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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책 알라딘에서 주문했네요.. 신간은 좀처럼 주문하지 않는 나인데.... 관촌수필 처음 읽을때가 생각이 나네요.. 수필치곤?? 책두께가 놀라웠고 충청도 사투리가 그렇게나 어려운것에 또 놀라웠죠..^^ 당시에 내수준은 유자만 붙이면 무조건 충청도라고--; 그러니께 설랑은이 말이어유~~헉!!-_-; 어줍잖은 비교를 할라치면 경상도는 토지의 박경리님..전라도는 태백산맥의 조정래님이라면 충청도는 관촌수필을 포함하는 이문구 작가라고.. 쉽게 읽지 않은 만큼 여운이 많이 남는 책이었어요.. 그래서 작가의 다른작품도 찾으려 애쓰던게 생각이 나요.. 그때에는 요즘처럼 책구하기가 쉽지가 않았다는 핑계도^^;; 저자만 보고 책사는데도 주저가 없는 작가중 한분이지요.. 우리 문단의 커다란 별이 떨어졌네요.. 아마 하늘에서나마 못다한 창작 활동을 하지지 않을런지.. 삼가 고인의 명복을 빕니다....(__) 아래 내용은 한국 소설가 협회(http://novel.or.kr/index_gesi.htm) 에서 퍼왔습니다.. 소설가 이문구(李文求.전 민족문학작가회의 이사장)선생께서 25일 오후 10시 40분 서울 을지로 백병원에서 지병으로 별세하셨습니다. 향년 62세. 선생은 1941년 충남 보령에서 태어나 서라벌예대 문예창작과를 졸업했으며, 1966년 『현대문학』지 추천으로 등단했고, 농촌 현실을 토속적인 문체로 그린 소설집 「관촌수필」을 비롯해 「우리동네」「장한몽」「매월당 김시습」 「내 몸은 너무 오래 서 있거나 걸어왔다」 등의 작품을 남겼으며 한국펜문학상, 만해문학상, 동인문학상, 대한민국문화예술상 등을 수상했습니다. 선생은 1974년 민족문학작가회의의 전신인 자유실천문인협의회 발기인과 간사로서 문학의 사회참여에도 주도적인 역할을 했으며, 펜클럽 이사, 한국문인협회 소설분과이사, 한국소설가협회 이사, 민족문학작가회의 이사장 등을 역임했습니다. 2년전 위암과 담낭 제거수술을 받았던 선생은 최근 지병이 악화돼 백병원에 입원, 치료를 받아왔으며, 병원측으로부터 "신변을 정리하라"는 통고를 받은 선생은 지난 15일 가퇴원, 투병중 쓴 동시 66편을 묶은 동시집 「산에는 산새 물에는 물새」 등의 원고를 출판사에 넘긴 뒤 열흘만에 세상을 떠나셨습니다. 유족은 미망인 임경애(任景愛.50)씨와 아들 산복(山馥.26), 딸 자숙(自淑.25)씨가 있다. 장례는 28일 오전 8시 문인장으로 치러지며 유언에 따라 화장된다. 빈소는 서울대병원 영안실. ☎ 760-2032 소설가 이문구씨 타계 ‘농촌 최후의 이야기꾼’ 25일 밤 세상을 떠난 ‘관촌수필’의 작가 이문구는 토속적인 아름다움을 담은 해학적인 문체로 한국문학에서 독특한 경지를 일궈 왔다. 대중적 인기를 크게 누리지는 않았지만 그의 문체는 한국 문단에서 독보적인 것이었다. 걸걸한 입담에 충청도 방언이 지닌 고유의 의미와 미감을 실은 그의 문체에 대해 작가 송기숙은 “시골 밭둑의 싱싱한 수풀 같다”고 평했다. 2년 전 위암으로 자리에 눕기 전까지 그는 문단 행사나 문인 초상 등에서 일 맡기를 마다하지 않았던, ‘어울림’을 아는 사람이었다. 친구 많기로, 선후배 챙기기로는 첫손가락에 꼽히는 문인이었다. 좌익에 가담했던 부친을 6·25전쟁 때 잃은 그는 두 형마저 ‘빨갱이 자식’이라는 이유로 대천해수욕장 바닷물에 산 채로 수장되는 뼈아픈 고난을 겪게 된다. 아들과 손자를 먼저 보낸 조부와 어머니도 그 뒤를 이어 세상을 떠났다. 가족을 모두 잃은 그는 고향 대천에서 중학교까지 마친 뒤 1959년 상경해 서울 신촌시장에서 좌판을 벌이거나 떠돌이 행상, 막노동으로 생계를 이어갔다. 작가가 되겠다는 꿈을 안고 서라벌예대에 응시했고 면접을 봤던 김동리는 “특이한 문장”이라며 그를 ‘을류 장학생’으로 뽑아줬다. 동급생으로는 조세희 한승원 이건청 등이 있었다. 고등학교 시절부터 이름을 날렸던 ‘선수’들 중에서 ‘노가다’ 문장으로 주눅들어 있던 이문구. 그의 스승인 김동리는 그를 “한국 문단에서 희귀한 스타일리스트가 될 것”이라고 아낌없이 독려해 줬으며 그의 습작을 논하라는 시험문제를 내기도 했다. 대학시절 이후 이문구는 김동리를 아버지처럼 섬겼다. 김동리의 추천으로 이문구는 등단했고 ‘월간문학’ ‘한국문학’ 등 문예지의 편집장을 맡기도 했다. 졸업 후 이문구는 생계를 위해 노량진에서 동작동까지 도로확장공사도 했고 연희동 외국인학교 터에 있던 공동묘지 3000기를 옮기는 일도 했다. 그러면서 노동의 현장에서 사람들과 어울려 사는 법을 배웠다. 1970년대 유신시절, 보수와 순수문학을 대표하는 김동리와 진보 진영, 참여문학의 선두에 선 이문구, 스승과 제자의 문학적 경향은 상극이었다. 그럼에도 사제지간의 정은 조금도 변치 않았다. 1988년 서울에서 국제펜클럽대회가 열렸을 때 참여문학을 대표하던 민족문학작가회의와 김동리가 대립 양상을 보이자 그는 스승에게 돌을 던질 수 없다는 이유로 스스로 작가회의를 떠나기도 했다. 스승이 타계한 뒤 1995년 이문구는 김동리기념사업회를 만들고 첫 사업으로 김동리문학상을 제정했으며 떠날 때까지 사업회의 회장직을 맡았다. 2000년 민족문학작가회의 이사장으로 취임한 뒤 그는 김지하 등 작가회의와 소원했던 인물들을 끌어안는 작업을 시작으로 문인 복지에 목소리를 높였다. 작가회의나 문인협회도 군사독재의 시대적 산물이라 여겼던 그는 이런저런 정치적 현안으로 성명을 내야 하는 일에 괴로워했다. 작가는 서재로 돌아가 글을 써야 한다고 주장했던 그다. 문학평론가 유종호는 그를 “농촌 최후의 시인”이라고 했다. 기세가 담긴 전통사회의 농촌 언어로 빚어온 그의 작품들에는 늘어지고 휘감기는 문장, 풍요로운 토박이말과 사투리를 비롯해 판소리 사설 같은 구수함이 깃들여 있다. 조상으로부터 이어받은 선비 기질과 직접 경험한 밑바닥 삶, 6·25전쟁에 대한 기억이 이문구 문학의 바탕을 이룬다. “이름 앞에 어떠한 수식도 붙여지길 원치 않는다”는 작가 이문구. 그는 “죽을 때까지 현역작가라는 말을 듣고 싶다”고 이야기한 적이 있다. 마지막 길을 떠나며 이문구는 동시집 ‘산에는 산새 물에는 물새’(창작과비평사)를 남겼다. 조이영기자 lycho@donga.com '관촌'으로 돌아간 문단 터줏대감 한국 문학과 문단의 마당쇠이자 터줏대감을 잃었다." 소설가 이문구의 부고 소식을 듣고 몰려든 문인 등 문화예술인들은 깊은 슬픔과 상실감을 쏟아냈다. 이들 중 대부분은 이승에서의 삶이 얼마 남아있지 않다는 소식에 어제, 그제 병상을 찾아 李씨의 손을 붙들고 다 꺼져가는 말로 인사를 나누며 슬픔을 참았었다. 그들이 이제 "여한 없이 살다 가신다고 했으니 여한없이 잘 가시라"며 슬픔을 쏟아내고 있다. 지난 15일 병원 측으로부터 "이 세상에 정리할 것 있으면 정리하시라"는 통보를 받은 李씨는 그날로 집으로 가 마지막 원고를 손질해 동시 60여편의 동시집과 산문집 한권 분량의 원고를 출판사로 보내 세상과의 거래를 끝냈다. 그리고 다시 병원으로 돌아와 감사와 충고를 전하고 싶은 선.후배 문화예술인들을 불러 인정도 정리했다. "산에는 산새/들에는 들새/물에는 물새/들고 나는 새/하고많아도/ 울음소리 예쁜 새는/열에 하나가 드물지./웬일이냐고?/이유는 간단해./듣는 사람이/새가 아니란 거야."('새'전문) 세상에 있는 말로는 양이 안 찬다며 새로 말도 만들어서 긴 만연체로 쓰던 소설과는 정반대로 李씨는 위와 같이 단순하고 명료한 동시로 마지막 투병을 하고 있었다. 출판사로 넘긴 동시집의 제목도 '산에는 산새 물에는 물새'로 마음 속에 정해놓았다. '산은 산 물은 물'이라는 고승대덕(高僧大德)의 말씀과 이 동시에는 어떤 차이가 있는가. 있는 것을 있는 것 자체로 받아들이는 단순한 마음으로 돌아가 李씨는 죽음도 순연하게 맞아들인 것이다. "흔적 없이 사라지고 싶다"며 "내 이름을 딴 어떤 추모사업도 벌이지 말고 무덤도 쓰지 말 것이며 어릴적 뛰놀던 고향 관촌 뒷동산에 뿌려달라"는 유언과 함께 숨을 놓았다. 유년시절과 전통적 유학자 집안이 남북 이념대립에서 빨갱이로 몰락한 집안 내력을 서구 소설 양식에서 벗어나 동양의 열전 형식과 수필 양식으로 넓힌 출세작 '관촌수필'의 고향, 충남 보령의 관촌으로 돌아가는 것이다. "그의 문체는 평단 전체가 달라붙어 연구해도 모자랄 그런 풍요로운 숲"이라고 일찍이 김지하 시인은 말했다. 다른 작가와는 다른 이야기, 형식, 언어, 문체를 부단히 개발한 그는 진작부터 스승인 김동리에게서 '우리 문단의 가장 이채로운 스타일리스트'란 평을 들었다. 李씨는 문학이 풍요로웠을 뿐만 아니라 좋은 관계로서 '가장 풍요로운 인간의 숲'을 이뤘다. "당신의 한 작품 제목처럼 '이 풍진(風塵) 세상'에 와 남의 먼지 다 씻겨주고 당신에게서는 먼지 하나 안 날린 분"이 李씨 아니냐며 진보.순수 문단, 재야.보수 문화계 등 이념과 경향을 뛰어넘어 많은 인사가 조문을 와 李씨의 포용력을 덕담으로 나누고 있다. 김동리와 서정주의 제자로 보수.순수문단에서 시작해 1970년대부터 진보.참여문단을 이끈 李씨. 그는 진보 문단 수장으로 있으면서도 보수 문단을 배제가 아니라 포용하며 함께 일해 나가고자 애썼다. 해서 "문학의 경향.파벌 다 아우르며 포용한 분은 문단사상 李씨밖에 없다"며 그동안 갈라섰던 한국문인협회.민족문학작가회의 등 모든 문학단체가 함께 문인장으로 장례를 치른다. "흑백논리로 가차없이 선배.동료.후배 할 것 없이 재단, 처벌해버려 덕성이 사라졌다. 스스로 서로를, 상대방을 감싸 안아줄 때 본래의 덕성으로 돌아갈 것이다. " 李씨가 병석에서 해준 이 말은 오늘 같은 '배제의 시대'에 더욱 크게 울린다. 이경철 문화전문기자(중앙일보) ▼이문구씨 연보▼ 1941년 충남 보령 출생 서라벌예술대 문창과 졸업 1966년 ‘현대문학’에 단편 ‘백결’이 추천되어 등단 1970∼1972년 ‘창작과 비평’에 장편 ‘장한몽’연재 1970∼1972년 ‘월간문학’ 편집장 1972년 제5회 한국창작문학상 수상 1973∼1975년 ‘한국문학’ 편집장 1977∼1997년 국제펜클럽 한국본부 이사 1978년 제5회 한국문학작가상 수상 1982년 제1회 신동엽 창작기금 받음 1984∼1989년 ‘실천문학’ 발행인 1987∼1988년 민족문학작가회의 이사 1990년 제7회 요산문학상 수상 1991년 ‘장곡리 고욤나무’로 흙의 문예상 수상 1991년 펜문학상 수상 1992년 제2회 서라벌문학상 수상 1993년 제8회 만해문학상 수상 1995∼1996년 한국소설가협회 상임이사 1996년 96문학의 해 집행위원회 출판 홍보분과위원장 1996∼1998년 한국예술종합학교 영상원 강사 1998∼1999년 민족문학작가회의 부이사장 1999∼2001년 민족문학작가회의 이사장 2000년 ‘내 몸은 너무 오래 서 있거나 걸어왔다’로 동인문학상 수상 소설집 ‘이 풍진 세상을’(1972), ‘으악새 우는 사연’(1978), ‘우리 동네’(1981) 장 편 ‘산너머 남촌’(1990), ‘매월당 김시습’(1992) 연작소설 ‘관촌수필’(1972∼1977) 외 다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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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자] 이문구 지음 [판형] 신국판 / 344 페이지 [가격] 8000 원 [ISBN] 89-8281-295-4 03810 [초판] 2000-6-15 [분야] 문학동네 소설집 [언론자료] 이문구 |
[내용 안내]
7년 만의 신작 소설집 출간
이문구의 신작 소설집 『내 몸은 너무 오래 서 있거나 걸어왔다』가 출간되었다. 『유자소전』(1993) 이후 7년 만이다. 이번 소설집에는 1991년에 발표하여 제9회 ‘흙의 문예상’을 수상한 「장곡리 고욤나무」를 비롯한 8편의 ‘나무’ 연작 단편들이 실려 있다(「더더대를 찾아서」 역시 ‘―나무’ 제목이 붙어 있지 않다 뿐, 같은 ‘나무’ 연작으로 보아도 무리가 없다).
90년대 이후 변화된 농촌의 모습과 농민들의 의식 변화에 글쓰기의 초점을 두었다고 작가 스스로 밝혔듯이, 『내 몸은 너무 오래 서 있거나 걸어왔다』는 90년대의 농촌 풍경과 그 속에서의 대단할 것도 누추할 것도 없는 사람살이를 날카로운 풍자와 풍성한 해학으로 핍진하게 그려내고 있다. 소설집의 제목 ‘내 몸은 너무 오래 서 있거나 걸어왔다’는 김명인의 시 「의자」에서 따온 것이다.
홍시의 붉은 단물을 쏙쏙 빨아 삼키듯 읽어가게 하는 문체의 힘
이문구의 문학세계를 특징짓는 가장 강력한 자원은 충청도 사투리로 이루어진 문체다. 유려한 토박이말과 생생한 입말이 살아 숨쉬고, 곳곳에서 날카로운 풍자와 풍유가 번뜩이는 그의 문장은 흐르는 물처럼 막힘이 없이 유장하다. 그의 문장에선 씹으면 씹을수록 깊은 ‘말맛’이 느껴진다. 이문구 특유의 독특한 입담은 이번 소설집에서도 예외 없이 빛을 발하고 있다. 각 작품에 등장하는 농촌의 갑남을녀, “수더분하면서도 고집스럽고, 학식은 짧지만 제반 일상사에서 경우 하나는 깍듯하게 바”른 그들이 벌이는 어깃장과 대거리의 입씨름판은 우리네 농촌의 토속적인 분위기를 현장감 있게 담아낸다. 소설가 신경숙 씨는 이문구의 문체를 두고 “홍시의 붉은 단물을 쏙쏙 빨아 삼키듯 읽어가게 하는 힘”이 있다고 했거니와 그 진경이 이번 소설집에서도 약여하다.
삶의 존엄에 우뚝 뿌리내린 문학의 진경!
“농촌 최후의 시인”이라는 이문구에 대한 평가(유종호)가 말해주듯, 『내 몸은 너무 오래 서 있거나 걸어왔다』에 실린 8편의 소설 역시 농투성이들의 삶을 다루고 있다. 그리하여 이번 소설집에서 그리는 농촌의 세태는 『관촌수필』이나 『우리동네』의 그것과는 세월의 간격만큼이나 다르지만, 그 속에서 사람살이의 차등 없는 존엄이나 줏대를 보아내는 작가의 시선은 일이관지하며 여전히 깊고 의뭉하다. 세계무역기구(WTO), 국제통화기금(IMF), 우루과이라운드 등 급변하는 세상 풍파에 휩쓸리고, 휴대폰과 러브 호텔, 노래방 등 몰려드는 도시 문명의 홍수 속에 몸살을 앓는 90년대의 농촌 현실이 손에 잡힐 듯 펼쳐지는 한편으로, 알 것 다 알고 “제 할말 다 하고 사는” 늘 그만큼의 그들(우리들)이 이번 소설집 속에는 있다.
이 소설집에 실린 8편의 단편 중 7편의 제목엔 전부 ‘나무’가 들어 있다. 그러나 제목에 나오는 나무들은 우리가 흔히 ‘나무’ 하면 떠올리는 소나무나 전나무같이 크고 우뚝한 나무가 아니라 싸리나무, 으름나무, 고욤나무 등 이름조차 낯설고 생김새도 볼품없으며 그다지 쓸모도 없어 보이는 나무 같지도 않은 나무들이다. 작품 속에 나오는 인물들 역시 이 나무들처럼 ‘존재도 희미한’ 농투성이 갑남을녀일 뿐이다. 그러나 이들 나무 같지도 않은 나무들의 삶은 작가 이문구에 의해 저마다의 존엄과 줏대를 유감없이 드러내며 사소한 듯 사소하지 않은 인간 진실의 국면을 풍성하게 열어 보인다.
저 당당한 일년살이들의 세상! 말의 숲, 인간의 숲!
첫번째 작품 「장평리 찔레나무」는 장평리 부녀회장이자 기본바로세우기운동 장평분회 회장인 김학자 회장과 도시에 나가 사는 김회장의 속물적이고 뻔뻔스런 시동생 이은돈의 갈등을 다루고 있다. 얼핏 보면 가볍고 우스워 보이는 갈등의 이면에는 IMF 시대의 세태 풍경과 도시 사람들의 건강 식품 공급 장소로 전락해버린 농촌의 모습, 변해버린 농촌 사람들의 인심이 드러나 있다.
「장천리 소태나무」의 주인공은 얼떨결에 ‘사건반장’이란 감투 아닌 감투를 쓰게 된 이송학 씨. 이 단편에는 휴대폰, 러브 호텔, 카섹스, 몰려드는 도시 낚시꾼 등 새로운 문명의 홍수로 몸살을 앓으며 점차 변해가는 농촌의 풍경이 소태나무같이 쓴맛이 느껴지는 유머로 그려져 있다.
중편 「장이리 개암나무」는 국제무역기구(WTO), 국제화 시대 운운하며 남의 묘를 파내 기우제를 지내려는 농민들과 그에 맞서 전통적 미덕을 지키려는 개암나무 주인 전풍식의 이야기이다. 복잡한 사회 현실 속에서 이기적으로 변해버린 농민들의 씁쓸한 모습과 미래 세대에 거는 희망을 동시에 보여주고 있다.
「장동리 싸리나무」는 시적인 문체와 서정성 넘치는 분위기로, ‘나무’ 연작들 중에서 가장 독특한 풍경을 그려 보이는 작품이다. 주인공 하석귀는 낙향해서 저수지 근처의 시골집에 사는 은퇴한 공무원이다. 그의 조용한 내면 성찰이 저수지의 아름다운 물빛과 멋들어지게 어우러지며 한 폭의 그림 같은 풍경을 만들어낸다.
이데올로기 싸움에서 살아남은 줏대 있는 홍쾌식 노인의 평생의 신조가 담겨 있는 「장석리 화살나무」와, 농토를 지키려는 이상만 옹과 농민운동에 종사하는 그의 사위 은산의 얘기를 통해 농토 개발과 농민운동의 문제를 풍자한 「장척리 으름나무」, 불합리한 농지 정책과 자식들의 외면 속에 목매어 자살한 70대 노인의 이야기를 다룬 「장곡리 고욤나무」 등 편편에서 세태와 인간 진실은 둘이 아닌 하나로 작가의 문체 속에 녹아 있다.
『내 몸은 너무 오래 서 있거나 걸어왔다』의 각 소설 제목에 쓰인 ‘개암나무’ ‘으름나무’ ‘고욤나무’ 등은 등장인물의 처지나 성품을 암시하기도 하고 부정적 인물이나 세태에 대한 비유로 쓰이기도 한다. 각 작품 속의 등장인물들은 키 작고 못생긴 나무들만큼이나 별볼일 없고 능력도 없고, “있는 듯 없는 듯 존재 가치가 희미”한 이들이다. 서구 문명과 유용성만을 따지는 자본주의 문명에 밀려 점차 사라져가는 개암나무나 으름나무, 고욤나무처럼 주류에서 비켜서 있는 외로운 존재이다. 그러나 저들 나름대로의 뚜렷한 ‘자기 줏대와 자기 고집’을 갖고 ‘숲을 이루는 데’ ‘제 나름대로 역할을’ 하는 나무들이다. 이 점, 작가는 다음과 같이 말하고 있다.
제목으로 쓰인 나무는 나무이되 나무 같지 않은 나무이지요. 그렇다면 덩굴이냐, 덩굴도 아니지요. 풀 같기도 한데 풀도 아니고 그러나 숲을 이루는 데는 제 나름대로 역할을 하는 나무이지요. 꼭 소나무나 전나무, 낙엽송처럼 굵고 우뚝한 황장목 같은 근사한 나무만이 숲을 이루는 건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예를 든다면 고욤나무는 과일이지만 과일 축에 못 끼는 나무 아닙니까. 개암은 옛날 제삿상에 꼭 오르는 과일이었지만 지금은 딸기나 키위, 외국에서 근거 없이 들어온 바나나에게 그 자리를 물려준 지 오래되었지요. 한마디로 말한다면 있는 듯 없는 듯 존재 가치가 희미한, 그러나 자기 줏대와 자기 고집은 뚜렷한 무지렝이 촌사람들의 이야기입니다. 이번 총선에 입후보한 사람들 보십시오. 똑똑하지 않은 사람이 어디 한 사람이라도 있습니까. 그러나 똑똑한 사람들만이 사회를 이루는 구성원은 아니지요. 우리처럼 돈 없고 힘 없고 빽 없는 일년살이들도 숲을 이루는 데는 꼭 필요한 존재라는 것을 말하고 싶었습니다.―시인 유용주와의 인터뷰에서(『문학동네』 2000년 여름호)
작가 이문구는 1941년 충남 보령에서 출생하여 서라벌예술대학 문예창작과를 졸업했다. 김동리 선생의 추천으로 『현대문학』에 단편 「다갈라 불망비」(1965)와 「백결」(1966)을 발표하며 작품활동을 시작했다. 현재 민족문학작가회의의 이사장으로 재직중이며 경기대학교 문예창작학과에서 소설을 가르치고 있다. 소설집 『이 풍진 세상을』(1972) 『해벽』(1974) 『관촌수필』(1977) 『우리동네』(1981) 『유자소전』(1993), 장편소설 『장한몽』(1987) 『산 너머 남촌』(1990) 『매월당 김시습』(1992) 등이 있다.
한국창작문학상(1972), 한국문학작가상(1978), 요산문학상(1990), 흙의 문예상(1991), 펜문학상(1991), 서라벌문학상(1992), 농민문화상(1993), 만해문학상(1993)을 수상했으며, 신동엽창작기금(1982)과 춘강문예창작기금(1989) 수혜자로 선정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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