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네로황제
서기0037.12.15출생 ~ 0068.6.9사망. -영화 쿼바디스 주인공 |
“플리니우스는 그를 가리켜 ‘인류의 파괴자’이며 ‘세상의 독’이라 표현했다. 그는 원로원에서 국가의 적이라 선언한 최초의 황제가 되었다. 후대 사람들은 네로에게서 사악한 인간, 더 나아가 반 그리스도의 전형을 보았다. 셰익스피어의 [햄릿]이나 라신의 [브리타니쿠스]와 같은 문학 작품에서 그는 모친 살해자나 몰인정하고 잔인한 인간의 상징으로 그려졌다. 또한 그 는 사드 후작의 영웅이기도 했다. ‘더러운 피를 물려받은 타락한 절대권력자’라는 말은 칼리굴라보다 네로에게 훨씬 더 어울리는 표현이었다.” 비비안 그린이 [권력과 광기]에서 묘사했듯, 네로라는 이름은 오랫동안 폭군의 대명사처럼 쓰였다.
그보다 더한 잔혹성을 보인 로마 황제들도 있었고, 오히려 네로는 잔혹성 면에서 온건한 편이었는데도 그런 오명의 주인공이 된 것이다. 그 까닭은 무엇일까?
황제란 무엇인가?
기원전 48년, 파르살로스 전투에서 카이사르가 폼페이우스를 격파함으로써 로마 공화국의 제국화는 사실상 결정되었다. 정식으로는 그로부터 21년 뒤인 기원전 27년에 카이사르의 후계자 옥타비아누스가 원로원에서 ‘아우구스투스(존엄한 사람)’라는 칭호를 얻은 때를 제국의 시작이라고 하지만.
그것은 포에니 전쟁 이후 로마의 급속한 번영과 그 번영의 그늘을 극복해 보려던 그라쿠스, 마리우스 등의 개혁, 그에 따라 나타난 군벌의 시대의 종착점이었다. 그러나 오래전에 왕정을 폐지했던 로마에게 황제란 생소한 존재였고, 실제로 황제권은 로마 공화정의 여러 제도를 이어붙여 만들어졌다.
이탈리아 본토의 행정과 군 통수권을 갖는 집정관, 그 집정관과 원로원에 맞서 민회를 대변하는 호민관, 각 속주를 지배하며 해당 지역의 병력을 지휘할 수 있는 총독. 로마 공화국은 이렇게 권력 분립을 이루고 또한 집정관과 호민관은 각기 두 명씩 선임함으로써 독재를 막아왔다.
그런데 아우구스투스는 집정관과 호민관을 겸임했을 뿐 아니라 동료를 두지 않았고, 각 속주의 총독을 지휘감독할 수 있는 권한까지 얻음으로써 “황제권”을 탄생시킨 것이었다.
이러다 보니 도대체 황제란 무엇이며 로마인은 황제를 어떻게 이해해야 하는지가 한동안의 과제였으며, 초기 황제들은 이 과제에 각각의 개성으로 답을 했다.
아우구스투스는 각종 제도의 창시자였고, 티베리우스는 냉혹한 관리자였으며, 칼리굴라는 독재자였다. 그리고 개성이 충분치 않았던 클라우디우스를 거쳐 네로에게 5대 황제의 지위가 돌아왔을 때, 그는 또 다른 의미에서의 로마 황제를 연출해 보였다. 바로 “지중해 세계에 군림하며, 모든 로마인을 하나로 묶는 상징적 존재”라는.
아그리피나의 집념
네로가 황제가 되는 길은 험난했으며, 그것은 그 자신보다 어머니 아그리피나의 집념의 결과였다. 아우구스투스는 결혼생활에서 아들을 얻지 못했고, 따라서 딸인 율리아가 아우구스투스의 오른팔이었던 아그리파와의 사이에서 낳은 루키우스와 가이우스에게 기대를 걸었다.
그러나 그 두 사람 모두 병사하자, 아우구스투스는 어쩔 수 없이 황후 리비아가 자신과 결혼하기 전에 전남편과의 사이에서 얻은 티베리우스를 양자로 들여 후계자로 삼았다.
한편,역시 리비아가 전남편과의 사이에서 낳은 아들인 드루수스(낙마 사고로 죽었다)의 아들 게르마니쿠스는 수려한 용모에 화려한 언변, 그리고 게르만족과의 전쟁에서 세운 혁혁한 공로 등으로 로마 민중이나 군인들 사이에서 인기가 높았다. 아우구스투스의 명령으로 그를 자신의 양자로까지 삼아야 했던 티베리우스는 황제가 된 뒤에도 항상 게르마니쿠스를 잠재적 경쟁자로서 꺼렸다. 그러므로 게르마니쿠스가 안티오크에서 34세의 젊은 나이로 갑자기 죽자, 티베리우스가 손을 쓴 것이라는 소문이 돌아도 이상하지 않았다. 티베리우스는 게르마니쿠스의 부인인 아그리피나(대 아그리피나)까지 섬에 유배 보내고 끝내 죽음에 이르게 했다.
아버지 게르마니쿠스가 죽을 때 겨우 세 살이었던 아그리피나(소 아그리피나)는 늘 죽음의 위협 속에서 자랄 수밖에 없었다. 오빠인 칼리굴라가 티베리우스에 이어 황제가 되자 비로소 운이 트이는 듯했으나, 광기 어린 젊은 황제의 의심을 사서 어머니처럼 코르시카 섬에 유배되고 만다. ‘이대로 죽을 수는 없다. 반드시 권력을 움켜쥐어야 한다.
그래서 적들을 죽여야 내가 살 수 있다’고 몇 번이나 다짐한 그녀는 스스로는 여자의 몸이었기에 아들 네로에게 모든 기대를 건다. 그녀의 계획은 숙부뻘인 클라우디우스가 칼리굴라에 이어 황제가 되자 그를 유혹하여 황후가 됨으로써 1단계가 성공했고, 다시 클라우디우스를 암살하고 마침내 네로를 황제에 앉힘으로써 2단계까지 성공을 보았다.
네로의 아버지 그나이우스 도미티우스 아헤노바르부스는 장남 네로(처음의 이름은 루키우스 도미티우스 아헤노바르부스)가 태어났을 때 ‘아그리피나가 오빠 칼리굴라와의 근친상간으로 낳은 자식이 아닌가?’하고 의심하였다고 한다. 그래서인지 아그리피나가 코르시카에 유배되자 두 살도 안 된 네로를 숙모인 레피다에게 맡겨 버리고 쳐다보지도 않았다. 레피다는 네로를 살뜰히 보살피지 않았으며, 무용수나 이발사 교육을 시켰다. 아그리피나의 세력이 커지면서 네로도 좋은 생활을 누리게 되었지만, 54년, 고작 열여섯 살의 나이로 로마 황제가 되자 처음에는 귀찮아했다고 한다. 자신은 시나 음악을 즐기며 사는 게 좋지, 정치놀음은 적성이 아니라고 여겼기 때문이다. 그러나 어머니는 황제란 무엇이든 할 수 있는 자리이며, 황제로서 시와 음악을 충분히 즐길 수 있다고 충고했다. 네로는 이를 귀담아들었으며, 마침내 자신만의 방식으로 그것을 실현하게 된다.
‘예술가 황제’의 ‘포퓰리즘’
“그의 성격의 특징은 대중의 인기에 대한 억누를 수 없는 욕망이다”라고, 네로보다 한 세대 뒤에 태어난 로마 역사가 수에토니우스는 쓰고 있다. 사실 네로는 평생 스스로를 황제라기보다 예술가로 생각했는데, 자신만의 미학의 세계에서 사는 고독한 예술가라기보다 대중의 환호와 애정을 먹고 사는 대중예술가에 가까웠다. 그는 황제로서 원로원이나 민중 앞에서 연설할 때 시적인 운율을 구사했으며, 아그리피나가 그의 스승으로 붙여 준 세네카[Seneca, Lücius Annaeus,스토아학파의 철학자]의 도움 덕에 내용적으로도 알찼던 연설은 많은 갈채를 받았다. 여기서 그치지 않고, 네로는 직접 류트나 리라를 켜면서 시를 읊고 노래를 불렀다. 그리고 환호하는 대중에게 환한 웃음과 함께 거액의 화폐를 뿌렸다.
원로원은 이를 황제답지 못한 경박한 일로 여겼으며, 수에토니우스나 타키투스는 네로의 목소리나 시의 수준은 형편없었으나 청중은 황제의 무력과 돈 때문에 마지못해 환호를 보내곤 했다고 적었다. 하지만 네로가 더 멋지게 공연하기 위해 피나는 노력을 했다는 이야기는 수에토니우스도 인정하고 있음을 볼 때, 그가 단지 겉멋만 든 엉터리 예술가는 아니었던 것 같다.
네로를 낳은 아그리피나
스승 세네카
젊은 황제의 이런 전시성 행사는 점점 규모가 커졌다. 올림픽을 본떠 ‘네로니아’ 축제를 열었는데 5년에 한 번 개최하기로 했지만 점점 기간을 좁혀 결국 연중행사가 되었다. 전차 경주와 검투사 경기 등에 이어 시와 리라 연주, 웅변 등의 경연이 벌어졌는데 이들 종목에서는 언제나 네로가 우승이었다.
그는 이를 축하하는 뜻에서 막대한 자금을 시민들에게 뿌리고, 축제 기간 중 누구나 자유롭게 목욕탕과 음악당을 사용하게 했으며, 수많은 경기장과 극장을 새로 지어 귀족들의 전유물이던 오락을 서민들도 즐길 수 있게 해 주었다. 또한 그는 그리스 비극에 직접 출연하여 연기를 했는데, 매번 심혈을 기울여 임했으며 어쩌다 작은 실수를 하면 그 때문에 관중들의 야유를 받을까 봐 안절부절못했다고 한다. 감히 아무도 그를 야유할 수 없으리라는 것을 모를 정도로 어리석어서 그랬을까? 아니면 그만큼 연기에 몰입했던 것일까?
이처럼 노는 일에 시간과 돈을 아낌없이 썼으니, 과연 폭군답다는 생각도 든다. 하지만 과연 그럴까? 폭군은 대개 유혈을 좋아하고 전쟁을 취미로 여긴다. 하지만 네로는 정반대였다. 그는 사형이 확정된 죄인에 대해서도 되도록 집행을 미루며 장기 유배형으로 바꾸게 했으며, 대중이 좋아하므로 검투사 시합을 열었지만 스스로는 즐기지 않았고 끝내 폐지했다. 역시 로마 황제들이 곧잘 벌였던 암살도 적어도 한동안은 저지르지 않았다. (즉위 직후 경쟁자였던 브리타니쿠스를 암살했다고 하지만, 현대의 학자들은 이를 부정적으로 보는 경우가 많다.) 또한 그는 재위 14년 동안 한 차례의 전쟁도 일으키지 않았다. 당시 로마의 가장 큰 적대국은 동방의 파르티아였는데, 네로는 특별히 조련한 군사들을 파르티아와의 국경에 배치해 만일에 대비하고는 파르티아 왕자 티리다테스를 로마로 초대했다. 그리고 주체할 수 없을 정도의 거액을 선사하여 양국 사이에 평화 무드가 이어지게 했다. 파르티아에서는 네로에게 큰 호감을 품은 나머지 네로가 죽은 뒤에도 그에게 경의를 표했다고 한다.
또한 네로는 ‘친서민 정책’을 많이 내놓았다. 과도한 변호사 비용 때문에 서민들이 소송을 포기하는 경우가 많았기에 변호사 비용 상한제를 실시하고, 보석금이나 과태료는 줄였다. 간접세를 일체 폐지하려다가 원로원의 저항에 부딪혀 세율만 낮추었으며, 속주에서 이탈리아에 들어오는 물품에 관세를 폐지했는데 이로써 사실상 무관세 혜택을 받고 있었던 이탈리아 내 대지주들의 기득권이 훼손되고, 생필품 물가는 내렸다. 노예들에게는 주인의 가혹행위에 맞서 주인을 고소할 수 있는 권리를 부여했다.
그러고 보면 그 사치스러운 공연과 볼거리들도 대중에게 정신적, 물질적 만족의 기회를 주고 로마 전역의 경기를 활성화하는 효과를 냈다고도 볼 수 있다. 아무튼, 이래저래 서민들 사이에서는 네로 황제의 인기가 드높았다. 반면 그의 전기를 쓴 수에토니우스와 타키투스를 포함하는 귀족들에게는 ‘철부지 황제’의 모든 것이 갈수록 못마땅해졌다.
로마 화재와 기독교 박해
그러나 재위 5년째인 59년, 그는 모후 아그리피나를 암살했으며 그것은 서민들 사이에서도 네로의 인기를 ‘조금은’ 떨어트리는 계기가 되었다. 친족 암살은 로마 황실에서 지겨울 정도로 많이 일어났지만, 친어머니를 죽인 경우는 처음이었기 때문이다. 네로로서는 어느 정도 불가피한 점도 있었는데, 점점 말을 듣지 않는 자식에게 실망한 그녀가 새로 얻은 정부를 대신 황제로 세우려는 음모를 꾸미고 있었던 것으로도 보이기 때문이다. 아무튼 이를 시작으로 65년에 스승 세네카에게 자살을 강요하기까지, 네로는 처음과 달리 점점 폭력과 탄압을 늘려가기 시작한다.
그것은 한편으로 천성적인 소심함(암살이나 반역의 낌새가 있다고 여겨지면 두려워서 견디지 못하는) 때문에, 그리고 그만큼 기세 좋게 퍼부어댄 결과 점점 뚜렷해지는 재정 부족 때문이었다. 반역이 의심되는 자를 처형하고 그의 재산을 몰수하면 일석이조의 결과를 얻을 수 있었던 것이다. 이 과정에서 원로원을 중심으로 하는 귀족들과의 사이는 더욱 나빠졌다. 네로는 스스로 창작한 소극에서 광대에게 이렇게 외치도록 하여 그들에 대한 적대감을 드러냈다. “오 황제시여, 당신은 어찌 그리 게으르십니까? 어째서 원로원 의원놈들을 한꺼번에 죽이지 않으십니까?”
“어머니를 죽이고 회한에 사로잡힌 네로”. 1878년 워터하우스의 그림
그러나 서민들 사이에서는 인기가 유지되는 편이었는데, 이를 단숨에 꺼트리는 사태가 일어났다. 바로 64년 7월에 일어난 로마의 대화재였다. 네로가 자신이 생각한 신도시를 만들기 위해 일부러 로마를 불태웠으며, 불타는 로마를 바라보며 시를 읊었다는 이야기는 수에토니우스 등의 역사가가 기록한 후 [쿠오바디스]를 비롯한 여러 문학과 예술 작품에서도 오랫동안 정설처럼 받아들여져 왔다. 사실 그렇게 믿을 만도 했다.
불타는 로마를 보며 네로가 시를 읊은 것은 사실이며(다만 그것은 진정 비통함을 표현한 것으로 보이지만), 로마의 잿더미를 대체하여 네로 스스로를 위한 웅장한 황금궁전을 포함하는 반듯하고 깔끔한 계획 도시를 건축할 생각도 있었다. 더욱이 네로의 근위대는 불길을 잡기 위해 시가지의 한쪽에 맞불을 놓았는데, 이 광경이 “군대가 방화를 했다.”는 뜬소문의 근거가 되었을 수도 있다. 하지만 요즘은 네로 방화설을 부정하는 경우가 많다. 이 화재로 네로가 아끼던 진귀한 수집품들도 불타 버렸다는 점, 네로가 화재 진압과 이재민 구호를 위해 안간힘을 썼던 점, 무엇보다 일반적인 이미지처럼 그렇게 광인은 아니었다는 점 때문이다. 당시 로마는 골목이 좁고 집이 다닥다닥 이어져 있어 불이 번지기는 쉬우면서 진압하기는 어려운 구조였으며, 화재가 처음 발생한 팔라티노 언덕 근처에는 올리브유와 옷감을 파는 상점들이 밀집해 있었다. 말하자면 우연히 일어난 작은 화재가 걷잡을 수 없는 대화재로 번졌을 수 있다.
기독교도를 화형시키는 네로의 상상도
하지만 네로 방화설은 당시의 민중들에게 쉽게 먹혀들었다. 하루아침에 모든 것을 잃어버린 사람들로서는 미칠 것 같은 분노를 쏟을 대상이 필요했으리라. “황제는 친어머니를 죽였다. 그러니까 우리 모두의 어머니인 로마 역시 죽이려 했을 것이다!”라는 유언비어는 또 하나의 로마 화재처럼 삽시간에 번져나갔다. 이 의혹과 불만을 잠재우기 위해 네로가 기독교도들을 희생양으로 삼자, 그것은 장기적으로 네로에 대한 평가를 더욱 떨어트리는 결과를 낳았다. 기독교는 그 뒤 계속해서 물밑에서 교세를 넓히며 로마 서민들의 마음을 사로잡았기 때문이다.
학살에서 살아남은 교인들은 모일 때마다 “사도들이 예언한 종말의 때가 왔으며, 적 그리스도는 다름 아닌 네로”라고 속삭였다.
예술가, 또는 광대의 죽음
이로부터 네로가 권력을 잃는 4년 정도의 기간에, 네로는 홀린 사람처럼 점점 더 잔인한 명령을 내렸다. 65년에 발각된 피소의 황제 암살 음모가 그런 추세에 불을 붙였으며, 이제는 반역 혐의자뿐 아니라 황제를 조롱했다거나 예의를 갖추지 않았다거나 하는 사람들까지 처형장으로 끌려갔다. 여기에 60년에는 브리타니아에서, 66년에는 예루살렘에서 반란이 일어나 로마군이 타격을 입자 네로의 국방 정책에 대해서도 비난이 쏟아졌다. 62년에 품행이 나쁘다고 소문난 포파에아와 결혼하기 위해 정숙한 황후였던 옥타비아에게 누명을 씌우고 끝내 죽인 것도 황제의 인기를 떨어트렸다. 게다가 로마에 전염병까지 돌아서 수천 명이 죽으니, 민심은 대부분 황제를 외면해 버린다. 마침내 갈리아에서 빈덱스가 반란을 일으키고, 에스파냐 총독인 갈바를 황제로 추대하고 나섰다. 네로는 이들을 진압할 군대를 보냈지만, 황금에 굶주려 있던 군대는 도리어 반란군 편에 붙어 버린다.
반란군이 거침없이 로마로 진격하고 있다는 소식에 네로는 갈팡질팡했다. “내가 갈리아로 가서 저들에게 눈물로 호소하면 저들은 무기를 내릴 거야”라 하다가, “파르티아로 달아나는 수밖에 없어” 했다가, “그냥 갈 바에게 로마를 넘겨주자. 나는 이집트 총독 정도면 만족해”……. 하지만 결국 친위대까지 그를 버리고 달아나 버리자, 그는 네 명의 하인만 데리고 로마 교외의 별장으로 피신했다. 그러나 이미 부처님 손바닥 안이었고, 네로는 잡혀서 갖은 고문 끝에 죽느니 자살을 선택한다. 그러나 이 심약한 인간은 스스로를 찌르는 일마저 주저하며 제대로 못 해, 결국 하인의 도움이 필요했다. 나이는 31세. 마지막으로 남긴 말은 “위대한 예술가가 이렇게 사라지는구나!”
네로는 분명 위대하고 현명한 황제였다고는 말하기 어렵다. 하지만 역사상 최악의 폭군이라고도 할 만할까? 그는 적어도 카이사르 이래의 군벌들과는 다른 황제상을 제시했다. 그것은 다수 백성들에게 인기를 얻는 정치를 하고, 무력보다는 매력으로 권위를 유지하는 것이다. 포악한 싸움꾼보다는 인심 좋은 광대가 그나마 나은 지배자가 아니겠는가? 그가 귀족들, 지식인들, 그리고 기독교인들에게 특별히 밉보이지 않았더라면 그토록 심한 오명의 주인공이 되지 않았을지도 모른다. 수에토니우스는 자신의 네로 전을 마무리하며 네로가 비열하고 우매했다고 비판하고는, 이렇게 덧붙이고 있다. “그가 죽은 날은 그가 옥타비아를 살해한 바로 그날이었다. 온 세상이 환호했다. 시민들은 자유의 모자를 쓰고 거리로 뛰쳐나왔다. 그러나 그의 무덤에 오랫동안 봄꽃과 여름꽃을 바치는 사람들도 있었다. 그의 조각상을 세우고, 토가를 입혀 놓은 사람들도 있었다. 그가 마치 아직도 살아서 황제로 군림한다는 듯, 포고령을 전하며 그의 이름을 언급하는 경우도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