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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50321. 묵상글 ( 사순 제 2주간 금요일. - 사람 하느님의 사람. 등 )
^ 김찬선 레오나르도 신부님. : 아직 / 05;08 추가
^ 호명환 가롤로 신부님 글 일부. : 아직 / 07:26 추가
^ 조명연 마태오 신부님. : 아직 / 07:26 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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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50321. 사순 제 2주간 금요일. 상지종 베르나르도 신부님.
<사람 하느님의 사람>
하느님께서
빚으시니
사람은
하느님의
사람입니다
하느님께서
보내시니
사람은
사람에게
하느님입니다
하느님께서
빚으시고
보내시는
하느님 같은 사람을
하느님의 사람을
보듬으니
참으로
사람이요
하느님 닮은
하느님의 사람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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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50321. 사순 제 2주간 금요일. 김찬선 레오나르도 신부님.
2025.03.21 05:02
- 공동선을 위해 합력선하는 우리
창세기 요셉의 얘기를 묵상할 때마다 드는 생각은
하느님께서는 인간의 역사를 당신의 역사로 만드신다는 것이고,
서로 파괴하는 인간 역사를 구원하시는 하느님 역사로 만드신다는 것입니다.
이것을 잘 표현하는 성경 구절이 바로 “집 짓는 이들이 내버린 돌,
그 돌이 모퉁이의 머릿돌이 되었네. 이는 주님께서 이루신 일,
우리 눈에 놀랍기만 하네.”입니다.
구약에서 야곱의 자식들이 형제인 요셉을 버리는데
신약에선 인간이 하느님의 아들마저 서슴없이 버립니다.
이는 인간이 악하게 되면 못 할 짓이 없고 버리지 않는 것이 없음을 보여 줍니다.
제 생각에 동물은 야수일지라도 잡아먹기는 해도 그냥 죽이거나 버리지 않습니다.
그것은 동물에게는 싫은 것이 없고 미워하는 것은 더더욱 없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인간은 버리거나 죽여버립니다.
앞에서 봤듯이 형제마저 하느님까지.
싫으면 버리고 미우면 죽여버립니다.
잘 아시다시피 좋고 싫음은 자기중심적인 감정이고,
미움은 싫어하는 것을 단지 버리는 것을 넘어 파괴하는 힘이며,
미움이 극에 달하게 되면은 죽여버리기까지 하는 힘입니다.
그리고 오늘 독서와 복음에서 또 볼 수 있는 것은
싫은 감정과 미움의 힘이 개인에게서 그치지 않고 집단화한다는 점입니다.
창세기에서는 형제들이 싫어하는 감정을 공유하며
요셉을 버리자고 더 나아가 죽이자고 공모하고,
복음에서는 소작인들이 힘을 합쳐 주인에게 대듭니다.
공동선을 위해 합력선하는 것이 아니라
혼자서는 할 수 없는 악한 짓을 힘을 합쳐 저지르는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이렇게 해서 집단 폭력이 발생하는데
거의 모든 악이 이렇게 집단화하고
이런 집단화에는 반드시 주모자와 공모자가 있습니다.
히틀러라는 인간이 이렇게 악을 집단화하였고,
전두환이라는 인간이 마찬가지로 악을 집단화하였으며
우리는 지금도 이들과 똑같은 것을 마주하고 있습니다.
세속 집단에서만이 아니라 종교 단체에서도.
사랑을 배우는 우리 그리스도교 안에서도,
자기를 버리지 않고 이웃을 죽여버리고,
자기 소유를 나누지 않고 이웃의 소유를 공모하여 빼앗습니다.
그런데 오늘 독서와 복음은 인간이 버린 돌을
하느님께서는 귀한 돌로 쓰신다고 얘기합니다.
그리고 인간이 버린 돌을 귀하게 쓰실 뿐 아니라
귀한 돌을 버린 악한 자들을 주인이 반드시 징벌하신다고
복음은 얘기하는데 이것이 창세기와 복음의 차이점입니다.
그런데 이 하느님의 징벌이 노아나 소돔과 고모라의 경우처럼
하느님께서 직접 손을 뻗어 징벌하시는 때도 있지만
많은 경우에는 사람들의 손을 빌리시고 힘을 합치게 하십니다.
이처럼 우리 인간은 악의 집단화도 하지만
공동선을 이루려고 합력선하기도 하고,
뜻을 모아 하느님의 뜻을 이루기도 하지요.
앞서 하느님께서는 당신의 귀한 돌들을 버리는 악한 개인과 집단을
반드시 징벌하신다고 말씀드렸는데 이것을 믿는 것이 우리 신앙이고,
하느님 뜻에 맞는 공동체를 이루려고 힘을 합치는 것이 우리 신앙인이겠지요.
그런데 하느님의 귀한 돌을 버리는 악한 짓을 하면서
자기는 하느님의 공동체를 지키기 위해 애쓴다고
복음의 바리사이나 원로들처럼 생각하는 것은 아닌지,
저 자신도 돌아보고 세상 걱정도 하는 오늘 저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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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50321. 사순 제 2주간 금요일. 호명환 가롤로 신부님.
CAC 매일묵상
동정심(Compassion)에 충실하기!
하느님의 숨
2025.03.20. 16:30
CAC(Center for Action and Contemplation) 리처드 로어의 매일 묵상 - 2025년 3월 20일 목요일 (호명환 번역) 열두 번째 주간: 낯선이를 환영하기
우리가 무언가를 참으로 실천하게 되면 대개 새로운 존재 방식과 새로운 믿음의 방식을 갖게 됩니다.
만일 여러분이 정말로 친구를 사귀고 싶다면 누군가의 집으로 가서 그와 함께 음식을 드십시오.... 자기들의 음식을 주는 사람들은 자기들의 마음을 주는 사람들입니다.
- 세자르 차베스(César Chávez)
신학자 카렌 곤잘레스(Karen Gonzalez)는 특별한 정책에 대한 자신의 노골적인 믿음과는 상관 없이 동정심을 지니고 행하는 어떤 여성과의 만남을 떠올리며 그 사람에 대해 이야기해 줍니다:
저는 제가 엘리베이터에서 나오기 전에 [자기 친구와 함께] 로비에 서 있던 피셔 부인(Mrs. Fisher)을 보았습니다. 그녀가 우리 이민 상담소를 방문한 것은 이번이 두 번째였습니다. 그래서 [저는] 잔소리를 들을 각오를 하였습니다. 그녀는 예상대로 우리 단체가 인민 정책을 옹호하는 일을 자신은 찬성하지 않는다고 말했습니다. "왜 여러분은 다들 그렇게 정치적이어야 합니까?" 하고 그녀가 저에게 물었습니다....
그런데 사실 피셔 부인은 저에게 수수께끼 같은 인물이었습니다. - 그녀는 자기민족중심주의에 바탕을 둔 분명한 외국인 공포증 성향과 "다른 이들", 특히 외국인에 대한 두려움을 드러내곤 했습니다. 그러나 그녀의 행동은 늘 관대하였고 환대적이었습니다. 그것도 만찬을 주최하며 보여주는 식의 관대함과 환대가 아니라 성경에서 묘사하는 낯선이에 대한 참된 사랑(philoxenia)으로 하는 관대함과 환대였습니다. 그 사랑은 감상적인 것이거나 일시적인 것이 아니라, 그녀의 삶의 방식이었고 외국 사람들에 대한 배려가 깊이 스며들어 있는 가치관과 같은 것이었습니다.
그녀는 첫 번째 방문 때 다른 이주민 친구 하나를 데리고 왔습니다. 그 친구는 자신의 가정부였는데, 취업 비자를 갱신해 주기 위해서온 것이었습니다. 이 가정부는 이 비자 갱신을 계속 미루어 왔습니다. 왜냐하면 그러려면 한나절은 일을 하지 않고 변호사를 만나러 가야 하므로 하루의 수입 반을 벌지 못한다는 이유 때문이었습니다. 그래서 피셔 부인은 한나절 자기 집 청소를 하지 않고도 하루 일당을 주겠다는 제안을 그녀에게 했습니다. 그리고 피셔 부인은 손수 이 가정부를 우리 이민 상담소까지 차를 태워 데리고 와서는 주차비가 비싼 주차장에 차를 댄 뒤 상담이 끝날 때까지 내내 기다려 주었습니다. 나중에 그녀는 이 가정부와 함께 돌아와 비자 갱신을 위한 청원서까지 제출해 주었습니다. 이민 정책에 극렬하게 반대하는 사람임에도 불구하고 그녀는 이민 법률 지원이 필요한 두 사람을 돕기 위해 자기 시간과 돈, 그리고 여타의 것을 기꺼이 내어 준 것입니다. 저는 말로는 난민들과 다른 이민자들을 지지한다고 하면서도 실제로는 단 한 사람의 이민자를 돕기 위해 하는 일의 절반도 하지 않는 사람들을 압니다!
곤잘레스는 마태오 복음에 나오는 두 아들의 비유(21,28-30)에 대해 말하면서 우리의 영적 성장에서 동정심에서 우러나오는 행동이 어떤 역할을 하는지를 강조하여 말합니다:
예수님의 말씀에 따르면 ... 중요한 것은 좋게 보이기 위해 그저 "예"하고 대답하는 것이 아니라 실제로 선한 행동을 하는 것입니다.... [피셔 부인]은 하느님의 뜻을 행하고 있었지만, 그녀가 이주민들을 환영하고 그들에게 정의를 실천하라는 하느님의 말씀을 믿었을까요?
저로서는 알길이 없습니다. 왜냐하면 제가 그 후로 그녀를 또 볼 수 없었기 때문입니다. 그렇지만 저는 그녀가 그 하느님의 말씀을 믿었다고 해도 놀라지 않았을 것입니다. 왜냐하면 우리가 무언가를 참으로 실천하게 되면 대개 그에 상응하는 새로운 존재 방식과 믿음의 방식을 갖게 된다는 것이 지금까지의 제 경험이 말해주는 바이기 때문입니다. 저는 늘 믿음이 행위보다 앞선다고 생각했고, 또 때로는 실제로 그랬습니다. 그러나 너무나 자주 우리를 형성해 주고 우리의 믿음을 변화시켜 주는 것은 오히려 실천이라는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그 실천은 어떤 변모의 힘을 내면화해주는 역할을 합니다. 우리는 행함으로써 배웁니다. 저는 피셔 부인이 이제 환대를 실천할 뿐 아니라 환대의 중요성을 선포하는 사람이 되었지 않았을까 하는 생각을 합니다. 그러길 바라면서요!
우리 공동체 이야기
수년 전 저는 비행기를 타고 가다가 제 어떤 영감을 받아 제 신앙에 대해 깊이 성찰한 적이 있습니다. 그 동안 저는 인류 전체에 대한 하느님의 영원한 사랑에 대해 깊이 숙고해왔었습니다. 우리가 비행기에서 내리기 위해 모두 함께 기다리는 동안 저는 거기 있는 한 사람 한 사람을 하느님으로부터 전적으로, 그리고 무조건적으로 사랑받고 있는 존재로 보았습니다. 물론 그들은 저에게 모두 낯선 사람들이었지만 하느님께는 전혀 그렇지 않다는 것을 깨달았기 때문입니다. 종종 제가 많은 사람과 함께 있을 때면, - 혹은 또 다시 비행기에서 내릴 때면 - 저는 그 경험을 떠올리며 깊은 평화를 느끼곤 합니다.
—Christy M.
Karen González, Beyond Welcome: Centering Immigrants in Our Christian Response to Immigration (Brazos Press, 2022), 70, 71–73.
Image credit and inspiration: Lucas Dalamarta, Untitled (detail), 2024, photo, Unsplash. Click here to enlarge image. 알지 못하는 존재와 함께 할 때 우리는 다른 이들을 위해 열린 마음으로 공간을 마련하고 함께 나아가는 수양을 할 수 있습니다. 그 결과를 우리가 알지 못한다 하더라도 말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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숨영성 묵상글
하느님은 창조의 목적인 선을 궁극적으로 실현시키시기 위해 악이 더 짙어지게 하기도 하십니다!
하느님의 숨
2025.03.21. 05:39
언젠가도 말씀드렸듯이, 어둠은 빛이 없는 상태를 의미합니다. 그래서 요한 복음 서문에서 "어둠이 빛을 깨닫지 못하였다." 하고 선언하는 것입니다. 어둠은 실체가 아니기 때문입니다. 어둠은 그저 없는 것입니다.
빛은 물질이라고 할 수는 없지만 입자(원자나 분자)가 높은 에너지 상태에서 낮은 에너지 상태로 이동할 때 잃어 버리는 에너지가 모아져서 생기는 파동 에너지입니다. 또 원자나 분자가 그 빛을 다시 흡수하게 되면 낮은 에너지 상태에서 높은 에너지 상태로 이동한다고 합니다.
그래서 빛은 우리 인간의 과학적 연구 대상이 될 수 있습니다만, 어둠은 이 빛이 존재하지 않는 것이어서 과학적 연구 대상이 될 수 없습니다.
그렇지만 우리 인간의 영적 영역에 있어서는 이 어둠이 미치는 영향이 크기에 그저 간과될 수 있는 것은 아닙니다. 없는 데도 "것"이라고 한다면 어쨌든 우리가 인식하는 그 무엇이라고 할 수 있는 것이지요.
그래서 하느님께서는 어둠(빛이 결핍된 상태)과 악(선이 결핍된 상태)을 누루시는 방법으로 그 상태를 더 어둡고 더 악하게 내버려 두기도 하십니다. 당신 창조의 목적인 선을 궁극적으로 실현시키시기 위해서 말입니다.
오늘 독서의 요셉의 삶과 복음의 예수님의 삶을 보면 악이 악 그 자체에 의해 패배에 이르게 된다는 것, 즉 악이 악에 의해 선이 승리하게끔 준다는 진리를 우리는 분명히 알 수 있습니다.
요셉의 형제들은 요셉을 이스마엘 상인들에게 노예로 팔아 넘겼지만, 하느님께서 이 요셉을 이집트로 가게 하시어 이스라엘 백성도우시는 중개자가 되게 하십니다(창세 37,20-28).
그리고 수석 사제들과 백성의 원로들이 예수님을 죽음에 넘기지만(마태 26,3 이하), 하느님 우리 아버지께서는 우리에 대한 애틋한 사랑 때문에 예수님의 죽음을 인류 구원, 즉 우리 한 사람 한 사람의 구원을 위해 활용하십니다.
오늘 우리가 함께 읊은 화답송 시편도 우리에게 이렇게 권고합니다. "주님이 이루신 기적(놀라운 일)을 기억하여라!" 우리의 상식으로는 이해가 되지 않는 사랑 자체이신 창조주 아버지 하느님의 일을 잘 살펴보라는 말입니다. 하느님께서는 모든 사건, 모든 일, 모든 재앙, 모든 악을 죄다 모아 당신을 사랑하는 이들과 당신의 계획에 따라 부르심을 받은 이들을 위한 선으로 바꾸어 주십니다.
그리스도교 역사 전체를 보게 되면 하느님의 거룩한 백성이 박해를 받을 때마다 하느님의 백성이 파멸에 이르지 않고 오히려 그 믿음에서나 수에서 더더욱 강해졌다는 것을 우리는 압니다. 하느님께서는 당신 말씀으로 이렇게 약속해 주시지 않습니까?! "너를 치려고 만들어진 어떤 무기도 소용이 없고 재판에서 너를 거슬러 일너난 혀들은 네가 모두 패소시키리라. 이것이 주님의 종들을 위한 상속 재산이며 그들이 나에게서 받을 승리다."(이사 54,17). 그래서 예수님께서도 이렇게 말씀하시는 것이고요! "사람들이 너희를 넘길 때, 어떻게 말할까, 무엇을 말할까 걱정하지 마라. 너희가 무엇을 말해야 할지, 그때에 너희에게 일러 주실 것이다. 사실 말하는 이는 너희가 아니라 너희 안에서 말씀하시는 아버지의 영이시다."(마태 10,18-19).
그러므로 우리는 악을 두려워하지 맙시다! 두려움은 아무 쓸모가 없을 뿐 아니라 우리를 더더욱 퇴보하게 만듭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는 우리에게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두려워하지 말고 믿기만 하여라!"(마르 5,36).
지난 2월 25일 복음 묵상에서 우리가 함께 나누었듯이, "우리는 이미 역사의 현재라는 유리한 입지에서 모든 것을 보고 들을 수 있기" 때문에 우리는 이 진리를 분명히 알고 있습니다.
그러나 이 진리가 우리 안에서 우리의 존재적 앎(온 몸으로 아는 앎-kinethetic knowing)이 되기 위해서는 우리도 이 진리를 우리 스스로 경험해야 하고, 그것도 반복되는 경험을 통해 이 진리를 깊이 깨달아 받아들일 수 있어야 합니다.
그래서 우리에게는 조바심이 아닌 예수님과 하느님에 대한 신뢰의 인내심이 필요한 것입니다. 꼭 그렇게 해 주실 것이라는 믿음 안에서 우리는 기다릴 필요가 있습니다. 지금 당장은 어둠과 시련이 있을지 몰라도 그것은 우리를 당신 선으로 이끌어 가시기 위한 하느님의 계획 안에 들어 있는 과정일 뿐입니다. 물론 이 사실을 받아들이는 것은 하루 아침에 이루어지지 않습니다. 그래서 우리에게 수양과 수행이 필요한 것입니다. 지긋한 신뢰심과 기다림의 수양과 수행 말입니다!
어두운 밤을 수없이 경험하면서 하느님의 앎에 이르게 된 십자가의 성 요한이나 다른 많은 성인, 성녀의 삶을 우리는 기억할 필요가 있습니다. 가르멜회 김광서 신부의 저서 [십자가의 성 요한의 하느님과의 합일론 - 사랑의 신비신학: 변화적 합일을 통한 하느님화와 그리스도화]에 이런 내용이 나옵니다.
"십자가의 성 요한에게 인간의 유한하고 일시적인 조건은 부정적인 의미가 아니다. 십자가의 성 요한은 그러한 조건을 이 현세의 삶에서 하느님과 완전한 합일을 이루고 그리스도 안에서 전적인 변화를 이루기를 바라는 하느님의 영원으로부터의 계획을 자신의 실존적 상황과 삶의 자리에서 구체적으로 실현할 수 있는 중요한 장(場)으로 보고 있으며, 새로운 존재 방식을 적용하고 구현할 가능성을 부여받는 기회로 보고 있다."
만일 지금 우리에게 시련과 어둠이 느껴진다면, 아니 그 어둠과 시련 한가운데서 어찌할 바를 모른다면 폭풍우마저도 잠잠하게 해 주시는 우리의 주님께 그 모든 것을 맡겨 드립시다! 사도 바오로의 다음 권고 말씀을 상기하고 반복해서 외면서 말입니다. "악에 굴복당하지 말고 선으로 악을 굴복시키십시오!"(로마 12,21).
어둠과 악은 빛과 선이 결핍된 상태이기에 우리가 하느님의 빛과 선을 마음(우리 존재) 깊이 품고자 한다면 악과 어둠은 자연스럽게 자기들 자리를 우리에게 내어 줄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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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50321. 사순 제 2주간 금요일. 조명연 마태오 신부님.
25.03.21 05:47
조너선 스위프트의 ‘걸리버 여행기’를 잘 아실 것입니다. 1726년 18세기의 작품으로, 의사 걸리버가 선박 의사로 취직해서 세계를 돌아다니며, 작은 사람들이 사는 나라, 큰 사람들이 사는 나라, 날아다니는 섬의 나라 등을 방문하게 되는 기행문 형식의 소실입니다.
저의 경우, 이 책을 어렸을 때 동화책으로 읽었습니다. 그렇다면 걸리버 여행기는 어린이들이 읽는 동화일까요? 사실 원본은 신랄한 성인용 풍자였습니다. 당대의 정치 상황을 비판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나 이 풍자는 시간이 지나가면서 사람들이 잘 이해하지 못해 사라졌고, 대신 어린아이도 읽을 수 있는 소설이 된 것입니다. 고전화가 이루어졌고, 세계적인 독자층을 가지게 되었습니다. 당시에, 저자 조너선 스위프트도 상상하지 못할 일이 이루어진 것입니다.
우리는 쉽게 단정 지을 때가 있습니다. ‘이렇게 될 것이다.’, ‘이것밖에 안 된다.’ 식의 한계를 만들고 그 안에서 벗어나려고 하지 않습니다. 그러다 보니 하느님 뜻에 맞게 사는 것이 아니라, 세상 뜻에만 맞게 살아가려 합니다. 욕심과 이기심이 가득한 세상이라서 그렇게 살아야 지혜로운 사람처럼 보이기도 합니다. 오랫동안 냉담 중인 분께서 이렇게 말씀하시더군요.
“신부님, 먹고 사는 것이 더 중요하지요.”
단정 짓는 자기 생각이 맞다고 이렇게 말씀하신 것 같습니다. 만약 이 세상에서 영원히 살 수 있다면 먹고 사는 것이 가장 중요하다고 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하느님 나라에서만 영원히 살 수 있다는 것을 기억하면 무엇이 더 중요한 것일까요?
예수님께서는 수석 사제들과 백성의 원로들에게 포도밭 소작인의 비유 말씀을 해 주십니다. 포도밭을 일구고 울타리를 치고 포도 확을 파고 탑을 세운 사람은 하느님을 가리킵니다. 이렇게 포도밭을 일구시고 이를 소작인들에게 맡기시지요. 이 소작인은 당시의 종교 지도자들을 가리키며, 동시에 하느님의 뜻을 따르지 않았던 이들을 나타냅니다.
자기 욕심과 이기심 때문에, 주인이 보낸 종들을 매질하고 죽입니다. 주인이 아들까지 보내지만, 포도밭을 차지할 생각으로 죽여 버립니다. 바로 예언자들을 향한 이스라엘 사람들의 배척과 예수님에 대한 배척을 보여줍니다. 그 모든 것이 세상의 논리로 생각하고 행동하는 사람들의 못된 모습이었습니다.
더 중요한 것이 무엇인지를 묵상할 수 있어야 합니다. 순간의 만족보다는 영원한 만족을 추구해야 하고, 세상의 뜻보다는 하느님의 뜻 안에 머물 수 있는 마음을 가져야 합니다. 그때 상상도 못 할 그분의 힘 속에서 힘차게 앞으로 나아가는 ‘나’를 만들 수 있게 될 것입니다. 하느님 나라의 기쁨을 누릴 수 있게 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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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의 명언: 인생에서 여러 번 낙담할 수는 있다. 하지만 그건 실패가 아니다. 다른 사람 탓을 하고 모든 시도를 멈추는 순간이 바로 실패다(존 버로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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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50321. 사순 제 2주간 금요일. 이영근 아오스딩 신부님.
오늘 <복음>은 ‘포도밭의 사랑의 노래’를 들려줍니다.
포도밭 주인(하느님)은 당신의 포도밭(이스라엘 백성)을 소작인(백성의 지도자)들에게 맡깁니다. 그리고 주인은 당신의 종(예언자)들을 여러 차례 보내지만 소작인들은 그 종들을 학대합니다. 하나는 매질하고, 하나는 돌로 쳐 죽이고, 결국 주인이 사랑하는 아들(예수 그리스도)까지 보내지만, 그마저도 포도밭 밖으로 끌어내어 죽입니다.
이 이야기는 하느님께서 인간을 얼마나 신뢰하고 사랑하고 계시는지를 실감나게 해 주는 노래입니다. 그 신뢰와 사랑이 너무도 커서 아들의 목숨까지도 건네주어 버리는 무방비의 신뢰와 사랑의 노래입니다. 그렇지만, 동시에 이 신뢰와 사랑의 노래는 애절한 그 신뢰와 사랑이 거절당하고, 배반당하고, 끝내는 목숨까지 살육당하는 처참하기 그지없는 가슴 아픈 노래입니다. 이 크신 하느님의 사랑과 신뢰에 우리는 얼컥 눈물이 젖습니다.
한편, 이 노래는 그 큰 사랑과 신뢰를 거부해버리고 마는, 나약한 우리 인간의 배신 이야기입니다. 또한 고귀한 사랑과 신뢰마저도 한갓 우리 자신의 탐욕을 채우기 위해 짓부숴버리고 마는, 배은망덕의 패륜 이야기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이 이야기를 통해, 사제들과 원로들을 고발하며 꾸짖으십니다. 어리석은 인간의 꾀와 작태를 비웃으시며, 하느님의 깊은 섭리와 계획을 밝히십니다. 집짓는 ‘사람들이 버린 돌이 모퉁이의 머리돌이 되었다’는 성경말씀의 인용을 통해, 비록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못 박혀 죽게 되겠지만 오히려 그 죽음을 통해 새로운 구원의 시대가 펼쳐진다는 역설의 신비를 가르쳐줍니다. 곧 당신께서는 버려진 돌이셨지만, 머릿돌이 되시어 새로운 집인 새로운 백성을 세우셨음을 말해줍니다. 그리하여 이스라엘 백성에게 한정적으로 구원의 역사가 보장되었다는 유대인들의 생각은 파기되고, 새로운 이스라엘 백성인 교회공동체에 보편적 구원이 사명으로 맡겨졌음을 드러냅니다.
이 이야기에서, 우리는 특별히 포도원 주인의 믿음과 사랑을 보게 됩니다. 도조를 받으러 보낸 종들이 두 번씩이나 무참히 맞고 죽는 배신을 당했음에도 불구하고, 당신의 아들을 보내주시기까지 베풀어지는 믿음과 사랑입니다. 마침내는 당신의 아들마저도 죽음을 당하지만, 끝까지 포도원을 포기하시지 않으시는 무한한 신뢰와 사랑입니다.
이는 아무리 인간의 죄가 크다 하여도 인간의 죄를 뛰어넘는 하느님 계획의 초월성과 구원의 신비를 보여줍니다. 참으로, “주께서 하시는 일이라 우리에게는 놀랍게만 보입니다.”(마태 21,42). 사실, 도조를 바치지 않고 못된 일을 저지른 소작인들, 그들은 일상의 삶 속에서 잘못과 죄를 반복하고 있는 우리들의 자아상 입니다. 소작인들에게 회개할 기회를 끊임없이 주시는 포도밭 주인에게 여전히 우리의 권리만 주장하고 있는 완고한 우리들의 자아상입니다.
그렇습니다. 우리의 삶에서 하느님을 밀쳐내고, 그분의 권리를 강탈하지는 말아야 할 일입니다. 탐욕으로 인해 주인의 아들마저도 죽이고 마는, 악한 마음과 배은망덕은 말아야 할 일입니다. 그리고 그분의 뜻에 따라 좋은 결실을 맺고, 그 풍성한 소출을 도조로 바쳐야 할 일입니다. 바로 오늘, 그분의 신뢰와 사랑에 응답해야 할 일입니다. 아멘.
오늘의 말·샘기도(기도나눔터)
“이는 주님께서 이루신 일, 우리 눈에 놀랍기만 하네.”(마태 21,42)
주님!
당신께서 제게 하신 일, 참으로 놀랍기만 합니다.
도망칠수록 더 강한 사랑의 철창으로 꼭 가두시고
제 안에 꿈틀거리는 반역을 멈추게 하십니다.
넘어지고 또 넘어져도 오히려 그를 통해 구원의 섭리로 이끄시며
감춰 둔 사랑의 신비를 보여주십니다.
하오니, 주님!
언제나 제 머리 위에 당신 사랑을 두고
당신께 속한 이로 살게 하소서!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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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50321. 사순 제 2주간 금요일. 조재형 가브리엘 신부님.
성경을 읽다 보면 흥미로운 패턴을 발견할 수 있습니다. 특히, 구약의 요셉과 예수님의 이야기입니다. 요셉과 예수님의 삶을 보면 비슷한 점이 있습니다. 아버지 야곱은 아들 형제 중에 요셉을 사랑했습니다. 그런데 형들은 시기하고 질투하다가 결국 요셉을 은 20닢에 팔아버립니다. 예수님도 비슷합니다. 예수님은 열두 제자 중 한 명인 유다가 예수님을 은 30닢에 팔았습니다. 요셉과 예수님은 배신당했지만, 나중에 그 배신이 더 큰 구원의 길이 됩니다. 요셉은 형들에게 배신당해 이집트로 팔려 가고, 예수님은 제자에게 배신당해 십자가에 못 박혔습니다. 배신의 원인을 보면 비슷합니다. 요셉은 형들에게 질투받았고, 예수님은 바리사이파와 종교 지도자들에게 미움을 받았습니다. 그 이유는 단순합니다. 자기들보다 더 뛰어나 보였기 때문입니다. 직장에서도 보면 실력 좋은 사람이 미움받는 경우가 있습니다. 뛰어난 사람이 조직에서 튀면, 그를 견제하려는 움직임이 생깁니다.
요셉은 이집트로 팔려 간 후에도 포기하지 않고, 감옥에서도 꿈을 해석하면서 기회를 잡았습니다. 결국 파라오의 꿈을 해석하며 이집트의 총리가 됩니다. 예수님도 십자가 위에서 끝난 것이 아니라, 부활하심으로 세상을 변화시킵니다. 요셉과 예수님에게서 한가지 공통점을 볼 수 있습니다. 그것은 "고난 속에서도 희망을 잃지 않는 것"입니다. 요셉은 감옥에서 좌절하지 않았고, 예수님도 십자가를 지시면서 끝까지 사랑을 실천하셨습니다. 우리도 삶에서 실패와 어려움을 겪을 때, 이 요셉과 예수님처럼 끝까지 포기하지 않는 인내가 필요합니다. 요셉은 형들을 용서하였습니다. 요셉은 이렇게 말했습니다. “이제는 저를 이곳으로 팔아넘겼다고 해서 괴로워하지도, 자신에게 화를 내지도 마십시오. 우리 목숨을 살리시려고 하느님께서는 나를 여러분보다 앞서 보내신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도 십자가 위에서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아버지 저 사람들을 용서해 주십시오.” 부활하신 후에도 제자들에게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너희에게 평화를 준다. 성령을 받아라.”
우리는 작은 상처도 쉽게 용서하지 못하는데, 요셉과 예수님은 배신한 사람들을 끝까지 사랑하셨습니다. 용서란 뭘까요? 용서는 약한 사람이 하는 게 아닙니다. 진정한 용서는 내가 더 강하기 때문에, 그리고 더 사랑하기 때문에 하는 것입니다. 요셉이 형들을 용서한 건 그가 총리가 되었기 때문이 아닙니다. 그가 이미 그 아픔을 극복했기 때문에 용서할 수 있었습니다. 우리들 또한 인생에서 억울한 일, 배신당한 경험이 있습니다. 그때 요셉과 예수님을 생각하면 좋겠습니다. 우리는 복수를 선택할 수도 있고, 용서를 선택할 수도 있습니다. 어떤 선택이 더 위대한 길인지, 한번 고민해 보면 좋겠습니다. 요셉과 예수님은 배신당하고, 고난을 겪었지만, 결국 세상을 바꾸는 구원의 주인공이 되었습니다. 우리는 어떨까요? 우리는 때로 요셉의 형들처럼 질투할 수도 있고, 유다처럼 배신할 수도 있습니다. 하지만 반대로, 요셉처럼 용서할 수도 있고, 예수님처럼 사랑할 수도 있습니다. 혹시 지금의 삶에서 배신과 상처로 힘들어하고 있다면, 그 상처를 어떻게 극복할 것인지 생각해 보는 시간이 되었으면 좋겠습니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포도원 소작인의 이야기를 하셨습니다. 소작인들은 주인이 보낸 종들을 쫓아내고, 죽였습니다. 주인의 아들까지도 죽여 버렸습니다. 요셉을 팔아넘긴 형제들은 가난한 이웃을 외면하는 우리의 모습이기도 합니다. 나쁜 포도원 소작인들은 자연을 파괴하고 더불어 살아가야 할 생명을 죽음으로 몰아가는 우리의 모습이기도 합니다. 우리의 내면에 있는 ‘시기와 질투, 욕심과 교만’을 버려야 합니다. 우리 마음 안에 요셉이 보여주었던 ‘인내와 용서’를 채워야 합니다. 모든 것을 할 수 있었지만 비천한 종의 모습으로 오셨던 예수님의 ‘겸손과 희생’을 채워야 합니다. 그러면 우리는 참다운 신앙생활을 할 수 있습니다. “집 짓는 이들이 내버린 돌, 그 돌이 모퉁이의 머릿돌이 되었네. 이는 주님께서 이루신 일, 우리 눈에 놀랍기만 하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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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50321. 사순 제 2주간 금요일. 민동규 다니엘 신부님.
찬미 예수님
복음을 읽고 묵상하며 포도밭 주인의 인내심에 다시 한번 탄복했습니다. 만약 저라면 처음 종을 보내고 그 종들이 매맞아 돌아왔을 때 소작인들에게 철퇴를 가했을 것입니다.
그러나 포도밭 주인은 그렇게 하지 않습니다. 오히려 몇 차례에 걸쳐 종들을 보내다 안되자 자기 아들을 보냅니다.
복음은 하느님께서 우리 사람을 얼마나 사랑하는지를 보여 주고 있습니다.
오늘은 알아주겠지, 오늘은 내 마음을 알아주겠지. 오늘은 오늘 하루가 왜 주어졌는지 알아주겠지…. 그러면서 주님의 말씀을 우리에게 매일 들려주고 계신 하느님의 마음을 보여 주고 있습니다.
우리는 모두 소작인들입니다. 하느님께서 만들어 놓은 밭을 경작하고 그곳에서 소출로 살아가는 사람들입니다. 그러니 우리는 마땅히 그 소출의 얼마를 하느님께 돌려드려야 합니다. 소출의 모든 것이 우리 것이 아니라는 말입니다. 그런데 가끔 욕심에 눈이 멀어 하느님께 드려야 하는 존경과 사랑을 저버리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이런 사람들과 오늘 복음의 소작인들의 모습은 같은 모습입니다. 왜냐하면 그들 또한 주님을 알아보지 못하고 주님의 목소리에 귀를 기울이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오늘도 저에게, 그리고 여러분에게 주님께서 다가오십니다. 하느님의 아드님께서 말씀을 통해, 우리 주변의 사람들을 통해 우리에게 다가오십니다.
오늘은 제발 제가 그분의 뜻을 깨닫기를 바랍니다. 그런 은총이 우리에게 주어지기를 희망합니다.
⭐벌레가 되자
“한낱 벌레일지라도 자기 의지대로 산다면 그렇게 살지 않는 인간보다 낫다.”(중략)
카프카는 이런 세계를 보여 주고 싶어 했으리라. 끌려다니는, 잠시도 멈출 수 없는, 이성에 지배받는 불쌍한 인간들을 잠시 벌레로 ‘변신’시켜 자신을 돌아보게 만든 것이다.
벌레가 되자, 벌레가 된 순간, 인간의 말은 들리지 않는다. 오로지 내면의 나 자신과 대화하라. 진정 내가 원하는 삶이 보이고 들릴 것이다. 충분히 생각하고 자신과 대화한 후에 다시 인간으로 변신하라. 그리고 살아라. 원래 당신이 태어난 이유로!”
-고전이 답했다. (라곰, 고명환)-
프란츠 카프카의 ‘변신’이라는 작품을, 삶을 통해 녹여낸 글입니다.
문장과 그 깊이가 아주 마음에 들어 소개합니다.
우리도 우리 태어난 이유로 살길 희망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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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50321. 사순 제 2주간 금요일. 이수철 프란치스코 신부님.
사부 성 베네딕도 별세 축일
떠남의 여정
“마지막 떠남, 죽음”
“하느님의 사람, 성 베네딕도는
하느님의 얼을 지니셨기에
세상의 영화를 업신여기고 버렸도다.”(입당송)
오늘은 참 아름다운 축일입니다. 바로 성 베네딕도회 수도자들인 우리는 오늘 사부 성 베네딕도의 별세 축일 미사를 봉헌합니다. 흡사 성인의 천상축일인 죽음의 날이 축제처럼 느껴집니다. 사실 아름답게 살다가 아름답게 떠난 분들의 죽음은 슬픔보다는 모두가 축제의 선물처럼 느껴지는 기쁨 충만한 장례미사들입니다.
성인의 마지막 떠남인 아름답고 거룩한 임종장면을 소개하는 성 대 그레고리오 교황님이 쓴 <베네딕도 전기> 37장 내용은 읽을 때 마다 늘 새로운 감동을 선사합니다. 그 내용중 길다싶지만 일부를 소개합니다.
‘그분은 임종하시기 엿새 전에 당신을 위해 무덤을 열어 두라고 명하셨다. 곧이어 그분은 열병에 걸리셨고 심한 열로 쇠약해지기 시작하셨다. 병세는 날로 심해져서 엿새째 되던 날 제자들에게 당신을 성당으로 옮겨 달라고 하셨다. 그분은 거기서 주님의 성체와 성혈을 영하심으로써 당신의 임종을 준비하시고, 쇠약해진 몸을 제자들의 손에 의지한 채 하늘을 향해 손을 들고 기도를 하는 가운데 마지막 숨을 거두셨다.’
흡사 불가의 거룩한 고승들의 죽음을 보는 듯, 아니 그 이상 거룩하고 아름답고 신비롭습니다. 더불어 떠오르는 성 프란치스코 <태양의 노래>에 나오는 아름다운 대목입니다.
“평화로이 참는 자들이 복되오리니,
지존이시여! 당신께 면류관을 받으리로소이다.
내 주여! 목숨 있는 어느 사람도 벗어나지 못하는
육체의 죽음, 그 누나의 찬미 받으소서.”
죽음조차 선물로 감사찬미하는 성 프란치스코의 임종도 참 아름다운 감동입니다. 최민순 신부님의 번역이 아름답습니다. 문득 가톨릭 교회의 3대 거장, 성인 경지에 이르렀던 문학에 최민순 신부, 음악에 이문근 신부, 성서에 선종완 신부 세분이 생각납니다. 제 장례미사때 입당성가는 “오 아름다워라”로 시작하는 성가에, 강론은 “하루하루 살았습니다”라는 자작 좌우명 고백시로, 퇴장성가는 위 프란치스코 성인의 “오 감미로워라”로 시작되는 태양의 노래를 불러달라 부탁하고 싶습니다.
이런 준비가 성인의 말씀처럼 ‘죽음을 날마다 눈앞에 환히 두고’ 거품이나 환상이 걷힌 본질적 깊이의 초연한 삶을, 아름다운 ‘떠남의 여정’을 살게 합니다. 이어지는 임종후 성인의 환시를 본 두 형제의 증언입니다. 말그대로 하늘길을 따라 아버지의 집으로 귀가하는 성인의 모습입니다.
‘그들은 그분의 방에서부터 동쪽을 향해 하늘에 이르기까지 똑바로 나 있는 길을 보았는데, 그 길에는 양탄자가 깔려 있고 수많은 등불이 켜져 있었다. 그러자 그 위에 빛나는 옷을 입은 존엄한 분이 나타나시어 이길이 누구를 위한 길인지 알겠느냐고 물으셨다. 그들이 모른다고 하자, “이 길은 주님께 사랑받는 베네딕도가 하늘로 올라가는 길이다”라고 그분께서 말씀하시더라는 것이다.’
이래서 죽음은 마지막이 아니라 천상고향집으로의 귀향임을 깨닫게 됩니다. 이런 희망의 죽음을 향해 사는 이들은 오늘 지금 여기서부터 그럼에도 불구하고 축제와 같은 삶을, 아름다운 떠남의 여정을 살 것입니다. 일상의 크고 작은 떠남의 여정이 아름다울 때, 마지막 떠남인 죽음도 아름다운 축제일 수 있습니다. 정말 잘 살았는가는 공동체에 남긴 결과를 보면 압니다. 공동체에 평화의 일치를 남겼느냐 혹은 분열의 불화를 남겼느냐를 보면 확연히 드러나는 그의 평생 삶입니다.
사실 성 베네딕도의 생애를 보면 떠남의 여정임이 확연히 드러납니다. 누르시아 고향에서 로마로, 로마에서 수비아코로, 수비아코에서 몬테가시아노로, 마지막 몬테가시아노에서 천상고향의 죽음의 떠남으로 요약되는 생애입니다. 성인의 죽음의 떠남을 노래하는 미사중 부르는 부속가 전반부도 아름답습니다.
“새빛 선물 가져오는 위대하온 지도자를 기념하는 안식일,
성총받은 그 영혼이 노래하는 찬미가는 마음속에 울리네.
동쪽길로 올라가는 아름다운 성조 용모 감탄 울려 퍼지네.”
오늘 우리는 복음과 독서에서 떠남의 모범인 예수님과 아브라함을 만납니다. 십자가의 길 죽음에 앞서 예수님의 마지막 고별기도(요한복음17장)가 감동적입니다. 당신 자신을 위한 기도, 제자들을 위한 기도, 마지막으로 남은 모든 믿는 이들을 위한 고별기도가 오늘 복음입니다.
“거룩하신 아버지, 저는 이들만이 아니라 이들의 말을 듣고 저를 믿는 모든 이들을 위해서도 빕니다. 그들이 모두 하나가 되게 해 주십시오.”
믿는 이들 모두의 일치를 위해 기도하는 예수님이요 이를 위해 우리에게 남겨 주신 최고의 선물이 바로 이 거룩한 성체성사 미사입니다. 제1독서의 아브라함이 떠남의 장면도 아름다운 감동입니다.
“네 고향과 친족과 아버지의 집을 떠나, 내가 너에게 보여줄 땅으로 가거라, 나는 너에게 복을 내리겠고, ‘너는 복이 될 것이다’(you will be a blessimg). 세상의 모든 종족들이 너를 통하여 복을 받을 것이다.”
이어지는, ‘아브람은 주님께서 이르신 대로 길을 떠났다. 아브람이 하란을 떠날 때, 그의 나이는 일흔 다섯 살이었다(창세12,4)’ 라는 대목이 신선한 감동입니다. 말그대로 떠남의 여정에 충실했던 75세 고령의 나이에 상관없이 영원한 현역의 영원한 청춘 아브람입니다. 아브람에게 주어진 축복이 복음의 예수님을 통해 영원한 현재진행형중에 완성의 여정중에 있음을 깨닫습니다.
삶자체가 복이 었던 예수님처럼, 아브라함처럼, 세상의 복이 되어 살다가 떠나면 얼마나 아름답고 멋진 삶이겠는지요! 주님의 이 거룩한 미사은총이 우리 모두 아름다운 떠남의 여정을 살 수 있도록 좋은 도움을 주십니다. 강물도 고이면 썩듯이 삶도 고이면 썩습니다. 끊임없이 맑게 흐르는 강물같은 떠남의 여정이 되기를 소망하며 쓴 좌우명시 일부를 나눕니다.
“하루하루 살았습니다.
하루하루 끊임없이 하느님 바다 향해 흐르는 강(江)이 되어 살았습니다.
때로는 좁은 폭으로 또 넓은 폭으로
때로는 완만(緩慢)하게 또 격류(激流)로 흐르기도 하면서
결코 끊어지지 않고 계속 흐르는 '하느님 사랑의 강(江)'이 되어 살았습니다.
하느님은 영원토록 영광과 찬미 받으소서.”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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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50321. 사순 제 2주간 금요일. 고인현 도미니코 신부님.
✝️ 교부들의 말씀 묵상✝️
주인은 마침내 ‘내 아들이야 존중해 주겠지.’ 하며 그들에게 아들을 보냈다.(마태 21,37)
내 아들이야 존중해 주겠지
그런데 “내 아들이야 존중해 주겠지”가 무슨 뜻입니까? 이것은 무식한 사람의 말이 아닙니다. 절대 아닙니다! 이것은 그들의 죄가 참으로 크며 용서받을 수 없는 것임을 보여 주려는 이의 말입니다. 주인은 소작인들이 아들을 죽일 줄 알면서도 이들을 보냈습니다 “내 아들이야 존중해 주겠지”는 소작인들이 그렇게 했어야 함을, 곧 주인의 아들을 존중하는 것이 그들의 의무였음을 말한 것입니다. 주님께서는 “그들이 듣든, 또는, … 듣지 않든”(에제 2,5)이라여 다른 곳에서도 비슷한 말씀을 하십니다. 주님은 그들의 마음을 모르지 않으십니다. 그러나 완고한 자들 가운데 어느 누구도 당신의 예고 때문에 그들이 불순종하게 되었다는 말을 하지 못하도록 ‘... 해 주겠지‘ 나 ‘ ... 할지도 모른다’는 식의 불확실함을 담은 단어를 시용해 표현합니다. 그들이 당신의 종들에게는 완고하게 굴었을지라도 아들의 존귀함에는 경의를 표했어야 마땅하기 때문입니다.
-요한 크리소스토무스-
✝️ 생태 영성 영적 독서✝️
마이스터 엑카르트는 이렇게 말했다(대지를 품어 안은 엑카르트 영성) / 매튜 폭스 해제 · 주석
【둘째 오솔길】
버림과 그대로 둠
설교 17
지성을 버리고 순수한 무지를 경험하라
예수가 열두 살 되던 해에도...(루카 2,42).
여러분은 이렇게 말할지도 모르겠습니다. “나의 이성이 모든 활동을 여윈 채 아무 방해도 받지 않고 있으려면 어찌해야 하나요? 무지, 곧 있을 수 없는 지식에다 나의 마음을 집중하는 것이 최선의 방책인가요? 내가 무언가를 안다면, 그것은 무지가 아닐 것이고, 방해를 전혀 받지 않고 텅빈 채로 있는 것이 아닐 텐데, 그렇다면 나는 완전히 어둠 속에 있어야 하는 것인가요'?' “그렇습니다! 완전히 어둠과 무지 속에 있는 것보다 더 좋은 것은 없습니다" ‘하지만 꼭 그렇게 해야 하나요? 되돌아가는 길은 없을까요?’ “그렇습니다. 되돌아가는 길은 없습니다" “그렇다면 도대체 이 어둠은 무엇인가요? 그것을 무엇이라고 불러야 하나요?’
“그것은 감수성 이외의 다른 무엇이 아닙니다. 그것은 속이 비어 있는 것도 아니고, 존재를 결여하고 있는 것도 아닙니다. 오히려 그것은 충만한 감수성입니다. 바로 이 감수성 안에서 여러분은 온전하게 됩니다. 되돌아가는 길이 없는 것은 바로 이 때문입니다. 여러분이 여전히 되돌아가려고 한다면, 그것은 진리 때문이 아니라 다른 어떤 것, 곧 오감과 세상과 악마 때문입니다. 여러분이 이 되돌아가는 길에 열중한다면, 여러분은 반드시 죄에 빠질 것이고, 길을 잃은 채 여러분의 영원한 파멸을 초래하고 말 것입니다. 그러므로 되돌아가는 길은 있을 수 없습니다. 오직 이 감수성을 부단히 앞으로 밀고 나아가 도달하고 이루는 길밖에 없습니다. 온전한 존재로 실현되지 않은 채 쉬는 것은 있을 수 없습나다. 물질이 쉬지 않듯이, 이성도 자신의 잠재력 속에 있는 모든 것을 실현하기까지는 결코 쉬지 않습니다"(355)
✝️ 금요일 성인의 날✝️
영적 삶의 샘(디다케에서 아우구스티노까지), 요한 봐이스마이어 외 지음
아우구스티노
프로바에게 보낸 편지 130
II. 그러므로 당신은 가진 재산이 아무리 많다고 하더라도 이 세상에서 살아가는 동안에는 사랑으로 참된 삶을 실현하도록 노력하십시오. 왜냐하면 진정으로 올바른 삶은 저 세상에서의 삶이기 때문입니다 이 세상에서 살아가는 것이 편안하여 그것이 지속되기를 바랄 정도로 좋아한다 하더라도 저 세상에서의 삶에는 비할 바가 못됩니다. 이 세상에 존재하는 참된 위로는 오직 하나뿐입니다.그 위로는 주님께서 예언자를 통해 말씀하신 다음과 같은 약속입니다.
“나는 그들의 길을 보았다. 그러나 나는 그들의 병을 고쳐 주고 그들을 인도하며 그들에게 위로로 갚아 주리라. 또 그들 가운데 슬퍼하는 이들에게 나는 입술의 열매를 맺어 주리라. 멀리 있는 이들에게도 가까이 있는 이들에게도 평화, 평화! ─ 주님께서 말씀하신다. ─ 나는 그들의 병을 고쳐 주리라.(이사 57,18-19)
이 위로의 말씀 이외에 이 세상에서 오는 위로들은 위로가 되지 못하는 공허한 말에 지나지 않는 것입니다. 참된 행복을 알지 못하는 사람들은 많은 재물과 높은 지위 그리고 다른 여러 가지 사물들에서 위안을 찾지만 그들이 주는 위안은 도대체 어떤 것입니까? 이 모든 것들을 필요로 하지 않는 사람이 종국에 가서는 이들을 넘치도록 가진 사람보다 훨씬 더 행복한 사람입니다. 이 세상의 재물과 지위를 성취한 사람은 그것을 잃게 될까봐 더 많은 걱정을 하게 되고, 이전보다 더 많은 욕심을 부리게 됩니다. 사람이 이러한 세속적인 요소들에 의해 좋아지는 것은 아닙니다. 사람은 먼저 다른 것을 통해 선하게 된 다음에야 비로소 세속적인 요소들을 올바르게 사용하여 그것이 좋은 것임을 드러냅니다. 그렇기 때문에 이러한 세속적인 요소들 안에 참된 위안이 있는 것이 아닙니다. 참된 위안은 오직 참된 삶이 있는 곳에만 있습니다. 사람은 그것으로 자신이 나아지는 것을 통해서만 행복할 수 있습니다.(24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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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50321. 사순 제 2주간 금요일, 굿뉴스 게시판-우리 묵상 체험
250320 묵상글
왜 부자는 저승에서 회개했을까?
강만연 [fisherpeter] 2025-03-20 ㅣNo.180883
사실 어제 밤늦게까지 오늘 복음을 묵상하다가 묵상글을 올리지 않고 그냥 생활묵상글 하나를 먼저 올렸습니다. 이제 다시 일어나 오늘 복음 묵상을 재정리하고 있습니다. 어떤 걸 강조할까 하는 고민이 있었습니다. 세부적인 내용은 다 잘 아실 것 같아 생략합니다. 복음에 보면 부자는 죽어서 회개를 했다고 하는 내용이 나오지 않습니다. 하지만 내용을 자세히 읽어보면 회개를 했다는 사실을 유추할 수 있습니다. 만약 회개를 하지 않았다면 할 수 없는 그런 말을 했기에 그렇게 추론해볼 수 있습니다. 자기의 형제들을 위해서라도 어떻게 해 주고 싶은데 죽은 사람이 가지 않으면 형제들이 회개를 하지 않을 것이라고 하는 말에서 잘 생각해보면 그렇습니다. 그런 절박한 상황에서 자기도 자신의 지난 삶을 회개하지 않았다고 한다면 그런 말을 할 수가 있었겠는가 하는 걸 생각해보면 그렇습니다.
이런 맥락에서 살펴보면 왜 부자는 이승에서는 이런 회개를 하지 못했는가 그 이유를 묵상해보는 것도 좋을 듯합니다. 이승에서의 삶을 보면 이 세상에서의 삶이 힘들지도 않고 풍족을 누리는 삶을 살았기 때문에 굳이 그런 회개와는 거리가 멀었기 때문입니다. 이런 관점에서 오늘 복음의 상황을 들여다본다면 어쩌면 부자에겐 이 세상에서 부를 누리며 살았던 게 축복이 아닐 수 있다는 사실을 우리는 묵상해볼 수 있습니다. 저는 이게 아주 중요하다고 생각합니다. 이걸 그렇다면 이렇게도 표현을 한다면 어떨까요?
이 세상에서의 삶이 축복인지 아니면 불행인지는 이 세상에서의 현재 지금의 삶의 결과만을 놓고 판단을 할 수가 없을 것입니다. 꼭 그런 것은 아니지만 오늘 복음의 내용만 봐도 이 세상에서 고통을 받았다면 위로를 얻을 수 있다고 하는 표현처럼 말입니다. 부자는 부자라서 그런 고통을 경험한 게 아니고 그런 부를 누릴 수도 있으면서도 그런 부를 자기의 삶만 생각하고 그 부를 나누지 못한 것 때문에 저승에서 고초를 겪었던 것입니다. 오늘 복음은 꼭 부만을 꼭집어 그렇게 전하는 것도 아닐 것입니다.
이건 하나의 예시입니다. 상징일 것입니다. 이건 이런 의미도 숨어 있을 겁니다. 달리 해석을 하면 이 세상에서도 자기가 받은 그 은총을 자기만을 위해서 독점하고 또 그 은총을 누린 것만큼 그에 대한 응분의 책임을 다하지 못하면 반드시 그에 대한 대가는 받게 된다는 사실입니다. 마침 오늘 독서 마지막 말씀처럼 말입니다. "나는 사람마다 제 길에 따라, 제 행실의 결과에 따라 갚는다." 이 말씀은 '이에는 이 눈에는 눈'과 같은 동태복수법 같은 보복의 성질이 아니라 당연한 인과응보의 원칙처럼 그게 하느님의 정의이지 않을까 하는 생각을 해봅니다.
화요일 복음을 제가 올렸다가 다시 많을 고민을 한 후에 한 차례 민감한 부분을 좀 수정해 오후에 다시 올렸습니다. 너무 심각하게 표현을 했나 하고 고민을 했지만 달리 생각해보면 우리는 어쩌면 하느님의 자비를 너무 관대하게 해석을 하는 경우가 없지 않아 있는 것 같아 만약 그런 식으로 해석했는데 실제 자기가 하느님을 나중에 만났을 때 자기가 알았던 그런 자비의 하느님은 맞지만 자기가 생각했던 만큼의 자비가 아니라면 그땐 어떻게 될 것 같습니까? 마치 그때 다시 소급해서 되돌릴 수 있을까요?
오늘 복음처럼 부자가 오도가도 못하는 그런 상황이 될 것입니다. 부자는 그나마 그 불구덩이 속에서도 회개를 했으니 망정이지 그것도 그런 고초가 그곳에서도 없었다면 그는 결코 영원히 자기 자신의 삶을 회개할 수 있는 기회가 어쩌면 영원히 없었을 수도 있을 것 같다는 묵상을 해보면 같은 값이면 회개도 할 수 있을 때 해야지 하는 생각이 얼마나 중요한지 알 수 있습니다. 우리는 오늘 부자와 같은 회개를 하는 어리석음을 경험하지 말아야 할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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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50321. 사순 제 2주간 금요일, 굿뉴스 게시판-우리 묵상 체험
■ 회개와 속죄로 다시는 죄짓지 않도록 /
박윤식 [big-llight] 250320.19:39 ㅣNo.180893
의형제를 맺었지만, 내심 제 속은 저마다 달라도 한참이나 다른 도둑 셋이 있었다. 그들은 협동하여 부잣집을 털어 큰 재물을 얻었다. 그중 한 놈이 성공을 자축하고자, 술 사러 마을로 갔다. 그러자 남은 두 놈은 좋은 기회라며 공모하여 그 자를 죽이고 둘만 나누자며, 그 자 오기만을 기다렸다. 한편 술 사러 간 도둑도 같은 생각이었다. ‘그래! 저들을 죽이면, 저 재물 다 내 차지이다.’ 이윽고 그가 오자 두 놈은 그를 죽였다. 그리하여 둘은 서로 축하하며 마음껏 술을 마셨다. 그런데 그들도 그만 죽고 말았다. 다 아는 사실로, 이미 ‘독약’이 들어 있었기에.
하느님 사랑을 받는 의인은 악인의 미움을 받는다. 예수님이 그 본보기이다. 모든 이에게 사랑받는 일은 불가능하리라. 착한 이들에게 사랑받고, 악인들의 미움 받으면 의인이리라. 허나 의인들은 이 세상 사는데 많은 어려움을 겪는다. 예수님 시대나 오늘날도 여전하다. “그 악한 자들은 가차 없이 없애고, 제때에 소출 내는 다른 소작인들께 줄 것입니다.”라는 대답에, 예수님께서는 다시 이르셨다. “너희는 이 말 읽어 본 적이 없느냐? ‘집 짓는 이가 버린 돌, 그게 모퉁이의 머릿돌이 되었네. 이는 주님께서 이루신 일, 우리 눈에 놀랍기만 하네.’ 내가 너희에게 말한다. 하느님께서는 너희에게서 그분 나라를 빼앗아 소출을 내는 민족에게 꼭 주실 것이다.”
많은 소작인들은 처음부터 포도밭을 마치 자신의 것이라나. 그러기에 그들은 주인 몫의 소출을 받으러 온 이들을 외면하고, 심지어는 겁 없이 학대하고 죽이기까지. 나중에는 주인이 보낸 아들마저 죽이고는 그 상속권도 가로챘다. 아무리 그렇기로서니, 그렇게까지 했어야 할 이유가? 그렇게 그들은 하늘의 힘을 차단하는 행동을 저질렀다. 그분께서는 구원을 약속했지만, 그들은 제대로 섬기지 않았다. 오히려 죽이려 든다. 우리 삶과 믿음을 돌아보게 하는 것 같다.
예수님은 집 짓는 이들이 버린 돌이 ‘모퉁이의 머릿돌’이 되었단다. 부활하신 그분을 이방인들은 믿었단다. 그리하여 기대를 걸지 않았던 이들이 소출을 바친다나. 따라서 예수님을 믿고 따르는 우리는, 언제라도 초심을 잊지 말자. 더군다나 그분의 땅에서 소출을 바치는 삶도, 그분께서 마련하신 거다. 포도밭은 우리가 가꾸지만, 마무리는 주님께서 하신다. 원래 그분의 것이었기에. 그러니 너무 꽉 쥐고 살면 안 된다. 때가 되면 돌려줄 것이란 것을, 언제나 기억하자.
예수님께서는 아버지 뜻에 따라, 당신을 죽이려는 당신 백성의 지도자들의 죄악을 그대로 받아들이신다. 그들이 그렇게 당신을 거부함으로, 오히려 많은 민족이 하느님 나라를 함께 누릴 수 있게 되는 계기가 될 테니까. 이처럼 하느님께서 하시는 일은 우리 지혜를 뛰어넘는다. 포도밭 주인의 아들이 살해됨으로써 포도밭이 다른 이들에게 넘겨지듯이, 예수님의 죽음으로 우리역시 하느님 나라에 참여할 수가 있게 되었다. 예수님의 죽음은 정녕 실패가 아니었다. 그분께서는 바로 이 일들을 위해 오셨다. 세상을 극진히 사랑하셨기에, 외아드님으로 오신 것이다.
우리는 다들 하느님으로부터 저마다의 재능을 부여받았다. 그리고 우리는 그분과 이웃 사랑을 실천하는 신앙인이다. 그렇지만 살아가면서 어쩔 수 없이 본의 아니게 죄 지을 수밖에 없다. 비록 죄인신분이지만 회개와 속죄로 다시는 죄짓지 않도록 다짐해야한다. 특히 이 사순 시기에 하느님은 우리에게 주실 보속의 선물 보따리를 마련하시고, 회개할 우리를 무작정 기다리신다. 그분께서 맡기신 일에 대한 결과 보고를 할 때가, 저만치 다가오고 있음을 꼭 명심하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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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50321. 사순 제 2주간 금요일. 한창현 모세 신부님.
예수님께서 수석 사제들과 백성의 원로들에게 비유를 들어 말씀하신 까닭을 살펴보려면 오늘 복음의 앞 이야기로 돌아가 보아야 합니다.
수석 사제들과 백성의 원로들은 예수님께 “당신은 무슨 권한으로 이런 일을 하는 것이오?
그리고 누가 당신에게 이런 권한을 주었소?”(마태 21,23)라고 물었습니다.
‘이런 일’이란 성전 정화 사건(21,12-17 참조)을 가리킵니다.
오늘 복음은 그 대답 가운데 일부입니다.
수석 사제들과 백성의 원로들이 예수님께 무슨 권한으로 이런 일을 하시는지 묻지만, 그 권한이 어디에서 왔는지가 정말 궁금한 것은 아니었습니다.
속으로는 성전을 관리하는 권한은 자신들에게 있음을 강조하며, 예수님께서 성전에서 하신 행동을 비난하고 싶었던 것입니다.
그들의 마음을 아시고 예수님께서는, 포도밭의 소출은 주인의 것이 분명한데도 자신들이 포도밭의 주인이 되려고 하는 악한 소작인의 모습을 비유로 들려주십니다.
그리고 수석 사제들과 백성의 원로들에게 이러한 상황이라면 포도밭 주인이 어떻게 해야 하는지 대답해 보라고 하십니다.
수석 사제들과 백성의 원로들은, 포도밭 주인이 악한 소작인들을 주저 없이 없애 버려야 한다고 대답합니다.
예수님께서는, 수석 사제들과 백성의 원로들이 악한 소작인들처럼 이스라엘 민족의 주인인 하느님의 자리를 차지하고 있었음을 스스로 깨닫기를 바라신 것 같습니다.
그 뒤의 이야기를 보면, 예수님께서는 깨닫지 못하는 그들에게 계속해서 비유를 들어 말씀하십니다(22,1 참조).
예수님께서는 그들이 깨닫기를 진심으로 바라셨던 것 같습니다. 그 누구도 포기하실 수 없었던 예수님의 마음을 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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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하 자료는 보관을 위해 추가 첨가한 자료입니다
(20:4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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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50321. 사순 제 2주간 금요일. 김명겸 요한 신부님.
예수님께서는 비유 하나를 말씀하십니다.
어떤 주인이 포도밭을 일구었습니다.
그것을 소작인들에게 내주고 멀리 떠났다가
포도 철이 되자 소출을 받아 오라고
소작인들에게 자기 종들을 보냈습니다.
그러나 소작인들은 종들을 거의 모두 죽였습니다.
주인이 마침내 아들을 보냈지만
소작인들은 아들까지 죽이게 됩니다.
수석 사제들과 바리사이들은
이 비유를 알아들었습니다.
포도밭 주인은 하느님이시고
그의 종들은 예언자들입니다.
그렇게 자기 조상들은 하느님께서 보내신 예언자들을
자기네 마음대로 다루었습니다.
그러나 이것은 비단 그들의 조상들에게만
해당하는 것이 아니었습니다.
최근까지, 다시 말하면 그들도 똑같이
세례자 요한을 죽였습니다.
비유를 통해 자기 모습을 보게 되어
기분이 좋지 않았고
그래서 예수님을 붙잡으려고 했습니다.
하지만 그 시도는 실패합니다.
군중이 예수님을 예언자,
즉 하느님께서 보내신 종으로 생각하고 있어서
그들이 하느님의 종을 또 한 명 죽일까
바라보고 있기에
붙잡지 못하게 됩니다.
그들이 예수님의 비유를 알아들었지만
전부 다 알아들은 것은 아닙니다.
군중은 예수님을 예언자로 생각했습니다.
그 말은 수석 사제들과 바리사이들도
예수님을 예언자로 생각했을 가능성이 높음을
알게 합니다.
하지만 비유에서 예수님께서 의도하신 것은
당신은 포도밭 주인의 종이 아니라
아들이라는 사실입니다.
수석 사제들과 바리사이들이 그것을 알아들었다면
예수님께서 하느님의 아들이심을 알아들었다면
상황이 어떻게 바뀌었을지 생각해 봅니다.
군중이 바라보는 시선이 아니라
자신들이 하느님의 아들을 죽일지도 모른다는
두려움에 빠지지 않았을까 생각됩니다.
자신들의 모습을 드러내는 예수가 싫었지만
자기들이 자칫 하다가는
하느님의 아들일지도 모르는 사람에게
해를 입힐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했을 것입니다.
그렇게 된다면 예수님을 붙잡는데 더 신중했을 것입니다.
그렇지만 그들은 자기 잘못이 드러났다는 것에 놀라서
거기까지 생각하지 못합니다.
단지 숨겨둔 것이 들켰을 때 오는 기분 나쁨만
남아있습니다.
그러다보니 결국 비유의 마지막 결론인
아들을 죽이는 것에 이르게 됩니다.
누군가 나의 모습을 드러낼 때
우리는 당황하게 됩니다.
숨기고 싶었던 것이 드러나면 숨고 싶습니다.
인정하기는 쉽지 않습니다.
우리는 그것을 나에 대한 공격으로
받아들이기도 합니다.
그러나 한편으로 그것은
내가 변화될 수 있는 기회입니다.
그 말을 들은 그 순간에는
그것을 받아들이기 쉽지 않지만
그 말을 새겨듣고 변화의 기회를 놓치지 않았으면 좋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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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50321. 사순 제 2주간 금요일. 한상우 바오로 신부님
."저자가 상속자다. 자, 저자를 죽여 버리자."(마태 21, 38)
새롭게
찾아오는
봄의
생명력은
그야말로
대단합니다.
모든 생명이
소중합니다.
생명의 가치가
하느님 나라의
가치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생명을 바쳐
생명을
살리십니다.
생명의 길을
가르치시고
생명의 길을
열어주십니다.
살아야 할
생명입니다.
그래서
살리는 것이
사랑입니다.
하느님의
사랑은
생명입니다.
사람이
같은 사람을
죽일 순 없습니다.
사람을
살리는 것이
복음입니다.
폭력을
이기시는
빛으로
우리 가운데
계십니다.
생명을
얻는 것이
하느님을
얻는 것입니다.
하느님께서는
우리 모두의
생명이십니다.
모든 생명은
진심어린
사랑과 기도로
자라납니다.
우리들의
생명을
귀하고
아름답게
보시는
하느님과 함께
생명을
진심으로
사랑하는
축복의
사순시기
되시길
기도드립니다.
우리의 역사가
살인과 폭력의
발자국이 아닌
사람을 살리는
발자국이
우리의 역사가
되어야 합니다.
그 길이
함께 사는
기쁜
하느님의
세상입니다.
우리는
그 세상에서
살아야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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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50321. 사순 제 2주간 금요일. 양승국 스테파노 신부님.
집단적 악의 세력이 휘둘러대는 광기 앞에 필요한 것은, 바로 우리들의 양심입니다!
집단적 악과 개인적 양심 사이에서 고민하고 갈등하는 인간 군상의 모습이 오늘 첫 번째 독서인 창세기를 통해 잘 그려지고 있습니다.
아버지 이스라엘의 총애를 한 몸에 받는 동생 요셉의 모습에 형들은 질투심으로 똘똘 뭉치게 되었고, 요셉은 그야말로 공공의 적이 되고 말았습니다.
그가 일부러 그런 것이 아니라, 아직 철이 없어서 그런 것인데도 불구하고, 형들은 아버지로부터 총애를 받는 동생의 모습을 견딜 수가 없었던 것입니다.
그리하여 어느 날 집단적 악이 결정적으로 발동됩니다.
평소 각자 마음속에 품고 있던 악의가 동시에 표출된 것입니다.
“저기 저 꿈쟁이가 오는구나. 자, 이제 저 녀석을 죽여서 아무 구덩이에나 던져 넣고, 사나운 짐승이 잡아먹었다고 이야기하자.
그리고 저 녀석의 꿈이 어떻게 되나 보자.”(창세기 37장 19~29절)
형들이 그런 악의를 품게 된 결정적인 계기가 있었으니, 아버지 야곱의 편애와 요셉이 꾼 특별한 꿈이었습니다.
“이스라엘은 요셉을 늘그막에 얻었으므로, 다른 어느 아들보다 그를 더 사랑하였다.
그래서 그에게 긴 저고리를 지어 입혔다.
그의 형들은 아버지가 어느 형제보다 그를 더 사랑하는 것을 보고 그를 미워하여, 그에게 정답게 말을 건넬 수가 없었다.”(창세기 37장 3~4절)
“내가 꾼 꿈 이야기를 들어보셔요. 우리가 밭 한가운데에서 곡식 단을 묶고 있었어요.
그런데 내 곡식단이 일어나 우뚝 서고, 형들의 곡식 단들은 빙 둘러서서 내 곡식단에게 큰절을 하였답니다.”
(창세기 37장 7절)
요셉의 꿈 이야기를 들은 형들은 분기탱천하기 시작하였고, 큰 시기심과 질투심으로 들끓었고,
마침내 집단적인 광기와 폭력성으로 연결되고 만 것입니다.
결국 구사일생으로 목숨을 건진 요셉은 가족들과 생이별을 하고, 이집트로 팔려 가게 되었습니다.
그러나 ‘인생만사 세옹지마’라고, 남의 나라 땅에서 셀 수도 없이 많은 위기를 지혜롭게 극복한 요셉은 대제국의 제2인자로 우뚝 서게 되고, 후에 대기근으로 굶어죽게 생긴 가족들을 살리게 되는 드라마틱한 대반전 스토리를 엮어갑니다.
인류 역사뿐만 아니라 우리나라 역사를 돌아봐도 집단적인 악, 집단적인 광기가 지속적으로 되풀이되어왔습니다.
600만 명이 넘는 유다인 대학살, 수많은 청춘들을 죽음으로 몰고 간 대전쟁들은 집단적 악의 결과입니다.
불행하게도 우리 백성은 아직도 집단적 악의 난동으로 인해 힘겨운 나날을 보내고 있습니다.
아직도 하이에나 떼처럼 무리를 지어 다니며 선량한 국민의 삶을 힘겹게 하는 검찰 집단, 기레기 집단, 국민 민폐당, 사이비 종교 단체들이 기승을 부리고 있습니다.
다행히 요셉이 기적적으로 죽음을 모면하고 살아날 수 있었는데, 그것은 한 인간의 내면이 남아있는 개인의 양심 때문이었습니다.
일말의 양심이 남아있던 르우벤은 이렇게 말합니다.
“목숨만은 해치지 말자. 피만은 흘리지 마라. 그 아이를 여기 광야에 있는 이 구덩이에 던져버리고, 그 아이에게 손을 대지는 마라.”(창세기 37장 21~22절)
집단적 악의 세력이 휘둘러대는 광기 앞에 필요한 것은, 바로 우리들의 양심입니다.
악이 더 큰 악으로 확산되기 전에 어떻게 해서든 막아보려는 일말의 양심입니다.
거대 악을 목격하고서도, 그 악으로 인해 드러나는 참혹한 현실을 직면하면서도 그것을 외면하는 것은 또 다른 악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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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50321. 사순 제 2주간 금요일. 조욱현 토마스 신부님.
복음: 마태 21,33-43.45-46: 저 자는 상속자다. 자, 저 자를 죽이자!
오늘 복음의 밭 임자는 포도밭을 일구고 울타리를 치고 포도 확을 파고 탑을 세웠다. 소작인들이 해야 했을 일들을 직접 하였다. 소작인들은 그렇게 많은 일을 해야 했던 것이 아니다. 주어진 것을 잘 지키기만 했어도 되었다. 모든 것이 다 되어 있었기 때문이다. 하느님께서는 이스라엘 백성들이 이집트에서 나왔을 때, 율법을 주셨고 도시를 세워주셨으며 성전을 마련해 주셨고 제단을 준비해 주셨다. 그러고는 “멀리 떠나셨다.”(33절) 밭 주인은 “소출을 받아 오라고”(34절) 자기 종들을 보냈다. 소출은 행실로 드러나는 순종을 뜻한다. 그러나 그들은 그토록 세심한 보살핌을 받고 나서도 게으름을 피워 소출을 내지 않았을 뿐 아니라, 종들을 못마땅하게 여겼고 자신들의 손에 피를 묻히기까지 했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주인은 아들을 보낸다. “내 아들이야 존중해 주겠지”(37절). 이 말은 글자 그대로 소작인들이 그렇게 할 것이라는 의미가 아니다. 주님은 소작인들이 아들을 죽일 줄 알고 있었다. 그들이 당신의 종들과는 달리 아들의 존귀함에는 경의를 표했어야 마땅하다는 의미다.
소작인들은 그러나 “‘저자를 죽여 버리고 우리가 그의 상속 재산을 차지하자.’하고 말하면서, 그를 붙잡아 포도밭 밖으로 던져 죽여 버렸다”(38-39절). 그들은 “십자가에 못 박으시오! 십자가에 못 박으시오!”하고 소리치며, 주님을 도성 밖에서 십자가에 못 박았다. “그러니 포도밭 주인이 와서 그 소작인들을 어떻게 하겠느냐?”(40절) 하고 물으시자 그들은 “그렇게 악한 자들은 가차 없이 없애 버리고, 제때에 소출을 바치는 다른 소작인들에게 포도밭을 내줄 것입니다.”(41절) 대답한다. 그 대답으로 그들은 자기들의 죄를 인정하였다. 주님께서도 당신의 말씀으로 이것을 암시하셨다. “집 짓는 이들이 내버린 돌 그 동이 모퉁이의 머릿돌이 되었네. 그러므로 내가 너희에게 말한다. 하느님께서는 너희에게서 하느님의 나라를 빼앗아, 그 소출을 내는 민족에게 주실 것이다”(42-43절). 수석 사제들과 바리사이들은 자기들에게 하는 이야기인 줄 알고 예수님을 죽이자고 마음먹었지만, 군중이 두려웠다. “군중이 예수님을 예언자로 여겼기 때문이다.”(46절) 그 군중들에게 변을 당할까 두려워한 것이지만 그 군중들도 결국은 “십자가에 못 박으시오! 십자가에 못 박으시오!”하고 외칠 사람들이었다. 나는 지금 어떤 소작인으로 살아가고 있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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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50321. 사순 제 2주간 금요일. 전삼용 요셉 신부님.
어쩌면 성체의 적을 만드는 교리교육?
오늘 복음은 ‘못된 포도밭 소작인의 비유’입니다. 포도밭에 소출의 일부를 받으러 와서 그들에게
죽임을 당하는 포도밭 주인 외아들은 예수 그리스도의 상징입니다.
지금으로 말하자면, 우리 안에 들어오시는 ‘성체’입니다.
우리가 성체를 십자가에 못 박을 수도 있음을 잊지 말아야 합니다.
우리에게 오시는 예수님을 우리가 죽일 수도 있는 이유는 우리가 그분이 주시는 이익만을 생각하지, 그분이 우리에게 없애려고 하시는 고통의 원인을 우리가 모르고 있기 때문입니다.
참새는 우리 주변에서 쉽게 볼 수 있는 새입니다. 정말 귀엽고 사랑스럽죠.
이 참새가 우리가 신경 쓰지 않았던 새라는 것을 몰랐나요? 그리고 참새에 대해 잘 모르기도 했습니다.
사실 저는 참새에 대해 많이 알지 못하는 것 같습니다.
그렇다면, 3월 20일 '세계 참새의 날'을 맞아
우리가 몰랐던 참새의 비밀을 함께 살펴보겠습니다.
첫 번째로 우리가 몰랐던 참새의 비밀은, 참새가 사람을 이용한다는 사실입니다.
참새는 다른 야생동물들과 달리 사람들의 집 근처에서 살아갑니다.
그 이유가 있습니다.
일반적으로 야생동물들은 사람들과 함께 살기를 꺼리지만, 참새는 사람들과 떨어져 살 수 없습니다.
사실, 사람들은 참새의 자연적인 적들로부터 참새를 보호하는 역할을 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참새에게는 뱀, 족제비, 매와 같은 자연적인 적들이 존재하는데, 이들 모두 사람을 두려워하여
사람을 보호막처럼 사용한다고 합니다.
우리가 사는 주변을 둘러보면, 참새들이 지붕 밑에서 둥지를 틀 수 있는 장소들이 많습니다.
또한, 농지와 같은 환경은 참새들에게 먹이를 제공하는 중요한 장소인데, 사람들은 자연적인 적들을 차단하고 집짓기를 쉽게 만들어 주며, 먹이를 풍부하게 제공한다고 합니다.
이 사실을 통해 우리는 참새가 우리와 함께 살며 자연의 균형을 맞추는 중요한 존재라는 것을
깨닫게 됩니다.
사실 일본의 나가노현의 산악지대는 원래 참새가 많이 살던 곳이었으나, 사람들이 더 이상 그곳에서 살지 않게 되면서 참새들도 사라졌다는 이야기가 있습니다.
또 다른 흥미로운 참새의 비밀은, 참새가 농업에 도움을 줄 수 있다는 점입니다.
실제로 참새는 때때로 모여서 곡식을 쪼아먹기도 합니다.
농부들에게는 마치 쌀 도둑처럼 보일 수도 있겠죠.
하지만 참새가 사라지면 농업에 더 큰 어려움이 생긴다고 합니다.
참새가 먹는 해충들이 증가하면서, 오히려 농업에 큰 피해를 줄 수 있기 때문입니다.
중국에서는 1958년, 마오쩌둥 주석이 쌀 수확량 감소를 보고하며 “쌀 이삭을 쪼아먹는 참새는
해로운 새들이다.”라고 말했습니다.
이에 따라 베이징의 모든 농부와 노동자들이 참새를 없애는 작전을 시작했죠.
그 결과, 2억 마리 이상의 참새가 죽임을 당했습니다.
하지만 그 후, 해충이 급격히 늘어나고 쌀은 잘 자라지 않았습니다.
결국, 4,000만 명이 목숨을 잃는 대기근이 발생하게 되었습니다.
이 비극은 참새를 잡지 않았다면 일어나지 않았을 일입니다.
참새는 생태계에서 중요한 역할을 하며, 인간과 가장 가까운 동물입니다.
우리는 세계 어디에서나 참새를 볼 수 있습니다. 그래서 '세계 참새의 날'이 존재하는 이유죠.
참새는 지구상의 모든 사람에게 가까운 이웃이지만, 매우 경계하고 사람에게 쉽게
다가가지 않기 때문에, 그 이웃은 쉽게 다가갈 수 없습니다.
이 소중한 이웃인 참새는 우리에게 중요한 교훈을 줍니다.
이제 사람들에게 참새를 해치는 시대는 끝났다고 할 수 있습니다.
우리는 참새와 함께 살며 자연과 더불어 살아가야 한다는 소망을 가져야 합니다.
참새와 함께하는 삶은 바로 우리 자신이 자연의 일원으로서의 책임감을 느끼고, 그 존재들을 존중하며 살아가는 삶입니다.
[세계 참새의 날'을 맞아 우리가 몰랐던 참새의 비밀 알아봄, 스브스뉴스, 유튜브]
예수님은 인간에게 이 참새와 같습니다.
인간이 하느님께서 요구하시는 것만 싫어하고
그분이 우리에게 주시고자 하는 것을 알지 못하면 그분을 거부하게 될 것이고 그러면 예전 베이징에서 일어난 일이 똑같이 일어나게 될 것입니다.
그렇다면 예수님께서 인간에게 도움이 되는 것은 구체적으로 무엇일까요?
저의 경험으로 알아보자면, 바로 이 세 가지 물음이었습니다.
1. “나는 누구의 자식인가?”,
2. “나는 사랑받고 있는가?”,
3. “내가 해야 할 일은 무엇인가?”
‘나는 누구인가?’라는 정체성에 대한 물음입니다. 어머니가 의심될 때 다른 것은 고통의 원인이 될 수 없었습니다.
‘나는 사랑받고 있는가?’ 또한 사랑으로 해결되는 문제였습니다.
내가 그분의 자녀라는 믿음이 있어도 자신은 다른 형제들에 비해 사랑받지 못한다고 느낄 수 있습니다.
‘자존감’에 관한 문제입니다.
이때 이것보다 중요한 문제는 없습니다. 마지막으로 ‘나는 뭐 하고 살아야 하는가?’입니다.
제가 가장 고통스러웠을 때는 내가 사제가 되어야 하는지, 세상에서 결혼하고 살아야 하는지 모를 때였습니다.
이 세 가지 문제를 다 해결해주는 것이 어머니가 주는 ‘밥’입니다.
젖을 먹고 내가 누구인지 알고, 그 밥을 통해 내가 소중한 존재임을 깨닫고, 그 밥을 통해 어머니가 원하는 것을 받아들여 그 꿈을 이룰 수 있게 합니다.
부모의 사랑만으로는, 그러나 내가 진짜 누구인지, 내가 진짜 사랑받는 존재인지, 내가 진짜 해야 할 일이 무엇인지 알 수 없습니다. 왜냐하면 부모도 자신이 어디서 와서 어디로 가는지 모르는 하나의 인간일 뿐이기 때문입니다.
나를 진짜 만들고 낳으신 창조자를 만나야 합니다.
부모는 나에게 다시 생명을 넣어줄 수
없습니다.
그 창조자가 이 세 가지 문제를 다 해결해주는 당신 ‘밥’을 주시는데 그분이 예수 그리스도의 ‘성체’입니다.
저는 구역 판공을 하며 냉담자들을 만나 면담도 할 수 있었습니다.
그분들의 하나같은 특징은 그 오랜 세월 신앙생활을 하면서도 왜 성체를 영하지 않으면
영원한 생명, 곧 참 행복에 이를 수 있는지를 이해하지 못하는 것이었습니다.
그러니 성체의 적이 되는 교리교육이 되지 않으려면, 사람이 왜 참새와 함께 살아야 하는지를 알아야 하는 것처럼, 성체가 주는 효과를 제대로 이해시켜야 합니다.
냉담자들이 발생하지 않게 만들려면, 교회에서 오늘과 같은 포도밭 소작인이 만들어지지 않게 하기 위해서는 이것을 가장 강력하게 가르쳐야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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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50321. 사순 제 2주간 금요일. 송영진 모세 신부님.
<우리는 소작인이 아니라 자녀입니다. 사랑 받고 있는.>
“포도 철이 가까워지자 그는 자기 몫의 소출을 받아 오라고 소작인들에게 종들을 보냈다.
그런데 소작인들은 그들을 붙잡아 하나는 매질하고 하나는 죽이고 하나는 돌을 던져
죽이기까지 하였다.
주인이 다시 처음보다 더 많은 종을 보냈지만, 소작인들은 그들에게도 같은 짓을 하였다.
주인은 마침내 ‘내 아들이야 존중해 주겠지.’ 하며
그들에게 아들을 보냈다.
그러나 소작인들은 아들을 보자, ‘저자가 상속자다.
자, 저자를 죽여 버리고 우리가 그의 상속 재산을 차지하자.’ 하고 저희끼리 말하면서, 그를 붙잡아 포도밭 밖으로 던져 죽여 버렸다.
그러니 포도밭 주인이 와서 그 소작인들을 어떻게 하겠느냐?(마태 21,34-40)”
“너희는 성경에서 이 말씀을 읽어 본 적이 없느냐?
‘집 짓는 이들이 내버린 돌, 그 돌이 모퉁이의
머릿돌이 되었네. 이는 주님께서 이루신 일, 우리 눈에 놀랍기만 하네.’ 그러므로 내가 너희에게 말한다.
하느님께서는 너희에게서 하느님의 나라를 빼앗아, 그 소출을 내는 민족에게 주실 것이다(마태 21,42-43).”
1) ‘포도밭 소작인의 비유’는, “자만심과 특권의식을 버리지 않고 계속 그렇게 살면, 너희는 하느님 나라에 들어가지 못한다.” 라는 경고입니다.
그래서 가장 중요한 말씀은, “하느님께서는 너희에게서 하느님의 나라를 빼앗아, 그 소출을 내는 민족에게 주실 것이다.”입니다.
이 말씀은, 하느님 나라를 차지하고 있다가 빼앗긴다는 뜻이 아니라, 그 나라에 못 들어간다는 뜻입니다.
하느님 뜻에 합당하게 신앙생활을 해서 자격을 얻은 사람들만이 하느님 나라에 들어갈 수 있고,
그 나라에서 구원과 생명을 얻을 수 있습니다.
바오로 사도는 이 경고를 이렇게 설명합니다.
“이제 그대는, ‘가지들이 잘려 나간 것은 내가 접붙여지기 위해서였다.’ 하고 말할 것입니다. 옳은 말입니다.
그들은 믿지 않아서 잘려 나가고 그대는 믿어서 그렇게 서 있는 것입니다.
그러니 오만한 생각을 하지 말고 오히려
두려워하십시오.
하느님께서 본래의 가지들을 아까워하지 않으셨으면, 아마 그대도 아까워하지 않으실 것입니다.
그러니 하느님의 인자하심과 함께 준엄하심도 생각하십시오.
하느님께서는 떨어져 나간 자들에게는 준엄하시지만 그대에게는 인자하십니다.
오직 그분의 인자하심 안에 머물러 있어야 합니다.
그렇지 않으면 그대도 잘릴 것입니다(로마 11,19-22).”
‘포도밭 소작인의 비유’는, 표현으로는 유대교가 받은 은총이 그리스도교에게로 넘어갈 것이라는 경고인데, 뜻을 생각하면, 이 경고는 유대교에게만 해당되는 것이 아니라 그리스도교에도 해당되고, 또 각 개인에게도 해당됩니다.
실제로 유대교는 메시아 예수님을 믿지 않고, 회개하지 않아서, 누리고 있던 은총을 잃었고, 그 은총이 예수님을 믿는 종교, 즉 그리스도교에게로 넘어왔습니다.
그러나 그리스도교라고 해서 구원의 은총이
보장되어 있는 것은 아닙니다.
예수님을 믿는 종교라면, 예수님을 믿는 종교답게 살아야 하고, 예수님의 신앙인이라면, 신앙인답게 살아야 합니다.
아무렇게나 막 살아도 되는 특권 같은 것은 원래 없습니다.
2) 우리는 하느님의 ‘소작인’이 아니라 ‘자녀’입니다.
“하느님의 영의 인도를 받는 이들은 모두 하느님의 자녀입니다.
여러분은 사람을 다시 두려움에 빠뜨리는 종살이의 영을 받은 것이 아니라, 여러분을 자녀로 삼도록 해 주시는 영을 받았습니다.
이 성령의 힘으로 우리가 ‘아빠! 아버지!’ 하고 외치는 것입니다.
그리고 이 성령께서 몸소, 우리가 하느님의 자녀임을 우리의 영에게 증언해 주십니다. 자녀이면 상속자이기도 합니다.
우리는 하느님의 상속자입니다.
그리스도와 더불어 공동 상속자인 것입니다(로마 8,14-17ㄷ).”
그런데도 예수님께서 비유에서 ‘소작인’으로 표현하신 것은, 유대인들이 자녀답게 살지 않고 충실하지 않은 소작인처럼 살고 있는 것을 꾸짖기 위해서입니다.
<혹시라도 “구약시대 때에는 하느님과 사람들의 관계가 주인과 소작인의 관계였다가 신약시대가 되어서야 예수님 덕분에 아버지와 자녀의 관계로 바뀐 것이 아닐까?” 라고 생각할 사람이 있을지도 모르는데, 구약시대 때에도 사람들은 모두 하느님의 자녀였습니다.
이스라엘 사람들이 그것을 잊어버리고 살았을 뿐입니다.>
소작인은, 남의 밭에서 일을 하고 그 대가로 소작료를 내는 사람이지만, 자녀는 아버지의 밭에서 아버지의 일을 하는 사람이고, 소작료를 내는 것이 아니라, 밭에서 거둔 소출과 그 밭을 상속받는 사람입니다.
그래서 아버지의 밭은 곧 자녀의 밭이고, 아버지의 일은 곧 자녀 자신의 일입니다.
이것은 대단히 중요한, ‘본질적인 차이’입니다.
‘누구를 위해서 신앙생활을 하는가? 신앙생활을
왜 하는가?’에 관한 근본적인 물음에 연결되기 때문입니다.
3) 실제 상황에서는 비유의 표현과는 달리, 유대인들이 예수님을 죽인 것은 하느님의 아드님이라는 것을 알아보았기 때문이 아니라 못 알아보고 안 믿었기 때문입니다.
또 상속 재산을 차지하려고 예수님을 죽인 것이 아니라, 하느님께 충성한다는 명목으로 죽였습니다(요한 16,2).
박해자 시절의 바오로 사도도 진심으로 하느님께 충성하려고 그랬고, 예수님을 죽인 박해자들도 대부분 그랬습니다.
실제 상황과 비유의 표현에 그런 차이가 있긴 한데, 결과만 놓고 보면, 하느님의 아드님을 알아보지 못하고, 안 믿고, 죽인 것은, 하느님께 정면으로 반역한 일입니다.
<모르고 그랬으니 정상참작의 여지가 있긴 했습니다.
나중에라도 회개한 이들은 구원받을 수 있었다는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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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50321. 사순 제 2주간 금요일. 함승수 세례자 요한 신부님
마태 21,33-43.45-46 “주인은 마침내 ‘내 아들이야 존중해 주겠지.’ 하며 그들에게 아들을 보냈다.“
오늘 복음 속 비유는 그것을 통해 깨달음을 주고자 하는 대상이 누구인지를 분명하게 밝히고 있습니다. ‘포도밭 주인’이신 하느님께서 사랑과 정성으로 일군 ‘포도밭’인 이스라엘 백성들을 잘 보살피며 당신께 대한 참된 믿음으로 이끌어주라고 ‘소작인들’ 즉 수석 사제들을 비롯한 종교 지도자들에게 맡기셨습니다. 그러나 그들은 욕망과 고집에 사로잡혀 자꾸만 하느님의 뜻으로부터 벗어났고 이에 하느님께서는 당신의 ‘종’인 예언자들을 그들에게 여러차례 보내시어 잘못된 길에서 벗어나 올바른 길로 돌아오라고 권고하셨지요. 그러나 종교 지도자들은 그들의 말을 듣지 않았습니다. 자신들의 권위와 영향력을 앞세워 그들을 무시하고 핍박하며 심지어 죽이기까지 했지요. 그럼에도 하느님께서는 이스라엘을 구원하시려는 당신 뜻을 포기하지 않고 당신 외아들까지 보내셨는데 종교 지도자들은 여전히 자기 욕망과 고집에 사로잡혀, 그분을 제거하고 이제는 자기들이 하느님의 자리를 대신 차지하려고까지 하기에, 하느님께서 직접 그들을 벌하시고 그들의 잘못을 바로잡으실 거라는 경고의 메시지인 겁니다.
예수님께서는 이 비유를 마무리하시면서 시편 118편의 구절을 인용하십니다. “집 짓는 이들이 내버린 돌 그 돌이 모퉁이의 머릿돌이 되었네. 이는 주님께서 이루신 일 우리 눈에 놀랍기만 하네.”(시편 118,22-23) 이 말씀 안에는 인간의 실수와 잘못을 통해서도 당신의 선한 뜻을 이루시는 하느님의 놀라운 섭리가 담겨 있습니다. 효율과 이익만 중시하는 ‘집 짓는 사람’들은 자기들이 쓰고자 하는 용도나 목적에 맞지 않는다며 어떤 ‘돌’이 지닌 가치를 함부로 판단하고 내버리기까지 하지만, 당신 피조물 하나하나를 아끼고 소중히 여기시는 하느님께서는 인간이 내버린 그 돌을 네 ‘모퉁이의 머릿돌’로 삼아 크고 아름다운 집을 지으신다는 겁니다. 즉 이스라엘의 종교 지도자들은 예수님이 자기들이 기대하고 바란 메시아의 모습과 다르다는 이유로 그분을 배척하고 핍박하며 죽이기까지 하겠지만, 하느님께서는 예수님의 그 희생과 사랑을 머릿돌로 삼아 이 세상에 무형의 건물, 즉 당신을 믿고 따르는 이들의 공동체인 ‘교회’를 세우실 거라고 일종의 ‘예언’을 하신 셈입니다.
그런데 오늘 복음 속 비유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그런 성경적 묵상이나 분석이 아닙니다. 당신이 보내신 종들이 무참히 매맞고 죽임 당하는 배신을 수차례 당하셨음에도 불구하고 끝까지 우리를 향한 믿음을 거두지 않으시는 하느님의 무한하고 깊은 사랑을 바라보아야 하는 것이지요. 게다가 오늘 비유는 우리와 상관 없는 ‘남 얘기’가 아닙니다. 하느님께서 무상으로 베풀어주신 선물들을 감사하는 마음으로 기쁘게 누리되, 거기서 나오는 결실들로 내 욕망만 채우려 들지 말고 그 중 일부라도 하느님을 위해, 이 세상에서 그분 뜻을 이루기 위해 잘 사용해야 할 중요한 소명이 우리에게 있음을 기억해야 하는 겁니다. 그 소명을 충실히 잘 이행한다면 우리는 하느님께 사랑받는 자녀로서 기쁨과 행복을 충만히 누리게 될 것입니다. 그러나 그 소명을 소홀히 하고 자기 욕망만 채우려 든다면, 늘 아버지 옆에 있으면서도 종처럼 불행하게 살았던 ‘큰 아들’의 전철을 밟게 될 겁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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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50321. 사순 제 2주간 금요일. 정인준 파트리치오 신부님.
“질투의 끝자락”
가끔씩 성당의 자매들로부터 ‘남자들 질투가 더 무서워!’라는 말을 들을 때가
있습니다. 유교 사상의 영향을 받았던 지난 우리의 사고에는 질투는 여성의 전유인
것처럼 인식되어 왔는데 그런 과거의 사고에 반박의 심리가 작용했으리라 생각합니다.
사실 질투에는 남녀 차이가 있겠어요?
질투의 근원은 무엇일까요? 여러 가지로 설명할 수 있겠지만 두드러지게 나타나는 것은
‘욕심’에서 비롯하는 것이지요. 사람을 독차지 하려는 욕심, 물건을 독차지 하려는
욕심에서 이웃의 경쟁자를 어떻게 하든 비하시키나 제외시키려는 심리적인 현상이
아닐까요?
가령 내가 A라는 사람을 좋아하는데, 또 다른 사람도 A를 좋아한다면 두 가지의 측면을
생각할 수 있겠지요. 다른 사람이 A를 가까이 하지 못하도록 애쓰거나, 아니면 다른
사람도 A와의 관계를 인정하고 존중해 주는 것이겠지요. 물론 후자가 성숙된 사람의
모습이겠는데, 그것을 가능하게 해 주는 방법은 바로 내 마음을 지배하는 ‘욕심’을 비우는
것입니다.
창세기 저자는 아버지 야곱이 후에 12지파의 시조가 될 아들들 보다 늘그막에 얻은
요셉을 더 사랑하기 때문에 결국 동생 요셉을 죽으려 합니다. 그러나 결국 형들은
그를 제거하는 마음에서 죽이는 것보다는 이집트를 왕래하는 미디안 상인에게
팔아넘깁니다.
성경은 이러한 인간의 욕심과 그 결과의 잘못된 행위에 대해서 솔직하게 이야기 하고
있습니다.
그렇게 따진다면 마태오가 전해주는 포도밭의 주인과 아들, 그리고 소작인들과의
관계에서도 이 질투의 모습을 볼 수 있습니다.
포도밭을 독차지 하려는 소작인들의
욕심에서 주인이 보낸 종들도 패주거나 죽이고 나중에는 주인의 아들까지도 없애버리는
행동을 취합니다. 그들은 주인의 외아들을 포도밭의 밖으로 던집니다. 주님께서
예루살렘 성 밖을 골고타에서 죽음을 맞으십니다.
주인은 노발대발로 그 소작인들의 포도밭까지도 빼앗습니다. 바리사이와 율법학자들에게
하시는 말씀은 그들이 주인의 뜻을 거스리는 일꾼들이 바로 바리사이들임을 암시하시는
것입니다.
욕심은 이렇게 사람을 해치거나 생명을 잃게 할 수 있습니다.
질투의 끝자락은 크고 작은 욕심으로 닿기 때문에 회개를 통하여 마음을 비우고
욕심을 서로 없앨 때 우리는 비로소 주님의 수난과 죽음과 함께 하며 그 고통과
아픔에 참여할 수 있게 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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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50321. 사순 제 2주간 금요일. 기경호 프란치스코 신부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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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50321. 사순 제 2주간 금요일. 오상선 바오로 신부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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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50321. 사순 제 2주간 금요일.
좁은 길로 나아가는 제자의 삶
<2025.3.21> 아침을 여는 묵상 (눅 13:22~35절)
❝좁은 길로 나아가는 제자의 삶❞
❚ 험난한 길일지라도 주님의 부르심을 따라 좁은 길일 걷는 참 제자의 삶을 살아가야 합니다.
✔ 참 제자는 어떻게 살아가야 합니까?
➲ 주님이 걸은 불편한 길을 따라가야 합니다(22~25절).
예수님은 예루살렘으로 이동 중에도 가르치는 사역을 계속하셨습니다. 이때 한 사람이 묻습니다. ‘주여, 구원을 받는 자가 적으니이까?’(22~23절).. 유대인들의 계속되는 공격과 박해등을 생각해 볼 때, 구원받을 사람이 적을 것이라고 생각 했던 모양입니다. 이 질문에 예수님은 ‘좁은 문으로 들어가기를 힘쓰라... 들어가기를 구하여도 못하는 자가 많으리라...’(24절)라고 말씀하십니다. 하나님 나라에 들어가고자 하는 사람은 많지만 정작 좁은 문으로 들어가려고 하는 사람은 적다는 의미입니다. 그리고 이어서 집 주인이 문을 닫은 후에는 아무리 문을 두드리며 열어 주기를 간청해도 주인은 끝내 그를 모른다고 말할 것(25절)이라고 말씀하십니다.
구원의 문제는 인간의 지식과 판단에 의해 결정되는 것이 아닙니다. 사람으로는 할 수 없지만, 하나님으로서는 다 하실 수 있습니다. 주님이 걸으신 그 길은 여러모로 불편함이 있는 길입니다. 주님이 들어가기를 힘쓰라 말씀하신 좁은 문 역시 매우 불편한 문입니다. 그 문을 통과하기가 말처럼 쉽지 않습니다. 그러므로 현재의 안일함과 부귀영화를 버리고, 하나님의 명령에 순종하므로 주님께서 걸으셨던 고난의 길을 걷기 위해 고군분투하는 자에게 하나님 나라가 예비 되어 있습니다. 기억해야 할 것은 그 문이 닫히기 전에 오늘 하나님 앞에서 범죄 함을 회개하고, 그리스도의 보혈로 정결함을 입고, 그때를 준비하는 삶이 되어야 합니다. 목자가 자기 양을 알듯이 주님 역시 우리의 모든 삶을 아십니다. 그러므로 주의 이름을 부르면서도 불법을 행하여 주님을 부인하는 어리석은 삶이 되지 않도록 주의해야 합니다. 좁은 그 문은 그리고 주님이 걸으신 그 길은 우리 자신을 살게 한 문이기 때문에 아무리 힘들고 불편해도 믿음으로 최선을 다하는 참 제자의 삶이 되어야 하겠습니다.
➲ 구원의 문이 닫히기 전에 들어가야 합니다(26~30절).
어디서 온 사람들인지 모르겠다는 주인의 말에 대하여 ‘...우리는 주 앞에서 먹고 마셨으며, 주께서 길거리에서 우리를 가르치지 않으셨습니까?’(26절)라고 그들이 말할 것이라고 말씀하십니다. 그러나 주님의 대답은 완고 하십니다. ‘...나는 너희가 어디에서 왔는지 모른다. 불의를 일삼는 자들아, 모두 내게서 물러가라!!’(27절).. 결국 주님으로부터 철저하게 외면을 당한 자들은 ‘...바깥으로 쫓겨나 거기서 슬피 울면서 이를 갈게 되는...’(28절) 비극을 경험하게 될 것입니다. 오히려 ‘...동서남북으로부터 온 사람들..’(29절) 즉 이방인들은 하나님 나라 잔치에 참여하게 되는 일이 생겨나고 말 것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 나라는 ‘...나중 된 자로서 먼저 될 자도 있고, 먼저 된 자로서 나중 될 자도 있다...’(30절)는 것입니다. 먼저 하나님의 택하심을 받은 유대인들이었지만 율법의 정신만을 강조한 채 정작 그리스도를 영접하지 않고, 회개하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이방인들은 그리스도를 믿고 영접하고 회개하였기에 하나님 나라 잔치에 참여할 수 있게 된 것입니다.
아무리 주님과의 관계가 친밀함 속에 있다고 말할지라도 그 자체가 형식적인 사귐이요, 진리를 거스르는 삶을 살아가고 있다면 결국 주님으로부터 철저하게 외면을 당하게 될 것입니다. 지금 우리 자신이 구원을 얻었다고 해서 자만하지 말아야 하겠습니다. 모든 상황이 역전될 수도 있다는 것을 염두에 두고 천국 문에 이를 때까지 믿음의 선한 싸움을 싸워 나아가는 삶을 살아가야 합니다. 무엇보다 이를 갈며 애통한 일을 당하지 않고 천국 잔치에 참여하는 복을 소망하는 삶이어야 합니다. 한 번 닫힌 구원의 문은 절대로 다시 열리지 않습니다. 주님이 문을 닫으실 때가 점점 더 가까이 다가오고 있습니다. 그때와 시를 알 수 없기에 영적 긴장감을 늦추지 말고, 서둘러야 하겠습니다. 구원의 문으로 들어가는 일을 결코 다음으로 미루지 않는 믿음의 삶을 통해 주님이 가신 그 길을 따르는 참 제자의 삶이 되어야 하겠습니다.
➲ 두려움 없이 구원의 길로 나아가야 합니다(31~35절).
어떤 바리새인들이 나와 헤롯이 당신을 죽이려고 하니 떠나라고 합니다(31절). 본문에 나오는 바리새인들은 예수님에 대해 다소 우호적인 모습을 보이는 듯 합니다. 그러나 그들이 정말 그런지는 예수님의 말씀을 통해 분명하게 알 수 있게 됩니다. ‘...너희는 가서 저 여우에게 이르되...’(32절).. 헤롯은 예수님을 죽이려 한다는 소문을 퍼뜨려 자신의 통치 구역에서 멀리 떠나게 하려는 속셈을 가지고 있었음을 보여줍니다. 예수님은 이런 헤롯의 간교함을 알고 계셨고, 급기야는 그를 여우라고까지 부릅니다. 적대자들의 간교함과 위협 속에서도 예수님은 당신의 사역을 마칠 때까지 또한 ‘다 이루었다’라고 말씀하실 때까지 사역을 멈추지 않으시겠다고 말씀하십니다. 왜냐하면 선지자를 예루살렘 밖에서 죽이는 것은 불가능하기 때문(33절)입니다. ‘...너희 집이 황폐하여 버린 바 되리라...’ 메시아를 거부하는 예루살렘의 운명이 이미 결정되어 있음을 보여줍니다. ‘...나를 보지 못하리라...’(35절)... 예수님의 사역이 일시적으로 중지되고 종말론적 심판주로 다시 강림하실 때까지 하늘 보좌 우편에 앉아 계실 것을 암시하고 있습니다.
예수님의 운명은 하나님에 의해 이미 정해져 있기에 어떠한 방해에도 불구하고 예루살렘으로 가실 것입니다. 예수님의 참 제자가 되고자 하는 자들 역시도 십자가를 지고 예수님의 길을 따라가는 삶이어야 합니다. 하나님 나라는 어떤 방해와 고난과 환난 속에서도 묵묵히 믿음의 길을 걷는 자에게 주어집니다. 구원의 일은 계속 되어져야 합니다. 무엇보다 어떤 상황과 조건에서도 복음을 전하는 일을 멈추지 않아야 합니다. 믿음으로 구원의 문을 두드리고, 선포할 때 주님은 구원의 문을 열어 주실 것입니다. 우리 자신과 우리 교회와 우리가 살아가는 이 지역이 황폐하게 되지 않도록 그리스도의 복음을 전하여 영혼들이 듣고, 돌이킬 수 있도록 주신 사명을 묵묵히 감당해 나감으로 주님이 가신 그 길을 따르는 참 제자의 삶이 되어야 하겠습니다.
오늘도 어떤 환경과 상황 속에서도 포기하지 않고, 복음의 증인답게 삶으로 구원의 길로 안내하는 삶으로 나아갈 뿐 아니라 주님을 위해 기꺼이 나의 유익을 포기하고, 좁은 문과 넓은 문 사이에서 주님의 길을 걷는 참 제자의 삶을 살아갈 수 있기를(눅 13:22~35절)...
행복의 시작 예수 그리스도!!!
빛이 있으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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