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地圖(지도)에도 잘 나오지 않는 섬, 낚시꾼들에겐 天國(천국) [韓國(한국)의 섬 32] 莞島權(완도권) 最南端(최남단)의 麗瑞島(여서도)]
大陸(대륙)의 끝 그 너머에 바다가 있고 그 바다 위에는 섬이 있다. 韓半島(한반도)의 南西(남서)쪽 끝자락, '섬의 바다' 多島海(다도해)에서도 安郡(신안군)(有人島(유인도) 73個(개), 無人島(무인도) 754個(개)) 다음으로 섬이 많은 곳. 바로 완도(莞島)다.
265個(개) 섬들 中(중) 55個(개) 섬에는 사람이 살고 나머지는 人跡(인적)이 없는 無人島(무인도)다. 莞島(완도)는 前(전)에는 뱃길을 따라 가야 했는데 이제 大橋(대교) 하나만 건너면 쉽게 陸地(육지)에서 닿을 수 있다. 莞島邑(완도읍)을 지나 淸海鎭(청해진)에 닿으면 海上王(해상왕) 張保皐(장보고)의 痕迹(흔적)들도 찾아볼 수 있다. '漁父四時詞(어부사시사)'로 有名(유명)한 尹善道(윤선도)의 遺蹟地(유적지) 甫吉島(보길도)와 Asia(아시아) 最初(최초)로 Slow City(슬로우 시티)로 指定(지정)된 靑山島(청산도)까지 莞島(완도)에는 볼거리가 넘쳐난다.
특히 莞島(완도) 船着場(선착장)에서 배로 3時間(시간) 정도 거리인 莞島(완도) 最南端(최남단)의 섬 麗瑞島(여서도)는 하루에 배가 한 번밖에 닿지 않는 自然(자연)의 風光(풍광)을 그대로 지닌 섬이다. 긴 歲月(세월) 거친 바닷바람에 맞서기 위해 담의 높이가 지붕의 처마까지 닿는 이곳은 大自然(대자연) 속에서 이어온 人間(인간)의 끈질긴 삶의 痕迹(흔적)들이 곳곳에 흩어져 있다.무엇보다 물이 不足(부족)한 보통 섬과 달리 이곳 麗瑞島(여서도)에는 7年(년) 가뭄에도 마르지 않은 샘이 아직도 파랗게 솟아나고 있다.
그래서 이곳 住民(주민)들은 섬 밖에서 들여오는 술은 거의 입에 대지 않는다. 섬에서 나는 물맛이 워낙 좋아 집에서 直接(직접) 누룩을 띄워 진한 農酒(농주)를 마시기를 즐긴다. 올해 麗瑞島(여서도)에 하나밖에 없던 初等學校(초등학교) 分校(분교)가 門(문)을 닫았다. 이 섬의 有一(유일)한 學生(학생)이었던 주훈이가 中學生(중학생)이 돼 莞島(완도) 본섬으로 留學(유학)을 떠났기 때문이다.
'여서(麗瑞)'란 이름은 '아름답고 상서롭다'는 뜻이다. 全體(전체) 人口(인구) 100名(명)도 안 되는 莞島(완도)의 외딴섬이다. 莞島(완도)에서 뱃길로 꼬박 2時間(시간) 半(반) 以上(이상)을 달려야 닿을 수 있는 외딴섬 여서도. 莞島港(완도항)에서 하루 한 번 出發(출발)하는 旅客船(여객선) 섬사랑 7號(호)가 이 외딴섬과 陸地(육지)를 이어주는 有一(유일)한 交通(교통)手段(수단)이다.
莞島(완도)에서 2時間(시간), 하루 한 번 다니는 배
午後(오후) 2時(시)에 莞島港(완도항)을 떠난 섬사랑 7號(호)는 小茅島(소모도)-大茅島(대모도)-長島(장도)-靑山島(청산도)-麗瑞島(여서도)를 向(향)한다. 이 旅客船(여객선)은 麗瑞島(여서도)에서 一泊(일박)을 한 後(후)에 아침 7時(시)에 出發(출발)하여 靑山島(청산도) 長島(장도) 大茅島(대모도) 小茅島(소모도)를 거처 莞島港(완도항)에 入港(입항) 한다. 잠시 쉬었다가 午後(오후) 2時(시)에 다시 麗瑞島(여서도)를 向(향)하여 뱃고동을 울린다. 世界(세계)가 地球村(지구촌) 時代(시대)이며 全國(전국)이 日日(일일) 生活圈(생활권)에 들어간 지 오래이지만 麗瑞島(여서도)는 한 번 들어가면 반드시 一泊(일박)하고 그 다음 날 아침 일찍이 나와야 한다.
莞島港(완도항)을 떠난 旅客船(여객선)이 큰 섬 靑山島(청산도)까지는 별 일 없이 잘도 간다. 그러나 靑山島(청산도)를 지나면서부터 먼 섬 麗瑞島(여서도)까지의 물길은 뱃사람들도 늘 警戒(경계)를 늦추지 않는다. 바다를 相對(상대)하는 사람들이 日常的(일상적)으로 하는 말 中(중)에 '女子(여자) 속마음과 바다 잔잔한 것 믿지 말라'고 했듯이 바다는 恒常(항상) 믿을 수 없을 정도로 變(변)한다. 그렇다 해도 요즘엔 배가 크고 속도도 빨라서 크게 걱정할 일은 아니다. 오히려 그러한 追憶(추억)이 麗瑞島(여서도)로의 旅行(여행)을 豊盛(풍성)하게 해 준다. 麗瑞島(여서도)는 먼 바다에 속하는 섬이라 波濤(파도)가 조금이라도 높은 날엔 缺航(결항)되기 일쑤. 특히 겨울철에는 그렇다.
地圖(지도)에도 없는 섬, 麗瑞島(여서도)이다. 面積(면적) 2.51㎢에 海岸線(해안선)길이 10㎞이다. 60餘(여) 家口(가구) 75名(명)의 住民(주민)이 살고 있다. 莞島(완도)에서 南東(남동)쪽 41km 거리에 있으며 濟州島(제주도)와 中間(중간) 地點(지점)에 位置(위치)해 있는 외딴섬이다. 日帝强占期(일제강점기)에는 '태랑도(太郞島)'라 불렀으나 1945年(년) 以後(이후)에 '天惠(천혜)의 아름다운 섬'이라는 뜻에서 麗瑞島(여서도)로 불리게 됐다. 1950年代(년대) 最大(최대) 240餘(여) 家口(가구)에 1200名(명)이나 살던 마을이었다. 1968年(년)도만 해도 麗瑞初等學校(여서초등학교)의 學生數(학생수)가 180名(명)이나 됐다.
마을을 돌아보니 麗瑞島(여서도)는 다른 島嶼(도서)와는 特異(특이)한 點(점)이 많아 後日(후일) 集中的(집중적)인 人類學的(인류학적) 照査(조사)를 해볼 만하다.
물량장과 마을 저녁에 麗瑞島(여서도) 海邊(해변)에서
麗瑞島(여서도) 住民(주민)들이 이렇게 먼 바다에서 살아갈 수 있는 첫 번째 祕訣(비결)은 배를 댈 수 있는 船着場(선착장) 德分(덕분)이다. 어머니의 품속과 같다는 이 섬의 生命(생명)과 같은 船着場(선착장)은 이제 現代(현대) 施設(시설)인 防波堤(방파제)로 變(변)해 바다 바깥쪽으로 나와 있고 外海(외해) 莞島(완도) 最南端(최남단) 神祕(신비)의 섬, 麗瑞島(여서도) [Korea Island(한국의 섬)]
地圖(지도)에도 잘 나오지 않는 섬, 낚시꾼들에겐 天國(천국)
[韓國(한국)의 섬 32] 莞島權(완도권) 最南端(최남단)의 麗瑞島(여서도)]
▲ 麗瑞島(여서도) 標紙石(표지석) 標紙石(표지석)에는
마을 분들의 名單(명단)이 들어있다.▲
물량장과 마을 저녁에 麗瑞島(여서도) 海邊(해변)에서
양쪽 긴 防波堤(방파제) 끝에서는 빨간 燈臺(등대)와 하얀 燈臺(등대)가 반긴다. 섬의 모양은 거의 圓形(원형)이며 東西南北(동서남북) 各各(각각)의 海岸(해안)에 작은 灣(만)이 形成(형성)되어 있다. 海岸(해안)은 大部分(대부분) 巖石(암석) 海岸(해안)이며 곳곳에 높은 海蝕崖(해식애)가 發達(발달)해있다. 北(북)쪽 海岸(해안)에 形成(형성)된 灣(만)의 沿岸(연안) 一帶(일대)에는 집채만 한 바위들이 散在(산재)해 있어 特徵的(특징적)인 景觀(경관)을 이루고 있다.
마을은 船着場(선착장)이 있는 南(남)쪽 海岸(해안)이 全部(전부)다. 船着場(선착장)에서 한 눈에 들어온다. 흔히 볼 수 있는 횟집이나 번듯한 建物(건물)은 發見(발견)할 수 없고 자그마한 民泊(민박) 看板(간판)이 全部(전부)다. 船着場(선착장)에는 넓이에 비해 배들이 별로 없다. 예전의 浦口(포구)가 그대로 있다. 規模(규모)가 相當(상당)히 작은 편이다. 浦口(포구) 쪽에 자리 잡은 마을은 거센 바람을 避(피)하기 위해 높은 돌담에 둘러싸여 지붕들만 보인다. 海岸(해안)이 좁은 탓에 집들은 산자락에서 山(산) 중턱으로 올라갔기 때문이다.
마을로 들어서니 담장들이 예사롭지가 않다. 바람이 많은 地域(지역)이라 그런지 온통 돌담들로 이루어져 있다. 마치 濟州島(제주도)의 모습을 연상시킨다. 높이도 3m 이상은 됨직하다. 거기에다 골목길도 自轉車(자전거) 하나 다닐 수 없는 階段(계단)에다 좁은 편이다.
지붕 높이까지 올라간 돌담의 祕密(비밀)
모든 집은 앞집과 뒷집 모두 돌담으로 가려져 보이지 않는다. 城壁(성벽)처럼 높고 튼튼한 돌담길을 따라가면 몹시 구불구불하며 迷路(미로)처럼 얽혀있다. 道路(도로)도 좁은 탓에 耕耘機(경운기)나 motorcycle(오토바이)가 들어갈 수 없다. 그래서 무거운 짐들은 지게로 힘들게 지고 날라야 한다. 집의 담장이라고 믿기지 않을 정도로 巨大(거대)한 돌담에는 오래된 삶의 痕迹(흔적)이 고스란히 남아 있다.
이 작은 섬에서 왜 이토록 높은 돌담이 必要(필요)했을까? 여름에는 颱風(태풍)과 波濤(파도)를 막아 주고, 겨울에는 北風(북풍)이라는 自然(자연)의 災害(재해)를 막기 위함이다. 지금까지 20年(년)이 넘게 섬을 다니지만 이토록 圓形(원형)이 남은 돌담은 내가 다녀본 섬 가운데 最高(최고)라 하겠다.
마을 뒤로 갈수록 길은 없어지고 山(산)길이 이어지는데 집들이 거의 廢家(폐가)다. 마치 城壁(성벽)을 연상시킨다. 거기에다 層(층)을 이루고 있었다. 밭도 그렇게 큰 편은 아니고 작은 것들이 주를 이루고 層層(층층)이다. 그 옆으로는 개울이 흐른다. 글쎄, 이것을 '다랭이 밭'이라고 해도 되나 모르겠다. 왼쪽은 溪谷(계곡)인데 季節(계절) 탓인지 모르겠지만 흐르는 물은 없다. 그러고 보니 마을은 溪谷(계곡) 사이로 形成(형성)되어 있다.
골목길을 걸어 올라가면 밭이 나타난다. 밭에서 보는 마을 風景(풍경)이 조금은 억척스럽다는 생각이 든다. 밭도 그렇게 넓은 것이 아닌 조그마한 것들의 연속이다. 밭에는 흑염소들이 제법 보인다. 大部分(대부분)이 묶여 있다. 벌어먹고 살 논도 없고, 마을 산비탈을 깎아 마을이 형성되어 Rear car(리어카)도 들어가기 힘든 착박한 땅이다. 바다 養殖(양식)도 먼 바다에 홀로 떠 있기에 바람과 波濤(파도) 때문에 不可能(불가능) 해 오로지 고기잡이에 依存(의존)해 사는 곳이다. 서로 돕지 않으면 살기 힘든 섬, 그래서 마을 사람들은 남의 일도 자기 일처럼 도우며 家族(가족)처럼 산다.
원래 이곳은 소 방목으로 유명한 곳이다.산을 타는 건강한 소들도 만날 수 있다. 이 소들은 외지에서 3월초에 사 들여와 봄철에 산에서 방목한다. 겨울이 되면 훈련된 소가 되어 민가로 돌아온다. 20여 가구 주민이 소를 키우고 있는데 운동을 많이 한 여서도 소는 근육이 발달해 육회용으로 많이 찾는다고 한다.
여서도는 아직까지도 때묻지 않은 천혜의 아름다움을 간직한 섬이다. 특히 30~40m 깊이의 바닷속이 훤히 보일만큼 맑아서 "여서도로 시집가던 새색시의 앞섶이 풀어지며 옷고름이 바닷물에 빠져 황급히 들어 보았더니 옥색으로 물들어 있더라"라는 전설이 전해질 만큼 깨끗한 섬으로 알려져 있다. 제주도와 제일 가까운 곳이라 일 년 중 200일 정도는 시야로 제주도를 볼 수 있다. 이 곳의 어종과 동식물은 보호할 가치가 많은 곳이기도 하다. 제주도 특산물인 자리돔(생이리)이 완도에서는 유일하게 이곳에서 잡히고 있다.
옛날부터 제주 풍선들은 이 곳을 지난 때마다 돼지를 섬 앞바다에 던져 무사통과를 빌었다고 한다. 당시 이곳 사람들은 자녀를 유학 보내고 육지에 몇 백 평씩 소작지를 가지고 있었다. 여기서 자유당 시대의 국회의원 김선태씨와 김수근(조대법대학장) 등 유능한 인재들을 많이 배출되기도 하였다. 한때 동력선이 40여 척 있고 고졸 이상 유학생이 19명이나 있었다. 이처럼 멀리 떨어져 있어 교통이 불편해도 사람이 살 만한 환경은 있기 마련이다.
麗瑞島(여서도)에 濟州(제주)出身(출신) 女人(여인)이 많은 까닭
麗瑞島(여서도)는 靑山島(청산도)와 濟州(제주) 楸子島間(추자도간) 거리의 꼭 中間(중간)에 있다. 只今(지금) 이 섬에는 濟州島(제주도) 出身(출신) 아낙네들이 몇 명 있다. 麗瑞島(여서도)와 濟州島(제주도)가 가깝다 보니 이곳으로 물질을 왔다가 麗瑞島(여서도) 總角(총각)과 눈이 맞은 것이다. 濟州島(제주도) 海女(해녀)들은 한번 물질을 오면 契約(계약) 期間(기간) 때문에 오랜 期間(기간) 머물러야 했다.
또 돌아가고 싶어도 旅客船(여객선)도 없고 只今(지금)처럼 빨리 달리는 배가 아니어서 마음대로 섬을 떠날 수도 없었을 것이다. 外海(외해)의 麗瑞島(여서도)의 變德(변덕)스러운 날씨 때문에 섬에 묶이게 되는 境遇(경우)가 許多(허다)했다. 젊은 處女(처녀)가 한 달이고 두 달이고 갇혀 있다 보면 자연스레 섬 總角(총각)과 가까워지는 범. 섬을 나설 때 쯤에는 어느덧 애 엄마가 되었다는 얘기다. 속된 表現(표현)으로 波濤(파도)가 거셌기 때문이라고도 하고, 섬 男子(남자)들과 '눈이 맞았기' 때문이라고도 한다. 그래서 濟州(제주) 사람들 사이에선 '麗瑞島(여서도)에 가면 아기를 배어야 나온다'는 말이 傳(전)해진다.
너무 가난한 섬이기에 '處女(처녀)가 시집갈 때까지 쌀 세말을 못 먹는 곳'이 靑山島(청산도)라면, 麗瑞島(여서도)는 '平生(평생)을 살아도 쌀 한 가마니를 못 먹는다'는 말이 傳(전)해질 정도로 먹을거리가 궁하고 家難(가난)한 섬이다.
이곳에 30~40代(대)는 10餘名(여명) 안팎이다. 나머지는 모두 高齡(고령)의 老人(노인)들뿐이다. 生活(생활)保護對象者(보호대상자)가 17名(명), 獨居老人(독거노인)이 20餘名(여명)으로 섬을 떠나고 世上(세상)을 등진 사람들이 많아 빈집도 많다. 現在(현재) 이곳에는 낚시꾼들을 위한 民泊(민박) 두 곳과 가게 두 곳이 門(문)을 열고 있다.
마을회관 方向(방향)으로 가면 그 앞에 새로운 마을 標紙石(표지석)이 있다. '神祕(신비)의 섬 麗瑞島(여서도)'라고. 標紙石(표지석) 바로 옆에는 마을 住民(주민)들의 名單(명단)이 새겨져 있다. 男便(남편) 이름과 夫人(부인) 이름이 나란히 쓰여 있다. 그 옆에는 또 다른 標石(표석)이 있는데 마을 沿革(연혁)이 새겨진 標紙石(표지석)이다. 같은 時期(시기)에 세워진 것 같은데 이것에 依(의)하면 2008年(년)에 麗瑞島(여서도)에는 90名(명)의 住民(주민)이 살고 있다고 한다. 그래서 여기에 새겨진 住民(주민)이름들도 모두 90名(명)이다.
이 뒤에는 마을회관이 있고 그 옆으로는 倉庫(창고)인 듯 보이는데 倉庫(창고) 한 쪽에 婦女會館(부녀회관)이 入住(입주)해있다. 이 앞에는 八角亭(팔각정) 쉼터가 있다.
또 다른 골목 入口(입구)에 保健(보건)診療所(진료소)가 있으며 그 모퉁이에 里程標(이정표)가 있다. 民泊(민박) 看板(간판)이 있는 돌담 옆에 마을의 施設物(시설물)을 알리는 標紙板(표지판)인데 '登山路入口(등산로입구)'다. 6個(개)의 거리가 標示(표시)되어 있는데 여기서 麗瑞港(여서항)까지 5.11km라 標示(표시)되어 있는 것으로 보아 한 바퀴 도는 形式(형식)으로 標示(표시)한 것이다.
여기서 이 섬의 가장 높은 곳인 여호산 頂上(정상)까지는 거리가 2.36km란다. 여호산의 海拔(해발)은 무려 352m다. 麗瑞島(여서도)의 山(산)은 山林(산림)이 상당히 우거져있어 密林(밀림)을 연상하게 하고 사실 陸地山(육지산)과는 달리 나무가 우거져있어 山(산)에 들어가기 힘들 정도다.
마을 안쪽에는 섬마을 敎會(교회)가 있고 마을에서 가장 높은 곳은 곳에 麗瑞初等學校(여서초등학교) 分校(분교)인 靑山初等學校(청산초등학교)가 있다. 섬에서 有一(유일)하게 文化(문화)를 接(접)하고 享有(향유)할 수있는 곳이다. cement(시멘트) 階段(계단)으로 된 入口(입구)에는 두 個(개)의 기둥이 세워져 있다. 왼쪽에는 '麗瑞島(여서도)31番(번)길 22-8' 그리고 오른쪽에는 '靑山初等學校(청산초등학교) 麗瑞分敎場(여서분교장)'이 붙어있다.
門(문)이 없는 校門(교문)에서는 멀리 바다가 내려다 보인다. 階段(계단)을 타고 오르면 바로 運動場(운동장). 雜草(잡초)들로 因(인)해 조금은 廢墟(폐허)가 된 듯한 느낌. 그리고 그 뒤로 높은 곳에 學校(학교) 建物(건물)이 달랑 하나 있다. 寄宿舍(기숙사) 等(등) 부속건물은 學校(학교) 바로 바깥에 위치해 있다. 學校(학교) 옆에 麗瑞島(여서도) 內燃 發電所(내연발전소)를 뒤로 하고 높지 않는 山(산) 頂上(정상)에 올라가니 麗瑞島(여서도) 앞 바다를 비추는 無人(무인) 燈臺(등대)는 太陽光(태양광)으로 作動(작동)되고 있었다. 燈臺(등대)를 둘러싼 鐵條網(철조망) 울타리가 통째로 기울어져 있다. 아랫마을과 물량장, 港口(항구)의 배들과 건너편 山(산)의 중턱까지 밭이 보인다. 只今(지금)은 거의 休耕地(휴경지)이지만 비탈 밭은 南海(남해)의 다랭의 논 처럼 섬살이의 고단함을 證據(증거) 해 주는 貴重(귀중)한 史料(사료)이다.
麗瑞島(여서도)는 언제 생겨났을까?
'莞島郡誌(완도군지)'에 따르면 高麗(고려) 穆宗(목종) 10年(년)(1007年(년) 耽羅(탐라)(濟州(제주) 近海(근해)에 7日間(일간) 大地震(대지진)이 지속된 뒤 바닷속에서 큰 山(산)(섬)이 솟았다고 한다. 高麗(고려)의 '麗(려)'字(자)와 祥瑞(상서)롭다는 '瑞(서)'를 따 '麗瑞(여서)'란 이름을 붙였다. 그러나 몇 年(년) 前(전)에 麗瑞島(여서도)에서 發見(발견)된 貝塚(패총)이 7000年(년) 前(전) 新石器(신석기) 時代(시대) 遺跡(유적)이 出土(출토)되었을 정도로 이 섬의 사람살이 歷史(역사)는 길다. 麗瑞島(여서도)는 외딴섬이라서 倭敵(왜적)의 侵入(침입)에 시달렸던 痕迹(흔적)이 많이 남아있는 것으로 보아, 麗瑞島(여서도)에도 그前(전)에는 倭寇(왜구)들의 侵犯(침범)이 甚(심)했을 것이다.
하지만 近世(근세)에 사람이 다시 들어와 살기 始作(시작)한 것은 1690年代(년대)이다. 壬辰倭亂(임진왜란)이 일어난 지 100年(년) 가까이 지난 다음이다. 晉州姜氏(진주강씨)가 麗瑞島(여서도)에 처음 발을 디딘 것이다. 住民(주민)들의 生計(생계)手段(수단)은 大部分(대부분) 農業(농업)과 漁業(어업)을 兼(겸)한다. 農産物(농산물)로는 고구마, 쌀, 보리, 콩, 참깨 等(등)이 少量(소량) 生産(생산)된다. 近海(근해)에서는 도미, 숭어, 도다리 等(등)이 잡히며, 자연산 돌미역, 해삼, 전복 等(등)이 採取(채취)된다. 麗瑞島(여서도) 海女(해녀)들이 주로 採取(채취)하는 것은 미역, 소라, 전복, 해삼 等(등). 특히 麗瑞島(여서도)의 自然産(자연산) 돌김, 김, 톳, 미역, 파래는 陸地(육지) 가까운 데서 養殖(양식)한 것과는 색깔과 맛이 다르다.
그리고 麗瑞島(여서도)의 自然産(자연산) 해초는 最上級(최상급). 그 中(중)에서도 봄에 처음 따는 미역인 麗瑞島(여서도)의 초각은 맛이 좋기로 有名(유명)하다.
麗瑞島(여서도)는 正確(정확)히 莞島(완도)와 濟州(제주)의 中間(중간)쯤에 位置(위치)해 있다. 直線距離(직선거리)로 濟州(제주)까지 40여km 이다. 莞島(완도) 41km, 麗水(여수)의 巨文島(거문도)까지는 30km, 바다의 한 가운데 있다 보니 풍선(風船)들이 各種(각종) 貨物(화물)들을 싣고 가다가 麗瑞島(여서도)에서 바람을 기다렸고, 全羅南道(전라남도) 康津(강진)에서 甕器(옹기)를 싣고 가다가 바람을 기다렸다.
麗瑞島(여서도)는 서울에서 木浦(목포)를 가는데 KTX가 通過(통과)하는 光州(광주)의 松亭里驛(송정리역) 정도 비교할 수 있다. 只今(지금)은 배들이 크고 빠른 動力船(동력선)이기 때문에 먼 바다까지 進出(진출)하며 子女(자녀) 敎育(교육)과 편리함 때문에 港口(항구) 都市(도시)에 生活圈(생활권)을 둔다.
莞島(완도)가 麗瑞島(여서도) 사람들의 生活圈(생활권)이 된 것은 1968年(년) 莞島大橋(완도대교)가 생기고 부터이다. 前(전)에는 莞島(완도) 亦是(역시) 섬이었고 都市(도시)와 交通(교통)이 不便(불편)하였다. 그래서 60~70年代(년대) 이곳 사람들은 멀리 麗水(여수)가 生活圈(생활권)이었다. 漁船(어선)들이 麗水(여수)에서 잡은 고기를 팔고 生必品(생필품)을 사들고 왔다.
그 當時(당시) 고기잡이 動力船(동력선)만 50餘尺(여척)이 철 따라 고기를 많이 잡았다. 冷凍(냉동) 施設(시설)이 未備(미비)한 그 때에 잡아온 삼치나 갈치 고등어를 소금으로 '염장질' 해서 麗水(여수)나 녹동으로 팔러 다녔다. 섬으로 돌아오면서 지붕 이을 볏짚과 食糧(식량) 等(등) 겨울 날 穀食(곡식)을 싣고 왔다. 食口(식구)가 많은 그 時節(시절) 보리가 나올 때까지는 온 食口(식구)가 그 食糧(식량)으로 버텨야 했다. 여름과 가을 사이에 갈치잡이 철이면 뭍의 장사꾼들이 生必品(생필품)을 들여와 生鮮(생선)과 바꾸어 가기도 하였다.
이 조그만 섬에 1000餘名(여명)의 사람들이 북적이며 살았으니 生存(생존) 競爭(경쟁)이 치열하였다. 바다 일 못지 않게 農事(농사)도 큰 일 中(중) 하나였다. 바람이 불거나 날씨가 좋지 않으면 밭으로 달려 나가고, 家畜(가축)을 기르며, 그물 일을 하고, 山(산)을 開墾(개간)하여 밭을 만들고 穀食(곡식) 거두는 일에 必死的(필사적)이었다. 나무와 숲이 우거진 關係(관계)로 藥草(약초)가 많이 자라기 때문에 藥草(약초)를 캐다 藥草(약초)蒐集商(수집상)들에게 넘기도 하였다.
地圖(지도)엔 없지만 낚시꾼들은 잘 아는 섬
섬은 낚시꾼들에겐 익히 알려진 名所(명소)다. 낚시를 즐겨하는 사람들은 麗瑞島(여서도)를 모를 사람이 없을 정도다. 뱅어돔, 감성돔, 돌돔, 해삼, 전복 等(등) 魚族(어족)이 豐富(풍부)하기로 有名(유명)한 섬이라 이곳을 찾은 낚시꾼들만이 늦은 밤까지 밤낚시로 활기를 띤다고 한다. 봄엔 볼락, 여름엔 돌돔, 가을엔 참돔, 겨울엔 감성돔이 잡힌다. 1960年代(년대)엔 漁業(어업)으로 크게 재미를 봤지만 只今(지금)은 예년만 못하다.
過去(과거)의 漁場(어장)은 6月(월)부터 9月(월)까지 松津(송진)과 乺(솔)로 만든 햇불로 멸치잡이를 하고 4月(월)부터 9月(월)까지는 미영(木花(목화)을 타서 물레로 실을 잦아서 낚시좋을 만들어(50-60年前(년전) 고등어 잡이를 하였다. 巾着網(건착망) 漁船(어선)이 繁盛(번성)하면서 過去式(과거식) 方式(방식)은 없어졌고 現在(현재) 고등어 잡이는 안강망 漁船(어선)이 주로 한다. 7月(월)부터 10月(월)까지는 낚시로 갈치 잡이를 하였다. 當時(당시) 멸치잡이를 하던 l1名(명)이 乘船(승선)하는 이앵이 배가 있었고 1930年(년)경부터 5장대 배가 나타났다. 이 배에는 12~15名(명) 船員(선원)이 타며 10個(개)의 倉庫(창고)가 있다하여 열간 답이라고도 불렀다. 이 배는 10~15年前(년전)에 없어졌다.
1장대는 5자에 該當(해당)한다. 배의 멸치장이 漁夫(어부)들이 밤에 뱃전을 치면서 소리를 내면, 멸치들이 튀어 오르면서 햇불을 쫓아 그물 속으로 들어갔다고 한다. 船主(선주)는 船員(선원)을 모으기 위하여 船員(선원)에게 先金(선금)으로 보리 1가마를 주었다. 일단 구성된 船員(선원)들은 6月(월)부터 9月(월)까지 모두 行動(행동)을 같이 했다. 잡은 멸치는 全部(전부) 16짓으로 나누었다(船員(선원) 12名(명)에 12젓이고, 뱃짓이 4짓이다.). 나머지는 술값으로 썼다. 멸치의 量(양)으로 보면 1짓이 한통체리에 該當(해당)한다. 한 배가 잡아오는 量(양)이 15통체리로 240통이 된다(한통체리는 16통).
하지만 이곳은 20年前(년전)부터 멸치잡이를 하지 않는다. 그 理由(이유)는 안강망들이 濟州海峽(제주해협)에서 멸치 떼를 미리 잡아버리기 때문에 이곳까지 멸치가 回遊(회유)하지 않기 때문이다. 그래서 住民(주민)들은 最近(최근)에 韓牛(한우)를 放牧(방목)하여 收入(수입)을 올리고 있다.
거의 모든 島嶼(도서)에 電氣(전기)가 들어가서 住民(주민)들의 生活方式(생활방식)이 다소 달라지기 始作(시작)했다. 家庭用(가정용) 電氣製品(전기제품)의 使用(사용)이 增加(증가)하였고 電氣(전기)는 燃料(연료)로도 使用(사용)하고 있다. 電氣(전기)와 함께 煉炭(연탄)이 燃爐(연로)로 利用(이용)되므로 山林綠化(산림녹화)에 도움이 된다는 關係當局(관계당국)의 評價(평가)는 外部(외부)에서 導入(도입)되는 燃料(연료)(電氣(전기)와 煉炭(연탄)의 依存度(의존도)와 함께 考慮(고려)되어야 한다.
麗瑞島(여서도)는 埋立(매립)으로 이루어진 물양장이 제법 넓고 큰 편이다. 運動場(운동장)으로 使用(사용)해도 좋을 만큼 넓다. 그러나 여느 港口(항구)처럼 그렇게 복잡하지는 않아 보인다. 하얀 燈臺(등대)가 있는 防波堤(방파제) 쪽의 山(산)을 깎아 埋立(매립)을 한 痕迹(흔적)이 보인다. 이곳은 6~7年(년)에 걸쳐 防波堤(방파제) 工事(공사)가 끝이 났다. 오래 전에 埋立(매립)工事(공사)를 하는데 660億圓(억원)대 工事(공사)가 1千億圓(천억원)대 工事(공사)가 되어서야 끝이 났단다. 工事(공사) 中(중)에 颱風(태풍)을 두 번이나 맞아 補修(보수)한다고.
이곳 住民(주민)들은 淸淨(청정) 海域(해역)에 있는 아름다운 섬에 環境(환경)毁損(훼손)이 深刻(심각)하다고 하소연 하였다. 環境汚染(환경오염)은 물론이고 自然(자연)景觀(경관) 毁損(훼손), 防波堤(방파제) 工事(공사)로 潮流(조류)疏通(소통)을 막아 마을 앞 바닷물이 淨火(정화)되지 못하고 있다고 呼訴(호소)했다. 마을주민들은 防波堤(방파제)에 圓滑(원활)한 潮流(조류) 疏通(소통)을 할 수 있는 空間(공간)을 만들어 주는 것과 마을 汚廢水(오폐수)處理場(처리장) 施設(시설)이 切實(절실)하다고 말한다.
이곳 麗瑞里(여서리)에는 田畓(전답)이나 마찬가지인 黃金(황금) 바다를 지키기 위하여 住民(주민)들의 배가 매일 갯바위 周邊(주변)을 巡察(순찰)한다. 外地(외지) 船舶(선박)이 不法(불법)操業(조업)(뻥치기) 하는 것을 막기 위해서다. 自體的(자체적)으로 돈을 걷어 故鄕(고향)의 바다와 삶의 터전을 목숨처럼 지키고 있다. 정정석 里長(이장)이 말을 들어보자.
"他地(타지) 배들이 操業(조업)을 하거나 不法(불법)操業(조업)을 하고나면 감성돔이나 농어, 숭어 等(등) 고기가 전혀 잡히지 않습니다. 海警(해경)과 行政(행정)에 陳情(진정)도 했지만 現場(현장)에서 잡지 못하면 現行法(현행법)상 法的(법적) 制裁(제재)를 할 수 없는 立場(입장)이어서 團束(단속)이 어렵다고만 합니다. 더구나 不法(불법)漁場(어장)을 하는 것을 뻔히 알고도 눈을 뜨고 보면서 잡을 수가 없습니다. 麗瑞島(여서도) 住民(주민)의 낡은 배로는 타지 배들의 속도를 따라 잡을 수가 없기 때문입니다."
麗瑞里(여서리) 住民(주민)들은 다른 地域(지역)에서 온 操業(조업) 漁船(어선)들에게 0.5마일(800m) 안으로 들어오지 말 것을 당부했다. 특히, 不法(불법)漁業(어업)을 엄격히 단속할 강력한 法(법) 規制(규제)를 마련해서라도 섬사람들의 삶의 터전인 바다를 侵犯(침범)하지 않도록 해달라고 建議(건의)했다. 麗瑞島(여서도) 隣近(인근) 바다에서 不法(불법) 漁業(어업)行爲(행위)가 繼續(계속)된다면 마을 사람들은 몇 年(년) 後(후)쯤이면 故鄕(고향) 섬을 등지고 모두 떠나 아무도 없을 것이라고 말했다.
물양장 가장자리에 마을 標紙石(표지석)이 單純(단순)하게 세워져 있다. '麗瑞島(여서도)'. 그 뒤로 '여호리조트'라는 標紙石(표지석)이 있고 거기에는 조그마한 建物(건물)이 있는데 民泊(민박)(2層(층)兼(겸) Super(슈퍼)(1層(층)다. 그 뒤로 언덕인데 그 주위에는 예전에 軍(군) 施設(시설)로 썼을 낡은 concrete(콘크리트)施設物(시설물)들이 나란히 있다. 哨所(초소)와 幕舍(막사)로 使用(사용)되었을 建物(건물)들이다. 그 앞에는 '麗瑞島(여서도)治安(치안)center(센터)' 派出所(파출소)가 있다.
麗瑞島(여서도)를 떠나면서 되돌아보니 麗瑞島(여서도)는 너무나 외로운 섬이었다. 이러한 섬의 傳統的(전통적)인 모습이 낚시꾼들과 Internet(인터넷) 媒體(매체)를 通(통)하여 外部(외부)에 알려지고 있다. fishing(낚시)와 Diver(다이버)와 山(산)과 바다와 孤獨(고독)을 좋아하는 사람이라면, 이곳에서 1年(년) 中(중) 몇個月(개월) 살기에 딱 좋다.
麗瑞島(여서도)는 이제 마지막 남은 淸淨地域(청정지역)이다. 바다만 좋은 것이 아니라 山(산)에서 내려오는 溪谷(계곡)물과 溪谷(계곡)에서 솟아나는 샘물도 좋다. 이곳에서 每年(매년) 休暇(휴가)를 보내고 싶어진다. 우리나라에서 손꼽을 정도의 먼 섬인 탓에 우리네 60年代(년대) 사람들의 人心(인심)이 그대로 살아있는 麗瑞島(여서도)는 時間(시간)이 멈춰버린 듯 늘 그리움과 孤獨(고독)의 섬으로 남아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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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댓글 이승철~금 2021-05-14 오후 6:32 ~ 참 좋은 구경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