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그 석바위 언덕이 기회의 땅이었는데
기회는 새벽이 오듯이 소리새도 없이 온다.
그른 기회가 눈앞에까지 와도 대부분의 사람은 낌새도 못 차리고 놓치고 만다. 기회가 가까이 다가왔을 때 알아차리고 동분서주해도 이미 흐르는 물처럼 흘러가 버린다. 어느 순간에 왔다가 긴 시간 기다려주지 않는 것이 기회다. 그래서 소는 뒤에서 붙잡아야 하고 기회는 앞에서 붙잡아야 한다고 한다. 소를 뒤에서 잡아야 하는 이유는 소머리에 날카로운 뿔이 있기 때문이고, 기회를 앞에서 잡아야 하는 이유는 기회의 뒤에는 잡을 꼬리가 없기 때문이다. 기회가 동구 밖에서 서성이기만 해도 눈치 빠르게 알아차리고 맞이할 멍석을 펴는 사람이 있다. 언제 올지 모를 기회를 맞이하기 위해 언제나 멍석을 준비해 놓고 동구 밖을 항상 주시하고 있던 사람이다. 준비된 사람만이 오는 기회를 놓치지 않고 잡을 수 있다.
소리새도 없이 오는 기회는 누구에게나 평생에 세 번은 찾아온다고 한다.
나에게도 그것이 기회였는지 아닌지는 모르겠으나 한두 번은 찾아왔던 것 같다.
1970년 대학 다닐 때다. 둘째 누님이 대구 신암동에 살고 계셨는데 누님댁에는 내가 기거할 방이 없어 근처에 조그만 방을 구해놓고 식사는 누님댁에서 했다. 신암동에서 대명동 학교까지 버스로 다녔다. 같은 동아리에서 활동했던 동기생 중에 신천동에 사는 친구가 있었다. 신암동과 신천동은 이웃하고 있어 수업이 끝나고 돌아올 때는 같은 버스로 다니곤 했다. 어느 날 친구의 제안으로 최근에 건설된 동대구역 구경을 같다. 동대구역이 있는 곳은 당시로는 시내를 벗어난 변두리였다.
동대구역은 산업화의 거센 물결 따라 대구시의 인구증가로 대구역이 협소하여 확장이 필요했고, 현대화 도시계획에 따라 1966년 7월 착공하여 1969년 6월 보통 역으로 영업을 시작했다. 최신 역사라 기존 역사와 차원이 달라 구경거리가 되었다. 뿐만아니라 역 앞으로 시원하게 뚫린 동대구로도 구경거리로 한몫을 했다. 동대구로는 파티마병원에서 범어네거리 쪽으로 왕복 8차선에 중앙분리대와 양쪽 녹지대에 전나무가 가로등처럼 줄지어 심어져 있었다. 그때는 가로수는 플라다나스나 이태리 포풀러가 주종이었는데 전나무 가로수는 색다른 볼거리를 제공해주었다. 특히 야간이며 기존의 전신주에 매달려 있는 가로등이 아니라 고개가 구부러진 가로등이 줄지어 불을 밝히면 낭만적이기도 했다. 그래서 동대구 신역사와 함께 많은 사람이 한 번쯤은 구경하려 가는 명소가 되었고, 데이트족이 많이 찾아오는 코스이기도 했다. 동대구역 주변에는 아직 계발되지 않아 석바위 언덕에 군데군데 채전밭을 일구어 푸성귀를 가꾸거나 척박한 땅에도 잘 자라는 피마자나 호박 등을 심었다. 주위에는 파티마 병원과 지금의 메트로시티 단지에 국군 통합병원만 있었을 뿐 황무지와 같은 버려진 땅이었다. 동대구로를 따라 서쪽 언덕(지금 국민건강증진센터가 있는 곳)에는 피난민들이 정착한 판자촌이 형성되어 있었다. 친구의 집도 그 판자촌에 있었다. 동대구역을 구경하고 친구 집에 들렀다. 친구의 부친께서 길 건너 저 석바위 언덕(구 귀빈예식장과 동부정류장이 있던 곳) 쪽에 땅을 매입해두면 머지않아 몇 배나 올라갈 것이라고 하셨다. 그러면서 부모님께 잘 말씀드려서 시골에 농사짓는 땅 중에 한 마지기 정도 팔아서 살 것을 권유하셨다. 세상 물정 모르는 내가 생각해 보아도 계발이 되어 투자 가치가 있을 것 같았다. 그 당시 시골의 논밭은 평당 300원 정도였는데 이곳은 100원 정도였다. 논 한 마지기(200평)만 팔면 600평을 살 수 있었다. 주말이 되어 고향에 내려가 조심스럽게 부모님께 말씀드렸더니 단번에 반대하셨다. 내가 생각해 보아도 넉넉하지 않은 농토가 대가족의 생명줄과 같은데 단 몇 평이라도 줄일 수는 없었다. 설마 조금의 농토를 팔아 그 황무지 같은 석바위 언덕을 사 둔다 해도 땅값이 올라간다는 것을 장담할 수는 없었다.
대학을 졸업하고 15년 후인 85년에 아이들의 학업과 전근 다녀야 하는 나의 근무지 등을 고려하여 대구에 집을 마련했다. 그 석바위 언덕 넘어 동구시장 쪽 효목2동에 대지 50평의 반 양옥집을 2천5백만 원 정도에 샀다. 15년 전에는 황무지 같던 곳이 도시로 변모해 있었다. 더구나 평당 300원 하던 시골 땅은 3만 원도 채 되지 않는데 100원 하던 땅이 45만 원대로 올라 있었다. 만약에 그때 조금만이라도 여유가 있어서 한 마지기(200평)만 대토하여 투자했더라면 우리집과 같은 집 네 채를 살 수 있었다. 그때는 학생인 나에게 주어진 기회도 아닐뿐더러 부모님도 기회를 잡을 여력이 없었다. 그 때가 기회였는지는 모르겠으나 준비되지 않은 기회라 붙잡지 못했다.
그런데 나에게는 기회가 눈앞에 찾아왔는데도 잡지 못하고 흘려보낸 일이 있다. 바로 그곳 석바위 언덕에서 찾아왔다.
1990년이었다. 그 때는 한창 건축 바람이 불 때였다. 또 약간의 금전적 여유가 있어, 반약옥 집은 여름에는 덥고 겨울에는 추워서 살던 집을 철거하고 2층 양옥집으로 다시 지었다. 8m 도로변이라 1층에는 작은 점포 3칸을 넣고 2층에는 내가 살 집으로 지었다. 90년 10월 완공하여 입주하였는데 이듬해 봄쯤 어느 날 퇴근하니 부동산소개소에서 찾아왔다. 우리 집을 사고 싶어 하는 구매자가 있는데 매도하면 어떻겠냐는 것이었다. 매수자는 가계가 꼭 필요 하서 사려고 하니 가격은 시세보다 더 높은 2억 3천만 원 정도 받아주겠다고 했다. 그 당시 아파트가 여기저기에서 생겨 날 때인데 수성구 지산동의 33평 아파트 가격이 7∼8천만 원 정도였으니까 세 채를 살 수 있는 가격이었다. 건축에 대해서는 조금의 지식도 없어 감독자를 고용하여 직접 건축자재를 공급하면서 고생해서 지은 집이라 당장은 팔고 싶지 않았다. 직접 집을 지어본 사람들은 알겠지만 한번 지어본 사람은 평생에 다시는 집을 직접 짓지 않는다고 한다. 그만큼 힘이 들고 어렵다는 것이다.
당시에는 아파트보다 단독주택을 선호했다.
그런데 세월이 흘러갈수록 아파트를 선호하는 추세로 바뀌어 단독주택의 인기는 날로 하향곡선을 그려갔다. 지금 팔면 변두리 33평 아파트 한 채도 살 수 없을 것 같다. 가격은 고사하고 사려고 하는 사람이 없다. 4년전 아파트로 이사 오면서 그 집은 세를 놓고 있다.
지금 생각해보면 90년 그때가 기회 였던 것이다. 만약 그때 기회를 대동하고 왔던 중개사의 말을 들었더라면 지금은 좀 더 여유로운 생활을 할 수 있을 것이라고 생각하니 아쉬움이 남는다.
물론 돈이 행복을 가져다주지는 않지만, 행복에 기여한다는 사실만은 부인할 수 없다.
우물 안 개구리같이 학교라는 울타리 안에서만 살다 보니 사회의 흐름을 손톱만큼도 알지 못해 기회가 저절로 찾아왔는데도 잡지 못한 것이 당연한 것인지도 모르겠다. 그러나 조금만 더 시선을 밖으로 돌려 앞을 내다보는 안목을 가졌더라면 하는 후회도 된다.
대학 시절 우연히 내 앞에 나타났던 그 석바위 언덕은 기회의 땅이자 아쉬움만 남게 하는 땅이 되고 말았다.
그러나 평생에 기회가 세 번은 온다는데 그 석바위 언덕이 또 언제 어떤 모습으로 기회의 땅이 되어내 앞에 나타날지 어떻게 알겠나. 기회가 오는 골목길에 서성이다 이번에는 놓치지 말고 붙잡아야 겠다.
첫댓글 기회는 앞에서 소는 뒤에서 잡아야 하는 이치 잘 알았습니다, 그리고 준비된 사람만이 기회를 놓치지 않고 잡을 수 있지만 그 기회란 것이 눈앞에 있어도 알아차리지 못하는 게 또한 사람인 것 같습니다. 지금 나의 기회는 건강과 화목으로 여기고 살고 있습니다. 잘읽었습니다.
저도 이재에 소질이 없어서 항상 잔소리를 듣고 있습니다. 기회를 잡기는 어렵습니다.
좋은 기회를 놓치셨군요, 글을 읽으며 저 역시 안타까운 마음 입니다. 부자가 되는 길만이 기회는 아닙니다. 현실에 만족하고 여유로운 마음으로 살아 갈수 있는것 또한 잘 잡은 기회라는 생각을 해 봅니다. 지금도 늦지 않았으니, 집앞에 커다란 멍석을 펴고 기다리면 또 다시 찾아올 날이 있지 않을까 합니다. 애석한 글 잘 읽었습니다.
기회는 언제나 내 주위에서 돌아다닌듯 하면서도 잡기가 참 힘들더랍니다.어떨때는 바쁘게 설쳐보아도 가만히 둔것만 못 할때도 있더랍니다. 그래서 지금은 편안하게 가만히 있습니다.몸건강하고 연금으로 먹고 살수있다는 힘이 나를 든든하게 해주는 걸 복이라 생각하고 현상유지에 만족합니다.
기회는 항상 누구에게나 다가오고 있으며. 다만 쉽게 잡지를 못할 뿐이랍니다. 감사합니다. 최상순드림
지나고 보면 그때가 기회였다는 생각이 드는데.. 그 당시는 모르고 지나는 것이 대부분이지요.. 정직하고 성실한 재테크를 나름대로 해 오셨다는 생각이 듭니다. 잘 읽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