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즉, "내가 의식적으로 시킨 적이 없는데 누가 시키는가?"라는 질문에 가장 가까운 답은 우리 몸 자체의 자동 조절 시스템이 시킨다입니다.
그리고 여기서 재미있는 점이 하나 있습니다.
우리가 흔히 "나"라고 느끼는 의식적인 자아가 몸 전체를 직접 조종하는 것이 아닙니다. 오히려 의식적으로 내가 조절할 수 있는 것은 몸의 아주 일부이고, 생명 유지에 필요한 대부분의 일은 우리가 의식하지 않는 상태에서 진행됩니다.
원하시면 여기서 한 단계 더 들어가서 “그렇다면 뇌가 시키는 건가? 뇌는 누가 시키는 건가? 결국 최초의 ‘명령자’는 누구인가?”라는 철학적인 질문까지 이어서 설명해드릴 수 있습니다.
◆ 단감농부
네, 저는 철학적인, 특히 불교철학적인 답변을 알고 싶었습니다.
◆쳇지피티
네. 이 질문을 불교철학의 관점에서 바라보면 상당히 깊은 곳으로 들어갑니다.
불교에서는 오히려 질문을 이렇게 바꾸어 봅니다.
불교의 대답은 상당히 독특합니다. 그런 영원하고 독립적인 ‘주인’이나 ‘조종자’를 찾을 수 없다는 쪽에 가깝습니다.
1. 심장은 누가 뛰게 하는가?
우리는 보통 이렇게 생각합니다.
“내가 심장을 뛰게 하는 것은 아니지만, 어딘가에 심장을 뛰게 하는 주체가 있지 않을까?”
그런데 불교에서는 여기서 한 단계 더 들어갑니다.
심장이 뛰는 데에는 심장 자체의 생리적 조건, 신경계, 호르몬, 혈액의 상태, 산소와 이산화탄소의 농도 등 수많은 조건이 관여합니다.
그러면 이렇게 질문할 수 있습니다.
“그 조건들을 작동시키는 것은 무엇인가?”
또 그것을 가능하게 하는 조건이 있고, 그 조건에도 또 다른 조건이 있습니다.
불교에서는 이것을 매우 중요하게 봅니다. 바로 연기(緣起)입니다.
즉, 생명 현상을 반드시 “맨 앞에서 모든 것을 지시하는 하나의 존재”로 설명할 필요가 없다는 것입니다.
2. 그렇다면 ‘나’는 아무것도 하지 않는 것인가?
여기서 아주 재미있는 문제가 생깁니다.
우리는 분명히 말합니다.
“내가 걸었다.”
“내가 생각했다.”
“내가 밥을 먹었다.”
그런데 자세히 들여다보면 그 ‘나’라는 것도 독립적으로 존재하는 하나의 실체라고 보기 어렵습니다.
불교의 오온(五蘊)을 빌려 말하면, 우리가 '나'라고 부르는 것은 대략적으로
이 여러 과정이 서로 의존하여 일어나는 것을 하나로 묶어 ‘나’라고 부르는 것입니다.
따라서 불교에서는
“몸 안에 작은 사람이 들어앉아서 몸을 조종한다.”
라고 보지 않습니다.
3. 그러면 생각하는 ‘나’는 누가 생각하는가?
여기서 질문이 더욱 깊어집니다.
예를 들어 갑자기 어떤 생각이 떠오릅니다.
그 생각을 내가 의도적으로 만들어냈습니까?
조금 관찰해 보면 이상합니다.
“생각을 하나 만들어야지.”
라고 의도해서 만든 생각과,
아무 생각도 하지 않고 있는데 갑자기 떠오르는 생각은 상당히 다릅니다.
불교 수행에서는 바로 이 부분을 관찰합니다.
생각이 일어나고,
느낌이 일어나고,
욕망이 일어나고,
몸의 움직임이 일어나고,
그 뒤에 우리는 그것을 보고
“내가 생각했다.”
“내가 원했다.”
“내가 행동했다.”
라고 붙입니다.
4. 그래서 불교의 ‘무아(無我)’가 등장합니다
여기서 무아(無我, anattā)가 나옵니다.
무아는 단순히
라는 허무주의적인 말이 아닙니다.
오히려
라는 뜻에 가깝습니다.
몸을 살펴봐도 그렇고, 감정을 살펴봐도 그렇고, 생각을 살펴봐도 그렇습니다.
심장은 내가 명령하지 않아도 뛰고,
소화는 내가 일일이 지시하지 않아도 이루어지고,
생각도 내가 선택하기 전에 떠오르며,
감정도 내가 원하지 않아도 생겨납니다.
그러면서 불교는 우리에게 묻습니다.
5. 그런데 이것이 ‘아무도 책임질 필요 없다’는 뜻은 아닙니다
이 부분이 굉장히 중요합니다.
불교에서 무아를 이해한다고 해서
“나는 아무것도 아니고, 모든 것은 자동으로 일어나니까 아무렇게나 살아도 된다.”
는 결론이 나오지는 않습니다.
왜냐하면 연기에는 인과가 있기 때문입니다.
내가 어떤 생각을 반복하면 그 생각의 경향이 강해지고,
어떤 행동을 반복하면 습관이 생기고,
습관은 다시 다음 행동과 마음에 영향을 줍니다.
즉,
고정된 ‘나’는 없지만, 인과의 흐름은 있습니다.
강물이 흐르는 것과 비슷합니다.
강물에는 고정된 하나의 물방울이 계속 존재하는 것이 아니지만, 그렇다고 강의 흐름이 없는 것도 아닙니다.
6. 그래서 질문하신 “누가 시키는 겁니까?”에 대한 불교적인 답
아주 압축하면 이렇게 말할 수 있습니다.
“누군가가 시키는 것이 아니라, 조건이 갖추어지면 현상이 일어난다.”
심장이 뛰는 것도,
소화가 이루어지는 것도,
호흡이 이루어지는 것도,
생각과 감정이 일어나는 것도
궁극적으로는 수많은 조건의 상호의존적 과정으로 봅니다.
그리고 그 과정을 한참 관찰하다 보면
라는 질문이 생깁니다.
불교는 바로 그 질문을 끝까지 밀고 들어갑니다.
그리고 “찾아보라. 몸에서도, 느낌에서도, 생각에서도, 의식에서도 영원하고 독립적인 조종자를 찾을 수 있는가?”라고 묻습니다.
그것이 무아와 연기를 체험적으로 이해하는 출발점입니다.
그리고 여기서 정말 흥미로운 다음 질문이 하나 남습니다.
“그렇다면 ‘내가 생각하는 것’조차 내가 만든 것이 아니라면, 수행은 누가 하는 것이며, 깨달음은 누가 얻는 것인가?”
이 질문까지 들어가면 불교의 무아·연기·업·윤회·깨달음이 하나의 퍼즐처럼 연결됩니다.
첫댓글 신기하여라..
나무아미타불 나무아미타불 나무아미타불 _()_()_()_