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오의 연정
원제 : Love in the Afternoon
1957년 미국영화
감독, 각본 : 빌리 와일더
원작 : 클로드 아네
음악 : 프란즈 왁스만
출연; 오드리 헵번, 게리 쿠퍼, 모리스 슈발리에
존 맥가이버, 반 두데, 리제 부르댕
'하오의 연정'은 오드리 헵번과 빌리 와일더가 아주 잘 나가던 시절에 만들어진 영화로
오드리 헵번의 맞춤형 장르라 할 수 있는 로맨틱 코미디 입니다. '로마의 휴일'에 이어
'사브리나'까지 성공한 오드리 헵번은 이후 '전쟁과 평화'라는 대작에 출연했지만
기대에 못 미친 작품이 나왔고, 결국 다시금 '파리의 연인'과 '하오의 연정'이라는
로맨틱 코미디에 계속 출연했습니다. 아직 전성기의 나이를 누릴때 관록있는 남자
배우와 공연하는 로맨틱 코미디 장르가 자신에게 가장 잘 맞는 것이라는 점을
간파한 안전한 출연이지요. 이건 배우로서 오드리 헵번이 '엘리자베스 테일러'나
'소피아 로렌' 등 동시대 라이벌 급 여배우에 비해서 연기의 폭이 매우 한정되어
있다는 한계이기도 합니다.
아무튼 이러한 오드리 헵번의 안전한 선택은 적절했습니다. '하오의 연정'은 여전히
오드리 헵번의 상큼한 매력이 충분히 발산되었고, 거기에 능청스럽고 코믹한 연기의
달인 모리스 슈발리에는 이 영화의 재미를 20% 이상 높여주는데 잘 기여했습니다.
거기에 빌리 와일더의 각본과 연출은 오프닝 5분부터 재미가 넘쳐나고 재치있습니다.
이런 상황이라면 '로마의 휴일'을 능가하는 걸작이 나올 수도 있었겠죠? 꽤 무난한
재미를 준건 사실입니다. 그런데 뭔가 좀 부족하고 아쉬운 느낌입니다. 뭘까요?
탐정으로 등장하는 모리스 슈발리에
첼로공부하는 학생인 오드리 헵번
모리스 슈발리에와 오드리 헵번은
모녀 관계로 좋은 호흡을 보여준다.
50년대라지만 왜 이리 촌스러운 아줌마 머리를 했는지.
숏 커트의 로마의 휴일과 너무 비교가 됨.
이 영화의 헤어 디자이너가 최악인듯.
다들 쉽게 짐작할 수 있지만 게리 쿠퍼의 미스캐스팅 입니다. 이 영화 한 편만 볼
경우 게리 쿠퍼가 얼마나 미스캐스팅인지 누구나 느낄 것입니다. 우선 그는 너무
나이가 많지요. 닳고 닳은 바람둥이 부호를 설정했다고는 해도 너무 낡은 느낌입니다.
거기다 그는 속물 바람둥이를 연기하기에는 너무 믿음직스럽고 정의롭게 생겼습니다.
'하이눈'의 그 진지한 보안관이 전 세계를 누비며 온갖 여자 후리는 멋쟁이 바람둥이
역할로 누가 어울린다고 생각할까요? 일자연기밖에 못하는 게리 쿠퍼의 연기폭을
감안할때 확실히 무리한 캐스팅입니다. 나이든 속물부호를 설정한다면 당연히 이런
연기의 대가인 캐리 그랜트를 출연시켜야 했고, 좀 젊은 부호를 설정한다면 당연히
록 허드슨이 어울리지요. 쉽게 말하면 록 허드슨이 출연한 많은 로맨스 코미디 영화에
찰톤 헤스톤이 대신 출연한 것으로 상상하면 될 것입니다. 캐리 그랜트, 록 허드슨
모두 전형적인 일자연기 배우지만 그들이 가장 잘하는 역할이 코미디 영화에서의
능청스런 주인공이니까요.
이 한 편으로 본다면 그런 미스캐스팅이 보이지만 그런 과정까지는 좀 깊은 사연이
있긴 합니다. 우선 이 영화의 원작은 스위스 출신 작가 클로드 아네의 소설이며 이
원작이 처음 영화화 된 것은 1931년 영국영화였습니다. 원작도 볼 수 없었고, 31년
영국영화도 못봤으니 빌리 와일더 버전이 원작을 어느 정도 각색했는지는 알 수가
없죠. 논점은 그게 아니고 이 영화와 매우 비슷한 내용을 가진 영화가 있는데 그게
바로 게리 쿠퍼가 주연한 '청염 제 8처'라는 영화입니다. 국내에도 개봉된 영화로
제목의 '푸른 수염'이야기는 익히 유명합니다. 프랑스 샤를르 페로의 잔혹동화로
아내를 얻었다가 살해하는 그런 남자의 이야기죠. 그걸 현대판으로 코믹하게 각색해
만든 영화가 1938년작품 '푸른 수염의 8번째 아내'이라는 작품이며 이 영화가 우리나라에
개봉될 때 '청염 제 8처'라는 제목이었습니다. 독일 출신 에른스트 루비치가 감독한
코미디로 게리 쿠퍼와 클로데트 콜베르가 주연이었습니다. 그리고 이 영화의 시나리오를
담당한 인물이 바로 빌리 와일더였습니다.
"당신은 곧 살해될 예정이에요"
19년이 흐르고 빌리 와일더는 굉장히 잘 나가는 감독 겸 시나리오 작가가 되었고, 그는
오드리 헵번을 주연으로 한 로맨틱 코미디 영화를 만들었는데 그게 바로 '하오의 연정'
이었고, 그 원작은 클로드 아네의 소설이었고, 내용은 '청염 제 8처'와 비슷한 것입니다.
그래서인지 '청염 제 8처'의 주연 배우였던 게리 쿠퍼를 그대로 다시 캐스팅한 것으로
보이는데, 젊은 시절 게리 쿠퍼는 로맨틱 코미디 장르에 제법 출연했고, 그중 수작들도
많았습니다. 하지만 56세가 된 그가 캐리 그랜트표 코미디 영화에서 바람둥이 부호를
연기하기에는 확실히 무리입니다.
굳이 '청염 제 8처'때문에 게리 쿠퍼를 억지로 캐스팅할 필요까지는 없었다고 생각한다면
왜 캐리 그랜트가 출연하지 못했을까요? 캐리 그랜트는 당시 스탠리 크레이머 감독의
'자랑과 정열'이라는 장엄한 영화에 출연했습니다. '하오의 연정'과 '자랑과 정열'은
1957년 한달 간격을 두고 공개되었는데 지금 시점에서 보면 두 영화에서 두 배우가
역할을 바꾸어 출연했다면 딱 좋았을 느낌입니다. '자랑과 정열'은 전형적인 게리
쿠퍼 표 영화라고 할 수 있으니까요. 뭐 50대 중견배우로 이룰 것 다 이룬 두 스타가
기존 역할 외에 좀 연기변신을 하는 목적으로 이렇게 서로 바꾸어 출연하는 것도
괜찮을지 모르지만 두 편 다 일급 감독이 연출했고, 쟁쟁한 여배우가 함께 공연했지만
두 배우의 대표작으로 꼽히지 못하고 오히려 두 배우의 이력에서 역대급 미스캐스팅이
된 작품으로 남았지요.
부호이자 희대의 바람둥이로 출연한 게리 쿠퍼,
하지만 역대급 미스캐스팅인듯.
오드리 헵번의 20대 후반을 장식한 영화
사실 오드리 헵번과 캐리 그랜트는 애초부터 로맨틱 코미디의 황금콤비가 될 수
있었고, 만약 그랬다면 두 배우는 영화사에서 가장 잘 맞고 뛰어난 로맨틱 코미디
커플로 기록되었을 것입니다. 오드리 헵번의 '로마의 휴일'부터가 전형적인 캐리
그랜트표 영화였습니다. 아마 캐리 그랜트가 이 영화 캐스팅을 받아들였다면
이후 '사브리나'나 '하오의 연정'은 모두 그의 역할이었을테고 그게 '샤레이드'까지
이어졌겠죠. 그런데 톱 스타 중의 톱 스타인 캐리 그랜트는 '로마의 휴일'에서
초점이 무명인 오드리 헵번에 맞추어지고 자기는 결국 들러리 역할이라는 것을 간파하고
출연을 하지 않았고, 그가 마땅히 했어야 할 '사브리나'에서의 역할도 험프리 보가트가
대신했습니다. 그래도 '로마의 휴일'의 그레고리 펙이나 '사브리나'의 험프리 보가트는
그럭저럭 괜찮았지만 '하오의 연정'의 게리 쿠퍼는 정말 못봐줄 상황이 되었습니다.
캐리 그랜트는 30년대 캐서린 헵번과 좋은 콤비를 이루며 몇 편의 영화에서 환상의
호흡을 보였고, '베이비 길들이기' '멋진 휴일' '필라델피아 이야기'는 모두 걸작이
되었습니다. 영국에서 건너온 배우로 성장기회를 잡았을때 캐서린 헵번이라는
일급 여배우와의 공연은 분명 그의 점프에 많은 도움이 될 수 있었지요. 그런데
정작 대스타가 되고 나서 오드리 헵번 같은 신인 여배우 띄워주는 역할은 거절한
셈입니다. 캐리 그랜트와 오드리 헵번은 1963년 '샤레이드'에서야 비로소 만났는데
오드리 헵번은 이때 전성기를 살짝 지나가던 시기였고, 캐리 그랜트도 은퇴를
몇년 앞둔 시기였습니다. 두 사람이 좀 더 일찍 만나서 여러 영화에서 호흡읆
맞추었다면 캐리 그랜트는 젊었을때는 캐서린 헵번, 중견배우가 되어서는 오드리
헵번 등 '두 헵번'과 함께 많은 걸작을 남긴 배우로 기억될 뻔 했지요.
이게 딱 봐도 모녀지간이지 어디 연인인가?
두 배우의 코믹한 장면
뭐든지 걸치면 패션이 되는 오드리 헵번
아무튼 그러그러해서 어찌되었든 '하오의 연정'에는 하나도 어울리지 않는 게리 쿠퍼가
출연했고, 그는 전 세계를 누비며 많은 여자들을 농락하는 바람둥이이자 엄청난
부호인 플래너건 이라는 인물을 연기합니다. 오드리 헵번이 연기하는 아리안느라는
여주인공은 첼로를 공부하는 학생입니다. 모리스 슈발리에는 아리안느의 아버지이자
클로드 샤바스라는 탐정인데, 어떤 남자가 자기 아내의 외도가 의심스러워서 의뢰한
사건이 바로 그 남자의 아내와 플래너건이 엮인 불륜사건이었습니다. 샤바스로부터
내막을 설명들은 남자는 총을 들고 플래너건을 죽이러 가고 그 사실을 미리 알게 된
아리안느가 재빠르게 한 발 앞서서 플래너건을 만나고 그 덕분에 플래너건은 위기를
모면합니다. 이런 은혜를 입었는데 플래너건의 바람기는 결국 아리안느에게 향하게
되고, 이미 아버지에 의해서 플래너건의 과거를 속속히 알고 있는 아리안느는 자기도
같은 부류의 여자인 것처럼 가장하고 그와 쿨한(사실은 쿨한척 하는) 사랑을 하는
것입니다. 오후에 와서 잠깐 있다가 어김없이 돌아가는 아리안느에게 플래너건은
몸이 달아서 오히려 주도권을 빼앗기게 됩니다.
'하오의 연정'이란 제목은 50-60년대의 구식느낌이 드는데 '오후의 미녀'라는 제목을
써도 괜찮겠죠. '오후의 미녀'라는 제목은 카트린느 느뇌브 주연의 '세브린느'라는
영화의 프랑스 원제이기도 합니다. 내용 때문에 자연스럽게 그 영화가 연상되기도
했습니다.
바람둥이 남자를 골려먹으면서 실제로 사랑에 빠진 처녀가 결국 그의 진실한 사랑을
얻게 되는 신데렐라형 이야기입니다. '사브리나'역시 오드리 헵번 주연의 신데렐라
스토리인데 이런 역할에 잘 어울리는 배우가 오드리 헵번이기도 하지요. 더없이
순수해 보이고 청순해 보이는데 무척 끌리는 사랑스런 여인, 결국 '하오의 연정'은
오드리 헵번의 맞춤형 영화인데 게리 쿠퍼는 그 상대역을 제대로 해내지 못한
셈입니다. 상큼한 오드리 헵번과 노련한 게리 쿠퍼의 조화가 잘 이루어졌어야
하는데.... 역시 '특징없는 것이 특징인 배우'라 불리는 캐리 그랜트의 그 30년간의
똑같은 변함없는 일관되고 폭이 좁은 연기자체도 결코 다른 배우에게는 쉽지 않다는
것을 느끼게 해 줍니다. 캐리 그랜트가 엄청난 연기파는 아닐지언정 아무나 캐리
그랜트가 될 수도 없는 것이지요. 대신 아버지역의 모리스 슈발리에는 정말
최상의 캐스팅이었고, 이 영화가 프랑스 파리를 배경으로 하고 있는데 오드리 헵번
같은 가짜 프랑스인이 아닌 진짜배기 프랑스인의 캐스팅이기도 했지요.
영화는 아주 재미있고 흥미롭게 시작했다가 중반부에 확 늘어지는 느낌이었다가
후반부에 다시 반짝 빛을 발합니다. 중반부 늘어지는 느낌은 게리 쿠퍼와 오드리
헵번의 로맨스가 본격화되면서 부터인데 확실히 게리 쿠퍼의 엇박자 연기때문에
늘어지는 느낌이 듭니다. 그래도 영화 자체는 전형적인 빌리 와일더표, 그리고
오드리 헵번표의 느낌이 풍성한 재미있는 수작입니다. 남자 주인고 캐스팅 하나가
잘못되어서 완벽한 작품이 아닐 뿐이지요. 그리고 오드리 헵번이 무척 어울리는
캐스팅이긴 했지만 이미 '로마의 휴일' '사브리나' '파리의 여인'등에서 봐온 연기를
했기 때문에 신선도도 덜 했을테고. 그래도 오드리 헵번의 맞춤형 영화로서 빌리
와일더 같은 재능있는 감독이 시나리오와 연출을 담당했기에 이정도 영화가 나온
것입니다. 좀 가혹하게 말하면 '게리 쿠퍼' 빼곤 다 만족스러운 영화입니다.
(오드리 헵번의 머리스타일을 담당한 헤어 디자이너도 못마땅하군요. 결국 둘이
문제였군요)
게리 쿠퍼 이야기를 좀 더 하면 그는 30년대에서 40년대 초반까지 확실한 헐리웃
최고의 스타였는데 40년대 중반 이후 주춤해서 인기가 내려가고 흥행배우에서
밀려날 위기에서 '하이눈'의 성공으로 다시 완벽히 부활했고, 이후 '베라크루즈'
'군법회의' '우정있는 설복'에서 호평을 받았습니다. 50대에 제 2의 전성기를
누린 셈인데 이후 '하오의 연정' '서부의 사나이(개봉제는 쿠퍼의 분과 노)'에서
일급 감독들과 작업을 했지만 너무 무리한 캐스팅이었습니다. '서부의 사나이'
에서는 57세였는데 그보다 실제 나이가 더 적은 리 J 콥의 조카로 나왔다는 것도
그렇고. 두 영화가 영화로서의 평가는 좋았지만 게리 쿠퍼가 스타성을 이용해서
다른 배우에게 어울릴 역할을 빼앗은 셈이지요.
'하오의 연정'은 50년대 로맨틱 코미디의 고전으로 출중한 영화입니다. 오드리 헵번
20대 후반기의 이력을 장식하고 있고, 빌리 와일더가 시나리오와 연출 모두에서
재능있는 작가라는 것을 충분히 보여주었습니다. 그의 빼어난 시나리오 덕분에
로맨틱 코미디로는 꽤 긴 130분의 러닝타임이 지루하지가 않았던 것이지요.
다만 특정 1 + 1 때문에(게리 쿠퍼와 헤어 디자이너) 2% 부족한 영화가 된 것이
두고두고 아쉬운 작품입니다.
ps1 : 기회가 있으면 '청염 제 8처'의 리뷰도 올리려고 합니다. 언제 기회가 될지
모르지만.
ps2 : 130분짜리 영화치고는 등장인물이 매우 적은 편입니다. 중요한 인물은 단지
세 명이고 코믹한 감초조연도 1명에 불과하니까요.
ps3 : 오프닝에서 파리의 이곳저곳을 구경시켜 줍니다. 이렇게 눈으로 하는
여행도 즐겁지요.
ps4 : 오드리 헵번이 '로마의 휴일'에서 과감한 숏 커트 머리로 떴고, 그걸 '헵번 스타일'
이라고 부르기까지 했는데 '하오의 연정'에서도 다른 방식의 짧은 머리인데
이 스타일은 지금 기준으로 많이 촌스러워 보입니다. 헤어 디자이너가 최악의
인물인것 같네요.
[출처] 하오의 연정(Love in the Afternoon 57년) 50년대 로맨틱 코미디|작성자 이규웅