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가 소녀였을 때, 그때는 육십년 대여서 서울은 그때 까지도 전쟁의 폐허에서 벗어나지 못한 채 어둡고 칙칙했다.
어느 겨울 전차에서 내려 남대문 앞을 지나다 남대문 앞에서 누더기를 걸치고 두르고 거적 대기를 둘러쓴 어느 촌 아낙이 눈보라 속에서 어린 것에게 젖을 물리고 있는 것을 보았다. 더러운 저고리를 들추고 꺼낸 젖은 그냥 무슨 반죽덩이 같았으며 젖을 빠는 아이는 추위에 볼이 얼어 붉게 갈라져 있었다. 맹렬하게 젖을 빠는 어린아이는 귀엽기는커녕 무슨 흡열판을 가진 악귀 같았고 젖을 물리고 있는 아낙네도 굶주림과 추위에 몽롱한 상태였는지 자애로움이란 눈 씻고 찾아볼 수가 없었다.
어미가 품에 안고 있는 어린것만 보고도 그 형상이 보기 어려웠는데 웬걸 어미가 둘러쓴 거적 대기 안에서 무엇이 부시럭거리더니 고만고만한 애들이 서너 명이 꿈틀거리는 게 아닌가.
순간 소녀였던 나는 토악질을 할 뻔했다.
원래 거지가 아니라 농토를 잃고 상경한 촌 아낙이 들어설 곳이 없어 급기야 길가에 나 앉아 있었던 것 같았는데 내가 헛구역질을 한 것은 그들의 거지꼴이 아니었다. 그들의 처참한 가난에 대한 연민도 아니었다. 나는 무책임하게 계속 내질른 그 어미와 아비가 너무도 밉고 추하고 더러워서 구토증이 났던 것이다.
성긴 눈발이 날리던 남대문은 더욱 웅장하고 아름다웠다. 거대한 대문과 기왓골은 위용이 넘쳤으며 담장은 눈발의 육각 부스러기를 사뿐히 어깨에 걸치고 오만하게 빛났다. 거기 엎디어 있는 얼어 죽기 직전의 가난한 가족을 냉담하게 내려다보고 있었다. (그때는 남대문 바로 옆까지 사람이나 소달구지가 다니고 있을 때였다.)
미와 추의 극치를 그날 동시에 보았다.
한 남자가 좋아졌을 뿐인데 결혼이라는 제도로 자연스럽게 편입되고 남녀가 함께 살면 당연히 임신이 되고 임신을 하면 아이는 꼭 낳아야 했다. 무슨 구체적인 가족계획을 세우기도 전에 나라에서 둘만 낳으라고 윽박질렀고 내심 그걸 반가워했다.
둘만 낳아 잘 키우자, 셋을 낳으면 어쩐지 미개하고 촌스런 동물로만 여겨졌다. 나는 내가 둘만 낳은 것에 대해 만족하고 있다. 내 새끼는 적어도 눈보라 치는 날 거적에서 굶주리고 떨지 않게 할 수 있었으니까, 다다익선 보다 소수정예가 훨씬 마음에 들었다.
제주에 와서 살면서 우연한 기회에 사십이 넘은 부부를 알게 되었다. 유기농이라는 특별한 방법으로 농사를 지어 귀농사모라는 사이트에 물건을 팔아 살아가는 사람들이었다. 사람이 살아가는 방법이 천태만상이라는 것쯤은 미리 알고 있었지만 삶을 그렇게 꾸려나가는 것은 처음 보았다.
대학 때 우연히 접하게 된 농촌운동이 집단 농장으로 이어지고 거기서 만난 젊은이끼리 결혼을 하고 그 집단에서 아이를 키우고 그 집단을 통해 미국이나 유럽도 나가 살기도 했으며 지리산 자락이나 강원도 골짜기에서 그 농사짓는 법을 배워 이제 따로 독립을 한 셈이다.
농사를 짓기 위해 배운다는 것도 어려운 일이지만 그런 사람들 끼리 모여 함께 경작을 하고 함께 분배를 하고 산다는 것은 이해하기 어려웠다. 가족도 해체되기 직전인 세상에서 노동을 함께 하기위해 모여 산다니, 무슨 종교적인 제의가 아니고도 가능할 수 있겠는가 하는 생각이 들었다.
그 여자는 보기만 해도 숨이 차오를 만큼 씩씩하고 활발했다. 미국에서 공부하던 중학생을 과감히 표선에 있는 고등학교에 전학시킨 용기도 놀랐거니와 그 많은 노동을 어쩌면 그리도 웃으며 할수 있단 말인가.
감자를 파종하던 날 그녀를 만나러가서 볼 기회가 있었는데 삼십키로가 넘는 감자 씨앗을 수십 자루 차에서 내려 밭에 뿌리고 있었다. 노동으로 단련되지 않으면 어림도 없는 무게와 강도였다.
그 집에서 숯불을 피워 고기를 구어 먹게 되었는데 씩씩 하기만 한게 아니라 밝고 따뜻하기 조차 했다. 아니 그런 노동을 하면서도 불평을 안하고 살 재주가 있다니.
유기농 귤이나 한라봉을 키워내고 있어 자주 만날기회가 생겼다. 얼굴에 먼지와 기미가 잔뜩 낀 그녀가 힘든 노동과 큰 돈이 되지 않는 농사짓는 세상에 대해 짜증을 내고 한탄을 할 때만 기다리는듯이 그녀를 유심히 염탐했다. 고물 트럭을 타고 다니며 종일 땡볕에서 일하고 새벽에 밭으로 나와 별이 총총해야 집으로 들어가는 일과에서 어떻게 그렇게 재미있다는 표정으로 살수 있는지 알다가도 모를 일이었다.
노동을 취미삼아 사는 사람도 있나?
언젠가는 그녀가 일이 지긋지긋해서 연장을 팽개 치고 통곡하기를 기다리는 몹쓸 눈매로 그녀를 늘 주시하고 있었다. 부자가 아님으로 그녀는 아직 제 땅도 갖고 있지 못해서 버려진 남의 땅을 값싸게 세 얻어 그녀가 배운 대로 땅을 살리며 유기농법으로 농사를 지으니 수입이 많을 리가 없다.농약을 쓰지 않고 땅을 살려 농사를 짓는다는 그 특별한 농사짓기 방법을 나는 오히려 의심의 눈으로 흘겨 보았다.
몰래 밤에 농약 뿌리는거 아냐?
그녀는 차차로라는 닉으로 귀농사모라는 사이트를 통해 그녀가 손수 지은 농산물을 소비자에게 직거래 한다. 그녀의 땅사랑, 흙사랑은 눈물겨운 것이었다. 땅을 살리기 위한 그녀의 노력은 피가 날만큼 힘이 들어 보였지만 그녀는 아무렇지 않은 듯 땅의 기운을 살리기 위해 노력하고 그게 그렇게 재미있다는 듯이 검게 탄 얼굴에 미소를 짓고 있었다.
그런 그녀가 임신을 했다
마흔다섯이나 되고 자궁근종 수술을 한 뒤여서 어지간한 산부인과에서는 고개를 외로 빼며 절레절레 흔든다는 것이다. 태아가 제대로 살수 있을련지 살더라도 정상일련지에 대해 모두 근심을 했지만 정작 본인은 천하 태평이었다. 그녀는 주변의 지인을 통해 아기용품 헌것을 수소문하고 출산 준비에 들어갔다.
그녀의 나이와 위험성 때문에 극구 만류하려던 내가 마음을 바꾸게 된건 그녀가 잘 갈아놓은 긴 밭을 보고 난후였다.
어쩌면 그리도 보송보송 반듯하게 손질을 해 놓을 수가 있을까. 흙들은 적당히 수분을 머금고 햇빛을 받아 보석처럼 광채을 내며 내 속에 씨앗을 심어줘라고 아우성치듯 교성을 지르고 있었다. 흙을 잘 살려 그곳에 씨앗을 심어 생명을 키워 내는 일을 천직으로 알고 있는 그녀가 자신에게 잉태된 새 생명을 받아 들이는 일은 당연한 일이었던 것이다.
아이의 인생을 생각해서라는 좋은 말로 그녀의 출산을 만류 한다는 것은 어쩌면 돼먹지 못한 생각이라는 부끄러움에 고개가 숙여졌다. 하늘이 내린 생명을 죽여라 살려라 말할 자격이 없다는걸 차제에 두고라도 누군들 내가 우수한 품종에 우수한 밭에 뿌려진 우수한 생명이라고 단언 할 수가 있을까.
세상에 곱고 화려한 장미만이 아름다운것이 아니라 길가에 아무도 보아주지 않은 냉이꽃도 저마다 살 자격이 있다는 것을.
흙 속에 씨앗을 심어 발아을 하여 키워내는 것은 모두 인간의 힘으로만 되는것이 아니다. 내 속에 잉태되는 생명도 무릇 땅을 기어가는 벌레 한 마리도 다 내가 내 힘으로만 할 수있는 것이 아니다. 그런데도 인간만은 우리 인간의 힘으로 만들 수도 부술 수도 있다고 착각하고 있는 것 같다.
나는 저 땅만큼도 삶의 이치를 깨닫지 못했던 것이다. 땅은 오로지 주어진 대로 제 할 일을 다하고도 제공으로 여기지 않는다.
자식이 많아 굶주리는 인간을 그들의 게으름과 나태, 대책없이 내지른 무책임으로만 돌릴수 없다.생명을 꾸려 나갈수 있을만큼 세상은 열려져 있으나 누군가의 탐욕으로(특히 인간의) 그들은 먹거리를 빼앗긴 것이다.
최고의 먹거리와 명품 신발이나 빼어난 디자인의 옷만이 사람이 살아가는 가치를 제공해 주지 않는다. 살아가는데 꼭 필요한 감자 몇 가마니는 언제나 부지런하면 얻을 수 있는데 감자 수 백톤으로 명품 핸드백을 하나 사기 위해 남의 것을 빼앗고 있지 않은가. 내가 지금 너무 앞서가서 헛말을 지껄이고 있는가?
살아남는 방법은 소수 정예가 아니다.
여럿이 함께 여야만이 살아 남는다.
종을 그래야 지킬수 있다.
나와 내 피가 세상을 움직이는 소수에 섞여 최고로 살아가려는 생각은 종을 멸종 시킬 수 있다.
멸종이 되면 어떠냐구?
살아있는 모든 것의 생명의 과업이란 생명을 이어가는 것이다. 생명이 생긴 이래 연연히 이어온 것을 누구라 여기서 막을 수 있으며 누구라 거슬리는 오만한 자세로 사는가.
춥지도 덥지도 않은 봄밤에 아기 하나씩 만들자.
소수에 섞이지 말고 다수가 되어 똘똘 뭉쳐사는 게 아주 잘사는 방법이다. 예일대나 서울대를 보낼 욕심만 없앤다면 남의 것을 빼앗고 살면 안된다는 기본을 가르친다면 아무도 눈보라 치는 날 그 입에 먹을 것이 없어 악귀가 되지 않는다.
약 8년전 제주도에 정착 하려고 3개월 정도 머문적이 있습니다. 한라봉을 선별하는 창고에서 향기에 취해 머뭇 거리는데 여인이 선뜻 1개를 줘서 먹은적이 있습니다만 그 여인이 차차로님 이라는 생각이 듭니다. 에리히 프롬의 "소유냐 삶이냐"란 내용 중에 "즐거이 일하며 한 일을 즐거워 한 사람은 행복하다"고 차차로님을 두고 한 말 같습니다.
카페가입 3개월차인 저는 차차로님이 이십대후반인줄로 알았네요 출산하신다기에,,,사연이 있었네요 옆지기와 나이차이많큼 옆지기보다 세살 작은데 제가 많은 착각을 했네요 3월 출산이면 이제 얼마남지않았네요 항상 즐거운 맘으로 순산때까지,,,카페의 자잘한 일에 넘 신경 쓰시지 말고 좋은것만 생각 하세요 님의 사정을 아시는분이 님이 카페에 몇개월 아니보여도 괴념치 않을꺼예요 맘 편히 2세(분신)에게 만 ,,그리고 산후조리 잘하실수 있도록 미리 님이 준비 해주세여 저는 몰라서 옆지기 못해준게 지금도 후회되네요((요통이 아직 심하네요ㅠㅠ)),,차차로 님이 보실수 있으리라 믿으며 ,,,
첫댓글 글쓴이는 저의 언니이고요 안덕면 덕수리에 살고있어요 글 속의 회원한테는 사전양해를 구했답니다
차차로 님이 그런 분이셨군요. 참 대단하십니다. 착한 심성으로 자연의 순리에 따라 사는 것이 행복이라 생각하면서도 그것을 실천하기란 너무 어렵다는 것을 아는지라.... 이 글을 보면서 다시한번 님의 성정이 참 아름다움을 느낍니다.
새삼 차차로님의 진면목을 봅니다. 사진으로만 뵈었지만 시원한 차차로님의 미소가 생각납니다~
그런사연이 있었군요. 한라봉을 먹으며 그님의 성품을 알 수 있었는데, 삶의 깊이가 깊은 분이셨군요.
여전사 기질의 차차로님.... ^^ 그런 그분의 열정으로 우리는 안전한 먹거리를 제공받고 있었던 거군요. 순산하시길 빌어봅니다
아 차차로님 이야기 구나 정말 대단하신 분입니다.
약 8년전 제주도에 정착 하려고 3개월 정도 머문적이 있습니다. 한라봉을 선별하는 창고에서 향기에 취해 머뭇 거리는데 여인이 선뜻 1개를 줘서 먹은적이 있습니다만 그 여인이 차차로님 이라는 생각이 듭니다. 에리히 프롬의 "소유냐 삶이냐"란 내용 중에 "즐거이 일하며 한 일을 즐거워 한 사람은 행복하다"고 차차로님을 두고 한 말 같습니다.
카페가입 3개월차인 저는 차차로님이 이십대후반인줄로 알았네요 출산하신다기에,,,사연이 있었네요 옆지기와 나이차이많큼 옆지기보다 세살 작은데 제가 많은 착각을 했네요 3월 출산이면 이제 얼마남지않았네요 항상 즐거운 맘으로 순산때까지,,,카페의 자잘한 일에 넘 신경 쓰시지 말고 좋은것만 생각 하세요 님의 사정을 아시는분이 님이 카페에 몇개월 아니보여도 괴념치 않을꺼예요 맘 편히 2세(분신)에게 만 ,,그리고 산후조리 잘하실수 있도록 미리 님이 준비 해주세여 저는 몰라서 옆지기 못해준게 지금도 후회되네요((요통이 아직 심하네요ㅠㅠ)),,차차로 님이 보실수 있으리라 믿으며 ,,,
차차로님은 농업에 희망을 주시는 위력을 지녔습니다
대단 하십니다 
존경 스럽습니다 
좋은카페에 가입하고 따뜻한 사연을 읽어 봅니다. 사람사는 세상이 이렇게만 살아진다면 무슨 번민이 더 필요할까요? 이런 글을 볼때마다 별거 아닌 세상살이의 즐거움을 만끽하게 됩니다. 사연의 주인공 차차로님과 글을 오려 주신 제주바당님 모두 고맙습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