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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적인 건국만이 살길이다! | 헬라어 ㄱ~ㅂ 원어해석(김준남 목사) - Daum 카페 23.04.10
영적인 건국만이 살길이다! | 헬라어 ㅅ~ㅇ 원어해석(김준남 목사) - Daum 카페 23.04.10
영적인 건국만이 살길이다! | 헬라어 ㅈ~ㅎ 원어해석(김준남 목사) - Daum 카페 23.04.10
원어단어 ‘ㄱ’ 에 해당하는 단어들
1,개혁 2,구원 3.거짓 4.궤계 5.금식하다 6.교회 7.권능 8. 권세 9.구제 10.골방 11.공경하다 12. 구하다 13. 가난 14.기도하라 15. 기근 16.교훈하다 17.강해지다 18. 기쁨 19.깨어 있다 20.거듭, 다시 21.거하다 22. 개 22.쉬지 말고 23. 꾸짖다 24.계명 25. 교제 26, 길, 27, 가증한 것 28, 구름, 29, 강림, 30, 기억하다
원어단어 ‘ㄴ’ 에 해당하는 단어들
1.내어주다
원어단어 ‘ㄷ’ 에 해당하는 단어들
1. 독생 2. 덧입다 3. 때 4.더러운 5.단단한 6.담대함 7.뜻 8 떡, 양식 9, 두드리다 10, 두 마음
원어단어 ‘ㅁ’ 에 해당하는 단어들
1. 믿음 2. 머리 3. 미혹하다 4. 마음 누스(νοῦς) 5. 마음 칼디아(καρδία) 6, 무장
원어단어 ‘ㅂ’ 에 해당하는 단어들
1. 불순종 2. 빛 3. 부끄러워 하다 4,비방하는 5. 비유 6.복종하다 7.변화하다 8, 복음 9,복 10, 번성하다[유오도오(εὐοδόω) 11, 번성하다.플레뒤노(πληθύνω) 12, 불순종 13, 보다 14, 부활 15, 보물 16, 병들다 17, 비밀
원어단어 ‘ㅅ’ 에 해당하는 단어들
1.십자가 2. 새롭게 함 3. 실족하다 4.신성 모독 5.소유 6. 선물 7. 순종하라 8. 섬기는 9. 새로운 10. 소망
11, 시험하다 12, 시인하다 13, 쉬지말고 14, 사모하라
원어단어 ‘ㅇ’ 에 해당하는 단어들
1. 의 2. 임하다 3. 은혜 4.예정 5. 영광 6. 율법 7. 영 8.언약 9. 온전한 10.예배하다 11.약속 12.연합한
13. 어둠 14. 오래 참음 15 이기다 16. 온전히 결실하다 17.약속 18. 연단 19.어리석음 20. 인내 21. 여자
22. 외식하는 자 23, 잃다 24, 염려하다 25, 알다 26, 우상 27, 이름 28, 일용할 29, 오늘 30, 인치다
31, 이루다 텔레오(τελέω) 32, 이루다 플레로오 33, 이방인
'원어 단어 'ㅈ'에 해당하는 단어들
1. 정의 2. 진리 3. 주 4. 지혜 5. 죽음 6.정죄하다 7.준비하다 8. 죽다 9.저주 10. 전도 11.절제하는
12. 접붙이다 13. 진노 14. 정욕 15.지키다 16, 죄하말티아(ἁμαρτία) 17, 죄 옵헤일레마(ὀφείλημα)
18, 자랑하다 19, 종 20, 적그리스도 21, 제자
원어단어 ‘ㅊ’ 에 해당하는 단어들
1.책망 2.찬송 3.초등학문 4.청결한 5, 찾아라 6, 첫 열매 7, 총명
원어단어 ‘ㅌ’ 에 해당하는 단어들
1.타락하다 2, 탐심 에피뒤미아 (ἐπιθυμία) 3, 탐심 플레오넥시아 4, 탄식 5, 통일시키다
원어단어 ‘ㅍ’ 에 해당하는 단어들
1,평안 2. 표적 3. 판단하다 4, 핍박하다
원어단어 ‘ㅎ’ 에 해당하는 단어들
1.회복 2.힘쓰다 3. 행하다 4. 환란 5.회개하다 6, 할례 7, 흥하다 8, 확증하다
원어단어 ‘ㅅ’ 에 해당하는 단어들
1. 십자가 2. 새롭게 함 3. 실족하다 4.신성 5.소유 6. 선물 7. 순종하라 8. 섬기는 9. 새로운 10. 소망
11, 시험하다 12, 시인하다 13, 쉬지말고 14, 사모하라
1. 십자가 스타우로스(σταυρός) : 헬라어 원어해석(김준남 목사)
‘이에 예수께서 제자들에게 이르시되 누구든지 나를 따라오려거든 자기를 부인하고 자기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를 것이니라’(마16:24)
‘십자가’로 번역된 헬라어 단어 ‘스타우로스’(σταυρός)는 위로 향한 막대기, 기둥을 말하는 ‘곧은 기둥’, 최고형을 집행하는 도구로서 ‘십자가’, 상징적으로 ‘죽음의 위협에 노출됨, 자기부인’ 그리고 함축적으로 ‘그리스도의 속죄’
라는 광범 위한 의미로 사용되어지고 있다.
오늘날 교회에서의 ‘십자가’에 대한 이해는 ‘우리의 죄를 대속하시기 위해서 예수님이 당했던 그 당시 최고형을 집행할 때 사용한 십자가’를 말하며 ‘우리를 향한 하나님의 사랑의 증표, 예수님의 대속의 죽음, 구원의 능력, 기독교인의 자랑의 상징물’로써 이해되고 있다. 그래서‘십자가’자체가 실제로 어떤 능력을 가진 것처럼 오해하여 우상(εἴδωλον)처럼 떠받들기도 하는 것이 현실이다.
그렇게 ‘십자가’(스타우로스 : σταυρός)라는 단어는 알게 모르게 그 단어가 가지고 있는 본래의 의미를 모른 채 왜곡되어 사용되는 단어도 없을 것이다.
‘십자가’로 불리워지는 ‘스타우로스’(σταυρός)의 정확한 의미를 알기 위해서는 그 단어의 유래가 되는 ‘히스테미’(ἵστημι)라는 단어를 살표 보아야 한다. ‘히스테미’(ἵστημι)는 기본적으로 ‘서게 하다, 두다, 놓다, 세우다, 옆이나 가까이 서다, 확고한 마음을 가지다, 권리를 포기하지 않다’라는 의미를 가지고 있다.
여기서 ‘히스테미’(ἵστημι)가 가지고 있는 ‘서다’라는 의미는 수동태와 수평적인 위치를 의미하는 것으로써 ‘배치하다, 세우다, 놓다, 정박하다, 수립하다’라는 뜻의 ‘티데미’(τίθημι)와 비교하여 능동적이며 수직적 위치로의 ‘세워짐’의 말하는 것이다.
좀더 부연 설명하면, 하나님의 창조 (בָּרָא)의 목적은 하나님께서 창조하여 배열해 놓은(티데미 : τίθημι)우리 눈에 보이는 이 세상(호 코스모스 : ὁ κόσμος)의 모든 것들을 통하여 그 속에 담겨진 내용 즉, 말씀으로 창조된 만물 가운데 숨겨진 하나님이 마음인 말씀을 깨달아 그 언약의 말씀으로 굳게 세워지도록(히스테미 : ἵστημι)하는 것이며, 우리를 성전 (אב) 삼으시는 것이고(고전3:16).성도에게 있어서 ‘스타우로스’(σταυρός)는 더 이상 어떤 것을 상징하는 상징물이 아니라 하나님의 언약의 말씀이며, 그 말씀 앞에 선악의 주체로서 하나님 처럼의 내가 죽는 자기부인의 자리이고 더 나아가 그 말씀이 되어 말씀이신 그리스도로 사는(갈2:20)것이다. 그래서 성도는 더이상 예수의 ‘스타우로스’(σταυρός)가 아닌 반드시 말씀이 되어 자기 ‘스타우로스’(σταυρός)를 져야 하는 것이며 그가 바로 땅적 존재에서 하늘적 존재가 된 자, 구원 받은 자가 되는 것이다. [스타우로스(σταυρός): 십자가]
2. 새롭게 함 아나카이노시스(ἀνακαίνωσις) : 헬라어 원어해석(김준남 목사)
‘우리를 구원하시되 우리가 행한 바 의로운 행위로 말미암지 아니하고 오직 그의 긍휼하심을 따라 중생의 씻음과 성령의 새롭게 하심으로 하셨나니’(딛3:5)
‘새롭게 함’으로 번역된 헬라어 단어 ‘아나카이노시스’(ἀνακαίνωσις)는 ‘새로이 하다, 성장시키다, 새롭게 하다, 새롭게 만들다’라는 뜻을 가진 동사 ‘아나카이노오’(ἀνακαινόω)에서 파생되었으며 ‘재생, 회복, 혁신, 더 좋은 것으로의 완벽한 변화’라는 의미를 가지고 있다. 그리고 ‘아나카이노오’(ἀνακαινόω)는 본래적 의미로 ‘위에, 한가운데로, 따로, 사이에, …의 복판에’ 이지만 접두어로서 합성어에서 쓰일 때 ‘반복, 강렬, 역전’의 뜻인 전치사 ‘아나’
(ἀνα)와 ‘새로운, 신선한, 새로운 종류의, 고귀한’의 뜻을 가진 ‘카이노스’(καινός)의 파생어에서 유래된 단어로
‘새로이 하다, 새롭게 하다, 성장시키다, 새롭게 만들다’라는 의미를 가진 단어이다.
‘…옛 사람과 그 행위를 벗어 버리고 새 사람을 입었으니 이는 자기를 창조하신 이의 형상을 따라 지식에까지 새롭게 하심(아나카이노오 : ἀνακαινόω)을 입은 자니라’(골3:9,10)는 말씀에서 알 수 있듯이 ‘아나카이노시스’
(ἀνακαίνωσις)가 말하는 ‘새롭게 함’이란 점진적으로 변화하여 새로워지거나 전과 비교해서 좀 더 낳아지는 의미에서의 새롭게 함이 아니라, 옛 것과 비교해서 완전히 다른 새 것이 됨, 옛 사람과 비교해서 완전히 다른 새 사람이 됨이라는 의미에서의 새롭게 함이라는 의미인 것이다.
인간은 스스로 새롭게 할 수도 없고 새롭게 될 수도 없다. 해 아래 새 것이 없기 때문이며(전1:9) 어둠 자체이기 때문이다(요1:5).그래서 성경은 인간을 허물과 죄로 죽은 자(엡2:1)라고 말하는 것이다.
인간이 할 수 있는 일이란 모든 불의, 추악, 탐욕, 악의, 시기, 살인, 분쟁, 사기, 악독이 가득하여 수군수군, 비방, 능욕, 교만, 자랑, 악을 도모, 부모을 거역, 오매, 배약, 무정, 무자비한 일 뿐이다(롬1:29,30).
새 사람이 되는 것은 오직 하나님의 은혜에 의한 하나님의 열심인 성령의 새롭게 하심(ἀνακαίνωσις)으로만 가능하다(딛3:5).
그래서 성도들인 그리스도 예수의 사람들은 ‘육체와 함께 그 정욕과 탐심을 십자가에 못 박은’(갈5:24)자들이며, 진리의 성령이 오시어 완전히 다른 하늘적 차원의 새롭게하심(ἀνακαίνωσις)을 입은 자들이고 이제는 모든 진리 가운데로 인도함(요16:13)을 받는 자인 것이다. [아나카이노시스(ἀνακαίνωσις) : 새롭게 함]
3.실족하다 스칸달리조(σκανδαλ?ζω) : 실족하다(to cause to stumble) 헬라어 원어해석(김준남 목사)
‘누구든지 나로 말미암아 실족하지 아니하는 자는 복이 있도다 하시니라’(마11:6)
‘실족하다’로 번역된 헬라어 ‘스칸달리조’(σκανδαλ?ζω)는 ‘덫, 올가미, (죄의 원인이 되는) 함정, 죄에 빠지는 것, 죄를 짓게 하는 것, 움직일 수 있는 함정의 나뭇가지, 잘못이나 죄를 범하게 하는 사람이나 물건’의 뜻을 가진 ‘스칸달론’(σκ?νδαλον)에서 파생된 단어로 ‘걸려 넘어지다, 함정에 들다, (상징적으로) 죄에 빠지다, 배반하다, 죄를 범하게 되다, 길에 장애물을 놓다, 범죄 하도록 유혹하다, 타락하게 하다, 불공정하게 재판하도록 하다, 화를 내다’의 의미를 가지고 있다. 그리고 ‘스칸달론’(σκ?νδαλον)은 ‘굽히다, 절하다, 무릎을 꿇다, 경배하다, 인사하다'
의 뜻을 가진 ‘캄프토’(πατ?ρ)라는 단어에서 유래된 것으로 보인다.
이것은 ‘스칸달리조’(σκανδαλ?ζω)가 말하는 ‘실족하다’라는 의미가 누군가에 의해 또는 어떤 것에 의해 그것이 함정이 되어 그곳에 빠져 죄를 짓게 된다는 뜻이 아니라, 기본적으로 만물 가운데 숨겨진 내용으로써의 말씀을 보지 못하고 겉에 보이는 그대로 보고 그것에 무릎을 꿇거나 판단해 버리는 선악의 주체로써의 나, 하나님 처럼 된 나 자신에게 실족의 원인이 있다는 것이다.
그래서 주님께서도 ‘나로 말미암아 실족하지(σκανδαλ?ζω) 않는 자가 복이 있다’고 말씀하시는 것이다(마11:6). 사실 하나님의 말씀을 그렇게도 사랑하고 지키려고 애를 썼던 바리새인들이 하나님의 말씀이신 예수님의 말씀에 실족하였던(σκανδαλ?ζω)것이다(마15:12). 그들이 하나님의 말씀을 사람의 계명으로 교훈을 삼아 가르치므로 하나님을 헛되이 경배하고 있었기 때문이다(마15:9).
뿐만 아니라 ‘오늘 밤에 너희가 다 나를 인하여 실족하리라(σκανδαλ?ζω) 기록된 바 내가 목자를 치리니 양의 떼가 흩어지리라 하였느니라’(마26:31).
이 땅에서 성공하는 자의 삶을 살아보려고 예수님을 따를 제자들에게 있어서 예수님의 비참한 최후의 모습은 말 그대로 실족 그 자체였던 것이다.
사도 바울은 그러한 자들을 가리켜서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원수로 행하는 자라고 하면서 저들의 신은 배라고 말하고 있다(빌3:18,19). 결국 자신의 배를 채우는 자기 가치 챙기기의 목적으로 예수를 따르는 것이 스스로 실족에 빠지는 결과를 낳게 하는 것이다.
사실은 주님이 이 땅에 오셔서 말씀하신 모든 것들이 우리로 실족하지(σκανδαλ?ζω) 않게 하려는 것이며(요16:1) 실족의 원인이 되는 내가 되어 십자가에서 죽으신 것이다. 그리고 그 십자가의 도는 멸망하는 자들에게는 걸림돌이 되고 미련한 것이지만 구원을 받는 우리에게는 하나님의 능력이 되는 것이다(고전1:18).
[스칸달리조(σκανδαλ?ζω) : 실족하다 (to cause to stumble)]
4. 신성모독 블라습헤미아(βλασφημ?α) : 헬라어 원어해석(김준남 목사)
‘내가 보니 바다에서 한 짐승이 나오는데 뿔이 열이요 머리가 일곱이라 그 뿔에는 열 왕관이 있고 그 머리들에는 신성모독 하는 이름들이 있더라’(계13:1)
‘신성모독’으로 번역된 헬라어 ‘블라습헤미아’(βλασφημ?α)는 ‘상스러움, (사람에 대하여) 중상의, (하나님에 대하여) 불경건한, 참람한, 악한 말의, 중상하는, 비난하는 욕하는, 독설의’라는 뜻의 ‘블라습헤모스’(βλ?σφημο?)에서 파생된 단어로 ‘(특히 하나님에 대항하여) 중상, 참람, 악담, 조롱, 상처를 주는 말, 불경스럽고 비난하는 말, 신적 위엄을 손상시키는 말, 신성모독’의 의미를 가지고 있다.
그리고 ‘블라습헤모스’(βλ?σφημο?)는 ‘(본래적 의미로는) 방해하다, (함축적으로) 해롭게 하다, 해를 끼치다, 상하게 하다, 다치게 하다’의 뜻을 가진 ‘브랍토’(βλ?πτω)와 ‘생각을 알리다, 선언하다, 말하다’의 뜻을 가진
‘훼미’(φημ?)의 명사 형인 ‘진술, 소문, 명성, 평판’의 뜻을 가진 ‘훼메’(φ?μη)의 합성어 에서 유래된 단어이다.
‘소문’으로 번역된 ‘훼메’(φ?μη)는 신약성경에서 단 2회인 ‘그 소문이 그 온 땅에 퍼지더라’ (마9:29)와 ‘… 그 소문이 사방에 퍼졌고’(눅4:14)에서 쓰여지고 있으며, 반드시 온 땅에 퍼져야 할 그 소문이란 진리를 선포하시는 예수님의 사역과 함께 말씀 육신이신 구원자 예수 바로 그 이름을 말하는 것이다.
그런 의미에서 ‘블라습헤미아’(βλασφημ?α)가 말하는 ‘신성모독’이란 하나님이 우리에게 모든 이름 위에 뛰어난 이름, 유일한 이름인 예수 그리스도를 주셨는데(빌2:9) 오히려 하나님 처럼 된 인간이 자기의 말을 하며 자신의 이름만을 드러내는 것을 의미하는 것이다.
하나님 처럼 된 자들의 말은 참람된 말로써 하나님을 모독하는 말이며(계13:5) 그들의 이름은 참람된 이름으로써 하나님을 모독하는 이름(계13:1; 17:3)이며 스스로 살아 보겠다고 발버둥치는 허물과 죄로 죽은 자들 각자의 이름인 것이다. 그리고 그들의 말과 이름이 있는 곳, 그들만의 천국은 다름 아닌 지옥인 것이다. 그러나 하나님의 나라는 내 말이 죽고, 내 이름이 삭제되고 그리스도로만 사는 나라이기에 그곳에는 오직 진리의 말씀과 그리스도의 이름 밖에는 없는 것이다.
그러므로 성도는 정욕과 욕심으로 가득한 선악의 주체자로써 자신의 말인 ‘참람한’(βλασφημ?α) 말과 자신의 이름인 ‘참람한’(βλασφημ?α) 이름이 십자가에 못박힌(갈5:24) 예수의 사람들이기에 이 땅에서 그토록 자긍심을 갖게 하는 자신의 말이 철저하게 파괴되고 나를 나 되게 존재하게 만드는 그러한 자존심을 대표하는 자신의 이름이 철저하게 삭제되는 아픔을 오히려 감사하고 기뻐할 뿐만 아니라, 하나님의 백성이기에 마땅히 하나님의 아들로 살도록 하시는 하나님의 은혜임을 고백하는 자인 것이다. [블라습헤미아(βλασφημ?α) : 신성 모독]
5. 소유 페리포이에시스(περιπο?ησι?) : 헬라어 원어해석(김준남 목사)
‘그러나 너희는 택하신 족속이요 왕 같은 제사장들이요 거룩한 나라요 그의 소유가 된 백성이니 이는 너희를 어두운 데서 불러 내어 그의 기이한 빛에 들어가게 하신 이의 아름다운 덕을 선포하게 하려 하심이라’(벧전 2:9)
‘소유’로 번역된 헬라어 ‘페리포이에시스’(περιπο?ησι?)는 이 단어의 동사형인 ‘만나다, 남다, 보존하다, 안전하게 지키다, 자신을 위해 남게 하다, 자신을 위해 보존하다, 자신을 위해서 얻다, 사다’라는 뜻의 ‘페리포이에오마이’(περιποι?ομαι)에서 파생된 단어로 ‘(행위나 물건의) 획득, (연루된 의미로) 보존, 얻는 것, (특별한 것으로써의) 소유, 재산, 구원’의 의미를 가지고 있다.
그리고 ‘페리포이에오마이’(περιποι?ομαι)는 본래적 의미로 ‘대하여, 관하여, 때문에, 주위에, 가까이’라는 뜻을 가진 전치사이나 상징적으로 ‘존경하다’ 그리고 합성어로 쓰일 때는 완전의 의미를 내포하는 ‘페리’(περ?)와 ‘하다, 만들다, 창조하다, 완수하다, 지키다, 맺다, 저자가 되다, 약속을 실행하다, 준수하다’의 뜻을 가진 ‘포이에오’(ποι?ω)의 합성어에서 파생된 중간태이다. 그러므로 ‘페리포이에시스’(περιπο?ησι?)가 의미하는‘소유’는 단순히 ‘가지고 있음’이 아니라 하나님의 ‘소유’라는 특별한‘소유’ 말하는 것으로 선택 받아 하나님의 백성이 되었음을 의미한다(벧전2:9, 히10:39). 좀더 구체적으로 하나님의 ‘소유’라는 말씀을 구약성경에서 찾을 수 있다.
‘세계가 다 내게 속하였나니 너희가 내 말을 잘 듣고 내 언약을 지키면 너희는 모든 민족 중에서 내 ‘소유’가 되겠고 너희가 내게 대하여 제사장 나라가 되며 거룩한 백성이 되리라…’(출19:4,5) 여기서‘소유’라고 쓰여진 히브리어인 ‘세굴라’(????)는 ‘(비밀히 잠가둔) 재산, 특별한 소유(보화), 귀중한 재산’이라는 뜻으로, 모든 것이 하나님의 창조물로써 하나님의 ‘소유’이지만 ‘세굴라’는 그런 ‘소유’가운데서 그 어느 것과도 비교할 수 없는 하나님의 백성으로서의 ‘특별한 보물’을 말하는 것이다. 이 단어를 파자하면 ‘인간 자신이 의지했던 모든 것과 관계를 끊고 진리와 함께 살아가는 실존’으로 스스로 보물로 여겼던 하나님 처럼의 나를 죽이고 진리의 말씀을 품고 하나님의 백성의 삶을 살아가는 자를 의미한다고 볼 수 있다.
하나님께서 이렇게 세우심은 오직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구원이라는 특별한 보물(περιπο?ησι?)이 되게 하려는 것이며(살전5:9), 또한 이렇게 복된 소식을 통해 우리를 부르심은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영광이라는 특별한 보물(περιπο?ησι?)이 되게 하시기 위함이다. 그러므로 성도는 하나님의 열심에 의해서 그 은혜를 인하여 구원받은 하나님의 특별한 보물(περιπο?ησι?)인 하나님의 백성이 된 자요, 그리고 이 땅에서 스스로 보물로 착각하게 만드는 나를 부인하고 날마다 내가 죽어가는 삶을 통하여 그리스도를 그려내는 진정한 ‘보물’(περιπο?ησι?)인 하나님의 아들의 삶을 살아가는 자이다. [페리포이에시스(περιπο?ησι?) : 소유]
6. 선물 도레아(δωρεά) : 헬라어 원어해석(김준남 목사)
‘예수께서 대답하여 이르시되 네가 만일 하나님의 선물과 또 네게 물 좀 달라 하는 이가 누구인 줄 알았더라면 네가 그에게 구하였을 것이요 그가 생수를 네게 주었으리라’(요4:10)
‘선물’로 번역된 헬라어 단어‘도레아’(δωρεά)는 신약성경에서 특별한 경우에만 한정되어 쓰인다. 즉, ‘하나님의 선물(δωρεά)’(요4:10,행8:20, 행11:17, 엡3:7), ‘성령의 선물(δωρεά)’(행2:38, 행10:45),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로 인해 주어지는 선물(δωρεά)’, ‘그리스도의 선물(δωρεά)’, ‘은혜와 의의 선물(δωρεά)’(롬5:17) 그리고 ‘하늘의 은사(δωρεά)’(히6:4)에서만 쓰이고 있다. 이것은 성경에 기록되어 있는 ‘선물’(δωρεά)이라는 것이 국어사전이 정의하고 있는 ‘남에게 어떤 물건 따위를 선사함 또는 그 물건’의 의미로써의 ‘선물’(膳物)로 이해하여 누구나 주고 받을 수 있는 것이 아닌 오직 하나님만이 주실 수 있는 것으로써의 의미를 가지고 있음을 말해주고 있는 것이다.
좀더 구체적으로 살펴보면, ‘도레아’(δωρεά)라는 단어는 ‘선물, 희생, 제물’이라는 뜻을 가진 ‘도론’(δῶρόν)에서 파생되었으며, ‘도론’ (δῶρόν)이 쓰인 용례는 ‘제단에 드리는 예물’ (δῶρόν)(마5:23,24), ‘하나님께 드림’ (δῶρόν)(막7:11), ‘헌금’(δῶρόν)(눅21:4), ‘하나님의 선물’(δῶρόν)(엡2:8) 등이다.
하나님이 죄로 죽어 있는 우리에게 주시는 유일한 ‘선물’(δωρεά)은 ‘그리스도이신 예수’ 뿐이며, 그러기에 구원 받은 우리가 하나님께 드릴 수 있는 유일한 ‘선물’(δωρεά)이 있다면 그것은 바로 ‘그리스도’가 되는 것이다.
‘도레아’(δωρεά)로 번역된 히브리어 단어 ‘마타나’(הנמת)는 기본적으로 ‘선물, 좋은 의미로 희생제물, 나쁜 의미로 뇌물’이라는 뜻인데 이를 파자하면 ‘완성된 진리를 간직하여 살아가는 실존’이라는 의미를 가진다.
그래서 예수님께서는 율법으로써의 남편만 있고 참 생명으로써의 남편이 없는 사마리아 여인에게 하나님의 ‘선물’(δωρεά)과 물을 달라고 하는 이가 바로 그리스도임을 알게 되면 당연히 생수인 진리의 말씀을 구하여 얻게 된다고 말씀하신 것이다(요4:10) 그러므로 성도가 가지고 있는 ‘선물’(δωρεά)이란 하나님이 주신 ‘선물’(δωρεά)인 그리스도요, 그러기에 성도가 하나님께 드려야 할 ‘예물’(δωρεά)도 그리스도여야 하는 것이다. 그리고 생명의 말씀을 간직하여 살아가는 실존으로써의 성도는 이미 하나님의 ‘선물’(δωρεά)이 된 것이다.
[도레아(δωρεά) : 선물]
7. 순종하라 휘파쿠오(ὑπακούω) : 헬라어 원어해석(김준남 목사)
‘자녀들아 주 안에서 너희 부모에게 순종하라 이것이 옳으니라’(엡6:1)
‘순종하라’로 번역된 헬라어 동사‘휘파쿠오’(ὑπακούω)는 ‘아래에, 곁에, 의해서,’라는 전치사 ‘휘포'(ὑπο)와 ‘청각 기능을 부여받다, 귀머거리가 아닌, 듣다, 귀기울이다, 소문을 내다, 들려오다’라는 ‘아쿠오’(ακούω)의 합성어에서 파생된 단어로 ‘아래에서 듣다, 주의 깊게 듣다, 따르다, 명령에 귀 기울이다, 순종하다, 복종하다, 유의하다’라는 의미를 가지고 있으며 명사형은 ‘경청, 복종, 순종’의 뜻인 ‘휘파코에’(ὑπακοή)이다. ‘휘파쿠오’(ὑπακούω)는 단순히 ‘순순히 따르다’라는 ‘행함’이 전제된 의미에서의 ‘순종하라’를 말하는 것이 아니라,‘주의 깊게 들어라, 말씀에 귀를 기울이라’는 ‘들음’이 전제된 의미에서의‘순종하라’는 뜻을 가지고 있는 것이다.
70 인역에서 ‘휘파쿠오’(ὑπακούω)로 번역된 히브리어가 ‘주의 깊게 듣다, 조심스럽게 듣다, 확실히 듣다, 부지런히 듣다, 찬송하다, 동의하다, 선포하다, 울리다, 소리를 내다’의 뜻을 가진 ‘솨마’(שמע)이다. 신명기 6장 4절에
나오는 ‘이스라엘아 들으라!(שמע) 우리 하나님 여호와는 오직 하나인 여호와시니’에서 ‘들으라! 이스라엘’로 알고 있는 ‘쉐마(שמע) 이스라엘’은 보 통 ‘쉐마’(שמע)로 줄여 부르기도 하며, (신6:4-7) (신11:13-21) (민15:37-41)의 말씀을 매일 아침 저녁으로 예배 때에 읊는 기도를 말한다.
또한 ‘솨마’(שמע)라는 단어가 처음 나오 는 곳이 창세기 3장 8절 ‘… 그들이 여호와의 음성을 듣고(שמע)…’이며 그 외 수많은 곳에서 ‘솨마’ (שמע)를‘듣다’로 번역하고 있다. 창조주 하나님의 말씀 앞에 피조물인 인간이 할 수 있는
것은 오직 ‘듣는’(솨마 : שמע)것 뿐이다. 그 말씀을 어떻게 해보려고 행하려는 것 자체가 하나님 처럼 되버린 인간의 불순종이 되는 것이다. 왜냐하면 하나님의 말씀은 하나님 스스로가 이루시겠다는 약속이기 때문이다.
정리하면, 휘파쿠오(ὑπακούω)는 ‘행하여 순종하라’라는 의미가 아니라 ‘주의 깊게 듣고 마음에 새기라’는 것이며
‘너의 말을 죽이고 나의 말을 가지라’는 의미인 것이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는 성도는 그 말씀을 지켜보겠다고 행하는 자가 아니라, 그 말씀이 하나님의 마음인줄 알아 그 말씀에 자세히 귀를 기울이는(ὑπακούω)
것이며, 내 마음에 품는(ὑπακούω)것이고 하나님의 마음을 내 마음으로 갖는 (ὑπακούω) 진정한 찬송(ὑπακούω)을 드리는 하나님의 아들인 것이다. [휘파쿠오(ὑπακούω) : 순종하라]
8. 섬기는 자 디아코노스(διάκονος ) : 헬라어 원어해석(김준남 목사)
‘섬기는 자’로 번역된 헬라어 ‘디아코노스’(διάκονος ) 는 ‘심부름을 가다’라는 의미를 가진 ‘디아코’(diaco)에 어원을 두고 있는 ‘시종인, 명령을 수행하는 사람, 종, 수행자, 대사’라는 뜻이다.
명사 ‘디아코노스’(διάκονος )에서 유래된 동사형은 ‘수행원이 되다, 종이 되다, 길들여지다, 봉사하다, 기다리다’는 뜻을 가진 '디아코네오'(διακονέω)이다. 성경 여러 곳에서 ‘하인, 일꾼, 집사’로 번역된 '섬기는 자'(διάκονος )의 성경적 의미를 알기 위해서는 성경에 쓰여진 용례에서 찾을 수 있다.
‘섬기는 자’는 ‘가장 위대한 완성이 됨’마20:26) (메가스 게네스다이 : μέγας γενέσθαι), ‘최후, 마지막‘막9:35)(에스카토스 : ἔσχατος), ‘하나님의 사랑을 받는 자’(요12:26)의 의미를 가지고 있으며 그런 분은 오직 예수 그리스도밖에 없다. 그래서 성경은 하나님의 사자(διάκονος)인(롬13:4) 그리스도가 수종자(διάκονος)가 되신다 (롬15:8
)고 말씀하고 있다. 우리는 예수님을 섬기려 한다. 그러나 섬길 자격도 없고 섬길 능력도 없다. 이 말은 일차적으로 예수님이 우리를 섬기신다는 것이며, 우리는 반드시 예수님의 섬김을 받아야 하는 존재라는 사실을 알아야 한다는 것이다.
‘인자가 온 것은 섬김(διακονέω)을 받으려 함이 아니라 도리어 섬기려(διακονέω)하고 자기 목숨을 많은 사람의 대속물로 주려 함이니라’(마20:28, 막10:45)는 말씀에서 예수님이 이 땅에 오신 이유가 섬김을 받으려 함이 아닌 섬기러 오셨다는 사실이다.
그리고 그 '섬기는 자'(διάκονος)이신 예수님의 섬김은 ‘자기를 낮추시고 죽기까지 복종하셨으니 곧 십자가에 죽으심’(빌2:8)으로 나타났으며, 바로 그 십자가에서 ‘내’가 죽었고 ‘그리스도’로 살게 되었다(갈2:20).‘무릇 하나님의 영으로 인도함을 받는 사람은 곧 하나님의 아들이라’(롬8:14)는 말씀에서 하나님의 말씀으로 섬김을 받는 자가 바로 하나님의 아들이라는 것이다. 성도는 오직 그리스도의 영, 말씀으로 섬김을 받는 자이며, 그렇게 말씀으로 섬김을 받는 자가 진정 하나님을 '섬기는 자'(διάκονος)이다. [디아코노스(διάκονος ) : 섬기는 자]
9. 새로운 카이노스(καινός) : 헬라어 원어해석(김준남 목사)
‘그런즉 누구든지 그리스도 안에 있으면 새로운 피조물이라 이전 것은 지나갔으니 보라 새 것이 되었도다’(고후 5:17)
‘새로운’으로 번역된 헬라어 '카이노스'(καινός)는 ‘새로운, 신선한, 최근의, 낡지 않은 , 새로운 종류의, 고귀한, 보기드문’의 의미를 가지고 있다. 이 단어는 '네오스'(νέος)와 비교하여 볼 때 더욱 확실한 의미를 알 수 있다. 네오스(νέος)는 기본적으로 '새로운'이라는 의미를 가지고 있는데 ‘젊은, 신선한, 재생시킨, 방금 태어난, 어린’이라는 단어로 번역되며 ‘…와 비교하여 새로운’의 의미로 이해할 수 있다.
즉, 묵은 포도주와 비교하여 새(νέος) 포도주(마9:17), 첫째 아들과 비교하여 둘째(νέος) 아들(눅15:13), 늙은 자와 비교하여 젊은(νέος)자(눅22:26), 옛 사람과 비교해서 새(νέος) 사람(골3:10), 옛 언약과 비교하여 새(νέος) 언약(히12:24)의 용례가 신약성경에 나타나있다. 반면에 '카이노스'(καινός)는 ‘완전히 다른, 차원이 다른’의미에서의 ‘새로운’이란 의미로 이해해야 한다.
즉, '새'(καινός) 부대(마9:17), '새'(καινός) 교훈(막1:27), '새'(καινός) 옷(눅5:36), '새'(καινός) 계명(요13:26), ‘새로운’(καινός) 피조물(5:17), '새로'(καινός) 지음 받은 자(갈6:15), '새'(καινός) 사람(엡4:24), '새'(καινός) 하늘과 '새'(καινός) 땅(벧후3:13, 계21:1)등의 용례를 통해서 볼 때 땅적 차원이 아닌 하늘적 차원의 것이며 유일하고 영원한 것으로써의 의미임을 알 수 있다.
이 땅에서 우리가 이해할 수 있는 새로운 것이란 오직 비교하여서 새로운 것, 이전 보다 나아져 변화된 새로운 것의 의미인 '네오스'(νέος)이다. 다시 말하면 성경이 말하는 ‘새(καινός) 사람’의 개념은 인간 스스로 계속적인 노력의 과정 또는 결과로써의 변화된 '새'(νέος) 사람과 다르다.
좀 더 구체적으로 ‘새 사람을 입었으니 이는 자기를 창조하신 이의 형상을 따라 지식에까지 새롭게 하심을 입은 자니라’(골3:10)는 말씀에서 ‘새’(네오스 : νέος)와 ‘새롭게 하심을 입은’(아나카이노오 : ἀνακαινόω - ἀνα와 καινός의 합성어에서 유래)으로 쓰인 단어가 다르다.
이 것도 성도는 옛 사람과 거기에서 나오는 옛 행위(골3:9)와 비교해서 '새'(νέος) 사람을 입었다는 것이며 그리고 결국 하나님의 형상으로 하늘적 차원의 ‘새로운’(καινός) 존재, 아들이라는 사실을 더욱 구체적으로 설명하는 말씀인 것이다. [카이노스(καινός) : 새로운]
10. 소망 엘피스(ἐλπίς) : 헬라어 원어해석(김준남 목사)
성경은 ‘우리가 '소망'(ἐλπίς)으로 구원을 얻었다…’(롬8:26)고 기록하면서 ‘그 소망(ἐλπίς)은 보이는 '소망'
(ἐλπίς)이 아니다’라고 분명히 말씀하고 있다. 눈에 보이는 것은 변할 것이며, 결국 사라질 것이기에 그것을 소망으로 삼는 것은 멸망(구원얻지 못함)이지만, 참 소망은 영원하고 변하지 않는 것이기에 유한한 육신의 눈으로는 절대로 볼 수 없고 그것으로 구원을 얻게 된다는 의미이다.
그리고 구원받은 백성들에게 있어서 하나님의 나라가 실제요 현실이지만, 눈에 보이지 않기 때문에 '소망'(ἐλπίς)으로 표현한 것이다. 하나님은 우리에게 눈에 보이지 않는 참 '소망'(ἐλπίς)을 알게 하기 위해서 눈에 보이는 것을
'소망'(ἐλπίς)으로 주셨다. 그래서 눈에 보이는 '소망'(ἐλπίς)을 통해서 눈에 보이지 않는 '소망'(ἐλπίς)을 알도록 하신 것이다. 그것이 바로 성경, 예수, 십자가, 성전…등이며, 우리가 살고 있고 볼 수 있는 이 세상(κόσμος)에 있는 모든 것이다.
그러나 선악의 주체가 된 인간은 눈에 보이는 모든 것들을 선(καλός)과 악(κακός)으로 구분하여, 자기 수준에서 선(καλός)이라고 생각한 것을 선택하여 '소망'(ἐλπίς)으로 삼아버렸다. 그 소망은 절대로 구원을 줄 수 없으며 단지 우상(에이돌론: εἴδωλον)에 불과한 것이다.'소망'으로 번역된 헬라어 '엘피스'(ἐλπίς)는 ‘항상 기꺼이 예기하다’라는 뜻을 가진 '엘포'(elpo)에서 유래된 단어로 ‘나쁜 기대, 두려움, 좋은 기대, 희망, 영원한 구원에 대한 즐거운 확신에 찬 기대, 희망하는 장본인’이란 의미를 가지고 있다.
'소망'(ἐλπίς)이라는 의미 속에는 ‘나쁜 기대와 좋은 기대’라는 서로 상반된 뜻이 들어가 있다.
이것은'소망'(ἐλπίς)하는 자, 즉 소망하는 장본인, 소망의 주체자가 매우 중요하다는 의미를 내포하고 있다. 생명이 없는 자의 '소망'(ἐλπίς)은 그 자체가 사망이요, 생명이 있는 자의 '소망'(ἐλπίς)은 그 자체가 영생이며, 창세전 언약의 백성들의 '소망'은 구원이요, 창세전 언약의 백성이 아닌 자들의 '소망'은 멸망이 되는 것이다.
멸망 받을 '소망'을 가진 자는 결국 '소망'없는 자 (살전4:13)라는 의미이다.
그러기에 창세전 언약의 백성인 성도들은 눈에 보이지 않는 '소망'(ἐλπίς)을 참 '소망'(ἐλπίς)으로 가진 자이며, 영원한 구원에 대한 즐거운 확신에 찬 '소망'(ἐλπίς), 변치 않고 확실하며 영원한 '소망'(ἐλπίς)을 가진 자이다.
그리고 이미 완료된 하나님 나라인 그 '소망'(ἐλπίς)을 가진 자로 또한 그 '소망'(ἐλπίς)을 '소망'(ἐλπίς)하며 '지금 그리고 여기'(now and here)를 사는 자인 것이다. [엘피스(ἐλπίς) : 소망]
11, 시험하다 도키마조( δοκιμάζω ) : 헬라어 원어해석(김준남 목사)
‘시험하다’라고 번역된 헬라어 '도키마조'( δοκιμάζω )는 ‘시험하다, 검사하다, 입증하다, 정밀하게 조사하다,
검사 후에 진짜라고 인정하다, 입증하다, 가치 있게 여기다’라는 의미이고 또 다른 헬라어 '페이라조'(πειράζω)는
‘철저하게 시험하다(to test thoroughly)’라는 의미이다.
한국어 성경에서는 도키마조와 페이라조를 동일하게‘시험하다’라는 말로 번역해 놓음으로써 독자로 하여금 약간의 오해를 가져올 수 있는 소지가 있다. 보통 하나님께서 주시는 시험을 '도키마죠'(Test)라고 하고 사단이 주는 시험을 '페이라조'(Temtation)로 이해하고 있다. 물론 일반적이며 좋은 해석이라고 볼 수 있다.
그러나 어느 누구에게도 '페이라조'의 시험을 받지 않으시는 예수님이 마귀에게 '페이라조'의 시험을 받고(눅4:2 - 마귀에게 시험{페이라조}을 받으시더라),
또한 누구도 '페이라조'의 시험을 하지 않으시는 예수님께서 '페이라조'의 시험을 하신다(요6:6 - 이렇게 말씀하심은 친히 어떻게 하실지를 아시고 빌립을 시험{페이라조}하고자 하심이라).
‘사람이 시험(페이라조)을 받을 때에 내가 하나님께 시험(페이라조)을 받는다 하지 말지니 하나님은 악에게 시험(페이라조)을 받지도 아니하시고 친히 아무도 시험(페이라조)하지 아니하시느니라(약 1:13)’
이 부분을 이해하기가 쉽지않다.
그래서 좀더 확실한 이해를 위해서 시험의 성경적 의미를 살표보아야 한다.
'도키마조'( δοκιμάζω )의 시험은 그 단어의 목적이 시험을 통해서 숨겨진 진리의 말씀을 깨달아 알도록 하는데 있고, '페이라조'(πειράζω)의 시험은 그 단의 목적이 시험을 통해서 완전히 망하게 하는데 있다. 다시말하면 누가 시험을 주느냐 보다는 시험을 당하는 당사자 즉 나 자신이 어떤 존재인가가 더 중요한 것이다. 삶의 현장에서 닥치는 수많은 사건, 사고를 일종의 시험들이라고 볼 수 있다. 그러한 사건, 사고를 표피적으로 보아 판단해 버리면 결국엔 망할 수 밖에 없는 '페이라조'의 시험에 빠지는 것이요, 사건, 사고를 통해서 그것이 좋은 것이든, 말할 수 없는 고통스러운 것이든 나에게 주시는 하나님의 말씀을 찾을 수 있다면 그는 생명으로 가는 '도키마조'의 시험, 참 좋은 시험을 받은 것이다.
그러기에 진리의 말씀이 있는 참 성도에게는 오직 '도키마조'의 시험만 있을 뿐이다. '페이라조'의 시험은 생명없는 죽은자가 받고 영원히 멸망받게 되는 것이다. 멸망의 시험(페이라조)을 받는 이유는 죽어야할 ‘나’인 영원한 멸망받을 인간의 욕심, 정욕(에피두미아 -ἐπιθυμία) 때문이다(약1:14). ‘나’를 죽이는 참 좋은 '도키마조'의 시험을 통하여
‘그리스도’로 사는 자(갈2:20), 그가 성도인 것이다. [도키마조( δοκιμάζω) :시험하다]
12, 시인하다 호몰로게오(ὁμολογέω) : 헬라어 원어해석(김준남 목사)
‘입으로 예수를 주로 시인하면 구원을 얻는다’(롬10:9)는 말씀에서 ‘시인하다’로 번역된 헬라어 단어가 ‘호몰로게오(ὁμολογέω)’이다. 이 단어는 ‘동의하다, 인정하다, 고백하다, 자유롭게 말하다, 찬양하다, 축하하다, 다른 사람처럼 똑 같은 것을 말하다’등 다양한 의미를 가지고 있다. 어원을 살펴보면 좀 더 깊은 성경적 의미가 있음을 알게 된다.
'호몰로게오'(ὁμολογέω)는 ‘함께, 같이’라는 소유격 부사인 '호무'(ὁμοῦ)의 어간과 ‘말씀’이라는 '로고스'(λόγος)의 합성어에서 파생된 단어이다. 좀더 구체적으로 '호무'(ὁμοῦ)는 ‘동일한 것’이라는 의미를 가지고 있는 ‘호모스’
(homos)에 기원을 둔 단어이며, '로고스'(λόγος)는 사도 요한에게 있어서 ‘하나님의 말씀의 본질인 예수 그리스도’
(요1:1)를 가리키고 있는 단어이다.
정리하면, '호몰로게오'(ὁμολογέω)는 '하나님의 말씀과 같은 말로 말하다, 예수 그리스도의 마음과 같은 마음으로 말하다, 예수 그리스도로 말하다’의 의미를 가지고 있는 것이다.‘동의하며 시인한다’라는 고백이 ‘내 말이 죽어 그리스도의 말씀만 있는 상태’를 전제로 한 동의와 시인이라면 ‘내가 십자가에서 죽었고 그리스도로 살아’(갈2:20)있는 상태에서 오히려 그리스도가 동의하고 시인한다 는 의미를 포함하고 있는 것이다.
여전히 선악의 주체로서의 내가 아무리 예수를 주로 시인한다 할찌라도 그것은 단순히 울리는 꽹가리에 불과하며 하나님에게는 전혀 들리지 않는 헛된 메아리에 불과한 것이다. 나는 십자가에서 예수와 함께 죽었고, 이제는 내가 된 그리스도가 시인하는 것만 하나님이 받으시고 그렇게 시인하는 자를 아들로 부르시는 것이다 . 그러므로 성도의 '호몰로게오'(ὁμολογέω)야 말로 진정한 영적 자유의 고백이며, 하나님을 찬양하는 것이고 축하하는 것이 된다.
[호몰로게오(ὁμολογέω) : 시인하다]
13, 쉬지말고 아디알레입토스(ἀδιαλείπτως) : 헬라어 원어해석(김준남 목사)
‘쉬지말고 기도하라’(살전5:17)
‘쉬지말고’로 번역된 ‘아디알레입토스’(ἀδιαλείπτως)는 ‘중단 없는, 끊임없는, 지속적인, 계속적인, 영원한’의
가진 형용사 ‘아디알레입토스’(ἀδιἀλειπτως – 부사형과 비교해서 악센트 위치만 틀림)의 부사형으로 ‘연속해서, 생략 없이, 끊임없이, 쉼 없이’라는 의미를 가지고 있다.
그리고 부사형인 ‘아디알레입토스’(ἀδιἀλειπτως)는 부정적 불변사인 ‘아’(ἀ)와 ‘통하여, 때문에, 항상, 가운데’의 뜻을 가진 전치사 ‘디아’(διἀ)와 ‘떠나다, 두고 가다, 저버리다, 처지다, 열등하다, 가지지 않다, 부족하다, 결핍하다,
실패하다, 결석하다’의 뜻을 가진 ‘레이포’(λείπω)의 합성어에서 파생된 단어이다.
이렇게 원래의 단어가 가지고 있는 의미를 통해서 ‘아디알레입토스’(ἀδιαλείπτως)가 가지고 있는 ‘끊임없이 쉬지말고’의 의미를 정리하면, ‘결코 떠나거나 두고 가지 않고, 언제나 부족하여 결핍함이 절대로 없고 그리고 단 한번의 실패도 있지 않는 쉬지말고’라는 의미가 되는 것이다.
기본적으로 이 단어는 피조물인 유한한 인간에게 해당되는 단어가 아니다. ‘쉬지말고(ἀδιαλείπτως)기도하라’
(살전5:17)는 말씀은 시간을 정해 놓고 기도하라는 것도 아니고 최선을 다해서 시간을 쪼개면서까지 기도하라는 것도 아닌 모든 시간에 쉬지말고 기도하라는 것이다. 선악의 주체가 된 인간은 끊임없이 자기만을 위해서 살아갈 수 밖에 없는 자인데 어떻게 하나님과 대화라고 말하는 기도를 쉬지 않고 할 수 있다는 것인가? 오히려 나름대로 최선을 다해서 기도해 보겠다는 바리새인들의 기도를 가리켜 예수님은 외식적인 기도요, 중언부언하는 기도(마6:5-7)라고 말씀하시면서 그런 것은 진정한 기도가 아님을 가르쳐 주고 있다.
‘쉬지말고’(ἀδιαλείπτως)의 기도는 오직 말씀이신 예수님만이 하실 수 있는 기도이다. 그러기에 ‘쉬지말고 기도하라’는 의미는 한마디로 ‘기도가 되라(포이에오 : ποιέω)’는 뜻으로 이해할 수 있으며 하나님 처럼의 내가 죽고 내 안에 그리스도가 살아 그리스도로 기도하라는 것이다. 그래야 비로서 바울이 말하고 있는 쉬지않는 기도인 하나님과 끊임없이(ἀδιαλείπτως)대화를 나눌 수 있는 것이다.
그러므로 성도는 말씀을 품은 자로써 하나님의 모든 창조물 속에 담겨진 말씀을 보며 또한 삶의 현장에서 경험하는 모든 사건 사고를 통하여서도 그 안에 담겨진 말씀을 보고 그 말씀이신 하나님과 쉬지않고 대화를 나누며 사는 자,
쉬지않고(ἀδιαλείπτως)기도하는 자이다. [아디알레입토스(ἀδιαλείπτως) : 쉬지말고]
14, 사모하라 에피포데오(ἐπιποθέω) : 사모하라 (to yearn after, long for) 헬라어 원어해석(김준남 목사)
‘갓난 아기들 같이 순전하고 신령한 젖을 사모하라 이는 그로 말미암아 너희로 구원에 이르도록 자라게 하려 함이라’(벧전2:2)
‘사모하라’로 번역된 헬라어 ‘에피포데오’(ἐπιποθέω)는 ‘위에, 곁에서, 대해서, 에서 떨어져서 위에, 건너편에’의 뜻을 가진 전치사 ‘에피’(ἐπί)와 ‘동경하다’의 뜻을 가진 ‘포데오’(potheo)의 합성어에서 파생된 단어로 ‘사랑에 빠지다, (합법적으로 혹은 부당하게) 갖기를 소원하다, (열심으로, 심히) 원하다, (대단히) 갈망하다, 사랑으로 밀고 나가다, 욕정이 타오르다, 금지된 욕망을 품다’라는 의미를 가지고 있다. 이 단어에서 파생된 단어로 여성형 명사인
‘갈망, 열렬한(격렬한) 소원’의 뜻을 가진 ‘에피포데시스’(ἐπιπόθησις)와 ‘강한 동경, 심한 소망’의 뜻을 가진 ‘에피포디아’(ἐπιποθία)가 있다.
좀더 구체적으로 ‘에피포데오’(ἐπιποθέω)가 뜻하는 ‘사모하라’라는 단어의 의미는 진리의 말씀이 없이는 살 수 없으며 존재도 아님을 깨달아 그 말씀에 목말라하는 심령이 '가난한 자'(프토코스 : πτωχός)로서 하나님 주시겠다고 약속하신 그 생명의 말씀만을 강력하게 갈망하며 합법적으로 갖기를 소원하는 것이다.
그러나 이와는 반대로(ἐπί) 하나님이 주시고자 하는 그 진리의 말씀을 동경하지(potheo) 아니하고 선악의 주체로서 자신의 자아만을 챙기려 부당하게 갖기를 소원하는 것이며 그러한 금지된 욕망을 품는 것이고 욕정이 타오는 것을 의미하기도 하는 것이다. 성경은 그것을 율법으로 말미암는 죄의 정욕(파데마 : πάθημα)이라고 말하고 있다(갈5:24).
그래서 베드로는 성도들을 향하여 갓난 아이들 같이 생명의 말씀인 순전하고 신령한 젖을 사모할(ἐπιποθέω) 것을 말하고 있으며, 그것이 바로 구원받은 자들의 이 땅에서의 삶이라고(벧전2:2) 가르쳐 주고 있다.
사도바울도 하늘로부터 오는 우리 처소로 덧입기를 간절히 사모한다(ἐπιποθέω)고 고백하고 있으며(고후5:2) 성도들을 향하여서는 예수 그리스도의 심장으로 열렬히 사모한다(ἐπιποθέω)고 고백하고 있다(빌1:8). 그리고 야고보는 하나님이 우리 속에 거하게 하신 성령이 시기하기까지 사모한다(ἐπιποθέω)고 말하고 있다(약4:5).
그러므로 성도는 허물과 죄로 죽은 자가 구하는 썩을 양식에 목말라 하는 자가 아니요, 하나님이 우리에게 주시려고 간절히 소망하는 바로 그 진리의 말씀인 영생하도록 있는 양식에 목숨을 거는 자(요6:27)이다. 뿐만 아니라 하나님의 마음인 그 말씀을 간절히 사모하는(ἐπιποθέω)것이야 말로 말씀에 이끌려 사는 것이요 하나님을 진정으로 사랑하는 것이기에 그가 바로 하나님과 사랑에 빠진(ἐπιποθέω)자라 할 수 있는 것이다.
[에피포데오(ἐπιποθέω) : 사모하라]
원어단어 ‘ㅇ’ 에 해당하는 단어들
1. 의 2. 임하다 3. 은혜 4.예정 5. 영광 6. 율법 7. 영 8.언약 9. 온전한 10.예배하다 11.약속 12.연합한
13. 어둠 14. 오래 참음 15 이기다 16. 온전히 결실하다 17.약속 18. 연단 19.어리석음 20. 인내 21. 여자
22. 외식하는 자 23, 잃다 24, 염려하다 25, 알다 26, 우상 27, 이름 28,일용할 29, 오늘 30,인치다
31,이루다 텔레오(τελέω) 32, 이루다 플레로오(πληρόω) 33, 이방인
1. 의 ‘의’ 디카이오쉬네(δικαιοσύνη) : 헬라어 원어해석(김준남 목사)
‘의에 주리고 목마른 자는 복이 있나니 그들이 긍휼히 여김을 받을 것임이요’(마5:6)
‘의’로 번역된 헬라어 단어 ‘디카이오쉬네’(δικαιοσύνη )인데, 넓은 의미에서 ‘의, 하나님이 받으실 만한 조건’, 좁은 의미에서 ‘각자에게 책임으로 주어진 정의와 도덕’이란 의미를 가지고 있다. 디카이오쉬네(δικαιοσύνη)의 형용사형은 ‘의로운, 신의 법에 순종하는, 거룩한, 흠없는’의 뜻을 가진 ‘디카이오스’(δίκαιος)인데 이 단어는 ‘옳은,
공의, 심판, 처벌, 복수, 옳바름’의 뜻을 가진 ‘디케’(δίκη)에서 파생되었으며,‘디케’(δίκη)는 ‘보여주다, 증거를 제시하다, 말이나 가르침으로 나타내다’라는 의미를 가지 ‘데이크뉘오’(δείκνυω)에서 유래되었다.
성경은 ‘의인(δίκαιος)은 없나니 하나도 없나니’(롬3:10)라고 말씀하고 있다. 이 말씀은 하나님이 받으실 만한 조건으로서의 ‘의’(δικαιοσύνη)는 인간에게서는 나올 수 없다는 것이다. 뿐만아니라 ‘의’(δικαιοσύνη)속에는 ‘공의와 심판과 처벌’이라는 의미가 모두 포함되어 있다는 사실에서 죄인인 인간에게 해당되는 말이 아닌 것이다.
신약성경에 기록된 ‘의’(δικαιοσύνη)의 좀더 구체적인 성경적 개념을 알기 위해서는 이 단어가 번역된 히브리어를 살펴보아야 한다. 70인역에서 ‘의’(δικαιοσύνη)로 번역한 히브리어 단어가 ‘쩨데크’(צךק)인데 이 단어는 ‘올바르다, 의롭게하다, 의를 나타나게하다, 정의를 행하다 또는 가져오다’라는 형용사 ‘짜다크’(צךק)에서 유래 되었다.
‘여호와여 주는 의로우시고(צךק)주의 판단은 옳으니이다’(시119:137)는 말씀에서 하나님 그분이 바로 ‘의’(צךק)
이심을 알 수 있다. 이 말은 ‘하나님은 죄가 없고 도덕적, 윤리적으로 완전하신 분이다’라는 의미가 아니라, 언약의 관계에서 ‘의’(צךק)이신 하나님께서 스스로 의를 행하신다는 의미인 것이다.
그래서 ‘의’(δικαιοσύνη)이신 하나님께서 말씀 육신이 되어 이땅에 오셨으며(요1:14), 하나님의 백성들과의 언약을 십자가에서 이루신 것이다. ‘이것은 죄 사함을 얻게 하려고 많은 사람을 위하여 흘리는바 나의 피 곧 언약의 피니라’(마26:28) 또한 ‘쩨데크’(צךק)를 파자하면, ‘잡아서 구분하여 죽이고 살리신다’는 의미를 가지고 있다.
성도의 ‘의’(δικαιοσύνη )’란 하나님의 언약의 말씀 안에서 하나님의 열심으로 하나님 처럼의 ‘나’를 십자가에서 죽이시고 ‘그리스도’로 살게 하시는(갈2:20) 하나님의 은혜의 선물인 것이다. [디카이오쉬네(δικαιοσύνη ) : 의]
2. 임하다 에펠코마이(?π?ρχομαι) :임하다 (to come upon) 헬라어 원어해석(김준남 목사)-
‘오직 성령이 너희에게 임하시면 너희가 권능을 받고 예루살렘과 온 유대와 사마리아와 땅 끝까지 이르러 내 증인이 되리라 하시니라’(행1:8)
‘임하다’로 번역된 ‘에펠코마이’(?π?ρχομαι)는 ‘(속격을 지배할 때) 위에, 가까이에, 가에, 앞에, …에 대한, …을, 대해서’의 뜻을 가지며 합성어로 쓰일때는 ‘…에, …위에’의 뜻을 가진 전치사 ‘에피’(?π?)와 ‘오다, (문자적 혹은 상징적으로) 가다, 동반하다, 가져오다, 떨어져 나가다, 자라다, 들어오다, (은유적으로) 존재하다, 일어나다, 나타나다, 자신을 보이다’의 뜻을 가진 ‘엘코마이’(?ρχομαι)의 합성어에서 파생된 단어로 ‘잇달아 일어나다, 다다르다, 일어나다, 임박하다, 공격하다, 닥쳐오다, (상징적으로) 영향을 미치다, 머지 않았다, 미래적이다, 엄습하다, 불시에 닥치다’의 의미를 가지고 있다.
이 단어는 특별히 ‘천사가 대답하여 이르되 성령이 네게 임하시고(?π?ρχομαι) 지극히 높으신 이의 능력이 너를 덮으시리니…’(눅1:32), ‘더 강한 자가 와서(?π?ρχομαι) 그를 굴복시킬 때에는…’(눅11:22), ‘사람들이 세상에 임할(?π?ρχομαι)일을 생각하고 무서워하므로 기절하리니…’(눅21:26) 그리고 ‘이 날은 온 지구상에 거하는 모든 사람에게 임하리라(?π?ρχομαι)’(눅21:35)는 말씀을 통해서 볼 때, 복음서 중에서 유일하게 누가복음에만 쓰여진 단어이다.
누가복음과 사도행전의 저자인 누가가 사용한 ‘에펠코마이’(?π?ρχομαι)라는 단어는 ‘미래에 반드시 일어나고 불시에 닥치며 위로부터 불가항력적으로 임하다’의 의미를 내포하고 있으며, 이것은 또한 은유적으로 하나님 자신을 보여 주시는 것으로도 볼 수 있는 것이다. 그래서 누가는 요엘서 2장 28절의 말씀을 인용하면서 ‘하나님이 말씀하시기를 말세에 내가 내 영을 모든 육체에 부어 주리니 너희의 자녀들은 예언할 것이요 너희의 젊은이들은 환상을 보고 너희의 늙은이들은 꿈을 꾸리라’(행2:17)고 기록하였던 것이다.
이 말씀은 ‘마침내 위에서부터 영을 우리에게 부어 주시리니…’(사32:15)라고 말한 이사야의 예언을 배경으로 하고 있음을 알 수 있으며, 하나님이 불가항력적으로 부어주시는 하나님의 은혜인 성령이 임하시면(?π?ρχομαι) 그 결과로 하나님의 진리의 말씀을 전하는 '권능'(뒤나미스 : δ?ναμι?)을 받게 되고 그 말씀의 목격자요 순교자(말튀스 : μ?ρτυ?)가 되는 것이다.
그러므로 성도는 위로부터 하나님이 부어주시는 성령의 임재(?π?ρχομαι)를 경험한 자로써 이제는 더 이상 내 말이 아닌 그리스도의 영인 진리의 말씀으로 충만한 자이며, 오늘도 정욕과 욕심의 주체인 내가 십자가에서 죽고(갈5:24
)오직 내 안에 그리스도가 살아 생명의 말씀을 증거하며 말씀이 되어 그 말씀으로 살아가는 자이다.
'사마리아와 땅 끝까지 이르러 내 증인이 되리라 하시니라’(행1:8)
‘임하다’로 번역된 ‘에펠코마이’(?π?ρχομαι)는 ‘(속격을 지배할 때) 위에, 가까이에, 가에, 앞에, …에 대한, …을, 대해서’의 뜻을 가지며 합성어로 쓰일때는 ‘…에, …위에’의 뜻을 가진 전치사 ‘에피’(?π?)와' ‘오다, (문자적 혹은 상징적으로) 가다, 동반하다, 가져오다, 떨어져 나가다, 자라다, 들어오다, (은유적으로)존재하다, 일어나다, 나타나다, 자신을 보이다’의 뜻을 가진 ‘엘코마이’(?ρχομαι)의 합성어에서 파생된 단어로 ‘잇달아 일어나다, 다다르다, 일어나다, 임박하다, 공격하다, 닥쳐오다, (상징적으로) 영향을 미치다, 머지 않았다, 미래적이다, 엄습하다, 불시에 닥치다’의 의미를 가지고 있다.
이 단어는 특별히 ‘천사가 대답하여 이르되 성령이 네게 임하시고(?π?ρχομαι) 지극히 높으신 이의 능력이 너를 덮으시리니…’(눅1:32), ‘더 강한 자가 와서(?π?ρχομαι) 그를 굴복시킬 때에는…’(눅11:22), ‘사람들이 세상에 임할(?π?ρχομαι) 일을 생각하고 무서워하므로 기절하리니…’(눅21:26) 그리고 ‘이 날은 온 지구상에 거하는 모든 사람에게 임하리라(?π?ρχομαι)’(눅21:35)는 말씀을 통해서 볼 때, 복음서 중에서 유일하게 누가복음에만 쓰여진 단어이다.
누가복음과 사도행전의 저자인 누가가 사용한 ‘에펠코마이’(?π?ρχομαι)라는 단어는 ‘미래에 반드시 일어나고 불시에 닥치며 위로부터 불가항력적으로 ‘임하다’의 의미를 내포하고 있으며, 이것은 또한 은유적으로 하나님 자신을 보여 주시는 것으로도 볼 수 있는 것이다. 그래서 누가는 요엘서 2장 28절의 말씀을 인용하면서 ‘하나님이 말씀하시기를 말세에 내가 내 영을 모든 육체에 부어 주리니 너희의 자녀들은 예언할 것이요 너희의 젊은이들은 환상을 보고 너희의 늙은이들은 꿈을 꾸리라’(행2:17)고 기록하였던 것이다.
이 말씀은 ‘마침내 위에서부터 영을 우리에게 부어 주시리니…’(사32:15)라고 말한 이사야의 예언을 배경으로 하고 있음을 알 수 있으며, 하나님이 불가항력적으로 부어주시는 하나님의 은혜인 성령이 임하시면(?π?ρχομαι) 그 결과로 하나님의 진리의 말씀을 전하는 '권능'(뒤나미스 : δ?ναμι?)을 받게 되고 그 말씀의 목격자요 순교자(말튀스 : μ?ρτυ?)가 되는 것이다.
그러므로 성도는 위로부터 하나님이 부어주시는 성령의 임재(?π?ρχομαι)를 경험한 자로써 이제는 더 이상 내 말이 아닌 그리스도의 영인 진리의 말씀으로 충만한 자이며, 오늘도 정과 욕심의 주체인 내가 십자가에서 죽고(갈5:24) 오직 내 안에 그리스도가 살아 생명의 말씀을 증거하며 말씀이 되어 그 말씀으로 살아가는 자이다.
[에펠코마이(?π?ρχομαι) : 임하다 (to come upon)]
3. 은혜 카리스’(χάρις) : 헬라어 원어해석(김준남 목사)
‘말씀이 육신이 되어 우리 가운데 거하시매 우리가 그의 영광을 보니 아버지의 독생자의 영광이요 은혜와 진리가 충만하더라’(요1:14)
‘은혜’로 번역된 헬라어 단어‘카리스’(χάρις)는 ‘은혜, 기쁨과 즐거움, 선한 의지, 사랑, 호의, 긍휼, 은혜의 선물, 자비, 감사, 보답’라는 의미를 가지고 있다. 동사형으로는 ‘카이로’(χαίρω)인데 ‘즐거워하다, 기뻐하다, 잘 되다, 번성하다, 안부를 묻다, 인사하다, 환영하다, 축하하다’라는 의미이다.
국어사전에서‘은혜’라는 단어가 ‘고맙게 베풀어 주는 신세나 혜택’이라는 의미를 가지고 단순하게 하나님의 ‘은혜’(χάρις)를 정의한다면 성경이 말하고자 하는 본래의 의미를 간과할 수 있는 것이다.
헬라어인‘은혜’(χάρις)는 히브리어로 ‘헨’(חן)이라는 단어인데 ‘호의, 우아함, 매력, 자비, 은혜’라는 뜻으로 쓰인다. ‘헨’(חן)을 파자하면 ‘울타리 안에 무엇인가를 포함하고 있는 장소’라는 의미로써 여기서 파생된 ‘하나’(הנח)라는 단어가 ‘진을치다, 야영하다, 거절하다, 적대하여 포위하다, 거하다’라는 의미이다.
이러한 의미로 볼 때, ‘헨’(חן)이라는 단어는 하나님의 마음이 없는 자, 하나님처럼 되버린 자에게 있어서 ‘매력, 우아함’(חן)이란 그 자체가 ‘탐욕’(ἐπιθυμία)이라는 죄를 의미하기에 ‘죄를 안으로 간직함’이라는 의미를 가진다. 반면에 하나님의 마음이 있는 자에게 있어서 ‘헨’(חן)이라는 단어는 ‘완성된 진리로서의 생명을 안으로 간직함’이라는 의미를 가진다.
그래서 복음서가 예수님에 대해서 기록할 때, 그가 하나님의 생명의 말씀을 간직한자라는 의미에서 ‘하나님의 은혜(χάρις)가 있는 자’(눅2:40), ‘은혜로운(χάρις) 말을 하는 자’(눅4:22), ‘하나님의 은혜(χάρις)가 충만한 자’(요1:14
) 그리고 ‘은혜(χάρις)를 주는 자’(요1:17)로 표현하고 있는 것이다.
그러기에 사도행전에서는 사도들이 말씀을 전하는 능력인 큰 '권능'(δύναμις)으로 예수의 부활을 증거할 때 큰 은혜(χάρις) 즉, 하나님 생명의 말씀을 얻게 되었으며 스데반도 그 은혜(χάρις)가 충만하여 복음을 증거하였다고 기록되어 있는 것이다. 그러므로 성도는 ‘하나님의 생명의 말씀을 간직한 자’라는 의미의 ‘은혜’(χάρις)가 있는 자이며, 그 ‘은혜’(χάρις)를 증거하는 자이고 나아가 성도 자신이 바로 ‘은혜’(χάρις)가 되는 것이다.
‘주 예수의 은혜(χάρις)가 모든 자들에게 있을지어다. 아멘!’(계22:21) [카리스(χάρις) : 은혜]
4. 예정 프로오리조(προορίζω) : 헬라어 원어해석(김준남 목사)
‘그 기쁘신 뜻대로 우리를 예정하사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자기의 아들들이 되게 하셨으니’(엡1:5)
‘예정’으로 번역된 헬라어 ‘프로오리조’(προορίζω)는 ‘미리 제한하다, 미리 결정하다, 영원 전부터의 하나님의 명하심, 미리 규정하다’라는 뜻을 가지고 있다. 그리고 이 단어는‘…앞에, 최상의 라는 개념인 이전의’라는 의미를 가진 전치사 ‘프로’(προ)와 ‘표시하다, 경계를 짓다, 정의하다, 제한하다, 임명하다’라는 의미를 가진 ‘호리조’(ὁρίζω)의 합성어에서 파생되었다.
국어사전에서 ‘예정’(豫定)’이라는 단어가 ‘미리 정하거나 예상함’이란 의미로 쓰여져 있음을 연상하여 성경에 나오는 ‘하나님의 예정’이라는 단어를 문자 그대로 ‘하나님이 미리 정하심’으로 이해하여 하나님의 구원의 예정을 ‘하나님이 누군가는 정하시고 누군가는 정하시지 않았다’라고 섣불리 정의할 수는 없는 것이다.
오히려 구원에 관한 ‘프로오리조’(προορίζω)의 성경적 의미는 ‘너희가 그 은혜에 의하여 믿음으로 말미암아 구원을 받았느니 이것은 너희에게서 난 것이 아니요 하나님의 선물이라’(엡2:8)는 말씀에서 알 수 있듯이 '기본적으로 그 구원의 기준이 결코 인간의 행위로 말미암지 않고, 인간의 행함과 아무런 관련이 없는 오직 하나님의 은혜라는 것을 전제하고 있다는 의미에서 하나님의 기쁘신 뜻에 의한 은혜의 정하심이라는 복음의 본질을 보여주고 있다고 볼 수 있는 것이다.==>
(커페지기의 글 :하나님은 하나님의 아가페 사랑의 완성을 위하여 창세전 (엡 1:3-6)에 언약에 따라 하나님의 형상과 모양대로 사람을 창조하시는 그 목적은 아가페 사랑의 완성을 위한 예지(叡智) 예정(豫定)입니다. 하나님의 아가페 사랑을 깨닫게 되면 쉽게 정리가 됩니다. 칼빈이 하나님의 절대 주권으로 선택과 유기를 했다는 교리는 하나님의 아가페 사랑을 전혀 모르는 신성 모독입니다.
‘신성모독’으로 번역된 헬라어 ‘블라습헤미아’(βλασφημ?α)는 ‘상스러움,(사람에 대하여)중상의,(하나님에 대하여
) 불경건한, 참람한, 악한 말의, 중상하는, 비난하는 욕하는, 독설의’라는 뜻의 ‘블라습헤모스’(βλ?σφημο?)에서 파생된 단어로 ‘(특히 하나님에 대항하여) 중상, 참람, 악담, 조롱, 상처를 주는 말, 불경스럽고 비난하는 말, 신적 위엄을 손상시키는 말, 신성모독’의 의미를 가지고 있다.... 그런 의미에서 ‘블라습헤미아’(βλασφημ?α)가 말하는 ‘신성모독’이란 하나님이 우리에게 모든 이름 위에 뛰어난 이름, 유일한 이름인 예수 그리스도를 주셨는데(빌2:9) 오히려 하나님 처럼 된 인간이 자기의 말을 하며 자신의 이름만을 드러내는 것을 의미하는 것이다.)(카페지기의 글 마침)침2023년 4월 13일 오전11시 58분에 영으로 유효적절하다는 감동을 받았습니다.
==>즉, 하나님을 사랑하는 자는 하나님께서 이전에 목적하여 제시해 주신 바로 그 뜻(프로데시스 : πρόθεσι)인 구원의 계획안에서 부르심을 입은 자들이며 그들에게는 하나님의‘예정’(προορίζω)가운데 있는 구원이라는 선(아가도스 : ἀγαθός)을 이루게 되는 것이다(롬8:28).
또한 모든 일을 하나님의 뜻(프로데시스 : πρόθεσι)의 결정대로 일하시는 이의 계획을 따라 우리가 ‘예정’
(προορίζω)을 입어 그 안에서 영원한 구원으로써의 기업이 된 것이다(엡1:11).
구원에 관한 하나님의 예정하심에 대하여 ‘나는 구원 받은 자다 또는 구원 받지 못한 자다’라는 단순한 생각을 벗어버리고 하나님의 언약의 말씀으로 보고 하나님의 마음이라는 의미에서의 ‘예정’을 이해해야 할 것이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예정’(προορίζω)가운데 있는 성도란 아버지의 뜻을 알아 아버지의 마음이 그들의 마음에 넘겨진 자들을 말하는 것이며, 오직 그리스도만을 통하여(διά) 아들이 된 자이다. [프로오리조(προορίζω) : 예정]
5. 영광 독사(δόξα) : 헬라어 원어해석(김준남 목사)
‘말씀이 육신이 되어 우리 가운데 거하시매 우리가 그의 ‘영광’을 보니 아버지의 독생자의 ‘영광’이요 은혜와 진리가 충만하더라’(요1:14)
‘영광’으로 번역된 헬라어 단어 ‘독사’(δόξα)는 ‘생각하다, …처럼 보이다, 여겨지다, 상상하다, 간주되다’라는 뜻의 ‘도케오’(δοκέω)의 어간에서 파생되었으며, ‘의견, 판단, 견해, 장엄, 탁월, 현저, 존귀, 품위’라는 기본적인 의미를 가지고, 문자적인 면과 상징적인 면에서 ‘거룩, 위엄, 거룩한 영예, 찬양, 경배’라는 의미와 함께 ‘가장 영광스러운 상태, 가장 고귀한 상태’의 뜻으로 쓰이고 있다.
‘독사’(δόξα)의 히브리어는 ‘카보드’(דובכ)라는 단어인데 ‘무거움, 영광, 명에, 영광스러운, 존귀, 풍부’라는 뜻이며, 파자하면 ‘하나님의 것을 우리에게 넘겨주신 진리의 그 집이 열림’이라는 의미를 가지고 있다.
그리고 ‘카보드’(דובכ)의 동사형은 ‘카바드’(דבכ) 또는 ‘카베드’(דבכ)이며 (형용사형과 같다), 이 단어의 의미는
나쁜 의미에서 ‘짐이 되다, 엄하다, 둔하다, 무겁다’ 그리고 좋은 의미에서 ‘많다, 부유하다, 풍부하다’이다.
구약에서 ‘카보드’(דובכ)라는 단어가 사람에게 쓰일 때는 ‘거부’(창31:1,2), ‘존귀’(창43:19), ‘둔하고’, ‘뻣뻣하고’
(출4:10), ‘완강하고’(출7:14)등의 다양한 의미로 쓰이지만 하나님과 관련하여 쓰일 때에는 ‘여호와의 영광’(출16:7,10 ; 24:16,17등)이라는 여호와가 바로 ‘영광’(דובכ) 그 자체이며 자신을 보여주는 것 자체가 ‘영광’(דובכ)이라는 의미인 것이다.
그러기 때문에 하나님께서 이 땅에 말씀 육신으로 오신 예수님의‘영광’(δόξα)을 보는 것이 바로 아버지의‘영광’
(δόξα)을 보는 것이요(요1:14), 하나님이 바로 ‘영광’(δόξα) 그 자체라는 뜻이다.
그런 의미에서 성경에 기록된‘영광’(δόξα)을 국어사전이 정의하고 있는 ‘경쟁(競爭)에서 이기거나, 남이 하지 못한 어려운 일을 해냈을 때의 빛나는 영예(榮譽)’인 ‘영광’(榮光)으로 이해해서는 안되는 것이다. 그리고 그러한 인간의 ‘영광’을 하나님께 드린다고 말해서도 안되는 것이다.
하나님은 자신의‘영광’(דובכ, δόξα)을 다른 자에게 주지 않겠다고 말씀하시며(사42:8), 예수님도 사람으로부터
‘영광’(δόξα)을 취하지 않는다(요5:41)고 말씀 하시는 것이다. ‘영광’(δόξα)은 ‘영광’(δόξα)이신 하나님이 우리에게 주시는 것이다.
그러기에 성도는 스스로 ‘영광’이 되려는 내가 죽고 하나님의 ‘영광’인 그리스도로 사는 자(갈2:20)이며, 하나님의 말씀이 거하여 하나님의 성전이 되었고(카보드 : דובכ) (고전3:16) 그래서 이미 하나님의‘영광’(δόξα)이 된 존재인 것이며, 그가 비로서 하나님께 그 하나님의‘영광’(δόξα)을 돌릴 수 있게 되는 것이다. [독사(δόξα) : 영광]
6. 율법 노모스(νόμος) : 헬라어 원어해석(김준남 목사)
‘그러므로 율법의 행위로 그의 앞에 의롭다 하심을 얻을 육체가 없나니 율법으로는 죄를 깨달음이니라’(롬3:20)
‘율법’으로 번역된 헬라어 단어 ‘노모스’(νόμος)는 ‘규정된 관습의 개념으로 율법, 명령에 의해 받아들여진 것, 모세의 율법, 관습, 습관, 법’이라는 의미이다. ‘노모스’(νόμος)로 번역한 히브리어 단어 ‘토라’(תּוֹרָה)는 ‘던지다, 인도하다, 쏘다, 가리키다, 지시하다, 교훈하다’라는 뜻을 가진 ‘야라’(ירה)에서 파생되었으며 ‘법, 지시, 명령, 율법’이란 뜻으로 ‘십계명, 모세오경, 구약성경, 신구약에 나타난 하나님의 백성의 생활과 행위에 관한 하나님의 명령 전체’를 의미한다.
그런 의미에서 ‘율법’(νόμος)이 기본적으로 가지고 있는 ‘무엇인가를 가리키고 교훈하며 인도하다’라는 본래적
의미를 생각해 본다면 ‘성경이 곧 내게 대하여 증언하는 것이니라’(요5:39)는 말씀을 통해서 ‘율법’(νόμος) 이 가리키는 분이 바로 ‘그리스도이신 예수’임을 알 수 있으며 ‘율법’(νόμος)으로는 죄를 깨달음이니라’(롬3:20)는 말씀을 통해서 율법이 교훈하는 것은 ‘죄를 깨닫는 것’임을 알 수 있고 ‘율법’(νόμος)이 우리를 그리스도에게로 인도하는 몽학선생이 되어 우리로 하여금 믿음으로 말미암아 의롭다 함을 얻게 하려 함이니라’(갈3:24)는 말씀을 통해서 율법이 우리를 ‘그리스도’에게로 인도한다는 사실을 알 수 있는 것이다.
하나님의 ‘율법’(νόμος)은 하나님이 이루시겠다는 언약의 말씀이다. 선악의 주체가 된 인간이 절대로 이룰 수 있는 것이 아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율법을 지켜 행하려는 것이 사람들에게 의롭게 보이는 것 같아 하나님에게도 기특한 것으로 보일것 같지만 실제로 속에는 ‘불법’(아노미아 : ἀνομία)이 가득한 것이다(마23:28).여기에서 ‘아노미아’(ἀνομία)는 부정적 불변사 ‘아’(ἀ)와 ‘노모스’(νόμος)의 합성어인 ‘율법이 없는’의 뜻을 가진 ‘아노모스’
( ἄνομος)의 파생어로 ‘법이 없는 상태’를 의미하며 그것은 곧 ‘회칠한 무덤, 죽은 사람의 뼈와 모든 더러운 것이
가득한 상태’(마23:27)로 ‘허물과 죄로 죽은 상태’(옙2:1)인 것이다.
그래서 하나님은 언약을 이루시기 위해 말씀 육신으로 예수를 이 땅에 보내셨던 것이다(요 1:14). 예수님은 ‘율법’
(νόμος)을 완성하시기 위해 오셨으며(마5:17) 결국 언약의 기둥에서 다 이루시고 죽으심으로(요19:30) ‘율법’
(νόμος)을 완성하셨다. 그 결과 하나님과의 막힌 담인 성소의 휘장이 찢어졌으며(마27:5) 그렇게 하나님의 뜻을 따라 예수 그리스도의 몸을 단번에 드리심으로 우리가 거룩함을 얻게 된 것이고(히10:10), 하나님의 창조의 목적인 우리로 성전 삼으시려는 뜻을 이루게 된 것이다(고전3:16). [노모스(νόμος) : 율법]
7. 영 프뉴마(πνεῦμα) : 헬라어 원어해석(김준남 목사)
‘살리는 것은 영이니 육은 무익하니라 내가 너희에게 이른 말은 영이요 생명이라’(요6:63)
‘영’으로 번역된 헬라어 ‘프뉴마’(πνεῦμα)는 ‘숨쉬다, 불다’의 뜻을 가진 ‘프네오’(πνέω)에서 파생된 단어로 ‘공기의 움직임, 바람, 입김, 숨, 영혼, 영, 성령, 힘과 애정과 감정과 욕망과 같은 결과를 가져오는 근원’의 의미를 가지고 있다. 구약의 헬라어 역본인 70인 역에서 ‘프뉴마’(πνεῦμα)로 번역한 히브리어는 ‘바람, 숨, 마음, 영, 생기, 공기, 기분, 경향’의 뜻으로 쓰이는 ‘루아흐’(רוּח)이다. 이를 파자하면 ‘시작(레쉬 : ח), ‘연합, 손’(바브 : וּ), 죄와 생명을 담는 ‘울타리’(헤트 : ח)로써 ‘죄를 담아 시작하면 죄의 울타리’가 되고 ‘생명을 담아 시작하면 생명의 울타리’가 될 수 있다는 의미에서 ‘시작하여 연합된 또는 시작하여 손에 쥐어진 울타리’로 볼 수 있다.
정리하면,‘영’으로써의 ‘프뉴마’(πνεῦμα)는 그 자체가 선하거나 악하거나 한 것이 아니라, 그것이 무엇과 결합하느냐, 누구의 소유가 되느냐 그리고 울타리의 개념을 가진 ‘영’(πνεῦμα) 안에 무엇을 담느냐에 따라서 변할 수 있다는 것을 전제하면서, 그렇게 비워져 있다는 의미에서 깨끗한 상태에 있는‘영’, 울타리, 마음’로 이해할 수 있는 것이다. 이런 의미에서‘영’ 또는 ‘귀신’(鬼神)으로 번역된 ‘프뉴마’(πνεῦμα)를 단순히 국어사전이 정의하고 있는 ‘사람이 죽은 뒤에 남는다는 넋 또는 사람에게 화(禍)와 복(福)을 내려 준다는 신령(神靈)’이라는 의미로 해석해서는 안된다. 이러한 사실을 성경의 용례를 통해서 보면 좀 더 확실히 알 수 있다.
더러운 것과 결합되면 ‘더러운 (아카달토스 : ἀκάθαρτος)귀신(πνεῦμα)’ (막1:26)으로 말을 못하여 말이 없는 것과 결합되면 ‘벙어리 귀신’ (막7:17)으로 번역되었고, 깨끗하고 순결한 것과 결합되면 거룩한 영인 ‘성(ἅγιος)령(πνεῦμα)’(마1:18)으로 번역되었다. 또한 강렬한 욕망과 고통의 의미를 가진 악한 것의 소유가 되었다는 뜻을 가진 ‘악귀(포네로스 : πονηρός)에 들린자(πνεῦμα)’로 번역되었고 하나님의 소유가 되면 ‘아버지(파테르 : πατήρ)의 성령(πνεῦμα)’으로 번역되었다.
그리고 ‘영’(πνεῦμα)은 말씀(흐레마 : ῥήμα)이다’(요6:63)라는 의미에서 더러운 귀신, 악귀를 더러운 말, 비진리의 말로 이해해야 하며, 깨끗한 영으로써의 성령은 생명의 말씀, 진리의 말씀으로 이해해야 한다.
그러기에 성도는 그 '마음'(πνεῦμα)에 하나님의 선물인 하나님의 진리의 말씀으로써의 ‘성(ἅγιος)령(πνεῦμα)’을 받아(행1:8) 하나님의 말씀을 품은 자들이며 그러기에 오늘도 하나님의 열심으로 우리로 하여금 성령으로 충만케 하시어(엡5:18) 오직 진리의 말씀에 섬김을 받는 하나님 나라의 삶을 살며, 온전히 그리스도를 그려내는 삶을 사는 자인 것이다. [‘프뉴마’(πνεῦμα) :영]
8.언약 디아데케(διαθήκη) : 헬라어 원어해석(김준남 목사)
‘언약’으로 번역된 헬라어 '디아데케'(διαθήκη)는 ‘계약, 언약, 유언, 협정, 배치, 배열’의 의미를 가진 단어이다.
특별히 신약성경에서 ‘유언’으로 번역된 구절이 히브리서 9장 16,17절이다.
'디아데케'(διαθήκη)는 ‘유언자, 처분하다, 지명하다, 만들다, 정돈하다, 배치하다, 언약을 맺다, 계약하다’라는 의미를 가진 '디아티데마이'(διατίθεμαι)에서 유래되었다. '디아티데마이'(διατίθεμαι)는 ‘맡기다’(눅22:29),
‘세우다’(행3:25, 히8:10, 히10:16), ‘유언자’(히9:16,17)라는 뜻으로 사용되고 있으며, ‘통하여, 때문에’라는 헬라어 전치사 '디아'(δια)와 ‘놓다, 만들다, 세우다, 수립하다’라는 뜻의 '티데미'(τίθημι)의 합성어에서 파생되었다.
‘언약’이라는 뜻을 가진 또 다른 헬라어 단어는 ‘상호 동등한 관계에서 동등한 권리와 목적과 기원과 의무를 지는 두 사람간의 계약’을 의미하는 '신데케'(Syntheke)가 있는데, 이것은 ‘양쪽 중에서 어느 한쪽의 일방적으로 계약’이라는 의미의 '디아데케'(διαθήκη)와는 많은 차이가 있다.
창조주 하나님과 피조물인 인간과의 언약은 결코 수평적이거나 동등할 수 없다. 하나님은 스스로 온전하시기에 언약하신 것을 온전히 완성하시지만 유한한 인간은 절대로 지킬 수 없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성경에 나타난‘언약’은 인간이 쓸 수 있는 단어가 아니라, 하나님만 쓰실 수 있는 단어이며 그분에게만 해당되는 단어인 것이다.
그래서 신약성경에 '신데케'(Syntheke)라는 단어가 나오지 않는 것이다.
70인역에서 ‘언약’(διαθήκη)으로 번역한 히브리어가 '베리트'(ברית)이다. '베리트'(ברית)는 ‘성전으로 시작하여 완성하다’라는 파자의 의미를 통해서 볼 때 ‘언약’(διαθήκη)은 하나님이 일방적으로 세우시고 또한 스스로 이루시는 것이다. 그래서 성경은 ‘언약’(διαθήκη)이 완성되기 위해서는 예수 그리스도의 죽음이 있어야만 한다고 말하고 있다. ‘언약’(διαθήκη)은 '유언한 자'(διατίθεμαι)가 죽어야 되나니 ‘언약’(διαθήκη)은 그 사람이 죽은 후에야 유효한즉 '유언한 자'(διατίθεμαι)가 살아 있는 동안에는 효력이 없느니라’(히9:16,17)
이것은 결국‘말씀, 육신으로 오신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죽으심으로 말미암아 그 ‘언약’(διαθήκη)이 성취(요19:30)되었음을 보여주고 있는 것이다.’ 그러므로 성도는 하나님의 일방적 은혜로써의‘언약’(διαθήκη)이 하나님의 열심으로 이루어져 성전이 된(고전3:16)하나님의 아들인 것이다. [디아데케(διαθήκη) : 언약]
9. 온전한 텔레이오스(τ?λειο?) : 헬라어 원어해석(김준남 목사)
‘그러므로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의 온전하심과 같이 너희도 온전하라’(마5:48)
‘온전한’으로 번역된 헬라어 ‘텔레이오스’(τ?λειο?)는 한계로써의 도달점, 행위 또는 상태의 결국이라는 뜻을 내포하고 있는 ‘끝, 한계, 마지막, 목표, 목적’ 그리고 특별히 지불된 세금 혹은 부과금이라는 뜻을 내포하고 있는 ‘사용료, 요금’의 의미를 가진 ‘텔로스’(τ?λο?)에서 파생된 단어로 ‘끝난, 마무리 된, 완전한, 완벽한, 완전한 것, 성년의, 온전한, 어른’이라는 뜻을 가지고 있다.
좀더 구체적으로 이 단어는 노동, 성장 그리고 정신적이고 도덕적인 성격의 상태를 보여주는 단어로 사용되고 있으며 그 상태가 ‘더 이상 해야 할 것이 없는 끝난, 흠이 전혀 없는 온전한, 완성을 위해 더 이상 필요한 것은 아무 것도 없는 완벽한’이라는 의미를 가지고 있는 것이다.
‘텔레이오스’(τ?λειο?)로 번역된 히브리어가 ‘타밈’(????)인데 ‘(문자적 상징적, 또는 도덕적으로)온전한, 흠없는, 손상되지 않은, 순결한, 전부의’ 뜻을 가지고 있다. 이를 파자하면 ‘완성된 말씀, 온전한 말씀’이라는 의미이다.
‘완성된 말씀’이라는 의미를 가진 ‘온전한, 흠 없는, 순결한, 전부의’라는 말은 어두움인 이세상의 언어가 아님을 알 수 있으며 허물과 죄로 가득한 인간에게 쓸 수 있는 단어가 아님을 알 수 있다. ‘오직 흠 없고 점 없는 어린 양 같은 그리스도의 보배로운 피’(벧전1:19)라는 말씀에서도 알 수 있듯이 말씀 육신으로 오신 예수님을 지칭하는 말이며 그 분에게만 해당되는 말인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노아를 가리켜 당대에 '완전한'(τ?λειο?, ????) 자라(창6:9)고 한 것은 하나님과 동행(내 말을 버리고 하나님의 말씀을 품고 오직 그 말씀에 이끌려 살아감)했기 때문이며 그리스도를 통하여 하나님의 백성 삼으시려는 하나님의 구원사역을 예표하고 있는 말씀이라고 볼 수 있다.
그런 의미에서 ‘내가 거룩하니(하기오스 : αγιο?) 너희도 거룩하라’(레11:45)는 말씀은 ‘너희 아버지의 온전하심(τ?λειο?)과 같이 너희도 온전(τ?λειο?)하라’(마5:48)는 말씀과 동일한 말씀이며 동시에 ‘내가 너를 온전케( τ?λειο?)’ 만들어 내 아들 삼겠다는 은혜의 말씀인 것이다. 그래서 우리에게 ‘온전한’(τ?λειο?) 선물인 예수를 보내 주셨으며 십자가에서 하나님의 뜻을 다 이루신 것이다.
그러므로 성도는 흠과 점으로 가득하여 도저히 '온전할'(τ?λειο?) 수 없는 내가 예수와 함께 십자가에서 죽어 이제는 그리스도로 사는 자이며 이것은 내 말이 죽어 그리스도의 영인 진리의 말씀을 품은 자로서 그 생명의 말씀에 이끌려 사는 ‘온전한’(τ?λειο?) 자, 하나님의 아들로 사는 자를 말하는 것이다. [텔레이오스(τ?λειο?) : 온전한]
10, 예배하다 프로스퀴네오(προσκυν?ω) : 예배하다 (to worship)] 헬라어 원어해석(김준남 목사)
‘하나님은 영이시니 예배하는 자가 영과 진리로 예배할지니라’(요4:24)
‘예배하다’로 번역된 헬라어 ‘프로스퀴네오’(προσκυν?ω)는 ‘…를 향하여’의 뜻을 가진 ‘프로스’(πρ??)와 아마도 ‘(기본적으로는 ‘개’라는 뜻이지만 그 ‘개’가 주인의 손을 핥는 것을 암시하는 의미에서) ‘키스하다’라는 뜻으로
‘퀴온’(κ?ων)이라는 단어의 합성어에서 파생된 단어로 ‘존경의 표시로써 손에 입맞춤을 하다, (문자적, 상징적으로) 굽실 굽실거리다, (경의의 표시로) 부족하다, (동양, 특히 페르시아에서) 깊은 존경의 표시로 무릎을 꿇고 땅에 이마를 대다, (신약에서) 무릎을 꿇거나 엎드림으로 존경하다 또는 순종하다’의 의미를 가지고 있다. 그리고 이 단어에서 파생된 명사형으로는 ‘경배자, 예배자’의 뜻을 가진 ‘프로스퀴네테스’(προσκυνητ??)가 있다.
신약성경에 기록된 ‘프로스퀴네오’(προσκυν?ω)가 말하는 ‘예배하다’라는 의미는 일반적으로 국어사전이 정의하고 있는 ‘(종교에서)신이나 부처와 같은 초월적 존재 앞에 경배하는 의식을 행하다’라는 것과는 같지 않다는 사실이다. 왜냐하면 성경은 인간을 향하여서 ‘허물과 죄로 죽은 자’라고 말하고 있으면 그런 인간이 초월적 존재를 향하여 경배할 수 없기 때문이다.
오히려 경배할 능력이 전혀 없는 인간을 향하여 전능하신 하나님의 사랑과 생명의 입맞춤이 먼저 있어야 하는 것이다. 그래서 성경은 ‘너희는 하나님의 은혜에 의하여 믿음으로 말미암아 구원을 받았으니 이것은 너희에게서 난 것이 아니요 하나님의 선물이라’(엡2:8)고 말하면서 무엇보다도 먼저 인간을 향한 하나님의 불가항력적인 사랑과 은혜가 부어졌다는 것이다. 그런 의미에서 하나님이 먼저 우리를 향해서 '예배드렸다'(προσκυν?ω)고 말할 수 있는 것이다. 그렇다면 오늘도 하나님은 자기에게 참되게 예배하는 자들을 찾으시는데(요4:23) 구원받은 우리가 하나님을 향한 '예배'(προσκυν?ω)는 어떠한 것이어야 하는가?
한마디로 ‘나는 가치없는(아크레이오스:?χρε?ο?)자 입니다(눅17:10), 하나님 만이 영원한 가치가 되십니다(worship)’라고 자신의 처음자리를 고백하는 것이며, 하나님께서 주시겠다고 약속하신 생명의 양식인 진리의 말씀을 깨달아 그 말씀에 갈급하여(프토코스 : πτωχ??) 구하는(아이테오 : α?τ?ω) 것이어야 하고, 하나님은 영이시기에 없어져 버릴 이 땅의 속한 것으로가 아닌 하나님이 선물로 주신 유일하고 영원한 선물인 그리스도(롬6:23)만을 드려야 하는 것이다. 그러기에 '예배자'(προσκυνητ??)로서의 성도는 반드시 하나님 처럼의 내가 죽고(다나토스 : θ?νατο?) 죽은 내 안에 사시는 그리스도의 영과 진리의 말씀으로만 예배해야(προσκυν?ω) 하는 것이다(요4:24).
[프로스퀴네오(προσκυν?ω) : 예배하다 (to worship)]
11, 약속 에팡겔리아(?παγγελ?α) : 약속 (promise)] 헬라어 원어해석(김준남 목사)
‘볼지어다 내가 내 아버지께서 ‘약속’하신 것을 너희에게 보내리니 너희는 위로부터 능력으로 입혀질 때까지 이 성에 머물라 하시니라’(눅24:49)
‘약속’으로 번역된 헬라어 ‘에팡겔리아(?παγγελ?α)’는 ‘예고하다, (함축적으로 무엇을 하기로) 약속하다, (자신에 관한 것을) 주장하다, 자백하다, (할 일과 줄 것을)발표하다, 단언하다’의 뜻을 가진 ‘에팡겔로’(?παγγελλω)에서 파생된 단어로 ‘(지식, 동의, 서약에 대해)통고, 소식, 약속, 공고’의 뜻을 가지고 있다.
그리고 ‘에팡겔로’(?παγγελλω)는 ‘에로, 넘어서, 위에, 에서, 건너편에, 반대쪽에, …를 향하여, …를 위하여’의 뜻을 가진 전치사 ‘에피’(?π?)와 ‘소식을 가져오다’의 뜻을 가진 ‘앙겔로’(aggello)에서 유래된 ‘전령, 대사, 보냄을 받은 자, 천사, 하나님의 사자’의 뜻을 가진 ‘앙겔로스’(?γγελο?)의 합성어에서 파생되었다.
‘에팡겔리아’(?παγγελ?α)가 말하는 ‘약속’은 국어사전적으로는 ‘다른 사람과 앞으로의 일을 어떻게 할 것인가를 미리 정하여 둠 또는 그렇게 정한 내용’이라는 뜻이지만 성경에서는 그런 의미로 쓰이고 있지 않다.
오히려 이 단어가 ‘…를 위하여 또는 …를 향하여 보냄을 받은 자’라는 의미를 내포하고 있다고 할 때, 그것은 오직 하나님 만이 우리를 위하여 무언가를 하실 수 있다는 것을 말하는 것이다. 그래서 신약에서 52회 쓰여진 이 단어는 주로 하나님의 ‘약속’(?παγγελ?α)에 대하여 쓰여지고 있다는 것이다.
주님께서는 ‘그 아버지의 그 약속’(텐 에팡겔리안 투 파트로스 : τ?ν ?παγγελ?αν το? πατρ??)을 보내주시겠다고 말씀하셨고(눅24:49), ‘그 아버지의 그 약속(?παγγελ?α)’을 기다리라고 말씀하셨으며(행1:4) 오순절 날 ‘약속’(?παγγελ?α)하신 성령’을 부어 주셨다(행2:33). 이것은 주님께서 ‘너희 하늘 아버지께서 구하는 자에게 성령을 주시지 않겠느냐’(눅11:13)고 말씀하신 것과 비교하여 볼 때, 하나님은 허물과 죄로 죽은(엡2:1)우리를 구원하시기 위해 미리 예비한 하나님의 ‘약속’(?παγγελ?α) 그 자체인 진리의 말씀 즉, 그리스도의 영인 성령을 부어주신 것이다.
결국 인간을 향한 하나님의 유일한 ‘약속’(?παγγελ?α)은 이 세상 어느 누구도 약속할 수 없는 구원의 선물인 진리의 영인 성령인 것이다. 그리고 하나님의 그 약속은 '유언'(디아데케 : διαθ?κη)과 같은 것으로 예수님의 십자가의 죽으심으로 이루어진 것이라 할 수 있다.
그래서 사도요한은 주님께서 우리에게 ‘약속’(?παγγελ?α)하신 것이 곧 영원한 생명이라(요일2:25)고 고백하고 있는 것이다. 그러므로 성도는 하나님께로부터 난 자로서(요일5:1)하나님의 최고의 ‘약속’(?παγγελ?α)인 성령을 받은 자요, 그 진리의 말씀으로 하나님의 ‘약속’(?παγγελ?α)이 된 자인 것이다.
[에팡겔리아(?παγγελ?α) : 약속 (promise)]
12, 연합한 쉼휘토스(σ?μφυτο?) : 연합한 (planted together)] 헬라어 원어해석(김준남 목사)
‘만일 우리가 그의 죽으심과 같은 모양으로 연합한 자가 되었으면 또한 그의 부활과 같은 모양으로 연합한 자도 되리라’(롬6:5)
‘연합한’으로 번역된 헬라어 ‘쉼휘토스’(σ?μφυτο?)는‘(밀접한 의미에서의) 함께, 동참, 교제, 진행, 소유, 도움’의 뜻을 가진 전치사 ‘쉰’(σ?ν)과 ‘낳다, 산출하다, 생산하다, 태어나다, 자라다, 싹이 나다, 돋아나다’의 뜻을 가진 ‘휘오’(φ?ω)의 합성어에서 파생되어 유래된 단어로 ‘(혈족 관계의) 같이 자라다, (상징적으로) 밀접하게 연합하다, 함께 계획하다, 함께 태어난, 공통된 기원의, 선천적인, 동시 발생의, 타고난, 함께 성장한, 결합된, 일족, 동족’이라는 다양한 의미를 가지고 있으며 신약 성경에서 단 한번만 쓰이고 있다.
‘쉼휘토스’(σ?μφυτο?)는 단순히 ‘함께 따라가는, 같이 성장하는, 누군가를 본받아 자라나는’이라는 의미보다는 ‘결합되어 함께 태어난, 밀접하게 연합되어 이미 선천적인 것이 되어버린 그래서 하나가 되어버린’ 의미에서의 ‘연합’을 말하는 것이다. 그래서 사도바울은 로마서 6장 5절에서 ‘우리가 예수님의 죽으심(다나토스:θ?νατο?)과 똑 같은 모양으로 ‘연합’(σ?μφυτο?)한 자’임을 고백하고 있는데 이것은 ‘내가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혔나니 그런즉 이제는 내가 사는 것이 아니요’(갈2:20)라는 고백과 같은 의미이다. 그렇게 되면 예수님의 부활(아나스타시스 : ?ν?στασι?)과 같은 모양으로 ‘연합’(σ?μφυτο?)한 자가 된다(기노마이 : γινομαι)는 것이다. 이것은 ‘오직 내 안에 그리스도께서 사시는 것이라’(갈2:20)는 의미가 된다.
그래서 ‘이제 내가 육체 가운데 사는 것은 나를 사랑하사 나를 위하여 자기 자신을 버리신 하나님의 아들을 믿는 믿음 안에서 사는 것이라’(갈2:20)는 말씀은 ‘이제는 예수님을 열심히 최선을 다해서 본받아 살아라’는 의미가 아니라 ‘아무리 노력해도 아무것도 아닌 나, 불가능한 나’임을 발견하고 하나님의 은혜가 있는 십자가로 나아가는 것이다. 그리고 선악의 주체인 율법으로써의 내가 십자가에서 죽었음을 알고, 내 믿음이 아닌 그리스도의 믿음으로, 그 진리의 말씀이 이끄는 대로 살라는 말씀이 되는 것이다. 그것이 사도바울이 고백한 ‘내가 그리스도를 본받는 자가 된 것 같이 너희는 나를 본받는 자가 되라’(고전11:1)는 말씀의 진의이다. 그러므로 성도는 부활이요 생명이신(요11:25) 예수님과 함께 ‘연합’하여(σ?μφυτο?) 죽음을 통과한 자요, 또한 예수님과 함께 ‘연합’하여 부활에 동참한 자요 그리고 이제는 그리스도와 ‘연합’하여 (σ?μφυτο?) 새 생명가운데 사는 자 즉, 그리스도로 사는(union Christ) 자인 것이다. [쉼휘토스(σ?μφυτο?) : 연합한 (planted together)]
13. 어둠 스코토스(σκ?το?) : 어둠 (darkness) 헬라어 원어해석(김준남 목사)
‘밤이 깊고 낮이 가까웠으니 그러므로 우리가 어둠의 일을 벗고 빛의 갑옷을 입자’(롬13:12)
‘어둠’으로 번역된 헬라어 ‘스코토스’(σκ?το?)는 ‘그늘, 그림자, 윤곽, 예시, (실책이나 전조를 의미하는) 어두움’의 뜻을 가진 ‘스키아’(σκι?)에서 파생된 단어로 ‘그늘,(문자적으로 또는 상징적으로)불투명, 어두움, 흑암, (은유적으로)신적인 것과 인간의 의무에 대한 무지'의 의미를 가지고 있다. ‘스코토스’(σκ?το?)에서 파생된 단어로는 ‘불투명한,(상징적으로) 어두운, 어둠으로 뒤덥인’의 뜻을 가진 ‘스코테이노스’(σκοτειν??)와 ‘어두움, 흑암, 빛이 없는데서 기인하는 어두움, (은유적으로) 신에 관한 무지, (상징적으로) 어두움’의 뜻을 가진 ‘스코티아’(σκοτ?α) 그리고 동상형으로 ‘어둡게 되다,
(상징적으로) 어두워 지다, 어둠으로 뒤덥이다’의 뜻을 가진 ‘스코티조’(σκοτιζω)가 있다.
스코토스(σκ?το?)로 번역된 히브리어 단어가 ‘어두움, (문자적으로) 흑암, (상징적으로) 무지, 암흑’의 뜻을 가진
‘호세크’(???)인데 파자하면 ‘악과 생명으로 분석되어 우리에게 전해짐’이란 의미이다. 창세기에서 하나님은 ‘어둠’으로써의 ‘호세크’(???)를 ‘밤’으로써의 ‘라일’(???)로 칭하셨다. ‘라일’(???)을 파자하면 ‘가르쳐 주신 것을 배워고 가르침’이라는 의미이다.
정리하면, ‘스코토스’(σκ?το?)가 말하는 ‘어둠’은 단순히 ‘어둠의 상태, 죄악의 상태, 무지의 상태’를 의미하기 보다는 ‘반드시 어둠을 통하여 빛을 알아야 하는, 빛을 알기 위해서는 반드시 어둠을 알아야 하는 그리고 빛으로 나가기 위해서는 반드시 어둠을 통과해야 하는’ 그러한 의미에서의 ‘어둠’이라는 것이다.
그래서 ‘어둠’(σκ?το?)은 결코 나쁜 것이 아니라 빛을 배우는 곳이며 빛을 알아가는 곳이다. 그래서 주님께서도 ‘네 속에 있는 빛이 어둡지(σκ?το?) 아니한가 보라’(눅11:35)고 말씀하신 것이다. ‘내가 어둠(σκ?το?) 맞습니다’라고 고백하는 자가 빛을 알아보는 자요 그가 바로 빛인 것이다(마5:14). 그러나 성경은 ‘빛이 어두움'(스코티아:σκοτ?α)에 비취되 '어두움'(σκοτ?α)이 깨닫지 못하더라’(요1:5)고 기록되어 있다.
‘어둠’(σκ?το?)을 통해서 하나님의 가르침을 받아 배워 빛을 알아보라고 한 것인데 선악의 주체가 되어 하나님 처럼 된 인간은 스스로 빛이라고 생각하여, 참 빛이 왔음에도 깨닫지 못한 것이다. 그가 바로 영원히 멸망 가운데 있는 진짜 ‘어둠’(σκ?το?)인 것이다.
그러므로 성도는 하나님 처럼 된 ‘어둠’(σκ?το?)의 상태에서 행하는 모든 ‘어둠’(σκ?το?)의 일들을 벗고 ‘내가 바로 어둠입니다’라고 고백하므로 ‘내가 바로 빛이 필요한 자 입니다, 생명의 말씀으로 채워 주소서'라고 부르짖으며(아이테오:α?τ?ω)그래서 하나님이 반드시 주시겠다고 하신 생명의 말씀을 받아 빛의 갑옷을 입고 사는 자이다(롬13:12). [스코토스(σκ?το?) : 어둠 (darkness)]
14, 오래 참음 마크로뒤미아(μακροθυμ?α) : 오래 참음 (forbearance)] 헬라어 원어해석(김준남 목사)
‘그러나 내가 긍휼을 입은 까닭은 예수 그리스도께서 내게 먼저 일체 오래 참으심을 보이사 후에 주를 믿어 영생 얻는 자들에게 본이 되게 하려 하심이라’(롬2:4)
‘오래 참음’으로 번역된 헬라어 ‘마크로뒤미아’(μακροθυμ?α)는 ‘오래 참음으로, 관대하게, 참을 성 있게, 끈기 있게’의 뜻을 가진 ‘마크로뒤모스’(μακροθ?μω?)와 동일어에서 유래된 단어로 ‘(대상이)‘오래 참음’(주체가) 꿋꿋함, 인내, 참을성, 불변성, 확고함, 끈기, 자제, 잘못을 갚는데 더딤’의 의미를 가지고 있다.
그리고 ‘마크로뒤모스’(μακροθ?μω?)는 ‘큰, 능력이 탁월한, (하나님의 은혜와 위엄이) 큰, 당당한’의 뜻을 가진 ‘메가스’(μ?γα?)와 어원이 유사한 ‘(문자적 혹은 상징적으로) 길이’의 뜻을 가진 ‘메코스’(μ?κο?)에서 유래된 ‘긴, 멀리 떨어진, 먼, 길게 지속되는’의 뜻을 가진 ‘마크로스’(μακρ??)라는 단어와 ‘달려들다, 제물로 바치다, 희생하다, (유월절 양을) 죽이다, 학살하다, (어떤 목적을 위해) 죽이다, (함축적으로) 제사 드리다’의 뜻을 가진 ‘뒤오’(θ?ω)에서 유래된 ‘욕정, 열정, 격노, 분노, 격정의 포도주, 흥분시키는 포도주’의 뜻을 가진 ‘뒤모스’(θυμ??)라는 단어의 합성어로 이루어진 신약성경에서 1회만 쓰여지고 있으며 ‘너그러이’로 번역된 독특한 단어이다.
‘마크로뒤미아’(μακροθυμ?α)가 말하는 ‘오래 참음’은 단어의 어근은 통해서 알 수 있듯이 단순히 국어사전이 정의하고 있는 ‘오랜 시간 웃음, 울음, 아픔 따위를 억누르고 견디다, 오랜 시간 충동, 감정 따위를 억누르고 다스리다, 오랜 시간 어떤 기회나 때를 견디어 기다리다’의 의미가 아니라는 것을 알 수 있다. 그러기 때문에 하나님의 약속을 오래 참아 기다리는 태도를 말하는 것도 아니고 죄인이 우리가 회개하고 돌아오기를 길이 참으시는 하나님의 성품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다.
하나님의 오래 참으심(μακροθ?μω?)의 성경적 의미는 ‘크신 하나님의 은혜로 허물과 죄로 죽은 우리를 살리시기 위해 말씀 육신으로 오신 예수님의 십자가의 죽으심과 그로 인한 영원한 제사드리심’이라는 의미가 포함되어 있는 것이다. ‘마크로뒤모스’(μακροθ?μω?)로 번역이 된 히브리어 단어가 ‘인내하는, 긴, 노하기를 더디 하는, 참는’이라는 뜻을 가진 ‘아레크’(???) (출34:6)인데 이를 파자하면 ‘하나님이 머리를 우리에게 넘겨 주심’의 의미를 가지고 있다.
그런 의미에서 하나님의 '오래 참으심'(μακροθ?μω?)은 하나님 창세전 언약에 따라(엡1:4-5) 우리를 향한 하나님의 구원의 열심에 의해 머리 되시는 예수님이 십자가에서 죽으심으로 우리에게 넘겨 주심 (파라디도미:παραδ?δωμι)이라는 의미로 하나님의 뜻(델레마 : θ?λημα)의 완성(텔레오: τελ?ω) 이며 하나님의 은혜 그 자체인 것이다. 그러므로 성도는 그렇게 심오한 의미를 가진 하나님의 '오래 참으심'(μακροθ?μω?)의 은혜로 하나님 처럼 된 나의 머리가 잘리고 진정으로 머리 되시는 그리스도로 머리 삼은 자 이며 사망을 통과하여 생명으로 들어간 자로서 이 세상에서 하나님의 '오래 참으심'(μακροθ?μω?)을 품고 하나님 나라를 살아가는 자이다.
[마크로뒤미아(μακροθυμ?α) : 오래 참음 (forbearance)]
15 이기다 니카오(νικ?ω) : 헬라어 원어해석(김준남 목사)
‘무릇 하나님께로부터 난 자마다 세상을 이기느니라 세상을 이기는 승리는 이것이니 우리의 믿음이니라’(요일5:4)
‘이기다’로 번역된 헬라어 ‘니카오’(νικ?ω)는 ‘정복, 성공의 수단, 승리’의 뜻을 가진 명사 ‘니케’(ν?κη)에서 파생된 단어로 ‘(문자적 또는 상징적으로) 정복하다, 승리를 거두다, 극복하다, 우세하다, 승리를 쟁취하다, 승리를 이루다’라는 의미를 가지고 있다.
‘하나님께로부터 난 자마다 세상을 이기느니라’(요일5:4)는 말씀에서‘이기다’(νικ?ω)라는 의미는 하나님 처럼 된 나 자신의 말이 죽고 그리스도로 사는 자 ? 하나님의 진리의 말씀만 있는 자마다 이제는 더 이상 눈에 보이는 것만 보는 어두움에 속한 자(요1:5) ? 허물과 죄로 죽은 자(엡2:1)가 아니요 세상(호 코스모스 : ? κ?σμο?)속에 내용으로 담겨진 하나님의 말씀을 보는(호라오)자를 말하는 것이다. 그래서 세상을 이기는 '승리'(ν?κη)가 바로 보이지 않는 말씀을 볼 수 있는 믿음(피스티스 : π?στι?)이 되는 것이다(요일5:4).
그런 의미에서 ‘니카오’(νικ?ω)가 말하는 ‘이기다’의 성경적 의미는 국어사전에서 ‘내기나 시합, 싸움 따위에서 재주나 힘을 겨루어 승부를 내다, 감정이나 욕망, 흥취 따위를 억누르다, 고통이나 고난을 참고 견디어 내다’라는 의미를 가진 ‘이기다’라는 단어와 기본적으로 다르다는 사실을 알 수 있다.
‘세상에서는 너희가 환난을 당하나 담대하라 내가 세상을 이기었노라(νικ?ω)’(요16:33)는 말씀은 생명의 말씀이 없는 자, 세상에 속한 자는 세상에서 환난을 당할 수 밖에 없지만 말씀이신 하나님께서 함께 하시기에 주님께서는 세상을 이기었다고 말씀하고 있는 것이며, ‘선(아가도스 : ?γαθ??)으로 악(카코스 : κακ??)을 이기라(νικ?ω)’(롬12:21)는 말씀도 내용으로써의 말씀을 보지 못하는 어두움 자체를 상징하는 악을 이기는 것도 말씀으로써의 하나님 자신이신 선(?γαθ??)으로만 가능한 것이다.
그러므로 성도는 계시록에서 자주 나오는 이기는(νικ?ω) 자(계2:7,11,17,26 ; 3:5,12,21등)를 가리키는 것으로 하나님의 말씀을 품은 자이며 말씀에 이끌려 사는 자를 말하는 것이다. 그러기에 눈에 보이는 것으로 판단하는 자가 아니요 눈에 보이지 않는 것을 보는(호라오) 자로서 삶의 현장에서 나타나는 모든 일들 속에 담겨진 하나님의 말씀, 우리로 하나님의 아들로 살며 그리스도를 그려내는 빛과 소금의 삶을 살아가는 진정한 이기는(νικ?ω) 자인 것이다.
[니카오(νικ?ω) : 이기다]
16. 온전히 결실하다 텔레습호레오(τελεσφορ?ω) : 헬라어 원어해석(김준남 목사)
‘가시떨기에 떨어졌다는 것은 말씀을 들은 자이나 지내는 중 이생의 염려와 재물과 향락에 기운이 막혀 온전히 결실하지 못하는 자요’(눅8:14)
‘온전히 결실하다’로 번역된 ‘텔레습호레오’(τελεσφορ?ω)는 ‘끝, 결국, 한계, 마지막, 목표, 목적’의 뜻을 가진 ‘텔로스’(τ?λο?)와 ‘운반하다, 참다, 견디다, 데려 오다, 보이다, 공개하다, 적용하다, 발표하다, 되다, 계속하다, 놓여지다, 지도하다, 관리하다, 생산하다, 맺다’라는 뜻을 가지고 매 다양한 용례로 쓰이고 있는 단어인 ‘훼로’
(φ?ρω)의 합성어에서 파생된 단어로 ‘완전(성숙)을 향해 참는 자가 되다,(상징적으로) 과실을 익히다. 온전히 결실하다, 성숙하다’라는 의미를 가지고 있다.
이 단어는 신약성경에서 단 1회만 나오는 희귀한 단어이지만 내용에 있어서는 ‘훼로’(φ?ρω)라는 뜻이 내포되어 매우 다양하게 적용하여 해석할 수 있는 단어이기도 하다. 즉, ‘온전히 결실하는 자’란 ‘온전히 말씀을 품은 자, 삶을 통하여서 그리스도를 그려내는 자, 결국 내가 죽고 그리스도로 사는 자, 모든 것에 말씀만 보이는 자, 그리스도의 장성한 분량에까지 이른 자, ’오직 말씀에 이끌려 사는 자 라는 다양한 의미를 가지고 있다고 볼 수 있는 것이다.
같은 내용을 기록해 놓은 마가복음에서는 ‘좋은 땅에 뿌려졌다는 것은 곧 말씀을 듣고 받아 삼십 배나 육십 배나 백 배의 결실을 하는 자니라’(막4:20)고 기록되어 있어 ‘삼십배나 육십 배나 백배의 결실을 맺다’(칼폽호레오 : καρποφορ?ω ? ‘비옥하다, 열매를 맺다, 출산하다, 낳다, 스스로 열매를 맺다’의 의미)로 쓰여지고 있다. ‘백배’라고 벅역된 ‘헤카톤’(?κατ?ν)은 ‘온전한, 완전한’을 뜻하는 그리스도를 상징하는 단어로 ‘백배의 결실’이란 결국 ‘온전하신 그리스도의 열매를 맺는 것’을 의미하는 것이다.
결국‘온전히 결실하다’라는 말과 ‘온전한 열매를 맺다’라는 말은 같은 의미라고 볼 수 있다. 그리고 그것은 말씀(호 로고스:? λ?γο?)에 귀 기우려 듣고 깨닫는 것이며 더 나아가 내 말을 부인하고 그 말씀을 받아들여 내 마음에 품고, 내 말로 삼을 때 비로서 가능한 것이다. 그러나 말씀을 들었지만 내 말이 죽지 아니하면 즉, 선악의 주체가 되어 하나님의 말씀이 아닌 오직 내 말이 주관하는 하나님 처럼의 삶을 살아가면 이생의 염려와 재물과 향락에 기운이 막혀 온전히 결실하지(τελεσφορ?ω) 못하게 되는 것이다.
그러므로 성도는 예수의 십자가의 죽으심으로 교회(에클레시아:?κκλεσ?α ? 세상에서 불러냄을 받은자, 세상에 대해서 죽고 하나님에 대해서 산 자)가 된 자이며, 교회인 성도는 이 세상에서 그리스도를 그려내는 삶, 그리스도라는 온전한 결실을 맺는(τελεσφορ?ω) 삶을 살아가는 자이다. [텔레습호레오(τελεσφορ?ω) : 온전히 결실하다]
17.약속 에팡겔리아(?παγγελ?α) :약속(promise) 헬라어 원어해석(김준남 목사)
‘볼지어다 내가 내 아버지께서 약속하신 것을 너희에게 보내리니 너희는 위로부터 능력으로 입혀질 때까지 이 성에 머물라 하시니라’(눅24:49)
‘약속’으로 번역된 헬라어 ‘에팡겔리아(?παγγελ?α)’는 ‘예고하다,(함축적으로 무엇을 하기로) 약속하다,(자신에 관한 것을) 주장하다, 자백하다, (할 일과 줄 것을) 발표하다, 단언하다’의 뜻을 가진 ‘에팡겔로’(?παγγελλω)에서 파생된 단어로 ‘(지식, 동의, 서약에 대해) 통고, 소식, 약속, 공고’의 뜻을 가지고 있다.
그리고 ‘에팡겔로’(?παγγελλω)는 ‘에로, 넘어서, 위에, 에서, 건너편에, 반대쪽에, …를 향하여, …를 위하여’의 뜻을 가진 전치사 ‘에피’(?π?)와 ‘소식을 가져오다’의 뜻을 가진 ‘앙겔로’(aggello)에서 유래된 ‘전령, 대사, 보냄을 받은 자, 천사, 하나님의 사자’의 뜻을 가진 ‘앙겔로스’(?γγελο?)의 합성어에서 파생되었다.
‘에팡겔리아’(?παγγελ?α)가 말하는 ‘약속’은 국어사전적으로는 ‘다른 사람과 앞으로의 일을 어떻게 할 것인가를 미리 정하여 둠 또는 그렇게 정한 내용’이라는 뜻이지만 성경에서는 그런 의미로 쓰이고 있지 않다.
오히려 이 단어가 ‘…를 위하여 또는 …를 향하여 보냄을 받은 자’라는 의미를 내포하고 있다고 할 때, 그것은 오직 하나님 만이 우리를 위하여 무언가를 하실 수 있다는 것을 말하는 것이다. 그래서 신약에서 52회 쓰여진 이 단어는 주로 하나님의 ‘약속’(?παγγελ?α)에 대하여 쓰여지고 있다는 것이다.
주님께서는 ‘그 아버지의 그 약속’(텐 에팡겔리안 투 파트로스:τ?ν ?παγγελ?αν το? πατρ??)을 보내주시겠다고 말씀하셨고(눅24:49), ‘그 아버지의 그 ‘약속’(?παγγελ?α)’을 기다리라고 말씀하셨으며(행1:4) 오순절 날‘약속’(?παγγελ?α)하신 성령’을 부어 주셨다(행2:33). 이것은 주님께서 ‘너희 하늘 아버지께서 구하는 자에게 성령을 주시지 않겠느냐’(눅11:13)고 말씀하신 것과 비교하여 볼 때, 하나님은 허물과 죄로 죽은(엡2:1)우리를 구원하시기 위해 미리 예비한 하나님의 ‘약속’(?παγγελ?α) 그 자체인 진리의 말씀 즉, 그리스도의 영인 성령을 부어주신 것이다
결국 인간을 향한 하나님의 유일한 ‘약속’(?παγγελ?α)은 이 세상 어느 누구도 약속할 수 없는 구원의 선물인 진리의 영인 성령인 것이다. 그리고 하나님의 그 ‘약속’은 '유언'(디아데케 : διαθ?κη)과 같은 것으로 예수님의 십자가의 죽으심으로 이루어진 것이라 할 수 있다. 그래서 사도요한은 주님께서 우리에게 ‘약속’(?παγγελ?α)하신 것이 곧 영원한 생명이라(요일2:25)고 고백하고 있는 것이다. 그러므로 성도는 하나님께로부터 난 자로서(요일5:1) 하나님의 최고의 ‘약속’(?παγγελ?α)인 성령을 받은 자요, 그 진리의 말씀으로 하나님의 ‘약속’(?παγγελ?α)이 된 자인 것이다. [에팡겔리아(?παγγελ?α) : 약속 (promise)]
18. 연단 도키메(δοκιμή) : 헬라어 원어해석(김준남 목사)
‘인내는 연단을, 연단은 소망을 이루는 줄 앎이로다’(롬5:4)
‘연단’으로 번역된 헬라어 ‘도키메’(δοκιμή)는 ‘의견이 있다, 생각하다, 가정하다, 여겨지다, 간주되다, ..로 통하다, 내가 보기에 …이다, 내 생각은 …이다, 자신이 기뻐하다, 믿다’라는 뜻을 가진 ‘도케오’(δοκέω)에서 파생된 단어로 ‘시험, 연단, 재판, 입증된, 증명된 특징, 증거, 증명된 가치의 실례’의 의미를 가지고 있으며 ‘인정된, 인정받은, 즐거운, 만족스러운, 연단된’이라는 뜻을 가진 형용사 ‘도키모스’(δόκιμος)도 여기서 파생된 단어이다.
특별히 ‘도케오’(δοκέω)는 같은 의미인 기본동사 ‘도코’(doko)의 연장형을 어원으로 하고 있으며 어떤 시제에서 대체어로서만 사용되는 ‘보여주다, 전시하다, 증거를 제시하다, 말이나 가르침으로 나타내다’라는 뜻의 ‘데이크뉘오’(δείκνυω)라는 단어의 어간과 비교될 수 있는 단어이다.
이런 의미에서 ‘도키메’(δοκιμή)라는 단어가 의미하는 ‘연단’은 단순히 ‘단단하게 하거나 굳세게 하며 반복하여 익숙하게 되는 것’이라기 보다는 ‘어떤 것을 증명하고 입증하여 제시해 주는 것’이라는 의미가 더욱 강조되어 있다는 것이다.
그래서 어떠한 상황 속에서도 오직 말씀 아래 계속적으로 머무르는 ‘인내’(휘포모네 : ὑπομονή)를 통하여 말씀을 품은 자로 인정받고 그 말씀을 보여주고 가르침으로 말씀의 가치를 증명해 준다는 의미에서 ‘연단’(δοκιμή)을 이루게 되며, 그 연단은 소망을 이루게 되는 것이다(롬5:4).
또한 ‘환난의 많은 시련 가운데서 그들의 넘치는 기쁨과 극심한 가난이 그들의 풍성한 연보를 넘치도록 하게 하였느니라’(고후8:2)는 말씀을 통해서 하나님께서 마게도냐 교회들에게 주신 은혜를 알 수가 있다(고후8:1).
여기서 하나님의 은혜의 시작이 바로 하나님의 말씀에 내 말이 ‘완전히 박살이 나서 죽는’ '환난'(들립시스 : θλῖψις) 가운데서 오롯이 ‘말씀만이 나타나 증명되는’ '시련'(δοκιμή)이라는 사실을 가르쳐 주고 있다.
그래서 기쁨의 원천이 되는 말씀인 바로 그 '기쁨'(호 카라 : ὁ χαρά)이 넘치게 되었고 오직 하나님의 말씀에 배고파 갈급해 하는 가난함(프토케이아: πτωχεία - πτωχός의 파생어)이 생겼다는 것이 그러므로 성도에게 있어서 ‘연단’(δοκιμή)은 마치 복음을 위하여 수고한 디모데의 ‘연단’(빌2:22)과 같은 것이며, 하나님의 말씀을 가진 자로써 그 진리의 말씀을 보여주고 증거하는 자로 이 땅을 살아가는 것을 말하는 것이다.
이러한 것은 무엇보다도 먼저 하나님의 불가항력적인 은혜로[“불가항력적인 표현을==>[한량없는 주님의 은혜(시편 145:7 새번역)저의 고백을합니다”] 그리스도께서 내 안에서 말씀하시는 '증거'(δοκιμή)가 있었기 때문이며 동시에 우리가 그것을 구하게 되었다는 것이다(고후13:3). 그리고 말씀을 제시하여 그리스도를 그려내는 이러한 직무의 '증거'(δοκιμή)를 통해 하나님께서 영광을 받으시는 것이다(고후9:13). [도키메(δοκιμή) : 연단]
19.어리석음 모리아(μωρία) : 헬라어 원어해석(김준남 목사)
‘십자가의 도가 멸망하는 자들에게는 미련한 것이요 구원을 받는 우리에게는 하나님의 능력이라’(고전1:18)
‘어리석음’으로 번역된 헬라어 ‘모리아’(μωρία)라는 단어는 ‘어리석은, 신앙심이 없는, 불신하는, 부주의한, 바보, 얼간이’의 뜻을 가진 형용사 ‘모로스’(μωρός)에서 파생된 명사로 ‘어리석음 불합리’의 의미를 가지고 있다.
그리고 ‘모로스’(μωρός)라는 단어는 ‘비밀, 신비, 감춰진 것’이라는 뜻의 ‘뮈스테리온’(μυστήριον)의 어간에서 유래된 것으로 보이며, 이 단어 또한 ‘입을 다물다’라는 ‘뮈오’(muo)의 파생어에서 유래되었다.
그렇기 때문에 ‘이유없는, 무분별한, 우둔한, 어리석은, 생각이나 이해력이 없는 무모하게 행동하는, 무지한, 자기 중심적인, 지혜롭지 못한’이라는 의미를 가지 ‘압흐론’(ἄφρων)이라는 단어와 의미상 차이가 있음을 알 수 있다.
이런 의미에서 ‘모리아’(μωρία)라는 단어가 의미하는 ‘어리석음’이란 이 세상이 자기 지혜로 하나님을 알지 못하기에 믿는 자들을 구원하시기 위한 도구로써 전도의 ‘미련한 것’(μωρία)이란 의미를 가지고 있으며(고전1:21)
그러기에 십자자에 못박힌 그리스도는 이방인에게는 ‘그리스도가 길이요 진리요 생명’(요14:6)이라는 사실이 감춰져 있어 알 수 없고 믿을 수 없기에 단지 '미련한 것'(μωρία)이지만 부르심을 받은 자들에게는 하나님의 능력이요 하나님의 지혜가 된다는 의미를 포함하고 있는 것이다(고전1:23,24).
그리스도를 믿는다는 것은 그리스도의 말씀을 믿는다는 의미이며 이것은 곧 그리스도의 말씀을 품었다는 의미로 그러한 영적인 자만이 하나님이 말씀을 내용으로 담아 창조하신 창조물을 통해서 하나님의 마음을 보고 깨달을 수 있는 것이다. 그러나 말씀이 없는 육에 속한 사람은 하나님의 성령이 주시는 것들을 볼 수 없기 때문에 받아들이지 않으며 단지 '어리석게'(μωρία)만 보이는 것이다(고전2:14).
그래서 성경은 결국 유일한 이웃이며 형제인 그리스도를 보지 못하고 깨닫지 못하며 오히려 그리스도에 대하여 '미련한 놈'(모로스: μωρός)이라 하는 자는 지옥 불에 들어가게 된다고 말하고 있는 것이다(마5:22).
그러므로 십자가의 도(호 로고스 :ὁ λόγος)는 멸망하는 자들에게는 미련한 것(μωρία)일 수 밖에 없다는 십자가의 역설적 용법을 통하여 복음의 진수인 구원의 언약을 성취하기 위한 하나님의 열심을 극명하게 보여주고 있는 것이다. 따라서 십자가의 도는 구원을 받는 성도들에게 있어서 허물과 죄로 죽은 나를 살리는 생명의 말씀이요, 진리의 말씀이기에 더 이상 어리석은 것(μωρία)이 아닌 하나님의 능력이 되는 것이다(고전1:18).
[모리아(μωρία) : 어리석음]
20. 인내 휘포모네(ὑπομονή) : 헬라어 원어해석(김준남 목사)
‘주께서 너희 마음을 인도하여 하나님의 사랑과 그리스도의 인내에 들어가게 하시기를 원하노라’(살후3:5)
‘인내’로 번역된 헬라어 ‘휘포모네’(ὑπομονή)는 ‘확고함, 불변성, 충실, 인내, 참을성 있는 인내, 변치 않는 기다림, 유지, 즐겁고 희망찬 인내’의 뜻을 가지고 있으며, ‘밑에 머무르다, 여전히 있다, 머무르다, 지키다, 견디다, 꿋꿋함을 지니다’의 뜻을 가진 동사 ‘휘포메노’(ὑπομένω)에서 파생된 단어이다.
그리고 ‘휘포메노’(ὑπομένω)라는 단어는 소유격과 목적격과 함께 쓰일 때 ‘아래, 아래에’라는 뜻으로 사용되며 합성어에서도 동일한 의미와 함께 특히 ‘열등한, 은밀하게, 적당하게’의 뜻으로 사용되는 전치사 ‘휘포’(ὑπο)와 주어진 장소, 상황, 관계 또는 기대 속에서 ‘머물다’, 거하다, 출발하지 않다, 계속해서 있다, 기다리다, 참다’의 뜻을 가진 ‘메노’(μένω)의 합성어에서 유래 되었다.
이런 의미에서 ‘휘포모네’(ὑπομονή)가 뜻하는 ‘인내’란 하나님은 창조주, 인간은 피조물이라는 관계에서 하나님처럼 된 내가 죽고 ‘창조주 아래에 피조물로써 머무르는 것’이며 그래서 예수님의 ‘나는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다’
(요14:6)는 말씀 앞에 피조물로써 ‘나는 길과 진리와 생명이 아닙니다’를 고백하며 ‘진정한 길, 진리의 말씀, 영원한 생명 아래에 머물고, 품고, 기대하며 기다리는 것’을 의미한다고 볼 수 있다. 그러기에 이 단어는 국어사전이 정의하고 있는 단순히 ‘괴로움이나 어려움을 참고 견딤’의 뜻을 가진 ‘인내’(忍耐)와 많은 차이가 있음을 알 수 있는 것이다.
주님은 오늘도 우리의 마음을 하나님의 말씀만 품은 그 말씀 자체이신 그리스도의 그 ‘인내’(ὑπομονή) 안으로 인도하신다(살후3:5). 그것은 비진리의 내 말이 죽고, 선악의 주체인 두 마음으로써의 내가 죽는 '환난'(들립시스 : θλῖψις)을 통해서 ‘인내’를 이루게 되며(롬5:3) 그렇게 진리의 말씀에 붙들린바 되고 생명의 말씀에 섬김을 받는 그 ‘인내’(ὑπομονή)로 말미암아 영원한 생명을 얻게 되는 것이다(눅21:19).
성도는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 지키어 ‘인내’(ὑπομονή)로 결실하는 자이다(눅8:15). 그래서 말씀이신 그리스도의 그 ‘인내’(ὑπομονή)를 동일하게 가지고 있는 자이다. 그 ‘인내’가 있기에 하나님의 뜻을 행할(포이에오 : ποιέω – 되다)수 있는 것이며 약속을 받게 되는 것이다(히10:36). 그러므로 이제는 말씀을 행하려고 하는 율법 행함의 무거운 것을 벗어버리고 진리의 말씀만 품는 ‘인내’(ὑπομονή)로써 진정한 자유함을 누리며 이 땅을 살아가야 할 것이다(히12:1). [휘포모네(ὑπομονή) : 인내]
21. 여자 귀네(γυνή) : 헬라어 원어해석(김준남 목사)
‘여자는 교회에서 잠잠하라… 여자가 교회에서 말하는 것은 부끄러운 것이라'(고전14:34,35)
고린도전서 14장 34,35절에 ‘여자’로 쓰여진 헬라어 단어가 ‘귀네’(γυνή)인데 ‘처녀, 유부녀, 과부, 아내, 결혼한 여자’로 성경 다른 구절에서 번역된다.
성경에서 ‘여자’로 번역된 '귀네'(γυνή)를 단순히 윤리와 도덕 그리고 사회학적인 관점에서 성경을 문자적, 표피적으로 보고 해석해 버린다면, 고린도전서 14장 34,35절을 가지고 교회 내에서의 여자의 위치, 여성의 목사안수 문제라는 엉뚱한 논쟁과 결과를 가져오게 되는 것이다.
성경에 쓰여진 ‘여자’(γυνή)는 성경이 말하는 ‘여자’(γυνή)의 의미를 알고 나면, 그런 것과는 아무런 관계가 없다는 것을 것을 알 수 있게 된다.
‘귀네’(γυνή)는 ‘발생하게 되는 원인이 되다, 되기 시작하다, 스스로 행하다, 만들어지다, 완성되다’라는 의미를 가진 ‘기노마이’(γίνομαι)에서 파생된 단어이다.
헬라어 ‘귀네’(γυνή)의 히브리어는 ‘네케바’(נְקֵבָה)인데 ‘찌르다, 구멍을 뚫다, 지정하다, 표시하다, 저주하다’라는 의미의 ‘나카브’(naw-kab)에서 유래되었다.
정리하면, ‘귀네’(γυνή)는 ‘선악과를 먹고 하나님처럼 되버린 죽음 즉, 어두움의 상태이나 스스로 살았다고 생각하여 행하는 자’, ‘하나님의 생명이 빠져 구멍 난 저주받는 상태로 완성된 자’ 그리고 ‘씨(생명)를 품고 있는 남자에게서 떨어져 나온 씨(생명)가 없는 존재’의 의미를 가지고 있다.
그래서 창세기에 나타난 ‘네케바’(נְקֵבָה)의 용례를 보면 반드시 ‘남자와 여자, 암수’(창1:27)(창5:2)(창6:19)(창7:3,9,16)로 같이 쓰이고 있다. 성경이 언약의 책, 구원의 책이기에 그 구원의 구성 요소로써 반드시 ‘남자와 여자, 암수’를 기록하고 있는 것을 볼 수 있다.
여기서 ‘남자’로 번역된 히브리어 ‘자카르’(זָכָר)는 ‘씨(생명, 진리)가 있는 존재’라는 의미를 가지고 있으며, ‘여자’
로 번역된 히브리어 ‘네케바’(נְקֵבָה)는 ‘씨(생명, 진리)가 없는, 존재도 아닌 그래서 반드시 씨(생명, 진리)를 가 져야 비로소 존재가 되는 자’라는 의미를 가지고 있는 것이다.
그런 의미에서 ‘여자’(γυνή)를 의미하는, ‘자카르’(זָכָר)를 만나지 못해 생명의 말씀이 없는 자는 교회(그리스도가 머리인 생명 있는 자)에서 말할 수도 없고 말해서도 안 되는 것이다.
그러기에 디모데전서 2:15절에서 바울은‘여자’(γυνή)들이 만일 정숙함으로써 믿음과 사랑과 거룩함에 거하면 그 해산함으로 구원을 얻으리라’고 말하면서 오직 믿음, 사랑, 거룩함이신 그리스도 예수 안에 거할 때(엔 크리스트 : ἐν Χριστῷ - union Christ) 다시 말하면 ‘네케바’(נְקֵבָה)가 ‘자카르’(זָכָר)를 만날 때 구원을 얻는다고 말한 것이다. [귀네(γυνή) : 여자]
22. 외식하는 자 휘포크리테스(ὑποκριτης) : 헬라어 원어해석(김준남 목사)
예수님은 '외식하는 자'(ὑποκριτης)의 대표로 특별히 '서기관'(그람마튜스 : γραμματεύς)과 '바리새인'(화리사이오스 : Φαρισαιος)을 지목하고 있다(마23:13,15,23,25,27,29). 서기관은 모세의 율법과 성경을 연구하는 학자이며, 성경의 해석자이고, 성경을 가르치는 자이다.
그리고 마카베오 전쟁 이후, 가장 강력한 종교적인 당파에 속한 자를 가리키는 ‘구별된 자’라는 뜻을 가진 바리새인은 이스라엘이 물려받은 율법과 선조들의 전통을 존중하고 일상 생활의 사소한데에 이르기까지 이 율법을 정확하게 지키려는 자이다.
‘외식하는 자’의 국어 사전적 의미는 ‘표리부동한 자’라는 의미에서 ‘겉으로 드러나는 언행과 속으로 가지는 생각이 다른 자’라고 볼 수 있다. 그런데 서기관과 바리새인은 오직 성경만 연구하고 가르쳤으며, 율법을 지키기 위해 목숨까지도 아끼지 않았던 자들이기에 국어 사전적 의미의 ‘외식하는 자’의 대표로 부르기에는 적당하지 않아 보인다. 사실 ‘너희의 의가 서기관과 바리새인보다 더 낫지 아니하면 결코 천국에 들어가지 못한다’(마5:20)는 말씀에서도 알 수 있듯이, 예수님도 사람들이 도저히 따라갈 수 없다는 의미에서 그들의 의를 인정하고 있다. 그렇다면 예수님이 말씀하신 ‘외식하는 자’(ὑποκριτης)는 단순히 ‘표리부동한 자’라는 의미와는 다르다.
예수님은 서기관과 바리새인을 향하여 ‘외식하는 자’(ὑποκριτης)라고 부르면서 여러 가지로 부연설명하고 있다. ‘천국 문을 사람들 앞에서 닫고 너희도 들어가지 않고 들어가려 하는 자도 들어가지 못하게 하는 자’(마23:13)
‘교인 한사람이 생기면 너희보다 배나 더 지옥 자식이 되게 하는 자’(마23:15)
‘눈 먼 인도자, 어리석은 맹인들’(마23:15,16)
‘박하와 회향과 근채의 십일조는 드리되 율법의 더 중한 바 정의와 긍휼과 믿음은 버린 자’(마23:23)
‘잔과 대접의 겉은 깨끗이 하되 그 안에는 탐욕과 방탕으로 가득하게 하는 자’(마23:25)
‘겉으로는 아름답게 보이나 그 안에는 죽은 사람의 뼈와 모든 더러운 것이 가득한 자’(마23:27)
‘휘포크리테스’(ὑποκριτης)는 ‘맡겨진 인물에 따라 연기하는 배우 또는 무대 연기자, 위선자, 외식하는 자’의 의미를 가지고 있으며, ‘대역하다, 연극하다, 진짜같이 보이게 하다’라는 뜻을 가진 ‘휘포크리노마이’(ὑποκρίνομαι)에서 파생된 단어이다. 그리고 ‘휘포크리노마이’(ὑποκρίνομαι)라는 단어는 ‘곁에, 의해서, 아래에’라는 뜻의 전치사
‘휘포’(ὑπο)와 ‘구별하다, 정죄하다, 판결하다, 더 좋아하다, 법령을 정하다, 선고하다…’등의 뜻을 가진 크리노(κρίνω)의 합성어에서 유래되었다.
정리하면, ‘휘포크리테스’(ὑποκριτης)는 선악과를 먹고 하나님처럼 된 인간의 실존이라고 볼 수 있다. 그러기에
‘외식하는 자’(ὑποκριτης)에게서 나올 수 있는 것은 생명 없는 자인데 생명 있는 자처럼 보이며 행하는 것이며, 선악의 주체자로 판단하고 정죄하며 사는 것이고 또한 그렇게 빛을 알아보지 못하는 어두움에 묶인 삶을 더 좋아하며 사는 것이다. [휘포크리테스(ὑποκριτης) : 외식하는 자]
23, 잃다 아폴뤼미(ἀπόλλυμι) : 헬라어 원어해석(김준남 목사)
‘누구든지 제 목숨을 구원하고자 하면 잃을 것이요, 누구든지 나를 위하여 제 목숨을 잃으면 찾으리라’(마16:25)에서 ‘잃다’라고 번역된 헬라어 단어가 '아폴뤼미'(ἀπόλλυμι)이다.
'아폴뤼미'(ἀπόλλυμι)는 장소, 시간, 관계의 여러 의미에서 ‘멀리 떨어져서’의 뜻을 가진 '아포'(ἀπό : away from)와 ‘붕괴, 폐허, 파괴, 죽음’의 뜻을 가진 '올레드로스'(ὄλεθρος : ruin, destroy, death)의 어간에서 파생된 단어로 ‘완전히 파괴하다’라는 의미이다.
재귀형으로 쓰일때는 ‘멸망하다, 잃다’의 의미로 사용된다. 소유하고 있는 것 중에서의 일부가 아닌 전부 잃어버림,어느 한 부분이 아닌 완전한 파괴 그리고 일부 손상이 아닌 완전한 죽음이라는 강력한 의미를 포함하고 있는 것이다.
마태복음 16장 25절을 직역하면, ‘누구든지 자기 목숨을 스스로 안전하고 튼튼하게 지키려고 한다면 그것 때문에 완전히 파괴될 것이요, 누구든지 그의 것(진리의 말씀) 때문에 자기 목숨을 스스로 안전하고 튼튼하게 지키려는 것을 완전히 파괴하면 얻게된다’로 번역할 수 있다.
성경은 인간을 가리켜 ‘…허물과 죄로 죽었던 너희’(엡2:1)라고 말씀하고 있다. 죽은 자가 스스로 구원에 이를 수 없다. 그러나 이미 선악과를 먹고 하나님 처럼 되버린 인간은 끊임없이 자기들의 양식을 먹으며 생명나무 실과를 탐하고 있는 것이다.
그들이 이 땅에서 할 수 있는 일이란 오직 ‘썩는(ἀπόλλυμι)양식을 위하여 일하는’(요6:27)것 뿐이며 썩는 양식을 부지런히 먹는 일 뿐이다. 그리고 그들의 결국은 완전한 죽음 그 자체가 되는 것이다.
주님은 제자들에게 ‘자기를 따라 오려거든 자기를 부인하고 자기 십자가를 지고 좇을 것이니라’(마16:24)고 말씀하셨다. 여기서 자기 '부인'(아팔네오마이 : ἀπαρνέομαι)이란 바로 하나님 처럼의 ‘나’, 선악의 주체가 되버린 ‘나’, 그래서 스스로 목숨을 구원해 보겠다는 ‘나’를 완전히 죽이는(ἀπόλλυμι) 것을 말하는 것이다.
그래야 비로소 생명나무 실과를 먹게 되는 것이며 영생을 얻게 되는 것이다. 물론 ‘나’ 스스로 죽을 수 없기에 예수님이 십자가에서 ‘내’가 되어 죽으신 것이 아닌가? 그래서 오직 은혜(only by grace) 아닌가? 생명의 양식, 말씀은 오직 주님만이 주시는 것이다(요6:27). 그 양식에 목마른 자로 아들의 삶을 사는 자는 날마다 자신을 '아폴뤼미'
(ἀπόλλυμι)하며 주님만이 주시는 생명, 진리로 사는 자이다. [아폴뤼미(ἀπόλλυμι) : 잃다]
24, 염려하다 메림나오(μεριμνάω) : 헬라어 원어해석(김준남 목사)
‘그러므로 염려하여 이르기를 무엇을 먹을까, 무엇을 마실까, 무엇을 입을까 하지 말라’(마6:31)
‘염려하다', 근심하다, 염려로 괴로워하다, 이익을 증진시키다’는 의미를 가진 '메림나오'(μεριμνάω)는 ‘마음이 나뉘어지다, 파벌로 분열하다, 분쟁하다’라는 '메리조'(μερίζω)에서 파생된 명사 '메림나'(μεριμνα : 근심, 걱정, 염려)의 동사형이다. '근심하는'(μεριμνάω) 이유는 어떤 이익를 증진시키려 하기 때문이며, 마음이 나뉘어져 어수선해졌기 때문이며 그리고 파벌로 분열되었기 때문이다.
그러면 왜 이익을 증진시키려하고, 마음이 나뉘어졌으며, 파벌로 분열되었는가?
'메리조'(μερίζω)의 어원인 ‘분배, 나눔, 부분, 운명’의 뜻을 가진 '메로스'(μέρος)에서 알 수 있듯이 이미 나뉘어진 상태인 인간의 실존에서 그 이유를 찾을 수 있다.
하나님처럼 되버린 인간은 하나님과 나뉘어져 하나님의 생명이 없는 존재가 되어버렸고, 스스로 선악의 주체가 되어 마음이 나뉘어진 존재가 되었으며, 하나님 처럼의 삶을 살기위해 스스로 끊임없이 이익을 도모할 수 밖에 없는 존재가 되버린 것이다.
하나님처럼 되버린 인간이 할 수 있는 일이란 끊임없이 먹고, 마시고, 입으려고 하는 것이다.
인간들이 먹고, 마시고, 입으려는 것이 바로 율법이다. 그리고 인간은 하나님이 주신 율법을 스스로 지켜보겠다고 애를 쓴다. 그러나 율법이 줄 수 있는 것은 오직 '근심'(메림나 : μεριμνα) 밖에는 없다. 율법은 죄를 깨닫게 하는데 목적이 있다(롬3:20 ; 7:7).
그래서 육신을 도모하는 모든 양식을 통하여 하늘의 양식을 먹어야 하며, 인간 실존의 목마름을 채우는 물을 통하여 하늘의 생수를 마셔야 하며, 율법의 옷을 통하여서 의의 옷을 입어야 하는 것이다.
생명없는 흙에 불과한 인간이 스스로 생명을 채우려 할 때 필연적으로 생기는 '메림나오'(μεριμνάω)에서 벗어날 수 있는 길은 하나님의 생명으로 채워야 하는 것 뿐이며, 나뉘어진 마음 그래서 반드시 짝을 찾아야 하는데 생명없는 것만을 찾아 헤메이므로 생기는 '메림나오'(μεριμνάω)에서 자유하기 위해서는 반드시 진정한 짝인 그리스도 예수를 만나야 한다. 그리고 율법으로 옷을 입으려는 모든 염려에서 벗어나 그리스도로 옷 입어야 한다.
그래서 바울도 '염려하지'(메림나오 : μεριμνάω) 말고 오직 모든 일에 기도(프로슈코마이 : προσεύχομαι) 할 것(빌4:6)을 말씀하고 있는 것이다. [메림나오(μεριμνάω) : 염려하다]
25, 알다 기노스코(γινώσκω) : 헬라어 원어해석(김준남 목사)
‘알다’라고 번역된 헬라어의 대표적 단어에는 '아니스다노마이'(αἰσθάνομαι), 도케오(δοκέω), '기노스코'
(γινώσκω)가 있다. ‘이해하다, 깨닫다’라는 의미를 가진 '아니스다노마이(αἰσθάνομαι)와 ‘생각하여 여기다, 가정하다’라는 의미를 가진 '도케오'(δοκέω)가 관념적이며 이론적 지식으로써 ‘알다’의 의미를 가지고 있다면, ‘알다’
알기 위해 배우다, 확신하다, 사귀게 되다’라는 의미의 '기노스코'(γινώσκω)는 주관적이며 체험적이 지식으로써
‘알다’의 의미가 있다.
70인역 헬라어 성경에 기록된 '기노스코'(γινώσκω)는 ‘안다, 알다’라는 의미를 가진 히브리어 야다(ידע)를 번역한 것이다. 야다(ידע)는 문자적 의미에서의 ‘알다’라는 뜻보다는 ‘직접 보아서 확인하다’라는 의미에서 체험적으로
‘알다’라 뜻이 좀더 적합하다. 그래서 히브리어 ‘야다’와 헬라어 ‘기노스코’가 ‘동침하다’라는 뜻도 가지고 있는 것이다.
‘아담이 그의 아내 하와와 동침(ידע)하매 하와가 임신하여 가인을 낳고…’(창 4:1)
‘아들을 낳기까지 동침(γινώσκω)하지 아니하더니…’(마1:25)
예수님은 우리를 이와 같이 친밀하게 '알고'(γινώσκω)계신다(요2:24). 실제적인 지식으로써 사람의 속에 있는
모든 것을 속속들이 '알고'(γινώσκω)계신다(요2:25). 우리가 하나님처럼 되어버린 생명없는 자임을 알기에 생명이신 예수님이 이 땅에 오셔서 하나님을 '알라'(ידע, γινώσκω)고 말씀하고 있는 것이다.
그러기에 구약에 호세아 선지자는 하나님을 '알지'(ידע) 못하는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그러므로 우리가 여호와를 알자(ידע)! 힘써 여호와를 알자(ידע)…’(호6:1)고 외쳤으며, 신약에 바울도 모든 성도들이 ‘… 하나님을 알게(에피그노시스 : ἐπίγνωσις – 기노스코의 파생어)’(엡1:17) 되기를 간절히 바랬던 것이다.
창세전 언약의 백성(엡1:4)인 성도는 예수가 그리스도임을 '알고'(γινώσκω)있기에 하나님의 다스림이 있고 하나님 말씀의 섬김만이 있는 성전(고전3:16)으로 사는 자들이다. 그리고 그들의 이 세상 역사속 현실은 그렇게 하나님을 배우고 하나님과 사귀며 사는(요일 1:3) 이미 하나님 나라를 사는 삶인 것이다. [기노스코(γινώσκω) : 알다]
26, 우상 에이돌론(εἴδωλον) : 헬라어 원어해석(김준남 목사)
‘자녀들아 너희 자신을 지켜 우상에서 멀리하라’(요일 5:21)
‘우상’으로 번역된 헬라어 '에이돌론'(εἴδωλον)은 ‘보이는 것, 외모, 인물 형태, 형상, 외견’의 의미를 가진
'에이도스'(ειδως)의 파생어로 ‘경배를 위한 형상, 이방신상, 숭배, 우상’이라는 뜻을 가지고있다.
그리고 '에이도스'(ειδως)는 ‘보다, 쳐다보다, 느끼다’라는 뜻을 가진 '에이도'(ειδω)의 파생어이다.
'에이도'(ειδω)는 크게 눈을 뜨고 자세하게 본다는 의미로써 ‘경험으로 알다, 마음의 눈으로 보다’의 뜻을 가진
'블레포'(βλέπω)와 완전히 다른 내용상 의미를 가지고 있다는 의미에서 ‘표피적으로 보고 알다’라는 뜻으로 이해할 수 있다. 좀더 구체적으로, '에이도'(ειδω)는 항상 과거 시제에만 사용 된다는 특징을 가지고 있으며, 문자적 혹은 상징적으로 ‘보다’는 의미에서 단지 기계적이고 수동적으로 ‘보다’, 우연히 ‘보다’는 뜻을 가지고 있다.
즉, 눈에 보여지는 그대로 보고 알아버렸다는 의미이다.
정리하면, '에이돌론'(εἴδωλον)은 어떤 형상을 표피적으로 보아 ‘느끼는 그대로 생각하고 알아버리게 된 것’이며 성경은 그것을 ‘우상’이라고 말하고 있다. 여기에서 영어 단어 ‘우상’이라는 뜻의 ‘idol’이 파생 되어 만들어 졌다.
보이는 그대로의 선악과를 먹고 선악의 주체가 되어 하나님처럼 된 인간, 그가 바로 우상이며, 우상이 되버린 인간이 할 수 있는 일이란 오직 ‘우상’(εἴδωλον)을 만드는 일 뿐이다(행7:41).
성경은 그 ‘우상’을 가리켜 더러운 것(행15:2), 가증한 것(롬2:22), 아무것도 아닌 것(고전8:4), 말이 없어 말 못하는 것(고전12:2) 그리고 보거나 듣거나 다니거나 하지 못하는 것(계9:21)이라고 기록하고 있다.
빛을 알아보지 못하는 소경, 거짓 증거만을 하는 자, 하나님의 생명이 없어 존재도 아닌 아무것도 아닌 자, 생명의 말씀이 없어 그 말을 못하는 벙어리, 그 진리를 듣지 못하는 귀먹어리, 생명이 없어 움직이지 못하는 앉은뱅이… 이것이 죽음 가운데 있는 ‘우상’으로서의 인간의 실존이다.
성도는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로 말미암아 ‘우상’(εἴδωλον)이 되버린 ‘나’ 자신에게서 탈출한(휠랏소 :
φυλάσσω)한 자이며, 참된 자 예수 그리스도를 알고 그 안에 있는 ‘나’를 지켜며(휠랏소 : φυλάσσω) 사는 자이다.
[에이돌론(εἴδωλον) : 우상]
27, 이름 오노마(ὄνομα) : 헬라어 원어해석(김준남 목사)
‘보라 처녀가 잉태하여 아들을 낳을 것이요, 그의 이름은 임마누엘이라 하리라 하셨으니 이를 번역한 즉 하나님이 우리와 함께 계시다 함이라’(마1:23)
‘이름’이라고 번역된 헬라어 단어 ‘오노마’(ὄνομα)는 ‘그 사람만이 유일하게 알고 있고 가지고 있는 그 자체’라는 의미를 가진 ‘기노스코’(γινώσκω)의 어간의 추정된 파생어에서 유래되었다.
국어 사전적 의미도 ‘다른 것과 구별하기 위하여 사물, 단체, 현상 따위에 붙여서 부르는 말’로 정의하고 있다.
성경은 예수의 ‘이름’(오노마 : ὄνομα)을 ‘하나님이 우리와 함께 하심’이라는 뜻을 가지고 있는 ‘임마누엘’
(Ἐμμανουήλ)이라고 부르고 있다(마1:23). 하나님은 말씀이시다(요1:1). 그리고 말씀이 육신이 되어 우리 가운데 거하신 분이 예수님이시다(요1:14).그러므로 예수님이 바로 '말씀'(호 로고스 : ὁ λόγος)이신 것을 알 수 있다.
헬라어 단어 ‘오노마’(ὄνομα)로 번역한 히브리어 단어가 ‘쉠’ (שם)이다. ‘쉠’ (שם)을 파자하면 ‘분석된 진리, 말씀’
이 된다. 그리고 여기에 정관사 ‘하’(ה )를 붙으면 ‘그 이름, 그 진리, 그 말씀’이신 여호와를 가리키며 동시에 예수를 가리키는 의미를 가진 ‘하쉠’(השם)이 된다.
그러므로 예수의 이름(호 오노마 : ὁ ὄνομα)은 그 자체가 말씀(호 로고스 : ὁ λόγος)이 되는 것이다. 그래서 그 말씀(ὁ λόγος)이신 그 이름(ὁ ὄνομα)은 마땅히 거룩히 여김을 받아야 하는 것이며(마6:9), 그 이름(ὁ ὄνομα) 자체가 귀신을 쫓아내며 새 방언을 말하게 하는 표적을 가져오게 한다(막16:17).
그러기에 이제는 신약성경에 기록된 ‘그 이름’(ὁ ὄνομα)은 ‘그 말씀’(ὁ λόγος)으로 이해하고 보아야 한다.
‘또 너희가 내 ‘이름’(ὁ ὄνομα)으로 말미암아 모든 사람에게 미움을 받을 것이나 끝까지 견디는 자는 구원을 얻으리라’(마10:22),
‘또 누구든지 내 ‘이름’(ὁ ὄνομα)으로 이런 어린 아이 하나를 영접하면 곧 나를 영접함이니’(마18:5, 막9:37),
‘두세 사람이 내 ‘이름’(ὁ ὄνομα)으로 모인 곳에는 나도 그들 중에 있느니라’ (마18:20),
‘또 내 ‘이름’(ὁ ὄνομα)을 위하여 집이나 형제나 자매나 부모나 자식이나 전토를 버린 자마다 여러 배를 받고 또 영생을 상속하리라’(마19:29),
‘영접하는 자 곧 그 ‘이름’(ὁ ὄνομα)을 믿는 자들에게는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권세를 주셨으니’(요1:12),
‘누구든지 주의 ‘이름’(ὁ ὄνομα)을 부르는 자는 구원을 받으리라 하였느니라’(행2:21),
‘그 ‘이름’(ὁ ὄνομα)을 믿으므로 그 ‘이름’(ὁ ὄνομα)이 너희가 보고 아는 이 사람을 성하게 하였나니…’(행3:16)… 그러므로 ‘그 이름’(ὁ ὄνομα )을 가진 성도는 그 말씀(ὁ λόγος)이신 그리스도로 사는 자임을 잊지 말아야 한다. [오노마(ὄνομα) : 이름]
28, 일용할 에피우시오스(ἐπιούσιος) : 헬라어 원어해석(김준남 목사)
‘오늘날 우리에게 일용할 양식을 주시옵고’(마6:11)
‘일용할’이라는 말로 번역된 헬라어 단어 ‘에피우시오스’(ἐπιούσιος)는 ‘위에, 에서 떨어져서 위에, 곁에서, 반대편에, 넘어서, 건너편에, 반대쪽에’ 라는 뜻의 전치사 ‘에피’(ἐπι)와 ‘존재하다, 발생하다, 있다, 현존하다’라는 뜻을 가진 존재동사인 ‘에이미’(εἰμί)의 합성어에서 유래된 것으로 ‘생존을 위한, 필요한’이라는 의미이다.
특별히 ‘에피’(ἐπι)가 헬라어 문법상으로 대격(직접목적)을 지배할 때 ‘~위로, ~건너로, 위에, ~을 향하여, ~을 위하여 ’라는 뜻으로 쓰이며 그런 의미에서 ‘에피우시오스’(ἐπιούσιος)는 ‘존재를 향한, 존재를 위한’이라는 뜻을 기본적으로 가지고 있어 '양식'(알토스 : ἄρτος)이라는 단어와 연계하여 생존을 위한 양식으로써의 양식으로 이해할 수 있다. 또한 ‘에피우시오스’(ἐπιούσιος)가 ‘다가오는, 다음 날, 머지않아’라는 의미를 가진 ‘에피우사’(ἐπιούσα)라는 단어와 동일어에서 유래되었다고 본다면 ‘다가오는 양식, 내일의 양식’으로도 이해할 수 있다.
그런데 ‘에피우시오스’(ἐπιούσιος)라는 단어는 신약성경 전체와 헬라 문학을 통틀어서 주님이 가르쳐준 기도 중에서 마태복음 6장 11절과 누가복음11장3절에서만 사용되고 있는 특별한 단어이다. 그리고 주님이 가르쳐준 기도는 이미 하나님께서 이미 이루어 놓은 것을 전제하기에 이미 주신 것이고, 그래서 구하는 것이고 결국에는 이루실 것이라는 의미에서 하나님의 아들들이 이 땅에서 반드시 구해야 하고, 구할 수 밖에 없는 것이다.
허물과 죄로 죽은(엡2:1) 땅적 존재들에게 있어서 ‘일용할’(ἐπιούσιος) 양식은 썩을(ἀπόλλυμι) 양식(요6:27)뿐이며 그것을 위해서만 수고하지만 눈에 보이는 것들을 통해서 그 속에 담긴 진리의 말씀을 깨달아 하늘적 존재가 된 자들에게는 땅적 존재들이 도저히 알 수 없는 ‘일용할’(ἐπιούσιος)이 있다는 사실이다. 서로가 자기의 존재의 삶을 위하여 똑같이 ‘일용할’ 양식을 구하지만 사실은 전혀 다른 내용으로써의 양식을 구하게 되는 것이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아들들이 날마다 구해야 할 ‘일용할’(ἐπιούσιος) 양식은 하나님의 아들들에게 있어서 반드시 있어야 할 필요한 양식이며, 눈에 보이는 썩어 없어질 세상의 양식이 아닌 차원이 다른 양식으로 이해할 수 있는 생명의 양식(호 알토스 테스 조에스 : ὁ ἄρτος της ζωης)인 그리스도요 진리의 말씀일 수 밖에 없는 것이다.
[에피우시오스(ἐπιούσιος) : 일용할]
29, 오늘 세메론 (σήμερον) : 헬라어 원어해석(김준남 목사)
‘오늘 우리에게 일용할 양식을 주시옵고’(마6:11)
‘오늘’로 번역된 헬라어 단어 ‘세메론’(σήμερον)은 ‘오늘, 지금, 오늘 발생한 것’이란 의미 로 쓰이고 있으며, 정관사 호(ὁ)와 ‘날, 시간으로 이루어진 날, 이 시대의 마지막 날, 재림과 심판의 날’이라는 뜻을 가진 ‘헤메라’(ἡμέρα)의 합성어로 추정된다는 점에서 ‘이 시대의 마지막 날에, 재림과 심판의 날에’라는 의미를 가지고 있는 단어이다.
‘세메론’(σήμερον)이라는 단어를 ‘내일, 본래적 의미로 신선한’의 의미를 가진 헬라어 단어 ‘아우리온’(αὔριον)과 연계하여 볼 때, ‘이 시대 마지막 재림과 심판의 날’로써의 ‘오늘’(σήμερον)과 그것과는 완전히 다른 ‘신선한 날,
구원의 날’로써의 ‘내일’(αὔριον)을 생각할 수 있다.
‘세메론’(σήμερον)의 히브리어 단어는 ‘욤’(יום)인데 이를 파자하면 ‘넘겨주어 연합된 진리의 말씀’의 의미가 되어 말씀으로 창조되었기에 이 땅의 모든 것 속에 숨겨져 있는 말씀인 세상으로써의 의미를 가지고 있는 ‘날, 오늘, 생애’라는 뜻이다. 그리고 ‘아우리온’(αὔριον)의 히브리어인 ‘마할’(מחר)을 파자하면 ‘진리의 말씀으로 완성된 생명의 시작’의 의미를 가지고 있는 ‘내일, 미래에’라는 뜻이다.
구원받지 못한 자들에게 있어서 ‘오늘’(σήμερον)은 만물 가운데 숨겨진 진리의 말씀을 보지 못하기에 ‘바로 그날’(this very day), '마지막 날, 재림과 심판의 날’이 되어 오늘도 수고하고 무거운 짐(마11:28)을 두려움으로 질 수 밖에 없을 뿐만 아니라 진리의 말씀으로 완성된 영원한 ‘내일’(αὔριον)을 살 수도 없는 것이다.
그러나 구원받은 자들에게 있어서 ‘오늘’(σήμερον)은 하나님 처럼 된 내가 죽어 그리스도로 사는(갈2:20) 자들이기에 이미 진리의 말씀으로 완성된 생명의 시작으로써의 ‘내일’(αὔριον)을 살아가고 있다고 볼 수 있는 것이다.
좀더 정확히 표현하자면 ‘오늘’ 여기에서 이미(already)내일의 나라인 하나님 나라와 그러나 여전히 온전한 완성으로써 아직 오지 않은(not yet) 하나님 나라를 동시에 살아가는 존재가 바로 성도인 것이다.
그러므로 성도에게 있어서 ‘오늘’(σήμερον)은 ‘구원의 날, 은혜의 날, 그리스도와 연합되어 살아가는 날’이라는 것이 분명하기에 성도의 ‘오늘’의 양식은 당연히 하나님의 마음인 하나님의 진리의 말씀 뿐인 것이다.
[세메론 (σήμερον) : 오늘]
30, 인치다 습흐라기조(σφραγίζω) : 헬라어 원어해석(김준남 목사)
‘그의 증언을 받는 자는 하나님이 참되시다는 것을 인쳤느니라’(요3:33)
‘인치다’로 번역된 ‘습흐라기조’(σφραγίζω)는 ‘(도용 등을 방지하기 위한) 표식, 문장, 봉인, 도장, (소유 또는 진위를 위한 표식의)인’이란 뜻의 ‘습흐라기스’(σφραγίς)에서 유래된 동사형으로‘인치다’, '안전 또는 보존을 위해 도장을 찍다, 보존하다, 증명하다, 인봉하다, 감추다, 비밀을 지키다, 확증하다, 의심할 여지가 없다’라는 의미를 가진 단어이다.
아울러 명사형인 ‘습흐라기스’(σφραγίς)는 ‘울타리 치다, 에워싸다, 봉쇄하다, 침묵하다, 닫다’라는 뜻의 ‘프흐랏소’(φράσσω)에서 파생된 강세형이며, 좀더 구체적으로 ‘프흐랏소’(φράσσω)라는 단어는 ‘횡경막, 심장의 일부, 마음, 지혜, 생각, 지각과 판단하는 기능’이라는 뜻을 가진 ‘프흐렌’(φρήν)이라는 단어의 어간의 강세형이다.
‘습흐라기조’(σφραγίζω)로 번역된 히브리어 단어가 ‘밀폐하다, 봉인지를 바르다, 인을 치다, 멈추다, ..끝내다, 표시하다’라는 뜻의 ‘하탐'(חתם)인데 이를 파자 하면 ‘죄 또는 생명의 울타리로 완성된 말’인데, 이는 죄로 완성되면 비진리의 말로 인침을 받게 되는 것으로 영원한 사망에 이르게 되는 것이고 생명으로 완성되면 진리의 말씀으로 인침으로 받게 되는 것으로 영원한 생명, 구원에 이르게 된다는 의미인 것이다.
이와 같이 ‘습흐라기조’(σφραγίζω)는 마음과 생각의 중심이 되는 그 사람 자체에 인치는 것으로 사망과 생명을 표시하고, 증명하며, 울타리를 쳐서 결정짓는 것이 된다.
그래서 그리스도의 증언을 받는 자는 ‘하나님은 진리이시다’라는 사실을 그 마음 중심에 확증하는(σφραγίζω) 자가 되는 것이고(요3:33), 그렇게 하나님의 은혜로 아들을 믿는 자에게 영생이 있는 것이다(요3:36).반면에 그리스도의 증언을 받지 못하는 자는 ‘하나님은 진리이시다’라는 표시(σφραγίζω)가 없는 자로 영생을 보지 못하고 오히려 하나님의 진노가 그 위에 있는 자가 되는 것이다(요3:36)
하나님이 '인치신'(σφραγίζω) 자, 바로 인자가 생명의 양식을 주시는 것이며(요6:27), 그가 또한 우리에게 '인치시고'(σφραγίζω)보증으로 우리 마음에 진리의 말씀, 생명의 말씀인 성령을 주시는 것이다(고후1:22).
그러므로 성도는 그리스도 안에서 진리의 말씀 곧 구원의 복음을 듣고 그 안에서(union Christ) 또한 믿어 하나님의 백성이 된 자들이며 이것을 확인하는 '표'(σφραγίζω)로써 약속하신 성령을 받은 자들이다(엡1:13).
‘…그리스도 안에서 너희가 구원의 날까지 인치심(σφραγίζω)을 받았느니라’ (엡4:30)
[습흐라기조(σφραγίζω) : 인치다]
31, 이루다 텔레오(τελέω) : 헬라어 원어해석(김준남 목사)
‘예수께서 신 포도주를 받으신 후에 이르시되 다 이루었다 하시고 머리를 숙이니 영혼이 떠나가시니라’(요19:30)
‘이루다’로 번역된 헬라어 ‘텔레오'(τελέω)는 ‘끝, 한계, 마지막, 목표, 목적, 사용료, 요금’의 뜻을 가진 ‘텔로스’(τέλος)에서 파생된 단어로 ‘완전히 하다, 완수하다, 결론짓다, (빚을) 청산하다, 끝마치다, 지불하다, 성취하다, 건너다, 실행하다, 완성하다’의 의미를 가지고 있다. ‘텔로스’(τέλος)에서 파생된 명사형 중에 ‘텔레이오시스’
(τελείωσις)라는 단어가 있는데 ‘완전, (예언의 혹은 속죄의) 면제, 성취, 완료’의 뜻이다.
‘텔레오’(τελέω)가 의미하는 ‘이루다’는 신약성경에서 그 용례를 통해서 좀더 자세히 알 수 있다.
‘다 이루다’(τελέω)라고 표현은 ‘빚을 완전히 청산하다’라는 뜻을 가지고 있는 ‘이루심’을 말한다.
이것은 예수님께서 자신의 머리를 우리의 머리가 되도록 허락하신 것이며 그래서 자신의 영혼을 우리에게 넘겨주셨다(파라디도미 : παραδίδωμι)는 것을 의미하는 것이다(요19:30).
‘성경에 그를 가리켜 기록한 말씀을 다 응하게(τελέω)한 것이라 후에 나무에서 내려다가 무덤에 두었으나’(행 13:2 9)는 말씀에서도 ‘응하다’(τελέω)라는 의미도 예수님의 죽으심(인간의 죄를 모두 청산하심)에 대한 언약의 말씀을 그대로 실행에 옮기셨다는 것을 의미하고 있는 것이다.
‘나는 받을 세례가 있으니 그것이 이루어지기(τελέω)까지 나의 답답함이 어떠하겠느냐’ (눅12:50)는 말씀도 예수님의 십자가의 죽으심을 통하여 인간의 모든 죄를 청산하시는 그 ‘이루심’을 의미하며, ‘예수께서 열두 제자를 데리시고 이르시되 보라 우리가 예루살렘으로 올라가노니 선지자들을 통하여 기록된 모든 것이 인자에게 응하리라(τελέω)’ (눅18:31)는 말씀에서도 동일한 의미로 기록되고 있는 것을 볼 수 있다.
‘내가 너희에게 말하노니 기록된 바 그는 불법자의 동류로 여김을 받았다 한 말이 내게 이루어져야(τελέω)하리니 내게 관한 일이 이루어져 감이니라’(눅22:37)는 말씀은 구약성경 이사야서에 나오는 말씀으로(사53:12) 죄인을 구원하시기 위하여 스스로 죄인이 되어 이 땅에 오셨으며 결국 십자가의 죽으심으로 모든 죄의 삯을 지불하시겠다(τελέω)는 것을 의미하는 것이다.
그러기에 예수님의 ‘이루심’(텔레오 : τελέω)은 하나님의 창세전 언약을 성취하기 위하여 말씀 육신으로 이 땅에 오시어 십자가의 죽으심으로 죄의 빚을 완전히 지불하셨음을 의미하는 것이다.[텔레오(τελέω) : 이루다]
32, 이루다 플레로오(πληρόω) : 헬라어 원어해석(김준남 목사)
‘내가 날마다 너희와 함께 성전에 있으면서 가르쳤으되 너희가 나를 잡지 아니하였도다 그러나 이는 성경을 이루려 함이니라 하시더라’(막14:49)
‘이루다’로 번역된 헬라어 ‘플레로오’(πληρόω)는 ‘가득한, 충만한, 부족함이 없는, 완벽한’의 뜻을 가진 형용사
‘플레레스’(πλήρης)에서 파생된 단어로 ‘가득하게 하다, 채우다, 풍성하게 하다, 완성하다, 끝까지 채우다, 완벽하게 하다, 실재가 되게 하다, 수행하다, (예언을) 성취하다’의 의미를 가지고 있다. 그리고 ‘플레레스’(πλήρης)는 ‘채우다, 가득하다, 가득차다, 완수하다’의 뜻을 가진 동사 ‘플레도’(πλήθω)에서 유래된 단어이다.
‘플레로오’(πληρόω)로 번역된 히브리어 단어는 ‘솟아오르다, 일어나다, 서다, 입증되다, 성취하다, 확고히 하다, 확인되다, 지속하다, (다시) 들어올리다’의 뜻으로 쓰이는 ‘콤’(קום)이며 이를 파자하면 ‘파괴하고 말씀을 다시 세우다’라는 의미이다. 참고적으로 이 단어는 ‘일어나다, 서다, 견디다, 세우다, 확립하다, 만들다, 지명하다’라는 의미를 가진 아람어 ‘쿰’(קום)과 어원적으로 일치한다.
이런 의미들을 종합하여 정리하면, ‘플레로오’(πληρόω)는 ‘이 모든 일이 된 것은 주께서 선지자로 하신 말씀을 이루려(πληρόω)하심이니…’(마1:22) 그리고 ‘선지자 예레미야를 통하여 말씀하신 바… 이루어졌느니라(πληρόω)’는 말씀을 통해서 보면 구약성경에 선지자에 의해서 기록된 말씀이 그대로 성취된다(막14:49)는 의미에서의 ‘이루어지다’라는 것을 의미하는 것이다.
또한 ‘때가 찼고(πληρόω)하나님의 나라가 가까이 왔으니…’(막1:15)는 말씀에서도 알 수 있듯이 구약성경에 나타난 모든 사건은 하나님에 의해 정해지고, 하나님께서 정하신 때에 실현된다는 사실이다. 즉, 하나님의 뜻과 계획에 따라 일어나야 할 때에 일어나며 성취되는 것이다. 이러한 성취는 예수 그리스도의 오심으로 다 이루어지며(πληρόω), 그 성취도 우연이 아닌 하나님의 결정적인 때, 찬(πληρόω) 때에 이루어진다.
‘…때가 이르면 내 말이 이루어지리라 하더라’(눅1:20)
성경은 오직 예수만을 증거하고 있고 그 분에 대해서만 기록하고 있다. ‘모세를 믿었더라면 또 나를 믿었으리니 이는 그가 내게 대하여 기록하였음이라(요5:46)’. 그리고 그 모든 기록들은 반드시 성취된다는 사실을 말씀하고 있다.
‘내가 너희와 함께 있을 때에 너희에게 말한 바 곧 모세의 율법과 선지자의 글과 시편에 나를 가리켜 기록된 모든 것이 이루어져야(πληρόω) 하리라 한 말이 이것이라’(눅24:44).
그러므로 성도는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미리 세우신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뜻을 따라(엡1:9) 하나님의 열심에 의해 성취된(πληρόω) 하나님의 아들인 것이다. 뿐만 아니라 하나님의 은혜에 의하여 믿음으로 구원을 얻은 것이기에 그 구원은 하나님의 선물이 되는 것이다(엡2:8). [플레로오(πληρόω) : 이루다]
33, 이방인 에드노스(ἔθνος) : 이방인 (nation people) 헬라어 원어해석(김준남 목사)
‘하나님이 그들로 하여금 이 비밀의 영광이 이방인 가운데 얼마나 풍성한지를 알게 하려 하심이라 이 비밀은 너희 안에 계신 그리스도시니 곧 영광의 소망이니라’(골1:27)
‘이방인’으로 번역된 헬라어 ‘에드노스’(ἔθνος)는 ‘(관습이나 관례에 의해) 익숙하다, 습관이 되다, 풍습이 되다, 익숙한 것, 관례, 관습’의 뜻을 가진 ‘에도’(ἔθω)에서 유래된 것으로 보이며, ‘(같은 습관을 가진) 민족 또는 지파’라는 의미에서 기본적으로 ‘집단, 무리, 떼, 인류, 민족, 국가’의 뜻을 가지고 있다.
뿐만 아니라 특별히 유대인이 자신들만이 하나님으로부터 선택 받은 자라는 선민의식에서 그들 이외의 (유대인이 아닌) 외국사람을 지칭하는 표현으로 ‘이방인’, 이교도, 이방나라’라는 뜻도 가지고 있으며, ‘(은유적으로) 비유대인 그리스도인’을 지칭하기도 한다.
그러나 성경은 ‘그러므로 염려하여 이르기를 무엇을 먹을까 무엇을 마실까 무엇을 입을까 하지 말라’(마6:31)고 말하면서 이러한 것들은 모두 ‘이방인’들(ἔθνος)이 구하는 것임을 말씀하고 있다(마6:32).
여기서 말하는 ‘이방인’(ἔθνος)이란 하늘 아버지께서 이 모든 것이 우리에게 있어야 할 줄을 아신다는 사실을 모르는 자를 지칭하는 것으로 하나님 나라의 백성이 아닌 ‘이방인’(ἔθνος) 즉, 허물과 죄로 죽은 자들의 나라인 세상 나라 백성을 가리키고 있는 것이다.
하나님의 백성은 무엇보다도 먼저 ‘하나님 나라와 하나님의 의를 구하는 자’여야 하기 때문이다. 그래서 사도바울도 이 땅의 것을 구하는 자를 가리켜 ‘그들의 마침은 멸망이요, 그들의 신은 배요, 그 영광은 그들의 부끄러움에 있고 땅의 일을 생각하는 자라’(빌3:19)고 말하면서 ‘우리의 시민권은 하늘에 있다’(빌3:20)고 고백하고 있는 것이며, 하나님 나라의 시민권을 가진 이 세상 나라의 ‘이방인’(ἔθνος)인 사도바울은 ‘내가‘이방인’(ἔθνος)인 너희에게 말하노라 내가 ‘이방인’(ἔθνος)의 사도인 만큼 내 직분을 영광스럽게 여기노니’(롬11:13)라고 말하고 있는 것이다.
예수님은 그렇게 이 세상 나라에 속하지 않은 '이방'(ἔθνος)을 비추는 빛이요, 진정한 주의 백성인 이스라엘의 영광(눅2:32)이 되는 것이다. 그리고 그 말씀은 ‘한 사람이 백성을 위하여 죽어서 온 민족(ἔθνος)이 망하지 않게 되는 것이 너희에게 유익한 줄을 생각하지 아니하는도다 하였으니 이 말은 스스로 함이 아니요 그 해의 대제사장이므로 예수께서 그 민족(ἔθνος)을 위하시고 또 그 민족(ἔθνος)만 위할 뿐 아니라 흩어진 하나님의 자녀를 모아 하나가 되게 하기 위하여 죽으실 것을 미리 말함이러라’(요11:50-52)는 말씀을 통해서 확인 할 수 있는 것이다.
그러므로 성도는 ‘택하신 족속이요 왕 같은 제사장들이요 거룩한 나라(ἔθνος)요 그의 소유가 된 백성’(벧전2:9)으로써 하나님 나라의 시민권을 가지고 있는 자이다. 그래서 세상에 대하여 죽은 자(갈6:14) 곧 사망을 통과하여 생명으로 옮겨진 자(요5:24)이기에 이 세상 나라의 ‘이방인’(ἔθνος)으로 살아갈 수 밖에 없는 자이다.
[에드노스(ἔθνος) : 이방인] (2023년 4월 14일 0시 정검 마침)