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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헤어지자."
그가 말했다. 이번엔 아무 탈 없이 300일을 보냈는데, 그러니까
이번이야말로 진짜 사랑이구나 느꼈는데 그도, 그 마저도 아니었다.
난 초조해진 손으로 콜라가 담긴 찬 유리잔을 만지작거리며 굳어있는 그의 눈을 바라봤다.
"...왜?"
마른 침이 삼켜졌다.
정말이지 시린 유리잔을 힘 주어 감싸 잡았지만
머리속까지 그 기운이 올라오진 않았다.
아쉽게도.
"...마음이 딴 데 가 있는 너 옆에 있는거, 이젠 지쳐."
살짝 고갤 틀고 그가 내뱉은 말이었다.
이걸로 5번째 이별인가.
이런 경험 쌓고 또 쌓다보면 아픈것도 언젠가 무뎌지겠지,하고
2번째 이별을 경험할 때 생각했었다.
하지만 틀렸다.
세번째든 다섯번째든, 이별은 아프다.
텅 빈 앞자릴 오랫동안 멍하니 바라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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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째 이번엔 좀 오래 가나 했더니."
"...흐. 이게 다... 이게 다 이찬해 그 자식 때문이야!!"
"또 그런다, 또."
맥주 한잔을 간단하게 비우는 날 보며 절레 절레 고갤 젓는 미래.
슬슬 취기가 돈다.
근데도 자꾸만 갈증이 일어서 맥주병을 기울였다.
그 때.
"...또 차였냐, 너?"
웬수같은 놈이 나타났다.
얼씨구.
누군 자기 때문에 어이없는 오해 받고 이걸로
다섯번째 차이고 왔는데
누군 여자친구와 같이 맞췄다는 커플 목도리를
턱 밑까지 치렁치렁 두르고 왔다.
당장에 이 맥주를 부어던지고 싶을 정도로.. 얄밉다.
"그래. 다 니 놈 때문이잖아!!"
서슬퍼런 내 고함에 이찬해의 눈썹이 우스꽝스럽게 일그러졌다.
"책임전가 하지마. 누가 나한테 먼저 전화 하랬냐?
면접 붙은거면 붙은거지 왜 나한테 먼저 전활 해?
내가 그 남자였어도 기분 엿 같았을거다."
...나쁜놈.
후려쳐도 시원찮을 놈..
할 말을 잃은 채 스스로가 한심하리만치 멍청하게
놈을 부들 부들 노려보기만 했다.
잠시 찌푸린 눈으로 날 내려보던 이찬해가,
망할놈이 말했다.
"당분간 서롤 위해서라도 연락 끊자.
넌 이미 깨졌다니 어쩔 수 없지만 난 아직 진행중이잖냐.
걔, 새담이만큼은 놓치고 싶지 않다. 알아먹지."
...나쁜놈. 나쁜놈..
"빨리 정신차려서 새 남자 만나라. 근처에 내가 없으면
너도 쓸데없는 오해 안받고 깨질일도 없어서 좋을거아냐. 힘내라."
....도무지.
위론지 악담인지 알 수 없는 말을 지껄이던 이찬해는
내 머릴 가볍게 툭툭 두드리고서 휘적 휘적 카페를 빠져나가버렸다.
손목시곌 내려보다가 택시를 잡아 타는 놈이 유리 너머로 보였다.
웃기게도 파란색 목도리 끝이 팔랑 팔랑..
그래, 이 나쁜놈아.
새담인지 똥담인지 하는 애 꽉 붙들고
그 잘난 연애 어디 한 번 불살라봐라, 이 망할자식아.
"....진짜 나쁜놈....얄미워 죽겠어, 아주..."
탕-
테이블위에 무거운 머릴 박 듯 올려놓았다.
"등신. 왜 그런 경사스런 날에 쟤한테 전활한거야.
아니, 차라리 전화만 하던가. 파티는 왜 해? 지 남자랑 해야지."
"...아, 몰라.. 생각도 하기 싫어."
"쯧쯧."
그냥 습관이 됐을 뿐이다.
좋은 일이든 나쁜 일이든, 10년 넘게 알고 지내온 놈에게
기대는게 습관이 됐을 뿐이다.
면접통과란 통보를 받고 자연스레 놈의 번호를 눌렀고
자연스레 놈의 집에서 파티를 하고 축하를 받았다.
10년이란 게 장난으로 거쳐 온 기간이 아니어서
내 일부분으로 단단하게 굳어버렸을 뿐이다.
단지 그 뿐인데.
놈은 단지 그런 정도로 가까운 친구일 뿐인데.
어째서 그마저도 그걸 사랑으로 본건지 난 도무지 이해할 수가 없다.
그래.
내가 한 두번 그런게 아니니까 화내는건 당연하다고 쳐.
그럼 말하면 되잖아.
그 놈 만나지 말라고 시원하게 말 하면 되잖아.
끝에 가서 지친 얼굴로 헤어지자고 하면
그대로 무슨 수를 써 볼 틈도 없이 끝내야하잖아.
..대체 날 더러 어쩌라는거야...
뒤늦게 눈을 적신 눈물이 소매끝까지 물들여가기 시작했다.
"....나쁜놈....나쁜놈..."
\
이찬해와 연락을 끊은지 일주일이 조금 넘었다.
그 웬수같은 얼굴 안보니까 마음 구석구석까지 깨끗해지는 기분이다.
진작에 이럴걸.
커튼을 밀어냈다.
크리스마스를 홀로 보내는 것도 그닥 나쁘진 않다.
그래. 남자가 전부는 아니야.
"...많이도 오네, 아주."
안 그래도 하얀 세상을 조금의 틈도 없이 다 뒤덮을 심산인지
펑, 펑, 눈이란 놈은 끊임없이 내리고 있었다.
그러고보니 작년에도 이만큼 눈이 왔었던것 같은데.
"...씨."
아, 그래.
작년 크리스마스 되기 5일전에 이번과 똑같은 오해로
남자에게 차였었다.
나와 같은 이유로 솔로가 된 이찬해와
부어라 마셔라 해대다가 술에 진탕 취해선 그대로 나란히 고꾸라졌었다.
정말 바보같이 크리스마스를 보냈구나.
그것도 그 놈이랑.
대체 무슨 인연이 있는건지. 으휴.
고갤 절레 절레 흔들며 커피잔을 키보드 옆가에 내려놓았다.
올해는 레포터나 하면서 크리스마스를 보내야겠구나, 하고
생각하며 내 신세를 한탄하는데. 그 때였다.
"...윽."
배 한구석에서 뭔가가 뒤틀리는 듯한 느낌이 났다.
"....아."
숨이 턱 막힐 만큼의 낯선 느낌이었다.
간신히 정신 한가닥 잡아내어 전화를 들고 번호를 눌렀다.
그냥 생각보다도 손이 가는대로 마지막 번호를 누르다가
"......으...아...씨.."
시내 어딘가에서 똑같은 목도릴 두르고 여자친구와
오붓한 시간을 보내고 있을 녀석이 떠오르자
번호를 지우고 다른 곳으로 전활 걸었다.
[여보세요.]
"...나. 미래야. 나...난데....으어어어."
[어. 뭐야. 왜 그래. 어디 아파?]
자꾸만 먹혀드려가려는 호흡을 겨우 가다듬고
집이라는 사실을 알린 뒤 핸드폰을 놓치다시피 해서
비스듬이 옆으로 쓰러졌다.
배의 낯선 통증이 정말 너무나도 거대해서
맨바닥에 헤딩하는 고통마저도 무색했다.
이찬해. 너 고마운 줄 알어. 라고
어렴풋이 중얼거렸던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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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몰라. 당분간 여자 안 만나. 차이는것도 이젠 지겨워서 그런다, 새꺄!!"
귀를 자극하는 익숙한 목소리에 천천히 눈을 떴다.
하얀 천장. 고약한 약냄새. 병원이다.
"끊어. 아, 끊어!!!"
금방이라도 던져버릴 기세로 전활 끊는,
병원에선 정숙,이란 상식적인 예절도 모르는 한 남자가 보였다.
...쟤가 왜 여깄어.
입술을 꿈틀거리며 한껏 욕을 중얼거리다가
내 시선을 느끼고서 고갤 돌린다.
눈이 마주침과 동시에 이찬해의 얼굴이 일그러졌다.
"...씨발, 너.."
저벅 저벅 다가오는 이찬해.
놈이 즐겨쓰는 향수가 확 끼얹혀오는 바람에
약냄새가 묻혀버렸다.
"왜 전화 안했냐? 아파 뒤지겠으면 바로 바로 때려야지
넌 전화가 폼이냐? 손가락은 또 뭐하러 끼우고 다녀?"
...말하는 거 하고는.
"..연락 끊자고 한 놈이 누군데."
"씨발. 그건 그거고 이건 이거지 넌 상황 구별도 못하냐?"
"새담인가 뭔가랑 오래 가고 싶다며. 우정을 먼저 내동댕이친게 누군데!"
"그래도 썅, 그럴 땐 전화해!! 완전 띨 아냐, 이거."
놈을 세차게 노려보다가 뜬금없이 울음을 터뜨려버렸다.
왜지?
저 싹퉁머리라곤 콧털만큼도 없는 놈이 눈물이 날 만큼 미웠나?
눈썹을 지그시 찌푸리며 욕설을 내뱉다가
신경질스럽게 확, 손을 내밀고서
그와는 모순되게 조심스레 눈가를 훔쳐내는 이찬해.
꺼이 꺼이 울다가 잔뜩 갈라진 목소리로 목도리는?,라고 물었다.
그러자 놈은, 병원에 가봐야겠다고 했더니
다짜고짜 목도리 뺏어가면서, 아, 말이 뺏어가는거지
아주 그냥 벗겨가는거였다, 망할.
목도리 빼앗고 대뜸 꺼져! 그러는데, 아 존나 그런 치사스런 여잔 처음이다 진짜.
라고 대답했다.
"빙신. 크리스마스때 딴 여자 만나러 간다고 하는 놈을 누가 만나냐?
나라면 뺨 몇대 날리고도 남았다!"
"와. 미친다. 뻔뻔한 그 입 다물어라."
"으구, 쪽팔려. 넌 대체 언제쯤이면 제대로 된 연앨 해볼래."
"...야. 못마땅한거 감수하고 눈물 닦아줬더니 지금 뭐하냐, 너."
"으이구, 한심한 놈."
"야!!!"
진짜 한심한게 누군지 모르겠네, 진짜.
올해도 이 망할 웬수랑 같이 크리스마스 보내게 생겼잖아.
갑자기 신경질이 팍 쏫구치려는데
병실문이 열리면서 무표정의 미래가 등장했다.
머리채라도 잡을 기세로 서로에게 달려들려는
우리 둘을 잠시 빤히 지켜보다가
지겹다는 목소리로 말한다.
"그냥 사겨라, 사겨.
나이가 몇갠데 지들 감정도 모르고 어린애들처럼 뭐하는 짓이냐?
내가 다 피곤해, 이 웬수들아."
그러면
동시에 외쳐지는 서슬퍼런 두개의 고함소리.
"미쳤냐?!!!!"
..
아아. 웬수. 웬수.
이 웬수 덩어리!
첫댓글 오오~ 단편방에서 재미있는 글을 찾았네요~ 잘 읽고 가요~ 그런데 왜 제목이 그렇게 된겁니까?
감사합니다, 스닙님. 아, 제목은 나이에 걸맞지않게 매우 유치하고 어린 커플이라서 그렇게 붙였답니다. 하하. 좋은하루되세요~.
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이거번외잇어요?
아, 제가 번외를 쓰면 내용을 완전히 망쳐버려서 되도록이면 자제하고 있답니다 흐흐. 읽어주셔서 고맙습니다~!
ㅎㅎ 남주랑 여주.. 잼있게 노네요..ㅋㅋ
앗. 그런가요? 매우 유치하게 놀지 않습니까? 봐도 또 봐도. 흐흐. (..) 코멘 감사드려요~~!
......=_=뭔가가 찔리는데..?
저런 비슷한 일이 있으셨나요? 그렇다면 진정 부럽습니다.. 읽어주셔서 고맙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