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대 대통령선거와 김대중
대통령 직선제를 실시하는 모든 나라의 대선은 말할 수 없이 치열하다. 이들 나라에서 각 정당은 상대 후보의 흠잡기에 여념이 없으며, 상대방에 대한 모략도 서슴치 않는다. 미국에서도 출마를 선언한 모든 후보에 대해 철저한 뒷조사가 이뤄지는데 심지어 대학 재학 중 리포트를 베낀 것이 밝혀져 후보를 사퇴하는 일도 있다.
1963년 10월에 치러진 5대 대통령 선거에서는 야당의 윤보선 후보가 공화당 박정희 후보의 좌익 경력을 상세히 폭로하였다. 그 자료는 한국에서 얻기 어려운 것이 많았고, 미국이 1948년에 일어난 여수․순천 반란 사건조사에서 주역이었으므로 미국에서 제공한 것 같다는 추측을 낳았다(1950년 2월까지 미군은 남한에서 완전 철수하였다). 윤보선 후보는 선거에서 이기지는 못했으나 사상논쟁으로 선거는 박빙이 되었다. 1997년 대선에서도 김대중 측에서 이회창 후보에 대해 철저한 뒷조사를 했고 이것이 승리의 주요 원인이 된 것은 누구나 아는 일이다.
공화당에서 김대중의 신상조사를 안 할 이유가 없었다. 1971년 초 공화당 정권은 비밀리에 김대중에 대한 신상조사를 했다. 이 조사를 한 사람은 육군헌병장교 출신의 하영조(河永祚) 씨였다. 수사의 베테랑이었던 그는 1961년 7월 9일 발표된「장도영 일파 44명 반혁명 사건」의 일원으로 법정에 선 경력이 있다.
이 ‘혁명재판’에 회부된 이는 다음과 같았다.
장도영(前최고회의 의장, 군사영어학교 출신, 중장), 송찬호(최고회의 위원 육사 5기, 준장), 박치옥(최고회의 위원 육사 5기, 대령), 문재준(최고회의 의장, 육사 5기, 대령), 김제민(최고회의 위원, 육사 9기, 중령), 이희영(내각수반 비서실보좌관, 육사 5기, 대령), 안용학( 최고회의의장 비서실장, 육사 5기, 대령), 노창점(舊황실 재산관리 사무총국장, 육사 5기, 대령), 이성훈(내각수반비서실 보좌관, 육사 5기, 대령), 최재명(감찰위원장, 육사 5기, 대령), 방자명(제 15 CID 대장, 육사 8기, 중령), 김영우(제 3 CID 대장, 육사 8기, 중령), 오기수(제 15 CID 정보과장, 대위), 장인항(제 15 CID 배속, 준위), 하영조(예비역 헌병대위), 김경조(제 1 공수 전투단 소대장, 중위), 김석률(제 7헌병 중대장, 대위)
단기간의 복역 후 사면된 하영조는 공화당 창당에 참여했으며 이때는 공화당 중앙위원이었다. 하영조는 2명을 보좌역으로 채용하였다. 그들은 자유당 시절 치안국 특정과에 근무한 적이 있으며 김대중과 같은 고향 출신으로 김의 뒷바라지를 많이 해주었다는 이백래(李白來), 해병대 상사 출신이며 김대중의 사촌이 된다는 윤일만(尹一萬)이었다.
이들은 목포와 신안군 일원을 샅샅이 누볐다. 배를 타고 섬에서 섬으로 펜과 진술조서, 녹음기와 카메라를 메고 40여 일간 힘들게 자료를 모았다.
육지에 돌아와서는 김대중이 사업을 한 부산을 거쳐 강원도 인제까지 원정하여 사진을 찍고 증언을 녹음하고 진술조서를 꾸미고 증거서류를 복사하고 수집했다.
이들이 수집한 자료는 다음과 같다고 한다.
전라남도 신안군 하의면 뻐리섬에서 성장한 張鹵島는 17세의 어린 처녀의 몸으로 같은 섬에 사는 총각 諸葛成祚라는 청년에게 시집을 갔다. 그러나 19세의 꽃다운 나이에 청상과부가 됐다. 남편을 잃은 신부를 그를 시숙인 諸葛成福이 돌봐주고 있었으나 과부가 된 장 여사는 얼마 후 여아를 분만했다(이 여아 즉 김대중의 누이는 장성하여 목포에서 이발관을 하는 김 모에게 시집을 가서 잘 살았는데 일찍 세상을 떠났다). 어린 젖먹이까지 가진 과부 장 여사는 먹고 살기가 어려웠다. 생계를 위해 뻐리섬에서 같은 신안군 하의면 너리섬으로 이사를 갔다. 너리섬에서 시골 주막집을 차렸다. 주막집을 하고 보니 뭇 사람을 상대하게 되었고, 젊은 과부는 홀로 살기가 어려웠다. 그곳에서 농악을 하는 尹昌彦이라는 사람을 알게되었고 끝내는 동거생활을 하게 되었다. 이 윤창언이라는 사람과 동거하면서 김대중을 낳았다. 김대중을 낳을 때 김대중의 이모가 되는 張都産이 조산을 했다. 김대중은 김대중이 아니라 윤창언의 아들로 尹x萬이라는 이름으로 있었다. 그의 사촌에 尹一萬이란 동생이 있었다 (이 사람은 하영조가 채용한 사람).
김대중의 일생도 기구한 운명이었으나 그의 어머니 장 여사도 팔자가 기구했다. 또 남편 윤창언을 잃었다. 남편 윤창언을 여윈 장 여사는 金云式이란 사람에게 또 시집을 갔다. 김운식에게는 김순례라는 부인이 있었고 梅月, 大本, 安禮, 用禮라는 자식도 있었다. 장 여사가 김운식의 집으로 尹x萬을 데리고 들어가니 尹x萬의 나이가 큰 아들 大本보다는 적었다. 그래서 이름을 고쳐 김대중(金大仲)이라 했다.(편집자주 : 仲자는 漢字에서 형제 중 둘째를 뜻함) 그후 정치인이 되자 관상가 金鶴에게 이름풀이를 해보았더니 사람들 가운데서 헤어나지 못한다고 평해서 人변을 없애고 中자로만 쓰게 되었다.
이후 김대중은 목포 북교국민학교를 거쳐 목포상업학교를 졸업했고 해방 후에는 남로당 산하 민주애국청년동맹 등에 몸을 담았고 보도연맹에 가입하고 있었다. 그리고 부산에서 통선업을 하다가 자유당 때인 1954년 5월 20일 제 3대 국회의원 선거에 목포에서 입후보하였으나 낙선되었고 1959년 6월 5일 강원도 인제 선거구 재선거에 국회의원에 입후보하여, 또 다시 낙선하였으며, 4․19이후 7․29 총선거에 민의원에 입후보하여 또 낙선했으나, 다음해인 1961년 5월 13일 인제지구 재선거에 또 다시 입후보하여 당선의 영광을 얻었다. 그러나 3일 후의 5․16 군사혁명으로 국회에 들어가지도 못하고 국회해산을 당하고 말았다. 그 동안 義父 김운식의 호적에는 입적을 못하고 있다가 인제 지구가 6․25 휴전으로 이남에 편입되는 바람에 여기에 착안하여 월남동포 행세를 하고 월남가족으로 假호적을 만들었는데 1962년 新民法 시행으로 그제야 김운식의 호적에 입적이 되어 김해 김씨가 되고 처음으로 호적을 갖게 되었다. (이한두 저,『유신 공화국의 몰락』, 매산 출판사, 1986 P42~44)
『유신 공화국의 몰락』은 공화당 중앙위원이었으며 김종필과 가까웠던 이한두 씨가 쓴 책으로 내용은 유신체제에 매우 비판적이면서도 김대중에 대해서도 비판적이다(이한두 씨는 70년대 후반부터는 윤보선의 개인비서로 정치활동을 했다). 이 책에는 위의 내용이외에도 김대중에게 불리한 서술이 많다. 김대중의 출생에 대해서는 이전부터 말이 많았는데, 이 책에서는 여러 설을 소개하는 정도에서 그치지 않고, 직설적으로 결론을 내리고 있다.
이한두의『유신 공화국의 몰락』에 따르면 공화당 정권은 하영조의 조사보고서를 가지고 이를 공개하느냐 마느냐로 찬반논쟁을 벌인 끝에 공개하지 않기로 결정했다. 공개를 찬성하는 측은 한국민이 가문을 중히 여기는 비교적 혈통을 존중하는 보수적인 민족이고 보니 지저분한 가계에 대해서 멸시하는 경향이 있고 더군다나 성씨를 바꾸었다는 것은 가장 수치스러운 것으로 생각하고 자기의 성을 제대로 찾지 못하는 사람을 대통령으로 모신다는 것은 언어도단의 일로서, 이것은 김대중에게 결정적 타격을 줄 수 있다는 것이었다.
공개를 반대하는 측은 자칫 잘못하면 국민에게 대통령 후보자를 중상모략 한다는 인상을 주어 도리어 역효과를 불러일으킬 수 있고, 또 이 나라에서 과거 시행한 선거의 예를 보아 적자 출신과 서자 출신이 맞서면 서자 출신이 이겼고 또 서자 출신 국민이 은연중 단결되어 같은 처지에 있는 입후보자를 동정하여 뭉치는 경향이 많으니 득보다 실이 더 많다고 주장했다고 한다.
김운식이 1974년 2월 25일 사망했을 때(호적에는 4월 25일 사망으로 되어 있음), 김대중이 연금해제 중인데도 불구하고 고향으로 내려가지 않은 것은 사실이다(1973년 8월 납치 사건 이후 가택연금된 김대중은 1973년 12월 12일 박정희씨에게 연금해제를 요청하는 서한을 보내 자유롭게 되었다. 그러나 김대중은 1974년 5월 23일부터 12월 17일까지 외신기자를 제외한 국내인사의 출입을 금지당하고 외출시에는 미행을 당하는 등 반연금 상태에 놓였다). 이미 2년 전 호적상 장남으로 돼 있는 이복형 김대본이 숨진 이상 2남인 김대중이 빈소에서 상주로서 문상객을 맞아야 하는 것은 전통적인 가문의 기본 예절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김대중이 이를 지키지 않았다는 것은 이례적이라 하지 않을 수 없다.
김대중 관계 인물들의 호적은 다음과 같다. 이 호적들이 단기 연호를 쓰고 있는 것으로 알 수 있듯이 해방 후에 작성된 것이다.
호주 : 金大仲/ 부 金云式 모 張鹵島/ 출생 단기 4258년(편집자 주 : 1925년) 12월 3일/ 본적 전라남도 무안군 하의면 대리 232 번지 무안군 하의면 오림리 132 번지 호주 張文淑(편집자주 :장지숙의 오기) 장녀 장노도 무안군 하의면 후광리 97번지에서 庶子 출생. 父신고 단기 4257년(1924년) 7월 7일 접수 입적 출생 년월일의 기재에 착오 있어도 호적 정정의 신청을 하지 아니 함으로 단기 4276년(1943년) 7월 10일 그의 출생 연월일 ‘단기 4257년(1924년) 1월 16일‘을 ‘단기 4258년(1925년) 12월 3일로 정정함… 단기 4287년(1954) 4월 20일 광주지방밥원 목포 지원의 허가 재판에 인하여 단기 4276년 7월 10일 그의 출생 연월일 ‘단기 4257년 1월 16일’을 ‘단기 4258년 12월 3일’로 정정함… 단기 4287년 4월 20일 광주 지방법원 목포 지원의 허가 재판에 인하여 호적정정 신청 동월 21일 접수명 ‘大中’을 ‘大仲’으로 정정함… (김대중 호적 초본)
다시 말하면 1924년 1월 16일 출생한 김대중은 김운식의 서자로 1924년 7월 7일 호적에 올려졌으나 1943년에 출생 연월일을 1925년 12월 3일로 고쳤다는 것이다. 그리고 1954년 ‘大中’을 ‘大仲’으로 개명했다. 훗날 다시 ‘大中’으로 이름을 고친다.
車蓉秀와 혼인 신고 단기 4278년 4월 9일 접수… 단기 4293년 5월 27일 처 차용수 사망으로 인하여 혼인 해소. 단기 4293년(1960) 6월 5일 부 김운식, 모 장노도의 혼인으로 인하여 嫡出子로 됨 (김대중 호적 초본)
김운식의 본처 김순례는 1894년생으로 66세 때인 1960년 6월 1일 김운식과 ‘협의 이혼’한 것으로 자신의 호적에 기록되어 있다. 그러나 김순례는 이혼 후에도 주소만 후광리 257번지로 옮겨 놓았을 뿐 김운식과 함께 살았으며 사망한 후에는 김운식 무덤 옆에 묻혔었다(1972년 5월 사망한 장노도는 경기도 파주군 천주교 묘지에 묻혔다).
호적대로 한다면 김운식은 67세에 이혼하고, 이혼한지 4일 후에 67세의 장노도와 재혼한 것이 된다. 그러므로 김운식과 김순례의 ‘협의 이혼’ 및 김운식과 장노도의 ‘혼인 신고’는 김대중을 적출자로 만들기 위한 요식행위이며 서류상에서만 발생한 일이라 하겠다(김대중의 강요에 의한 이혼이라 한다).
김대중은 장기간 김운식의 첩으로 있던 모친 장노도가 67살의 나이로 1960년 김운식과 혼인 신고를 함으로써 국회의원이 되기 위해 맹렬히 활동하던 때 비로소 庶子 신분에서 벗어나 嫡子로 인정되었다.
신안군 하의면 오림리 132 번지에서 출생. 서기 1911년 3월 10일 제갈 성조와 혼인 신고 除籍. 서기 1925년 12월 8일 호주 張之淑 입적 신고, 서기 1924년 10월 10일 전 호주 사망으로 호주 상속. 서기 1960년 6월 5일 金云式과 혼인 신고 除籍. (장노도 호적 초본)
장노도는 18세 때인 1911년 결혼한 첫 남편 제갈성조와는 사별한 것으로 확인됐다. 이후 1923년까지 12년 동안의 행적은 명확하지 않으며 호적 이외의 공식 기록은 없다. 앞의 김대중 호적에 나와 있는 대로라면 1924년 1월 16일 김대중을 낳아 이 해 7월 7일 김운식의 서자로 입적시켰으며, 자신은 이듬해인 1925년 12월 8일 아버지 장지숙에게 입적함으로써 호적상 신분을 정리한 것이 된다.
나중에 나온 것이지만 이런 자료가 있다.
출생과 성장 金大中의 생모 長鹵島여인(71년5월9일사망)은 1911년 諸葛成祚와 결혼했다가 사별, 1920년에 尹昌彦의 셋째첩으로 입적했으나 역시 사별했다. 그후 본남편 諸葛成祚의 친형인 시숙 諸葛成福의 도움으로 주점을 경영하다가 김대중을 임신, 全南新安군 하의면 후광리에 사는 金云式의 첩으로 들어갔다. 1924년 11월 16일 全南新安군 荷衣島에서 이같은 복잡한 계보속에서 태어난 金大中은 金云式의 서자로 자라면서 국민학교와 木浦상업을 졸업한후 어업을 시작했고 그후 해운업에 종사했다. 복잡한 가정환경속에서 자란 아이들의 심성이 그렇듯이 金도 극히 반항적이고 교활한 성품이 길러졌고 심지어 의부 金云式을 부친으로 여기지도 않았다. 훨씬 후의 일이지만 1960년에는 서자로 국회의원에 출마하는 것이 불리함을 알고 4남매를 거느리고 있는 의부 金云式과 金云式의 본처 金順禮에게 호적상 이혼을 강요한 다음 그의 생모 長여인을 본처로 입적시켜 자신을 金云式의 차남으로 조작해 江原도 麟蹄군 北면 元通리로 분가, 전적했었다. (경향신문 1980년 9월 11일자에서)
이 기사는 당시 계엄 사령부가 신문사측에 제공한 자료에 기반한 것 같다. 전두환 측이 중앙정보부 등 각 정보기관의 인물 자료를 보유하기는 했으나 판단은 유보하는 것이 좋겠다.
김대중은 자신의 가족 관계에 대해 언급한 적이 없는데, 카톨릭 잡지인 월간지 ‘司牧’ 1990년 11월 호에서 누이동생 얘기를 했다.
당신 생애에서 양심에 가장 거리낀 일을 한 것은? 언제, 무엇을? “내 누이동생이 1959년에 죽었는데, 누이동생은 이화여대 다니다가 중도 퇴학하고 오랫동안 심장판막증으로 고생하다가 죽었다. 그 당시 나는 야당을 하면서 선거에 몇 번 실패해서 가산이 탕진되어 누이동생의 치료를 충분히 해 주지 못했다. 그보다도 좀더 누이동생을 따뜻하게 격려하고 보살펴 주었 어야 했는데 그것도 제대로 못 했다. 어떨 때는 귀찮다고 생각한 일도 있었 는데 지금도 가슴이 아프다”
이 누이동생이 누구를 말하는지는 불확실하다.
정치적 격변과 극적인 사건이 자주 일어나는 한국은 외국언론에는 좋은 뉴스원이다. 1979년 박정권과 김영삼의 결전이 전개될 때부터 미국과 일본언론은 한국상황을 자세히 보도했다. 10․26 이후 한국에 대한 취재 경쟁은 더욱 치열해졌다. 한국정황은 매일 일본신문을 장식했다. 일본의 시바다 미노루(紫田穗) 기자는 1980년 한국에 체류하면서 현장을 누볐는데, 그는 김대중의 생애를 샅샅이 취재해 김대중 전기를 펴냈다. 시바다 미노루는 야마사끼 하지메(山崎一)기자, 통역을 맡은 김영희(金英熙) 씨와 더불어 2일 동안 하의도에 머물며 김대중의 출생과 성장 등에 대해 취재했다. 이들은 70대의 村老들에게서 이야기를 들었다. 이 책에서 김대중 출생에 대해 서술한 부분은 다음과 같다.
한국 민주화의 영웅 김대중 씨의 출생지는, 전라남도 신안군 하의면 후광리 97로 되어 있는데, 原籍은 하의면 대리 232로 다르다. 생모는 1911년 3월, 제갈성조 (諸葛成祚)라는 사람과 결혼했지만, 남편이 1920년 12월 병사하자 남편의 친형 (동생이라는 설도 있다)인 諸葛成福과 동거했다고 한다. 그리고 1920년인가 1921년(양설이 있다) 尹昌彦이라는 사람의 세 번째 처(첩)으로 入籍했다. 그런데 1927년 윤창언과도 사별했다. 남편복이 없는 어머니였다. 그후 최초의 남편의 친형, 제갈성복의 원조로 다방을 경영하는 중에 사내아이를 낳았다. 그 아이가 김대중이다. 그러므로 김대중 씨가 윤창언의 아이인지 제갈성복의 아들 인지는 분명하지 않다. 생년월일의 양설이 1년 남짓 차이나는 것도 그간의 복잡한 사정을 증명하는 듯하다. 그러나 어머니는 그 후 金云式이라는 사람과 동거했다. 김운식에게는 본처인 金順禮가 있었기 때문에, 김 씨의 어머니는 여기에서도 첩이었다. 김대중 씨는 그 김운식의 서자로서 입적했다. 김대중 씨가 김 씨 성을 가지게 된 것은 이때 부터라고 생각된다. 김대중 씨는 實父를 몰랐으며, 형제의 맛을 모른다. 생모인 張鹵島가 1920년 (21년의 양설이 있다), 하의도에서 두 번째 첩이 된 남편 윤창언에게는 세 명의 아이가 있었다. 大義, 大賢이라는 두 명의 사내아이와 貞賢이라는 계집아이다. 지금은 모두 50세 전후가 돼 있어 김대중 씨와 그다지 나이 차이는 없다. 그러나 義父가 사망한 1927년은 김대중 씨가 태어나 2,3세 때이므로 물론 배다른 형제를 알 리가 없다. 김대중 씨가 태어난 1924년(25년 설이 있다), 어머니는 김운식의 첩이 되는데, 김운식에게는 4명의 아이가 있었다. 梅月, 大本, 安禮, 用禮 등 네 명으로 지금 모두 50대에서 60대가 돼 있어 김대중 씨와 별로 나이 차는 없다. (시바다 미노루,『김대중의 좌절』산께이 신문, 1982)
이 내용의 진위 확인은 어려울 것이다.
1998년에는 김대중 명예훼손죄로 재판이 여러 차례 벌어졌다.「한길소식」 편집인이었던 孫昌植씨도 재판을 받았다. 1998년 7월 14일 손창식씨는 김대중의 출생과 관련된 진술서를 제출했다.
〈피고인이 金大中 대통령의 姓氏 眞否에 관심을 갖게 된 것은 1971년 대통령 선거 후부터 정가에 설왕설래하던 풍문 때문이 아닙니다. 1980년 5월부터 6개월간 일본 산케이 신문에 시바다 미노루(紫田穗) 논설위원이 연재한 기사와 그가 쓴「김대중의 좌절」이란 책과 1980년 5월 8일 경주 金山大祭에서「윤대중은 물러가라」는 현수막과 유인물이 나부꼈다는 기사를 보고, 당시 金大中씨의 열혈 지지자였던 피고인은 울분과 충정의 일념에서, 그런 음해들에 대해 반박 자료를 만들기 위해 金大中씨 출생에 대해 깊이 探査해왔습니다.
그런데 探査가 계속될수록 金大中씨측이「정치적 모함」이라 일관해온 주장이 한낱 강변인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예를 들어 金大中씨 호적에 드러난 것만 보아도, 張鹵島씨가 金대통령을 庶子로 출생신고하여, 1924년 7월 7일에 접수한 것으로 되어 있습니다(중략).
이 같은 의문들 속에서 피고는 1990년 5월부터 1997년 10월까지 약 8년간, 金大中씨 출생지 하의도를 13회, 그 인근인 안좌도, 진도, 임자도, 비금도 지역을 10회(1회 평균 3박4일) 방문하여 金大中씨를 아는 사람 28명을 만나 대화, 녹음, 촬영 등 자료수집을 해왔습니다(중략).
재판부의 객관적인 조사나 규명작업이 진행된다면 그 동안 피고인이 수집해 둔 자료를 제공하고 기꺼이 고증에 협력할 것입니다. 따라서 별도 제출한 金大中씨의 호적 사본과 관련자들의 호적 사본 등은 증거보존해 원본과 대조 검토해 주시기 바랍니다〉
1998년 8월 17일, 손창식씨는 광주 지방법원 목포 지원에 있는 김대중의 호적 原簿, 전남 신안군 하의면 하의초등학교에 있는 김대중의 학적부, 金云式의 호적 원부, 諸葛成祚의 호적 원부, 諸葛成福의 호적 원부 등에 대해 증거보존 신청을 냈다. 재판부는 이를 8월 25일 기각하고 변론을 종결했다.
증거보존 신청이 기각된 그 다음날인 8월 26일, 손창식씨는 재판부에 변론재개 신청을 하고 김대중의 호적등본 변조 여부를 검증하기 위해서는 자신이 증거보존 신청한 서류들이 있어야 한다고 주장하고 김종필과 전두환을 증인 신청했다.
김종필은「윤대중은 물러가라」는 현수막과 유인물이 나부낀 1980년 5월 8일 경주 金山大祭에서 초헌관으로 참석했기 때문이며, 전두환은『金大中씨는 대통령은 고사하고 자기 성씨나 찾도록 하라』는 발언을 했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증인 신청은 기각되었고 서울지법 형사지부는 1998년 11월 26일 손창식씨에게 징역 1년에 집행유예 2년을 선고했다. 손창식씨는 항고하여 2심에서 광주지법 목포지원 호적계에 보관중인 金云式의 호적원부와 김대중의 외조부 張之淑의 호적 원부, 그리고 諸葛永凡의 호적원부와 除籍 원부의「認證등본 송부촉탁」을 신청했다. 호적원부와 제적원부에는 본인은 물론, 자식들의 출생․결혼․사망 등 변동 사항이 기록되어 있다.「인증등본」이란 법원에 보관중인 김대중 관련 호적등본이 관청에서 인증하는 절차로 발급되었음을 말한다. 재판부는 이 요청을 받아들였다.
1999년 4월 19일 광주지법 목포지원은 항소심 재판부에 사실조회에 대한 회신을 보내「호적 예규 제475조에 의해 폐기되었다」고 통보했다.
손창식씨는 여러 호적 문서 외에 ‘김대중이 김해김씨가 아니다’라고 증언한 주민 28명의 녹취록을 증거로 제출했다. 재판부는 이 녹취록을 증거로 채택하지 않았다. 손창식씨가 다시 요구한 김종필, 전두환에 대한 증인 신청도 기각했다. 손창식씨는 1999년 6월 22일 재판부에 제출한 최후 진술서에서 이렇게 썼다.
〈김대통령의 측근이 현역 국회의원을 세 차례나 피고의 집에 보내, 피고가 가지고 있는 김대통령과 관련된 일체의 호적 원본과 28명의 녹음 테이프를 돌려주고, 한길 소식지 발행인 咸允植 씨를 별도 형사 고발하면 피고의 사건을 취하해 주고 생활과 자리를 보장해 주겠다고 했습니다. 우리 헌법에 검찰이 항소까지 한 사건을 취하할 수 있습니까. 피고가 변호사도 없이 이 어려운 재판을 해 올 수 있었던 것은 우리의 헌법체제와 독립된 사법부, 현명하신 재판부의 명철한 심판을 믿기에 회유와 유혹을 뿌리칠 수 있었습니다〉
서울고등법원 형사 10부는 1999년 7월 13일, 1심 판결을 인정했다.
이런 말들이 맞는지 그른지 판별하려면 DNA 검사가 가장 확실한 방법인데 가능할지 모르겠다. 1995년 미테랑 대통령 사후 프랑스에서는 친자 확인을 위해 프랑스 법원이 무덤을 열라는 판결을 내려 확인한 바 있다.
1971년 대통령 선거 포스터에 나온 김대중의 경력에는 건국대학교 정치외교과 수료라는 구절이 있었다. 대한민국 국회사무처가 1977년 펴낸「歷代 國會議員 總攬」에 나온 김대중의 학력과 경력은 다음과 같다(국회의원의 학력이나 경력은 본인이 제출한 자료를 기초로 해서 기록된다). . 6대국회의원 선거
建國大學校政外科修了. 木浦日報社社長. 第5代民議員. 民主黨宣傳部長. 民衆黨黨務委員. 民主黨宣傳局長. 民衆黨政策審議會議長.
또한 중앙선거관리위원회가 1989년에 간행한「歷代 國會議員 選擧狀況」에 나온 김대중에 대한 사항은 다음과 같다.
5대 국회의원 선거
建國大學校政經科3年中退 民主黨木浦市黨常務委員
6대 국회의원 선거
日本法政大學3年中退
중앙선거관리위원회가 발간한 자료를 보면 3대 국회에서는 입후보한 김대중의 학력 및 경력란에「中卒」로 나온다. 그러나 5대, 6대, 7대 국회에서는「建國大學校 政經科 3年 中退」 또는「建國大學校 政經科 3年 修了」라는 기록이 나온다.
6대 국회의 지역선거구당선자 명부에는「日本 法政大學 3年 中退」라는 기록이 나오고, 지역선거구 후보자별 득표수 일람에서는「建國大學 政經科 修了」라고 기록되어 있어 보는 이가 당혹스럽다.
중앙선거관리위원회에서도 입후보자가 제출한 자료에 따라 학력과 경력을 기록하고 각종 통계를 낸다. 김대중이 건국대학교정외과를 수료했다는 허구의 기록이 남게 된 경위는 어떤 것일까. 여기 나오는 건국대학교는 현재 서울시 광진구에 소재한 건국대학교를 가리키는 것은 아니다. 이 건국대학교의 처음 명칭은 朝鮮政治學館으로 1946년 5월 15일 개교하였으며 1959년에 현재와 같은 이름이 되었다. 1960년 7월 29일 실시된 5대 국회의원 선거에서 김대중과 같이 강원도 인제군에 출마한 朴周成 후보의 학력란에도 政治大(建大)卒이라고 씌어 있어, 독자들은 김대중이 다녔다는 건국대학교가 현재 서울에 있는 同名의 대학이 아님을 알 수 있다.
일제는 1931년 9월 만주를 침략하여 1932년 2월에는 만주 전역을 점령하였다. 청의 마지막 황제인 선통제를 추대하여 만주국이라는 괴뢰국을 건설하였다. 엘리트 관료를 양성하기 위해 국책 대학인 건국대학교가 설립되었다. 이 대학에는 만주족 뿐 아니라, 조선인과 일본인 학생들도 수학하였다. 조선의 고등 보통학교에서도 최상급의 성적이던 학생들이 입학했다. 당시 조선에도 ‘만주 붐’이 불던 시절이라 이 학교의 인기는 매우 높았다. 六堂 崔南善이 교수로 이 대학에 초빙되었고 그의 강의를 들으러 만주로 건너간 학생들도 적지 않았다. 해방 후 국내 대학에서 경제학 및 경제사 강의를 담당한 金三守, 권혁소, 김재진 교수들이 이 대학에서 수학했다. 흔히 만주 건국대라고 부르는 이 대학을 다녔다고 주장하는 이가 해방 후에 적지 않았다. 日帝가 만주에서 물러간 뒤 없어진 이 대학을 실제로 다녔는지 문서로 확인은 불가능했다.
김대중의 자서전에서 이와 관계된 내용을 인용하면 다음과 같다.
목포상고 4학년 때부터 성적이 전과목에 걸쳐 점차 떨어졌다. 그 원인은 두 가지였다. 1, 2학년 때는 늘 반장이었고 다행히 성적도 좋았다. 우등생만 갈 수 있다는 은행에도 취직할 수 있다고 생각했지만 나는 대학진학을 결심했다. 3학년 때 1, 2조는 취직반, 3조는 진학반으로 학교측이 나눠 놓았다. 3학년에 이르러 나는 취직반 반장을 그만두고 진학반으로 간 것은 대학에 가겠다는 뜻을 세웠기 때문이다.
그런데 일본이 일으킨 태평양 전쟁은 일본 스스로가 점점 궁지에 몰리는 상황으로 변했다. 일본에 건너가서 대학에 진학하는 것이 작은 소망이었는데 미해군의 해상봉쇄로 사실상 갈 수 없게 되었다. 가기 위해선 목숨을 걸어야 하고 여행허가를 받아내는 일도 하늘에 별따기만큼이나 어렵던 시절이었다. 만주(현재 중국 동북부) 건국대학은 학비가 무료이기 때문에 그곳도 진학 목표 중 하나였다. 그런데 1943년 ‘학도지원병’제도가 강행되더니 이어 태평양 전쟁 막바지에 이르자 1944년 징집제도가 바뀌어 패전할 때까지 약 20만 명이 강제 징집된 것이다. ‘어차피 군대엘 가야하는데 대학 진학도 못하는 공부에 죽자살자 매달릴 필요가 무엇인가?’ 나는 점차 자포자기의 심정으로 공부해봤자 소용없다는 생각이 든 것이다. 그것은 성적이 떨어진 첫째 이유였다.
또 하나는 사상적인 이유였다. 그때부터 많은 독서와 견문을 쌓는 동안에 점점 시야가 넓어졌다. 목포상고 선배가 가까이 접근해 들려준 일본 사정 이야기에 영향을 받은 것 같다. 나중에 들었는데 그 선배(편집자 주 : 나중에 간첩으로 사형당한 정태묵을 말하는 것 같다)는 공산당과 관계가 있었으며 나를 끌어들이려 했다는 것이다. 하지만 나는 군대 생각 때문에 그런 운동에는 전혀 관심이 없었다.…
일본의 전쟁상황은 갈수록 악화되어 갔고, 1944년 봄에 목포상고를 졸업할 예정이었지만 우리는 모두 그 전 해인 1943년 가을에 앞당겨 졸업하게 되었다. 이는 전시특별조치였고, 일본인 학생들도 마찬가지였다.
목포상고를 졸업한 뒤 나는 얼마 되지 않아 일본인이 경영하는 해운회사에 입사했다. 만주의 건국대학에 진학할 예정이었으나, 일제의 징용을 피하기 위해 대학 진학을 포기하고 일본인이 경영하는 회사에 취직한 것이다. 전쟁종반이라서 어디서나 일손이 부족해 취직이 쉬웠다. (김대중 자서전, 도서 출판 인동, 1999, P36~38)
1985년 5월호「신동아」에는 「김대중과 김영삼」이라는 기사가 실렸다. 여기에 이런 대목이 있다.
그는 국민학교 4학년 때 하의도에서 木浦 北橋국민학교로 전학했고 13세 때 목포상업학교에 1등으로 합격할 정도의 수재였다. 당시의 동창인 林鍾基의원(전 민한당 원내총무)은 그가 줄곧 우등을 했고 작문과 역사 성적이 뛰어났으며 웅변에 소질이 있었다고 전한다. 그후 그의 학력과 청년시절에 대해서는 구구한 억측이 많다. 그의 학력을 훑어보면 滿洲의 建國大중퇴 경희대대학원 고려대경영대학원 수료로 되어있다. 그는『정규대학교육을 받을 기회가 없었으나 면학에 힘썼다』고 회고한다.
목포상업학교를 졸업한 김씨의 꿈은 만주건국대학에 진학하는 것이었다. 43년 그는 서울로 올라와서 시험을 치른 결과 물론 합격했으나 징집될 연령이라서 입학을 포기하고 곧 일본인 상선 회사에 취직, 경리담당사원으로 일했다. 그가 숫자에 밝아 경제정책비판이나 정책수립에 일가견을 갖게 된 바탕도 이때 닦아졌던 듯하다. 그러다가 20세 때 8․15 해방을 맞았다.
그는 해방을 맞아 쫓겨간 일인 회사의 관리위원으로 선임되는 등 약관 20세에 경영진이 되었고 이재에 밝아 한때 상당한 재산을 모았다.
김대중 추종자의 책에도 같은 내용이 있다.
상업학교를 졸업한 젊은이는 그의 장래의 나아갈 길에 관해서 하나의 선택을 하지 않으면 안 되었다. 하나는 전문학교에서 대학에 진학하는 길이요, 다른 하나는 직업전선에 뛰어드는 일이었다. 그는 만주건국대학에 응시, 합격한 바 있었으나, 그러나 이 젊은이는 25년 생이었으니 명년에는 이른바 징병 제1기생이었으므로 ‘대일본제국의 군인’이 되기 위해 출정하지 않으면 안 되는 것이었다. 무슨 수를 쓰든지 군대는 나가지 않아야 되겠는데, 이 대학은 징병을 연기해 주는 것도 아니었다. 그래서 그는 한 직업을 택하기로 한 것인데, 일본 사람이 경영하는 목포상선(商船) 주식회사의 경리과 사원으로 취직을 했다. 특히 이 회사를 택한 이유는 이른바 국책(國策)회사였기 때문에 징병이 보류되었던 것이다. 김대중씨는 이 회사에서 2년 남짓을 근무한다. (김형문,『金大中, 그는 누구인가』서울: 금문당, 1987, P45~46)
김형문의 책,「신동아」기사의 공통점은 만주 건국 대학교에 합격은 했는데 대학교 가보아야 군대에 징집되기 때문에 진학을 포기했다는 것이다. 당시 일제는 대학생에게 징병 연기의 특혜를 주었으나 전황이 불리해진 1944년에 철회했다.
김대중은 그 이전인 1943년에 대학생도 징병될 것으로 예견하고 지레 대학 진학을 포기한 것인가. 일제는 언론을 엄격하게 통제하면서 계속 승전하고 있다는 허위보도를 하고 있었기 때문에 국내에서 전황을 제대로 알고 있던 한국인은 거의 없었다. 김대중의 글을 보더라도 일본이 전쟁에 지고 있다는 현실을 몰랐다.
나는 상업학교 5학년 때부터 반일적인 사상이 싹트기 시작했는데, 이 때문에 일본인의 지배적인 행위에 대해서는 사사건건 반항적인 태도를 취하게 되었다. 나는 그때까지 학교 성적이 우수해 언제나 1, 2 등을 다투면서 급장(오늘날은 반장)을 했었는데 “사상이 불온하다”는 이유로 박해를 받기 시작했다. 한번 딱지가 붙자 이렇다 할만한 까닭도 없이 교사나 상급학생들로부터 노상 심한 제재를 받았던 기억이 난다.
1945년 8월 15일 이날은 우리나라가 해방된 날이다. 나는 아침부터 집에서 라디오에 귀를 기울이며 낮 열두 시에 있기로 된 일본 천황의 소위 조칙(詔勅) 방송을 기다렸다. 나는 그때 군대에 들어가기 위해 집에서 대기하고 있었는데, 설마하니 일본의 패전을 알리는 방송일 줄은 꿈에도 생각지 못했다. 많은 일본인들과 마찬가지로 나도 전쟁에 대한 새로운 결의 표명을 하는 것으로 생각하고 있었다.
(김대중,『행동하는 양심으로』서울: 금문당출판사, 1985, P44)
목포상선 주식회사가 실제로 일제의 국책회사였는지는 그만 두고라도 국책 대학 재학생들의 징병이 보류가 안 되는데 국책 회사원의 징병이 보류될 수 있었을까. 일제 말기 조선 젊은이들은 모두 징병을 피하고 싶어 했다. 목포상선 주식회사에 취업하면 징병이 연기된다면 입사 경쟁이 치열했을 것이다. 그러나 김대중 스스로 취업이 쉬웠다고 밝힌다. 김형문에 따르면 김대중과 김대의(金大義)의 장인 둘 만이 정식사원이었다고 한다. 김대중은 이러한 징병 연기 방법을 경쟁률이 높아질 것을 우려하여 목포상고 동기들에게는 알리지 않고 혼자서만 입사한 것인가. 목포상고 동기들에게 알렸는데도 목포상선 주식회사에 입사하지 않았다면 이들은 아마도 황국사관에 물들어 모두 징병을 마다하지 않았던 것이라고 할 수 있다.
김대중 자서전에는 만주 건국대 진학을 목표로 했다고 만 할 뿐 입학시험을 쳤다거나 합격했다는 말은 없다. 상업학교를 다니던 김대중이 만주 건국대 입학시험을 쳤다는 것 자체가 있을 수 없는 일이다. 당시 만주 건국대는 인문계인 고등보통학교 학생들만 응시 가능했다. 이 대학의 선발은 까다로워서, 실업계 학교를 제외한 고등보통학교의 재학생 중 학교장의 추천을 받은 최상급 성적의 학생만 입학시험을 치게 했다.
만주 건국대는 엘리트 관료를 양성하는 곳이므로 왜정 시대에는 출세의 보증수표로 여겨졌다. 합격자가 나오면 학교나 마을에 플래카드가 걸렸다고 한다. 김대중은 왜정 시대에 한 자리 하는 것이 소원이었던 모양이다.
또 하나의 가능성은 한국 전쟁 중에 부산에 있었던 건국 대학이다. 김대중의 고향 친구인 김진하 씨는 김대중이 건국대학교를 다녔다고 하는 설에 대해 “만주 건국대학에는 내가 다녔다. 김대중 씨가 건국대학교를 다녔다고 하는 것은 나의 학력을 이용한 것이거나 그렇지 않을 경우 한국전쟁 때 부산으로 피난가서 생긴 부산 건국 대학일 수도 있다”고 말한 적이 있다.
김대중은 1987년 10월 30일 관훈 클럽 초청 토론회에서 다음과 같이 해명했다.
나는 학력이 법정대학 나왔다는 말 한 적도 없고 만주 건국대학 나왔다 한 일도 없습니다. 다만 부산 있을 때 거기에 건국대학이란 게 있어 가지고 나중에 동아 대학으로 합병했습니다. 거기에 내가 3학년으로 편입한 일이 있습니다. 그리고 나는 경희대 경영 대학원을 나왔고 경희대 대학원에서 석사 과정을 마쳤습니다. 다만 대학을 정식졸업 안했기 때문에 석사 학위는 받지 못했습니다.
이 해명에도 의문점이 있다.
1) 대졸일 경우에나 타 대학에 3학년 편입이 가능한 것이 상식인데 그때는 고졸이면 대학 3학년 편입이 가능했는가. 김대중이 부산에 있었다는 건국대학에 대졸이라 속이고 편입한 것인가. 2) 김대중은 편입한 일이 있다고만 말했지 그 이후는 언급하지 않았다. 졸업하지 않은 것이 확실한데, 이 경우 학력란에 3학년 수료라고 쓸 수가 있는지 모르겠다. 3) 건국대학이 동아대학에 흡수되었으면 동아 대학 수료라고 하는 것이 상식인데 굳이 없 어진 대학 이름을 쓰는 이유는 무엇인가.
1970년 9월 29일자 동아일보는 김대중의 신민당 대통령 후보 지명을 1면 머리기사로 보도하면서 김대중의 약력을 다음과 같이 실었다.
金大中씨 略歷 (만四五세全南新安출신) ▲木浦商高졸업 ▲만주建國大三年中退 ▲興業海運사장 ▲木浦日報사장 ▲韓國웅변협회부회장 ▲新世界誌주간 ▲民主黨中央상무위원 ▲民主黨노농부장 ▲民主黨인제郡黨委員長 ▲民權수호연맹선전부장 ▲民主黨선전기획부장 ▲五,六,七代 국회의원 ▲民衆黨대변인 ▲新民黨黨務委員
1970년 9월 18일 김대중이 지은「내가 걷는 70년대」가 발간되었다. 이 책에는 저자 약력이 다음과 같이 나온다.
◀ 著者略歷 ▶ ■ 高麗大學校 經營大學院修學 ■ 慶熙大學校 産業經營大學院修了 ■ 慶熙大學校 大學院 經濟學科修了(碩士課程) ■ 海運業自營10年 ■ 木浦日報社 社長 ■ 韓國勞動問題硏究所 主幹 ■ 民主黨 代辯人(執權當時) ■ 民主․民衆․新民黨 代辯人(5․16以後) ■ 民衆黨 政策審議會 議長 ■ 5․6․7대 國會議員 ■ 新民黨 政務委員(現在)
1993년 발간된「후광김대중대전집」에 나오는 김대중 연보에서 이에 관계된 부분은 다음과 같다.
1948. 목포일보 사장 4.19 김구․김규식 방북, 남북대표자 회의 8.15 대한민국 정부 수립 8.25 북한 총선거 실시, 김일성 수상 선출 10.20 여순․반란 사건 1949 건국대 정치학과에 입학했으나 이듬해 전쟁으로 학업 중단 5.20 남로당 국회 프락치 사건 6.25 김구 피살 10. 1 중공정권 성립
이 기록도 많은 의혹을 불러일으킨다. 여기 나오는 건국대는 어디에 있는 것인가? 상식적으로 목포에 가까운 데 있어야 한다. 김대중의 관훈클럽 토론 발언을 믿는다면 부산에 소재한 대학인데 목포에서 사업하는 김대중이 교통이 불편한 그때에 먼 부산까지 가서 편입하는가. 출석은 어떻게 하는지. 김대중 말에 따르면 부산에 있을 때 다녔다고 하는데 김대중이 사업 때문에 부산으로 간 것은『나의 삶 나의 길』에서 밝혔듯이 1951년이지 1949년이 아니다.
건국대 수료 얘기는 빼놓고라도 국회사무처와 중앙선거관리위원회에서 발간한 책자에서 일본 법정대학 3년 중퇴라는 경력이 실린 경위는 무엇일까(김대중은 1945년 을유 광복 이전에는 만주에도 일본에도 가본 적이 없다). 아마도 다음 3가지 이유 중 하나로 유추할 수 있겠다.
1. 김대중이 학력을 날조했다. 2. 김대중 비서들이 잘못 알고 선거관리위원회에 경력을 잘못 전달했다. 3. 중앙선거관리위원회가 김대중이 학력을 위조했다고 모략하기 위해 허위 사실을 기록했다.
중앙선거관리위원회에 문의해본 결과 선거관리 위원회는 국회의원 후보들이 제출하는 경 력, 학력자료로 책을 낸다고 한다. 사실 확인은 하지 않는다고 한다. 복지부동한다는 평을 받는 공무원들이 수고스럽게 그 많은 후보들의 경력에 대해 사실 확인을 할 리가 있겠는가. 더구나 후보들은 범죄 피의자도 아니다.
김대중 측의 주장에 따르면 역대정권은 김대중에 대해 헤아릴 수 없이 많은 모략을 했다고 한다. 이 말을 믿으면 3의 가능성도 배제할 수 없겠다.
김대중은 시국 강연회 명목으로 일찌감치 선거 운동을 시작했다. 첫 유세는 1970년 10월 24일 대전 유세였다. 다음은 1970년 11월 14일 효창 운동장에서 가진 선거 유세의 일부이다. 박 정권을 극렬 비난하고 있다.
가장 존경하고 사랑하는 서울 시민 여러분! 그 동안 여러분께서는 얼마나 괴롭고, 서럽고, 절망의 세월을 보내셨습니까? 그러나 여러분? 이제 이 나라에서 10년 동안 한줌도 못 되는 소수가 우리 국민을 지배하고 우리 국민의 행복을 수탈해서 자기들만의 부귀영화를 누리던 ‘소수의 시대’는 지나가고 이제 절대 다수의 국민대중이 이 나라를 지배하고 이 나라에서 행복을 향유할 수 있는 희망에 찬 ‘국민대중의 시대’가 오고 있는 것입니다.…
하물며 박 정권 10년 동안 이 나라는 독재와 부패와 몇 사람만이 잘사는 특권경제의 길을 달려왔습니다.…
나는 정권을 잡으면 대중경제를 실시해서 이 나라 국민이 경제의 혜택을 고르게 보도록 하겠습니다. 나는 박정희 대통령이 약간의 경제건설을 한 사실은 인정합니다. 그러나 그 결과는 지금 참담한 실패로 돌아가고 있습니다.
여러분! 경제건설의 목적이 어디에 있는 것입니까?
경제건설의 목적은 높은 빌딩에 있는 것도 아니고, 고속도로에 있는 것도 아닙니다. 경제건설의 목적은 국민 모두가 잘 사는데 있는 것입니다. 그런데 박 정권은 건설만 하면 잘 산다고 국민들을 속이고 국민에게서 엄청난 세금을 뜯어간 결과가 오늘날 박 정권의 권력 지도자 일부나 박 정권에 아부한 특권 경제층 이외에는 이 나라에 잘 사는 사람이 없게 되고 만 것입니다.…
여러분! 나는 오늘 신문에 이런 것을 발표했습니다. “내가 대통령이 되면 이 나라의 모든 부정은 나 혼자 책임진다. 부정의 책임은 누구에게도 맡길 수 없이 대통령이 책임진다.” 고 말했습니다.
내가 대통령이 되면 어떻게 부정을 제거할 것인가. 그 길은 간단합니다. 그것은 윗물이 맑아야 아랫물이 맑다는 이론에 부합하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내가 대통령이 되면 전국의 공무원에게 친서를 보내 “내가 부패를 하면 여러분도 부패를 해라. 내가 부패를 안 하면 여러분도 하지 말라. 내가 부패를 하면서 당신들 보고 하지 말라고 하면 내 말을 듣지 말라. 그 대신 내가 부패를 안 함에도 불구하고 너희들이 부패를 하면 그 때는 용서없이 처단하겠다.” 고 분명히 말해 두겠습니다.(환호성과 박수)
여러분! 내가 오늘 효창공원에서 서울시민에게 공약합니다. 명년에 정권 교체가 되어서 이 사람이 대통령이 되었을 때 여러분은 내가 또 부패를 하거나 부패를 막지 못할 때는 이 효창공원에 다시 이와 같이 모여서 김대중 대통령을 규탄하고 청와대 앞에 몰려 와서 나의 하야를 요구하더라도 나는 이것을 쾌히 감수하겠다는 것을 여러분 앞에 맹세합니다.(환호성과 박수)
내가 정권 잡으면 이 나라에서는 정직하고 부지런하고 착한 자 이외에는 성공하지 못할 것입니다. 재주 부리고 거짓말하고 잔꾀를 부린 자들은 자연히 도태되고 말 것입니다.…
김대중은 자신이 집권하지 못 하면 국민들에게 큰 불행이 올 것처럼 떠들기도 했다.
명년에 여러분이, 우리가 주인된 심정으로 이 나라가 망해서 김일성이 앞에서 우리의 수많은 국민과 재산이 학살당하고 파괴되는 것을 원치 않거든, 여러분의 사랑하는 자식과 후손들에게 이 어둡고 괴로운 불행의 세월을 다시 되풀이하는 것을 원치 않거든 우리 이겨야겠습니다.…
여러분! 나는 정말로 행복한 사람이라고 생각하고 있습니다. 국민을 위해서 일평생을 바친 우리 야당 지도자인 70노객 유진산 선생이 나를 이렇게 도와주고 있고, 또 나와 같이 경합을 하여 1차에는 나를 이기고 2차에는 근소한 차로 패배한 김영삼 의원에게도 그러한 자기의 괴로움을 무릅쓰고 전국을 같이 누비면서 이 사람을 도와주는 그 훌륭한 자세에 대해서 감사를 드리지 않을 수 없습니다.(일제히 박수)
또한 비록 나이는 거의 같은 세대일망정 정치적으로는 선배인 이철승 의원께서 나를 위해 성심과 총력으로 도와주고 있는 이 은혜는 잊을 수가 없습니다. 나는 여러분에 대해서 대단히 외람되고 황송한 이야기지만 이 세 어른을 격려하는 의미에서 박수를 보내 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일제히 환호와 박수)
여러분! 앞으로 이철승․김영삼 두 분의, 연설을 끝까지 경청해 주시기 바라면서, 여러분의 가정에 만복이 있으시기를 빌며, 우리가 다 같이 이 나라의 민주주의의 소생을 위해서 마음으로 하느님께 기도드리면서 저의 말씀을 그치겠습니다. 감사합니다. (환호와 박수)
김대중의 시국강연회를 빙자한 사전 선거 운동은 고질병이 되었다. 1980년에도 1987년에도, 그 이후에도 변함없었다. 정부 당국이 고발하거나 중앙선거관리위원회가 경고해도 아무 소용이 없었다. 오히려 야당 탄압으로 몰아붙이는 바람에 역대 정권이 손을 놓았다.
상당수 한국인의 정신세계를 지배하는 주요 요소는 ‘피해자 의식’이다. ‘있는 놈’ ‘가진 놈’ ‘특권층’ ‘주류 세력’ ‘학벌주의’ ‘지연’ ‘혈연’ 등등 때문에 차별 대우를 받아 인생이 잘 안 풀렸다는 것이다. 이러한 피해자 의식은 실제로 피해를 입어 생기기도 하고 다른 이유로 생기기도 한다.
한국 사회에서 정도는 다르지만 대부분의 사람이 자기 합리화 의식의 타락한 형태인 ‘피해자 의식’을 가지고 있다. 객관적으로 보아 정말로 피해를 입었는지는 몰라도 이러한 의식을 가지면 보상 심리 때문에 일종의 면죄 의식을 갖기 쉽다. 면죄 의식을 가지면 ‘세상의 부정’이나 상대방의 부정에는 민감하게 반응하나 자신에 대한 성찰은 하지 않으며 자신의 부정은 정당화한다. 세상은 부패해도 자신은 독야청청하다는 인식을 갖게 된다.
‘피해자 의식’ 은 보상 심리 때문에 일종의 ‘특권 의식’ 형태로 발현되기도 한다. 이제까지 부당한 대우를 받았으니 남보다 우월한 대우를 받아야 한다는 생각으로 특혜를 당연시하게 되며 부정한 방법에 의한 사리 추구마저 합리화 한다. 그러므로 정도가 심해 ‘피해자 의식’으로 뭉쳐진 자들은 결국은 ‘파렴치하다’ ‘이중 잣대를 가졌다’ ‘인격 파탄자’ 식의 평가를 받게 된다.
‘야망’을 가진 자들이 넘쳐나는 한국 사회에서는 ‘피해자 의식’은 떨치기 힘든 유혹이다. 어느 사회이건 인간의 욕망을 충족시키는 재화와 용역은 유한하므로 야망을 가진 자들의 대부분이 좌절하게 되는 것은 당연한 일이다. 이러할 때 ‘피해자 의식’을 가지면 인생이 덜 괴롭다. 자신의 실패를 ‘능력 부족’이 아닌 ‘잘못된 사회’ ‘부패한 기득권층’ ‘썩은 세상’ 탓으로 돌릴 수 있으니 말이다.
구박 많이 받은 며느리가 시어미가 되어 한술 더 뜬다거나, 가정 폭력을 휘두르는 부모 밑에서 자란 자녀들이 부모가 되어 자식을 그 이상으로 가해하는 일이 드물지 않듯이 세상에는 피해자가 자신에 피해를 준 가해자에 복수하는 경우보다 애꿎은 사람에 대한 가해자로 변하는 경우가 많다. 개인적 차원이 아니라 집단적 차원에서도 ‘피해자’에서 ‘가해자’로 변하는 예도 드물지 않다. 그러나 가해자가 된 뒤에도 이를 전혀 인식 못하는 경우가 대부분이다. 히틀러에게 박해를 받아 ‘피해자 의식’을 가지게 된 이스라엘은 나치스가 소멸한 지 50년이 지난 지금도 그들이 받은 박해를 전 세계에 선전하기 바쁘다. 20세기에 유태인 못지않게 타 민족에게 가공할 박해를 받은 민족이 적지 않으며 한민족도 그 중에 하나다. 그러나 유태인들은 자신들만이 유일한 박해자인 듯 떠들며 팔레스타인의 테러는 규탄하나 그들이 팔레스타인의 영토를 침탈하고 생존권을 박탈한 지극히 객관적인 사실은 인정하지 않는다. 한국 정치판에서도 이러한 경우를 많이 볼 수 있다.
부정한 일이 발생하면 많은 사람들이 ‘피해자 의식’을 가진다. 그러나 가져서는 안 되는 자들이 가지는 경우가 많다. 대학입시 부정이 일어났을 때 그 때문에 당락이 뒤바뀐 수험생이 분노하는 것은 당연하나 그에 상관없는 낙방자가 피해자라고 떠드는 것은 희비극이다. 예를 들어 어떤 시험에서 100점 만점에 80점이 합격선이었는데 부정으로 90점 받은 한 수험생이 낙방하고 10점 받은 수험생이 대신하여 합격했다 하자. 이때 40점 받아 낙방한 또 다른 수험생이 ‘나는 억울하다’고 생각하고 부정으로 낙방했다고 떠들고 다니면 말이 되는가(이것을 말이 된다고 하는 자들이 적지 않다). 40점 받아 낙방한 수험생이 ‘내가 바로 그 부정의 수혜자가 되었어야 했다’는 생각을 하면 억울할 수도 있겠다. 이러한 심성을 가진 자들은 언제나 ‘나는 억울하다, 피해자다’고 생각하게 된다. 범죄를 저질러 처벌받아도 ‘다른 애는 빠져나갔으니 잡힌 나만 진정 억울한 사람이다’라고 생각한다. ‘피해자’ 아닌 자가 피해자라고 떠드는 일이 한국 사회에는 비일비재하다.
모든 분야에서 공정한 경쟁이 보장되는 사회, 만인에게 균등한 기회가 보장되는 사회가 이상적인 사회일까. 피해자 의식으로 뭉쳐진 자, 능력에 비해 욕망이 과도한 자에게는 매우 바람직하지 못한 사회이다. ‘이상적인 사회’에서 살면 개인이 목적 달성을 못했을 경우, 경쟁에서 졌을 경우 ‘잘못된 세상’ 탓을 할 수 없고 오직 ‘못난 내 탓’을 해야 한다. 잘 나가는 유능한 자를 헐뜯어서 마음의 위안을 얻을 수 없는 사회, 이러한 사회는 그들에게 지옥이다. 이들에게는 아주 부패하거나 상당히 부패한 사회가 오히려 살기에 마음 편할 것이요 빈부격차가 큰 부유한 사회보다는 평등하게 가난한 사회가 더 이상적일 것이다. 이러한 자들이 집권하면 제대로 된 개혁이 이루어질 수가 없고 경제발전도 기대할 수 없는데, 이는 무능한 것도 그 원인이지만 잠재의식 속에서 개혁이 성공하여 깨끗하고 공정한 사회가 되기를 거부하는 것이 더 큰 원인이다. 진정으로 개혁할 의지도 능력도 없는 것이다. 부패가 심한 사회도 살기 힘들지만 지극히 공정한 세상도 마음 고생하기 마련이다.
인간의 속성으로 보아 ‘소수의 천국’이나 ‘다수가 잘 사는 사회’는 존재 가능하나 ‘만인의 천국’은 불가능이다. ‘만인의 천국’을 만들려던 모든 시도는 그것이 진정한 선의에서 비롯되었건 다른 생각에서 나왔던 간에 인간 세상에 크나큰 불행을 가져 왔다.
피해자 의식이 집단적으로 발휘하면 국가의 통합이 어려워진다. 각계각층에서 차별대우 받았다고 아우성치는 소리로 날을 보내게 되는데 유한한 국가 자원으로는 이들 집단을 만족시킬 수 없게 된다. 결국 목소리 크고 억지를 잘 부리는 집단이 정당성 유무에 관계없이 보상을 받게 되는데, 이는 조직화가 덜 되고 목소리를 못 내는 그래서 눈에 띄지 않는 사람들의 희생에 바탕을 둔 것이 된다. 그렇다고 보상받은 집단들이 감사하는 마음을 가지는 것도 아니고 요구가 더 커지는 데 문제가 있다.
한국 사회에서 ‘피해자 의식’은 매우 강력한 이데올로기이다. 해방 이후 대다수 정파의 정치 선전이나 의식화 교육은 ‘피해자 의식’을 대중에게 심어주는 것이었다. 한국 ‘민주화 세력’의 의식을 지배하는 것도 민주주의나 진보주의보다는 ‘피해자 의식’이다. 세상 모든 일을 ‘내 탓이오’ 하는 것이나 ‘남 탓이오’하는 것은 공정한 일이 아니지만 균형 잡힌 사고가 설 땅을 찾기 힘든 한국 사회에서는 양극단에서 헤매기 쉽다(대부분 부정적인 유산만 물려받은 박 정권이 일본 제국주의 탓이나 이승만 정권 탓을 하지 않은 것은, ‘안되면 조상 탓’ 하기 잘하는 한국 풍토에서는 매우 특이한 일이었다. ‘하면 된다’는 의식을 국민에게 심어주려 애쓰던 박정희 씨가 '피해자 의식'을 심어주면서 유권자를 선동하던 야당을 경멸한 것은 당연한 일이었다).
피해자 의식을 가진 자들이 집권하게 되면 국정운영의 실패를 늘 ‘무엇 때문에’ 식으로 변명하게 되고 부정부패가 드러나면 ‘지난 정권보다는 덜 하다’ 식으로 대응하게 된다. ‘수구 보수 정권’하에서 부당한 대우를 받았으니 ‘진보 개혁 정권’하에서 보상받아야겠다는 심리로 저지를 부정부패는 상상을 초월할 것이다.
김대중의 언행을 보면 그 객관성 여부를 떠나 투철한 ‘피해자 의식’을 가졌음을 알 수 있다. 선거에 지면 ‘부정선거’요 교통사고가 나면 ‘정권의 살해 음모’로 떠드는 것은 너무도 당연하다.
미 국무성에는 정보 조사국(BIR : Bureau of Intelligence and Research)이란 정보 기구가 있다. 세계 각국에 있는 대사관 등 해외 공관을 통해 각 나라의 유력 인사들에 대한 자료를 수집 분석도 한다. 이중에는 ‘잠재적 지도자 신상명세 보고 프로그램(PLBRP : Potential Leader Biographic Reporting Program)’이란 것이 있다.
김대중에 대한 ‘자료 파일’은 1960년부터 작성되었다. 박 정권은 월남전에 대규모 병력을 파견하여 미국에 대한 발언권이 커진 상태였고 미국 정부로서도 한국의 군사 전략적 가치 때문에 1971년 대통령 선거에 대해 지대한 관심을 가지고 있었다. 미국 국무성 관리들은 선거 실시 1년여 전부터 선거 결과를 예측하기 위해 정보 수집에 열중하고 있었다.
1970년 12월 27일 윌리엄 포터 주한 미 대사가 국무성에 보낸 ‘김대중 경력’ 보고서에는 다음과 같은 부분이 있다.
선거에서의 잠재 취약점
a. 초기 좌익 연루 : 김대중은 1945년 해방 직후 좌파 정치에 연루됐음. 그러나 자세한 부분에서는 언론마다 보도 내용이 다름. 한 보고서에 의하면 김대중은 1940년대 후반, 한때 친공산주의자들이었던 멤버들이 조직한 보도연맹을 위해 반공 연설을 한 바 있음. 이 점을 볼 때 김대중은 초기 한때 좌파에 기울었다는 것을 확인할 수 있으나 동시에 반공산주의로 빨리 넘어왔다는 사실도 알려줌.
10일전 김대중은 우리 대사관 관리에게 자신의 초기 활동에 대해 말해준 바 있음. 이에 따르면 해방 후 그는 약 6개월간 좌익 신민당에 관계했으나 내부 공산주의자들의 세력에 반대해 당을 떠났음. 김은 또 자신이 1946년 10월 목포 파출소 습격 사건에 가담했던 것으로 비난을 받았으나, 그 사건이 일어나던 날 그는 장남을 출산하는 처 옆에 같이 있었다고 주장했음.
김은 또 우리 대사관 관리에게 말하기를, 1950년 목포가 공산주의 점령하에 있을 때 공산당에 의해 감금되어 사형선고를 받았다고 했음. 그는 공산당 패주로 구출됐음. 미 육군 정보 참모부가 한국 정보계통 관리의 말을 인용한 바에 따르면, 한국 정보계통 인사들 사이에서 이 이야기는 일반적으로 틀림없는 것으로 받아들여지고 있음.
상황을 종합해볼 때, 초기에 좌익에 기울었다는 주장은 대통령 선거 운동에서 김대중에게 잠재적인 위해가 될 가능성이 있음. 그러나 최소한 박 대통령도 똑같은 약점이 있기 때문에 민주 공화당이 이 문제를 공개적으로 부각시킬 것 같지는 않음.
b. 병역 미필 문제 : 김대중의 출생신고서에 따르면 한국전 발발시 24세였으나 한국군에 징집되지 않았음. 김대중은 대사관 관리에게 말하기를 자신은 단순히 소집되지 않았을 뿐이며, 따라서 징집 기피였다고 할 수는 없다고 함. 그러나 당시 부유층이나 유지급 가족의 자제가 병역면제를 받는 것은 흔한 일이었으며, 이를 반증하지 못할 경우 국민들은 군 복무를 하지 않은 것으로 간주할 것임.
신민당의 대통령 후보로 선출된 직후 김대중의 참모들이 준비한 김대중의 이력에 따르면, 김대중은 1950년 10월에는 ‘공민 해안경비대 전남 지부 부사령관’으로 되어 있음. 조사에 의하면 공민 해안경비대는 지역방위와 해안 경비를 임무로 하는 비공식적인 자원 단체임.
c. 수입원과 정치자금 : 한 가지 아리송한 점은 김대중이 지금까지 박정희 정권으로부터 과연 재정 지원을 받았느냐는 것인데, 대부분이 그런 것으로 받아들이고 있긴 하지만, 만약 돈을 받았다면 왜 재정 지원을 했고 그 액수가 얼마냐 하는 점임. 한 정보요원은 박 정권 초기인 1964년에는 김대중에게 돈을 지원했다고 언급한 바 있음. 최근 들어서는 김대중이 박 정권으로부터 돈을 받은 최대의 수혜자 가운데 한 명인 것으로 대부분의 사람들이 인식하고 있음. 김이 박 정권으로부터 최소한 최근까지 돈을 받았을 가능성과 관련, 정치자금의 흐름이 정보기관에 의해 철저하게 통제되고 있는 한국 정치풍토에서 ‘깨끗한’ 정치자금은 거의 없으며, 이런 류의 돈 지원은 크게 문제되지 않는다는 점을 고려해야 함.
김대중이 1950년대에 국회 진입에 몇 차례 실패한 후 빚더미에 올라앉았고, 첫째 아내가 자살한 원인이 바로 이 때문이라는 설이 있기도 했지만, 최근 들어서는 재정적으로 안정된 것으로 보이며 풍족한 자금을 가지고 있다는 징후가 보임. 현재 수입원에 대해서는 본 대사관이 파악한 바가 없음. 개인 수입과 관련, 대중 앞에 이를 해명하는 문제에 대해서는 김이 걱정하지 않는 것처럼 보이는데, 선거 유세에서 말하기를, 자신이 당선될 경우 대통령을 포함한 고위공직자의 수입을 공개하겠다는 공약을 한 바 있기 때문임.
박정희 정부의 한 고위 공직자는 최근 사석에서, 김대중이 최근 경제적으로 어려운 회사들을 갈취해 부를 축적한 사실을 선거에서 부각시킬 수 있는 증거를 확보하고 있다고 주장한 바 있음.
김대중이 신민당 대통령 후보로 결정되자 윤보선은 신민당을 탈당하여 1971년 1월 6일 장준하(張俊河)와 더불어 국민당을 창당하고는 박기출(朴己出)을 대통령 후보로 추대했다. 명망 높은 강원룡(姜元龍) 목사는 김영삼, 이철승, 김대중이 신민당 대통령 후보로 출마하여 겨루던 시절에 이들을 다 만나 본 다음 김대중을 지지하기로 결정하였다. 그는 국민당 총재 윤보선을 만나 김대중 지지를 호소했다. 이에 윤보선은 “강 목사는 사람을 몰라도 그렇게 몰라? 김대중이란 사람은 머리털부터 발톱까지 완전히 정치적인 사람이야. 김대중은 믿을 수 없어”라고 하면서 반발하였다. 강원룡은 김대중을 지지해야 이길 수 있다며 윤보선을 설득하였다.
1971년 1월 23일 김대중은 기자회견을 통해 정책의 대강을 선보였다. 김대중은 이날 “만일 이번에 정권교체가 이뤄지지 않는다면 박대통령은 다음 임기 동안에 선거조차 없는 영구집권의 총통적 체제를 저지르고야 말 것”이라고 말했다.
김대중은 자신이 집권하면 총통제 음모의 분쇄, 민족안보의 전개, 예비군의 완전한 폐지, 대중 경제의 실현, 농업혁명의 추진, 부유세의 실현, 전태일 정신의 구현, 여성의 지위향상과 능력 개발 등 국정전반에 걸쳐 많은 공약을 제시하였다.
이틀 뒤인 1월 25일 김대중은 미국과 일본 방문길에 올랐다. 야당 대통령 후보가 선거 이전에 미국과 일본의 정치 지도자들에게 자신의 정책을 설명하고 지지를 호소한 것은 이때가 처음이었다.
1971년 4월 27일 실시된 제7대 대통령선거전에서 박정희 공화당 후보와 김대중 신민당 후보는 격전을 벌였다. 박정희 후보는 권력과 금력을 총동원하였으나 참신성으로 예상외의 바람을 일으킨 김대중에게 고전했다. 국민들은 변화를 바라고 있었던 것이다.
1971년 2월 19일 박정훈 장충준 한광옥 김덕규 조홍규 등 6․3세대 20여명이 신민당에 입당을 했다. 입당식에서 유진산 총재를 비롯하여 김대중 등 중진들이 크게 환영을 했다.
미국에서 귀국한 김대중은 선거유세를 본격적으로 벌여 나갔다. 1970년 10월 24일부터 선거 전날인 4월 26일까지 1만6천3백㎞를 달리며 1백37회의 유세를 했다. 김대중은 수월한 상대가 될 거라는 공화당의 예상을 깨고 의외의 돌풍을 일으켰다.
유진산 총재와 정일형 의원 김영삼 의원도 전국을 누비며 지원 유세를 했다. 유진산은 김대중 지원 유세에 몸을 아끼지 않아 ‘아버지같은 당수, 아들같은 후보’라는 말이 나오기도 했다.
이 선거에서 큰 쟁점의 하나는 경제개발과 부정부패였다. 박 정권은 중단없는 전진을 내세웠고 신민당은 경제개발이라는 이름아래 부정부패가 독버섯처럼 자라고 있다고 했다. 그냥 부정부패라던 얘기가 국민의 눈을 번쩍 뜨이게 한 것은 김대중의 예고였다. 김대중은 4월 18일에 있을 서울 장충단 연설회에서 공화당 정권의 부정축재자, 부정부패자 200명의 명단을 발표할 것이라고 선언했다. 시중에서는 온통 이 문제가 화제였다.
그러나 선거가 끝날 때까지 부정 축재자 명단은 공개되지 않고 넘어갔다. 이를 두고 당시 ‘선거자금 염출과 관련이 있는 것 아니냐’는 추측이 있었다. 공화당 원내총무였던 김택수 의원은 그 내막을 말한 바 있고 그의 친구인 이한두 씨는『유신 공화국』에서 이 내용을 글로 썼다.
그 장충단 유세가 있는 전날 밤 서울 중구 필동에 있는 김대중의 처가 댁에서는 김대중 정권의 모 고위실력인사가 마주 앉아 있었다.
고위실력인사가 먼저 말을 끄집어냈다.
“김 후보가 선거에 승리했다고 합시다. 과연 정권을 인수받을 수 있다고 생각하십니까? 정권을 유지하기 위해서 삼선개헌을 강행해 온 박정권입니다. 박정희 대통령은 이번이 마지막입니다. 헌법상 삼선이니 더 할래야 더 할 수가 없는 것입니다. 박정희 대통령은 이번 선거로써 4년만 더하고 나면 다음 차례는 김 후보가 차지하는 것입니다. 4년 후에 말썽없이 정권을 인수받는 것이 안전하고 순조롭지 않겠소?”
고위 인사는 여기에서 말을 끊고 김대중의 눈치를 살폈다. 김대중의 얼굴 표정이 긍정적이었다. 고위인사는 다시 말을 계속했다. “내일 장충단공원 유세에 김 후보가 부정부패, 부정축재자 200명의 명단을 공개한다고요? 그 사람들은 지금 박 정권에 충성을 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김 후보가 정권을 잡게 되면 그 사람들은 김 후보에게 충성을 하게 될 것입니다. 그 사람들을 적으로 돌려서 뭐 시원하고 좋은 수가 있겠소?”
고위인사의 조리정연한 말에 김대중의 귀는 솔깃하고 수긍하는 기색이었다. 고위인사는 최후의 용건을 끄집어냈다. “여기 박정희 대통령의 저서「민족 지도자의 길」이란 책이 있소. 이 책 속에는 김 후보의 그 동안의 선거 비용이 있소. 내일 장충단공원 유세에서 부정부패, 부정축재자 명단공개를 보류해 주시오.”
고위 인사는 책을 건냈다. 김대중은 책을 받아서 폈다. 책속에는 봉투가 들어 있었다. “좋소.”
김대중은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 말했다. “나도 한가지 요구가 있소.” “말해 보시오!” “박정희 후보가 마지막 서울 유세를 할 때 이렇게 말해 주시오 ‘이번이 나의 대통령 후보의 마지막이오, 다시는 대통령에 입후보하지 않겠습니다.’라고 전 국민 앞에 선언을 해주세요.” “좋소! 그렇게 하리다.”
고위인사의 대답이었다. 고위인사는 일어섰다. 공화당 정권의 고위인사와 김대중은 악수를 나누었다. 두 사람은 마지막 인사말을 했다.
“우리 잘해 봅시다” (이한두 저,『유신 공화국의 몰락』, 매산 출판사, 1986 P45~46)
이 내용의 진위 확인은 가능한지 모르겠다.
김대중은 선거전이 막바지에 이른 4월 18일 서울 장충단공원 유세에서 공원부지와 주변 간선도로를 메운 수십만 군중(외신 70~90만으로 추산)을 향해 열변을 토했다. 우선 박정희씨가 국민에게 군림하는 군주 같은 자세를 취하고 있다고 비난했다.
박정희 씨는 지금 국민에게 봉사하고 심판받는 대통령 입후보가 아니라 국민에 군림하고 국민을 지배하는 군주 같은 자세를 취하고 있습니다. 대통령 선거에 임했음에도 불구하고 전국 유세조차 하지 않고, 도 소재지 몇 군데 밖에 안 가고 있습니다. 국민을 무시하기 때문에 그런 것입니다.
이 비난은 지나쳤다. 박정희 후보가 선거 유세를 열심히 했으면 김대중은 대통령 되는 데 정신이 팔려 국정을 소홀히 하고 있다고 비난했을 것이다.
김대중은 이 자리에서 중앙정보부의 폐지, 지방자치제의 실시, 향토예비군과 교련 폐지 등을 약속했다. 또한 서울 시민들이 안심하고 잘 수 있게 1년 이내에 국방 태세를 완비하겠다고 떠들었다.
여러분! 내가 정권을 잡으면 1년 이내에 서울 550만 서울 시민들이 안심하고 발 뻗고 잘 수 있는 국방태세를 완비할 것입니다. 그것은 첫째로 완전히 국민의 지지를 받는 정부를 수립하여 공산당이 발붙일 데가 없도록 하고, 모든 정보기관들이 공산당 잡는 데 집중해서 간첩이 얼씬도 못해. 국군을 정치적으로 완전 중립시키니까 오직 대공 전투에만 집중하게 돼요.
여러분! “내가 향토예비군을 폐지한다.” 이렇게 말했더니 마치 공화당 사람들이 향토예비군을 폐지하면 내일이라도 김일성이가 서울에 들어올 것같이 말을 해. 이것은 새빨간 거짓말이야. 우리는 향토예비군이 없어도 예비역을 유사시에 10분 내에 동원할 수 있는, 그러한 법과 제도가 있는 것입니다. 향토예비군은 국방에 필요한 것이 아니라, 박정희 씨의 독재체제를 강화하기 위해서 필요한 것입니다, 민주주의에서는 필요 없는 거요.
우리는 이북의 김일성이보다도 배가 많은 현역 군인을 가지고 있는 것입니다. 60만 대군을 가지고 있어요. 미군이 주둔하고 있습니다. 경찰이 있습니다. 향토예비군은 필요가 없는 거요. 취약 지구에는 전투경찰대와 예비사단 기동 타격대가 있으면 됩니다.
내가 향토예비군을 폐지한다고 했더니 전국의 국민들이 호응을 했어요. 이에 공화당이 놀라 자빠져 가지고, 이래서 국방 장관이 협박을 하고, 국회의 문을 닫고, 내가 김일성이한테 손을 든 것처럼 떠들어댔어. 내가 공화당 사람들에게 말했어. “당신네 향토예비군이 그렇게 좋으면 공화당은 하라, 이 말이야. 내가 정권 잡아 가지고, 우리 국방정책에서 향토예비군 필요 없다는데 남의 당 정책에 대하여 공화당이 시비할 게 뭐 있느냐 말요.”
박정희 씨는 엉뚱하게도 무슨 70년대 후반에 가서 신의주까지 고속도로를 놓느니, 금강산에 가서 관광 개발을 한다느니 잠꼬대 같은 소리를 하고 있어요.
아까도 말했지만 국제정세는 지금 급속도로 변하고 있어요. 내가 말한 4대의 한반도 전쟁 억제, 이 안은 내가 지난 번에 미국 갔을 때 험프리 전 미국 대통령 후보 같은 사람, 내 그 설명을 듣고, “당신의 그런 훌륭한 정책을 미국 지도자들이 다 알았으면 한다.” 면서 내 손을 붙잡고, “널리 좀 알려 달라.” 고 부탁했어요. 하버드 대학의 라이샤워 교수나 MIT 대학의 윌리엄 번디 같은 교수가 전폭적으로 지지를 해. 닉슨 대통령도 금년 연두교서에서 “아시아에서의 안전보장은 4대 국가에 달려 있다.” 고 말하고 있어요. 나는 박정희 씨에 대해서 이 자리를 통하여 말하고 싶습니다. “대통령을 하려면 공부 좀 하라.”고. (박수) “국제정세가 어
떻게 돌아가는가, 조그마한 국내정치에만 악용하려 들지 말고, 크게 앞을 내다보고 국가의 운명을 내다보는 대통령학을 공부하라.”고 권고하고 싶어요.
김대중은 부정부패의 모든 책임이 박정희씨에게 있다고 하고 일가친척들이 엄청난 부정축재를 했다고 말했다.
여러분! 나는 오늘 여기서 박 정권의 부정부패에 대해서, 내가 여러분에게 대해서 중대한 얘기를 좀 하고 싶습니다. 요새 지방을 다녀보면 도처에 뭐라고 써 있느냐 하면 ‘중단없는 전진’, 이렇게 해 놓았습니다. 박 정권이 전진한다는 것입니다. 전진은 뭐가 전진입니까? 이 나라에서 민주주의가 후퇴하고, 남북통일이 후퇴하고, 농촌경제가 후퇴하고, 도시 중소기업들의 경제가 후퇴하고, 대기업들이 마구 쓰러지며 후퇴하고, 오직 이 나라에서 중단없이 전진하고 있는 것이 하나 있어. 그것은 오직 부패가 중단없이 전진하고 있어요.
오늘날 박 정권 사람들은 마치 부정부패는 박정희씨는 아무런 책임이 없는 것처럼 얘기를 해요. 나는 나의 경쟁 상대자에 대해서 되도록 그 개인의 인격과 관련된 말은 내가 하고 싶지 않습니다. 다만 내가 참을 수 없는 것은 사실을 감추고 박정희씨는 아무 책임이 없는 것같이 하는 것만은 용서할 수가 없어요.
오늘날 이 나라의 부정부패는 법적으로 정치적으로 박정희씨에게 책임이 있을 뿐 아니라, 사실상으로 책임이 있어요. 여러분! 오늘날 지금 이 나라에서 청와대 비서진의 책임자, 경호실의 책임자, 박정희씨의 처남, 박정희씨의 처조카, 사위, 이런 사람들이 몇 십억, 몇 백억의 부정축재를 했어요. 어째서 박정희 씨에게 책임이 없느냐, 그 말이오.
【박정희씨의 친인척들이 부정축재했는지 그 진위는 그만두고라도 김대중이 떠드는 액수는 상식을 초월한다. 물가 수준을 고려하면 1971년 몇 백억이면 지금은 몇 조에 이르는 금액이 된다. 1971년 국가예산은 대략 4천억 대였고 2000년 예산은 100조가 넘는다. 박정희씨 친족들 중 재벌이 된 사람이 있다는 말은 들어보지 못했다. 이러한 엄청난 모략을 당하고도 박정희 씨는 김대중을 악랄하게 박해만 한 인물로 인식되고 있다. 현대 사회에 와서 정치선전은 진실을 덮는 경우가 매우 많다.】
이렇게 부정부패한 것이 오늘의 현실이야. 지금 이 나라 국민은 어떻습니까? 돈이 없으면 천금 같은 부모가 병들어도 병원 앞에서 죽고, 돈이 없으면 다 큰 자식이 학교도 못 가고, 쌀이 없으면 굶고, 집이 없으면 길거리에서 떨고 있는 실정입니다.
여러분! 윗물이 맑아야 아랫물이 맑습니다. 대통령이 깨끗해야 모든 공무원이 깨끗해요. 나는 내가 정권을 잡으면 내 단독으로 부정부패 일소에 대한 책임을 질 것입니다. 나의 재산을 국민 앞에 공개 등록하고, 부정부패 추방법을 만들고 부정부패 적발 위원회를 전국에 두어 가지고 국민 여러분의 대표가 참석해서 정치와 행정의 부정부패를 적발해야 할 것입니다.
나는 부정부패에 대한 전 책임을 누구에게도 미루지 않고 내가 지는 동시에 국민 여러분이 감시하고, 여러분이 한 번 대통령인 나와 국민 여러분이 손을 잡고 일치 단결해서 부정부패를 뿌리 뽑자는 것을 이 자리에서 제의하는 것입니다.
김대중은 집권할 경우 ‘대중경제체제’를 실시하겠다고 말했다.
내가 정권을 잡으면 대중경제 체제를 실시할 것입니다. 생산면의 자유경제, 분배에 있어서 사회정의를 실천에 옮길 것입니다. 물가를 대폭 내려서 오늘날 독과점업자들이 결탁해 가지고 물가를 올리는 것을 법으로 금지해서 여러분의 물가를 대폭 내리고, 노동자와 사무원이 참여하는 ‘노사공동위원회’를 만들 것이며, 또한 농촌경제의 발전 기초 위에 상업과 공업을 발전시킬 것입니다.
세금정책에 있어서 일대 개혁을 단행하겠습니다. 세금에 있어서 오늘날 돈 많이 벌면 세금 적게 내고, 돈벌이가 적은 중소기업이나 공무원이나 봉급자가 오히려 세금을 많이 냅니다. 노동자가 세금을 많이 부담하는 이러한 현상은 단호히 시정할 것입니다.
김대중은 골프를 규탄했다.
농민들은 땅 한 평이 없는데 30만 평, 40만 평 골프장이 대한민국에 열 개 이상 있어요. 이 골프장 출입하는 사람들, 단단히 입장세 내야 돼요.
김대중은 열띤 환호와 박수가 30 차례나 터지는 가운데 연설을 다음과 같이 끝냈다.
여러분! 4․19는 학생의 혁명이었소. 5․16은 군대가 저질렀어. 이제 오는 4월 27일은 학생도 아니고, 군대도 아니고, 전국민이 협력해서 이 나라 5천년 역사상 처음으로 국민의 손에 의해서 평화적으로 정권을 교체하는 위대한 민주주의 혁명을 이룩하자는 것을 여러분에게 호소하면서, 나와 뜻을 같이하는 여러분이 총궐기하는 의미에서 박수갈채를 보내주시기를 부탁합니다.
여러분! 여러분! 여러분! 감사합니다. 나는 이번 선거에서 기어이 승리할 것입니다. 여러분은 이번 선거에 나와 더불어 승리할 것입니다.
내 연설이 끝나면 내가 가장 사랑하고, 친아우같이 여기고, 또한 우리 나라 민주주의의 위대한 지도자이신 조병옥 박사님의 둘째 자제인, 나의 아우 같은, 친형제 같은, 그리고 훌륭한 청년인 조윤형 의원의 폭탄 같은 말씀이 있을 것입니다. 또한 여러분이 신문을 보셨으면 아시겠지만 우리나라 여성계의 위대한 지도자이며, 가장 인기 높은 인물이요, 유일한 여자 법학 박사인 이태영 선생이 이번에 이화여대 법정대학장 자리를 사임하시고, 여기 민권투쟁의, 정권교체의 대열에 참가해서 오늘 연사로 여기 나와 계십니다.
이 두 분의 말씀을 여러분이 한 분도 자리를 뜨지 않고 끝까지 들어 주시기를 바라면서, 여러분! 7월 1일은 청와대에서 새로운 대통령이 취임식을 올리는 날입니다. 5백50만 서울시민 여러분! 7월 1일에 청와대에서 만납시다.
4월 25일 박 후보는 서울 장충단 공원에서 방어형식으로 연설했다.
야당은 총통제니 뭐니 해서 내가 두 번이고, 세 번이고 언제까지나 집권할 것처럼 허위선전을 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3선 개헌 때 국민투표로 한번만 더 할 수 있도록 여러분이 허락한 것이지 몇 번이고 해도 좋다고 지지한 것은 아닐 것이며, 여러분이 나를 다시 뽑아주면 이 기회가 마지막 정치연설이 될 것입니다…. 나는 그동안 부정부패 문제에 가장 고심했고 이를 뿌리뽑기 위해 온갖 노력을 기울였지만 아직도 부정부패가 있는 것은 사실입니다만 한번만 더 기회를 주면 기어이 뿌리뽑고 물러가겠습니다.
같은 날 김대중은 대구 수성천변에서 열변을 토했다.
이번에 정권교체가 안 되면 이 나라는 영원히 파멸의 길을 걷게 되며, 박정희씨 한사람의 총통제 시대가 옵니다. 나는 그 증거를 가지고 있습니다. 공화당 정권은 외국에 연구원을 파견해서 총통제를 연구했으며 서울시청 앞 구 대한항공 빌딩 8층에 총통제 연구기관이 있습니다.… 나는 그동안 전국을 통해 유세를 해 본 결과 만일 김대중이가 경북에서 지지를 받으면 문제없이 대통령에 당선된다는 것을 알았습니다.
선거일을 5일 앞둔 1971년 4월 22일 미국 국무성의 윌리엄 로저스(William Rogers) 장관과 동아시아-태평양 담당 차관보 마샬 그린(Marshall Green) 등 미국 정부의 고위관리들이 참석한 회의에서 한국 대통령 선거에 대한 토론이 벌어졌다. 이날 기록된 대화 비망록에서는 박정희 후보의 당선을 예측하고 있다.
서울의 주한 미 대사관이 대통령 선거에 대한 일일 보고를 보내오고 있다. 야당의 김대중 후보가 부산에서 60만 명의 청중을 동원하며 정력적인 선거 운동을 하고 있지만 박정희 대통령이 재선될 가능성이 높다.
1971년 4월 27일의 대통령 선거에서 3번째 출마한 박정희 후보와 신민당의 김대중 후보는 접전 끝에 박 후보가 6백34만2천8백28표, 김 후보가 5백39만5천9백표를 얻어 박 후보가 95만 표 차로 승리했다.
1971년 제 8대 대선 지역별 득표 현황
박정희 김대중
서울 80만 5772 119만 8018 부산 38만 5999 30만 2452 경기 68만 7985 69만 6542 강원 50만 2722 32만 5556 충북 31만 2744 22만 2106 충남 55만 6632 46만 1978 전북 30만 8850 53만 5519 전남 76만 5712 48만 800 경북 133만 3051 41만 1116 경남 89만 1119 31만 595 제주 8만 1422 2만 6009
합계 634만 2828 539만 5900
1971년 4월 28일 미 국무성이 헨리 키신저(Henry Kissinger) 대통령 안보담당 특별 보좌관에게 보낸 문서에는 이 선거에 대한 간단한 평이 있다.
제목 : 박정희 한국 대통령에게 보낼 축하 전문.
박에 대한 신임을 확인한 투표였다는 말 외에는 선거의 성격에 대해 언급하지 않음. 야당에서는 부정선거라고 주장하지만, 주한 미 대사관의 보고와 언론 보도에 따르면 차분하고 질서있는 가운데 치러진 상당히 공정한(reasonably fair) 선거였음.
4월 29일 신민당은 ‘4․27 대통령 선거의 진상은 이렇다’라는 제목의 성명서를 발표했다. 이 성명은 이 선거를 “중앙정보부에 의해서 계획되고 지령되고 감독된 완전범죄의 선거였으며, 전 국력을 동원하여 한 개 야당을 때려잡는 소리없는 암살의 선거였다”고 주장했다.
이 선거에서도 김대중은 “박 정권이 나를 죽이려 한다”는 말을 여러 차례 했다. 박정희 대통령은 이에 대해 다음과 같이 회고했다.
하도「죽인다」는 말을 많이 해서 이에 흥분한 金大中 반대자가 혹시라도 위해를 가할까 봐 혼이 났다. 대통령 경호원 반 이상을 金大中씨 보호하는데, 그것도 눈치 못 채게 투입할 정도였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