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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참 보고 있는데 가이드로부터 전화가 왔다. 빨리 오라는 것이다. 시간을 너무 지체했다. 일일 여행은 편리하게 이동할 수는 있지만 늘 시간이 문제다.
다시, 버스는 마오쩌둥의 고향이 있는 샤오산(韶山)으로 향했다. 점심시간이 거의 됐는데 30여명이나 되는 일행을 마오쩌둥 상품 전시장으로 데리고 간다. 실내에서 사진도, 영상도 찍지 못한다는 문구가 있어서 대단한 전시장인 줄 알았는데, 100% 상품 매장이다.
20세기 초 공산주의 사상을 받아들인 마오쩌둥은 농민봉기로 기틀을 잡은 중국공산당 내에서 자신만의 중국적인 사회주의 사상을 확립하면서 장정을 통해 지도자로 조명 받았고 결국 일본제국주의와 국민당과의 전쟁에서 승리해 신중국을 건국했다.
그는 대약진운동의 실패와 과도한 좌파주의였던 문화대혁명을 거치며 정치지도자로서, 혁명가로서 성공과 실패가 점철되기도 했다. 그러나 중국은 최고지도자를 관광 및 캐릭터 상품화하는 독특한 문화적 정서를 만들어냈다.
역시 마오쩌둥은 훌륭한 캐릭터 상품이다. 반신상과 전신상도 있으며 인장(印章)도 있다. 사상전집부터 다큐멘터리 DVD, 우표, 시를 적어놓은 쟁반, 사진이 들어있는 목걸이, 리본으로 묶은 부채, 휘장 등 그야말로 없는 게 없다. 자그마한 동상은 몇 백 위안도 하지만 몇 천 위안하는 것도 있고 순금으로 만든 동상은 2만위안(약 250만원)이 넘는 것도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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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시간 정도 상품을 둘러봤더니 과연 마오쩌둥이라는 인물이 이다지도 위대한 것인가, 아니면 온 국민들의 마음 속에 깊이 각인된 사람인가, 그도 아니면 왜 이렇게 중국을 대표하는 현대 인물로서 각광을 받는 것인가 생각해보게 된다. 위대한 사상가이며 혁명가임을 부정하지는 못하겠지만 그렇다고 국민들에게 친근하게 다가갈 정도로 인간적인 품성을 지닌 것 같지도 않고 감동적인 인물은 더더욱 아닌 것인데 말이다.
거의 대부분의 중국사람들이 존경해 마지 않는 저우언라이 총리에 비하면 인간적으로 존경하는 것 같지도 않다. 이런 상품화는 또 다른 우상화의 일환인가. 신중국으로 대표되는 공산주의 혁명의 성공 그 자체, 또는 당 중앙에 대한 신뢰를 영원히 채워가기 위한 전략인가 말이다. 중국을 이해하는 복잡한 코드인 마오쩌둥을 생각하는데 식사시간이다. 그래 식후경이지.
후난 요리 중에서 가장 대중적이고 유명한 요리인 홍샤오러우(红烧肉) 맛을 볼 수 있었다. 베이징이나 다른 곳에서도 가끔 먹었지만 본토에서 먹는 원조 맛에 비할 수 있으랴. 홍샤오러우는 비계가 두툼한 돼지고기를 재료로 하는데 우리가 먹는 삼겹살(五花肉)에 비해 훨씬 통통한 원육을 깍두기처럼 두텁게 썰어서 삶고 볶은 후 여러 가지 향료를 넣고 만든다. 향기도 좋지만 약간 단맛도 일품이다. 장담하지만 우리나라 사람들이 맛 보면 열 명 중 아홉 명은 맛있다고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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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오쩌둥이 아주 즐겨 먹었다고 해서 더욱 유명해진 이 요리는 마오씨(氏) 또는 마오자(家) 홍샤오러우라는 이름으로 전국 대부분의 도시에 퍼져있다. ‘마오자쟈샹차이(毛家家乡菜)’나 ‘샹차이(湘菜) 요리’ 식당에 가면 언제든지 먹어볼 수 있다.
일행들과 함께 홍샤오러우를 먹는데, 중국사람들이 요리가 무엇인지 아느냐고 물어본다. 베이징에서 중국어 공부할 때 자주 먹어서 잘 알고 좋아한다고 했더니 신기한 듯 쳐다본다. 게다가 자랑스럽게 홍샤오러우에 대해 설명까지 해주더니 많이 먹으라고 한다. 사실 한 테이블에 한 접시씩 나오는 이 요리는 겨우 몇 점 맛볼 정도인데 덕분에 아주 많이 먹었다.
후난성(湖南省) 샹탄(湘潭)의 샤오산(韶山)은 마오쩌둥이 태어난 고향이다. 맛 있는 점심을 먹고 마오쩌둥이 청년시절 즐겨 찾던 해발 500여m의 자그마한 산봉우리 샤오펑(韶峰)을 올랐다.
청년시절에 썼다는 시구(诗词)들을 바위에 새겨놓은 비림(碑林)에는 하얀 대리석에 깃발을 들고 진군하는 그림이 새겨진 벽화가 있고 그 앞에는 마오쩌둥이 농민과 군인들과 함께 동상으로 서 있다. 1893년생인 그의 탄생 100주년을 기념해 건립한 것이라 한다. 청년기의 혈기를 드러내듯 시 중에 ‘복수’라는 뜻의 빠오처우(报仇), 치욕이란 뜻의 치츠(奇耻)와 같은 글귀가 있기도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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숴다오(索道)를 타고 산을 오르면 관음각(观音阁)이 있고 가파른 계단을 오르면 정상에는 샤오펑쓰(韶峰寺)라는 사원이 하나 있는데 이곳은 고대시대에 봉화대로 사용하기도 했다. 주위가 한눈에 다 드러나는 높은 봉우리 정상에 사원 하나가 있고 향불을 피우는 화로 하나가 한가로운 모양으로 향을 태우고 있다. 사원 뒤에서 종이 울려서 가보니 그냥 길에서 주웠을 것 같은 나무로 종을 치고 있는 아이가 있다. 아무나 와서 종을 치고 가도 된다. 사원이긴 하지만 거의 관리를 하는 것 같지는 않다.
산을 내려와 마오쩌둥 동상이 있는 광장으로 갔다. 동상 아래서는 많은 사람들이 화환을 바치는(敬献花篮) 행사를 하고 묵념을 올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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앞서 말한 6번에 걸친 류사오치의 결혼은 대체로 한치 앞을 볼 수 없던 혁명 시기에 이뤄진 불행한 삶이어서 다소 안타까운 마음이 들기도 한다.
반면 마오쩌둥의 3번의 결혼은 그의 인간적인 품성이 그의 사상과 철학, 혁명이론에 비해 너무나 그 격이 떨어져서 안타깝다고 하겠다.
마오쩌둥은 1920년 당시 창사에 있던 은사 양창지(杨昌济)의 딸인 양카이후이(杨开慧)와 동거를 한다. 1919년 베이징에 있던 마오쩌둥은 양창지의 소개로 리다오자오(李大钊)를 만나 마르크스주의를 배우게 된다. 이 시기 마음에 두었던 양카이후이를 찾아 결혼을 하게 됐고 본격적으로 공산주의 조직가로서 활동하기 시작한다.
이후 마오쩌둥은 농민폭동의 실패로 징강산(井冈山)으로 들어갔고 1927년 장씨(江西) 출신으로 고향 융씬(永新)의 ‘한 떨기 꽃(一枝花)’ 또는 ‘제일미녀(第一美女)’라 불리던 당시 17세의 나이의 허즈쩐(贺子珍)과 동거를 시작한다.
본처인 양카이후이가 징강산으로 들어오겠다는 것을 한사코 반대했던 마오쩌둥은 당이 둘 사이의 이혼을 불허하게 되자 당시 후난 군벌이던 허젠(何建)의 손을 빌어 그녀가 죽도록 방조했다. 군사를 동원해 허젠을 압박하고 밀서를 전달했다는 기록들이 있다.
군벌에 체포된 그녀는 29세의 나이로 영웅적으로 처형되었다고 기록되어 있지만 최근의 자료들을 보면 수호지를 즐겨 읽었던 그가 차도살인(借刀杀人)을 사용했다는 것이다. 공개적으로 마오쩌둥과 이혼하겠다고 발표하면 살려주겠다는 군벌의 요구에, 죽어도 이혼하지 않겠다는 강경한 입장을 보였던 양카이후이는 결국 사형 당하게 된다.
함께 체포됐던 장남 마오안잉(毛岸英)을 포함해 세 아들은 양카이후이의 사형 이후 곧바로 상하이로 보내지고 그 직후 당은 마오쩌둥과 허즈쩐의 결혼을 허가하게 된다. 양카이후이 아버지 양창지의 제자이고 마오쩌둥과 동문수학한 쌰오즈셩(萧子升)은 <마오쩌둥과 함께 구걸하다(和毛泽东一起行乞记)>라는 책에서 이를 증언하고 있기도 하다.
마오쩌둥이 가장 사랑했다고 전해지는 허즈쩐과는 어떻게 헤어지게 되었을까. 기록을 보면 허즈쩐은 1937년 갑자기 옌안(延安)을 떠나 씨안(西安)을 거쳐 소련으로 병을 치료하러 간다. 이후 모스크바에서 공부한 후 1948년 귀국한 것으로 되어 있다. 장정(长征)을 함께 한 부부이자 비서이면서 정치적으로 중요한 역할을 하던 그가 갑자기 사라진 것은 이상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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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것은 1937년 당시 옌안에 있던 미국기자인 스메들리(史沫特莱)의 통역인 우리리(吴莉莉)와의 연분 때문이다. 중국 역사에서 가장 예뻤다는 양귀비에 필적할(杨贵妃相媲美) 정도로 미모가 뛰어났던 우리리를 마음에 두고 있던 마오쩌둥은 어느 날 그의 숙소를 찾아가다가 허즈쩐에게 들통나게 된다. 이후 그녀는 마오쩌둥의 반대와 설득에도 불구하고 떠났고 결국 둘 사이는 파경을 맞게 된 것이다. 허즈쩐은 귀국 후 전국정협위원까지 지내는 등 활동하다가 1984년 사망하게 되지만 마오쩌둥에게는 돌아가지 않았다고 한다.
마오쩌둥은 허즈쩐이 떠난 이듬해인 1938년, 막 옌안에 온 24살의 리윈허(李云鹤) 즉, 장칭(江青)과 결혼한다. 신중국 건립 후 주로 당 선전 영화 부문에서 활동하던 장칭은 문화대혁명의 4인방 중 한 명으로 천하를 주무르지만 1977년 출당조치를 당하고 사형 판결 후 무기징역으로 감형되지만 1991년 5월 자살로 생애를 마감한다.
양카이후이를 본처라는 뜻의 위엔페이(原配), 허즈쩐을 후처라는 뜻의 지페이(继配), 그리고 장칭은 재취라는 뜻으로 자이취(再娶)라 한다. 이렇게 마오쩌둥과 결혼한 부인들을 나누어 부르는 것도 재미있기는 하다. 문제는 마오쩌둥의 결혼에는 아름다운 사랑이야기가 없다. 가난, 혁명, 투쟁 속에 피어난 감흥까지 기대하지는 않았지만 그래도 조금 실망이다.
마오쩌둥은 중국공산주의 혁명의 지도자이고 사상가이지만 그의 인간적인 면모는 그리 본 받을 만하지는 않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13억 중국인들의 마음 속에 깊이 살아있는 이유는 뭘까. 우리는 대통령이 비리 등에 연루되면 바로 엄청난 후 폭풍이 생기는데 비해 마오쩌둥은 수많은 캐릭터 상품 속에 여전히 살아있고 1년 내내 방방곡곡에서 그의 탄생지를 방문하니 말이다.
신중국의 국가주석으로 중국인들의 지도자로 남아있는 그의 고거(故居)에는 1년 내내 사람들의 발길이 끊이지 않는다. 사진촬영이 금지되고 공안(公安)이 감시하지만 관람은 공짜다. 집 내부는 평범한 농가의 모습 그대로 별로 특별할 것은 없다. 사람들은 연꽃이 무성한 작은 호수를 사이에 두고 집을 배경으로 사진을 찍느라 여념이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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후난성은 공산혁명의 발원지라 할 정도로 유명인들의 고거가 많다. 출생지는 아니더라도 혁명 근거지로 삼았던 곳이라 이곳에 많이 살았기 때문이다. 특히, 이곳 샹탄(湘潭) 시는 마오쩌둥, 류샤오치와 함께 인민해방군 원수(元帅)를 지낸 펑더화이(彭德怀)의 고향이기도 하다.
또 청나라 말기 정치가인 증국번(曾国藩), 요절한 인민해방군 군인 레이펑(雷锋), 20세기 중국 최고의 화가이며 서예가인 치바이스(齐白石), 인민해방군 창건자 중 한 명인 뤄룽환(罗荣桓), 인민해방군 대장인 천겅(陈赓), 소수민족인 투자족(土家族)으로 최초의 여성당원 중 한 명인 샹징즈(向警予) 등 20세기 전후 중국을 움직인 인물들이 대거 태어난 곳이기도 하다.
하루 종일 중국 공산당 혁명사를 읽은 느낌이다. 더운 날씨 때문일까. 두 국가주석의 생애를 따라가는 과정에 땀이 많이 난다. 그들의 삶을 읽는 것은 지금의 중국을 보는 힘이기도 하지 않을까. 땀이 나더라도 열심히 쫓아 다녔다.
첫댓글 통합적으로 평가하면은 잘한것 못한것 반반 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