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롤랑 바르트의 『기호의 제국』
개요
프랑스 구조주의 철학자이자 문학비평가가 일본의 일상생활의 기호와 그 함의에 대한 감성을 자유롭게 풀어쓴 해체주의적 글쓰기의 대표작.
구조주의 시대의 도래를 예고한, 혁신적인 이론과 문체로 빛나는 현대 비평의 핵심 텍스트인 롤랑 바르트의 『기호의 제국』이다. 이 책은 롤랑 바르트가 순례한, 감각적인 일본 문화 지도에 다름 아니다. 저자가 구성해낸 일본은 하나의 텍스트이며, 이 책은 일본 문화라는 텍스트에 대한 일종의 비평이라 할 수 있다.
일본의 여러 문화 현상을 다루고 있는 이 책은 결코 일본 문화에 ‘대한’ 글만은 아니다. 바르트는 자신이 다루는 일본이 어떤 실체가 아니라 자신이 선택한 “몇몇 특질들을 골라내서 정성스레 만들어낸” 하나의 체계라고 못 박고 있다. 바르트는 심각한 표정으로 진리에 대해 이야기하지도, 일본 문화 현상 뒤에 숨겨진 무언가를 발견했다고 내세우지도 않는다. 그는 일본이라는 텍스트 속을 이리저리 거닐며 유유히 즐기고 있다.
일본의 모든 사물에서 기호학적 표식을 추구하는 하나의 순례기라고 할 수 있는 이 책을 통해 선과 깨달음, 무(無), 하이쿠, 스모 선수, 파친코, 꽃꽂이, 가부키, 분라쿠, 전학련, 젓가락, 미소 된장, 사시미, 스키야키, 덴푸라 등 일본을 상징하는 이 모든 것들이 이루고 있는 일본 문화의 '성(誠)'을 이해할 수 있을 것이다.
『기호의 제국』은 1970년에 나온 책이다. 첫 한국어 번역판은 1997년에 김주환, 한은경의 공동번역으로 민음사에서 나왔다. 그 뒤에 같은 번역자의 책이 2008년에 산책자에서 재출간되었다.
https://naver.me/xiqmKmJP
롤랑바르트 :: 기호의 제국
롤랑바르트, 김주환, 한은경 옮김, <기호의 제국>, 웅진씽크빅, 2008
정화열 해설, 「일본을 텍스트화하는 즐거움 바르트의 『기호의 제국』에 대한 메타주석」
바르트의 학문적 자서전인 『기호의 제국』은 일본을 실험실로 삼은 보편과학으로서의 해체주의적 기호의 사유실험장이며 바르트 자신은 일본문화의 기호학을 실천하는 (게이샤 언어를 빌리자면) 마이코라 불릴 만하다. 진지한 탐구는 부분적으로나마 일종의 자서전이며, 탐구자 본인은 다른 이를 위한 글쓰기의 소재가 된다. 이 시점에서 필자는 "위에서 아래로 de haut en bas"와 "아래에서 위로 de bas en haut"가 변증법적으로 상호교환되는 사비냐 Raymond Savignac의 천체Astral가 떠오른다.
자서전이나 자기탐닉적인 글이 자기 배꼽이나 내려다보는 신랄하고 무례한 글이 되는 것은 아니다. 또한 메를로퐁티Maurice Merleau-Ponty의 표현을 빌리자면 근본적인 관찰이란 결국 관찰자 자신도 관찰이라는 행위에 의해 관찰대상과 뒤엉키는 일련의 관찰에 대한 탐구다.
다시 말해서 근본적인 관찰은 제임슨이 말하는 '메타주석'인 것이다. "모든 해석은 저마다 자신의 존재에 대한 해석을 포함해야 하며, 자신이 믿을 만하다고 보여주고 정당화시켜야 한다. 따라서 모든 주석은 동시에 메타주석이어야 한다." 이러한 점에서 『기호의 제국』은 바르트의 구조주의적 기호학을 위한 일종의 '보완물'이다. 즉 이국적인 보조 텍스트로서 바르트의 전체적인 글쓰기라는 직물에 색과 향을 더해주기 때문에 『기호의 제국』이 없었다면 바르트의 전체 텍스트가 완성되지 못했을 것이다.
pp.162~163
이 에세이는 바르트의 일본에 대한 주석에 대한 주석이다. 훌륭한 수필가 몽테뉴는 사람들이 사물les choses의 질서 대신 주석, '사물의 해석' 대신 '해석의 해석'이 넘쳐난다고 불만을 털어놓은 적이 있다. 진부하지만 낯익은 몽테뉴의 불만은 우리 시대의 '주석'과 '비평', '학문'
에 대해 진지하게 돌이켜보게 하낟. 그러나 인간의 사고와 언어는 공존하고 말verbum이 사물res을 은폐하거나
대행하지 못하며, 말은 곧 사물이기 때문에 '해석의 해석'은 다시 '사물의 해석'이 될 수 있다 더욱이 (니체와 블룸의 주장대로) 해석은 언제나 오역이며 해석된 사물이나 단어는 다시 해석되어야 한다. 뒤에서 다시 언급을 하겠지만 현상학적 읽기는 경험주의로 돌아왔을 때 그 타당성을 인정받게 마련이다. 말하자면 '사물' 자체가 선에서 말해지는 것처럼 모든 '해석'의 근원이기 때문에 '해석의 해석'과 '사물의 해석'에 대한 구분이 사라질 뿐만 아니라 그런 구분 자체가 불필요해진다.
pp.164~165
옮긴이의 말
바르트는 심각한 표정으로 진리에 대해 이야기하지도, 일본문화 현상 뒤에 숨겨진 무언가를 발견했다고 내세우지도 않는다.
그는 일본이라는 텍스트 속을 이리저리 거닐며 유유히 즐길 따름이다. 그는 즐기기만 할 뿐 일본문화에 대해 '아무것도' 이야기하지 않는다. 그의 일본문화 비평은 그야말로 텅 비어있고 '알맹이'가 없다. 이런 점에서 『기호의 제국』은 우리에게 낯설기만 하다. 그동안 우리는 너무나 많은 것에 대해 이야기하고 너무나 많은 알맹이로 '가득 찬' 평론들에 둘러싸여 있었기 때문이다.
여러가지 폭력이 난무하는 우리 문화 환경에서 생겨난 수많은 평론 중 상당수는 대단히 폭력적이다. 이들은 빳빳하게 발기된 자신만의 이데올로기나 가치관을 독자들의 부드러운 머릿속에 강제로 삽입하려 한다. (성폭력은 신문 사회면에나 존재하는 것이 아니다.) 이러저러한 이유로 해서 대중의 눈에는 잘 안 보이지만 문화평론가라는 수퍼맨 (지식인이라는 이상한 이름으로 불리기도 하는)의 눈에는 잘 띄는 '숨겨진 진실'로 '가득 찬' 평론만을 들어온 우리 귀에는 바르트의 일본문화 '평론'이 그야말로 알맹이 없이 텅 빈 헛소리로 들릴지도 모른다.
그러나 바르트는 아무것도 이야기하지 않음으로써 일본문화의 정수를 꿰뚫는다. 여기에서 정수를 꿰뚫는다는 것은 어떤 실체나 진리를 포착한다거나 드러난 현상 뒤에 숨겨진 본질을 발견해낸다는 뜻이 아니다. 다만 텅 비어있는 일본문화의 빈틈을 비집고 들어가서 (비집고 들어가는 것이지만 그 어떤 강요나 마찰, 파열도 일어나지 않고 그저 미끄러지듯이 빨려 들어간다) 그 빈 공간을 쓱 한 번 감아놓으면서 다시 스쳐지나가듯 부드럽게 빠져나오며, 이 동작을 다시 반복한다. (역시 성적이지만 폭력적이지 않다.)
pp.200~201
https://naver.me/GalgZgh7
바르트와 기호의 제국.. 피터 페리클레스 트리포나스
* 언어와 이미지와의 상호관계를 위한, 참고서적. 바르트의 『기호의 제국』 관련. 정박과 중계.
p.13 바르트는 언어적 기호체계와 시각적 기호체계가 같은 텍스트 안에서 서로 이데올로기적으로 의존하고 있음을 설명하기 위해 한 파스타 광고를 끌어들인다. 『기호의 제국』에서도 동일하게 행해지고 있는 이미지와 텍스트에 대한 이러한 분석 유형을 통합매체적cross-medial 접근 방법이라고 부를 수 있다. 광고 속에 시각적으로 나타난 물체들(스파케티, 토마토 소스, 파르메산 가루 치즈, 양파, 후추, 바구니)은 그 생산품의 상표로 쓰이는 하나의 어휘인 "판자니Panzani"라는 이름 아래 함께 묶일 수 있다. 이러한 생산품들 자체가 유독 어떤 민족 고유의 특성을 나타내고 있는 것은 아니다. 하지만 광고에 따르자면 그 "완벽한 스파게티 요리"의 재료들은 한 광고 사진을 통해서 주방 안에서 다분히 "이탈리아적인" 것으로 재현되며, 따라서 스파게티 재료로서는 최상의 품질을 갖고 있는 것으로 비친다. "판자니"라는 이름 자체에 담긴 이탈리아 어원과 그 이름이 지니고 있는 민족적 정체성을 활용한 것이 이 제품을 문화적으로 진짜 이탈리아 것 처럼 보이게 만드는 것이다. ..
그 광고는 재현의 형식 안에 숨어 있는 상투적인 것들로 가득 차 있다. 그 상품들이 지니고 있는 "이탈리아적인" 특성은 언어적 텍스트에서 시각적 텍스트로 공시를 이동시키기 위해 "판자니"라는 단어와 상품이 맺고 있는 인접contiguous 관계나 결합 관계에 주로 의존하며 그 결과 정박anchorage과 중계relay의 작용으로 귀결된다. 바르트가 광고 안에서 단어와 이미지 사이의 상호작용을 분석하기 위해 전개하고 있는 이 "정박"과 "중계"라는 개념은 "연합된 약호" 형태의 텍스트가 기호학적으로 의미 생성을 야기시키고 이끄는 방식을 고찰하는 데에 유용하다. 그의 설명에 따르면, 정박을 통해서 "텍스트는 독자로 하여금 이미지가 가질 수 있는 여러 기의signifie들 중에서 어떤 것은 버리고 어떤 것은 받아들이게 한다. .. 텍스트는 독자를 사전에 선택한 의미로 원격 조종한다." 한편 중계를 통해서 "텍스트와 이미지는 어떤 보완적인 관계를 맺게 된다. 이미지와 마찬가지 방식으로 단어들은 보다 일반적인 통합체syntagme의 단편들이 되고 그러한 이미지와 단어로 구성된 전언message의 통합은 보다 높은 단계에서 실현된다." 의미를 보다 잘 드러내기 위해서 광고 전체의 전언은 이렇듯 어휘적인 면과 시각적인 면이 의존하고 있는 정박, 그리고 텍스트를 구성하는 단어와 이미지라는 두 요소들 사이의 보완성을 의미하는 중계를 모두 포함하고 있는 것이다.
바르트는 「이미지의 수사학」에서 이미지와 관계 맺는 언어적 전언message linguistique이 정박ancrage과 중계relais의 작용을 한다고 말한다. 이미지는 기본적으로 다의적이며 "고정되지 않은 기표들의 연쇄"를 이루고 있는데, 이렇듯 불확실한 이미지의 의미를 고정시키기 위한 언어적 기술 중의 하나가 바로 정박이다. 예를 들어 "감미롭게 녹아드는 아이스크림"이라는 광고 문구가 아이스크림의 이미지와 결합하게 되면 그 이미지가 "아이스크림을 사시오"라는 하나의 의미로 자연스럽게 고정되는 것이 바로 정박의 이데올로기적 작용이라고 할 수 있다. 바르트가 중계의 예로 들고 있는 것은 영화의 대사인데, 영화 속 대사들은 단순한 설명의 기능뿐만 아니라 이미지에서 발결되지 않는 의미들을 배치하는 기능을 하기 때문에 언어와 이미지는 서로 보완적인 관계를 맺게된다.
* 대문자 역사History를 싫어 한다. 언제나 내 어머니는 소문자의 어머니로 남아야 한다.
p.65 역사는 주관적인 성격과 문화적인 자의성을 띤 재현의 형식일 수 밖에 없다. 왜냐하면 역사가 실재를 객관적으로 재현하거나 현실에 직접적으로 접근할 수 없어 필연적으로 진실을 윤색하게 되기 때문이다. 곧 역사는 텍스트와 이미지들이 경쟁하는 하나의 장이며, 그러한 텍스트와 이미지들은 우리가 타자와 접촉할 때 가지는 낯선 것에 대한 경험 또는 소외의 느낌을 담은 어떤 소설이나 꿈처럼 읽혀지고 씌어진다. 바르트가 『기호의 제국』에서 읽고 쓰고 있는 것은 일본의 역사와 문화가 갖는 이러한 차이일 뿐이다. 그러나 바르트는 서구의 독자들이 자신의 텍스트를 일본 문화의 본질적 차이들을 경험하게 해 주는 하나의 지배적인 텍스트Master Text로 읽지 말라고 경고한다. 오히려 『기호의 제국』은 일본이라는 텍스트와 이미지를 여행해 가면서 바르트 자신이 그것들에 어떻게 노출되고 있는가를 주관적으로 묘사한 작업이다. 시각적 이미지에 있어서나 언어에 있어서나 어떠한 재현도 한 문화의 본질과 그 역사의 의미를 복원할 수 없는데, 왜냐하면 이미 경험의 기원에는 언제나 의미의 상실이 따르기 때문이다. 『기호의 제국』은 문화적 단절과 소외라는 외상trauma에서 비롯된 의미의 과잉을 다루는 바르트의 상상력이 낳은 산물에 지나지 않을지도 모른다.
모든 것이 텍스트이다. 곧 모든 것이 의미 작용의 가능성이 들어 있는 충돌을 산출하는 동시에 그 층들에 의해 산출되는 경험의 조직들인 것이다. 몸, 얼굴, 글쓰기는 타자의 영역이며, 또한 그것들은 차이의 상징적 체계 안에서 의미의 현존과 부재 또는 의미의 점진적인 상실에 대한 은유로 기능한다.
- 오로지 나만의 것은, 오로지 나만의 것이다. 이해할 수도 이해받을 수도 없다. 그것이 소문자 어머니이다.
https://naver.me/5bV0ACJ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