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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3. 4. 7. 큐티
창세기 50:1 ~ 26
야곱의 장례와 50.20
관찰 :
1) 야곱의 장례
- 1절. “요셉이 그의 아버지 얼굴에 구푸려 울며 입맞추고” => 요셉은 아버지 야곱의 죽음에 깊은 슬픔을 표현했습니다. 아버지의 인생에 지울 수 없는 가장 큰 슬픔과 고통이 요셉의 실종이었습니다. 그리고 가장 큰 기쁨이 요셉과의 재회였습니다. 이러한 사정을 요셉 자신도 잘 알기에 아버지의 죽음에 대해서 애절한 슬픔을 느끼게 되었습니다. 사람이 죽는 것은 어쩔 수 없는 것이고, 야곱의 나이가 많아서 죽는 것은 당연한 결과였지만 요셉은 깊은 슬픔을 표현했습니다.
- 2절. “그 수종 드는 의원에게 명하여 아버지의 몸을 향으로 처리하게 하매 의원이 이스라엘에게 그대로 하되” => 요셉은 야곱을 애굽의 방식으로 미이라를 만드는 과정을 행하게 했습니다. 이후에 막벨라 굴까지 아버지의 시신을 옮기는 과정에서의 부패를 막기 위함이었습니다.
- 3절. “사십 일이 걸렸으니 향으로 처리하는 데는 이 날수가 걸림이며 애굽 사람들은 칠십 일 동안 그를 위하여 곡하였더라” => 야곱의 시신을 미이라로 처리하는 과정은 애굽의 왕들을 미이라로 만드는 과정과 거의 동일한 수준으로 진행했습니다. 사십 일이 걸리는 미이라 작업의 과정은 세밀하게 내장을 빼내고, 시신의 물기를 제거하고, 유향과 몰약 등으로 시신을 처리하는 모든 과정을 거쳤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그리고 칠십 일의 시간을 곡하며 애도하는 시간으로 가졌다는 것은 거의 국장에 준하는 수준의 장례 절차를 진행했다는 것을 알게 됩니다. 애굽에서의 요셉의 위상을 새삼 엿보게 되는 장면입니다.
- 4절. “곡하는 기한이 지나매 요셉이 바로의 궁에 말하여 이르되 내가 너희에게 은혜를 입었으면 원하건대 바로의 귀에 아뢰기를” => 요셉의 아버지 야곱에 대한 장례가 거의 바로의 장례에 준하게 치러졌지만, 그것으로 인해서 요셉이 문제를 겪지 않았습니다. 그것은 요셉의 위치가 바로에 준하는 상황이었음을 알게 되는 것입니다. 그리고 아버지의 시신을 가나안에 가서 장사하는 것에 대해서 바로의 허락을 받고자 합니다.
- 5절. “우리 아버지가 나로 맹세하게 하여 이르되 내가 죽거든 가나안 땅에 내가 파 놓은 묘실에 나를 장사하라 하였나니 나로 올라가서 아버지를 장사하게 하소서 내가 다시 오리이다 하라 하였더니” => 요셉이 가나안에 다녀오는 것은 사실 몹시 중대한 일이었습니다. 바로에게 있어서 신의 대리자로 여겨지는 요셉이었고, 애굽의 명실공히 바로 다음의 실력자로, 실질적인 통치를 하고 있던 존재가 나라 밖에 나갔다 온다는 것은 중대한 일이었기 때문입니다. 요셉은 바로에게 자신이 아버지의 장례를 마치고 다시 돌아오겠다 말하고 있습니다. 요셉이라는 존재의 전력은 애굽에서 없어서는 안되는 존재였기에 아버지의 장례를 핑계로 애굽을 떠나게 되면, 국가적 손실이라는 인식이 있었다는 것을 알게 됩니다.
- 6절. “바로가 이르되 그가 네게 시킨 맹세대로 올라가서 네 아버지를 장사하라” => 바로는 요셉이 요청한 바에 대해서 허락하고 있습니다. 요셉을 신뢰하고 있었고, 요셉의 위치와 역량이 얼마나 중요했던 것인가를 확인하게 됩니다.
- 7절. “요셉이 자기 아버지를 장사하러 올라가니 바로의 모든 신하와 바로 궁의 원로들과 애굽 땅의 모든 원로와” => 요셉은 아버지 야곱의 장례를 위해서 가나안에 다녀오고자 합니다. 이에 바로의 모든 신하와 바로 궁의 원로들과 애굽 땅의 모든 원로가 요셉의 장례 일행에 동참해서 이동하게 됩니다. 거의 바로의 장례와 방불한 규모의 장례가 치러졌다는 것을 알게 됩니다.
- 8절. “요셉의 온 집과 그의 형제들과 그의 아버지의 집이 그와 함께 올라가고 그들의 어린 아이들과 양 떼와 소 떼만 고센 땅에 남겼으며” => 이스라엘 집안의 어린 아이들과 양 떼와 소 떼 외에는 모든 이들이 가나안 막벨라 굴에 가서 야곱의 장례를 치렀다는 것을 말하고 있습니다. 이것은 출애굽이 아니었음을 의미합니다.
- 9절. “병거와 기병이 요셉을 따라 올라가니 그 떼가 심히 컸더라” => 야곱의 장례에는 병거와 기병이 따랐습니다. 혹시라도 있을 수 있는 불미스러운 마적이나 도적 떼의 공격을 방비하고자 한 것입니다. 또한 가나안의 종족들이 이 장례 행렬에 대해서 불필요한 물리적 행사가 없도록 조치가 취해진 것입니다. 매우 큰 무리가 애굽에서 가나안의 막벨라 굴로 가게 되었습니다.
- 10절. “그들이 요단 강 건너편 아닷 타작 마당에 이르러 거기서 크게 울고 애통하며 요셉이 아버지를 위하여 칠일 동안 애곡하였더니” => 큰 무리의 애굽 사람들이 아닷이라는 사람의 타작 마당에서 7일 동안 머물며 애곡하는 시간을 가졌습니다. 이 아닥의 타작 마당은 애굽에서 온 큰 무리가 7일을 머물며 애곡할만한 장소였습니다. 막벨라 굴은 그렇게 넓은 장소가 아니었기에 이곳에서 장례의 애곡하는 절차를 치른 것입니다. 이들을 바라보는 가나안 사람들에게 있어서 애굽 사람들이 대거 몰려와서 장례를 치르는 이 상황이 일반적일 수 없었을 것입니다.
- 11절. “그 땅 거민 가나안 백성들이 아닷 마당의 애통을 보고 이르되 이는 애굽 사람의 큰 애통이라 하였으므로 그 땅 이름을 아벨미스라임이라 하였으니 곧 요단 강 건너편이더라” => 가나안 거민들은 애굽에서 몰려온 이들의 큰 애통에 대해서 기묘하게 여겼습니다. 그리고 그 큰 애통이 있었던 땅의 이름을 “아벨미스라임” 즉 “애굽인의 애통”이라고 불렀습니다. 그들에게 있어서 히브리인이 와서 장례를 치렀다기 보다는 애굽의 높은 사람의 장례가 치러진 것으로 여겨졌던 것입니다.
- 12절. “야곱의 아들들이 아버지가 그들에게 명령한 대로 그를 위해 따라 행하여” => 야곱은 아들들에게 자신을 애굽이 아닌 가나안의 막벨라 굴에 장사를 지낼 것을 언약하게 했습니다. 그렇기에 야곱의 아들들은 아버지 야곱의 유언을 따르게 됩니다.
- 13절. “그를 가나안 땅으로 메어다가 마므레 앞 막벨라 밭 굴에 장사하였으니 이는 아브라함이 헷 족속 에브론에게 밭과 함께 사서 매장지를 삼은 곳이더라” => 하나님이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에게 가나안을 주시기로 언약했습니다. 하지만 이 때까지 실질적으로 소유하고 있던 곳은 이곳 막벨라 밭 뿐이었습니다. 이곳에 야곱이 장사되는 것은 하나님의 언약을 되새기는 것이었고, 이스라엘이 돌아와야 할 곳이 바로 가나안 땅이라는 것을 의미하는 것이었습니다.
- 14절. “요셉이 아버지를 장사한 후에 자기 형제와 호상꾼과 함께 애굽으로 돌아왔더라” => 요셉과 형제들은 야곱의 장례를 어마어마한 규모로 마치고 애굽으로 돌아왔습니다. 성경에 나오는 모든 장례 중에 가장 성대하게 치러진 장례였습니다.
2) 구속사적 관점 50.20
- 15절. “요셉의 형제들이 그들의 아버지가 죽었음을 보고 말하되 요셉이 혹시 우리를 미워하여 우리가 그에게 행한 모든 악을 다 갚지나 아니할까 하고” => 아버지 야곱이 죽고, 장례까지 다 끝났습니다. 그러고 나서 요셉의 형제들에게는 현타(현실 직시 타임)가 왔습니다. 요셉의 권세는 애굽에서 바로와 방불한 것이었습니다. 그렇기에 요셉이 앙심을 품고 있다면 자신들과 자식들은 모두 다 죽는 수밖에 없다는 결론이 나오는 것은 당연한 것이었습니다. 그래서 두려웠습니다.
- 16절. “요셉에게 말을 전하여 이르되 당신의 아버지가 돌아가시기 전에 명령하여 이르시기를” => 요셉의 형들은 요셉에게 아버지의 당부를 기억하기를 원했습니다.
- 17절. “너희는 이같이 요셉에게 이르라 네 형들이 네게 악을 행하였을지라도 이제 바라거대 그들의 허물과 죄를 용서하라 하셨나니 당신 아버지의 하나님의 종들인 우리 죄를 이제 용서하소서 하매 요셉이 그들이 그에게 하는 말을 들을 때에 울었더라” => 요셉의 형들은 요셉이 아버지의 명을 따라서 자신들을 용서해 달라고 빌었습니다. 요셉의 형들은 요셉에게 자신들이 요셉의 종이라고 까지 표현하고 있습니다. 그러한 형들의 고백에 대해서 요셉 역시 가슴이 아렸습니다. 눈물이 났습니다. 그들 사이에 있었던 아프고 고통스러웠던 과거가 잊혀진 것은 아니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또한 하나님의 은혜를 통해 그 문제가 해석되지 못하고 있다는 것으로 인한 슬픔도 올라왔기 때문이었을 것입니다.
- 18절. “그의 형들이 또 친히 와서 요셉의 앞에 엎드려 이르되 우리는 당신의 종들이니이다” => 요셉의 형들은 아버지의 유언을 통해서 자신들을 용서해 달라고 고별을 한 것뿐만이 아니라 직접 찾아왔습니다. 그리고 엎드려 절하며 자신들이 요셉의 종들이라고 고백하며 용서를 구했습니다.
- 19절. “요셉이 그들에게 이르되 두려워하지 마소서 내가 하나님을 대신하리이까” => 요셉은 형들에게 두려워하지 말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하나님이 이스라엘을 선택하셨고, 자신들에게 있었던 모든 일들이 하나님의 섭리였다는 전제로 요셉은 형들에게 이야기하고 있습니다.
- 20절. “당신들은 나를 해하려 하였으나 하나님은 그것을 선으로 바꾸사 오늘과 같이 많은 백성의 생명을 구원하게 하시려 하셨나니” => 요셉은 놀라운 고백을 하고 있습니다. 요셉의 형들은 분명히 자신을 해하려 했다는 것을 분명히 말하고 있습니다. 그것을 무시하거나 없던 것으로 말하고 있지 않습니다. 그 사실은 변하지 않는다는 것을 말하고 있습니다. 하지만 하나님께서 그들의 악한 의도를 선으로 바꾸셨다는 것입니다. 그것이 중요합니다. 하나님께서 구속을 위한 방편으로 요셉의 형들의 악한 의도를 바꾸셔서 좋은 결과가 나오게 하셨다는 것입니다. 그 결과 많은 백성의 생명을 구원하게 되었습니다. 애굽과 근동 지방의 많은 사람들이 요셉이 준비한 7년 풍년, 7년 흉년 프로젝트로 인해서 살게 되었습니다. 무엇보다 이스라엘의 모든 족속들이 가나안에서 굶어 죽을 수도 있었던 상황에서 그들이 애굽으로 들어와 무사하게 전 세계적 위기를 피할 수 있었습니다. 이 모든 것이 하나님의 섭리라는 것입니다. 그것을 요셉이 말하고 있습니다. 이것은 구속사적 여정을 통과해 온 요셉의 믿음입니다. 이것은 또한 축복의 여정을 걸어온 야곱으로 말미암아 드러나게 된 은혜이기도 했습니다.
- 21절. “당신들은 두려워하지 마소서 내가 당신들과 당신들의 자녀를 기르리이다 하고 그들을 간곡한 말로 위로하였더라” => 요셉은 구속사적 관점으로 자신과 형들 사이에 있었던 문제를 이해했습니다. 그렇게 하고 나니 원망도 복수심도 없어지게 된 것입니다. 모든 것이 하나님이 선하게 결과를 가져오게 하셨으니 그 과정이 고통스럽고 힘들었지만 하나님께 감사를 돌리는 일이 되었다는 것입니다. 요셉은 형들과 형들의 자녀들을 요셉이 책임지고 보호하겠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이것은 요셉의 진심이었고, 이후에 요셉의 형들은 다시 이 문제로 요셉을 찾아오지 않았을 것입니다. 또한 요셉의 형들도 요셉이 경험한 구속사적 여정에 대한 이해를 갖게 되고,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의 후손으로 하나님의 선민인 이스라엘이 되는 중요한 과정을 함께 통과하게 되었습니다.
3) 요셉의 죽음
- 22절. “요셉이 그의 아버지의 가족과 함께 애굽에 거주하여 백십 세를 살며” => 요셉이 30에 애굽의 총리가 되었고, 39세에 가나안에 있던 가족을 애굽으로 데려왔습니다. 그리고 71년을 형제들의 가족과 함께 애굽에서 지냈습니다. 요셉은 애굽을 떠나 가나안으로 돌아갈 것을 오매불망 기대한 사람이었습니다. 하지만 하나님은 요셉의 생전에 가나안으로 돌아가게 하지 않으셨습니다. 때가 이르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요셉은 그것을 알았기에 자신의 권력으로 이스라엘을 가나안으로 돌아가게 하지 않았습니다. 그리고 애굽에서 눈을 감게 되었습니다.
- 23절. “에브라임의 자손 삼대를 보았으며 므낫세의 아들 마길의 아들들도 요셉의 슬하에서 양육되었더라” => 요셉은 자손 삼대를 보았고, 맏아들 므낫세의 손자도 직접 양육할 수 있었습니다. 요셉이 자손을 양육하는 것은 애굽의 교육 방식이 아니라 하나님의 구속사적 관점으로 양육했을 것이라는 것은 자명한 일일 것입니다.
- 24절. “요셉이 그의 형제들에게 이르되 나는 죽을 것이나 하나님이 당신들을 돌보시고 당신들을 이 땅에서 인도하여 내사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에게 맹세하신 땅에 이르게 하시라라 하고” => 요셉은 죽음을 맞이하면서 자신이 죽더라도 가나안 땅으로 갈 것을 소망하고 있었습니다. 즉, 후손들은 하나님께서 반드시 가나안 땅으로 인도하실 것인데, 그 때가 언제가 되던지 자신도 가나안 땅으로 가서 매장해 줄 것을 신신당부한 것입니다. 아버지 야곱의 믿음을 잇는 요셉의 믿음이었습니다.
- 25절. “요셉이 또 이스라엘 자손에게 맹세시켜 이르기를 하나님이 반드시 당신들을 돌보시리니 당신들은 여기서 내 해골을 메고 올라가겠다 하라 하였더라” => 요셉은 이스라엘 자손의 대표들, 장로들을 불러 모아 자신과 맹세하게 했습니다. 자신이 죽으면, 자신을 미이라로 만들어서 장차 하나님이 가나안 땅으로 인도하실 때, 자신도 그곳으로 옮겨 매장해 달라는 것이었습니다.
- 26절. “요셉이 백십 세에 죽으매 그들이 그의 몸에 향 재료를 넣고 애굽에서 입관하였더라” => 요셉은 110세에 죽었습니다. 요셉은 자신의 죽음을 미리 준비했습니다. 아버지처럼 성대한 장례를 치르지 않았습니다. 하지만 약속의 땅 가나안으로 들어갈 소망을 품고 자신을 미이라로 만들도록 모든 준비를 갖추게 했습니다. 그리고 애굽에서 매장한 것이 아니라 입관하고 장차 가나안으로 갈 그날을 소망했습니다. 이렇게 요셉의 소망을 품고 창세기는 마무리 되었습니다.
가르침 :
1) 야곱의 장례는 몹시 성대했습니다. 마치 바로의 장례와 방불했습니다. 가나안으로 가서 막벨라 굴에 장례를 치르며 많은 이들이 애곡했습니다. 특별히 요셉의 애곡은 깊은 울림이 있었습니다. 이 모든 과정에서 하나님의 섭리를 깨달았고, 하나님 나라에 대한 더욱 큰 소망을 품게 되었습니다. 이것이 요셉이 죽을 때 자신도 가나안 땅에 매장될 것을 소망하며 자신을 미이라로 만들게 한 이유가 되었습니다. 향후에 요셉의 해골, 즉 미이라는 출애굽 하며 같이 떠나게 됩니다. 광야에서의 시간을 함께 보내고 가나안을 정복하며 그곳에서 매장이 됩니다.
2) 여호수아 24:32 “또 이스라엘 자손이 애굽에서 가져 온 요셉의 뼈를 세겜에 장사하였으니 이곳은 야곱이 백 크시타를 주고 세겜의 아버지 하몰의 자손들에게서 산 밭이라 그것이 요셉 자손의 기업이 되었더라” 야곱은 요셉에게 세겜 땅을 유언으로 주었습니다. 그리고 그것이 수 백년의 시간이 흘렀을지라도 온전히 성취되었습니다. 요셉은 아버지의 믿음을 이어 가나안 땅에 대한 소망을 품었고, 그것이 하나님의 섭리에 의해서 성취된 것입니다.
3) 요셉은 구속사적 관점을 소유했습니다. 창세기 50:20 “당신들은 나를 해하려 하였으나 하나님은 그것을 선으로 바꾸사 오늘과 같이 많은 백성의 생명을 구원하게 하시려 하셨나니” 이것이 요셉의 믿음을 가장 극명하게 드러내는 구절입니다. 요셉은 세상의 모든 일을 바라보는 시력을 50.20으로 본 것입니다. 이로 인해서 요셉의 형들이 가진 죄의식을 풀어줄 수 있었고, 자신의 인생의 모든 문제를 해결하는 관점을 소유했던 것입니다. 요셉의 신앙은 형들에게도 이어지게 되었고, 후손들에게도 전달되었습니다. 새로운 민족들이 애굽을 점령하고 요셉을 알지 못하는 바로가 세워져 히브리인들이 애굽의 노예가 되어 고통스러운 노예 생활이 이어졌지만, 그들이 하나님을 바라보고 구속사적 관점으로 애굽을 떠날 날을 소망할 수 있게 된 중요한 믿음의 관점이 이어지게 된 것입니다.
4) 하나님은 믿음의 조상 아브라함의 믿음의 여정을 인도하셨습니다. 그리고 이삭의 순종의 여정을 인도하셨습니다. 또한 야곱의 축복의 여정도 인도하셨습니다. 그리고 요셉의 구속사적 여정을 끝으로 족장들의 믿음의 스테이지를 마무리 하셨습니다. 요셉의 미이라가 가나안으로의 회귀를 소망하는 것으로 창세기는 마무리 되었습니다. 하나님이 보시기에 믿음, 순종, 축복, 구속사적 관점으로의 믿음이 성장하는 것이 개인의 믿음의 전체 구조가 되기를 원하신 것으로 여겨집니다. 오늘날 예수 그리스도를 믿고 믿음의 여정이 시작되어 순종과 축복, 그리고 구속사적 하나님의 인도하심을 깨닫게 되는 과정을 걷게 되는 모든 것이 참으로 은혜요 넘치는 축복임을 고백하게 됩니다.
적용 :
1) 야곱의 죽음과 매장은 후손들에게 가나안으로 돌아가는 것에 대한 소망을 품게 했습니다. 가장 중요하게 요셉이 그러한 믿음을 잇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자신을 미이라로 만들어서 그 땅으로 돌아갈 것을 소망했고, 후손들에게 맹세까지 하게 한 것입니다. 그리고 향후 모세가 요셉의 미이라를 챙겨서 길을 떠났고, 므낫게 족속에게 세겜 땅이 배정되며, 여호수아가 요셉 족속을 통해서 요셉의 매장을 세겜 땅에 하게 하는 것으로 이어지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창세기는 엄밀하게 여호수아 끝까지 이어지게 됩니다. 하나님의 섭리와 역사가 얼마나 놀라운가를 다시금 깨닫게 됩니다. 이 땅에서 우연은 없고, 하나님의 섭리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일이 진행됨을 고백합니다. 그래서 하나님을 찬양합니다.
2) 구속사적 관점. 이것이 창세기를 통해서 하나님이 기대하신 믿음의 가문의 정점이었습니다. 아브라함의 믿음의 여정, 이삭의 순종의 여정, 야곱의 축복의 여정이 요셉의 구속사적 여정으로 화룡점정을 이루게 되었습니다. 제 개인의 믿음의 여정 역시 믿음 - 순종 - 축복 - 구속사적 관점으로 연결되고 풍성하게 채워지기를 소망합니다. 제 눈의 시력이 창세기 50장 20절로 5.0과 2.0이 되기를 갈망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