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 속으로]
두 번째 거룩한 진리는 둑카苦의 생겨남이다.
감각적 쾌락에 대한 목마름이며, 존재하려고 하고 생성하려고 하는 목마름, 존재하지 않으려는 자기 파괴의 목마름이다.
무명으로부터 일어나는 거짓된 자아관념이 이 목마름의 중심을 차지한다.
세상의 모든 갈등과 분쟁이 이런 자기 본위의 목마름에서 비롯된다. 부처님께서 말씀하셨듯이 세상은 궁핍한 것인데도 갈망하고들 있다. 그래서 목마름의 노예가 된다.
욕망이 둑카를 일으키는 원인이며, 정신이 형성한 것들의 모임(行蘊)에 근원을 두고 있다. 그래서 우리는 둑카가 생겨나는 원인, 그 싹이 둑카 자체에 있는 것이지 둑카 바깥에 있는 것이 아님을 명확하고 주의 깊이 주목하여 기억해야 한다.
불교에서의 業은 마음먹은 행위를 의미하지 모든 행위를 의미하지 않는다. 목마름, 의도, 업은 이롭거나 해롭거나 간에, 그 효과를 내는 하나의 힘을 갖고 있다. 좋은 것이건 나쁜 것이건 간에 업은 상대적이며 '계속되는 순환' 속에 있다.
존재하려 하고 생성하려 하는 이 목마름이 계속되는 한 계속되는 순환(윤회)은 그치지 않는다. 오로지 실재, 진리, 즉 열반을 보는 지혜로써, 이 몰아가는 힘, 즉 목마름을 단절시켰을 때만 멈출 수 있다.
[글을 본 후]
苦海 속에 표류하는 중생들, 드넓은 바다 속에서도 항상 목마른 인간의 삶은 눈 뜨고 깨어 있으면 있을수록 더욱 시리게 다가옵니다.
내가 부모에게서 태어남과 동시에 부모라는 존재가 성립하고, 내 업에 의해 세상이 나타나는 것.
애인을 만들어 놓았기 때문에 머리가 아픈 것처럼 일체유심조는 일체유업조唯業造라는 법문을 다시 가슴에 새깁니다.
불교의 업설(業說)은 체념이 아니라 자기 책임과 자유의 원리이자, 삶의 지혜가 담긴 궁전입니다. 하지만 삼세의 바늘에 낚인 인간의 마음을 들여다볼수록 전율을 금할 수 없는 것이 사실입니다.
사성제에서 말하는 ‘집(集)’은 고통을 일으키는 원인이며, 갈애와 무명이 모여 이루어집니다. 이 ‘집’의 실체를 더 깊은 근원으로 파고들면, 결국 마음의 심연에서 일어나는 삼세육추의 전개 과정과 맞닿게 됩니다.
표면적으로 드러나는 갈애(集)는 육추(六麤)의 단계, 즉 대상을 분별하고(지상), 이를 이어가며(상속상), 기어이 자기 것으로 취하려는(집취상) 마음에서 구체화됩니다.
그러나 그 뿌리를 추적해 올라가면, 마음의 미세한 흔들림인 삼세(三細), 즉 무명의 바람에 다다르게 됩니다.
결국 ‘集’은 단순한 욕심의 차원을 넘어, 삼세라는 근원적인 무명에서 시작하여 육추라는 거친 집착과 행위(기업상)로 뻗어 나가는 고통의 연쇄 과정 전체를 의미합니다.
왜 괴로운가 하면, 찰나마다 무명의 바람에 흔들리며 주객을 나누고, 그 분열된 대상에 집착하여 스스로를 업의 노예로 묶고 있기 때문입니다.
이 미세한 무명의 바람을 잠재우고 거친 파랑을 가라앉히는 것, 그것이야말로 둑카의 불꽃을 끄는 유일한 길입니다.
그 진리의 맥락은 놀랍게도 원효 성사의 해동소 속 깊은 통찰과 그대로 이어집니다.
但有無明迷自一心 起諸波浪 流轉六道 雖起六道之浪 不出一心之海
단지 무명이 일심을 미혹시켜 모든 파랑을 만들어 6도에 윤회케 한다. 그렇게 6도의 파랑이 일어나지만 그래도 일심의 바다로부터 벗어나지 않고 있다.
ㅡ계 속ㅡ
대승기신론 해동소 전문도량 원효센터 1부 회원 The west 합장
첫댓글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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