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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승상을 뵈옵니다.”
초이란의 유승상이 화향에서 마침내 이승상을 독대하니, 이승상이 말하였다.
“한남국에 와보시니 어떠합니까?”
“온화한 기후와 드넓은 곡창지대. 그야말로 천하천국(天下天國)이 아니 옵니까.”
“초이란과는 비교도 되지 않지요.”
“이를 말이 옵니까.”
앞에 바짝 몸을 숙인 유승상을 보며 이승상이 말하였다.
“채성평의 장자는 이제 우리 사람이 되었습니다.”
이승상의 말에 유승상의 입 꼬리가 탐욕스럽게 올라갔다.
“황자는 찾고 있으니, 찾는 대로 곧 죽임을 당할 것입니다.”
“화비가 오라비의 서찰을 가지고 있으니, 그것은 언제 터질지 모를 화약고와 같은 것이지요. 적절한 시기에 터트릴 것입니다.”
“모든 것이 계획대로 되고 있습니다.”
“남은 것은, 대장군뿐이지요.”
이승상의 말에 유승상의 낯빛이 어두워졌다.
“쉽지 않을 듯 합니다.”
“예. 쉽지 않을 겝니다. 거사(巨事)라는 것이 어찌 쉬이 되겠습니까?”
유승상과 달리 이승상은 여유 만만하여 말하였다.
“그 또한 이루어 낼 것이니.”
“방도(方道)가 있으신 겝니까?”
유승상의 물음에 이승상은 묘한 미소를 흘리며 말하였다.
“대장군 또한 사내이니.”
“미인계를 쓰시렵니까? 하오나, 지난 연회에서 무희들을 모두 쫓아냈다 하더이다.”
“대장군을 쓰러트릴 수 있는 무기는 단 하나뿐이오.”
“그것이 무엇입니까?”
이승상은 내내 묘한 미소로 뜸을 들이며 말하였다.
“하얀 나비 같은, 사내의 연정.”
46.
온통 푸른 하늘과 꽃이 흐드러지게 핀 화원이 보이는 커다란 창 앞 긴 의자에 앉은 화비는 그 자태가 너무도 고와 눈이 부실 지경이었다. 회임을 하여 유방이 더욱 커지니 풍만함이 넘쳐흘렀다. 그럼에도 드러나는 목덜미나 팔 다리는 여전히 가늘고 여리여리했다. 저런 여인을 보고도 눈이 돌지 않는다면 그것은 사내가 아니라 할 것이다. 같은 여인이 보아도 그 자태에 넋을 잃고 바라보고 또 바라보고 싶게 하였다.
“휴우, 하루가 다르게 몸이 무거워지는 구나.”
화비가 제법 불러온 배를 만지며 말하니, 화비를 모시는 궁인도 건강히 자리는 태중 황자가 뿌듯하여 환하게 웃어보였다. 그때 문이 열리고 다급하고 불안해 보이는 기색으로 궁인 아이가 달려와 화비를 모시던 궁인에게 귓말을 전하고는 명을 기다렸다. 귓말을 전해들은 궁인의 표정도 좋지 않았다. 이에 화비가 차분히 물었다.
“무슨 일이냐?”
“마마, 그것이…….”
궁인의 낯빛을 보니 뭔가 좋지 않은 일인 듯하여 순간 배가 뭉치며 불안함이 들었으나 가만히 심호흡을 하며 마음을 진정 시켜보았다.
“괜찮을 것이다.”
화비는 그렇게 자신에게 주문을 걸 듯 말했다. 그리고는 다시 한 번 심호흡을 하고 말하였다.
“괜찮으니 고하라.”
“태후마마께오서 마마를 뵙고자 하십니다.”
“…….”
태후의 얘기가 나오니 화비의 얼굴이 다시 굳어졌다. 태후가 화비 자신에게 주려던 차를 화후가 대신 마시고 죽게 되었다. 원래대로였다면 화비 자신이 혹은 태중의 황자가 죽었을 것이다. 하지만 태후는 황제의 모후이고, 황제의 모후에게 황후를 암살한 죄를 묻게 되면 황제의 입장 또한 난처해지는 것이 되었다. 그리하여 이번 일은 죄인은 없고 고인만 있는 것이 되었다.
“…….”
화비는 가만히 자신의 배를 어루만져보았다. 그리고는 이내 말하였다.
“태후전으로 가자.”
화비에게는 믿음이 있었다. 어떤 상황에서도, 자신을 지켜줄 것 이라고.
이 나라의 황제이자,
나의 지아비인 사내가.
+
“폐하, 황실의 정통을 위해서라도 이는 아니 될 일이옵니다! 명을 거두어주시옵소서, 폐하!”
“…….”
오늘도 신료들은 등청하여 황제를 향해 화비의 황후 책봉을 반대하고 들었다. 황제는 이제는 익숙한 듯 무료하기까지 한 얼굴로 그런 신료들을 깔아보다가 길게 하품을 하였다. 그런 황제의 모습에 신료들은 당황한 듯 이승상의 눈치를 살피었다. 이승상은 모두 반대하고 엎드려 있는 와중에 유일하게 황제의 뜻에 반대하지 않는 신료였다.
“훗.”
황제는 그런 이승상을 힐끗 쳐다보고는 비릿한 코웃음을 쳤다. 이승상의 그 진짜 속내를 알 수 없었으나, 분명한 것은 하나 있었다. 그는 결코 황제를 향하지 않을 것이라는 것. 그것만큼은 확실했다. 그리고 이승상 또한 그런 황제의 속을 잘 알고 있었다. 서로 치열하게 심리전을 하고 있었다.
“폐하.”
그때 내관이 급히 달려와 몸을 바짝 낮추고 황제의 곁으로 기어와서는 황제에게 귓말을 전하였다. 이에 신료들이 눈치를 살피었으나, 황제는 어떤 말을 들어도 섣불리 표정으로 드러낼 사람이 아니었다. 곧 귓말을 전한 내관이 내려갔으나 황제는 어떤 동요도 없었다. 그저 신료들을 보며 여전히 무료한 얼굴로 말하였다.
“다들 화비의 황후 책봉을 반대하는 것 말고는 더 할 말들이 없는 게지요?”
황제의 물음에 신료들은 침묵하였다. 그러자 황제가 몸을 일으켜 섰다. 기골이 장대하여, 그 모습은 언제보아도 위풍당당하였다.
“허면 짐은 퇴청할 터이니, 알아서들 하시오.”
그리고는 뒷짐을 지고 여유롭게 나가는 황제를 당황한 신료들과 묘한 표정의 승상이 바라보았다.
탁.
문이 닫히자, 퇴정한 황제의 표정이 순식간에 굳어져 변하였다.
“하여.”
표정만큼이나 무거운 소리로 황제가 말하였다.
“화비는 지금 어디 있느냐.”
“태후전으로 가시고 있다 들었습니다.”
내관이 안절부절못하며 말하니, 곧 황제가 급한 걸음을 옮기며 말하였다.
“호위 대장군, 짐을 따르라.”
황제의 말에 곧 호위 대장군과 호위 무사들이 황제의 뒤를 따랐다.
+
“화비. 몸은 좀 어떻습니까.”
물어오는 태후는 부쩍 노쇠(老衰)하였다. 그도 그럴 것이, 태후도 사람이니 엄한 사람을 죽게 하고 멀쩡할 리 없었다. 응당 사람이라면 그럴 것이라고 생각하였다. 그러자 한편으로는 태후에게 연민이 드는 것 같기도 했다. 저렇게 해서까지도 한남국의 정통을 지키고 싶어 했던 그 마음에 연민이 들었다. 황실 여인의 숙명 일 테지.
“복중 황자도 건강하고 소첩 또한 무탈하옵니다.”
“화비.”
태후가 화비를 부르는 목소리가 어쩐지 애달파서 화비는 그런 태후를 가만히 바라보았다. 만일 자신이 황후가 되고 황자를 낳아 훗날 태후에 자리에 오른다면 자신 또한 태후와 같은 길을 가게 될 것인가. 생각하니 심난하였다.
“예. 마마.”
“화비 또한 강건하지 못한 군주의 최후가 어떤 것인지 보았겠지요.”
“......?”
갑작스런 태후의 말에 화비가 당황하여 말을 잇지 못하니, 잔뜩 거칠어진 입술을 간신히 열어 태후가 말하였다.
“선황제께서는, 그 인품으로는 성황(聖皇)이셨으나 너무도 어질고 온화하시어 신료들에게 많이 시달리셨지요. 강력한 황실을 만들지는 못하셨습니다. 그리하여 당시 황자였던 황상의 위치마저 위태로웠지요. 나는 한낱 여인이지만, 황후였습니다. 황상과 이 황실을 지킬 의무가 있었습니다.”
태후의 말을 듣고 있으니, 그 자리의 무게가 느껴지는 듯 하여 더욱 태후에게 연민이 느껴졌다.
“화비, 나는 내가 한 일에 후회 없습니다.”
“…….”
화비는 어찌 대답해야 할지 판단이 서지 않아 말을 아끼었다. 연민을 느끼지만 그렇다고 태후가 한 일에 동조할 수도 없었다.
“어떤 것도.”
그리고 이 말을 들었을 때는, 동조하지 않은 것이 다행이라 생각하였다.
“그러니, 나는 지금 이 말도 후회하지 않을 겝니다.”
화비가 불안하여 태후를 보니, 태후가 말하였다.
“화비.”
“예......?”
“이 약을 드세요.”
태후의 말에 태후전 궁인이 약이 담긴 사발을 가져와 화비 앞에 내밀었다. 놀란 화비가 배를 움켜쥐고 떨리는 시선으로 태후를 보니, 태후의 눈에서 후드득 눈물이 떨어졌다. 태후가 말하였다.
“이 약을 먹으면, 화비는 죽지 않습니다.”
“마, 마마......?”
“허나, 복중의 아이는 죽을 것입니다. 그리고 또한, 앞으로 화비는 결코 황자를 생산 할 수 없을 것입니다.”
“마마!”
놀란 화비가 벌떡 일어나 뒷걸음질 치니, 약사발을 든 궁인이 화비를 향해 다가왔다.
“화비, 내 말을 들으세요. 설령 화비가 황자를 낳지 못한다 해도, 화비에 대한 황상의 마음은 달라지지 않을 겝니다. 내 배로 낳았으니, 황상은 어미인 내가 잘 압니다.”
“마마……. 이러 실 수는 없습니다……. 이것은, 황제 폐하에 대한 역심입니다…….”
“황후를 독살한 것 역시 역심이지요. 하지만 황상은 내게 죄를 묻지 않았습니다.”
태후는 노쇠한 몸을 간신히 일으켜 핏발이 선 눈으로 화비를 보며 말하였다.
“내가 황상의 어미이기 때문입니다.”
“마마!”
“화비!”
마지막 힘을 다 쏟아내듯, 태후는 큰 소리로 화비를 불렀다. 그리고는 화비를 바라보다 그대로 무릎을 꿇으니, 놀란 궁인들이 일제히 바닥에 몸을 엎드려 몸 둘 바를 몰라 하였다. 화비 또한 놀란 눈으로 태후를 보니, 태후가 말하였다.
“내 이 자리에서 약조합니다. 화비께서 이 약을 먹으면 내 화비가 황후가 되는데 힘을 보테겠습니다. 허나, 화비가 이 약을 먹지 않는다면 화비는 결코 이 나라의 황후가 될 수 없을 겝니다.”
“마마…….”
화비의 눈에서도 후드득 눈물이 떨어져 흘렀다. 황후가 되는 대가는 평생 아이를 가지지 못하는 여인으로 사는 것이었다. 화비는 고개를 저었다. 그렇게는 살고 싶지 않았다. 고개를 저으며 거부하는 화비를 보며 태후가 말하였다.
“황상은 화비에게 크나큰 성은을 베풀었습니다. 화비는 그런 황상에게 무엇을 해줄 수 있습니까? 황자 생산?”
태후는 옅게 코웃음을 치고는 말하였다.
“화비, 황자를 낳을 수 있는 여인은 천하에 수두룩합니다. 황상은 그 여인들 중 황제의 권력에 힘을 실어 줄 수 있는 여인의 몸에서 황자를 얻어야 합니다. 그것이, 정치라는 것입니다. 화비 또한 황족이었으니 이를 모르지 않을 터.”
“…….”
태후의 말에 화비가 입을 다물었다. 태후의 말에는 전혀 틀림이 없었다. 지금도 신료들이 자신의 황후 책봉을 반대해 황제가 어려운 상황에 있는 것을 알고 있었다. 해가 지고 달이 뜨면 월령신처럼 찾아오는 지아비는 그저 애정만을 베풀고 또 베푸니, 어렵다 고단하다 말하지 않는 이였다.
“마마.”
마침내 화비가 말하였다. 고운 얼굴은 눈물이 번져 반짝이고 있었다.
“허면, 소첩이 황후가 되지 않으면 이 아이를 지킬 수 있겠습니까?”
화비의 말에 태후가 자조적으로 웃으며 고개를 저었다.
“화비. 어찌하여 황상이 화비를 황후에 앉히고자 이리도 고군분투 하는지 아십니까?”
“…….”
“그저 화비가 어여뻐 정실로 들이겠다. 그리 생각하십니까?”
생각지 못한 물음에 말문이 막힌 화비가 가만히 태후를 보고만 있으니 태후가 말하였다.
“화비는 황후가 되지 않는 한, 이 궁에서 죽는 날까지 단 한순간도 목숨의 위협을 받지 않는 날이 없을 겝니다. 이는, 화비의 몸에서 나온 아이도 마찬가지겠지요.”
위태로운 노파의 걸음으로 어느 새 화비의 코앞까지 다가온 태후가 주름이 자글자글한 손을 들어 화비의 뺨을 쓰다듬으니, 섬뜩한 기분이 화비가 몸을 떨었다. 태후가 말하였다.
“나 또한 그랬습니다.”
“......?!”
“황상은 형제가 없으시지요. 어째서 그렀겠습니까?”
“마마…….”
화비가 두려움에 흐느끼니, 태후가 손을 뻗어 약사발을 집어 들었다. 태후는 가만히 한숨을 내쉰 후 말하였다.
“드세요, 화비.”
“마마!”
“뭐하느냐. 어서 화비께 올리거라.”
화비가 사색이 되어 뒷걸음질을 치니, 그 뒤는 문이었다. 화비가 돌아서 문을 열고자 하였으나 밖에서 문을 잡고 있어 열리지 않았다.
“들리느냐! 문을 열거라!”
화비가 문을 치며 소리쳐도 문을 열릴 기미조차 보이지 않았다.
“화비 마마, 드시지요.”
약사발을 든 궁인이 화비에게 사발을 내 미니, 화비가 기를 쓰고 입을 꾹 다무는데.
“열라.”
크지도 않고 차분하지만, 그 무게감만큼은 모든 것을 압도할 목소리가 문 밖에서 들려왔다. 그와 동시에 지체 없이 문이 열리었다.
“이리 오거라.”
그리고 그 문 앞에는 화비를 향해 손을 내밀고 있는 지아비, 한남국의 황제인 남자가 서 있었다.
“폐하…….”
황제를 보자마자 화비가 다리에 힘이 풀려 휘청하니, 황제가 팔을 뻗어 덥석 화비를 품에 안았다. 황제의 표정은 굳어져 있었다. 그 굳어진 얼굴 속에는 이로 말할 수 없는 분노가 가득 차 있었다.
“이 모든 것이, 다 황실과 황상을 위함입니다.”
모두가 황제의 분노 앞에 두려움에 몸을 떨고 있는데, 태후만이 차분히 내지는 초연하게 황제를 대하였다. 황제는 그런 어머니를 보며 말하였다.
“이 황실이, 누구의 것입니까.”
“…….”
“짐의 황실입니다. 짐의 나라입니다.”
태후는 말없이 황제가 된 아들의 얼굴을 바라보았다. 선황제의 유약한 모습이 싫어 누구보다 강한 군주가 되길 바랐었다. 그리고 그리 자란 황제를 보니, 여한이 없다 생각하였다. 그러자 황제를 낳고 모든 것이 달라졌던 그 시절이 떠올랐다. 한직 관료의 딸로 태어나 후궁으로 시작하였으나 황자를 낳고 권력을 알았고, 이 자리에 오르기까지 못할 일이 없다 하며 살아온 나날들이었다. 그 시간들이 주마등처럼 태후의 머릿속을 훑어 지나갔다. 마치 마지막을 앞둔 사람처럼.
“듣거라.”
황제의 말에 내관과 호위대장군이 명을 받들 준비를 하였다.
“태후마마를 냉궁으로 모셔라.”
“폐하?”
놀란 내관이 황제를 보았으나, 단호히 굳어진 얼굴에 내관도 호위대장군도 바로 명을 받들었다. 곧 궁 안 호위 병사들이 태후전 궁인들을 끌어내었고, 호위대장군의 인도를 받으며 태후도 태후전을 떠나기 위해 몸을 일으켰다. 한 걸음 한 걸음 아들에게 가까이 다가가며, 어쩌면 죽는 날까지 두 번 다시 볼 수 없을 아들의 얼굴을 잊지 않으려고 새기도 또 새기었다.
“황상. 어미의 진심을 곡해하지 마세요.”
황제가 그런 태후를 보며 말하였다.
“어머니.”
“예, 황상.”
“그래도 틀린 것은,”
“…….”
“틀린 겁니다.”
황제의 말에 태후는 가만히 눈을 감았다 뜨고는 태후전을 나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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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승상, 들으셨습니까? 태후마마께오서 냉궁으로 유배되셨다합니다!”
“냉궁이요?!!”
허겁지겁 달려와 소식을 전하는 이의 말에 다른 신료들이 화들짝 놀라니, 냉궁은 황제의 여인이었던 이들이 중죄를 범하면 그 죄를 물어 가둬두는 곳인데 한 번 들어가면 죽을 때까지 나올 수 없는 곳이니 그곳에서 자결을 하는 여인들도 많았다. 대게는 선황제의 첩들이나 황제와 사이가 좋지 않은 후궁들이 갇히는 곳이었다.
“황제가 모후인 태후마마 마저 냉궁으로 보냈다 함은 화비에 대한 뜻이 확고한 것이 아니겠습니까?”
“이러다 다음은 우리차례가 되는 게 아닌지요?”
“승상, 어찌 말을 안 하십니까? 이승상만 황제의 뜻에 반대하지 않으셨으니, 이는 혹 이런 일을 예측하시고 혼자 살아남기 위함이셨습니까?!”
명(命)이 경각(頃刻)에 달리니 혼비백산(魂飛魄散)하여 승상에 따지고 들자, 차분하던 승상이 날카로운 눈으로 노려보았다. 그러자 바로 입을 다물고 고개를 숙이니, 마침내 승상이 말하였다.
“이제 화비가 황후가 되는 것을 밀어줍시다.”
“예?”
승상의 말에 놀란 이들이 수군거리니 승상이 말하였다.
“그리되면 일석삼조가 되는 것이니.”
승상의 말을 이해하지 못하였으나, 곧 신료들이 고개를 끄덕이며 승상에 뜻에 따르기로 하였다. 돌아선 승상은 가만히 미소를 지어보았다. 이로서 화비를 이용해 태후를 잡았고, 곧 초이란 황자의 가짜 서찰로 화비를 잡고, 그리고 나면 황제마저.
“잡을 것이다.”
+
구름이 달을 가린 어두운 밤이 되니, 황제의 침실에는 초가 가득 켜져 있었다. 황제는 홀로 커다란 방에 덩그러니 서서 뒷짐을 지고 화비가 있을 곳을 바라보았다. 곧 문이 열리고 내관이 들어오니, 여전히 돌아선 채로 황제가 말하였다.
“화비는 어찌하고 있느냐.”
“놀라신 마음을 추스르고 계시옵니다.”
“그래. 그러하겠구나.”
황제의 말에 내관이 잠시 눈치를 살피다 조심스럽게 운을 떼었다.
“폐하. 오늘 밤은 어찌 화비마마께 가시지 않으시는지요.”
“그것이 궁금한 것이냐.”
황제가 슬핏 웃으며 말하니, 내관이 조금 더 가까이 다가가 말하였다.
“이런 때일수록 폐하께서 곁에 계셔주는 것이 좋지 않을 런지요.”
“아느냐.”
“무엇을 말씀이시옵니까, 폐하.”
“문득, 화비를 이 궁으로 데려와 초야를 치르려 했던 날이 생각난다.”
‘내 그대를 화비라 할 것이다.’
‘폐하와 혼인하겠다 한 적 없습니다!’
황제가 슬핏 웃으니, 그 웃음이 애틋하고 애달아 슬픔이었다.
“한 번도 여인에게 이토록 마음을 준 적이 없었다. 아니. 이것은 준 것이 아니라, 빼앗긴 것이다.”
빼앗아본 적은 있었다. 하지만 빼앗겨 본 적은 없었다. 그리고 대단히 은혜하고 있는 여인인데, 그 여인을 행복하게 해줄 방법을 찾을 수가 없었다. 황후가 되면 그래도 조금은 안심할 수 있을까 하여 황후가 되게 해줄까 하였더니, 이조차 녹녹치가 않았다.
“내 오늘은 화비를 보지 않으려 한다.”
황제의 말에 내관이 몸을 조아려 예를 갖추고는 뒤로 물러났다. 황제는 여전히 화비가 있는 곳을 바라보며 말하였다.
“그대를 지켜주겠다 했는데…….”
밤이 더욱 깊어 달빛마저 잠이 든 시간, 검은 색으로 복면을 하고 변복을 한 황제가 내관도 없이 은밀하게 창문을 너머 발소리를 죽이고 빠르게 이동하였다. 황제가 향하는 곳은 궁에서도 가장 깊고 후미진 곳이라 궁인들 중에 죄를 지은 궁인들이 기거하는 곳이었다. 그런 연유로 궁인들 조차조 발길을 하지 않는 곳으로 빠르게 당도한 황제가 일정한 박자에 맞춰 창문을 두드리니 곧 같은 박자소리와 함께 창문이 열리었다. 황제는 한 번 더 주변을 살핀 후 빠르게 창문을 너머 안으로 들어갔다.
“후, 날이 후덥지근하구나.”
황제가 복면을 벗고 땀을 닦으며 말하니, 도인처럼 백의(白衣)를 입은 노인이 이미 굽은 허리를 조금 더 굽혀 황제에게 예를 갖추었다.
“오셨습니까.”
노인의 예를 받은 황제가 곧 진중한 얼굴로 물었다.
“차도는 있는가?”
“해독을 한 후부터는 빠르게 회복되시고 있사옵니다.”
“의식은 찾았는가.”
“짧게 돌아오시고 계십니다.”
노인의 말에 황제가 안도의 큰 숨을 내쉬고는 큰 손을 들어 노인의 어깨를 격려하듯 잡아주었다.
“정녕 천하 최고의 명의답다.”
“망극하옵니다.”
“정녕, 바라시는 것이 더는 없단 말인가. 내 그대가 원하는 것은 무엇이든 해주고 싶다네.”
황제의 말에 노인은 옅게 웃으며 말하였다.
“소인이 역적으로 몰려 멸문지화(滅門之禍) 당할 뻔한 것을 당시 고작 열다섯이셨던 어린 황자께서 구해주셨었지요. 그 은혜에 비하면 아무것도 아닙니다.”
황제와 노인의 인연은 황제가 황자였던 열다섯 시절로 거슬러 올라간다. 황실 최고의 명의였던 노인은 당시 황후였던 태후로부터 회임한 후궁에게 낙태약을 먹이라 하지만 차마 그 명을 받들 수 없다하니, 모함당하여 역적으로 몰려 그야말로 멸문지화(滅門之禍)의 위기에 처했었으나 이를 알게 된 황제가 그의 가족들이 도성을 떠나 숨어 살 수 있도록 도와주었다. 그리고 마지막에는 이미 죽은 시신과 노인을 바꿔치기하여 노인 대신 시체가 목을 매달게 하였다. 그 후 노인은 자신의 목숨은 황제의 것이라 하여 황실 깊은 곳에 은둔하며 뒤로 황제를 조력하였다.
“내가, 보아도 되겠는가?”
황제의 물음에 노인이 바로 황제를 안내하였다. 작고 평범한 방 안에서 노인이 벽을 살짝 밀어내니 곧 다른 곳으로 향하는 길이 열렸다. 노인이 앞장서고 곧 황제가 노인을 뒤따랐다. 좁고 어두운 길을 따라 내려가니, 이내 조금 전 있던 방을 열 개는 합쳐 놓은 듯 넓은 공간이 나타났다. 그리고 그 곳에는 침상이 놓여 있고 그 위에 누군가가 누워 있었다. 황제는 가만히 크게 숨을 한 번 내쉬고는 누군가가 누워 있는 침상 앞으로 향했다. 그리고는 내려다보다 말하였다.
“혈색이 좋아졌구나.”
“독기를 빼내었으니, 기력만 회복하시면 되옵니다.”
“내가 좀 지켜보아도 되겠는가?”
황제의 말에 노인이 의자를 대령하였다. 황제가 의자에 앉으니 노인이 자리를 피해주었다. 의자에 앉은 황제가 말하였다.
“황후.”
첫댓글 허허! 작가님 대단하십니다. 뛰는 태후! 위에 나는 승상! 그리고 위에 타 있는 황제네요. 재미있게 읽었습니다.^^
정치라는 것이 참 그런 것 같습니다.ㅎㅎ 보아주셔서 감사해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