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딴지일보와의 인터뷰 이후 매우 유명해졌으며, 그와 태생이 비슷한 딴지일보는 이어지는 수차례의 인터뷰를 통해 역설적으로 그를 선전해주었다. 그의 특이하고 일부 비현실적인 약력과 정책이 인터넷을 중심으로 인기를 모아 무협지나 판타지에 나오는 허본좌라는 별명이 붙었는데, 대선 이후에도 인터넷 정책 홍보, KBS의 텔레비전 프로그램인 폭소클럽 2, 연예가중계, PD수첩(비판 내용) 등 긍정과 부정, 관심과 비난의 TV 프로그램 출연을 계속하며 화제가 되었다.
그는 공직선거법 위반과 박근혜 전 한나라당 대표에 대한 명예훼손 혐의로 구속되었고, 서울중앙지방법원은 징역 1년 6개월을 선고했다. 너무나 억울해서 열린 항소심, 상고심에서도 똑같이 1년 6개월의 형이 유지되었다.
한편 2009년 7월 23일 형기를 마치고 출소한 그는 케이블 채널 온스타일과 협의하여 방송인 김구라와 구라만땅이라는 토크쇼를 진행하기로 했다고 주장했으나 아쉽게도 해당 방송국 및 김씨는 이를 부인하고 있으며, 故 노무현 전 대통령과 마이클 잭슨의 영혼이 자신을 찾아 왔다거나 수영선수 박태환의 세계 선수권 대회 부진이 본인의 이름을 부르지 않아서 그렇다고 발언하는 등 사실 여부가 확인되지 않는 언행을 계속하고 있다.
현재 허경영은 을왕리에 위치한 모 팬션에 거주하면서 총 4권으로 구성될 일대 야심작 <동방의 등불> 및 <허경영의 첫사랑>을 집필 중에 있으며, 위클리경향과의 인터뷰를 통해 서울 은평구 국회의원 재보선 불출마, 허경영 쇼에 대한 구상, 다행히 18대 대선 도전 의사를 밝혔다.
허경영이라는 이름은 그의 아버지가 서울형무소에서 사형당하기 직전 "서울을 세계의 중심이 되게 해서 가난한 국민들을 편안하게 해주어야 한다"는 뜻으로 서울 경(京)을 넣어 지었다고 한다. 1950년 초 겨울 어머니인 조계식(趙桂植)이 아버지의 면회를 위해 마굿간 보다 더욱 초라하고 추운 중랑교 다리 밑 가마니 움막에서 살고 있었을 당시에 출생하였다.
그러나 검찰에서 조사한 결과 1947년 경남 밀양에서 태어난 것으로 밝혀졌다. 이에 대해 본좌 허경영은 1947년은 호적상 생일일 뿐이라고 주장하고 있다. 그때 어머니는 겨울 날씨 때문에 산후병을 얻었으며 병을 이기지 못하고 허경영이 4살 때 죽었다고 한다.
한국전쟁의 틈 속에서 전쟁 고아가 되어 지리산의 농부의 양아들이 되어 그 밑에서 여러 가지 유교 서적을 배웠다고 한다. 사춘기가 된 1964년에는 다시 서울로 올라와 수유리 화계사의 행원 숭산 스님의 양아들이 되어 팔만대장경을 공부하였다고 한다. (하지만 아쉽게도 숭산 문중의 확인을 거치치 않은 사실이다.) 절밥을 충분히 다 먹어본 후에 본좌 허경영은 1966년에는 광화문 내수동교회의 홍근섭 목사의 양아들이 되어 성경을 공부하였다고 한다. 1968년에는 삼성의 이병철 회장의 양자가 되었다고 한다.
각 종교계 인사와 유명 기업인의 양아들이 된 허경영은 1969년부터 박정희가 사망할 때까지 비공식적인 정책 보좌역을 맡았다고 한다. LG그룹과 GS 그룹의 창설 과정에도 자신의 조부에게 아이디어를 낸 것이 발전의 계기가 되었다는 주장이다. (이에 대해 2007년 대선 이후에 있었던 재판 과정에서 재판부는 아쉽게도 이병철과 허경영의 연관은 사실 무근이며, 허경영이 박정희의 정책 자문역을 했다는 자료를 전혀 찾을 수 없었다고 결론내렸다.)
삼성, GS 측에서는 이러한 허경영의 주장을 인정하지 않고 있는 것은 물론 자신을 양아들로 삼았다는 스님이나 목사의 경우 역시 현재 본인이 생존해 있지 않기 때문에 아쉽게도 조작인지 사실인지 알 길이 없다. (그 점은 역사상 모든 성현이나 종교적 교주들과 사실 여부 미확인의 처지가 비슷하다.)
미국 공화당과 결연식에서 혼자 연설 중인 본좌 허경영 총재. (허경영 총재 본인이 가지고 있는 사진)
성장 이후 본좌 하경영은 새마을 운동과 한국방송통신대학교 설립을 주도하였다고 주장하나 아쉽게도 이를 뒷받침할 객관적 근거는 전혀 제시되지 않고 있다.
1972년 베트남 전쟁에 참전하고 제대한 후 대한불우자보호협회를 만들어 운영하였다고 주장하고 있다. 1987년 유력야당이었던 신민당의 부총재를 역임하고, 13대 대통령 선거 당시 대선 후보로 추대되어 선출되었기까지 했으나 아쉽게도 출마하지 못했다.
1992년 10월 24일 진리평화당을 창당하였다. 14대 대선 후보로 진리평화당은 당초 허경영을 후보로 등록하고자 하였다가 마지막 순간 현홍균 당 고문을 후보로 선출하고, 후보 등록 마감일인 1992년 11월 25일 마감 3분전인 오후 4시 57분에 서류 제출을 시도하였으나 남의 등을 쳐서 정치자금을 만드는 기술을 배우지 못한 그는 시간내에 기탁금 3억원이 준비되지 않아 아쉽게도 후보 등록을 하지 못하였다.
1997년 11월 26일 15대 대선 공화당 대선후보로 후보 등록을 하였고, 9억 9천만원의 재산을 신고하였다. 개표 결과 아쉽게도 0.2% 득표를 하였다. 선거공보 및 포스터에 허경영 후보가 경제정의실천시민연합에서 중앙위원을 지냈다고 적었으나 경제정의실천시민연합 측에서는 아쉽게도 그러한 사실은 허위라며 문제를 제기하였다.
2002년 11월 제16대 대선 후보 민주공화당 대선 후보로 등록하고자 하였으나 역시 남의 등을 쳐서 정치자금을 만드는 재주가 없어 아쉽게도 기탁금 문제로 등록을 포기하여야만 하였다. 2004년 대한민국 17대 총선에서 민주공화당 비례대표 1번은 허경영 대표였다. 그러나 야속한 국민들이 정당 투표에 철저히 외면하여서 국회에는 등원하지 못했다.
2004년 10월 20일 조용필을 상대로 죽은 부인이 그림을 샀었는데 대금 50만 달러를 다 지불하지 않았다며 제기한 소송에서 그림을 샀었다는 자체가 허위일 것이라며 재판부는 아쉽게도 허본좌의 원고패소 판결을 내렸다.
2007년 대통령 선거 출마 그는 2007년 대선에 출마하기 위해 열린우리당에 입당했다. 2006년 2월 기자 회견을 통해 2006년 7월 열린우리당에 기간당원으로 입당하였으며, 열린우리당 대선 경선에 참여하여 딴지일보를 포상하고 청와대에 탱크를 진격시킬 것이라고 호언장담하였다.
주요 공약
만 65세 이상 노인들에게 건국 수당 매월 50만원씩 지급
결혼 수당 남녀 각 5,000만원씩 지급
출산 수당 출산시마다 3,000만원씩 지급
국회의원 출마 자격 고시제 실시 국회의원 100명 감원
정당 정치 해산하고 국회의원들을 무보수 명예직으로
경기도 전체를 서울특별시로 합병, 전국을 4개道로 축소
몽골과 통일
UN 본부를 판문점으로
득표 2007년 12월 19일 17대 대선에 기호 8번 경제공화당 후보로 선거에 참여했으며, 0.4%의 득표율(약 10만여표)을 기록하여 아쉽게도 7위를 했다. 이명박, 정동영, 이회창 등의 주요 후보들과 함께 텔리비젼 토론회에 다수 참여했던 이인제 후보가 0.68% 득표를 한 것을 감안하면 꽤 높은 득표율이다. 이러한 높은 득표율은 기성 정치에 대한 불만과 냉소가 반영된 결과라는 분석이 있다.
누구보다도 할말이 많았던 본좌 허경영 후보는 TV 토론회에서 철저히 소외받았으나 군소후보로서는 득표 결과가 고무적인 일로 평가되고 있다. 아래의 지역에서는 이인제 후보보다 높은 득표율을 기록하여 승리한 지역이다.
서울특별시 강남구, 강동구, 강서구, 광진구, 마포구, 서초구, 송파구, 양천구, 중랑구
경기도 구리시, 과천시, 성남시 분당구, 용인시 수지구, 수원시 영통구, 안양시 동안구, 고양시 일산동구
부산광역시 중구, 동구, 서구, 남구, 북구, 금정구, 동래구, 부산진구, 사상구, 사하구, 수영구, 연제구, 영도구, 해운대구, 기장군 (강서구를 제외한 모든 구)
대구광역시 중구, 동구, 서구, 남구, 북구, 달서구, 수성구, 달성군
울산광역시 중구, 동구, 남구, 북구
강원도 강릉시(허경영 1.01%로 전국 최다 득표율), 속초시
경상북도 경산시, 경주시, 구미시, 봉화군, 상주시, 안동시, 울릉군, 울진군, 청도군, 청송군, 포항시 북구, 포항시 남구
경상남도 거제시, 거창군, 김해시, 사천시, 산청군, 양산시, 진주시, 진해시, 창원시, 함안군
부산, 대구, 울산의 경우 대부분의 선거구에서 허경영 후보가 이인제 후보를 제쳤으며, 부산 동래구, 대구 남구, 대구 수성구의 경우 2배가 넘는 투표율로 승리하였다.
대선 이후 본좌 허경영 총재 대선에서의 인기를 바탕으로 허경영은 이후 각종 TV 프로그램에 등장하여 여러 가지 기행을 선보이며 자신의 입지를 넓혀가고 있었다. 대선 이후에는 경제공화당 사이트를 통해 자신의 정책을 계속 홍보 중이며, 18대 대통령 선거 출마 계획을 밝히고 있다.
허경영 관련 PD수첩 방송 내용을 비판하는 1인시위
명예훼손 등으로 징역 그는 예전부터 여러 언론을 통해 자신과 박근혜 한나라당 전 대표가 단순한 친분 이상의 관계라는 주장을 자주 했었다. 2007년 대선 때 이런 이야기가 더욱 널리 퍼졌고 급기야 박근혜 전 대표측이 2007년 12월 13일 공식적으로 소송을 제기했다. 2008년 1월 15일 및 2008년 1월 22일 MBC-TV PD수첩은 허경영 신드롬을 통해 허경영의 허황됨을 비판하였고, 2008년 1월 22일에 검찰로부터 사전 구속영장을 받았다. 그는 박근혜 전 한나라당 대표의 명예훼손 혐의를 비롯하여 조지 부시 취임식 한국 대표 참여, 이병철 양자 주장, 박정희 비밀 정책 보좌관 역임 등의 허위 사실 유포 혐의로 사전 구속영장이 신청된 다음날인 1월 23일 영등포구치소에 수감되었다. 이후 검찰은 허경영에게 징역 3년을 구형하였다.
한편 구속된 그는 애초에 18대 총선에서 서울 은평구 을 선거구(문국현, 이재오가 출마한 지역구)에 옥중출마할 예정이었지만 3월 26일 경제공화당 홈페이지를 통해 아쉽게도 여러 가지 사정상 총선에는 출마할 수 없으며, 향후에 있을 보궐선거 등에 출마할 것을 발표했지만 이후 재판 등으로 인해 출마하지는 못했다.
4월 21일 서울 남부지법에서 열린 결심 공판에서 검찰은 징역 3년을 구형하였다. 그는 재판 초기 자신이 결백하다며 죄를 부인했지만 마지막에는 "나는 죄를 짓지 않았다. 예수, 황우석 전 서울대 교수, 이건희 삼성 회장처럼 나 역시 국가에 엄청난 공헌을 했는데 자그마한 티끌로 흠을 잡는 것은 부당하다" 다며 눈물을 흘리며 판사와 검사에게 선처를 호소했다.
5월 15일 1심 선고 공판에서 징역 1년 6개월을 선고받았다. 재판부는 "대선 과정에서 허위 사실을 유포하고, 법정에서까지 잘못을 뉘우치지 않았다" 고 선고 이유를 밝혔다. 그러나 그는 판결에 불복해 서울고등법원에 항소하였지만 10월 9일 서울고등법원에서 열린 항소심에서도 징역 1년 6개월을 선고받았으며, 12월 24일 대법원에서도 원심을 확정하였다. 이듬해인 2009년 7월 23일 그는 형기를 마치고 만기 출소하였고, 케이블 채널 온스타일과 협의하여 방송인 김구라와 토크쇼 구라만땅을 진행할 것으로 알려졌으나 김구라 측에서는 아쉽게도 이를 부인하고 있다.
출소 이후의 행보 출소한 이후 허경영은 머니투데이를 비롯한 여러 매체와의 인터뷰를 통해 "(본인이 언급한) 마이클 잭슨 뿐만 아니라 저명인사들은 꼭 죽기 3일 전에 영혼의 형태로 나를 찾는다", "자신의 인기에 비하면 TV에서 극심한 괄시를 받았기 때문에 스스로 방송국 하나를 인수하거나 만들겠다고 다짐했다. 이미 인터넷은 장악을 했으니 방송국 인수나 설립을 통해 본좌 허경영쇼 등의 프로그램을 만들어 서서히 방송을 장악할 것"이라고 주장하는 등 실현되기 어려운 주장을 계속하였다.
또한 허경영은 2009년 8월 13일 디지털 싱글 Call Me를 발표한다고 하였다. 작곡에는 록밴드 뷰렛의 멤버 이교원이 참여하였으며, 작사는 허경영 본인이 직접 한 것으로 알려졌다.
본좌 허경영 총재의 주장 및 어록 다음은 2007년 17대 대통령 선거 기간 동안 화제가 되었던 그의 발언이다.
“ 나의 IQ는 430이다. ”
“ 부시로부터 UN 사무총장직을 제안받았으나 대한민국 제17대 대통령 선거에 출마하기 위해 사양했고 대신 반기문이 UN 사무총장이 되었다. ”
“ 3시간 동안 오를 산을 10분만에 오르는 축지법과 공중부양, 외계인과 교신 등을 사용할 수 있다. ”
“ 2000년 조지 W. 부시 대통령 취임식에서 부시 대통령과 함께 환담을 가져 UN본부를 판문점으로 옮기는 제안을 하였다. ”
이 주장의 근거로 제시한 부시대통령과 함께 촬영한 사진은 아쉽게도 합성이라는 의혹이 제기되었고 결국 국립과학수사연구소 감식 결과 취임식 참석은 사실일 가능성이 있으나 부시 대통령과의 사진은 합성사진임이 밝혀졌다.
부시 대통령 취임식 축하 파티에 참석했던 인사들의 증언에 의하면 허경영은 축하 파티에 정식으로 초대되어 참석한 것은 사실이나 당시 미국에 있던 3개 축하 파티장을 순회하며 바쁘게 뛰던 부시의 사정상 허경영과 개인적으로 만나 사진 찍을 기회는 아쉽게도 없었던 것 같다.
“2007년 대선 결과에 대해 당원(경제공화당) 숫자가 30만명인데 그보다 적게 나왔다. 초등학생들도 허경영 인기가 짱이라고 한다. 내 표가 어디로 갔는지 나도 궁금하다. 뭔가 착오가 생긴게 분명하다.”
다음은 2009년 7월 형기를 마치고 출소한 당일 Y-STAR와 만난 자리에서의 발언이다.
“마이클 잭슨이 죽기 3일 전 그의 영혼이 나를 찾아왔다. (그의) 온 몸에는 예수처럼 못 박힌 자국이 있었다.”
"찰나 인플루엔자가 곧 생겨날 것이며, 내 눈빛을 보면 걸리지 않는다."
본좌란 본인을 높일 때 쓰이는 말로 무협지에서 유래했다. 본좌의 뜻은 즉 최강이라는 자신만만한 의미로 자신을 상대에게 알려야 할 때 주로 쓰이는 단어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