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장 구속사 강해
인간의 나라 ‘바벨’과 신령한 나라의 시작
대홍수 이후 하나님께서 새 인류를 향하여 다시는 인류가 멸절되는 일이 없을 것이며 그 생명을 해하는 어떤 위험으로부터도 보호받을 수 있도록 모든 여건을 보장해 주겠다고 약속하셨던 것은 새로운 인류가 이 땅에 “생육하고 번성하여 땅에 충만하라”(창 9:1)는 문화적 사명을 수행하도록 하기 위함이었다.
그러나 새 인류는 하나님과 맺은 언약을 따라 의와 사랑으로 통치되어지는 하나님의 나라를 건설해야 한다는 존재 의미를 망각해 버리고 말았다. 대신 인류는 인간들의 힘을 드러내고 인간들에 의해 통치되는 인간들의 나라를 건설하기 위해 힘을 모았다. “자, 성과 대를 쌓아 대 꼭대기를 하늘에 닿게 하여 우리 이름을 내고 온 지면에 흩어짐을 면하자”(창 11:4)고 하는 새 인류의 경영은 마침내 바벨탑을 쌓는 일에서 그 절정에 이르렀다. 하나님은 그들의 경영을 중단시키기 위해 언어를 혼돈케 함으로서 그들의 사역을 중지시키셨다.
1. 하나님을 떠난 인류의 세상
하나님께서 인류의 생존을 보호해 주겠다는 노아와 맺으신 언약에도 불구하고(창 9:1-17) 노아의 후손들은 바벨탑 사건으로 이 땅에 새로운 인류로서 가져야 할 존재 의미를 상실하고 말았다. 노아의 언약은 사실상 하나님을 불신하고 바벨탑을 건설한 사람들에 의해 파기되는 위기에 처하게 된 것이다. 노아의 언약이 깨어진다는 것은 더 이상 인류가 생존을 유지하기 위해 하나님으로부터 보장을 받을 수 없게 되었음을 의미한다. 그것은 인류가 하나님의 보호와 인도 가운데 사는 대신에 각기 자기들 능력대로 삶의 방편을 해결하며 살게 되는 결과를 가져오게 되었다. 이것은 인류의 존재 가치가 상실되는 위기에 처하였음을 단적으로 보여 주는 현상이다. 이제 인류는 스스로 자신들의 삶을 스스로 보존해야만 했다. 즉 바벨탑 사건 이후 사람들은 각자 생존의 방편을 해결하기 위해 먹고사는 일에 매달리게 된 것이다.
하나님의 통치를 거부하고 자기들 스스로의 통치가 실현되는 나라를 건설하겠다는 바벨탑 사건 이후, 인류는 더 이상 하나님의 보호와 인도 가운데 있지 못하고 생존의 위협과 갈등에 처하게 되었다. 그러한 삶의 두려움 속에서 인류는 자신들의 생존을 스스로 보호하기 위한 자구책으로 성을 쌓기 시작했다. 특히 노아의 저주를 받은(창 9:20-27 참조) 함의 후예들 가운데 바벨탑 사건 이후 큰 성을 쌓게 되는 현상이 두드러지게 나타나고 있다(창 10:10-21 참조). 이것은 가인이 그랬던 것처럼 자신들의 생존을 어떻게 해서든지 보전해 보겠다는 인간의 강한 의지의 표현이기도 한다. 인류가 성을 쌓고 도시를 건설하기 시작한 것은 하나님의 보호를 받지 못함으로 오는 두려움 때문이었다.
운명에 대한 불안은 인간이 창조주이신 하나님을 떠나면서부터 시작된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사람들은 창조주이시며 자기 운명의 주관자이신 하나님보다는 자기들이 만들어 낸 운명의 신을 신앙한다. 그 이유는 인간들이 만들어 낸 신들과는 쉽게 타협할 수 있는 반면에 하나님은 절대로 인간과 타협하지 않는 분이기 때문이다. 하나님과 화해하기 위해서는 근본적으로 죄의 문제를 해결하지 않으면 안 된다. 그러나 죄의 종이 되어 이미 죽음에 빠져 있는 사람으로서는 도저히 하나님과 화해할 수 없는 위치에 있는 것이다. 반면에 인간이 만든 신들과는 언제든지 타협이 가능하다. 신의 마음을 노엽게 하지 않기 위해 그만큼 치성을 드리는 것으로 충분하다고 여기기 때문이다. 그 결과 사람들은 하나님께 나아가 자신들의 죄를 회개하기보다는 자기보다 월등하게 능력이 있다고 여겨지는 신들을 찾아 나서게 된 것이다.
그러나 진정으로 인간이 돌아갈 자리는 하나님의 보호와 인도를 받는 곳이다. 이미 하나님께서 인류의 생존을 보호하겠다고 무지개를 증표로 하여 언약해주셨기 때문에 그 사실을 인정하고 하나님의 약속을 신앙하는 것만으로도 사람들은 하나님의 보호와 인도를 받는 위치에 서게 되는 것이다. 반면에 하나님의 약속에 대한 신앙을 포기하는 행위가 바로 우상 숭배이다. 우상을 숭배하는 것은 더 이상 하나님의 약속을 신뢰하지 않고 자기 나름대로 인생을 경영해 보겠다는 의지의 표명인 것이다. 이러한 우상 숭배의 현상이 전 인류 사회를 지배하고 있을 때 하나님의 보호와 인도하심에 대하여 남달리 관심을 갖고 있던 인물이 바로 아브라함이었다.
2. 신령한 나라의 조상 아브라함
아브라함이 성장할 때에는 아직도 바벨탑 사건을 지켜본 사람들이 살아남아 있었다. 아브라함은 그들을 통해 바벨탑에 임한 하나님의 저주가 어떤 성격을 띠고 있는가를 충분히 알 고 있었다. 나아가 바벨탑 사건과 불가분리의 관계에 있는 노아 홍수 사건에 대해서도 상세히 알 수 있었다. 즉 아브라함은 노아 홍수 사건과 바벨탑 사건에 대한 역사적인 조명을 통해 창조주이신 하나님께서 인류에게 바라시는 궁극적인 천지 창조의 목적이 무엇인가를 충분히 알게 된 것이다. 아브라함이 하나님에 대한 바른 지식을 습득하게 된 것은 우연한 일이 아니었다.
당시 아브라함의 세대는 우상 숭배라는 시대적 특징이 강하게 나타나고 있었기 때문에, 그 시대에 하나님께서 요구하시는 것은 하나님을 신앙하고 그 말씀을 따라 인생을 경영하는 것이었다. 그러한 시대적 특징을 파악한 아브라함이기 때문에 인생의 경영을 우상에게 의뢰하지 않고 살아 계신 하나님께 의지해야 한다는 사실을 모를 리 없었던 것이다. 아브라함이 하나님께서 갈대아 우르를 떠나 새로운 땅으로 떠나라고 말씀할 때 주저하지 않고 그 길을 떠날 수 있었던 것도 그러한 이유에서였다.
데라가 205세에 하란에서 죽은 후 아브라함이 하란을 떠나 가나안에 도착할 때 75세였다고 한다면 데라는 적어도 130세 경에 아브라함을 생산하였음을 알 수 있다. 아브라함은 갈대아 우르에서 청년기를 보냈을 것이다. 그곳에서 우상 숭배에 빠져 있는 인류의 괴악함을 발견하였고 나아가 아직도 살아 있는 조상들을 통해 노아 홍수 사건의 성격에 대하여 자세히 알게 되었을 것이다. 그러한 지식을 바탕으로 하나님에 대한 올바른 삶의 자세와 방향을 정립한 후 하나님의 부르심을 받고 갈대아를 떠나기로 작정하였을 것이다.
따라서 아브라함은 적어도 70세 이전에 갈대아 우르에서 하나님의 약속을 듣고 떠났음을 미루어 짐작할 수 있다. 데라는 200여세가 다 된 노구의 몸이었으나 갈대아를 떠나야 한다는 아브라함의 강력한 주장에 이끌려 하란에까지 왔다가 하란에서 급격히 체력이 떨어져 죽은 것으로 보아야 할 것이다. 데라는 우상 숭배의 경험이 있던 자로서 하나님의 말씀에 대한 신뢰가 아브라함처럼 확실하지 못했을 것이다.
이미 바벨탑 사건을 통해 나타났던 것처럼 아담이 한번 범죄한 이후 인류는 정상적인 길로 가지 못하고 계속 하나님의 경영과는 정반대의 길을 가고 있다는 것이다. 역사 속에 그러한 현상이 강하게 나타나면 나타날수록 근본적으로 죄를 해결하지 않고서는 인류가 참다운 인생의 길을 갈 수 없다는 사실이 더 분명해진다는 교훈을 바벨탑 사건을 통해 확인한 인류는, 죄로부터 인류를 구원하기 위해 오실 약속의 씨를 더 기다리고 소망해야 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인류가 스스로 우상 숭배에 빠지고 말았다는 것은 그만큼 어두움의 시대가 깊었음을 의미하는 것이다.
그와 같은 어두움의 시대에 인류가 깊이 잠들어 있을 때 하나님께서 새롭게 하나의 독특한 인류 사회를 건설하여 신령한 나라를 세우시겠다고 선언하신 것이 바로 아브라함을 부르신 사건이었다. 하나님은 아브라함을 통해 큰 민족을 이루고 복의 근원으로 삼을 것이라고 선언하신다. 결국 아담과 하와의 범죄로 인해 노아 홍수를 통해 하나님의 심판을 받은 인류는 다시 바벨탑 사건을 통해 버림을 받고 말았지만, 그 가운데서도 하나님의 우주적인 통치를 바라보고 인류를 죄로부터 구원하기 위해 약속의 씨인 메시아가 태어나야 할 것을 소망하는 아브라함은 신령한 새 인류의 조상으로 하나님의 부르심을 받게 된 것이다.
바로 그와 같은 어두움의 시대에 하나님의 우주적인 경영의 방침을 꿰뚫어 볼 수 있었던 아브라함의 신앙은 밤하늘의 혜성과 같이 역사에 길이 빛날 만큼 소중한 것이 아닐 수 없다. 아브라함은 하나님의 약속을 의심하지 않고 믿음으로 수용하여 갈대아 우르를 떠나 가나안을 향해 말씀을 따라 나섰던 것이다. 더욱이 아브라함은 계시에 대하여 어두운 시대에 인류의 죄를 구속할 약속의 씨를 소망하고 자신이 속한 우상 숭배의 세계에서 과감하게 탈출할 수 있었던 것은 역사에 길이 남을 발자취인 것이다(요 8:5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