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출처: 이안삼카페 원문보기 글쓴이: 이율이
1. 공교육 살리기의 수많은 방안들 우리 교육, 공교육이 죽었다고 한다. 학교가 붕괴되었다고 한다. 어떻게 살릴 것인가? 교원 평가로? 성과급 차등 지급으로? 네이스를 통해서? 일제고사를 통해서? 학교 성적을 공개함으로써? 고교 다양화 프로젝트로? 사교육비 절반으로? 귀족학교를 여러 개 만들어서? 전교조 죽이기로? 대학입학사정관제로? 미래형 교육과정으로 바꿈으로써? 교육인적자원부를 교육과학기술부로 바꿈으로써? 교육감을 직선으로 뽑음으로써? 방과후 학교 운영을 철저히 함으로써? 영어 원어민 교사를 학교마다 배치함으로써? 학원 수강을 10시까지만 하게 함으로써? 이 수많은 방안들이 정답이 아님을 다들 알고 있다. 2. 우리 교육, 누구도 참회하지 않는다 또 하나. 우리 교육이 이 지경이 되었는데 참회하는 사람은 적다. 그 이유는 무엇일까? 이 문제에서 책임지려고 하는 사람이 없기 때문이다. 책임은 ‘우리’의 것이 아니고, ‘나’의 것은 더더욱 아니기 때문이다. 생각해 보자. 우리 교육이 이렇게 된 것을 지금의 시점에서 누구의 탓인가를 한번 따져보자. 노무현 정권, 평준화, 청와대, 이명박 대통령, 교육과학기술부, 교육과학기술부장관, 교육청, 교육감들, 교육 관료들, 전교조, 교총, 뉴라이트, 교장, 무한 경쟁, 대학의 욕망, 대학 입시, 입시 학원의 탐욕, 시장주의, 교사들의 안일무사, 게걸주의··· 우리 교육이 이토록 참혹한 상황인데도 참회하지 않는 이유는 그 책임을 떠넘길 곳이 너무도 많기 때문이다. ‘나’와 ‘우리’가 빠져도 책임을 지울 곳이 너무도 많기 때문이다. 그리하여 그 책임에서 자유로운 사람이 하나도 없으면서도, 책임을 지지 않아도 마음에 짐이 되지 않는 것이다. 우리 모두는 빠져나갈 구멍을 몇 개씩 충분히 가지고 있지 않은가? 3. 민주적인 학교를 위하여 4년 반 동안 교장직에 있으면서 가장 중점을 두었던 것은 <민주적인 학교>를 만들어 보겠다는 것이었다. 한성여중으로 부임하기 전에 근무하던 학교가 억압적인 학교는 아니었지만, 결정적인 상황에서는 교사들의 의견이 무시되었다. 교무실이 말의 무덤이기를 바라는 학교 분위기가 몹시 싫었다. 토론 직원회를 해 보자고 여러 차례 건의를 했지만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한성여중의 교장으로 부임하는 첫날부터 중대한 결단을 내려야 하는 상황을 맞았다. 중학교 1학년이 고등학교 건물을 함께 쓰고 있는데, 고등학교 교장이 교장실로 부르더니, 전번 중학교 교장이 1학년을 중학교 건물로 이전하기로 약속을 했다면서 나보고 추인(追認)하여 확정하고 도장을 찍으라는 것이었다. 아무런 정보를 갖지 못한 입장에서 바로 결정을 한다는 것이 불가능하여 10여 일의 말미를 달라고 해놓고, 다음날부터 학년별로 선생님들의 생각을 모았다. 교실 이전의 긍정적인 면과 부정적인 면이 그대로 드러나면서 선생님들의 의견이 팽팽하게 맞서고 있음도 확인했다. 1주일 정도 다양한 방법으로 상황을 파악해 보니, 1학년 8개 학급의 교실을 중학교 건물로 이전하는 것에는 문제점이 더 많다는 판단이 섰고, 이전을 반대하는 의견이 55% 정도로 찬성보다 많았기에 이전 불가를 결정했다. 이전하기를 원하는 선생님들에게 사전에 양해를 구하고 이전 반대 의견을 고등학교에 통보를 하니, 고등학교에서는 무척 난감하게 생각하였다. 참으로 민망했다. 선생님들의 다수가 반대하기 때문에 어쩔 수 없다고 하니 고등학교는 어이가 없다는 표정이었다. 교실 이전 문제가 마무리된 후 선생님들의 반응은 그리 나쁘지 않았다. 의견 수렴을 충분히 해서 결정을 한 것이므로, 그 결정은 교장 혼자 한 것이 아니었다. 소통의 힘이랄까? 시간과 노력을 기울여 충분히 말하게 하고, 충분히 듣게 하면서 비록 모두가 원하는 결정은 아니었지만, 이 문제에 대해 성숙한 결정을 할 수 있었다. 이어, 학운위 교사위원을 2배수 추천에서 정수 추천으로 규정을 바꾸어 법인의 결재를 받아 놓았고, 학년부장을 학년에서 선출하는 것으로 바꾸었다. 신임교사를 뽑을 때도 인사위원들과 해당 교과에 거의 일임을 하다시피 하였는데, 선생님들은 자기 일처럼 철저히 검증의 단계를 거쳐서 매번 좋은 선생님을 뽑았다. 고마움을 느낄 정도였다. 한 달에 한 번은 토론 직원회를 열었다. 그러나 특별한 사안이 생기면 곧바로 토론 직원회를 예고하여 열기도 했는데, 한 번 시작하면 한 시간으로는 짧은 경우가 많았다. 첫해는 선생님들이 할 말이 쌓였기에 긴 시간이 필요했지만, 해가 갈수록 발언 시간은 점점 짧아졌다. 구성원들 간에 신뢰가 쌓이면서 짧은 발언으로도 소통이 이루어지는 것 같았다. 2년 정도 지나면서부터는 모든 부장을 직선으로 선출하고, 부장교사도 순환 보직제로 바꾸었으며, 6년을 계속한 부장은 1년간의 안식년을 두어 자연스럽게 부장직에서 물러나게 하기도 했다. 대개의 사립학교가 한번 부장이면 영원히 부장을 하는 그런 체제였는데, 이처럼 부장직을 3년씩 순환하게 하고, 6년을 한 후에는 부장 자리에서 일단 그만두게 하니 웬만한 선생님들도 부장직을 할 수 있는 문호가 열린 셈이기도 했다. 더 나아가 교감도 교사들이 직접 선거를 통하여 2배수로 추천하기로 하였고, 법인 정관을 고칠 수는 없다고 해서 교장 단임제는 선생님들과 구두로 약속을 하기도 했다. 새 학년의 교무분장도 선생님들의 의견을 먼저 받아 가능하면 그대로 결정했고, 담임도 희망을 받아 결정을 하니 학년이 바뀔 때마다 겪는 인사 후유증이 크게 줄어들었다. 중요한 것은 강요된 자리, 피동적인 자리가 아니라 자신이 결정한 자리라는 생각에 의욕을 가지고 맡은 일을 열심히 하는 모습을 확인하게 되었다는 것이다. 민주적인 학교 그 자체도 소중하지만, 민주적인 학교로 바뀌면 구성원들이 자발적으로, 의욕적으로 변화한다는 것이다. 7개의 동아리는 3년만에 22개로 늘어났다. 학교가 살아 있었다. 활력이 있었다. 4. 교장이라는 자리 교장은 권한을 가진 자리이지, 권력을 가진 자리가 아니었다. 그런데 아직도 학교 현장에서는 그 <권한>을 권력으로, 권위로, 권세로 아는 교장들이 많이 있고, 그것에 문제 제기를 하면 서로 심각한 갈등으로 바뀌게 되어 서로 상처를 주고 깊은 상처를 받는다. 사실 그 권한이라는 것은 교장이기 때문에 주어진 것이 아니라, 그에 따른 막중한 <책임>이 있기 때문에 주어진 것이다. 책임의 크기만큼의 권한이요, 권한의 크기만큼의 책임이 주어진 것이다. 그런데 교장의 권한을 선생님들도 권력으로 받아들인다. 그렇기 때문에 민주적인 학교를 만들어가는 데 어려움이 있다. 교장의 권한이 권력으로 바뀌는 것을 막는 방법으로 가장 효과적인 것은 교장이 수업을 하는 것이다. 1주일에 4시간 정도 수업만 해도 권위적인 교장으로부터 벗어나게 된다. 수업은 누구에게나 지난(至難)한 과제다. 그렇기에 교장이 되면서, 그 지난한 수업의 짐으로부터 벗어나는 순간 대한민국의 교장들은 곧바로 <교장>이 되고, <완벽한 교장>이 된다. 놀랍게도 <교장>이 되는 데 걸리는 시간은 하루 정도면 가능한 것이다. 교장, 교감이 수업을 하지 않는 것은 인적 자원의 낭비다. 교장 교감은 가장 훌륭한 교사인데 왜 그 소중하고 훌륭한 능력을 사장(死藏)하는가. 당연히 그 좋은 수업을 학생들에게 베풀어 주어야 하는 것 아닌가? 교장, 교감의 업무가 막중하니 당연히 수업 시수는 3, 4시간 정도로 줄여 주어야 하는 것은 당연하다. 교장이나 교감이 수업을 하게 되면, <교사로서의 교장>이 되니 자연스럽게 그냥 <교장(校長)>이 아니라, <교장(敎長)>이 되는 것이요, <교감(校監)>이 아니라 <교감(敎監)>이 되는 것이다. 수업의 짐, 그 고난의 십자가를 함께 짐으로써 교사들과 그야말로 동고동락하는 것이다. 선생님들과 자연스럽게 대화가 가능한 것은 물론이요, 중요한 것은 학생들의 요구를 현장에서 읽을 수 있다는 것이다. 학부모를 대할 때도 현장의 숨소리가 담긴 <대화다운 대화>를 할 수 있어 좋은 것이다. 더욱 중요한 것은 자연스럽게 <민주적인 교장>이 될 수 있어 소통은 이래서 아주 자연스럽게 이루어진다. 수업하는 교사로서의 어려움을 알게 되어, 교사의 입장으로 교사의 복지에도 관심을 가지게 된다. 교사들은 동료의식으로 교장과의 관계를 이룰 수 있다. 교장실·행정실·화장실의 트라이앵글에 갇힌 교장이 아니라, 학교를 향해 모든 것을 열어 놓은 교장이 되는 것이다. 5. 민주적인 학생, 민주적인 학부모 진정한 민주적인 학교는 교사만의 민주적인 학교가 아니다. 학생이 민주적인 학교, 나아가 학부모들까지 민주적인 학교가 될 때 비로소 그 학교는 민주적인 학교가 되는 것이다. 학생들에게는 학생회장과 임원 선출 과정을 일반 선거 과정을 그대로 밟아 실시하고, 생활 규정을 바꿀 때는 학생들이 직접 참여하여 의견을 반영하도록 하였다. 잘 짜여진 학생회 임원 수련회, 동아리 연합 캠프, 그리고 학생들이 100% 주관하는 자치회의인 <한성인 한마당>을 통하여 학교의 주인으로 당당히 서게 하였다. <한성인 한마당>은 참으로 자랑할 만한 행사였다. 한 달에 한 번씩 열리는 이 행사를 준비하기 위하여 학생회 임원들 30여 명은 1주일 동안 밤늦도록 고민하고 토론하고 몸으로 실천한다. 전교생 760명은 학생회가 준비한 여러 가지 프로그램으로 웃고 박수치고, 때에 따라서는 직접 참여하는 자치 회의를 함께 만들어갔다. 임원들 간의 관계가 두터워지고 학교에 대한 애정을 그런 과정을 통해서 확인한다. 그런 활동은 각종 동아리 활동에서 다시 살아나고, 2학기 때 <목화축제>와 <대동제>에서 알찬 결실을 맺는다. 민주적인 학교는 학부모의 참여도 활발한 학교가 되어야 한다는 생각에, 학부모회를 적극적으로 구성하고, 어머니 합창단을 만들어 학부모들이 학교에 자주 올 수 있게 하였다. 학부모와 함께 하는 학년 협의회를 해마다 2회씩 열어 학부모와 선생님들이 직접 만나 서로 하고 싶은 말을 나누게 했다. 학부모 독서 동아리를 만들고, 학생·선생님들과 함께 김장을 담가 불우한 노인들에게 나누어 주기도 했다. <목화축제> 때는 바자회와 학부모들의 작품 전시, 학생들을 위한 먹거리 장터 운영, 체육대회 참여 등을 통하여 자연스럽게 학교 구성원으로서의 보람을 느끼게 하였다. 학교가 좀 촌스러워진 느낌도 있었으나, 학부모와 학교, 학부모와 교사들이 많이 가까워지게 된 것이다. 6. <자본>으로부터 독립하는 <인간>을 이 시대, 이 사회, 이 세계는 <인간>이 <자본>을 섬기는 시대다. <자본>의 탐욕에 의해 <인간>이 철저히 도구화되고 소외되고 종속된 세상이다. 자본의 힘 앞에 인간은 얼마나 초라해지고 있는가? 따라서 우리 아이들을 <자본>의 폭력, <자본주>의 폭력, <자본주의>의 폭력에 당당히 맞서는 인간으로 키워야 한다. 그 아이들의 힘으로 <자본>이 <인간>을 섬기는 세상으로 만들어 가게 해야 한다. 진정한 자본주의 국가는 <자본>이 인간을 섬기고, <자본>이 사회를 섬기는 나라다. 이런 나라를 만들어가기 위한다면, 객관식 시험이나 주입식 교육으로는 어림없다. 한 줄 세우기, 무한 경쟁, 극한 경쟁은 <자본>이 요구하고 명령하는 방식이다. 조기 교육이니 영어 몰입 교육이니 하는 것도 탐욕스런 자본의 음모가 진하게 밴 용어들이다. 경제적으로 <잘사는> 사람만이 아니라, 다함께 행복을 누리는 <잘 사는> 사람의 가치를 체화(體化)하도록 가르쳐야 한다. 우리 교육에게 내린 이 시대의 명령이다. 우리 사회는 이제 <인간>이 주인이어야 한다. 그래서 <민주(民主)>인 것이다. 이 나라의 주인이 <인간>이 되어야 한다. 민주주의 교육, 민주적인 교육은 그래서 가장 절실한 과제다. 내가 주인이 되는 교육이어야 <자본>으로부터, <탐욕>으로부터 자유로울 수 있다. 민주적인 학교만이 아이들 가슴 깊이 파고드는 <교육>, 진정한 <교육>이 가능하다.
- 학생을 주인으로 모시는 학교가 민주적인 학교다. - 사람이 사람으로 만나는 학교가 민주적인 학교다. - 사람과 사람이 서로 섬기는 학교가 민주적인 학교다. - 가슴과 가슴이 서로 부딪치는 학교가 민주적인 학교다. - <자본>의 명령으로부터 자유로운 학교가 민주적인 학교다. 7. 행복 버전으로, 행복 비전으로 이제 교육은 딴청부리지 말아야 한다. 우리 교육은 놀랍게도 엉뚱한 짓거리에 너무 오랜 동안 올인해 왔다. <교육>의 힘으로 우리가 <잘사는> 나라가 되었다고 한다. 그런데 나는 이 말을 좀 바꾸고 싶다. <교육>의 힘이라기보다 <교육욕(敎育慾)>의 힘으로 이 나라가 이만큼 <잘살게> 되었다고 말이다. 그러나 안타깝게도 지금 이 나라는 <잘 사는> 나라가 아니라는 것이다. 행복한 나라가 아니라는 것이다. 우리 교육의 줄기찬 딴청이, 우리 교육의 왜곡(歪曲)이 이런 사회, 이런 불행한 나라를 만들어 놓은 것이다. <잘사는> 나라가 된 것은 참으로 다행이지만, 이제는 <잘 사는> 나라, <행복한> 나라를 만들어 가기 위하여 올인하여야 한다. 무엇을 가르칠 것인가? <행복>이다. 이제 노골적으로 행복을 가르치자. 행복이 무엇이라는 것, 행복하게 살 수 있는 원리(原理), 행복하게 살 수 있는 능력(能力)을 학교에서 가르치자. 종교가 가르치자. 어른들이 가르치자. 이 사회가 가르치자. - 경쟁을 하고 싶다면 행복 경쟁을 하자. - 경쟁을 그리도 시키고 싶다면 행복 경쟁을 시키자. - 평가를 하고 싶다면 행복 평가를 하자. 학생 평가, 교원 평가, 학교 평가를 그리도 애타게 하고 싶다면, <행복>을 기준으로 하라는 말이다. - 공부 못 해도 좋다, 행복하면 되는 것이다. - 좀 잘 살지 못해도 좋다, 행복하면 되는 것이다. - 궁벽한 시골에 살아도 좋다, 행복하면 되는 것이다. - 남보다 못해도 좋다, 행복하면 되는 것 아닌가? 핀란드가 그렇다 한다. 핀란드 교육의 궁극적인 목표는 아이들의 행복이란다. 그런데 놀랍다. 기가 막힌다. 그 나라는 학업 성취도가 세계 제일이란다.
* 이 글은 지난 8월 9일(일)에 새길교회에서 열린 교육 좌담회 때 발표한 원고입니다. |
첫댓글 校長/校監 이 아니라 수업하는 敎長/敎監이 돼야한다는 의견 좋구려.
이율이 교장선생 오랫만이요 좋은글 공감합니다, 애들이 다커버려서,,,,,,그저 안타까울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