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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적인 건국만이 살길이다! | 헬라어 ㅅ~ㅇ 원어해석(김준남 목사) - Daum 카페 23.04.10
영적인 건국만이 살길이다! | 헬라어 ㅈ~ㅎ 원어해석(김준남 목사) - Daum 카페 23.04.10
원어단어 ‘ㄱ’ 에 해당하는 단어들
1,개혁 2,구원 3.거짓 4.궤계 5.금식하다 6.교회 7.권능 8. 권세9.구제 10.골방 11.공경하다 12. 구하다 13. 가난 14.기도하라 15. 기근 16.교훈하다 17.강해지다 18. 기쁨 19.깨어 있다 20.거듭, 다시 21.거하다 22. 개 22.쉬지 말고 23. 꾸짖다 24.계명 25. 교제 26, 길, 27, 가증한 것 28, 구름, 29, 강림, 30, 기억하다
1, 개혁 디올도시스(διόρθωσις) : 개혁 헬라어 원어해석(김준남 목사)
‘이런 것은 먹고 마시는 것과 여러 가지 씻는 것과 함께 육체의 예법일 뿐이며 개혁할 때까지 맡겨 둔 것이니라’(히9:10)
‘개혁’으로 번역된 헬라어 ‘디올도시스’(διόρθωσις)는 ‘통하여, 때문에,…으로부터,…를 위해’라는 뜻을 전치사 ‘디아’(διά)와 ‘똑바른, 수직으로 선, 곧장 위로, 정직한, 비뚤어지지 않은’의 뜻을 가진 ‘올도스’(ὀρθός)의 파생어에서 유래된 단어로 ‘철저하게 바로 잡다, 부러지거나 기형적인 뼈를 곧게 하거나 정상적인 상태로 회복시킴, 법률과 규칙, 개혁, 메시아적 회복’의 의미를 가지고 있으며 신약에서 유일하게 1회 등장하는 단어이다.
또한 ‘올도스’(ὀρθός)는 ‘일어나다, 세우다’라는 뜻을 가진 ‘오로’(oro)를 어원으로 하고 있는 ‘산, 평지위에 돌출한 작은 산’이라는 뜻의 ‘오로스’(ὄρος)에서 유래된 단어이다. 이 단어는 ‘들어올리다, 높이다, 운반하다, 죄를 속하다, 없이 하다’의 뜻을 가진 ‘아이로’(αἴρω)와 유사한 의미를 가지고 있다.
이런 의미에서 ‘디올도시스’(διόρθωσις)가 말하는 ‘개혁’은 단순히 국어사전의 ‘제도나 기구 따위를 새롭게 뜯어고침’이라는 개념과 차원이 다른 ‘위로의 회복’인 ‘허물과 죄로 죽었던’(엡2:1)어둠의 자리에서 하나님과 사귐이 있는 '참 생명인 빛으로의 회복’을 의미하는 것이다. 성경은 ‘개혁’ (διόρθωσις)의 결과가 ‘사망을 통과하여 생명 안으로(에크 투 다나투 에이스 텐 조엔 : ἐκ τοῦ θανάτου εἰς τὴν ζωήν)들어가는 것’(요5:24)으로 표현하고 있다.
하나님은 창세전 언약의 성취를 위한 참된 ‘개혁’(διόρθωσις)을 위해서 육체의 예법인 성막, 율법을 미리 허락하셨던 것이다. 이 모든 것은 메시야인 예수에 대해서 기록하고 있으며(요5:46)그것은 곧 예수를 예표하고 있다는 것을 의미하는 것이다. 인간을 구원하시기 위한 하나님의 열심으로 하나님 자신이 이 땅에 말씀 육신으로 오시었고 결국 십자가에서 다 이루셨다(요19:30).
그러나 하나님 처럼 된 인간은 말씀을 통해서 자신의 처음자리를 깨닫기 보다는 선악의 주체자로써 하나님의 말씀을 자신의 것으로 소유하며 지켜보겠다고 하므로 스스로 영적인 소경이며 앉은뱅이임을 폭로하고 있는 것이다.
그러므로 성도에게 있어서 진정한 ‘개혁’(διόρθωσις)이란 이러한 소경의 자리에서 ‘내가 곧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다’(요14:6)라는 예수님의 말씀에 ‘맞습니다, 내가 바로 소경입니다’라고 고백하므로 그리스도를 보는(호라오) 것이요, ‘맞습니다, 내가 바로 걷지 못하는 자 입니다’라고 고백하므로 그리스도를 향하여 똑바로 걷는 것(행14:10)을 의미하는 것으로, 오늘도 모든 것을 표피적으로 보지 아니하고 그 속에 담겨진 진리의 말씀을 보고 깨달아 그 생명의 말씀을 품고 사는 것이다. [디올도시스(διόρθωσις) : 개혁]
2 구원 소테리아(σωτηρία) : 구원 헬라어 원어해석(김준남 목사)
‘다른 이로써는 ‘구원’받을 수 없나니 천하 사람 중에 구원을 받을 만한 다른 이름을 우리에게 주신 일이 없음이라 하였더라’(행4:11)
‘구원’으로 번역된 헬라어 ‘소테리아’(σωτηρία)는 ‘구원, 안전, 건강, 보호, 메시야적 구원, 모든 진실된 그리스도인들이 현재 소유한 구원, 미래의 구원’이라는 의미를 가진 단어이다. 이 단어의 동사형은 ‘소조’(σῴζω)로써 ‘구조하다, 구원하다, 안전하고 튼튼하게 지키다, 위험과 파괴로부터 구출하다, 완전하게 만들다, 보존하다’라는 의미를 가지고 있으며, 여기서 파생된 남성명사가 ‘구주, 구속자, 구원자, 해방자, 보호자’의 뜻을 가진 ‘소텔’(σωτῆρ)이라는 단어이다.
‘소테리아’(σωτηρία)로 번역된 히브리어는 ‘구원, 번영, 승리’의 뜻을 가진 ‘예슈아’(ישועה)인데 이를 파자하면 ‘손에 못이 박혀 나타난 존재’라는 의미이다. 여기서 ‘헤’(ה)를 빼면 ‘예슈아’(ישוע)가 되는데 이것이 예수님의 히브리어 이름이며 ‘그가 자기 백성을 그들의 죄에서 구원할 자’(마1:21)라는 뜻을 가지고 있다.
‘예슈아’(ישועה)라는 단어는 구약에서 야곱이 자신의 열두 아들을 불러 예언하며 축복하는 말씀 중에 ‘여호와여 나는 주의 구원(예슈아 : ישועה)을 기다리나이다’(창49:18)에서 처음 나오며 구약성경에서 77회 사용되고 있다.
‘여호와’로 쓰인 히브리어 ‘예호바’(יהוה)를 파자하면 ‘손을 보라 못을 보라’는 의미로 결국 여호와가 바로 구원자 예수라는 사실을 알 수 있다.
하나님의 기쁘신 뜻대로 우리를 예정하사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자기의 아들들이 되게하신 하나님의 창세 전 언약에 따라 하나님의 열심으로 이루어지는 것이 구원(σωτηρία)이다. 그래서 히브리서 기자는 ‘만물을 창조하시고 보존하시는 하나님이 많은 사람을 영광으로 인도하시려고 구원(σωτηρία)의 창시자이신 예수님을 고난을 통해 완전하게 하신 것은 너무나 당연한 일이었습니다’(히2:10, 현대인의 성경)라고 기록하고 있는 것이다.
그러면서 예수님이 하나님의 아들이면서도 받으신 고난으로 순종함을 배워서 온전하게 되셨기에 마찬가지로 자기에게 순종하는 모든 자에게 영원한 ‘구원’(σωτηρία)의 근원이 되셨다고 말하고 있다.
하나님께서 말씀 육신이 되어 이 땅에 오신 그리스도이신 예수(요1:14), 그 이름 만이 우리를 구원하시는 것이다(행4:11)이와 같이 성도는 믿음으로 말미암아 ‘구원’(σωτηρία)을 받은 자이다. 그러나 이 믿음도 우리에게서 난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열심에 의한 하나님의 선물이다(엡2:8). 그래서 ‘구원’(σωτηρία)은 오직 하나님의 은혜(only by grace)라고 말하는 것이다 [소테리아(σωτηρία) : 구원]
3. 거짓’ 헬라어 프슈도스 헬라어 원어해석(김준남 목사)
‘이는 그들이 하나님의 진리를 ‘거짓’것으로 바꾸어 피조물을 조물주보다 더 경배하고 섬김이라 주는 곧 영원히 찬송할 이시로다’(롬1:25)
‘거짓’으로 번역된 헬라어 ‘프슈도스’(ψεῦδος)는 ‘거짓을 말하다, 의도적으로 거짓말을 말하다, 거짓말로 속이다’라는 뜻을 가진 ‘프슈도마이’(ψεύδομαι)에서 파생된 단어로 ‘거짓말, 고의적인 거짓말, 비뚤어지고, 불경건하며, 속이는 교훈, ‘거짓’의 의미를 가지고 있다.
또한 ‘거짓말쟁이, 믿음을 저버린 사람, 거짓되고 믿을 수 없는 사람’이라는 뜻을 가진 남성명사 ‘프슈스테스'
(ψεύστης)도 ‘프슈도마이’(ψεύδομαι)에서 파생된 단어이다. 70인역에서 ‘프슈도스’(ψεῦδος)로 번역한 히브리어 단어가 ‘허위, 가짜, 거짓말, 속임, 실망시키는 것, 기만, 사기, 부정행위, 거짓된 맹세, 거짓된 혀’의 뜻을 가지고 쓰이고 있는 ‘쉐케르’(רקש)이며 이를 파자하면‘분석하여 파괴하고 다시세우기 시작함’이라는 의미이다.
하나님의 창조 원리는 혼돈하고 공허하며 흑암이 깊음 위에 있는 땅(창1:2)으로부터 시작하며 저녁이 되고 아침이 되는 것으로 이루어져 있다. 그렇게 어두움으로부터 시작하는 것이 하나님의 피조물인 인간의 실존이며 여기에 빛을 비추어 하나님의 창조의 완성을 이루는 것이다. 이것은 인간의 시작이 어둠이라는 것을 말해주는 것이다. 그런데 성경은 빛이 어둠에 비치되 어둠이 깨닫지 못하였다(요1:5)고 말하고 있다.
즉, 실존이 어두움인데 그래서 볼 수가 없는데 자기가 빛이라고 생각하여 본다고 하는 것이 바로 ‘거짓’(ψεῦδος)이요, 성경은 그것을 '죄'(하말티아 : ἁμαρτία – 짝을 만나지 못한 상태, 짝이 아닌 것을 짝으로 알고 있는 상태)라고 말하고 있다(요9:41).
이런 의미에서 ‘프슈도스’(ψεῦδος)가 뜻하고 있는 ‘거짓’은 단순히 국어사전이 정의하고 있는 ‘사실과 어긋난 것 또는 사실이 아닌 것을 사실처럼 꾸민 것’이라는 윤리적이고 도덕적인 의미 보다는 ‘비 진리 안에 숨겨진 내용으로써의 말씀인 진리를 보지 못하고 눈에 보이는 비 진리를 진리로 보고 믿어 버리는 것 그리고 그렇게 믿고 행하는 모든 것’이라는 의미로 볼 수 있다. 결국 하나님의 진리를 ‘거짓’(ψεῦδος)것으로 바꾸어 피조물을 조물주보다 더 경배하고 섬기기에 거짓말쟁이(ψεύστης)가 되는 것이며, 진리가 그 속에 없으므로 진리 안에 거하지 못하고 ‘거짓’ (ψεῦδος)을 말할 때마다 자기의 본성을 나타내는데 이는 그가 거짓말쟁이(ψεύστης)이기 때문인 것이다(요8:44).
성도는 하나님의 모든 창조물을 보면서 그 안에 담긴 말씀을 보는 자이다. 그래서 이제는 선악의 주체가 되어 보이는 대로 판단해 버리는 ‘거짓말쟁이’(ψεύστης)가 아니라 그런 ‘거짓’(ψεῦδος)을 버리고 진리를 말하는 자이며(엡4:25), 그렇게 진리를 알아 진리가 주는 자유 함을 누리는 자(요8:32)인 것이다.[‘프슈도스’(ψεῦδος) 거짓]
4.궤계: scheme ==>간사스러운 꾀나 속임수를 말한다. 교활한 정책, 중상, 속임수와 같은 말이다. 미디안 사람들은 궤계로 이스라엘 사람을 유혹하여 죄를 짓게 했고(민 25:18) 애굽 왕은 궤계를 써서 어린아이들을 죽였다(행 7: 19)시편 기자는 악인이 해하려고 올무를 놓고 괴악한 일을 말하며 종일토록 궤계를 도모한다고 고백했다(시 38:12 ). 신약에서 대제사장과 장로들은 예수님을 궤계로 잡아 죽이려고 의논했다(마 26:4). 또한 사탄은 궤계를 써서
성도를 파멸시키고 교회를 분열시키는 존재이다(고후 2:11; 엡 6:11).[온라인성경사전]
궤계(詭計, δολος :돌로스, 명, 1, 원, 미끼, 올무, 속임, 간교, 변절, 2, 간사한꾀, 3, <용>예수를 잡아 죽이려는 악한 자들의 관련하여 나타난다.(마 26:4)[그랜도 기독교 낱말 큰 사전]
헬라어 성경에는 이 ‘간사하다’라는 표현이, ‘돌로스(δολος)’라고 기록되어 있는데 이는 ‘속이는 자’, 또는 ‘간교한 자'라는 뜻으로 그 어원(語原)은 물고기를 잡기 위해 던지는 '미끼'를 의미한다. 그 이유는, 실제로 미끼란 물고기를 속이는 역할을 하기 때문일 것이다. [강인 칼럼] “그 속에 간사한 것이 없도다” - 문화저널21 (mhj21.com)
5. 금식하다 네스튜오(νηστεύω) 헬라어 원어해석(김준남 목사)
‘사십 일을 밤낮으로 금식하신 후에 주리신지라’(마4:2)
‘음식이나 음료를 삼가다’, ‘금식하다’라는 뜻이다. 일반 사전에서도 ‘금식(禁食)하다’는 ‘치료나 종교, 또는 그 밖의 이유로 일정 기간 동안 음식을 먹지 못하게 금해지다 또는 먹지 않다’라는 의미로 기록되어 있다.
그래서 기독교인들은 이 세상으로부터는 멀어지고 하나님께 더 민감해지고 더 가까이 가기 위해 일정 기간 동안 음식을 먹지 않고 금식을 한다.
뿐만 아니라 ‘금식한다’(네스튜오 : νηστεύω)라고 할 때는 ‘음식이나 음료를 끊는다’는 것에 더욱 중점을 두고 있는 것이 사실이다. 금식은 그 자체가 죽음을 각오하는 의미가 있어 금식기도를 죽기를 각오한 기도요 그러기에 반드시 응답 받을 수 밖에 없는 기도로까지 오해하고 있다.
‘네스튜오’(νηστεύω)는 ‘집어 올리다, 받아 올리다, 말아올리다, 일으키다’라는 뜻의 ‘아날람바노’(ἀναλαμβάνω)에서 파생된 단어이다. 그리고 ‘아날람바노’(ἀναλαμβάνω)는 ‘위에, 한가운데로, 중앙에, 다시’라는 뜻을 가진 전치사 ‘아나’(ἀνα)와 ‘취하다, 능동적인 의미로 잡다’라는 뜻을 가진 ‘람바노’(λαμβάνω)의 합성어에서 유래된 단어로
‘위의 것을 취하다, 내용으로써의 중앙을 잡다, 새로운 것으로써의 다시 잡다’라는 본래적 의미를 포함하고 있는 것이다.
결국 ‘네스튜오’(νηστεύω)는 단순히 음식이나 음료를 끊는다는 의미보다는 그리스도이신 생명의 말씀을 취하는 것이며, 하늘 백성에게 반드시 있어야 할 생명의 양식인 말씀을 다시 잡는다는 의미가 더욱 강조되고 있음을 알아야 한다.
그래서 예수님께서도 공생애를 준비하며 진리의 말씀을 먹은 것이며, 마태복음 4장 4절의 말씀처럼 ‘사람이 떡으로만 살 것이 아니요 하나님의 입으로부터 나오는 모든 말씀으로 살 것이라’고 선포할 수 있었던 것이다.
이렇게 ‘금식’(νηστεύω)과 ‘말씀’(흐레마: ῥήμα)는 매우 밀접한 관계가 있다.
그러므로 성도에게 있어서 ‘금식’(νηστεύω)이란 하나님의 입을 통하여 나오는 ‘말씀’(ῥήμα)만이 하늘 백성들의 생명의 양식임을 알아 세상의 음식을 끊어가면서까지 적극적으로 그리고 능동적으로 그 진리의 말씀을 먹는 것을
의미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너희가 그리스도와 함께 다시 살리심을 받았으면 위의 것을 찾으라 거기는 그리스도께서 하나님 우편에 앉아 계시느니라. 위의 것을 생각하고 땅의 것을 생각하지 말라’(골3:1,2) [네스튜오(νηστεύω) 금식하다 ]
6. 교회 엑클레시아(ἐκκλησία) 헬라어 원어연구 김준남 목사
‘…하나님의 교회 곧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거룩하여지고 성도라 부르심을 입은 자들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을 부르는 모든 자들…’(고전1:2)
‘교회’로 번역된 헬라어 ‘엑클레시아’(ἐκκλησία)는 ‘집에서 공공장소로 불려나온 시민들의 모임, 예배와 종교적인 만남을 위해 모인 그리스도인들의 모임, 교회’라는 기본적인 의미를 가지고 있다. ‘엑클레시아’(ἐκκλησία)는 ‘안에서 밖으로부터, 의하여 떨어져서’라는 뜻의 ‘에크’(ἐκ)와 ‘부르다, 큰 소리로 말하다, 특별한 이름이 불리우다, 이름을 부르다’라는 뜻의 ‘칼레오’(καλέω)의 합성어에서 파생된 단어로 ‘우리가 살고있는 이 세상 안에서 이 세상 밖으로 이름이 불리워진 자’라는 의미를 포함하고 있다.
정리하면, ‘엑클레시아’(ἐκκλησία)는 눈에 보이며 십자가가 달려있는 장소적 개념에서의 건물을 말하는 것이 아니라 ‘세상에서 부름 받은 자 즉, 세상 나라에서 하늘 나라로 부름 받은 자’라는 의미이며, 이것을 바울은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내 쪽에서 보면 세상이 죽었고, 세상 쪽에서 보면 내가 죽었다’(갈6:14)라고 표현하면서 교회인 성도는 세상에 대하여 죽은 자라는 것을 분명히 말하고 있다.
뿐만 아니라 바울은 '교회'(ἐκκλησία)를 가리켜서 그리스도의 이름을 부르는 모든 자들(고전1:2)이라고 말하면서 내 말이 죽고 그리스도의 말씀만 있는 자, 그래서 그 말씀만 부르는 자로 정의하고 있다.
‘엑클레시아’(ἐκκλησία)의 히브리어 단어가 ‘카할’ (קהל)인데 파자하면 ‘파괴하고 다시 세워 진리를 배워 살아가며 진리와 함께 순종하는 실존’으로 ‘선악의 주체인 내가 완전히 죽고 그리스도로 살아 이제는 그 진리, 그 말씀에 이끌려 살아가는 자’를 의미한다.
계시록 20장 4절에서는 말씀에 이끌려 사는 자로서의 '교회'(ἐκκλησία)인 성도를 가리켜서 ‘하나님의 말씀 때문에 목 베임을 당한 자들’ 즉 ‘내 말이 죽고 그리스도의 말씀으로 된 자, 그리스도의 말씀만 말하는 자’라고 기록하고 있다. 그래서 그 말씀과 함께 지금 여기서부터 영원히 살게 된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엑클레시아’(ἐκκλησία)는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를 택하셔서 우리로 사랑 안에서 그 앞에 거룩하고 흠이 없게 하시려는 창세전 언약(엡1:4)에 의해 우리를 하나님의 성전으로 삼으시는(고전3:16) 하나님의 사랑의 마음 그 자체이며 그가 바로 성경이 말하는 진정한 의미에서의 성도인 것이다. [엑클레시아(ἐκκλησία) : 교회]
7, 권능 뒤나미스(δύναμις) 헬라어 원어연구 김준남 목사
‘오직 성령이 너희에게 임하시면 권능을 받고 예루살렘과 온 유대와 사마리아와 땅 끝까지 이르러 내 증인이 되리라 하시니라’(행1:8)
‘권능’으로 번역된 헬라어 단어 ‘뒤나미스’ (δύναμις)는 ‘할 수 있다, 가능하다, 힘이 있다’는 뜻의 ‘뒤나마이'
(δύναμαι)에서 파생된 명사형으로 ‘강한 힘, 이적적인 능력, 전능한 일’이란 의미이다.
보통 ‘무엇이든 할 수 있는 능력’이라는 의미로 알려져 많은 그리스도인들이 '능력'(δύναμις)을 얻기 위해 기도하곤 한다. 그러나 이 단어가 쓰여진 용례를 보면 숨겨진 속뜻이 있음을 알 수 있다.
성령(말씀)이 임하면 ‘권능’(δύναμις)을 받아 말씀의 증인이 되며(행1:8), 예수님께서 말씀을 가르치실 때 그러한 ‘권능’(δύναμις)이 어디서 났는지 사람들이 놀라고(마13:54, 막6:2), 스데반이 은혜와 ‘권능’(δύναμις)이 충만하여 성령으로 말하며(행6:10)…
‘권세’(엑수시아 : ἐξουσία)가 ‘하나님의 말씀을 품을 수 있는 능력’이라고 말한다면, ‘권능’(뒤나미스 : δύναμις)은 ‘하나님의 말씀을 넘겨주는 능력’으로 이해할 수 있다.
이는 헬라어 ‘뒤나미스’(δύναμις)가 히브리어로는 ‘코아흐’(כח)라고 하는데 이를 파자하면 ‘완성된 진리로서의 생명을 넘겨줌’이라는 의미를 가지고 있다는 데서 좀 더 확실하게 알 수 있는 것이다.
‘내가 너를 세웠음은 나의 능력을 네게 보이고 내 이름이 온 천하에 전파되게 하려 하였음이니라’(출9:16).
하나님께서는 하나님의 이름(말씀)을 온 천하에 전파되도록 하기 위해 모세를 세우면서 '능력'(כח, δύναμις)을 보여주신다. 모세가 받은 능력은 다름 아닌 말씀을 전하는 능력이었던 것이다.
성령(말씀)이 임했다는 것은 나의 말(율법)이 죽었다는 것을 의미한다. 그리고 하나님의 말씀을 품을 수 있는
'권세'(ἐξουσία)가 임하게 되었다는 것이며, 나아가 하나님의 말씀을 전해주는 '능력'(δύναμις)을 받았다는 것을 의미한다.
그러므로 '능력'(δύναμις)행함이란, 눈에 보이고 육신을 만족케하는 기사와 이적을 행하는 의미에서의 행함이 아니라 오히려 진리의 말씀, 생명의 말씀을 전해준다는 의미에서의 행함을 말하는 것이며 그 말씀을 통하여 그리스도로 살도록 하는데 그 목적이 있음을 알아야 한다. 그런 의미에서 성도는 날마다 '능력'(δύναμις)행함의 삶을 살아야 하는 것이다. [뒤나미스(δύναμις) 권능]
8, 권세 엑수시아(ἐξουσία) : 헬라어 원어연구 김준남 목사
‘영접하는 자 곧 그 이름을 믿는 자들에게는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권세를 주셨으니’(요1:12)
‘권세’로 번역된 헬라어 단어 ‘엑수시아’(ἐξουσία)는 ‘옳다, 합법적이다, 할수 있다’는 뜻을 가진 ‘엑세스티’
(ἔξεστι)에서 파생된 단어로 ‘권세, 특권, 자유, 초능력 인간, 영향력, 사법권, 선택할 능력, 기뻐하는 것을 할 자유,
육체적이며 정신적인 힘, 권위와 의무의 힘, 다스림과 통치할 능력’이라는 의미를 포함하고 단어이다.
그리고 ‘엑세스티’(ἔξεστι)는 동작이나 활동이 시작하는 시점이 되는 원천으로써의 ‘안에서 밖으로, ...로부터, 떨어져서’라는 뜻의 전치사 ‘에크’(ἐκ)와 ‘있다, 존재하다, 발생하다, 현존하다’의 뜻을 가진 존재동사 ‘에이미’(εἰμί)의 합성어에서 유래된 단어이다. 다시 말하면 원천에서 나와 존재한다는 의미에서 그것은 지극히 옳고 합당한 어떤 것이라는 성격을 가지고 있는 단어이다.
그런 의미에서 본다면, 성경이 말하는 ‘권세’(엑수시아: ἐξουσία)의 성경적 의미는 국어사전이 말하고 있는 사람이 소유할 수 있고 스스로 행사할 수 있다는 의미에서의 ‘권력과 세력을 아울러 이르는 말’과는 완전히 다른 차원의 의미를 가지고 있는 것이다.
다시 말하면, 성경은 동작이나 활동이 시작되기 위해 반드시 필요한 시간의 시점인 태초에(Ἐν ἀρχή) '말씀' (ὁ λόγος) 이 있었다고 기록하고 있다(요1:1). 그런 의미에서 ‘권세’(ἐξουσία)라는 단어는 피조물인 인간에게 해당되는 단어라기 보다는 ‘말씀’(ὁ λόγος)과 밀접한 관계가 있는 하나님과 관련된 단어이며 ‘그 말씀’(ὁ λόγος)이 곧 ‘권세’(ἐξουσία)라는 사실을 알 수 있다.
성도는 내가 죽고 그리스도로 사는 자이며(갈2:20), 땅에 있는 자로서 진리를 깨달아 천국을 소유하게 된 자이고 이 땅에서부터 하나님의 아들의 삶을 사는 자이다. 그러기에 예수 그리스도로 영접하여 하나님의 아들이 된 성도에게 있어서 ‘권세’(ἐξουσία)란 오직 ‘말씀이신 하나님의 아들 예수의 권세인 하나님의 말씀을 품을 수 있는 능력’을 말하는 것이다.
결코 성도가 소유하여 행하는 어떤 것이 아니라 성도 자체가 그 ‘권세’(ἐξουσία)가 된다는 의미이다. 그리고 ‘하나님의 말씀을 품을 수 있는 능력’이란 ‘하나님의 아들이기에 날마다 하나님의 말씀에 섬김을 받는 능력’을 의미하는 것이다. 그래서 그 말씀인 그 권세가 거짓 말씀인 귀신을 쫓아내고“귀신을 내쫓는 권능도 가지게 하려 하심이러라.”(막3:15), 하나님의 말씀을 가르칠(눅4:32) 수 있게 만드는 것이다. [엑수시아(ἐξουσία) : 권세]
9.구제 엘레에모쉬네(ἐλεημοσύνη ) 헬라어 원어연구 김준남 목사
‘말하되 고넬료야 하나님이 네 기도를 들으시고 네 구제를 기억하셨으니’(행10:31)
‘구제’로 번역된 헬라어 ‘엘레에모쉬네’(ἐλεημοσύνη )는 ‘동정, 자선, 가난한 자들에 대한 기부, 구호품’이란 뜻이다.그래서 이 단어를 ‘자연적인 재해나 사회적인 피해를 당하여 어려운 처지에 있는 사람을 도와줌’이라는 국어사전적 의미로 이해하여,‘구제하라’는 말씀을 그렇게 행해야 하는 것으로 이해한다.
그러나 성경의 말하는 ‘구제’(엘레에모쉬 : ἐλεημοσύνη)는 결코 그런 의미가 아니다.
‘엘레에모쉬네’(ἐλεημοσύνη)는 기본적으로 ‘긍휼, 자비’의 뜻을 가진 ‘엘레오스’(ἔλεος)에서 파생된 단어라는 사실이다. ‘긍휼, 자비’(ἔλεος)는 그 단어 자체가 ‘하나님의 속성’을 의미하는 것으로 인간에게는 나올 수 없는 것이다.
그러기에 ‘구제’(엘레에모쉬 : ἐλεημοσύνη)는 우리가 가지고 있는 어떤 것이 아닌 주어진 어떤 것이 되는 것이다. 신약성경에서 ‘엘레에모쉬네’(ἐλεημοσύνη )는 항상 진리의 흘림으로서의 ‘기도’(προσευχή) 그리고 그 기도를 통하여 받은 생명의 ‘떡’(ἄρτος)과 함께 쓰이고 있다. 마태복음 6장에서 ‘구제’(ἐλεημοσύνη)를 이야기하면서 ‘기도’(προσευχή)와 ‘생명의 떡’(ἄρτος)이신 예수 그리스도 그리고 그 보물이신 예수 그리스도를 하늘(구원받은 자, 성도)에 쌓는 것을 연결 짓고 있다.
‘구제’는 하나님이 먼저 우리에게 해 주시는 것이다. 죄로 죽은 우리를 살리는 유일한 구제품은 바로 생명의 떡인 예수 그리스도이며 진리의 말씀인 것이다. 그런 의미에서 ‘구제하라, 구제를 행하라’는 말씀은 ‘진리의 말씀이 되라(ποιέω),진리의 말씀을 주어라(ποιέω)’는 의미가 되는 것이다. 그래서 진리의 말씀을 가진 베드로가 성전미문에서 구걸하는(ἐλεημοσύνη)자에게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진리의 말씀)을 주었던 것이다(행3:3-6).
성도는 기도(προσευχή)와 ‘구제’(ἐλεημοσύνη )가 있는 자(행10:2)이다.
그러므로 성도에게 있어서 ‘구제’(ἐλεημοσύνη )는 '기도'(προσευχή)를 통하여 진리의 말씀을 받는 것이며, 그 말씀을 받은 자로서 심령이 가난한 자(프토코스 : πτωχός)에게 참 생명의 떡인 진리의 말씀을 흘려주는 것이다.
그러므로 진리의 말씀이 없이는 성경이 말하고자 하는 진정한 ‘구제’도 없는 것이다.
[엘레에모쉬네(ἐλεημοσύνη) : 구제]
10.골방 타메이온(ταμειον) : 헬라어 원어연구 김준남 목사
‘너는 기도할 때에 네 골방에 들어가 문을 닫고 은밀한 중에 계신 네 아버지께 기도하라 은밀한 중에 보시는 네 아버지께서 갚으시리라’(마6:6)
‘골방’으로 번역한 헬라어 ‘타메이온’(ταμειον)은 ‘조제자, 분배자’란 뜻을 가진 ‘타미아스’(tamias)와 ‘자르다’라는 뜻을 가진 ‘템노’(temno)에서 파생된 단어로 ‘약국, 연료실, 밀실, 저장실, 골방, 안방’의 의미를 가지고 있다.
‘큰 방의 구석 쪽에 달린 햇볕이 잘 들지 않는 작은 방’으로써의 골방 즉, ‘타메이온’(ταμειον)의 의미를 ‘세상 모든 것과 단절하고 오직 하나님과의 대화를 나눌 수 있는 공간, 기도의 공간’으로 이해한다. 좋은 해석이지만 그 속에 반드시 어떤 내용을 가지고 있어야 하는 것이다.
먼저, ‘타메이온’(ταμειον)의 의미 가운데 ‘조제자, 약국’이 있다는 것을 주의하여 볼 필요가 있다. 원래 성막에 있는 골방은 제사장들이 놋제단, 물두멍, 일곱 등대, 진설병상, 분향단 같은 성막에서 쓰는 기명들을 준비하는 조제실 ‘타메이온’(ταμειον)이다. 제사장들은 기명들 하나하나의 의미를 잘 알고 있었다. 모든 것이 하나님의 마음을 나타내는 말씀이며 곧 예수 그리스도를 상징하는 것들이다. 골방에 들어간다는 것은 하나님 앞에 나아가는 것이며, 하나님의 말씀 앞에 철저하게 내가 부인당하는 것이며, 내가 죽고 그리스도로 사는(갈2:20) 것을 의미하는 것이다.
‘타메이온’(ταμειον)에 들어가야 비로서 나의 처음자리를 알 수 있는 것이며, 하나님의 마음을 알 수 있는 것이고, 여러 기명들과 기명들의 역할을 통해서 말씀의 섬김을 받는 온전한 하나님의 백성이 될 수 있는 것이다. 그러기에 단순히 ‘기도하는 공간’이라기 보다는 ‘하나님의 자녀로 온전히 조제함을 받는, 말씀의 섬김을 받으며 그 말씀을 품는 공간’인 것이다.
마태복음 6장 6절에 나오는 ‘은밀한 중에 계신, 은밀한 중에 보시는’에서 ‘은밀한’은 헬라어 단어 ‘감취진, 숨겨진, 비밀'이라는 의미를 가지 ‘크뤼프토스’(κρυπτός)이다. 감춰진 하나님은 말씀을 통해서만 알 수 있다. 말씀을 통해서 감취어진 하나님의 마음을 알 수 있다. ‘타메이온’(ταμειον)은 말씀이 있는 곳이다. 그리고 말씀의 섬김을 받는 곳이며, 하나님의 마음을 알 수 있는 곳이다.
70인역에서 ‘타메이온’(ταμειον)으로 번역된 히브리어가 ‘둘러싸다, 포위하다, 골방으로 들어가다’라는 ‘헤데르’
(חדר)이다. 파자하면 ‘완성된 진리로서의 생명이 흘러 나가기 시작하는 곳’이라는 뜻으로 ‘하나님 앞에서 인간의 처음자리를 확인하는 곳이며, 말씀인 생명을 받는 곳’이다. 그래서 성도는 ‘골방'(ταμειον)에 들어가 기도(προσεύχομαι)해야 하는 것이다. [‘타메이온’(ταμειον) ‘골방’]
11.공경하다 티마오(τιμάω) 헬라어 원어연구 김준남 목사
‘네 아버지와 어머니를 공경하라 이것은 약속이 있는 첫 계명이니’(엡6:2)
여기서 ‘공경하라’고 번역된 헬라어 단어가 ‘티마오’(τιμάω)로써 ‘높이 평가하다, 가치를 두다, 존경하다, 공경하다’라는 뜻을 가지고 있다. 그리고 ‘공경하라’의 국어사전적 의미는 ‘공손히 받들어 모시다’이다. 그런 의미에서 부모를 마땅히 공경해야 하며 그것은 이 땅에서 부모에게 마땅히 해야 할 도리이다.
그러나 이 말씀을 단지 윤리, 도덕적 차원에서만 이해해서는 안된다. 성경적 의미를 알기 위해서는 부모를 공경하라는 신약성경의 말씀 (마15:4,6 ; 19:19, 막7:10 ; 10:19, 눅18:20, 요5:23 : 8:49)이 인용된 구약성경을 보아야 하며 특히 부모와 공경을 함께 살펴야 한다.
70인역에서 ‘티마오’(τιμάω)를 번역한 히브리어는 ‘카바드’(דבכ)이며 나쁜 의미에서 ‘무겁다, 괴롭다, 힘들다, 짐스럽다, 누를 끼치다’라는 뜻과 좋은 의미에서 ‘다수의, 부유한, 영화롭게 하다, 명예롭다, 영광스럽다’라는 서로 상반되는 뜻을 가지고 있다.
그리고 ‘카바드’(דבכ)가 ‘부하다’(창 13:2), 중하다(창 19:20), 존귀하다(창 34:19),어두워지다(창 48:10), 무겁게하다(출 5:9), 완강하다(출 8:11), 영화롭게 하다(출 14:4,17,18)’등 다양한 뜻으로 쓰여지는데, 하나님, 신, 부모라는 단어와 함께 쓰일 때 ‘공경하다’라는 뜻으로 번역이 되고 있다(출20:12, 말1:6, 단11:38, 잠 3:9).
‘카바드’(דבכ)를 파자하면, ‘카프’(כ)는 ‘잡기, 주기, 열기, 손바닥, 하나님의 것을 우리의 것으로 전환’, ‘베트’(ב)는 ‘집,성전, 하나님께서 거하시는 진리의 그 집안’, ‘달렛’(ד)은 널리 퍼뜨리기, 뿌리다, 구분하다, 문과 열림’이다. 정리하면, ‘하나님의 것을 우리의 것으로 전환해준 하나님께서 거하시는 진리의 그 집을 구분하여 퍼뜨리다’라는 의미를 가지고 있다.
그리고 '부'(父,아브 : אב)는 ‘하나님의 성전’, ‘모’(母, 엠 : אם)는 ‘하나님의 진리, 말씀’을 의미한다.
결국 ‘부모를 공경하라’는 말씀은 문맥상 ‘하나님의 성전과 하나님의 말씀을 너의 것으로 바꾸어 너를 구분하여 성전을 삼아라’라는 의미인데, 하나님은 우리가 그렇게 할 수 없는 존재임을 아시기에 ‘부모를 공경하라’는 말씀은 지켜야 할 ‘율법의 계명’이 아니라 하나님의 창조의 계획안에 있는 ‘언약의 말씀’으로써 ‘하나님의 성전과 하나님의 말씀을 너의 것으로 바꾸어 너를 구분하여 성전을 삼을 것이다’(출20:12, 고전3:16)라는 성경적 의미를 가지고 있는 것이며 하나님의 열심으로 나로 성전 삼으시려는 하나님의 구원의 은혜가 언약의 말씀안에 담겨져 있는 것이다.
[티마오(τιμάω) 공경하다]
12. 구하다 아이테오(αἰτέω) :헬라어 원어해석(김준남 목사)
구하다로 번역된 헬라어‘아이테오’(αἰτέω)‘구하다, 묻다, 간청하다, 요청하다, 갈망하다, 바라다, 요구하다’라는 의미의 ‘아이테오’(αἰτέω)는 빚을 진 자에게 당연하고도 마땅하게 요구하는 것이다. 이 단어는 '기도'(프로슈코마이 - προσεύχομαι)가 무엇인지를 알아 하나님이 자기 백성들에게 반드시 주시겠다고 하는 그것(나의 원함이 아닌 하나님의 원함)을 구하는 것이다.
누가복음 11장 13절에 보면, 너희 하늘 아버지께서 구하는 - ‘아이테오’(αἰτέω) - 자에게 성령 – 프뉴마 ‘하기오스’( πνεύμα ἅγιος) - 을 주시지 않겠느냐고 말씀하고 있다. 성령은 진리의 영(요14:17), 진리의 말씀을 가리키는 것이다. 성도가 유일하게 반드시 구해야 할 기도가 바로 ‘아이테오’(αἰτέω)의 기도이다.
그러나 우리 기도의 대부분이 하나님의 원함을 구하는 기도 보다는 나의 원함을 구하는 기도이다. 나의 원함을 구하는 것을 ‘에로타오’(ἐρωτάω)의 기도라 한다. ‘에로타오’(ἐρωτάω)라는 단어는 기본적으로 ‘심문하다, 질문하다, 묻다, 간청하다, 원하다, 탄원하다, 기도하다’의 의미를 가진다. 단순히 사람과의 관계에서 질문하거나 부탁하는 의미에서 쓰여지고 있으며, 그것은 이 땅에서의 필요한 것, 나의 원함을 구한다는 의미로 이해할 수 있다.
‘에로타오’(ἐρωτάω)는 이 땅에서 필요한 것이다.
그러나 하나님을 향하여 기도할 때 ‘에로타오’(ἐρωτάω)의 기도로 하는 것은 자기의 원함만을 간절히 구하여 자아확장의 기회로 만드는 것이기에 무익한 기도요 악한 기도가 되는 것이다.성도의 기도는 하나님께서 백성들에게 반드시 주시겠다고 하신 그것을 구하는 것이고, 그것 없이는 오늘을 살 수 없습니다. 라는 진리의 목마름으로 구하는 것이며 그래서 성령, 진리의 말씀을 받아 하나님의 아들의 삶을 누리는 ‘아이테오’(αἰτέω)의 기도여야 하는 것이다.‘아버지의 나라가 오게 하시며 아버지의 뜻이 하늘에서와 같이 땅에서도 이루어지게 하소서’(마6:10)
[아이테오(αἰτέω) 구하다]
13. 가난 프토코스( πτωχός ) 헬라어 원어연구 김준남 목사
이 단어는 ‘심령이 가난한 자는 복이 있나니..’(마5:3)에서‘가난’으로 번역되었다.
‘가난’으로 번역된 헬라어는 ‘프토코스’(πτωχός)와 ‘페네스’(πένης)가 있다. 프토코스의 가난이 절대적 가난이라면 페네스는 상대적 가난이다. 절대적 가난이란 ‘절대로 없어서는 안될 그것이 없는’, ‘반드시 있어야 할 그것이 없는’ 상태로 ‘생명, 진리의 말씀’을 의미한다.
반면에 ‘페네스는 페노’(peno)에서 파생된 단어로 ‘일상생활에 필요한 것이 없는’ 상태로 불편하지만 없어도 생명에는 지장이 없는 가난을 의미한다.성경에 나오는 ‘가난한 자, 가난한 자에게 복음을…,가난한 자를 부요케…’등 가난이라고 번역된 헬라어 원어는 프토코스이다. 다시말하면 성경은 세상에서의 굶주림이나 생활의 어려움으로 인한 가난한 자 보다는 진리의 말씀, 생명의 말씀이 없어 죽은 자, 프토코스의 ‘가난’한 자에 대해서 말씀하고 있는 것이다. 생명의 말씀에 대한 목마름에 대해서 시편기자는 ‘하나님이여 사슴이 시냇물을 찾기에 갈급함 같이 내 영혼이 주를 찾기에 갈급하니이다(시42:1)’라고 고백하고 있다.
절대적 가난을 헬라어로 ‘프토코스’(πτωχός)라고 쓴다면 히브리어로는 ‘아나브’(ענו)로 쓴다. 아나브는 ‘가난한, 비천한, 겸손한, 온유한’의 의미로 쓰인다.
‘이 사람 모세는 온유함이 지면의 모든 사람보다 더하더라(민12:3)’
모세의 온유함(아나브)이란 말씀 없이는 살 수 없어 말씀으로만 가득한 상태를 말한다. 살인을 했던 모세를 세상 적 윤리의 기준으로 온유한 자라고 볼 수는 없을 것이다. ‘말씀으로 충만한, 오직 말씀에 이끌려 사는 자’ 라는 의미에서 모세를 온유한 자라고 부르는 것이다.
그렇다면 나는 진리의 말씀에 목말라하는 프토코스의 가난한 마음이 있는가?
아니면 생활의 필요에만 목말라하는 페네스의 가난한 마음이 있는가?
‘명절 끝날 곧 큰 날에 예수께서 서서 외쳐 이르시되 누구든지 목마르거든 내게로 와서 마시라. 나를 믿는 자는 성경에 이름과 같이 그 배에서 생수의 강이 흘러나오리라 하시니'(요7:37,38)
생명의 말씀 되시는 예수님에게 와서 그를 믿는 자는 그 배에서 생수의 강, 생명의 말씀이 넘치게 된다.내 말이 아닌 생명의 말씀이 흘러나오는 자가 바로 예수를 믿는 자이고 온유한 자이며 심령이 가난한(πτωχός) 자, 성도인 것이다. [프토코스( πτωχός ) - 가난]
14.기도하라 프로슈코마이(προσεύχομαι) :헬라어 원어연구 김준남 목사
누가복음 11장 2절에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기도할 때에 이렇게 하라’고 하시면서 기도를 가르쳐주신다. 이때 쓰인 ‘기도하라’는 단어가 헬라어로 ‘프로슈코마이’(προσεύχομαι)이다. ‘프로슈코마이’(προσεύχομαι)는 ‘프로스’
(προσ : 향하여)와 ‘유코마이’(εύχομαι : 원하다)의 합성어로 ‘…를 향하여 원하다’라는 뜻이 된다.
기도란 무엇인가? 국어사전적 의미로는 ‘인간보다 능력이 뛰어나다고 생각하는 어떠한 절대적 존재에게 빎, 또는 그런 의식’이다. 그래서 기독교인들도 기도할 때 인간보다 뛰어나며 절대적 존재인 하나님께 나의 원함을 들어달라고 기도한다.
그러나 성경적 기도의 의미는 국어사전적 기도의 의미와는 사뭇 거리가 멀다. 성경에서 인간을 무엇이라고 정의하고 있는지를 먼저 알아야 한다. 골로새서 3장 3절에서는 ‘이는 너희가 죽었고…’, 에베소서 2장 1절에서는 ‘허물과 죄로 죽었던 너희를’이라고 말하고 이다. 죽었다는 의미는 nothing(아무것도 없어)즉, 하나님의 은혜가 아니면 존재도 아니다.라는 말이다. ‘죽은자, 아무것도 아닌자’는 ‘원함’이라는 것이 있을 수 없다. 있다면 아직 죽은자가 아닌 것이다. 그러기에 우리가 하나님을 향하여 하는 기도가 있기 위해서 반드시 전제되어야 할 것은 '죽은 우리를 향한 하나님의 원함이 있어야 한다는 것'이다.
하나님의 원함, 하나님의 뜻은 우리를 살리는 생명의 양식인 진리의 말씀인 것이다. 이렇게 우리를 향한 하나님의 원함이 있고 은혜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원함이 무엇인지 알아 하나님의 뜻인 진리의 말씀을 구하며 진리의 말씀에 목말라하는 자들에게 진리의 말씀을 전해주는 이 모든 것을 기도 - ‘프로슈코마이’(προσεύχομαι) – 라 한다.
예수님께서 광야에서 시험받으실 때 ‘사람이 떡으로만 살 것이 아니요 하나님의 입으로부터 나오는 모든 말씀으로 살 것이라’고 말씀하고 있다. 떡은 이 땅에서 한시적으로 필요하지만 없어질 우리의 원함을 상징하고 있으며, 말씀은 죽은 우리가 영원히 사는 금생과 내생에 반드시 있어야할 진정한 양식을 상징하고 있다. 이제 나의 원함을 구하는 어리석은 자가 아니라 '하나님의 원함, 진리의 말씀, 생명의 양식을 구하는 지혜로운 자가 되야 할 것'이다.
[프로슈코마이(προσεύχομαι) : 기도하라]
15. 기근 리모스(λιμ??) : 기근 (scarcity) 헬라어 원어해석(김준남 목사)
‘민족이 민족을, 나라가 나라를 대적하여 일어나겠고 곳곳에 ‘기근’과 지진이 있으리니’(마24:7)
‘기근’으로 번역된 헬라어 ‘리모스’(λιμ??)는 ‘떠나다, 실패하다, 결석하다, (원하는 것이)결핍되다, 부족하다, 두고 가다, 가지지 않다’의 뜻을 가진 ‘레이포’(λε?πω)에서 파생된 것으로 알려진 단어로 ‘(식량이)거의 없음, 부족, 기근
, 배고픔, 부족한 수확’의 의미를 가지고 있다.
70인 역에서 ‘리모스’(λιμ??)로 번역된 히브리어는 ‘배고픔, 부족, 결핍, 기근, 굶주림, 기아’의 뜻을 가진 '라아브’
(???)인데 이 단어는 ‘나쁜, 사악한, 해로운, 재난’의 뜻을 가진 ‘라아’(??)와 ‘집, 성전’의 뜻을 가진 ‘베트’(?)와 결합되어 ‘사악한 집, 재난의 집’이라는 의미를 가지고 있다. ‘라아’(??)를 파자하면 ‘눈에 보이는 것으로 시작하다’의 뜻을 포함하고 있어 결국 ‘악’이라는 것이 단순히 윤리 도덕적인 악을 말하는 것이 아니라 숨겨진 내용으로써의 진리의 말씀을 알아보지 못하고 눈에 보는 그대로 보고 판단하는 것을 말한다고 볼 수 있다. 이런 의미에서 ‘리모스’
(λιμ??)가 말하는 마지막 때에 나타나는 ‘기근’의 성경적 의미는 단순히 국어사전이 정의하고 있는 ‘흉년으로 먹을 양식이 모자라 굶주림’이 아니라, ‘하나님의 말씀이 없음’이 되는 것이다.
만물은 말씀으로 말미암아 지은 바 되었고 그래서 지은 것이 하나도 말씀이 없이는 된 것이 없다(요1:2). 그러나 선악과를 먹고 선악의 주체로서 하나님 처럼 된 인간은 만물 가운데 숨겨진 생명의 말씀을 '보지'(호라오 : ?ρ?ω) 못하고 눈에 보이는 그대로 보고 판단하여 더 이상 진리의 말씀을 보지 못하는 상태 그래서 하나님의 말씀이 없는 상태인 영적인 의미에서의 ‘기근’(λιμ??)의 상태가 되버린 것이다. 이렇게 성경은 하나님 말씀이 없다는 의미에서 ‘기근’(λιμ??)에 대해서만 말하고 있는 단지 육신의 양식이 없어 굶주린 상태의 기근을 말하고 있지 않다는 것이다.
구약의 아모스 선지자는 공포와 두려움 보다도 더 무서운 ‘기근’의 심판을 예언하면서 그것이 바로 하나님 말씀의 ‘기근’임을 말하고 있다(암8:11,12). 하나님의 말씀이 없다는 것은 그 자체로 영원한 사망을 의미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오늘날도 하나님께서 만나로 우리를 먹이시는 것은 사람이 떡으로만 사는 것이 아니요 여호와의 입에서 나오는 모든 말씀으로 사는 줄을 알도록 하는데 있는 것이다(신8:3).
그러므로 성도는 ‘나는 하나님의 말씀이 없이는 생명 없는 자요, 존재도 아닙니다. 나 ‘기근’(λιμ??)의 상태 맞습니다. 그래서 그 말씀에 목말라 합니다’라고 고백하는 자 이며, 그렇게 진리의 말씀에 갈급한 가난한 자(프토코스 : πτωχ??)가 되어 이 세상에서 보여지는 모든 것들 속에 숨겨진 하나님의 말씀을 깨달아 날마다 말씀으로 섬기시는 하나님의 섬김을 받으며 그 말씀에 이끌려 가는 진정으로 풍성한 삶을 사는 자이다.
[리모스(λιμ??) : 기근 (scarcity)]
16.교훈하다 솝흐로니조(σωφρον?ζω):교훈하다 헬라어 원어해석(김준남 목사)
‘그들로 젊은 여자들을 교훈하되 그 남편과 자녀를 사랑하며’(딛2:4)
‘교훈하다’로 번역된 헬라어 ‘솝흐로니조’(σωφρον?ζω)는 ‘건전한 마음의 제정신의, 자기 의식이 있는, 욕망이나 충동을 억누르는, 자제하는, 삼가는, 마음이 안정된, 분별력 있는, 근신하는’ 이라는 뜻을 가진 형용사 ‘솝흐론’
(σ?φρων)에서 파생된 단어로 ‘건전한 마음을 만들다, 의식을 회복하다, 억제하다, 제자로 삼다, 책임지게 하다,
훈계하다, 진지하게 권하다, 교훈하다’의 의미를 가지고 있다. 그리고 ‘솝흐론’(σ?φρων)은 ‘구원하다, 안전하고 튼튼하게 지키다,위험과 파괴로부터 구출하다, 완전하게 만들다, 보존하다’의 뜻을 가진 ‘소조’(σ?ζω)와 ‘감정, 정신, 지혜’의 뜻을 가진 ‘프흐렌’(φρ?ν)의 합성어에서 파생된 단어이며, 여기에서 파생된 부사형인 ‘분별력 있는 마음을 가지고, 냉정히, 절도 있게, 적절하게, 건전한 마음을 가지고, 신중히’의 뜻을 가지면서 ‘근신함’으로 번역된(딛 2:12 ) ‘솝흐로노스’(σωφρ?νω?)가 있다.
정리하면, ‘솝흐로니조’(σωφρον?ζω)가 말하는 ‘근신하다, 교훈하다’는 국어사전이 정의하고 있는 ‘말이나 행동을 삼가고 조심하다’는 뜻의 ‘근신(謹愼)하다’의 의미도 아니고 단순히 ‘가르치고 타이르다’는 뜻의 ‘교훈(敎訓)하다’의 의미도 아닌 두 마음을 한 마음인 하나님 마음으로 갖게 하는 것이며, 허물과 죄로 죽은 어두움의 상태에서 그리스도의 생명의 말씀을 통하여 빛으로 회복시키는 것이라는 성경적 의미가 있는 것이다. ‘솝흐로니조’(σωφρον?ζω)에서 파생된 명사형인 ‘사리분별을 하는 마음, 절도와 자제력을 가지도록 훈계함, 근신하는 마음’의 뜻을 가진 ‘솝흐로니스모스’(σωφρονισμ??)라는 단어이다.
신약성경에서 유일하게 한번만 나오는 이 단어의 용례인 ‘하나님께서는 우리에게 두려움의 영을 주지 아니하시고 권능과 사랑과 건전한 생각의 영(σωφρονισμ??)을 주셨느니라’(딤후1:7 : 현대인의 성경)고 기록되어 있어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생명의 말씀, 진리의 말씀을 마음에 품게 해 주셨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성도는 예수님께서 ‘내가 곧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니’(요14:6)라고 하신 말씀에 ‘네, 맞습니다. 나는 길, 진리, 생명 아닙니다’를 고백하며 참된 진리에 목말라 구하므로(아이테오) 하나님의 은혜로 거주 주어지는 그 생명의 말씀을 품은 자이며, 나아가 아직 말씀이신 그리스도를 신랑으로 만나지 못한 자들에게 그 진리의 말씀을 교훈함으로(σωφρον?ζω) 진정한 남편되시는 그리스도를 사랑하고 하나님의 자녀를 사랑하도록 가르치는 자로서의 사명이 있는 것이다.
[솝흐로니조(σωφρον?ζω) : 교훈하다]
17.강해지다 크라타이오오(κραται?ω) :헬라어 원어해석(김준남 목사)
‘깨어 믿음에 굳게 서서 남자답게 강건하라’(고전16:13)
‘강건하다’로 번역된 헬라어 ‘크라타이오오’(κραται?ω)는 ‘힘있는, 강력한’의 뜻을 가진 형용사 ‘크라타이오스’
(κραται??)에서 파생된 단어로 ‘힘이 부여되다, 힘이 강화되다, 강해지다, 강하게 되다, 강화시키다, 강하게 만들다’의 의미를 가지고 있다. 그리고 ‘크라타이오스’(κραται??)는 ‘세기, 힘, 권세, 능력, 지배권, 권능, 통치’의 뜻을 가진 명사 ‘크라토스’(κρ?το?)에서 유래되었으며, ‘크라토스’에서 파생된 동사 ‘크라테오’(κρατ?ω)는 ‘힘을 쓰다, 강하다, 소유하다, 붙잡다, 고수하다, 억제하다, 간직하다, 획득하다’의 뜻이다.
‘크라타이오오’(κραται?ω)로 번역된 히브리어는 ‘하자크’(???)인데 ‘달라붙다, 잡다, 강하다, 압도하다, 용기를 북돋우다, 견고하다, 강팍하다, (사역동사로)강하게 하다, 견고하게 되다, 치료하다, 돕다, 수선하다, 강팍케하다, 굳세게 하다’라는 뜻으로 이를 파자하면 ‘울타리 안의 악 또는 생명을 무기삼아 파괴하고 다시 세우다’라는 의미를 가지고 있다. 그래서 하나님이 여호수아에게 ‘마음을 강하게 하라’(???)고 했을 때는(수1:18)는 ‘마음에 참 생명을 무기 삼아 자신의 거짓 말을 파괴하고 하나님의 진리의 말씀으로 다시 세우라’는 말씀으로 이해할 수 있고, 반대로 ‘바로의 마음이 강팍하여(???)’라는 말은 ‘마음에 악을 무기 삼아 진리의 말씀을 파괴하고 하나님 처럼 된 자신의 말로 다시 세워’라는 뜻으로 이해할 수 있는 것이다.
이것은 ‘헤트’(?)라는 알파벳이 ‘울타리’라는 원래 의미를 가지고 ‘죄, 잘못, 생명’이라는 서로 상반된 의미로 성경에서 쓰이고 있기 때문이다. 결국 무엇을 붙잡느냐(크라테오:κρατ?ω)에 따라서 서로 상반된 결과를 가져오게 된다. 즉, 하나님의 말씀을 붙잡으면 생명으로 가득한 진리로 강하게 되는 것이고, 자신의 말을 붙잡으면 악으로 가득한 비진리로 강팍케 되는 것이다.
이런 의미에서 ‘남자답게 강건하라(κραται?ω)’(고전16:13)는 말씀은 남자답게(안드리조마이:?νδρ?ζομαι ? ‘남편, 씨’라는 뜻의 ‘아네르:?ν?ρ’에서 파생된 단어로 말씀이신 예수를 상징) 즉, 말씀을 품고 있는 바로 그 말씀이신 예수님 처럼 진리의 말씀에 붙잡힌 자가 되라는 말씀인 것이다. 뿐만 아니라 예수님의 어린 시절을 표현하고 있는 ‘아이가 자라며 강하여지고(κραται?ω)’ (눅1:80)(눅2:20)로 표현된 것도 ‘하나님의 말씀에 붙잡혀 그 말씀으로 충만케 되고’고 이해 할 수 있다. 그러므로 성도는 선악의 주체로써의 내 말이 완전히 파괴되고 하나님의 말씀인 생명의 말씀으로 다시 세워져 그 진리의 말씀에 붙잡혀(κρατ?ω) 이끌려가므로 진정으로 날마다 강건해지는 (κραται?ω)자이다. [크라타이오오(κραται?ω) : 강해지다]
18. 기쁨 카라(χαρ?) : 헬라어 원어해석(김준남 목사)
‘지금 내가 아버지께로 가오니 내가 세상에서 이 말을 하옵는 것은 그들로 내 기쁨을 그들 안에 충만히 가지게 하려 함이니이다’(요17:13)
‘기쁨’으로 번역된 헬라어 ‘카라’(χαρ?)는 ‘즐거워하다, 기뻐하다, 잘 되다, 번성하다, 안부를 묻다, 인사하다, 축하하다, 평안하다, 행복하다’라는 뜻의 ‘카이로’(χα?ρω)에서 파생된 단어로 ‘유쾌함, 기쁨, 기쁨의 원인’의 의미를 가지고 있다. 그리고 신약성경에서 ‘카라’(χαρ?)는 60회, ‘카이로’(χα?ρω)는 77회라는 다른 어떤 단어보다도 빈도수가 높게 사용되었다는 점에서 성경은 ‘기쁨의 책’이라고 부르기도 하는 것이다.
일반적으로 ‘기쁨’이라는 단어가 ‘욕구가 충족되었을 때의 흐뭇하고 흡족한 마음이나 느낌’으로 정의된 국어사전적 의미를 생각하기 쉽다. 그러나 그 ‘기쁨의 원천’을 이 세상에서는 찾을 수 없는 것이기에 ‘기쁨’의 성경적 의미는 이 세상에서 사람들이 정의해 놓은 뜻과는 많은 차이가 있을 수 밖에 없다는 사실이다.
기쁨으로 번역된 대표적인 히브리어 명사는 ‘씸하’(????)인데 ‘기쁨, 환희, 유쾌, 즐거움, 즐거운 결과, 행복한 결과’등으로 번역되고 있다.
이를 파자하면 ‘분석된 하나님의 말씀을 생명으로 깨달아 진리로 살아가는 실존’이라는 의미로 ‘카라’(χαρ?)의 성경적 의미는 하나님의 진리의 말씀, 생명의 말씀이 있기에 누구도 빼앗을 수 없고(요 16:22) 어떠한 상황과 여건에도 결코 흔들릴 수 없는 영적 당당함을 내포하고 있는 ‘영원한 기쁨’이라 할 수 있다.
세례요한은 ‘신부를 취하는 자는 신랑이나 서서 신랑의 음성을 듣는 친구가 크게 기뻐하나니 나는 이러한 ‘기쁨’
(χαρ?)으로 충만하다’(요3:29)고 고백하고 있다. 이것은 진리의 말씀을 품고 있기에 그 말씀을 들을 수 있는 ‘기쁨’이 있다는 것이며, 그래서 진정한 ‘기쁨’이 되시는 말씀 육신이신 예수님을 흥하여야 하고 참 ‘기쁨’이 아닌 나는 쇠하여야 한다고 말하고 있는 것이다(요3:30).
바울과 바나바가 하나님의 말씀을 담대히 전할 때 이방인들이 듣고 기뻐하여(χα?ρω) 하나님의 말씀을 찬송하며 영생을 주시기로 작정된 자는 다 믿었으며(행13:48), 핍박가운데서도 ‘기쁨’(χαρ?)과 성령이 충만하였던 것이다(행13:52).
이와 같이 예수님은 바로 그 ‘기쁨’(χαρ?)이 우리 안에 차고 넘치기를 원하시며(요17:13), 마지막 때에 주인의 즐거움(χαρ?)에 참여할 것을 원하신다. 그래서 우리에게 오늘도 말씀으로 섬기심은 우리 안에 말씀을 품은 그 ‘기쁨’
(χαρ?)이 충만하게 하려는 것이다(요15:11). 그러므로 성도는 오늘도 진리의 말씀을 구하여(아이테오 : α?τ?ω) 생명의 말씀을 품은 자로서 삶의 현장에서 당당함의 그 ‘기쁨’(χαρ?)으로 충만하여(요16:24) 살아가는 자이며 그러기에 항상 기뻐할(χα?ρω) 수 밖에 없는 자인 것이다. [카라(χαρ?) : 기쁨]
19.깨어있다 그레고류오(γρηγορε?ω):깨어있다 헬라어 원어해석(김준남 목사)
‘그러므로 깨어 있으라 어느 날에 너희 주가 임할는지 너희가 알지 못함이니라’(마24:42)
‘깨어 있다’로 번역된 헬라어 ‘그레고류오’(γρηγορε?ω)는 ‘(문자적으로 잠에서) 깨우다, (죽음에서) 눈을 뜨게 하다, (병에서 또는 누운 것에서)일어나게 하다, 나타나게 하다, 선동하다, 건축하다, 자리를 차고 일어나다, (상징적으로 불분명, 비활동, 파멸, 비존재에서 다시)일어나다, 들어올리다’의 뜻을 가진 ‘에게이로'(?γε?ρω)에서 파생된 단어로 ‘깨어 있다, 지켜보다, (문자적으로 혹은 상징적으로)정신차리다, 엄하게 정성을 기울이다, 신중하다, 경계하다, 주의하다’라는 의미를 가지고 있다.
‘그레고류오’(γρηγορε?ω)라는 단어는 누가복음에는 1회(눅12:37)가 사용되고 마태복음과 마가복음에서는 각각 6회가 사용되어지고 있는데 그 용례를 살펴보면, 그리스도의 재림을 앞에 두고 심판의 때를 의미하는 마지막 때에 어떻게 준비해야 할 것인가에 대하여 가르쳐주는 뜻으로 집중적으로 쓰이고 있다. 그리고 이것은 영원한 죽음과 생명을 결정 짓는 중대한 명령이 되는 것이며 하나님이 반드시 깨우시겠다는 약속이기도 한 것이다.
‘그런즉 깨어 있으라(γρηγορε?ω) 너희는 그 날과 그 때를 알지 못하느니라’(마25:13) ‘그러므로 깨어 있으라(γρηγορε?ω) 집 주인이 언제 올는지 혹 저물 때일는지, 밤중일는지, 닭 울 때일는지, 새벽일는지 너희가 알지 못함이라’(막13:35) 성경은 인간을 ‘허물과 죄로 죽은 자’(엡2:1)로 말하고 있으며 또한 죽은 자를 잠자는 자(고전 15:2 0)로 표현하고 있다.
그것은 선악과를 먹고(창3:6) 선악의 주체가 되어 하나님 처럼의 삶을 살아가는 인간의 실존을 말하는 것으로 ‘반드시 죽으리라’(창2:17)는 말씀대로 죽어 있는 상태를 말하는 것이며 동시에 진리의 말씀으로 완성해야 하며 진리의 말씀인 그리스도로 살리겠다는 하나님의 언약의 말씀이기도 한 것이다.
그래서 참 빛이 되시는 그리스도를 알아보지 못하는 어두움(요1:5), 진리의 말씀을 보지 못하는 소경(마23:19), 생명의 말씀을 담지 못하는 혈루병자(눅8:43), 진리의 말씀이 없어 말씀에 이끌려 살아가지 못하여 수족을 제대로 가누지 못하는 중풍병자(막2:9)등으로 표현하고 있는 것이다.
여기가 바로 인간의 처음 자리이며 여기에서 자신의 모습을 보며 애통해 하며(마5:4) 하나님의 생명의 말씀에 목말라할 때(마5:3), 하나님의 은혜의 선물인 그리스도를 통하여 그가 죽은 자 가운데서 다시 살아나사(?γε?ρω)잠자는 자의 첫 열매가 되시므로 참 생명을 얻게 되는 것이다.
그러므로 성도는 자신의 처음 자리를 깨달아 오직 하나님의 은혜로 사망을 통과하여 생명 안으로 들어간(에크 투 다나투스 에이스 텐 조엔 : ?κ το? θαν?του ε?? τ?ν ζω?ν)진정으로 깨어있는(γρηγορε?ω)자인 것이다. 그래서 이제는 이 땅의 삶 가운데에서 ‘내가 죽고 그리스도로 살아야 하는 것’(갈2:20)이며, 사도 바울의 고백처럼 ‘나는 날마다 죽노라’의 삶이 경험되어지는 그러한 의미에서의 ‘깨어있는’ (γρηγορε?ω) 삶을 살아야 하는 것이다.
[그레고류오(γρηγορε?ω) : 깨어 있다]
20.거듭, 다시 아노덴(ἄνωθεν) :김준남목사의 단어연구
‘예수께서 대답하여 이르시되 진실로 진실로 네게 이르노니 사람이 거듭나지 아니하면 하나님의 나라를 볼 수 없느니라’(요3:3)
‘거듭’으로 번역된 헬라어 ‘아노덴’(ἄνωθεν)은 ‘위에, 위로, 높이, 꼭대기에, 가장자리에, 위를 향하여, 이전으로’
라는 뜻의 ‘아노’(ἄνω)에서 파생된 단어로 ‘위로부터, 처음부터, 새로, 다시, 높은 곳에서부터, 새롭게’라는 의미를 가지고 있다.
그리고 부사형인 ‘아노’(ἄνω)는 ‘반대하여, 마주보고, 대신에, 보상, 대치, 상응, 앞에’의 의미를 가진 전치사 ‘안티’
(ἀντί)에서 유래되었다.‘다시 만들다, 다시 태어나다, 새롭게 태어나다’의 뜻을 가진 ‘아나겐나오’(ἀναγεννάω)라는 단어가 ‘예수 그리스도가 죽은 자 가운데서 부활하심으로 말미암아(벧전1:3) 그리고 썩지 아니할 씨로 된(벧전 1:2 3)’이라는 거듭날 수 있게 된 근거에 강조점이 있다면, ‘겐나오 아노덴’(γεννάω ἄνωθεν)은 ‘아래를 상징하는 땅적 차원이 아닌 하늘적 차원의 위로부터(약3:15), 육적 차원인 인간의 몸이 아닌 영적 차원인 물과 성령으로부터(요3:5)' 라는 거듭남의 근원에 강조점이 있다.
이것은 위로부터의 ‘거듭’(ἄνωθεν) 난다는 것이 이 땅에서의 율법으로는 될 수 없으며 오직 새로 지으심을 받아야 함을 말하는 것이며(갈6:15), 세상에 대해서 죽고 그리스도 안에서 살게 된 것이고(갈6:14) 결국 새로운 피조물로써 땅적인 이전 것은 사라지고 새 것이 된 것(고후5:17)을 의미하는 것이다.
이것은 유한하며 없어질 이 세상으로부터 구할 수 없는 영원한 것으로 써의 온갖 좋은 은사와 온전한 선물이 다 위로부터(ἄνωθεν)빛들의 아버지께로부터 내려오기(약1:17) 때문인 것이다.그래서 성경은 위로부터(ἄνωθεν)난 자를 ‘하나님께로부터 난 자’(요 1:13)(요일3:9)(요일5:1)라고 표현하고 있는 것이다.
그런데 누구보다도 하나님을 잘 알고 또한 하나님의 말씀을 잘 지킨다는 유대인의 관원이며 또 바리새인이고 공회(Sanhidrin)의원이었던 니고데모는 ‘거듭(ἄνωθεν)난다’라는 것이 ‘하나님께로부터 난다’라는 것을 의미한다는 사실을 몰랐다.
그 이유에 대해서 성경은 그가 예수님이 행한 하늘적 차원을 알아보라고 준 땅적 차원의 눈에 보이는 ‘표적’(세메이온:σημεῖον)을 표피적으로 보고 믿었기 때문이라고 말하고 있다(요3:2).그러므로 성도는 땅적 차원의 구습을 따르는 옛 사람을 벗어 버리고 하나님이 원천이 된 위로부터의 ‘거듭’(ἄνωθεν)남으로 새 사람을 입은 자이다(엡4:22-24). 그것은 곧 하나님의 은혜로 그리스도와 함께 죽었고 이제는 그리스도와 함께 사는 것(롬6:8)을 말하는 것이며 이 모든 것은 우리로 새 생명 가운데서 하나님의 아들로 영원히 살도록 하는 데 그 목적이 있는 것이다(롬6:4).
[아노덴(ἄνωθεν) : 거듭, 다시]
21.거하다 스케노오(σκηνόω) : 거하다 헬라어 원어해석(김준남 목사)
‘말씀이 육신이 되어 우리 가운데 거하시매 우리가 그의 영광을 보니 아버지의 독생자의 영광이요 은혜와 진리가 충만하더라’(요1:14)
‘거하다’로 번역된 헬라어 ‘스케노오’(σκηνόω)는 ‘장막, 천막, 오두막집, 임시거주지, 상징적으로 (영혼의 거처로써의)인간의 몸’의 뜻을 가진 명사형인 ‘스케노스’(σκῆνος)에서 파생된 단어로 ‘천막을 치다, 야영하다, 천막을 가지다, 천막에 살다, 임시로 거처하다,(마치 구약에서 하나님이 보호와 교제의 상징인 성막에서 하듯) ‘거하다’’라는 의미를 가지고 있다.
그리고 ‘스케노스’(σκῆνος)는 ‘천막, 초막, 거처, 성막’의 뜻을 가진 ‘스케네’(σκηνή)에서 유래된 단어이며 이동식 하나님의 성전으로 이해할 수 있는 성막의 모양을 본떠서 후에 예루살렘 성전을 세우게 되었다.
뿐만 아니라 ‘스케네’(σκηνή)는 어원적으로 ‘그릇, 도구, 가정용 기구, 돛가 밧줄에 사용되는 배의 도구들, (상징적으로)선택된 도구로 사용되는 우수한 사람, 행악의 조력자’의 뜻을 가진 ‘스큐오스’(σκεῦος)와 ‘그늘, 그림자, 윤곽, 예시’의 뜻을 가진 ‘스키아’(σκιά)라는 단어와 우사어인 듯하다.
‘스케노오’(σκηνόω)로 번역된 히브리어 단어인 ‘아할’(אהל)은 ‘장막을 치다, 장막을 걷다, 장막을 옮기다’라는 뜻을 가지고 있으며 이를 파자하면 ‘하나님이 말씀하시고 가르치신다’라는 의미이다. 그리고 ‘그리스도께서는 참 것의 그림자인 손으로 만든 성소에 들어가지 아니하시고 바로 그 하늘에 들어가사 이제 우리를 위하여 하나님 앞에 나타나시고’ (히 9:24)라는 말씀을 통해서 손으로 만든 성소가 예수 그리스도를 상징한다는 사실을 알 수 있다.
그래서 ‘말씀이 육신이 되어 우리 가운데 거하신다(σκηνόω)'는 말씀은 ‘예수 그리스도께서 우리 안에 장막을 치셨다’라는 뜻이 되는 것이며, 아울러 하나님의 영광의 임재를 상징하는 것이다 (요1:14). 선악과를 따먹은 인간은 율법 지킴의 주체가 되어 스스로 하나님 처럼의 삶을 살려고 끊임없이 노력한다. 그러나 성경은 ‘의인은 없나니 하나도 없다’(롬3:10)고 기록하고 있다. 이것은 어느 누구도 율법을 지킬 수 없다는 것이며 오직 예수님만이 지킬 수 있으며 바로 그가 ‘허물과 죄로 죽은 우리를 살리셨다’ (엡2:1)고 말씀하고 있는 것이다.
성도는 율법의 내가 죽고 말씀이신 그리스도가 거하는(σκηνόω)자로써 하나님의 진리의 말씀으로 살아가는 실존으로써 하나님의 말씀을 배우며 가르치며 그렇게 진리와 함께하는 진정한 순종의 삶을 살아가는 자이다.
‘내가 들으니 보좌에서 큰 음성이 나서 이르되 보라 하나님의 장막(σκηνή)이 사람들과 함께 있으매 하나님이 그들과 함께 계시리니(σκηνόω) 그들은 하나님의 백성이 되고 하나님은 친히 그들과 함께 계셔서 모든 눈물을 그 눈에서 닦아 주시니 다시는 사망이 없고 애통하는 것이나 곡하는 것이나 아픈 것이 다시 있지 아니하리니 처음 것들이 다 지나갔음이러라’(계21:3,4). [스케노오(σκηνόω) : 거하다]
22. 개 퀴온(κύων) : 헬라어 원어해석(김준남 목사)
‘개들과 점술가들과 음행하는 자들과 살인자들과 우상 숭배자들과 및 거짓말을 좋아하며 지어내는 자는 다 성 밖에 있으리라’(계22:15)
‘개’번역된‘퀴온’(κύων)은 ‘개(사냥개), (은유적으로)불순한 마음을 가진 사람, 뻔뻔한 사람’이라는 뜻을 가지고 있으며, 여기서 파생된 단어로 ‘개, 강아지, 작은 개’의 뜻으로 쓰이는 ‘퀴나리온’ (κυνάριον)이 있다.
‘개’(κύων)라고 번역된 히브리어 ‘케레브’(בלכ)는 ‘짖다, 공격하다’는 뜻의 사용하지 않는 어근에서 유래된 단어로써 ‘개, 남자 매춘부’의 의미를 가지고 있으며, ‘케레브’(בלכ)의 한 형태이면서 동일어근에서 파생된 ‘힘센’이란 의미를 가진 단어가 ‘카레브’(בלכ)이다. ‘카레브’(בלכ)는 가나안 땅을 정탐한 후에 ‘우리가 곧 올라가서 그 땅을 취하자 능히 이기리라’고 말했고(민13:30), 그나스 사람 여분네의 아들이며 여호와를 온전히 따른 자(민32:12)로
‘갈렙’으로 불려지고 있다.
‘케레브’(בלכ)를 파자하면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넘겨주신 모든 것을 배우고 연구하여 가르치는 집’이라는 의미로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허락하신 모든 환경과 상황 즉 우리가 경험하는 모든 것들을 단지 눈에 보이고 느끼며 판단해 버리는 차원이 아닌 그 속에 담겨진 하나님의 말씀을 배우고 연구하여 깨달아 그 말씀을 품고 말씀의 다스림을 받는 성전’이라는 의미로 이해할 수 있다.
그런 의미에서 ‘케레브’(בלכ)는 ‘나는 아무것도 아닙니다. 나는 힘 없는 자입니다. 하나님만이 유일한 힘이 되십니다’라는 고백을 하며 하나님만을 구하는 자 그래서 하나님의 말씀을 가지고 생명의 양식인 진리의 말씀만 먹는 진정한 힘센(בלכ)자라고 볼 수 있지만 반대로 하나님이 주시는 모든 것들 속에서 ‘하나님의 말씀을 보지 못하고 깨닫지 못하는 자, 선악의 주체로 하나님 처럼의 삶을 살아가는 탐욕으로 가득한 자, 허물과 죄로 죽은 자, 참된 생명되시는 예수를 만나지 못해 끊임없이 간음하는 자’라는 뜻을 포함하고 있는 ‘영적 매춘부’(בלכ)라고도 볼 수 있는 것이다.
그래서 신약성경에서는 점술가들과 음행하는 자들과 살인자들과 우상 숭배자들과 및 거짓말을 좋아하며 지어내는 자 (계22:15)와 동격으로써의 ‘개’(κύων)와 주인의 상에 떨어진 '떡'(알토스)조각 일찌라도 먹기를 갈급해하는(막7:28) 자로써의 ‘개’(κυνάριον)를 구분하여 사용하고 있다.
그러므로 성도는 수로보니게 여인이 그랬던 것처럼 눈에 보이는 것으로 판단하지 않고 속에 담긴 말씀을 보는 자로서 항상 영적 가난(프토코스)의 상태에 있으면서 유일한 주인되시는 하나님의 생명의 말씀에만 목말라하는 자, 내가 죽고 그리스도로 사는 진짜 힘있는 자(בלכ)이다. [퀴온(κύων) : 개]
22.쉬지말고 아디알레입토스(ἀδιαλείπτως):쉬지말고 헬라어 원어해석(김준남 목사)
‘쉬지말고 기도하라’(살전5:17)
‘쉬지말고’로 번역된 ‘아디알레입토스’(ἀδιαλείπτως)는 ‘중단 없는, 끊임없는, 지속적인, 계속적인, 영원한’의 가진 형용사 ‘아디알레입토스’(ἀδιἀλειπτως – 부사형과 비교해서 악센트 위치만 틀림)의 부사형으로 ‘연속해서, 생략 없이, 끊임없이, 쉼 없이’라는 의미를 가지고 있다.
그리고 부사형인 ‘아디알레입토스’(ἀδιἀλειπτως)는 부정적 불변사인 ‘아’(ἀ)와 ‘통하여, 때문에, 항상, 가운데’의 뜻을 가진 전치사 ‘디아’(διἀ)와 ‘떠나다, 두고 가다, 저버리다, 처지다, 열등하다, 가지지 않다, 부족하다, 결핍하다, 실패하다, 결석하다’의 뜻을 가진 ‘레이포’(λείπω)의 합성어에서 파생된 단어이다.
이렇게 원래의 단어가 가지고 있는 의미를 통해서 ‘아디알레입토스’(ἀδιαλείπτως)가 가지고 있는 ‘끊임없이 쉬지말고’의 의미를 정리하면, ‘결코 떠나거나 두고 가지 않고, 언제나 부족하여 결핍함이 절대로 없고 그리고 단 한번의 실패도 있지 않는 쉬지말고’라는 의미가 되는 것이다.
기본적으로 이 단어는 피조물인 유한한 인간에게 해당되는 단어가 아니다. ‘쉬지말고(ἀδιαλείπτως)기도하라’(살전5:17)는 말씀은 시간을 정해 놓고 기도하라는 것도 아니고 최선을 다해서 시간을 쪼개면서까지 기도하라는 것도 아닌 모든 시간에 쉬지말고 기도하라는 것이다. 선악의 주체가 된 인간은 끊임없이 자기만을 위해서 살아갈 수 밖에 없는 자인데 어떻게 하나님과 대화라고 말하는 기도를 쉬지 않고 할 수 있다는 것인가? 오히려 나름대로 최선을 다해서 기도해 보겠다는 바리새인들의 기도를 가리켜 예수님은 외식적인 기도요, 중언부언하는 기도(마 :6 5-7)라고 말씀하시면서 그런 것은 진정한 기도가 아님을 가르쳐 주고 있다.
'쉬지말고'(ἀδιαλείπτως)의 기도는 오직 말씀이신 예수님만이 하실 수 있는 기도이다.
그러기에 ‘쉬지말고 기도하라’는 의미는 한마디로 ‘기도가 되라(포이에오 : ποιέω)’는 뜻으로 이해할 수 있으며 하나님 처럼의 내가 죽고 내 안에 그리스도가 살아 그리스도로 기도하라는 것이다. 그래야 비로서 바울이 말하고 있는 쉬지않는 기도인 하나님과 끊임없이(ἀδιαλείπτως)대화를 나눌 수 있는 것이다.
그러므로 성도는 말씀을 품은 자로써 하나님의 모든 창조물 속에 담겨진 말씀을 보며 또한 삶의 현장에서 경험하는 모든 사건 사고를 통하여서도 그 안에 담겨진 말씀을 보고 그 말씀이신 하나님과 쉬지않고 대화를 나누며 사는 자, '쉬지않고'(ἀδιαλείπτως)기도하는 자이다. [아디알레입토스(ἀδιαλείπτως): 쉬지말고]
23. 꾸짖다 에피티마오(ἐπιτιμάω) : 꾸짖다 헬라어 원어해석(김준남 목사)
‘예수께서 가까이 서서 열병을 꾸짖으신대 병이 떠나고 여자가 곧 일어나 그들에게 수종드니라’(눅4:39)
‘꾸짖다’로 번역된 헬라어 ‘에피티마오’(ἐπιτιμάω)는 ‘(여격을 지배할 때)안에, 위에, 대항하여, 곁에, ~에, ~에게서,’라는 뜻의 전치사 ‘에피(ἐπι)와 ‘평가하다, 가치를 결정하다, 존경하다, 경외하다, 경배하다’라는 뜻의 ‘티마오’
(τιμάω)의 합성어에서 파생된 단어로 ‘존경을 나타내다, 경의를 표하다, 가격을 올리다, 판결하다, 수여하다, 잘못을 지적하다, 꾸짖다, 혼을 내다, 책망하다, 질책하다, 엄격하게 따지다’라는 다양한 의미로 쓰이고 있는 단어이다.
그리고 ‘에피티마오’(ἐπιτιμάω)로 번역된 히브리어 단어가 ‘꾸짖다, 비난하다, 질책하다, 부패하다, 타락하다’라는 뜻을 가진 ‘가아르’(רעג)인데이를 파자하면‘자기에게서 벗어나 가시적으로 시작하다’라는 의미를 가지고 있다.
이 단어가 하나님이 쓰실 때 ‘비진리를 벗겨 진리로 나타나도록 시작하다’라는 의미로 볼 수 있는 것이다.
구약에서 쓰인 용례를 살펴보면 ‘이방나라들을 책망하시고(רעג)악인을 멸하시며 그들의 이름을 영원히 지우셨나이다’(시9:6), ‘교만하여 저주를 받으며 주의 계명들에서 떠나는 자들을 주께서 꾸짖으셨나이다(רעג)’(시119:21)에서 인간을 향하여서 하나님이 책망하는 것으로 기록되어있다.반면에 ‘그는바다를 꾸짖어(רעג) 그것을 말리시며 모든 강을 말리시나니’(시106:9)라는 말씀에서 하나님이 창조하신 어떤 것을 향하여 꾸짖기도 하신다.
마찬가지로 예수님께서도 ‘에피티마오’(ἐπιτιμάω)라는 단어를 쓰실 때 ‘비진리를 벗기고 진리의 말씀을 드러나게 하시다’라는 의미를 가지고 사용하고 있다고 볼 수 있는 것이다. 즉, ‘예수께서 '열병'(퓌레토스 : πυρετός – 물이 없다는 의미에서 열이 있는, 진리의 말씀이 없고 비진리의 말만 있는)을 꾸짖으신대 (ἐπιτιμάω)병이 떠나고 일어났다(아니스테미 : ἀνίστημι – 죽음에서 일어서다, 일으키다, 똑바로 서다, 나타나다, 진리로 서다)’(눅4:39), ‘예수께서 깨어 바람을 꾸짖으시며 (ἐπιτιμάω) 바다더러 이르시되 잠잠하라 고요하라 하시니 바람이 그치고 아주 잔잔하여지더라’ (막4:39)라는 말씀을 통해서 ‘에피티마오’(ἐπιτιμάω)의 의미를 자세히 알 수 있는 것이다.
그렇게 예수님은 공생애 동안에 귀신(더러운 말, 섞인 말, 비진리)을 '꾸짖어'(ἐπιτιμάω)진리의 말씀으로 설 수 있도록 해 주시는 사역을 하신 것이다.
그러므로 성도는 진리의 말씀으로 선 자로서, 날마다 그리스도의 말씀으로 통해서 마땅히 책망(ἐπιτιμάω)을 받아야 하며, 그 말씀을 전하는데 힘써야 하며, 죄를 지은 자를 '경계'(ἐπιτιμάω – 비진리를 벗겨 진리로 세워줌)해야 할 것이다(딤후4:2). [에피티마오(ἐπιτιμάω) : 꾸짖다]
24.계명 엔톨레(ἐντολή) :헬라어 원어해석(김준남 목사)
‘나의 계명을 지키는 자라야 나를 사랑하는 자니 나를 사랑하는 자는 내 아버지께 사랑을 받을 것이요 나도 그를 사랑하여 그에게 나를 나타내리라’(요14:21)
‘계명’으로 번역된 헬라어 ‘엔톨레’(ἐντολή)는 ‘명하다, 행하도록 명령하다, 이르다’라는 뜻을 가진 ‘엔텔로마이’
(ἐντέλλομαι)에서 파생된 단어로 ‘주문, 명령, 의무, 지시, 지령, 계율’의 의미를 가지고 있다.
그리고 ‘엔텔로마이’(ἐντέλλομαι)는 ‘안에, 의하여, 가지고’의 뜻을 가진 전치사 ‘엔’(ἐν)과 ‘끝, 결국, 한계, 마지막, 목표, 목적, 사용료 요금’의 뜻을 가진 ‘텔로스’(τέλος)의 합성어에서 유래된 단어이다.
‘엔톨레’(ἐντολή)로 번역된 히브리어 단어는 ‘계명, 명령, 율법, 법령’의 뜻을 가진 ‘미쯔바’ (מצוה)이며 이를 파자하면 ‘말씀을 붙잡고 그 말씀과 연합된 존재’라는 의미를 가지고 있다.
이 말은 ‘계명’(ἐντολή)을 지켜야 한다(테레오: τηρέω)라는 것이 국어사전이 정의하고 있는 것처럼 ‘규정, 약속, 법, 예의 따위를 어기지 아니하고 그대로 실행해야 한다’의 의미가 아닌 ‘하나님의 율법을 진리의 말씀으로 알아 마음에 둔다, 마음으로 품는다’는 말이며 ‘그 말씀을 내 말로 갖는다, 말씀과 하나가 된다’라는 의미로 보아야 하는 것이다.
‘계명’(ἐντολή)은 믿음이신 하나님이(요일1:9)말씀하시고 이루시는 것이다. 그래서 구약에서 ‘아브라함이 내 말을 순종하고 내 명령과 내 계명(מצוה : ἐντολή)과 내 율례와 내 법도를 지켰다’(창26:1)라는 말씀을 신약에서는 ‘믿음이 아브라함을 부르시고 순종하게 하셨다’(히11:8)라고 설명하고 있는 것이다.
그러므로 성도에게 있어서 ‘계명’(ἐντολή)은 하나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을 믿는 것이며(요일3:23),
하나님의 '계명'(ἐντολή)들을 지키는(τηρέω)것이 바로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이다(요일5:3).그의 ‘계명’을 행함으로 지키려하면 수고하고 무거운 짐이 될 수 밖에 없다. 인간은 하나님의 계명을 만나면 두마음으로 인해 '탐욕'(에피뒤미아 : επιθμια)의 마음으로 계명을 지키려 하는데 그것이 바로 죄가 되는 것이다.
그래서 예수님은 수고하고 무거운 짐진 자들을 향하여서 ‘내게로 오라, 내가 너희에게 안식을 주겠다’(마11:28)고 말씀하시는 것이며, 그의 말씀을 믿으면 즉, 그의 말씀을 내 마음에 품으면 비로서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것이다(요1:12) 결국 하나님의 ‘계명’(ἐντολή)은 나를 죽여 하나의 말씀, 진리의 말씀만 품은 그리스도로 살게 하시는(갈2:20) 하나님의 마음이요 은혜인 것이다. [엔톨레(ἐντολή) : 계명]
25. 교제 코이노니아(κοινωνία): 교제 헬라어 원어해석(김준남 목사)
‘그들이 사도의 가르침을 받아 서로 교제하고 떡을 떼며 오로지 기도하기를 힘쓰니라’(행2:42)
‘교제’로 번역된 헬라어 단어‘코이노니아’(κοινωνία)는 ‘동업자, 제휴자, 동료, 친구, 배우자, 분배자’라는 뜻을 가진 ‘코이노노스’(κοινωνός)라는 단어에서 유래되었으며 ‘동료의식, 교제, 사귐, 공동체, 공유, 참여, 사귐, 상호교류, 우정’이라는 의미를 가지고 있으며, 동사형은 ‘코이노네오’ (κοινωνέω)인데 ‘남과 나누다, 공유하거나 교제를 나누다, 동업자가 되다, 제휴하다, 동참자가 되다’라는 의미이다.
‘코이노네오’(κοινωνέω)는 히브리어 ‘하나로 만들다, 연결하다, 함께 묶다, 부부가 되다, 동맹하다, 붙다, 쌓아 올리다, 친교하다’ 라는 뜻을 가진 ‘하바르’(ברח)라는 단어를 번역한 것으로 이를 파자하면 진리가 없는 자는 ‘죄가 거하는 집으로 시작하다’ 그리고 진리가 있는 자는 ‘생명이 거하는 집으로 시작하다’라는 의미이다.
또한 ‘코이노니아’(κοινωνία)라는 단어가 가지고 있는 ‘교제’의 의미는 국어사전이 정의하고 있는 ‘서로 사귀어 가까이 지냄, 어떤 목적을 달성하기 위한 수단으로 남과 가까이 사귐’이라는 단순한 의미를 넘어, 마치 범죄 조직에 들어가면 죽기 전에는 나올 수 없는 그 정도의 결속을 말하는 것이다. 그래서 구약성경에서 ‘악한 일을 하는 자들과 한패(헤브라 : הברח – ‘하바르 : ברח’의 명사형)가 되어…’(욥34:8)라는 말씀에서도 알 수 있듯이 악한 일을 하는 자들과 사귀어 하나가 되면(ברח, κοινωνέω), 그가 바로 악한 자가 되는 것이다.
신약성경에서 성도들이 감사하며 받는 축복의 잔은 바로 그리스도의 피에 참여함(κοινωνία)이며, 성도들이 떼는 떡은 그리스도의 몸에 참여함(κοινωνία)이다(고전10:16)는 말씀을 통해서 성도들은 이미 그리스도와 사귀어 하나 된(κοινωνία)상태(union Christ)를 말하는 것으로 더 이상 뗄래야 뗄 수 없는 결합의 관계가 된 것을 의미하는 것이다.
뿐만 아니라, 요한사도는 우리가 본(호라오 : ὁράω) 영원한 생명과 들은(아쿠오 : ἀκούω)생명의 말씀을 전한다고 하면서 그 목적이 우리와 '사귐'(κοινωνία) 있게 하려 함이요, 그 '사귐'(κοινωνία)은 아버지와 또 그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와 함께 하는 '사귐'(κοινωνία)이라고 말하는 것이다(요일1:3).그러므로 성도는 진리의 말씀을 받아 내 말이 죽고 그리스도의 말씀으로 서로 '교제'(κοινωνία)하는 자이며, 생명의 양식을 함께 나누는 자이고 오직 하나님께 진리의 말씀을 구하고 받고 흘리는 '일'(프로슈케 : προσευχή)에만 전념하는 자인 것이다(행2:42).
[코이노니아(κοινωνία) : 교제]
26, 길 호도스(ὁδός) : 길 (way) 헬라어 원어해석(김준남 목사)
‘예수께서 이르시되 내가 곧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니 나로 말미암지 않고는 아버지께로 올 자가 없느니라’(요14:6)
‘길’로 번역된 헬라어 ‘호도스’(ὁδός)는 ‘길’(함축적의미로) 진로,(상징적의미로) 형태, 수단, 여행, 여로, (은유적으로) 행동의 과정, 사고 방식’의 의미를 가지고 있다. ‘호도스’(ὁδός)가 일반적 의미에서의 ‘길’을 의미한다면,
여기에 정관사가 붙은 ‘그 길’(헤 호도스 : ἡ ὁδὸς)은 오직 하나 밖에 없는 유일한 길을 의미한다.
그래서 예수님께서 ‘내가 곧 길이다’(에고 에이미 헤 호도스 : Ἐγώ εἰμι ἡ ὁδὸς)라고 말한 것은 ‘나 외에는 어떠한 것도 결코 길이 아니다’라는 의미이며 ‘누군가가 스스로 길이라고 하면 그것은 거짓말이다’라는 의미도 포함하고 있는 것이다. 그러기에 ‘그 길’(ἡ ὁδὸς)은 곧 유일한 바로 ‘그 진리’(헤 알레데이아 : ἡ ἀλήθεια)이며 ‘그 생명’(헤 조에 : ἡ ζωή)이 되는 것이다.
히브리어 성경을 헬라어로 옮긴 70인역 성경(LXX)에서 ‘호도스’(ὁδός)로 번역된 히브리어가 ‘(자주 다니는) 도로, 길, (문자적으로 또는 상징적 의미로) 길, 방법, 여행자’의 뜻을 가진 ‘오라흐’(ארח)라는 단어인데 이를 파자하면
‘하나님이 시작하는 완성된 진리로서의 생명’이라는 의미를 가지고 있다.
그러나 ‘이익을 탐하는 모든 자의 길(ארח)은 다 이러하여 자기의 생명을 잃게 하느니라’ (잠1:19)는 말씀에서도 알 수 있듯이 선악의 주체가 되어 스스로 '길'(ὁδός)이라고 생각하는 하나님 처럼 되버린 인간 그 자체와 그가 하는 모든 것은 죄이며 악이고 결국 영원한 사망이라는 의미도 함께 내포하고 있는 것이다.
그러기에 신약에서 ‘…길(ἡ ὁδὸς)가에 떨어지매 새들이 와서 먹어버렸고’(마13:4)라는 말씀을 통해서 보면 반드시 유일한 생명이 되는 ‘그 길’(ἡ ὁδὸς)에 떨어져야지 옆에(파라 : παρά) 떨어지면 사망에 이르게 되는 것임을 가르쳐 주고 있다. ‘그 길’에 떨어져야 한다는 의미는 ‘그 길’이 되어야 한다는 것이며 그것은 곧 하나님의 처럼의 내가 죽고 영원한 생명이 되시는 유일한 ‘그 길’ 바로 그리스도로 사는 것(갈2:20)을 말하는 것이다.[호도스(ὁδός) : 길]
27, 가증한 것 브델뤼그마(βδέλυγμα) : 가증한 것 (abomination) 헬라어 원어해석(김준남 목사)
‘멸망의 가증한 것이 서지 못할 곳에 선 것을 보거든 (읽는 자는 깨달을진저)그 때에 유대에 있는 자들은 산으로 도망할지어다’(막13:14)
‘가증한 것’으로 번역된 헬라어 ‘브델뤼그마’(βδέλυγμα)는 ‘나쁜 냄새를 내다’의 뜻을 가진 ‘브데오’(bdeo)의 추정된 파생어에 어원을 둔 ‘지긋지긋하게 싫어하다, 싫어하게 만들다, 혐오하게 하다, (특히 우상숭배에 대하여) 미워하다, 악취로 인해 외면하다, 혐오하다’의 뜻을 가진 ‘브델륏소’(βδελυσσω)에서 파생된 단어로 ‘가증한 것, 역겹도록 싫은 것, 증오하는 것, 혐오, (특히) 우상숭배’의 의미를 가지고 있다. 여기서 파생된 형용사 ‘브델뤽토스’
(βδελυκτός)는 ‘미워하는, 혐오스러운, 증오하는, 우상숭배하는’이라는 뜻을 가지고 있다.
이러한 어원적 의미를 통해서 볼 때, 브델뤼그마(βδέλυγμα)라는 단어가 내포하고 있는 ‘가증한 것’이란 단순히
‘괘씸하고 얄미운 짓’이 아닌 ‘우상숭배하는 것’과 밀접한 관련이 있다는 것이다.
'예수께서 이르시되 너희는 사람 앞에서 스스로 옳다 하는(δικαιόω)자들이나 너희 마음을 하나님께서 아시나니 사람 중에 높임을 받는 그것은 하나님 앞에 미움을 받는 것 ‘브델뤼그마’(βδέλυγμα)이니라’(눅16:15)는 말씀을 통해서 좀더 확실히 알 수 있다.
성경은 ‘의인(디카이오스 : δίκαιος)은 없나니 하나도 없다’(롬3:10)고 말씀하고 있는데, 그럼에도 불구하고 자기 스스로 의롭다(디카이오오 : δικαιόω)고 하는 자들을 향하여 그러한 행위가 하나님 앞에서 역겹도록 미움을 받는 것(βδέλυγμα)이며 그것이 바로 선악의 주체가 되어 하나님 처럼 된 자기 자신만을 섬기는 우상숭배 하는 것(βδέλυγμα)이 된다는 사실을 보여주고 있다.
그리고 그것은 결국 멸망 받을 수 밖에 없는‘가증한 것’(βδέλυγμα)이 되는 것이다(마24:15 ; 막13:14).하나님의 창세전 언약에 따라 하나님의 열심으로 어두움인 인간에게 빛을 비추어 구원에 이르도록 하시려는 것이 구원의 여정이다. 그러나 오히려 인간은 스스로 빛이라 생각하기에 빛이 어둠에 비추어 짐에도 불구하고 그 빛을 깨닫지 못하게 되었다(요1:5). 이와 같이 허물과 죄로 죽은 자(엡2:1)요, 어두움임에도 불구하고 스스로 빛이라 생각하여 빛처럼 행하는 모든 것이 바로 우상숭배 하는 것(βδέλυγμα)이며‘가증한 것’(βδέλυγμα)이고 하나님 앞에 미움을 받은 것(βδέλυγμα)이다.
그러므로 성도는 그러한 자신의 처음자리를 하나님의 은혜로 깨달아 ‘육체와 함께 그 정욕과 탐심이 십자가에 못 박힌’ 그리스도의 예수의 사람들이며(갈5:24)그렇게 ‘가증한 것’(βδέλυγμα) 밖에 없는 내가 죽어 오직 하나님의 마음만 있는 그리스도로 사는 자(갈2:20)이다. [브델뤼그마(βδέλυγμα) : 가증한 것]
28, 구름 넵헬레(νεφέλη) : 구름 (cloud) 헬라어 원어해석(김준남 목사)
‘말할 때에 홀연히 빛난 구름이 그들을 덮으며 구름 속에서 소리가 나서 이르시되 이는 내 사랑하는 아들이요 내 기뻐하는 자니 너희는 그의 말을 들으라 하시는지라’(마17:5)
‘구름’으로 번역된 헬라어 ‘넵헬레’(νεφέλη)는‘구름’, 크고 밀집된 다수, 군중’의 뜻을 가진 ‘넵호스’(νέφος)에서 파생된 단어로‘구름’이라는 기본적인 의미를 가지고 있다. 그러나 국어사전이 정의하고 있는 ‘공기 중의 수분이 엉기어서 미세한 물방울이나 얼음 결정의 덩어리가 되어 공중에 떠 있는 것’으로만 이해해 버린다면 ‘구름’(νεφέλη)
속에서 소리가 나서 이르되’(마17:5), 그리스도가 ‘구름’(νεφέλη)타고 오시리라’(계1:7)등 ‘구름’(νεφέλη)이라는 단어가 들어간 많은 성경구절을 곡해할 수 밖에 없다는 사실이다.
구약에서도 ‘인자 같은 이가 하늘 구름을 타고 와서 옛적부터 항상 계신 이에게 나아가 그 앞으로 인도되매’(단7:13)라는 표현이 기록되어 있다. ‘구름’(νεφέλη)이 상징하는 의미가 성경에 다양하게 나오지만 가장 주목하여 보아야 할 상징적 의미는 ‘하늘이 물을 내리고 구름도 물을 내렸나이다’(삿5:4) 그리고 ‘구름 속에 물을 채우시고’
(욥26:8) 그리고 ‘구름에 비가 가득하면 땅에 쏟아지며’(전11:3)라는 말씀을 통해서 ‘물을 간직하고, 이슬을 뿌리며, 비를 내리게 하는’ 이라는 의미를 갖고 있다는 것이다.
그리고 성경에서 물(마임 : מַיִם)은 ‘진리의 말씀’을 상징하고 있다. 그래서 주님께서 ‘누구든지 목마르거든 다 내게로 와서 마시라’(요7:37)는 것은 물 없는 자 즉 진리의 말씀이 없는 자는 진리이신 주님께 나와 그 말씀으로 채우라는 말씀이다. 그것이 바로 주님을 믿는 것이며 그 결과 그 속에서 샘솟는 물(진리의 말씀)이 강물처럼 흘러 나오게 된다는 의미인 것이다(요7:38).
이와 같은 의미에서 본다면 ‘말할 때에 홀연히 빛난 ‘구름’(νεφέλη)이 그들을 덮으며 ‘구름’(νεφέλη) 속에서 소리가 나서 이르시되’(마17:5)라는 말씀은 진리의 말씀이 그들에게 임하였고 그 진리의 말씀이 밖으로 소리가 났다는 것을 의미하는 것이다. 그리고 그 진리의 말씀은 바로 ‘이는 내 사랑하는 아들이다. 내가 이 아들을 기뻐하니, 너희는 이 아들의 말을 들어라’(마17:5)는 말씀으로 들려졌던 것이다.
뿐만 아니라 진리의 말씀이 없는 자는 곧 주 예수 그리스도를 부인하는 자를 가리키는 것이며 그들을 향하여 성경은 ‘…너희의 애찬에 암초요 자기 몸만 기르는 목자요 바람에 불려가는 물 없는 구름(νεφέλη)이요, 죽고 또 죽어 뿌리까지 뽑힌 열매 없는 가을 나무요’(유1:12)라고 말씀하고 있는 것이다.
그러므로 성도는 ‘구름’(νεφέλη)을 타고 오신 즉, 진리의 말씀으로 오신 그리스도를 본(호라오 : ὁράω)자이며, 물을 머금은 ‘구름’(νεφέλη)을 상징하는 생명의 말씀을 간직한 자이고 결국에는 그 말씀 안으로(구름 속으로) 끌어 올려질(살전4:17)자인 것이다.[넵헬레(νεφέλη) : 구름]
29, 강림 파루시아(παρουσία) : 강림(advent, coming, presence) 헬라어 원어해석(김준남 목사)
‘그러나 각각 자기 차례대로 되리니 먼저는 첫 열매인 그리스도요 다음에는 그가 강림하실 때에 그리스도에게 속한 자요’(고전15:23)
‘강림’으로 번역된 헬라어 ‘파루시아’(παρουσία)는 ‘가까이 하다, 옆에 있다, 도착했다, 참석하다, 준비되다’의 뜻을 가진 ‘파레이미’(πάρειμι)의 현재 분사에서 파생된 단어로 ‘가까이 존재하는 것, 현존, 임재, 도착, 재림, 강림, 나타남’이라는 의미를 가지고 있다. 그리고 ‘파레이미’(πάρειμι)는 ‘가까운, (소유격과 함께) 곁으로부터, (여격과 함께) 근처에, (대격과 함께)근사하게’의 뜻을 가진 전치사 ‘파라’(παρά)와 ‘있다, 존재하다, 발생하다, 현존하다’
의 뜻을 가진 ‘에이미’(εἰμί)의 합성어에서 유래된 단어이다.
그런 의미에서, 그리스도의 ‘강림’(παρουσία)은 이미 이루어져 함께 있는 현존의 의미를 가지게 된다. 즉, 하나님의 구원의 열심으로 인하여 내가 십자가에서 죽고 이제는 내 안에 그리스도가 사는 자(갈2:20)에게 있어서 이미
그리스도의 ‘강림’(παρουσία)이 이루어진 것이다.
그것이 바로 ‘예수를 죽은 자 가운데서 살리신 이의 영이 너희 안에 거하시면 그리스도 예수를 죽은 자 가운데서 살리신 이가 너희 안에 거하시는 그의 영으로 말미암아 너희 죽을 몸도 살리시리라’(롬8:11)는 말씀의 의미인 것이다.
그리고 그리스도 안에서 모든 사람이 삶을 얻을 수 있었던 것은 바로 그리스도가 부활의 첫 열매 되시고 그리스도의 ‘강림’(παρουσία)으로 인하여 그리스도에게 속하였기(union Christ)때문인 것이다(고전15:23).
반대로 하나님께로서 난 자가 아닌 내 안에 그리스도의 영이 없는 자에게 있어서 그리스도의 ‘강림’(παρουσία)은 그 자체가 심판이 되는 것이다. 따라서 하나님을 믿는다고 하는 이들은 절대로 언젠가 오실 그리스도의 ‘강림’
(παρουσία)을 기다려서는 안된다는 사실이다. 이미 내 안에 진리의 말씀이 그리스도의 영이 계시기 때문이다.
사도 요한은 주님은 반드시 진리로 오신다고 말하고 있다(계1:7). 이러한 사실이 진리이신 그리스도로 사는 자에게는 이미 그리스도의 강림을 경험했기에 그 날이 기쁨과 감사의 날이지만, 여전히 비진리로 가득한 땅에 속한 자들에게는 그리스도의 ‘강림’이 슬픔으로 가슴을 치는 날이 되는 것이다.
그러므로 성도에게 있어서 그리스도의 ‘강림’(παρουσία)은 ‘그 날에 하늘이 불에 타서 풀어지고 물질이 뜨거운 불에 녹아지는’(벧후3:12)곧 하나님의 처럼의 내가 완전히 죽는 순간이 되며, 이제는 그리스도의 영으로 사는 진정한 하나님 나라의 삶을 사는 것을 의미하는 것이다.[파루시아(παρουσία) : 강림]
30, 기억하다 므네모뉴오(μνημονεύω) : 기억하다 (to remember) 헬라어 원어해석(김준남 목사)
‘내가 전한 복음대로 다윗의 씨로 죽은 자 가운데서 다시 살아나신 예수 그리스도를 기억하라’(딤후2:8)
‘기억하다’로 번역된 헬라어 ‘므네모뉴오’(μνημονεύω)는 ‘회고, 기억, 추억, 언급’의 뜻을 가진 ‘므네메’(μνήμη)에서 파생된 단어로 ‘기억을 더듬다, 회상하다, 마음에 새기다, 언급하다, 생각하다, 깨닫다’의 의미를 가지고 있다.
‘므네모뉴오’(μνημονεύω)가 말하는 ‘기억하다, 생각하다’는 것은 ‘단순히 이전의 인상이나 경험을 의식 속에 간직하거나 도로 생각하다’의 의미보다는 어두움인 인간이 스스로 볼 수 없기에 그 어떠한 것도 기억하거나 생각할 수도 없다는 점에서 그것까지도 먼저 하나님이 주셔야 하는 것이며 ‘주면 그것을 마음으로 간직하다’라는 의미로 이해할 수 있다. 그래서 하나님의 말씀을 기억하라는 말씀은 ‘하나님의 말씀을 지켜라(keep), 마음으로 간직하라, 생각하라 그리고 깨달으라’는 뜻으로 볼 수 있는 것이다.
그러기에 ‘너희가 눈이 있어도 보지 못하며 귀가 있어도 듣지 못하느냐 또 기억하지(μνημονεύω)못하느냐’(막8:18)는 말씀을 통해서 보면, 보지 못하며 듣지 못하기에 기억하지 못하는 것은 바로 본적이 없고 들은 적이 없다는 것을 말하는 것이다. 그것은 또한 하나님의 은혜로 주어진 하나님의 선물인 믿음으로 말미암는 구원을 받은(엡2:8) 사실이 없기 때문에 알 수도 없고 설명할 수도 없는 것이다.
은혜에 대하여 ‘므네모뉴오’(μνημονεύω) 할 수 있다는 그가 은혜를 받았다는 것을 의미하며 구원의 선물을 받았다는 것이며 하나님께로부터 난 자임을 말하는 것이다. 그런 의미에서 이 단어는 ‘하나님의 말씀과 같은 말로 말하다, 예수 그리스도의 마음과 같은 마음으로 말하다, 예수 그리스도로 말하다’의 의미를 가진 ‘호몰로게오’(ὁμολογέω)와 비교할 수 있으며 진리로 자유케 된(요8:32)자의 고백인 것이다.
그러므로 성도가 반드시 생각하고 '기억해야'(μνημονεύω)할 것은 허물과 죄로 죽었던 자였으며(엡2:1), 그때에 그리스도 밖에 있었고 이스라엘 나라 밖의 사람이었으며, 약속의 언약들에 대하여는 외인이요 세상에서 소망이 없고 하나님도 없는 자 (엡2:12)였다는 사실이다. 뿐만 아니라 그런 우리를 하나님의 은혜로(only by grace) 그리스도와 함께 살리셨고(엡2:5) 성령 안에서 하나님이 거하실 처소가 되기 위하여 그리스도 안에서(union Christ) 함께 지어져 가는 자(엡2:22)라는 것도 생각하고 '기억해야'(μνημονεύω) 할 것이다.
[므네모뉴오(μνημονεύω) : 기억하다]
원어단어 ‘ㄴ’ 에 해당하는 단어들
1.내어주다
1.내어주다 파라디도미(παραδίδωμι) : 헬라어 원어해석(김준남 목사)
‘자기 아들을 아끼지 아니하시고 우리 모든 사람을 위하여 내주신 이가 어찌 그 아들과 함께 모든 것을 우리에게 주시지 아니하겠느냐’(롬8:32)
‘내어주다’로 번역된 헬라어‘파라디도미’(παραδίδωμι)는 ‘(다른 사람의) 손에 넘겨주다, 힘을 주거나 사용하도록 넘겨주다, 관리하도록 넘겨주다, 위임하다, 맡기다, 구두로 전달하다, 명령하다, 보고하다, 허락하다, 허가하다, 양보하다, 주다’라는 다양한 의미로 쓰여지고 있는 단어이다.
그리고 ‘부터, 의하여, 외에, 근처에, 반대편에’라는 뜻을 가진 전치사 ‘파라’(παρα)와 ‘주다, 수여하다, 공급하다, 은사를 주다, 몫을 주다, 직책을 맡기다, 나타나게 하다, 허가하다, 위임하다, 넘겨주다’라는 뜻을 가진 ‘디도미’
(δίδωμι)라는 단어의 합성어에서 유래되었다.
‘디도미’(δίδωμι)가 단순히 ‘보여주고, 나타내주고, 끼쳐주고, 전해주고, 허락해주다’는 의미를 가진 단어라면,
‘파라디도미’(παραδίδωμι)는 모든 힘과 권리와 생명까지 완전히 차압당하고 뺏겨버린다는 의미와 ‘항복하고, 맡기며 포기한다! 는 의미를 전제로 하여‘…에게 잡히고, ..에게 넘겨주고, ..에게 붙여 버리게 되고, 팔아 넘기다’ 의 강력한 의미를 가지고 있는 단어이다.
‘예수께 입을 맞추려고 가까이 하는지라 예수께서 이르시되 유다야 네가 입맞춤으로 인자를 파느냐 (παραδίδωμι)하시니’(눅22:48) 하나님 처럼 되어버린 인간은 스스로 자기의 정욕(에피뒤미아 : επιθμια)을 채우기 위해 하나님의 아들이신 예수를 끊임없이 팔아 넘길(παραδίδωμι) 수 밖에 없는 존재 인 것이다.
그러나 이미 하나님은 창세전 언약(엡1:4)에 따라 자기 아들을 아끼지 아니하시고 우리 모든 사람을 위하여 내어 주셨다(παραδίδωμι)는 사실이다(롬8:32). 그래서 그리스도도 우리를 위하여 자신을 버리사 향기로운 제물과 희생제물로 하나님께 드리신(παραδίδωμι)것이다(엡5:2). 이것은 인간은 예수님을 십자가의 죽음에 넘겨버렸지만(παραδίδωμι)오히려 그런 인간을 위해 하나님께서는 아들을 십자가의 죽음에 넘겨버리셨다(παραδίδωμι)는 사실이다.
그러므로 나를 사랑하사 나를 위하여 그리스도이신 자기 자신을 버리신(παραδίδωμι) 하나님의 아들을 믿는 믿음 안에서 사는 자(갈2:20)인 성도는 바나바와 바울처럼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을 위해서(그리스도의 말씀 때문에) 자기 목숨을 내놓은(παραδίδωμι)사람들이며(행15:26),그렇게 항상 예수를 위하여 죽음에 넘겨져서(παραδίδωμι) 예수의 생명, 진리의 말씀이 삶 가운데 나타나는(고후4:11)자인 것이다.
[파라디도미(παραδίδωμι): 내어주다]
원어단어 ‘ㄷ’ 에 해당하는 단어들
1. 독생 2. 덧입다 3. 때 4.더러운 5.단단한 6.담대함 7.뜻 8 떡, 양식 9, 두드리다 10, 두마음
1. 독생한 모노게네스 (μονογενής) : 독생한 헬라어 원어해석(김준남 목사)
‘하나님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 독생자를 주셨으니…’(요3:16)
‘독생한’으로 번역된 헬라어 모노게네스(μονογενής)는 ‘남아있는, 유일한, 하나의’라는 뜻을 가진 ‘모노스’
(μονος)와 ‘발생하게 되는 원인이 되다, 되기 시작하다, 완성되다’라는 뜻을 가진 ‘기노마이'(γίνομαι)의 합성어에서 파생된 단어이다.
'독생자'(τὸν υἱὸν τὸν μονογενῆ)를 단순히 국어사전적 의미로 ‘하나님의 외아들’로 이해해서는 안되며 ‘유일한 원인이 되는, 유일한 시작과 완성이 되는 의미에서의 유일한 존재, 하나만 가진 자의 뜻으로 이해해야 하다.’뿐만 아니라 독생자는 ‘하나님의 마음을 가진 자, 한마음을 가진 자, 한마음이신 자’로서 바로 그리스도 예수를 가리키는 것이다. 구체적으로 모노게네스 (μονογενής)는 ‘하나님으로부터 시작된 하나님이신 하나’(요1:14)이며, ‘시작이 되시고 완성이 되시는 하나님 자신인 하나’라는 의미이다.
또한 ‘두마음’이라는 헬라어 '딥쉬코스'( δίψυχος)라는 단어와 비교해서 반대되는 개념을 가지고 있다.
선악과를 먹고 하나님처럼 돼 버린 인간은 두마음 (딥쉬코스 : δίψυχος )을 가진 선악의 주체가 되었으며 하나님의 생기가 떠난 죽은 자가 되었다. 죽은 자가 할 수 있는 일이란 오직 ‘탐심’(에피뒤 미아: ἐπιθυμία) 밖에는 없다.
인간의 '두마음'(δίψυχος)이 '한마음'(μονογενής)이 되는 것을 구원이라고 말한다. 이를 위해서 예수님이 이 땅에 오신 것이며, 모든 정욕과 '탐심'(δίψυχος )의 주체인 율법으로서의 ‘내’가 되어 십자가에 못 박혀 죽으신 것이다(갈5:24). 이렇게 성도는 모든 것들을 선악으로 판단하는 두마음을 가진 자가아니라, 모든 사건과 눈에 보이는 것들을 통해서, '한마음'(μονογενής)인 하나님의 마음만 있기에 그 속에 숨겨진 하나님의 진리의 말씀을 찾고 그 말씀의 섬김을 받으며 하나님의 아들 로 사는 자이다. [모노게네스 (μονογενής) : 독생한]
2. 덧입다 에펜뒤오마이(ἐπενδύομαι) : 헬라어 원어해석(김준남 목사)
‘참으로 우리가 여기 있어 탄식하며 하늘로부터 오는 우리 처소로 덧입기를 간절히 사모하노라’(고후5:2)
‘덧입다’로 번역된 헬라어 ‘에펜뒤오마이’(ἐπενδύομαι)는 여격의 지배를 받을 때 ‘위에, 곁에’의 뜻을 가진 ‘에피’(ἐπί)라는 전치사와 ‘착용하다, 입다, 의복을 걸치다, 정장하다’라는 뜻의 ‘엔뒤오’(ἐνδύω)의 합성어에서 파생된 단어로 ‘…위에 입다’의 의미를 가지고 있다. 그리고 ‘엔뒤오’(ἐνδύω)라는 단어는 ‘안에, 의하여, 가지고’라는 뜻의 전치사 ‘엔’(ἐν)과 ‘들어가다, 입장하다. 해가 지다, 잠수하다, 가라앉다, 침몰하다’라는 뜻의 ‘뒤노’(δύνω)의 합성어에서 유래된 단어로 ‘옷 속에 스며들다, 안에서 침몰하다’라는 의미와 함께 ‘착용하다, 정장하다, 의복을 걸치다’라는 뜻을 가지고 있다.
이런 의미에서 ‘에펜뒤오마이’(ἐπενδύομαι)가 의미하는‘덧입다’는 ‘입고 있는 옷을 벗고 다른 옷으로 갈아입다’라는 의미가 아니라 지금 입고 있는 그 상태에서 ‘입고 있는 옷 위에 또 다른 옷으로 덧입다’의 의미로 이해할 수 있다. 여기서 파생된 단어가 ‘겉옷, 싸는 것, 외투’라는 뜻의 명사형인 ‘에펜뒤테스’(ἐπενδύτης)가 있다.
그렇다면 인간이 입고 있는 옷이란 어떤 것인가? 성경은 선악과를 따먹은 인간에 대해서 선악의 주체가 되어 두 마음의 옷, 탐욕의 옷 그리고 율법의 옷을 입고 있는 자로 표현하고 있으며 그것은 바로 어두움의 옷을 입고 있는 것이기에 허물과 죄로 죽은 자(엡2:1)라고 말하고 있는 것이다.
그래서 사도바울은 ‘참으로 이 장막에 있는 우리가 짐진 것 같이 탄식하는 것은 벗고자 함이 아니요 오히려 덧입고자(ἐπενδύομαι)함이니 죽을 것이 생명에 삼킨 바 되게 하려 함이라’(고후5:4)고 고백하면서 구원이라는 것이 수고하고 무거운 짐으로써의 율법의 짐을 지고 있는 장막인 인간의 몸을 벗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그 위에 진리의 겉옷으로 덧입는(ἐπενδύομαι)것이며 죽을 것이 생명에 삼킨 바 되는 것임을 의미한다고 말하고 있다.
그러기에 바울은 이 장막에서 신음하며 하늘로부터 오는 우리의 집으로 옷 입기(ἐπενδύομαι)를 간절히 원한다(킹제임스 흠정역, 고후5:2)고 말하고 있는 것이다. 특별히 이 단어는 신약성경에서 오직 2회(고후5:2,4)만 쓰이고 있으며 또한 중간태로 쓰여져 수동태의 의미인 ‘덧입혀 준다’와 능동태의 의미인 ‘덧입혀 주시기에 덧입는다’는 두가지 의미로 해석할 수 있다.
그러므로 ‘성도는 하나님의 은혜를 덧입은(ἐπενδύομαι)자’라는 의미 속에는 ‘내가 지금 입고 있는 사망의 율법의 옷에 대한 부정을 고백하는 자이며, 나 스스로는 도저히 존재할 수 없다는 내 존재의 없음을 고백하는 자이고 그래서 그러한 인간의 처음자리의 옷 위에 하나님의 생명의 말씀, 진리의 말씀의 옷을 덧입어(ἐπενδύομαι)비로서 하나님의 아들로서의 존재가 되고 영원한 생명을 소유한 자’라는 의미를 포함하고 있는 것이다.
[에펜뒤오마이(ἐπενδύομαι) : 덧입다]
3. 때 카이로스(καιρός) :헬라어 원어해석(김준남 목사)
‘이르시되 ‘때’가 찼고 하나님의 나라가 가까이 왔으니 회개하고 복음을 믿으라 하시더라’(막1:15)
‘때’로 번역된 헬라어‘카이로스’(καιρός)는 ‘지급기일 한도, 시간의 범위, 확정된 그리고 명확한 시간, 시기 적절한 시간, 제한된 시간, 기회’라는 의미를 가진 단어로 엄밀한 의미에서 고정되거나 특별한 경우를 뜻한다고 볼 수 있다. 여기서 ‘확정되고, 명확하며, 시기 적절하고 특별한’ 이라는 단어가 주는 의미는 확정되지 않고 불명확하며 적절하지도 않은 이 세상과 연계하여 생각할 수 ‘있는’[문맥상 ‘있는’을 추가함]단어가 아니라는 것을 의미하는 것이다.
이런 의미에서 ‘카이로스’(καιρός)의 ‘때’는 영원하며 변함이 없고 항상 적절하신 창조주 하나님, 하나님의 계획, 뜻 그리고 말씀과 연계된 때나 기회를 말하는 것으로 하나님과의 관계성 속에서 일어나는 사건이기에 보통 수직적인 시간으로 이해되고 있다. 그래서 수평적이고 직선적인 시간으로 이해되는 ‘시간의 간격, 짧거나 긴 시간, (광범위한 의미에서)개인적인 기회, (함축적으로) 연기, 때, 계절’의 뜻을 가지고 시간의 경과나 과정을 나타내는 ‘크로노스’
(χρόνος)와 개념적으로 많은 차이가 있다.
‘크로노스’(χρόνος)로 번역된 히브리어가 ‘시간’의 뜻을 가진 ‘에트’(תע)인데 이를 파자하면‘보이는 것으로 완성’이라는 의미로 눈으로 확인할 수 있고 느낄 수 있는 끊임없이 지나가는 것으로 봄, 여름, 가을, 겨울이 계속 반복되는 계절, 아침이 지나가면 저녁이 오는 때 그리고 오늘도 계속적으로 언제나 경험할 수 있는 기회로 볼 수 있다.
반면에 ‘카이로스’(καιρός)로 번역된 히브리어가 ‘시간을 정하다, 고정하다, 지정하다’의 뜻을 가진 ‘자만’(זמן)이며 이를 파자하면 ‘전쟁의 무기인 진리의 말씀을 안으로 간직하다는 의미로써 결정된 시간, 지정된 시간 그래서 무언가 의미하고 있는 시간이며 그것은 ‘말씀을 가지고 있는 시간’을 말한다. 그래서 말씀이 없고 말씀을 보지 못하고 지나가는 모든 시간들은 아무 의미가 없는 시간(χρόνος)이라면 말씀을 품고 말씀을 보며 경험하는 모든 시간은 그 자체가 구원이요 영원한 생명을 경험하며 사는 시간(καιρός)이 되는 것이다.
마가복음 1장 15절의 ‘때가 찼고 하나님의 나라가 가까이 왔으니’의‘때’는 바로 ‘카이로스’(καιρός)의 의미를 잘 드러내고 있는 것으로 여기서의 때란 전 인류를 향한 복음의 선포의 시기 즉 하나님의 구원역사를 결정적으로 전개할 중요한 ‘때’(καιρός)라는 뜻을 나타내고 있는 것이다.
그러므로 성도는 눈에 보이는 ‘크로노스’(χρόνος)의 시간 속에서 동시에 진리의 말씀을 품고 크로노스의 시간 속에 담겨진 생명의 말씀을 보는 ‘카이로스’(καιρός)의 때를 살아가는 자이다. 그러기에 오늘도 하나님과의 관계에서의 모든 시간이 영원이요 그것은 곧 언제나 현재이며 지금이기에 하나님의 말씀과 함께 영원한 현재를 살아가는 자요, 그런 의미에서 이미 하나님 나라를 살아가고 있는 자이다. [카이로스(καιρός) : 때]
4 .더러운 아카달토스(ἀκάθαρτος) : 더러운 헬라어 원어해석(김준남 목사)
‘더러운 귀신이 사람에게서 나갔을 때에 물 없는 곳으로 다니며 쉬기를 구하되 쉴 곳을 얻지 못하고’(마12:43)
‘더러운’으로 번역된 헬라어 ‘아카달토스’(ἀκάθαρτος)는 부정적 불변사인 ‘아’(ἀ)와 ‘청결한, 깨끗한, 순결한, 정결한, 흠없는’의 뜻을 가진 ‘카다로스’(καθαρός )의 합성어에서 파생된 것으로 보이는 단어로 ‘더러운, 부정한, 불결한, 불순한, 깨끗하지 못한’의 의미로 쓰이고 있으며, 이 단어는 특별히 마태, 마가, 누가복음에서 ‘영, 영혼, 숨’ 이라는 뜻의 '프뉴마’(πνεῦμα)와 함께 ‘더러운 귀신’(τὸ ἀκάθαρτονπνεῦμα)의 용례로만 쓰이고 있다는 사실이다.
이것은 ‘더러운’(ἀκάθαρτος)라는 단어가 국어사전이 정의하고 있는 ‘때나 찌꺼기 따위가 있어 지저분한 또는 언행이 순수하지 못하거나 인색한’이라는 의미가 아니라 ‘정결함이 없는, 깨끗함이 없는’ 상태를 의미하는 것이다.
구약에서 깨끗하고 정결한 제물을 상징하고 있는 정결한 자, 깨끗한 자는 오직 말씀이시며 하나님의 마음, 하나의 마음만 가지신 예수님 뿐이다. 이런 의미에서 ‘아카달토스’(ἀκάθαρτος)는 한마디로 ‘두 마음을 가져 말씀이 없는’ 상태를 말한다고 볼 수 있는 것이며 그러기에 더러운 귀신이 물(말씀) 없는 곳으로 다니는 것(마12:43) 표현하고 있는 것이다.
하나님은 모든 것을 말씀으로 창조하셨는데(요1:3), 이것은 하나님의 모든 창조물 속에 말씀이 내용으로 담겨있다는 것을 말해 주는 것이다. 그러나 선악과를 먹은 인간은 스스로 선악의 주체가 되어 버렸고 하나님의 마음이 떠나 하나님의 말씀을 보지 못하는 자 즉, 눈에 보이는 것으로만 보고 판단해 버리는 소위 ‘말씀이 없는’(ἀκάθαρτος) 자가 된 것이다.
이러한 사실을 베드로가 기도하는 중에 본 환상을 보고 이야기하는 주님과의 대화 속에서 알 수 있다. ‘내가 이르되 주님 그럴 수 없나이다 속되거나 깨끗하지 아니한(ἀκάθαρτος) 것은 결코 내 입에 들어간 일이 없나이다 하니 또 하늘로부터 두 번째 소리 있어 내게 이르되 하나님이 깨끗하게 하신(카다리조 : καθαρίζω)것을 네가 속되다고 하지 말라 하더라’(행11:8,9) 그래서 말씀 육신으로 오신 예수님은 공생에 기간에 말씀을 명하심으로 더러운 귀신을 꾸짖고 내쫓는 섬김의 사역을 감당하셨던 것이다.
그러므로 성도는 두 마음으로써의 ‘더러운’ (ἀκάθαρτος) 마음이 하나의 마음, 하나님의 마음으로 새롭게 된 자이며, 진리의 말씀이 없어 ‘더러운’ (ἀκάθαρτος) 상태에 있는 자가 더러운 내 말이 죽고 그리스도로 사는 자 즉, 그리스도의 생명의 말씀만 있는 자, 오늘도 깨끗한 말씀에 섬김을 받으며 그 말씀에 이끌려 가는 자이다.
[아카달토스(ἀκάθαρτος) : 더러운]
5 .단단한 스테레오스(στερεός) : 단단한 헬라어 원어해석(김준남 목사)
‘단단한 음식은 장성한 자의 것이니 그들은 지각을 사용함으로 연단을 받아 선악을 분별하는 자들이니라’(히5:14)
‘단단한’으로 번역된 헬라어‘스테레오스’(στερεός)는 ‘서게 하다, 옆이나 가까이 서다, 확고한 마음을 가지다, 권리를 포기하지 않다, 고정하다’의 뜻을 가진 ‘히스테미’(ἵστημι)에서 파생된 단어로 ‘강한, 확고한, 움직일 수 없는, 단단한, 완고한, 굳은, 견실한, 꾸준한’이라는 의미를 가지고 이다.
구약성경 ‘못이 단단한 곳에 박힘 같이 그를 견고하게 하리니 그가 그의 아버지 집에 영광의 보좌가 될 것이요’(사22:23)에서 ‘단단한’으로 번역된 히브리어가 ‘지지하다, 진실을 입증하다, 충실하다, 확실하다, 영구하다, 세우다, 지탱하다’라는 뜻의 ‘아만’(אָמַן)으로 70인역에서는 이 단어를 ‘스테레오스’(στερεός)로 번역하였으며, ‘아만’(אָמַן)을 파자하면 ‘하나님의 말씀을 안으로 간직하다’라는 의미가 된다.
정리하면, ‘스테레오스’(στερεός)가 말하는 ‘단단한’이라는 뜻은 성도에게 있어서 눈에 보는 것을 통해서 그 안에 숨겨져 있는 하나님의 말씀을 깨달은 성도만이 가질 수 있는 ‘하나님의 말씀을 품어 그것을 확실한 마음으로 가져 결코 흔들리지 않는 견고한’이라는 의미로 이해 할 수 있는 것이다. 그런 의미를 가지고 사도바울은 ‘이는 내가 육신으로는 떠나 있으나 심령으로는 너희와 함께 있어 너희가 질서 있게 행함과 그리스도를 믿는 너희 믿음이 굳건한 것(스테레오마 : στερέωμα - στερεός 의 명사형)을 기쁘게 봄이라’(골2:5)고 말하고 있는 것이다.
뿐만 아니라 성도들을 향하여서 믿음을 굳건하게 하여(στερεός) 마귀를 대적하라(벧전5:9)고 말하면서 아울러 그리스도께서 친히 ‘온전하게 하시며 굳건하게 하시며 강하게 하시며 터를 견고하게 하신다’(벧전5:10)고 말하고 있는 것이다. 바울은 이미 하나님의 견고한(στερεός) 터가 세워졌다는(ἵστημι) 사실을(딤후2:19) 알았기에 하나님의 창세전 언약의 말씀에 따라 우리를 성하게 하시는(스테레오스 : στερεός) (행3:16) 하나님의 열심을 보았던 것이다.
그러기에 성도는 더 이상 눈에 보이는 수준으로 여전히 가르침을 받아야 하는 젖과 같은 음식을 먹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말씀을 품은 자로서 그 말씀 위에 굳건히 (στερεός) 서서 장성한 자의 양식이라 할 수 있는 영의 양식인 단단한(στερεός) 양식을 먹고 마땅히 진리의 말씀을 흘려주는 선생 된 자가 되어야 하는 것이다(히5:12).
[스테레오스(στερεός) : 단단한]
6.담대함 팔흐레시아(παρρησία): 담대함 헬라어 원어해석(김준남 목사)
‘그러므로 우리는 긍휼하심을 받고 때를 따라 돕는 은혜를 얻기 위하여 은혜의 보좌 앞에 담대히 나아갈 것이니라’(히4:16)
‘담대함’으로 번역된 헬라어‘팔흐레시아’(παρρησία)는 ‘숨김없이 말함, 솔직함, 담대함, 말하는 자유, 말의 솔직함, 용기, 확신, 확고한 평판을 얻게 된 사람의 태도’라는 뜻을 가진 단어이다. 그리고 ‘팔흐레시아’(παρρησία)는 ‘각, 모든, 모두, 전부, 모든 사람, 모든 것, 온, 전체의’라는 뜻을 가진 형용사 ‘파스’(πᾶς)와 ‘쏟아내다, 말하다, 명령하다, …하게 만들다’라는 뜻을 가진 ‘흐레오’(ῥέω)의 합성어에서 파생된 단어로써 ‘확신을 가지고 오직 그 말만 한다는 의미에서의 담대함’이라는 뜻을 강하게 내포 하고 있는 것이다.
‘팔흐레시아’(παρρησία)로 번역한 히브리어 단어는 ‘강하다, 용기있다, 용감하다, 외치다, 주의하다, 단단하다, 확증하다’라는 뜻을 가진 ‘아마쯔’(ץמא)인데 이를 파자하면 ‘하나님의 말씀을 붙잡다’라는 의미이다.
정리하면, ‘팔흐레시아’(παρρησία)라는 단어가 가지고 있는‘담대함’이란 단순히 국어사전이 정의하고 있는 ‘겁이 없고 배짱이 두둑함’이 아니라 ‘말’과 밀접한 관계가 있으며, 구체적으로 하나님의 말씀만 붙잡은 담대함, 하나님의 말씀에만 목표를 둔 확신 그리고 하나님의 말씀만 외치는 용기로 볼 수 있다.
그러기 때문에 우리가 예수의 피를 힘입어 내가 죽고 그리스도로 사는 자가 되어 이제는 성소에 들어갈 진리의 말씀을 가진 담력(παρρησία)을 얻었고(히10:19), 하나님의 은혜의 보좌 앞에 하나님의 말씀을 품은 그 담대함(παρρησία)으로 나아갈 수 있게 된 것이다(히4:16)
사도 요한은 ‘그를 향하여 우리가 가진 바 담대함(παρρησία)이 이것이니 그의 뜻대로 무엇을 구하면 들으심이라’(요일5:14)고 말하면서 하나님의 말씀을 가진 그 담대함으로 구할(아이테오 : αἰτέω) 때 하나님은 들으신다는 것이다. 뿐만아니라 자녀들을 향하여 그리스도 안에(ἐν Χριστός) 거하라고 하면서 그리스도께서 다시 오실 때 부끄러움을 당하지 않고 하나님의 생명의 말씀을 품었기에 떳떳이 그분을 뵙게 될 것이라(요일2:28)고 말씀하고 있다.
성도는 하나님의 말씀만 붙잡고 있는 진정한 ‘담대함’(παρρησία)을 가진 자이다. 그리고 이제는 그 말씀으로 충만한 담대함(παρρησία)으로 하나님의 말씀을 전해야 하며(행4:31), 말씀을 품은 자로서 입을 열어 복음의 비밀을 담대히(παρρησία) 알려야 할 것이다(엡6:19).[팔흐레시아(παρρησία) : 담대함]
7. 뜻 델레마(θέλημα) : 뜻헬라어 원어해석(김준남 목사)
‘나를 보내신 이의 ‘뜻’은 내게 주신 자 중에 내가 하나도 잃어버리지 아니하고 마지막 날에 다시 살리는 이것이니라’(요6:39)
‘뜻’ 으로 번역된 헬라어 단어 ‘델레마’(θέλημα)는 ‘원하다, 생각하다, 의도하다, 좋아하다, 즐거워하다’라는 뜻을 가진 ‘델로’(θέλω)의 연장형으로 ‘이루고자 원하거나 결심한 것, 의지, 선택, 경향, 욕망, 기쁨’의 의미를 가지고 있다.
70 인역에서 ‘델레마’(θέλημα)로 번역된 히브리어 단어는 ‘즐거워하다, 기쁨을 취하다, 마음에 들다, 만족하다, 희망하다’의 뜻을 가진 ‘하페쯔’(חפצ)에서 파생된 ‘헤페쯔’(חפצ)로 ‘가치있는 것, 소원하는 것, 기쁨, 즐거움. 목적, 뜻, 아름다움’의 의미로 사용되고 있다.
기본적으로 선악의 주체로서의 인간이 가지고 있는‘뜻’(θέλημα)이란, 끊임없이 하나님 처럼의 삶을 살려는 욕망인 ‘정욕’(에피뒤미아: ἐπιθυμία) 뿐이다. 하나님의 마음이 없기에 그 속에는 ‘모든 불의, 추악, 탐욕, 악의, 시기, 살인, 분쟁, 사기, 악독’ 만이 가득한 자이다(롬1:29). 그들 스스로 가치가 있다고 생각하여 목적으로 삼고 있는 모든 것은 결국 ‘완전히 파괴되고 썩을’(아폴뤼미 : ἀπόλλυμι) 것에 불과한 것이다.
그 러나 하나님의 ‘뜻’(θέλημα)은 창세전 언약에 따라 그리스도 안에서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자기의 아들들이 되게 하는 것이다(엡1:4,5).그래서 예수님께서 아버지의 뜻대로 언약의 십자가를 지신 것이며(마26:42) (눅22:42), 아버지의 뜻을 온전히 이루는 것을 양식으로 삼으셨다(요4:34).
그 에게 있어서 자기를 이 땅에 보내신 아버지의 뜻은 ‘내게 주신 자 중에 내가 하나도 잃어버리지(ἀπόλλυμι)아니하고 마지막 날에 다시 살리는 것’(요6:39 )이며, ‘아들을 보고 믿는 자마다 영생을 얻는 것’(요6:40)임을 분명하게 말하고 있다.
결국 하나님은 말씀 육신으로 이 땅에 오시어 언약의 십자가에서 자신의 ‘뜻’(θέλημα)을 이루셨으며(요19:30)우리에게 그리스도의 영을 주시어 우리로 하나님의 거하시는 성전을 삼으신 것이고(고전3:16) 하나님의 아들이 되게 하신 것이다(엡1:5).
그러므로 성도는 하나님의 선하시고 기뻐하시고 온전하신‘뜻’(θέλημα)이 무엇인지를 분별(도키마조 : δοκιμάζω)하여 그것만이 유일한 참인 것을 인정하고(δοκιμάζω) 그것만이 유일한 참된 가치로 여기는(δοκιμάζω)자이며(롬12:2),뿐만 아니라 하나님의 뜻이 바로 하나님의 마음임을 알아 그 마음을 내 마음으로 품고 사는 자이다. [델레마(θέλημα) : 뜻]
8 떡, 양식 알토스( ἄρτος ): 떡, 양식 헬라어 원어해석(김준남 목사)
‘떡과, 양식’으로 번역된 헬라어‘알토스’( ἄρτος )성경은 떡에 대한 문제를 매우 중요하게 다루고 있다. 구약에서 하나님은 홍해를 건너 광야로 나온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만나를 주셨고, 예수님의 공생애 사역의 시작에 앞서 광야에서 사단으로부터 돌로 떡을 만들라는 시험을 받았다. 뿐만 아니라 주님께서 가르쳐 주신 기도의 핵심도 양식, 떡에 관한 것이다.
이 땅에서 살기 위해서는 반드시 떡이 있어야 한다. 그러나 아무리 많은 떡을 먹는 다해도 결국 죽음을 피할 수는 없다는 사실이다. 하나님이 주신 만나는 하늘에서 내려온 하늘의 양식이다. 하늘의 양식은 영원한 양식인데 이스라엘 백성들은 하늘양식인 만나를 먹었어도 죽었다.
이유는 만나를 하늘의 양식으로 알아보지 못하고 먹었기 때문이다. 만나는 히브리어로 만 후(הוא מן) 'What is this?’이다. 만나가 하늘의 양식인지 몰랐기에 ‘이게 뭐냐’라고 이름을 붙인 것이다. 그리고 배고픔을 달래는 육의 양식으로만 알고 먹었던 것이다. 만나라는 양식은 단순히 육신의 배를 채우라고 주신 것이 아니라 그것을 통해서 하늘의 양식을 알고 하늘양식으로 먹으라고 주신 것이다.
구약에서 하늘 양식은 바로 그리스도를 상징하고 있다. 그리고 신약에서 예수님은 스스로 생명의 떡이라고 말씀하고 있다.‘예수께서 이르시되 나는 생명의 떡이니 내게 오는 자는 결코 주리지 아니할 터이요, 나를 믿는 자는 영원히 목마르지 아니하리라’(요6:35)
뿐만 아니라 주기도문에서 ‘일용할 양식’도 ‘내일의 양식’ 즉 이 땅에서 필요한 양식과는 완전히 차원이 다른 ‘양식인 생명의 떡, 진리, 말씀, 예수 그리스도를 나타내는 것’이다.
오늘 나는 이 땅의 양식으로 배고프고 갈급해 하고 있는가. 아니면 생명의 양식, 진리의 말씀으로 목말라 하는가?
육의 양식은 영원한 양식의 모형이다. 육의 양식으로 배 부르려고 하는 자는 그 자체가 사망이요, 육의 양식을 통해서 영원한 양식을 깨달아 그 ‘생명의 양식인 말씀을 구하는 자는 영생인 것’이다. ‘누구든지 제 목숨을 구원하고자 하면 잃을 것이요 누구든지 나를 위하여 제 목숨을 잃으면 찾으리라’(마16:25).
성도는 반드시 진리의 말씀 - ‘알토스’(ἄρτος) - 으로 목말라하는 자라야 하는 것이다. [알토스( ἄρτος ): 떡, 양식]
9, 두드리다 크루오(κρούω) : 두드리다(to knock) 헬라어 원어해석(김준남 목사)
‘…문을 두드리라 그리하면 너희에게 열릴 것이니’(마7:7)
‘…두드리는 이에게는 열릴 것이니라’(마7:8)
‘문을 두드리다’로 번역된 헬라어 '크루오'(κρούω)의 원래 의미는 ‘톡톡 두드리다, 두드리다’로 ‘문’이라는 단어가 들어가 있지 않다. 단순히 ‘열릴 것이다’라는 말에 병행하여 ‘문’이라는 단어를 넣어 독자로 하여금 쉽게 이해하도록 ‘문을 두드리라’로 번역한 것이다.
'크루오'(κρούω)의 의미를 잘 이해하기 위해서는 병행 단어인 ‘열리다’(아노이고 : ἀνοίγω)와 연계하여 보아야 한다. ‘열리다’라는 '아노이고'( ἀνοίγω)는 입을 ‘열다’, 문을 ‘열다’, 책을 ‘펴다’, 눈을 ‘뜨다’의 용례에서 알 수 있듯이 ‘숨겨진 어떤 것이 밝히 보여지다’라는 의미를 가지고 있다.
숨겨진 어떤 것이 밝히 보여지도록 하기 위해 반드시 '크루오'(κρούω) 해야 한다면 그것은 열릴때까지, 끝장날때까지 그리고 죽을때까지 두드려야 함을 의미하는 것이다.
그러면 왜 두드려야 하며 무엇을 그렇게까지 두드려야 하는가? 두드린 결과는 어떤가?
그것에 대한 실마리를 구약에서 찾을 수 있다.
헬라어 '크루오'(κρούω)는 히브리어로 '나카'(נָכָה)이다.
'나카'(נָכָה)는 ‘살해할 목적으로 치다, 죽도록 치다, 죽이다, 파괴하다’라는 의미를 가지고 있다.
구약에서 ‘…너는 그 반석을 치라(나카 : נָכָה) 그것에서 물이 나오리니…’(출17:6)의 사건을 바울은 ‘다 같은 신령한 음료를 마셨으니 이는 그들을 따르는 신령한 반석으로부터 마셨으매 그 반석은 곧 그리스도시라’(고전10:4)라고 해석하고 있다.
정리하면, 두드림의 목적은 신령한 음료를 얻기 위함이고 두드림의 대상은 반석이신 그리스도시며 두드림의 결과는 생수, 성령, 말씀, 진리이다. 언약의 십자가에서 육체(율법)로서의 예수님이 죽어야(κρούω) 비로서 지성소(진리)가 열리게 된다는 것으로 설명할 수 있다. 그리고 그 십자가는 예수님이 내가 되어 말씀의 완성으로써의 죽음인 '다나토스'(θάνατος)의 죽음으로 죽은 곳이다.
성도는 '크루오'(κρούω)의 기도를 통하여 날마다 자기의 옛자아가 죽는 '아포드네스코'(ἀποθνήσκω)의 죽음으로 진리로 사는 자이다.[크루오(κρούω) :두드리다]
10, 두마음 딥쉬코스( δίψυχος ) : 두마음 헬라어 원어해석(김준남 목사)
‘두마음을 가진, 두마음을 품은, 흔들리는, 의심하는’이라는 헬라어 '딥쉬코스'( δίψυχος )는 '둘'이라는 '디스'( δίς )와 '숨,호흡,마음'이라는 프쉬케( ψυχή )가 합쳐진 단어의 파생어이다.
'딥쉬코스'( δίψυχος )라는 단어는 야고보서 1장 8절과 4장8절에 쓰여지고 있다. '두 마음'을 품어 모든 일에 정함이 없는 자로다(약1:8) '두 마음'을 품은 자들아 마음을 성결하게 하라’(약4:8)
야고보는 ‘흔들리는 마음으로써의 두 마음’과 ‘정한 마음’ 그리고 ‘의심하는 마음으로써의 두 마음’과 ‘성결한 마음’을 서로 대조하고 있다.
'두 마음'을 가진 자는 선과 악을 구별하여 가지고 있는 자인데 바로 선악과를 먹고 선악의 주체가 되어 하나님처럼 되버린 인간을 말하는 것이다. 하나님께서 율법을 주시며 ‘지키라(keep)’고 하셨을때도 ‘말씀을 마음으로 새겨라’는 의미로 말씀하셨다.
그러나 스스로 선악의 주체가 되어 선과 악을 나누어 ‘하라, 하지말라’의 율법지킴의 주체가 되어 도리어 다른 사람들을 판단하는 도구로 사용하게 된 것이다. 그 결과 인간은 모든 것에 ‘옳고 그름’을 정하고 자기의 소견에 옳은 대로 행하게 된 것이다. 그 이유를 성경은 왕이 없었기 때문이라고 분명하게 말씀하고 있다(삿17:6). 한마디로 하나님의 말씀을 세상의 윤리, 도덕의 수준으로 바꿔버린 것이다. 성경은 그것을 죄라고 한다.
반면에 ‘정한 마음’과 ‘성결한 마음’을 가진 자는 이 땅에는 없고(롬3:10 – 의인은 없나니 하나도 없으며…) 말씀 육신으로 오신 예수님 한분뿐이다. 예수님만이 한마음(모노게네스; μονογενής)을 가진자이다. 그분이 진정한 왕이시다. '독생자'( μονογενής )이신 예수는 한 마음, 유일한 생명, 생명의 근원으로써의 예수를 의미하는 것으로 '두 마음'생명 없음으로써의 인간과 대조를 이루게 되는 것이다.
예수님이 이땅에 오신 이유가 바로 사망가운데 있는 '두 마음'인 인간에게 영원한 생명 '한 마음'을 주시기 위해서이다. 사도행전 4장 24절 ‘그들이 듣고 '한 마음'으로 하나님께 소리를 높여 이르되…’에서'한 마음'으로’는 사도들이 서로 서로 마음을 합쳐 '한 마음'으로 기도한 것이 아니라, 한 마음이신 예수의 마음으로 기도했다는 의미이다. 한 마음이 있어야 영생을 소유한 산 자가 되는 것이다.
하나님은 말씀으로 천지를 창조하셨다(히11:3). 이 말은 말씀을 담아 창조하셨다는 것이요, 모든 창조물에 말씀이 담겨있다는 것이다. 보이고 느끼는 모든 것에 말씀이 숨겨져 있는데, 두 마음을 가진 인간은 그것을 표피적으로 보아 선과 악으로 나누기에 숨겨진 말씀을 보지 못하는 것이다. '두 마음'으로는 절대로 성경말씀을 이해할 수 없다. 말씀이 곧 하나의 마음, 예수이다. 우리가 예수를 믿는다면 '한 마음'을 가진 것이요, '두 마음'은 버린 것이다. 성경은 그것을 가리켜 ‘자기부인’이라고 한다. ‘나 자신’을 부인 한다는 말은 곧 '두 마음'인 나를 부인 한다는 말이다. 우리 눈에 좋아 보이는 그 속에 말씀이 있고 좋아 보이지 않는 그 속에서도 말씀이 있다. 어떠한 상황과 사건 속에서도 말씀을 볼 수 있는 자가 말씀이 있는 자요, 진정으로 예수를 믿는자이다. 그리고 그가 바로 '딥쉬코스'
( δίψυχος )가 아닌 '모노게네스'( μονογενής)의 삶을 사는 자요, 지금 여기에서부터 영원히 천국을 누리며 살아가는 성도인 것이다. [딥쉬코스( δίψυχος ) : 두마음]
원어단어 ‘ㅁ’ 에 해당하는 단어들
1. 믿음 2. 머리 3. 미혹하다 4. 마음 누스(νοῦς) 5. 마음 칼디아(καρδία)
1. 믿음 피스티스(πίστις) : 믿음 헬라어 원어해석(김준남 목사)
‘믿음으로 모든 세계가 하나님의 말씀으로 지어진 줄을 우리가 아나니 보이는 것은 나타난 것으로 말미암아 된 것이 아니니라’(히11:3)
‘믿음’으로 번역된 헬라어 ‘피스티스’ (πίστις)는 기본적으로 ‘설득, 확신, 진리에 대한 확신, 믿음, 충성, 성실’이라는 의미이며, ‘확신하다, 화해하다, 동의하다, 친구로 만들다, 순종하다, 신뢰하다’라는 뜻을 가진 ‘페이도’(πείθω)에서 유래된 단어라는 점에서 ‘…와 화해가 된 상태, …와 친구가 됨’을 전제로 한 ‘신뢰와 믿음’이라는 의미를 가지고 있는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국어 사전이 ‘믿음’을 ‘어떤 사실이나 사람을 믿는 마음’이라고 정의한 것을 생각하여 단순히 어떤 것을 굳게 믿는 마음인 신념(信念)과 같은 것으로 성경에서 말하는 ‘믿음’(πίστις)을 정의해서는 안되는 것이다.
‘믿음’(πίστις)이라는 히브리어 ‘아만’(אמן)이라는 단어를 파자하면 ‘하나님의 말씀을 안으로 간직함’이라는 의미이다. 그래서 성경은 ‘믿음’(πείθω)이 곧 ‘믿음’ “믿음의 말씀과 네가 따르는 좋은 교훈으로 양육을 받으리라.”(딤전4:6)이며, 모든 세계가 ‘믿음’(πείθω)인 하나님의 ‘말씀’으로 지어졌다(히11:3)고 말하고 있다.
그래서 주님의 ‘너희 믿음(πείθω)대로 되라’(마9;29, 마15:28)는 말씀도 ‘너희가 가지고 있는 하나님 말씀으로써의 그 믿음(πείθω)대로 되라’는 의미를 가지고 있는 것이다.
그리고 이것은 ‘너희는 내가 명하는 대로 행하면 곧 나의 친구라’(요15:14)는 말씀에서 알 수 있듯이 말씀대로 행하므로(포이에오 : ποιέω) 말씀이 되어(ποιέω) 예수님의 친구가 되고 그래서 하나님과 화해가 된 상태로써의 그‘믿음’(πίστις)을 말하는 것이다.
세상과 친구가 되면 하나님과 원수가 된다는 말씀(약4:4)도 세상과 친구가 되어버린 상태에서의 믿음은 그 자체가 사망이라는 것을 말씀하고 있는 것이다. 세상이 주는 믿음, 선악의 주체가 된 나의 믿음은 결국 멸망 당할 수 밖에 없는 욕심(에피뒤미아 : επιθυμια)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예수님께서도 진리의 말씀을 간직한 ‘네 믿음이 너를 구원하였다’(마9:22, 막5:34, 막10:52,막7:50, 눅8:48, 눅17:19, 눅18:42)고 말씀하신 것이며, 생명의 말씀을 간직한 ‘저희의 믿음을 보시는’(마9:2, 막2:5, 눅5:20, 눅17:19) 것이고 그 말씀, 그 ‘믿음대로 되라’(마9:29, 마15:28)고 말씀하시는 것이다.
그러므로 ‘믿음’(πίστις)의 성도란 하나님과 화해한 자이며, 세상의 친구가 아닌 예수님의 친구가 된 자로서 ‘하나님의 말씀, 진리의 말씀, 생명의 말씀만 간직한 자’인 것이다. [피스티스(πίστις) : 믿음]
2. 머리 켑할레(κεφαλ?) : 머리 (head)헬라어 원어해석(김준남 목사)
‘오직 사랑 안에서 참된 것을 하여 범사에 그에게까지 자랄지라 그는 ‘머리’니 곧 그리스도라’ (엡4:15)
‘머리’로 번역된 ‘켑할레’(κεφαλ?)는 ‘잡는다’의 뜻을 가진 기본어 ‘캅토’(kapto)에서 유래된 단어로 ‘(잡기가 가장 쉬운 부분으로서)‘머리’ (문자적으로 혹은 상징적으로)‘머리’ (은유적으로) 주인, 남편, 그리스도, 모퉁이돌’이라는 의미를 가지고 있다. 여기에서 파생된 중성 명사인 ‘켑할라이온’(κεφ?λαιον)은 ‘중점, 주요한 것, 계산된 돈의 합계, 액수’의 의미로 쓰이며, 또 다른 여성명사인 파생어 ‘켑할리스’(κεφαλ??)는 ‘가장 높은 부분, 맽 끝, 기둥머리, 두루마리로 된 책’이란 의미이다. 하나님의 모든 창조물은 자기의 ‘머리’(κεφαλ?)를 가지고 있다. 그렇지만 성경에서 말하는 유일한 ‘머리’(? κεφαλ? : 호 켑할레)는 오직 그리스도(크리스토스 : Χριστ??) 밖에 없다(엡4:15)는 사실이다. 이 말씀은 그리스도로 머리 삼지 않는 모든 창조물은 존재의 의미가 없으며 존재도 아닌 것이 된다는 의미이다.
그리고 그리스도로 ‘머리’ 삼으면 그리스도의 몸이 되고(고전12:27), 그렇게 되면 그리스도는 그리스도로 ‘머리’ 삼은 자의 유일한 주인이며 남편이 되는 것이다. 그렇지만 예수님은 ‘여우도 굴이 있고 공중의 새도 집이 있으되 인자는 그 머리(? κεφαλ?)를 둘 곳이 없다’(눅9:58)고 말씀하고 있다. 예수님은 우리의 ‘머리’가 되셔서 우리를 하나님의 아들로 만드시기를 원하시는데 인간들은 예수로 ‘머리’삼으려고 하지 않는다 의미이다. 이것이 선악과를 먹은 인간이 선악의 주체가 되어 하나님 처럼 되었기 때문에 자기 스스로 가짜의 ‘머리’를 ‘머리’삼아 살기 때문인 것이다. 그래서 성경은 그들을 향하여 ‘허물과 죄로 죽은 자’(엡2:1)라고 말하는 것이다.
‘켑할레(κεφαλ?)로 번역된 히브리어가 ‘머리, 꼭대기, 정상, 처음, 시작, 가장 중요한, 총계, 족장’의 뜻을 가진 ‘로쉬’(???)인데 이를 파자하면 ‘진리의 말씀을 듣고 의롭게 됨으로 하나님께서 진리가 되게 하시는 그 ‘머리’’란 의미를 가지고 있으며, 그가 곧 하나님의 말씀이신 예수 그리스도를 가리키는 것이다. 그리고 예수님은 선악의 주체로서의 율법인 내가 되어 십자가에서 죽으심으로(갈5:24) 하나님 처럼 된 내 ‘머리’(κεφαλ?)를 자르시고 그의 머리를 넘겨(파라디도미 : παραδ?δωμι)주셨다.“자기 아들을 아끼지 아니하시고 우리 모든 사람을 위하여 내주신 이가 어찌 그 아들과 함께 모든 것을 우리에게 주시지 아니하겠느냐."(롬8:32).
그러므로 성도는 그렇게 가짜의 머리가 잘린 자들(계20:4)이며 이제는 그리스도로 ‘머리’(κεφαλ?) 삼아 사는 자로서(갈2:20) 하나님의 말씀의 섬김을 받는 성전(고전3:16)이고, 이미 하나님의 택하신 족속, 왕 같은 제사장, 거룩한 나라, 그의 소유된 백성으로(벧전2:9) 하나님 나라를 사는 자이다. [켑할레(κεφαλ?) : 머리 (head)]
3. 미혹하다 플라나오(πλαν?ω) : 미혹하다 헬라어 원어해석(김준남 목사)
‘거짓 그리스도들과 거짓 선지자들이 일어나 큰 표적과 기사를 보여 할 수만 있으면 택하신 자들도 미혹하리라’(마24:24)
‘미혹하다’라고 번역된 헬라어 ‘플라나오'(πλαν?ω)는 ‘(신앙에서) 이탈, 기만, 미혹, 죄, 방랑, 정처 없이 헤메는 것, 실수, 잘못’의 뜻을 가진 ‘플라네’(πλ?νη)에서 파생된 단어로 ‘(안전, 진리, 도덕에서 부터) 방황하다, 헤메다, 속다, 죄를 짓다, 넋을 잃다, 벗어나게 하다, 빗나가게 인도하다, 옳은 길에서 벗어나게 인도하다, 오해하다, 진리에서 벗어나게 하다, 죄를 범하게 하다’의 의미를 가지고 있다. 성경은 인간을 가리켜서 ‘어두움에 묶여 있는 자(요1:5), 허물과 죄로 죽은 자(엡2:1), 속은 자(딛3:3), 길을 잃어버린 자(마18:12),성경도 하나님의 능력도 알지 못하여 오해한 자(딛3:3)’라고 말씀하고 있다. 그것이 바로 선악과를 먹고 하나님 처럼 된 인간의 실존인 것이다. 그래서 만일 우리가 죄가 없다 - 나는 어두운 자, 죽은 자, 속은 자, 길을 잃어버린 자, 하나님을 오해한 자가 아니라고 말하면 스스로 속이는(πλαν?ω) 것이요,
또 진리가 우리 속에 있지 않다(요일1:8)는 것을 증명하는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마지막 날에는 많은 사람이 주님의 이름으로 와서 자기가 예수라 하여 많은 사람을 미혹하며(막13:6), 그러한 거짓 그리스도들과 거짓 선지자들이 일어나 큰 표적과 기사를 보여주며 미혹한다는 것이다(마24:24). 그들이 미혹하는(πλαν?ω) 것은 눈에 보이는 것으로만 보게 하는 것이며, 그 속에 내용으로 담고 있는 말씀을 보지 못하게 하는 것이다. 그래서 예수님께서 ‘너희가 사람의 미혹을 받지(πλαν?ω) 않도록 주의하라(블레포 : βλ?πω)’(막13:5)고 말씀하시면서 끊임없이 선악의 주체로 하나님 없이도 살 수 있다는 미혹에 빠지지 말라고 경고하고 있는 것이다.
하나님은 그렇게 스스로 살았다고 하는 자 그러나 실제로는 그 속에 진리의 말씀이 없는 죽은 자(네크로스 : νεκρ??)의 하나님이 아니요, ‘나 죽은 자 맞습니다’라고 고백하며 하나님의 생명의 말씀에 목말라 하는 진정으로 산 자(자오 : ζ?ω)의 하나님이신 것이다(마12:27). 오늘도 그러한 미혹에 빠져 있다면 여전히 ‘음행하는 자, 우상 숭배하는 자, 간음하는 자, 탐색하는 자, 남색하는 자, 도적이나 탐욕을 부리는 자, 술 취하는 자, 모욕하는 자, 속여 빼앗는 자’가 되는 것이요
하나님의 나라를 유업으로 받지 못하게 되는 것이다(고전6:9). 그러므로 성도는 자신의 처음자리를 알아 선악의 주체자로서 율법을 지킬 수 있다는 미혹에(πλαν?ω) 빠지지 않는 자이며 그래서 오늘도 하나님의 생명의 말씀이 없이는 살 수 없어 그 진리의 말씀에 목말라 하는 자요, 눈에 보이는 것에 미혹받거나 오해하거나 길을 잃어버리는 것이 아니라 그 속에 담겨진 하나님의 말씀만 보아(호라오) 오직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신 그리스도와 연합된(union Christ) 자인 것이다. [플라나오(πλαν?ω) : 미혹하다]
4. 마음 누스(νοῦς) : 마음 헬라어 원어해석(김준남 목사)
‘이에 그들의 마음을 열어 성경을 깨닫게 하시고’(눅24:45)
‘마음’으로 번역된 헬라어 단어 ‘누스’((νοῦς)는 ‘하나님 또는 인간의 사고, 감각, 또는 의지로서의 마음’을 의미한다. ‘누스’((νοῦς)라는 단어가 ‘지각하다, 이해하다, 인지하다, 지식을 갖다, 친밀하게 알다’라는 뜻의 ‘기노스코’
(γινώσκω)의 어간에서 유래된 것으로 본다면, ‘누스’((νοῦς)가 의미하는 마음은 단순히 감각적 능력에 상대하여 개념적으로 사유하는 능력으로써 직관적으로 판단하고 인식하는 능력인 이성의 의미를 뛰어 넘어 반드시 깨달아 알아야 하는 마음으로써의 이성과 생각을 의미한다고 볼 수 있다. 그런 의미에서 영적 생명의 중심 자리로서의 ‘마음’(칼디아 : καθαρός)과 약간의 차이가 있다.
개역성경에서 대부분 ‘마음’이라고 번역한 ‘누스’(νοῦς)라는 단어가 사용되고 있는 용례를 살펴보고 아울러 다른 번역서를 보면 그 의미를 좀더 명확하게 알 수 있다.
‘만일 내가 방언으로 기도하면 내 영은 기도할지라도 내 이성(νοῦς)은 이해하지 못합니다’(고전14:14)우리말 성경)
‘그들이 자기 지식 속에 하나님 두기를 싫어하매 하나님께서도 그들을 버림받은 생각(νοῦς)에 내주사’ (롬1:28, 킹제임스 흠정역)
‘… 깨달은 마음(νοῦς)으로 다섯 마디 말을 하는 것이 일만 마디 방언으로 말하는 것보다 나으니라' (고전14:19) 우리말 성경에서는 ‘깨달은 마음’을 ‘깨달은 이성’으로, 킹제임스 흠정역에서는 ‘이해’로 번역함.
‘… 너희는 다 같은 것을 말하고, …같은 생각(νοῦς)과 같은 판단 안에서 완전히 함께 결합하라’(고전1:10, 킹제임스 흠정역)
정리하면, 누스(νοῦς)는 깨달아 알아야 하는 마음으로써의 이성과 생각이기에 세상이 합의해 놓은 단순한 지식, 이해, 판단, 생각, 이성의 의미로 오해하지 말아야 하며 그러기에 그‘마음’(νοῦς)도 내가 노력해서 얻을 수 있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은혜로 주어지는 것임을 알아야 한다. ‘누가 주의 마음(νοῦς)을 알았느냐?’(롬11:34) 그래서 예수님은 무지한 그들이 성경을 깨달을 수 있도록 그들의 ‘마음’(νοῦς)을 열어 주신 것이다(눅24:45).
그러므로 성도는 하나님의 은혜로 ‘마음’(νοῦς)이 변화되고 새롭게 된 자이기에 하나님의 선하시고 기뻐하시고 온전하신 뜻을 무엇인지 분별하는 자(롬12:2)인 것이다. [누스(νοῦς) : 마음]
5. 마음 칼디아(καρδία) : 마음 헬라어 원어해석(김준남 목사)
‘나는 마음이 온유하고 겸손하니 나의 멍에를 메고 내게 배우라 그리하면 너희 마음이 쉼을 얻으리니’(마11:29)
‘마음’으로 번역된 헬라어 단어‘칼디아’(καρδία)는 ‘마음, 심장, 영적 생명의 중심 자리, 영혼, 생각, 열정, 욕망’등의 의미를 가지고 있다. 히브리어 성경을 헬라어로 번역한 70인역에서 ‘칼디아’(καρδία)는 히브리어 ‘속사람, 마음, 의지, 가슴, 이해력’이라는 뜻을 가진 ‘레브’(לב)를 번역한 단어로 그 ‘마음’은 정서, 의지와 지성까지도 포함하는 광범위한 의미로 사용되었으며, 어떤 것에서나 그 ‘중심’으로 사용되었다.
‘레브’(לב)를 파자하면 ‘배우고 연구하는 집’이라는 의미를 가지게 되는데 이것은 ‘마음’(καρδία) 이라는 것이 영적 생명을 결정 할만큼 중요한 것이라는 전제하에 ‘중심처, 근원, 장소, 터’라는 의미로 그곳에 무엇을 담느냐에 따라서 어떤 ‘마음’(καρδία)이 되느냐를 결정하게 되는 것이다.
즉, ‘선한 사람은 마음(καρδία)에 쌓은 선에서 선을 내고 악한 자는 그 쌓은 악에서 악을 내나니 이는 마음(καρδία)에 가득한 것을 입으로 말함이니라’(눅6:45)는 말씀은 ‘마음’(καρδία)자체가 선하고 악한 것이 있는 것이 아니라, 그 ‘마음’(καρδία)에 선을 쌓으면 선한 자가 되고 악을 쌓으면 악한 자가 되는 것임을 가르쳐주고 있다.
그런데 성경은 ‘사람의 마음에서 나오는 것은 악한 생각과 살인과 간음과 음란과 도둑질과 거짓 증언과 비방이다’(마15:19)라고 말하고 있다. 이미 하나님께서도 ‘사람의 마음(לב, καρδία)에 생각하는 모든 계획이 언제나 악한 것 뿐이다’(창6:5)라고 말씀하셨는데, 이것이 바로 하나님처럼 되어 선악의 주체가 되버린 두 마음을 품은 인간의 실존임을 말해주는 것이다.
그런데 허물과 죄로 죽은 우리(엡2:1)가 예수님께서 죽으심으로 그리고 우리의‘마음’(καρδία)에 그리스도의 피가 뿌려져 하나님께 나아갈 수 있는 참 ‘마음’(καρδία)을 갖게 되었다(히10:22)는 사실이다. 이것은 이미 ‘새 마음’(καρδία)을 너희에게 주겠다’(겔36:26)고 말씀하신 하나님의 언약의 말씀이 있었기 때문이며 동시에 구원은 오직 하나님의 열심으로만 이루어지는 하나님의 은혜(only by grace)임을 보여주는 것이다.
그러기에 성도는 오직 유일한 보물(데사우로스 : θησαυρός)인 그리스도, 진리의 말씀을 그 ‘마음’(καρδία)으로 품은 자(마6:21)이며, 그가 바로 하나님을‘마음’(καρδία)을 다하여 사랑하는 자(막12:30)가 되는 것이다.
[칼디아(καρδία) : 마음]
6, 무장 파노플리아(πανοπλία) : 무장 (full armor) 헬라어 원어해석(김준남 목사)
‘더 강한 자가 와서 그를 굴복시킬 때에는 그가 믿던 무장을 빼앗고 그의 재물을 나누느니라’ (눅11:22)
‘무장’으로 번역된 헬라어 ‘파노플리아’(πανοπλία)는 ‘모든, 전부, 전체의’라는 뜻을 가진 ‘파스’(πᾶς)와 ‘..에 열중하다’의 뜻을 가진 ‘헤포’(hepo)라는 단어에 어원을 둔 ‘도구, 용구, 장비, 무기, 갑옷’의 뜻을 가진 ‘호플론’
(ὅπλον)의 합성어에서 파생된 단어로 ‘(한 벌의 갑옷으로써)완전무장, 전신갑주’의 의미를 가지고 있다.
그리고 ‘호플론’(ὅπλον)에서 파생된 단어가 ‘호플리조’(ὁπλίζω)인데 ‘무장하다, 무기를 마련하다, 제공하다, 스스로 갖추다, (은유적으로) 같은 마음을 품다’의 의미이다.
‘파노플리아’(πανοπλία)가 말하는 ‘무장’은 기본적으로 ‘전쟁에 필요한 장비 또는 장비를 갖춤’이라는 의미와 함께 은유적으로는 ‘어떤 일에 필요한 마음이나 사상, 기술을 단단히 갖춤’이라는 의미를 가지고 있다.
그런 의미에서 본다면, 인간의 ‘무장’(πανοπλία)이란 선악의 주체가 되어 스스로 하나님 처럼 되버린 자신의 마음, 생각 그리고 말 그 자체라고 볼 수 있으며 그것만이 자신을 영원히 지킬 수 있는 전신갑주(πανοπλία)로 여기고 있는 것이다. 그러나 그것은 허물과 죄로 죽은 마음, 생각 그리고 말에 불과한 것이며 결국 완전한 '멸망'(아폴뤼미 : ἀπόλλυμι)만 가져올 뿐이다(마16:25).
그래서 사도바울은 ‘그 하나님의 그 전신갑주(호 파노플리아 호 데오스 : ὁ πανοπλία ὁ θεός)를 입으라’고 말하면서(엡6:11) 썩어질 인간 자신의 전신갑주를 버리고 하나님의 마음인 온전한 그 말씀이라는 전신갑주(πανοπλία)를 입을 것을 명령하고 있다. 그것은 바로 하나님의 마음 곧 그리스도 예수의 마음을 품는 것이며(빌2:5) 하나님의 말씀으로 충만한 것을 의미하는 것이다.
하나님의 전신갑주(πανοπλία)를 입어야 하는 이유는 거짓의 아비이며 거짓 비방자(디아볼로스 : διάβολος)인 그가 말하는 거짓말(마귀의 간계)에 대적하기 위함이며(엡6:11) 하나님의 창세전 언약인 그 약속 위에 굳게 서기(히스테미 : ἵστημι) 위한 것이다(엡6:11).
그러므로 성도는 자신의 전신갑주가 자신을 지켜 줄 수 없으며 영원한 생명을 줄 수도 없음을 깨달아 그리스도를 위하여 자신의 전신갑주인 목숨을 버린 자이다. 뿐만 아니라 오늘도 이 땅에 살면서 자신을 위해서 밖에 살 수 없는 무력한 존재임을 날마다 폭로 당할 때마다 ‘나는 날마다 죽노라’라는 사도바울의 고백을 하면서 오직 하나님의 은혜만을 구하므로 하나님의 마음인 그 말씀으로 충만한 진정한 하나님의 전신갑주(πανοπλία)를 입은 자이다.
[파노플리아(πανοπλία) : 무장]
원어단어 ‘ㅂ’ 에 해당하는 단어들
1. 불순종 2. 빛 3. 부끄러워 하다 4,비방하는 5. 비유 6.복종하다 7.변화하다 8, 복음 9, 복 10, 번성하다[유오도오(εὐοδόω) 11, 번성하다.플레뒤노 (πληθύνω) 12, 불순종 13, 보다 14, 부활 15, 보물 16, 병들다 16, 비밀
1. 불순종 아페이데이아(ἀπείθεια ) : 불순종 헬라어 원어해석(김준남 목사)
‘불신, 불순종’으로 번역된 헬라어 단어 ‘아페이데이아’(ἀπείθεια )는 ‘설득할 수 없는, 반항적인, 순종하지 않는, 거스리는, 고집 센’이라는 뜻을 가진 형용사 ‘아페이데스’(ἀπειθής)에 서 유래되었다. 그리고 ‘아페이데스’
(ἀπειθής)는 부정적 불변사로써 ‘아’(α)와 ‘확신하다, 동의하다, 친구로만들다, 신뢰하다, 화해하 다, 경청하다’라는 뜻의 ‘페이도’(πείθω)의 합성어이다.
‘순종치 아니함’(롬11:30,32,히 4:6,11), ‘불순종’(엡2:2 ; 5:6, 골3:6 -헬라어 원문에는 있으나 개역성경 번역서에는 빠져있고 표준새번역에는 기록됨)으로 번역된 '아페이데이아'(ἀπείθεια)는 단순히 ‘순종하지 않음, 거역함’는 의미보다는 ‘믿지 않음, 경청하지 않음, 화해하지 않음, 친구로 만들지 않음, 동의하지 않음’이라는 의미로 보아야 한다. 70인역에서 ‘아페이데스’(ἀπειθής)로 번역한 히브리어 단어는 ‘마라’(הרם)인데 ‘쓰다, 반역하다, 완고하다, 불순종하다, 반항하다’라는 뜻을 가지고 있다.
헬라어 명사 ‘아페이데이아’(ἀπείθεια )의 의미는 신명기 9장24절에 보면 ‘내가 너희를 알던 날부터 너희가 항상 여호와를 거역하여왔느니라’는말씀에서 구체적으로 알 수 있다.
특별히 ‘거역하여(마라 : םרה )왔느니라(하야 : חיה )’를 함께 쓰고 있는 부분을 생각해 보아야 한다.
사실 이스라엘 백성들이 여호와의 율법을 지키기 위해 많은 수고와 노력을 하였다. 그런데 하나님은 그런 백성들을 향하여 ‘처음부터, 항상 거역하여 왔다’고 말씀하고 있다. 무슨 뜻인가?
히브리어 동사 ‘하야’(חיה)는 ‘존재하다, 일어나다, 발생하다, 되다, 있다’는 뜻의 존재 동사이다.
즉, 원래부터 거역하는 존재, 불순종의 존재라는 뜻이기에 그가 하는 모든 행위는 그 자체가 거역하는 것이며 불순종이 되는 것이다. 이것은 선악과를 먹고 하나님처럼 돼 버린 인간의 실존을 말하는 것으로 하나님의 말씀을 자기 식으로 듣고 행하게 되었다.
결국, 그가 하는 모든 것은 믿지 않고, 경청하지 않고, 화해하지 않는 불순종(아페이데이아 : ἀπείθεια)이 되는 것이다. 그래서 바울은 그들을 가리켜서 ‘불순종의 아들들, 본질상 진노의 자식’(엡2:2,3)이라고 말하고 있는 것이다.
그러기에 성도의 순종이란, '불순종'(ἀπείθεια )의 반대 개념으로 ‘하나님의 말씀을 경청하고 믿음으로 그 믿음이 된 상태, 하나님과 화해하여 하나 됨, 그리고 예수 그리스도를 친구로 삼아 그리스도로 사는 자의 상태’로 이해할 수 있다 [불순종: 아페이데이아(ἀπείθεια]
2. 빛 프호스(φῶς) : 헬라어 원어해석(김준남 목사)
‘예수께서 또 말씀하여 이르시되 나는 세상의 빛이니 나를 따르는 자는 어둠에 다니지 아니하고 생명의 ‘빛’을 얻으리라’(요8:12)
‘빛’으로 번역된 헬라어 ‘프로스’(φῶς)는 ‘빛, 불빛, 별빛, 등빛, (은유의 의미로) 하나님의 빛, 진리의 빛, 마음의 빛’이라는 의미를 가지고 있는 단어이며, 지금은 쓰이지 않아 없어진 ‘반짝이다, 특히 빛에 의해 드러나게 하다’라는 뜻을 가진 ‘프하오’(phao)라는 단어에 어원을 두고 있다. 그리고 이 단어의 연장형으로써 동사인 ‘화이노’(φαίνω)는 ‘밝게(빛나게)하다, 보이다, 비치다, 빛을 내뿜게 하다, 눈부시다, 분명해지다, 나타나다’의 뜻을 가지고 있으며 이 단어에서 파생된 남성 명사이며 ‘빛을 비추는 것, 발광체, 빛, 광채, 반짝임’의 뜻을 가진 ‘프호스텔’(φωστὴρ)이 있다.
‘프로스’(φῶς)로 번역된 ‘빛’이라는 뜻의 히브리어 단어는 ‘오르’(אוֹר)이며 이를 파자하면 ‘하나님이 시작하신다’
는 의미로 하나님 그분이 ‘빛의 본체’라는 의미와 함께 하나님이 시작하시는 그 모든 것이‘빛’(φῶς)이라는 것을 의미하는 것이다. 그런데 유한한 인간은 무한하신 하나님을 볼 수도 없고 느낄 수도 없다. 한마디로 감지할 수 없을 뿐만 아니라 감지 되지도 않는다.
그래서 하나님은 하늘의 궁창에 ‘광명체’(마오르 : מאוֹר)를 두신 것이다(창1:14).
헬라어로는 ‘프호스텔’(φωστὴρ) ‘마오르’(מאוֹר)의 의미는 ‘빛, 광명체, 방광체, 등잔’의 뜻으로 쓰이며, 이를 파자하면‘말씀으로 하나님이 시작하신다’라는 의미를 가지고 있다.
즉, 인간으로서는 도저히 알수 없는 너머의 하나님은 창세전 언약에 따라 어두움인 이 세상에‘빛’(φῶς)을 비추심으로 구원의 여정을 시작하신 것이다(요1:15). 성경은 이를 말씀이 육신이 되어 우리 가운데 거하게 되었다.
(요1:14)고 표현하고 있으며, 말씀 육신이신 예수님은 ‘나는 세상의 빛(φῶς)이다’고 선포하시면서 나를 따르는 자는 더 이상 어둠에 있지 않고 생명의 빛(φῶς)을 얻는다고 말씀하고 있다.
‘빛’이신 예수님을 따른 다는 것은 ‘나는 빛이 아니라 어둠입니다’라는 고백이며 이것은 ‘나는 스스로 생명을 얻을 수 없습니다, 죽은 자 맞습니다’라는 자기 부인을 의미하며, 예수님의 십자가를 자기 십자가로 지고 따라가는 자라는 것을 의미하는 것이다(요16:24). 성도는 십자가에서 내가 죽고 그리스도로 사는 자(갈2:20)이며 이것은 내 말이 죽고 그리스도의 말씀으로 사는 자를 말하는 것이다. 그리고 빛이신 말씀을 품은 자이기에 세상의 ‘빛’(φῶς)이라 칭함을 받는 것이다(마5:14). 또한 두 마음이 하나님의 마음인 한 마음으로 된 자로서 어둠을 통해 ‘빛’(φῶς)을 알아보는 자, 빛의 아들(살전5:5)이 된 자 그리고 빛의 갑옷(롬13:12)을 입은 자인 것이다. [프호스(φῶς) : 빛]
3. 부끄러워 하다 에파이스퀴노마이(?παισχ?νομαι):부끄러워 하다 헬라어 원어해석(김준남목사)
‘내가 복음을 부끄러워하지 아니하노니 이 복음은 모든 믿는 자에게 구원을 주시는 하나님의 능력이 됨이라 먼저는 유대인에게요 그리고 헬라인에게로다’(롬1:16)
‘부끄러워 하다’로 번역된 헬라어 ‘에파이스퀴노마이’(?παισχ?νομαι)는 다른 말과 병합해서 사용될 때 본질적으로 ‘..에, ..위에’의 뜻을 가진 전치사 ‘에피’(?πι)와 ‘더러운, 저속함, 불명예, 상스러운, 부끄러운’이라는 형용사
‘아이스코스'(α?σχρ??)에서 유래되었으며 ‘(스스로) 수치를 느끼다, 부끄러워 하다, 추하게 하다, 모욕하다, 부끄러움이 가득하다, 부끄럽게 하다’의 뜻을 가진 ‘아이스퀴노’(α?σχ?νω)의 합성어에서 파생된 단어로 ‘(무언가에 대해) 부끄럽게 여기다, 부끄러워 하다’의 의미를 가진 단어이다.
‘에파이스퀴노마이’(?παισχ?νομαι)가 말하는 ‘부끄러워 하다’라는 말은 국어사전이 정의하고 있는 ‘부끄러운 태도를 나타내다, 어떤 것을 부끄럽게 여기다’는 단순한 의미가 아니라 ‘진리의 말씀이 없기에 진리의 말씀을 바로 보지(호라오)못하여 그 말씀에 대해 부끄러워하고, 그 말씀을 부끄럽게 여기다’라는 성경적 의미로 이해해야 한다. 그래서 우리에게 구원을 주시는 십자가에 못 박힌 그리스도가 유대인에게는 거리끼는 것이요 이방인에게는 미련한 것이 되어(고전1:23) 그들은 그리스도를 믿는 것을 부끄럽게 여길 (?παισχ?νομαι) 수 밖에 없는 것이다.
그렇지만 사도 바울은 진리의 말씀을 가지고 있기에 그들이 부끄러워하는 복음을 오히려 모든 믿는 자에게 구원을 주시는 하나님의 능력이 됨을 알기에 결코 부끄러워할(?παισχ?νομαι) 수 없었던 것이다.
예수님도 ‘누구든지 이 음란하고 죄 많은 세대에서 나와 내 말을 부끄러워하면(?παισχ?νομαι) 인자도 아버지의 영광으로 거룩한 천사들과 함께 올 때에 그 사람을 부끄러워하리라’(막8:38, 눅9:26)고 말씀하시면서 말씀이신 예수를 부끄러워하면 마지막 날에 오히려 영원한 사망으로 심판받는 부끄러움을 당할 것에 대해서 경고하고 있다.
이것은 선악과를 먹고 선악의 주체가 된 인간은 스스로 하나님 처럼 되어 참 하나님의 말씀을 오히려 부끄러워하는 허물과 죄로 죽은 존재(엡2:1)가 되어 버렸다는 것을 보여주는 것이다. 그러므로 성도는 진정으로 하나님 처럼의 내 말을 부끄러워하여 자기를 부인하고 자기 십자가를 짐으로 그리스도와 함께 살아난 자이며, 이제는 하나님이 너희들의 하나님이라 일컬음 받으심을 부끄러워하지(?παισχ?νομαι) 아니하시고 (히11:16) 우리로 하나님 거하시고 말씀으로 섬기시는 성전 삼으신 바 된(고전3:16). 하나님의 백성이 된 자이다.
[에파이스퀴노마이(?παισχ?νομαι) : 부끄러워 하다]
4,비방하는 블라습헤모스(βλ?σφημο?):비방하는 헬라어 원어해석(김준남 목사)
‘내가 전에는 비방자요 박해자요 폭행자였으나 도리어 긍휼을 입은 것은 내가 믿지 아니할 때에 알지 못하고 행하였음이라’(딤전 1:13)
‘비방하는’으로 번역된 헬라어 ‘블라습헤모스’(βλ?σφημο?)는 ‘(본래적 의미로는) 방해하다,(함축적으로는)해롭게하다, 해를 끼치다, 다치게하다’라는 뜻의 ‘블랍토’(βλ?πτω와 ‘진술, 소문, 평판, 명성’의 뜻을 가진 ‘훼메’(φ?μη)의 합성어에서 파생된 단어로 ‘상스러운, (사람에 대하여) 중상의, (하나님에 대하여) 불경건한, 악한 말의, 중상하는, 비방하는 독설의, 참람한’의 의미를 가지고 있으며 여기서 파생된 명사 ‘블라습헤미아’(βλασφημ?α)는 (하나님께 대항하여)'중상, 참람, 조롱, 상처를 주는 말, 불경스럽고 비난하는 말, 신적 위엄을 손상시키는 말’이란 뜻이다.
정리하면, ‘블라습헤모스’(βλ?σφημο?)는 말과 밀접한 관계가 있는 단어로써 사도바울이 자기 자신을 가리켜 ‘비방자’(βλ?σφημο?)라고 고백한 것은 하나님의 마음으로써의 말씀을 알지 못하고 율법에 묶여 아는 것처럼 말했다는 것을 의미한다. 이와는 반대로 선악의 주체가 되어 하나님 처럼의 삶을 살아가는 자를 대표하는 대제사장은 예수님이 자기를 가리켜 ‘하나님의 아들 그리스도’라고 했을 때 예수님을 향하여 신성 모독하는 말(블라습헤미아 : βλασφημ?α)을 했다고 말하고 있다(마26:65).
이와 같이 진리의 말을 가지고 있는 자에게 있어서 비진리의 말은 성령을 훼방하는 것이요, 하나님의 말씀을 비방하는 것이 되지만, 오히려 비진리의 말? 하나님 처럼 된 인간의 말을 가지고 있는 자에게 있어서 진리의 말은 참람한 말이 될 수 밖에 없는 것이며 하나님 처럼 된 자신들을 향한 신성 목독(目讀 :눈으로 보며 읽음)이라고 떠드는 것이다.
그래서 선악의 주체가 된 사람에 대하여 훼방하는 것은 사하심을 얻되 성령(진리의 말씀)을 훼방하는 것은 사하심을 얻지 못하는 것은 당연한 것이다(마12:31). ‘말’을 가지고 있는 자는 반드시 심판을 받게 되어있다. 비진리의 말을 가진 자는 자기가 가지고 있는 비진리의 말로 심판받아 하나님의 생명의 말씀이 없는 어두움 속에 영원히 묶이게 되는 것이며, 반대로 진리의 말을 가진 자는 이 땅에서 비진리의 말을 가진 가짜 하나님, 하나님 처럼 되버린 자들에 의해 심판을 받게 된다.
그래서 그들은 스데반이 진리의 말씀을 가지고 전했을 때 ‘스데반이 모세와 하나님을 모독하는 말을 했다’고 하여 고소하였으며 돌로 쳐 죽였던 것이다(행7:59). 그러므로 진리의 말씀을 품은 성도는 더 이상 하나님의 말씀을 비방하는(βλ?σφημο?)자가 아니요, 오히려 선악의 주체가 되어 비진리의 말을 가진 자들로부터 그 진리의 말씀을 전하는 것 때문에 참람한(βλ?σφημο?) 자라는 말을 들을 수 있는 자이다. [블라습헤모스(βλ?σφημο?) : 비방하는]
5. 비유 파라블레(παραβολή) : 비유 헬라어 원어해석(김준남 목사)
‘비유가 아니면 말씀하지 아니하시고 다만 혼자 계실 때에 그 제자들에게 모든 것을 해석하시더라’(막4:34)
‘비유’로 번역된 헬라어 ‘파라블레’(παραβολή)라는 단어는 ‘병령, 은유, 비교, 예, 우화, 뜻이 깊고 교육적인 말, 금언, 격언, 잠언, 위험’등의 의미를 가지고 있으며, ‘따라 던지다, 비교하기 위하여 옆에 놓다, 비교하다, 스스로 넣다, 스스로 장소나 사람에게 들어가다’의 뜻을 가진 동사 ‘파라발로’(παραβάλλω)에서 파생된 명사다.
특별히 ‘파라발로’(παραβάλλω)는 소유격과 함께 쓰일 때는 ‘곁으로 부터’, 여격과 함께 쓰일 때는 ‘근처에’ 그리고 대격과 함께 쓰일 때는 ‘에 근사하게’라는 뜻을 가진 전치사 ‘파라’(παρα)와 ‘던지다, 아무렇게나 던지다, 쏟다, 삽입하다, 두다’라는 뜻을 가진 동사 ‘발로’(βάλλω)의 합성어에서 유래되었다.
‘비유’‘파라블레’(παραβολή)로 번역되는 히브리어 단어는 ‘잠언, 격언, 속담, 수수께끼, 이야기, 풍유’의 의미를 가진 ‘마샬’(םשל)이다. 이른 파자하면 ‘말씀을 분석하여 배우고 연구하며 가르치는 것’이란 의미이다. 이런 의미에서 성경에서 말하는 비유(παραβολή)는 국어사전이 정의하고 있는 ‘어떤 현상이나 사물을 직접 설명하지 아니하고 다른 비슷한 현상이나 사물에 빗대어서 설명하는 일’이라는 의미 보다는 진리의 말씀을 듣고 그것을 분석하여 배우고 연구하며 가르쳐야 한다는 목적을 전제로 하여 ‘옆에 던져진 것’이란 의미로 볼 수 있는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예수님의 비유(παραβολή)는 단순히 복음을 알기 쉽게 설명하기 위해서 쓰는 화법이 아니라 하나님의 백성들만 들을 수 있고 알 수 있도록 주신 말씀인 것이다. 그래서 예수님은 모든 것을 비유로 말씀하셨고 비유가 아니면 아무 것도 말씀하지 않았던 것이다(마13:34). 비유로 말씀하신 목적은 하나님의 백성들에게 ‘창세 부터 감추인 것들을 드러내리라’(시78:2) 함을 이루려 함이다(마13:35).
결국 하나님의 백성이 아닌 자들에게 있어서 ‘비유’(παραβολή)는 도저히 알 수 없는 어려운 것이며 오히려 그것 때문에 실족해 버리게 되며 거치는 돌에 불과한 것이 된다. 왜냐하면 두 마음을 품은 인간은 생래적으로 표피적으로 보고 판단해 버리기 때문에 ‘진리’을 알아 보라고 ‘옆에 던져놓은 것’(παραβολή) 인 ‘비진리’를 진리로 잘못 붙잡아 스스로 사망에 빠지게 되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성도에게 있어서 예수님의 ‘비유’(παραβολή)는 하나님 나라의 비밀을 알 수 있는 진리의 말씀으로 주어진 것이지만 그렇지 않은 자들에게는 하나님의 나라의 비밀을 보아도 보지 못하고 들어도 깨닫지 못하게 하려는 것임(눅8:10)을 알 수 있다. [파라블레(παραβολή) : 비유]
6.복종하다 휘포탓소(ὑποτάσσω) : 복종하다헬라어 원어해석(김준남 목사)
‘그러므로 교회가 그리스도에게 하듯 아내들도 범사에 자기 남편에게 복종할지니라’(엡5:24)
‘복종하다’로 번역된 헬라어 단어‘휘포탓소’(ὑποτάσσω)는‘아래에 정돈하다, 하위에 두다, 경시하다, 복종시키다, 따르다, 통제에 따르다, 충고하다, 순종하다, 복종하다’는 의미를 가지고 있다. 그리고 이 단어는 ‘곁에, 의해서, 아래에’라는 뜻의 전치사 ‘휘포’(ὑπο)와 ‘정돈하다, 배치하다, 차례차례 놓다, 배열하다, 장소를 정하다, 지정하다’
라는 뜻의 ‘탓소’(τάσσω)의 합성어에서 파생되었다는 점에서 ‘지정된 것 아래 거하다, 질서있게 배열된 것 아래 놓다, 질서를 지키다’라는 의미를 전제로 한 ‘복종하다, 순종하다’라는 뜻을 말한다.
그런 의미에서 ‘주의 이름이면 귀신들도 우리에게 항복(ὑποτάσσω)하더이다’(눅10:17),‘육신의 생각은 하나님과 원수가 되나니 이는 하나님의 법에 굴복하지(ὑποτάσσω) 아니할 뿐 아니라 할 수도 없음이라’(롬8:7), ‘예언하는 자들의 영은 예언하는 자들에게 제재(ὑποτάσσω)를 받나니 하나님은 무질서의 하나님이 아니시요…’(고전 14:32, 33), ‘만물을 그의 발 아래에 두셨다(ὑποτάσσω) 하셨으니 만물을 아래에 둔다(ὑποτάσσω) 말씀하실 때에 만물을 그의 아래에 두신(ὑποτάσσω)이가 그 중에 들지 아니한 것이 분명하도다’(고전15:27)는 말씀을 이해할 수 있는 것이다.
그러므로 ‘휘포탓소’(ὑποτάσσω)는 원래의 처음 자리을 알고 그 자리로 돌아가라는 의미가 되는 것이다. 씨가 없어 반드시 씨가 있어야 할 존재인 ‘네케바’(נקבה)는 자기에게 생명이 없음을 알고 씨를 가진 '자칼’(זכר)을 만나 생명을 가진 존재가 되는 것이 성경이 말하는 구원의 여정이다. 물론 그 구원의 여정은 하나님의 창세전 언약(엡1:5)에 따라 하나님의 열심으로 이루어 지는 것이다. 그런데 선악과를 먹고 선악의 주체가 되버린 인간은 하나님 처럼 되어 스스로 생명 있는 자로 행세하게 되었다.
성경은 그것을 죄(하마르티아 : ἁμαρτία)라고 말하고 있으며, 진정한 생명으로서의 짝이 되는 '자칼’(זכר)을 만나지 못하고 생명이 없는 엉뚱한 것을 신랑으로 알고 살아가는 자를 죄인이라고 말하고 있다.
그래서 사도바울은 ‘아내(네케바 : נקבה)들도 범사에 자기 남편(자칼 : זכר)에게 복종할(ὑποτάσσω)지니라’(엡5:24)고 말하고 있는 것이다. 그러므로 성도가 그리스도에게 ‘복종한다’(ὑποτάσσω)라는 말은 ‘나는 생명이 없는 자입니다. 예수님 만이 생명이십니다.’(요14:6) 라고 나의 처음 자리를 고백하고 나를 섬기려 이 땅에 오신 참된 신랑 되시는 예수님(마20:28)을 믿음으로 영접하는 것을 의미하는 것이며, 내 말을 죽이고 그리스도의 영, 진리의 말씀을 마음으로 품는 것을 의미하는 것이다. [휘포탓소(ὑποτάσσω) : 복종하다]
7.변화하다 메타몰프호오(μεταμορφόω) : 헬라어 원어해석(김준남 목사)
‘너희는 이 세대를 본받지 말고 오직 마음을 새롭게 함으로 변화를 받아 하나님의 선하시고 기뻐하시고 온전하신 뜻이 무엇인지 분별하도록 하라’(롬12:2)
‘변화하다’로 번역된 헬라어 ‘메타몰프호오’(μεταμορφόω)라는 단어는 목적격과 함께 쓰여 ‘함께’라는 뜻을 가지게 된 ‘메타’(μετα)라는 전치사와 ‘형태를 만들다’라는 뜻을 가진 ‘몰프호오' (μορφόω)의 합성어에서 파생되었으며 ‘변화하다, 다른 형태로 바꾸다, 변형하다, 변모시키다’라는 의미를 가지고 있다.
특이한 것은 ‘몰프호오' (μορφόω)라는 단어가 ‘형상, 형태, 모양, 외모’라는 뜻을 가진 ‘몰프헤’(μορφμ)와 동일어에서 유래되었는데 이 단어는 ‘부분, 운명, 조각, 몫’이라는 의미를 가진 ‘메로스’(μέρος)의 어간에서 유래된 것으로 보인다.
이러한 의미에서 ‘메타몰프호오’(μεταμορφόω)는 ‘사물의 성질, 모양, 상태 따위가 바뀌어 달라지다’라는 국어사전적 의미를 가지고 ‘점차 변화하어 달라지다 또는 원래 가지고 있는 성질이나 모양을 근거로 시작하여 변화하다’라고 이해해서는 안되며, 오히려 ‘완전한 다른 형태로 변화하다 또는 다른 것으로 바꾸다’라는 의미로 이해해야 한다.
그것은 마치 생명 없는 상태에서 생명과 함께 한 상태로, 진정한 짝으로서의 그리스도를 만나지 못한 상태에서 그리스도를 만난 상태로 그리고 제한적이고 유한적 속성에서 영원한 무한적 속성으로의 완전한 다른 형태로의 변화를 의미하는 것이다.
그래서 예수님의 변화산에서의 사건에 대해서 마태복음에서는 ‘그들 앞에서 변형되사 (μεταμορφόω) 그 얼굴이 해 같이 빛나며 옷이 빛과 같이 희어졌다'(마17:2), 마가복음에서는 ‘…그들 앞에서 변형되사(μεταμορφόω) 그 옷이 광채가 나며 세상에서 빨래하는 자가 그렇게 희게 할 수 없을 만큼 매우 희어졌더라’(막9:1,2) 그리고 누가복음에서는 ‘기도’(προσεύχομαι) 하실 때에 용모가 '변화되고'(헤테로스 : ἕτερος – ‘다른, 또 하나의’라는 뜻) 그 옷이 희어져 광채가 나더라’(눅9:29)고 기록되므로 완전히 다른 것으로의 변화를 말하고 있는 것임을 알 수 있다.
그러기에 성도는 차원이 다른 것으로써의 변화된(μεταμορφόω) 자 즉, 두마음을 가진 선악의 주체가 하나의 (모노게네스: μονογενής) 마음을 가진 자로의 변화된 자를 말하는 것으로 이것 또한 스스로 노력하여 변화될 수 있는 것이 아니며, 오직 하나님의 은혜로 말미암은 그리스도의 영, 생명의 말씀으로만 가능한 것이다(고후3:18).그래서 사도바울은 성도를 가리켜 그리스도의 영광을 볼 수 있는 그리스도와 똑 같은 형상으로 변화된 (μεταμορφόω) 자(고후3:18)라는 사실을 분명하게 밝혀주고 있으며 그런 의미에서 내가 죽고 그리스도로 사는 자(갈2:20)라고 말하고 있는 것이다. [메타몰프호오(μεταμορφόω :변화하다)
8, 복음 유앙겔리온 (εὐαγγέλιον) : 복음(good news) 헬라어 원어해석(김준남 목사)
‘하나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 복음의 시작’(막1:1)
‘복음’으로 번역된 헬라어 '유앙겔리온'(εὐαγγέλιον)은 ‘좋은’이라는 뜻을 가지고 있는 부사인 유(εὐ)와 ‘사자, 천사, 목사, 전령, 보냄을 받은 자, 하나님의 사자’라는 뜻을 가지고 있는 명사 '앙겔로스'(ἄγγελος)에서 파생된 ‘좋은 소식을 선포하다, 복음을 전파하다, 좋은 소식을 가져오다, 기쁜 소식을 보이다, 복음을 가르치다’라는 의미를 가진 동사 '유앙겔리죠'(εὐαγγελίζω)의 명사형이다.
마가복음 1장 1절에 보면, ‘복음’이란 하나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라고 분명하게 정의하고 있다.
‘복음’의 실체로서 예수님은 자신을 가리켜 ‘내가 곧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다’(요14:6)라고 말씀하고 있다.
예수님 만이 유일한 길, 유일한 진리, 유일한 생명이라는 의미는 한마디로 인간은 길, 진리, 생명이 아니다.라는 의미이다. 그래서 성경은 그러한 인간의 상태를 가리켜 ‘죽어있다’(골3:3)로 기록하고 있는 것이다. 잘못된 길로 가는 자에게 유일한 기쁜 소식은 옳은 길이다. 거짓 진리로 가득찬 자에게 유일한 기쁜 소식은 참 진리이다. 그리고 생명없는 자(죽은 자)에게 유일한 기쁜 소식은 생명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인간은 유일한 기쁜 소식의 실체인 예수님을 알아보지 못한다는 것이다.
‘빛이 어둠에 비치되 어둠이 깨닫지 못하더라’(요1:5) 그 이유는 스스로 자기가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라고 착각하고 있는 하나님처럼 되버린 인간의 실존때문이다. 그렇게 오늘도 선악의 주체자로 하나님 처럼의 삶을 살고 있는 우리에게 예수님은 ‘내가 세상에 화평을 주러 온 줄로 생각하지 말라, 화평이 아니요 검을 주러 왔노라’(마10:34)고 말씀하신다. ‘검’이라고 번역된 헬라어 '마카이라'(μάχαιρα)는 ‘전쟁’을 상징하는 단어이다.
‘복음’(εὐαγγέλιον)이신 예수님의 이 땅에 오심은, 우리가 이 땅에서 그토록 소원하는 내 자아를 세워주고, 살찌우게 해주는 모든 것을 주시기 위함이 아니라 오히려 썩어져 없어질 세상의 것으로 자아를 확장하려는 ‘나’를 죽이려 ‘나와의 전쟁’을 치루기 위함인 것이다. 그래서 내가 죽고 예수로 사는(through Death, in Life) 구원의 여정이 바로 ‘복음’(εὐαγγέλιον)이다. [유앙겔리온 (εὐαγγέλιον) : 복음]
9, 복 마카리오스 (μακάριος) : 복 헬라어 원어해석(김준남 목사)
국어사전에서 ‘복’(福)의 의미는 ‘삶에서 누리는 좋고 만족할 만한 행운. 또는 거기서 얻는 행복, 배당되는 몫이 많은 것을 비유적으로 이르는 말’이다. 그러나 성경이 말하는 ‘복’은 ‘진리의 말씀에 목말라 함, 죄인된 인간의 처음자리에 대한 깨달음에서 나오는 애통, 말씀에 사로잡힘, 의에 주리고 목마름, 긍휼, 청결, 화평, 의 때문에 박해를 받음’이다(마5:3-10).세상이 정의하고 있는 ‘복’과 성경이 말하는 ‘복’의 개념이 너무나 다름을 알 수 있다.
성경은 오직 예수 그리스도만을 말씀하고 있다. 그래서 구약을 오실 메시야인 예수, 신약은 오신 메시야인 예수에 대한 책이라고 말하는 것이다. 또한 성경은 ‘복’의 책이라고 한다. ‘복’의 실체는 바로 하나님이신 예수 그리스도를 말하는 것이다. 신약성경에서도 ‘하나님은 ‘복’이시다’(딤전 1:11 ; 6:15)고 기록하고 있다.
‘복’(μακάριος)에 대한 좀 더 정확한 이해를 돕기 위해서는 구약성경에 나타난 ‘복’의 개념을 알아야 한다.
‘복’을 히브리어로는 '바라크'(ברך)라고 하는데 ‘축복하다, 무릎을 꿇다, 높이다, 인사하다, 저주하다, 신성모독하다’라는 뜻이다. ‘복’(ברך) 이란 단어는 ‘하나님을 찬양, 송축하는 것, 하나님 앞에 무릎을 꿇는 것, 하나님을 높이는 것’이란 뜻과 함께 ‘하나님을 저주하고 모독하는 것’이란 서로 상반된 의미를 동시에 가지고 있다.
히브리어 알파벳 각자가 가지고 있는 뜻을 가지고 ‘복’( ברך)을 파자하면 ‘베트’(ך)는 ‘하나님께서 거하시는 진리의 그 집, 성전’, ‘레쉬’ (ר)는 ‘하나님께서 진리가 되게 하시는 그 머리, 시작하다’, ‘카프’ (כ,ך)는 하나님의 것을 우리의 것으로 전환, '손바닥’이다. 이것을 정리하면 ‘하나님이 거하시며 다스리시는 성전을 우리에게 넘겨주심’이다.
하나님이 말씀으로 창조하신 모든 것이 성전이다. 하나님의 창조 목적도 우리를 성전으로 삼는 것이다(고전3:16).
‘성전이 되었다라는 것은 하나님의 아들이 되었다는 것이고, 구원을 받았다는 것이며, 하나님의 말씀으로 섬김을 받는다는 의미로써 ‘복’을 받았다라고 말할 수 있는 것이다.'
하나님의 창조의 목적을 알지 못하고, 이 땅의 모든 것들로 나를 만족시키는 도구로 삼아 자아 확장을 하려는 마치 그것이 ‘복’이라고 생각하는 인간의 실존이 바로 선악과를 먹고 하나님 처럼 되버려 오히려 하나님을 저주하는(ברך) 자의 모습이며, 바로 그가 저주(ברך)받은 상태인 것이다.
성도에게 있어서 ‘복’(ברך) 이란, 세상이 합의하여 정의해 놓은 국어사전적 의미와 전혀 상관이 없는 것이며, 오직 하나님이 거하시는 성전이 되는 것(고전3:16), 말씀의 섬김을 받으며 사는 것(막10:45) 그리고 내가 죽고 그리스도로 사는 것(갈2:20)을 말하는 것이다. [마카리오스 (μακάριος) : 복]
10, 번성하다 유오도오(εὐοδόω) : 헬라어 원어해석(김준남 목사)
‘사랑하는 자여 네 영혼이 잘됨 같이 네가 범사에 잘되고 강건하기를 내가 간구하노라’(요삼1:2)에서 ‘잘됨, 잘되고’라고 번역된 헬라어 단어가 '유오도오'(εὐοδόω)이다. 일반적으로 ‘잘되다, 형통하다, 번성하다’의 의미로 이해하고 있는 ‘유오도오’(εὐοδόω)는 ‘순조롭고 신속한 여행을 이루어주다, 방향과 쉬운 길을 인도하다, 성공적인 결과를 주다, 번창하게 하다, 번성하다, 성공하다’라는 다양한 뜻을 가지고 있다.'유오도오'(εὐοδόω)는 ‘좋은, 성공하여,잘 하여, 번영하여, 잘 움직이는’이라는 의미의 부사 ‘유’(εὐ)와 ‘길,여로, 행동의 과정, 사고방식’의 뜻을 가진 명사
‘호도스’(ὁδός)의 합성어에서 파생된 단어로 단순히 ‘좋은 길’이라고 번역할 수 있다.
그렇다면 ‘좋은 길’(εὐοδόω)이란 어떤 길을 말하는가?
요한복음 14장 6절 말씀인 ‘내가 곧 길(ἡ ὁδὸς)이요 진리(ἡ ἀλήθεια)요 생명(ἡ ζωή)이니’에서 오직 유일하신 좋은 길은 바로 예수 그리스도를 말하는 것임을 알 수 있다. 70인역(히브리어를 헬라어로 번역한 성경)에 ‘유오도오’
(εὐοδόω)는 ‘히브리어 ‘짜라흐, 짜레아흐’(צלח)를 번역해 놓은 것으로 ‘짜라흐, 짜레아흐’(צלח )는 ‘앞으로 돌진하다, 좋다, 번영하다, 형통하다, 성공하다, 진행시키다, 이롭다’의 의미를 가지고 있다.
특별히 이 단어는 창세기에서 ‘하나님이 형통케 (צלח)하셨다’ (창24:56, 창39:3,23)라고 기록되어 있어 '형통’(צלח)이 ‘하나님과 함께 진행함’이라는 기본적인 의미를 가지고 있다. 즉 하나님이 '형통’(צלח)이시다.
그리고 신약에서 그 '형통’ (צלח)이 바로 ‘그 길’(ἡ ὁδὸς)이신 예수 그리스도이신 것이다. 예수님 만이 형통이시기에 세레요한이 요한복음 3장 30절에서 ‘그는 흥하여야 하겠고 나는 쇠하여야 하리라 하니라’고 고백한 것이다. 우리는 망해야 하는 존재지 '형통'(εὐοδόω)해야 할 존재가 아닌 것이다. 그래서 신약성경에 ‘형통’이라는 단어가 나오지 않는 것이다. 성도들의 형통은 ‘내가 죽고 그리스도로 사는 것’(갈2:20)이며, ‘내가 죽고 그리스도로 열매를 맺는 것’
(요12:24)이다. 그런의미에서 성도는 그리스도와 함께 이 땅을 여행하는(εὐοδόω)자이며, 그리스도가 인도하는(εὐοδόω)대로 말씀에 끌려가는 자이다. [유오도오(εὐοδόω) : 번성하다]
11, 번성하다 플레뒤노(πληθύνω) :헬라어 원어해석(김준남 목사)
히브리서 6장 14절에 ‘내가 반드시 너에게 복 주고 복 주며 너를 번성하게 하고 번성하게 하리라 하셨더니’에서 ‘번성하게’로 번역된 헬라 단어가 ‘플레뒤노’(πληθύνω)이다. '플레뒤노'(πληθύνω)는 ‘채우다, 가득차다, 완수하다’
라는의미를 가진 ‘플레도’(πληθω)에서 유래된 ‘가득참, 많은 수’의 뜻인 ‘플레도스’(πληθος)에서 파생된 단어로
‘증가하다, 많아지다, 증가되다’라는 의미를 가지고 있다. ‘번성하다’의 국어사전적 의미로는 ‘한창 성하게 일어나 퍼지다’이지만 단순하게 많아지다라는 의미 보다는 ‘채워지고 가득 차 완수 되었다는 것을 전제로 한 번성’의 의미가 있다고 볼 수 있다.
좀더 구체적인 의미를 알기 위해서는 70인역 성경이 ‘플레뒤노’(πληθύνω)라고 번역한 히브리어를 살표보아야 한다. 헬라어 ‘플레뒤노’(πληθύνω)는 히브리어 ‘파라’(פרה)를 번역한 것이다. ‘파라’(פרה)는 창세기 1장 22절에 처음 나오는데 ‘생육하고’ 로 기록되어 있으며, ‘열매를 맺다, 열매가 많다, 결실하다’라는 의미를 가지고 있다.
또한 ‘파라’(פרה)를 파자하면 ‘פ’는 ‘진리를 배워 가르침, 입’, ‘ר’는 ‘하나님께서 진리가 되게 하시는 그 머리, 시작하다’ 그리고 ‘ה’는 ‘진리를 배워 살아가는 실존, 호흡’이다. 정리하면 ‘생육하다, 번성하다, 열매맺다’로 번역된 ‘파라’(פרה)의 성경적 의미는 ‘하나님의 은혜로 진리가 되어 그 진리를 배우고 가르치며 산다’가 되는 것이다.
‘번성’(πληθύνω , פרה)은 하나님의 명령이기에 반드시 하나님께서 완성하시겠다는 언약의 말씀인 것이다.
구원과 밀접하게 관련된 단어로서 우리에게서 나올 수도 없고 우리 스스로 이룰 수도 없는 것이다.
하나님께서 구원을 싹트게(파라 : פרה) 하시고(사45:8,)이새의 줄기에서 한 싹이 나며 그 뿌리에서 한 가지가 나서 결실(파라 : פרה)할 것이라(사11:1)는 예수 그리스도를 통한 구원의 완성을 보여주는 것이다.
그러기에 성도의 '번성'(πληθύνω)이란 하나님의 언약에 의해 구원받은 자, 진리가 된 자로서 오늘도 진리와 함께 살며 그 진리를 배우고 가르치며 사는 삶을 말하는 것이다.[플레뒤노(πληθύνω) : 번성하다]
12, 불순종 아페이데이아(ἀπείθεια ) : 헬라어 원어해석(김준남 목사)
‘불신, 불순종’으로 번역된 헬라어 단어 ‘아페이데이아’(ἀπείθεια )는 ‘설득할 수 없는, 반항적인, 순종하지 않는, 거스리는, 고집 센’이라는 뜻을 가진 형용사 ‘아페이데스’(ἀπειθής)에서 유래되었다.
그리고 ‘아페이데스’(ἀπειθής)는 부정적 불변사로써 ‘아’(α)와 ‘확신하다, 동의하다, 친구로 만들다, 신뢰하다, 화해하다, 경청하다’라는 뜻의 ‘페이도’(πείθω)의 합성어이다.
‘순종치 아니함’(롬11:30,32,히4:6,11),‘불순종’(엡2:2 ; 5:6, 골3:6-헬라어 원문에는 있으나 개역성경 번역서에는 빠져있고 표준새번역에는 기록됨)으로 번역된 ‘아페이데이아’(ἀπείθεια)는 단순히 ‘순종하지 않음, 거역함’는 의미보다는 ‘믿지 않음, 경청하지 않음, 화해하지 않음, 친구로 만들지 않음, 동의하지 않음’이라는 의미로 보아야 한다. 70인역에서 ‘아페이데스’(ἀπειθής)로 번역한 히브리어 단어는 ‘마라’(הרם)인데 ‘쓰다, 반역하다, 완고하다, 불순종하다, 반항하다’라는 뜻을 가지고 있다. 헬라어 명사 ‘아페이데이아’(ἀπείθεια)의 의미는 신명기 9장24절에 보면 ‘내가 너희를 알던 날부터 너희가 항상 여호와를 거역하여왔느니라’는 말씀에서 구체적으로 알 수 있다.
특별히 ‘거역하여(마라 : הרם) 왔느니라(하야 : חיה )’를 함께 쓰고 있는 부분을 생각해 보아야 한다.
사실 이스라엘 백성들이 여호와의 율법을 지키기 위해 많은 수고와 노력을 하였다.
그런데 하나님은 그런 백성들을 향하여 ‘처음부터, 항상 거역하여 왔다’고 말씀하고 있다.무슨 뜻인가?
히브리어 동사 ‘하야’(חיה)는 ‘존재하다, 일어나다, 발생하다, 되다, 있다’는 뜻의 존재동사이다.
즉, 원래부터 거역하는 존재, 불순종의 존재라는 뜻이기에 그가 하는 모든 행위는 그 자체가 거역하는 것이며 불순종이 되는 것이다. 이것은 선악과를 먹고 하나님처럼 되버린 인간의 실존을 말하는 것으로 하나님의 말씀을 자기 식으로 듣고 행하게 되었다.
결국, 그가 하는 모든 것은 믿지 않고, 경청하지 않고, 화해하지 않는'불순종'(아페이데이아 : ἀπείθεια )이 되는 것이다. 그래서 바울은 그들을 가리켜서 ‘불순종의 아들들, 본질상 진노의 자식’(엡2:2,3)이라고 말하고 있는 것이다. 그러기에 성도의 순종이란, '불순종'(ἀπείθεια )의 반대 개념으로 ‘하나님의 말씀을 경청하고 믿음으로그 믿음이 된 상태, 하나님과 화해하여 하나됨, 그리고 예수 그리스도를 친구로 삼아 그리스도로 사는 자의 상태’로 이해할 수 있다. [아페이데이아(ἀπείθεια ) : 불순종]
13, 보다 호라오(ὁράω) : 보다 헬라어 원어해석(김준남 목사)
‘본래 하나님을 본 사람이 없으되 아버지 품 속에 있는 독생하신 하나님이 나타내셨느니라’(요1:18)
‘보다’라고 번역된 헬라어 ‘호라오’(ὁράω)는 깨달아 안다는 의미에서 ‘눈으로 보다, 마음으로 보다, 인지하다,
알다, 경험하다, 주의하다’라는 뜻을 가지고 있다. 헬라어에는‘보다’라는 뜻을 가진 단어가 여러 개가 있다.
먼저 ‘그냥 응시하다, 보여지다’라는 ‘옵타노마이’(ὀπτάνομαι),단지 기계적이고 수동적이거나 우연한 응시를 표현하는 ‘겉을 보고 깨닫다, 지식을 갖다, 확신하다, 발견하다, 보다, 알다, 확신하다’라는 ‘에이도’(ειδω) – 이 단어에서 ‘우상’이라는 ‘에이돌론’(εἴδωλον)이 유래 되었으며, 이와 같이 눈에 보이는 형태, 외모를 보고 확신해 버리면
우상(idol)이 되버린다. 또한 좀더 진지하게 본다는 의미에서 ‘가까이서 보다, 지각하다, 주목하다, 보고 배우다, 방문하다’라는 뜻을 가진 ‘데아오마이’(θεάομαι), 크게 뜬 눈으로, 현저한 어느 것을 향한 것처럼 자발적인 관찰이라는 의미에서 ‘경험으로 알다, 마음의 눈으로 보다, 이해하다, 생각하다’라는 뜻을 가진 ‘블레포’(βλέπω)가 있다.
‘보다’라는 뜻을 가진 헬라어 단어들을 정리하면, 단지 응시하는(ὀπτάνομαι)단계에서 보이는 그대로 보고 판단해 버리는(ειδω)단계로 그리고 좀더 자세히 보아(θεάομαι) 경험과 마음으로 아는(βλέπω) 단계를 통하여 비로서 깨달아 알게되는(ὁράω)것이다. 성경은 원래부터 항상 하나님을 본(호라오 : ὁράω) 사람이 없다(요1:18)고 기록하고 있다. 그러면서 마음이 청결한자 만이 하나님을 볼(호라오 : ὁράω)수 있다고 말씀하고 있다(마5:8). 청결하고 흠없는(카타스 : καθαρός)자는 그리스도 예수 밖에 없다. 그리고 예수님께서 말씀해 주시는 그 말씀으로 만 청결하고 흠없게 될 수 있다(요15:3)
선악의 주체가 된 ‘나’의 말을 죽이고 그리스도의 말씀으로 섬김을 받는 자가 비로소 하나님을 ‘호라오’(ὁράω)할 수 있는 것이다.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와서 ‘보라’(호라오 : ὁράω)고 말씀하실 때 제자들은 눈에 보이는 것만 보았다(에이도: ειδω)(1:39).많은 사람들이 그렇게 보려고(ειδω)한다. 그러나 하나님은 말씀으로 모든 것을 창조하셨다.
만물 가운데 하나님의 말씀이 숨어 있다는 뜻이다. 보이는(옵타노마이: ὀπτάνομαι) 만물을 통하여 말씀을 보는(ὁράω)자가 하늘 백성인 성도이며, 바로 그가 예수를 통해서 그리스도를 보는(ὁράω)자, 그리스도를 믿는자 그리고 그리스도로 사는 자요(갈2:20), 영원한 그리스도의 생명을 가진 자로서 영생을 보는(ὁράω)자(요3:36)인 것이다. [호라오(ὁράω) : 보다]
14, 부활 아나스타시스(ἀνάστασις) : 부활 헬라어 원어해석(김준남 목사)
‘예수께서 가라사대 나는 부활이요, 생명이니 나를 믿는 자는 죽어도 살겠고’(요11:25)
‘부활’로 번역된 헬라어 단어 ‘아나스타시스’ (ἀνάστασις)는 ‘다시 일어서기, 죽음에서 부활, 자리에서 일어남, 죽음에서 일어남, 올림’이라는 뜻을 가지고 있다.
‘부활’이라는 단어의 국어사전적 의미는 ‘죽었다가 다시 살아남, 쇠퇴하거나 폐지한 것이 다시 성하게 됨 또는 그렇게 함, 십자가에서 못박혀 세상을 떠난 예수가 자신의 예언대로 사흘 만에 다시 살아난 일’이라고 정의하고 있다. 그래서 많은 기독교인들이 부활의 첫 열매가 되시는 예수님을 바라보며 죽음에서의 부활을 믿으며 소망하는 소위 ‘부활’신앙을 가지고 오늘도 열심히 신앙생활을 하고 있는 것이다.
그러나 성경이 말하고 있는 ‘부활’의 의미는 국어사전이 정의하고 있는 것과는 너무나 많은 차이가 있다. ‘부활’
로 번역된 ‘아나스타시스’(ἀνάστασις)가 유래된 동사형인 ‘아니스테미’(ἀνίστημι)라는 단어가 가지고 있는 원래의 의미에서 찾을 수 있다. ‘아니스테미’의 뜻은 ‘다시 일어나다, 똑바로 서다, 죽음에서 일으키다, 나아가다, 자리에서 일어나다, 들어올리다’인데, ‘한 가운데로, 중앙에 , 의 복판에, 사이에’의 뜻을 가진 ‘아나’(ἀνά)와 ‘서다, 이룩하다, 두다, 세우다, 옆이나 가까이 서다, 확고한 마음을 가지다, 권리를 포기하지 않다’의 뜻을 가진 ‘히스테미’
(ἵστημι)의 합성어에서 유래된 단어이다.
정리하면, ‘부활’(ἀνάστασις)의 성경적 의미는 ‘하나님이 창조하신 모든 것을 통하여 그 속에 담겨진 하나님의 마음인 말씀을 깨달아 그 말씀으로 똑바로 서는 것, 선악의 주체가 되어 두마음을 가지고 하나님처럼 살아가는 영원한 죽음의 삶에서 한마음이신 예수 그리스도의 영원한 생명의 삶으로 나아가는 것 그리고 하나님이 주시겠다고 약속하신 진리의 영이신 성령(말씀)을 통하여 진리(말씀)의 완성이라는 의미를 가진 ‘다나토스’(θάνατος)의 죽음으로 다시 살아나는 것’으로 이해할 수 있다.
그런 의미에서 예수님의 ‘나는 부활이다’(Ἐγώ εἰμι ἡ ἀνάστασις)라는 고백은 ‘나는 말씀이다’((Ἐγώ εἰμι ὁ λόγος) 라는 고백과 같은 것이다. 그러므로 그리스도의 사람인 성도는 그리스도의 영(말씀)을 가진 자이며(롬8:9), 하나님의 성령(말씀)이 거하는 성전이고(고전3:16) 이미 ‘부활’(ἀνάστασις)의 삶을 사는 자인 것이다.
[아나스타시스(ἀνάστασις) : 부활]
15, 보물 데사우로스(θησαυρός) : 보물 헬라어 원어해석(김준남 목사)
‘오직 너희를 위하여 보물을 하늘에 쌓아 두라…’(마6:20)
‘보물’로 번역된 헬라어 ‘데사우로스’(θησαυρός)는 ‘좋고 값비싼 것들을 모아 둔 곳, 저장소, 창고, 보물을 두는 것, 재산을 모으는 것, 저축, 부, 보물’의 의미를 가지고 있으며, 동사형은 ‘데사우리조’ (θησαυρίζω)인데 ‘모아서 쌓아 놓다, 저장하다, 축척하다, 창고에 보관하다, 보물을 함께 쌓아두다’는 뜻이다.
‘데사우로스’(θησαυρός)는 어원적으로 ‘배열하다’라는 의미를 가진 ‘티데미’ τίθημι)에서 파생된 단어라는 점에서 하나님이 창조한 눈에 보이는 그대로의 이 세상의 모든 것 그리고 그것을 모으는 것을 의미한다고 볼 수 있다.
그래서 사람들은 이 세상에 있는 것들을 자기 소유로 삼아 자아를 확장시키는 도구인 보물(θησαυρός)로써 자기의 창고에 쌓아 놓는다((θησαυρίζω). 그런데 성경은 ‘보이는 소망이 소망이 아니다’(롬8:24)라고 기록하고 있으며
더 나아가 육신을 쌀 찌우는 ‘썩을 양식을 위하여 일하지 말고 영생하도록 있는 양식을 위하여 하라’(요6:27)고 말씀하고 있다.
결국, 없어지지 아니하고 영원한 ‘보물’(θησαυρός)은 눈에 보이는 그 어떤 것도 아니며 눈에 보이는 것으로써의 이 세상에는 없다. 왜냐하면 ‘보물’(θησαυρός)은 바로 그 안에 담겨진 내용인 하나님의 마음이며 말씀이기 때문이다. 허물과 죄로 죽은(엡2:1) 우리에게 있어서 유일한 소망으로써의 ‘보물’이 있다면 그것은 생명이다.
말씀 육신으로 오신 예수님은 ‘내가 곧 생명(호 조에 : ἡ ζωή)이다’(요14:6)라고 선포하시면서 자신이 바로 유일하고 영원한‘보물’(θησαυρός)임을 말씀하고 있다.
그래서 사도 바울도 그리스도 안에 지혜와 지식과 모든 보화(θησαυρός)가 감취어져 있다(골2:3)고 말하면서 우리가 그리스도이신 보배(θησαυρός)를 가졌다 (고후4:7)라고 고백하고 있는 것이다.
그러므로 성도에게 있어서 유일한‘보물’(θησαυρός)은 오직 ‘말씀이며 말씀이신 그리스도’이시고 그 ‘보물’
(θησαυρός)을 성전이 된 내가 죽고 그리스도로 살아가는 성도인 그 하늘(οὐρανός)안에 쌓으면 (θησαυρίζω)면 그가 곧 ‘보물’(θησαυρός)이 되는 것이다.
‘너희 ‘보물’(호 데사우로스 : ὁ θησαυρὸς) 있는 곳에는 너희 마음(헤 칼디아 : ἡ καρδία )도 있으리라’ (눅12:34).[데사우로스(θησαυρός) : 보물]
16, 병들다 아스데네오(ἀσθενέω) : 병들다 (to be feeble) 헬라어 원어해석(김준남 목사)
‘병든 자를 고치며 죽은 자를 살리며 나병환자를 깨끗하게 하며 귀신을 쫓아내되 너희가 거저 받았으니 거저 주라’(마10:8)
‘병들다’로 번역된 헬라어 ‘아스데네오’(ἀσθενέω)는 ‘문자적으로, 상징적으로 그리고 도덕적으로 등 (다양한 용례에서) 무력한, 더욱 유약한, 병든, 힘이 없는, 나약한, 박약한, 허락한’의 뜻을 가진 ‘아스데네스’(ἀσθενὴς)에서 파생된 단어로 ‘연약하다, 힘이 없다, 병약하다, 재산이 적다, 빈곤하다, 가난하다, 병들다, 허약하다’라는 의미를 가지고 있으며, 명사형은 ‘나약함, 질병, 연약함, 병’의 뜻을 가진 ‘아스데네이아’(ἀσθένεια)이다.
그리고 ‘아스데네스’(ἀσθενὴς)는 부정적 불변사인 ‘아’(ἀ)와 ‘힘센’의 뜻을 가진 ‘스데노스’(sthenos)에 어원을 둔 ‘강화하다, 굳게하다, (상징적으로, 영적인 지식에 있어서 강하게 만들다)’라는 뜻의 ‘스데노오’(σθενόω)의 합성어에서 파생된 단어로 ‘확고한 마음을 가지지 못하여 연약한, 똑바로 세워지지 못하여 힘이 없는, 건강하지 못하여 병든, (상징적으로) 부유하지 못하여 가난한' 이라는 의미를 내포하고 있다.
이것은 ‘아스데네오’(ἀσθενέω)가 말하는 ‘병들고 연약하다’라는 의미가 단순히 육체적으로 병들어 연약한 것을 말한다기 보다는 오히려 영적으로 바로 세워지지(히스테미 : ἵστημι) 못하여 연약한 것으로써 진리의 말씀을 깨닫지 못한 상태를 의미한다고 볼 수 있다.
성경은 인간을 가리켜 허물과 죄로 죽은 자(엡2:1)라고 말하고 있으며 죽은 자의 의미로 병든 자의 모습으로 보여주고 있다. 그래서 성경 여러 곳에서 생명의 말씀이 없는 자를 상징하는 병든(ἀσθενέω) 자가 등장하고 있는 것이며, 예수님은 그러한 병든 자를 고치셨다(눅4:40).
뿐만 아니라 야고보 기자는 ‘너희 중에 병든 자(ἀσθενέω)가 있느냐? 그는 교회의 장로들을 청할 것이요, 그들은 주의 이름으로 기름을 바르며 그를 위하여 기도할지니라’(약5:14)고 말하면서 말씀에 바로 서지 못한 자는 말씀을 가르치는 장로를 청하여 그 진리의 말씀에 바로 세워짐으로 영적으로 강건할 것을 부탁하고 있다.
사도바울도 육체의 가시로 인하여 고통을 당할 때 진정한 능력은 나의 약함(ἀσθένεια)을 속에서 온전하여진다(텔레오 : τελέω – 성취되다)는 사실을 깨달았다(고전12:9). 그래서 ‘그리스도께서 약하심으로(ἀσθένεια) 십자가에 못 박히셨으나 하나님의 능력으로 살아 계시니 우리도 그 안에서 약하나(ἀσθενέω) 너희에게 대하여 하나님의 능력으로 그와 함께 살리라’(고후13:4)고 고백할 수 있었던 것이다.
그러므로 성도는 구원받은 자로서 오늘도 여전히 나 만을 위해서 살 수 밖에 없어 하나님의 은혜만을 구하는 자요, 그렇게 약할(ἀσθενέω) 그때가 곧 강함이라고(고후12:10) 외칠 수 있는 자이다.[아스데네오(ἀσθενέω) : 병들다]
17, 비밀 뮈스테리온(μυστήριον) : 비밀 (mystery) 헬라어 원어해석(김준남 목사)
‘사람이 마땅히 우리를 그리스도의 일꾼이요 하나님의 비밀을 맡은 자로 여길지어다’(고전4:1)
‘비밀’로 번역된 헬라어 ‘뮈스테리온’(μυστήριον)은 ‘입을 다물다’라는 뜻을 가진 ‘뮈오’(muo)의 파생어에서 유래된 단어로 ‘비밀, 신비, 감춰진 것’이라는 의미를 가지고 있다.
국어사전에서 ‘비밀’(祕密)은 ‘숨기어 남에게 드러내거나 알리지 말아야 할 일, 밝혀지지 않았거나 알려지지 않은 내용 그리고 (불교에서) 참된 의미를 숨기고 가르침을 설하는 것’이며, 신비(神祕)는 ‘일이나 현상 따위가 사람의 힘이나 지혜 또는 보통의 이론이나 상식으로는 도저히 이해할 수 없을 만큼 신기하고 묘함 또는 그런 일이나 비밀’이라는 의미로 단순히 ‘숨겨진 것으로써 알지 못하고 알 수도 없는 것’으로 이해할 수 있다.
그러나 성경에서 ‘뮈스테리온’(μυστήριον)은 영(프뉴마 : πνεῦμα)으로만 말할 수 있는 것 (고전14:2)이라는 말씀에서 영(πνεῦμα)이 곧 하나님의 말씀이기에(요6:63) 진리의 말씀으로 그 ‘비밀’을 알 수 있다는 것이다.
이것은 이 세상 만물이 하나님의 말씀으로 창조되었다(요1:1-3)는 말씀에서 하나님이 창조하신 모든 것 안에 말씀이 숨겨져 있다는 것이며, 숨겨진 내용으로써의 말씀인 그 ‘비밀’(μυστήριον)은 그 말씀을 가진 자 즉, 하나님께로부터 난 자만 알 수 있고 볼 수 있는 것이다. 그러면서 성경은 숨겨진 말씀인 그 ‘비밀’을 아는 자가 바로 세상을 이긴 자라고 말씀하고 있다(요일5:4)
그런 의미에서 ‘뮈스테리온’(μυστήριον)은 말씀육신으로 오신 예수, '진리'(알레데이아 : ἀλήθεια)로 충만한 바로 그 진리의 말씀이신 예수를 가리킨다고 볼 수 있으며 또한 하나님의 말씀만 있는 자로서의 예수가 바로 하나님의 나라가 되는 것이다. 이것은 ‘뮈스테리온’(μυστήριον)이라는 단어가 복음서에서 3번 쓰여지는데 ‘그 하나님의 그 나라의 그 비밀’(타 뮈스테이아 테스 바실레이아스 투 데우 : τὰ μυστήρια τῆς βασιλείας τοῦ θεοῦ)이라는 말씀에서 ‘하나님의 나라가 바로 비밀 그 자체’임을 분명히 알 수 있다(마13:11 ; 막4:11 ; 눅8:10).
그래서 사도바울은 스스로 하나님의 성전이 되고 하나님의 성령이 거하는 자(고전3:16)로서 마땅히 하나님의 ‘비밀’(μυστήριον)을 맡은 자로 고백하고 있으며(고전4:1), 자신을 위하여서 말씀을 주사 입을 열어 복음의 ‘비밀’
(μυστήριον)을 담대히 알릴 수 있도록(엡6:19) 기도를 부탁하고 있다.
그러므로 성도는 하나님의 뜻인 그 ‘비밀’(엡1:9) 바로 허물과 죄로 죽은 우리를 그리스도를 통하여 살리신 복음의 ‘비밀’을 안 자이며 그리스도와의 연합(union Christ)으로 세상에 대하여 죽은 자가 되어 세상이 알 수도 없는 그리스도의 ‘비밀’(μυστήριον)이 된 자이다.[뮈스테리온(μυστήριον) : 비밀](최종 정검 완료 2023,04.12, 20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