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기인 자줏빛 주머니에 목도장과 통장을 넣고 옆걸음으로 바다를 따라가는 꽃게 아코디언 주름을 부풀렸다 줄이는 파도 치렁거리는 바다의 옷이 너무도 커서 젖는다 그물에 걸려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는 신세 꽃게 집게발로 잘라놓은 넥타이와 새파란 구두를 벗어놓은 기분으로 입에 문 거품 통통배에 지나치게 많이 앉은 갈매기 울음 지나치게 많은 집게발의 허우적거리는 불가능성 스티로폼 박스에 차례로 재워놓은 마름모꼴 잿빛 착하게 뒤집어놓은 근질거리는 배꼽 일생이라는 단위는 당신 깊이에 닿을까 낮과 밤은 집게발로 끊을 수 없는 파도 옆으로 다가와 귀에 넣어준 냉장고 소리 퉁 부은 별 모양 성에를 끌어당기는 꽃게 투구와 갑옷을 벗지 못하는 불면 밤새 어느 해안가로 떠내려가는 달빛 목도장과 통장을 함께 건져놓은 아침 주머니에서 흘러나오는 마지막 자줏빛 집게발로 싹둑 자르지 않은 담배 연기 ―월간 《現代文學》 2024년 7월호 --------------------- 이기인 / 1967년 인천 출생. 2000년 〈경향신문〉 신춘문예로 시 등단. 시집 『알쏭달쏭 소녀백과사전』 『어깨 위로 떨어지는 편지』 『혼자인 걸 못 견디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