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느 노인의 일상
희수喜壽(77세)를 앞둔 이 나이가 되도록 요즘처럼 힘들고 어려웠던 시절은 없었던 것 같다.
6.25전쟁도 겪은 세대인데 이보다 더한 어려운 때가 왜 없었을까마는 심정적으로 느끼는
불편함이 더 한것 같아 하는 말이다.
오십 일을 훌쩍 뛰어 넘는 역대 최장 장마기간 이라고 언론 매체들이 난리들이다.
이천(利川), 이름 값을 하느라 그런가? 물이 순해 태풍도 피해 가고, 내가 이사 온 후 20여년간
큰비가 온 적도 없었다. 그런데 금년 장마에는 이천시는 물론 이웃한 안성, 음성 일대에
물폭탄이 쏟아졌다. 이천 관내 산양 저수지는 제방뚝이 무너져 아랫동네가 쑥대밭이 되었다.
거기서 그리 멀지 않은 우리 집도 폭포수 같이 쏟아지는 비에 배수로가 넘쳐 마당으로 물이
들어왔다. 허지만 그거는 약과. 집 앞 계곡에서 서경 저수지로 흘러 들어가는 물길의 석축 제방은
찢겨 나가고 말았다. 저수지는 반이 토사로 메워졌고 아래 동네는 대피 소동을 벌였다.
긴급 복구를 하느라 우리집 앞 하천부지를 밀어 잡목이며 흙을 허물어진 제방에 메웠다.
시야가 트이니 계곡 따라 흐르는 성난 흙탕물이 달겨들 듯 넘실대고 물소리가 요란해 마음이
심란하다.집안으로 들어왔다.
사우나에 들어 앉은 듯 눅눅하고 습진 공기가 가슴을 답답하게 한다.
발바닥에 닿는 촉감도 축축한게 온 몸이 젖은듯 무겁다.모든 문을 처닫고 난방 보일러를 켠다.
한증막이 따로 없다.이번에는 에어컨을 튼다.
나이 탓인가? 찬 기운이 살갗을 스치니 선뜩하니 으스스 하다.
감기라도 걸리면 어쩌나 싶은 생각에 껏다 켰다를 반복한다.
그러다 처박아 놓았던 제습기를 꺼내 돌린다. 돌아가는 소리에 어느 공장에 나앉은 것처럼
시끄럽다. 거기다 더운 바람까지 뿜어댄다. 삐~릭. 휴대폰이 울린다. 안전 안내 문자다.
"산 사태 위험지역에 있는 사람은 안전한 곳으로 대피 하란다."
시도 때도 없이 오는 안내 문자가 불안만 부추겨 놓고 제 할일 다 했다는 듯이 자빠져 있다.
휴대폰 마저 밉쌀스럽게 느껴진다.어디 하나 마음 부칠 곳이 없다.
에~이, 외출이라도 하면 나아질까? 아니면 코구멍에 바람이라도 들어가면 좀 편해질까?
나갈 차비를 한다.그런데 불쑥 코로나19가 떠오르며 걱정이 된다.
특별히 갈데도 없는데 마스크까지 쓰고 나갈 필요가 있을까 싶어 다시 주저 앉는다.
밖에는 억세게 장대비가 쏟아진다.스물스물 걱정이 피어 오른다.
우리 지역에 산사태 경보가 내려졌는데 집에 바로 붙은 옆 산은 괜찮을까?
괜한 걱정 말고 마음 편히 먹자 스스로를 달래며 TV를 튼다.뉴스는 수해 소식으로 도배를 한다.
뒤이어 코로나 소식! 무엇하나 속 시원한 뉴스가 없다.
시사 프로그램에서는 누구를 위한 평론인지 속이 훤히 들여다 보이는 얘기를 허멀건 친구가
계속 지꺼리고 있다.옛날 전제 군주 시절에도 재난이 있으면 덕이 부족해 그렇다고 자기 탓을
했다는데 요즘은 부박하고 야멸찬 여인네의 남 탓만 있는것 같다.
신경질적으로 채널을 바꾼다.미스터 트롯 재방송이 이 채널 저 채널에서 방영된다.
그래도 그동안 위안이 많이 되었는데 여러번 보다 보니 그나마도 식상하고 재미가 사라졌다.
가벼운 수필집이라도 읽을까 싶어 꺼내든다.
몇 페이지 읽다보니 활자가 흐려지며 눈이 가물가물 해진다.
새로 안경을 바꾼지도 얼마 되지 않았는데 날이 갈수록 시력이 떨어지나 보다.
할 일이 없다. 마음 부칠 곳도 없다. 세상도 내가 살던 세상이 아닌것만 같다.
나이 탓인가? 면역력이 약해진 탓인가? 춥고 더운 것이 견디기 힘들어졌다.
또 새파란 젊은 친구들이 일천한 경험을 가지고 자기 주장만을 펴는 것이 그렇게 싫어질 수가 없다.
정말 늙으니까 살기 힘들어 지는 것이 한 두 가지가 아닌 것 같다.
그저 이런저런 거 다 잊고 푸른 하늘에 유유히 흘러가는 구름이라도 멍 때리며 보고 있었으면 좋겠다.
사위스러운 소리는 들리지 않고 숲에 부는 바람 소리같은 청량한 소리나 들렸으면 좋겠다.
그리고 창문 열면 보송보송한 공기가 쏟아져 들어와 상쾌한 마음이 되었으면 좋겠다.
그런데 장마가 질기게도 버티며 몸도 마음도 한없이 가라앉게 하고 있다. 그렇지만 어찌하랴?
'내 마음 내가 다스리는 수 밖에 없지 않겠나'
혼자 묻고 또 혼자 답하며 긴 장마의 어느 하루를 달래고 있는 나는 행복한 늙은이라고 치자.(펌글)
첫댓글 코로나로 외출이나 점심약속도 가급적 삼가고 지난지가 벌써 반년을 넘기면서
지쳐가는데...금년에는 유난히 긴 장마에 수시로 쏟아지는 폭우가 더욱 우울하게
만듭니다.
다행이 오후에는 아파트에서 바로 이어지는 서달산 둘레길이 있어 비가오나,
바람이부나 10,000보 걷기를 할수있어 그나마 약간의 숨통이 트이는 하루를
보낼수 있어 큰 다행이라 생각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