부적인 부가 수단들이 없으시며 단지 그분 자신 안에 소유하고 계신 것만으로도 충분히 그들을 붕괴시킬 수가 있다고 하신 말씀과 같은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이 구절에서 삼위가 신성의 한 본질 안에 존재하고 있는 것을 입증하는 것으로 인증하는 것은 적절하지 않은 것입니다. 더욱이 하나님의 신적인 보복의 이 본보기는 모든 세기에 속한 것입니다. 그것은 인간들이 언제나 비합법적인 것을 시도하려는 욕망을 갖고 불타있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또한 이 이야기가 제시하고 있는 것은 하나님은 그런 묘사나 계획들에 대해서는 언제나 대적하실 것이라는 점입니다. 그래서 여기서 우리가 직접 눈앞에 묘사되어 있는 사실과 같이 생생하게 깨닫게 되는 것입니다.
그것은 또한 솔로몬이 “지혜로운 명철로도 모략으로도 여호와를 당치 못하느니라”(잠21:30)고 말한 사실이 우리들의 목전에서 생생하게 묘사되고 있습니다. 오직 우리가 번영된 것을 기대할 수 있는 하나님의 복이 그분과 함께 임재하지 않으면 우리가 시도하고 있는 모든 것은 반드시 파멸되고 말 것입니다. 그리고 하나님이 자신은 항구적으로 절제없이 무모하게 날뛰는 인간들의 사악성에 도전하여 계속 싸우실 것이라고 선포하셨기 때문에 그분의 결재를 받지 않고 우리가 착수하는 모든 일은 분명히 비참하게 종말을 고하고 말 것이라는 말입니다.
비록 지상과 지하의 모든 피조물들이 우리를 도우려고 그들의 모든 도움을 제공한다고 해도 그런 비참한 종말을 피할 수가 없는 것입니다. 이제 비록 세상이 지금까지 이런 저주를 지니고 있습니다. 그렇지만 그 형벌가운데 그리고 인간들의 교만을 향하여 발하시는 하나님의 진노에 대한 무시무시한 증거들 가운데서도 하나님의 감탄할만한 선하심이 두드러지게 드러나고 있습니다. 민족들이 서로 다른 말을 하며 다른 각이한 언어를 갖고 있습니다.
그래도 그들이 상호간에 의사소통을 하고 친선을 교류할 수 있게 하셨습니다. 그리고 특별히 전 세계를 통하여 여러 가지 언어가 있지만 한가지 복음을 선포하십니다. 그리고 사도들을 방언의 은사로 입혀주셨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그런 복음 선포와 하나님께서 주신 은사들에서 하나님의 선하심이 두드러지게 눈에 띄게 되는 것입니다. 이 사실에서 우리는 전에는 비참하게 갈라졌던 자들이 그래도 믿음의 연합으로 다시 달라붙어 연합되었다는 사실을 깨닫습니다.
이런 의미에서 이사야는 가나안의 언어가 그리스도의 통치하에서 모든 사람들에게 공통이 될 것이라고 말했습니다(사19:18). 그 이유는 비록 그들의 언어가 소리로는 다르다고 할지라도 그들 모두가 아버지라고 부를 때에는 똑같이 한 가지 일을 말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이렇게 삼위 일체 하나님을 알게 하셔서 믿음을 고백하게 하십니다. 그리고 하나님을 향한 공통한 사랑도 주시고 이웃을 돌아보는 공통한 사랑을 주심으로 주 안에서 통일되게 하시는 것입니다.
4. 본문 8절은
“여호와께서 가기서 그들을 온 지면에 흩으신 고로 그들이 성 쌓기를 그쳤더라” 입니다.
인간들은 이미 널리 흩어져 있었습니다. 그리고 이 사실은 오히려 하나님의 복과 은혜로부터 흘러나온 것이라는 사실을 감안해 볼 때에 형벌이라고 간주하지 말아야 합니다. 그러나 전에 여호와께서 여러 거처에서 영예로 입혀 주셨던 자들을 지금은 불명예스럽게 흩어버리시고 마치 이질적인 몸의 지체처럼 그들을 여기저기로 몰아내신 것입니다. 그러므로 이것은 이 땅위를 충만하게 번식시키려는 분산이 아니라 이 땅에 어느 곳에서도 땅을 경작하는 자들과 거주인들이 있게 하려는 것입니다. 그러나 그들 사이에 관계를 지어주는 근본적인 유대가 두동강이 났기 때문에 그들은 난폭한 폭도들이었습니다.
5. 본문 9절은
“그러므로 그 이름을 바벨이라 하니 이는 여호와께서 거기서 온 땅의 언어를 혼잡케 하셨음이라 여호와께서 거기서 그들을 온 지면에 흩으셨더라” 입니다.
1) 자 보십시요, 그들의 어리석은 야심으로 결국 하나의 이름을 얻고야 말았지 않았습니까?
그들은 자기들의 기원에 대한 생각들이 영원히 이 탑에 새겨지기를 바랐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그들의 헛된 기대를 좌절시키셨습니다. 뿐만 아니라 또한 그들에게 불명예스런 영원한 치욕의 낙인을 찍었습니다. 그러한 그들의 잘못으로 인하여 모든 인류에게 덮어 씌우게 된 막대한 불행 때문에 그들의 자손들에게 저주거리가 되게 하신 것입니다. 정말로 그들은 이름을 얻긴 하였습니다. 그러나 그들이 선택하기를 좋아했던 그런 명예로운 이름이 아니었습니다. 그렇게 하나님은 모욕적으로 전혀 칭호도 없는 명예를 갈취하다시피 빼앗은 자들의 교만을 꺾어 버리시고 낙담시키고 계십니다. 또한 쥬피터 벨루스로부터 바벨론의 기원을 연역하는 자들의 오류를 일축하고 있습니다.
2) 자, 오늘 본문 전체를 다시 한번 살펴 보십시요.
하나님께서는 인생들의 어리석은 야심을 징벌하심에서도 “하나님의 하나님 되심” 을 증거 하십니다. 그 분께서 친히 강림하셨습니다. 하나로 통일된 족속들이요, 한가지 언어로 말할 수 있는 그런 복을 받은 인생들이 헛된 것을 스스로 고안하고 헛된 일을 시도하고 그 일들을 계속 경영합니다. 하나님께서 그들을 그대로 두시면 멸망으로 맥진 할 것을 아시므로 친히 강림하셔서 그들 중에 자기 택하신 자들을 고치려 하시는 것입니다. 그들을 심판하시는 중에도 긍휼히 여기시며 그분께서 가지신 온전하신 인애와 선하심으로 하나님 자신의 일을 경영하시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징벌하시는 중에도 자신에게서 복과 은혜를 흘려 보내십니다.
그리고 흩어서 징벌하실 때에도 그분께서 의도하신 가장 복된 통합의 방식을 내시는 분이십니다. 하나님께서는 인생들이 멸망으로 맥진하는 일을 그치게 하십니다. 그리고 하나님 자신을 그들에게 제시하시고 적극 알리십니다. 자신 안에서 통합시키시고 자신 안에서 참된 것을 시도하게 하시고 그것으로 가장 큰 복으로 여기게 하십니다. 인생들이 스스로 고안하여 시도하는 그 일에는 가장 큰 불명예를 안기시고 하나님께서는 자신의 이름에 그들의 소망을 붙잡아 매주십니다. 그리고 그분께서 흩으실 때에는 전혀 다른 방식으로 모으시는 일을 시도하시기 때문입니다. 그것이 주 자신을 중심으로 하는 교회입니다. 이런 교회에 하나님 자신과 자신의 복을 주십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