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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50m, 한번 구경 오십시오”
해발 1,950m. “한번 구경 오십시오”란 뜻이라죠? 그러나 한라산 정상 백록담은 남한 최고봉답게 장삼이사나 어중이떠중이가 쉽게 구경할 수 있는 곳이 아니었습니다. 적어도 서너 시간 동안 헉헉대며 올라가야 하니까요. 또 힘겹게 오르더라도 한라산은 거대한 분화구 속을 좀처럼 보여주지 않습니다.
저희도 마찬가지였습니다. 추위와 배고픔을 참으며 가까스로 올라갔는데, 보이는 건 뿌연 곰탕 국물 속이었습니다. 그래도 거대한 현무암 비석에 새겨진 ‘한라산 천연보호구역 白鹿潭’ 열두 글자를 보는 것만으로도 뿌듯했습니다. 10명 중 3명은 짐작조차 하기 어려운 성취감이죠.
성균관대 신문방송학과 산악회의 19년간 산행 기록을 더듬어보니 한라산에 오른 건 이번이 여섯 번째였습니다. 그 가운데 백록담에 오른 것은 고작 두 차례로 2009년 3월 이후 14년 만이더군요. 나머지는 영실이나 어리목이나 돈내코에서 올라와 해발 1,700m 윗세오름과 한라산 남벽 주변을 둘러보고 내려간 겁니다.
“오랜만에 백록담 한번 올라가는 건 어때?”
누가 먼저 백록담 가자는 얘기를 꺼냈는지는 확실치 않습니다. 제 기억엔 산바람이었던 것 같은데, 아톰인지도 모르겠습니다. 저도 동조한 기억이 있고요. 그게 무슨 대수겠습니까? 어차피 알자지라 대장이 고독한 결단을 내린 건데요.
2월 정기산행 때 금토일 2박3일간 한라산에 오르고 제주를 둘러본다는 일정을 알 대장이 올린 건 1월 5일(목) 오후 2시 43분이었습니다. 2월 17일(금) 오전 9시~9시 30분 제주공항 렌트카 버스 타는 곳에 집결할 테니 1월 12일까지 각자 항공권을 예매하라는 공지였죠. 당일 산행 때 2~3일 전 공지하던 평소 태도에 견줘보면 엄청나게 서두른 거였지만 알 대장이 간과한 게 있었습니다.
백록담을 보려면 성판악이나 관음사 코스로 올라야 하는데, 이곳은 예약제로 운영됩니다. 하루에 성판악 1천 명, 관음사 500명으로 제한해 인기가 높고 밀거래도 이뤄진다고 합니다. 항공권보다는 한라산 탐방 예약이 더 급한 거죠.
전 단톡방에서 공지를 보자마자 그 전에 백록담 가자고 얘기를 나눴던 게 생각나 알 대장에게 확인하고 한라산 예약 사이트에 들어가봤습니다. 이게 웬걸. 2월 주말은 벌써 예약이 마감된 상태였습니다. 백록담을 보려면 출발 당일인 금요일에 오르는 수밖에 없고, 그러려면 비행기 출발 시간을 새벽으로 앞당겨야 하죠. 알 대장은 “대한민국은 아무튼 약간 미친 듯”이라는 심경을 토로하며 금요일 오전 6시 30분 전후로 항공권을 예매해 달라고 수정 공지했습니다.
그때부터 이튿날 오전까지 한라산 탐방 예약과 항공권 예매의 숨가쁜 레이스가 펼쳐졌습니다. 희망자가 8명까지 불어났는데, 오전 8~10시 성판악에는 딱 7자리만 남아 관음사로 급변침했습니다. 그 과정에서 예약 인원을 12명으로 늘릴 수 있었죠. 분초를 다투며 주고받는 문자 속에 “우리가 살면서 이처럼 절실하게 뭐에 매달려본 적이 언제였던가” 하는 생각이 들더군요.
당초 제 예상에는 2박3일 시간을 내기가 빠듯하고 비용도 만만치 않을 뿐 아니라 체력적으로 부담이 클 것 같아 동참하는 대원이 많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생각과 달리 희망자가 쇄도했습니다. 단톡방에서 주고받는 문자를 보면서 겨울 한라산, 특히 백록담에 가는 게 좀처럼 쉽지 않다는 사실을 깨달은 거죠. 홈쇼핑 채널에서 쇼호스트가 “이제 몇 개 남지 않았습니다. 딱 몇 분께만 혜택을 드립니다”라고 말하면 주문 전화가 쇄도하는 것과도 마찬가지죠.
“저 코로나래요. 형도 검사 받아보세요.”
어찌어찌하여 대원은 모두 12명으로 늘어났습니다. 피플러버(75학번 남인복)와 그의 고교 짝궁 이 교수님, 80학번 4인방 희망과용기(이희용) 산바람(강만석) 감자바우(조진영) 참나리(한광섭), 달라무(박환 81학번), 알 대장(임병선 82학번), 83학번 3총사 뜬구름 총무(이현준) 꼬맹이(정은경) 호랭이(오기철), 법상(원준희 84학번). 근교 송년 산행이나 시산제 산행 때도 모이기 쉽지 않은 수효입니다. 그에 맞춰 숙소(그랜드메르호텔)도 예약하고 렌트카도 넉넉하게 15인승 솔라티로 골랐습니다.
그러나 그게 끝이 아니었습니다. 역시 백록담은 쉽게 탐방객의 발길을 허락하지 않더군요. 1월 산행 때 3년 만에 모습을 드러낸 법상이 가벼운 뇌경색 증세를 보여 빠진다는 통보를 해왔습니다. 이어 알 대장은 출발 6일 전인 2월 11일(토) 코로나에 확진됐습니다.
전 그 소식을 산바람 참나리, 그리고 또다른 동기와 덕유산 마이산 다녀오는 길에 들었죠. 참 당혹스럽더군요. 제가 이틀 전 알 대장과 점심을 먹었거든요. 만일 저까지 확진되면 알 대장 없이 한라산을 오르는 데다 회장도 없이 시산제를 지내야 하는 형편입니다. 그날 집에 오는 대로 자가 키트로 검사해보니 다행히 음성으로 나와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습니다.
알 대장은 의무 격리 기간이 끝나는 대로 하루 늦게 합류하기로 했습니다. 사고자가 속출하는 과정에서 숙소를 예약한 산바람은 주인장의 눈치를 보며 방을 2인실에서 3인실로 다시 2인실로 여러 차례 바꿔야 했습니다.
기내에서 본 구름, 바다, 태양, 하늘
이제 출발입니다. 오전 5시 15분 집에서 나와 핸드폰을 열어보니 산바람이 달라무와 함께 공항에 도착했다는 문자가 뜹니다. 공항이 집에서 가까워 좋네요. 5시 24분 공항철도를 타고 도착하니 대합실에 탑승객들이 장사진을 이루고 있습니다. “설마 이 사람이 모두 한라산 오르는 건 아니겠지?” 제주도를 최대한 알뜰하게 즐기고픈 사람들이 새벽부터 집을 나선 모양입니다.
수속을 마친 뒤 6시 35분발 제주행 비행기 탑승구 앞에서 산바람, 감자바우, 달라무, 꼬맹이와 만났습니다. 참나리는 우리보다 앞서 6시 15분 비행기를 타고 출발했습니다. 피플러버와 친구분, 그리고 뜬 총무는 하루 전 제주로 떠났고, 창원에 사는 호랭이는 김해공항에서 6시 55분 비행기를 탈 예정입니다.
기내에서 자리를 잡고 책을 펴들었는데, 이른 새벽부터 잠을 설친 탓인지 금세 까무룩 잠이 듭니다. 30분쯤 지났을까? 창밖으로 눈부신 햇살이 비춰 잠에서 깹니다. 아래 깔린 구름이 막 솜틀에서 빠져나온 이불솜을 연상케 합니다. 구름 사이로 바다가 언뜻언뜻 비치는 가운데 태양이 솟아오릅니다. 제주행이든 김포행이든 기내에서 일출이나 낙조를 보려면 왼쪽 창가 좌석에 앉아야 합니다.
한라산 꼭대기가 희미하게 보일 듯하자 비행기는 구름을 뚫고 아래로 향합니다. 구름 위는 맑았는데 아래는 온통 뿌옇습니다. 희마히게 제주항이 보입니다. 앞이 잘 보이지 않는데도 비행기는 용케 항로를 찾아 활주로에 사뿐히 내려앉습니다.
자! 이제 한라산으로 고고 씽!
비행기에서 내려 뜬 총무와 통화하니 10분 안에 도착한다고 합니다. 시간 절약을 위해 편의점에서 컵라면을 사고 보온병에 뜨거운 물도 받습니다. 그런데 아주 뜨거운 물이 아니라 정수기의 온수를 받으라고 하네요. 이걸로 한라산에서 컵라면을 익혀 먹으라고? 그것밖에 없다니 하는 수밖에요. 그나마 보온병을 가져온 사람은 저와 꼬맹이 둘밖에 없습니다.
물을 받아 나오니 3일간 우리가 탈 애마 솔라티가 주차장에 도착해 있습니다. 호랭이도 짐을 싣고 있네요. 피플러버와 친구분은 이미 한라산을 올라가고 있답니다. 나머지 모두 승차하고 8시 15분 관음사 입구로 출발합니다. 차내에서 제가 애용하는 노래방 마이크를 꺼내들고 오늘 일정을 안내합니다.
8시 50분 관음사 출발, 12시 삼각봉대피소 통과, 1시 30분 백록담, 2시 왕관릉으로 내려와 시산제, 오후 6시 하산 완료 계획입니다. 동절기에는 12시 이전 삼각봉대피소 통과, 1시 30분 백록담 하산이 마지노선입니다. 지나면 엄격하게 통제합니다. 저질체력의 소유자도 있는 데다 눈길이어서 시간이 빠듯해 보입니다. 알 대장도 없어 걱정스럽습니다.
가는 길에 아스피테(순상화산), 톨로이데(종상화산), 페디오니테(탑상화산) 등 화산의 종류라든가 사화산과 휴화산의 구분 방법 등을 설명합니다. 모두 기대와 걱정이 교차하는 표정입니다. 뜬 총무가 일찍부터 챙긴 김밥으로 아침을 대신합니다. 산바람은 12시 전에 삼각봉대피소에 통과하려면 서둘러야 한다며 시산제 용품 등을 미리 챙기라고 독려합니다.
그러나 이게 어인 일입니까. 내비게이션이 말썽을 일으켜 관음사 입구를 코앞에 두고 엉뚱한 곳을 한 바퀴 빙 돕니다. 8시 51분이던 도착 예정시간이 9시를 훌쩍 넘어섭니다. 마음이 초조합니다. 더욱이 달라무와 호랭이는 아이젠을 안 챙겨왔다고 하네요. 뜬 총무는 컵라면도 사야 한다고 합니다(결국 관음사 입구 가게에는 컵라면이 없어 사지 못했습니다).
“백록담에 갈 수 있을까?” “여기까지가 끝인가보오”
걸음이 느린 꼬맹이는 먼저 올려보내고 본진은 9시 18분에야 QR 코드를 찍고 관음사 탐방 안내소를 통과합니다. 산바람이 안내원에게 묻습니다. “삼각봉대피소 얼마나 걸려요?” “세 시간이요” 대답을 듣자마자 산바람은 포기하려는 눈치입니다. 제가 충분히 갈 수 있다고 말했는데도 “지난번 알 대장과 성판악에서 올라갈 때 기를 쓰고 올라갔는데, 몇 분 차이로 진달래대피소를 통과하지 못해 백록담에 못 가고 사라오름만 보고 왔어”라고 하며 귀담아듣지 않습니다.
덩달아 호랭이도 핸드폰을 꺼내들고 풍경을 카메라에 담으며 걸어갑니다. 제가 “이리로 다시 내려올 테니 그때 찍어도 된다”며 걸음을 재촉합니다. 어느새 앞서간 참나리는 보이지도 않습니다. 저도 앞서 간 꼬맹이를 금세 추월합니다. 산바람과 호랭이는 어차피 포기한 모양인지 보이지 않습니다.
탐라계곡 화장실에 이르자 계절은 봄에서 겨울로 바뀝니다. 봄 산행을 마치고 아이젠과 스패츠를 장착한 뒤 겨울 산행을 시작합니다. 저와 뜬 총무, 감자바우와 달라무 4명이 앞서거니 뒤서거니하며 산을 오릅니다. 뜬 총무와 제가 삼각봉대피소에 도착한 시간은 11시 40분. 조금 있으니 달라무와 감자바우도 모습을 보입니다. 꼬맹이는 몰라도 산바람과 호랭이도 얼마든지 12시 전에 올라올 수 있었는데 안타깝습니다.
나중에 듣자하니 참나리가 11시 16분 삼각봉대피소에서 올린 사진을 보고 산바람과 호랭이는 망연자실했다고 합니다. 회장인 저의 말보다 안내원의 말을 더 믿은 게 패착입니다. 산바람은 12시 5분, 호랭이는 12시 20분 삼각봉대피소에 도착해 1시간여를 추위에 떨다가 다시 내려갔습니다.
삼각봉대피소를 나와 백록담으로 향하는 길에 정상을 찍고 내려오는 피플러버 일행을 만났습니다. 지친 표정으로 “배고파 죽겠다”면서 먹을 걸 달라고 하기에 “컵라면 드릴까요”라고 하니 “컵라면 싫어. 김밥 없니?”라고 합니다. “뒤에 오는 감자바우에게 달라고 하세요”라고 말하며 짧은 만남을 끝냈습니다. 조금 더 가니 참나리가 쌩쌩한 기색으로 내려옵니다. 처음 한라산을 오른다는데 대단한 체력이고 실력입니다.
첫댓글 역쉬! 그림이 그려지는 산행기! 최고입니다^^
함께 못해서 아쉬움 있네요, 다음달에 뵈요
아톰이 없어 허전하고 아쉽고 안타깝고, 아무리 흥을 내려고 해도 나지 않았어. 다음에 꼭 함께하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