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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 현실과 문화정책
진형준 안규철 김사인 이남호
■ 참석자 진형준(문학평론가, 홍익대 교수)
안규철(화가, 한국예술종합학교 교수)
김사인(시인, 동덕여대 교수)
■ 사회자 이남호(문학평론가, 고려대 교수)
■ 일 시 2003년 3월 8일 4시
■ 장 소 현대문학사
문화란 무엇인가
이남호:반갑습니다. 먼저 좌담에 응해주신 선생님들께 감사드립니다.
오늘날 문학적 상황을 비롯한 우리 문화의 지형도는 급격하게 변하고
있는 것 같습니다. 특히 새 정부의 출범과 더불어 문화정책에도 많은
변화가 예고되고 있습니다. 이번 정부의 인선을 보니까 역대 어느 정부들보다 더 많은 변화가 있을 거라는 느낌이 듭니다. 이런 계제에 오늘날의 우리의 문화 현실을 살펴보고, 기존의 문화정책을 비판해보고, 나아가 앞으로의 문화의 방향 그리고 문화정책의 방향에 대해서
이야기해보고자 합니다. 너무 좁은 주제로 한정하지 말고, 우리 문화
전반과 문화정책 일반에 대해서, 일반론적이고 원칙적인 이야기부터
아주 구체적이고 세부적인 이야기까지, 생각나는 대로 편하게 말씀을
나누시기 바랍니다. 그럼 먼저 문화라는 것이 뜻하는 바가 무엇인지에 대해서부터 말씀을 나누어보고자 합니다.
진형준:저는 간단하게 문화라고 하는 것을 한 사회, 혹은 한 문화권의
삶의 결의 집합이라고 생각합니다. 말하자면 한 문화권이나 한 사회의 정신, 영혼이라고 할 수 있다는 것이지요. 그래서 이른바 고급문화라든지 화려한 문화만 말하는 것이 아니라 전통성과 일상성과 대중성을 모두 포함하는 보다 크고 긴 개념으로 이해하고 있습니다. 하나의
문화라고 하는 것을 한 사회의 정신이나 영혼이라고 생각하면 그 단어 앞에서 우리는 훨씬 진지해지고 경건해질 수 있다는 것이지요. 열
길 물속은 알아도 한 길 사람 속은 모른다는 말이 있지 않습니까? 마찬가지로 문화라는 것은 길고 깊이가 있는 거다, 최소한 유한한 정치권력이라든지 정치제도와 비교해볼 때 그것보다 훨씬 긴 게 문화다,
그런 정도의 자부심을 가지고 우리가 출발을 해야 된다고 생각합니다. 그런 의미에서 처음부터 예를 들고 싶은 사람이 한 명 있는데요,
바로 프랑스 드골 정부 하에서 문화부 장관을 지냈던 앙드레 말로입니다. 잘 아시다시피 앙드레 말로 하면, 행동주의 문학의 기수로 알려져 있지요. 중국에서 오랫동안 지내면서 반 식민주의 독립운동에도
직접 참여하고 스페인 내전에도 직접 참여하는 등 현실적 모순을 행동으로 타파하려 했던 인물이지요. 그런데 그가 쉽게 한마디로 규정한다면 민족주의 국가주의 정부라고 할 수 있는 드골 정부 하에서 문화부 장관을 지냅니다. 그 당시 프랑스 지식인들의 전반적인 풍토를
감안한다면 상당히 비난을 받을 만했고 어떤 면에서는 용기도 있는
행동이었습니다. 당시 프랑스의 지식인은 대부분 좌익이었고 구체적으로는 스탈린에 열광하고 있었지요. 물론 앙드레 지드처럼 직접 소련을 기행한 후 러시아 혁명의 기만성과 허구성을 폭로한 경우도 있긴 했지만(그의 『소련 기행』은 용기도 있고 혜안을 지닌 사람이 쓸
수 있는 글이었지요.) 상당히 예외적인 경우였고 대부분의 지식인은
혁명적 사유에 물들어 있었습니다. 그런 분위기에서 당대의 대표적
지식인의 하나로 여겨졌던 말로가 드골 정부 하에서 문화부 장관을
지냈다고 하는 것은 상당한 용기 있는 모험이었는데, 그에게 그런 용기를 준 것이 무엇이냐를 생각해보는 게 중요하다고 생각합니다. 그게 뭐냐, 문화라는 것이 정치적인 경향에 따라 좌지우지되는 것이 아니라는 신념이었다고 볼 수 있다는 겁니다. 그는 드골이라는 정치권력 밑에 들어간 게 아니라 오히려 자신이 생각하고 있는 프랑스 문화라고 하는 것, 이것을 정치를 이용해서 제대로 세워보자, 이렇게 생각했다 이거죠. 그러니깐 말로 같은 지식인이 드골 대통령 밑에서 어떻게 문화부 장관을 하느냐 하는 식으로 그를 비판할 수 있을지도 모르지만 그게 아니라 앙드레 말로 같은 경우는 문화의 이름으로 드골을
이용한 거다, 라고 얘기하는 게 가능하다는 거죠. 우리가 오늘날 프랑스를 문학과 예술의 나라라고 말할 수 있는 것은 거의 다 앙드레 말로가 문화부 장관을 하면서 이룩했던 업적 덕분이라고 해도 별로 틀린
얘기가 아니에요. 루브르 박물관 등 온갖 유적을 재단장 재배열하고
치밀한 계획에 의해 조직화하는 등 그가 문화부 장관으로서 이룬 업적이 수없이 많지만 어쨌든 합리주의 국가라고 얘기할 수 있는 프랑스가 문화예술의 나라가 될 수 있었던 것은 거의 앙드레 말로의 공이라고 볼 수 있는 거지요. 저희가 새로운 정부의 출범과 함께 새로운 문화부 장관이 임명된 현실에서 만일 그분한테 무언가 요구를 하고 싶다면 적어도 문화에 종사하는 우리들로서는 문화라는 것 앞에 경건하자, 그것이 어떤 정치적인 흐름이라든지 그것에 종속되는 길로는 가지 말자, 그것은 대단히 위험하다 그런 얘기를 우선 하고 싶어요. 예를
들어 현재 정부가 개혁정부니까 모든 분야에서 개혁, 그리고 또 개혁을 모토로 내세우고 있는데 적어도 문화부 장관만은 조금 다르고 폭넓은 시각을 가져줬으면 하는 겁니다. 즉 문화의 입장에서 보자면 꼭
개혁문화만 있는 게 아니다, 아까 말씀드렸듯이 우리의 문화를 우리의 삶의 결, 정신, 뭐 이런 걸로 생각을 한다면 껴안기 문화도 있고 동반자 문화도 있고 숨어 있는 문화도 있고 깊은 문화도 있는 것인 만큼
그러한 것이 정치 개혁에 의해서 좌지우지되고 결정될 수 있다는 생각은 안 했으면 좋겠다는 그 말씀을 우선 드리고 싶습니다.
김사인:진 선생님 말씀의 강조점을 우리 사회의 정치적ㆍ경제적 삶이
온전하기 위해서도 문화적 깊이와 정신의 섬세함 같은 것이 받쳐주지
않으면 안 된다고 이해한다면, 제 생각도 다르지 않습니다. 정치 쪽에서 보면 우리 삶 전부가 정치적인 것이고 경제 쪽에서 보면 우리 삶 전부가 경제적인 것이 됩니다. 마찬가지로 문화 쪽에서 보면 우리 삶 전부가 문화적인 어떤 것이지요. 그런데 그동안 우리 사회는 문화라는
차원을 정치ㆍ경제적 목표에 종속시켜왔어요. 물론 우리 사회가 당면했던 여러 어려운 상황들이 다른 여유를 허락하지 않았다는 이유도
있었겠습니다만, 이제 그런 수준의 인식으로는 문화적 영역을 살리지
못하는 것은 말할 것도 없고 우리가 그토록 중시해온 정치ㆍ경제적
가치들을 제대로 실현하는 것도 어려워지는 단계에 우리 사회가 온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이것은 문화부를 문화관광부로, 교육부를 교육인적자원부로 바꾸었던 김대중 정부 5년의 문화산업적 논리가 보여준
한계를 돌아보면 알 수 있는 일이라고 생각합니다.
안규철:신임 문화부 장관이 취임 인터뷰에서 보이지 않는 가치를 존중하겠다는 말을 했는데, 문화의 본질과 관련해서 매우 중요한 발언이라고 생각합니다. 보이지 않는 것의 가치를 이야기할 수 있는 정부부처는 아마 문화부와 교육부 정도가 아닌가 합니다. 눈에 보이지는
않으나 우리의 삶을 근본적으로 규정하는 정신적 가치를 문화라고 할
수 있다면, 이제까지는 문화부마저도 보이는 문화만을 이야기해왔다고 생각합니다. 사회 전체가 가시적인 가치만을 이야기하는 분위기
속에서 산업으로서 돈벌이가 되는 문화, 남에게 보여주고 자랑하기
위한 문화만이 강조되어왔는데, 그에 앞서 우리가 그 속에서 살면서
우리 내면의 삶을 풍요롭게 하는 문화의 가치는 소외되어왔던 것이
사실입니다. 신임 장관의 그 약속이 지켜지기를 바랍니다.
오늘의 문화적 지형
이남호:문화를 이야기할 때 먼저 생각해봐야 할 문화의 의미와 지향에 대한 말씀들이 계셨습니다. 그에 입각해서 오늘의 문화적 지형에
대해서도 말씀해주십시오. 문화의 상품적 가치에 대한 관심이 높아지고, 전자문화, 영상문화가 확산되고 있습니다. 그리고 대중문화가 급격하게 득세하는 반면 고급문화는 옛날보다 상당히 위축되고 있는 현실이 아닌가 합니다.
김사인:단순화의 위험을 무릅쓰고 오늘 우리 문화의 성격과 지형을
결정해가는 요인들을 몇 가지 들어본다면, 무엇보다 뿌리깊다고 여겨지는 것은 우리들 속에 의식적ㆍ무의식적으로 내면화되어 있는 상업주의적 태도인데요, 이것은 정책당국 쪽의 문화산업 논리에 호응하는
것이겠는데, 모든 문화적 가치를 환금 가치로 보는 겁니다. 이런 논리
위에 서면 문화적 차원을 이윤이라는 관점에서 보게 되고 그것은 또
불가피하게 속도를 요구하게 된다고 봅니다. 이와 더불어 우리의 문화적 현실을 규정하는 가장 큰 부분이 말씀하신 디지털, 영상분야의
급속한 팽창이라고 할 수 있겠는데요, 이 현상 역시 어느 일면에서는
우리 사회의 문화상업주의와 속도강박에 연루되어 있다고 보입니다.
물론 그런 시각만으로 현상의 전부를 설명할 수는 없겠지만요, 어떻든 문화산업 논리와 디지털 기술, 영상문화의 팽창이 문화의 생산과
보급의 전 영역에서 구현해내고 있는 대중화, 대량화, 빠른 속도는 뭔가 지금까지와는 다른 새로운 삶이 열릴 것 같은 기대마저 갖게 합니다. 그러나 아시다시피 그러한 긍정적 가능성과 함께 인간을 1차원적으로 만드는 디지털 야만주의의 폐해 또한 우려할 만합니다. 이런 추세 앞에서 오래된 것, 수공업적인 것, 느린 것, 고요한 것, 영적인 것,
진지한 것 같은 전래의 정신적 가치들은 설자리를 찾기 어려워질 수밖에 없는데, 결국 상반되는 이 두 방향성을 어떻게 아우를 것이냐 하는 것이 모든 문화분야 종사자들의 화두가 아닐지요.
이남호:김 선생님의 말씀처럼 우리 문화가 지금 산업주의 혹은 자본주의 상품화에 의해서 크게 변질되고 있고, 또 한편 영상매체와 전자매체라는 매체와 기술, 전자기술의 변화에 따라서 문화의 성격이 크게 변하고 있는데 그런 변화들이 한편으로 기능적이고 긍정적인 면이
없지는 않겠지만 지금 현실로 나타난 현상들은 아주 우려할 만한 모습들인 것 같습니다. 가령 아놀드 하우저 같은 사람이 영화에 대해서
굉장한 기대를 가졌는데 영화가 앞으로 종합예술로서 굉장히 훌륭한
인류정신을 표현하고 인류의 문화적 가치를 드높이는 수단이 될 거라고 예상했습니다. 그런데 아놀드 하우저의 예상은 제가 볼 땐 지금 절반은 맞고 절반은 틀린 것 같습니다. 절반은 맞다는 것은 영화가 그만큼 우리 문화에서 차지하는 비중이 또는 힘이 엄청나게 커졌다는 사실을 의미합니다. 그러나 최근의 영화는 하우저가 기대했던 높은 문화의 모습을 보여주지는 못합니다.
진형준:나중에 말씀드리겠다고 하고 바로 끼어들게 됐네요. 지금 정보화시대ㆍ영상시대를 맞이해서 문화 전반의 저질화가 초래되어, 소위 순수하고 고급스런 문화가 설자리를 잃어버리게 되는 것은 아닌가
걱정을 하셨지요. 일리가 있는 걱정입니다. 하지만 저는 기본적으로
그 생각에는 조금 유보를 두고 싶습니다. 순수문화와 대중문화, 고급문화와 대중문화를 그렇게 명백하게 구별할 수가 있는 건가, 거기에
대해서 한번 점검을 하고 가야 된다는 생각이 들거든요. 미국의 교육의 예를 들어 설명을 해보겠습니다. 최근 미국의 대학에서는 컬쳐럴
스터디즈, 그러니까 문화연구라고 하는 게 상당히 활발하게 이루어지고 있습니다. 그리고 그런 문화연구의 내용은 바로 대중문화 연구이고 낯선 문화 연구입니다. 그것은 기존의 대학 연구 분야에서 소외되어 있던 것들이죠. 우리는 그러한 현상을 어떻게 이해해야 하는가? 그것은 바로 이전까지 그들이 지니고 있던 문화에 대한 개념에 의해서는 문화로 취급되지 않던 것들에 대한 이해의 흐름과 맞닿아 있는 것입니다. 고급문화에 비해 대중문화는 문화가 아니다, 서구의 우수한
문화에 비해 다른 문화는 문화가 아니다, 이런 생각에 의해 문화의 영역에서 벗어나 있던 것들을 문화연구라는 이름으로 수용하고 적극적으로 연구하기 시작했다는 것은 무엇을 의미하겠습니까? 그것은 바로
낯선 것을 인정하고 그것을 있는 그대로 존중하는 태도가 자리 잡았음을 의미합니다. 대중문화연구를 시작하게 된 기본정신은 다른 것,
즉 이타성에 대한 이해의 정신입니다. 사실 어떤 의미에서 본다면 한
사회의, 어느 일정한 시대의 어떤 인식구조랄까, 그 저변에 깔려 있는
신화랄까 정신 같은 것을 대중문화가 더 잘 보여준다고 할 수도 있거든요. 저는 이런 식으로 생각을 하고 싶어요. 과연 우리가 저질이다,
상스럽다고 하는 것의 규정을 어떻게 해야 할 것이냐가 더 중요하다는 것이지요. 서구 중심주의적 입장에서 보자면 자기네들 문화가 가장 고급문화고 중심문화고 상대적으로 제일 상스러운 게 아마 미개인들, 야만인들 문화일 겁니다. 거기에는 문화라는 수식어도 붙이지 않았죠. 우리가 잘 알고 있는 레비스트로스의 구조주의 인류학, 문화적
상대주의는 바로 그러한, 이른바 야만적 사유를 연구하면서 그것이
야만적인 것은 서구 중심주의적 사고에서 볼 때 그러할 뿐이다, 그것도 훌륭한 하나의 문화라는 것을 보여준 것입니다. 낯선 것을 받아들인 정신이라는 측면에서 볼 때 그런 정신하고 아마 컬쳐럴 스터디즈,
즉 대중문화에 대한 연구하고 그 기본정신은 맞닿아 있다고 생각합니다. 그런 경향이 사회학 분야에서는 일상성 연구라든지 이런 것들로
나타나기도 합니다. 이런 얘기들을 하면 고급문화를 버리라는 얘기냐, 그런 의미로 오해하는 사람들이 있는데 고급문화 버리라는 게 아니라 적어도 지금까지 고급문화라고 규정돼 있는 것에 의해서 배제돼
있던 다른 문화, 다른 것들에 대한 이해를 우리가 보다 진지하게 해야
되지 않을까, 그래야 문화에 대한 우리의 인식이 성숙될 수도 있고 균형도 잡힐 수 있는 게 아니냐, 저는 그런 이야기를 하고 싶은 겁니다.
그런 게, 이거 우리 문화가 걱정이다, 저질화 돼서 큰일이다, 고급문화
설 땅이 없어진다고 걱정하는 것보다는 생산적이 아닐까 생각하는 겁니다. 그건 아마 문화정책 부문하고 관련이 있을 건데 그 부분에 대해서도 다시 이야기를 나눌 수 있었으면 좋겠습니다.
이남호:저는 진 선생님 생각에 일부분 동의하면서 약간 의아한 부분이 있는데, 물론 대중문화 혹은 순수문화가 분명히 나눠질 수는 없는
것이고 그 경계는 항상 모호한 것이지만 그러나 대중문화들도 순수문화 같은 방식으로 존중되어야 한다고는 생각하지 않습니다. 대중문화가 현실적으로 많은 사람들한테 영향력을 가지고 있으니까 그 문화를
연구한다는 것은 현실적 영향력을 가진 어떤 문화들에 대한 고려와
연구도 필요한 것이겠죠. 그러나 그러한 것들이 똑같이 중요한 가치가 있다고 말하는 것과 그것이 강한 현실적 영향력을 가지고 있다는
것은 별개로 나눠서 생각해봐야 될 것 같습니다. 그것을 나누지 않는다면 진 선생님 처음 말씀하신 문화의 보이지 않는 가치는 생각하기
어려울 듯합니다. 좀더 경건하고 진지하고 우리 삶의 근본적인 가치를 찾아내고 존경하는 계기가 될 수 있는 문화를 좀더 존중해야 하지
않을까요?
진형준:이 선생님도 저랑 같은 걱정을 하시는 셈이네요. 제가 말씀드린 것은 고급문화가 사라진다, 진지한 문화가 사라진다는 걱정이 자꾸 반복이 되면 공허한 동어반복이 되기 쉬우니까 그것보다는 우리
문화 자체가 획일화된다든지 너무 경직화된다든지 인식이나 의식의
차원에서 우리 문화를 바라보고 걱정을 할 필요가 있다는 거지요. 대중문화가 너무 획일적인 가치관, 경직된 가치관, 경박한 가치관의 조장에 기여하고 그것을 확산시키는 데 기여한다면 충분히 비판의 대상이 되는 것이지만 바로 그 이유 때문에 그것이 진지한 성찰의 대상에서 벗어날 수는 없다는 이야깁니다.
안규철:대중문화와 고급문화의 가치를 그렇게 명확히 구분하기는 어려운 것 같습니다. 어떤 불변하는 문화적 영역이 있는 것이 아니라 계속해서 외부의 자극에 의해 변화하는 것이 문화의 본성이라고 생각합니다. 전에 고급문화였던 것이 대중문화가 되고, 대중문화였던 것은
고급문화에 흡수됩니다. 지금의 사회는 문화의 대량생산과 소비가 문제가 되는 사회라고 할 수 있습니다. 산업적 과잉생산이 자원고갈과
환경문제를 낳듯이 문화적 과잉생산이 문화의 정체, 역류, 반복, 혼성을 낳고, 우려하시는 질적 저하도 가져온다고 봅니다. 문화연구는 이런 상황에서 우리의 삶에 커다란 영향력을 갖게 된 대중문화에 대해
비판적 안목을 제공하는 것으로서 의미가 있다고 생각합니다. 아마
문학에 비하면 미술은 대중문화의 영향력에 의해 더 급진적으로 변화해온 장르일 것입니다. 대중문화의 영향력은 단순히 회화나 조각에
대중문화의 이미지가 등장하는 차원을 넘어서 미술전시회의 형식을
바꾸고 이에 따라 작가들의 행동양식 자체를 변화시키는 단계에 와
있습니다. 미술전시회가 대규모 관객을 동원하는 이벤트로서의 성격을 갖게 되고, 그래서 전시회의 '기획'이 중요해졌고, 작가들의 작업이
이러한 요구를 따르게 되는 경향이 일반화하고 있습니다. 우려되는
점이 물론 많습니다만 그렇다고 해서 삶의 의미를 묻는 전통적이고
고유한 예술적 가치를 추구해온 예술가들의 영역이 사라진다고 말할
수는 없습니다. 변화하는 외부적 조건 속에서도 정신적 가치를 추구하는 본질적 지향성은 그대로 존속하고 있고 앞으로도 그럴 거라고
생각합니다.
문화권력에 대하여
이남호:좋은 말씀입니다. 이제 화제를 문화권력으로 옮겨볼까 합니다. 요즘 문화권력 얘기들이 나오는데 문화권력이란 도대체 뭔가, 이런 것들이 우리 사회에서, 문화의 논의 가운데서 중요한 문제인가 그리고 오늘날 정치와 경제가 문화에 미치는 영향에 대해서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진형준:신임 이 장관이 취임 후 가진 첫 기자간담회에서 자신의 입각을 문화예술계의 권력 이동으로 보아도 되느냐는 질문에 대해 그렇게
보는 건 지난 시대의 패러다임이다, 자신의 임명을 정치 세력화로 보지 말라는 이야기를 분명히 했습니다. 아마 이 장관이 취임함으로써
문화 부분에서 커다란 개혁의 물결이 일어나기를 기대하고 있는 사람들을 다소 맥빠지게 하는 소리일 수도 있었다고 생각합니다. 사실 이
장관이 그런 발언을 한 것은 우리나라에서 그동안 문화라고 하는 것이 정치적인 목적으로 이용된 점이 많았고 그런 의미에서 문화권력이라는 단어가 대단히 부정적인 함의를 품고 있었다는 사실과 연관이
있는 것 같습니다. 그 발언 자체가 개혁적이라고 볼 수 있는 거지요.
하지만 저는 적어도 문화정책의 방향 설정과 그 집행이라는 구체적인
부분에 있어서는 문화가 권력과 무관할 수 있다고 그대로 믿지는 않습니다. 두 가지 말씀을 드리지요. 우선 저는 권력이란 단어부터 검토를 해보길 원합니다. 권력이라면 대개 정치권력만 뜻하는 것으로 생각하는데 저는 권력이란 단어의 뜻을 확산시키고 싶거든요. 사실 권력이라고 하면 삼권이라고 해서 입법권, 사법권, 행정권, 이렇게 정치권력만 얘기했지만 경제권력도 있고 언론권력도 있고 더 나아가 윤리
같은 것도 권력이다, 라고 보고 싶습니다. 한 사회의 모양을 형성하고
있는 주된 인식의 틀 자체를, 물론 복수(複數)적으로 되어 있지만요,
권력으로 본다면 그것을 모두 아우르거나 토대를 이루는 문화가 권력과 상관이 없다는 것은 좀 억지 같습니다. 문화정책이 정치권력에 종속되어 이용당하는 데 문제가 있다는 것이지 그런 기본적인 어떤 커다란 의미의 권력하고 문화정책의 내용과 방향이 무관할 수가 없다는
것이 제 생각입니다. 따라서 또 제가 지적해드리고 싶은 것은, 사실 이
이야기를 하고 싶어서 앞의 이야기를 한 셈인데요, 장관이 바뀌고 사회의 모든 중요한 문화 분야의 담당자가 바뀌었다는 것은 문화권력이
바뀐 것을 의미한다는 것이며 당사자들이 그것을 인정하고 인식했으면 한다는 것입니다. 실제로 권력자가 된 거죠. 그건 인정을 해야 합니다. 좁은 의미의 정치권력은 물론 아닙니다. 그걸 왜 솔직하게 인정을
해야 하느냐면 중심에 섰을 때는 그에 걸맞는 생각을 하고 정책을 집행해야지 여전히 재야에 있을 때의 마인드와 방법을 쓰면 위험하다고
보기 때문입니다. 이젠 아마추어가 아니고 프로가 되어야 한다고 생각해야 정당한 문화권력이 창출될 수 있어요.
김사인:권력을 누가 쥐고 있느냐, 하는 식의 얘기는 잘 모르겠고 또 그것만으로는 불충분할 듯합니다. 다만 근년에 우리 문화계에서 제기되었던 권력논쟁은 우리 사회의 문화적 심층의 변화가 일정하게 반영되어 있다고 봅니다. 개인적으로는 논쟁들을 간간이 지켜보면서 문학
또는 문화를 논의하는 자리에 권력이라는 용어가 적절한 세련과 검증과정이 불충분한 채 남용되는 듯하여 거부감을 가졌었습니다. 말은
같은 권력이되 우리가 일상적으로 써온 그 말과는 뿌리가 다른, 유럽에서 건너온 또 다른 학술상의 유행어로 추정되는데, 그 권력 개념의
안경을 통해 과연 우리 문학과 문화를 살릴 전망이 세워질 수 있겠는지 별로 미덥지가 못했습니다. 그렇지만 개념과 논리의 적절성 여부와는 별도의 차원에서, 급속히 팽창하는 영상과 디지털의 새 감수성이 활자매체를 위시한 기존의 아날로그적 감수성과 질서에 제출하는
다양한 이의제기의 한 양상이라고 보아야 하지 않을까 생각합니다.
논의의 세련은 그것대로 애쓸 일이지만 양자의 갈등과 충돌은 어쩔
수 없는 현실이라고 봅니다.
이남호:김사인 선생님은 매체의 변화나 사회의 변화에 따라서 기존의
문화적 힘을 대표했던 고급한 활자문화를 중심으로 한 어떤 문화적
공간, 문화적 헤게모니를 우리 사회에서 가지고 있었다면 이제는 그
공간을 유지했던 시스템과는 다른 데서, 그 바깥에서 생성된 새로운
매체와 관련해서 생성된 문화적인 공간들이 강한 힘을 발휘하고 있다는 점에서 문화권력을 주목하고 계시는 것 같습니다. 이에 비해 진 선생님께서는 소위 보수적인 문화적 인사들의 문화적 영향력이나 발언권이 급격히 약화되고 그대신 상대적으로 외곽에 있던 진보적 성향의
문화들이 문화계의 중심이 되고 있다는 점에서 문화권력을 주목하고
있는 것 같습니다.
진형준:사실을 말하자면 그렇다고 볼 수 있지요. 말이 나온 김에 한마디만 더 하겠습니다. 저는 진보라는 말보다는 변화라는 말을 훨씬 선호하는데 그래서 개혁이 남발되는 요즈음의 세상 분위기에 대해서는
할 말이 많아요. 개혁을 너무 부르짖다 보면 우리는 착각에 빠지기 쉬워요. 우리 사회는 예나 지금이나 하나도 변한 게 없다는 착각이지요.
하지만 세상은 개인의 삶도 그렇고 개인의 생각도 그렇고 한 사회정신도 그렇고 어차피 변하는 겁니다. 그 변화를 껴안고 우리는 살아가는 건데 여태까지 사회가 하나도 안 변하고 그대로 있었던 것처럼 착각을 하게 만든단 말이에요. 어차피 그거 환상이에요. 여태 안 변하고
있었으니까 이 기회에 다 올바로 잡자, 뒤집자, 그것도 갑자기. 그래서
그들의 생각에 동조하지 않는 사람들은 지금 있는 현실을 있는 그대로 유지하는 것이 절대 선이다, 라고 믿는 사람들로 만들어버려요. 사실 둘 다 환상에 불과한 건데 말입니다. 그런 생각은 천복년설 같은 종교적인 신앙차원에서 가능한 거지 현실에선 불가능한 거거든요. 그것을 현실 차원에서 착각하면 어떤 일이 벌어지냐 하면 일정한 사람들과 그들의 생각이 전체의 구세주가 되려고 해요. 어느 한 인간과 그의
생각이 인간의 삶 전체에 대해서 구세주가 될 수 있겠어요? 어떻게 일정한 집단이나 개인의 생각이 절대 진리가 될 수 있겠어요? 그리고 도대체 유일한 절대 진리라는 게 존재하기나 하나요? 그렇다고 믿거나
그런 것처럼 행동하고 사고하는 것처럼 위험한 건 없습니다. 정말 위험해요. 시대에 뒤떨어진 생각이라서 위험할 뿐만 아니라 그런 생각이 초래한 역사적 비극들이 생생하게 우리에게 교훈을 주고 있는데도
우리가 그 길을 또 따라가는 것 같아서 위험해요.
안규철:그동안 예술계 안에서 주도적인 세력을 형성하고 정치권력과
밀착되어 독점적인 혜택을 누리면서 기득권을 유지해왔던 이른바 관변 작가들에 대한 비판이 많이 있어왔지요. 이들의 가장 큰 과오는 자신들과 다른 예술관을 갖고 있는 이들을 인정하지 않고 예술을 자신들에게 유리한 방향으로만 편협하게 묶어두려 하고 왜곡해온 데 있습니다. 지금의 상황은 이들이 차지해온 자리에 이들을 비판해온 재야
문화계 인사들이 들어서게 된 상황입니다. 이제 새로운 '관변'으로서
정책에 간여하는 문화적 세력을 형성하게 된 이분들이 과거의 관변
예술가들이 해왔던 잘못을 반복하지 말 것을 주문하고 싶습니다. 문화적 다양성과 관점의 차이를 받아들이는, 과거의 관변 예술가들과는
다른 태도가 필요하고, 그러기 위해서 더 엄격한 자기성찰이 요구됩니다. 그래서 이들이 또 하나의 비문화적이고 타락한 문화권력이 되지 않기를 바랍니다.
진형준:옳으신 지적입니다. 하지만 저는 타락의 문제를 관변 작가나
예술가에 국한해서 생각할 것은 아니라고 봅니다. 그보다는 대국적
견지를 갖는다든지 아니면 좀 공정한 시각을 갖는다든지 현실적 감각을 가져야 한다든지의 문제로 보고 싶은 거지요. 재야에 있을 때야 소수의 편일 수밖에 없는 게 사실이지요. 또 그게 균형감각이기도 하구요. 하지만 일단 중심에 들어오면 시야가 확대되어야 한다고 봅니다.
자신의 정책이 호소해야 하는 대상이 뜻을 같이 하는 일부가 아니라
국민 전체가 된 거니까요. 그 생각이 확고하지 않으면 한 국가의 문화정책이 국가적 차원에서 결정되지 않고 일부의 신념의 차원에서 결정됩니다. 국민이 그 신념의 실험 대상이 될 수는 없으며 더 위험한 것은
국가 단위의 정책이 불공정한 게임 같은 것이 될 수도 있다는 사실입니다. 적절할지 모르겠고 국가의 문화정책과 긴밀한 관련이 있다고
볼 수 있는지 모르겠지만 한 가지 예를 들지요. 지난 3월 1일 서울의
각기 다른 장소에서 두 종류의 집회가 있었습니다. 한쪽에선 2천 명이
모였고 한쪽에선 10만 명이 모였단 말예요. 그런데 텔레비전을 보다
보니까 몇 개 방송국에서는 10만 명 모인 건 방영을 안 하고, 하는 데서도 앞에 2천 명 모인 걸 크게 보도하고 그 집회는 뒤에 슬쩍 끼워넣는 식으로 하더군요. 그런 불공평한 게임이 어디 있나 이거죠. 게임은
공정하게 하자 이거죠. 그리고 설사 현재 문화권력을 잡은 사람들의
성향이 2천 쪽에 가깝다 할지라도 10만 명도 우리 국민이다 하는 생각을 가져야 올바른 정책방향이 생기는 거고 그것이 자유민주주의 정부에서 취해야 할 태도가 아니겠어요? 10만은 반역사적 세력이다, 수구세력이다, 참된 국민이 아니다 라고 강변하는 것은 재야에 있을 때 할
얘기지 문화권력을 잡은 사람이 그런 생각을 한다면 국가가 위험해지고 절망스러운 거죠. 그런 거는 스스로 나서서 바로잡아야 해요. 자유민주주의라는 큰 틀은 깨지 말아야 하니까요. 나중에 정보화시대 영상시대의 문제에 대해 말씀드리면서 비슷한 이야기를 또 하게 될지
모르겠습니다.
이남호:문화부 장관부터 시작해서 문예진흥원, 세종문화회관, 국립극장 극장장, 박물관 관장 자리는 제도가 만들어낸 문화권력이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문화개혁시민연대에서 앞으로는 개혁적인 문화인들이 문화계 전반에서 활동을 해야지 옛날 예총이나 문협에 계시던 분들은 다 물러나야 된다는 발언이 나오기도 했던 것 같습니다. 개혁적인 문화인들이 그걸 다 독점해야 된다는 생각은 위험하지 않을까요?
김사인:입에 올리기조차 멋쩍습니다만 '지금까지는 너희가 다 해먹었으니 이제부터는 우리끼리 다 하겠다' 이런 유치한 수준의 정서나 생각으로 새 정부가 이른바 개혁에 임한다면 심각한 일이겠지요. 그러나 그런 일은 가능할 수도 없고 지혜로운 것도 아니라고 보는데, 너무
지나친 우려 아닐까요? 무력으로 장악한 정권도 아니고 국민 다수의
지지 위에서 출범한 정부를 그런 시선으로까지 보는 것은 우리들 자신의 상식에 대한 모독이 될 수도 있다고 생각합니다. 좀더 두고볼 일이겠습니다만, 급진개혁을 새 정부의 전부라고 보는 것은 단견일 수
있습니다. 현 정권의 지지기반이 '노사모'로 대표되는 젊은 세대만으로 이루어져 있는 것이 아닙니다. 여의도 증권가며 미국 월가도 자신들의 이해에 따라 적극적인 지지를 보냈고요, 무엇보다도 재벌 2세인
정몽준 씨와의 후보단일화가 아니었다면 선거에 이길 수 없었을 겁니다. 현 정권의 토대가 이처럼 홑겹으로 이루어진 것이 아니라는 점을
기억한다면, 현실성 없는 지나친 염려나 지나친 기대를 피할 수 있을
거라고 봅니다. 누가 어느 자리에 있는가 하는 것도 적지않이 중요하겠습니다만, 우리가 더 관심을 가져야 할 것은 정책결정 과정, 제도운용 과정을 어떻게 과거보다 좀더 합리화하고 형평성, 공정성을 높일
것인가 하는 점이라고 봅니다. 문화 분야에서 새로 일을 맡은 분들도
그런 관점에서 애써주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그래야 있을 수 있는
오해와 갈등을 줄일 수 있을 겁니다.
진형준:지당하신 말씀인데 하나만 여쭤볼게요. 현 정권의 지지기반
문제입니다. 어느 정권이든 정권을 잡았다 하면 순전히 단일한 소수의 지지를 기반으로 하겠습니까? 일단 한 정권이 탄생했을 때는 여러
사람의 지지를 받았으리라는 건 당연한 거고 그것을 가지고 현 정권의 성격이 당연히 겹으로 이루어지리라고 보는 것은 위험하거든요.
사실 현 정권이 김대중 정권보다 한 걸음 더 나가 개혁을 슬로건으로
내세우고 있다는 것은 김 선생님도 인정을 하시죠? 그리고 개혁의 대상은 뭔가. 풀어 쓰자면 과거의 잘못된 부분들을 청산하자, 정의나 선의 이름으로 불의나 악을 제거하고 좋은 세상을 만들자는 것인데 아무리 좋게 보아도 환상적 이상주의예요. 엊그제 일간신문에 난 정명환 선생님의 인터뷰를 저는 아주 감명깊게 봤는데요, 어른이 한 분 계시구나 그런 느낌이 들어서 감동스럽게 봤는데 아롱이 얘기를 인용하신 부분이 있습니다. 정의나 선의 이름으로 어떤 정치적 당파나 이념을 전적으로 신뢰하는 것은 위험한 일이라는 이야기였지요. 그런데
지금 현재 개혁이라는 화두를 앞세우고 있는, 현 정권의 마인드가 어디까지 확장이 돼 있냐 하면 정의나 선의 이름으로 과거의 것은 전부
물러나라는 식으로까지 확장되어 있다는 겁니다. 저는 그러지 말자는
겁니다. 정말 거기까지 가면 위험하다는 겁니다. 뒤에 나온 건 옳다,
이건 굉장히 위험한 발상입니다. 내가 공자나 예수보다 컴퓨터나 자동차 운전은 잘 할지 모르지만 내가 공자나 예수보다, 옛날에 살았던
사람보다 절대 훌륭하다는 생각은 안 들어요. 요즘의 세태를 보면 꼭
막 청소년기에 접어든 젊은이가 엄마 아빠는 낡았어, 날 너무 몰라라고 투정부린다는 생각이 들곤 해요. 생각이야 좀 달라졌겠지만 그게
어디 꼭 훌륭해진 건가요? 저도 지금 김 선생님 말씀하신 쪽으로 정책방향이 흘러가고 그런 식으로 운영이 되면 다행이겠다는 생각을 하면서도 그런 낙관적인 생각이 들지를 않아서 말씀을 드리는 겁니다.
이남호:이 문제에 대해서 안 선생님도 미술계나 종합예술학교에 계시면서 여러 가지 느낀 게 많을 텐데 한말씀 해주십시오.
안규철:진 선생님은 일방적 개혁 논리의 위험성을 지적하셨는데, 저는 문화예술계 안에서 일어나는 여러 가지 불합리한 관행과 제도에
대한 개혁은 반드시 필요하다고 생각합니다. 문화부와 산하기관들이
실행하는 문화정책을 감시하고 비판하는 문화연대 같은 단체가 등장한 것은 문화예술계에 누적되어온 이런 요구가 자연스럽게 모여서 나타난 결과입니다. 새 정부는 이제까지 제기되었지만 개선되지 못했던
여러 가지 문제점들을 정부의 정책을 통해서 고쳐야 합니다. 다만 이제는 비판만 하는 입장이 아니라 직접 정책에 개입할 수 있는 통로가
열린 상황에서 문화 전체를 바라보는 넓은 시야를 가질 필요가 있겠지요. 좀더 신중하고 엄격하게 자신들의 하고자 하는 일을 검증하고
통제하는 노력이 중요하다고 생각합니다.
진형준:저도 NGO의 역할이라든지 시민연대라든지 이런 단체들의 역할이 아주 중요하다고 생각을 해오는 편입니다. 왜냐하면 그것의 기본정신은 비판정신이고 비판정신을 지탱하는 것은 균형감각이기 때문이지요. 하나의 권력이 비대화되고 전체주의화되어 그 사회가 균형을 상실했을 때 균형을 취해주는 건데 그 역할을 위해서 언제나 재야에 있어야 한다는 게 제 소박한 생각입니다. 그게 권력에 힘을 실어주면 균형감각을 상실하게 되는 거예요. 그게 정치권력이 되고 권력을
실천하는 주체가 되면 그건 NGO가 아니죠. NGO라는 건 언제나 야 쪽에서 균형을 취해주는 역할을 해야 되는 거고 아니면 공식적으로 들어가야죠. NGO 하지 말고.
문화진흥정책의 효용성
이남호:지금 개혁에 대해서 말씀들을 하셨는데 저도 한 말씀드리고자
합니다. 우리가 늘 불만을 갖고 있었고 잘못 됐다고 생각하고 있었고
불편하다고 느꼈던 것들, 많은 절차나 관례나 힘의 균형이나 이런 것들을 고쳐나가야 하고 고쳐나갈 수도 있다고 생각해야 합니다. 그러나 제가 지금 말씀드리고 싶은 것은 그런 개혁이 곧 문화수준의 향상과 연결되지는 않는다, 그러니까 그런 관습이나 제도 같은 것들을 개혁한다고 해서 문화수준이 더 높아진다고 생각하지는 않습니다. 그것은 별개의 문제라고 생각합니다. 정치를 통한, 개혁을 통한 문화나 예술의 진보는 과연 가능할 것인가 이 문제에 대해서 저는 회의적입니다. 시스템이 잘못되었던, 가령 예를 들면 아주 독재적인 어떤 정권 하에서 좋은 작품들이 많이 나왔던 역사적인 사례들이 있습니다.
진형준:지금 이 선생님 얘기하신 부분에 대해서 조금 더 적극적인 의견을 낸다면 문화예술을 진흥한다 해서 그 지원을 정부에서 독점할
생각 말아라, 오히려 줄여라 이렇게 말하고 싶어요. 아무리 의도가 좋다 할지라도 뭘 주고받으면 이미 관계가 수상해지는 거죠. 게다가 이
선생님 말씀하셨듯이 굳이 돈을 주고 지원을 해줘야지 그것이 곧 육성되고 발전할 것으로 생각하는 것도 문제가 많고. 저는 문화진흥을
위한 경제적 지원은 정부가 독점할 것이 아니라 기업에서 하든지 아니면 지방자치단체에서 하든지 하는 식으로 되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그로 인해 얻어지는 반대급부 때문에 지원정책을 포기하기가 싫긴 하겠지만. 기본적으로 과연 우리 정신의 질, 문화의 질, 학문의 질을 정말 높이려는 충정의 발로에서 지원하는 거냐라고 물으면 저는
부정적인 생각이 들어서….
김사인:글쎄요, 지금까지와 같은 정부 주도의 문화진흥정책의 효용성, 지원방식에 대해서는 저도 의구심을 가지고 있습니다. 그렇지만
민간이 주도하건 정부기구가 주도하건 문화예술에 대한 사회적 지원은 의미 있는 일이라고 생각합니다. 문화예술인들이 무슨 특별한 대접을 받아야 할 사람들이라서가 아니라, 자본주의 시장 속에서 자생적으로 재생산되기 어렵지만 사회적으로는 보호되고 격려될 만한 가치에 대한 지원이어야 하는 것이지요. 문제는 그 지원 방법인데, 원고료 지원, 공연이나 전시회 지원 같은 단편적이고 상상력 없는 행정편의주의는 이제 더는 곤란하다는 생각입니다.
기존 문화정책에 대한 반성
이남호:지금까지 우리 문화부나 문예진흥원이나 관변 문화단체가 시행했던 문화정책이 원칙이나 올바른 방향을 보여주었는지 궁금하군요.
안규철:문화예술계에 대한 지원이 가시적인 데 치중되어왔다고 봅니다. 거대한 미술관 건물을 짓고 대규모 국제미술전시회를 열어 유명한 외국작가들을 불러들이는 일에 중점을 두어왔지, 미술가들에게 절대적으로 필요한 임대작업실을 짓는 일 같은, 보이지 않는 문화적 인프라를 만드는 일에 소홀해온 것이 사실입니다. 물론 지방의 폐교를
작가들에게 작업실로 임대해주는 정책사업들이 소수 있었지만, 그 혜택을 받는 숫자는 정말 미미합니다. 대부분의 작가들이 농가의 축사나 비닐하우스 같은 열악한 환경에서 '불법으로' 작업을 하고 있는 상황은 전혀 개선되지 않고 있습니다. 미술관 건물들은 국제적으로도
부끄럽지 않을 만큼 번듯한데 거기서 전시될 작품을 생산하는 작업실들은 형편없는 상태로 방치되고 있습니다. 이것은 예술지원정책의 방향이 가시적인 데 편중된 결과입니다. 다른 한편으로 우리 문화정책에서는 문화예술이란 남에게 보여주고 자랑하기 위해서 하는 일이라는 인식이 지배적이었던 것 같습니다. 국가인지도를 높이고, 한국민이 고유한 문화를 갖고 있음을 외국인들에게 널리 알리는 수단으로
생각하는 것입니다. 물론 문화예술이 그런 효과를 가질 수 있습니다만, 남에게 보여주는 것은 다음 문제라고 생각합니다. 더 중요하고 본질적인 것은 그 문화 속에서 우리가 어떻게 살고 있는가, 그것이 우리의 삶을 어떻게 질적으로 풍요롭게 하고 우리의 집단적 기억을 형성하는 데 어떻게 기여하느냐 하는 문제일 텐데, 이런 측면이 도외시되어왔다는 것이죠. 문화정책이 눈에 보이는 실적만을 추구하고 남에게
보여주는 것을 목적으로 한다는 것은 대단히 반문화적입니다.
김사인:저는 일산 신도시에 살고 있는데요, 신도시 생긴 지 10년이 가까워서야 얼마전 문화센터 건립공사가 시작되었습니다. 다들 반가워
했지요. 그런데 알아보니 그 거창한 건물 속에 2천 석 규모의 오페라극장, 1500석 규모의 공연장이 들어앉는다는 겁니다. 대체 일 년에 몇
차례나 오페라를 공연할 것이며, 주민들이 얼마나 그에 호응할 것인지 가늠이 잘 안 되는 노릇입니다. 1500석 공연장 역시 방송국들의 쇼
프로그램을 위한 장소로나 임대될 수 있을까 지역여건으로 보아 턱없는 규모인 것이지요. 국민들, 지역 주민들의 생활상의 문화적 욕구가
거의 외면되는 우리 문화행정의 현주소가 단적으로 드러나는 사례입니다. 문학의 경우에도 형평성을 둘러싼 뒷말을 줄이기 위한 궁여지책이겠으나 사업의 시급성이나 질적 우열을 판별하기보다 '조금씩 고루 나누기'주의가 지원의 관행처럼 되어 있습니다. 지원금을 그 회계연도 안에 다 쓰지 않으면 안 되는 관행도 바뀌어야 한다고 봅니다. 장기적으로 적립을 해서 좀더 뜻있는 사업에 해당 문화단체들이 쓸 수
있는 여지가 전혀 없습니다.
문화정책의 방향
안규철:기존의 문화예술 지원은 주로 예술가들에게 창작활동을 위한
지원금을 나눠주는 데 초점을 두어왔습니다. 말하자면 창작자 중심의
예술지원정책이었는데, 창작만 지원하면 자동적으로 문화예술이 진흥된다고는 할 수 없습니다. 폭넓은 문화예술의 수요자층이 형성되지
않는 한 예술가에 대한 지원의 효과는 한계가 있습니다. 정부의 예술
지원이 소수의 창작자만을 위한 것이 아니라 궁극적으로 다수의 수요자를 위한 것이라면, 지원정책이 수요자를 형성하는 데도 관심을 가져야 할 것 같습니다. 이것은 결국 문화예술교육의 문제입니다. 입시
위주의 현행 중ㆍ고등학교 교육에서 문화예술교육이 거의 소멸되다시피 하고, 미대나 음대로 진학하는 전공자들에게만 예술교육이 한정되는 것은 우리나라 문화예술의 장래를 생각할 때 대단히 심각한 문제라고 생각합니다. 공교육과 일반인들에 대한 사회교육을 통해서 문화예술의 수용자층을 확대하는 일에 문화부가 주도적으로 나서야 할
것으로 생각합니다. 이제까지는 문화예술교육은 교육부에 일임해두고 방치해온 상태였습니다만, 앞으로 문화부가 적극적으로 개입해서
개선해야 할 문제입니다.
진형준:저는 문화정책 하면 한가지 말씀드리고 싶은 게 있습니다. 한
국가의 문화정책을 결정하는 것은 글로벌 정책, 세계화 문제하고 상당히 밀접한 관련이 있다는 것입니다. 세계 속에서의 우리 문화라든지 급속하게 진행되고 있는 세계화 속에서 우리 문화를 어떻게 설정하고 우리의 아이덴티티를 유지해야 하는가라는 문제가 우리 문화정책방향을 어떻게 이끌 것인가 하는 데 상당 부분 고려되어야 한다고
봅니다. 유럽의 경우를 예로 들어보지요. 우선 독일을 살펴보면 사실
독일 같은 나라는 적어도 문화의 면에서는 상당히 폐쇄적인 나라였습니다. 타문화에 대해서 배척적이었고 국민성 속에 그런 기본정신을
가지고 있었고 문화정책도 그랬는데 얼마전부터 아주 의도적으로 이민자 문화를 지원하고 개방된 혼합 문화를 지향하면서 외국에 대한
공포증을 치유하고 타문화에 대한 관용, 이런 것들에 역점을 두고 시행을 해서 상당히 성공을 거두고 있습니다. 대부분의 문화기관의 활동을 지방자치로 이양해서 거기서 자율적으로 관리하게 한다든지 그
기본적인 개념은 세계화에 대한, 그것이 가져올 획일화에 대항하여
다문화주의를 지키기 위한 것이고 그러기 위해서는 우선 스스로 내부의 문화와 인식의 다원화가 필요하다는 것이지요. 그래서 이질적인
것들을 스스로 받아들이는 정책을 쓰게 된 겁니다. 프랑스 같은 경우는 영미 중심의 획일화에 반대하는 데 언제나 앞장선다는 사실이 그
기본정신을 잘 보여줍니다. 그렇기에 문화라는 개념 자체를 새로 정립하고 기존의 개념을 해체하려는 노력도 많이 하는 한편 문화다원주의라고 하는 것이 무엇인가에 대한 연구를 많이 하면서 그것을 구체적 정책에 반영도 합니다. 그런데 재미있는 것은 그런 노력들이 아주
현실적인 결실들을 맺는다는 것입니다. 구체적으로는, 그렇게 자국
문화에 대한 우월감을 가지고 있었던 나라가 오히려 문화 자체의 폐쇄성만 고집해서는 안 된다 하면서 경제와 문화를 타협시키는 방향을
모색한다든지, 민간 다국적 문화산업과 국가 공공서비스 문화의 균형을 잡을 수 있는 정책방향을 설정하기 위해서 노력을 한다든지 문화산업 자체를 문화부의 정책에 접목시킨다든지 그런 노력도 하고 그
다음에 지역과의 상호문화주의 이런 것들을 아예 정책방향으로 정한다든지 하고 있습니다. 너무 구체적인 부분까지 우리가 이야기할 수는 없고 딱 한 가지만 지적하기로 하지요. 독일이건 프랑스건 세계화가 지구촌의 획일화를 낳을 수도 있다는 측면에서 경계를 하고 있는
것은 사실이지만 그것을 유럽 문화의 우수성이나 자국 문화의 독자성의 이름으로 배척하는 것은 아니라는 거지요. 예컨대 역으로 세계화가 지역문화의 특성화를 부추기는 측면이 있다는 점이 강조되기도 합니다. 그리고 그런 부분의 연구도 상당히 이루어져 세계화와 지역화를 합성한 글러컬리제이션이라는 신조어가 만들어지기도 했구요. 저는 우리에게도 그런 감각이 필요하다고 봅니다. 예컨대 복고문화라든지 전통을 복원하는 것을 꼭 향수, 옛것으로 돌아간다는 식으로 생각하지 말고 그것을 바로 지역개발의 실천적인 의지와 결합을 시킨다든지 뭐 그런 식으로 지역과 고루 발전시키는 쪽, 세계화에 맞추어 우리
쪽의 독자성을 개발하는 방향들에 대한 구체적이고 실천적인 모색들을 새로운 장관이 해주었으면 합니다.
김사인:좀 미안하지만 계속해서 정책입안자들의 문화에 대한 인식의
불충분함, 상상력의 부족 이런 걸 탓하게 되는데, 우리 사회의 문화적
역량이 아직 그쯤에 머물고 있다는 얘기일 수도 있어요. 그렇지만 예컨대 문학을 지원하는 경우에도 문인들한테 얼마쯤씩이라도 '구휼금'을 보태주는 것 외에 무엇이 또 있겠느냐는 태도를 보게 될 때는 도리없이 답답해져요. 좀 눈이 시원하게 각도를 바꿔 생각해봤으면 하는 거지요. 당장 문인들에게 경제적 혜택으로 돌아가는 건 아니라 하더라도, 돌아가신 이문구 선생이 늘 하시던 말씀입니다만, 서울 같으면 종로나 관철동 같은 곳을 문학의 거리로 조성해간달지, 전국적으로 중소규모 도서관 건립운동을 추진한달지 하면 장기적으로 시민과
문학과 문인들을 다 살리는 진흥사업이 아니겠나 하는 생각입니다.
진형준:제가 하나만 더 덧붙이기로 하지요. 아까 맨 처음에 저는 한 나라의 문화를 그 나라의 영혼이나 정신으로 간주할 수 있다고 말씀드린 바가 있습니다. 문화를 얼이나 정신으로 생각할 수 있다면 우리 문화에 대한 성찰은 우리 문화의 자존심, 주체성 문제하고 상당히 관련이 있다고 봅니다. 저는 요즘, 아마 우리나라가 지구상에 존재하는 그
어떤 나라보다 열심히 우리의 주체성을 내세우고 자랑하고 있다고 보고 있습니다. 한 100년 넘었죠? 우리가 서구 콤플렉스를 지니고 살아온 것이. 100년 가까이 서구의 어떤 인식이나 문화를 모델로 하고 따라가다 그 반대급부로 우리 자존심을 찾으려는 자연스런 움직임이 생겼다고 봅니다. 그런데 그런 흐름을 바라보는 제 마음이 그리 편치를
못해요. 그게 꼭 배타적인 독선주의로 가서 무조건 우리 게 귀하다, 옳다, 이런 식으로 가는 게 아닌가 하는 우려가 든단 말입니다. 가령 개고기를 예로 들어보지요. 88년도에 올림픽을 앞두고 관에서 주도해서
개고기 먹는 걸 금지시킨 적이 있었지요. 그 경우 저는 개고기도 우리
식문화다, 뭐 이렇게 얘기하는 게 당연하다고 생각해요. 그런데 요즘은 스스로 나서서 먹는데 어쩔래, 먹는데 어쩔래 하면서 일부러 들고
다니며 먹는 것 같아서 영 기분이 찜찜해요. 자신이 있으면 남의 입장도 생각해주면서 좀 조용히 먹는 게 어른스러운 태도지 그냥 자기 좋은 대로 하는 게 점잖은 태도는 아니잖아요. 난 그런 게 주체성이 아니라고 생각하거든요. 주체성은 타자에 대한 이해를 전제로 하고, 남들에 대한 배려도 하면서 그들이 우리를 보는 시선도 염두에 둘 때 생긴다고 생각해요. 자존심이라고 하는 게 나 귀하다, 귀하다 한다고 생기는 게 아니라 남들이 우리를 정상적인 시선으로, 귀한 시선으로 볼 때
생기는 거다 이거지요. 여기서 앞에 말한 정명환 선생님 인터뷰 내용이 엉뚱하게 또 생각나네요. 정명환 선생님이 말씀하셨듯이 요즘 저도 국제적인 정보를, 특히 외국에서 우리를 어떻게 바라보느냐 하는
정보를 우리의 텔레비전이나 신문을 보고는 전혀 얻을 수가 없어요.
외국 정보들, 외신보도, 텔레비전을 열심히 뒤적이고 보면서 겨우 알게 되거든요. 말하자면 우리 모두 국제감각이 마비된 채 민족의 동질성과 자존심을 내세우고 있는 형국이에요. 논의가 조금 확대되는 듯이 보이지만 아주 중요한 문제라서 몇 마디 더 해야겠습니다. 바로 북한 정권의 문제예요. 북한의 김정일 정권을 사회주의 정권이니 공산주의 정권이라고 말하는 나라는 거의 없어요. 깡패 국가라고 부르던가 아니면 더 심하게 강도 국가라고 불러요. 미국의 시선이 아니라 반미감정에서 둘째가라면 서러워 할 프랑스의 지식인들과 언론들도 그렇게 말하고 북한 문제를 심각하게 생각하는 국제회의도 열리는 형국이니 그것이 아주 일관된 국제적 시각이라고 볼 수가 있어요. 지금 그럴 필요를 못 느껴서 일일이 자료를 말하지는 않겠지만 제 속에 들어
있는 민족주의적 감각은 그런 정보를 대할 때마다 저를 아주 부끄럽게 만들어요. 그렇지만 내 속의 민족주의가 지금의 북한 정권을 같은
민족이란 이름으로 무조건 껴안게 만들지는 않아요. 하나의 비유를
들어볼까요? 암세포가 뭡니까. 암세포는 우리 속에 있던, 우리 신체를
구성하고 있던 하나의 정상세포가 적어도 최소한의 기본 상태를 유지하지 않고 일탈했을 때 생기는 거거든요. 그렇다면 그 암세포도 우리
세포라고 껴안을 겁니까. 어떻게든 정상세포로 만들도록 노력을 해야지, 하나의 세포가 정상세포냐 암세포냐, 그것이 최소한도의 기본 상태를 유지하고 있는 건강한 세포냐 아니냐라고 하는 건 의사가 진단을 하지요. 제가 보기에 방금 말한 국제적인 감각과 시각이 현 상태에서 유일하게 의사 노릇을 할 수 있다고 저는 봅니다. 외국의 눈치를 보자는 것이 아니라 우리 스스로가 진단의 능력을 상실했다고 보기 때문이지요. 같이 생각해봅시다. 최근 5년 간 300만에 가까운 북한 주민이 기아선상에서 헤매고 있거나 아사했으며, 순전히 굶어죽지 않기
위해 북한을 탈출한 탈북자의 수가 20 내지 30만에 이른다는데 우리는 그 가슴 아픈 현실에 대해 너무 무지하고 둔감해요. 우리가 그 문제에 무지하고 둔감하도록 길들여졌기 때문이지요. 인권의 차원에서 도저히 둔감할 수 없는 일에 우리가 둔감하다면 우리는 그런 진단 능력을 상실했다고 보는 것이, 정말 가슴 아픈 일이지만, 우리가 인정해야
할 우리의 현실이 아닌가요? 그래서 우리는 국제적인 감각 같은 것들을 중시해야 된다 이거죠. 그러지 않고 우리끼리 민족 민족하면서 그
암세포를 하나로 껴안으려고 하면 우리가 암에 걸려 결국은 다 죽게
됩니다. 우리의 자존심이 타자에 대한 이해를 전제로 한 국제감각과
함께해야 하는 것은 그래서 아주 절박한 문제라고 저는 봐요.
안규철:앞에서 문화예술정책이 예술을 남들에게 보여주고 우리를 알리기 위한 수단으로 생각해왔다는 점을 지적했습니다만, 이로 인해서
국제적인 문화예술행사에 내놓는 작품들의 성격이 남들이 우리에게
기대하는 쪽으로 편향되어온 점도 큰 문제입니다. 안타깝게도 이런
태도가 문화정책뿐 아니라 예술가들 속에도 상당히 내재되어 있습니다. 우리에게서 이국적인 것을 기대하는 서구인들의 기호에 따라서
우리 스스로 그들의 오리엔탈리즘에 우리를 맞추려는 경향 말입니다.
한때 세계화가 가장 중요한 이슈였을 때, 한국을 빛낸 영화들은 모두
우리 문화의 고유성을 강조한 영화들이었다는 정부의 홍보방송을 지하철에서 계속 듣게 되었던 적이 있습니다. 그런데 이렇게 하면 상을
받아올 수는 있을지 몰라도 지금의 우리에게는 낯설어진 과거의 한
측면만이 중요해집니다. 그렇게 되면 계속해서 우리 자신의 정체성을
과거 속으로 한정하고 왜곡하게 된다는 점을 지적하고 싶습니다. 우리가 살고 있는 지금 이곳의 이야기로 세계인의 보편적 공감과 인정을 받아야 합니다.
진형준:사소한 거 하나 여쭤보고 싶은데 혹시 고적지를 다닌다든지
또는 유적지를 다니면서 그거 안내문 볼 때마다 답답하신 적 없으세요? 전 좀 답답하던데요. 유적품의 속내용을 소개한 것을 본 기억이
거의 없어서요. 이게 왜, 어떤 관점으로 보면 의미가 있느냐 등의 예술품의 의미, 내용을 소개하는 것이 없어요. 하나도 없습니다. 세워진 연대라든지 개연 설명만 해놨거든요. 이거 다 바꿔야 된다고 생각을 한번 해봤거든요. 이건 국가사업으로 크게 한번 지원을 벌여도 좋겠다
하는 생각을.
안규철:거기 번역돼 있는 문장들이 또 엉터리 영어에 엉터리 일본어예요.
이남호:선생님들 말씀 들으니까 문화부에서 할 일은 폼 잡는 일들이
아니고 숨어서 조금씩, 문화부가 아니면 관심을 가지고 추진할 수 없는 그런 일을 해야 될 것 같습니다. 가령 김소월 100주년 때 『현대문학』에서 특집을 기획했는데, 김소월 시 한 편씩을 여러 필진들이 해설을 하는 그런 기획입니다. 그런데 시를 받아보니까 판본이 다 틀려요. 시인, 국문학자, 국어학자 모여서 김소월 시들을 현대 표기법으로
고친 정본을 만드는 사업도 문화부에서 할 만한 사업이 아닐까 해요.
또는 단순히 개인의 문예지가 아니고 이제 현대문학의 역사나 다름없는 『현대문학』 같은 것도 전부 전산화 작업을 해야 하는데, 개인의
힘으로는 너무 큰 사업일 것 같아요. 그리고 지금 TV 드라마나 개그
같은 데서 쓰이는 상스런 말들이 우리 사회에 급속히 확산되고 있는데, 직접 규제할 수는 없지만 간접적으로 우리말을 순화할 수 있는 방안도 문화부에서 강구하면 좋겠습니다. 즉 문화의 저변을 넓히는 사업들을 문화부에서 많이 해야 되지 않을까 그렇게 생각합니다. 이건
뭐 재미로 하는 얘긴데, 문화부의 자문회의 자리에서 어떤 작가 한 분이 이런 말씀을 하셨습니다. 조그만 다리 하나를 놓는 데도 몇백억씩
드는데 문화부의 문학지원 예산이 겨우 십억 이십억이냐, 근본적으로
국가나 정부에서 문인들을 우습게 보는 처사다라고 하셨어요. 그건
좀 곤란하지 않나 싶어요. 문인들 주라고 세금 거두는 것은 아니죠. 그리고 또 문인들이 열심히 반정부투쟁을 해서 오늘날 민주화를 이뤘는데 문인들에 대한 지분이 이렇게 약하면 되겠느냐라는 말도 있었어요. 어떤 문인들은 정부의 창작지원금들을 지원받는 것에 대해서 너무나 당연하게 생각하고 그걸 공돈으로 여기는 듯한 발언도 해요. 예술가들이 정부의 돈을 지원받는 것들에 대해서 굉장히 조심해야 될
것 같아요.
김사인:진 선생님 말씀 충분히 공감합니다. 그리고 그러한 세계화 문제, 각국의 전통의 문제와 관련해서 심각한 상황이 지금 진행중에 있습니다. 2005년 1월 1일을 기해서 뉴라운드라고 불리는 세계무역기구(WTO)체제가 완전 가동될 예정으로 되어 있습니다. 그 내용의 핵심이
서비스시장의 개방이고, 그 안에는 교육, 출판, 법률, 영상, 시청각, 방송, 정보통신 등의 분야가 모두 들어 있습니다. 해당 분야의 우리 역량에 불리한 영역은 개방을 않겠다고 우리 정부가 큰소리를 친 터이지만, 우리 마음대로 그렇게 될 수만은 없는 것이겠지요. 또 시장논리에
따르면 서로 개방을 함으로써 우리가 개발도상국들로부터 얻어낼 이득 또한 만만치가 않을 것이겠고요. 치열하게 진행되고 있을 외국과의 협상에서 문화의 종 다양성을 존중하는 인류적 대의에 의거하는
가운데 열 것과 지킬 것을 슬기롭게 분간해서 통상 당국에 가이드라인을 제시하는 것은 문광부가 잘 해내지 않으면 안 될 일이라고 생각합니다. 또 얘기 듣기로 아직 문화관광부 내에 남북의 문화적 이질화
문제를 고민하고 통일문화정책을 수립할 전담 부서가 없다고 해요.
이 얘기를 듣고 깜짝 놀랐습니다.
문화단체의 역할
이남호:오랫동안 우리 문화계를 대표했던 문인들이나 예총 이런 쪽의
지원과 파워나 인지도가 급격하게 떨어진 반면, 민족작가들이나 민예총이나 이런 쪽의 파워나 인지도 또는 세력이 커져 있는 실정입니다.
이런 것들이 문화권력의 이동이라면 이동이겠죠. 어쨌든 헤게모니를
쥐고 있는 문화단체들이 꼭 필요한 건가, 문화를 발전시키고 문화의
질을 높이는 데 정말 순기능을 하고 긍정적인 기능을 하는가, 그리고
또 정부로부터 상당한 액수의 지원금을 이런 문화단체들이 지원받고
있는 걸로 알고 있는데 그런 지원들이 정당하게 지원되고 또 집행되고 있는가 이런 문제들도 한번 간략하게 짚어주시면 좋겠습니다. 미술계는 어떠신가요?
안규철:단체에 가입을 안 해서…. (일동 웃음)
이남호:예술 자체는 단체하고는 사실 상관이 없는 거죠.
김사인:참 난감한 질문인데요. 제가 인연을 맺고 있는 문인단체가 민족문학작가회의인데 작가회의는 표현의 자유와 우리 사회의 민주화,
참다운 민족문학의 건설을 정관의 목적 조항에 못박아두고 있습니다.
지난 7, 80년대에 이러한 취지의 문학인 결사체의 활동과 존재는 작품
이상의 의미를 가졌다고 생각합니다. 그러니 문화단체가 꼭 필요한가
하는 질문에는 사회적 상황에 따라 다를 수 있지 않겠는가 하고 답해볼 수밖에 없겠고요. 그런데 90년대 이후 지금에 이르는 상황은 그 이전과는 질적으로 달라졌다고 판단되고, 그런 만큼 표현의 자유와 사회의 민주화를 말하는 목소리에 7, 80년대처럼 힘이 실리기가 어려워졌습니다. 그런 암중모색 끝에 90년대 중반 사단법인으로 등록을 하고 문학인 대중단체의 성격을 강화하는 가운데 오늘에 이르고 있는
셈입니다. 물론 문인 권익 옹호사업이나 복지사업들을 제대로 해낼
수만 있다 해도 단체의 의의가 충분하겠습니다만, 그 역시 썩 당당하다고만 할 수 없는 게 현실인 듯합니다. 1천여 회원 가운데 한 사람 몫의 생각입니다만, 이제 또 한차례 엄정한 자기점검이 필요한 단계가
아닌가, 조직적 관성에만 맡겨 계속 흘러갈 수만은 없는 노릇이 아닌가 하는 생각을 하기도 합니다. 단체를 이끌어가는 소임을 맡은 분들은 물론 더 많은 생각들 하시겠지요. 그중 표방하는 바가 선명하고 사정이 나은 작가회의가 이럴 때 여타 문인단체, 예술인단체들의 형편은 더 난처한 것 아닐까 짐작됩니다.
이남호:정부에서 그런 단체들을 지원을 해줘야 되나요?
김사인:아니 그건 내용을 잘 모르시는 얘기일 수가 있는데, 정부에서
단체 자체를 지원해주는 경우, 다시 말해 단체의 경상비를 지원하는
경우는 예총과 그 산하단체들뿐인 것으로 알고 있어요. 남의 집 살림
얘기가 조심스럽지만, 회원들의 자발적 결사체라면 단체의 운영은 회비로 충당해야 경우에 맞는다고 생각합니다. 경상비를 정부로부터 지원받아온 오랜 관행이 오히려 그 단체들의 자립성과 자생력을 결정적으로 훼손한 것이 아닌가 싶습니다. 다행인지 불행인지 작가회의나
민예총 쪽은 경상비 지원이 없고, 기획하는 사업별로 심사를 거쳐 사업비 일부를 지원받고 있습니다.
문화관광부의 역할
이남호:네. 좋은 말씀 많이 나왔는데, 문화관광부란 데가 도대체 문화에 대해서 뭘 하는 곳인가, 뭘 해야 되는 곳인가, 뭘 할 수 있는 곳인가, 이런 것에 대해서 의견을 듣고 싶군요.
안규철:반복되는 얘기지만 미술관만 번듯하게 잘 지어놓고 거기서 전시될 작품은 비닐하우스 축사에서 만들든 말든 상관하지 않고 있는
것이 우리 문화정책의 현주소입니다. 서구에서 보편화된 공공 임대작업실 같은 창작을 위한 인프라가 너무 안 돼 있어요. 또 수많은 전업작가들이 자신의 작업을 계속하면서 자기 전공을 가지고 이를 테면 일반인을 위한 사회교육 분야에서 일을 할 수 있는 장치를 마련해서 이들을 지속적으로 사회 속에 끌어들이는 일도 중요합니다. 이런 일들은 민간이 하기 어렵습니다. 화려한 무대의 뒤쪽을 튼튼하게 하는 이런 역할을 문화부가 맡아야 합니다.
이남호:우리 문학의 경우에는 집필실이 곳곳에 많이 지어졌는데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용하는 사람이 별로 없는 듯해요. 문학은 집필실이
자기 방 하나 있으면 되고 하다못해 PC실에 가서 쓰면 되니까요. 사실
문학이 사회적으로 큰 비중을 차지함에도 불구하고 문학은 종이와 연필만 있으면 되는 개인적인 작업이기 때문에 지원의 방식이 별로 많지 않은 것 같아요. 그래서 가령 대규모 오페라 공연은 많은 지원금을
받을 수 있는데 문학은 그런 건 아니죠. 오페라 하나를 무대에 올리면
몇억씩 지원이 되고 하는데 문학은 그런 행사용 예술이 아니기 때문에 지원하기가 어려울 것입니다.
진형준:문학이야 지원을 해도 아웃풋이 적으니까 크게 신경을 쓸 수가 없는 거겠지요.
이남호:아까 진 선생님께서 외국의 문화정책을 말씀하셨는데, 그렇다면 문화부가 적극적으로 문화정책을 펴면 우리의 문화적 환경이나 문화의 수준에 상당한 영향을 미치면서 좋아질 수도 있다고 생각하십니까?
진형준:아뇨. 앞에서도 말했듯이 저는 문화부가 그런 부분에 좀 소극적이었으면 좋겠다, 소극적일수록 좋다고 생각하는 편이에요. 선의에서 지원을 하더라도 무언가 주고받고 하면 관계가 어색해지잖아요.
현 정부의 개혁 내용에는 권언유착, 정경유착의 고리를 끊겠다는 내용이 들어 있는 것으로 알고 있는데 그 정신에도 그리 어긋나지 않는다고 봅니다. 지원 문제가 그렇다는 것이고 저는 문화정책에서 정작
신경을 써야 될 문제는 따로 있다고 봅니다. 제가 아까 말한 것처럼 정보화시대와 관련된 문제인데 그런 시대에 문화정책이 어떻게 건전하게 운용될 수 있는가의 문제는 문화정책 담당자들이 진지하게 고민해보아야 할 문제라고 생각하는 거지요. 대개 우리가 IT 세계첨단국가라고 얘기를 하는데 제가 너무 앞장서서 얘기를 하는지 모르지만 야, 이러다가 너무 앞장섰으니까, 우리가 앞서가니까 그것 때문에 망해가지고 후발, 뒤에 따라오는 국가들의 타산지석이 될까봐 걱정이거든요.
비교적 제가 오랫동안 이미지 상상력 연구를 해온 편인데 그러다 보면 이미지나 영상, 전자매체가 가진 힘 같은 것들을 강조하게 돼요. 그러나 그 말을 뒤집으면 거꾸로 위험이 그만큼 크다는 얘기거든요. 그런데 우리는 너무 낙관적이에요. 대개 착각들 하거든요. 정보유통이
쉬워지고, 정보량이 많아지면 사람들은 보다 다양한 지식들을 접하게
되어 사람들 인식도 다원화되고 다양화된다고 생각하거든요. 다원주의를 80년대부터 쓸데없이 혼자 얘기해온 입장에서는 참 걱정스러운
건데 다원화라는 말이 잘못 쓰이고 있기 때문이지요. 하지만 그 문제는 접어두고 영상시대, 정보화시대가 가져올 위험을 조금 자세히 말씀드리고 싶어요. 사태가 좀 심각하다고 보기 때문이지요. 허락하신다면 지루하시더라도 조금 참아주시길 부탁드리겠습니다. 요즘 정보매체들이 많아지고 정보소통수단이 발달함에 따라서 정보가 첫째는
과잉이면서 오히려 정보부재를 낳는다 말이죠. 정보화 시대를 맞이하여 우리는 수없이 많은 정보를 쉽게 접할 수 있게 된 건 사실이지요.
하지만 그렇다고 우리의 선택의 폭이 넓어진 건 아닙니다. 조금만 생각해보면 알 수 있어요. 정보의 양이 너무 많아지면 우리는 오히려 그
정보의 그물망에 갇혀 우리가 정보 자체를 택하기가 어려워지는 법이지요. 그래서 우리는 우리 입맛에 맞는 정보만 택해서 취하게 되고 다른 정보는 접하지 않게 돼요. 정보끼리 소통이 안 되는 거죠. 자기가
하나의 정보만, 한 군데 매체에서 하나의 정보만 얻으면 다른 건 안 봐요. 전에는 신문 몇 개 보고 텔레비전도 보고 그렇게 해서 여러 개를
보는 균형감각이 있었는데 이제는 하나만 보면 다른 거는 안 보거든.
그러면 정보과잉이 정보편식, 정보차단이 된단 말예요. 이건 굉장히
중요한 문제예요. 어떻게 정보들이 소통할 수 있는 망을 뚫어줄 수 있느냐 하는 문제, 거기다 더 중요한 문제가 있어요. 주어지는 정보가 너무 많으니까 정보를 그냥 빨리 빨리 소화해버려요. 빨리 빨리 소화해내는 게 아니라 소화를 못하고 소화불량증에 걸린다는 표현이 더 알맞겠지요. 우리는 우리에게 주어지는 정보, 특히 TV를 통해 전해지는
정보를 그냥 그런 무식욕의 식욕으로 무덤덤하게 소비하는 거지요.
그런 사이 정보라는 것의 사실성이나 진실성 여부의 성격도 바뀌고
정보의 무게도 바뀌는 일이 벌어져버리지요. 전에는 육하원칙에 의해서 그것이 올바른 정보냐 아니냐의 검증 절차가 있었지만 요즘은 눈에 보이는 이미지 자체가 그대로 사실이 되어버리잖아요? 그리고는
금방 환상에 빠지지요. 저렇게 우리 눈에 생생하게 보이는 사실을 우리가 어떻게 부정할 수 있겠느냐는 거지요. 하지만 생각해봅시다. 우리 눈에 생생하게 보이는 것은 실은 누군가가 의도적으로 선택하여
우리에게 제공한 생생함일 뿐이에요. 그러니 우리는 정보의 수동적인
소비자가 되어 화려한 버라이어티쇼나 지구상에서 사람이 굶어죽고
있는 기막힌 뉴스, 대통령의 발언 등을 아무런 의식 없이 그냥 동등하게 소화해버리면서 성찰을 멈추게 된다 이겁니다. 그러면 어떤 정보가 중요하냐 아니냐의 기준이 엉뚱해지지요. 우리 눈에 보이는 이미지가 화려하면 그게 그냥 중요한 정보가 되어버리지요. 그리고 그것이 여러 매체를 통해 여러 번 반복이라도 되면 그대로 진실이 되어버리지요. 야, 그거 텔레비전에서 보니까 정말 대단하더라, 혹은 끔찍하더라, 혹은 아주 중요한 문제더라 하는 의견들이 교환되고 그런 정보가 여러 매체를 통해 여러 번 반복되어 보도까지 되면 그것은 그대로
의심할 바 없는 진실이 되는 거고 그게 그냥 여론이 되어버려요. 그리고는 거기에 인터넷이 아주 큰 몫으로 등장합니다. 그러한 여론이 인터넷이라는 매체를 통해 순식간에 널리 유포되어 막강한 힘까지 갖게
되고 그게 바로 정보화시대를 맞이하여 생겨난 새로운 여론권력이라고 부를 수 있는 거지요. 더욱이 위험한 것은 그러한 여론은 무서운 획일성을 가지고 쉽게 응집이 된다는 데 있어요. 거기에 동의하느냐 안
하느냐의 확인과정만 있지 그것을 하나의 공통 의견으로 채택하기까지의 안에서의 토론과 검증과정은 생략되니까 내 편이냐 아니냐, 동의하냐 아니냐의 일도양단의 질문밖엔 없어요. 무서운 거지요. 그러니 그런 메카니즘 속으로 성찰력을 지닌 의견 같은 건 들어갈 틈이 없어요. 그냥 없는 것으로 간주되어 죽어버리고 사회는 천박화되고….
그런데 현 정부권력은 바로 그러한 정보화시대의 성격을 아주 적절하게 이용하여 탄생했고 정말 안타까운 것은 그러한 것을 국정 운영에도 이용하고 있다는 거지요. 답이요? 쉬운 답은 없어요. 우리는 분명
인터넷 선진국이지요. 그리고 그에 열광해 있고 기대도 크지요. 다시
후퇴를 할 수도 없고 그럴 필요도 없어요. 하지만 한 가지는 꼭 지적하고 싶습니다. 그 분야에서 우리보다 후진인 나라들에서는 정보매체의
발전이 가져올 수 있는 폐해에 대한 자각을 하면서 그에 대처하는 방안을 열심히 모색하고 있다는 사실이지요. 그러면서 그들은 반성을
너무 늦게 시작한 것이나 아닌지 걱정까지 하고 있어요. 그러니 나는
이런 걱정까지 할 수밖에 없습니다. 정보화에 앞장선 우리가 지금 겪고 있고 또 앞으로도 겪게 될 일들이 혹 하나의 시금석이 되어 그들에게 타산지석의 교훈으로나 남게 되지 않을까 하는 걱정 말입니다. 한
마디만 더 하지요. 현 정부가 권력을 잡는 데 정보매체와 영상매체를
적절히 이용했으면 이제는 그 힘을 적절히 통제하고 성찰하는 데도
큰 힘을 기울여야 하고 그것이 문화부의 중요한 일이 되어야 한다는
말을 꼭 하고 싶어요. 그러지 않으면 종국에는 그 정보매체의 법칙에
의해 그것을 이용한 사람이 스스로 무너질 수도 있어요. 어떤 권력이건 맹목적인 몽매주의에 의해서 무너지면 안 되잖아요. 그런 일이 자꾸 벌어지면 나라가 무너져요.
이남호:정보화시대에서의 인식과 사유의 문제점에 대해서 논문을 쓰셔도 되겠습니다.
진형준:너무 장황했던 데 대한 경고로 듣겠습니다. 미안합니다.
이남호:좋은 말씀 감사합니다. 오늘 우리들의 좌담도 정보홍수의 시대에 눈에 띄지 못하고 묻혀버리지나 않을지 우려되는군요. 좋은 말씀들 많이 해주셨는데 말입니다.
새 문화부 장관에게 바란다
이남호:새 정부가 들어서고 화제가 된 일 중에 하나가 문화부 장관으로 소설가 겸 영화감독이 임명된 사실입니다. 예전 문화부 장관들보다는 문화에 대해 잘 알 것 같은, 문학인이 장관이 됐다는 것에 대해서
어떤 기대를 갖게 됩니다. 여기 나오신 분 모두 새 장관과 친분을 갖고
있는 걸로 아는데, 문화부 장관한테 갖는 기대 내지 제언 혹은 인사말씀을 간단하게 한 말씀씩 해주시면 좋겠습니다.
안규철:대부분의 예술가들은 누가 문화부 장관이 되든지 사실 별 관심이 없습니다. 장관이 바뀐 것과 나의 예술과는 무관한 것입니다. 그러나 지난 5년 동안 이름도 기억할 수 없는 수많은 문화부 장관이 임명되고 교체되었습니다만, 오늘처럼 장관의 취임을 두고 이런 자리가
만들어진 것은 이번이 처음입니다. 이런 좌담이 마련된 것 자체가 소설가이자 영화인인 새 장관에 대한 문화예술계의 기대를 반영한다고
생각합니다. 이창동 장관이 취임 인터뷰에서 했던 말, 보이지 않는 것의 가치를 존중하는 문화부가 되도록 하겠다는 약속을 실천해주기를
기대합니다.
김사인:우선 재임 기간 중에 문화관광부란 이름을 다시 문화부란 이름으로 되돌려줬으면 하는 기대가 있습니다. 체육이며 관광이며 하는
것은 문화란 범주 속에 포괄이 가능한 것이지요. 감상적인 부탁을 덧붙인다면, 이창동 문화부 장관이 있어 우리 사회 구성원들의 고단한
나날이 좀더 너그럽고 따뜻하고 아름다운 것이 되기를 바랍니다. 그것이 진정한 개혁의 목표일 것으로 생각되고, 그러자면 애쓰는 모습도 차갑고 사나운 느낌의 것이어서는 안 된다고 생각합니다. 이게 다입니다.
진형준:제가 하고 싶은 말도 김 선생님께서 말씀하신 거랑 비슷한데,
중언부언이 될 것 같지만 가볍게 한마디만 하지요. 전에 이 장관하고
문학 활동도 같이 했고 잡지도 만들어보고, 이 장관이 영화계로 진출할 때의 모습도 지켜본 바가 있어요. 그래서 이 장관이 정말 얼마나 문화, 혹은 예술, 영화, 연극들을 사랑하고 그에 대하여 신성한 열정을
지니고 있는지 제가 잘 알거든요. 그래서 문화부 장관이 된 지금 그 초심을 잃지 말기를 바랍니다. 절대로 특정집단의 대표성을 띠고서 정책을 결정한다든지, 이런 것은 절대, 절대 경계를 해야 된다, 그리고
그런 압력이 음으로 양으로 느껴지더라도 언제나 초심으로 돌아가주기를 바란다, 하는 바람 정도로 그치겠습니다. 잘 해주리라 믿어야지요. 안 그러면, 잘못하면, 때가 때인 만큼 크게 그르치기 쉬워요.
이남호:아, 선생님들의 요구가 까다로워 이창동 문화부 장관이 정말
힘들겠습니다. 그렇지만 저도 한 말씀 드리지요. 다른 분야는 모르겠습니다만, 교육하고 문화는 절대 개혁 가지고 될 일이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교육개혁, 문화개혁, 이런 말은 말 자체가 모순인 것 같아요.
그런 점에 유의하면서, 취임하실 때 눈에 보이지 않는 가치를 존중한다 했는데, 눈에 보이지 않는 가치를 존중하면서 그 효력이 10년, 20년
뒤에 조금씩 나타날 수 있는, 눈에 보이지 않는 업적을 좀 많이 쌓아주시기를 부탁드립니다. 이제 저녁 먹으러 갈 시간이 된 듯합니다. 오늘
좋은 말씀 많이 해주셔서 감사합니다. ●
현대문학 2003/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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