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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50322. 묵상글 ( 사순 제 2주간 토요일. - 당신과 나 . 등 )
^ 김찬선 레오나르도 신부님. : 아직 / 05:09 추가
^ 호명환 가롤로 신부님 글 일부. : 아직 / 07:33 추가
^ 조명연 마태오 신부님. : 아직 / 07:33 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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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50322. 사순 제 2주간 토요일. 상지종 베르나르도 신부님.
<당신과 나>
“그리하여 그는 아버지에게로 갔다. 그가 아직도 멀리 떨어져 있을 때에 아버지가 그를 보고 가엾은 마음이 들었다.
그리고 달려가 아들의 목을 껴안고 입을 맞추었다.”(루카 15,20)
당신
떠나는
나 괜찮아도
나
떠나보내는
당신 아리시지요
당신
멀리에
나 있어도
나
바로 곁에
당신 계시지요
당신
곁으로 차마
나 가지 못해도
나
늘 그렇게
당신 품고 계시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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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50322. 사순 제 2주간 토요일. 김찬선 레오나르도 신부님.
2025.03.22 05:00
- 자비 투덜이
“세리들과 죄인들이 모두 예수님의 말씀을 들으려고 가까이 모여들고 있었다.
그러자 바리사이들과 율법 학자들이 투덜거렸다.”
저는 위에서 복음을 인용하며 투덜거렸다는 말에
무얼 투덜거렸는지 그 내용을 빼고 인용했습니다.
뺀 내용은 “저 사람은 죄인들을 받아들이고 또 그들과 함께 음식을 먹는군.”인데
제가 이 부분을 뺀 이유는 세리와 죄인들이 주님 말씀을 듣는 것과
바리사이와 율법 학자들이 투덜거린 것을 대조하기 위해서였습니다
그러니까 경청자와 투덜이의 대조입니다.
그런데 이것은 이어지는 비유에서도 재현됩니다.
둘째 아들은 경청자이고 맏아들은 투덜이입니다.
둘째 아들은 자기 몫의 유산을 챙겨 아버지를 떠나는 죄를 지었습니다.
그런데 세리와 죄인들이 주님 말씀을 들으려고 모여들었듯이
작은아들은 죄를 뉘우치고는 아버지께 돌아왔습니다.
아버지와 같이 있는 것을 기준으로 보면
맏아들이 한 번도 곁을 떠나지 않았으니
아버지께 한결같은 충성과 사랑을 지녔다고 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아버지의 자비를 체험하는 것을 기준으로 보면
작은아들은 아버지의 자비를 체험하는 데 비해
맏아들은 아버지가 동생에게도 자비하신 것 때문에 삐지고 투덜거립니다.
아버지가 늘 아버지와 함께한 자기한테만 자비하셔야 한다고 생각했는데
그 괘씸한 동생을 받아들이고 오히려 잔치까지 베푸니 화가 단단히 났고
그 바람에 아버지의 자비를 느낄 수 없게 된 것입니다.
이는 햇빛을 같이 쐬지 않고 나만 쐬려는 고약한 심사인데
그 바람에 자기도 동생에게 자비롭지 못하고
아버지의 자비도 체험하지 못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고 보니 이웃에게 자비로운 사람이 하느님의 자비도 체험하는 것이고,
하느님의 자비를 체험하는 사람이 이웃에게도 자비로울 수 있는 것입니다.
그것이 잘 드러나는 것이 동생을 환영하는 잔치에 함께하자고
아버지가 초대해도 그 잔치에 참여하려 하지 않는 장면입니다.
비유는 이렇게 묘사합니다.
“큰아들은 화가 나서 들어가려고도 하지 않았다.”
그러니까 집 안으로 들어가려고 하지 않는 것이
자비 안으로 들어가려 하지 않는 것과 같습니다.
오늘 비유에서 아버지의 집은 자비의 집입니다.
그런데 작은아들은 그 집을 떠났다가 되돌아오지만
맏아들은 화가 나서 그 집 안에 들어가지 않습니다.
아버지의 자비를 몰랐던 것은 둘 다 마찬가지였지만 차이가 있다면
작은아들은 늦게라도 자비를 알게 되고 자비 안으로 돌아간 반면
맏아들은 동생과 같이 아버지의 자비 안에 있는 것을 거부했기에
끝까지 아버지의 자비를 모르고 자비 밖에 있게 된 점입니다.
끝까지 투덜거리며 아버지의 자비 밖에 있는 맏아들이 가엾습니다.
그런데 내가 바로 그 투덜이 맏아들이 아닌지 돌아보는 오늘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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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50322. 사순 제 2주간 토요일. 호명환 가롤로 신부님.
CAC 매일묵상
물리적 지리를 넘어서시는 하느님!
하느님의 숨
2025.03.21. 16:44
CAC(Center for Action and Contemplation) 리처드 로어의 매일 묵상 - 2025년 3월 21일 금요일 (호명환 번역) 열두 번째 주간: 낯선이를 환영하기
어떤 기관이나 국가도 하느님 나라를 아우를 수 없습니다.
리처드 신부는 우리가 개인의 소유와 국가의 경계로 우리 자신을 규정하는 것이 문제임을 지적하며 우리에게 도전을 던져 줍니다:
예수님께서는 우선적으로 당신의 세계관을 드러내시기 위해 하느님 나라에 대해 말씀하셨습니다. 그렇지만 역사 안에서 절대 다수의 그리스도인은 훨씬 더 작은 자기들의 왕국들에 자기들의 정체성을 두었습니다. 그래서 그들은 이 세상의 나라를 위해 싸우고 죽이고 자기를 온전히 내어 주고 그 나라에 전적인 충성 맹세까지 하였습니다. "카이사르가 주님이다!"라는 외침이 당시 제국에게는 의도적인 체제 전복의 외침처럼 들리는 신앙 고백인 "예수가 주님이시다!"(로마 10,9; 1코린 2,3)라는 외침보다 더 그리스도인들을 결집시켜 주는 외침이었습니다. 지금까지의 그리스도교 역사는 "가톨릭"이기보다는, 즉 보편적이기보다는 놀라우리만큼 대담하게 지역적이고 민족적이며 문화적이었습니다. 우리는 대개 포용보다는 배척에 의해 우리 자신을 규정하였습니다. 아이러니하게도 제1차 세계대전과 제2차 세계대전은 유럽과 미국의 여러 "그리스도교" 사람들끼리의 싸움이었습니다. 우리의 이런 수치스러운 역사를 인정하기를 꺼려한다면, 그것은 우리의 커다란 그림자를 회피하고 거부하려는 우리의 엄청난 능력을 드러내는 것일 뿐입니다.
국가의 경계들은 단순히 자기들 멋대로 그은 선일 뿐이고, 하느님의 눈에는 정말로 하찮아 보이는 것입니다: "보라, 민족들은 두레박에서 떨어지는 물 한 방울 같고 천칭 위의 티끌같이 여겨질 뿐. ... 민족들 모두가 그분 앞에는 없는 것이나 마찬가지, 그분께는 아무것도 아니며 헛것으로 여겨진다."(이사 40,15; 17). 신약성경은 이 말씀을 더 긍정적인 방식으로 표현합니다. "우리는 하늘의 시민입니다."(필리 3,20). "우리는 이 세상에서 나그네이며 이방인일 따름입니다."(히브 11,13). 저의 사부이신 아시시의 프란치스코는 자기 형제들에게 히브리서의 이 말씀을 인용하기를 참 좋아했습니다. 그래서 저는 이 시대의 우리도 열정적으로 이 말씀을 귀여겨 들어 받아들이기를 간절히 바랍니다.
반면에 우리는 우리 땅과 가정, 소유를 마치 진짜 우리 것인 양 거기에 우리의 정체성을 둡니다! 그렇다면 자기에게 주어진 시간을 맞이하게 될 때 우리는 모두 예수님의 이 메시지를 들을 것입니다: "어리석은 자야,... 네가 마련해 둔 것은 누구 차지가 되겠느냐?"(루카 12,20). 저는 자기들을 그리스도인이라고 여기는 사람들의 태도와 세속적이고 불가지론적인 사고를 가진 사람들의 태도에 별 차이를 느끼지 못합니다. 그리스도인 대부분의 시민권은 바로 이곳, 이 세상, 즉 비현실적인 이 작은 땅에 있는 듯합니다. 어디에 우리의 참된 땅이 있는지, 무엇이 우리의 참된 땅(real estate)인지를 정말로 인식하도록 합시다. 우리의 안전함과 정체성, 보화가 우리의 이 작은 왕국에 있습니까? 아니면 참으로 거대한 하느님 나라에 있습니까? 예수님께서 말씀하신 대로, 우리는 결국 이 두 개의 주인을 다 섬길 수 없습니다(마태 6,24). [1]
어떤 기관이나 나라도 하느님의 나라를 아우를 수 없습니다. 사람들이 신심을 지니고 "아버지의 나라가 오소서!" 하고 자기들 입 한쪽으로 말할 때 그들은 자기들 입 다른 쪽으로는 이렇게 말하는 것입니다. "제 나라가 가게 하소서!" 하느님 나라는 자아의 모든 왕국과 개인적인 보상, 사회, 혹은 이 세상의 나라마저도 모두 대체할 수 있는 나라이고, 이 모두를 완전히 능가하는 나라입니다. 하느님 나라에 대한 큰 그림은 하느님의 일과 뜻이 중심이 될 때 우리에게 뚜렷이 펼쳐지고 , 우리가 이 큰 그림의 한쪽에 우리 자리를 잡을 때 우리는 참으로 행복해질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하늘에 계신 아버지의 뜻을 실행하는 것"(마태 7,21)이고, 더 큰 인생 극장에서 참 사랑이 펼쳐지게 하는 것입니다! [2]
우리 공동체 이야기
수년 전 저는 비행기를 타고 가다가 제 어떤 영감을 받아 제 신앙에 대해 깊이 성찰한 적이 있습니다. 그 동안 저는 인류 전체에 대한 하느님의 영원한 사랑에 대해 깊이 숙고해왔었습니다. 우리가 비행기에서 내리기 위해 모두 함께 기다리는 동안 저는 거기 있는 한 사람 한 사람을 하느님으로부터 전적으로, 그리고 무조건적으로 사랑받고 있는 존재로 보았습니다. 물론 그들은 저에게 모두 낯선 사람들이었지만 하느님께는 전혀 그렇지 않다는 것을 깨달았기 때문입니다. 종종 제가 많은 사람과 함께 있을 때면, - 혹은 또 다시 비행기에서 내릴 때면 - 저는 그 경험을 떠올리며 깊은 평화를 느끼곤 합니다.
—Christy M.
[1] Adapted from Richard Rohr, “We Have Not Yet Begun to Love: Religion and Immigration,” Radical Grace 24, no. 4 (2011): 3.
[2] Adapted from Richard Rohr, Preparing for Christmas: Daily Meditations for Advent (Franciscan Media, 2012), 14.
Image credit and inspiration: Lucas Dalamarta, Untitled (detail), 2024, photo, Unsplash. Click here to enlarge image. 알지 못하는 존재와 함께 할 때 우리는 다른 이들을 위해 열린 마음으로 공간을 마련하고 함께 나아가는 수양을 할 수 있습니다. 그 결과를 우리가 알지 못한다 하더라도 말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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숨영성 묵상글
탕부의 비유(?)
하느님의 숨
2025.03.22. 05:51
"그가 아직 멀리 떨어져 있을 때에 아버지가 그를 보고 아버지의 마음은 온통 연민으로 가득 찼다."
아버지의 마음을 표현한 이 성경 구절이 우리말 성경에는 "가엾은 마음이 들었다."라고 단순하게 되어 있지만, 더 정확하게 이야기하자면 아버지의 아들에 대한 애끓는 짐정, 애틋한 심정, 애간장이 타는 심정을 표현한 말입니다. 아버지의 자비 아니면 어디에도 의지할 곳이 전혀 없는 상거지(아주 비참할 정도로 형편 없는 불쌍한 거지) 신세가 된 아들에 대한 아버지의 마음을 표현하는 데는 순 우리말인 '애'가 가장 적절한 말이 아닐까 합니다. 이 '애'는 본래 '창자'를 의미하는 말이고, 그래서 '애가 타다' 혹은 '애가 끓는다'라는 표현은 너무 사랑이 가득하여 존재의 가장 깊은 곳에서부터 슬픔을 느끼는 마음을 표현하는 것입니다. 그리스어 원문에도 이 단어는 동사로 'splagchnizomai'(스플라그크니조마이)라는 단어가 쓰이는데 이 말은 "창자를 끊어내다"라는 뜻을 지닌 동사입니다. 그러니 이 말은 우리말에서 "애"가 들어가는 단어를 쓰는 것이 훨씬 더 정확한 번역일 거라고 저는 개인적으로 생각합니다. 이 단어가 쓰여야 불쌍한 처지에 있는 "애가 끓고" 또 "애가 타들어가는" 부모의 자식에 대한 마음을 잘 표현해 줄 수 있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흔히 하느님을 우리 세상과는 경계선이 그어진 저 먼 하늘에서 냉정하게 우리를 밤낮으로 지켜보시는 분으로 상상하는 경우가 많습니다. 그래야 우리가 정신을 차려서 이 삶을 잘 살 수 있는 것처럼 말입니다. 그런데 글쎄요...! 저는 일전에도 말씀드렸지만 하느님에 대한 이런 개념은 하느님을 우리 인간 수준으로 끌어내리는 참으로 어리석은 짓에서 기인한 것이라는 사실을 우리가 깊이 인식하고 새겨야 한다고 믿습니다. 물론 저에게도 이런 하느님의 이미지가 전혀 없는 것은 아닙니다. 어려서부터 오랫동안 그런 하느님 이미지를 제 마음에 품어왔기 때문입니다.
그렇지만 우리가 이런 하느님 이미지를 내려놓고 오늘 복음에 나오는 늘 당신 집 밖에까지 나오셔서 너무도 애틋하게 우리를 기다려 주시는 아버지 하느님 이미지로 우리 마음을 채우지 않는 한 우리는 하느님을 절대 알 수 없다는 사실을 분명히 인식하고 인정해야 합니다. 이것이 바로 우리가 이 은혜로운 회개의 때인 사순시기에 "잃었던 아들의 비유"를 듣는 이유입니다.
우리가 잘못된 하느님 이미지를 무의식적으로 계속 우리 정신에 각인시키는 한 우리는 절대 하느님을 알 수 없습니다! 절대!~~~
루카 복음에만 나오는 이 불후의 이야기, "되찾은 아들" 이야기는 연속되는 새 개의 잃었다가 찾는 이야기 중 마지막 이야기입니다. 그리고 이 이야기들은 세리와 죄인들이 예수님의 말씀을 들으려고 모여드는 모습을 본 바리사이들과 율법 학자들이 이에 못마땅해하자 예수님께서 그들에게 해 주신 말씀이라는 점을 우리는 꼭 기억해야 합니다. 그러니까 예수님께서는 바리사이들과 율법 학자들에게 하느님께서 죄인들에게도 똑같이 애틋한 마음을 가지고 계시다는 사실을 말씀하고자 하신 것이고, 더 나아가서는 그렇게 불평하는 당사자들인 바리사이들과 율법 학자들에 대해서도 똑같이 애끓는 마음을 가지고 계시다는 사실을 인식시켜 주려 하시는 것입니다.
자, 이 비유에서 바리사이들과 율법 학자들은 세 사람, 즉 아버지와 큰 아들, 그리고 작은 아들 중에 어디에 해당된다고 생각하십니까?.... 큰 아들이겠지요?! 아버지를 떠나 방탕한 삶을 살다 죽기 일보직전에 되돌아온 동생을 위해 잔치를 벌여 주시는 아버지에 대해 못마땅해하며 잔치에 함께하지 않으려는 아들 말입니다. 이들에게도 하느님께서는 이렇게 말씀해 주십니다. "얘들아, 너희는 늘 나와 함께 있고 내 것이 다 너희 것이다. 너희의 저 아우들은 죽었다가 다시 살아났고 내가 잃었다가 되찾았다. 그러니 즐기고 기뻐해야 한다."라고요!...
그러나 이 비유의 핵심 인물은 작은 아들도 큰 아들도 아닙니다. "아버지"입니다. 자식들에 대해 이렇게 애틋한 마음을 지니시는 아버지 말입니다! 이 아버지는 잃었던 아들이든 아버지의 마음을 전혀 이해하지 못하는 아들이든 두 아들에 대해 똑같이 애틋한 마음을 지니시는 아버지 하느님이십니다.
그런데 한 번 곰곰이 살펴봅시다. 아버지의 재산을 가지고 방탕한 생활을 하다 돌아온 아들도 사실은 아버지의 마음을 아직 이해하지 못한 채 돌아왔습니다. 그는 그저 생존을 위해 돌아온 것입니다. 그는 그때까지도 내내 아버지가 너무 후하게 재산을 자기에게 주었다는 사실은 까맣게 잊고 있었던 것입니다. 자식이 살아있는 동안 유산을 물려 주는 것은 상식에서 벗어난 일이었기 때문입니다. 이런 아버지의 마음을 아직도 아들은 알지 못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이렇게 말하지 않습니까?! 그것도 어떻게 될지 모르니까 준비까지 해서 말합니다. "아버지, 제가 하늘과 아버지께 죄를 지었습니다. 저는 아버지의 아들이라고 불릴 자격이 없습니다. 저를 아버지의 품팔이꾼 가운데 하나로 삼아 주십시오."
그렇지만 아버지는 아들이 이 말을 하기도 전에 먼저 아들의 목을 껴안고 입을 맞추어 줍니다. 두말할 필요 없다는 것입니다. 하지만 작은 아들은 자기가 준비한 말씀을 아버지께 해 드립니다. 그런데 아버지는 거두절미하고 아들에게 반지를 끼워주고 신발을 신겨 주고는 이 아들을 위해, 아니 집안 전체를 위해 잔치를 베풀어 줍니다.
아마 그제서야 이 아들은 아버지의 이 애틋한 마음, 즉 처음부터 끝까지 한결같은 아버지의 애틋한 마음을 알기 시작했을 것입니다.
아들 쪽에서는 이것이 바로 회개의 시작입니다. 그러나 아버지는 그 아들이 아버지의 마음을 알지 못했더라도 돌아올 마음을 먹은 것부터가 회개라고 여길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아버지 하느님의 애틋한 마음입니다. 그래서 어떤 영성가들은 이 비유는 "탕자(prodigal son)의 비유"가 아니라 "탕부(prodigal father)의 비유"라고 말합니다. 자비가 너무 헤픈 아버지의 비유라는 것입니다. 영어 prodigal은 라틴어 prodigus에서 유래했는데, 이 단어는 '방탕한', '헤픈'이라는 뜻이 있지만 또 '너무 후한'이라는 뜻도 지니고 있기 때문입니다!
이렇듯이 우리의 관점과 하느님의 관점은 그 근본부터가 철저하게 다릅니다. 이 하느님의 마음을 이해하기 시작하는 것이 우리 신앙 생활에 있어 가장 큰 관건입니다.
우리는 죄를 짓지 말아야 하고, 또 죄를 지었다면 뉘우쳐야 합니다. 하지만 가장 중요한 것은 그렇게 죄를 뉘우치는 이유를 우리가 결국은 알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벌받을까봐서가 아니라, 하느님 아버지의 사랑이 그토록 애틋하다는 사실을 알기에, 그리고 궁극적으로 하느님의 사랑에 들어서는 것이 얼마나 행복한지를 알기에 우리는 하느님에게서 멀어진 우리의 마음(죄: 히브리어의 '죄'는 하느님으로부터 멀어지는 것을 의미함)을 돌려 행복을 향해 발걸음을 옮겨야 합니다.
저는 개인적으로 이 작은 아들이 아버지의 이 애틋한 마음을 이해하기 시작하고 나서야 비로소 진정으로 아버지를 향해, 아버지의 집을 향해 발길을 옮기기 시작하게 되었을 것이라고 믿습니다.
아버지의 사랑 안에 머무는 것이 얼마나 중요한 것인지를 알고 나서야, 즉 자기 삶에서 이것보다 중요한 것이 절대 없다는 사실을 알고 나서야 그는 참으로 회개하게 되었을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우리의 회개여야 하지 않을까요?!
그래서 루카 복음은 마태오 복음의 행복선언에 덧붙여 불행선언까지 넣었는가 봅니다. 이 애틋한 하느님의 사랑으로부터 떨어져 나가는 것이 얼마나 불행한 것인지를 강조하기 위해서 말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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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50322. 사순 제 2주간 토요일. 조명연 마태오 신부님.
25.03.22 05:42
어떻게 마음먹느냐가 중요하다는 이야기를 많이 들었을 것입니다. 미국의 사회학자가 노인의 사망 시기를 연구한 결과, 생일 되기 전에 사망률이 뚝 떨어졌다가 생일이 지나면 급격히 상승하는 현상을 발견했습니다. 왜 생일 전후에 노인의 사망률에 현저한 변화가 나타날까요? 생일 축하를 받을 수 있을 것이라는 기대가 영향을 준 것입니다. 즉, 마음먹기에 따라 달라진다는 것이지요.
이런 예도 있습니다. 의학계의 거물 한 명이 위독한 상태에 빠졌습니다. 훈장을 받기로 내정되어 있었지만 정식으로 수여될 때까지 버티지 못할 것만 같았습니다. 그래서 제자들이 관계자에게 부탁해서 병상에서 훈장을 보여주었습니다. 그런데 그 뒤 갑자기 건강을 회복해서 몇 년을 더 살게 된 것입니다.
이렇게 마음이 중요한데도 우리는 그 마음을 소홀히 여깁니다. 쉽게 포기하고 좌절하면서 그 마음을 닫아버리기도 합니다. 특히 마음을 튼튼하게 하는 것보다 눈에 보이는 물질이 더 중요한 것처럼 여깁니다. 그래서 지금을 힘차게 살지 못하고 어렵고 힘들다며 온갖 불평불만의 삶을 살게 되는 것입니다.
회개 역시 이 마음에서 나오는 것입니다. 인간의 외적 행동 변화가 아닌, 내적 변화를 나타내는 것입니다. 마음을 고쳐서 하느님께 향하는 것입니다. 이렇게 마음이 중요한데도 다른 것이 더 중요한 것처럼 착각 속에 사는 것이 아닐까요?
오늘 복음에서 우리는 잃어버린 아들에 관한 비유 말씀입니다. 재산을 나누어 받고 나간 작은아들이 타락한 생활 끝에 집으로 다시 돌아오는 장면을 보게 됩니다. 이것이 마음을 바꾸는 것, 회개인 것입니다. 그런데 이 작은 아들의 아버지는 아무 조건 없이 따뜻하게 맞아들입니다. 그리고 큰 잔치까지 벌이게 되지요. 이렇게 하느님께서는 우리가 마음을 바꿔서 당신께로 나아오는 것을 기쁘게 그리고 따뜻하게 맞아들이십니다.
큰아들의 모습도 우리가 묵상할 필요가 있습니다. 큰아들은 작은아들을 위한 잔치에 화를 내고 있습니다. 그리고 자신은 지금까지 제대로 대우받지 못하고 종처럼 일만 하였다고 항변하고 있습니다. 사랑 가득한 아버지와 함께 있으면서도 그 사랑을 보지 못하고 있는 것입니다. “너는 늘 나와 함께 있고 내 것이 다 네 것이다.”라는 아버지의 말씀을 받아들이지 못하니, 마음을 바꾸지 못해서 즐기고 기뻐할 수 없었던 것입니다.
우리의 마음을 다스릴 수 있어야 합니다. 하느님 곁에서 멀리 떨어졌다고 생각하면, 마음을 바꿔 얼른 하느님께로 향해야 합니다. 또 하느님 곁에 있으면서도 감사하지 못한다면, 이 역시 마음을 바꿔서 하느님의 사랑을 느껴야 합니다. 하느님 나라에 들어가려면 우리의 마음부터 하느님께로 향해야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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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의 명언: 겉모습만 보고 판단하지 마세요. 첫인상이 중요하긴 하지만, 그 중요성에 비해 정확성은 그리 신뢰할 만하지 않습니다(이드리스 샤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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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50322. 사순 제 2주간 토요일. 이영근 아오스딩 신부님.
“나 일어나 아버지께 가리라.
가서, 아버지! 제가 하늘과 아버지께 죄를 지었다고 말하리라.”
참으로 벅찬 아름다움입니다. 떳떳하게 성공해서 가는 것이 아니라, 죄인으로서 돌아가는 길이기에 더더욱 가슴 저미도록 아름답습니다. 뉘우치고 돌아가서 행동으로 죄를 고백하는 일, 참으로 이토록 아름다운 일은 없습니다.
그래서 시나이의 성 이사악은 말합니다.
“자신의 죄를 아는 이가 기도로 죽은 이를 살리는 이보다 위대하다.
~자기 자신 때문에 한 시간 동안 우는 이가 온 세상을 통치하는 이보다 위대하다.
자신의 나약함을 아는 이가 천사들을 보는 이보다 더 위대하다.”
바로 이러한 회개를 두고, 오늘 <복음>에서는 ‘하느님께서 기뻐하는 일’이라고 말합니다. 그 회개는 죄에 대해 뉘우침과 통탄을 넘어서, 그 죄로부터 일어나 아버지께 돌아가는 행위 속에 있습니다.
이처럼, 회개는 ‘뉘우침’이라는 내면적인 통회와 ‘돌아옴’이라는 외면적인 행동이 요청됩니다. 그리고 작은 아들의 ‘뉘우침’과 ‘돌아옴’ 뒤에는 ‘아버지의 사랑’에 대한 깨달음이 있습니다. 그는 넘어지고, 무너지고, 부서진 바로 그 자리에서, 다름 아닌 아버지의 집에서 받은 사랑, ‘아버지의 사랑’을 깨달았던 것입니다.
‘아버지는 돌아오는 그가 아직도 멀리 떨어져 있을 때에 그를 보고 가엾은 마음이 들어 달려가 아들의 목을 껴안고 입을 맞춥니다. 그리고 미리 마련해 두었던 가장 좋은 옷을 입히고, 반지를 끼워주고, 신발을 신겨줍니다.’(루카 10,20-22 참조)
참으로 아름다운 장면입니다. 사실, 아버지는 아들이 방종으로 유산을 다 탕진하리라는 것을 훤히 알고 있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그가 방탕한 생활로 재산을 허비할 때에도, 결코 그에게서 신뢰를 거두지 않았던 것입니다. 아니, 그렇게 당신을 거부하고 배신할 때마저도, 결코 그에게서 희망을 거두지 않았던 것입니다. 그가 돌아오리라고 믿고 희망하며 좋은 옷과 반지와 신발을 “미리 마련해” 두었습니다. 바오로 사도가 <로마서>에서 말한 것처럼, “우리가 아직 죄인이었을 때에~ 하느님께서는 우리에 대한 당신의 사랑을 증명해주셨습니다.”(로마 5,8).
이것이 바로 아들을 향한 결코 멈추지 않으시는 ‘하느님의 사랑’입니다. 바로 이러한 하느님의 사랑이 오늘 <복음>에서는 잃어버린 아들이 “돌아올 때까지” 믿고 희망하며 기다리는 아버지의 사랑으로 비유되고 있습니다. 비록 죄에 떨어졌을지라도, 결코 멈출 수 없는 아버지의 지극한 사랑 말입니다. 바로 이 사랑에 대한 깨달음이 그로 하여금 아버지의 집으로 돌아오게 하고 새로운 삶에로 태어나게 하는 원동력이었던 것입니다. 그리하여, 마침내 그는 아담과 하와가 나뭇잎 대신 가죽옷을 입었듯이(창세 3,21) 아버지로부터 ‘옷과 반지와 신발’을 받고 자신의 신원을 되찾습니다.
그렇습니다. 진정한 회개는 가슴으로 뉘우치는 것을 넘어, 아버지께로 돌아오는 행동을 넘어, ‘새로운 탄생’에 있습니다. 그리고 거기에는 나를 향한 ‘하느님의 사랑’에 대한 깨달음이 있습니다. 결코 멈추지 않으시는, 나를 향한 하느님의 사랑, 비록 보잘 것 없는 죄인 한 사람이라 할지라도, 마치 전부인 양 소중히 여기시는 하느님의 지극하신 사랑 말입니다.
이처럼, ‘회개’는 자신의 죄보다도 더 깊은 하느님의 사랑을 보며, 상처가 깊어가는 것이 아니라 사랑이 깊어가는 것을 의미합니다. 사순시기를 보내는 지금, 우리는 그리스도의 상처를 바라보면서, 오히려 그리스도의 사랑이 깊어갑니다. 그리고 작은 아들과 함께 이 아름다운 사랑의 노래를 부릅니다.
“나 일어나 아버지께 가리라.
가서, 아버지! 제가 하늘과 아버지께 죄를 지었다고 말하리라. 아멘.
오늘의 말·샘기도(기도나눔터)
“일어나 아버지께 가서, 말하리라. 아버지! 제가 하늘과 아버지께 죄를 지었습니다.”(루카 15,18)
주님!
죽어 눕혀서가 아니라 살아서 제 발로 아버지께 돌아가게 하소서.
뉘우치고 돌아가서 행동으로 죄를 고백하게 하소서.
뻔히 알면서도 믿어주시고 기다려주시는
죄보다 더 깊은 아버지의 사랑에 눈물 흘리며 돌아서게 하소서.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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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50322. 사순 제 2주간 토요일. 조재형 가브리엘 신부님.
엘파소에서 76세의 자매님이 ‘나물, 대추, 호도, 고춧가루, 버섯’을 가지고 왔습니다. 12시간 운전해서 왔습니다. 농산물을 팔아서 본당에 봉헌하고, 어려운 이웃을 도와주겠다고 합니다. 왕복 24시간 운전해야 하는 고된 일정입니다. 달라스 성 김대건 안드레아 성당도 성전 건립할 때 물건을 많이 만들어서 팔았습니다. 76세 어르신이 기분 좋게 엘파소로 갈 수 있도록 도와드리자고 했습니다. 다행히 물건이 잘 팔렸고, 어르신은 환하게 웃으면서 돌아갔습니다. 우리가 살아가면서 듣는 말이 있습니다. "입장 바꿔 생각해 봐!" 가족 간에도, 친구끼리도, 직장에서도 참 자주 하는 말입니다. 그런데, 이 말을 들으면 어떤 기분이 드시는지요? "입장 바꿔 생각해 봐"라는 말은 단순한 생활 속 조언이 아니라, 성경이 가르치는 아주 중요한 신앙의 태도입니다.
오늘 복음 말씀에서 우리는 탕자의 비유를 봅니다. 둘째 아들은 자기 몫의 유산을 달라고 해서 먼 나라로 떠나 방탕한 생활을 합니다. 돈이 다 떨어지고, 돼지나 치며 힘겹게 살다가, 아버지를 떠올립니다. "아버지 집에서는 품꾼들도 나보다 잘 사는데, 내가 차라리 품꾼이라도 되어야겠다!" 그리고 아버지께 돌아갑니다. 그런데 아버지는 그를 보자마자 달려가서 끌어안고 환영합니다. 잔치를 벌이고 좋은 옷을 입혀 줍니다. 이 장면만 보면 참 감동적입니다. 그런데, 맏아들의 생각은 달랐습니다. 맏아들은 열심히 일하면서 살았습니다. 한 번도 아버지를 속상하게 한 적이 없었습니다. 그런데, 자기 몫의 재산을 다 써버리고 돌아온 동생이 오히려 더 큰 환대를 받습니다. 형의 입장에서 보면 억울할 것 같습니다. "나는 평생 성실하게 살았는데, 왜 저렇게 쉽게 용서받지?" 하는 마음이 들 수도 있을 겁니다.
그런데, 여기서 한 가지 질문을 던져 보겠습니다. 탕자의 입장에서 형을 바라보면 어떨까요? 탕자는 형이 억울할 수도 있다는 것을 생각이나 했을까요? 아버지의 입장에서는 어떨까요? "내 아들이 죽었다가 살아 돌아왔다. 얼마나 기쁜 일인데!" 입장을 바꿔 보면, 같은 상황이라도 보이는 것이 달라집니다. 탕자의 비유뿐만이 아닙니다. 하느님께서는 오래전부터 "입장을 바꿔 생각하는 법"을 우리에게 가르쳐 오셨습니다. 이스라엘 백성이 이집트에서 노예 생활을 할 때를 기억해 보십시오. 그들은 오랫동안 억압받고 힘든 삶을 살았습니다. 그런 그들에게 하느님께서 출애굽을 허락하시고, 자유를 주셨습니다. 그런데 가나안 땅에 정착한 후, 그들은 어떠했습니까? 자신들도 과거에 억압받았던 경험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다른 이방인들을 차별하기 시작했습니다. 그래서 하느님께서는 그들에게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너희도 이집트에서 노예로 살지 않았느냐? 그러니 너희도 이방인을 따뜻하게 대해야 한다.”
이 말씀이 오늘날 우리에게 어떤 의미일까요? 우리는 살면서 "나는 힘든 시절을 다 이겨내고 여기까지 왔어!"라고 자부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우리보다 약한 사람, 어려운 사람을 보면 어떤 태도를 가져야 할까요? 하느님께서는 우리가 과거의 고통을 기억하고, 다른 사람을 이해하기를 원하십니다. 성경의 이 가르침은 단순히 오래된 이야기로 끝나는 것이 아닙니다. 트럼프 행정부는 불법 체류자에 대한 강력한 단속을 강화하였습니다. 이민자들은 미국 사회에 부담을 준다는 이유로 쫓겨나야 했습니다. 그런데, 한번 입장을 바꿔 생각해 보면 어떨까요? 그들은 폭력과 가난을 피해 어렵게 국경을 넘었습니다. 더 나은 삶을 위해서, 탕자처럼 무언가를 찾아 떠났던 것입니다. 그렇다면, 미국 사회가 그들에게 조금 더 따뜻한 시선을 보낼 수는 없을까요? 이스라엘은 2000년 동안 박해받은 민족이었습니다. 홀로코스트라는 끔찍한 경험도 했습니다. 그런데, 지금은 팔레스타인 사람들을 억압하는 입장이 되어 있습니다. 만약 유대인들이 자신들이 한때 박해받던 입장으로 돌아가 생각해 본다면? 팔레스타인 사람들이 겪는 아픔을 이해할 수 있지 않을까요?
”입장을 바꿔 생각해 보는 것“은 단순한 조언의 문제가 아닙니다. 이것은 우리가 하느님의 사랑을 실천하는 방법입니다. 탕자의 비유에서 아버지가 보여준 사랑, 출애굽기에서 하느님께서 이스라엘 백성에게 주신 가르침, 그리고 오늘날 우리 사회에서 요구되는 공감과 배려. 이 모든 것이 결국 같은 맥락에서 이해될 수 있습니다. 우리는 때로는 탕자의 입장에서 용서를 받아야 하는 사람이고, 때로는 맏아들의 입장에서 누군가를 용서해야 하는 사람입니다. 그리고 때로는 아버지의 입장에서 조건 없는 사랑을 베풀어야 할 때도 있습니다. 하느님의 사랑과 공감이 삶 속에서 실천되기를 바랍니다. “얘야, 너는 늘 나와 함께 있고 내 것이 다 네 것이다. 너의 저 아우는 죽었다가 다시 살아났고 내가 잃었다가 되찾았다. 그러니 즐기고 기뻐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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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50322. 사순 제 2주간 토요일. 민동규 다니엘 신부님.
찬미 예수님
사람은 살아가면서 죽음을 체험합니다. 모든 사람은 생명이 끝나는 죽음을 받아들여야 하는 날이 옵니다. 그러나 그 이전에 죽음과도 같은 아픔을 경험하기도 합니다.
어떤 철학자는 말했습니다.
‘인간은 던져진 존재입니다.’고 말입니다. 처음 던져진 때는 힘도 있고 빠르고 바람을 가르며 날아갑니다. 그러다 보면 점점 속도는 줄어들고 힘은 떨어지고 하늘로 솟구쳐 올랐던게 시간이 지나면서 점점 땅을 향해 떨어지고 있음을 알게 됩니다. 이것이 모든 사람의 삶의 모습입니다.
우리에게는 가장 젊은 날이 있었습니다. 우리에게는 가장 힘센 날이 있었고, 가장 활력있는 날이 있었습니다. 그러나 그날은 영원하지 않습니다. 그렇게 우리의 젊음과 활력과 재력이 떨어질 때쯤 내 것으로 생각했던 사람들은 우리를 떠나기 시작합니다. 세상을 살며 내 것으로 생각했던 것들이 점점 우리를 떠나게 됩니다. 이것을 우리는 죽음 체험이라 합니다.
오늘 복음의 둘째도 같은 경험을 합니다. 자신의 재력을 과시할 때, 활력을 과시할 때는 사람들이 그의 곁에 있었습니다. 그러나 모든 것을 잃은 후에는 누구도 그의 곁에 남아있지 않았습니다. 둘째에게 그것은 죽음의 체험이었습니다. 둘째는 그때 말합니다.
‘아버지의 집으로 돌아가야겠다. 돌아가서 죄인이라고 말해야겠다.’라고 말입니다. 죽음과도 같은 체험 후 그는 아버지에게 다시 돌아갑니다.
우리 아버지, 하느님께서 우리를 기다리고 계십니다. 죽음체험 속에서 우리를 기다리고 계십니다.
우리가 해야 하는 고백은 단 하나입니다.
‘아버지 저는 이제야 아버지 집으로 돌아왔습니다. 저는 아버지께 죄인입니다.’라고….
⭐감자꽃
자색 감자꽃이 피었습니다.
그럼 영락없이 감자 색도 자색입니다.
하얀 감자꽃이 피었습니다.
그럼 영락없이 감자 색도 하얀색입니다.
자색 꽃인데 하얀색일 수 없고
하얀색 꽃인데 자색일 수 없습니다.
우리 꽃은 어떤 색인가요?
붉은 홍색일까요? 푸르고 푸른 청색일까요?
각기 색이 다르다면 그 삶도 분명 다를 것입니다.
우리는 그렇게 다채로운 색으로 살아갑니다.
너무 다른 이의 꽃을 부러워 마세요.
그대의 꽃도 아주 예쁘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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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50322. 사순 제 2주간 토요일. 이수철 프란치스코 신부님.
자비하신 하느님 아버지
“하닮의 여정”
“내 영혼아, 주님을 찬미하여라.
내 안의 모든 것도 거룩하신 그 이름 찬미하여라.”(시편103,1)
오늘은 그 유명한 복음중의 복음, 순복음이라는 되찾은 아들의 비유입니다. 되찾은 아들의 비유이자 자비하신 아버지의 비유입니다. 우리가 믿고 희망하고 사랑하는 하느님이 어떤 분인지 환히 보여주는 복음입니다. 말그대로 하느님은 대자대비하신 아버지입니다. 자비는 하느님의 마음이자 하느님의 얼굴입니다. 바로 우리 삶은 이런 자비하신 하느님을 닮아가는 하닮의 여정, 자비의 여정이라 할 수 있습니다.
“주님은 자비롭고 너그러우시네.”
바로 오늘 화답송 후렴이 자비하신 주님을 노래합니다. 미카 예언자도 이런 자비하신 하느님을 고백합니다.
“우리의 허물을 용서해 주시고, 죄를 못 본 체해 주시는, 당신 같으신 하느님이 어디 있겠습니까? 그분은 분노를 영원히 품지 않으시고, 오히려 기꺼이 자애를 베푸시는 분이시다. 그분께서는 우리를 가엾이 여기시고, 우리의 허물들을 모르는 체 해 주시리라.”
자비하신 주님을 고백한후, 저희의 모든 죄악을 바다 깊은 곳으로 던져 주십사, 또 저희를 성실히 대하시고 자애를 베풀어 달라 우리를 대신하여 기도하는 미카 예언자입니다. 기도와 더불어 하느님의 자비를 배워야 하는 우리들입니다. 자비하신 하느님 아버지를 평생 배워가며 자비한 사람이 되는 것이 우리의 평생숙제입니다. 오늘 옛 현자의 말씀입니다.
“세상에서 가장 유익한 공부는 덕을 쌓아가는 것이다. 덕이 있는 사람 곁에는 반드시 사람들이 모인다.”<다산>
“큰 덕을 지닌 사람은 반드시 지위를 얻고, 녹을 받고, 명성을 얻고, 장수를 누린다. 큰 덕을 지닌 사람은 반드시 천명을 받는다.”<중용>
바로 자비하신 하느님 아버지를 닮아가는 하닮의 여정에 충실한 이들에게 더해가는 참 좋고 큰 덕이 바로 애덕愛德입니다. 그렇다면 하느님은 어떤 분이신지요? 바로 오늘 복음이 우리가 평생 배워야 할 자비하신 하느님 아버지의 모습을 잘 보여줍니다. 읽을 때 마다 새로운 감동을 선사하는 복음입니다. 우리가 믿는 하느님은 어떤 분이신지, 또 우리는 누구인지 거울처럼 비춰주는 복음입니다. 마치 하느님 자비의 거울같은 복음입니다. 부단히 우리의 회개를 촉구하는 복음입니다.
자기 몫을 챙겨 아버지의 집을 떠났던 작은 아들을 회개로 이끈 것은 바로 자비로웠던 아버지의 추억이었습니다. 아버지를 떠난 자유가 자유가 아닌 방종이었음이 확연히 드러나는 상황입니다. 아버지를 떠나 극한의 곤궁한 처지에 있던 작은 아들은 비로소 제정신이 들고 아버지를 생각하며 회개합니다.
“일어나 아버지께 가서 이렇게 말씀드려야지. ‘아버지, 제가 하늘과 아버지께 죄를 지었습니다. 저는 아버지의 아들이라고 불릴 자격이 없습니다. 저를 아버지의 품팔이꾼 가운데 하나로 삼아 주십시오.”
철저한 회개를 통해 제정신을 찾은 작은 아들은 아버지의 집으로 귀향합니다. 은총의 사순시기, 부단한 회개를 통해 자비하신 아버지의 집으로 귀향하는 홈컴잉(home-coming)의 시간입니다. 오매불망 날마다 길목에 서서 작은 아들의 귀향을 기다리던 아버지는 돌아오는 아들을 보자 가엾은 마음이 들어 달려가 목을 껴안고 입을 맞춥니다.
바로 이 장면을 포착한 렘브란트의 그림입니다. 아, 바로 이것이 아버지의 참 모습입니다. 우리 하느님은 바로 이런 자비하신 아버지입니다. 작은 아들의 회개의 고백을 듣는둥 마는둥 아버지는 당신 종들에게 명령하십니다.
“어서 가장 좋은 옷을 가져다 입히고 손에 반지를 끼우고 발에 신발을 신겨 주어라. 그리고 살찐 송아지를 끌어다가 잡아라. 먹고 즐기자. 나의 아들은 죽었다가 다시 살아났고 내가 잃었다가 도로 찾았다.”
바로 이 마음이, 이 사랑이 자비하신 하느님의 마음이요 사랑입니다. 이리하여 즐거운 잔치를 벌이기 시작했으니 바로 회개한 우리들을 위한 미사잔치를 닮았습니다. 거지같은 삶에서 회개를 통해 자녀로서의 고귀한 품위를 회복한 작은 아들같은 우리들입니다. 세리와 죄인들을 상징하는 작은 아들이요 우리들이라면, 평생 아버지의 집에서 아버지를 충실히 섬겨온 큰 아들은 당대의 의롭다 자부하는 바리사이들과 율법학자들은 물론 우리들의 모습입니다. 아우의 귀향을 반기기는커녕 격한 반응을 보이는 큰 아들은 그대로 우리의 모습입니다.
“보십시오. 저는 여러해 동안 종처럼 아버지를 섬기며 아버지의 명을 한 번도 어기지 않았습니다. 이러한 저에게 아버지는 친구들과 즐기라고 염소 한 마리 주신 적이 없습니다. 그런데 창녀들과 어울려 아버지의 가산을 들어먹은 저 아들이 오니까, 살진 송아지를 잡아 주시는군요.”
여지없이 폭로되는 큰 아들의 내면의 본색입니다. 아버지의 집에서 자녀답게 산 것이 아니라 아버지의 마음을 전혀 헤아리지 못하고 종처럼 살았던 큰 아들입니다. 아우를 저 아들이라 부르며 적대적인 그 언행이 참으로 목불불견, 무자비합니다. 아버지와 가장 가까이 살았으면서도 마음은 멀리 떠나 있었음을 봅니다.
제대로 ‘자녀답게’가 아닌 그냥 ‘종처럼’ 생각없이 아버지를 섬겼던 것입니다. 사람의 속은 정말 알 수 없습니다. 바로 이것이 모범 신자의 정체일 수 있습니다. 큰 아들을 달래는, 회개를 바라시며 호소하시는 아버지의 반응입니다. 두 아들 사이에서 전전긍긍하는 아버지의 모습에서 두 아들에 대한 한결같은 사랑을 배웁니다.
“얘야, 너는 늘 나와 함께 있고 내 것이 다 네 것이다. 너의 아우는 죽었다가 다시 살아났고 내가 잃었다가 되찾았다. 그러니 즐기고 기뻐해야 한다.”
바로 큰 아들같은 우리를 향한 말씀입니다. 바로 이것이 자비하신 하느님 아버지의 마음이요, 이 아버지를 그대로 닮은 또 하나의 아들, 바로 예수님의 마음입니다. 바로 큰 아들같은 우리를 향한 말씀입니다. 과연 나는 큰 아들, 작은 아들, 예수님 중 누구를 닮았는지요?
우리 모두 자비하신 아버지의 마음, 예수님의 마음을 지니고 거룩한 미사잔치에 참여하도록 합시다. 날마다 주님의 거룩한 미사은총이 자비하신 하느님 아버지를 닮아가는 하닮의 여정중에 있는 우리에게 결정적 도움이 됩니다.
“내 영혼아, 주님을 찬미하여라.
그 분의 온갖 은혜 하나도 잊지 마라.”(시편103,2).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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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50322. 사순 제 2주간 토요일. 고인현 도미니코 신부님.
✝️ 교부들의 말씀 묵상✝️
그제야 제정신이 든 그는 이렇게 말하였다. ‘내 아버지의 그 많은 품팔이꾼들은 먹을 것이 남아도는데, 나는 여기에서 굶어 죽는구나. 일어나 아버지께 가서 이렇게 말씀드려야지. ′아버지, 제가 하늘과 아버지께 죄를 지었습니다. 저는 아버지의 아들이라고 불릴 자격이 없습니다. 저를 아버지의 품팔이꾼 가운데 하나로 삼아 주십시오.′’ 그리하여 그는 일어나 아버지에게로 갔다.(루카 15,17-20)
아버지 집으로 돌아감
야곱이 양떼를 이끌어
아버지 집으로 데려갔습니다.
분별 있는 이들을 위한 상징,
지각 있는 이들을 위한 비유가
이 귀향에 들어있는 바,
우리도 아버지 집으로 돌아갑시다.
형제들이여, 덧없는 이 세상을 향한
욕망의 포로가 되지 맙시다.
그대의 본향은 에덴이니
거기서 사랑하는 이들을 만나는
사람이야말로 복 있는 자입니다.
-시리아인 에프렘, 낙원찬가-
✝️ 생태 영성 영적 독서✝️
마이스터 엑카르트는 이렇게 말했다(대지를 품어 안은 엑카르트 영성) / 매튜 폭스 해제 · 주석
【둘째 오솔길】
버림과 그대로 둠
설교 17
지성을 버리고 순수한 무지를 경험하라
예수가 열두 살 되던 해에도...(루카 2,42).
이와 관변하여 한 이교 학자는 다음과 같이 말합니다. “하늘보다 빠른 것이 자연에는 없다. 하늘은 자신의 궤도 안에 있는 만물을 추월한다." 마찬가지로, 사람의 정신도 자신의 궤도 안에서 하늘보다 더 멀리 날아갑니다. 정신이 제 힘으로 움직이고, 낮고 저열한 것들로 인해 타락하거나 훼손되지만 않는다면 말입니다. 정신은 가장 높은 하늘까지도 추월하며, 가장 높은 정상에 이르러, 모든 선 가운데 최고의 선에 의해 양육되기까지 쉬는 법이 없습니다.
이러한 잠재력을 깨닫고, 아무런 방해도 받지 않고 있는 그대로 있고,여러분 자신을 이 어둠과 무지에다 전적으로 맡기고, 이 어둠과 무지를 탐색하고 그것들로부터 돌아서지 않는다면 얼마나 유익하겠습니까? 전부이신 하느님을 획득할 수 있는 가능성이 이 잠재력 속에 들어 있으니 말입니다! 여러분이 자기를 포기하고 모든 것을 모르면 모를수록, 여러분은 그분에게 더 가까이 다가가게 될 것입니다. 이 광야에 대하여 호세아 예언자는 다음과 같이 말합니다. “이제 나는 그를 꾀어 내어 빈 들로 나가 사랑을 속삭여 추리라’(호세 2,16). 참되고 영원한 말씀은 독거(獨居) 속에서만 들려집니다. 사람들이 자신과 모든 잡다한 것으로부터 벗어나 광야와 같이 되는 자리, 그곳이 바로 독거입니다. 예언자는 이 광야와 같은 독거를 갈구한 나머지 이렇게 말했습니다. “비둘기처럼 날개라도 있다면 안식처를 찾아 날아가련얀’μl면 55,히. 우리는 어디서 안식을 찾을 수 있을까요? 모든 피조물로부터 벗어난 자리, 곧 쓸쓸한 광야에서만 안식처를 찾을 수 있습니다. 이와 관련하여 다윗은 다음과 같이 말합니다.
“주님 집 뜰안이면 천날보다 더 나은 하루, 악인의 편한 집에 살기보다는 차라리 하느님 집 문간을 택하리이다”(시편 84,10)(355)
✝️ 토요일 이웃 종교(생태)의 날✝️
이름 없는 하느님, 김경재
하느님 신앙과 동학의 시천주
‘조화정'의 ‘정'(定)이란 ‘그 덕에 합하여 그 마음을 정하는 것' 이라는 말인데, ‘조화’의 상태에 머물고 기하는 것이다. ‘영세불망’은 ‘인간이 일생 동안 잊지 않는다’는 뜻이다. 진솔한 신앙이란 달면 삼키고 쓰면 뱉는 그런 것이 아니다. 폴 틸리히의 말을 빌리면 종교란 ‘궁극적 관심'이어야 한다. 언제나 항상 한울님을 모시고 한울님과 동행하는 사람은 이제 ‘민사지' 한다. 세상사와 만물에 형통한다.
동학의 ‘강령 주문 21자’ 해설은 이쯤 해두고, 동학(천도교)의 한울님 신앙의 의미를 생각해 보자. 동학의 시천주 신앙은 한민족의 오랜 히느님 신앙이 위기 상황에서 다시 한 번 땅 위로 분출해 나온 것이다. 동학이 발생할 당시 외세의 침략과 수탈, 통치 세력의 부패와 가렴주구로 인하여 민족의 기강은 무너지고 가난과 질병과 불의가 판을 치고 있었다. 밝음 대신에 어둠의 세력이, 광명정대함 대신에 불의한 집단의 당파성이, 높고 숭고함 대신에 천박한 동물적 현세주의가 판을 치면서 모든 생명들을 짓누르고 있었다.
이러한 반생명적 현상을 일시에 돌파하기 위해서는 근원적인 혁명과 힘이 요청되었다. 동학의 한울님 신앙의 복권으로 인하여 한민족 민중의 가슴속에서 5천 년 동안 면면이 흐르던 인격적 하느님 신앙과 ‘한 밝음의 신앙’이 다시 회생한 것이다. 동학(천도교)의 신관은 동양 일반의 내재적 범신론 도 아니고, 셈족계 종교의 ‘초월적 유신론’도 아니며, 그 긴장 갈등이 통전된 유일신론적 ‘범재신관(pan en-theism)인 것이다(1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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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50322. 사순 제 2주간 토요일, 굿뉴스 게시판-우리 묵상 체험
작은 아들은 무엇을 회개했는가?
강만연 [fisherpeter] 2025-03-22 ㅣNo.180927
오늘 복음을 읽고 오늘은 무엇에 초점을 맞추어 묵상할까를 대충 메모를 해보니 선택지가 열 개 정도 되는 것 같은데 그중 하나 자격에 대해 한번 묵상해보겠습니다. 오늘 작은 아들은 아버지 품을 떠나 유산을 다 탕진한 후에 지방에 기근이 들었고 먹을 것 때문에 결국은 회개하는 그런 상황입니다. 이 아들은 언제 회개를 했는가 하는 것과 자신은 아버지께 무엇을 잘못했다고 생각해 회개를 했는지 이 부분을 주목해서 살펴보겠습니다. 먼저 작은 아들이 회개를 한 배경은 먹을 것이 없어서 자칫 잘못하면 죽을지도 모를 상황이 될 수도 있다는 상황에서 제정신이 든 것입니다. 만약 그때 꼬투리 같은 걸로 어떻게 먹고 연명을 할 수 있는 상황이라면 회개를 할 수도 없었을지도 모를 일입니다. 결국 죽게 되는 상황이 됐을 때 정신이 든 것입니다. 이때 복음은 회개를 했다고 하는 직접적인 표현을 하지 않았습니다.
단순히 정신이 들었다고 표현을 합니다. 이 표현이 문맥상 흐름상 회개를 했다는 다른 표현과 같다고 봐도 좋을 듯합니다. 달리 표현하면 제정신인 상태에서는 회개를 할 수 없다는 표현으로 이해를 하면 우리가 만약 회개를 할 수 있는 상황에 있음에도 불구하고 회개를 하지 못한다면 그 이유는 자신이 처한 현실 속에서는 제정신을 유지할 수 없기 때문에 할 수 없다고 봐야 할 것입니다. 여기서 제정신이라는 건 무엇을 의미할까요? 원래 단어가 의미하는 단어 그 뜻 그 자체를 의미하는 게 아닐 것입니다. 복음 안에서 생각해보면 아버지의 품 안에 있었을 때가 얼마나 행복했었던가 하는 걸 깨달았을 때 그때 제정신이 든 것입니다.
이런 관점에서 보면 우리도 지금 우리가 하느님 품 안에 있고 할 때 우리와 다른 세상이 더 멋져보이고 신앙생활을 하는 게 신앙생활을 하지 않는 사람과 비교했을 때 어떻게 보면 제약도 많고 스스로 자신의 생활을 통제도 해야 하니 버거울 수 있다고 생각해 인간적으로 신앙을 가진 걸 후회할 수도 있다는 측면도 있지만 나중에 만약 우리가 우리의 삶이라든지 굳이 꼭 삶을 말하는 것은 아니더라도 모든 인생을 결산하게 됐을 때 그때 좋은 결과가 나온다면 그때 어떤 생각을 하게 될까를 묵상해보면 “그때 내가 세상에 있었을 때 신앙생활을 할 때는 계도 지켜야 하고 뭔가 틀에 매여 힘들었다고 생각했는데 지금 시점에서 보니 그 생활이 얼마나 은총이었는지 생각해보면 정말 감사한 일이었는지” 하는 고백을 할지도 모를 일입니다. 마치 작은 아들이 오늘 제정신이 들어 표현한 것처럼 말입니다.
제정신이 든 것은 좋은 일이지만 그 상태로만 머물러 있다면 아무런 유익이 없습니다. 발심을 했으면 그 발심이 표현돼야 합니다. 여기서 발심을 했을 때 이 아들은 자신이 무엇을 잘못했다고 하는 그걸 표현한 게 없습니다. 다만 하늘과 아버지께 죄를 지었다고 하는 것과 함께 자신은 단순히 자격이 없다고만 표현을 했습니다. 이 부분을 주목해 볼 필요가 있습니다. 자격과 회개의 상관관계를 한번 살펴 보고 싶습니다. 우리는 단순히 어떤 죄가 있다면 그 죄를 저지른 결과를 보고 그 죄를 뉘우칠 수 있다고 보는 게 일반적입니다. 자격이라는 걸 죄라는 시각으로 보려고 하는 사람은 아마 거의 드물지 않을까 생각합니다. 극단적인 표현을 하자면 자격이 없는 것도 회개를 해야 한다는 그런 논리도 성립할 수 있습니다.
우리도 마찬가지입니다. 우리는 세례를 받고 하느님과의 새로운 계약을 설정했습니다. 다시 하느님 자녀로서의 신원이 회복된 것입니다. 그와 같은 자격이 주어진 것입니다. 우리는 이 계약관계가 계속 유지를 해야 하는데 주로 계약 자체를 위반하는 건 주로가 아니라 사실은 전적으로 일방인 우리 측에서 다 계약을 위반한다는 것입니다. 오늘 우리는 다시금 생각해봐야 할 것입니다. 나는 개인적으로 하느님과 계약을 했다면 어떤 계약을 했고 나는 과연 하느님의 자녀로서 지켜야 하는 품위 바로 하느님의 자녀가 되는 자격 그 자체를 잘 유지하고 있는가 하는 점입니다. 저는 이런 관점으로 오늘 복음을 묵상해보는 것도 좋을 듯합니다.
자격은 다양할 것입니다. 수도자는 수도자로 서원했을 때 그때 그 마음을 돌아봐야 할 것이고 서품 받으신 신부님은 서품 때 서약을 또 우리 평신도는 세례 때 한 계약입니다. 과연 우리는 그 계약을 잘 실천하고 있는지 말입니다. 다 좋은 점수를 받기는 힘들 것이라는 고백을 하지 않을 수 없을 것입니다. 왜 그럴까요? 사람은 초심을 유지한다는 게 힘들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오늘 이 복음을 묵상하면서 다시 우리가 하느님과의 계약을 맺었을 때 그때 그 마음으로 잠시 되돌아가 지금의 모습을 재점검해봐야 할 것입니다.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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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50322. 사순 제 2주간 토요일, 굿뉴스 게시판-우리 묵상 체험
■ 하느님은 우리가 가야 할 영원한 고향 /
박윤식 [big-llight] 250321. 18:20 ㅣNo.180918
러시아 박물관에 걸린 렘브란트가 그린 ‘돌아온 탕자’ 그림이다. 방탕 끝에 돌아온 작은애가 아버지 품에 얼굴을 묻고 있다. 누더기 옷, 다 해진 신발, 상처 난 발바닥은 그가 집 떠나 고통스럽게 산 모습이 여실하다. 머리는 막 태어난 아이마냥 삭발인데, 아버지의 따뜻한 사랑에 안겼다. 아버지모습에 옆의 큰아들은 어둡게 처리되어 있다. 얼굴에는 시샘과 분노가 인다. 아버지 모습에 불만일 게다. 아들을 안은 아버지 두 손은 서로 다르다. 왼손은 크고 강인해 세상 그 어떤 위험에서도 아들을 보호해 줄 손이다. 오른손은 작고 부드러워 마치 사랑을 섬세하게 품는 어머니 손이다. 집 나간 자식 기다리다 지친 아버지 얼굴 모습이 이제 안도감으로 자비롭다. 그러나 한쪽 눈은 눈물로 지샌 거의 실명이다. 그렇지만 눈가에는 사랑이 가득하다.
‘되찾은 아들의 비유’를 흔히 돌아온 탕자의 비유라나. 죄 지은 작은놈을 주인공으로 본 거다. 그런데 또 어떤 이들은 ‘큰아들 비유’란다. 이는 줄곧 아버지 종으로, 애비 명을 한 번도 어기지 않은 큰애를 주인공으로 본 거다. 허나 방탕함을 모른다는 큰아들이 아버지를 이해하지 못하듯이, 바리사이나 율법학자가 하느님을 제대로 모른다는 메시지도 어쩜 더 중요할 수도. 그러나 누가 뭐래도 주인공은 ‘자비로운 아버지’일 게다. 두 아들이 주인공이 아닌, 그들을 한결같은 사랑으로 대하는 아버지라는 거다. 비록 작은애가 큰 죄 지었음에도 멀리서부터 알아보고 기꺼이 받아들였고, 또한 큰애가 화났을 적에 ‘애야, 내 것이 다 네 것이다.’라며 자신과 그를 ‘따로’가 아닌 하나인 양 대하는 아버지의 그 크신 사랑만이 가장 큰 메시지로 여겨지니까.
사실 우리도 때로는 작은애, 때로는 큰애마냥 산다. 아버지는 집 나간 애를 하루도 잊지 못해 떠난 그 길 끝없이 보았으리라. 멀리 간 아들향한 그리움은 눈물이 되어, 그 흘린 눈물로 눈마저 짓눌렀으리라. 그러다 멀리 길모퉁이 돌아온 몰골 달라진 아들안고 기쁨에 겨워 춤추는 아버지 모습이 바로 하느님 마음이다. 그분께서는 우리 잘못을 다 아시면서도 조건 없이 사랑하신다. 그렇지만 큰아들은 아버지가 동생 잔치까지 벌이는 것에 막 화를 낸다. 자신은 지금까지 종처럼 일만 했다나. 그런 큰아들에게 아버지는 늘 사랑받으며 살아온 걸 일러준다. “애야, 너는 늘 나와 함께 있고 내 것이 다 네 것이다.” 사실 그는 집 안에 머물면서 아버지 잘 섬기고 충실하게 일하는 효자였다지만 내면적으로는 작은아들과 다를 바가! 단지, 하나는 집 나갔다가 깨달은 탕자이고, 다른 하나는 집 안에 있으면서도 깨치지 못한 탕자라는 차이 뿐이니까.
이렇게 작은애 모습이 우리 모습일 수 있으며, 동생을 용서 못해 받아들이지 못하는 속 좁은 큰애 모습 또한 우리다. 문제는 주님께서 우리 죄악을 헤아리시기에, 여기에 자유로울 이는 아무도 없을 게다. 그분께서는 죄 많은 우리를 늘 일으켜 세우신다. 그러기에 이제라도 이웃을 바라보는 우리 마음을 바르게 안고 가야 하리라. 이것이 곧 사랑뿐인 그분 마음이기에. 되찾은 아들 비유에서 충실하게 살아온 큰아들보다, 아버지 품에 안겨 참회의 눈물 흘리는 작은아들이 더 아름답게 보이는 건, 넘치는 그분 사랑이 그를 깨끗이 씻어 주기 때문일 게다. 누가 뭐래도 이 사순 시기는 참된 회개로 하느님을 만나야 한다. 이렇게 우리가 또 한 사람의 탕자임을 깨달을 때에야, 비로소 하느님의 그 한없는 사랑을 올바로 이해하리라. 지금도 그분은 우리를 기다리신다. 비록 우리가 사순 시기마다 회개한다지만, 매번 같은 죄 반복하고 후회한다. 그리고 그분께서는 당신을 찾는 우리를 기꺼이 맞으신다. 이 시기만이라도 그분을 꼭 기억하자. 그래서 고향의 오솔길처럼 포근한 아버지께 돌아가자. 우리가 가야 할 영원한 고향이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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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50322. 사순 제 2주간 토요일. 한창현 모세 신부님.
신앙생활을 중단한 이들과 대화하다 보면, 가끔 이러한 말을 듣습니다.
‘신앙생활을 다시 시작하기가 두렵다. 평소에 상황이 좋을 때는 하느님을 찾지 않다가, 상황이 어려워지니까 하느님을 찾는 것 같아 양심에 걸린다.’ 또는 ‘지금은 상황이 어려워서 하느님을 찾더라도, 다시 상황이 좋아지면 하느님을 찾지 않을 것이 분명하다. 그러니 아예 신앙생활을 다시 시작하기를 포기한다.’는 말입니다.
그럴 때, 오늘 복음에 나오는 두 아들과 아버지의 이야기를 들려줍니다.
작은아들은 순수하게 아버지가 좋아서 돌아온 것이 아닙니다. 배고픔을 해결할 수 있는 가장 확실한 방법이었기에 돌아온 것입니다.
큰아들은 아버지와 함께 있었지만 아버지는 자신에게 일을 시키는 사람이고 자신은 아버지의 종일 뿐이라고 생각하고 있었습니다.
작은아들이 어떤 마음으로 돌아왔는지, 그리고 큰아들이 어떤 마음으로 아버지와 함께하였는지에 상관없이 아버지는 두 아들을 받아들였습니다. 이것이 바로 하느님의 자비입니다.
프란치스코 교황께서는 하느님의 자비를 다음과 같이 말씀하십니다.
“하느님의 자비와 용서는 정의를 넘어섭니다. 정의를 깎아내리거나 쓸데없는 것으로 여겨서가 아닙니다. 죄를 지은 사람은 벌을 받아야 합니다. 그러나 이는 회개의 시작이라는 점을 기억하십시오. 하느님께서는 정의를 거부하지 않으십니다. 오히려 큰 차원에서 정의를 뛰어넘으십니다”(『아버지처럼 자비로워지십시오』, 생활 성서사, 48면).
우리는 정의에 묶여서 하느님의 자비를 외면하기도 합니다.
두 아들의 아버지는 참된 정의를 뛰어넘는 하느님의 자비를 보여 주고 있습니다. 자비하신 하느님께서는 우리를 언제나 기다리십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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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하 자료는 보관을 위해 추가 첨가한 자료입니다
(23:5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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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50322. 사순 제 2주간 토요일. 김명겸 요한 신부님.
세리들과 죄인들이 예수님께 모여옵니다.
그러자 바리사이들과 율법 학자들이 투덜거립니다.
그들의 불만을 들으신 예수님께서
오늘의 비유를 말씀하십니다.
오늘 복음은 루카 15장으로
15장에는 세 개의 비유가 있습니다.
양, 은전, 아들의 비유인데
앞의 두 가지 비유와 오늘의 비유가 다른 점이 있습니다.
앞의 두 가지 비유에서는
잃어 버린 것을 찾는 모습이 나타납니다.
그러나 오늘의 비유에서 아버지는
찾아나서기보다는 집에서 기다립니다.
아들이 돌아갈 결심을 하는 것이
중요하게 보입니다.
즉 오늘 복음의 시작 부분에서
세리와 죄인들이 예수님께 모여왔다는 것이
중요하게 보입니다.
죄를 지은 상황에서 용서 받고 싶은 마음도 있지만
그것에 앞서 죄를 숨기고 싶은 마음도 있습니다.
내 초라한 모습을 드러내고 싶지 않습니다.
더 나아가 다른 사람들이 나를 죄인이라고 말하면서
그들과 관계가 끊어지는 것을 원하지 않습니다.
더욱이 당시 이스라엘 사회에서는
공동체에서 추방당하는 일까지 있었습니다.
그래서 할 수 있는 한 숨기려고 합니다.
하지만 누군가 나의 허물을 있는 그대로 받아주고
용서해 준다면
부끄럽지만 드러내고 싶은 마음도 있습니다.
숨기면서 겪는 불편함,
드러날까 생각하는 불안함에서
벗어나고 싶습니다.
그러다보니 나를 있는 그대로 받아줄 수 있는 사람을
찾게 됩니다.
15장의 앞선 두 비유에서는 하느님께서 찾으신다면
오늘의 비유에서는 하느님을 찾는 모습을 봅니다.
그렇게 서로를 찾으려는 마음이 만나고
그렇게 화해가 이루어집니다.
나를 있는 그대로 보여줄 용기가 별로 없습니다.
나를 있는 그대로 바라볼 용기가 별로 없습니다.
그래서 하느님께 다가가는 길에서
주저하는 내 모습을 보게 됩니다.
오늘 비유에 나오는
아버지의 기다리는 모습을 생각할 때
우리는 한 번 더 용기를 낼 수 있을 것입니다.
그 용기를 통해
자유로움을 살아가는 우리가 되었으면 좋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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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50322. 사순 제 2주간 토요일. 한상우 바오로 신부님
."너의 저 아우는 죽었다가 다시 살아났고 내가 잃었다가 되찾았다."(루카 15, 32)
다시 살아나는
축제이며
잃었다가
되찾는
사랑의
축제입니다.
아버지
하느님께서는
우리를 위한
삶을 주셨습니다.
아버지
하느님께서 주신
축복의 일상을
다시 만나는
사랑의
사순입니다.
하느님에게서
멀어지는
아픔이
얼마나
큰 아픔인지를
절실히
우리 삶에서
깨닫습니다.
떠나보내는 일도
맞아들이는 일도
모두
아버지 하느님의
간절하신
사랑 안에서
이루어집니다.
하느님의
기다림이
돌아가는
우리의
길을 만듭니다.
기다리시는 분이
계시기에
돌아갈 곳이
있습니다.
사람은
기다림과
사랑으로
진정한
사람이 됩니다.
그 누구도 아닌
우리 자신을
기다리시는
하느님이십니다.
우리의 자아가
무너져야
돌아갈 곳을
알게 됩니다.
하느님께로
돌아가는 길을
그 누구도
막을 수 없습니다.
고귀한
사랑의 관계를
다시 뜨겁게
체험합니다.
하느님께로
돌아가는 길을
어느 누구도
대신해 주지
않습니다.
조건 없이
우리를
반겨주시는
아버지
하느님의
사랑입니다.
하느님께로
돌아가는 길
회개는
우리 모두의
축제가 됩니다.
새로워지는
아버지
하느님과
우리의
관계입니다.
아버지
하느님께서는
우리를
되찾기 위해
우리의 여정을
기다려주십니다.
기다림과
돌아감 사이에
참된 만남과
새로운 시작이
있습니다.
창조하시고
되찾으시는
사랑의
하느님이십니다.
사랑의
아버지
하느님을
다시 만나는
은총의 날
되시길
진심으로
기도드립니다.
참된 회개가
참된
축제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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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50322. 사순 제 2주간 토요일. 양승국 스테파노 신부님.
<활짝 열린 두 팔로>
떠나갔던 작은아들은 순식간에 물려받은 유산을 탕진하고 삶의 가장 밑바닥에 서게 됩니다.
주머니가 두둑해서 돈을 물 쓰듯이 탕진하던 순간 사람들은 호의를 보이며 다가왔지만 무일푼이 된 그를 받아주는 곳은 단 한 군데도 없었습니다.
마침내 마지막 한 푼까지 다 탕진한 그는 자존심에 한 며칠 굶었겠지요.
그러던 그가 마지막으로 선택한 곳은 돼지 치는 농장이었습니다.
드디어 작은아들은 인생의 가장 밑바닥까지 내려간 것입니다.
돼지 치는 농장에서 지독한 분뇨 냄새를 맡으며 죽기 살기로 일한 대가로 돌아온 양식은 겨우 돼지들이 먹는 열매 꼬투리였습니다.
그제야 작은아들은 아버지의 얼굴을 떠올립니다.
아버지집의 그 따뜻하고 훈훈한 기운이 떠오르자 작은 아들의 눈에서는 굵은 눈물방울이 쉴 새 없이 흘러내렸습니다.
드디어 그는 어려운 결심을 합니다.
자존심이고 수치심이고 다 팽개치고 아버지께로 돌아갈 것을 결심합니다.
“아버지, 제가 하늘과 아버지께 죄를 지었습니다.
저는 아버지의 아들이라고 불릴 자격이 없습니다.
저를 아버지의 품팔이꾼 가운데 하나로 삼아주십시오.”
작은아들은 드디어 회개를 한 것입니다.
작은 아들의 회개를 묵상하며 회개의 가장 큰 배경이 무엇인가 생각해봅니다.
만일 평소 작은아들의 아버지가 엄격한 아버지였다면, 단 한 치의 실수도 용납 못하는 무서운 아버지였다면, 쉽게 분노하고 절대로 용서 못하는 아버지였다면, 작은아들이 아버지 집으로 발길을 돌렸겠습니까?
나라도 돌리지 않았을 것입니다.
돌아가면 이제 남은 것은 죽음인데, 그 지긋지긋한 잔소리며, 그 다그침, 그 호통을 어떻게 견딜 것입니까?
그러나 평소 보여주셨던 아버지의 모습은 절대 그런 것이 아니었습니다.
늘 자신의 의지를 존중해주시던 분, 한번 실수했다고 해서 불같이 화를 내지 않으시는 분,
언제나 관대하고 열려있던 분, 언제나 연민과 측은지심의 정으로 가득 찼던 분, 큰 과오에도 그저 허허, 하고 웃어넘기시던 분이었기에, 작은아들은 안심하고 용기를 낼 수 있었을 것입니다.
결국 부드러움이 강함을 이깁니다.
결국 연민과 측은지심이 인간을 살립니다.
결국 인내가 모든 것입니다.
우리의 하느님은 철저하게도 수동적인 하느님이십니다.
작은 아들이 좋은 않은 마음을 먹을 때도 그냥 계십니다.
인간이라면 하지 말아야 할 말, ‘유산을 분배해 달라’고 할 때에도 그저 말없이 그렇게 하십니다.
떠나갈 때도 붙잡지 않으십니다.
갖은 추문을 퍼트리며 방황할 때도 그냥 기다려주십니다.
더 이상 견딜 수 없어 돌아올 때도 그저 두 팔을 활짝 벌리시며 환대해주십니다.
철저하게도 수동적인 하느님, 우리 하느님의 ‘수동’으로 인해 우리가 구원됩니다.
철저하게도 약한 하느님, 그 하느님의 약함으로 인해 우리가 해방됩니다.
철저하게도 겸손하신 하느님, 그 하느님의 겸손으로 인해 우리가 높아집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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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50322. 사순 제 2주간 토요일. 조욱현 토마스 신부님.
복음: 루카 15,1-3.11-32: 아버지, 저는 하늘과 아버지께 죄를 지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되찾은 아들의 비유를 말씀하신다. “어떤 사람에게 아들이 둘 있었다.”(11절). 여기서 작은아들은 자신에게 돌아올 유산을 달라고 한다. 작은아들은 아들의 자격을 잃어 마땅하였다. 작은아들은 아버지가 돌아가실 때까지 기다릴 수가 없어서 살아있는 아버지의 너그러움에 기대어 자기 쾌락을 따르기로 한 것이다. “며칠 뒤에 작은아들은 자기 것을 모두 챙겨서 먼 고장으로 떠났다.”(13절). 아버지에게서 떠난 사람은 누구나 자기 고장에서 떠난 사람이다. 그는 먼 고장에서 방탕하게 살며, 인자한 아버지께서 주신 재물을 모두 허비하였다. 이러한 삶은 어둠의 세계에 살며, 당신 얼굴에서 멀리 떨어져 사는 것이며, 아버지를 떠난 삶이다.
하느님의 말씀을 떠난 자가 진짜 굶주리는 자이다. 영원한 양식으로 배를 채울 줄 모르는 자는 늘 굶주린다. 아버지의 사랑을 등진 그는 돼지 치는 신세가 되었다. 진흙투성이 돼지우리에 뒹굴며 더러운 오물을 뒤집어쓰니까 그는 아버지의 집의 평화로운 생활을 등지고 떠난 것이 얼마나 비참하고 괴로운 일인지 알게 된다. 그는 죄인이었지만 여전히 아버지의 아들로 남아있었다. 창녀들과 어울리며 아버지의 재산을 탕진했지만, 아버지를 떠나 남의 땅의 포로가 되었으나 그는 아버지를 아버지라고 불렀다. 작은아들은 아버지께 돌아오며 울부짖는다. 아버지는 아들이 아직 멀리 있을 때 아들에게 달려간다. “그리고 달려가 아들의 목을 껴안고 입을 맞추었다”(20절). 아버지는 아들의 죄를 드러내거나 비참하게 만들지 않으려고 입맞춤으로 아들의 죄를 용서하고 포옹으로 덮어준다.
“어서 가장 좋은 옷을 가져다 입히고 손에 반지를 끼우고 발에 신발을 신겨 주어라”(22절). 가장 좋은 옷은 영원불멸하는 영광을 아들에게 입히고 반지를 끼워줌으로써 예전에 지녔던 명예도 되찾아 준다. 신발을 신겨 주는 것은 발도 헐벗지 않게 하고 신발을 신은 채로 옛날의 삶으로 돌아오게 해 준 것이다. “그리고 살진 송아지를 끌어다가 잡아라”(23절). 되찾은 작은 아들을 위하여 준비된 송아지다. 들에서 돌아온 큰아들은 아버지 집에서 춤추며 노래하는 소리가 들리는 데도 안으로 들어가려 하지 않는다. 그러면서 동생을 심판한다. 아버지가 밖으로 나가 아들에게 말한다. “얘야, 너는 늘 나와 함께 있고 내 것이 다 네 것이다. 너의 저 아우는 죽었다가 다시 살아났고 내가 잃었다가 되찾았다. 그러니 즐기고 기뻐해야 한다.”(31-32절) 아버지의 것이 모두가 그의 것인데, 아버지와 함께 살던 모든 삶이 매일의 잔치였는데 그것을 알지 못하고 종같이 살아온 큰아들에게는 기쁨이 없었다. 더구나 이제는 시샘 때문에 형제가 파멸하기를 바라니 아버지의 잔치에 참여하여 기쁨을 맛볼 자격이 없다. 작은아들이 사랑의 모습을 되찾았기 때문에 기뻐해야 한다는 것이다. 작은아들이 아버지의 자비로우심으로 잔치에 참여할 자격을 얻었다면 큰아들도 아버지의 허락이 없으면 그 잔치에 참석하지 못했을 것이다. 우리 역시 모두 하느님의 사랑으로 되돌아가야 한다.
1) 여기에도 신비가 있다. 창세기에서 악마는 동정이었던 하와에게 먼저 말을 건 다음 남자에게 말을 걸었다. 이 말은 그들에게 죽음을 건네기 위한 말이었다. 동정 잉태의 사건에서는 거룩한 천사가 마리아에게 먼저 말하였고 다음에 요셉에게 말하였다. 이것은 그들에게 생명의 말씀을 드러내기 위함이었다. 앞의 사건에서는 죄와 죽음을 위해 여자가 선택되었고, 뒤의 사건에서는 구원을 위해 여자가 선택되었다. 앞의 사건에서는 여자로 말미암아 남자가 넘어졌고, 뒤의 사건은 동정녀로 말미암아 남자가 일어섰다. 그래서 천사는 요셉에게 그렇게 말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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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50322. 사순 제 2주간 토요일. 전삼용 요셉 신부님.
행동이 아니라 욕구에 집중하라. 그게 나다!
‘헬과 마리’라는 두 남녀가 있었습니다.
헬은 아주 험상궂게 생겨서 사람들이 다 싫어했습니다.
그런 헬이 어느 날 아리따운 아가씨 마리를 만납니다.
가슴 깊이 찾아든 사랑의 열정으로 용기를 내어 청혼을 했지만 마리는 일언지하에 거절합니다.
헬의 마음을 아신 하느님은 헬에게 가장 온화한 사람의 얼굴 가면을 선물하십니다.
헬은 그 가면을 쓰고 다시 마리를 찾아가 청혼합니다. 마리는 결혼에 응합니다.
결혼하고서도 헬은 늘 조마조마한 마음으로 자신의 얼굴을 가면 속에 감추고 삽니다.
헬은 마리를 진심으로 사랑했으므로 온 힘을 기울여 마리를 보살폈고 마리는 참으로 행복하였습니다.
그런 마리의 행복이 헬에게도 크나큰 기쁨이요 행복이었습니다.
그러던 어느 날 헬의 행복을 질투한 친구가 헬의 집으로 놀러왔습니다.
그리고 마리가 보는 앞에서 헬의 가면을 벗겨버립니다.
그 순간 가장 놀란 사람은 마리도 헬도 아니었습니다.
바로 그 친구였습니다.
헬의 험상궂은 얼굴은 이미 거기에 없었고 가면과 같은 인자하고 친절한 얼굴이 있었던 것입니다.
그리고 자신의 얼굴 위에도 가면이 있는 것을 안 헬의 친구는 그것을 벗어봅니다.
그런데 헬의 이전 얼굴이 친구에게 있는 것이었습니다.
막스 비어의 ‘행복한 위선자’라는 책의 내용을 각색해 보았습니다.
사람은 그 행위로는 그 사람이 어떤 사람인지 알아차리기가 매우 어렵습니다.
사람의 본성은 행위로 드러나기도 하지만 가장 정확히는 ‘욕구’로 드러납니다.
본성이 욕구입니다.
사랑하면 겉모양이 아무리 험상궂어도 속에는 사랑의 본모습이 있고 아무리 착한 행동을 해도 바라는 것이 험악하면 그 사람의 본 얼굴은 험악한 것입니다.
그래서 자신의 행동을 보지 말고 지금 자신이 무엇을 바라는지를 살펴야합니다.
자신의 행동이 아니라 자신의 욕구가 바로 자신의 본모습이기 때문입니다.
바리사이-율법학자들의 문제는 자신들의 욕구가 아닌 행위에 초점을 맞춘 것이었습니다.
그들은 자신들의 행위로만 의인이라 믿었습니다.
자신들의 행동에 자신들이 속은 것입니다.
예수님은 그들에게 위선자라고 하십니다.
왜냐하면 속은 음탕한 마음으로 간음하고 있었고
화나는 마음으로 살인하는 사람들이었기 때문입니다.
겉은 의인이었지만 속은 깨끗하지 못한 사람들이었습니다.
그러나 겉은 죄인이지만 속은 예수님을 따르고 싶은 세리와 죄인들도 있었습니다.
예수님은 당연히 세리와 죄인들의 편이 될 수밖에 없으셨습니다.
예수님은 겉이 아닌 속을 보시는 분이시기 때문입니다.
오늘 비유말씀의 형은 아버지 밑에서 죄라는 것을 지어본 적이 없는 사람입니다.
그러나 동생은 온갖 죄를 짓고 재산을 다 탕진하고 나서야 아버지께 돌아옵니다.
큰아들은 아버지가 동생을 대하는 자세를 보며 분통을 터뜨립니다.
왜 죄만 짓고 온 놈을 자신보다 더 잘 대해주느냐는 것입니다.
큰아들의 죄는 이것입니다.
동생이 지은 죄를 은근히 부러워했다는 것입니다.
자신이 일을 하고 있는 동안 동생은 흥청대었습니다.
이것에 화가 난 것입니다.
그도 마음으로는 그러고 싶었던 것입니다.
욕구로는 이미 죄인이지만 겉만 보고 자신을 판단하니 의인이라 착각한 것입니다.
반면 동생은 이제야 아버지 밑에서 죄 안 짓고 형처럼 일하는 것이 행복임을 알았습니다.
그래서 아버지 곁에 있고 싶어 했습니다. 속으로 좋아하는 것이 나의 본성입니다.
남이 죄를 짓는 것을 보고 화가 나면 나도 죄를 짓고 싶은 것입니다.
그래서 죄인들이 하는 행동을 보며 화를 내는 사람은 그 죄인들이 받을 심판을 받게 됩니다.
제가 한 본당을 떠나기 직전 한 자매님이 저에게 감사인사를 왔습니다.
형제님이 외도를 하는데 어떻게 해야 하느냐고 저에게 1년 전에 상담을 하셨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제가 매일 1시간 동안 성체조배 하라고 했고 그분은 그것을 지켰습니다.
남편이 회개한 것은 아니지만 자매님이 변했다고 합니다.
그전엔 남편이 미워서 죽겠었는데 지금은 남편이 불쌍해 보인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무슨 짓을 하고 왔는지 뻔히 알아도 식사도 차려주고 이불도 깔아주며 잘 주무시고 나가라고 말한다는 것입니다.
이것이 주님께서 주시는 기적입니다.
죄를 짓는 것이 아니라 죄를 짓지 않는 것이 행복임을 알게 하신 것입니다.
만약 내가 회개를 했다면 죄를 짓는 사람들이 불쌍해보여야 합니다.
죄 짓는 것이 고통임을 알기 때문에 죄를 지을 수 없는 사람이 회개한 사람입니다.
회개하면 무엇이 행복인지 알게 되어 더 이상 행복하지 않은 삶으로는 갈 수 없게 됩니다.
하느님은 인간이 죄짓는 것을 두려워하지 않으십니다.
다만 죄가 고통임을 알기를 원하실 뿐입니다.
인간은 누구나 작은 아들의 길을 밟아야합니다.
죄를 짓지 않으시고 이것을 아신 분은 성모님과 예수님밖에 없으십니다.
죄를 지어본 우리들이 아직까지 죄를 짓는 사람들이 행복하겠다 믿어서는 안 됩니다.
그렇게 자신의 본성이 죄인으로 드러나기 때문입니다.
죄를 안 짓는 것이 더 큰 행복임을 안다면 그 사람의 가면 뒤에는 예수님의 얼굴이 있을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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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50322. 사순 제 2주간 토요일. 송영진 모세 신부님.
<‘몸의 배고픔’보다 ‘사랑의 배고픔’이 더 큰 고통입니다.>
“...아버지는 종들에게 일렀다.
‘어서 가장 좋은 옷을 가져다 입히고 손에 반지를 끼우고 발에 신발을 신겨 주어라.
그리고 살진 송아지를 끌어다가 잡아라.
먹고 즐기자.
나의 이 아들은 죽었다가 다시 살아났고 내가 잃었다가 도로 찾았다.’ 그리하여 그들은 즐거운 잔치를 벌이기 시작하였다.
그때에 큰아들은 들에 나가 있었다.
그가 집에 가까이 이르러 노래하며 춤추는 소리를 들었다.
그래서 하인 하나를 불러 무슨 일이냐고 묻자, 하인이 그에게 말하였다.
‘아우님이 오셨습니다.
아우님이 몸성히 돌아오셨다고 하여 아버님이 살진 송아지를 잡으셨습니다.’
큰아들은 화가 나서 들어가려고도 하지 않았다. 그래서 아버지가 나와 그를 타이르자, 그가 아버지에게 대답하였다.
‘보십시오, 저는 여러 해 동안 종처럼 아버지를
섬기며 아버지의 명을 한 번도 어기지 않았습니다.
이러한 저에게 아버지는 친구들과 즐기라고 염소 한 마리 주신 적이 없습니다.
그런데 창녀들과 어울려 아버지의 가산을 들어먹은 저 아들이 오니까, 살진 송아지를
잡아 주시는군요.’ 그러자 아버지가 그에게 일렀다.
‘얘야, 너는 늘 나와 함께 있고 내 것이 다 네 것이다.
너의 저 아우는 죽었다가 다시 살아났고 내가 잃었다가 되찾았다.
그러니 즐기고 기뻐해야 한다.’(루카 15,22-32)”
1) 25절의 “그때에 큰아들은 들에 나가 있었다.” 라는 말은, 집에서 ‘즐거운 잔치’를 벌이고 있을 때
큰아들은 들에서 일을 하고 있었음을 뜻합니다.
26절의 “하인 하나를 불러 무슨 일이냐고 묻자” 라는 말은, 집에서 무슨 잔치를 벌이고 있는지, 왜 잔치를 벌이는지를 큰아들이 전혀 모르고 있었음을 뜻합니다.
이상한 일인데, 표현만 보면, 아버지는 작은아들이 돌아온 것만 기뻐서 큰아들을 잊어버린 것은 아닐까, 라고 생각할 수도 있고, 잔치를 벌이면서 들에 있는 큰아들에게는 아무런 연락도 하지 않았다고 생각할 수도 있습니다.
그렇다면 의도한 일은 아니더라도 아버지가 큰아들을 소외시킨 셈이 되고, 그것만으로도 큰아들이 화를 낼만 하다고 생각할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 ‘되찾은 아들의 비유’를 말씀하신 본래의 의도와 가르침을 생각하면, 아버지는 작은아들이 돌아왔다는 것을 당연히 큰아들에게 알렸을 것이고, 잔치를 시작할
테니까 하던 일을 중단하고 곧장 집으로 들어오라고 전했을 것이라고 생각하는 것이 옳습니다.
그렇게 생각하면, 큰아들은 그 ‘기쁜 소식’을 들으려고 하지도 않았고, 집에서 벌어지는 일에 관심도 없었다가 무슨 잔치인지 모르게 된 것이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자기가 안 들으려고 해서 못 들었으면서도 “왜 나에게 아무것도 알리지 않았느냐?” 라고 화를 냈다는 것입니다.
그 모습은, 예수님께서 복음을 선포하실 때에는 듣지 않다가 나중에 심판 때에 “나는 못 들었다. 나는 몰랐다.” 라고 변명하는 사람들의 모습으로 해석할 수도 있습니다.
<똑같이 미사 참례를 하고, 똑같이 강론을 들었는데도, 강론 내용을 생생하게 기억하는 사람도 있고, 전혀 기억하지 못하는 사람도 있습니다.
마음이 다른 곳에 가 있고, 딴 생각만 하고 있었다면, 강론을 들어도 듣는 것이 아니고, 아무것도 기억하지 못하게 됩니다.
성경을 읽을 때, 분명히 눈으로는 글자를 읽고 있고, 손가락으로는 페이지를 넘기고 있는데, 읽었다는 사실만 기억하고 무엇을 읽었는지는 전혀 기억하지 못하는 경우도 있습니다.>
2) 작은아들이 집으로 돌아온 일에 대해서, “그는 그저 배가 고파서 돌아온 것뿐이고 순수한 마음으로 돌아온 것이 아니다.
그것은 진정한 회개가 아니다.” 라고 말하는 이가
있는데, 비유의 전체 내용을 보면, 단순히 ‘배고픔만이’ 작은아들이 집으로 돌아온 이유였다고 말할 수는 없습니다.
17절에 “그제야 제정신이 든 그는”이라는 말이 있습니다.
‘제정신’이라는 말은 작은아들이 ‘비로소’ 자기 잘못을 깨달았고, 뉘우치기 시작했음을 나타냅니다.
물론 ‘배고픔’은 그가 그렇게 하게 되는 계기가 되었습니다.
21절의 “아버지, 제가 하늘과 아버지께 죄를 지었습니다.
저는 아버지의 아들이라고 불릴 자격이 없습니다.” 라는 말은, 그가 ‘진심으로’ 회개를 하고 있음을 나타냅니다.
<배고픔에서 벗어나려고, 즉 밥을 얻어먹으려고,
마음에도 없는 말을 한 것은 아니라는 것입니다.>
작은아들의 회개에 초점을 맞추면, 그는 ‘몸의 굶주림’보다 ‘사랑의 굶주림’에 더 시달렸다고 말할 수 있습니다.
15절-16절을 보면, 그는 ‘몸의 배고픔’도 심하게 겪었지만, ‘사랑의 배고픔’을 더 심하게 겪었음을 알 수 있습니다.
자기가 버리고 떠났던 그 사랑을 되찾기 위해서
아버지에게로 돌아간 것이 그의 회개입니다.
<큰아들은 ‘몸의 배고픔’은 실제로 겪지 않고 있었는데, ‘사랑의 배고픔’은 그 자신이 전혀 깨닫지 못하고 있는 모습입니다.>
3) 아버지가 기뻐하는 모습은 ‘사랑’을 나타냅니다.
그 모습에서 ‘사랑은 곧 기쁨’이라고 말할 수도 있습니다.
큰아들이 화를 내는 모습은 ‘사랑 없음’을 나타냅니다.
‘화’는 사랑의 반대쪽에 있습니다.
<복음서에서, 예수님께서 제자들을 꾸짖으실 때나, 위선자들을 꾸짖으실 때 화를 내시는 것 같은 모습을 접할 때가 있는데, 그것은 ‘화’가 아니라 ‘안타까움’입니다.
유대인들이 예수님과 사도들을 미워하고 박해할 때의 모습을 보면, 그들은 ‘화’와 ‘증오심’만 가득 차 있는 모습입니다.
그렇게 그들 마음 안에 사랑이 없었다는 것도 죄입니다.
오늘날 우리나라 현실에서, 자기들만의 신념을 주장하는 사람들의 모습에서 사랑은 볼 수 없고, ‘화’와 ‘증오심’만 가득한 모습을 볼 때가 많은데, 참으로 안타까운 일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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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50322. 사순 제 2주간 토요일. 함승수 세례자 요한 신부님
루카 15,1-3.11ㄴ-32 “얘야, 너는 늘 나와 함께 있고 내 것이 다 네 것이다. 너의 저 아우는 죽었다가 다시 살아났고 내가 잃었다가 되찾았다. 그러니 즐기고 기뻐해야 한다.“
부모님은 자녀들을 믿고 사랑하는 마음을 어떻게 표현하실까요? 바로 ‘기다림’을 통해서입니다. 여러가지로 부족해도, 수많은 실수와 잘못들로 당신을 걱정시키고 마음을 아프게 해드려도, 결국은 올바른 길을 찾아갈 거라는 믿음으로, 언젠가는 당신 마음을 알아주리라는 기대와 바람으로 묵묵히 바라보시며 기다려주시는 겁니다. 오늘 복음 속 비유에 등장하는 아버지도 아들들을 그렇게 믿고 기다려 주십니다.
먼저 작은 아들에 대한 기다림입니다. 아버지와 함께 사는게 답답하고 불편하여 집을 나가고 싶다고 해도 서운해하지 않으십니다. 나중에 돌아가시면 저에게 주실 유산 조금 일찍 준다 생각하시라는 철 없고 무례한 모습에도 화내지 않으십니다. 이런거 하면 안되고 저런거 조심해야 한다는 충고도 하지 않으십니다. 이제야 자기 맘대로 살 수 있다며 신이 나서 떠나가는 아들의 뒷모습을 지켜보시며, 그가 잘 지내기를 바라고 또 바라십니다. 그 작은 아들이 결국 재산을 탕진하고 거지꼴로 산다는 소식을 들은 뒤로는 그가 죄송스런 마음에 밖에서 방황하지 않기를, 어서 당신 품으로 돌아오기를 애타게 기다리십니다. 그리고 마침내 작은 아들이 저 멀리 보이자 버선발로 마중나가 따뜻하게 안아주시고, 받아 주십니다.
다음으로는 큰 아들에 대한 기다림입니다. 큰 아들은 동생처럼 아버지랑 같이 못살겠다며 집을 뛰쳐나가지는 않았습니다. 그러나 몸만 아버지 곁에 있었을 뿐 마음까지 함께 하지는 못했지요. 아버지 곁에서 큰 은총과 복을 누리고 있었음에도 그것이 얼마나 감사하고 기쁜 것인지를 깨닫지 못했습니다. 아버지 때문에 자기가 하고 싶은 건 참고 하기 싫은 건 억지로 해야한다고 여겨 괴로워했습니다. 자신이 아버지를 위해 그런 희생과 노력을 하니 당연히 그에 합당한 보상을 받아야 한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러나 자기 바람대로 되지 않자 오랜 시간 동안 마음 속으로 아버지를 원망했습니다. 그런데 제 멋대로 살다 돌아온 동생을 탓하고 혼내시기는 커녕 그를 위해 잔치까지 베풀어주시는 아버지의 모습에 서운하고 화가 나서 결국 넘지 말아야 할 선을 넘어 버리지요. ‘난 한 순간도 당신 아들로 산 적 없다’고, 당신과 함께 살아온 시간들이 나에겐 지옥 같았다고... 그러나 청천벽력 같은 그 소리에도 아버지는 그를 탓하거나 혼내지 않으십니다. 그저 언제나 한결같이 그를 향해 있었고 지금 이 순간에도 마찬가지인 당신 사랑을 표현하실 뿐입니다. “얘야, 너는 늘 나와 함께 있고 내 것이 다 네 것이다.”
오늘 비유는 우리를 향한 하느님 아버지의 한 없는 사랑과 자비에 대한 이야기입니다. 그리고 그런 하느님을 향한 참된 신앙이 무엇인지에 대한 가르침이기도 하지요. 참된 신앙은 구원에 대한 보증 때문에 억지로, 심판과 징벌에 대한 두려움으로 어쩔 수 없이 하느님 곁에 머무르는 게 아닙니다. 내가 무슨 잘못을 해도 이해해주시고 용서해주시는, 나 스스로 잘못을 바로잡고 올바른 길로 들어서도록 참고 기다려주시는 하느님을 굳게 믿으며 그분과 함께 살아가는 것입니다. 그런 하느님께서 언제나 우리와 함께 계신다는 것을, 그분을 굳게 믿고 그분께 나 자신을 의탁하면 하느님의 것이 곧 나의 것임을 마음에 깊이 새기고 그분과 함께 하는 일상을 잔치처럼 기쁘게 사는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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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50322. 사순 제 2주간 토요일. 정인준 파트리치오 신부님.
“죄인들을 받아들이고”
예수님 당시에 서민들은 여기저기도 속하지 않아서 소외된 사람들과 다를 바가
없었습니다. 특히 바빌론 유배 당시 이스라엘 정치 종교 지도자들은 바빌론으로
끌려갔습니다.
본토에 남아 있는 사람들은 서민들이었습니다. 그들은 그 땅에 남아 있어도 율법도
성전 전례도 이끌어 갈만한 사람들이 못되었습니다. 그래서 유배에서 돌아온 사람들이
다시 지도급의 사람들이 되었습니다. 그들은 본토에 남아 있던 사람들을 차별하고 무시
하였기에 성전을 재건할 때에도 끼워주지 않고 제외시킬 정도였습니다.
특히 바리사이들과 율법학자들은 세분된 율법을 모른다고 역시 서민을 무시했습니다.
그런데 주님께서는 서민의 편이시었고 그들에게도 댓가를 받았던 바리시아이와
율법학자과는 달리 아무 댓가 없이 그들을 가르치셨습니다.
그러다 보니 자연 가난해서 죄인 취급 받는 사람, 또 세리로서 동포로부터 미움과 무시의
대상이었던 세리들이 주님 주위에 늘 있었습니다. 그래서 오늘 바리사이와 율법학자들은
은근히 주님까지도 무시하는 투로 “저 사람은 죄인들을 받아들이고 또 그들과 함께 음식을
먹는군.”(루카 15,2)라고 투덜거렸습니다.
이들 뿐 아니라 정치적으로 주도권을 쥐고 있는 성전을 중심으로 위세를 부리는
사두 가이파 사람들도 주님과 서민을 깔보기는 마찬가지 였습니다.
그래서 주님께서는 당시 기득권을 갖으며 완전한 자들로 자처하는 사람들에게
‘돌아온 탕자의 비유’를 들어 그들의 교만을 꼬집으며 하느님의 자비에 대해
설명하시는 것입니다.
하느님께서는 그들처럼 사람을 차별하며 냉대하시는 것이 아니라 비록 부족하지만
자신의 죄를 뉘우치는 사람에게 너그러우시고 사랑이 많으신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작은 아들과 같은 가난한 서민들에게 하느님의 자비가 넘치신다는 사실을
일깨워 주시는 것입니다. 바리사이들과 율법학자는 자신이 율법을 조금 안다고 해서
그 위세가 크고 또 사람들 앞에 교만을 떨었던 것입니다.
예언자는 언제나 주님께 성실한 사람이고 주님을 절대적으로 의비하는 사람입니다.
그는 하느님의 자비에 대해 믿음을 가지며 이렇게 기도하는 것입니다.
“당신의 소유인 남은 자들, 그들의 허물을 용서해 주시고, 죄를 못 본 체해 주시는,
당신 같으신 하느님이 어디 있겠습니까?”(미카 7,18)
우리는 자칫 잘못하면 바리사이들처럼 신앙의 삶이 윤리적으로 완전한 상태가 되어야
한다고 조바심 할 수 있습니다. 그래서 남름대로 원칙에 충실해서 때로는 부족한 이웃을
받아들이기보다 날카로운 칼로 비판할 수가 있습니다.
큰 아들의 입장에서 보면 흥청망청 재물을 다 낭비한 작은 자기 동생을 받아들이 기조차
어려운 것입니다. 우리는 우리의 얄팍한 지식이나 가치관으로 내 이웃을 비판할 것이 아니라
아버지의 사랑으로 내 이웃의 부족함이나 죄스러움까지도 포용할 수 있는 넉넉하고
너그러움의 마음을 갖도록 합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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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50322. 사순 제 2주간 토요일. 기경호 프란치스코 신부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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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50322. 사순 제 2주간 토요일. 오상선 바오로 신부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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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50322. 사순 제 2주간 토요일.
조건 없이 낮은 자들과 함께 하는 삶
<2025.3.22> 아침을 여는 묵상 (눅 14:1~14절)
❝조건 없이 낮은 자들과 함께 하는 삶❞
❚ 거저 받은 하나님의 은혜를 조건 없이 이웃들에게 흘려보내는 겸손의 삶을 살아야 합니다.
✔ 낮은 자의 삶이란 어떤 삶입니까?
➲ 생명이 우선시 되는 삶이어야 합니다(1~6절).
안식일에 한 바리새인 지도자의 집으로 예수님은 식사 초대를 받아 들어가셨습니다. 이는 예수님과의 교제를 나누기 위함이 아니라 예수님을 책잡기 위한 수단이었습니다. 그럼에도 예수님은 그들이 보는 앞에서 수종병 환자의 병을 고치셨습니다. ‘수종병’은 몸 여러 부위에 진물이 흐르는 일종의 피부병입니다. 이런 환자가 안식일에 바리새인의 집에서 벌어진 만찬에 참석했다는 것은 매우 이례적입니다. 예수님은 병을 고치신 후에 그들의 위선적인 신앙을 지적하십니다. 유대 종교 지도자들은 예수님이 안식일에 병을 고치시는 일에 대해 실랄하게 비판을 했습니다. 그런데 막상 안식일에 병을 고치는 것이 합당하냐는 질문에 그들은 침묵합니다. 자신의 아들이나 소가 우물에 빠지면 안식일에라도 끌어내지 않겠느냐는 질문에 여전히 그들은 대답하지 못합니다. 법적인 책임은 지지 않겠다는 태도입니다.
‘내가 하면 로맨스이고, 예수님이 하면 죄를 범한 것이다’라는 식의 종교적 위선을 예수님은 지적하셨습니다. 역시나 자신들의 잘못과 거짓이 들통이 날까 봐 그들은 침묵으로 일관합니다. 목회자 모임에서 가끔 신학적인 견해 차이로 인해 논쟁이 벌어질 때가 있습니다. 자기식의 신학 해석과 방법을 절대화하려는 모습 때문에 때로는 감정들이 격해지는 경우도 있습니다. 내 주장을 앞세우기 전에 하나님 앞에서와 사람들 앞에서의 나의 신앙은 어떤지를 먼저 살필 수 있어야 합니다. 예수님의 관심은 율법 학자들이 강조하는 안식일에 관한 법에 있는 것이 아니라 평생을 질병으로 인하여 인간다운 삶을 살지 못하고, 죽은 목숨이나 다름없는 비참한 삶을 살고 있는 수종병 든 그 한 사람의 병자에게 있었습니다. 생명의 논리가 세상의 그 어떤 법보다 우선시 되어야 합니다. 예수님은 법보다는 생명을 중시 여기셨습니다. 주님의 긍휼이 그리고 주님의 사랑이 무엇보다 생명을 우선시하는 가치관이 나를 살리셨습니다. 그러므로 세상의 가치 기준의 잣대로 다른 사람을 평가하지 말고, 주님께서 보여주신 긍휼과 사랑으로 다른 사람을 소중히 여기는 삶을 살아가야 하겠습니다. 생명이 우선시 되는 삶을 통해 낮은 자의 삶을 살아가야 하겠습니다.
➲ 겸손이 생활화 되는 삶이어야 합니다(7~11절).
예수님은 초대받아 온 사람 중에 윗자리를 골라잡아 앉는 사람을 보셨습니다. 예수님은 그들의 행위를 주의 깊게 관찰하시면서 비유로 말씀을 하셨습니다. “혼인 잔치에 초대를 받았다면 처음부터 높은 자리에 앉았다가 그 자리를 내어주는 일이 생긴다면 이는 부끄러운 일이니 아예 처음부터 낮은 자리에 앉으라...” 말씀하십니다(8~10절).. 그때 주인이 높은 자리에 앉으라고 권면하면 영광이 될 것이라고 하십니다. 그러므로 “누구든지 자기를 높이면 낮아질 것이요, 자기를 낮추면 높아질 것....”(11절,새번역)이라고 말씀하십니다.
교만은 패망의 선봉입니다(잠 16:18). 그러므로 선 줄로 생각하는 자는 넘어질까 조심(고전 10:12)해야 합니다. 예수님은 하늘 영광 보좌를 버리시고 스스로 낮은 자리를 택하셨습니다. 그리고 끝까지 섬김과 희생을 통해 본을 보이셨습니다. 또한 인간의 몸을 입으시고 가장 낮아지셨지만, 하나님 아버지는 모든 이름 위에 뛰어난 이름을 주셨습니다. 오만한 자리에 앉지 않아야 합니다. 하나님께 나아가기 위해서 진심으로 회개하는 마음으로 우리 자신을 겸손하게 낮추고 주님의 자비를 구하는 삶이어야 합니다. 무엇보다 작은 공동체라 할지라도 섬김을 받는 자리가 아닌 섬김의 자리에 서 있는 교회가 될 수 있어야 합니다. 그럴 때, 하나님은 영광의 자리로 이끌어 주실 것입니다. 겸손함이 생활화되는 삶을 통해 낮은 자의 삶을 살아가야 하겠습니다.
➲ 대가를 바라지 않는 삶이어야 합니다(12~14절).
잔치를 베풀 때는 벗이나 형제나 친척이나 부유한 이웃들을 초대하지 말라고 하십니다. 왜냐하면 그들은 베푼 은혜를 되갚을 수 있는 사람들이기 때문(12절)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잔치를 베풀거든 차라리 가난한 자들과 몸 불편한 자들과 저는 자들과 맹인들을 청하라고 말씀하십니다. 왜냐하면 그들은 갚을 능력이 없는 사람들이기 때문입니다. ‘...그리하면 그들이 갚은 것이 없으므로 네게 복이 되리라...’ 그 복은 ‘...부활시에 네가 갚음을 받겠...’(14절)되는 복입니다. 경제적으로나 신체적으로 무능력한 사람들을 잔치에 초대한다는 것은 당연히 손해를 보는 것입니다. 그러나 그러한 자들을 초대함으로써 결국에는 하나님의 초대를 받게 될 것입니다. 부활 시에 하나님의 보상이 있을 것입니다.
하나님은 높은 곳에 계신 독생자를 낮은 이 땅으로 그 은혜를 흘려보내셨습니다. 마찬가지로 진정한 사랑은, 그리고 은혜는 높은 곳에서 낮은 곳으로 흘려 내려가야 합니다. 주님은 결코 고인 물처럼 제자리에서만 그 사랑과 은혜가 돌기를 원치 않으십니다. 반사 이익이나 대가를 바라고 행한 행동은 결코 선행이 될 수 없습니다. 내가 받은 만큼 다시금 그 은혜와 사랑을 이웃들에게 나누는 삶이 그리스도를 닮은 제자의 삶을 살아가는 것입니다. 이 땅에서 사람들에게 이미 보상을 받은 자는 마지막 날에 하나님께 받을 것이 없다(벧전 5:4)는 말씀을 기억해야 합니다. 진정한 복은 세상이 주는 복이 아니라 하나님께로부터 주어지는 복입니다. 그러므로 대가를 바라지 않는 믿음의 삶을 통해 낮은 자의 삶을 살아가야 하겠습니다.
오늘도 가장 낮은 자가 되셔서 하나님께 가장 큰 영광을 돌리셨던 예수님의 겸손하심을 본받아 삶으로 살아낼 뿐 아니라 마땅히 대접을 받을 자격이 있다는 교만을 버리고 하나님과 사람들 앞에서 먼저 낮아지는 작은 예수의 삶을 살아갈 수 있기를(눅 14:1~14절)...
행복의 시작 예수 그리스도!!!
빛이 있으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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