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산은 윤리적 근거를 인격적 상제(上帝)에게 두었다. 기독교의 영향이다. 상제는 인간과 교감하는 도덕적 감시자이자, 인간 개개인의 관계에서 윤리적 실천을 하게 조율(調律)하며 도덕적 동기를 부여한다. 그는 중용의 천명지위성(天命之謂性)의 사상을 중요시하여, 천명(天命)과 인성(人性) 도심(道心)의 일관성을 주장했다(性命一如). 천명은 선(善)을 즐거워하고 악(惡)을 미워하는 지향성이며 이것이 인간의 도덕성이다.
다산은 다음과 같이 실천윤리를 강조했다.
(1) 영명한 인간은 지적 사유, 도덕적 반성, 자율적 판단, 선택의지가 있어 능동적 가치실현자이다. 인의예지(仁義禮智)는 성리학의 성즉리(性卽理) 같은 천부의 리(理)가 아니라 인간이 실천을 통해 성취해낸 후천적 도덕성이다. 선을 즐거워하고 악을 부끄러워하는 속성은 선천적으로 부여받은 영명한 지혜요 가능(可能)적 도덕성으로, 사람에게 내재(內在)되어 있을 뿐 그 자체로서는 도덕성이 되지 못한다.
(2) 다산은 영혼의 능력과 육신의 活力이 묘합되어 있다고 보는 心身一元論의 입장이며, 정신의 主宰 하에 육체가 활동한다고 보았다. 그런데 마음에는 욕구지향적 人心과 도덕지향적 道心의 갈등 대결이 있다. 도심은 上帝와의 交感장치로서 이것이 구심점이 되어 도덕적 자아실현이 된다. 다산 특유의 성기호설에 따르면 인간의 嗜好(기호) 성은 形軀(형구)의 기호(人心)와 靈(영) 智(지)의 기호(道心)로 구분된다. 人心은 육체를 따르고 道心은 도를 따르고자 한다. 天命으로서의 性은 道心이나 혹은‘영지의 기호’와 같다고 그는 생각한다. 도덕적 지향성 곧 善意志는 인간본성이며, 인간은 도덕적 가치의 실현자이다.
心은 상제가 인간과 감응하여 臨在하는 곳으로 활동적 적극적 능동적 주체이며 도덕적 주동자이다. 성리학은 인간 욕구를 악으로 규정하여 存天理 滅人慾을 철저히 고수하는데 반해 다산은 심을 정당한 욕구를 가지고 현실에 능동적으로 대처하는 자율적 주체로 보았다. 인간은 선에의 자연적 경향성을 自由意志를 이용하여 선한 행위에로 실현할 수 있는 자이므로 도덕적 책임자가 된다.
(3) 다산은 天命, 誠, 愼獨君子, 仁, 向人之愛, 恕 등의 개념을 중요시한 실천윤리 주창자였다. 실천결과로 가치가 평가된다고 보는 실학적 인간학 사상가였으며, 도덕적 실천이 奉天(하늘 섬기기)이라 했다. 기독교의 向人之愛와 成德 그리고 유교적 孝悌慈 삼덕을 기본으로 유교적 도덕 실천을 주장했다.
다산은 다음과 같은 특징을 가진 인간학자(humanist)이다.
(1) 上帝天에 기초한 인본주의. 천명과 人性은 一貫적이다. 상제천은 사람에 의해 실현되는 존재이지 피안적, 초월적, 절대적 존재가 아니다. 上帝天은 氣도 理도 아닌, 선을 좋아하고 악을 부끄러워하는 人心으로 표현되는 人性적 內在者이다.
(2) 인간의 사회성, 관계성, 의존성을 강조하는 점에서 儒學 본연의 공동체윤리의 사상가이다. 人生 斯(사)世, 自生至死, 自落地至入地, 其所行所爲 都不過人與人之相與耳.(이 세상 인생은 나서 죽을 때까지 땅에 떨어져 땅에 묻힐 때까지 그 행하는 모든 것이 사람과 사람 사이 곧 서로의 관계일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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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 실행 실천주의. 思惟이성보다 실천이성 곧 실천의지가 중요하다. 誠만으로는 덕이 될 수 없고 誠과 行으로 비로소 덕이 된다.
因命與道 有性之名 (天命과 人道 때문에 性이란 명칭이 있게 되었고)
因己與人 有行之名 (자기와 남이 있어 行이란 이름이 있게 되었고)
因性與行 有德之名 (성과 행 있어 덕이란 말 생겼으니)
徒性不能爲德 (性만으로는 덕이 될 수 없다.)
(4) 反主知主義. 主知主義는 知를 善으로 無知를 악으로 보는 경향마저 있으나 그런 주지주의는 틀렸다. 知力이 출중한 자가 악하고 우둔한 자가 善한 경우는 허다하다.
요순 같이 선천적 필연적으로 선하다면 선이라 볼 수 없고 칭송의 대상 아니다. 걸주 같이 숙명적으로 악하게 태어나면 책임을 물을 수 없고 비난할 수도 없다. 주자는 기질의 차별적 품부(稟賦)로 악이 있게 된다고 했는데 그런 악에 대해서는 도덕적 책임을 묻기 힘들다. 도덕지향성과 욕구지향성의 상충을 인격적으로 조절 통일시켜 도덕적 실천을 해야 한다.
지옥이란 무엇인가
강 병 조
필자는 내세를 믿지 않는다. 사후 지옥이나 천당 또는 극락이 있다고도 생각하지 않는다. 혹자는 필자를 유물론자라고 생각할지도 모른다. 필자는 유물론자도, 유심론자도, 유영혼자도 아니다. 진화론에 기반을 둔 자연과학자이고, 사람의 생명을 다루는 한 사람의 의사일 뿐이다. 생물학에서, 심리학, 철학, 종교까지 넘나드는 한 명의 정신과 의사일 뿐이다.
필자는 지옥이 사후에 가는 곳이 아니라, 살아생전에 마음이 불편한 곳이 지옥이라고 생각한다. 자기가 극복하지 못한 콤플렉스(complex) 또는 열등의식이 지옥이라고 생각한다.
필자의 지옥은 <노래하는 곳>이었다. 필자는 음치로 태어나서 아직까지도 음치를 면하지 못하고 있다. 중학교 때까지는 음치라도 음악 점수만 나빴지 노래 공포증은 없었다. 고등학교 들어가서 남녀 혼성 서클활동을 하면서 노래 공포증이 생겼다. 서클 활동을 마치고 레크레이션 시간에 노래를 부르는데 여학생들이 킥킥 웃는 바람에 심한 수치감을 느꼈다. 고등학교 2학년 때의 사건이다. 이후로 노래 부를 것이 예상되는 모임은 기피하게 되었다. 노래 부를 것이 예상되나 참석하지 않으면 안 되는 모임에 참석했을 때는 정말 바늘방석이요 지옥 같은 기분을 느꼈다. 회의를 마치고 노래방에 가면 죽을 맛이었다.
혼기가 되어 부인은 노래 잘 부르는 사람을 택했다. 부부 합창하라면 필자는 입만 벌리면 되었다. 자식들은 다행히 필자를 닮지 않고 집사람을 닮아서 안심을 놓았다.
정신과 공부를 하고, 정신치료자가 되기 위한 정신치료를 받고, 또 환자를 정신치료를 하면서 필자는 노래에 대한 전략을 바꾸게 되었다. 노래 부르기 전에 미리 음치라는 것을 만천하에 공포를 하고 누구보다 먼저 노래를 부르는 것이었다. 노래 공포증을 가지고 있던 사람들도 필자의 노래를 듣고는 용기를 내어 노래를 부르게 되었다. 그 후로 어느 모임에서나 제일 먼저 필자에게 노래를 부르는 순서가 돌아왔다. 공포를 회피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더 과감하게 도전하는 심리를 역공포방어(counter phobic defense)라고 한다. 겉으로는 용감하게 도전하나 마음 속에는 여전히 공포가 있었다. 마음이 편할 리가 없었다.
세월이 흘러 환갑을 넘기니 이런 공포심도 역공포심도 줄었다. 인격이 성숙되어서 그런 것이 아니라 관심의 영역이 줄어서 그런 것 같다. 나이가 드니 <남이 나를 어떻게 생각할까?>하는 데는 별로 관심이 없어지고, 오로지 관심은 가족과 건강 쪽으로 쏠리게 되었다. 젊었을 때는 나라를 위한다고 데모도 해보았고, 짧은 지식과 경험을 후배나 제자들에게 가르쳐주려고 애도 써보았다. 지금은 열정도 식었지만 남보다는 내 자신에 충실하려고 노력한다. 남이야 뭐라고 생각하든 내 마음 편하고 내 건강에 도움이 되는 쪽으로 행동한다. "불러서 즐겁고 들어서 괴로운 노래"일망정 노래를 부른다. 이제는 모임에서 필자를 제일 먼저 지명하지도 않고, 필자도 그렇게 할 필요를 느끼지 않는다.
하나의 콤플렉스가 다른 콤플렉스로 옮겨가기도 한다. 부모의 콤플렉스가 자식 대로 넘어가기도 한다. 배우자의 선택에 있어서 자기의 콤플렉스를 해결할 수 있는 사람을 택하면 그 상대방의 다른 콤플렉스가 따라오기 마련이다. 두 부모의 콤플렉스가 자식 대로 넘어갈 수가 있다. 이런 콤플렉스는 유전인자의 문제만이 아니라, 문화나 문명의 산물일 수도 있다. 학력이나 재력, 권력, 종교 등등.
욕심이 지옥을 만든다. 욕심(기대치) 만큼 안 되면 불만이 생긴다. 최선이 안 되면 차선으로도 만족이 되어야 한다. 최선만을 고집하고 최선이 성취되지 않으면 지옥이 된다.
공포 중에서 제일 큰 공포는 죽음에 대한 공포이다. 내세가 있고 자기는 천당 갈 것이라고 확실하게 믿고 있으면 죽음에 대한 공포는 적을 것이다. 석가나 예수와 같은 삶을 살고 있는 사람은 죽음에 대한 두려움이 없을 것이다. 삶은 그렇게 살지 않으면서 입으로만 성자의 말씀을 쏟아내는 사람은 속으로는 두려움이 있을 것이다. 삶은 그렇게 살지 않으면서도 두려움이 없다면 그런 사람은 그 종교에 세뇌(洗腦)된 사람이거나 망상증 환자일 것이다.
필자의 한 친구는 "과대망상증 환자가 제일 행복할 것이다"고 이야기한 적이 있다. "내가 대통령이다, 내가 이 세상에서 제일 부자다. 내가 제일 미인이다"고 생각만 하지 실제로는 그렇지 않는 망상증 환자가 과연 행복할까? 행복할 리가 없다. 왜냐하면 실제로 그렇지 않기 때문이다. 실제로는 망상과 정반대로, 권력도 없고, 가난하고, 못 생겼기 때문이다. 이런 과대망상은 소원성취적인 투사로 생겨난 것이기 때문이다. 삶은 성자답게 살지 않으면서 입으로만 성자인척 말하는 신자도 이 과대망상 환자와 같은 심리일 것이라고 필자는 생각한다. 세뇌는 오래가지 않는다. 소위 <김일성교, 주체사상교>에 세뇌된 사람이 그 세상 밖으로 나와 보면 세뇌는 단번에 무너지고 만다. 그 세상 안에서만 평생을 산다고 행복할 수도 없을 것이다. 왜냐하면 밖의 소식은 듣지 못한다고 하더라고, 이성(理性)이 있기 때문에 그 사교(邪敎)의 잘못된 교리에 의문을 품을 수 있기 때문이다. 천당이나 극락도 지옥과 마찬가지로 마음에 있기 때문이다.
나의 한 친구는 종교 때문에 지옥과 같은 인생을 살다가 일찌감치 세상을 떠났다. 같은 종교이나 교파가 다른 부인과 결혼하였다. 이 부인은 결혼 후에도 자기 교파의 지시에만 따르다가 시어머니와 갈등을 일으켰다. 시어머니와 며느리 사이에 서로 <이단>이라고 논쟁이 벌어졌다. 내 친구는 어머니와 부인 사이에서 누구 편도 들 수 없었다. 집에 들어가는 것이 지옥과 같아서 퇴근 후 술집에 가서 술로 마음을 다스렸다. 결국은 술에 의한 간경화로 사망하였다. 죽기 전에 필자에게 뼈아픈 말을 남겼다. "나는 자식 노릇, 남편 노릇, 애비 노릇 한 가지도 옳게 못했다." 필자는 이 친구의 유언을 들으며 <과연 종교는 누구를 위하여 존재하는가?>하는 의문에 빠졌었다. 종교는 신자를 위해서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신자 위에 군림하는 그 어떤 그룹을 위해서 존재하는가?
한동안 이런 이야기를 들은 적이 있다. "우리나라의 교육이 잘 되려면 교육부가 없어야 한다. 농민이 잘 살려면 농림부가 없어야 한다. 우리나라 여자 골프가 세계에서 최강의 두각을 나타내고 바둑이 세계 최고의 수준인 것은 이들을 감독하는 정부기관이 없었기 때문이다."
이런 이야기를 들으며 필자는 20%-80% 법칙을 생각하였다. 종교도 마찬가지라는 생각이 들었다. 상위 20%의 종교 지도자가 신자인 80%를 지배하고 이용하고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지옥, 천당, 극락, 그 곳은 사후 다른 세계에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이 세상 내 마음 속에 존재한다고 필자는 생각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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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 지 시 항 : 2009년 5월 모임
1木 모임 -- 2009년 5월 7일 (목) 7 시
장소: 배성병원 신경정신 1과
(복현오거리에서 코스트코 방향,
코스트코 지나 우측 성광高校 直前에 위치)
3木 모임 -- 2009년 5월 21일 (목) 7 시
장소: 경북대학교병원 606병동 회의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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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파일:1]</p>