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 재생기(2)
또한, 이 무렵에는 유호 작사, 박시춘 작곡의 ‘전우야 잘 자라’가 전국을 휩쓸었다. 전우의 시체를 넘고 넘어 앞으로 앞으로 낙동강아 잘 있거라 우리는 전진한다 원한이야 피에 맺힌 적군을 무찌르고 꽃잎처럼 사라져 간 전우야 잘 자라 너무나 애절한, 애상적인 노래였지만, 적의와 통분이 뒤범벅되어 전선과 후방 모두에서 이 노래의 합창은 더욱 높았다.
전쟁 동안 숱한 우리 가요인들이 납북되기도 했지만, 자유를 찾아 남하하는 피난민의 대열 가운데에는 가수들도 섞여 있었다.광복 이전 빅터레코드에서 활동하던 한정무가 대표적인 경우라 할 것이다.
한복남은 피난지 부산에서 레코드 바늘 장수로부터 출발해 도미도레코드사를 차렸다. 집안 식구가 모두 달려들어 레코드를 찍어 내다가 삼삼오오 흩어져 팔러 나가야 했다. 손영준, 김흥산의 스타레코드와 이병주가 대구에서 차린 오리엔트레코드, 유니온레코드 등이 기를 쓰고 있었다.
1954년에 스타레코드에서 박단마가 취입한 ‘슈샤인보이’는 그 무렵의 풍경을 되살려 주는 노래다. 비슷한 시기에 나온 황금심의 ‘삼다도 소식’, 신카나리아의 ‘승리부기’, 조금 앞서 나온 현인의 ‘굳세어라 금순아’ 등이 이 당시 히트한 노래들이다.
‘굳세어라 금순아’는 월남 피난민들의 애절한 기원과 푸념이 절실히 그려져 있어, 밤이면 부산 남포동 선술집에서 쉰 목소리에 실려 들리던 노래다. 한복남의 도미도레코드사에서는 신인 허민을 얻어 ‘페르샤 왕자’를 내놓았다.
대구의 오리엔트레코드사에선 주로 박시춘을 중심으로 남성봉이 부른 ‘쌍가락지 논개’, 이인권의 자작곡‘미사의 노래’, 심연옥의 ‘아내의 노래’(노래:은방울자매), 신세영의‘전선야곡’ 등 히트곡을 내놓았다.
가랑잎이 휘날리는 전선의 달밤
소리 없이 내리는 이슬도 차가운데
단잠을 못 이루고 돌아눕는 귓가에
장부의 길 일러 주신 어머님의 목소리
아 그 목소리 그리워
<
전선야곡 : 유호 작사, 박시춘 작곡, 신세영 노래(1952)>
그 무렵 부산항은 6.25 전쟁의 비극을 좁은 시가지에 담고 살기 위해 발버둥치는 피난민들로 가득 차 있었다. 그들은 전선 소식에 눈물을 뿌리기도 했고 웃음을 터뜨리기도 했다. 인간이 가는 곳엔 로맨스가 생기는 법이라, 토박이 아가씨와 외로운 피난 청년의 로맨스가 싹트기도 했다. 먼 훗날 그토록 못 견디게 슬프던 부산항의 석양도 추억이 됐으리라.
부산항에 아롱진 노래로는 박재홍의 ‘경상도아가씨’가 대표적이다.
40계단 층층대에 앉아 우는 나그네
울지 말고 속 시원히 말 좀 하세요
피난살이 처량스레 동정하는 판자집에
경상도 아가씨가 애처로워 묻는구나
그래도 대답 없이 슬피 우는 이북 고향 언제 가려나
<
경상도 아가씨 : 손로원 작사, 이재호 작곡, 박재홍 노래>
이 노래는 그 때 그 누구나 가슴에 담아 두고 있던 한을 읊은 것이다. 한정무의‘꿈에 본 내 고향’ 또한 그런 노래였다. 어쩌면 그것은 스스로 실향민이기도 했던 한정무 자신의 넋두리였으리라.
이 무렵의 레코드 제작은 엿장수가 모아 오는 고물판을 재생하는 수공업 수준의 것이었다. 무딘 바늘에 그 SP 음반이 여러 차례 닳고 나면 원래 취입되어 있던 노래가 나와 합창을 이루기도 했다.
부산방송국은 이재호를 중심으로, 대구방송국은 이병주, 그리고 마산방송국은 반야월을 중심으로 가요인들이 후방을 지키고 있었다. 진방남, 즉 반야월이 부른 ‘비내리는 삼랑진’은 자기가 쓴 가사를 노래한 것이라 감정 표현이 한결 뚜렷했다. 반야월은 마산방송국에서 신인가수를 육성하면서 ‘마산엘레지’, ‘눈 내리는 마산항’ 등의 노래를 작사하여 진방남이란 이름으로 불러 인기를 모았다.
이 무렵 발표된‘물방아 도는 내력’은 박재홍으로 하여금 톱가수가 되게 했다.
벼슬도 싫다마는 명예도 싫어
정든 땅 언덕 위에 초가집 짓고
낮이면 밭에 나가 기심을 매고
밤이면 사랑방에 새끼 꼬면서
새들이 우는 속을 알아 보련다
<
물방아 도는 내력 : 손로현 작사, 이재호 작곡, 박재홍 노래>
국회의원들을 태운 버스가 기중기에 매달려 끌려가고 땃벌떼, 해골단이 난무하는 정치파동 속에 귀거래를 노래한 이 곡은 자유당 정권에 대한 반발을 부채질한 것이었다. 한 마리 고기짝을 들고 피난살이 판자집으로 돌아가던 취객들도 불렀고, 불 밝힌 창가에서 소녀들도 불렀다.
동란의 시절, 진해 앞바다 푸른 물에 낚시를 던지고 한가롭게 노닐기도 했던 늙은 대통령이야 이 노래를 몰랐겠지만.
이 무렵 악단들은 미8군 무대를 누볐다. 얘기가 되돌아가지만, 북진행렬에 동승했던 악단도 있었다. OMC악단은 북진행렬에 동승해 평양까지 갔다가 중공군의 침략에 되쫓겨 되돌아왔다.
미8군 무대가 흥청거리기 시작하면서 유능한 악사들을 모두 미8군 무대에 빼앗겨 일반 공연이 부진하기도 했다. 이후 더욱 거창해진 미8군 쇼의 출발이었다.
휴전회담 이후 북진통일의 소리가 높을 때 ‘판문점의 달밤’이 나와서 사람들의 가슴을 뒤흔들었다.
뜸북새 울고 가는 판문점의 달밤아
내 고향 잃어버린지 십 년은 못 되더냐
푸른 가슴 피 끓는 장부의 가는 길에
정안수 떠 놓고 빌어 주신 어머님은 안녕하신가
<
판문점의 달밤 : 유노완 작사, 이봉룡 작곡, 고대원 노래>
비슷한 시기에 유춘산은‘안개 낀 목포항’, ‘향기 품은 군사우편’으로 주목을 받았다. 남인수의 목소리와 비슷한 면이 있으면서도 새로운 목소리였다.
특히 ‘향기 품은 군사우편’은 동란 속에 맺힌 가지가지 한 중에, 사랑하는 애인을 전선으로 보내고 뒤에 남은 여인이 지금은 그 님이 어디에서 총을 들고 날 생각할까 하는 이별의 슬픔을 그려 가슴을 두드렸다.
행주치마 씻은 손에 받은 님 소식은
능선의 향기 품고 그대의 향기 품어
군사우편 적혀 있는 전선 편지에
전해 주던 배달부가 싸리문도 못 가서
복받치는 기쁨에 나는 울었소
<
향기 품은 군사우편 : 박금호 작사, 나화랑 작곡, 유춘산 노래>
1954년에는 유니버살레코드가 새로 등장하고 백설희가 스타덤에 올랐다. 백설희는 은쟁반에 방울을 굴리는 듯한 특이한 목소리로 주로 박시춘의 곡을 불렀다. ‘아메리카 차이나타운’, ‘봄날은 간다’, ‘물새 우는 강언덕’, ‘첫사랑의 문’ 등이 히트했다. 백설희의 전성기라고나 할까. 한 동안 백설희의 노래를 찾는 손님으로 레코드가게가 붐볐다.
북진통일의 절규는 빈 메아리가 되고, 환도 열차가 부산을 떠나기 시작했다. 너도 나도 쓰린 피난지에서의 추억을 안은 채 열차에 올랐다. 피난 올 땐 없던 어린애를 들쳐업고 차에 오르는 아낙네도 있었다. 홀로 피난을 와서 피난지에서 결혼해 부부가 되어 떠나는 사람도 있었다. 인간의 삶이란 그 어떤 수난 속에서도 더욱 가혹하게 싱싱한 것일까. 영도다리에서, 사십계단에서 맺은 로맨스 때문에 열차 난간에서 눈물을 닦는 사람도 있었다.
바로 이 감정을 묘사한 노래로 폭발적인 인기를 모았던 노래가 남인수의 ‘이별의 부산정거장’이다.
보슬비가 소리도 없이 이별 슬픈 부산정거장
잘 가세요 잘 있어요 눈물의 기적이 운다
한 많은 피난살이 설움도 많아 그래도 잊지 못할 판자집이여
경상도 사투리의 아가씨가 슬피 우네 이별의 부산정거장.
<
이별의 부산정거장 : 호동아 작사, 박시춘 작곡, 남인수 노래(1954)>
이 노래로 남인수는 또 한번 만년가수로서의 관록을 과시했다.
<다시 황금기로 가는 오르막길에서>
서울 환도 이후 명국환이 부른 ‘방랑시인 김삿갓’은 노래 가사처럼 열두 대문 문간마다 불리던 노래다.
죽장에 삿갓 쓰고 방랑 삼천리
흰 구름 뜬 고개 넘어 가는 객이 누구냐
열두 대문 문간방에 걸식을 하며
술 한 잔에 시 한 수로 떠나가는 김삿갓
<
방랑시인 김삿갓 : 김문응 작사, 전오승 작곡, 명국환 노래>
선풍적으로 유행한 이 노래는 시대 감각과는 전혀 어울리지 않았지만 대중들은 한사코 이 노래를 불렀다.
어수선한 환도의 한 철이 가고 가요계는 서울, 부산, 대구 등 지방별로 권역을 형성했다. 지방에는 주로 환도하지 않고 남은 가요인들과 현지에서 발굴한 신인들이 모여 있었다.
부산에는 코로나레코드사와 미도파레코드사를 중심으로 백영호, 김호길, 허영철 등의 작곡가와 현인, 송민도, 이숙희, 박재홍 등의 가수가 있었다.
이숙희의 ‘부산블루스’, 한종명(작사가 한산도가 가수로 활동할 때 사용한 본명)의 ‘고향 아닌 고향’이 히트했고, 송민도의‘애수’역시 크게 인기를 끌었다.
울어 보아도 웃어 보아도 시원치 않더라
내 가슴 속 미련이 남아 시냇물 여전히 흐르건만
잔디 핀 언덕에 나만 홀로 아 추억에 운다
( ‘애수’, 한산도 작사, 백영호 작곡, 송민도 노래)
작사가 한산도 자신의 실연을 읊었다는 이 노래는 송민도를 크게 부각시켰고 그를 중앙무대로 진출시켰다.
6.25 전쟁 때에 부산에서 이름을 떨치던 매력적인 엘토가수 송민도는 ‘서귀포 사랑’을 불러 인기 절정을 이루었다. 손석우 작곡의 ‘나 하나의 사랑’ 또한 크게 히트해서 같은 제목의 영화가 나오기까지 했다.
1950년대 중반에는 맘보붐이 있었다. 미스코리아로 세계 미인대회에 나간 아가씨가 “맘보춤을 춰서 날씬해졌다”고 호언할 만큼 맘보붐은 대단했다. 물론 가요가 이를 외면할 리 없었다. 김정구의 ‘코리안 맘보’, 한복남의 ‘맘보타령’, 송민도의 ‘서울의 안나’ 등이 계속 나왔고, ‘맘보타령’은 레코드가 5만 장이나 팔렸다고 한다.
이른바 자유부인이 속출하고 댄스를 배우는 주부들이 손가락질을 받던 시절이다. 많은 가요도 춤곡으로 편곡되고 차차차, 블루스가 판을 쳤다. 세태를 반영한 것이라고 할 것이다.
이러한 현상은 가요의 본질을 조금씩 변화시키고 있었다.
이 무렵 중앙방송국에서는 최초로 라디오 연속극을 시도했다. 특히 인기를 끈 ‘청실홍실’은 그 주제가를 신인 안다성이 불렀는데, 중앙방송국의 출력이 증강되자 방송은 이제 가수들의 활동무대로 크게 한 몫을 하기 시작했다. 방송은 새로운 가수들을 포용하고 새로운 가요를 새로운 가요를 홍수처럼 번지게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