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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17년 가해 6월11일 주일 [(백) 삼위일체 대축일]
[수도회] 사랑으로 사랑의 신비를 드러내는 삶 -
기경호 프란치스코 신부 작은 형제회(프란치스코회)
○ 제1독서 탈출 34,4ㄱㄷ-6.8-9
○ 제2독서 1코린 13,11-13
† 복음 요한 3,16-18
오늘은 삼위일체 대축일입니다. 삼위일체는 인간의 지혜로 다 알아듣기
힘든 신비입니다. 하느님 아버지께서는 아드님과 성령과 함께 한
하느님이시며 한 주님이시나, 한 위격이 아니라 한 본체로 삼위일체
하느님이심을 우리는 믿음으로 고백합니다.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완전한 일치와 지극한 사랑을 본받아, 우리도 하나 되어 사랑하며
살아가기로 다짐합시다.
◈ 오늘의 묵상
하나가 된다는 것은 참으로 아름답고 행복한 일입니다. 그러나 삶
안에서 그것이 얼마나 어렵고 힘든 일인지를 우리는 잘 압니다. 서로
사랑해서 하나가 된 부부도 계속 하나가 되어 그 행복을 유지하며
살려면 수많은 수고를 겪고 위기를 극복해야 하지 않습니까. 세상에서
가장 뜨겁고 강력한 부모와 자식 간의 사랑도 수많은 갈등과 질곡을
넘어서야 합니다.
성부와 성자와 성령께서 서로 다른 위격을 지니시면서도 동일한 본질을
공유하시고, 유일한 실체로서 존재하신다는 삼위일체의 신비는, 우리
그리스도교의 가장 중요한 교리이면서도 인간의 머리로는 쉽게
알아들을 수 없는 신비입니다. 세 분이시면서 동시에 한 분이시라는
존재론적 모순의 논리로 표현되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삼위일체의 신비는 존재론이나 논리학의 대상이 아니라 하느님
사랑의 표현입니다. 사랑 자체이신 하느님께서 끝없는 애정으로 성자를
바라보시고, 성자 예수님께서도 하느님을 향해 끓어오르는 사랑으로
보답하시는 것입니다. 그리고 두 분 사이에 흐르는 그 뜨거운 사랑
자체가 바로 성령이시라는 어느 신부님의 설명이, 세 분이 동시에 한
분이라는 이 교리를 가슴으로 느끼게 해 줍니다.
우리 그리스도인은 하느님의 이 가장 뜨거운 신비에 참여하는 행복한
존재입니다. 이로써 우리의 삶 자체가 바로 삼위일체 하느님의 친교와
사랑에 푹 빠진 기쁨의 잔치가 될 것입니다.
(이정주 아우구스티노 신부)
- 매일 미사 -
◈ [인천] 삼위일체
2017년 가해 6월11일 삼위일체 대축일
제1독서
<주님은, 주님은 자비하고 너그러운 하느님이다.>
○ 탈출기의 말씀입니다. 34,4ㄱㄷ-6.8-9
제2독서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은총과 하느님의 사랑과 성령의 친교>
○ 사도 바오로의 코린토 2서 말씀입니다. 13,11-13
복음
"하느님께서 아들을 세상에 보내신 것은 세상이 아들을 통하여 구원을
받게 하시려는 것이다."
† 요한이 전한 거룩한 복음입니다. 3,16-18
거액 복권에 당첨된 사람이 불행하게 살게 되었다는 이야기를 매스컴을
통해서 자주 접하게 됩니다. 실제로 통계적으로도 90% 이상이 복권에
당첨되기 전보다 훨씬 더 불행한 삶을 살고 있다고 합니다. 이것만 봐도
돈이라는 것이 우리를 행복으로 이끌어주는 것은 아니라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그런데도 불구하고 ‘돈돈돈’ 하면서 돈에 모든 것을 걸고 있는
사람들이 얼마나 많습니까? 바로 돈이 하느님인 줄 아는 것입니다.
하느님으로부터 창조된 우리들은 하느님의 사랑을 찾으며 살아갑니다.
문제는 그 사랑을 이 세상의 물질적이고 세속적인 것들에서 찾는
것이지요. 즉, 돈, 명예, 술, 마약 등에서 하느님의 사랑을 찾는
것입니다. 이 안에서 영원함, 행복, 사랑받고 있다는 느낌 등을
추구한다는 것은 결국 그러한 것들이 하느님인 줄로 착각하는
것이지요. 하느님이 아닌 것들을 하느님인 것처럼 생각하다보니 정작
행복하지 않습니다. 그리고 하느님께서 사랑하시는 나의 이웃들을 향한
사랑도 생기지 않게 됩니다.
아우구스티노 성인은 사랑에 대하여 이렇게 가르쳤습니다.
“사랑이 있는 곳 어디에서나 삼위일체, 즉 사랑하는 존재와 사랑을 받는
존재 그리고 사랑의 원천이 존재합니다.”
사람은 사랑하고 사랑받아야 살맛나게 살 수 있습니다. 문제는 그
사랑이 엉뚱한 곳을 향하고 있다는데 있습니다. 따라서 아우구스티노
성인의 말씀처럼 ‘나의 사랑’ 안에 사랑하는 존재와 사랑을 받는 존재
그리고 사랑의 원천이 존재하고 있는 지를 점검해봐야 할 것입니다.
이 중에 하나라도 존재하지 않는다면 분명 그 안에 참된 사랑은
존재하지 않습니다.
오늘은 삼위일체 대축일입니다. 성부 성자 성령의 서로 다른 세
위격이지만 동일한 본체로 하나를 이룬다는 삼위일체의 신비는 가톨릭
교리의 가장 중요한 교리이기도 합니다. 그리고 이 신비는 바로 하느님
사랑의 표현이라고 말하지요. 세 위격이 하나의 사랑으로 하나를
이루고 있기 때문입니다. 가장 큰 사랑을 위해 삼위일체의 하느님으로
우리에게 다가오셨다는 것을 보면서 우리 역시 사랑으로 주님과 하나를
이루고 또한 나의 이웃들과 하나를 이루어야 합니다.
토마스 머튼은 이렇게 말했습니다.
“사랑은 계속해서 나눌 때에만 유지될 수 있다. 오로지 자신만을 위한
행복은 그 어디에도 없다. 다른 사람과 나눌수록 커지는 행복이야말로
우리를 진정 행복하게 한다.”
삼위일체이신 하느님께서 보여주신 사랑을 함께 나누면서 진정으로
행복한 우리가 되었으면 합니다.
더 많이 사랑하는 것 외에 다른 사랑의 치료약은 없다
(헨리 데이비드 소로우).
삼위일체 하느님
사랑하고 사랑받기
어마어마한 금을 소유한 사람이라고 해서 마음까지 부유하지 않습니다.
그렇다면 진정한 부자는 어떤 사람일까요? 아마 매 순간 사랑의 힘을
느끼며 사는 사람이 아닐까 싶습니다.
며칠 전, 특강 중에 이런 질문을 던진 적이 있습니다.
“예전에는 너무나도 중요했지만, 지금은 중요하지 않다고 생각되는
것이 있지 않습니까? 어떤 것이 있을까요?”
저는 예전에 소중하다고 생각하면서 애지중지했던 것들이 지금
현재에는 쓸모없는 폐품이 되어 버린 것들을 떠올리면서 이런 질문을
던졌던 것입니다. 그런데 어떤 자매님께서 곧바로 말씀하십니다.
“남편이요.”
처음 연애하고 결혼하면서는 너무나 소중했던 남편이었다고 합니다.
그런데 오랫동안 결혼생활을 유지하면서 산 지금은 별 쓸모없는
사람이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물론 재미있게 말하기 위해서 이렇게 말씀하신 것일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어느 정도 이런 생각을 평소에 가지고 있었기 때문에 이런
답변을 곧바로 하셨던 것이 아닐까요? 그렇다면 이런 마음을 가지고
있는 상태에서 과연 남편과 함께 있는 시간이 행복할까요? 아무리 지금
부유하고 여유가 있다 하더라도 사랑을 느끼지 못하면서 산다면 별
의미를 느낄 수가 없게 됩니다.
어떠한 상황에서도 사랑에 집중해 보았으면 합니다. 나의 상대방을
위해서가 아니라, 내 자신을 위해서도 사랑을 하고 사랑을 받는 것은
중요합니다.
갑곶성지에서 유아세례 받은 어린이들과 부모, 대부모.
- 인천교구 갑곶 성지 조명연 마태오 신부 -
◈ [수도회] 사랑으로 사랑의 신비를 드러내는 삶 -
기경호 프란치스코 신부
2017년 가해 6월11일 삼위일체 대축일
탈출 34,4ㄱㄷ-6.8-9; 2코린 13,11-13; 요한 3,16-18
"하느님께서는 세상을 너무나 사랑하신 나머지 외아들을 내주시어,
그를 믿는 사람은 누구나 멸망하지 않고 영원한 생명을 얻게 하셨다.”
(요한 3,16)
사랑으로 사랑의 신비를 드러내는 삶
삼위일체 교리는 이렇습니다. 한 분이신 하느님께서는 성부, 성자,
성령의 세 위격(persona)으로 구별되지만, 이 위격들은 본성(natura)
과 본질(essentia)과 실체(substania)로는 구별되지 않는 하나라는
것입니다. 각각의 위격은 다른 위격들 안에 존재하면서도, 세 위격들은
각기 하나의 참 하느님으로 이해합니다.
자주 성호경을 그으며 신앙을 고백하지만, 머리로는 알아듣기 어려운
신비입니다. 삼위일체 신비는 어찌 보면 영영 알아듣기 어려운
신비임이 틀림없습니다. 그러나 그것은 사랑이 있다면 아주 쉽게
알아차릴 수 있는 진리이기도 합니다. 그것은 하느님의 사랑이
삼위일체의 원리와 신비의 핵심이기 때문입니다.
오늘 복음은 말합니다. "하느님께서는 세상을 너무나 사랑하신 나머지
외아들을 내주시어, 그를 믿는 사람은 누구나 멸망하지 않고 영원한
생명을 얻게 하셨다.”(3,16) 곧 성자께서는 세상을 구원하시어 영원한
생명을 주고자 하시는 성부의 뜻을 실행하시려고 사람이 되어 오셨다는
것입니다.
하느님께서는 “자비롭고 너그러우시며, 분노에 더디고 자애와 진실이
충만하십니다.”(탈출 34,6) 성부께서는 그 사랑으로 인간과 피조물과 이
세상을 창조하셨습니다. 하느님께서는 우리에 대한 사랑 때문에 ‘살을
취하시어’ 사람이 되어 오셨습니다. 성부께서는 세상을 너무나
사랑하신 나머지 외아들까지 내주신 것입니다. 사람이 되신 하느님,
성자 예수그리스도께서는 죽기까지 성부의 뜻을 수행하셨습니다.
예수그리스도께서는 하느님의 뜻을 이루시려고, 온갖 반대와 모욕과
박해를 사랑으로 견뎌내십니다. 죽음을 앞두고 마음이 산란해지지만
묵묵히 수난의 길을 걸으셨고, 끝내는 기꺼이 자신의 목숨을
내놓습니다. 사랑은 사랑을 향해 달려갑니다. 사랑은 그렇게 더 큰
사랑을 부릅니다. 생명은 사랑 안에서 영원한 호흡을 이어갑니다.
예수님께서는 죽음을 앞두고 이렇게 기도하셨지요. "저는 그들에게
아버지의 이름을 알려 주었고 앞으로도 알려 주겠습니다. 아버지께서
저를 사랑하신 그 사랑이 그들 안에 있고 저도 그들 안에 있게 하려는
것입니다.”(요한 17,26) 성자 예수그리스도께서는 우리가 사랑의
일치를 이루며, 사랑이신 하느님 안에 머물기를 기도하신 것입니다.
성자 예수그리스도께서는 마지막 남은 숨결까지도 우리를 위해 다
내놓으시고는 성부께로 가십니다. 그리고는 우리를 “모든 진리 안으로
이끌어주실”(17,16) 보호자 성령을 보내주십니다. 성자께서는 우리가
언제 어디서나 사랑의 일치를 이루며 사랑 안에 머물 수 있도록 성령을
보내주신 것입니다.
어떻게 삼위일체의 신비를 살아야 할까요? 우리는 성부와 성자와
성령께서 서로를 내어주는 사랑을 지니도록 해야겠습니다. 끝까지,
그리고 전부를 주고받는 사랑이 삼위일체의 신비입니다. 따라서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은총과 하느님의 사랑과 성령의 친교가
함께하는”(2코린 13,13) 것이 삼위일체의 신비 안에 머무는 삶입니다.
성부, 성자, 성령은 모두 다르지만 그 존재하는 이유는 사랑이며, 그
지향도 궁극적인 목표도 사랑입니다. 따라서 성부의 뜻인 사랑을 이 땅
위에서, 각자의 삶의 자리에서 이루는 것이 바로 삼위일체의 신비를
사는 삶이 될 것입니다. 성부께서는 우리 가운데서 사랑을 실현하고
회복하시려고, 아들을 파견하셨습니다. 또 아들은 아버지와 함께
성령을 파견하셨지요.
이처럼 우리도 끊임없이 사랑을 위해 자신을 내놓으며 움직여야 할
것입니다. 우리가 하느님의 사랑을 품고, 사랑으로 내어주고 조건 없이
받아들이며, 사랑으로 감싸고 보듬어줄 때, 하느님의 삼위일체가
드러날 것입니다. 우리 모두 사랑으로 삼위일체의 신비를 알아차리고,
사랑 실천으로 그 신비를 드러내는 ‘거룩한 친교의 달인’이 되도록
힘썼으면 합니다. 그것이 영원한 생명의 집으로 가는 우리의 길입니다.
- 기경호 프란치스코 작은형제회(프란치스코회) 신부 -
강론채널 주소 : story.kakao.com/ch/francesco -
◈ [수도회] "구원을 받게 하시려는 것이다."(요한 3, 17)
한상우 바오로 신부 |오늘의 강론 묵상
2017년 가해 6월11일 삼위일체 대축일.
"구원을 받게 하시려는 것이다."(요한 3, 17)
안에 있는 것이 밖으로 드러나는 법입니다.
한 하느님이 세 위격으로 존재하십니다.
세 위격으로 존재하시는 하느님 존재의 본질은 분명 사랑입니다.
사랑의 본질은 감사와 희생 자유입니다.
성부, 성자, 성령의 삼위일체 신비는 자비와 용서와 은총의 신비입니다.
삼위일체 신비는 사랑의 신비 생명의 신비 구원의 신비입니다.
사랑은 서로를 향하고 생명은 서로를 필요로 하고
구원은 서로를 자유롭게 합니다.
삼위일체 신비안에서 창조와 구원 현존을 체험하게 됩니다.
삼위일체 신비안에서 가장 소중한 것은
언제나 가까이 있음을 깨닫게됩니다.
서로를 지배하는 지배의 의미가 아니라
사랑으로 결합하는 결합의 의미입니다.
삼위일체 대축일을 통해 우리의 생명이 우리의 삶이
어떻게 살아야 할지를 고민하는 시간이 되길 기도드립니다.
하느님은 사랑이십니다.
어떻게 사랑해야 할지를 삼위일체 신비는 잘 보여주고 있습니다.
우리또한 우리 삶속으로 깊이 들어가 순명과 기도
사랑으로 생활하는 삼위일체의 삶되시길 기도드립니다.
- 구속주회 한상우 바오로 신부 -
◈ [수도회] 장벽을 허무십시오! 다리를 놓으십시오!
2017년 가해 6월11일 삼위일체 대축일
"하느님께서 아들을 세상에 보내신 것은 세상이 아들을 통하여 구원을
받게 하시려는 것이다."
† 요한 3,16-18
장벽을 허무십시오! 다리를 놓으십시오!
늘 애매모호하고 알쏭달쏭한 삼위일체 대축일입니다. 삼위일체
대축일만 되면 누군가가 ‘짠!’하고 나타나서 삼위일체 하느님의 신비에
대해 간단명료하고도 속 시원하게 설명해주셨으면 하는 마음
간절합니다.
그러나 곰곰이 생각해보니 그게 다가 아니었습니다. 최첨단 과학의
발달에 발맞추어 인간의 지능과 능력을 총동원해서 연구한 결과,
마침내 하느님의 실체가 세상 앞에 낱낱이 다 밝혀지고 드러났다고
한번 생각해보십시오. 그때 하느님은 더 이상 신앙의 대상이 아닌
것입니다.
그러니 하느님은 지금처럼 알다가도 모르겠고, 도통 이해할 수 없는
존재, 강 건너 피안의 언덕 위에 신비로운 미소를 짓고 있는 희미한
존재로 남아계시는 것이 차라리 나을 것 같습니다.
그러나 우리 그리스도인은 알게 모르게 이미 삼위일체이신 하느님
안에 흠뻑 젖어 살고 있습니다. 매일 아침 저녁기도 때, 미사 때, 성호를
긋는데, 이를 통해 우리는 성삼위 하느님을 향한 신앙고백을 하고
있습니다.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이름으로, 아멘.”
미사를 집전하는 사제들은 매 미사 시작 때 신자들을 향해 인사를
건네는데, 이 역시 삼위일체 하느님의 이름을 부르면서 시작합니다.
“사랑을 베푸시는 하느님 아버지와 은총을 내리시는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와 일치를 이루시는 성령께서 여러분과 함께.”
사도 바오로 역시 초대 교회 공동체 신자들에게 편지를 쓸 때
삼위일체이신 하느님의 이름으로 인사를 했습니다.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은총과 하느님의 사랑과 성령의 친교가 여러분 모두와
함께하기를 빕니다.”(코린토 2서 13장 13절)
저 같은 경우도 뭘 하든 3이란 숫자를 염두에 둡니다. 청소년들에게
간단히 한 말씀 해달라면, 삼위일체 하느님을 생각하며 딱 3분만
이야기합니다. 강론 시간에도 삼위일체 하느님을 생각하며 많이도 말고
딱 3가지만 이야기합니다. 강의 시간에도 3가지 키워드만을 사용해서
진행합니다. 하루에 커피도 딱 3잔, 술을 마셔도 캔 맥주 딱 3캔^^
성부, 성자, 성령, 삼위께서 서로 굳게 결속되어 계시며, 상호 완벽히
일치하시고, 항상 소통하시는 모습은 찢겨지고 갈라진 우리 시대에
얼마나 큰 의미로 다가오는지 모릅니다. 완벽한 일치의 모델이신
삼위일체 하느님께서 셀 수도 없이 분열된 인류 공동체를 향해
바라시는 바는 오직 한 가지입니다. 일치입니다. 하나 되는 것입니다.
삼위일체 하느님께서는 상호 온전히 일치해계시면서, 존재 자체로,
형상 자체로 우리를 향해 강력히 외치고 계십니다. “장벽을
허무십시오! 다리를 놓으십시오! 한 마음 한 몸이 되십시오! 서로
격려하십시오! 서로 뜻을 같이 하십시오! 거룩한 입맞춤으로 서로
인사하십시오!”
지구상에서 가장 길고도 높은 장벽으로 갈라 서 있는 참으로 가련한
우리 민족입니다. 저 멀리 잠비아, 아르헨티나, 동티모르에서도 편지가
오고 가는데, 가장 가까운 북녘 땅 동포들과는 아직도 편지 한 장
마음대로 주고받지 못합니다. 가장 가까운 곳에 살아가는 동포들이지만
그 두터운 장벽으로 인해 가장 먼 이웃으로 살아가고 있습니다. 똑같은
피를 나눈 형제자매들이지만 가장 낯선 사람들이 되어버렸습니다.
이토록 불행한 우리 민족을 삼위일체이신 하느님께서 굽어 살피시어,
하루 빨리 장벽이 무너지고, 서로 편안하게 왕래하며, 얼굴마다 활짝
웃음꽃을 피우며 다시금 한 형제자매로 살아갈 수 있는 은총을
청합니다.
- 살레시오회 관구장 양승국 스테파노 신부 -
◈ [서울] 삼위일체 대축일
2017년 가해 6월11일 삼위일체 대축일 요한 3,16-18
일을 하면서 과정과 목적을 생각하게 됩니다. ‘작년에 자비의 해’를
지내면서 청소년국과 함께 성소주일 행사를 준비했습니다. 목적은
많은 젊은이들이 ‘성소’의 소중함을 알게 하는 것이었습니다.
청소년국은 다양한 프로그램을 준비하였고, 본당의 젊은이들을
초대하였습니다. 성소국은 장소를 준비하였고, 비용을 부담하였습니다.
준비하는 과정에 많은 회의를 하였고 추기경님께서 미사를 함께 해
주셨습니다. 다행히 날씨도 좋았습니다. 함께하는 과정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자신의 것을 내어 주는 것입니다. 함께 하는 목적을
명심하는 것입니다.
평화방송과는 ‘다큐 사제’를 함께 제작하였습니다. 사제 양성과정과
사제들의 삶을 영상물로 만들어 보고 싶었습니다. 평화방송은 많은
자료를 소장하고 있었고, 방송국 차원에서도 의미 있는 작업이라고
생각하였습니다. 3년 동안 준비를 하였고, 함께 회의를 하였습니다.
평화방송은 현장을 다니면서 작품을 만들었습니다. 성소국은 방향을
제시하고, 제작비를 부담하였습니다. 이번 작업을 하면서 느낀 것이
있습니다. 작가와 연출자의 전문성을 인정하는 것입니다. 제작자는
방향을 이야기하고, 믿고 기다려 주는 것입니다. 3년 동안의 노력이
결실을 맺어서 사제 양성을 위한 ‘다큐 사제’ 3부작이 완성되었습니다.
함께하면서 분열과 갈등이 생기는 경우가 있습니다. 명분은 좋지만
과정이 투명하지 않을 때가 있습니다. 과정은 투명하지만 목적이 서로
다를 때가 있습니다. 함께 한다고 하면서 서로 다름을 인정하지 않을
때가 있습니다. 함께 한다고 하면서 자신의 이익을 먼저 생각할 때가
있습니다. 많은 학생들이 숨진 ‘세월호’는 위기의 상황에서, 재난의
상황에서 함께하지 못했기 때문입니다. 책임을 서로에게 미루었기
때문에 벌어진 비극입니다. 배는 과적을 하였고, 선장은 승객들을
뒤로하고 먼저 탈출하였고, 잘못된 명령으로 학생들은 자리에 있어야
했고, 근처에 있던 배들은 제자리에 머물러 있어야 했습니다. 과적을
하지 않았다면, 항행 원칙을 제대로 지켰다면, 구조의 골든타임을
놓치지 않았다면, 해경이 적극적으로 구조에 임했다면, 선장이 자신의
책임을 다했다면 ‘세월호’는 위기의 상황 속에서도 승객들을 안전하게
구조한 모범사례가 되었을 것입니다.
오늘은 삼위일체 대축일입니다. 삼위일체이신 하느님께서는 과정은
투명하셨고, 목적은 한결 같으셨습니다. 성부이신 하느님께서는 이
세상을 창조하셨고, 하느님을 닮은 모습으로 사람을 창조하셨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이 세상을 통해서 하느님의 자비하심을 느낄 수
있습니다. 성자이신 하느님께서는 말씀과 표징과 십자가의 희생으로
우리에게 하느님 나라를 알려 주셨습니다. 잠시 지나가는 이 세상이
끝이 아님을 보여 주셨습니다. 세상이 줄 수 없는 참된 평화와 사랑을
보여 주셨습니다. 성령이신 하느님께서는 시간과 공간이라는 틀을
벗어나서 우리들에게 은사를 주시고, 열매를 맺게 해 주십니다. 지혜를
주시고, 굳셈을 주시고, 용기를 주십니다. 온유와 친절과 사랑의 열매를
맺게 해 주십니다. 삼위일체이신 하느님의 목적은 우리를 심판하려는
것이 아니었습니다. 우리의 마음을 여시고, 우리를 구원하셔서 영원한
생명을 얻게 하시려는 것이었습니다.
초대교회의 신자들은 삼위일체이신 하느님을 체험하였습니다.
삼위일체이신 하느님은 ‘친교, 나눔, 사랑’의 하느님이셨습니다.
하느님은 모든 권한을 예수님께 주셨습니다. 예수님은 그 모든 권한을
하느님의 뜻을 따라 사용하셨습니다. 성령은 이제 예수님이 세우신
교회를 따뜻하게 감싸 주시고, 용기와 힘을 주셨습니다. 그러기에
초대교회는 ‘성부, 성자, 성령’의 이름으로 세례를 주었고, 삼위이신
하느님은 교회의 중심이 되었습니다.
가정은 삼위일체이신 하느님의 친교, 나눔, 사랑이 드러나는 가장
이상적인 공동체입니다. 아빠의 권위는 가족들의 건강과 행복을 위하여
행사되어야 합니다. 엄마의 사랑은 가족들을 위한 배려와 희생으로
드러나야 합니다. 아빠의 보살핌과 엄마의 사랑을 받은 자녀들은
가정의 미래가 될 것입니다.
본당 공동체에도 삼위일체이신 하느님의 친교, 나눔, 사랑이 드러나야
합니다. 불화와 대립을 극복하고 화해와 일치의 삶을 사는 것, 사랑으로
하나가 되는 삼위일체의 신비를 누리고 그 안으로 들어가는 것, 이것이
신자생활의 이상입니다. 성호경을 할 때마다, 영광송을 바칠 때마다
삼위일체의 신비를 살도록 다짐하고 그 은총을 구해야 하겠습니다.
†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이름으로 아멘.
- 서울 대 교구 성소국장 조재형 가브리엘 신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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