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창 11: 1-4
온 땅의 구음이 하나이요
본 장은 인류가 바벨성과 바벨탑을 쌓는 죄를 범하였으므로 하나님의 징벌을 받아서 흩어지게 된 사실을 보여주는 말씀입니다(1-9). 이 사건에 따라서 셈의 자손 중에 특별히 에벨을 위시하여 경건한 운동이 있었습니다. 그리고 그 계열에서 아브라함이 나게 되어 있습니다(10-32).
1. 본문 1절은
“온 땅의 구음이 하나이요 언어가 하나이었더라” 입니다.
1) 전에는 단 한마디 말로 바벨론에 대하여 언급했던 것에 반하여 모세는 지금 그 말이 어디서 유래되었는가에 대하여 보다 폭넓게 설명하고 있습니다.
이것은 정말로 우리가 잊지 못할 역사입니다. 거기에서 우리는 인간이 하나님을 대항하여 고집을 부리는 엄청난 완악성을 파악합니다. 또 하나님의 심판으로부터 그들은 한가지도 유익을 보지 못한 사실을 감지합니다. 처음 보기에는 그 악인들의 죄악성이 드러나지 않습니다. 그렇지만 징벌하는 형벌이 내려짐으로서 이 사람들이 시도했던 것을 하나님께서 얼마나 불쾌하게 여기셨는가를 입증해 주고 있습니다.
사람들이 그 탑을 건립한 것은 만약 어느 때라도 하나님이 홍수로 이 땅을 쓸어 버리기로 결심하신다면 자기들의 피난처와 보호소로 삼으려는 의도를 가지고 시작했다는 생각을 하는 자들은 자신들의 머리로 꿈을 꾸고 있는 것입니다. 전혀 다른 표현이 적용될 수 없습니다. 모세의 말들이 그런 면에서 전혀 의미를 전달하지 않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들이 하나님을 배신한 야심과 그분을 교만하게 경멸하고 있는 것 외에는 전혀 다른 의미를 찾아볼 수 없기 때문입니다. ‘자 우리가 하늘까지 닿을 탑을 쌓아서 우리의 이름을 날리자’ 는 식으로 그들은 말하고 있습니다.
그 일을 했던 계획과 목적이 있습니다. 그들은 무슨 일이 일어나든지 이 땅 위에서 불멸되는 이름을 갖고 싶었습니다. 그들은 마치 하나님의 뜻을 반대하는 것처럼 그 탑을 건설했습니다. 그리고 틀림없이 이런 야심이야말로 사람들을 헤칠 뿐만 아니라 그것이 하나님을 대항하여 일어나는 결과를 빚게 되는 것을 우리는 여기서 보고 있습니다. 그런 망대를 세우는 것 자체가 그렇게 큰 범죄가 되는 것이 아닙니다.
오직 그들이 자기들을 기념하려고 영원한 기념비를 세우고, 또 그것으로 모든 세기를 통하여 스스로 존재하게 하려는 것이었습니다. 바로 그것이 하나님을 경멸하는 것과 함께 복합되어 있는 완고한 교만이었습니다. 그리고 시인들이 가장한 것처럼 여호와를 그분의 하늘나라의 보좌에서 끌어내리려고 산들 위에 쌓아올린 거인들에 대한 우화가 거기서 기원하게 되었습니다. 이런 우화는 여기서 모세가 암시하고 있는 불신자들의 음모와 그다지 거리가 멀지 않습니다
멸망될 자들은 자기 자신에 대하여 쉽게 망각해 버립니다. 그리고 자기 분수에 지나친 것으로 영향을 받게되는 순간마치 거인들과 같이 그들은 하나님과 전쟁을 시작하는 것이 확실합니다. 이 사실은 그들이 공개적으로 공언을 하지 않지만 누구든지 하나님이 지시한 경계를 범하는 자들은 정면으로 하나님을 도전하고 공격하는 결과 외에 다른 길로는 갈 수가 없습니다.
2) 이 사건이 일어났던 시기에 관하여는 베로수스(Berosus)의 단편이 존재해 있습니다.
그런데 만약 정말로 베로수스가 그런 문제들의 장본인이라고 간주된다면 어떻게 되겠는가? 거기서는 무엇보다도 그들이 그 탑을 짓기 시작했던 때까지 홍수 때부터 계산하면 140년 정도가 된 것으로 여겨지고 있습니다. 비록 유능한 권위 면에서는 불충분하겠습니다. 그렇지만 이 의견이 몇몇 사람들에 의하여 지지를 받고 있습니다. 그것은 주로 유대인들 가운데서 받아들여지고 있는 계산보다 더 지지를 받고 있습니다. 그들은 홍수 때로부터 이 탑의 건립에 이르는 시대적인 간격을 340년으로 계산합니다.
그밖에 다른 사람들이 설명하고 있는 것들은 전혀 생각할 여지도 없는 것들입니다. 이를테면 그 당시 만해도 사람들이 흩어져서 멀리 살고 있었고, 많은 식민지가 이미 형성되어 있었기 때문에 건축자들이 그 일을 착수했다는 것입니다. 그런 상황에서 그들은 자기들의 자손들이 날마다 증가되면 그들은 머지않아 더 멀리 이민을 가지 않으면 안된 처지에 이르게 될 것이라는 사실을 간파했다는 것입니다.
3) 그러나 이와 같은 주장에 대하여 우리는 반대합니다.
하나님의 특이한 복은 인류가 번성하는 면에서 그 흔적을 찾아볼 필요가 있습니다. 더욱이 모세는 모든 논쟁을 제쳐놓고 있는 듯합니다. 셈의 아들들 가운데 셋째로서 아르박삿을 언급하고 나서 그의 증손자 벨렉을 언급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이 벨렉의 시대에는 이미 언어가 나누어져 있었던 때입니다. 그러나 그가 기록하고 있는 년의 계산에서 살펴보면 1세기가 중간에 삽입되어 있습니다.
4) 하지만 우리가 여기서 주목해야 될 것은 그 언어들이 바로 벨렉이 출생한 직후에 나누어졌다고는 말하지 않고 있습니다.
그리고 지금까지 정확한 시간이 언급되지 않고 있다는 사실입니다. 노아가 이 악한 자들의 음모를 들었을 때에 그의 고통은 훨씬 더 증가되었을 것입니다. 그리고 그 악한 궤계들은 그의 후손들에 의하여 다시 계승되었던 것입니다. 또한 그가 완전히 정신이 몰두되어 그들의 멸망으로 달려가는 것을 볼 때에 더욱 더 심한 슬픔으로 상처를 받았을 것입니다.
그러나 여호와는 그 거룩한 사람을 그렇게 고령에서도 훈련시켜 고통과 갈등이 계속해서 닥쳐오게 하셨습니다. 그렇더라도 그 일로 인하여 절대로 우리가 실망하지 말라고 가르쳐 주고 계십니다. 누구든지 유대인들 가운데서 일반적으로 받아들여지고 있는 의견에 더 호감을 갖는다면 그때는 이 땅의 분배가 처음으로 있었던 이주를 가리키고 있는 듯합니다. 그리고 그때가 인간들이 여러 지역으로 나누어지기 시작했던 때였습니다.
5) 그러나 니므롯의 왕국에 관하여 전 장에 기록되었던 것은 이 해석에 모순되고 있습니다.
아직도 중간의 의견이 지지를 받고 있는 듯한데 그것은 언어의 혼란은 아마도 벨렉의 나이가 최고로 늙었을 때에 일어났던 것이라는 주장입니다. 지금 그는 거의 240년 간을 살았습니다. 그리고 니므롯이 창건한 그 제국은 2,3세기 정도 지탱했던 것이라고 추측하는 것입니다.
6) 우리가 확실히 지극히 의심스런 경우처럼 아무 부담 없이 시인하는 것은 홍수와 그 탑을 건립하는 계획과의 사이에는 더 긴 시간적인 간격이 끼어 있을 것이라는 점입니다.
더욱이 모세가 “온 땅의 구음이 하나이요” 라고 말할 때에 그는 서로가 멀리 떨어져 있는 인간들 가운데서 사회의 신성한 결속이 그들 가운데서 공통적인 언어를 가짐으로 지탱되게 하신 의도에서 하나님의 특이한 은총을 찬양하며 묘사하고 있습니다. 정말로 언어가 여러 가지로 갈라진 사실은 경이적인 것으로서 간주되어야 할 것입니다. 그것은 언어가 마음의 인상이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똑같은 이성(理性)과 사회적인 생활을 위하여 출생한 자들이 똑같은 언어로 서로 대화를 나누지 못하고 의사 소통을 하지 못하게 되는 일이 과연 있을 수가 있겠습니까?
그 사실이 자연에 불일치한 것을 감안하여 모세는 이 단점이 후천적이라고 선언합니다. 또한 언어가 갈라지게 된 것은 하나님이 인간들에게 내린 형벌이라고 선포하고 있습니다. 그것은 그 인간들이 불신앙으로 하나님을 경멸했기 때문입니다.
언어적인 공동체는 그들 가운데서 종교적인 일치성을 이루게 됩니다. 그러나 사람들이 하나님을 순수하게 경배하는 데로부터 자신들을 멀리 떠나게 하고 신실한 사람들의 거룩한 회중으로부터 떨어져 나간 후에 모세가 언급하고 있는 이 무리들은 하나님을 대항하여 전쟁을 도발하는 데에 모두가 합세한 것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공의로운 복수로 인하여 그들의 언어가 그렇게 나누어지게 된 것입니다.
2. 본문 2절은
“이에 그들이 동방으로 옮기다가 시날 평지를 만나 거기 거하고” 입니다.
이 말에서 모세가 니므롯과 그가 자기 주변에 모아 들인 사람들에 대하여 말하고 있는 것이라고 상상하게 됩니다. 그러나 만약 우리가 니므롯이 자기의 폭군 정치의 엄청난 기념비를 세울 목적으로 착수하는 그 방대한 건축 사업에서 아마도 책임자였다고 인정한다면 모세가 분명하게 언급하고 있는 사실과는 어떻게 될 것입니까? 그러므로 모세는 사업은 단지 한 사람의 조언이나 뜻으로 되어진 것이 아니라고 말합니다. 오직 모든 사람이 음모에 가담하였기 때문에 그 책임 소재를 한 사람이나 몇몇 소수에게만 돌려지는 것이 아니라는 사실을 시사하고 있습니다.
3. 본문 3절은
“서로 말하되 자, 벽돌을 만들어 견고히 굽자 하고 이에 벽돌로 돌을 대신하며 역청으로 진흙을 대신하고” 입니다.
1) 그들은 상호간에 서로를 격려하였습니다.
그리고 각자가 진지하게 직접 그 일에 참여했습니다. 또 그뿐만 아니라 다른 사람들도 그것에 감히 참여시켰으며 격려까지 했습니다.
2) “자 벽돌을 만들어 견고히 굽자” 에서 모세는 암시하기를 그들이 편안했기 때문에 이 일을 착수한 것이 아니라고 합니다.
그렇게 편안한 상태였다면 그 일이 전혀 성취될 수가 없었을 것입니다. 또 그 밖의 다른 어떤 유리한 점 때문에 그것을 시작한 것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다만 그들 모두가 그렇게 어렵고 분투적인 일을 만족스럽게 여기고 했다는 것을 그는 제시해 주고 있습니다. 그런 수단으로 그들의 죄성은 보다 더 확장되었습니다. 그들이 마치 미친 사람들같이 하나님을 대항하여 열렬하게 날뛰는 것이 아니라면 그들은 아무런 목적도 없이 그토록 어렵고 힘든 노동을 요하는 사업을 헛되게 하느라고 자신들을 괴롭히며 기진맥진하게 만든 격이 될 것입니다. 그렇지 않겠습니까? 어려운 문제가 가끔 우리들을 필요한 일들로부터 저지시키는 경험을 하게 됩니다. 그러나 이 사람들이 돌들도 없고 몰타르(mortar)도 없는 때에도 그들은 구름을 뚫고 치솟을 그런 작업을 진행하는 것을 조금도 주저하지 않고 대담하게 감행했다는 사실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이 본보기로 사람들이 자기들의 야심에 탐닉될 때에 과연 인간의 헛된 정욕이 얼마나 오랫동안 그들을 재촉하며 몰아가고 있는가를 배우게 되는 것입니다. 심지어는 하나님을 모독하는 시인도 이 제목에 대하여 잠잠하지 않고 있습니다. “무모하게 대드는 인간, 교만으로 가득 찬 인간이여 대다수가 가장 거절되고 있는 것을 탐내고 있는 인간이여” 라고 하였습니다. 그리고 “열심의 보람도 없는 것을 정신병자처럼 하늘을 소유하려고 날뛰는구나” 라고 썼습니다.
4. 본문 4절은
“또 말하되 자, 성과 대를 쌓아 대 꼭대기를 하늘에 닿게 하여 우리 이름을 내고 온 지면에 흩어짐을 면하자 하였더니” 입니다.
1) 이것은 과장법의 한 형식입니다.
이 표현에서 보면 그들은 자기들이 일으키려고 시도하고 있는 건축물의 고상함을 극구 찬양하고 있습니다. “우리 이름을 내고” 를 부가시킨 말도 역시 그와 같은 점에 소속되어 있습니다. 그들은 그 일이 보는 자들로 하여금 하나의 기적으로 보였을 뿐만 아니라 이 세상의 모든 곳까지 그것이 기념되게 하겠다는 것을 암시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이것은 이 세상이 항구적으로 몰두해 있는 것을 가리키고 있습니다. 그리고 하늘을 무시하고 모든 만물이 모두 시들어 가고 있다는 사실도 가리킵니다. 그리고 무상한 이 세상에서 멸망되지 않은 불멸성을 추구하는 것을 교훈하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그들의 관심과 추구는 자기들의 이름을 이 세상에 남기고 날리는 것에만 쏠리고 다른 목적이 없었습니다.
시편 49편에서 다윗은 이와 같이 맹목적인 탐욕에 적절하게 조소를 가해주고 있습니다. 그리고 비록 그들이 조상들이 본보기로 교훈을 받았습니다. 그렇지만 그들이 축적해 온 경험 자체는 어리석은 자의 교사 일 뿐입니다. 그래서 그것은 자손들을 건전한 정신으로 회복시켜 주지 못하고 다만 얼빠진 몰두가 모든 시대에 걸쳐서 계속 스며들어오고 있는 것입니다. 주베날(Juvenal)은 ‘죽음만이 인간의 몸이 얼마나 의미심장한 것인가를 인정하고 있다’ 고 말하고 있습니다. 하지만 이 죽음도 우리의 교만을 고정하지 못하고 있습니다.
또한 우리의 가련한 상태를 고백할 만큼 우리를 진지하게 만들지 못하고 있습니다. 흔히 더 많은 교만이 화려한 결혼행렬에서보다는 장례식에서 더 과시되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그런 본보기로 우리는 겸손하게 살아야 되는 사실을 경고 받습니다. 또한 겸손하게 죽어야 되는 것이 얼마나 마땅한 일인가를 충고 받고 있습니다. 그리고 우리 자신을 절제하는 데에 습관화시키는 목적을 위하여 생활가운데서 직접 우리가 죽음을 목격하는 것은 참된 신중성의 적잖은 중요한 부분이 되는 것입니다. 세상에서 위대하게 되기를 원하고 있는 자는 첫째는 인간들에 대한 오만불손한 것이 됩니다 그리고 결국 그의 모독적인 억측은 바로 하나님 자신을 대항하는 돌출구가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그 거인들의 본보기를 따라서 그런 자는 하늘을 대항하여 투쟁하는 것입니다.
2) “온 지면에 흩어짐을 면하자 하였더니” 라는 말씀이 있습니다.
몇몇 해석가들은 이 구절을 ‘우리가 흩어지기 전에’ 라고 표현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그 말의 특이성은 이런 설명을 지니지 못할 것입니다. 사람들이 굉장하다고 믿고 있는 위험을 대처하기 위하여 그들은 같은 수단을 고안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마치 그들이 ‘우리의 인구 수가 증가되면 이 지역이 반드시 이 모든 사람들을 수용해야 될텐데 그것이 불가능하겠다’ 라는 표현인 것 같습니다. 그러므로 영구적으로 그들의 이름이 보존되게 해야 했습니다. 그러므로 본 구절은 비록 그들이 각각 다른 지역들에 흩어져 있다고 하더라도 그들의 이름이 그대로 보존될 것이라고 말한 듯한 표현입니다. 그러나 어떻게 그들이 자기들이 장차 흩어질 것이라는 생각을 갖게 되었는가에 대한 문제입니다.
어떤 자들은 추측하기를 그들이 노아에게서 경고를 받았다고 합니다. 노아는 세상이 다시 이전의 죄악과 부패로 다시 빠지게 되는 것을 보고 동시에 예언적인 영으로 장차 무서운 분리가 그들에게 닥칠 것을 예견하였습니다. 그리고 그들은 생각하기를 바벨론 사람들은 하나님을 직접 대항할 수는 없다는 것을 알고 간접적인 방법으로 하나님의 심판을 피하려고 갖은 노력을 했다고 여기고 있었습니다. 그리고 다른 사람들은 이들이 성령의 은밀한 영감으로 자기 자신들의 형벌에 관하여 예언을 하게 될 것이라고 추측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그 예언은 그들 자신들은 전혀 이해하지 못했던 것입니다. 하지만 이런 주해들은 모두가 어색한 억지 해석들입니다. 여기에서 우리가 그들이 말한 것을 그들에게 내려진 저주에 적용시킬 아무런 이유가 없습니다. 그들은 이 땅이 사람이 살도록 지어졌으며 어느 곳을 가도 사람들이 지낼 수 있도록 풍성한 열매를 제공해 줄 것이라는 점을 알고 있었습니다. 그리고 인류가 급격하게 번성하게 되는 것은 자기들이 현재 살고 있는 비좁은 제한된 지역에서는 도저히 오래 견디어 낼 수가 없다는 사실이 그들에게 입증되었던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그들이 어디로 이사하여 가든지 가는 곳이 어떤 곳이든지 상관없이 그들은 자기들의 기원에 대한 증거로 남겨놓기 위하여 이 탑을 세우는 계획을 갖고 있었습니다.
3) 여기에 본 장이 가리키는 바 바벨성과 바벨탑을 쌓는 범죄가 나옵니다.
그리고 그 일을 하나님께서 심판하십니다. 모세는 이와 같은 기록을 남김으로서 하나님의 하나님 되심을 알리고 있습니다. 그리고 하나님께서는 친히 모세의 기록을 통해서 오늘날 우리에게도 교훈 하시는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