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녕,
나는 686L 양문형 냉장고야.
20년 전
드럼세탁기,
LCD TV 친구들과 이 집에 왔으니
나도 어느덧 스무 살이 되었네.
몇 년 전 내 친구 드럼세탁기와
LCD TV는 저세상으로 갔고
이젠 나 혼자만 남았어.
요즘엔 나도 몸이 좀 안 좋은지
밤마다 모터 돌아가는 환청이 들려.
난 20년 동안 단 하루도 쉰 적이 없어.
작년엔가?
정전이 돼서 깜빡 졸기도 했는데,
우리 주인님 난리가 났었지.
내 몸에 넣어둔 음식하고
식재료가 온통 흐물흐물해지고
축축해져서 구석구석 닦아야만 했거든.
그래도 그 덕분에
나도 20년 만에
'전신 목욕'이란 걸 했지 뭐야,
내가 이 집에 올 때만 해도
내 용량은 상급에 속했어.
그땐 참 위풍당당했는데 말이야.
하지만 그 사이 700L급,
800L급 친구들 나오더니
얼마 전엔 900L대
'헤비급' 친구까지 등장했단 소식에
마음이 착잡해지더라고.
그래도 말이야,
요즘 비우며 사는
미니멀 라이프란 게 유행하면서
'냉파족'(냉장고 속 남은 음식 파먹는 사람들)도 나오고,
'냉비족'(냉장고 비우는 사람들)도 생겼다며?
다시 옛날처럼
문 하나 달린 냉장고,
400L대 '라이트급'
냉장고로 갈아타는 사람들도 있다는데,
그거 실화야?
그거 진짜야?
겨울 되면서
이래저래 다른 집 냉장고는
다이어트를 시작했다는데
우리 주인님은 20년 전이나
지금이나 한결같이 날 너무 믿는 것 같아.
몇 년 전
후배 김치냉장고가 들어오고
부담이 좀 줄어들긴 했지만
주인님은 뭐든 사오면 일단 다 내게 맡겨.
작년 꽃게 철에 사다 놓은 꽃게,
언제부터 있었는지
나조차도 기억 가물가물한 고춧가루,
뜯지도 않은 채 유통기한 지난 소스,
검은 비닐 봉지에 싸인 채 동상 걸린 감자….
가끔 싱싱한 채로 내 품에 들어왔다가
그대로 떠나보내야 하는
말라 비틀어진 생선,
썩은 채소들 보면 마음이 참 아파.
작년 가을에 들어온 대봉도 그대로 있어.
떡도 있는데
저거 언제 들어 왔는지 기억이 안나
쫌 오바해서 말 한다면
주인님 애들 백일 떡 같아
주인님 막내가 서른 세살 이라는데...
그래도 먹는 음식은 좀 낳아
어쩔때는
티비 레미콘을 아니 니미콘도
들어 오고 쓰레빠도 들어와.
우리 주인님은
내가 품을 것들을 한없이
꾸역꾸역 안겨주시지.
나만 사랑 하나봐.
재미있는 건 말이야,
그런데도
느으을 내게 다가와
내 속을 들여다보곤 똑같은 말을 해.
"에휴~ 먹을 게 하나도 없네!"
첫댓글 감사합니다.
그 집 쥔도 우리집 독종과 꼭 닮았네요..
ㅎㅎㅎ~
나는 아닌거 가트요
내가 할말이어라~~^
@박영란(근정) ㅎㅎ~~~
저도 냉장고의 하소연을 들을만 합니다.
두식구 사는데
냉장고 두대가 꽉차있으니
우린 매일티격태격~~
냉장고에서 버리는게 더 많은 세상
도데체 세상이 으찌 될련지~
감사합니다.
넘 재밌게 웃고갑니다
저도 이사하면서 작은걸로 바꾼다고 바꿨는데
냉동고는 항상 만원
또 다른 냉동고 사야하나?
그러면서 자제해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