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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50320. 묵상글 ( 사순 제2주간 목요일. - 의지하는 이와 신뢰하는 이 . 등 )
^ 김찬선 레오나르도 신부님. : 아직 / 04:31 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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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조명연 마태오 신부님. : 아직 / 07:21 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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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50320. 사순 제2주간 목요일. 김찬선 레오나르도 신부님.
2025.03.20 04:27
- 의지하는 이와 신뢰하는 이
“사람에게 의지하는 자와 스러질 몸을 제힘인 양 여기는 자는 저주를 받으리라.”
“그러나 주님을 신뢰하고 그의 신뢰를 주님께 두는 이는 복되다.
그는 물가에 심긴 나무와 같아 그 잎이 푸르고 줄곧 열매를 맺는다.”
오늘 예레미야서는 저주받는 자와 복 받는 자를 대비합니다.
저주를 받는 자는 사람에게 의지하는 자이고,
복을 받는 자는 하느님을 신뢰하는 자입니다.
이 말에서 의지와 신뢰라는 단어가 대비되며
의지-저주, 신뢰-복의 대비도 이루어집니다.
그렇습니다.
우리의 어법과 어감에서 신뢰 관계는 좋지만,
의지 관계는 탁 들어도 좋지 않은 어감이 있습니다.
누구에게 의지한다는 것이 좋지 않다는 것은
스스로 서지 못하고 그에게 의지해야만 서 있을 수 있고,
그가 없거나 몸을 빼면 그대로 무너져버리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사람에게 의지해도 이렇게 좋지 않은데
오늘 복음의 부자처럼 돈에 의지하면 어떻게 되겠습니까?
돈에 자기의 행복을 의지하는 것이고,
그의 행불행이 돈에 좌우되는 것이지요.
그런데 사람이건 돈이건 의지하는 것이 좋지 않은 것은
스스로 서지 못하고 그것에 좌우되기 때문이 아니라
그것에 의지하기 때문에 하느님을 믿지 않기 때문입니다.
자기의 행복과 구원을 사람이나 돈에 두고, 하느님께 두지 않기 때문인데
그것은 마치 나무가 물가에 있지 않고 광야와 소금땅에 심긴 것과 같다고
오늘 예레미야서는 얘기합니다.
그러므로 오늘 부자가 천국에 가지 못한 것은 그가 부자였기 때문이 아니라
자기 행복을 돈에 의지하기에 하느님께 자기 구원을 찾지 않았기 때문이지요.
그렇습니다.
부자는 구원받으려고 하지 않고 행복하려고만 한 것입니다.
그리고 행복도 하느님께 복을 받아 행복하려고 하지 않고 부자 청년처럼
가족이 있고 돈만 많이 있으면 영원히 행복할 것이라고 생각한 것입니다.
그래서 하느님과도 단절하고 이웃과도 단절하고 살았을 겁니다.
주님께서 그의 집 문을 두드려도 열어주지 않았을 것이고,
나자로처럼 귀찮은 존재들은 봐도 못 본 체하고 살았을 겁니다.
그런데 영원한 생명을 얻으려고 한 부자 청년에게 주님께서 말씀하셨지요.
영원한 생명은 가진 것을 다 팔아 가난한 사람들에게 주고 당신을 따라야
얻을 수 있는 것이라고.
주님을 따른다는 것은 두 가지입니다.
하나는 주님의 모범을 따르는 것이고,
다른 하나는 모범이 아니라 아예 주님을 따라나서는 것입니다.
주님의 모범을 따라 이웃 사랑을 실천하는 것이고,
주님을 따라 하느님께서 계신 천국으로 가는 것입니다.
부자 청년과 오늘 복음의 부자는 두 가지 다 실패한 것이고,
그래서 천국에 가지 못하고 이 세상에서의 단절이
저승에서도 그대로 이어지는 영원한 단절의 지옥에 간 것입니다.
행복도 하느님께서 주시는 겁니다.
구원은 하느님만이 주시는 겁니다.
이것을 믿는 사람이 신앙입니다.
그래서 사람에게 의지하지 않고 하느님을 신뢰하는 사람이 신앙인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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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50320. 사순 제2주간 목요일. 호명환 가롤로 신부님.
CAC 매일묵상
환대: 거룩한 실천!
하느님의 숨
2025.03.19. 16:46
CAC(Center for Action and Contemplation) 리처드 로어의 매일 묵상 - 2025년 3월 19일 수요일 (호명환 번역) 열두 번째 주간: 낯선이를 환영하기
환대는 하느님 은총으로부터 나오는 그리스도인 삶의 심장부입니다.
신학자 크리스틴 폴(Christine Pohl)은 성경에 나오는 환대의 소명에 대해 성찰합니다:
환대가 활력 있게 실천되는 공동체들은 소속되고자 하는 인간의 깊은 갈망을 끌어내 주고 자신들의 선물을 나누게 해 주는 장소가 됨으로써 그 자체로 중요한 가치를 지니게 됩니다. 환대의 실천은 공동체 구성원이 다른 사람들에게 열려 있고, 또 그들의 통찰력과 필요, 그리고 기여에 열려 있고자 하는 기꺼움을 반영해 줍니다. 환대하는 공동체들은 다른 사람들이 없이는 자기들이 불완전하다는 것을 인식할 뿐 아니라, 자기들이 다른 이들과 나눌 "보화"를 지니고 있다는 사실을 인식하는 공동체들입니다.
환대는 하느님 은총에 나오는 그리스도인 삶의 핵심으로서, 하느님의 은혜로우심을 반영해 줍니다. 환대를 통해 우리는 하느님께서 제공해 주시는 환대에 응답하고, 이 세상에서 이 하느님의 환대를 재현하는 것입니다. 오늘날 환대에 대한 이해가 대개 식당과 호텔 사업, 커피와 간식을 제공하는 교회, 잘 계획된 만찬 연회 등에 한정되는 반면, 환대를 실천하는 것 그 자체는 성서적으로나 역사적으로 그리고 신학적으로는 훨씬 더 실질적이고 중요한 의미를 지닙니다.
환대의 실천은 공동체들이 다른 이들에게 손을 뻗치고 자기들 내부의 관계성들을 강화하기 위해 일하는 데 있어 중요한 역할을 합니다. 공동체는 또한 환대의 실천에 있어 매우 중요합니다. 공동체 내에서 낯선 사람을 환영하는 사람들은 일과 축복을 공유하고 전체적인 전망을 견지하게 해 주며 휴식과 쇄신을 위한 기회를 줄 친구들을 찾을 수 있게 됩니다. [1]
목사요 사회 활동가인 산드라 마리아 판 옵스탈(Sandra Maria Van Opstal)은 환대를 우리가 행하는 어떤 것에서 우리인 바의 표현으로 넓혀 가도록 교회에 도전을 던져 줍니다:
행함에서 존재함으로의 이런 전이 혹은 여정이란 무엇을 의미할까요? 여기에는 성령과의 관계는 물론이고 우리와는 다른 모습의 사람들 혹은 우리의 경험을 나누지 못하는 사람들과의 관계성을 깊게 해 주는 그 무엇이 들어 있습니다. 우리가 행함에서 존재함으로 우리의 초점을 바꿀 때 우리 공동체는 더욱 충만하게 성경이 우리에게 요청하는 그런 공동체가 될 수 있습니다. 비록 우리가 "우리는 여러분을 환영합니다." 하고 말하는 환대에서 시작한다 해도, 성서는 우리에게 그러한 장소가 되는 것에서 연대라는 것(우리는 여러분과 함께 서 있습니다.)을 통해 궁극적으로 상호성(우리는 여러분이 필요합니다.)으로의 이전을 요청합니다. 여기에서 우리는 예수님을 따르는 이들의 공동체로서 성서가 요청하는 하느님의 사람들이 되기 위해 서로를 얼마나 절실히 필요로 하는지를 이해하게 됩니다....
우리가 환대에서 상호성으로의 이 여정을 일방통행으로 생각하는 경향이 있는데, 사실 그리스도 안에서의 우리 삶은 그렇게 일직선적으로 이루어지는 것 것과는 전혀 거리가 멉니다. 예수님은 온갖 방식으로 이 상호성의 예를 보여주셨습니다: 그분이 말씀하신 이야기들 안에서, 그분이 다른 이들과 관계를 맺는 방식에서, 그리고 심지어는 그분이 돌아가신 방식 안에서마저도요. 교회가 매일의 삶에서, 특별히 이주민들과 난민들을 대하는 방식에서 상호성을 구현해 갈 때, 우리는 함께 애통해하고, 함께 기념하며, 함께 배우는 법을 배우게 됩니다. 궁극적으로 이런 상호성이 바로 하느님께서 [당신의] 피조물 전체를 위해 바라시는 치유와 온전함을 이루어 줄 것입니다! 그리고 이것은 그리스도의 사랑을 반영해 주는 행위일 뿐 아니라 그 사랑의 반영을 이 세상에 존재하게 하는 것이기도 합니다. 이것이 바로 교회의 소명입니다; 그리고 이것이 바로 말로만이 아니라 [그리스도의] 몸의 지체들인 우리의 상호 정체성 안에서 그리스도를 증거하는 것입니다. [2]
우리 공동체 이야기
저는 티베트 전통을 따르는 불교도입니다. 그리스도인 친구 하나가 리처드 로어의 매일 묵상에 대해 저에게 말해 주어서 저도 이 매일 묵상을 구독하기 시작했습니다. 저는 그리스도교의 관상 전통이 우리 신앙 전통과 많은 면에서 맥을 같이한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습니다. 특별히 하나 됨과 사랑에 중심을 두는 측면에서 말입니다. 제가 처음으로 읽은 매일 묵상은 바바라 매허니(Barbara Mahany)의 로렌스 수사의 저술 "자연의 책"에 관한 묵상(Barbara Mahany's reflections on Brother Lawrence’s “Book of Nature.”)이었습니다. 제가 저의 불교 명상 그룹에 이 묵상 글에 나오는 몇 가지 핵심 메시지를 전해 주었더니, 우리 그룹의 인도자가 눈물을 흘리더군요. 이 내용이 우리 그룹 게시판에 올라와 있습니다. 이 심오한 인간성의 원천을 나눠 주신 데 대해 감사드립니다.
—Richard H.
[1] Christine D. Pohl, Living into Community: Cultivating Practices That Sustain Us (Eerdmans, 2012), 159–160.
[2] Sandra Maria Van Opstal, “Beyond Welcoming,” in No Longer Strangers: Transforming Evangelism with Immigrant Communities, ed. Eugene Cho, Samira Izadi Page (Eerdmans, 2021), 69, 83.
Image credit and inspiration: Lucas Dalamarta, Untitled (detail), 2024, photo, Unsplash. Click here to enlarge image. 알지 못하는 존재와 함께 할 때 우리는 다른 이들을 위해 열린 마음으로 공간을 마련하고 함께 나아가는 수양을 할 수 있습니다. 그 결과를 우리가 알지 못한다 하더라도 말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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숨영성 묵상글
이제 우리는 홍익인간(弘益人間)의 마음을 되찾아야 합니다!
하느님의 숨
2025.03.20. 05:42
부자와 라자로. 이는 라틴어로 Dives와 Lazarus인데, Dives는 이름이 아니라 그냥 부유한 사람이라는 라틴어입니다. 신약성경이 본래 그리스어로 쓰였기에 이 단어는 그리스어 'plousios'의 번역어입니다. 그러니까 루카 복음 저자는 이 부자에게 이름을 붙이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이 가난한 사람에게는 라자로라는 이름을 붙여 주었습니다. 라자루스(Lazarus)는 히브리어 Eleazar(엘레아자르)에서 온 이름인데, El은 '하느님'을, azar는 '돕다'라는 뜻을 지니고 있기에 이 이름의 뜻은 "하느님께서 도우셨다."입니다.
성 아우구스티노는 이와 관련하여 이런 말을 하였습니다. "예수님은 부자의 이름에 대해서는 침묵을 지키시지만, 가난한 사람에게는 이름을 붙여 주셨습니다. 부자의 이름이 주변 사람들에게 더 잘 알려져 있었을 테지만, 하느님은 그 이름에 대해 침묵을 지키십니다. 그러나 사람들이 전혀 알아주지 않아 그 이름이 어둠 속으로 사라져 버린 가난한 사람의 이름은 하느님께서 언급해 주십니다. 놀라지 마십시오.... 하느님께서는 하늘 나라에 그 이름이 적혀 있지 않은 부자의 이름에 대해서는 침묵을 지키시는 것이고, 그 이름을 하늘 나라에 적어 놓으라고 친히 이르신 이 가난한 사람의 이름에 대해서는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그렇지만 이 이야기의 메시지는 부유함이 우리에게 가져다주는 문제와 관련되어 있습니다. 일전에도 말씀드렸듯이, 이 이야기의 중심 주제는 사실 라자로가 아니라, 부자와 관련되어 있습니다. 말하자면 가난하고 불행하게 살면 하늘 나라에게 갈 수 있다는 것이 이 이야기의 주제가 절대 아닙니다. 오히려 자기가 소유하고 있는 것을 자신과 혼동하고 있는 부자는 자신의 진정한 자아를 볼 수 없을 뿐만 아니라, 하느님 앞에 벌거벗겨진 순수한 자신의 모습과 '부유함'을 혼동하고 있기에 다른 이들의 본질적인 모습도 볼 수 없었다는 점에 있습니다.
가만히 살펴보면 이 부자가 어떤 나쁜 짓을 했다는 이 비유에 전혀 나오지 않습니다. 그러니까 이 부자가 가난한 거지 라자로를 내쫓았다거나 그를 괴롭혔다는 내용은 전혀 포함되어 있지 않습니다. 그가 저승의 불길 속에서 고초를 겪을 만한 죄를 짓지 않았는데, 이게 웬말인가요?
그러므로 이 비유의 핵심 메시지는 자신이 소유한 것을 자신으로 보는 데 큰 문제가 야기된다는 것입니다. 자신이 가지고 있는 것과 자신을 혼동해서 자신의 본 모습, 즉 하느님께서 당신의 모상으로 소중하고 아름답게 창조해 주신 자신의 진정한 모습을 볼 수 없기에 다른 이들도 그렇게 볼 수밖에 없다는 것입니다. 여기서 '소유하는 것'이란 단순히 물질적인 것이나 돈과 관련되어 있는 것만이 아닙니다. 자신이 이룬 성과나 업적, 혹은 자신의 노력으로 만들어냈다고 여기는 재능이나 지위 등도 여기에 해당됩니다.
우리가 있는 그대로의 우리 자신을 볼 수 없다면 다른 존재에 대해서도 우리는 같은 관점으로밖에 볼 수 없게 되고, 한 인간으로서 가지고 있어야 할 존엄성과 품위 등에 대해서는 아랑곳하지 않을 수 있다는 것입니다. 제가 자주 말씀드리는 대로 이렇게 되면, 즉 소유와 존재를 헷갈리게 되면 다른 존재, 특히 동료 인간에 대한 공감능력이 없어져 다른 사람의 고통을 전혀 볼 수 없는 상태가 되어 버릴 수 있다는 것입니다.
어제 어느 텔레비전 프로그램에서 두 가지 우리 사회의 문제를 연속해서 알려주는 내용을 보게 되었습니다. 하나는 어느 지방에서 40대의 젊은 남성이 그 주변에 있는 식당이나 편의점, 찜질방, 여관 등을 다니면서 행패를 부리고 폭력을 행사했다는 내용입니다. 그것도 연약한 여자들이나 노인들에게 폭력을 행사했다는 것입니다. 물론 이제 그 사람은 구속되어 법의 심판을 기다리고 있기는 하지만, 그 사람의 문제가 분노조절장애에 있다는 것입니다. 그러면서 외국(미국?)의 경우 이런 분조절장애가 생기는 연령대가 10대였는데, 우리의 경우는 4-50대에 이런 사례들이 더 많이 나타난다는 것입니다.
그러고 나서 제가 제목은 잘 기억하지는 못하겠지만 아이들이 초등학교에 들어가기도 전에 무슨 특별한 영재교육 학원들을 다니는 문제에 대한 이야기가 나왔습니다. 이제는 7세 이하의 아이들이 일찍부터 초등학교 고학년 수준이나 그 이상 수준의 교육을 받고 있다는 것입니다. 일찍부터 경쟁 사회 안에서 높은 경쟁력을 심어 주겠다는 부모들의 욕심이 부른 문제입니다!
이 두 가지 문제가 어떤 상관관계에 있다고 생각지 않으십니까?! 그러니까 나이가 어렸을 때는 그냥 하라는 대로 열심히만 하면서 자기들의 능력을 높이는 데 온갖 신경을 쓰다 보니 삶에 대해, '나'의 본질에 대해 깊이 생각할 여지가 전혀 없게 되는데, 어느 정도 나이가 되어서야 그 문제에 봉착하게 되는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우리나라에는 중년층에 분노조절장애 사례가 더 많이 나타나는 이유가 이런 종류의 우리의 욕심에서 나오는 것은 아닐까요?!!
우리가 어려서부터 '사람됨'의 가치를 인식하는 사회 환경에서 살지 못한다면 우리의 미래는 없습니다. 오늘 복음에 나오는 부자와 같은 사람들을 우리는 계속해서 양산(?)해 간다면 우리는 부유한 사회를 만들 수 있는지는 몰라도 참된 인간성이 꽃피는 사회는 만들 수 없을 것입니다. 우리나라 시조인 단군의 건국 이념이 바로 "홍익인간"(弘益人間)이 아닙니까?!
맞습니다. [널리 인간을 이롭게 하는 것]이 오직 우리의 살길입니다. 인간성 회복, 참된 삶의 가치의 회복이 필요한 때입니다. 하느님께서 라자로를 도우시듯이 말입니다!
예전에 [좋은 생각]이라는 잡지에서 이런 내용의 글을 본 적이 있습니다. 정확하게 내용을 다 기억하지는 못합니다만, 대략 내용이 이렇습니다.
이 글을 쓴 사람은 초등학생 딸을 둔 아빠인데, 하루는 자기 딸이 학교에 갔다가 돌아오는데 다친 참새 한 마리를 두 손에 들고 오더랍니다. 참새를 살려야 한다고 하면서 말입니다. 아빠는 잠깐 생각했다고 합니다. 그깟 참새 한 마리가 뭐 그리 대단한가 하는 생각이 들면서도 자기 딸이 생명에 대해 소중해 하는 마음을 잘 지켜 주기 위해 그 참새를 동물병원에 데리고 가서 치료를 해 주었다고 합니다. 거금(?) 7만 원을 들이고서요....
이런 것이 우리가 살리고 촉진시켜야 할 가치가 아니겠습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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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50320. 사순 제2주간 목요일. 조명연 마태오 신부님.
25.03.20 05:30
2019년 통계청의 생활시간조사(5년마다 발표되기에 올해 2024년 생활시간조사가 발표될 것입니다)를 보면 수면과 노동시간을 제외하고 1인 가구 청년(19~34세)의 경우 하루에 3.9시간을 혼자 있지만, 노년(65세 이상)이 되면 7.6시간을 혼자 보낸다고 되어 있습니다. 중장년을 거쳐 노년으로 갈수록 혼자 있는 시간이 늘어나는 것입니다. 그래서 노인의 경제적 빈곤 못지 않게 관계 빈곤이 이 사회에서 큰 문제가 된다고 말합니다.
혼자 있는 것이 더 편하다고 말씀하시는 분이 많습니다. 철학자 프리드리히 니체는 ‘하루의 3분의 2를 자신을 위해 쓰지 못하는 사람은 노예’라고도 했습니다. 그러나 관계의 부재로 외톨이가 되는 것은 커다란 위기감을 느끼게 합니다. 실제로 우울증에 힘들어하는 사람이 얼마나 많습니까? 따라서 혼자 지내는 것이 편할 수도 있지만, 길게 바라보면 관계를 맺으며 사는 삶이 잘 사는 것이라 할 수 있습니다. 그래서 어떤 작가의 이 말이 와닿습니다.
“나는 이 세계에 소속되어 있어요. 필요한 만큼, 그리고 분리돼 있어요. 소외감을 느끼지 않을 만큼.”(김희경, ‘에이징솔로’ 중에서)
‘홀로’와 ‘함께’. 모두 각자에게 중요한 가치가 됩니다. 홀로 하느님과의 만남도 중요하고, 또 함께 하느님과의 만남도 중요합니다. 그런데 상처받았다고, 바쁘다고 ‘홀로’ 그 자체에 머물면서 스스로 힘든 길로 들어서는 사람이 상당히 많아 보입니다. 그리고 특별한 ‘함께’만을 추구하는 사람도 참 많습니다.
부자와 라자로 이야기를 듣습니다. 부자는 이 세상에 살면서 온갖 호화로운 생활을 하였고, 라자로는 너무나 비참하게 살았습니다. 그런데 죽은 다음에는 인생 역전이 되고 말았습니다. 라자로는 아브라함의 곁으로 가고 부자는 저승에서 고통받게 된다는 것이지요. 여기서 우리가 유심히 볼 필요가 있는 것은 부자의 모습입니다.
부자가 악인 같습니까? 죄와 엄청나게 친한 사람이었고, 착한 마음은 전혀 없는 것 같습니까? 아닙니다. 그가 생전에 잔치를 많이 벌인 것을 보면, 사람들에게 좋은 평가를 받았을 것입니다. 또 거지인 라자로를 냄새나고 더럽다고 쫓아내지도 않았습니다. 그리고 저승에 가서도 자기 형제들을 걱정하는 모습도 보입니다. 악인이 아닙니다. 그런데도 그는 저승에서 고통받습니다. 왜 그럴까요?
제외되는 ‘함께’이기 때문입니다. 자기와 친한 사람, 자기에게 잘해주는 사람과의 ‘함께’만을 추구했기 때문입니다. 그 안에서 소외되는 ‘라자로’를 개들이 종기를 핥고 있을 정도로 무시하는 데도 함께하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그렇다면 우리의 ‘함께’를 다시 재조정해야 합니다. 그 누구도 소외되지 않는 ‘함께’가 될 수 있도록 더 신경 써서 바라볼 수 있어야 합니다.나의 욕심과 이기심을 위한 ‘홀로’는 절대 안 됩니다. 모두와 사랑을 나누는 ‘함께’를 살아야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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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의 명언; 사람은 식물과 같다. 빛을 향해 자라난다(호프 자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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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50320. 사순 제2주간 목요일. 이영근 아오스딩 신부님.
오늘 <복음>의 “부자와 라자로의 비유”는 극단적인 두 인물의 대조된 모습을 통해, 불신과 재물의 올가미에 사로잡힌 우리를 하느님의 말씀에로 초대합니다. 이 비유는 이렇게 시작됩니다.
“어떤 부자가 있었는데, 그는 자주색 옷과 고운 아마포 옷을 입고 날마다 즐겁고 호화롭게 살았다. 그의 집 대문 앞에는 라자로라는 가난한 이가 종기투성이 몸으로 누워 있었다.”(루카 16,20)
부자는 가련한 라자로를 거들떠보지도 않으며, 자신과 라자로 사이에 골짜기를 파놓고 분리된 삶을 살았습니다. 그러나 결국, 그가 이승에서 파놓고 건너가지 않은 그 분리의 골짜기는 저승에서도 그가 건너갈 수 없는 분리의 골짜기가 되고 맙니다.
사실, 이 부자는 특별한 악행을 저지르지는 않았습니다. 단지 자신의 재물을 자신의 호화로운 생활과 즐거움을 위해 사용하고, 타인에게는 무관심하고 인색했습니다. 곧 종기투성이의 몸으로 대문 앞에 누워있는 가난한 라자로를 무시하고 무관심했습니다. 그러니 오늘 복음은 악행을 저지르지 않았다고 해서 할 바를 다한 것이 아니라, 선행과 자비를 베풀지 않음이 곧 심판을 받는다는 사실을 말해줍니다. 그래서 야고보 사도는 말합니다.
“좋은 일을 할 줄 알면서도 하지 않으면 곧 죄가 됩니다.”(야고 4,17)
다시 말하면, ‘이웃을 사랑하지 않는 것이 곧 죄’임을 말해줍니다. 그가 심판받은 것은 그가 단순히 부자였기 때문이 아니라, 이웃사랑을 하지 않은 데 있기 때문입니다. 이는 음식을 먹되 나누어 먹어야 하고, 마시되 자신의 혀만 적시는 것이 아니라 남의 혀도 적셔주어야 한다는 것을 말해줍니다. 재물을 소유하지 말라는 것이 아니라, 소유하되 소유당하지 말라는 말씀입니다. 나아가서, 자비를 입어 부자가 되었으니, 가난한 이에게 자비를 베풀어야 한다는 것을 말해줍니다.
그러니 오늘 복음에서 부자가 죽어서 아브라함에게 한 말, 곧 “저에게 자비를 베풀어 주십시오.”(루카 16,24)라는 간청은 ‘제가 자비를 베풀게 해주십시오.’ 라는 간청으로 바뀌어야 할 일입니다. 사실, 부자가 대문 앞에 가난한 이가 종기투성이로 누워있어도 못 본 것은 자신의 호사스러움과 즐거움, 탐욕과 인색에 눈이 가려졌기 때문일 것입니다. 이웃을 사랑하라는 하느님의 말씀을 무시했기 때문일 것입니다. 그러니, 오늘 우리가 형제들 사이에, 또 가난한 이들과의 사이에, 냉대와 무시와 무관심의 골짜기를 파놓아서는 안 될 일입니다. 그것은 곧 저승에서의 골짜기가 되고 말 것이기 때문입니다.
한편, ‘라자로’라는 이름은 ‘하느님이 도와주시는 이’라는 뜻을 지니고 있는데, 이는 라자로가 구원을 입은 것이 그의 가난하고 고통 받은 삶에 대한 보상이 아니라, ‘하느님의 도움과 자비를 입은 것’임을 말해줍니다. 곧 하느님의 호의와 사랑을 입고서 구원받았다는 사실을 드러내줍니다. 그렇습니다. 라자로가 은총을 입은 것은 바로 하느님의 자비였던 것입니다.
그런데 저승에서 처지가 뒤바뀐 부자는 자기 형제들에게 라자로를 보내달라고 청하지만, 아브라함은 이렇게 말합니다.
“그들에게는 모세와 예언자들이 있으니, 그들의 말을 들어야 한다.”(루카 16,29)
부자는 이승에 살고 있는 자신의 형제들의 회개를 위해서 라자로를 보내는 것이 하느님의 말씀보다 더 효과적일 것이라고 말하지만, 아브라함은 이승에서는 이미 하느님의 말씀이 있으니, 그 말씀을 들어야 한다고 말하면서 덧붙입니다.
“그들이 모세와 예언자들의 말을 듣지 않으면,
죽은 이들 가운데서 누가 다시 살아나도 믿지 않을 것이다.”(루카 16,31)
사실, 우리가 당신을 믿지 못함은 기적을 보지 못했거나 듣지 못했거나 체험하지 못해서가 아니라, 듣고 보고 체험하고도 받아들이지를 않는 완고함 때문일 것입니다. 곧 믿음을 일으키는 것은 기적이 아니라, 말씀을 듣고 받아들임에서 옵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는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하느님의 말씀을 듣고 지키는 사람들이 복되다.”(루카 11,28). 아멘.
오늘의 말·샘기도(기도나눔터)
“죽은 이들 가운데서 누가 다시 살아나도 믿지 않을 것이다.”(루카 16,31)
주님!
당신을 믿지 못함은
보지 못해서 아니라, 듣지 못해서가 아니라,
받아들이지를 않은 까닭입니다.
기적을 보고도 보지 못하고 신비를 체험하고도 체험하지 못함은
마음이 완고한 까닭입니다.
하오니, 주님! 완고함과 제 자신을 내려놓게 하소서!
자애심을 내려놓고, 당신이 주님임을 알게 하소서!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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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50320. 사순 제2주간 목요일. 조재형 가브리엘 신부님.
본당 사제로 지내면서 감사할 일이 많습니다. 음식을 직접 만드는 데 익숙하지 않아서 어려움이 있지만, 교우들이 맛있는 음식을 만들어 주실 때가 있습니다. 음식 담은 그릇을 깨끗하게 설거지해서 드리는 걸로 인사를 드리고 있습니다. 가끔 주류를 주시는 분도 있습니다. 미사 때 목소리가 조금 갈라지면 생강차를 주시는 분도 있습니다. 세탁소 하시는 분은 언제든지 옷을 가져오면 드라이클리닝을 해 주신다고 하십니다. ‘당신은 사랑받기 위해서 태어난 사람’이라는 노래가 어쩌면 제게 딱 맞는 노래 같습니다. 신문사에 있을 때는 느껴보지 못했던 과분한 사랑입니다. 사제를 위하는 마음은 한국 공동체가 각별한 것 같습니다. 한국 교회는 박해의 시간을 사제와 교우들이 함께 견디어냈습니다. 교우들은 사제들을 모시고 공소로 다녔고, 공소에서는 사제들을 위해서 음식을 마련했습니다. 사제가 다른 공소로 이동할 때면, 교우들이 모두 문밖으로 나와서 눈물로 이별했다고 합니다. 교회를 위해서, 교우를 위해서 기꺼이 순교의 영광을 받아들였던 사제들이 뿌린 씨앗이 열매 맺고 있습니다.
고령의 프란치스코 교황님의 건강을 위해서 기도하고 싶습니다. 교황님은 관절이 나빠지셔서 휠체어를 타고 다닌다고 합니다. 최근에는 폐렴이 있어서 병원에 입원 치료를 받았다고 합니다. 저는 태어나서 5분의 교황과 함께 살고 있습니다. 2차 바티칸 공의회를 개최했던 요한 23세 교황님. 이스라엘을 방문하였고 2차 바티칸 공의회를 마무리했던 바오로 6세 교황님. 한국을 2번이나 방문하셨던 요한 바오로 2세 교황님, 전통과 교리를 지키려고 하셨던 베네딕토 16세 교황님 그리고 프란치스코 교황님입니다. 4분의 교황님은 하느님의 크신 사랑과 자비로 천상에서 빛나는 신앙의 별이 되었습니다. 프란치스코 교황님에 대해서 저는 3가지 아름다운 기억이 있습니다. 방명록입니다. 2014년 교황님은 124위 복자 시복을 위해서 한국을 방문하였습니다. 교황님은 방명록에 이름을 적었는데 아주 작은 글씨로 구석에다 적었습니다. 교황님의 겸손을 볼 수 있었습니다. 가방입니다. 교황님의 가방은 30년은 넘어 보였습니다. 낡은 가방에서 교황님의 검소함을 볼 수 있었습니다. 자동차입니다. 교황님은 본인이 타실 자동차를 ‘쏘울’로 정했습니다. 소형차를 선택하신 교황님에게서 소박함을 보았습니다. 교황님께서 건강한 모습으로 교회를 이끌어 갈 수 있기를 기도합니다.
오늘 독서는 이렇게 이야기합니다. “주님을 신뢰하고 그의 신뢰를 주님께 두는 이는 복되다. 그는 물가에 심긴 나무와 같아 제 뿌리를 시냇가에 뻗어 무더위가 닥쳐와도 두려움 없이 그 잎이 푸르고 가문 해에도 걱정 없이 줄곧 열매를 맺는다.” 하느님의 뜻을 따르고, 하느님의 말씀에 충실한 사람은 물가에 심어진 나무와 같아서 푸른 열매를 맺고, 하는 일마다 잘될 것이라고 이야기합니다. 그러나 사람의 것을 따르고, 욕심을 따라 사는 사람은 하느님과 멀어질 것이라고 말합니다. 오늘의 복음은 신앙인의 역할을 이야기하고 있습니다. 교회는 가난한 이들, 병든 이들, 외로운 이들, 굶주린 이들의 친구가 되어야 한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부자는 가난한 이들을 도와야 한다고 말합니다. 교회는 가난한 이들의 친구가 되어야 한다고 말합니다. 오늘 복음에서 우리는 한 가지를 배울 수 있습니다. 교회에 다니는 것이 우리를 구원으로 이끌어 주는 필요한 요소이지만, 충분한 것은 아니라는 사실입니다. 우리는 교회에 다니면서, 예수님께서 말씀하셨던 것을 실천해야 합니다. 이웃을 내 몸처럼 사랑하는 것, 하느님께서 자비로우신 것처럼, 우리도 자비로운 사람이 되는 것, 형제들의 발을 씻겨 주는 것입니다. 이런 사랑의 실천이 함께 할 때, 우리는 교회를 통해서 구원받을 필요하고도 충분한 조건을 다 채우는 것입니다.
자유는 하고 싶은 일을 마음대로 하는 것이 아니라, 해야 할 일을 위해서 목숨까지 바치는 것입니다. “나는 사람마다 제 길에 따라, 제 행실의 결과에 따라 갚는다. 바르고 착한 마음으로 하느님 말씀을 간직하여 인내로 열매를 맺는 사람들은 행복하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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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50320. 사순 제2주간 목요일. 민동규 다니엘 신부님.
찬미 예수님
부자는 자신의 삶을 즐겼습니다. 성경에 드러나지는 않지만 어쩌면 태어나면서부터 부자였을지도 모릅니다. 그렇게 부자는 자신이 가진 부를 누렸습니다.
복음에서는 부자의 반대 모습으로 라자로를 등장시킵니다. 부자에게는 부자라는 말만 있을 뿐이고 가난하고 또 가난한 라자로에게는 라자로라는 이름이 있습니다.
왜 성경은 부자의 이름을 기억하지 않고 가난한 사람, 라자로의 이름만을 기억하는 것일까요?
여러분은 부자의 잘못이 무엇이라고 생각하시나요? 왜 부자는 저승에서 고통을 받았을까요? 많은 사람이 부자가 라자로를 돌보지 않았기 때문이라고 답할지 모릅니다. 맞습니다. 그것도 틀린 답은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그런데 어쩌면 라자로가 아닌 다른 누가 와도 부자는 저승의 고통을 피하기 어려웠을 것입니다.
그 이유는 이렇습니다. 아브라함이 부자에게 말합니다.
“얘야, 너는 살아 있는 동안에 좋은 것들을 받았고 라자로는 나쁜 것들을 받았음을 기억하여라.”
아브라함의 이 말에서 우리가 알 수 있는 것은 이것입니다. 부자가 생각했던 부유함이 자신이 이룬 것이든 아니면 태어날 때부터 부유함을 소유했던지 간에 부유함 자체가 하늘에서 내려 준 것이라는 점입니다. 즉 부자는 자신의 부유함과 하늘의 자비를 연결하지 못하고 있었던 것입니다. 그래서 다른 누구에게도 자비롭지 못했던 것이지요. 부자의 첫 번째 잘못은 부유함을 자신의 것으로 생각했던 것입니다.
그대의 것으로 생각되는 것이 그대의 것이 아닙니다. 그러니 늘 감사하고 자비롭기를 주님께서는 복음을 통해 우리에게 들려주십니다.
⭐옛날 개그….
1. 이미 하느님께서는 우리의 바람을 알고 계십니다.
하느님이 그대를 사랑하지 않아서
그대의 기도가 이루어지지 않는다고 생각한다면
경기도 오산입니다.
2. 기도에는 단계가 있습니다.
초보적인 단계를 거쳐 기도에 더 깊이 들어가면
우리는 주님을 만나고 하느님을 뵙길 청할 것입니다.
그것만으로도 모든 것이 만족스러울 수 있기 때문입니다.
그때 우리는 이렇게 말할 것입니다.
이렇게 뵙게 되어 전남 영광입니다.
작은 미소 짓는 하루 되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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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50320. 사순 제2주간 목요일. 이수철 프란치스코 신부님.
하느님 중심의 삶
“무지에 대한 답은 회개뿐이다”
“하느님, 제 마음을 깨끗이 만드시고,
제 안에 굳건한 영을 새롭게 하소서.”(시편51,12)
사람은 무엇인가? 나는 누구인가?
과연 사람이 희망이 될 수 있는지 묻습니다. 오늘 이사야서 후반부 말씀이 깊은 여운을 남깁니다. 사람이, 내가 문제입니다. 누구나 정도의 차이일뿐 문제아問題兒요 살아 있는 생물生物의 나는 나도 모릅니다. 정치 역시 생물이라 하지 않습니까?
“사람의 마음은 만물보다 더 교활하여 치유될 가망이 없으니 누가 그 마음을 알리오? 내가 바로 마음을 살피고 속을 떠보는 주님이다. 나는 사람마다 제 길에 따라, 제 행실의 결과에 따라 갚는다.”
결국 하느님 중심의 삶에로 귀결됩니다. 하느님 중심의 끊임없는 기도의 삶이,회개의 삶이 답입니다. 참으로 알 수 없는 사람의 마음이요, 역시 인간이 물음이라면 하느님이 답입니다. 오늘 옛 현자의 지혜가 좋은 깨달음을 줍니다.
“내가 하는 일이 옳은 것이라면 설사 세상이 나를 돕지 않아도 하늘이 나를 돕는다.”<다산>
“하늘의 뜻이 우리에게 임했으니 두 마음을 품지 말고 근심하지도 말라.”<시경>
정말 이런 믿음으로 사는 자가 하느님 중심의 올곧은 삶입니다. 하느님 중심의 갈림없는 순수한 한마음으로 살라는 것입니다. 오늘 이사야서가 두 삶의 양상을 극명하게 보여줍니다. 과연 나는 어느쪽입니까? 하느님을 떠난 무지한 나 중심의 삶을 사는 자에 대한 묘사요, 이사야를 통해 주님께서 친히 하신 말씀입니다.
“사람에게 의지하는 자와 스러질 몸을 제 힘인 양 여기는 자는 저주를 받으리라. 그의 마음이 주님에게 떠나 있다. 사막의 덤불과 같아 좋은 일이 찾아드는 것도 보지 못하리라. 그는 광야의 메마른 곳에서, 인적없는 소금 땅에서 살리라.”
이런 내면의 삶이라면 아무리 좋은 외적 환경이라도 내면은 지옥일 것입니다. 사실 이런 삶을 사는 이들도 적지 않을 것입니다. 희망없는, 하느님을 내내 잊거나 잃은, 생각이 없는, 영혼이 없는, 의식이 없는 순전히 무지한 자기 중심의 욕망 추구의 육적 삶을 사는 이들이 그러합니다. 바로 오늘 복음의 부자가 그러합니다. 부자의 내면이 이러할 것입니다만 그는 이것도 모를 것입니다. 모르는 이는 알려줘도 모릅니다. 자기를 아는 겸손의 지혜에 이르기는 참 가깝고도 한없이 먼 길입니다.
‘어떤 부자가 있었는데, 그는 자주색 옷과 고운 아마포 옷을 입고 날마다 즐겁고 호화롭게 살았다. 그의 집대문 앞에는 라자로라는 가난한 이가 종기투성이 몸으로 누워 있었다. 그는 부자의 식탁에서 떨어지는 것으로 배를 채우기를 간절히 바랐다. 그러나 개들까지 와서 그의 종기를 핥곤 하였다.’
그림같은 선명한 대조가 우리의 생각을 묻습니다. 어떤 부자는 익명인데 가난한 거지는 라자로는 이름이 있습니다. 라자로 이름 뜻은 ‘하느님께서 도와주신다’를 뜻하며 ‘가난한 이’에게는 잘 들어맞습니다.
정말 어떤 부자가 사람이었다면 그에게 구원의 표징과도 같은 라자로와 나눴을 것입니다. 그러나 공감 능력이 상실한 괴물같은 어떤 부자에게 라자로는 그냥 하나의 사물에 불과했을 뿐입니다. 이런 가난한 이웃들과 무관한 익명의 괴물같은 내면이 황폐된 부자들도 참 많을 것입니다. 이와는 대조적인 하느님 중심의 구원의 삶에 대한 묘사입니다.
‘그러나 주님을 신뢰하고 그의 신뢰를 주님께 두는 이는 복되다. 그는 물가에 심은 나무와 같아 제 뿌리를 시냇가에 뻗어 무더위가 닥쳐와도 두려움 없이 그 잎이 푸르고 가문해에도 걱정없이 줄곧 열매를 맺는다.’
이런 사람이, 하느님 중심에 깊이 뿌리내린 사람이 진짜 행복하고 자유로운, 내적 부요의 살아 있는 참 사람입니다. 이런 뿌리없이, 중심없이 표류하는 사람들이 참 많은 세상입니다. 삶이 두렵고 불안한 것은 이런 믿음의 뿌리가 없기 때문입니다. 아마도 어떤 부자가 이러했을 것이며, 반면 외관상 가난했던 문앞의 라자로는 역설적으로 하느님께 깊이 뿌리내린 가난한 부자요, 내적 자유와 평화를 누렸으리라 생각됩니다.
사후 이들의 처지는 완전히 바뀝니다. 불길 속에서 고통을 겪고 있는 어떤 부자는 아브라함에게 자비를 베풀어 달라 호소합니다. 아브라함 곁에는 라자로가 있습니다. 살아있을 때 기도요 회개요 사랑의 실천이지 죽으면 모두가 끝입니다. 아브라함은 물론 하느님도 어쩌지 못합니다. 그리고 그들 사이에는 넘을 수 없는 큰 구렁이 가로놓여 있으니 이미 살아있을 때부터 형성된 단절과 불통의 구렁입니다.
어떤 부자는 다급하게 라자로를 자신 집에 보내어 다섯 형제가 고통스러운 이곳으로 오지 않도록 경고하게 해 달라고, 그리하여 그들이 회개하게 해 달라고 간청합니다만 아브라함의 대답은 지극히 냉철합니다. 그대로 우리에게 주는, 우리의 회개를 촉구하는 말씀입니다.
“그들이 모세와 예언자들의 말을 듣지 않으면, 죽은 이들 가운데에서 누가 다시 살아나도 믿지 않을 것이다.’
얼마나 회개가 어려운 무지로 굳어진 완고한 마음들인지 오늘날 불신의 사람들을 보면 능히 짐작할 수 있습니다. 과연 거룩한 은총의 사순시기, 나는 누구인지 거듭 묻게 됩니다. 무지에 대한 답은 끊임없는 회개와 배움을 통한 깨달음의 은총뿐입니다. 주님의 이 거룩한 미사은총이 우리 모두 회개의 여정에 항구하도록 도와줍니다.
“주님,
구원의 기쁨을 돌려주시고,
순종의 영으로 저를 받쳐주소서.”(시편51,14).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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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50320. 사순 제2주간 목요일. 상지종 베르나르도 신부님.
<벗이 바라는 때에 벗에게>
“어떤 부자가 있었는데, … 그의 집 대문 앞에는 라자로라는 가난한 이가 종기투성이 몸으로 누워 있었다.”(루카 16,19ㄱ.20)
“부자가 저승에서 고통을 받으며 눈을 드니, 멀리 아브라함과 그의 곁에 있는 라자로가 보였다.”(루카 16,23)
나
몸소
벗에게
나
아쉬운
때가 아니라
벗
애타게
바라는 때에
내
눈길
벗에게
나
건네고픈
때가 아니라
벗
애타게
바라는 때에
내
발길
벗에게
나
가고픈
때가 아니라
벗
애타게
바라는 때에
내
손길
벗에게
나
내밀고픈
때가 아니라
벗
애타게
바라는 때에
나
몸소
벗에게
나
아쉬운
때가 아니라
벗
애타게
바라는 때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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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50320. 사순 제2주간 목요일. 고인현 도미니코 신부님.
✝️ 교부들의 말씀 묵상✝️
“어떤 부자가 있었는데, 그는 자주색 옷과 고운 아마포 옷을 입고 날마다 즐겁고 호화롭게 살았다. 그의 집 대문 앞에는 라자로라는 가난한 이가 종기투성이 몸으로 누워 있었다.
그는 부자의 식탁에서 떨어지는 것으로 배를 채우기를 간절히 바랐다. 그러나 개들까지 와서 그의 종기를 핥곤 하였다.(루카 16,19-21)
자선을 베풀지 않은 부자
자주색 옷을 입은 그 부자는 탐욕을 부렸다거나 남의 재물을 빼앗았다거나 간음을 했다거나 다른 무슨 잘못을 저질렀다는 이유로 비난받는 것이 아닙니다. 그가 저지른 유일한 악은 교만입니다. 사람들 가운데 가장 사악한 자여, 그대 몸의 한 지체가 그대 집 대문 앞에 누워 있는 것을 보면서도 가없은 마음이 일지 않소? 그대 눈에 하느님의 율법이 아무것도 아닌 듯이 보이더라도, 최소한 그대 자신의 처지를 가련히 여기고 두려워할 일이오. 그대 신세가 그 사람처럼 될 수 있오. 그대가 낭비하고 있는 것을 그대 지체한테 주시오. 그대 재산을 모두 버리라는 말이 아니오. 그대가 내버리는 것, 상에서 떨어지는 부스러기를 가난한 이들에게 주라는 말이오.
-히에로니무스-
✝️ 생태 영성 영적 독서✝️
마이스터 엑카르트는 이렇게 말했다(대지를 품어 안은 엑카르트 영성) / 매튜 폭스 해제 · 주석
【둘째 오솔길】
버림과 그대로 둠
설교 17
지성을 버리고 순수한 무지를 경험하라
예수가 열두 살 되던 해에도...(루카 2,42).
우리는 복음서에서 이와 유사한 상황을 접하게 됩니다. 그것은 우리 주님이 우물가에서 한 이방 여인과 정답게 이야기를 나누시던 상황입니다(요한 4,5 이하). 그 이방 여인은 자신의 물동이를 버려 두고 동네로 들어가서,진짜 메시아가 오셨다고 알렸습니다. 동네 사람들은 그녀의 말을 믿지 않았지만, 그녀와 함께 동네에서 나와서, 그분을 직접 뵈었습니다. 그들은 그녀에게 이렇게 말했습니다: 우리가 믿는 것은 당신의 말을 들었기 때문이 아니라 우리가 직접 그분을 뵈었기 때문이오(요한 4,42), 모든 피조물의 지식이나 여러분 자신의 지혜나 여러분의 모든 지식으로는 하느님을 신적인 방법으로 알 수 없습니다. 여러분이 하느님을 신적인 방법으로 알고자 한다면, 여러분의 지식이 순수한 무지가 되어야 할 것이고, 여러분 자신과 모든 피조물을 잊어야 할 것입니다.(354)
✝️ 목요일 성모님의 날✝️
<파티마의 성모 마리아와 목동 / 세 바르따스>
제 5 장 두 천사 세상을 떠나다
성체의 예수님과 함께 희생이 되다
하얀 작은 무덤
그로부터 15년 후 1935년 9월 12일 알비야젤 가문에서 축복의 원천이라고 소중하게 공경해 오던 유해가 그 가문의 열렬한 간청에도 불구하고 레이리아의 주교의 명으로 파티마의 묘지로 옮겨지게 되었다. 레이리아 주교는 이 유해를 맞이하기 위해 작은 흰 묘를 준비하였던 것이다.
이 유해의 이장에 앞서 우렘의 묘지에서 관 뚜껑을 열어 보았을 때 참석자 모두는 여간 놀라지 않았다. 히야친따의 얼굴은 완전히 생전 그대로 남아 있었다.
우리가 알고 있는 히야친따는 전염성 병으로 사망하였으므로 매장 규정에 따라 시신에 석회를 덮었기에 사람들의 놀람은 한층 더 컸던 것이다.
너무나 조심스럽게 관을 열었었기 때문에 몸 전체도 얼굴과 마찬가지로 부패를 면했는지 어쩐지를 미처 확인할 수도 없었다.
참석자는 천과 신심물을 작은 유해에 갖다 대고 판을 다시 덮은 후 장송 행렬은 파티마의 묘지를 향해 갔다.
행렬이라고 말을 했으나 네 대의 자동차 뿐이었다. 남작과 그의 아들은 영구차에 탔고 다음에는 흰 영대를 두른 두 분의 사제, 세번째와 네번째는 히야친따의 가족과 친척이 되는 여러 명의 부인들이 탔었다.
그 옛날 어린 죄수였던 히야친따는 다시 우렘 시가를 지나갔다. 이 시가는 지난 1917년 그러니까 18년 전의 그 옛날 광기 어린 과격 당원 군수가 어린이들의 충절을 꺾으려고 갖은 방법을 다해 고문을 했던 곳이었다. 이어 파티마의 언덕길을 올랐다.(19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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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50320. 사순 제2주간 목요일. 굿뉴스 게시판-우리 묵상 체험
생활묵상 : 회계학을 공부하면서 새삼 깨닫는 신앙의 교훈
강만연 [fisherpeter] 2025-03-19 ㅣNo.180873
요즘 개인적인 사정으로 회계학을 틈틈히 공부를 하면서 깨닫는 거라고 하는 표현을 하긴 좀 그렇지만 많이 반성을 하는 게 있습니다. 전혀 신앙과는 상관없는 분야인데도 저는 회계학 이 학문을 신앙의 눈으로 보려고 합니다. 그렇게 하려고 해서 그런 게 아니라 어쩌다 보니 이게 저는 천주교에서 가르치는 신앙의 교훈과 또 교리도 고스란히 있는 걸 발견해 참 신비롭다는 걸 느낍니다. 특히 우리는 부활 신앙을 가지고 있는데 수리적인 학문인데 부활도수 잘 와 닿을 수 있는 그런 부분도 있었습니다. 제가 2년 전 이맘때에 회계학을 잠시 공부를 한 적이 있었습니다. 사실 저는 공부를 하면서 이 내용도 내용이지만 부수적인 현상을 가지고 길을 걸을 때 많이 묵상한 게 있었습니다.
그게 신앙과는 전혀 관계없는 내용인데 이걸 신앙과 견주어 생각해보면 많은 도움이 될 것 같아 소개를 해드리고 싶습니다. 국내에 보면 회계학 과목을 가지고 자격시험을 보는 게 좀 많이 있습니다. 공인회계사, 세무사, 관세사, 감정평가사 등등 있습니다. 유튜브를 보면서 부분 부분 저명한 강사의 팁을 참조하면서 공부를 합니다. 어떤 공통점이 있는 이야기를 하는 걸 느낍니다. 쉽게 말해서 자신도 처음에 회계학을 전공해 배울 때 혼돈스러운 부분이 있었다는 것입니다. 이게 좀 일반적인 학문과는 특이한 면이 있습니다. 개념을 잡는 게 생각보다 추상적인 면이 많아 어려울 뿐만 아니라 또한 수리적인 감각도 있어야 합니다.
회계사 세무사가 사용하는 수학은 단순 사칙연산만 사용하면 되긴 되는데 만약에 실제 회계학 지식이 어느 정도 쌓인다고 해도 수리적인 센스가 느리면 힘듭니다. 만약에 시험에서는 고전을 할 수 있습니다. 이건 시간 싸움이기 때문입니다. 다른 이 세상의 학문도 휘발성이 강한 분야가 있는데 특히나 이 회계학 공부는 모든 회계학 선생이나 실제 회계를 공부하는 사람이라면 다 피부로 느끼는 것 같습니다. 대개 전문 공인회계사가 아니면 과락을 면하는 걸 목표로 할 정도로 힘들어 하는 입니다. 휘발성이 강하다는 건 말 그대로 공부를 해도 순간을 아는데 시간이 지나면 날라가버린다는 것입니다.
자기가 자기펜으로 직접 풀이를 해 계산을 해 답을 구했는데 어느 정도 지나서 한참 다른 걸 풀다가 또 다시 그걸 풀려고 보면 분명 풀이를 적고 했는데 이게 어떻게 해서 이렇게 계산을 했는지 만약에 풀이 과정을 보면서 그걸 말로 전부 메모로 남기지 않으면 대부분 회계를 공부하는 사람들의 공통점이 바로 이건 것이라고 합니다. 그래서 많은 회계 1타 경험자들이 하는 말이 있습니다. 회계의 전 과정이 자기 몸에 체화가 될 때까지는 계속 조금씩이라도 책을 놓아서는 안 된다는 것입니다. 그러면서 계속 일정부분 문제를 통해 계속 푸는 감을 유지를 하지 않으면 안 된다는 것입니다. 이론은 처음엔 어렵지만 감만 잡으면 쉽는데 이게 또 이론을 안다고 해서 되는 게 아니고 어떻게 개념을 잘 잡아서 핵심을 파악해 하지 않아도 되는 계산을 하는 실수를 줄여야 합니다.
그렇게 하기 위해서는 아예 정형화된 문제풀이 정석이 있는데 그건 사람마다 지도하는 방식이 다 다르지만 그걸 완전히 습득해 이해해서 논리적으로 계산을 하는 게 아니라 그냥 본능적으로 기계적으로 이 문제는 어떤 식으로 접근을 해 풀어야 한다는 걸 문제를 보자마다 그게 머리에 떠오르지 않으면 그 문제는 그냥 포기해야 합니다. 읽다가 시간 보내고 고민하다가 시간보내다 보면 그냥 과락입니다. 이해를 한 다음에는 그냥 속사포처럼 계산을 해야 합니다. 제가 알고 있기로 유일하게 공학용 계산기를 사용하는 회계 시험은 아마 감정평가사시험이 될 것입니다. 그건 그 자체 고유의 특성이 있기 때문입니다.
일반 흔히 말하는 쌀집 계산기를 사용하는 공인회계사나 세무사도 계산은 단순 사칙연산이지만 어떤 경우는 계산기를 사용하기 전에 미리 특정 식에서는 암산으로 해 굳이 계산기를 사용하더라도 계산기 입력 시간을 최소화할 수 있는 수학적인 머리가 있으면 그것도 상당한 도움이 됩니다. 전반적인 이런 모든 걸 잘하기 위해서는 그냥 머리로 이해만 해서는 절대 안 되는 과목이 아마 대한민국에서 회계학이 유일할 것입니다. 가령 어떤 문제를 강사가 풀이를 하는데 이해를 하면 당연히 그 풀이 과정은 이해가 되는데 다 풀이를 한 후에 금방은 뭐 어떻게 나름 기억을 되살려 어떻게 푼다고 해도 이게 다음날 다시 그 문제를 풀려고 하면 어떻게 풀이를 했지 하고 막막할 때가 많이 있습니다.
이건 어려워서 어려운 게 아니고 자기의 머리로 푼 게 아니고 남이 푸는 걸 보고 이해를 하기 때문에 순전히 자기 머리로 사고를 하는 과정이 생략됐기 때문입니다. 많은 회계학을 공부하는 사람들이 착각을 하는 게 바로 이것입니다. 볼 때는 다 알 것 같은데 막상 자기가 풀려고 하면 막히는 게 바로 이런 이유 때문입니다. 저는 이걸 보면서 가장 먼저 떠올린 묵상이 있었습니다. 머리로는 안다고 해도 실천을 하지 않으면 그건 말짱 도루묵과 같은 것입니다. 아무리 하느님 나라 법이 어떻고 어떻다는 걸 잘 알아도 그 나라에 가기 위해서는 실제 자기가 실해을 해보고 해야 합니다. 운전 지식은 말로 해서 운전을 배울 수 있는 게 아니고 실제 자기가 운전을 하지 않으면 절대 되지 않는 것처럼 말입니다.
휘발성이 강하다는 사실에서 묵상한 내용은 다음과 같습니다. 감을 유지하기 위해서 계속 일정부분 회계 문제를 계속 풀어 문제 풀이 감을 손이 기억을 해야 하는 것처럼 우리도 하느님과의 끈을 마치 이렇게 하지 않으면 하느님과의 관계도 보기엔 연결된 상태로 있다고 스스로 착각하며 살 수도 있을 것 같다는 묵상을 엄청 많이 했습니다. 마치 회계학 공부와 같습니다. 우리가 매일 아니면 주일 때 전례에서 만나는 복음과 말씀이 다 아는 것처럼 머리에만 생각하고 그걸 실제 말씀과 함께 그 말씀이 우리의 육신을 제어할 수 있게 우리 스스로가 계속 인식을 하고 몸으로 체화를 해서 그게 진정으로 말씀이 육화가 되야 하는데 말씀따로 육 따로 따로 국밥처럼 되면 실제 우리는 머리로는 하느님 말씀을 다 알고 있고 그냥 뻔한 사실이라고만 생각하는 그 정도에서만 머물고 더 나아가지 않을 수 있게 된다면 우리가 그런 사실을 모를 땐 그게 얼마나 심각한지 전혀 모르고 지낼 수 있다는 사실을 묵상해보면 정신을 바짝 차리지 않으면 안 될 것 같다는 생각도 해봅니다.
마치 회계학 그 감을 잃지 않기 위해 매일 회계학 문제를 풀면서 감을 유지하려고 하는 것처럼 우리도 하느님과의 끈을 자기만의 방법으로라도 어떤 수단을 사용해서라도 어떤 연결고리를 만들지 않으면 우리는 실제는 하느님과 함께 하며 산다고 생각을 했는데 실제는 완전 남남이 만나 남남처럼 사는 게 아닌지 하는 생각도 해보게 된다면 우리가 얼마나 어리석은 삶을 사는지 알 수 있을 것입니다. 제가 드린 말씀을 아마 잘 묵상해보시면 많은 분들이 공감하실 것입니다.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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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50320. 사순 제2주간 목요일, 굿뉴스 게시판-우리 묵상 체험
■ 무관심 탓에 생겨난 저 구렁이를 /
박윤식 [big-llight] 2025-03-19 ㅣNo.180872
무관심에 대한 어느 수도원 이야기다. 당시 수사들은 서로를 너무 미워하였다나. 이에 고민한 원장은 결국 현인을 찾는다. 그는 원장에게 당신 수도원은 ‘예수님 계심’을 잊고 있는데 어찌 기도가 되겠냐며 주문했다. 이에 놀란 원장은 수사들께 이를 전했다. 그러자 그들은 ‘누가 예수님일까?’라며 서로를 관찰하고 혹시나 하며 매우 조바심이었다. 다들 예수님 모시는 심정으로. 행여 잘못한 게 있으면, 당사자를 미리 찾아가 용서청하기도. 이 분위기가 한두 달 지속되자 수도원은 형제애가 넘쳤지만, 예수님을 끝내 찾지를 못했다. 결국 원장은 다시 현인을 찾았다. “그분이 어디 단 한 사람뿐이더냐? 다 예수님이란 생각은 못해!” 라며 그는 불호령이었다.
예수님께서 말씀하신 ‘부자와 라자로의 비유’에서 무관심의 극치를 본다. 부자는 날마다 호화롭게 살았지만, 거지 라자로는 종기투성이 몸으로 부자의 식탁에서 떨어지는 것으로 배를 채우기를 간절히 바랐다. 그러다 라자로가 죽자 천사들이 그를 아브라함에게 데려갔다. 부자도 죽었다. 부자가 저승에서 고통 속에 눈을 드니, 멀리 아브라함과 그 곁에 라자로가 있었다. ‘아브라함 할아버지, 저에게 자비를 베풀어 주십시오. 그를 보내시어 손가락 끝에 물을 찍어 제 혀 좀 식히게 해 주십시오. 제가 이 불길에서 고초를 겪고 있습니다.’라고, 그가 소리쳤다.
그러자 아브라함이 말하였다. “얘야, 너는 사는 동안 좋은 것 모두를, 이 라자로는 나쁜 것들을 죄다 받았음을 기억하라. 그래서 그는 여기서 위로를, 너는 거기서 고초를 겪는 거다. 게다가 우리와 너 사이에는 저렇게 큰 구렁이 있어, 여기에서 너희 쪽으로 건너가려 해도 갈 수 없고, 거기에서 우리에게 올 수도 없다.” 사실 이 비유에서 부자의 잘못은 전혀 없다. 그가 부당한 방법으로 재산을 모았다거나, 다른 이에게 피해를 주었다는 것도 없다. 자기가 지닌 재력으로 권세를 부렸다는 것도 거지 라자로를 못살게 군 건 더더욱 없다. 다만 부스러기라도 주워 먹는 그를 방관만 했다. 그가 지탄받아야 한다면, 그것은 바로 이웃에 대한 무관심일 게다.
그렇다. 그는 거지 라자로가 자기 집 대문 앞에서 종기투성이 몸으로 누워 있는 것을 못 볼 수가 없었으리라. 그러나 그는 날마다 호화롭게 살면서도 라자로가 죽기까지 눈길 한번 전혀 주지 않았다. 그의 고통에 대해 아예 관심이 없었던 것이다. 조금이라도 그에게 ‘관심을 가졌다면’ 라자로가 그렇게 처참히 죽지는 않았으리라. 라자로는 대문 앞서 부자에게 끊임없이 회개할 기회를 주었다. 그러나 그는 천국으로 넘어가는 그 쉬운 사다리 타는 절호의 호기를 스스로 저버렸다. 그래서 그는 위로받는 라자로 앞에서 고초를 겪는 것이다. 무관심으로 버려진 것들이 저 세상 어딘가에서 우리 관심으로 나타남을 아브라함 할아버지의 꾸중에서 되새기자.
이처럼 이름조차 모르는 부자보다, 라자로라는 이름을 가진 가난한 이가 더 기억됨을 새기자. 우리는 이 세상 것이 그대로 저세상 것이 되는 게 아니란 걸 되새겨야 한다. 지금 무관심이 큰 구렁이를 만든다. 메워져야 할 큰 구렁이가 곳곳에 너무나 많이 깔렸다. 무관심에서는 결코 구렁이는 메워지질 않는다. 이것들을 우리는 애정 어린 관심으로 메워야 한다. 지금도 우리의 무관심으로 만들어지는 아무리 작은 구렁이도 만들지 않도록 가까운 이웃으로 우리 눈길을 돌리자. 자신만 아는 이는 점점 이웃과 거리 둘게다. 이웃과 스스로 구렁이를 파는 것이다. 이 구렁이가 점점 크고 깊어지면 어떻게 될까? 결국 이웃은 물론이고 하느님께도 갈 수 없는 상황에 놓이게 되는 건 아닐까? 그러기에 더 늦기 전에 나눔과 배려의 의무를 다해야만 할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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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50320. 사순 제2주간 목요일. 한창현 모세 신부님.
오늘 복음은 저승에 간 부자의 이야기로, 우리에게 생각 거리를 전합니다.
저승에서 고통을 받던 부자는 처음에는 자기 처지에만 집중하고, 자신의 고통을 해결해 달라며 소리 지릅니다.
그러나 자신이 고초를 겪어야만 한다는 사실을 받아들이고 나서는 자기 형제들이 자신과 같은 상황에 놓이지 않게 해 달라고 부탁합니다.
관심의 대상이 자신에서 형제들로 바뀐 것입니다.
그리고 부자는 형제들에게 죽은 사람이 살아서 가지 않으면 그들이 회개하지 않을 것임을 깨닫습니다.
부자는 저승에서 고초를 겪으면서 자신이 어떻게 살았는지 알게 됩니다.
부자가 즐겁고 호화롭게 사는 동안, 그의 대문 앞에 가난한 라자로가 종기투성이의 몸으로 누워 있었습니다.
심지어 부자의 식탁에서 떨어지는 것으로라도 배를 채우기를 바랐습니다.
만일 부자가 가난하고 병든 라자로에게 마음을 썼더라면, 자신이 누리고 있는 모든 것이 하느님께서 주신 것임을 깨달았을 것입니다.
그런데 부자는 라자로가 자기 주위에 있다는 사실조차 몰랐습니다.
예수님께서는 부유한 사람들이 불행하다고 하십니다.
그리고 그것은 그들이 이미 위로를 받았기 때문이라고 말씀하십니다(루카 6,24 참조).
부자는 자신의 재물로 위로를 받는 데 만족하였습니다.
부자는 날마다 즐겁고 호화롭게 사는 것으로 위로받고, 더는 주위를 둘러볼 생각을 하지 않았습니다. 부자가 저승에서 겪는 고초는 하느님을 본받아 사랑을 실천할 기회가 있었음에도 이를 깨닫지 못하고 살았다는 뉘우침의 다른 표현입니다.
살아 있는 형제들이 늦기 전에 하느님의 사랑을 실천하기를 바라는 부자의 마음이 우리에게도 전해져야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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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하 자료는 보관을 위해 추가 첨가한 자료입니다
(20:4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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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50320. 사순 제2주간 목요일. 김명겸 요한 신부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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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50320. 사순 제2주간 목요일. 한상우 바오로 신부님
."그는 이제 여기에서 위로를 받고 너는 고초를 겪는 것이다."(루카 16, 26)
눈에 보이는
모든 것들이
사라지고
없어질 것입니다.
천년만년
영원한 것은
이 세상에
없습니다.
죽음이라는
변화가 있기에
우리가
가야할 길을
우리는
알게 됩니다.
죽음은
그 누구의
것만이 아닌
우리 모두의
것입니다.
라자로의 눈물을
닦아주고
아픔을 위로하는
우리의 마음이
중요합니다.
우리의 마음과
우리의 생명을
다시금
묵상하게 되는
사순시기입니다.
어떻게
살아가느냐에
따라서 이어지는
삶도 달라집니다.
예수님께서는
또 다른 삶이
있음을
가르쳐주십니다.
이것을
잊어서는
안됩니다.
하느님께로
돌아가는
죽음이며
사랑의 삶을
되돌아보며
반성하는
죽음입니다.
삶과 죽음은
서로를 향해
있습니다.
영원하신
하느님만이
우리의
삶과 죽음을
안아주십니다.
십자가가
지나가는
시간 안에
우리가
있습니다.
십자가의
우리 삶을
어루만져주시는
하느님이 계십니다.
라자로의 고통을
라자로의 슬픔을
이제 여기에서
위로를 받습니다.
이름 없는
이름을
부르는 것이
회개가 아니라
다시 돌아갈 곳이
하느님뿐임을
알고
우리의 삶이
바뀌는 것이
회개입니다.
우리 존재의
소멸이 아니라
우리 모두를
구원하시는
하느님만이
존재할 뿐입니다.
구원하시는
위로하시는
하느님 안에
우리가
있습니다.
우리의
삶과 죽음을
함께 봉헌하는
십자가의
여정입니다.
서로의 노고와
고초를 위로하는
은총의 날
되십시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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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50320. 사순 제2주간 목요일. 양승국 스테파노 신부님.
돈은 돈다고 해서 돈입니다!
부(富)는 사실 좋은 것입니다.
어느 정도 재물이 있어야 인간적인 품위도 유지할 수 있습니다.
돈이 있어야 궁핍한 이웃과 나눌 수 있습니다.
봉사활동을 하는 데 있어서도 어느 정도 돈이 필요합니다.
열심히 일해서 모은 돈, 그리고 건전한 방법으로 축척한 재물은 주님의 축복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건전한 재물로 인생을 즐기는 것도 참 좋은 것입니다.
내가 매일 땀 흘려 모든 돈으로 여행도 다니고, 하고 싶은 취미생활도 하고 삶을 만끽하는 것은
주님께서 바라시는 바이기도 합니다.
예수님께서 경고하시는 것은 재물에 대한 과도한 집착입니다.
돈이면 다, 돈이 최고라며 돈에 모든 것을 거는 그릇된 신조입니다.
재물을 주님이나 신앙보다 더 위쪽에 두는 황금만능주의를 질타하시는 것입니다.
돈 좀 있다고 해서 없는 사람 업신여기는 부자들, 가까운 동료 인간들이 저리도 경제적 어려움 앞에
저리도 힘겨워하고 있는데 ‘나 몰라라’ 하는 부자들, 가난한 이웃들을 향한 측은지심이라고는
손톱만큼도 없는 부자들을 향한 예수님의 경고는 강력합니다.
“애야, 너는 살아 있는 동안에 좋은 것들을 받았고 라자로는 나쁜 것들을 받았음을 기억하여라.
그래서 그는 이제 여기에서 위로를 받고 너는 고초를 겪는 것이다.
게다가 우리와 너희 사이에는 큰 구렁이 가로놓여 있어, 여기에서 너희 쪽으로 건너가려 해도 갈 수 없고 거기에서 우리 쪽으로 건너오려 해도 올 수 없다.”(루카 16, 25-26)
주님께서 오늘 부자들에게 바라시는 바가 한 가지 있습니다.
이쪽과 저쪽 사이에 다리 하나를 놓는 것입니다. 부자들의 세상과 가난한 사람들의 세상을 갈라놓은 구렁 그 위에 다리는 하나 놓은 일입니다.
사랑의 다리, 관심의 다리, 나눔의 다리, 측은지심의 다리...
주님으로부터 버림받았다고 여겼는데 천국에서 주님 품에 안겨 호강을 하고 있는 라자로입니다.
반대로 주님으로부터 큰 축복을 받았다고 확신했던 부자는 지옥 불의 고통 속에서 울부짖고 있는 모습을 보면서 한 가지 영원불변의 진리를 떠올립니다.
주님의 생각과 인간의 생각은 다르다는 것입니다.
주님의 방식과 인간의 방식은 다르다는 것입니다.
주님의 관점과 인간의 관점은 다르다는 것입니다.
부자와 라자로의 비유 말씀을 듣고 걱정하실 분들이 계실 것입니다.
어느 정도 선이라야 부자라고 할 수 있을지 모르겠지만, 나름의 부를 축척하고 계신 분들!
그러나 걱정할 필요가 하나도 없습니다.
예수님으로부터 지탄받고 저승에서 영원한 고통을 겪을 부자는 조금도 나눌 줄 모르는 인색한 부자였습니다.
지척에서 고통받고 있는 동료 인간을 향한 자비심이라고는 손톱만큼도 없었던 사람이었습니다.
가장 가까운 사람들을 향한 갑질과 횡포, 고성과 폭력이 일상인 분들, 지금이라도 지난 부끄러운 삶을 성찰하고 회심하며, 새 삶을 시작할 때, 늦었지만 주님께서는 그들도 축복하실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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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50320. 사순 제2주간 목요일. 조욱현 토마스 신부님.
복음: 루카 16,19-31: 아브라함이 라자로를 품에 안고 있었다
자주색 옷을 입은 부자의 잘못은 다른 것이 아니다. 그는 라자로라는 거지가 종기투성이로 대문 앞에 누워 있는 것을 보았지만 가엾은 마음을 가지지 않았다. 자기 재산을 모두 버리라는 것이 아니었다. 그가 식상에서 내버리는 빵부스러기라도 그 거지에게 주었어야 했다. 아무 동정도 받지 못한 라자로는 굶주린 배를 채우기 위해 부자의 상에서 떨어지는 부스러기라도 먹으려 했다. 게다가 불치의 병이 그를 괴롭혔다. 개들조차 그의 종기를 핥으며, 그를 해치지 않고 돌보고 있다. 그런데 부자는 개들보다 잔인했다. 라자로를 가엾이 여겨주지도 않았고 무자비하게 굴었기 때문이다. 오늘 복음에서는 하늘에서의 삶과 영원한 형벌에 대하여 말하고 있는데, 그것은 내가 선택한 삶에 관한 결과이다. “너는 살아 있는 동안에 좋은 것들을 받았고 라자로는 나쁜 것들을 받았음을 기억하여라. 게다가 우리와 너희 사이에는 큰 구렁이 가로놓여 있어.”(25-26절) 라고 하신다. 이 구렁은 서로 반대되는 삶을 선택한 데 대한 심판이다. 하느님의 뜻에 역행하는 삶을 선택하면 깊고 가늠할 수 없는 구렁을 파고 만다. 주님께서 고통을 겪고 있는 부자에게 자비를 베풀지 않으신 것은 그가 살아있는 동안에 자비를 베풀지 않았기 때문이다.
부자는 살아있을 때 라자로와 그 같은 사람들을 돌봄으로써 그 재물로 친구들을 만들어 두었어야 했다. “이 작은 이들 가운데 한 사람에게 그가 제자라서 시원한 물 한 잔이라고 마시게 하는 이는 자기가 받을 상을 결코 잃지 않을 것이다”(마태 10,42). 부자는 고통을 겪으며 마지막으로 라자로를 자기 집으로 보내어 다섯 형제가 또 이 고통스러운 곳으로 오지 않게 해 달라고 청한다. “아브라함이 ‘그들에게는 모세와 예언자들이 있으니 그들의 말을 들어야 한다.’”(29절) 했을 때, 죽었던 사람이 가야 그들이 회개할 것이라고 하자, “그들이 모세와 예언자의 말을 듣지 않으면, 죽은 이들 가운데에서 누가 다시 살아나도 믿지 않을 것이다”(31절). 이 말씀은 유대인들에게 그대로 이루어졌다. 그들은 모세와 예언자들의 말을 듣지 않았고, 죽음으로부터 부활하신 예수님도 믿지 않았기 때문이다. “너희가 모세를 믿었더라면 나를 믿었을 것이다.”(요한 5,46) 모세와 예언자들은 죽은 이들 가운데에서 부활하실 분이 바로 그분이라고 예언하였다. 아브라함의 말뜻은 바로 이것이다. 부자의 죄는 다른 것이 아니라 이웃의 필요를 보고도 외면한 데 있었다면 오늘의 나 자신은 어떤지 반성하고 우리가 가지고 있는 재물을 잘 사용할 수 있도록 하여야 하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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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50320. 사순 제2주간 목요일. 전삼용 요셉 신부님.
두 삶의 방식과 두 상반된 결과: 십자가와 부활, 부활과 십자가
오늘 복음은 부자와 거지 라자로의 비유입니다. 부자는 지옥가고, 거지는 천국에 간다는
내용입니다.
그러나 이것만으로는 속이 시원하지 않습니다.
왜 그런지 알아야 할 것입니다.
오늘 복음에서는 그 해답을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얘야, 너는 살아 있는 동안에 좋은 것들을 받았고 라자로는 나쁜 것들을 받았음을 기억하여라.
그래서 그는 이제 여기에서 위로를 받고 너는 고초를 겪는 것이다.”
다음은 ‘마크 트웨인’의 소설 『톰 소여의 모험』의 줄거리입니다.
미국 미주리주 미시시피 강가에 위치한 작은 마을 세인트피터즈버그에 톰 소여라는 개구쟁이 소년이 살고 있었습니다.
톰은 일찍 부모를 잃고 고모인 폴리 아줌마 밑에서 자랐는데, 공부는 싫어하고 장난과 모험을 좋아해 언제나 골칫덩어리였습니다.
그는 학교 수업보다는 친구들과 어울려 온갖 말썽을 부리며 놀기를 좋아했습니다.
어느 날 토요일, 폴리 아줌마는 말썽을 피운 톰에게 벌을 주기 위해 마당 울타리를 페인트칠하라고 시켰습니다.
처음에는 마지못해 칠하던 톰이었지만, 곧 묘안을 떠올려 친구들에게 울타리 칠하는 것이 아주 재미있는 일이라고 속여 오히려 친구들로부터 사과, 구슬 등의 물건까지 받으며 일을 시키고 자기는 편히 쉬었습니다.
이 사건을 통해 톰은 자신의 재치와 영리함에 뿌듯함을 느끼면서도, 여전히 삶을 가볍게 여기고 책임감을 가지지는 않았습니다.
그런 톰에게 변화의 시작이 되는 중대한 사건이 벌어집니다.
어느 날 밤, 톰은 마을에서 방랑아 취급받던 친구 허클베리 핀과 함께 공동묘지로 가게 됩니다. 허클베리 핀은 늘 자유롭고 누구의 간섭도 받지 않고 살아 톰이 매우 부러워하던 친구였습니다.
두 소년은 공동묘지에서 죽은 고양이로 사마귀를 치료하려는 미신적인 의식을 하려고 갔다가
우연히 끔찍한 살인 사건을 목격하게 됩니다. 마을의 의사 로빈슨이 인디언 조라는 악명 높은
사람과 머프 포터와 다투는 모습을 숨죽이며 보던 톰과 허클베리는, 인디언 조가 의사 로빈슨을 칼로 찔러 죽이고, 그 죄를 머프 포터에게 뒤집어씌우는 장면까지 전부 보게 되었습니다.
두 소년은 살인을 목격한 충격에 사로잡혀 비밀을 지키기로 맹세하지만, 톰은 이후 계속해서 양심의 가책을 느끼게 됩니다.
이 사건 이후, 톰은 그 죄책감을 잊으려 다시 모험과 놀이에 몰두합니다.
친구 조 하퍼와 허클베리 핀과 함께 해적으로 가장하여 섬으로 도망쳐 며칠을 보내며 마을 사람들이 자신들을 죽었다고 생각하고 장례식을 치르는 장면을 지켜보며 즐거워하기도 했습니다.
그러나 자신을 사랑하는 폴리 아줌마와 마을 사람들이 슬퍼하는 모습을 보며 톰은 자신이 무책임하게 행동한 것을 깨닫고, 다시 마을로 돌아와 사람들 앞에 나타납니다.
톰은 이 사건을 통해 자신의 행동이 다른 사람들에게 얼마나 큰 영향을 주는지 어렴풋이 알게 되었습니다.
그 후 얼마 지나지 않아, 머프 포터가 재판을 받게 됩니다.
톰은 자신이 진실을 알면서도 말하지 않으면 죄 없는 사람이 억울하게 처형당할 수 있음을 깨닫습니다.
결국, 톰은 내면의 두려움을 이기고 법정에서 증인으로 나서, 인디언 조가 진짜 살인자라는 것을 밝히게 됩니다.
법정에서 용기 있게 진실을 밝힌 톰은 마을 사람들에게 영웅이 되었지만, 한편으로는 인디언 조의 복수를 두려워하며 지내야 했습니다.
얼마 후 톰과 허클베리는 보물을 찾는 또 다른 모험을 계획하게 됩니다.
그들은 마을 근처의 낡은 폐가를 탐험하다가 우연히 인디언 조와 그의 공범이 숨겨둔 보물에 대해 이야기하는 것을 듣게 됩니다.
톰은 허클베리와 함께 이 보물을 찾으려고 애쓰지만, 오히려 인디언 조가 자신들을 발견하고 위험에 처할 뻔합니다.
이 과정에서 톰은 점점 자신의 용기와 책임감을 의식하게 됩니다.
이제 톰에게 있어 모험은 단순한 놀이가 아니라, 위험을 감수하고 현실의 어려움을 이겨내야 하는
일로 바뀌게 되었습니다.
어느 날 마을 아이들과 함께 동굴로 소풍을 떠난 톰은, 자신이 좋아하는 소녀 베키와 동굴 안 깊숙이 들어갔다가 길을 잃게 됩니다.
어둠과 공포 속에서 톰은 베키를 위로하고 책임지며, 끝까지 포기하지 않고 길을 찾아 나섭니다.
그 과정에서 톰은 우연히 인디언 조가 동굴 속에 숨어 있는 것을 보게 됩니다.
톰은 가까스로 동굴에서 탈출한 후 마을 사람들에게 이 사실을 알렸고, 인디언 조는 동굴 속에 갇혀 굶어 죽게 됩니다.
마지막으로 톰과 허클베리는 동굴에서 인디언 조가 숨긴 보물을 찾아내어 큰돈을 얻게 됩니다.
뜻밖의 부자가 된 톰과 허클베리는 이 보물을 나누어 갖기로 합니다.
하지만 톰은 돈이 자신을 행복하게 해 주지 않는다는 것을 깨닫고, 더 이상 부유함에 의미를 두지 않습니다.
반면, 허클베리는 갑자기 얻게 된 부와 규칙적인 삶이 부담스러워 다시 방랑의 삶으로 돌아가려고 합니다.
톰은 그런 허클베리를 이해하며, 함께 자유롭게 살기를 제안합니다.
톰 소여의 진짜 모험은 재미를 찾는 데서, 누군가를 구하기 위한 모험으로 바뀝니다.
위 이야기에서 톰 소여는 마냥 놀기 좋아하는 무책임한 소년에서 벗어나 점점 성숙하고 책임감 있는 사람으로 성장합니다.
그는 처음에는 자신의 즐거움만 추구하던 부자 같은 모습에서, 양심의 가책과 어려움 속에서 고통받는 라자로의 모습을 거쳐, 결국 진정한 의미의 삶의 가치를 깨닫고 천국 같은 내면의 평화를 얻는 사람이 되었습니다.
이것을 부자와 라자로를 연결하기 위해 오늘 복음 말씀을 조금 더 깊이 이해할 필요가 있겠습니다.
좀 단어의 뜻을 살펴보는 어려운 과정을 거쳐야 할 것 같습니다.
사실 부자는 좋은 것을 받았고, 라자로는 나쁜 것을 받았다고 표현되어 있는데, 여기에 매우 중요한 단어가 하나 있습니다.
“ἀναπαύεται”(anapaúetai)입니다.
뜻은 “쉬다, 위로를 받다”란 뜻입니다.
라자로가 죽음 뒤에 받는 것이고, 부자는 이것을 받지 못합니다.
구약에서 이 단어는 ‘샤밧’, 곧 ‘안식’, ‘쉼’이라는 뜻으로 사용되며, 하나님께서 창조의 일을
마치시고 안식하신 날을 나타내는 데 사용됩니다. 신약에서는 예수님께서 사용하신 “나는 마음이 온유하고 겸손하니 너희는 나에게 와서 안식을 얻으라.”(마태 11,28)고 하신 말씀에서 이 단어가 등장합니다.
따라서 오늘 복음의 핵심은 안식은 십자가에서 오고, 안식을 찾는 이들에겐 십자가를 준다는
시스템을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부자는 이 세상에서 부활의 쉼과 안식을 찾았고, 라자로는 십자가의 길을 갔다는 뜻입니다.
그러니 이 세상에서 안식을 찾은 부자는 영원한 십자가가 준비되고, 이 세상에서 십자가를 산 라자로에게는 영원한 쉼과 안식이 마련된다는 뜻입니다.
어린 왕자는 장미꽃을 버리고 안식을 누리려다 결국 참된 안식을 누리지 못합니다.
안식은 십자가 뒤에 옵니다.
그러나 사막 여유와의 관계를 통해 안식을 포기하는 법을 배웁니다.
관계를 위해 십자가 지는 법을 배운 것입니다.
부자에서 라자로로 변화되는 것입니다.
그렇게 참사랑을 알게 된 그는 장미꽃에게로 돌아갑니다.
비록 그것이 죽음을 의미하더라도.
그런 죽음은 부활이 예약되어 있기 때문입니다.
중요한 것은 이 세상에서 휴식을 취하고 안식을 누리며 위로를 받으려 하면 타인을 착취하게 되고
게으르게 되어 사랑을 실천할 수 없다는 것입니다.
반면 이 세상에서 안식을 포기하면 다른 이를 편안하게 하고 위로를 주고 휴식을 줄 수 있는
존재가 됩니다.
우리는 이 세상에서 안식을 누리는 삶을 배우는 사람입니까, 십자가를 지는 삶을 배우는 사람입니까?
이 세상에서 숫자 40이 상징하는 십자가의 삶을 살 것인지, 벌써 위로와 안식을 살아서 십자가만 남게 할 것인지는 우리 선택에 달려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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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50320. 사순 제2주간 목요일. 송영진 모세 신부님.
<부자들과 부자가 되고 싶어 하는 이들을 향한 경고입니다.>
“어떤 부자가 있었는데, 그는 자주색 옷과 고운 아마포 옷을 입고 날마다 즐겁고 호화롭게 살았다.
그의 집 대문 앞에는 라자로라는 가난한 이가 종기투성이 몸으로 누워 있었다.
그는 부자의 식탁에서 떨어지는 것으로 배를 채우기를 간절히 바랐다.
그러나 개들까지 와서 그의 종기를 핥곤 하였다. 그러다 그 가난한 이가 죽자 천사들이 그를
아브라함 곁으로 데려갔다.
부자도 죽어 묻혔다.
부자가 저승에서 고통을 받으며 눈을 드니, 멀리 아브라함과 그의 곁에 있는 라자로가 보였다. 그래서 그가 소리를 질러 말하였다.
‘아브라함 할아버지, 저에게 자비를 베풀어
주십시오.
라자로를 보내시어 그 손가락 끝에 물을 찍어
제 혀를 식히게 해 주십시오.
제가 이 불길 속에서 고초를 겪고 있습니다.’ 그러자 아브라함이 말하였다.
‘얘야, 너는 살아 있는 동안에 좋은 것들을 받았고
라자로는 나쁜 것들을 받았음을 기억하여라. 그래서 그는 이제 여기에서 위로를 받고 너는 고초를 겪는 것이다.
게다가 우리와 너희 사이에는 큰 구렁이 가로놓여 있어, 여기에서 너희 쪽으로 건너가려 해도 갈 수 없고 거기에서 우리 쪽으로 건너오려 해도 올 수 없다.’(루카 16,19-26)”
1) ‘부자와 라자로의 비유’는, 부자들을 향한 ‘경고’입니다.
“그렇게 살지 마라. 회개하지 않고 계속 그렇게 살다가는 저승에서 정반대의 처지로 떨어질 것이다.” 라는 경고.
<지금은 부자가 아니더라도, 부자가 되고 싶어 하는 사람들 모두를 향한, 또 물질적으로 풍요롭고 안락하게 살기를 바라는 사람들 모두를 향한 경고입니다.>
바로 앞의 13절에, “어떠한 종도 두 주인을 섬길 수 없다.
한쪽은 미워하고 다른 쪽은 사랑하며, 한쪽은 떠받들고 다른 쪽은 업신여기게 된다. 너희는 하느님과 재물을 함께 섬길 수 없다(루카 16,13).” 라는 말씀이 있습니다.
그리고 14절에는, ‘돈을 좋아하는 바리사이들’이
예수님을 비웃었다는 말이 있고, 15절에는 예수님께서 그 바리사이들을 꾸짖으시는 말씀이 있습니다.
“돈을 좋아하는 바리사이들이 이 모든 말씀을 듣고 예수님을 비웃었다.
그러자 예수님께서 그들에게 이르셨다.
‘너희는 사람들 앞에서 스스로 의롭다고 하는 자들이다.
그러나 하느님께서는 너희 마음을 아신다.
사실 사람들에게 높이 평가되는 것이 하느님 앞에서는 혐오스러운 것이다.’(루카 16,14-15)”
‘부자와 라자로의 비유’는 바로 그들에게 하신 말씀입니다.
2) ‘돈을 좋아하는’이라는 말과 ‘스스로 의롭다고 하는’이라는 말은, 그들이 ‘위선자들’이라는 것을 잘 나타냅니다.
그들은 세속의 부유함을 ‘하느님의 복’이라고 생각했고, 자기들이 부유하게 사는 것은 하느님께서 의인으로 인정해 주시고 복을 내려 주신 덕분이라고 생각했습니다.
그래서 그들은 자기들이 돈을 좋아하는 것에 대해서 아무런 죄의식도 없었고, 스스로 의롭다고 하면서 잘난 체 했고, 가난한 사람들을 무시하고 업신여겼습니다.
<그들은, “가난하게 사는 것은 의인이 아니기 때문이고, 하느님께서 복을 안 주셨기 때문이다.” 라는 지독한 편견과 고정관념에 사로잡혀 있었는데, 사실 그것은 당시 유대인들의 일반적인 생각이었습니다.
그러니 부자들은 대부분 스스로 의인이라고 자처한 위선자들이었고, 가난한 사람들은 순전히 가난하다는 이유만으로 죄인 취급을 받았고, 가난한 사람들 자신들도 자기들이 죄인이라는 생각을 버리지 못하고 있었습니다.
오늘날에도 크게 다르지 않은 것 같습니다.
전에 중요한 상들을 많이 받은 유명한 영화에서,
“부자인데도 착한 것이 아니라, 부자니까 착한 것이다.” 라는 대사가 있었던 것이 기억납니다.>
3) ‘부자와 라자로의 비유’에 나오는 부자는, 적어도 겉으로 보기에는, 특별히 무슨 죄를 지은 것 같지도 않고, 또 나쁜 사람인 것 같지도 않은데, 그렇지 않습니다.
그는 자기 집 대문 앞에 라자로가 누워 있다는 것을 알고 있었고, 오며가며 먹을 것을 던져 주었습니다(21절).
아마도 그 부자는 그것으로 자기 할 일을 다 하고 있다고, 자기는 사랑 실천을 잘하고 있다고 생각했을 것입니다.
21절의 말을 다시 잘 보면, 부자는 라자로에게 먹을 것을 그냥 준 것이 아니라 개들에게 주듯이 던져 주었습니다.
<듣기 거북한 말이지만, 라자로를 ‘개 취급’ 한 것입니다.>
“부자의 식탁에서 떨어지는 것으로 배를 채우기를
간절히 바랐다.” 라는 말은, 부자가 라자로에게 무엇인가를 조금씩 던져 주긴 했지만, 그것은 터무니없이 적은 양이었다는 것을 나타냅니다.
“개들까지 와서 그의 종기를 핥곤 하였다.” 라는 말은, 표현으로는 개들이 라자로를 괴롭혔다는 말인데, 뜻으로는 라자로가 먹는 것을 개들이 가로챘다는 말입니다.
성경에서 ‘개들’이라는 말이 우상숭배자들을 뜻할 때가 많기 때문에(마태 7,6), 여기서도 ‘개들’을 우상숭배자로 생각할 수 있고, 그렇다면 ‘개들’이 라자로를 괴롭혔다는 말은, 부자의 초대를 받고 온 이방인들이(우상숭배자들이) 라자로를
모욕하고 조롱한 것을 나타낸 말로 생각할 수 있습니다.
그 모든 일들은 전부 다 부자의 죄입니다.
4) 부자가 저승에서 한 방울의 물을 아쉬워하고
애원하게 된 것은 ‘인과응보’입니다.
자기가 뿌린 대로 거둔 것인데, 그것은 이승에서
그 부자가 라자로에게 무엇인가를 주었다 하더라도 실제로는 ‘제대로’ 주지 않았음을 나타냅니다.
그 부자가 자기 형제들을 걱정하는 모습을(28절) 좋은 쪽으로 해석해서, 남을 생각하는 마음이 조금은 남아 있었다고 말할 사람이 있겠지만, 그러나 전체 내용을 보면, 그는 저승에서도 여전히 회개하지 않은 채로 자기 가족만 생각하는 이기심을 버리지 못하고 있는 사람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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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50320. 사순 제2주간 목요일. 함승수 세례자 요한 신부님
루카 16,19-31 “우리와 너희 사이에는 큰 구렁이 가로놓여 있어, 여기에서 너희 쪽으로 건너가려 해도 갈 수 없고 거기에서 우리 쪽으로 건너오려 해도 올 수 없다.“
오늘 복음 속 비유에는 ‘라자로’라는 이름의 가난한 병자가 등장합니다. 라자로라는 이름은 ‘엘 아자르’라는 그리스식 이름을 히브리어로 번역한 것인데, 그 이름에는 “하느님께서 도와주신다”는 뜻이 담겨 있지요. 사람은 자기가 받은 이름에 담긴 뜻을 이루면서 살아야 하는데 라자로가 바로 그런 경우입니다. 가진 것 하나 없는 궁핍한 상황, 기대고 의지할 이 하나 없는 가련하고 외로운 처지에도 불구하고, 자신의 처지를 비관하지도, 자기보다 부유하게 살아가는 다른 이들에게 미움과 원망을 쏟아내지도 않고 묵묵히 그 모든 시련과 고통을 참고 견딘 것은, ‘하느님께서 어떤 상황에서든 나를 보살피시고 도와주신다’는 믿음을 지니고 있지 않았다면 불가능했을 일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니 그는 누구보다 자기 이름에 담긴 뜻을 제대로 이뤄낸 사람인 겁니다. 그래서 하느님께서도 그의 이름을 기억해주시지요.
반면, 오늘 비유 속 또 다른 주인공이라 할 수 있는 부자는 그 이름이 드러나지 않습니다. 그는 자기 이름에 담긴 뜻보다 자기 욕망을 이루는데에만 집착했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그 과정에서 본인 말고 다른 이에게는 아무런 신경도 쓰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그가 많은 재산을 가지고 떵떵 거리며 살았던 ‘이 세상’에서는 그가 왠만한 사람은 그 이름만 들어도 누군지 알 정도로 유명한 사람이었을지 모르나, 그가 삶을 마치고 가게 된 ‘저 세상’에서 그는 이름 조차 불분명한 존재감 없는 사람이 되고 맙니다. 그가 하느님과 그분 뜻을 따르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하느님께서 그에게 보내신 ‘라자로’라는 천사를, 그의 도움을 필요로 하는 힘 없고 가난한 이들을 ‘나 몰라라’ 했기 때문입니다. “누구든지 사람들 앞에서 나를 모른다고 하면, 나도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 앞에서 그를 모른다고 할 것이다.”(마태 10,33)라고 하신 예수님 말씀이 떠오르는 상황입니다.
이것이 우리가 오늘 비유에서 알아들어야 할 가장 중요한 점입니다. 부자의 이름이 ‘생명의 책’에 기록되지 않은 것은, 그가 하느님 나라에 들어가지 못한 것은 그가 법적 도덕적 윤리적으로 죄를 지어서가 아닙니다. 주님께서 당신 자신과 동일시하시는 우리 사회의 작고 약한 이들에게 무관심했기 때문이지요. 즉 자비를 베풀지 않은 것이 문제이고, 사랑을 실천하지 않은 것이 잘못이며, 이웃의 사정에 차갑고 무관심하게 대한 것이 패착이었던 겁니다. 그래서 사랑의 반대말은 미움이 아니라 무관심이라고 하지요. 부자는 자기가 욕망으로 쌓아올린 성 안에서 살았습니다. 그 안에는 부족한 것 없이 다 있었고, 그 안에서 그와 가족들은 안전하고 평화로웠습니다. 부자에게는 친구도 이웃도 심지어 하느님도 필요 없었습니다. 그러나 그 무관심과 이기심이라는 심리적인 벽이, 저 세상에서는 그가 하느님 나라로 건너가지 못하게 가로막는 거대한 ‘장벽’이, 도저히 오를 수 없는 ‘절벽’이 되었고 부자는 그렇게 하느님의 사랑으로부터 단절된 채 고통스러운 지옥 안에 갇히게 되었지요. 그러니 그 부자처럼 후회와 절망 속에서 영원히 울부짖고 싶지 않다면, 특별히 나쁜 짓만 안하면 된다는 안일한 생각부터 버려야겠습니다. 기회될 때마다 이웃 형제 자매에게 사랑과 자비를 실천하여 나중에 하느님 나라로 건너갈 튼튼한 다리를 미리미리 준비해둬야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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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50320. 사순 제2주간 목요일. 정인준 파트리치오 신부님.
“그들에게는 모세와 예언자들이 있으니.”
하느님께 의지하는 자와 사람에게 의지하는 자를 나누어 예언자는 축복과 저주를 전하고 있습니다.
사람에게 의지하는 사람은 “광야의 메마른 곳에서, 인적 없는 소금 땅”에서 살 것이라고 귀뜸 해줍니다.
그러나 하느님께 의지하는 사람에 대해서는 그 반대로 축복이 따르는 것입니다.
“주님을 신뢰하고 그의 신뢰를 주님께 두는 이는 복되다. 그는 물가에 심긴 나무와 같아, 제 뿌리를
시냇가에 뻗어, 무더위가 닥쳐와도 두려움 없이 그 잎이 푸르고, 가문 해에도 걱정 없이
줄곧 열매를 맺는다.”(예레 17,7-8)
루카는 예수님께서 바리사이들에게 하셨던 라자로와 부자에 대한 긴 비유 말씀을 전하고 있습니다.
부자는 늘 호화롭게 살며 호의호식하였습니다.
그 집 문간에는 라자로라는 가난한 이가 있었는데 그는 종기투성이에다가 제대로 얻어 먹지 못해
몸을 가누기도 힘든 처지였습니다.
그는 부자가 먹다가 떨어트리는 빵부스러기로 배를 채우곤 했습니다.
그러다가 거지 라자로는 죽었습니다. 천사들이 그를 아브라함의 곁으로 데려갑니다. 그런데 부자도
죽어서 저승으로 가게 됩니다.
그는 그곳에서 불길 속에서 고통을 겪습니다. 그가 눈을 들어보니 아브라함과 그의 곁에 라자로가
보였습니다.
그래서 그는 고리를 질러 아브라함이 자기에게 손가락 끝에 물을 찍어 지기 혀를 식게 해달라고
청합니다.
아브라함은 그에게 말합니다.
“우리와 너희 사이에는 큰 구렁이 가로놓여 있어, 여기에서 너희 쪽으로 건너가려 해도 갈 수 없고
거기에서 우리 쪽으로 건너오려 해도 올 수 없다.”(루카 16,26)
부자는 다시 자신의 다섯 형제들에게 라자로를 보내달라고 청합니다. 라자로가 그들에게 경고하여
그들만이라도 이 고통스러운 곳에 오지 않게 해달라는 청이었습니다.
그런데 아브라함은 그들에게는 모세와 예언자가 있으니 됐다고 합니다. 부자는 다시 라자로 처럼
죽은 사람이 가야 그들이 믿는다고 말합니다.
아브라함은 그에게 이렇게 다시 말합니다.
“그들이 모세와 예언자들의 말을 듣지 않으면,
죽은 이들 가운데에서 누가 다시 살아나도 믿지 않을 것이다.”(31절)
주님께서는 바리사이들에게 왜 비유의 말씀을 하셨을까요?
일반적으로 바리사이들을 재물을 좋아하고 가난한 이들에게는 무관심할 뿐 아니라
가난한 이들을 멸시한 것으로 나타납니다.
그래서 그들은 재물은 하느님의 선물이고 가난은 인간의 게으름의 결과와 죄의 그늘로
보는 것입니다.
모세의 율법과 예언자의 가르침을 바리사이는 제일로 치는 것입니다.
그런데 그 율법과 예언서가 실행이 따르지 않는 이론이나 형식이라면 무슨 소용이
있는지에 대한 가르침이 또한 스며있는 것입니다.
종교의 위험은 재물에 그 기준을 두는 데 있습니다.
물론 재물이 그 자체가 나쁜 것만은 아니지만 특정인의 소유로 머물고 가난한 이들과
나누지 못한다면 그것은 악으로 기우러 질 수 있는 것입니다.
부자는 라자로에게 해를 끼친 적은 없습니다. 이야기에서 라자로를 괴롭힌 것도 없습니다.
다만 라자로의 고통에 함께 하지 않았던 것입니다.
자신의 호의호식에 빠져서 가난한 라자로를 챙기기도 못한 것입니다.
사람들은 미움과 무관심은 다 나쁘지만
미움은 그래서 상대에 대해 관심이 있다는 면에서는 개선의 여지가 있는 것입니다.
그런데 마음에 없거나 아예 무관심하다면 거기에는 개선의 희망도 없는 것이지요.
사순절을 지내고 있는 우리가 우리의 삶을 살펴보아야 하겠습니다.
우리 자신이 세상과 너무 친하다보니 가난한 이웃에 대해서 무관심한 것은 아닌지,
우리 자신이 이기적거나 너무 편한 것만 좋아해서 ‘안일무사 ’에 빠져 있는 것은 아닌지
반성과 회개의 시간을 가져야 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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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50320. 사순 제2주간 목요일. 기경호 프란치스코 신부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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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50320. 사순 제2주간 목요일. 오상선 바오로 신부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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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50320. 사순 제2주간 목요일.
하나님 나라에 합당한 열매를 맺는 삶
<2025.3.20> 아침을 여는 묵상 (눅 13:1~21절)
❝하나님 나라에 합당한 열매를 맺는 삶❞
❚ 하나님 나라의 진정한 가치를 모든 사람이 누리도록 그에 합당한 열매를 맺는 삶이어야 합니다.
✔ 하나님 나라에 합당한 삶이란 무엇입니까?
➲ 회개의 기회를 선용하는 삶입니다(1~9절).
몇몇 사람이 예수님께 빌라도가 갈릴리인들을 죽여 그 피를 제물에 섞었다는 흉흉한 소식을 전합니다(1절). 빌라도의 이러한 행동은 반란과 봉기를 일삼는 갈릴리 사람들에게 경고하는 차원에서 행한 경악할 만한 사건이었습니다. 그런데 이들이 이 사건을 일부러 예수님께 알려 준 이유가 그런 불행의 원인이 갈릴리 사람들의 죄 때문이라고 대답해 주시길 기대하고 있었음을 알 수 있습니다. 예수님은 그들의 질문들에 대해 분명하게 말씀하십니다. 갈릴리 사람들이 그리고 실로암 망대가 무너져 억울하게 죽임을 당한 열여덟 명의 사람들이 다른 모든 사람들보다 더 많은 죄를 지었기 때문이 아니라고 말입니다(2,4절). 그리고 단호하게 다시 말씀하십니다. ‘...너희도 만일 회개하지 아니하며 다 이와 같이 망하리라..’(3,5절). 예수님은 누가 죄인인가를 따지기에 앞서 먼저 자기 자신을 돌아봄으로 회개의 합당한 삶을 살 것을 말씀하십니다. 예수님은 이어서 무화과나무의 비유를 통해 심판이 임박했으며, 지금은 잠시 심판이 유예된 은혜의 시기임을 말씀하십니다. 3년은 무화과나무에서 열매를 얻기에 충분한 시간을 의미합니다. 즉, 오래 기간을 상징하는 것으로 기다리실 만큼 기다리신 하나님의 인내하심을 보여줍니다. 하나님의 인내에도 불구하고 좋은 열매를 맺지 못하는 나무는 결국 찍힘을 당하게 될 것입니다(6~9절).
고난과 어려움을 단순히 흑백논리로 접근하고 해석하려고 해서는 안 됩니다. 아울러 어려움을 당하고, 고난을 당하고 있는 사람에 대해 내 마음대로 정죄하는 일도 없어야 합니다. 그냥 말없이 함께 울어주고, 함께 아파해 주는 것이 주님의 마음일 것입니다. 죄인과 의인을 구분하는 기준에 대해 예수님은 아무리 종교적인 기준으로 볼 때 의롭고 경건한 사람이라도 하나님이 보내신 이를 거부하는 자는 하나님께 불순종하는 죄인으로 간주합니다. 그러므로 주님의 준엄한 명령을 귀담아 들어야 하고, 내 자신을 제대로 볼 수 있는 영적인 눈이 필요합니다. 그리하여 회개의 열매를 맺기를 오늘도 기다리시는 하나님 아버지의 마음을 깨닫는 삶이어야 합니다. 소망 중에 회개의 열매를 맺어 우리 삶의 주인 되시는 하나님께 기쁨이 되어드리는 믿음의 삶을 살아가야 합니다. 하나님이 원하시는 회개의 열매를 맺게 될 때, 우리 자신의 삶 가운데 소망이 있습니다. 부모는 자녀가 실수를 해도 끊임없이 기회를 주고, 사랑으로 이해합니다. 그러나 장성해서도 응석받이로만 지낼 수는 없는 것입니다. 마찬가지로 예수님도 끊임없이 우리 자신에게 소망을 주시고자 하십니다. 그러나 그러한 은혜도 정해진 시간이 있다는 것입니다. 그 시간이 오늘이 될 수도 있다는 경각심을 가지고, 회개할 수 있는 기회를 잘 선용하여 하나님 나라에 합당한 열매를 맺는 삶을 살아가야 하겠습니다.
➲ 진정한 안식을 선포하는 삶입니다(10~17절).
예수님의 사역은 안식일에도 계속됩니다. 예수님께서 회당에서 가르치실 때에 18년 동안 귀신 들려 꼬부라진 채로 살아온 한 여자를 만나십니다. ‘열여덟..’(4,11절).. 18은 불완전한 수로, 불완전한 인생을 의미한다고 볼 수 있습니다. 예수님은 불완전한 인생을 살아가고 있는 여인을 찾아오셔서 ‘여자여, 네가 네 병에서 놓였다’(12절) 말씀하십니다. 눈여겨보아야 할 사실은 예수님은 먼저 병에서 나았음을 선포하신 후에 안수하셨고, 그 즉시로 여인의 병이 나았다는 것(13절)입니다. 예수님께서 안식일에 병을 고치시는 이적은 사탄에 매여 고통 받고 있는 사람들에게 안식을 주시는 하나님의 역사였습니다. 그러나 회당장은 예수님이 안식일 계명을 어긴다고 생각하여 분을 내었습니다(14절). 이에 예수님은 회당장과 무리들에게 “외식하는 자들아”라고 외치십니다(15절). 그들은 안식일에 아무렇지도 않게 자기들의 소나 나귀를 외양간에서 풀어내어 물을 먹이면서도 안식일 법을 위반했다고 말하지 않습니다. 하물며 18년 동안 사탄에 매인 하나님의 백성을 사단의 결박에서 풀어 주는 것이 어찌 마땅하지 아니하냐(15~16절)고 말씀하십니다. 짐승에게 허용되는 일을 사람에게 금지시키는 것은 ‘아브라함의 딸’보다 짐슴을 더 대우하는 일종의 논리적 모순이며, 도덕적 가치의 모순인 것입니다. 예수님의 말씀에 모든 반대하는 자들을 부끄러워했습니다. 그러나 그들과 정반대로 ‘온 무리’는 기뻐했습니다(17절).
영적 무지는 하나님의 뜻과 전혀 무관한 행동을 하면서도 마치 자신의 생각과 행동이 옳다고 주장하는 심각한 범죄에 빠지기 쉽습니다. 그러나 분명한 사실은 하나님의 나라는 의와 평강과 희락을 가져다줍니다. 그런데 잘못된 신앙의 인식과 자기만의 법 준수 방식을 고수하면서 누구나가 누려야 할 하나님 나라의 의와 평강과 희락을 누리지 못하게 한다면 이 역시 큰 범죄에 해당합니다. 외식적인 신앙에서 벗어나야 합니다. 그리스도의 참 제자답게 어떤 적대자들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모든 사람들이 하나님 나라의 축복을 소망할 수 있도록 적극적으로 전하는 삶이 되어야 합니다. 하나님 나라의 가치는 공평한 기쁨과 안식이 있습니다. 주님 안에서 누릴 수 있는 진정한 안식을 세상 가운데 선포하여 하나님 나라에 합당한 열매를 맺는 삶을 살아가야 하겠습니다.
➲ 주님의 통치에 순종하는 삶입니다(18~21절).
예수님은 하나님 나라에 대한 짧은 두 비유를 말씀하십니다. 첫 번째는 겨자씨 비유로 설명하십니다(19절). 연약한 육신의 몸을 입고 이 땅에 오신 예수님은 참으로 미약해 보입니다. 그러나 예수님 속에 담겨있는 진리는 엄청난 것임을 우리는 잘 압니다. 두 번째는 누룩의 비유로 설명하십니다(20~21절). 누룩은 부풀어 오르도록 하는 작용을 합니다. 눈에 띄지는 않지만, 누룩을 반죽에 넣으면 한없이 팽창합니다. 이는 예수 그리스도의 사역을 통하여 시작된 하나님 나라는 미약하지만, 누룩이 가루 서 말을 전부 부풀게 하는 것처럼 하나님 나라가 창대 해 질 것임을 강조하는 말씀입니다.
나약한 내 인생이라는 반죽 가운데 하나님의 사랑이 들어오면 내 인생은 풍요로워집니다. 사람들의 사랑에는 한계가 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사랑은 누룩과 같이 자신을 내어 주고, 모든 인생을 풍요롭게 해 줍니다. 나와 우리 교회의 사역은 미약해 보일 수 있지만, 그럼에도 나 한 사람과 교회를 통해서 확장될 하나님 나라를 기대합니다. 우리의 입술을 통해 선포된 하나님 나라라는 나무에 많은 사람들이 찾아와 평안히 거하는 생명의 보금자리가 될 것입니다. 지금 당장은 답답하고, 눈물로 씨를 뿌리는 아픔이 있지만, 반드시 풍성한 열매로 거두게 되는 날이 올 것을 믿고 담대히 사역의 자리로 나아갈 수 있어야 합니다. 하나님 나라는 풍성한 사랑과 열매가 있습니다. 그러므로 주님의 통치하심에 절대적으로 순종하여 하나님 나라에 합당한 열매를 맺는 삶을 살아가야 하겠습니다.
오늘도 열매를 맺지 못하게 하는 습관적인 죄들을 깨달아, 회개의 기회를 잘 선용하여 하나님 나라에 합당한 열매를 맺는 삶을 살아갈 뿐 아니라 옳음을 드러내고 싶어 해서 본질을 놓치는 어리석음을 범하지 말고 하나님 나라의 가치를 당당하게 드러내는 삶을 살아갈 수 있기를(눅 13:1~21절)...
행복의 시작 예수 그리스도!!!
빛이 있으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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