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얼굴 모르는 고조부모 제사 지내는건 시대착오”
국학진흥원 “대면 조상 한정 합리적”
누리꾼 찬성 의견 많아… 일부 “반대”
‘얼굴도 모르는 고조부모까지 기제사를 올려야 할까.’
전통 기록유산을 연구하는 경북 안동의 한국국학진흥원이 “4대 봉사(부모, 조부모, 증조부모, 고조부모의 기제사를 모시는 것)는 시대착오적이라는 의견이 많다”고 밝히면서 2일 논쟁이 이어졌다.
진흥원은 전날 ‘제례문화에 대한 오해와 편견’ 자료를 내고 “조선시대에도 4대 봉사가 제도적으로 명시된 적은 없었다”고 밝혔다. 진흥원에 따르면 1484년 편찬된 법전 경국대전에는 “6품 이상 관료는 3대까지, 7품 이하는 2대까지, 서민은 부모 제사만을 지낸다”고만 돼 있다. 그러나 ‘주자가례’를 신봉하는 유학자들에 의해 4대 봉사가 보급됐다.
진흥원은 “조상과 생전 주고받은 정서적 추억이 풍부할수록 추모의 심정은 간절해진다”며 “조상 제사의 대상은 (부모, 조부모 등) ‘대면 조상’까지로 한정하는 것이 합리적이다”라고 강조했다.
온라인 커뮤니티에서는 “얼굴도 모르는 분들의 제사를 지낼 때마다 ‘왜 해야 하나’ 싶었다”, “살아계신 부모에게 잘하는 것도 힘든 시대다”라며 진흥원의 의견에 찬성하는 이들이 많다. 그러나 “조상에 대한 존경의 차원에서 고조부모까지 제사를 모셔야 한다”는 의견도 일부 나왔다.
최훈진 기자
“고조부모까지 제사… 조선시대에도 명시된 적 없다”
동의보감에 따르면 남자의 결혼 적령기는 16세, 여자는 14세이다. 조선시대만 해도 조혼(早婚)이 성행하고 대가족으로 모여 살았기 때문에 조혼한 부모가 낳은 아이를 기준으로 보면 인생 육십일 때 조부모뿐만 아니라 증조부모까지 함께 사는 것이 일반적이었다. 사람에 따라서는 80, 90세 이상 사는 경우도 있었다. 그럴 경우 고조부모하고도 같이 살았다는 얘기다. 그래서 넉넉잡아 기억에 남아 있을 수 있는 고조부모까지 제사를 지냈다. 그것이 4대 봉사(奉祀)다.
▷한국국학진흥원은 1일 ‘제례문화에 대한 오해와 편견’이라는 자료를 내고 조선시대에 4대 봉사가 원칙으로 명시된 적이 없다고 밝혔다. 1484년 성종 때 편찬된 법전인 경국대전에 따르면 “6품 이상의 관료는 부모, 조부모, 증조부모 3대까지 제사를 지내고, 7품 이하는 2대까지, 벼슬이 없는 평민은 부모 제사만을 지낸다”고만 명시돼 있다. 다만 이후로 ‘주자가례’를 신봉하는 주자학이 득세하면서 고조부모까지 제사를 지내는 4대 봉사가 양반집을 중심으로 확산됐다.
▷평민이 4대 봉사를 지키기는 현실적으로 어려웠다. 그러나 조선 후기로 올수록 신분 질서가 무너지고 결정적으로 구한말 갑오경장에 의해 양반과 평민의 구분이 없어지자 양반의 평민화가 이뤄진 것이 아니라 오히려 평민의 양반화가 이뤄져 모두가 4대 봉사를 원칙으로 삼게 됐다. 실제 지키건 안 지키건 그랬다는 말이다. 가난한 집에 시도때도 없이 돌아오는 제삿날을 간소화한 것은 뜻밖에도 일제였다. 일제는 가정의례준칙을 둬 2대 봉사를 강제했다.
▷유교의 본산인 성균관은 광복 후 4대 봉사의 원칙을 재확인했다. 물론 그것을 엄격히 따를 수 있는 일반 가정은 얼마 되지 않았다. 많은 가정이 조부모까지만 제사를 지내거나 나중에는 그것도 어려워 부모 제사만 지내게 됐다. 성균관도 결국은 타협해 명절이나 부모 제사 때 4대까지 한꺼번에 모시는 간략한 방안을 제시했다. 그런데 이번에 국학진흥원에서 4대 봉사의 원칙 자체를 부정하고 나온 것이다.
▷국학진흥원은 “조혼 습속이 사라진 오늘날 고조부모 제사상을 차리는 건 시대착오적”이라고 강조했다. 과거에는 조혼 때문에 3대나 4대가 함께 살았지만 지금은 고령화(高齡化)로 3대가 공존하는 것이 일반적이다. 수명 100세 시대가 되면 4대가 공존하는 것도 드물지 않아질 것이다. 그때의 예법은 또 어떨 것인가. 제사란 살아 있을 때 생활을 같이 하거나 따로 살아도 왕래하면서 쌓인 친밀감을 토대로 한다. 봉사는 몇 대가 맞느냐를 따지기보다는 기억에 남아 있는 조상을 추모하는 것임을 잊지 말아야 한다.
송평인 논설위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