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적 ; 안덕면 덕수리 2521번지
시대 ; 대일항전기
유형 ; 위인선현유적(생가 터)
김명돈(1878∼1956) 지사는 덕수리에서 김응철(金應喆)의 장남으로 태어났다. 1936년 大靜면 新桃리 1374번지로 이적하였다. 1918년 10월 5일 제주도 법정사(法井寺)에서 승려 김연일·강창규·방동화 등이 주도한 항일무력시위에 참가하였다. 그는 평소 법정사의 승려 김연일 등과 교류를 통하여 항일의식을 길러 갔다. 항일의식이 투철하였던 김연일은 일제의 한국 강점에 대하여 민족적 울분을 참지 못하고 일찍부터 독립운동의 방도를 강구하였다.
김연일은 우선 1918년 봄에 강창규·방동화 등의 승려를 중심으로 항일비밀결사를 결성한 다음 신도들을 포섭하여 조직을 확대해 갔다. 그리하여 1918년 10월에 이르러서는 김명돈를 비롯한 30여 명의 신도들이 법정사를 근거지로 동지적 유대를 이루는 가운데, 조직적 결집을 이룰 수 있었다. 이들은 동년 10월 5일 김연일을 불무황제(佛務皇帝)로 옹위하고 도대장(都大將) 이하 군직(軍職) 체제로 조직을 편성한 뒤, 제주도 내의 일본인 관리의 처단과 일인의 도외(島外)로의 구축을 행동 방침으로 정하여 무력에 의한 항일투쟁을 전개하였다.
이들은 행동에 앞서 각 면(面)의 이장(里長)에게 격문을 배포하여 동참할 것을 권유하여 군민 4백여 명이 가세하는 가운데 행동을 개시하였다. 이에 김명돈 등은 일경의 연락을 차단하기 위해 전선(電線)을 절단하여 각 주재소(駐在所)를 고립시킨 다음 중문(中文) 주재소를 습격하였으며, 주재소에 감금되었던 13명의 구금자들을 석방하고, 식민수탈의 전위 역할을 맡았던 일본 상인(商人)들을 공격하였다. 그러나 이들은 곧이어 출동한 일본군에 의해 이틀만에 붙잡히고 말았다. 그는 이 일로 1919년 2월 4일 광주지방법원 목포지청에서 소위 소요(騷擾) 및 보안법 위반으로 징역 1년을 받아 옥고를 치렀다. 정부에서는 고인의 공훈을 기리어 1995년에 건국훈장 애족장을 추서하였다.(독립유공자공훈록) 법정사 투쟁에서 옥중순국한 스님 김봉화의 형이다.
김봉화(1882∼1919) 지사는 덕수리 2521번지(2542번지?)에서 태어났다. 법정사 항일투쟁에서 일경의 연락을 차단하기 위해 전선(電線)을 절단하여 각 주재소(駐在所)를 고립시킨 다음 중문(中文) 주재소를 습격하였으며, 주재소에 감금되었던 13명의 구금자들을 석방하고, 식민수탈의 전위 역할을 맡았던 일본 상인(商人)들을 공격하였다. 그러나 이들은 곧이어 출동한 일본군에 의해 이틀만에 붙잡히고 말았다. 그는 이 일로 1919년 2월 4일 광주지방법원 목포지청에서 소위 소요(騷擾) 및 보안법 위반으로 징역 2년을 받아 옥고를 치르던 중 모진 고문으로 인하여 1919년 12월 1일에 옥중 순국했다. 정부에서는 고인의 공훈을 기리어 1995년에 건국훈장 애국장을 추서하였다.(독립유공자공훈록)
《작성 22063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