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활 제6주간 금요일 강론>(2024. 5. 10. 금)(요한 16,20-23ㄱ)
복음
<그 기쁨을 아무도 너희에게서 빼앗지 못할 것이다.>
✠ 요한이 전한 거룩한 복음입니다.16,20-23ㄱ
그때에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말씀하셨다.
20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말한다.
너희는 울며 애통해하겠지만 세상은 기뻐할 것이다.
너희가 근심하겠지만, 그러나 너희의 근심은 기쁨으로 바뀔 것이다.
21 해산할 때에 여자는 근심에 싸인다.
진통의 시간이 왔기 때문이다.
그러나 아이를 낳으면,
사람 하나가 이 세상에 태어났다는 기쁨으로 그 고통을 잊어버린다.
22 이처럼 너희도 지금은 근심에 싸여 있다.
그러나 내가 너희를 다시 보게 되면 너희 마음이 기뻐할 것이고,
그 기쁨을 아무도 너희에게서 빼앗지 못할 것이다.
23 그날에는 너희가 나에게 아무것도 묻지 않을 것이다.”
주님의 말씀입니다.
◎ 그리스도님, 찬미합니다.
『기쁨으로 그 고통을 잊어버린다.』
“해산할 때에 여자는 근심에 싸인다. 진통의 시간이 왔기
때문이다. 그러나 아이를 낳으면, 사람 하나가 이 세상에
태어났다는 기쁨으로 그 고통을 잊어버린다. 이처럼 너희도
지금은 근심에 싸여 있다. 그러나 내가 너희를 다시 보게 되면
너희 마음이 기뻐할 것이고, 그 기쁨을 아무도 너희에게서
빼앗지 못할 것이다. 그날에는 너희가 나에게 아무것도 묻지
않을 것이다(요한 16,21-23ㄱ).”
1) 여기서 ‘진통’과 ‘해산’은, 예수님의 십자가 수난, 죽음,
부활을 설명하기 위한 비유가 아니라, 슬픔이 기쁨으로
바뀌는 것을 설명하기 위한 일반적인 ‘예’입니다.
<“예수님 수난과 죽음 때에 제자들이 겪게 될 고통과 슬픔은
산모가 겪는 진통과 같다.”는 뜻도 아니고,
“예수님의 부활은 출산과 같다.”는 뜻도 아닙니다.>
그래서 여기서 ‘잊어버린다.’ 라는 말이 가장 중요합니다.
아이가 태어났다는 기쁨으로 산모가 진통을 잊어버리는
것처럼, 부활하신 예수님을 만나게 되면, 제자들은 예수님의
십자가 수난과 죽음 때에 겪었던 고통과 슬픔을 모두
잊어버리게 될 것입니다.
여기서 ‘잊어버린다.’ 라는 말은, ‘망각’을 뜻하는 말이 아니라
‘해방’을 뜻하는 말입니다.
예수님 부활 후에, 제자들은 예수님의 십자가 수난을 기억하지
못하게 되는 것이 아니라, 그때 겪었던 고통과 슬픔에서
완전히 벗어나게 됩니다.
즉 고통과 슬픔에서 완전히 해방됩니다.
그만큼 부활의 기쁨이 크다는 것입니다.
2) 복음서를 보면, 예수님 부활 이야기는 짧고 간단하게
기록되어 있고, 예수님의 수난과 죽음에 관한 이야기는
아주 길고 자세하게 기록되어 있습니다.
복음서를 기록한 시점에서 생각하면, 교회 공동체는,
또는 신앙인들은 이미 부활의 기쁨을 마음껏 누리면서, 정말로
예수님의 십자가 수난과 죽음을 잊어버렸을지도 모릅니다.
그래서 사도들과 복음서 저자들은 예수님께서 왜 그렇게
십자가에 못 박혀 돌아가셔야만 했는지를 잊지 말라고
가르치기 위해서, 예수님의 수난과 죽음에 관한 이야기를
길고 자세하게 기록했을 것입니다.
십자가를 잊어버리면, 부활의 기쁨도 희미해질 것이고,
결국에는 부활도 잊어버리게 될 것입니다.
혹시라도 “예수님께서 부활하셨다는 것을 분명히 알고 있고
믿고 있으니까 더 이상 사순절은 필요 없다.” 라고
주장할 사람이 있을지도 모릅니다.
예수님의 부활을 믿는 것이 가장 중요한 신앙이긴 한데,
부활 전의 과정도 중요하고, 부활의 이유와 목적도 중요합니다.
우리가 미사 때마다 “주님께서 오실 때까지 주님의 죽음을
전하며 부활을 선포하나이다.” 라고 고백하는 것은, ‘예수님의
죽음’을 먼저 믿어야만 ‘예수님의 부활’을 믿는 믿음이 의미와
가치가 있기 때문입니다.
3) 예수님께서는 부활하셨지만,
우리의 부활은 아직 이루어지지 않았습니다.
조금 다르게 표현하면, 예수님께서는 십자가의 길을 끝까지
걸어가셔서 부활하셨지만, 우리가 걸어가야 할 십자가의 길은
아직도 남아 있습니다.
우리는 분명히 부활의 기쁨 속에서 신앙생활을 하고 있고,
각자 자신의 부활을 향해서 나아가고 있지만, 각자 자신의
십자가를 지고 걸어가야 하는 길은, 사람마다 차이가 있긴
해도, 아직 끝나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의 수난과 죽음에 관한 이야기를
길고 자세하게 기록했을 것입니다.
<우리가 해마다 사순절을 지내면서 예수님의 수난과 죽음을
기억하고 기념하는 것은 바로 우리 자신을 위한 일입니다.
즉 우리에게 주어진 십자가의 길을 잘 걸어가기 위해서이고,
우리도 예수님처럼 부활하기 위해서입니다.>
4) “내가 너희를 다시 보게 되면”이라는 말씀은,
“내가 부활해서 너희에게 나타나면”이라는 뜻입니다.
“너희 마음이 기뻐할 것이고” 라는 말씀은, “너희 마음이
모든 고통과 슬픔에서 해방될 것이고, 기쁨으로 가득 찰
것이다.” 라는 뜻입니다.
“그 기쁨을 아무도 너희에게서 빼앗지 못할 것이다.” 라는
말씀은, “부활의 기쁨은 영원하다.” 라는 뜻입니다.
여기서 ‘아무도’는 박해자들, 사탄, 시간 등을 모두 가리킵니다.
‘박해자들’로 해석하면, 예수님 말씀은
“세상이 너희를 박해해도, 너희의 기쁨은 없어지지 않을
것이다.”, 또는 “부활의 기쁨은 세상의 박해를 극복하는 힘이
될 것이다.” 라는 뜻이 됩니다.
‘사탄’으로 해석하면, 예수님 말씀은 “부활의 기쁨은 사탄의
유혹과 방해를 물리치는 힘이 될 것이다.” 라는 뜻이 됩니다.
<물론 자동적으로 그렇게 되는 것은 아니고, 우리 쪽에서도
유혹을 물리치려고 능동적으로 노력해야 합니다.>
‘시간’으로 해석하면, 부활의 기쁨은 영원하다는 뜻입니다.
5) “그날에는 너희가 나에게 아무것도 묻지 않을 것이다.”
라는 말씀에서 ‘그날’은 부활과 성령강림을 함께 가리킵니다.
사도들은 부활하신 예수님을 만나고 나서, 또 성령을 받고
나서, 예수님의 가르침들을 온전히 깨달았고, 확신했습니다.
그래서 더 이상 예수님께 물을 필요가 없이, 세상 사람들에게
자신들이 확신하고 있는 신앙을 증언하고 선포했습니다.
<“나는 예수님의 부활을 믿고 있고, 성령을 받았는데도,
왜 아직도 모르는 것이 많고, 이해하지 못하는 것도 많은가?”
예수님을 믿게 되면서 한 번에 믿음의 완성 단계에 도달하는
사람도 있긴 하지만, 대부분의 신앙인들은 일생 동안 끊임없이
노력해서 그 단계에 도달하게 됩니다.
믿음이 부족해서 그런 것이 아니라, 단련과 정화 과정이
좀 더 필요하기 때문에 그런 것입니다(1베드 1,7).>
[출처] 부활 제6주간 금요일 강론|작성자 송영진 모세 신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