출처 : 여성시대 아름다운 영혼을 위한 소나타
- 개인 계정에 올렸던 글이라, 그간 느낀 감정보다 훨씬 부드럽고 온화한 어조로, 제 스탠스를 감추며 서술하였습니다. 특히 초반부의 경우 그 경향이 심하게 나타나네요. 모쪼록 끝까지 읽어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학부 때 철학과 윤리 수업에서 임신중절권 관련 찬반토론을 한 적이 있다. 당시 반대는 한명, 찬성은 69명이었다. 수업은 남자가 더 많았던 것으로 기억한다. 이게 여자는 이편, 남자는 저편의 문제가 아니라는 말이다. 여성들의 처우에 공감하지 않는 남자들로만 이 세상이 이루어진 건 아니구나, 그때 다소 안도했던 것 같다.
어느 날 우연히 네이트를 들어가 기사를 보았다. 임신 중절권 관련 시위 기사였다. 혹시 이 세상이 조금은 변하지 않았을까, 낙태한 여성=걸레라는 일차원적 사고에서 조금은 벗어나지 않았을까 하는 기대로 클릭했다. 댓글은 단연코 내가 본 댓글 수준 중 가장 최악이었다. 그리고 이내 나는 국가가 주도하는 교육과 정치로서의 민주주의에 대한 믿음을 완전히 잃어버렸다. (참조 : http://m.news.nate.com/view/20170625n12195)
물론 개개인의 탓을 할 수만은 없을 것이다. 국가는 성 관련 문제를 숨기기 급급하고, 제대로 된 성교육은 커녕 성교육 시간에 피임법을 알게 된다면 운이 좋은 편이니까. 여성의 성욕에 매질을 하는 것에 익숙한, "정숙"을 여성의 가치로서 강요하는 한국 사회에서, 어쩌면 기성 세대가 보기에 연인 간의 성관계란 있을 수 없는 것이고 게다가 (여성으로서) 낙태까지 한다는 건 더욱더 받아들일 수 없는 일일 것이라는 거, 절대 동의할 수 없지만 조금은 이해해 보기로 했다.
다만 내가 이해하지 못하는 것은 그나마 더 나은 교육을 받은, 더 나은 인식을 가진 사람들이었다. 성관계를 연인관계의 필수적인 요소로 규정지으면서도, 100퍼센트 피임은 없다는 걸 너무나 잘 알면서도, 임신의 책임을 여성에게만 전가하는 것을 관망하고 동조하는 수많은 사람들. 몰라서 그랬다는 핑계를 방패로 삼을 수 없는 사람들. 그 앞에서 지성의 몰락을 보았다.
왜 낙태죄는 폐지되어야 하는가. 우선, 많은 사람들이 알다시피 우리나라는 의사와 해당여성을 처벌할 뿐 생물학적인 아버지에 대한 처벌은 없다. 생명권을 존중한다는 기조를 생각한다면 참 가당찮은 일이다. 특히, 많은 임신중절이 (미혼의 경우) "책임질 수 없다"는 의사로, (기혼의 경우) "책임질 환경이 안된다"는 의사로 이루어진다는 점에서 더더욱 그렇다. 법제상으로 뿐 아니라 생물학적으로 불평등한 책임을 지고 있는 것은 분명 여성이다. 그럼에도 국가는 이를 조정할 의사를 보이지 않는다. 이정도면 직무유기고 업무해태 아닌가.
그러면 임신중절을 주장할 것이 아니라 생물학적 아버지를 처벌하자고 하면 되지 않느냐, 고 물을 수 있다. 그렇지만, 아버지가 "책임"질 수 있는 인생은 어디까지나 자식의 인생일 뿐이다. 여성의 몸이, 여성의 인생이 임신과 출산으로 겪는 피해는 불가역적이고, 이는 어떤 보상으로도 메워지지 않는다. 일례로 유리천장과 경력단절은 "기혼의" 여성보다 "출산한" 여성에게 더 강하게 작용한다는 점을 들 수 있겠다. (이는 여성의 평생을 경제적 약자로 끌어내린다는 점에서 치명적이다. 특히, 미혼모라면 문제는 더 심각하다.) 한편, 원하지 않는 임신으로 태어난 아이의 삶이 평탄할 가능성은 어떤가? 직관적으로 생각해 보아도 매우 낮다. 아이의 정서는 부모의 정서에 절대적으로 영향을 받기 때문이다. 생명권 보장은 단순히 질긴 목숨을 이어붙인다고 되는 것이 아니다. 어떻게 살아가느냐가 훨씬 더 중요한 문제지.
더불어, 태아의 인지청구권이 보장되지 않는 사회에서 더욱이 미혼모의 지위는 열악하고 불확실할 수 밖에 없다. 또한 우리나라의 현행법상 강제집행 대상에는 양육비가 포함되어 있지 않으며, 통계에 따르면 상당 부분의 양육비가 제대로 집행되지 않고 있는 실정이다. 생명권 주장, 그래 좋다. 태아를 생명으로 보는 입장에서는 일단 생긴 이상 책임지라고 이야기할 수 있으니까. 그렇다면 낳은 이후의 생명까지도 존중해달라 요구해야 할 것이 아닌가? 태어날 아이의 장래는 무시한 채, 임신에 직면한 여성의 삶은 외면한 채 무작정 "낳으라"고 종용하는 것이 과연 정의이고 국가인가?
그리고 마침내 오늘, 헌재의 판단을 앞두고 법무부가 입장을 표명했다. 법무부는 일단 임신을 "인간의 자연스러운 생물학적 변화"라고 설명하면서, 이 기간 여성의 신체가 어떤 부담을 지는지는 물론 출산 이후까지 일터에서 어떤 조건에 놓이게 되는지에 침묵했다. 한마디로, 임신과 출산으로 인해 사회에서 여성이 겪게 되는 차별은 "낙태죄에 따른 별개의 간접효과에 불과"하다는 것이다. 더불어, "임신에 대한 미필적 인식" 있이 성관계를 한 이상 그에 따른 책임을 져야 한다고 주장했다. (인용 : http://v.media.daum.net/v/20180523181206960?f=m&from=mtop)
법무부와 다수의 남성들의 입장이 바라보기에는 아마, 여성이 "임신의 위험을 떠안고" 스스로 섹스했으니 그 부담과 책임은 여성에게 온전히 이전되는 것이라고 생각하는 듯 싶다. 따라서 그들의 사고 내에서는 임신으로 인한 간접효과로 여성의 삶이 송두리째 파괴되는 건 오로지 "여성들 스스로 책임져야 할" 문제인 것이다. 저출생이 문제라고 지적하면서, 젊은 여성들이 이기적이라고 비난하면서, 정작 여성이 살아가며 겪을 수 밖에 없는 분노와 비탄과 우울을 돌아볼 생각은 추호도 하지 않는 것은, 이들이 여성을 인간으로 보았다면 감히 내비칠 수 없는 태도라 본다.
임신중절에 대한 국민 일반의 인식을 보며, 더 나아가 정부 부처라는 관청의 인식을 보며, 한편으로는 우리 사회의 현 주소를 본다. 현재 나온 그 어떤 피임법으로도 100퍼센트 피임은 되지 않는다. 최후의 수단이라는 사후 피임약마저도 그렇다. 그럼에도 "피임을 잘못한 죄"로 "낙태죄"를 처벌하자는 것은, 여성을 대상으로 러시안 룰렛 게임을 하는 것과 다를 바 없을 것이다. 섹스는 여성이 혼자 하는 것이 아니다. 남성들과 국가 또한 이 사실을 너무나 잘 알고 있다. 그럼에도, 낙태죄를 유지하면서도 생물학적 아버지에게는 그 어떤 책임도 전가하지 않는다는 것은, 남성에게는 출산과 임신에 대해 면책하겠다는, 양육에 대해서는 책임을 감경하겠다는 의사를 강력하게 표명한 것이 아닌가. 국가와 사회와 제도가 나서서 여성은 그저 뼈를 깎고 생살을 찢는 임신을 "받아들여야" 한다고, 출산에 있어서 여성의 의지는 없다고 외치는 꼴이 아닌가.
더욱이 화가 나는 점은, "낙태죄"에서 비난의 대상이 되는 것이 주로 남성 보호자 없는 여성에 한정된다는 것이다. 기혼의 임신중절이 미혼의 임신중절을 상회하는 통계, 미혼 커뮤니티보다 기혼의 커뮤니티에서 훨씬 자유롭고 죄책감 없이 중절에 대해 이야기하는 문화(어머니 세대의 경우 중절 경험이 더욱 더 많다.), 그리고 이 사회의 싱글맘과 미혼모에 대한 인식을 보면, 이 사회가 "낙태죄"로서 특별히 통제하려 드는 것은 "남성 보호자" 없는 여성들임을 분명하게 알 수 있다. 혹은, "남성 보호자" 있는 여성들마저도 그 보호자의 "강력한" 보호 없이는 살아가지 못하도록 하는 의도일 테고. 결국, 6-80년대 여아낙태 및 임신중절을 "애국"이란 거창한 이름으로 포장하던 국가가 현대에 와서 "낙태죄"로써 도달하고자 했던 것은 그저 국가정책적 목표 달성 및 가부장제의 수호일 것이리라.
내일 헌법재판소에서 그 어떤 방향의 판결이 나온다 한들,
솔직히 나는 이 사회가 종국적으로 바뀔 것이라 기대하지 않는다.
저들이 이야기하는 점진적 개혁이 여성 해방까지 다다를 것이라고 믿지 않는다.
저열하고 조야한 여성인권에 대한 인식이 끝내 희석될 거라고 생각하지 않는다.
다만 매일 기도할 것이다.
신이든, 과학이든, 그 어떤 힘을 빌어서라도, 저들이 꼭 임신으로 인한 공포를 느끼게 해 달라고. 변하지 않는 사회에 대한 무력감을 맛보게 해 달라고. 평등하지 않은 사회에서 살아가는 박탈감에 몸부림치게 해 달라고.
그렇게라도 하지 않으면 홀로 미쳐버릴 것만 같기 때문이다.
관련기사 :
http://m.news.nate.com/view/20170625n12195(임신중절권 시위 관련)
http://v.media.daum.net/v/20180523181206960?f=m&from=mtop(법무부의 낙태죄 입장 표명)
첫댓글 잘읽었어 여시얌 맨마지막 단락 격하게 공감한다
와 진짜 싹다 맞는말이다
삭제된 댓글 입니다.
갑자기 안경환이 왜 나와 ㅋㅋㅋㅋ허위 혼인 신고 해서 여자 인생 망치려고 한 놈이 법무부장관하는것도 이상해 ㅋㅋ여성법조계인사많은데 왜 굳이 안경환이 해야함?
@곽하옥스토리 아 미안.. 의식의 흐름대로 생각나대로 썼더니 지금 보니까 글 주제랑 너무 동떨어졌다ㅠㅠ 댓삭할께 미안..
@이중좆대 집어쳐라 미안 ㅠㅠㅠ 좋은글 나땜에 댓망진창될거같아서 지울께 미안해요
글쓴여시한테도 죄송합니다..
잘읽었어 노컷뉴스가 좋은 글 많이 쓰네 배운만큼 배운 인간들이 임신함으로써 가지는 리스크는 싹 무시하고 낙태는 나빠 웅애웅하면 어쩌자는건지
2018년에 법무부가 저딴 소리를 하는게 너무 놀랍다 80년대인줄
개시발
콘돔안쓰는 한남새끼들이 문제지........진짜 낙태죄페지 청원이랑 답변 읽어는 봤냐 법무부...?
씨발 우리나라 검사 판사들 존나 싫어
여시야 글 진짜 잘썼다. 난 화가난다라고 밖에 표현을 못 하는데 여시 덕분에 내 감정을 논리적으로 생각해 볼 기회가 됐어.
정부가 너무 예상가능한 답변(이라고쓰지만 개소리)을 내놓았다ㅋㅋㅋㅋㅋ 여성을 억압하고 개돼지로 사육해야 지들이 생각하는 나라가 굴러가고 계속 냄져들의 권력이 유지되니까^ㅗ^ 증맬루 여자들 다 같이 나와서 창문 깨고 나라 한번 밟아야되는데
진짜 쓰레기같은 나라다
글 잘 읽었어!
진짜 좋은 글... 프린트해서 붙이고 싶고 몇 문장은 너무 표현하기 갑갑했던 마음이라 받아 적으려고... 고마워 글쓴여샤...
아니 난 진심으로 요새 기술발전보면서 인공자궁이 개발되지않는거에대해 계속생각한다 남근 확대수술이니 별의별 기술은 계속 나오는데 남자새끼들도 애낳을수잇도록 하는 기술은 왜개발안되는지? 여성들 애낳지말아야함 여성들이 비출산 다짐해야 남성들이라도 출산기술 개발하려할거고 그제야 여성의 기분을 조금이라도 공감할수잇는거아닌가 싶음
진짜아무리생각해도 2018년에 법무부 장관이3 저런말을 공식입장으로 한다는게 충격적임
여시 필력 장난아니다 단어선택도 그렇고..마지막문단 진짜 공감..
2018년 아니고 1988년인줄ㅋㅋㅋㅋㅋ
레알 괘씸죄