위 책은 월풀라 라훌라 스님의 저서 What the Buddha taught를 고법엄선생이 한문으로 번역한 것임.
[책 속으로]
첫 번째 거룩한 진리 _둑카 苦
"늘 그러하지 않은 것은 모두가 둑카이다"
'괴로움'이 있기 때문에 둑카가 아니고 '늘 그러하지 않은 것은 모두가 둑카'이기 때문에 둑카인 것이다.
오로지 순수한 평온함과 각성이 있는 선정의 경지, 이런 아주 높은 경지까지도 둑카에 속한다. 마지마 니까야의 한 경전에서 부처님은 이 선정의 정신적 행복을 찬양한 다음에 그것들이 늘 그러하지 않은 것이고, 둑카이며, 변화하는 것이라 말한다.
집착하려고 하는 다섯 가지 모임(五取蘊)이 둑카이다.
서로 의존하는 색수상행식 이들 다섯 가지 육체적 정신적 모임들이 심리적 생리적 기계같이 결합되어 함께 작업하면 '나'라는 관념을 얻는다. 그러나 이는 거짓된 관념일 뿐이다.
고통이 존재하더라도, 고통받는 사람은 찾아볼 수 없네. 행위가 있지만, 행위하는 사람은 찾아볼 수 없네.
[글을 본 후]
색·수·상·행·식 다섯 가지 모임(오취온)으로 만들어진 집착의 아이콘인 '나'는 결국 가짜에 불과합니다.
늘 그러하지 않다는 것은 곧 무상(無常)하다는 뜻이며, 항상함이 없이 동요할 수밖에 없는 인간의 의식 구조는 필연적으로 苦를 발생시킵니다.
원효 성사 해동소에서 이르시기를,
覺則不動 動則有苦 果不離因故
깨달으면 동요가 없다. 동요하게 되면 苦가 있다. 果는 因을 벗어나지 않기 때문이다 라고 하셨습니다.
이 '각즉부동(覺則不動)'의 구절을 배치한 것은 둑카의 근원이 마음의 동요에 있음을 증명하는 데 더할 나위 없이 적합합니다. 무상한 세상 속에서 마음이 흔들릴 때 고통이 발생하는 필연적 인과관계를 이보다 더 명쾌하게 짚어낼 수는 없을 것입니다.
데카르트는 "나는 생각한다. 고로 나는 존재한다"고 말했습니다. 그러나 불교는 다르게 말합니다. "나는 망념에 의해 존재한다. 그러므로 망념에 젖은 생각을 한다."
이 말은 인식의 주체와 객체의 관계가 완전히 뒤바뀌어 있음을 뜻합니다. 즉, 주체인 나의 요동만큼 객체인 세상이 나에게 고통스러운 모습으로 나타난다는 뜻입니다.
제행무상·제법무아·열반적정의 삼법인을 모르면 '일체개고'가 되어 세세생생 고통을 받아야 합니다.
이 모든 것은 무명(無明)에 의한 망념이며, 이 망념에 의해 무상과 고통과 유전과 부정이 나타납니다. 이 네 가지가 있는 삶은 그 자체로 모두 고통일 수밖에 없습니다.
그렇다면 이 고통을 어떻게 마주해야 할까요? 여기서 초기불교와 대승의 가르침이 빚어내는 훌륭한 통섭의 실마리를 발견할 수 있습니다.
초기불교의 사성제가 ‘지금 여기에서 내가 겪는 고통의 실상을 낱낱이 직시하는 서늘한 메스’라면, 원효성사의 삼세육추는 ‘그 고통이 내 마음의 가장 깊은 심연에서부터 어떤 구조로 피어올랐는지를 그려낸 정밀한 설계도’라고 할 수 있습니다.
이 둘을 엮어낸다면, 라훌라 스님이 전하시는 서슬 퍼런 사성제의 진단 속에서 멈추지 않고, 그 고통이 내 안의 마음 공장(삼세육추)을 어떻게 거쳐 증폭되었는지까지 꿰뚫어 보는 '입체적인 각성의 지도'가 완성될 것입니다.
둑카의 거울 위에 펼쳐진 심층의 바다를 조망해 보십시오. 이는 독서와 사유의 폭을 한 차원 더 깊은 영적 심해로 끌어올리는 아주 훌륭한 통섭이 되어 줄 것입니다.
ㅡ계 속ㅡ
대승기신론 해동소 전문도량 원효센터 1부 회원 The west 합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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