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차 세계대전이 일어나는 1914년의 세계정세는 영국,프랑스,러시아의 3국 협상국과 독일과 오스트리아가 팽팽히 맞서 있는 상황이었다.
이러한 차에 오스트리아 헝가리 제국이 보스니아 헤르체보비나를 합병하자,같은 슬라브국가인 세르비아는 불만이었다.
그러자 1914년 6,28일 오스트리아 황태자 페르디난트 부처가 보스니아의 수도 사라예보를 방문하게 되는데,이때 세르비아의 한 청년에게 암살되는 사건이 발생했다.사라예보 사건이다.
이 발칸지역은 당시의 유럽의 화약고라고 해서,오스만 투르크가 물러난 후에 오스트리아와 러시아의 세력이 뻩치고 있었다.러시아는 같은 슬라브국가인 세르비아를 편들고 있었다.
오스트리아는 사라예보 사건에 대한 최후 통첩 10개조를 발표했는데,범죄자에 대한 사법조사와 이 감시를 위한 오스트리아에서 전권대표기관이 참여한다는 것등이다.
전권대표 참여한다는 것에 불만인 세르비아의 통고가 늦어지자,오스트리아는 세르비아에 선전을 포고하고,뒤이어 러시아가 세르비아 편으로,독일이 오스트리아헝가리편으로,삼국협상국이었던 프랑스, 영국이 러시아 편으로,영국에 불만을 품은 오스만투르크가 독일 오스트리아 편으로 되어서 4년간의 세계대전이 진행됐다.
독일은 슐리펜 작전으로 서부 프랑스를 빠른시일내에 격파하고 동부전선으로 러시아를 쳐부수려 했지만 마음같이 되지 않았다.이탈리아는 협상국쪽으로 발을 돌렸고,루마니아도 협상국,일본 협상국, 불가리아는 독일 쪽으로 갔다.
그러나 러시아에서는 1917년 11월 혁명이 일어나 독일에게 많은 영토를 양보하고 전선에서 떠나자, 독일은 좋은 기회를 잡게 되었지만,독일은 영국을 고립시켜 식량과 원료의 공급을 차단하려는 무제한 잠수함 작전으로 민간선박 루지타니아 호를 침몰시켜 미국인 128명이 사망한 사건으로 미국이 1918년 협상국으로 참전하자,전세는 일변하였다.
이러한 미증유의 세계대전으로 민간인 사망1.300만명,군인 사망자 850만,부상자포함 4,000만명의 인명피해를 보고 끝났다(1914,7.28-1919,11.11)
미국 28대 대통령 윌슨은 대전이 끝나기 전인 1918년 1월 18일 평화원칙 14개조를 발표했다.여기에서 “각 민족은 스스로의 의지에 따라서 정치적 운명을 스스로 결정하고,다른 민족의 간섭을 받을 수 없다.”라고 천명했다.일면 자결권이라고 하는데,결과적으로 이는 하나의 좋은 말만의 잔치였고,전승국에는 적용되지 않았고 패전국에만 적용된 빛 좋은 개살구였다.
이러한 윌슨의 14개조가 알려지자,국내의 반응은 고무되었다.암울한 조선의 독립을 유리하게 전개할 수 있다고 분석한 국외망명정객,청년단체,일부 종교인 등이 일말의 독립의 희망을 갖게 되어 적극적인 활동을 하게 된다.
이러한 국제정세의 움직임에 따라 각지에서 활동중인 독립운동가들이 상하이에 모였고,김규식,여운형등이 주도한 신한청년당이 1918년 8월 결성되어 김규식을 파리강화회의에 파견,외교전을 벌었으나.국가 자격문제로 거부당한다.
하지만 조선의 도쿄유학생들은 조선청년독립단의 명의로 일본의 사기와 폭력에 의한 국권찬탈과 노예로의 전락을 폭로하고 ,앞으로의 국권회복을 위해서 피의 투쟁을 계속하겠다는 2,8독립선언서를 발표한다.
국내에서도 윌슨의 민족자결주의와 2.8독립선언으로 더욱더 독립의지가 높아졌고,고종의 갑작스러운 붕어로 망국의 설움과 일본에 대한 적개심으로 크게 동요하게 되었다.그리하여 1919년 3월 1일을 기해서 민족대표 33인이 독립선언서를 낭독하고 독립을 세계에 고했다.
민족대표 33인은 탑골공원에서 독립선언서를 낭독하려 했으나,모이기로 했던 학생들의 희생이 우려되어,태화관으로 옮겨서 식을 거행했는데, 정작 팁골공원에서는 민족대표가 참석하지 않자,신원이 밝혀지지 않은 한 학생이 단상에 올라 독립선언서를 낭독하고 서울 시내로 행진하면서 대한독립만세를 외쳤다. 이 만세운동은 전국적으로 퍼져 나가 모든 이천만 국민들이 만세대열에 참가하여 독립을 부르 짖었다.일본헌병경찰,그리고 무장군인들의 무자비한 탄압으로 사망자 7,500명 부상자 16,000명의 희생을 내었다.
특히,천안군 아우내[竝川] 장터에서는 4월 1일 3,000여 명의 시위군중이 모여 독립만세운동을 전개하였다. 천안에서 출동한 철도경비대가 무차별 사격을 가해 20명이 현장에서 순국하고, 많은 부상자가 발생하였다.
수원군 제암리에서는 4월 15일 일본군 중위가 마을사람에게 알릴 것이 있다고 속여 천도교도·기독교도 20여 명을 교회에 모이게 하고 사격을 가한 뒤 증거를 없애기 위해 교회에 불을 지르는 끔찍한 만행을 감행하였다. 이 때 교회당 안에서 죽은 사람이 23명, 고주리에서 칼로 살해된 사람이 6명이었다.
이상과 같은 일본의 만세운동자에 대한 학살 사례는 몇 가지 두드러진 예에 지나지 않는다. 이렇듯 만세시위운동에 대한 일본의 대책은 비인도적인 대량 살육과 만행, 그리고 대규모 검거였다. 만세운동의 주동자로서 검거된 인사에 대해서도 극악한 고문을 가한 뒤에 식민지 통치법규에 의해서 처형하였다. 유관순이 대표적인 경우다.
3.1만세운동은 비록 실패로 돌아갔지만,민족의 단결력을 만 천하에 보여주었다.그리고 일본의 통치 형태를 바꾸는 계기가 되었다.즉 무단통치에서 소위 문화통치로 바꿨다고 했으나,그것은 교묘한 민족이간정책이었다.참 일본인들 교묘하고 교활하고 영리한 인종이다.
첫댓글 일본은 조선을 침략하기 위하여 조선을 연구하는 학자가 당시 30만명이 넘었다 합니다
그러나 조선은 일본을 알려 하는 사람이 1천명도 되지않았다고 합니다.
일본은 우리나라 시골 구석구석 시골마을의 영향역 있는 사람이 는구인지 까지 파악하고 있었다고 하네요.
그러니 지금의 잘먹고 잘사는 친일파를 갖고 놀았겠지요.
그러니 그 뿌리가 너무 깊은것 같네요.
정신차리지 않으면 역사는 반복 된다고 하지않던가요!
저의 미미한 글에 답글하여 주신 대 대하여
감사합니다.
그리고 좋으신 글 마음에 간직합니다.
104회 3.1행사와 뭔가 다르네요.
전문가들의 이야기를 더 들어 봐야겠습니다.
https://www.youtube.com/live/RM-nLWBcnzQ?feature=share
뭐 더 연구하고 말 것도 아닙니다,
파고다 공원 뒷문 장기판 장년들의 지껄임으로
가볍게 생각하세요.
이것은 정치적인 이야기가 될까요?
역사적인 이야기가될카요?
갠적 의견은 어떻 하신가요?
미래적일까요? 현실적일까요? 😀
https://youtu.be/NazW0z1mu0M
PLAY
일본인에 조상은 뿌리는?
백제에 후손이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